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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의 천재

인문 2025. 10. 16. 07:09

- 오늘날의 서유럽 음식은, 올리브기름과 와인과 곡식뿐이었던 로마인들의 요리와 고기와 우유와 버터뿐이었던 독일인들의 요리가 어느 순간 만나 뒤섞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로마인들은 부르군트족을 야만인들 중에서도 가장 야만적인 종족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이 머리에 버터를 바르고 다녔기 때문이다. 로마인들도 올리브기름으로 몸을 씻었지만 그들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고 그것을 문제 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런 이야기를 접하면 자연스레 지금 우리의 의복 문화도 돌아보게 된다. 오늘날 우리가 입는 바지는 독일인들이 입고 다니던 무릎까지 오는 바지에서 유래했고, 치마는 로마인들이 넓게 두르고 다니던 옷에서 유래했다(성별에 따라 바지와 치마를 구분해서 입는 것은 순전히 우연에 의해 발생한 관습이다. 이를 보란 듯이 증명해주는 이들이 스코틀랜드인들이다). 
요리도 마찬가지다. 우리 음식 문화는 부모가 누구인지 불분명하다. 요리는 혼혈이다.  요리에 토속적인 순수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탈리아 요리의 가장 전형적인 식재료들은 모두 외국에서 들어왔다. 파스타는 아랍에서, 토마토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건너왔다.

- 중세 초기에서 후기로 넘어오는 사이에 사회구조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전쟁과 사냥에 전념하던 귀족들이 외교관과 정치인으로 변신하면서 이들의 행동 방식과 식생활도 변화했다. 사냥한 동물로 만든 요리는 더 이상 달갑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식탁에는 날짐승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지위의 변화에 따른 취향의 변화이기도 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일수록 높이 나는 것을 먹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회적 지위가 낮을수록 진흡탕에서 허우적거리는 돼지나 땅속에서 자라는 무로 만족해야 했다.
왕들과 왕자들의 식탁에서는 곰이나 소의 고기가 사라지고 수많은 종류의 새 요리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먹는 것이라고는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없는 새들, 예를 들어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칠면조로 대치된 공작 외에도 불에 구운 가마우지, 황새, 고니, 두루미, 왜가리, 제비 등이 요리로 등장했다.

- 꿩이 권력자들의 식탁 위에 고급 음식으로 등장한 것도 이 시기다. 플리니우스가 로마 시대에 스페인과 프랑스, 알프스에서 대량 서식하던 것으로 기록했던 꿩이 중세에 와서는 서유럽에서 종적을 감추게 된다. 그러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십자군전쟁이 시작되었을 무렵이다. 아마도 키프로스 섬이나 팔레스티나에서 들여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명은 곧장 왕과 군주들이 찾는 고급 음식으로 변신했고 이때부터 식용으로 사육되기 시작했다. 새 요리에 대한 귀족들의 이러한 애호는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1500년대의 한 귀족은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우리는 조류나 좀 더 부드러운 고기들을 섭취한다. 그것이 우리의 지성을 자극하고 우리의 감각을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주로 먹는 사람들보다 휠씬 더 유연하게 만들어준다."

- 알프스 산맥을 중심으로 북쪽 지역에서 포크의 보급은 상당히 더디게 진행되었다. 카테리나 데 메디치Caterimna de Medici의 아들인 프랑스왕 앙리 3세(1551~1589)는 포크 사용을 제도화하려고 노력했지만 주변 사람들, 누구보다도 프랑스 문화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음식을 손으로 다룰 줄 모르고 예민하게 구는 이탈리아 사람들을 경멸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측근의 야릇한 비웃음을 피할 길이 없었다. 프랑스에서 포크는 1600년대가 흐르는 동안 서서히 정착되었고, 영국에서는 1725년까지만 해도 고작해야 국민의 10퍼센트만이 식사용 포크와 나이프를 가지고 있었다. 독일에서 포크는 1600년대 말이 되어서야 상류층의 식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포크가 전 유럽의 중산층에 보급되는 것은 그로부터 다시 한 세기가 흐른 뒤였고, 정
말 일반적인 것으로 정착되기까지는 거기서 또 한 세기가 더 필요했다. 다시 말해, 한 비잔틴 여인의 결혼식에 처음으로 등장했던 포크가 완전히 정착될 때까지 1,000년이 조금 못 되는 기나긴 시간이 소요되었던 것이다.

- 르네상스 시대의 식사 습관은 우리 시대와 상당히 달랐다. 우선 등장하는 것은 단품 요리가 아니라 코스였다. 다시 말해 고기 코스, 생선 코스, 채소 코스, 디저트 코스가 번갈아가며 등장했다. 디저트도 식사 끝이 아니라 식사 도중에 다양한 종류로 나왔다. 그뿐 아니라 르네상스 시대에는 모든 요리 위에 설탕, 계피를 (우리가 소금을 뿌리는 식으로) 곁들여가며 음식을 먹었다. 약간 시큼하고도 달콤한 맛을 내기 위해서였다. 이 역시 우리 시대에는 상당히 다른 취향 중 하나다.
설탕은 어쨌든 소금처럼 하나의 맛을 첨가하기보다는 맛을 부각시키데 사용되었으며, "맛 좋은 음식에 또 다른 즐거움을 더하기 위한 귀한 재료"였다. 르네상스 시대에 상당량의 설탕을 사용했던 것은 소금의 짠맛을 상쇄하기 위해서였다. 음식을 오랫동안 보관하기 위해 많은 양의 소금을 사용했기 때문에 조금이나마 짠맛을 없애기 위해 가미되었던 것이다.

- 르네상스 시대에는 코스마다 여러 요리들을 다양한 크기의 접시에 담아 한꺼번에 테이블에 올렸다. 만찬에 참석한 사람은 팔이 닿는 곳에 있는 음식을 접시에 덜어 먹었다. 아주 먼 곳에 있는 음식을 향해 팔을 거나 식탁 위로 몸을 기율이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고 부적절한 행위로 여겨졌다. 때로는 집사가 각자의 접시에 음식을 담아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식사를 하다보면 이것저것 조금씩 맛만 보다가 식사가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테이블 위의 음식을 전부 맛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어떤 음식들은 이미 식어버린 상태에서 접시 위에 올라오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예를 들어 화덕에서 구운 고기의 외관을 장식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나, 무슨 개선행진처럼 모든 요리를 한꺼번에 테이블로 실어 나르기 위헤 대기하는 시간 때문에 음식은 흔히 식어서 올라오곤 했다. 다 식은 음식이 구미를 당길 리는 없었을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은 만찬을 준비하는 동안 일종의 광기 같은 것에 전엄되곤 했다. 부와 권력을 자랑하기 위해 조그만 크기의 디저트에서 커다란 통구이에 이르기까지 600~700가지의 요리를 준비한 사례도 있었다. 이런 경우, 모든 음식을 맛본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 음식을 모조리 테이블 위에 쌓아놓는 이런 종류의 코스 요리 역시 다양한 스타일과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전식에 수프가 들어 있으면 독일식이라고 불렀고, 처음부터 고기로 가득한 접시들이 테이블 위에 올라오고 나중에야 수프가 나오는 경우에는 이탈리아식이라고 불렀다. 두 번에 걸처 전식이 나오고 식사도 엄격한 순서에 따라 진행되는 만찬은 프랑스식이라 불렀고, 차가운 음식에 수프가 곁들여 나올 경우 스페인식이라고 불렀다. 좀 더 세분화된 이름도 존재했다. 이를테면 요리를 뚜껑을 덮은 채로 테이블에 가져와 즉석에서 뚜껑을 열고 썰어 손님들의 접시 위에 올려놓는 방식은 베네치아식이라고 불렀다. 그런 식으로 볼거리로서의 흥미를 유발했던 것이다.

- 테이블에 요리를 배치하는 방식이 본질적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은 1800년대부터다. 예를 들어 알렉산 데르 쿠라킨시 왕자(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도 언급된 바로 그 인물) 덕분에 생겨난 것이 이른바 '러시아식 만찬'이다. 시종들이 쟁반에 요리를 담아 들고 커다란 테이블 주변을 돌며 식사에 참석한 모두의 접시 위에 차례로 음식을 덜어주는 방식이다. 오늘날처럼 요리를 마치자마자 부억에서 직접 접시에 담는 방식도 또 하나의 혁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러시아식은 이제 결혼식 피로연이나 사람들이 아주 많이 모이는 만찬에서만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이 이전 세계의 것에 비해 반드시 우월하다고만 보기는 힘들다. 사실 우리 식대로라면 일단 앞에 놓인 요리들에 대해 각자가 마음 내키는 대로 하면 그만이지만. 러시아식 만찬은 음식을 거절하거나 반대로 더 요구하기가 쉽지 않았고 그만큼 예의범절을 자연스럽게 가르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 안 좋은 냄새를 없애기 위해 향료가 필요했다는 것도 사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향료를 살 만한 돈이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신선한 식재료를 살 만한 돈도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향료가 원래 악취 제거를 위해 사용되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늘 잘못 이해되어온 사항들 중 하나다. 썩기 일보 직전의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음식을 먹어야했던 사람들은 당연히 향료처럼 비싼 재료를 살 만한 여유도 없었다.
고기는 신선한 상태에서, 생선은 생물을 즉시 요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운반이 용이하지 않았던 바닷물고기보다는 민물고기의 소비가 휠씬 많았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16세기 말까지 향료는 사회적 위치를 드러내는 일종의 지표였다. 

- 중세와 르네상스 요리의 핵심은 뒤섞기였으며, 이를 상징하는요리기구가 바로 절구다. 새로운 종류의 음식과 맛을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절구에 넣고 찧은뒤에 망사로 걸러냈다. 당시 사람들은 '자연의 맛'을 사랑하지 않았으므로 요리사는 맛과 색상과 식재료 자체의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해야 했다. "절구는 근대 이전의 요리에 사용되던 일종의 믹서"이자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요리사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일상적인 도구였다.
이 모든 것이 17세기의 프랑스 문화로 인해 변화한다. 향료가 보편화되어 모든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게 되자마자 귀족들은 향료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파리의 중산층 가정을 찾아가면 언제든 맛볼 수 있는 음식을 베르사유궁전에 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태양왕의 궁전을 드나드는 귀족들은 중산층 사람들을 업신여기면서 농부들을 감싸 안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벌였다. 그렇게 해서 부추와 양파, 버섯, 케이퍼, 정어리 등의 식재료들이 가지고 있던 전통적인 맛의 부활이라는 결과가 나타났던 것이다. 이들은 가난한 자들의 향료란 마약에 지나지 않는다던 주장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단숨에 뒤엎으며 놀랍게도 유럽 요리의 발전에 결정적인 퇴보를 선언하고 말았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 유행하던 신맛 소스(식초와 레몬즙, 포도즙을 사용한 소스)는 기름진 소스(올리브기름 혹은 버터)에 자리를 빼앗겼다.

- 이 시점에서 정확히 해둘 것이 있다. 스파게티가 탄생한 해를 1154년,즉 (루제로의 책>이 발간된 해로 보는 것은 문헌학적인 차원에서 볼 매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우리는 스파게티가 기계화되고 산업화된 공정의 결과라는 점을 분명하게 의식해야 한다. 19세기 전에는 스파게티라는 이름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는 스파게티를 베르미첼리(사람들이 점점 이 이름을 사용하지 않기 시작하게 된 것은 베르미, 즉 지렁이를 먹는다는 것 자체가 서구에서는 절대적인 터부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라 불렀고, 만드는 것이 쉽지 않았던 데다 수요도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스파게티는 이제 하나의 상징이자 신화로서 파스타의 동의어가 되어 다른 모양새의 모든 파스타들을 뒷전으로 밀어냈다. 스파게티는 파스타뿐 아니라 종종 이탈리아 사람들과 동일시되기도 한다. 한때 유럽에서는 이탈리아인을 가리킬 때 마카로니라는 용어를 사용했고(외국어들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경멸조의 뉘앙스를 지닌 말이다. 마카로니-마피아라는 조합은 콧수염과 다혈질을 연상시킨다), 한편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스파그'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이 또한 썩 기분 좋은 말은 아니다. 

- 요리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집요한 관심사 중 하나였다는 사실은 더 이상 수수께끼가 아니다. 1473년 피렌체에 있는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공방에서 수업을 받던 시절, 다빈치는 견습생에게 지급되는 보잘것없는 급료를 충당하기 위해 식당 종업원으로 일했다. 저녁마다 베키오 다리 근처에 있는 '세 마리 달팽이'라는 이름의 음식점에 나간 것이다. 하지만 어느 날 요리사들이 원인 모를 독극물로 인해(불만을 품은 고객의 행위였을까?) 모두 사망하자 다빈치는 주방장으로 승격된다. 주방에서도 다빈치는 자신의 창조 본능을 발휘했다. 음식의 양을 줄이고 접시에 담는 모양새에 좀더 신경을 썼다. 뭐랄까, 벌써 500년 전에 일종의 누벨 퀴진"을 일으킨 셈이다. 하지만 저명한 요리 연구가 폴 보퀴즈의 새로운 요리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인상을 찌푸렸던 것처럼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창작품도 많은 이들에게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손님들은 접시에 요리를 듬뿌 담아 오던 예전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어느 날은 빵 조각 몇개에 바질 잎을 없어서 내온 다빈치의 요리에 화가 난 손님들이 요리사와 한판 벌일 기세로 주방까지 처들어오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손님은 왕이 아닌가. 다빈치에게 화가 난 건 아니지만 식당 주인은 예전 방식으로 돌아가기로 하고 젊은 주방장을 해고해버렸다. 하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포기하지 않고 한 친구와 함께 새로운 식당을 열었다. 그 친구는 바로 다빈치만큼이나 밝은 미래를 타고난 산드로 보티첼리였다. 그리고 식당 이름은 '산드로와 레오나르도의 세마리 두꺼비'였다. 식당 밖에는 보티첼리와
레오나르도가 그린 두 개의 간판이 걸려 있었다.

- 전쟁이 끝난 뒤에도 스파게티는 미국에서 계속 성공 가도를 달렸다. 스파게티의 보급(뿐만 아니라 울리브기름과 토마토, 레드 와인의 보급도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에 결코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1960년대에 펜실베이니아의 마을 로세토에서 진행된 한 연구 결과다. 로세토는 1882년 이탈리아의 풀리아 주 포자 근교의 로세토 발포르토레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이탈리아인들이 세운 마을이다. 1960년대에 한 의사가 이 마을에 동맥 질환 환자가 상당히 드물고, 영국과 독일에서 건너온 근교의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도 현저하게 적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이에 몇몇 의사들이 좀 더 자세한 조사를 시작하게 된다. 1955년과 1961년 사이에 로세토에서 동맥 질환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수는 인근 마을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았지만 1965년과 1974년 사이에 두 마을의 사망률은 거의 비슷한 수치를 기록했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의사들은 이러한 차이의 원인이 음식에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1960년대 초까지 로세토 마을 사람들의 주식은 이탈리아에서처럼 올리브기름을 사용한 파스타와 곡식 요리였다. 그리고 이들은 항상 와인을 곁들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식습관이 변화하면서 더 이상 올리브기름을 사용하지 않았고 미국식으로 음식을 섭취했으며 와인도 마시지 않았다."
이런 정황 속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지중해식 식이요법이다. 이 의사들의 연구는 파스타의 수요를 폭발적으로 증가시켰고 어떤 광고로도 도달할 수 없는 성과를 이루어냈다. 생산자들은 손뻑을 치며 반가워했다. 동맥 질환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적어도 사람들이 몸매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탄수화물을 거부하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 미셸 오마마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카르보나라 스파게티를 좋아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긍정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2000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요리 역사가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마시모 알베리니는 카르보나라 스파게티 앞에서 눈살을 찌푸렸던 인물이다. 그는 "태운 베이컨에 버터와 치즈, 달갈노른자를 섞어 만든 불쌍한 스파게티가 카르보나라다. 칼로리가 지나치게 높고 맛에 조화라고는 찾아볼 수 없으며 소화불량을 일으키는 카르보나라는 가장 질 나쁜 스파게티의 원형"이라
고 말했다.

- 옛날에 파스타를 만들던 사람들은 마카로니가 제대로 건조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마카로니 하나를 귀에 가져가 부러뜨려보았다. 부러지는 소리로 건조 여부를 판단했던 것이다. 훌륭한 건식 파스타의 비결에는 물의 함량도 큰 묶을 했다. 넓적한 파스타는 그만큼 반죽이 단단해야 하고 페투치네와 베르미첼리, 카펠리니 같은 경우는 부드러워야 하며 스파게티와 부카티니의 경우는 물을 더 많이 섞어야 한다. 마케로니는 빨래처럼 걸어놓고 말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우리는 기계화된 공정을 거쳐 생산되는 조그만 크기의 파스타에 익숙해져있지만, 이와는 달리 오래전에는 길고 넓적한 파스타를 말린 뒤 손으로 잘라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바로 '처녀 파스파' 지티다(시집가야 할 처녀, 즉 '지타'의 파스타라는 뜻이다). 잘라낸 마케로니의 길이는 보통 손가락 세 마디 정도, 혹은 대략 4센티미터에 달했다. 몇십년 전만 해도 마케로니를 자르는 일은 하나의 직업으로 존재했다. 집집마다 찾아다니면서 파스타를 잘라내는 쉽지 않은 일을 해결해주었던 것이다. 일요일 아침이면 골목 한편에서 마케로니 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고 회상하는 사람도 있다.

- 다양한 종류의 채소를 섞어 넣고 기름과 식초로 간을 하는 요리는 100퍼센트 이탈리아 요리다. 샐러드가 유럽의 다른 나라들, 특히 프랑스로 전해진 것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건너간 요리책들과 요리사들을 통해서였다. 우르비노 근교, 카스텔두란테출신의 의사 코스탄초 펠리치는 1572년 인살라타 (샐러드)는 전적으로 이탈리아 이름"이라고 기록한 바 있다.' 당시 타향살이를 하던
이탈리아인들이 느끼던 신선한 채소 요리에 대한 향수는 오늘날 이탈리아인들이 외국을 여행하면서 본토의 스파게티나 에스프레소를 그리워하는 것과 비슷하다. 모데나에서 태어나 베네치아에서 자란 뒤 영국으로 망명한 개신교도 자코모 카스텔베트로는 1614년 고향의 "채소와 과일"을 그리워하며, 영국인들이 고기만 먹고 채소를 무시한다고 기록한 적이 있다. 외국인들은 이탈리아에서 채소를 익히지 않고 먹는 방법뿐 아니라 그 이름까지 배워 갔다. 1518년에 폴란드의 왕 지그문트 1세와 결혼한 보나 스포르차는 시집을 가면서 폴란드에 수프용 채소와 상추를 전파했다. 이 이야기가 사실이든 아니든, 확실한 것은 여전히 오늘날에도 수프용 채소를 폴란드어로 이탈리아의 채소라고 부른다는 사실이다. 샐러드뿐만 아니라 당근, 완두콩, 아스파라거스, 주키니 호박, 꽃양배추를 가리키는 폴란드 단어들은 모두 이탈리아어에 어원을 둔다.

- 샐러드, 즉 익히지 않은 채소 요리는 아주 최근에도 전형적인 이탈리아 요리로 언급된 적이 있다. 현대 인류학의 아버지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1968년 훌륭한 식사 습관의 기원을 집필하면서 다음과 같이 관찰했다. 
"최근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이탈리아 레스토랑은 정통 프랑스 레스토랑에서보다 휠씬 '덜 익힌' 채소의 맛을 선사한다. 우리가 해오던 대로 기름과 식초에 묵히는 대신 채소를 씻어 자르기만할 뿐이다.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무다. 무에는 상당량의 버터와 소금을 곁들인다. 아주 무의미하다고 보기는 힘든 요소다. 어쨌든 이탈리아 음식 문화 덕분에 날로 먹는 음식의 폭이 휠씬 넓어진 셈이다."

-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로마 군인들은 상추발 외에도 포도발을 만들었다고 한다. 서기 3세기에 어떤 물자보관 책임자가 상황을 지켜보다가, 와인을 무거운 항아리에 담아 어렵게 옮기느니 차라리 야영장 근처에 포도를 심는 것이 휠씬 수월하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276년부터 282년까지 로마의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와인을 멀리서 어렵게 공수하는 수고를 덜고 언제든지 손쉽게 마실 수 있도록, 병사들에게 항상 포도 묘목을 가지고 다니라고 지시한다. 현재 헝가리, 프랑스, 스페인, 크로아티아에서 자라는 무려 78개의 포도 품종이 고대 로마의 직계 후손들이다. 그뿐만 아니라 오늘날 가장 중요한 포도주 생산지들 가운데 몇몇은 로마 시대에 로마군의 야영지였던 곳이다. 대표적인 예로 프랑스에서 샴페인을 만들어내는 지역을 들 수 있다. 상추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오늘날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몇몇 야생상추의 형태를 연구, 추적하다 보면 로마 군인들이 야영했던 장소를 찾아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로마인들은 재배종과 야생종을 포함한 수백 종의 채소를 익히거나 날것으로 먹었는데 몇몇은 정체를 밝히기 힘든 것들도 있다. 이름만 살아남은 것이다. 하지만 서기 1000년 이후 시금치의 폭발적인 인기로 인해 대부분이 도태되고 말았다.

- 샐러드가 식사를 시작하는 요리에서 식사 도중에 먹는 음식으로 밀려나는 과정, 다시 말해 안티파스토에서 곁들여먹는 음식으로 바뀌는 과정은 상당한 난관을 겪었다. 예를 들어 앞서 인용한바 있는 코스탄초 펠리치는 "샐러드는 저녁식사 시간에, 요리에 앞서 먹어야 한다"고 썼고 파올로 차키아는 1636년에쓴 사순절 요리에 "샐러드를 식사 도중에 두 번씩 먹는 것은, 즉 처음에 그리고 도중이나 마지막에 먹는 것은 굉장히 해로울 수밖에 없다"고 기록했다. 어쨌든 채소는 처음에 먹는 것이 좋다.
반면에 곁들여 먹는 음식으로서 샐러드의 역할은 소스에 달렸다. 그리고 식사를 다 마친 뒤 '위장을 닫아야' 할 순간에 적합한 것은 과일이나 오래 묵힌 치즈다. "아주 세련된 사람들은 설탕에 절인 아니스나 코리안돌로" 씨앗을 먹는다." (오늘날 인도 음식 레스토랑에서 후식으로나오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이탈리아인들은 이런 식으로 고집을 부렸지만 프랑스인들은 아무런 문제 없이 샐러드를 구이 요리에 곁들여 먹는 음식으로 후진시켰다. 이탈리아인들이 샐러드를 식사 도중에 먹는 습관을 들이게 된 것은 한참 뒤에 일어나는 일이다. 19세기 말에 와서야 아르투지가 이에 대한 설명을 시도한 바 있는데, 어겠든 이것은 부르주아 계층이 소금과 식초가 많이 들어간 음식을 거부하면서 생긴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30년대부터 시작되는 비타민 문화가 다시 샐러드를 식사의 시작을 알리는 음식으로 되돌려놓는다. 동기는 새로있지만 어쨌든 옛날 방식으로 되돌아간 셈이다. 그리고 똑같이 건강을 이유로, 같은 시기에 피에몬테와 롬바르디아와 베네토의 식탁에 드디어 남부이탈리아에서 탈출한 토마토 샐러드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 고대 로마인들의 음식 가운데 오늘날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 모습을 우리가 어럽지 않게 알아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식재료들 중 하나가 바로 프로슈토다. 아울러 프로슈토는 가장 덜 이탈리아적인 음식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가장 널리 전파되었으며, 따라서 어디서든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유명한 곳이라면, 물론 최고의 프로슈토를 생산해내는 스페인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이탈리아인들은 이 분야에서도 자신들만의 특별한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몇몇 식재료나 생산품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기도 했고(예를 들어 파스타나 피자) 어떤 경우에는 프랑스인들에 뒤쳐지기도 했지만(와인과 샴페인) 프로슈토에 관해서라면 모범이 될 만한 수준을 보여주는 데 성공한 듯하다. 이제 전 세계에서 프로슈토란 단어는 이탈리아의 프로슈토를 가리킨다. 무엇보다 이 이탈리아 단어가 수많은 다른 언어권으로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다른 나라에서 만든 프로슈토는 다른 식으로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예를 들어 스페인에서 만든 프로슈토는 카스티야 단어를 사용해 하몽이라고 부른다.
프로슈토는, 그 기원을 찾자면 돼지가 존재하기 시작한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만큼 오래된 음식이다. 물론 고대와 중세의 돼지는 지금의 돼지보다 크기가 휠씬 작았고(크기가 크고 분홍색을 종자는 18세기 영국에서 영국 품종과 중국 품종의 교배를 통해 만들어진다) 그 고기를 다루기도 결코 쉽지 않았다. 잡아서 먹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보관을 통해 숙성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소금이었고, 종종 훈제로 만들기도 했다. 그리스와 로마 이전 시대의 민족들도 프로슈토에 익숙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5세기경의 포 강 유역 에트루리아 문명을 연구하던 고고학자들은 땅속에서 뒷다리가 없는 돼지의 뼈를 상당히 많이 발굴해냈다.' 이 발굴 범위가 지금의 에밀리아주를 포함하고 있는 만큼 경계는 비교적 분명해 보인다. 결과적으로 파르마와 모데나의 프로슈토는 이미 에트루리아 시대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볼 수있다.

-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사이에는 여러 지역에 산재해 있던 흑돼지들이 천천히 영국의 요크셔로 대체되기 시작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요크셔는 본토의 돼지들에 비해 크기가 휠씬 크고(19세기 초에 프로슈토는 4~5킬로그램이었지만 지금은 10~12킬로그램에 달한다) 지방 함유량도 휠씬 적다. 따라서 지방이 공포와 멀시의 대상이었던 당시의 사람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종자였다. 물론 지방이 무조건적으로 건강에 해롭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맛과 부드러운 질감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지방이기도 하다. 게다가 프로슈토의 지방은 올리브기름에 들어 있는 올레산이 45퍼센트를 차지하고 동맥경화증을 방지하는 리놀레산도 15퍼센트나 들어 있다. 한 가지 더 고려해야 할 사항은, 숙성에 의한 아미노산의 변화가 프로슈토를 마치 이미 소화된 것처럼 부드럽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프로슈토는 신선한 고기의 영양분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휠씬 쉽게 소화되는 음식이라 할 수 있다. 사실 프로슈토는 "의사들은 맛있는 모든 것을 금지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조반니 레보라의 말이 적용되지 않는 아주 드문 경우 중 하나다. 프로슈토 크루도는 권장할 만한 음식일 뿐만 아니라 의사들이 반드시 섭취해야 할 음식으로 여기는 것 중 하나다. 운동선수들, 특히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들이 경기 직전에 먹는 것이 프로슈토다. 오히려, 무조건 반대만 하던 사람들도 프로슈토에 관해서만큼은
1300년대의 의사 마이노 데 마이네리 Maino de Maineri가 했던 말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마음에 드는 음식이 건강에 좋다."

- 파네토네와 판도로는, 한마디로 효모에 중독된 디저트다. 효모를 들이붓고 달갈과 버터로 부풀렸기 때문이다. 이 디저트는 두말할 필요 없이 이탈리아 전역에서 크리스마스에 만들어 먹던 여러 종류의 빵에서 유래한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파네토네와 판도로는 산업화된 생산 공정의 결과이며, 무엇보다 우리 시대의 천재적인 발명가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작품이다. 베로나 출신의 도메니코 멜레가티가 1894년 판도로의 특허를 얻어냈고, 이어서 밀라노 출신의 안젤로 모타가 1919년에 자신의 첫 번째 화덕을 개장한 뒤 파네토네를 구워냈다. 파네토네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던 터라 전문적으로 만들어내는 기술자들도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모타는 빵을두 배로 부풀렸다. 17세기의 그림에서 엿볼 수 있듯이 원래는 피자 모양이었던 파네토네를 그는 요리사 모자와 닮은꼴로 만들었다(요리사의 모자는 글쓴이의 비교가 아니라, 종전의 파네토네에 비해 최소한 두 배는 높아진 새 디저트를 설명하면서 사용되었던 표현이다. 

- 모짜렐리는 물소젓으로 만든 독특한 치즈로 나폴리 일대에서, 특히 카르디토와 아베르사에서 만들어지고 카푸아 근교에서는 마초니, 살레르노 근교에서는 바티팔리아에서 만들어지는데 이곳에서는 아주 다양한 종류의 모짜렐라를 생산해내고 있다. 소젓으로 만들기도 하지만
줄 모양의 반죽을 만드는 방식은 똑같다- 그럴 경우 물소젓으로 만든 모짜렐라의 향과 맛은 느낄 수 없다. 모짜렐라는 순백색의 치즈로 둥글고 물컹거리면서도 나름대로 단단하고 표면은 살짝 젖어 있다. 보통은 무게가 500그램을 넘지 않는다. 부드럽고 섬세하고 유지방을 많이 함유하며 칼로 자르면 상당량의 우유를 쏟아낸다."

- 오늘날 모짜렐라라는 말은 물소젓으로 만든 모짜렐라 디 부팔라뿐만 아니라 보통 소젓으로 만든 모짜렐라나 미국식 모짜렐라 치즈나 피자 치즈, 다시 말해 피자를 만들 때 집어넣는 피자 전용 치즈까지 모두를 아우른다. "모짜렐라 소모량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인들의 피자 소모량이 증가함에 따라 엄청나게 늘어났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모짜렐라 디 부팔라의 생산 지역은 캄파니아와 라치오로 뚜렷히 제한되어 있다. 원산지 표기 규정에 의해 보호되고 있는 이 지역 외에는 풀리아의 포자 근교에서 극소량을 만들어낼 뿐이다(전체 생 산량의 1퍼센트도 체 되지 않는다). 반면 '우유 꽃'은어디서든 만들 수 있다.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제품들은 풀리아, 칼라브리아, 몰리제에서 생산된다. 이는 모짜렐라 디 부팔라보다 '우유 꽃'이 휠씬 더 많이, 거의 4배에 달하는 양이 생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줄의 치즈를 엮어 만든 소렌토의 '꽈배기'는 소젓으로 만든 것들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높이 평가받는 모짜렐라다. 약간 변형된 형태의 모짜렐라로는 부라타를 들 수 있다. 풀리아의 무르제를 원산지로 둔 이 부라타는 1900년대 초에 안드리아의 비안키니 농장에서 모짜렐라 생산 중 남은 원료를 활용하기 위해 생크림을 섞어 만들기 시작한 것이 시초이다. 부라타는줄 반죽 치즈로 만든 좀더 단단한 외피 안에 내용물을 집어넣어 만든다. 이 기발한 아이디어는 크게 성공을 거두어, 비교적 최근에 개발되었음에도 이탈리아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치즈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 이탈리아에서 모짜렐라가 커다란 성공을 거둔 것에는 심리적인 요인도 있다. 저지방 음식이라는 통념 때문에 몸매에 신경을 쓰는 부인들이 즐겨 찾는 식재료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가톨릭교회가 무분별하게 치즈를 저지방 음식으로 선전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는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다. 치즈를 만드는 재료가 유지방인 만큼 저지방 치즈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저지방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유일한 치즈는 유청을 제거하고 만드는 리코타뿐이다. 기술적으로 말하자면 치즈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리코타다. 건강에 좋은 식재료들의 소모량이 증가하는 반면 "요구르트와 모짜렐라만 먹고 살면서도 우리 시대의 여성은 우율빛과 창백한 피부색을 싫어한다". 백색을 광적으로 선호하던 중조할머니 시대, 즉 힘줄이 드러날 정도로 투명한 피부를가장 섹시한 것으로 여기던 때와는 달리 우리 시대의 여성들은 담배 빛깔의 검게 그을린 피부를 휠씬 더 좋아한다. 하지만 햇빛에 피부를 노출하는 것이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 아닌가. 동물성 지방이 혈액질환이나 소화기관에 암을 유발한다고 떠들어대면서 햇빛 때문에 걸릴 수 있는 악성 피부질환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다니,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 17세기 초, 커피의 세계를 향한 길은 이미 열려 있었다.온 천하가 커피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의사들도 커피를 권하기 시작했다. 비록 값은 말할 수 없이 비싸지만 향료를 파는 가게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데다 교황까지 인정한 음료였다. 하지만 결국 커피를 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인가가 아닌 금지령이었다. 금지령보다 효과가 더 뛰어난 광고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커피가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 셈이다.
커피숍에서 사람들은 자유분방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따라서 누군가 권력층을 상대로 음모를 꾸민다거나 하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1633년 엄격하기로 소문난 술탄 무라트 4세는 커피숍이 그를 위협하는 세력들의 회합 장소가 될 수도 있다는 판단하에 모든 커피숍의 폐업을 명령하고(그는 담배도 금지했지만 이것도 큰 효과는 거두지 못했다) 본을 보여주겠다며 몇몇 커피 애호가(그리고 흡연가)들을 사형해 버렸다. 이스탄불을 화재의 위험으로부터 구해야 한다는 것이 공식적인 성명 내용이었지만 사실 술탄이 언급한 화재란 결국 정치적인 화재를 뜻했다. 

- 커피에 우유를 담을 생각을 최초로 한 이는 누구일까? 먼저 태어난 것은 카푸치네르일까, 아니면 카푸치노일까?
게다가 곁들여 먹는 크루아상, 혹은 코르네토는 어떻게 해서 갑자기 생겨난 걸까? 영국인들은 커피에 우유를 넣어 마실 줄 몰랐고 터키인들은 커피에 우유를 섞어 마시면 나병이 생긴다고 믿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뿐이다(카페오레가 자신들의 발명품이라고 자처하는 프랑스인들은 뒤로 미뤄두자). 어쨌든 이 오랜 유대관계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빈의 저명한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1902년 이탈리아 여행 중 마신 베네치아의 우유 섞인 커피를 가리켜 "고급스러운" 맛이라고 말했으며, 시칠리아 주 알카모시의 커피를 "최고"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많은 이탈리아인들이 아침식사용으로 마시는 카푸치노의 우유거품은 바에서 사용하는 에스프레소용 기계로 만든다. 기계가 우유를 데우면서 동시에 거품을 만들어 낸다. 이 기계가 발명되기 전에 이탈리아식 카푸치노는 존재하지 않았고, 주로 카페 라테를 마셨다. 카푸치노리는 단어는 에스프레소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하는 시기에 등장했다. 작가이자 언어학자인 알프레도 판치니시는 1905년 일반적인 사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현대 이탈리아 용어 사전 에서 카푸치노를 "검은색 커피를 약간의 우유와 섞은 음료"로 정의했다. 보다시피 거품에 대해서는 이때까지도 아무런 언급이 없다.
한편 빈의 카푸치네르는 에스프레소 기게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음료다. 커피에 약간의 생크림을 없어 마시며, 따라서 먼저 발명된 것은 카푸치네르일 가능성이 높다. 어떻게 해서 알프스 산맥을 넘어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쩌면 롬바르도-베네토왕국 시대에 오스트리아 군인들과 함께 건너왔을 수도 있고, 아니면 몇몇 여행자들에 의해 전해졌을 가능성도 있다. 두 번째 주장을 펼친 인물은 레오폴트 에바워로, 그는 이 분야의 최고 권위자이자 일종의 커피 소물리에를 양성하는 빈의 커피전문가학교 원장이다.
카푸치노라는 용어의 기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어느 정도 일치하는 편이다. 고동색 커피와 흰색 생크림은 다름 아닌 카푸치니 수도회 수도사들이 입는 튜닉과 흰색 허리끈을 연상시킨다. 언어학자 판치니 역시 같은 의견이다. 그에 따르면 이 용어는 "아마도 카푸치니 수도회의 튜닉과 색이 비슷하다는 사실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한편 나폴리 연극계의 왕 에두아르도 데 필리포도 1945년 이 유령들이라는 작품에서 카페가 -수도사의 망토 색"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따라서 이 수도회의 이름이 아마 처음엔 생크림이 들어가는 오스트리아의 카푸치네르를 가리키다가, 이어서 이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우유 거품이 들어가는 이탈리아식 카푸치노도 가리키게 되었을 것이다.

- 이탈리아에서는 1940년대 말과 1950년대 초사이에 경제성장의 기본적인 틀이 마련되었다. 사람들은 아침 일찍부터 직장을 향해달려갔고 아침에 바에서 커피를 마시는 습관이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거의 반세기 전에 영업용 에스프레소 기계를 최초로 만들어냈던 파보니가 이즈음 굉장한 아이디어를 들고 다시 등장한다. 당시 가장 중요한 디자이너들 중에 한 명이었던 지오 폰티에게 혁신적인 디자인을 의뢰했던 것이다. 혁명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지오 폰티는 기계를 눕히기로 결심했다. 수직이었던 것을 수평으로 바꾼 것이다. "에스프레소 기계는 탄생한 지 거의 50년 만에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났다." 지오 폰티는 자신이 창간한 잡지 도무스에 기사를 심고 파보니의 새로운 에스프레소 기계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오래된 기계에서 불쑥 튀어나오고 복잡하게 꼬여 있는 부분들을 제거하거나 박스에 담아 기계를 축소시켰다. 새 기계는 간단히 크게 세 부분, 본체와 기계 박스와 주둥이로 나뉜다. 이 요소들은 몇몇 관악기들이 외관상의 발전을 통해 도달했던 완벽한 단순합을 지니고 있다."
다른 디자이너들, 브루노 무나리와 엔초 마리l는 파에마를 위헤 여러 색상의 알루미늄 판으로 교체가 가능한 기계를 만들어 냄으로써 또 다른 혁신을 가져왔다(모델 콩코르소와 디아만테). 그렇게 해서 바의 주인들은 선호하는 색상과 원하는 크기의 커피 기계를 설치할 수 있게 되었다. 생산자들 간의 경쟁은 기술 경쟁에 그치지 않고 디자인의 싸움으로 확대되었다.

- 커다란 혁신을 가져온 기계들 가운데 마지막이라고 볼 수 있는 기계는 1961년 파에마에 의해 제작된다. 마지막이라고 보는 이유는,오늘날 바에서 사용하는 에스프레소 기계들이 이와 똑같은 원리로 작동되기 때문이다. 기계의 모델명 E61은 그해에 일식이 일어났기 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E는 일식을, 61은 연도를 가리킨다. E61은 지속적인 작동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최초의 기계, 즉 물탱크를 사용하지 않고 호스를 통해 물을 직접 공급받아 작동하는 기계다. 그뿐 아니라 뜸들이기 기능이 장착된 최초의 기계로, 이전에는 고압의 뜨거운 물이 커피 가루를 대략 25초에 걸쳐 통과했지만 새 기계에는 저압으로 소량의 물이 먼저 커피 가루를 적시하는 과정이 포함되었다. 그런 식
으로 원두가 가진 있는 맛과 향을 최대한 추출하는 것이다.
이 기술 덕분에 파에마는 커피 기계 생산 분야에서 세계 1위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E61은 1966년까지 수백만 대가 생산되었고 뒤이어 새 모델이 등장했다.

- 오늘날 모데나와 레조 에밀리아 지방에서 생산되는 전통 발사믹 식초는 최소 12년의 숙성 기간을 거친다. 하지만 생산자들은 보통 100년이 휠씬 넘는 발사믹 식초들도 보관하고 있다. 아주 조그만 병에 담은 이 발사믹 식초는 상당한 고가품으로, 유서 깊은 모데나 가문의 후손들이 결혼식을 올릴 때 혼수로 사용되곤 한다.
발사믹 식초는 와인만큼이나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발사믹이 과연 와인에서 파생된 식품인지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상한 와인을 어떤 식으로든 활용해보려고 노력했다는 것만큼은 사실이다. 사실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양조 기술이 오늘날처럼 발달해 있지 않았다. 와인이 상해서 식초로 변하는 건 늘 일어나는 일이었고, 따라서 활용할 수 있는 상한 와인의 양도 엄청났다. 상한 와인은 양념으로 쓰이기도 하고 음식의 보전을 위해서도 사용되었다.
다양한 종류의 카르피오네, 스카페체, 스카베초 등은 모두 똑같은 원리를 적용해서 만든 요리들이다. 예를 들어 생선을 보관할 맨 구운 생선을 식초와 또 다른 재료들, 흔히 양파 혹은 빵가루, 때로는 마늘과 함께 담아 숙성시켰다. 이런 식으로 음식을 만드는 문화는 이탈리아 전역에 퍼져 있고 그만큼 아주 일반적이어서 유대인들의 전통 음식뿐만 아니라 기독교 전통 음식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실제로 양쪽 모두 원조임을 주장하는 형편이다). 어쨌든 지중해 연안에서는 이런 요리들을 얼마든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식
초에 음식을 절이는 방식은 당연히 와인을 마시는 지역과 연결된다.
반면에 맥주를 주로 마시는 지역에서는 소금물에 절인 독일식 혹은 러시아식 오이나 양배추로 대치된다.

-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발사믹 식초가 언제 만들어지기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포도즙을 끓여 만들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틀림없이 뒤늦게 일어난 일일 것이다. 최초의 문헌은 위에서 언급한 아가초티의 발사믹 제조법이다. 오늘날 발사믹식초를 만드는 과정은 상당히 길고 복잡하다. 먼저 포도즙을 끓이고 통에 담아 묵힌다. 주기적으로 커다란 통에서 크기가 좀 더 작은 통으로 내용물을 옮겨 담는데, 이 공정은 처음 40리터가 고작 몇 리터 정도로 줄어들 때까지 계속 반복된다. 통은 여러 종류의 나무로 만든다.
초기에는 연하고 기공이 많은 재질의 나무(예들 들어 밤나무)를, 시간이 흐를수록 더 단단한 나무(참나무 혹은 나무)를 사용한다. 나무는 제조인이 선호하는 것을 고르는 게 보통이다. 결과적으로 맛이 완전히 똑같은 발사믹 식초란 있을 수 없다. "아가초티는 참나무와 밤나무를 선호했다. 하지만 가장 좋은 것은 역시 뽕나무다."

- 이탈리아 전통 발사믹 식초는 기막힌 향기를 지니고 시럽처럼 걸쭉하며 수십 년씩 묵힌 이 식초는 당연히 상당한 고가품에 속한다. 매년 가장 조그만 크기의 오크통에서 추출해내는 식초의 양은 고작해야 몇 리터밖에 되지 않는다. 끝에서 두번째로 작은 동에서 추출한 식초를 가장 작은 통에 채워 넣고, 이런 식으로 가장 큰 통으로 거슬러가면 최초에는 끓인 포도액을 집어넣는다. 최소 세 종류 이상의 다양한 통으로 구성된 이 숙성 시스템을 이른바 바테리아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통은 70퍼센트에서 80퍼센트 정도의 비율로 축소된다. 식초는 한여름의 지붕 밑에서 끓는 열기를 받아 증발하고 농축되지만 훌륭한 식초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한겨율의 추위 또한 반드시 필요하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발사믹 식초가 보급되던 곳은 모데나 근교뿐이었다. 모두들 아끼면서 지붕 밑에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상업화하기로 결정한 것은 이 상품이 가지고 있는 어마어마한 위력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모데나의 발사믹 식초는 2000년에 DOP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고 오늘날 '모데나와 레조 에밀리아 전통발사믹식초협회'에 소속된 생산자들은 100밀리리터짜리 병을 12년 묵은 것과 25년 묵은 것 두 종류로 판매한다. 

- 일반 발사믹 식초는 샐러드용으로 쓰이지만, 전통 발사믹은 거의 신성하기까지 한 재료로 딸기나 아이스크림 위에 보석처럼 올려져 장식되는 것이 보통이다. 맛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는 전통 발사믹 식초는 요리의 창조적인 면에 치중하는 전문 요리사들에게 높이 평가받는 최고의 식재료다. 결국 이 식초의 역할은 1962년, 모데나 출신의 작가 조반니 카비키올리가 생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모데나 식탁의 세속적인 식욕을 상징하는 족발, 람브루스코 와인, 토르텔리니 등의 맛을 세련되게 다듬고, 반드시 고귀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순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발사믹 식초일 것이다."

- 초기 기독교 사회에서, 와인을 마시던 세계와 사과주를 마시던 세계 간에는 치열한 전쟁이 계속되었다. 중동에 기원을 둔 로마교회는 포도주와 깊이 연관되어 있었고 성경에도 포도에 관한 언급이 적지 않게 등장한다. 예를 들어 유대인들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때에는 어마어마하게 큰 포도송이를 두 사람이 장대에 매달아 깊어지고가는 장면이 나온다. 신들도 와인을 마다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그리스 신 디오니소스에게 와인은 신성한 음료였다. 로마의 신 바쿠스도 머리에 포도 가지를 두르고 손에는 포도주로 가득한 잔을 들고 돌아다녔다.
하지만 알프스 산맥 북쪽의 상황은 전혀 달랐다.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에 북쪽 땅에는 드루이드교도"가 살고 있었고 이들은 종교의식(드루이드교는 고대 로마 시대에 갈리아 및 브리튼제도에서 나타났던 켈트족의 종교)에 사과주를 사용했다. 이들이 믿었던 천국의 이름은 아발론으로 이는 아발의 섬, 즉 사과의 섬이었다.
켈트족의 성직자들과 로마의 신부들 사이에서는 기독교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국경 없는 전쟁이 계속되었다. 켈트족은 라틴족과 함께 기도하는 것도, 식사하는 것도 마다했고 라틴족들이 사용하는 모든 도구들은 병균으로 가득하다고 주장했다. 한편 로마교회는 켈트족의 예배 방식을 이단적이라고 몰아세우면서 서유럽에 기독교를 전파하던 북방의 선교사들을 처형하겠다고 위협했다. 5세기 말에는 상황이 악화되어 기독교 세계는 두 개로 분리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승리를 거둔 것은 로마다.

- 바롤로의 맛과 품질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바롤로가 고품격 와인으로 승격될수 있었던 것은 사보이아왕가의 사람들이 선호하던 와인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토리노의 군주가문이 이탈리아의 왕좌에 오르면서 바롤로는 로마에까지 전해져, 통일이 되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와인 애호가들을 만나게 된다. 와인의 왕은 왕이 개최하는 만찬에 빠지는 법이 없었으며 외국에서 활동하는 이탈리아 대사들의 공식 만찬에도 항상 등장했다. 이러한 경로를 통해 와인의 왕은 왕들의 와인으로 승격되었다. 1946년 이탈리아가 왕국의 이름을 벗어던지고 공화국이 되었을 때에도 바롤로는 한때 왕궁이었지만 지금은 대통령 궁으로 쓰이고 있는 퀴리날레 궁전 창고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탈리아의 2대 대통령이 루이지 에이나우디였다는 점도 한묶했던 것으로 보인다. 에이나우디는 토리노 근교의 카루 출신의 경제학자이자 대학교수였지만 동시에 바롤로 생산자이기도 했다. 1897년, 고작해야 23세의 나이로 돌리아니에 있는 농장 하나를 구입해 포도 재배에 뛰어들었던 그의 뒤를 이은 사람은 그의 아들, 이탈리아의 저명한 출판사 '에이나우디'의 창업주인 줄리오 에이나우디Giulio Einaudi다. 에이나우디 포도 재배지는 초기에 비해 상당히 넓어졌다. 에이나우디 가문은 오늘날까지도 이 땅에서 활동하며 랑게에서 최고의 바롤로를 만들어내고 있다.
랑게는 리구리아 해상 도시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내륙의 시골처럼 여겨지던 곳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이 지방을 대표하는 요리 바냐카우다로, 산맥의 발치에 위치한 구릉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식재료, 즉 정어리와 마늘과 올리브기름 등으로 만드는 음식이다. 하지만 이제 랑게는 이러한 소외된 지방으로서의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던졌다. 조반니 네그리가 말했듯이 오늘날 랑게는 "포도주 산업과 요리뿐만 아니라 의류 산업과 누텔라 생산 분야에서 기업과 금융 차원에서의 증기기관 역할을 하는 경제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땅에 대한 주민들의 사랑은 통계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생산되는 부가 거의 고스란히 해당 지역에 재투자되는, 이탈리아에서 몇 안 되는 고장들 중 하나가 바로 별천지 랑게다."

- 오늘날 매년 1,200만 병 정도 생산되는 바롤로는 70퍼센트 이상이 외국으로 수출된다. 북미(미국과 캐나다)에서 가장 많은 양을 소비하며, 중부와 북부 유럽(독일과 스칸디나비아)이 그 뒤를 있는다. 하지만 일본과 중국 시장도 제 큰 편이다. 원산지 및 품질관리법에 의해 보호되는 지역에는 11개의 시가 포함되어 있는데, 당연히 그 중심에는 바롤로가 자리한다. 와인에 관해서만큼은, 1931년에 출판된 투어링클럽 이탈리아노의 가이드북에 실린 내용이 지금의 바롤로에 관한 가장 적절한 설명이 되리라고 본다. "바롤로는 생동하는 와인으로 조심스럽게 취급해야 할 필요가 있다. 첫해에 상당히 거친 상태로 남아 있다가 3~4년이 지나면 부드럽고 감미로운 맛과 더 풍부한 향기를 발휘
하기 시작한다. 제비꽃 향기를 연상시키는 바롤로의 향은 약간의 가문비나무 향을 여운으로 남긴다. 루비에 가까운 붉은색이지만 해를 거듭하여 6~7년쯤 지나면 고동색에 가까운 적색으로 변한다. 알코올도수는 13도에서 15도에 이른다."

- "후작 부인 아말리아 나니 모체니고에게 의사들은 아주 엄격한 식이요법을 명령했다. 그녀는 익힌 고기를 먹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위해 안심을 아주 얇게 썰어보기로 했다. 고기 그 자체만으로는 맛이 덜할 수밖에 없었지만 아주 간단히 만들 수 있는 소스가 있었다. 고기 요리나 생선 요리, 어디에든 잘 어울리는 소스였다. 나는 소스를 안심 위에 뿌리고 그해 베네치아에서 열린 전시회 덕분에 사람들의 입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던 화가를 기리기 위해, 아울러 이 화가가 사용하는 몇몇 붉은색이 나의 요리 색깔과 유사했기 때문에, 그 이름을 카르파초라고 부르기로 했다. 발명이란 항상 예외적인 상황에서 이루어지지 않는가." 베네치아 해리스 바의 설립자이자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이탈리아 요리 카르파초의 발명자 주세페 치프리아니
의 말을 들어보면, 모든 것이 아주 간단해 보인다. 기원이 중세에 있거나 고대 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하는 많은 음식들에 비하면 카르파초는 요리의 세계에서 갓 태어난 신생아에 불과하다.

- 메이드 인 알바 헤이즐넛과 카카오 크림의 성공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바로 포장이다. 누텔라는 유리병에 넣어 팔았고, 빈 병들은 모아서 물컵으로도 사용할 수 있었다. 기하학무늬가 그려진 것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것에는 만화 주인공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이런 컵들은 여전히 수집가들이 사고파는 물품으로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결정적으로 컵은 부모들의 심적 부담을 덜어주는 요인이었다. 아이들에게 초콜릿 간식을 사준다고 돈은 썼지만 결국에는 컵이 하나 남지 않는가. 탐식과 소비를 정당화해주는 것이 바로 컵이었다. 이탈리아인들이 멀리하던 초콜릿을 결국 그들의 가정에 들여보낸, 일종의 트로이의 목마였던 셈이다. 캐나다의 사회학자이자 커뮤니케이션학자 마셜 매클루언의 이론에 따르면, 누텔라는 일종의 메시지였고 컵은 매개체였다

- 오늘날 이탈리아 전역에서 식전주로 통하는 스프리츠는 와인을 희석시켜 마시는 오스트리아 문화에서 비롯되었다. 독일어로 '스리첸' 뿜어내다라는 뜻이다. 언제였는지 정확히는 알수 없지만 누군가, 원래 반드시 무색이어야만 하는 오스트리아의 스프리츠를 붉은색으로 만들 생각을 하게 된다. 원래는 화이트 와인에 탄산수를 섞어 만든 것이 스프리츠였다. 과거 트리에스테 사람들이 즐겨 마시던 것도 바로스프리츠였고, 나이가 지긋한 분들은 아직도 이 맑은 스프리츠를 고집한다.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를 붉은색으로 자신들의 식전주가 오염되는 것에 거부감을느끼는 것이다.

- 무엇보다도 티라미수는 누구든 쉽게 만들 수 있는 디저트다. 달걀 노른자를 설탕과 함께 빠른 속도로 휘젓다가 어느 정도 부풀어 울랐을 때 마스카르포네 치즈를 섞어 크림을 만들고 커피에 적신 사보이아르디 비스킷 위에 이 마스카르포네 크림을 없은 뒤 그 위에 카카오가루를 듬백 뿌린다. 이것이 전부다. 남은 건 즐겁게 먹는 일뿐이다.
발효에 실패할까 걱정할 필요도 없고, 오븐 온도를 조절하느라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도 없고, 빵이 타거나 부풀어 오르지 않거나 설익는 것은 아닌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술이 들어가지 않아서 모두가 즐길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이탈리아 냄새가 물씬 나는 디저트. 강렬한 이탈리아 에스프레소 향기가 코를 찌르고 사보이아르디 비스킷은 사보이아 왕가와 베르디의 시대를 떠오르게 한다.
뭐랄까,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여건은 모두 갖춘 셈이었고 아니나 다를까 티라미수는 빠르게 성공 가도를 달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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