- 퍼니스가 야프섬 화폐 시스템의 이런 모습에 경탄을 금치 못했을 때 안내인은 더욱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가까운 마을에 누구나 엄청난 재산가라고 인정하는 엄청난 집이 있지만, 아무도, 심지어 재산가 본인조차 그 재산을 만진 적도 본 적도 없다. 엄청나게 크다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기만 할 뿐 옛날이나 지금이나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은 상태 그대로 있는 페이가 그 재산의 근원이다."
알고 보니 그 페이는 아주 오래전 바벨투아프섬에서 야프섬으로 옮기던 중 폭풍우를 만나 바다게 가라앉은 것이었다.
"굉장히 큰 페이가 바다로 떨어져 사라진 사건은 시시한 일이라 입에 올릴 이유가 없다는 생각, 그것이 해저 수백 미터 아래에 있더라도 시장성에는 아무 변함이 없다는 생각이 ... 보편적이었다. ... 돌 화폐의 구매력은 바닷속에 있어 보이지 않을 때도 소유주로 추정되는 사람의 집 한구석에 놓여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유효했다. 중세시대 수전노가 닥치는 대로 긁어모아 쌓아놓은 황금 덩어리가 그랬듯이 부를 상징하는 의미만 담긴 듯했다. 어쩌면 워싱턴 재무무 금고를 꽉 채우고 있다는 은덩이와도 비슷했다. 우리는 그것을 본 적도 만진 적도 없지만, 그것이 거기에 존재한다는 증명서의 힘에 기대어 거래한다."
퍼니스의 유별난 여행기는 1910년에 출간되었지만, 경제학계의 눈길을 끌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그중 한 권이 어쩌다 영국 왕립경제학회 기관지 이코노믹 저널 편집부로 흘러들어갔다. 편집부는 켐브리지 대학교 출신 젊은 경제학자 케인스에게 이를 읽어보라고 주었다. 20년 뒤 화폐와 금융에 관한 세상의 인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으나, 그 당시만 해도 영국 전시 내각의 신출내기 관료에 지나지 않았던 케인스는 퍼니스의 여행기를 읽는 내내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훗날 이렇게 술회했다. "퍼니스의 여행기 덕에 화폐에 관해서라면 세계 어느 나라 국민과 견줘도 철학적으로 훨씬 심오한 생각을 만들어낸 야프섬 원주민을 알게 되었다. 현대의 금 보유 관행은, 논리적으로 더 뛰어난 야프섬 관행에서 배울 점이 많다." 20세기 최고의 경제학자가 어째서 야프섬의 화폐 시스템이 굉장히 중요하고 보편적인 가르침을 준다고 생각했는지 밝혀내는 것이 이 책의 주제다
- 야프섬의 돌 화폐 이야기는 화폐의 기원에 관한 전통 이론의 설명에 도전장을 내민다. 더 나아가 화폐는 실제로 무엇인가 하는 개념에도 심각한 의문을 제기함 전통이론에 따르면 화폐란 교환의 매개체로 기능할 수 있게 해주는 상품들 중에서 선정된 물건이며, 화폐교환의 본질은 재화와 서비스를 이 교환수단을 통해 맞바꾸는 것이다. 그러나 야프섬의 돌 화폐는 이 도식에 들어맞지 않는다.
첫째, 누군가를 지름 30센티미터에서 360센티미터에 이르는 굉장이 크고 단단하며 무거운 돌 바퀴를 교환수단으로 선택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대부분 사례에서 돌 바퀴를 옮기는 것은 거래대상인 재화를 옮기는 것보다 훨씬 힘들기 때문
둘째, 페이는 다른 모든 것과 교환될 수 있는 상품이라는 의미에서의 교환수단도 아니었다. 페이가 교환된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운반선이 침몰하는 바람에 페이가 바다에 빠진 사례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 문제의 페이를 교환수단으로 사용한 것은 고사하고 실물을 본 적도 없었다. 야프섬 주민이 이상하게도 페이가 어찌 되건 무관심했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들의 화폐 시스템에서 핵심은 교환수단으로 사용되는 돌 화폐가 아니었다 무언가 다른 것이었다.
- 교환수단으로 선정된 상품에 대한 애덤 스미스의 이야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야프섬 주민은 무언가를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애덤 스미스는 다양한 시대 다양한 장소에서 당야한 상품이 화폐로 선정되었다고 주장했음. 다시 말해 뉴펀들랜드섬에서는 말린 대구, 버지니아에서는 담배, 서인도제도에서는 설탕, 스코틀랜드에서는 못이 화폐로 쓰였음. 그러나 국부론이 나오고 나서 한두 세대 지난 뒤 거기 실린 사례가 과연 타당한지 의구심이 제기되었다. 예컨대 미국인 은행가 토머스 스미스는 1832년 '통화와 은행에 관한 소고'에서 애덤 스미스는 이들 사례를 두고 특정 상품이 교환수단으로 사용된 증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 그 모든 사례는 알고 보면 근대 영국에서 그랬듯 파운드, 실링, 펜스 단위로 계산된 거래와 다르지 않았다. 판매자는 자신의 장부에 화폐단위로 채권을 기재했고, 구매자도 자신의 장부에 화폐단위로 채무를 기재했음. 판매자와 구매자가 누적 채권과 채무를 서로 상계하고 남은 채무의 순 잔액을 그 가치에 해당하는 이런저런 상품을 털어버렸다는 사실은 그 상품이 화폐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애덤 스미스는 신용 시스템 및 신용 시스템 이면의 정산 시스템이 아니라 상품 지불에만 주목한 바람에 상황을 완전히 거꾸로 이해하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애덤 스미스가 그랬듯 상품 자체가 화폐라고 하는 것은 처음에는 논리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결국에는 헛소리로 귀결되고 만다 화폐의 본질을 다룬 뛰어난 논문을 두편이나 썼지만 그다지 유명하지 않았던 경제학자 앨프리드 미첼 이니스는, 뉴펀들랜드섬에서 말린 대구가 화폐로 사용된다는 애덤 스미스의 이야기에 담긴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직설적인 말로 정확하게 정리했다.
"조금만 생각해도 주산물이 화폐로 사용되는 건 불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가설에 따르면 교환수단은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똑같이 주고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부가 말린 대구로 물품 대금을 지급했다면, 어부와 버래한 상인은 똑같이 말린 대구를 구입한 대금을 말린 대구로 지급해야 한다. 누가 봐도 터무니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 야프섬의 페이가 교환수단이 아니었다면, 페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더 중요하게는 야프섬의 화폐가 아니었다면, 무엇이 야프섬의 화폐였을까? 이 두가지 물음에 대한 답은 굉장히 간단하다. 야프섬의 화폐는 페이가 아니라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근원적 신용거래 및 정산 시스템이었고, 페이는 이 시스템을 추적, 기록하는 보존수단이었다. 페이는 이들 신용거래를 나타내는 증거물에 불과했다. 뉴펀들랜드섬 주민이 그랬듯이 야프섬 주민이 물고기, 코코넛, 돼지, 해삼을 거래하는 과정에서도 채권과 채무가 발생해 쌓였다. 이들 채권과 채무는 사후정산을 통해 서로 상쇄되었다. 즉, 일회성 거래가 끝난 뒤나 하루 단위, 혹은 일주일 단위 거래가 끝난 뒤 거래 당사자는 서로 원한다면 적절한 가치의 통화, 즉 페이를 교환해 이월된 미결제 잔애을 정산했던 것이다. 페이는 야프섬 주민 사이의 매매거래에서 발생한 미결제 신용 잔액이 기록된,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증거였다. 다시 말해, 주화와 통화는 근원적 신용거래 시스템을 기록하고, 근원적 정산과정을 이행하는 데 도움이 되는 증거물이다. 주화가 바다에 떨어져 밑바닥에 놓여 있어도 그것이 그 소요주의 재산이라는 데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던 야프섬보다 경제규모가 더 큰 곳에서도 통화와 주화는 필요하다. 그러나 통화 그 자체는 화폐가 아니다. 화폐는 통화의 의미를 명백하게 보여주는 신용 정산의 체계다.
- 화폐는 하나의 상품이고, 화폐교환은 재화와 교환수단을 맞바꾸는 것이며, 신용은 화폐상품을 빌려주는 것이라는 전통적 관점은 지난 수백 년간 이론가와 철학자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그리하여 경제사상과 경제정책을 지배해왔다. 전통적 화폐이론이 분명히 틀렸다면, 그렇게 유명한 경제학자와 철학자가 그것을 믿었던 이유는 뭘까? 왜 오늘날 유명한 경제학자 대부분이 전통적 화폐이론에 담긴 근본적 이념을 현대 경제사상의 주춧돌로 삼기를 고집했을까? 간단히 말해 왜 전통적 화폐이론은 생명력이 강한 걸까? 여기에는 깊이 생각해야 할 이유가 두가지 있다.
첫번째 이유는 화폐에 관한 역사적 증거와 관련 있다. 오래된 화폐가 적잖이 남아 있지만, 문제는 그 모두가 사실상 단 하나의 유형, 즉 주화라는 점이다. 전 세계 박물관은 고대와 현대의 주화를 잔뜩 쌓아두고 있다. 주화 및 주화에 새겨진 명문은 고대문화, 사회, 역사를 이해하려 할 때 꼭 필요한 주요 고고학적 자료다. 재능있는 학자가 해독한 주화 속 이미지와 짧은 문구는 고대 신의 위계서열, 고대 공화국의 이념에 관한 폭넓은 정보를 알려준다. 고대 주화를 연구하는 학문이 고전학이라는 이름으로 자리잡고 있다. 고전학은 특별한 지식이 없는 사람도 해볼만한 우표수집과는 다름. 가장 성과 높은 역사 연구분야의 하나다. 물론 주화가 고대 역사 연구에서 굉장이 중요한 이유, 무엇보다 화폐 역사의 연구를 지배해온 이유는 오늘날까지 사라지지 않고 남은 것이 주화밖에 없기 때문이다.
- 12세기에서 18세기까지 600년 이상 영국 재정은 단순하지만 굉장히 독창적인 회계기술, 즉 재무무 엄대 시스템에 따라 운영되었다. 엄대는 웨스트민스터궁 인근 템스 강변에서 자라는 버드나무로 만든 막대기. 엄대에는 재무부의 수입과 지출내역이 눈금으로 새겨졌고, 대로는 글씨로도 적혔음. 지주가 국왕에게 납부한 세금의 영수증으로 쓰인 엄대가 있는가 하면, 국왕이 유력한 신하에게 빌린 돈을 만기에 갚았다는 기록이 담긴 엄대도 있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한 엄대를 보면 "풀크 바셋에게서 받은 위컴 농장지대 9파운드 4실링 4페니"라고 적혀 있다. 13세기 런던 주교 풀크 바셋이 헨리 3세에게 진 빚과 관련 있는 듯하다. 뇌물 수수를 기록한 것 같은 엄대도 있음. 민간인이 소장한 한 엄대에는 "국왕의 은전에 대한 대가로 윌리엄 드 툴레위크에게서 13실링 4페니를 받음"이라는 수상쩍은 글이 적혀 있다. 양쪽 거래 당사자는 엄대에 거래 세부내역을 기록한 뒤 엄대를 가로로 쪼개 하나씩 나눠 가졌다 채권자가 보관하는 것은 스톡이라 불렸고, 채무자가 보관하는 것은 포일이라 불렸다. 스톡이라는 말은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영국의 국채를 가리킨다. 버드나무는 나뭇결이 독특하기 때문에 사실상 위조하기가 불가능하다. 또 엄대에 새겨두는 것이 웨스트민스터궁의 장부에 기록해두는 것보다 이동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엄대 보유자는 거기에 기록된 재무부 채권으로 제삼자에게 진 빚을 갚을 수 있었다. 현대 금융의 관점에서 보면 엄대는 채권, 주권, 은행권처럼 보유자에게 액면 금액을 수령할 권리를 보장해주는 무기명 채권증서였던 셈이다.
- 영국의 엄대 시스템이 보여주듯 주화는 거대한 빙산의 한 조각에 지나지 않음. 주화만으로 화폐와 금융의 방대한 역사를 파악하기란 불가능함. 한마디로 화폐의 존재와 운용을 알려주는 물리적 증거가 더는 남아 있지 않기 때문. 자연재해가 발생해 현대 금융 시스템의 실상이 담긴 디지털 기록이 파괴되었다고 가정할대, 미래의 역사가가 무엇에 의지해 오늘알 화폐의 역사를 복원할 지 생각해보면, 문제의 심각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가의 추론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파괴되지 않고 남은 파운드와 유로 동전덜, 5센트와 10센트 주화만이 오늘날 화폐의 전부라고 가정한다면, 현대 경제 생활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 전통적 화폐이론이 끈질긴 생명력을 보이는 두번째 이유는 사회과학 고유의 문제점과 직접 관련 있다. 자연과학과 달리 사회과학은 연구대상을 객관적 관점에서 바라보기가 굉장히 어려움. 어떤 제도가 우리 일상적 삶의 핵심부와 가까워질수록 한걸음 비켜서서 그 제도를 분석하기란 굉장히 까다로워진다. 한걸음 비켜서려고 시도하는 것 자체가 논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화폐의 보질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려우며 화폐가 예나 지금이나 논쟁의 주제가 될 수밖에 없는 두번째 이유는 화폐가 경제의 불가결한 일부이기 때문. 우리가 화폐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중국 속담의 물고기가 물속에서 헤엄치며 물이 무엇인지 알려고 애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 야프섬 사례는 지난 수백년간 경제학자의 골머리를 썩이던 화폐의 본질, 즉 교환수단으로 기능하는 통화, 상품화폐의 본질은 무엇인가에 관한 그릇된 선입견을 벗겨냈다. 야프섬 같은 원시경제에서도 오늘날 경제 시스템과 마찬가지로 통화는 잠깐 사용하다 마는 허울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신용거래 뒤 정산하는 메커니즘의 기초를 이루는 시스템이 화폐의 본질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전통이론이 그리는 것과 전혀 다른 화폐의 기원과 본질에 관한 그림을 마주하게 되었다. 화폐를 바라보는 대안적 관점의 핵심은 신용이다. 화폐는 상품교환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세가지 기본요소로 이루어진 사회적 기술이다.
첫번째는 화폐의 액면금액으로 표현되는 추상적 가치.
두번째는 개인이나 기관이 서로 거래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채권과 채무의 잔액을 기록하는 신용거래 시스템
세번째는 원래 채권자가 그 채권과 아무 상관없는 채무를 정산하기 위해 제삼자에게 채무자의 채무상환 의무를 양도할 가능성.
이 세번째 기본요소가 매우 중요함. 모든 화폐는 신용이지만, 모든 신용이 화폐인 것은 아님. 양도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서 차이가 남.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의 금전소비대차계약만 나타나는 한 차용증서는 신용이지만, 화폐는 아니다. 차용증서를 제삼자에게 양도할때 신용이 생겨나고, 이는 화폐로 양도가능한 신용이다. 신용이 생겨나 화폐로 기능하기 시작한다. 다시 말해 화폐는 단순한 신용이 아니라 양도가능한 신용이다. 19세기 경제학자 겸 변호사 헨리 더닝 매클라우드는 이렇게 말했다.
"조금만 생각해도 화폐의 근본적 성격이 들날 것이다. 분명히 말해 화폐의 주요 용도는 채무를 측정하고 기록하는데, 이 사람에서 저 사라으로 채무의 양도를 쉽게 하는 데 있다. 금, 은, 종이 등 그 무엇으로 만들어졌던 이 목적에 사용될 수 있는 모든 수단은 화폐인 것이다. 그래서 화폐라는 말과 양도가능한 채무라는 말은 서로 바꾸어 쓸 수 있다. 종류가 무엇이든 양도가능한 채무를 나타내는 것은 화폐다. 또 화폐는 그 소재가 무엇이든 다름 아닌 양도가능한 채무를 나타낸다."
채권은 양도가능하다는 혁신적 생각 덕분에 화폐의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발전이 일어났다. 역사를 되짚어 보면, 물물교환 대신 화폐를 사용해 거래하면 더 편할 것이라는 생각보다는 채권을 양도할 수 있다는 생각이 경제와 사회를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 누가 인류의 운명에 가장 깊은 영향을 미친 발견을 했는가? 이 질문을 받았을 때 곰곰이 생각한 끝에 부채도 판매 가능한 상품이라는 것을 처음 발견한 사람이라고 대답하면 별로 틀리지 않을 것이다.
- 아일랜드 은행 폐쇄 사례는 은행과 신용카드, 위조방지 표식이 새겨진 지폐 같은 공식적 장치는 화폐에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줌. 이들 장치는 사라질 수 있지만, 화폐는 살아남는다. 신용거래 및 정산 시스템으로서 팽창과 수축을 한없이 반복하며 거래의 원활한 순환을 도움. 화폐가 신용거래 및 정산 시스템으로 기능하려면 신용도가 높은 채무자가 존재하고, 제삼자가 채무자의 채무를 인수할 것이라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어야 함. 경험에 비춰볼 때 정부와 은행이 나서면 이 두가지 기준이 쉽게 충족되지만, 개인은 물론이고 기업은 그러기가 쉽지 않음. 그러나 아일랜드의 은행 폐쇄사례가 보여주듯이 이 경험칙이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님. 공식적 화폐 유통질서가 해체되더라도 사회는 효과적 대안을 즉흥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 우리는 형체와 내구성을 겸비한 주화를 비롯한 모든 통화는 화폐이고, 그 위에 신용과 채무라는 마법과 같은 무형의 장치가 놓여 있다는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다. 양도가능한 신용이라는 사회적 기술이 자본적 힘이나 화폐의 원초적 실체다. 야프섬의 돌 화폐 페이, 중세 영국의 버드나무 엄대는 물론 은행권, 대용화폐, 그리고 인류 역사에서 수없이 벌어진 통화 혼란사태 때마다 작성된 차용증서, 오늘날 선진국 은행이 널리 사용하는 전자 데이터 등은 모두 무수한 채권, 채무관계의 근저에서 수시로 변화하는 잔액을 기록한 증거물이다. 뉴턴 역학이 양자역학으로 바뀌면서 물리 현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극적으로 달라졌듯이, 화폐를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면 경제현실을 이해하는 방식도 극적으로 달라진다.
- 구소련 사회에서 살았던 사람이 계획이나 계획을 조율하는 계획가가 없어도 경제가 작동할 수있다는 생각에 충격을 받았듯이, 시장경제 시스템에 익숙한 우리는 사회가 시장이나 화폐 없이도 작동할 수 있다는 생각에 놀랄 것이다. 화폐와 시장이 존재하기 전에 무엇이 사회를 조직했을까?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는 이에 대해 풍부하고 자세한 대답을 들려준다.
- 화폐가 없던 암흑시대 그리스사회는 어떻게 작동했을까? 의식주 같은 인간의 기본욕구를 해결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부족원이 자기 땅에서 생산한 농산물로 근근이 먹고사는 자급자족 경제였기 때문이다.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는 공동체를 조직하는 데서 중요한 역할을 한 세가지 사회제도도 강조한다. 일리아드는 특히 전쟁상황에 관심을 기울이는데, 전쟁에서 도시를 점령하거나 적을 물리친 뒤 전리품을 나눠 갖는 것은 그중 가장 중요한 메커니즘이다. 이는 일종의 소득분배 시스템으로서 완벽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분배규칙부터 빈번하게 논란이 된다. 사실 일리아드의 줄거리는 그리스 최고의 전사 아킬레우스와 그리스 동맹군 사령관 아가멤논이 누가 전리품을 더 많이 차지해야 하는지를 놓고 벌이는 말다툼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오딧세이의 시대에 이르러 세계는 평화를 되찾았다. 오딧세이는 트로이에서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오디세우스의 여정과, 아버지를 찾아 에게해를 떠도는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오디세이 시대에는 일리아드 시대와 전혀 다른 제도가 장면을 지배함. 다시 말해 부족장 사이에 선물을 주고받는 관습이 등장한 것. 동료 귀족과 만나거나 헤어질 때 선물을 주는 것이 당시 관습이었다. 이 선물은 다음번 찾아가면 되돌려받을 수 있었다. 이 원시적 형태의 교환경제는 사회적으로 동등한 사람과의 유대를 가시적이고 구체적으로 표현하며, 미래에 대비한 사회적 기반을 공고히 다지는 데 목적이 있었다. 전리품 분배규칙이 그랬듯이 교환경제 규칙도 종종 분란을 일으키곤 했다. 트로이 전쟁 자체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규칙을 어기고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신부인 헬레네를 데리고 달아났기 때문에 일어났다. 그러나 암흑시대 그리스 세계에서는 전쟁중일 때를 제외하면 교환경제가 가장 중요한 경제적 상호작용 시스템이었다. 사실 교환경제는 그 당시 세게관에 비춰볼 때 핵심적인 시스템이었다. 그래서 호메로스보다 200년 뒤에 활동한 어떤 시인은 행복한 삶의 본질을 포착해 이렇게 읊었다. "아들, 사냥개, 말 그리고 외국에서 돌아온 친구가 있는 사람은 행복하리니."
- 거의 모든 면에서 고대 메소포타미아 사회는 암흑시대 그리스 사회와 달라도 아주 달랐다. 호메로스 시대 그리스에는 원시적이고 평등한 부족사회가 있었지만, 메소포타미아에는 수만명의 주민이 반신반인 왕의 지배를 받으면 다층적 위계질서에 따라 조직된 도시가 있었다. 또 호메로스 시대 그리스에서는 부족장이 무지막지한 권력을 휘두르며 평민을 지배했지만, 고대 메소포타미아에는 신전관료가 운영하는 회계 시스템에 의한 정교한 지배가 뿌리를 내렸다. 호메로스 시대 그리스 경제는 호혜성 원리와 희생의식이 지배하는 단순한 경제였지만, 고대 메소포타미아 경제는 세련된 경제계획 시스템이 지배하는 복잡한 경제였다. 호혜성 원리와 희생의식이 수천년간 무수한 원시부족에게 낯익은 것이었다면, 경제계획 시스템은 현대 다국적 기업 경영자에게 낯익은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도저히 메울 수 없는 차이가 있었지만, 고대 메소포타미아 경제와 암흑시대 그리스 경제는 한 가지 중요한 점에서 똑같았다. 신전 관료의 계획경제건, 암흑시대 그리스의 원시부족 제도건 화폐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대단히 뛰어난 상업문명이 발달했고 당시 세계에서 가장 발전한 경제를 뽐냈으며 문자, 숫자, 회계를 발명한 사회로 꼽힌 고대 메소포타미아가 왜 화폐를 발명하지 못했을까?
- 전통적 도량형 개념은 구체적 상황에서 사용하기 위해 아래에서부터 만들어진 것, 눈앞에서 진행되는 활동과 가장 관련깊은 측면을 포착한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예를 들어, 오늘날 우리는 경작지의 둘레를 재서 그 넓이를 알아낸다. 그러나 중세 촌뜨기 농부에게 밭의 넓이는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비톨트 쿨라의 설명을 들어보자. "밭의 두가지 질적 측면이 대단히 중요하다. 첫째가 밭을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고, 둘째가 밭에서 거둘 수 있는 수확물의 양이다." 그 결과 밭을 측정하는 전통적 단위는 한 사람이 하루에 쟁기질할 수 있는 넓이나 일정한 양의 곡물을 생산할 수 있는 넓이를 기준으로 정의되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렇게 넓이의 단위를 정하면, 밭의 질적 수준에 따라 넓이는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음. 현대인이 보기에 일반성 없는 단위였지만, 당장 해야 하는 일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하는 관점에서 보면 분명한 장점이 있었다. 이 사례는 모든 도량형 개념의 적절성 정도와 표준화 여부는 그 용도가 무엇인가에 좌우된다는 일반적 사실을 보여준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도량형학은 정적인 학문이 아니다. 측정용도가 바뀌면 측정단위와 측정기준도 바뀐다. 게다가 측정용도가 측정단위, 기준은 서로 기줌은 서로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상호작용한다. 즉, 관습이 바뀌고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측정단위가 새로 등장하는가 하면, 범위가 더 넓은 도량형 개념이 발명되고 더 일관된 기준이 적용됨에 따라 새로운 방식의 기술적, 경제적 협력이 활기를 띠기도 한다. 고립된 자작농 위주의 경제에서는 마을마다 다르고 일관성 없는 여러 측정 시스템과 기준 시스템으로도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산업의 시대, 즉 기계의 시대이자 대량생산의 시대는 표준화를 요구했고, 국제무역과 산업의 급성장은 효율성이라는 명분하에 공통의 단위를 필요로 했다. 오늘날에는 공통의 기준에 따라 정해지는 보편적 단위의 필요성이 한층 더 높아지고 있다.
- 고도의 기술과 세련된 문화가 반드시 발전을 보장해주지는 않았다. 역사를 보면 새로운 사상의 흡수를 거려했거나 흡수할 능력이 아예 없었던 선진적 문명이, 기존 성취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은 후진적 민족에게 따라잡힌 사례가 풍부하다. 고대 세계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메소포타미아에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선진적이고 혁신적인 사회 시스템, 즉 관료제에 의해 운영되는 대도시와 복잡한 경제가 있었다. 관료제는 문자, 수, 회계 같은 최첨단 사회적 기술을 이용해 최적의 효율과 성과를 발휘했다. 인류 문명의 정점을 찍었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서방 미개민족에게서 배울 점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이들 미개민족은 1000여년 전 메소포타미아에서 이미 사라진 투박한 부족제도를 기반으로 소규모 사회를 조직해서 살았다. 그러나 그리스는 달랐다. 그리스인은 문자와 숫자를 받아들이면 편익이 엄청나다는 것을 아주 잘 알았다. 그들은 동방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적절한 관계를 맺자 마자 새로운 기술을 철저하게 받아들여 전 그리스 세계로 퍼뜨렸다. 그리스와 메소포타미아 사이에서 문명을 전파한 민족은 레반트 지방의 페니키아인이었다. 그리스 인이 암흑시대 말기부터 광범위하게 관계를 맺은 페니키아인은 항해술과 장사수완이 뛰어난 민족이었다. 그리스 문자에 관한 최초의 고고학적 증거로 글귀 세줄이 간명하게 새겨진 유명한 술잔이 꼽힌다. 1954년 이스키아섬의 한 무덤에서 발견된 이 술잔의 제작연대는 기원전 750년에서 700년 사이로 거슬러 올라감. 불과 몇 십년 사이 문자와 숫자를 사용하는 능력이 동으로는 흑해 연안에서 서로는 시칠리아섬과 티레니아해 연안 식민지까지, 그리스 세계 전반으로 퍼져나갔다. 문자와 숫자라는 새로운 기술은 그리스 문화에 대단히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기원전 650년 이후 100년간 전례 없는 지적 혁명이 일어났다. 수량화하는 능력, 기록하는 능력, 반성하는 능력, 비판하는 능력 덕에 사고의 행방이 일어난 것이다.
- 메소포타미아는 화폐의 세가지 요소 중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문자와 숫자의 발견을 기반으로 발전한 회계 시스템이었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의 정교한 관료경제, 통제경제에는 보편적 경제적 가치라는 개념이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제각각 독자적 기준이 있는 제한적 용도의 가치개념만 필요했고, 그들은 이를 완성시켰다. 화폐의 첫번째 구성요소인 추상적이고 보편적으로 적용가능한 경제적 가치의 단위를 개발하지 않았다. 반면에 암흑시대 그리스에는 비록 원시적 형태이긴 했지만, 보편적 가치개념과 보편적 가치를 측정하는 기준이 있었다. 그리스 암흑시대에는 회계 시스템은 고사하고 문자도 숫자도 없었음. 화폐의 첫번째 구성요소가 발생 초기 형태로 존재했지만, 두번째 구성요소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방의 최신기술인 문자, 숫자, 회계가 야만적 서방에서 싹튼 보편적 가치의 척도라는 개념과 결합하자 비로소 화폐의 전제조건이 형성될 수 있었다.
- 화폐의 두가지 구성요소, 즉 보편적으로 적용가능한 가치 단위개념과 화폐를 단위로 삼아 장부에 기록하는 관습이 널리 확산됨에 따라 세번째 구성요소인 탈중앙적 양도원리도 나타남. 보편적 경제적 가치라는 새로운 개념이 싹트면서 중앙 통제기관의 승인을 받지 않고 의무를 상쇄하는 것이 가능해짐. 또 객관적인 경제적 공간이라는 새로운 개념, 즉 시장개념은 그 가능성이 부단히 존재할 것이라는 확신이 생겨남. 시장이 있을 때 사람들은 중앙 통제기관에 무엇을 선호하는지 알려 행동지침이 받는 대신, 시장에서 가격을 흥정하고 임금에 합의할 수 있다. 이때 흥정이 성공하려면 공통의 언어가 있어야 함. 흥정하며 주고받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서로 공유해야 함. 그래서 가치개념과 표준화한 가치측정 단위의 공유는 시장이 제대로 기능하기 위한 필요조건임. 다시 말해 흥정이 일어나려면 어떤 재화와 서비스에 특별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공유하는 것만으로 부족하고 경제적 가치의 단위도 공유해야 하는 것이다. 달러화는 무엇인가에 관한 일반적 합의가 없다면, 시장바닥에서 달러화로 표시된 가격을 놓고 흥정하는 것은 새와 벌에게 말을 거는 것과 다르지 않다.
- 최초의 혁명적 화폐화 경험은 사회와 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음.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린 경제 중앙통제기관과, 고착화된 사회계층을 특징으로 하던 전통사회 시대는 끝났다. 대신 화폐사회시대, 시장이 거래를 조직하는 원리로 기능하는 시대, 가격이 인간의 행동지침으로 작동하는 시대, 그리고 야망과 기업가 정신, 혁신이 지배하는 시대가 새로 열림. 낡은 우주론은 죽어갔고, 그와 더불어 공정한 사회질서는 우주질서의 지상 축소판이라는 낡은 생각도 사라져갔다. 대신 돈 버는 능력이 사회적 지위를 결정한다는 경제중심적, 화폐중심적 생각이 발전했음. 낡은 제도 아래서는 사회적 지위가 절대적이었음. 농부로 태어나면 농부로 살다 죽었고 부족장으로 태어나면 부족장으로 살다 죽었다. 그러나 새로운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상대적이었다. 인간의 가치를 측정하는 유일한 척도는 돈이었다. 그리고 돈의 축적에는 본질적으로 한계가 없다. 재산도 잃고 친구도 잃은 아르고스의 귀족 아리스토데모스는 새로 자리잡은 질서에 넌더리를 내며 "아, 돈! 돈 나고 사람 나는 세상이야"라는 유명한 말을 내뱉었다. 이제 돈이 사회적 지위, 가문, 명예를 좌우했고, 전통은 아무 쓸모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누구든 돈이 없으면 별 볼 일 없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
- 아르헨티나 외에도 통화 레지스탕스가 정부의 경제적책에 맞선 게릴라전을 벌인 사례는 더 있음. 90년대 초 구소련이 붕괴할 무렵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음. 러시아 정부는 수십 년간 보조금에 의지해 유지되어온 기업을 겨냥해 예산을 매섭게 줄이는 충격요법을 취했다. 그 바탕에는, 홀로서기가 불가능한 기업을 대거 청산하는 창조적 파괴를 거쳐 살아남은 기업의 미래는 밝을 것이라는 기대가 깔려 있었다. 그러나 기업경영자는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다. 경영하던 기업이 공식 금융부문에 접근할 수 있는 경로는 꽉 막히고 경영자들은 조용히 퇴직하라는 압력에 직면했지만 그들은 묘책을 생각해냄. 독자적 통화 네트워크를 만들어 거래를 정산한 것. 공급사슬로 연결되어 장기간 거래신용을 쌓아온 덕분에 국정통화를 사용하지 않아도 채권, 애무를 상쇄할 수 있는 기업이 모인 네트워크였다. 97년에 이렇게 통화 네트워크를 통해 정산된 기업간 거래규모는 러시아 전체 거래규모의 40%에 달할 것으로 추정됨. 노동자는 대용화폐나 바우처러 급여를 받음. 우크라이나의 한 애널리스트는 그 발행규모에 관해 다음과 같이 요약. "이들 사적 화폐, 독립회계 화폐의 종류가 우크라이나는 수백가지, 러시아는 수천가지에 이른다."
- 제정 초기 로마 상류층이 농장 경영으로 부를 쌓던 시절은 한참 전에 끝남. 로마 시인 호라티우스는 "농장을 경영해 부자가 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아 부자가 된 사람도 있다."라고 당시의 로마인을 노래했다. 그는 "전 재산을 국채에 쏟아부었다."는 이유를 대며 청구서에 지불하지 못해도 봐달라고 간청한 금리생활자가 드물지 않았던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 살았다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을 것이다. 로마시대에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부동산은 거들떠보지 않고 화폐 형태로만 부를 쌓기로 선택한 부자가 있었다. 로마의 은행가도 예금을 받고 대출을 일으키며 국제거래를 정산. 그때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금융 엘리트는 복잡한 금융기법으로 특별한 지식이 없는 사람을 현혹했다. 금융 엘리트의 행태에 신물이 난 키케로는 신랄하게 비꼬는 글을 썼다. "야누스 신전 부근 영업소에서 일하는 어떤 영악한 친구들은 어디서 돈을 벌고 어디에 돈을 맡겨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그 어떤 학파의 철학자보다 말을 잘한다." 이렇듯 화페화가 널리 진행되었으므로, 로마인이 현대 금융의 낯익은 또 하나의 특징인 신용위기를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님. 로마 사회가 현대 사회와 닮은 점이 많아 가끔 기괴한 느낌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기원후 33년 로마 황베 티베리우스의 재무관은 최근 몇 년간의 사적 대출업 붐이 과도하다고 판단. 비정상적 과열양상을 보인 사적 대출업을 진정시키려면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결정 내리고 선행법령을 간략히 살펴보았다. 수십 년 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시조인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부유한 세습귀족이 돈을 빌려주고 받는 이자를 엄격히 제한하는 제도를 도입했다는 사실이 밝혀짐. 카이사르는 한마디로 대출업자의 자기자본요건을 엄격하게 정하는 법을 제정했던 것. 이 법이 알려주는 바는 명백했다. 아무리 사적 대출업을 규제해도 부지런한 대출업자는 매번 규제를 피하는 방법을 용케 알아낸다는 것이었다. 역사가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는 "끊임없이 새로운 규제조치를 취하며 사적 대출업을 억누르려고 했지만, 대출업자는 희한한 수법을 개발해 되살아났다."고 썼다.
- 화폐사외에서 전통사회로 전면적으로 후퇴했으나 완전하게 후퇴한 것은 아니었다. 대형 금융거래의 정교한 기법부터 자그마한 주화를 사용할 때의 소박한 편리함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금융기술의 파노라마는 잊혔지만, 로마 화폐사회의 흔적은 남아 있었다. 보편적인 경제적 가치개념이 그것이다. 유동적 사회구조가 다시 딱딱하게 굳어감에 따라 확고한 부족관계와 봉건관계가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화폐사회의 전형적 징표인 보편적인 경제적 가치개념은 끈질기게 살아남아, 훗날 유럽 사회의 재화폐사회화를 널리 촉진시키는 지적 고정자본이 되었다. 8세기 말 프랑크 왕국이 서유럽을 제패한 뒤 화폐사회는 부활했다. 샤를마뉴 대체 치하에서 파운드, 실링, 펜스 등의 화폐단위가 되었고, 유럽 전역에서 일관된 기준에 따라 화폐가 발행되었음. 그러나 이 첫번째 화폐 르네상스는 오래가지 못했다. 12세기 전반에 이르러서야 2000년 전 에게해에서 확립된 논리에 따른 재화폐사회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됨. 12세기말부터 서유럽 저지대나라(벨, 네, 룩 일대)를 시작으로 전 유럽에 걸쳐 전통적인 현물지대가 화폐지대로 바뀌어감. 농노가 1년 중 일정기간 동안 봉건영주에게 노역을 마치던 부역제도도 임금노동으로 대체됨. 가난한 사람이 보기에 세습귀족과 다르지 않았던 민간 관료는 봉급을 받으며 전문적 일을 하는 집단이 되기 시작. 이거은 민간관료를 부릴만한 경제력이 있는 지역에서는 로마시대 이후 처음으로 조세의 금납화가 재도입되었다는 것을 뜻했다.
- 12세기말에서 14세기 중반에 거린 이른바 장기 13세기에 벌어진 유럽의 재화폐사회화는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현상을 초래. 첫째, 화폐로 거래하며 부를 쌓아가는 개인과 기관이 출현. 그들은 군주 이상으로 화폐에 대해 '정치적으로 강력한 이해관계'가 있었다. 화폐 사용이 늘어날수록 위력이 강해지는 기적이었다. 경제활동의 화폐화가 더욱 심해지고 화폐경제에 말려드는 사람이 점점 늘어남에 따라 시뇨리지를 부과하는 대상도 확대됨. 그러나 군주는 국고를 채워주는 시뇨리지의 마력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술적 한계까 아니라 정치적 한계였다. 새로 등장한 화폐 이익집단은 때가 되면 군주의 도를 넘는 시뇨리지 추구행위에 반대할 것임에 틀림없었다.
- 리옹 같은 대도시에서 시장이 서면 유럽의 대상인은 대륙 곳곳의 마을과 도시에서 매주 열리는 장을 크게 키울 기회로 생각해 모여들었다. 이런 시장은 국경을 가로지르는 고가의 사치품 거래가 일어나는 주요 공간으로, 거기서 중세 경제의 역동성이 크게 발휘되었다. 그것은 물론 지역에서 생산되는 변하기 쉬운 다양한 농수산물이 소규모로 거래되는 공간이기도 했음. 그러나 장기 13세기 동안 국경을 넘나드는 무역을 조직하는 방식이 바뀜. 무엇보다 무역업에서 노동의 분화가 일어남. 상인 가문의 수장은 이제 더는 상품을 갖고 돌아다니지 않았다. 본국에 머물면서 대리인을 주요 수출시장에 보내 상주시켰고, 계약에 따라 육지나 행상으로 상품을 운송하는 전문 운송인을 두었다. 상인은 상품이나 상품거래대금의 명의변경 같은 국제거래의 법적, 재무적 측면이나 전화 한 통화로 받은 수입과 다른 통화로 나간 지출을 조정하는 재무적 계산에 주로 관심을 기울임. 상품을 어느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넘기는 지루한 작업은 상인보다 더 낮은 계급에게 넘어갔다. 이처럼 무역을 조직하는 방식이 바뀜에 따라 시장의 본질도 서서히 바뀌어감. 본래 리옹 같은 대도시의 시장은 지역 소매상인의 거래가 맨 밑에 위치하고, 도매상인과 국제상인의 거래가 중간에 위치하며, 낮은 수준에서 누적된 신용거래의 상계처리가 맨 꼭대기에 위치하는 피라미드 모양.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유럽 상인계급이 정기적으로 만나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페르낭 브로델이 말했듯이, "피라미드 밑바닥이 아닌 꼭대기에 상품이 아닌 신용이 집중되었다." 상품을 물리적으로 교환할 기회는 점점 줄어들었다. 반면 지난 몇 달 동안 국제거래에서 누적된 채권과 채무 잔액을 정산하고 결제할 기회는 날로 늘어갔다. 한 시장이 문을 닫고 다른 시장이 문을 여는 사이 국제거래는 주화가 아니라 환어음에 바탕을 둔 신용으로 결제되었다. 환어음은 범유럽 상인가문이 고객에게 발행한 크레디트노트였다. 그러면 고객은 해외도시의 공급자에게 상품대신 크레디트노트를 건네주었음. 결국 1555년 무렵 리옹 시장은 유럽의 상인가문이 거래대금을 조달하기 위해 환어음을 발행함에 따라 상호 누적 채권과 채무잔액을 정산하는 정산소 역할을 주로 했다. 상품이 아니라 화폐를 교환하는,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시장이 됨. 온종일 문서작업에 매달리던 이탈리아 상인도 이 시장 시스템의 일부였음
- 유럽의 대상인 가문은 영업활동이 복잡해지고 규모가 커짐에 따라 거래 사슬의 중간에 한 가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깨달음. 신용을 계층적으로 조직화할 가능성을 재발견 한 것. 지역 소매상인의 지불약속은 고객과 공급자라는 좁은 범위를 벗어나면 별 가치가 없다. 그러나 지역 소매상인보다 거래규모가 훨씬 크고, 보유자금이 아주 많으며, 오랜 성공의 역사를 누려온 국제적 대상인의 지불약속은 달랐다. 대상인이 자신의 지급약속으로 지역 소매상인의 지불약속을 대체하면 그 전에는 고작 지역경제 테두리 안에서만 유통되던 차용증서가 대상인의 명성이 자자한 곳이라면 어디서나 유통되는 차용증서로 바뀔 수 있었다. 결국 지역 소매상인의 신용이 맨 아래에 놓이고, 도매상인의 신용이 중간에 놓이며, 배타적이고 유명하며 결속력이 강한 국제적 대상인 집단의 신용이 맨 꼭대기에 놓이는 신용 피라미드가 세워졌다. 다시 말해 국제적 상인 가문이 지역 상인가 지역상인의 거래상대에 끼어들어, 유동성 없는 쌍방향 지불약속을 이 채권자에게서 저 채권자에게로 쉽게 양도가능한, 그래서 대상인 가문의 신용이 통하는 곳에서는 화폐처럼 유통할 수 있는 유동성 있는 부채로 바꿔 놓았다. 달리 말해 아주 영세한 지역상인조차 국제적 대상인의 이름 아래서, 지역의 테두리를 벗어나 원래 채무자가 누구이고 무슨 사업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유럽 다른 지역의 상인과 거래하고 대금을 결제할 수 있었다. 바로 여기서, 즉 사적 결제 시스템의 창출에서 근대 은행의 발명이 싹틈. 근대 은행의 기원이 보잘것 없어서 의외라 생각할 수도 있다. 흔히 생각하기에 은행 부문의 지급 서비스는 틀에 박힌 지루한 업무이고 대출이나 증권, 채권거래는 역동적인 업무일 것 같다. 그러나 자금조달 및 지급결제 활동은 은행의 기본활동이다. 이 활동 덕분에 은행은 통화 역할을 하며 특별한 지위를 누릴 수 있다. 은행은 한편으로는 차용증서(은행이 예치한 예금, 은행이 발행한 채권과 어음 등 은행입장에서 부채)를 발행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차용증서(은행의 대출금과 보유유가증권 포트폴리오 등 은행 입장에서 자산)를 모아둔다. 모든 기업은 공급자에게 미지급금을 지급하겠다는 약속을 해주고, 고객에게서는 대금을 지급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놓는다. 대부분 기업에서는 이들 재무적 자산과 부채의 가치가 설비자산, 업무용 부지와 시설, 재고자산 등 실물자산의 가치보다 작다. 그러나 은행은 정반대다. 리옹 시장의 수수께끼에 싸인 이탈리아 상인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떠올리면 짐작가능함. 은행의 실물자산은 예나 지금이나 무시할 만한 것으로 평가받음. 현대 은행의 대차대조표에 적힌 금액을 보면 어마어마하다. 07년 영국 스코틀랜드 왕립은행의 대차대조표에 적힌 자산규모는 영국 전체 GDP보다 더 컸다. 제조업 기업도 그만한 규모의 자산을 쌓아둘 수 없다. 은행이 이렇게 엄청난 규모의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고 대차대조표에 적어둘 수 있는 것은 거의 모든 자산이 지불약속에 지나지 않기 때문. 거의 모든 부채도 마찬가지다.
- 환은행가가 유럽 대도시 간 무역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환어음을 지속적으로 발행하고 인수함에 따라 채권과 채무잔액이 쌓여갔음. 환은행가 집단의 결속력이 끈끈해, 미결제 잔고가 쌓여도 기꺼이 용인했음. 그렇지만 누가 누구에게 얼마나 빚졌는지 분명하게 파악하려면 채권과 채무를 정기적으로 상쇄해야 했다. 누적 채권과 채무는 쌍방이 합의하면 즉석에서 상쇄할 수 있었지만, 시장이 정기적으로 열리면서 채권과 채무를 덩어리로 정산할 기회가 점차 자연스레 열렸다. 대상인 가문은 분기마다 리옹시장에서 모임을 갖고 서로의 장부를 맞추며 정산했다. 시장이 열리고 나서 처음 이틀 동안은 열심히 채권과 채무를 사고팔고 새 환어음을 발행하며 오래된 환어음을 취소했다. 일과가 끝날 무렵에는 대상인 가문 대리인이 일제히 분기별 장부를 마감해 대상인 가문 사이의 채권과 채무잔약을 확정지었다. 셋째날은 가장 중요한 환율의 날이었다. 환은행가 집단의 고위 간부는 따로 모여 콘토, 즉 에퀴 드 마르와 유럽의 다양한 법정화폐 사이의 환율 명세서를 작성. 환율명세서는 전체 금융 시스템의 중추였다. 시장 마지막날인 결제의 날에 환율명세서에 적힌 환율로 미결제 잔액을 다음 정산일까지 이월할 것인지, 아니면 이번에 현금으로 결제할 것인지 합의해야 했다. 리옹의 비밀스러운 이탈리아 상인 같은 신중한 환은행가의 임무는 시장이 열린 첫째 날 채권과 채무의 거래를 성사시켜 결제의 날까지 잔액을 완벽하게 털어내고 이익을 올리는 것이었음. 그러나 환은행가가 경이로운 부와 권력을 누리는 실제 원천은 갓 생겨난 외환시장이 요동치는 틈을 파고들어 투기할 줄 아는 능력 하나만이 아니었다. 환어음 시스템은 국제무역이나 외환거래는 촉진하는 놀라운 성과를 올렸지만, 그 수단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이는 훨씬 포괄적이고 정치적으로 의미있는 시스템이었다. 환은행가는 유럽 곳곳에서 사적 신용이 화폐로서 유통될 수 있게 하는 거대한 기계의 가동부를 차근차근 조립해나갔다. 거기에는 화폐의 세가지 기본적 구성요소가 담겼다. 먼저 아르헨티나의 크레디토와 마찬가지로 고유의 추상적 가치단위, 에퀴 드 마르가 있었다. 또 독자적 회계 시스템도 갖췄다. 파치올리가 산술집성에서 정리한 부기규칙가 대상인 가문이 부기규칙을 적용하기 위해 합의한 표준규약이 그것이다. 마지막으로 환어음과 주요 시장의 어음교환소를 이용해 채권과 채무잔액을 이전하고 정산하는 시스템도 마련. 환어음은 국가 내부의 공적 화폐와 상호작용하는 초국적 사적 화폐가 되었다. 환은행가는 국제적이고 자율적이며 결속력이 강한 네트워크로 범유럽 신용 위계체계의 최정점에 올라섬으로써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데 성공. 환어음 시스템을 완성함으로써 유럽 전역에서 유통될 수 있는 사적 화폐를 만들어냄. 환은행가가 만든 사적 화폐의 경제적 의미는 분명했다. 상업혁명을 촉진했고 환은행가에게 엄청난 부를 안겨줌. 뿐만 아니라 이는 획기적 정치변화, 금융의 면모를 영원히 바꿔 놓는 변화의 조짐이기도 했다.
- 잉글랜드 은행설립으로 화폐 이익집단과 군주는 역사적 타협에 도달. 화폐 레지스탕스가 마침내 권력을 잡았고, 그 보답으로 그림자 군대가 비록 부분적이긴하지만 정부를 지지했다. 이 타협은 오늘날 세계를 지배하는 화폐 시스템의 직계 선조다. 화폐를 창조하고 관리하는 일은 사적 은행에 거의 전적으로 위임되지만, 법정화폐가 최종정산자산으로 남아 있는 시스템 말이다. 여기서 최종정산자산은 피라미드 맨 위에서 두번째 층에 있는 은행간, 혹은 이들 은행과 국가 사이에 얽히고 설킨 채권, 채무 잔액을 정산할 때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신용잔액을 말함. 현금은 군주가 지켜야 할 신용의 징표라는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유통중인 화폐 대부분은 사적 은행계좌에 기록된 신용잔액이다. 1694년의 정치적 타협을 모태로 탄생한 군주의 화폐와 사적 화폐의 융합은 아직도 현대 화폐 시스템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
- 맨더빌은 비록 가볍게 툭 던지듯 우화를 발표했지만 그 우화에는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심오한 생각을 담았다고 생각했다. 탐욕스러운 말버러 공작의 특별한 사례는 일반화될 수 있었다. 언뜻 사악해 보이는 모든 행동이 의도와 달리 실제로는 최상의 결과를 낳음. 맨더빌은 1714년 이 풍자시의 증보판을 새로 펴냈다. 증보판의 제목 '꿀벌의 우화: 개인의 악덕, 사회의 이익'은 사회의 역설적 면을 직설적으로 지적했다. 인간 사회를 존재하게 하는 것은 '인간의 타고난 우호적 자질과 속 깊은 애정이 아니다. 이성과 자기부정에 의해 후천적으로 획득하는 도덕성도 아니다. 선천적인 악에서 도덕적인 악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이 세상의 악이라 부르는 모든 것 덕분에 인간사회는 존재할 수 있다." 자칫 악을 장려하는 말로 들리겠지만, "인간의 모든 예술과 과학의 진정한 기원은 악이다. ... 악이 멈추는 순간 사회는 완전히 해체되지는 않더라도 심하게 망가질 것이다." 사회 차원에서 최적의 결과를 낳는 최상의 방법이자 사실상 유일한 방법은 야망, 탐욕, 원초적 이기심을 추구하는 개인차원의 행동을 장려하는 것이다. 당파성 짙은 풍자시인이 진지한 정치경제학자가 되었다. 맨더빌의 시집은 심한 분노를 샀다. 철학자와 성직자가 앞다퉈 그의 끔찍한 주장을 반박했다. 그가 쓴 시집과 수필집은 금서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금융혁명이 잉글랜드 은행의 설립이라는 날개를 달고 탄력을 받았듯이, 맨더빌의 역설적 주장은 분명 시대정신을 정확히 반영한 것이었음. 화폐는 어디서나 유통되엇다. 해마다 새로운 회사가 세워졌다. 시골 아낙네조차 주식투자에 대한 수다를 떨었다. 기업혁명과 금융혁명이 빚어낸 새로운 세상은 설명과 정당화가 필요했다. 바로 이때 물의를 일으키며 등장한 맨더빌의 주장은 그 두가지를 동시에 달성해낸 것처럼 보였다. 계몽시대의 떠오르는 샛별 중 한 명이던 스코틀랜드인 애덤 스미스가 받아들인 맨더빌의 주장은 오늘날까지도 충분히 통할 만한 화폐사회이론의 밑거름이 되었다.
- 국부론에서 애덤 스미스는 조직적 경제활동과 개인의 행동을 연관시키는 체계적 이론을 최초로 정립. 금융혁명이 전통사회를 어떻게 바꿔놓았는지 살핀 초기 사상가들의 생각을 최초로 일관성 있게 종합. 그는 상업이 발달하고 화폐 사용이 늘어남에 따라 '질서와 좋은 정부가 자리를 잡았고, 개인의 자유와 안전도 향상되었다'고 주장. 애덤스미스는 이 같은 금융혁명의 정치적 배당이 축적되고 지급되는 이전의 역사적 역설도 깨달았다. 전통사회의 최대 수혜자였던 봉건영주는 화폐의 마력에 푹 빠졌다. 그들은 사치품을 무척 좋아했고, 그로 인해 봉건지대의 화폐화가 촉진됨. "봉건영주는 유치하고 천박하며 추잡한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자신의 권력과 권위를 내동댕이쳤다." 맨더빌이 읊은 역설적 과정을 애덤 스미스가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손이다.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의 행동이 의도와 달리 사회의 이익을 효율적으로 증진할 수 있게 보장해주는 '보이지 않는 손'은 대단히 유명해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애덤 스미스는 또한 이 만족스러운 결과가 개인이 내린 자기결정의 특징이라기보다는 시스템 자체의 특징이라는 점을 강조. 개인은 '사실 사회의 이익을 증진할 의도가 없다. 심지어 자신이 어떻게 사회의 이익을 증진하는지 알지 못한다' 애덤 스미스는 경제적 가치가 만물의 척도가 되고 화폐사회의 동적 관계가 전통사회의 정적 관계를 대신할 것이라는 전망을 명확하게 밝혔다. 그것은 정치적 균형과 경제적 균형을 지향하는 객관적 시스템으로서의 화폐사회에 대한 전망이기도 했다. 전통사회가 전복되면, '임차농이 독립자영농이 되고 지대가 사라지면, ... 도시는 물론 농촌에도 정상적인 정부가 들어서면, 어느 누구도 그 정부가 작동하는 것을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화폐사상의 역사에서 전례 없는 업적을 남겼음. 경제적 관점과 정치적 관점 양쪽에서 화폐사회를 철저하게 정당화했던 것이다. 화폐사회는 실천적 차원에서의 화폐 대타협에 어울리는 지적, 도덕적 차원에서의 역사적 타협이었음. 잉글랜드 은행 설립자는 사적 은행과 국정화폐를 결합시키면 역사속에서 경제적 진보와 사회적 진보를 향한 힘이 용솟음칠 것으로 믿었다. 정치적 자유주의의 아버지 로크는 누구나 화폐를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그리고 화폐에 수반되는 자연스럽고 변치 않는 경제적 가치의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화폐는 새로운 복음인 입헌정부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룰 것이라고 선언. 화폐는 절정기에 도달했다
- 화폐는 사회구조가 바뀌지 않는 전통사회는 엄두도 내지 못할 방법으로 사회적 안정과 사회적 이동을 결합시킬 수 있다는 독특한 약속을 했다. 화폐가 혁신적이고 매력적인 발명품이 된 것은 이 약속 덕분이었음. 화폐사회가 확산됨에 따라 사회와 경제가 전통에 얽매여 옴짝달싹 못하는 곳에서 야망과 혁신이 굉장치 효과적으로 싹텄다. 화폐는 은행과 더불어 정치혁명의 분위기를 조성했을 뿐 아니라 예상치 못한 규모로 사회 구석구석을 활발하게 변화시켰다. 화폐의 장점을 의심어린 눈으로 바라본 유명한 회의주의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9세기 중반의 고도로 발전한 화폐사회를 두고 다음과 같이 불평한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모든 고정된 관계, 빠르게 굳어진 관계는 유서깊은 오랜 편견 및 견해와 함께 사라져갔다. 새로 형성된 모든 관계역시 미처 자리잡기 전에 낡은 것이 되고 만다. 견고한 것은 아무 흔적없이 사라진다. 신성한 모든 것이 모독당한다.
- 늑대 사이에서 살아가려면 늑대처럼 울어야 한다.
- 로의 시스템은 믿기지 않는 성공을 거두었다가 한순간에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진 탓에 금융사기극의 전형으로 매도당했고, 로는 18세기 버니 메이도프로서 금융사기극의 주연을 맡았다는 비난을 샀음. 영국 작가 대니얼 디표는 로가 한 일을 놓고 일확천금을 좇는 젊은이의 본보기라고 비꼬았다. "로의 사례가 말해주는 바는 간단하다. 할 수만 있다면, 검을 차고 다니다 애인의 남자친구 한두 놈 죽여 교도소에 갇혔다가 사형선고를 받고 탈옥하라. 낯선 나라로 건너가 주식 투기꾼으로 변신한 다음, 국채를 발행해 나라 전체를 거품경제속으로 몰아넣어라. 그러면 당신은 금방 대단한 인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디포의 평가는 너무 피상적이다. 로의 시스템은 화폐의 힘을 활용하려는,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실험이었다. 화폐사회의 장점은 살리고 바람직하지 못한 결점은 피하기 위한 제3전략의 원형이었다. 스파르타 전략과 소비에트 전략은 기본적으로 화폐를 믿지 않았고, 화폐의 이용을 억제하거나 제한하려고 시도했음. 반면에 존 로는 야망과 기업가 정신을 촉발시킬 수 있는 힘이 화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 믿었다. 로의 회의론은 화폐의 두번째 약속, 즉 고정된 금융적 의무가 제공하는 안전성과 안정성을 사회적 유동성과 결합시키는 능력을 발휘하겠다는 약속과 관련이 깊었다. 그래서 로의 전략은 보편적 경제적 가치라는 개념의 사용을 막는 것을 지향하지 않았다. 대신 겨제적 가치를 측정하는 기준을 유연하게 함으로써 원과 넓이가 같은 정사각형을 만들어내는 것을 지향했다. 불가능한 일을 시도했던 것이다. 이것이 로의 시스템의 궁극적 목적이었다. 그는 이행 불가능한 군주의 지급약속이라는 베일로 화폐의 모순적 약속에 담긴 위험을 가리는 대신 모든 화폐 사용자가 그 위험을 명시적 전면적으로 부담하게 하는 새로운 타협을 이뤄내려 했다. 로는 국가 소유 단일회사와 국가소유 단일은행을 합병시킴으로써 불산된 화폐 시스템과 금융 시스템에 숨어 있던 것을 명확히 드러내 보여주었음. 모든 소득과 부는 따지고 보면 생산적 경제에서 흘러나온다. 화폐가 궁극적으로 대표하는 것은 이 소득에 대한 청구권이다. 그러나 소득은 불확실하다. 세계는 불확실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소득에 대한 청구권의 가치도 불확실하다. 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는 가장 단순한 방법은 일반적으로 화폐로 이용되고, 다른 말로는 부채라고도 하는, 고정적인 금융적 청구권을 가변적인 금융적 청구권, 달리 말하면 주식으로 바꾸는 것임. 그러기 위해서는 네덜란드나 잉글랜드에 전에도 존재하지 않았고 후에도 존재한 적 없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것은 바로 조세징수권을 비롯한 국가의 모든 자산을 소유하는 기업이다. 이 지분-화폐는 관습적 화폐보다 안정성이 떨어졌다. 1720년 로가 만든 시스템에 투자한 사람들이 깨달았던 대로 주식-화폐의 가치는 하락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똑같은 이유에서 지분-화폐의 이동성은 더 높았다. 로의 시스템은 이렇게 철저한 투명성을 감당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덜 강력한 대안도 내놓았다. 왕립은행이 발행하는 지폐, 즉 은행권이 그것이다. 이 은행권은 화폐본위의 단위를 잣대로 고정된 가치가 매겨졌다. 그러나 화폐본위 그 자체는 국왕평의회가 경제적, 재정적 관점에서 가장 적절할 것 같은 수준에서 결정했기 때문에 변동이 심했다. 달리 말하자면, 지분-화폐와 은행권의 유일한 차이는 지분-화폐는 시장에 의해 가치가 결정되지만, 은행권은 군주에 의해 가치가 결정된다는 점이었다. 로의 시스템은 독창적이고 혁신적이었으며, 시대를 수백년 앞서갔다. 1973년 국제 금환본위제가 무너지고 명목화폐본위제가 전 세계 규범이 되었다는 사실에 비춰볼 때 250년 앞을 내다본 것이었다. 그러나 로의 시스템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어디에 결함이 있었을까? 당연히 온갖 부수적 문제가 로의 야심만만한 계획을 방해했다. 로는 자신의 능력은 과대평가했지만, 자신의 시스템 때문에 특권을 빼앗긴 기득권 집단의 힘은 과소평가했다. 아주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것을 이루려는 계획을 세웠다. 게다가 공적 정부부채가 아니라 공적 정부지분을 제공한다는 로의 독특한 생각자체도 시대를 너무 앞선 것이었다. 이후 시대에 로와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로의 해법에는 이들 부수적 문제를 압도하는 근본적 오류가 있었다.
- 메소포타미아인은 이렇듯 부채의 문제점을 꿰뚫어보고, 자신의 전통과 종교적 우주론에 바탕을 둔 해법도 마련해 놓았다. 부채의 일부나 전부를 탕감해 사회의 균형을 회복하는 것이 하늘의 신을 대리해 지상을 다스리는 국왕의 책임이라 보았음. 메소포타미아에서 부채로 인한 부담이 사회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수준에 도달하면, 부채를 전액 탕감해주는 전통이 존재했다는 증거는 이자부부채가 존재했다는 증거만큼 역사가 길다. 이 전통은 도시국가 라가슈의 국왕 엔테메나가 통치하던 기원전 24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전통은 고대 근동세계로 전해져 성서시대 희년의 관습으로 살아남았다. 성경의 레위기를 보면 히브리인은 50년마다 희년을 선포하고 즐겼다.
- 그린스펀이 사용하던 모형에 결함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결함이 그린스펀의 생각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문제, 말 그대로 수조 달러짜리 문제였다. 경제학은 역사가 짧은 학문이 아니다. 중앙은행도 오래전부터 있었다. 지난 200년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 사회과학의 여왕 경제학은 왜 파멸적 오류를 범했을까? 세계은행의 수석 이코노미스트와 재무장관을 지낸 미국 최고의 경제학자 래리 서머스는 오바마 정부 국가경제위원회 위원장직에서 물러난 직후인 2011년 4월 세번째 의견을 내놓았다. 그는 금융위기로 인해 정통 거시경제학과 금융이론이 경제현실을 이해하는 데 실패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고 보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놀랍게도 그렇다고 인정. 서머스의 설명에 따르면, 정통 거시경제학이 2차대전 이후 쌓아올린 방대한 이론체계는 금융위기가 닥치자 아무 소용 없었다. 왜 경제가 휘청거리는지, 휘청거리는 경제를 바로 세우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아무말도 못했던 것이다. 서머스는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어떤 경제학 전통이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미국 금융시스템이 심하게 흔들리며 혼수상태 일보직전에 이른 08년 말과 09년 초 백악관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정책을 수립하는 동안 그는 세명의 경제학자 월터 배젓, 하이먼 민스키, 찰스 킨들버거를 스승으로 지목. 서머스는 스스로 인정했듯이 정통 경제학의 범위를 한참 벗어난 오래전 경제사상가를 스승으로 골랐다. 먼저 하이먼민스키는 화폑ㅇ제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관한 파격적 이론을 내놓았지만, 주류 경제학계의 냉대에 시달리다 96년 사망한 경제학자였다. 찰스 킨들버거는 78년 '광기, 패닉, 붕괴: 금융위기의 역사'를 쓴 경제사학자. 대학 강단의 경제학자는 경제사를 별 볼 일 없는 경제학의 방계 학문쯤으로 취급함. 1877년 사망한 영국 금융언론이 월터 배젓은 1873년 명저 '롬바드 스트리트'를 썼다. 그는 당시 근대 경제학계에서 경제학자로 대접받지 못했다. 서머스는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때 은행과 금융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했지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물 간 경제사상가를 스승으로 삼고 의지. 그리고 금융위기의 가장 심각한 국면이 지나 중기 정책대응 방안을 모색할 때가 되자 케인스에게 눈을 돌림. 서머스는 이런 말을 했다. 현대 강단 거시경제학의 핵심연구 프로그램은 "정책입안 과정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나는 기본적인 케인스주의 경제학 체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렇다면 이 대안적 경제사상 전통의 어떤 점이 2차대전 이후 많은 사람이 정성을 쏟았떤 방대한 체계보다 훨씬 쓸모 있고, 훨씬 현실적 이론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최대 규모의 금융붕괴가 한창 진행되던 때 1870년대 초의 런던 금융시장을 설명한 월터 배젓의 롬바드 스트리트가 빼어난 21세기 경제학자의 최신 연구성과가 담긴 학문적 성취도 높은 무수한 책을 제쳐두고 대통령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장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서머스의 말을 빌리자면 "경제학은 아는 것은 많다. 잊은 것도 많다. 그리고 한눈 판 것도 많다."
- 근대 화폐 시스템은 잉글랜드 은행이 세워진 뒤로 확장을 거듭했지만, 그 작동원리는 언제나 똑같았다. 잉글랜드 은행은 특권을 누리는 사적 은행가 집단의 상업적 감각과 화폐에 신용과 보편적 양도가능성을 부여할 수 있는 군주의 공적권한을 결합시켰음. 설립 이후 150년 동안 잉글랜드 은행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사적 은행가는 꾸준히 증가. 군주가 자신의 고유권한을 잉그랜드 은행에 빌려주었듯이, 잉글랜드 은행도 자신의 고유 권한을 수많은 은행에 빌려주었다. 오버렌드거니주식회사의 종말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어음중개인에게 알리며 정책을 전환할 때까지 줄곧 그랬다. 그 결과 근대 화폐 경제는 영국이 부도나느냐, 마느냐가 일개 합자회사 이사의 말 한마디에 좌우되고, 모든 은행이 잉글랜드 은행에 의지하며, 모든 상인이 은행가에 의지하는 상황에 빠졌다.
- 배젓에 따르면, 롬바드가가 글로벌 경제의 화폐시장인 이유, 세계 역사 그 어느 시대보다 많은 은행이 많은 화폐를 발행하는 공간이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잉글랜드 은행이 군주와의 대합의를 통해 화폐 유통권을 얻어냈듯이, 롬바드가의 은행과 어음중개인도 잉글랜드 은행으로부터 화폐유통권을 얻어내고, 이어 지방은행도 롬바드가의 은행과 어음중개인으로부터 화폐 유통권을 얻어냈다. 지방과 런던의 은행은 기업가와 지주가 저축한 돈을 예금으로 유치했다. 상인은행과 어음중개인은 기업 발기인으로부터 투자기회를 제공받았다. 피라미드 맨꼭대기의 대어음중개인, 즉 최초의 근대식 중앙은행인 잉글랜드 은행은 한 예금자와 기업가에게서 다른 예금자와 기업가에게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어음할인과 인수를 가능하게 했고, 그 흐름을 조절했다. 위기 상황에서 잉글랜드 은행이 해야 할 핵심역랑은 분명했다. 잉글랜드 은행은 졸지에 최후에 기댈 최종 어음중개인이자 최종 은행가가 되었다. 아무도 어음을 할인해주겠다고 나서지 못할 때 잉글랜드 은행만이 어음을 할인해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배젓의 설명에 따르면, 이 놀라운 화폐의 기반시설, 즉 잉글랜드 은행은 산업혁명의 운영시스템이었다. 잉글랜드 은행이 있었기에 영국은 세계 다른 나라를 제칠 수 있었다. 여기까지가 잉글랜드 은행의 좋은 면이었다. 그러나 똑같은 이유에서 잉글랜드 은행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면 파국적 결과가 빚어질 수 있었다. 엄청난 유혹, 고전파의 추상적 경제학이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약점이라고 밝혀낸 유혹이 일었다. 군주의 대리인인 중앙은행만이 화폐 시스템의 존립을 좌우하는 신용과 신뢰를 지탱할 수 있으므로, 평상시건 위기시건 경제전반의 건전성은 물론 시티 오프 런던의 건전성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싶은 유혹 말이다. "우리는 어려운 과제에 매달리다보면 쉬운 과제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부자연스러운 상태에서 살다보면 자연스러운 상태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롬바드가에는 관리해야 할 화폐가 너무 많다." 1866년 위기당시 잉글랜드 은행은 세계 최대 금융중심지 한복판에서 관리능력과 정책 능력면에서의 시대착오성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 유동성을 신용의 명백한 한 속성으로 생각하며 중시한 배젓의 통찰이나 배젓보다 앞선 시대의 조플린과 손턴의 통찰도 결정적으로 놓치고 말았다. 이들 세사람은 유동성이란 존재할 때는 신용을 화폐로 만들어 놓지만, 존재하지 않을 때는 신용을 무기력한 쌍방신용으로 바꿔놓는 속성으로 바라보았다. 유동성은 배젓과 케인스가 그토록 강조하고 싶어했던 금융과 실물경제를 잇는 중요한 연결고리이자 거시경제정책의 근거였다. 법정화폐는 어떤 사적화폐 발행자도 감히 바라기 힘든 유동성을 어느정도 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2차대전 후 강단 금융학은 국가가 유동성을 지원할 필요가 있는가, 필요가 있다면 어떻게 지원해야 하는가 하는 신학적으로 고민스러운 주제를 거시경제학자에게 흔쾌히 떠넘긴 채, 사적 시장에서 거래되는 금융 청구권을 신용도가 가격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 관심을 쏟았다. 유동성이라는 추가적 수준까지 살피며 상황을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 지난 10여년 간 통화안정을 헌신적으로 숭배한 해악은 심했다. 외곩으로 낮고 안정적인 인플레이션만 추구했기 때문에 08년 글로벌 경제를 무릎꿇게 만든 여타 통화요인과 금융요인에는 관심을 쏟지 못했다. 아니, 이들 요인을 더 악화시키시만 했다. 이단적 예지자 하이먼 민스키는 수십 년 전에 이미 외곬으로 통화안정을 추구할 때의 해악을 다음과 같이 경고했음. 중앙은행이 낮고 안정적인 인플레이션을 달성함으로써 한가지 유형의 위험을 완화하는 데 성공할수록, 투자자는 더욱 자신감을 갖고 불확실하고 비유동적인 증권에 투자함으로써 다른 유형의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려고 할 것이다. 풍선 한쪽을 누르면 다른 쪽이 부풀어오른다. 바꿔 말하면, 높고 변동이 심한 인플레이션을 제거하면, 자산시장의 파국적 불안정을 초래함. 통화안정이 금융불안정을 야기하는 것이다. 모든 정책입안자가 정통 이론이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아니, 왜 오류를 범할 수 밖에 없는지 알았다. 01년 세계적으로 유명한 거시경제학자이자 훗날 잉글랜드 은행 총재자리에 오른 머빈 킹은 "많은 사람이 경제학은 화폐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대부분 경제학자의 대화에는 화폐라는 말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고 설명한 다음, "경제학자가 사용하는 표준모형에 화폐가 등장하지 않는 것이 앞으로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이 내 믿음이다. ... 추측하건대 경제학자의 대화에서 다시 화폐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며 그의 믿음은 적중했지만, 추측은 빗나간 것으로 밝혀졌다. 화폐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경제학을 확립하려고 했던 배젓과 케인스의 꿈을 무너뜨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 물음에 대한 궁극적 대답은 화폐에 관한 로크의 교리가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배젓은 화폐에 관한 로크의 교리를 공격했지만, 때가 너무 늦었다. 화폐가 거울나라로 사라져버린 지 오래였다. 화폐는 상품교환 수단이라는 마법에 걸린 사람은 정반대되는 증거나 논거를 아무리 많이 접해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 결과 1866년의 위기 및 배젓이 이 위기에 보인 반응은 화폐와 경제를 이해하는 두가지 방식이 수렴하는 지점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두가지 방식이 갈라지는 지점이었다. 고전파의 화폐 없는 경제학에서 현대의 정통 거시경제학, 즉 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중앙은행이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화폐사회에 관한 과학이 발전했다. 한편 배젓의 현장 전문가 경제학에서는 금융학, 즉 경영대학원에서 가르치고 은행가와 증권거래인이 사용하는 거래방법이 발전했다. 거시경제학은 화폐, 은행, 금융없이 경제를 이해하는 지적 틀이었고, 금융학은 경제없이 화폐, 은행, 금융을 이해하는 지적 틀이었다. 이렇게 경제학과 금융학이 지적으로 갈라진 결과 08년 금융부문에서 발생한 위기로 거시경제학이 역사상 최악의 상황에 빠졌을 때, 그리고 이후 은행 부문의 파탄 때문에 경제가 회복되지 못했을 때, 현대 겨시경제학과 현대 금융학 둘 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다행히도 래리 서머스가 지적했듯이 의지할 만한 대안 전통이 있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물음, 즉 왜 경제학자는 위기가 닥치는 것을 몰랐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경제학자가 거시경제를 이해하는 틀에는 화폐가 없었다는 것이다. 똑같은 이유에서 수많은 사람이 은행가와 규제당국에 묻고 싶었던 물음, 즉 왜 당신들은 위험한 짓을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 역시 간단하다. 금융을 이해하는 틀에 거시경제학이 없었다는 것이다.
- 07년에서 12년 사이 25개국의 대규모 은행이 위기를 겪었는데, 그중 3분의 2는 자국 은행에 신용을 지원했다. 몇몇은 위기에 전례 없는 규모로 개입했다. 미국은 GDP의 4.5%를 은행 자본재구조화에 쏟아부었다. 대규모 전쟁이 한창일 때 지출하는 1년치 국방예산과 맞먹는 규모였다. 1816년 토머스 제퍼슨은 "은행 제도는 상비군 제도보다 훨씬 위험하다"고 경고. 제퍼슨의 경고는 놀라우리만큼 진실에 가까웠다. 영국은 GDP의 8.8%를 은행 자본재구조화에 지출했다. 이는 영국이 해마다 국민건강보험에 지출하는 예산규모보다 더 컸다. 아일랜드는 GDP의 40%를 썼다. 정부 각 부처의 1년 예산을 모두 합친 것보다 많았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정부는 은행가를 철저히 돌봐주었다.
- 자욱한 먼지가 가라앉고 대침체가 시작되자 대중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기 시작했다 은행과 은행투자자는 일방적 정책만 펴왔다. 언제나 그렇듯 은행이 하는 일은 유동성 위험과 신용위험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만약 자산가 부채의 만기를 일치시키지 못하면, 중앙은행이 개입해 유동성을 지원했다. 대출이 악성으로 변하고 자기자본이 부족해지면 납세자가 신용손실을 메워주었다. 되돌아보면 그 결과는 얼마든지 예측가능했다. 전 세계 숱한 은행이 규모를 늘렸고 완충자본을 줄였다. 서슴지 않고 위험한 대출을 했고 자산의 유동성을 낮췄다. 덩치가 아주 커져서 쉽게 망하지 않을 은행이 늘어갔다. 그 결과 정부가 암암리에 제공하는 신용보험의 수준은 높이 치솟았다. 위기가 엄습하고 도덕적 해이를 억제하려는 정책입안자의 노력이 실패로 엄습하고 도덕적 해이를 억제하려는 정책입안자의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고 나서야 정부가 은행에 퍼준 보조금의 진짜 규모가 드러났다. 리먼브러더스가 망하고 1년이 지난 09년 11월 전 세계 각국 정부가 은행부문에 지원한 자금 총액은 약 14조 달러로 추정됨. 전 세계 GDP의 25%를 웃돌았다.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 납세자가 줄곧 들은 손실 예상액의 규모였다. 이에 반해 수익 예상액은 오롯이 은행의 주주, 은행 투자자, 직원의 차지였다.
- 2000년대 들어 수많은 소액 채무증권을 묶어서 거액의 새로운 채무증권을 만들어내는 증권화 사업이 본격화되었다. 주택담보대출, 자동차 대출, 기업대출, 신용카드 부채 등 온갖 종류의 신용은 하나로 묶인 다음 잘게 나뉘어 새로운 채권으로 발행되었다. 이들 채권은 신용평가기관의 평가를 받고 새로운 투자자에게 팔려나갔다. 신용시장을 통해 돈을 빌리는 것이 전에는 간단한 거래였다. 은행의 도움을 받아 회사가 발행한 채권을 개인이나 기관이 매입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엔 그 과정에 굉장히 복잡해졌다. 회사는 여전히 채권을 발행하지만 최종투자자가 채권을 직접 매입하지 않는다. 채권 매입 목적으로 다른 회사가 취득해 보관하다가 자산 유동화 기업어음을 특수목적회사 앞으로 발행한다. 특수목적회사의 부채로 잡히는 자산유동화 기업어음은 제4의 회사가 매입해 보관한다. 이 제4의 회사의 채무증권은 또다른 특수목적회사가 매입해 부채담보부증권을 배서하는 데 사용한다. 헤지펀드는 다시 이 부채담보부증권을 매입해 머니마켓 뮤추얼펀드에서 대출을 받기 위한 담보로 사용한다. 이 단계에 이르러서야 최종투자자가 등장해 머니마켓 뮤추을펀드 지분을 매입함으로써 처음 채권을 발행한 회사로 거슬러 올라가는 사슬에 현금을 공급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슬 맨 앞의 회사가 채권을 발행하는 수수료는 옛날보다 덜 든다.
- 20세기를 지나며 미국과 영국 은행의 보호적 완충자본의 규모는 5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포트폴리오 내 현금과 고유동성 증권의 비율 역시 불과 50년 사이 5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바젤위원회는 보호적 완충자본의 유지 및 포트폴리오 내 현금가 고유동성 증권비율 확대는 검증이 끝난 아무 문제 없는 무기지만, 정말 필요한 것은 그보다 화력이 더 강한 무기라고 진단을 내렸다. 2010년 12월 바젤위원회는 은행에 더 많은 자본을 보유하고 포트폴리오 내 유동자산의 보유를 늘리라는 요구는 위험한 행동에 큰 부담을 안겨준다. 밑바탕에 깔린 기본 주장은, 그렇게 함으로써 은행이 위험한 행동을 한 대가를 비싸게 치르게 하고 위험한 행동을 하는 판의 크기를 제한함으로써 건전한 균형이 회복되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규제는 틀이 정해져 있고, 이는 사적 편익과 사회적 비용을 유발하는 그 어떤 산업에도 낯익은 것이다. 예를 들어 화학공장은 주주에게 줄 이윤을 창출하고 직원에게 줄 월급을 벌어들일 뿐 아니라 환경에 해로운 폐기물도 배출한다. 화학공장이 환경오염 비용을 부담하지 않고 무임승차를 즐기려 하면, 폐기물은 경제적으로 정당화되는 수준 이상으로 생산된다. 해법은 오염 유발자가 오염을 생산한 경제적 비용을 전부 지불하도록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다. 그러나 규제기관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은 위기에서 드러난 심각한 문제를 이 같은 재래전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그들은 금융부문이 일으키는 오염은 화학공장이 일으키는 오염과 두가지 이유에서 다르다고 경고한다. 첫째는 문제의 규모다. 금융 시스템의 현재구조를 바꾸지 않고 그대로 운영할 때 잠재적인 사회적 비용은 너무 커서 조세시스템으로 억제할 수 없다. 은행에 부담금을 부과하면 유동성 지원과 신용지원이라는 직접적 재정비용을 거의 환수할 수 있을 것이다. 은행이 거둔 이윤 대부분을 빼앗아갈 테지만 말이다. 07년 이후 자업자득인 금융불안정으로 GDP 감소, 대량실업, 생산능력 상실 등 엄청난 대가를 치렀다. 금액으로 환산하면 수십조 달러에 달한다. 엄청난 액수다. 바꿔 말해 재래전 방식을 고집한다면, 지구를 파괴할 정도로 위력이 큰 원자폭탄을 사용해야 겨우 이긴다는 이야기다. 세금부과가 아무 효과 없는 두번째 이유는 네트워크로 연결된 은행 시스템의 성격상 개별 은행의 활동도 시스템 전체의 비상한 위험을 초래한다는 데 있다. 이론적으로만 따지면 오염을 일으키는 화학공장 사례와 달리 추가세금을 부과해 위험을 불러오는 활동을 억제해야 함. 그러나 은행 시스템은 국제적이다. 세금을 부과할 정당성을 갖춘 다자가 정치권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재래전을 고집한다면 좋은 무기로 무장하고 전투력이 뛰어난 유엔군을 투입해야 이길 수 있다.
- 사람들이 특정한 사회제도를 단순한 사회적 고안물이 아니라 자연계의 필연적 사실로 받아들이면, 그것을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건 불가능해져 제 아무리 그릇된 것이라도 비판적으로 보지 못한다. 역사에는 그런 사례가 즐비함. 19세기에는 신체적 특징으로 흉악범을 식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실증범죄학이 크게 유행. 귀 모양으로 부정부주의자를 알아볼 수 있고 코 모양으로 절도범을 판별할 수 있다고 했음. 기괴하게 들리겠지만 중요한 것은 실증 범죄학을 믿은 사람은 얼굴이 특이하게 생긴 사람을 잡아 가두는 데 별 이해관계가 없었다는 점. 그들은 단지 범죄행위는 생리적 요인의 산물이라는 자연주의적 설명을 믿었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과학적 인종주의도 19세기 미국에서 받아들여졌다. 신체적 차이로 유색인종이 열등함을 입증할 수 있다는 이론. 이 과학적 인종주의는 보수적 세계관이 아니라 진보적 세계관의 특징이었다. 사회과학에서의 자연주의적 추론, 즉 사회적 현상을 자연의 객관적 진실로 설명할 수 있다는 주장은 자기강화적 특징이 있다. 사회적, 정치적 편견이라는 실을 갖고 가짜 사실이라는 그물을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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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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