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위의 세계사

역사 2021. 5. 25. 20:53

-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침대는 남아프리카의 동굴에서 발 견되었다. 대략 7만 년 전에 현생 인류가 동굴 바닥을파내서 만든 침대들이 남아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 영어 bed'는 원시 게르만어 어원에서 땅바닥을 파내서 만든 쉼터'를 뜻한다. 이것은 적절한 설 명이었다. 최초의 침대가 땅을 파낸 구덩이였다는 특징 때문이 아니 라, 침대가 언제나 휴식을 취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침대는 휴식 말고도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난방이 잘 되는 집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우리 조상들이 자연과 환경에 취약했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한다. 잠을 어떻게, 어디서 잘는지는 언제나 보온과 안전성을 우선으로 해서 결정되었다.
- 빙하기 말이나 2세기 전 캐나다 북극권처럼 영하권의 추운 날씨가 이어지는 지역의 사람들은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고 낮이 짧아지면 침대로 파고들었고, 여러 겹의 털을 휘감고 깊은 겨울잠에 들었다. 4 천 년 전, 캐나다 북극권 배핀섬 인디펜던스 피오르의 겨울 집에 살던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몇 달간 반수면 상태로 지냈다. 이들은 두툼하고 따뜻한 사향노루나 황소 털가죽을 두르고 손닿을 거리에 음식과 연료를 쟁여놓고 서로 밀착해 웅크려서 지냈다.
오늘날에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담요나 털가죽이나 옷가지를 뒤집어쓰고 땅바닥, 콘크리트 바닥, 마룻바닥에서 잠을 잔다. 하지만 5천 년도 전에 문명이 발생하면서 침대의 높이가 때때로 올라갔고, 이는 지식인층 사이에서 두드러졌다. 이런 고대 카우치 유물은 이집트의 건조한 기후 덕분에 고스란히 보존되었다. 투탕카멘이 통 치하던 기원전 14세기 중반, 침대는 이미 (우리가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기본 형태가 갖추어졌다. 다만 머리를 대는 쪽이 살짝 높았고 미끄 러져 떨어지지 않도록 아래쪽에는 발판이 세워져 있었다. 이후로 침 대가 잠을 자는 곳이라는 주제는 거의 변화하지 않았지만 침대 종류는 다양해졌다. 벽장형 침대부터 해먹, 낮은 워터 베드(물침대)와 바닥에서 5미터 가까이 띄운 침대도 있었다. 그럼에도 지난 5천 년 동
안 놀랍게도 직사각형의 형태는 변하지 않았다. 매트리스도 수천 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았다. 풀과 건초, 짚을 채운 자루나 천 가방이 수 세기 동안 기본 매트리스 구실을 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이런 매트리스를 여러 개 쌓아올려서 벌레를 쫓고 충전재의 까칠 까칠한 감촉이 느껴지지 않게 했다. 21세기에 들어 수면과학 기술이 엄청나게 정교해지면서 불면증을 물리치기 위한 묘수와 엉터리 치료법이 난무하고 있다.
- 버지니아 공대의 역사학자 로저 에커치(Roger Ekirch)는 베어의 수면 연구에 자극을 받아서 이중 수면 패턴을 기록한 역사 문헌들 을 모으기 시작했다. 기원전 1세기에 쓰여진 리비우스(Livius)의 라틴어책 《로마사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둘 다 ‘프리모 솜노(primo somno)' 또는 콘큐빈 녹테(concubine nocte)', 즉 첫 번째 잠에 대하여 수차례 언급했다. 중세 시대에 제프리 초서 같은 작가 들은 영국인들이 이따금 이른 저녁에 ‘첫 번째 잠에 들었다가, 후에 깨어나서 아마도 무언가를 먹고, 다시 두 번째로 아침잠을 즐겼다고 적었다. 두 번째 잠은 한밤중을 넘기고 시작되었을 수도 있었다. 심야의 깨어 있는 시간을 영어권 사용자들은 'the watch' 또는 (watching 이라고 불렀다. 이때 사람들은 꿈을 되돌아보거나 이야기를 나누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음식을 먹거나 섹스를 나누기도 했다(유대인의 글에는 이 시간이 임신에 적기라고 충고한다). 또 다른 사람들 은 이 시간을 종교적인 목적으로 활용했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하면 괴로움을 느낀다. 예를 들어 잠을 적게 자던 윈스턴 처칠은 자신을 괴롭히던 우울증을 '블랙 독(black dog)' 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매일 밤 다섯 시간을 자도 건강에 전혀 지장이 없는 부류가 드물게 있다. 태생적으로 잠이 없다고 알려진 이 엘리트들은 긍정적이고 낙천적으로 생각했던 듯하다. 반대로 잠을 많이 자는 습관은 우울한 기분과 연관된다. 이중 수면 패턴을 끝장내는 데 누구보다 공헌한 토머스 에디슨은 태생적으로 잠을 적게 자는 위인에 속했다. 에디슨은 밤에 네 시간 정도 잤고, 때때로 사무실의 간이침대나 작업대 근처의 바닥에서 잠들었다고 한다.
- 1900년 미국 여성의 약 5퍼센트가 병원에서 분만을 했다. 1920년대에는 이 비율이 미국 대도시에서 65퍼센트에 달했고, 1955년에는 95퍼센트로 올라갔다.
오늘날 예비 '부모'는 아기를 낳기 전 각종 검사를 받는다. 또 미국과 영국의 산모 중 약 3분의 1이 제왕절개수술[caesarean section]을 받는다. 고대 로마의 과학자이자 철학자였던 대(大) 플리니우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Caesar)의 조상이 이런 방식으로 분만을 했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 명칭은 '자른다'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caedere', 또는 로마법 렉스 카이사레아(Lex Caesarea, 황제령)에서 유래한 듯하다. 이 로마법에 따르면 임신한 채로 죽은 여성은 사망 직후에 분만이 허용되었다. 태아를 몸에 지닌 어머니의 장례를 치를 수 없게 한 문화적 금기 때문이었다. 무균수술과 마취제가 개발되기 전에 제왕절개 분만은 산모에게 죽음을 의미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산부인과 병원의 침대는 우리 대부분이 처음으로 만나는 침대가 되었다.
-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관련해서 침대는 적극적인 회복을 위한 공간에서 수동적인 출산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이런 전환은 여성 산 파가 남성 산부인과 의사로 바뀐 것과 일맥상통한다. 오늘날 산부인과 의사의 85퍼센트가 남성이다. 이전의 가부장 사회처럼 우리 사회 는 출산의 공로를 대부분 남성에게 돌리고 있다. 하지만 침대는 더 이상 여성이 오염되는 공간이 아니다. 출산과 관련된 수많은 질병이 치료되면서 한 달 동안 침대에서 나오지 못하는 불결한' 여성들은 이제 없다. 그 대신 여성들은 출산 후 며칠 만에 청바지를 입고 팔짝 팔짝 뛰어다니는 미디어 속 유명인을 따라 하라는 압박에 시달린다. 이것도 여성의 정신건강에 좋을 리 없다.
1970년대 초에 페미니즘 운동가들은 출산과 관련된 치료가 이해하기 쉬워야 하고 여성의 삶이 의료행위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 장했다. 출산은 질병이 아니므로 임신부 모두가 병원에 갈 필요는 없다면서, 일반 조산사의 부활을 옹호했다. 여성 운동가들이 가정출 산을 지지하면서 의사들과 갈등이 일어났다. 가정에서의 분만을 금지한 미국의 주는 없었다. 하지만 가정출산을 시행하는 의사들은 권 위의 상실과 심지어 의사자격증에 대한 위협을 받았다. 오늘날 조산사들은 미국 내 출산의 8.2퍼센트를 맡고 있다. 1980년 1.1퍼센트에 불과했던 수치보다 높다.
그런데 현대의 의학 덕분에 그 어느 때보다 인간은 안전한 삶을 살고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병원 침대로 가는 이유이다. 이들은 대부분 장신구를 두른 오스투니의 여성 유골이나, 1631년 열네 번째 아이를 낳다가 죽어 타지마할에 묻힌 인도 왕비 아르주만드 바누(뭄타즈 마할), 1855년에 임신으로 인한 구토증(=입덧, 지속적인 구토와 체중감소, 탈수)에 시달리다가 죽은 소설가 샬럿 브 론테의 운명을 피할 수 있다. 산후조리를 하는 동안 침대는 삶이 갑자기 죽음으로 변할 수도 있는 장소였다.
- 임종 침대 둘레에서의 모임은 왕실에서만 중요한 것은 아니었 다. 임종 침대는 친구들과 가족이 망자를 (그리고 서로를) 지지하기 위해 모이는 사교장이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1세 시절 영국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보통 시신을 씻기고 수의를 입힌 후에 경제적 여유가 있으면 간단하게 방부 처리를 했다. 이 시신은 상여나 뚜껑 없는 관이나 망자의 침대에 놓였다. 그리고 조문이 시작되었고, 친구들과 가족은 시신을 묻기 전까지 망자를 결코 홀로 두지 않았다. 이런 전통은 20세기 중반까지 이어졌다.
가톨릭교는 임종을 지키는 관습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때 망자 의 운명이 갈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망자의 사후는 침대를 천사가 둘러쌀지 아니면 악마가 둘러쌀지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고요한 죽음은 천사가 승리했다는 표시였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도들은 인간의 운명이 마지막 1분으로 정해질 리 없다며, 이런 태도가 분명 임종 침대에 불안감을 가져온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개신교도인 엘리자베스 1세의 채플린은 여왕이 마지막 숨으로 곧장 천국으로 갔다고 주장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그는 “여왕께서는 마치 양처럼 온화하게, 나무에서 익은 사과를 따듯 편안하게 이생을 떠나셨다” 라고 적었다.
이슬람에서도 가족과 친구들이 임종 침대 둘레에 모여들었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아랍어로 “알라는 유일신이고,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자”임을 믿는다는 신앙 고백이 이어졌다. 원래 이 기도는 반복된 '라'음으로 편안하고 서정적으로 진행된다. 죽어가는 사람의 몸이 편치 않을 때에는 갓 태어난 아기에게 하듯 귀에 대고 성스러운 말들을 속삭여주었다. 죽은 후에 시신은 의식에 따라 씻기고 수 의가 입혀져 상여 위 관에 놓였다. 매장은 가능한 빨리, 보통 하루 이 내에 진행되었는데, 매장된 후에 조문 기간이 이어졌다. 이렇듯 신속하게 매장이 진행된 것은 위생과 부패 문제 때문이었다. 이슬람교는 물론이고 유대교도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화장을 금지했다.
16세기와 17세기 유럽의 유대인들은 임종 침대를 지키는 풍습을 미츠바(mitzvah), 즉 선행이나 종교인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유대인 공동체는 누구도 홀로 죽게 하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죽어가는 사람은 열 명의 유대인 앞에서 고해를 하는데, 여기에는 일련의 기도가 포함되었다. 이후에 죽어가는 사람이 가족을 위해 축복을 빌거 나 기도를 했다. 죽은 후 시신은 24시간 안에 씻기고 매장되어야 했 다. 탈무드에 따르면 하느님은 “나는 너희 사이에 나의 형상을 두었 고, 너희의 죄로 인해 나는 그것을 뒤엎었다. 이제 너의 침대를 뒤엎 는다.”라고 말한다. 유대인 조문객들은 이 구절을 따라서 자신의 카우치나 침대를 엎어놓았다. 7일간 이어지는 시바 기간(shivah 기간, 부모·배우자와 사별한 유대인이 장례식 후 지키는 7일간의 복상服喪 기간 옮긴이)에는 바닥에 누워서 잠을 잤다.
- 서구인들은 마지막 말에 유달리 관심을 갖는다. 이런 유행은 인상적인 소크라테스의 죽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는 불경죄와 아테네 젊은이들을 타락시킨 죄로 고발되었 고 헴록(hemlock, 독미나리과의 다년초로, 독이 있어 사약으로 쓴다.)을 마시는 독약형을 선고받았다. 젊은 제자인 플라톤이 당시 사건의 흐름을 기록으로 남겼다. 소크라테스는 독약을 마시고 (아마도 침대에) 누워서 온몸을 시트로 덮었다. 독이 소크라테스의 발에서 머리로 차츰 퍼지면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마지막 순간 소크라테스 는 자기 얼굴에서 시트를 내리고 지켜보던 친구에게 부탁을 남겼다. “크리톤, 내가 아스클레피오스(의료의 신)에게 수탉 한 마리를 빚졌 는데 자네가 대신 갚아줄 수 있겠는가?”
- 우리는 얼마나 겁먹으며 살아왔는가! 우리는 죽음과 맞서며 여기 까지 왔다. 살균된 시트와 격리 커튼이 있는 병원 침대는 우리의 생 명을 살려내는 곳이며 또한 우리 중 50퍼센트가 죽는 곳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이 병원이 아닌 곳에서 죽기를 바라는 소망을 이루지 못한다. 어쩌면 임종 침대에 사람들을 모아서 마지막 인사를 하고 용서를 건네는 전통을 되살리면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유족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침대 위에 시신을 뉘어서 모든 사람이 보고 받아 들이고 큰 북소리, 가슴 치기, 친구들의 지지, 큰 축제가 포함된 장례식을 여는 건 어떨까. 인간은 무엇보다 사교적인 동물이다.
- 옛날 사람들은 청결에 대해 각기 다른 생각을 가졌다. 이슬람교 도들은 흐르는 물로 규칙적으로 세정식을 해야 했다. 고여 있는 물 에서 씻는 행위는 불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서구의 상류층은 17세기 말 이전까지 거의 씻지 않았다. 엘리트층의 어린아이 들은 두세 살까지 목욕을 시키지 않았다. 1601년에 태어난 루이 13 세의 기록을 보면, 의사가 신중하게 고안하고 승인한 특별한 왕실 일정표에 따라 열일곱 번째 생일날을 앞두고 처음으로 목욕을 했다. 고 한다. 체액이 보존되어야 하고 또 물이 너무 많으면 건강을 해친 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5세기 무렵 유럽의 몇몇 논평자들이 위생과 도덕을 근 거로 공동 수면을 성토하기 시작했다. 가장 두려운 동물은 머릿니였 을 것이다. 머릿니가 있으면 사회에서 낙인이 찍힐 정도였다. 머릿니는 흔했지만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수시로 머리와 수염을 빗 고 감는 방법 말고는 마땅한 해결책이 없었다. 서캐와 머릿니를 잡 아 없애려 고안된 빗살이 가늘고 촘촘한 빗은 개인의 필수 소지품 이 되었다. 고고학자들이 튜더 왕조 시대의 난파선 메리 로즈(Mary Rose)를 발굴하면서 익사한 선원들 대부분이 빗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 중세 시대 유럽 사람들은 대부분 건초더미 위에서 잠을 잤다. 외투르 뒤집어쓴 채 바닥에서 자거나 짚을 채운 자루를 깔고 그 위에서 가죽 이나 담요를 덮고 잤다. 사람들은 공동주거지에서 온기를 찾아 난로 가까이에 모여서 자기도 했다. 이 주거지는 동물들과 함께 썼다. 사 람들은 자루를 건초로 채워서 침대를 만들었다. 영주의 눈에 든 이 들은 영주의 주 거주 공간 벽에 딸린 구석진 곁방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당시 침실은 창문에 유리가 없어서 외풍이 심했고 위생 상태가 형편없었다. 가장 중요한 영주만이 신화 속의 덴마크 왕 베어울프처 럼 높다란 침대를 가질 수 있었다. 베어울프는 자신의 침대 부근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수많은 용사들에 둘러싸여 잠이 들었다. 용사들 모두 갑옷만 아니라면 어디서도 잠이 들었다. 베어울프의 백성들은 1066년 잉글랜드를 정복한 노르만족에 비하면 거칠었다.
노르만족은 안락함을 선호해서 집을 지었고 영주는 응접실 역할 을 하던 방에서 잠을 잤다. 이 방들은 침실 겸 알현실로 사용되었고, 귀족부터 평민 농부까지 모든 사람이 응대를 받았다. 훗날 이 방들의 형태는 유럽 궁정의 공적 침실의 원형이 되었다.
- 2013년 인터넷의 개척자 구글의 빈트 서프(Vint Cerf)가 프라이버시 를 근래에 태어난 변종이라고 했을 때, 원색적인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서프의 말은 완벽한 진실이다. 프라이버시는 개인적인 비밀, 공적 영역과의 분리 개념으로 약 150년 전에 등장했다. 그러나 그 뿌리는 훨씬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흥미로운 사실은 근대적인 개념의 침실이 등장한 것은 불과 2세기 전 이었다는 것이다. 산업혁명 이전까지 프라이버시는 어느 인간 사회에서도 최우선이 아니었다. 돈 · 권위 · 안전 · 편리성에 비해 고독은 뒷 전으로 밀려 있었다.
선사시대에는 온기와 안전성이 보장되어야 하므로 프라이버시를 별로 지키지 않았다. 사람들은 화덕 가까이에 붙어 있거나 함께 웅크리고 지냈다. 십중팔구 아이들은 부모가 섹스하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가족 모두 붙어서 잠을 자거나 작은 집에서 함께 지냈기 때문 이다. 1929년 트로브리안드 군도 사람들의 성생활에 대한 인류학자 브로니슬라브 말리노프스키의 유명한 보고서에 따르면, 어른들은 자 신들의 섹스를 아이들에게 보이지 않으려 딱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 았다. 아이들이 빤히 쳐다보면 매트로 얼굴을 덮으라고 꾸짖는 게 전부였다. 한편 전통적인 수렵채집인과 극빈층 농민 사회에서 섹스 는 수면 공간이 아닌 야외에서 자주 이루어졌다. 보는 사람도 없고 움직임의 폭도 더 넓었을 것이다. 육식동물로 바글거리는 위험한 장 소나 자연환경에 살던 사람들에게 생존에 비해 프라이버시의 희생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예전의 북극 사회에서는 바깥에서 고독을 찾는 행위가 매우 위험하고 멍청한 짓으로 생각되었다.
- 프라이버시가 언제부터 개념으로 자리 잡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아마도 통치자와 귀족들, 그 외 사람들이 구분되기 시작하면서 나타났을 것이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높은 침대에서 잠을 잤고 유력한 관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을 뺀 모든 사람이 매트나 땅바닥에 누워 잠을 잤다. 건축 기하학에 능했던 고대 아테네 사람들은 이따금 햇빛은 최대로 들이면서 공적인 노출은 최소화한 집들을 설계했다. 단어 'private'의 기원인 라틴어 'privatus'는 원래 관직을 맡지 않은 시민을 일컫는 말이었다. privatus'는 '나는 박탈한다, 빼앗는다' 뿐만 아니라 '나는 해방시킨다, 풀어준다'라는 뜻을
가진 'privo에서 유래되었다.
- 당시에도 오늘날처럼 프라이버시에 대한 논쟁이 일었던 듯하다. 소크라테스 같은 석학들은 사생활을 옹호하여 자신을 은폐하는 사람 들을 용납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고독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이 렇게 언급했다고 알려져 있다. “당연히 적절한 명예나 관직 어느 것 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정의조차도. 평등주의와 거리가 멀었던 로 마 사람들은 호화로운 시골 빌라든 우아한 호숫가든 도심의 대저택 이든 대놓고 자신의 부를 과시하고 즐겼다. 서기 77년 대 플리니우스 는 엄청난 재산을 가진 부자들이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고... 자신들 의 침실과 내밀한 공간... 심지어 은밀한 비밀도 낱낱이 까발렸다”라 고 적었다. 사실 로마의 주택 대부분은 딱히 구분된 침실이 없었고, 대신 이동 가능한 침대들을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옮겼을 뿐이다.
- 로마 사람들은 공공 목욕탕에서도 거리낌이 없었고, 그곳에 딸린 공동 화장실에서도 나란히 앉아 볼일을 봤다. 이 화장실에서는 칸막이로 나눈 흔적이 이따금 발견될 뿐이다. 이들은 볼일을 보기 위해 U자 형태의 구멍이 있는 좌석에 앉았고 볼일을 본 후에 낡은 천 쪼가리로 닦거나 스펀지를 붙인 막대를 함께 썼다. 그 사이에 스 스럼없이 대화를 이어갔다. 화장실은 사교와 공적 모임이 벌어지는 장소였다. 특권층이 사치와 과시를 누렸던 것에 비해 로마 시민 대 부분은 날림으로 지어진 비좁은 공동주택에 살았고 여기에 프라이 버시가 존재할 리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생활에 개의치 않았 다. 관청의 허가를 받은 매춘부와의 섹스는 (남성들에게) 비밀이 아니었고 공공연한 쾌락의 원천이었다. 폼페이의 한 벽에는 이런 낙서가 적혀 있다. “목욕·술·섹스는 우리의 몸을 망가뜨린다. 하지 만 목욕·술·섹스는 우리를 살 만하게 한다. 프라이버시는 세계 어디에서도 최우선이 아니었다. 기원전 5000년경에 등장한 중국의 '캉은 결코 사적인 침실이 아니었고, 여러 사람이 함께 자고 먹고 사 교하는 장소였다. 기원전 1000년경에야 점차 바닥보다 높은 침대에 서 잠들기 시작했다. 정교하게 새기고 금박을 입힌 엘리트층의 침실 은 조용한 휴식처라기보다 가구를 두는 공간에 가까웠고 사람들이 잠을 자고 손님을 접대하는 장소로 자리 잡았다. 옷을 보관하는 장소는 따로 있었다.
- 상업화가 진행되던 빅토리아 시대에 침실을 따로 쓰게 되면서 아주 다양한 상품이 개발되었다. 이 시기에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마케팅(어린이 장난감과 가구를 포함해서)이 시작되었다.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하는 비즈니스가 활발해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 를테면 남자아이의 장난감과 옷, 가구는 파란색이고 여자아이들은 핑크색이라는 관념(부모가 물건을 두 배로 사주어야 함)은 제2차 세계대 전 이후에야 널리 알려졌다. 그 전에는 반대였다. 1918년의 한 패션업계 기사는 이러했다. “일반적으로 남자아이에겐 핑크색을, 여자아이에겐 파란색을 적용하는 규칙을 받아들인다. 핑크색은 확실하고 강렬한 색이라서 남자아이들에게 어울리는 반면, 파란색은 섬세하고 얌전해서 여자아이들을 더 예뻐 보이게 한다
- 19세기가 되자 침대와 매트리스는 중세 시대의 건초나 짚으로 채운 자루에서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다. 혼자 자는 것은 아직도 보편화되지 않았다. 앞에서 보았듯이 빅토리아 시대의 가정에서는 프라이버시를 중요시했음에도 침대 공유는 이 무렵까지 이어졌다. 침실의 분리는 실내에 계단과 복도가 발전하면서 가능해졌다. 계단과 복도를 통해 하인들과 다른 사람들은 다른 방들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한때 하인들은 남주인이나 여주인의 침실에서 잠을 잤으나 이제 하 인들도 위층이나 아래층에 자신만의 공간을 갖게 되었고 벨이 울리면 불려 갔다. 국가의 권력은 이제 더 이상 왕의 침실이 아니라 입법부와 행정부에 있었다. 따라서 침실은 호화로움이 약화되고 훨씬 사적인 공간으로 변화했다.
- 전용 침실이 여러 개 필요해지자 건축가들은 침실과 집 안 다른 구역 들의 관계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19세기에 남편과 아내의 침실은 때때로 1층에 있었고 공동의 공간인 응접실로 이어져 있었다. 가족과 하인, 성인과 어린아이들, 다 큰 아이들과 아기들이 분리되기 시작했다. 집안의 다른 가족들은 2층에서 잠을 잤고, 하인들은 더 높은 층에서 잠을 잤다. 지위가 올라갈수록 올라야 할 계단 숫자는 줄어들었 다. 이런 관습은 수세대 동안 지속되다가, 결국 1층 전체가 일상생활 에 할당되었다. 그리고 수면 공간은 위층으로 배정되었고, 각 공간은 복도로 연결되었다. 사생활에 대한 보호가 강화되었다. 하지만 단층 집이나 도심 공동주택에서는 침실을 어떻게 배치해야 할까? 두 가지 대안이 유행하게 되었다. 하나는 복도를 중심으로 침실을 배치하는 방식이었다. 또한 침실을 사교 공간들과 연결하는 방식도 있었다. 작은 집에서 침실 하나는 부모에게, 또 다른 침실은 아이들에게 배정되었다. 하인들은 지하층의 부엌에서 잠을 잤다.
- 미래의 침대는 당신의 모든 욕구를 충족시킬 수면 캡슐이 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수면 캡슐은 이미 존재하지만 보편화되어 있지는 않다. 수면 캡슐은 컴퓨터로 연결되어 있고 사용자의 안락한 정도를 점검하여 온도와 조명, 심지어 외부 소음 정도를 조절한다. 당연히 이 침대에는 자동 마시지기가 있어서 부드럽게 침대를 흔들고 우리를 조용히 그리고 가만히 깨워줄 것이다. 캐노피 수면 캡슐은 미디어 스 크린을 구비해서 커플이 일어나지 않고도 텔레비전을 보거나 웹사이 트를 검색할 수 있다. 잠이 손짓할 때는 버튼을 누르면 스크린이 블 라인드로 가려진다.
게임 콘솔과 HD 프로젝터 등 멀티미디어 오락기기를 갖춘 수면 캡슐도 있다. 원하는 대로 마음껏 침대를 조절할 수 있고, 매우 사적인 순간에 당신을 숨겨주는 블라인드도 설치되어 있다. 아니면 식물과 함께할 수 있는 생태형 식물 침대도 있다. LED로 빛을 주어 식물의 성장을 돕고, 당신을 잠들게 할 음악을 들려주는 스피커, 심지어 자가발전기도 있다. 여기서는 침대 주변의 모든 활동이 에너지로 전 환된다. 클라우드 침대(The Cloud)는 자력을 활용해서 부드러운 쿠션을 공중에 띄우는 것으로, 휴식을 취하거나 잠자기에 좋은 장소이 지만 그 밖의 다른 활동에 대해서는 비실용적이고 청교도적인 삶을 요구한다.
- 수면 캡슐, 캐노피, 자기부상 침대와 고급 워터 베드 모두 연결성 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는데, 이것은 불과 몇 년 전에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USB 포트와 블루투스를 설치한 매트리스도 있다. 당신의 침대가 스마트폰과 완벽히 동기화될 날이 멀지 않았다. 당신은 전세 계에 걸쳐서 인터넷을 검색하거나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침대에서 기상하는 시간, 온도를 낮추거나 음악과 빛 을 조절하는 미래 기술과 연결되어 있다. 당신은 컴퓨터가 만들어놓 은 환경에서 빈둥거리며 누리기만 하면 된다. 가상현실을 통해서 당 신의 매트리스가 꽃이 만발한 가운데,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 딩 위나 보름달과 별들 아래에 있을 수도 있다. 가까운 미래에 각 사용자에 맞춰 개별 난방과 냉방을 제공하는 매트리스를 갖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분명 당신에게 이야기책을 읽어줄 홀로그래 피 반려자를 개발해줄 것이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자동세척과 해충 제거 기능을 완비한 항균 매트리스라면 돈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과 마찬가지로 미래 세대는 당연히 안락한 표면에 기대고 싶어 하겠지만, 미래주의자들은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 을 것이다. 누군가는 공중 부양을 최고로 삼고, 당신을 공중으로 띄울 에어제트 침대를 상상한다. 아마 당신은 강력한 에어제트와 플로트에서 전화를 걸게 될 수도 있다. 베개에는 칩과 센서가 내장되어 당신의 바이털 사인을 측정하고, 수면 패턴을 추적하고 이상적인 기 상 시간을 알려줄 것이다. 천장과 벽은 낮 또는 잠을 불러오는 조명 으로 빛날 것이다. 내장 스마트폰으로 헤드셋, 음성과 센서로 난방 과 냉방을 조절하게 되리라고 미래주의자들은 말한다. 그리고 밀집 주거지와 더 작아지는 아파트를 고려해서 거실을 침실로 전환하는 자동 가구가 언급되고 있다. 수직룸은 더 흔해질 것이고, 어쩌면 우주인처럼 침낭에서 자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침낭이 안락함을 느낄 만큼 무중력 상태를 만들어낼 날이 올까?
- 우리 대부분은 우리 선조들이 알아볼 수 있는(우리의 매트리스가 훨씬 안락하겠지만) 매트리스에서 누워 잠을 잔다. 스마트 기기를 침대에 꼭 장착해야만 할까? 우리는 정말로 의학적 상태뿐만 아니라 음악 취향, 좋아하는 책, 좋아하는 물건 구입을 추적하는 전자기기를 원할까? 건강진단용 스마트워치와 칼로리 계산 어플에 중독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현실을 고려하면 답은 '그렇다'일 것이다. 곧 우 리는 슬립 트래커(sleep tracker)가 내장된 매트리스를 구입할 수 있 고, 이것은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이론적으로 시간에 따라 향상될 것이다. 슬립 트래킹은 당신의 수면을 더 스마트하게 만들어줄 것이 라고 주장한다(스마트하다는 게 무슨 뜻이든 간에). 매트리스가 최적의 수면 조건을 만들어줄 수는 있지만 당신의 수면 문제까지 해결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 대부분에게 숙면에 가장 효과적인 방안은 본업 포기, 일과 유지하기, 효과적인 다이어트, 적당한 시각의 취침, 규칙적인 운동, 잠동무와 즐기는 시간이 될 것이다.
한때 삶의 모든 과정이 역동적으로 펼쳐지던 침대는 어둠 속으 로 사라졌지만, 침대는 이제 가상의 세계에서는 사회적인 장소가 되 리라고 약속한다. 미국의 미술가 로리 앤더슨(Laurie Anderson)은 말한다. “기술은 우리가 둘러앉아 우리 이야기를 하는 캠프파이어입니다.” 그녀의 말은 일부 맞다. 기술을 통해 우리는 누구든 어떤 생각이 든 우리 침대로 가져오리라 기대할 수 있다. 우리의 조상들이 일상적 이라 여겼던 신체적 접근 없이..
무한한 연결과 완벽한 고립 이렇듯 오늘날의 침대는 이전과 마 찬가지로 우리의 삶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내일의 침대에 덮인 시트 를 잡아당길수록 우리는 미래를 더 잘 볼 수 있다. 미래는 공동체성 이 실종되는 악몽이 될 수도 있지만 상호 연결된 세상이라는 꿈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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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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