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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5.12.02 미니멀리즘적 쾌락주의
  3. 2025.12.02 세계사를 바꾼 물고기
  4. 2025.12.02 20251202

상상하는 뇌

심리 2025. 12. 2. 07:04

- 상상을 통해 지금 여기'에서 벗어나는 능력은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와 같다. 상상은 우리를 다른 존재들과 떼어놓고 현실에서 고립시킨다. 동시에 상상한 경험을 공유하는 능력이 우리를 하나로 묶기도한다. 이것은 인간이 살아가며 마주하는 가장 큰 역설 중 하나다. 이 역설은 상상력의 작용을 둘러싼 두 가지 상반된 욕구 사이에서 끊임없는 긴장을 만들어낸다. 하나는 상상력이 앗아간 경험의 생생한 감각을 되찾으려는 욕구이고. 다른 하나는 상상이 제공하는 감각에서 벗어나려는 욕구다. 우리는 과연 스토아 철학자이자 로마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조언처럼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완성하는 일만을 추구"해야 할까? 아니면 과거와 미래, 그리고 수많은 가능성 속에서 살아가려는 인간다운 바람을 따라야 할까?
상상력은 우리의 타고난 권리이자 인간 고유의 인지적 통제와 상징화 능력이 결합한 결과이며 인간만이 유일무이하게 가진 창의성의 원천이다. 상상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때로는 지나친 상상의 나래(망상, 공상 등)에서 벗어나고 싶거나 벗어나야 할 때도 있다. 그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마음챙김. 명상, 여행. 춤. 스포츠, 공연., 환각제. 성관계 등은 모두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 를 먹은 원죄로 인류가 타락하기 전에 겪은 경험의 생생한 감각을 잠시나마 되찾을 수 있는 방법들이다.

- 심상은 감정을 강력하게 환기하는 힘이 있다. 존 키츠가 패니 브론을 떠올리는 상상은 마치 창처럼' 그를 꿰뚫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장소의 심상은 우리를 끌어당기고, 위로하고, 자극하고, 괴롭힌다. 시각화 능력을 잃은 내 환자 짐 캠벨은 가족의 모습을 떠올릴 수 없게 되어 슬퍼했다. 
평생 아판타시아를 안고 살아가는 많은 이에게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떠올릴 수 없다는 사실은 깊은 슬픔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심상이 정서에 미치는 영향은 양날의 검이다. 애정의 유대를 강화하는 동시에 중독의 갈망을 부추길 수 있다. 아판타시아를 겪는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떠올릴 수 없음에 슬퍼하지만 결별이나 사별을 좀 더 수월하게 극복하는 경향이 있다. 심상이 떠들썩하게 영향을 미치지 않으니 현재를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

- 대부분의 사람에게 심상은 장단기 기억, 미래에 관한 생각, 창의력, 문제 해결, 정서 측면에서 중요하다. 궁극적으로 심상의 장점은 행동으로 나타나야 하며, 그렇지 않았다면 결코 진화하지 못했을 것이다. 심상은 우리가 미래를 더 정확히 예측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돕는다. 즉 우리는 심상을 통해 미래 사건들을 어느 정도 현실과 가까운 형태로 시뮬레이션할수 있다.

- 비티 연구팀은 163명의 참가자를 대상으로, 확산적 사고를 측정하는 '대체 용도 과제'예예 들어 벽돌의 새로운 용도를 떠올리는 문제)를 실시하고 이를 참가자들이 실제 생활에서 보이는 창의성과 비교했다.
이 실험 규모는 창의성 연구에서는 비교적 큰 편에 속한다. 참가자들이 과제를 수행하는 동안 fMRI로 뇌 활동을 촬영했다. 분석 결과,디폴트 모드 네트워크 .집행 네트워크.현저성 네트워크, 이 세가지 뇌 네트워크 간의 연결이 활발할수록 과제 점수가 높았다.
이 연구의 핵심 발견은, 이른바 창의적 커넥톰(창의적 뇌 회로도)이라 불리는 뇌 연결망을 통해 참가자들의 창의력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예측이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창의성이 뇌 속에서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 다른 연구팀은 로저 비티의 이 결과를 이렇게 해석했다. "창의적인 사람들은 인지와 감정, 의도적 사고와 즉흥적 사고처럼 서로 다른 방식의 사고를 유연하게 오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필립 풀먼이나 데이비드 그레이 같은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창작 과정을 설명할 때 했던 이야기와도 맞아떨어진다.

- 이처럼 저율 효과는 행위자와 관찰자 사이에 리출라티가 말한 '공유된 행동 공간'을 형성한다. 내가 당신의 동작을 암묵적으로 모방한다면 이는 당신의 동작이 나의 뇌에 머물고 나의 동작 역시 '당신의 뇌에 자리 잡는다는 뜻이다. 거울 효과는 단지 모방에 그치지 않는다. 뇌의 여러 영역에서 발생하는 이 메커니즘은 정서와 공감 형성에도 깊이 관여한다. 이러한 공감과 상호 이해의 능력은 함께 무언가를 만들고 더 복잡한 방식으로 소통하는 토대가 된다.
인간 고유의 정교한 도구 사용과 언어 사용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추정할 수 있는 데는 몇 가지 흥미로운 이유가 있다.
첫째는 신경학적 이유다. 이는 다소 단순해 보이지만, 매우 설득력 있는 설명이다. 인구의 약 90퍼센트는 오른손잡인데, 뇌의 좌반구가 대개 오른손을 통제한다. 그리고 이 좌반구는 응용 동작이나 숙련된 행동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다. 흥미롭게도 언어를 지배하는 뇌 영역 역시 좌반구다. 즉, 도구 사용에 필요한 정교한 손의 움직임을 제어하는 뇌 부위와 언어를 담당하는 영역이 상당 부분 겹쳐 있다. 이런 연결 구조를 깊이 들여다보면 발화'란 일종의 숙련 동작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언어 표현과 도구 사용은 모두 손이나 성도의 소근육을 정밀하게 제어하고 시간 순서에 따라 일련의 움직임을 조직해
야 하는 공통점이 있다. 실제로 오늘날에도 말을 할 때 몸짓이 자연스럽게 동반되곤 한다는 점은 이 유사성을 방증한다.
둘째는 기술을 가르치고 배울 때 발생하는 '공동 주의 집중' 현상이다. 이 현상은 의사소통, 학습, 사회적 상호작용의 기초가 되는 인지능력이며, 특히 언어 발달과 문화 전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언어가 처음 등장할 때는 이런 마음 공유 능력이 먼저 갖추어져야 했지만 언어가 발달하면서 언어는 오히려 마음 공유 능력을 비약적으로 확장하는 도구가 됐다. 공동 주의 집중은 마음 공유 능력의 핵심 요소이자 거의 동의어로 볼 수 있다.
셋째.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언어를 활용하는 능력은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학습자에게 매우 큰 도움을 준다. 이처럼 도구 사용과 언어는 뇌 구조, 학습 방식. 사회적 상호작용이라는 여러 차원에서 긴밀하게 얽혀 있으며 인간 고유의 능력을 설명하는 핵심 연결 고리다.

- 환각 형태(사별 후에 느끼는 존재감 환각. 절단된 팔다리가 여전히 있는 것처럼 느끼는 환지 감각. 감각 차단 탱크에서 경험하는 환각. 실명이나 청각 상실로 인한 환각. 시각피질이나 뇌간 영역의 손상으로 생기는 환각)는 공통적으로 본질적인 결핍'에서 비롯된다. 평소에 들어오던 감각 입력이 갑자기 사라지면, 마음과 뇌는 그 결핍을 채우기 위해 유사한 자극을 찾게 되고 그 결과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으로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런 뇌의 활동이 너무 과도해지면 환각으로 나타난다. 다만, 레르미트 증후군의 경우에는 감각 입력 자체는 그대로 유지되지만, 뇌의 내부 억제 기능(브레이크)이 갑자기 풀려버리면서, 예를 들어 목을 앞으로 숙일 때 전기 충격처럼 치는 강한 감각과 같은 비정상적인 감각이나 환각이 생겨난다.
이처럼 환각은 평소에는 감각 자극과 뇌의 흥분. 억제 시스템이 섬세한 균형을 이루어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현실과 잘 들어맞도록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환각은 우리의 뇌가 눈에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세상을 예측하고 구성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필요할 때는 존재하지 않는 것조차 만들어낼수 있는 창의적인 기관임을 잘보여준다.

- 뇌전증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그리스어 에필람바네인으로 '잡히다'라는 뜻이다. 뇌전증 발작은 갑작스럽고 비자발적으로 의식과 행동에 침입하는 발작적 현상이다. 뇌전증 발작의 가장 큰 특징은 뇌 속 전기 활동이 일제히 동기화된다는 점이다. 평소 건강하게 깨어 있을 때 뇌의 리듬은 복잡하게 얽혀 서로 뒤섞여 있지만, 발작이 시작되면 이러한 섬세한 상호작용이 사라지고 하나의 지배적인 주파수가 뇌 전체를 뒤덮는다. 만약 이 동기화된 활동이 뇌 전체에서 일어나면, 환자는 의식을 잃고 멍하니 한곳을 응시하거나 온몸을 떨게 된다.
하지만 동기화가 뇌의 일부 영역에서만 발생하면, 마치 '이중의식'과 같은 상태가 일어난다. 이렇게 되면 발작이 뇌 안에서 퍼져나가는 과정을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경험하게 된다. 발작은 피질의 모든 부위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그 증상은 매우 다양하며 통렬한 경험이 된다.

- 우리의 뇌는 현실 세계를 탐색하고 동시에 상상 세계를 그려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이러한 상상력은 현실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통찰을 제공한다. 인류는 수백만 년에 걸처 이러한 통찰을 타인과 공유하는 능력을 진화시켜 왔다. 그러나 상상과 현실을 구별하는 능력 또한 반드시 필요하다. 바로 이 구별을 담당하는 것이 고도로 발달한 인간 전두엽의 정점, 즉 전두극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때로는 이 영역이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 역시 놀라운 일이 아니다.
환각과 망상. 거짓 기억은 모두 뇌가 내부 현실 모델을 바탕으로 예측을 세우는 과정에서 생겨날 수 있는 부산물이다. 전두극은 이 경계를 지켜내는 핵심 역할을 맡지만, 이 영역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우리는 현실과 상상을 혼동하기 쉽다.
상상은 인류가 진화 과정에서 얻은 가장 강력한 도구이지만, 그 힘이 때로는 현실 감각을 위협할 수도 있다. 우리의 뇌는 늘 현실과 상상이라는 두 세계 사이를 오가며,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법을 배워야 한다.

- 우리는 기억을 스냅사진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기억은 우리 안에 살아 있는 존재이며, 오랜 시간에 걸처 일어나는 복잡한 생화학적 사건의 연쇄적인 결과물이다. 기억은 뇌의 여러 부위에서 서로 다른 여러 버전으로 생성된다. 각각의 기억은 확립과 성숙 과정을 거쳐 저장되고 나중에 기억을 떠올릴 때 되살아난다. 최신 기억은 사라지기 쉽다. 두부 외상, 발작, 새로운 단백질 합성을 차단하는 약물주입은 모두 최근의 기억을 지울 수 있다. 의식을 잃었을 때 충격을 받기 직전에 일어난 사건에 대한 기억이 날아가 공백이 생기는 경우도 종종 있다.

- 아판타시아를 가진 사람들은 과학계나 IT 업계에 종사할 가능성이 높은 반면. 하이퍼판타시아를 가진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창작 산업 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었다.
아판타시아 상태인 사람은 얼굴 인식에 어려움을 겪거나, 과거의 개인적 사건을 일반인보다 희미하게 기억하거나,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동반하는 경우가 있다. 또한, 무서운 묘사를 읽었을 때 땀을 흘리는 것처럼 심상에 따른 신체 반응이 겨의 없거나, 뇌 활동이 부족하거나 달라지는 경우도 보고됐다. 아판타시아는 가족 내력이 확인되므로, 다른 많은 특성과 마찬가지로 유전적요인의 영향을받을 가능성이 크다.
이밖에도 두 가지 측면이 점차 분명하게 드러났다. 아판타시아인 사람 대부분은 대체로 감각 심상이 미약하거나 아예 없다. 마음의 귀, 코. 혀, 손끝이 마음의 눈과 함께 작동하지 않는다. 더 놀라운 점은 아판타시아 상태인 사람 중 약 절반이 시각 심상이 무엇인지 안다고 말한다. 그들이 꾸는 꿈 속에는 여전히 시각 심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아판타시아에는 예상치 못한 이점이 따르기도 한다. 그들은 친구나 친척들보다 쉽게 앞으로 나아가고, 남들보다 실연이나 사별을 빨리 극복한다. 때때로 그런 점에 죄책감을 느끼면서 자신이 너무 냉정하지는 않은지 고민하기도 한다.
하이퍼판타시아를 겪는 사람들은 정반대 특징을 나타낸다. 개인적 사건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다른 감각에서도 생생한 심상을 떠올린다. 갈망이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처럼 심상이 촉진하는 심리적 어려움에 시달리기 쉽다. 일부는 자신이 상상했던 사건과 관련된 침입적이고 불안한 심상을 경험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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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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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피쿠로스는 화려한 식탁보다는 소금 한 줌과 빵 한 조각, 시끄러운 연회보다는 친구들과의 조용한 대화를 더 귀하게 여겼다. 그는 육체의 고통이 없고, 마음이 걱정으로 흔들리지 않는 상태야말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쾌락이라 보았다. 그가 지은 학교의 이름이 '정원의 철학'이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의 철학은 숲 속을 거니는 산책처럼 조용하고, 햇빛에 젖은 나뭇잎처럼 고요한 것이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쾌락도 바로 그것이다. 수많은 자극속에서 헤매다 지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덜 자극적이지만 더 지속되는 평온, 더 깊은 집중과 쉼, 그리고 내 욕망을 나 스스로 이해하고 다루는 능력이다. 쾌락은 방종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자기 내면과 욕망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비롯된 절제된 삶의 미학이다.

- 쾌락을 느끼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고통이 사라졌음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쾌락을 잘모르는 것이 아니라 고통에 너무 익숙해져서 쾌락을 감지할 수 없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이 장에서 우리가 처음 되짚어야 할 질문은 이렇다.
지금 나의 고통은, 정말 견뎌야만 하는 것인가?

- 우리는 고통을 느낄 때, 흔히 가장 먼저 떠올리는 건 '육체적인 아픔'이다. 배가 아프거나, 다리를 빼거나, 치통이 오거나. 몸의 고통은 즉각적으로 다가오고 비교적 명확하게 인식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피하거나 치료하려는 데 익숙하다. 하지만 마음의 고통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더 느리고, 더 모호하게 찾아오며, 때로는 자각조차 어럽다. 에피쿠로스는 이 점에 주목했다. 그는 몸의 고통보다 영혼의 고통이 더 오래 지속되고 삶을 더 깊이 흡든다고 보았다.
"몸의 고통은 일시적이다. 그러나 영혼의 고통은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영원할 수도 있다."

-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오늘날 심리치료의 원리와도 통하는 면이 많다. 인지행동치료(CBT)에서는 부정적 감정을일으키는 자동적인 생각을 관찰하고,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해석함으로써 감정을 조절할수 있다고 본다. 에피쿠로스는 이미 2천년전,이 원리를 자신의 방식으로 실천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고통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지금 내게 반드시 필요한가?"
몸이 아플 땐우리는 병원을 찾는다. 그러나 마음이 아플땐,우리는 종종 참는다.
"참지 말고, 사유하라."
이것이 에피쿠로스식의 치료법이다.

- 에피쿠로스를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종종 그가 매우 단순한 삶을 살았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는 화려한 옷도, 사치스러운 집도, 값비싼 식사도 없었다. '정원'이라 불리는 작고 조용한 학교에서 친구들과 함께 소박한 식사를 나누고, 생각을 정리하고, 사유를 나누는 삶을 살았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미니멀리즘과 닮아있다. 하지만 그 철학적 깊이는 휠씬 더 크고 정교하다.
우리는 종종 미니멀리즘'을 소유를 줄이는 삶으로만 이해하지만 에피쿠로스는 휠씬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왜 우리는 그렇게 많은 것을 갖고 싶어 하는가?", "그 욕망은 정말 내 것인가?" "그것은 내 평온을 도와주는가, 방해하는가?"
에피쿠로스가 강조한 덜어냄은 단순히 물건의 개수를 줄이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욕망을 비우고, 기준을 낮추고, 존재의 본질로 되돌아가는 일이었다. 그에게 미니멀한 삶은 '적게 가지는 삶 아니라 '적게 바라기 위해 훈련된 삶'
이었다.

- 그가 말하는 자유는 선택지를 늘리는 것이 니라 선택하지 않아도 되는 내면의 힘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번 선택을 강요당한다. 그때마다 고민하고, 비교하고, 결정하고, 후회하는 과정 자체가 우리를 소모시키고,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상태로 만든다. 그는 진정한 자유를 이렇게 정의했다.
*타인의 시선에 끌려가지 않는 자유
*물건이나 조건에 매이지 않는 자유
*욕망이 아닌 판단으로 결정할 수있는 자유

- '비우는 삶'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흔히 '무엇을 없앨것인가'에 집중한다. 그것도 중요하지만, 에피쿠로스가 우리에게 정말로 묻고자 했던 것은 무무을 남길 것인가'였다. 비움의 끝에는 반드시 '선택된 것'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삶은 텅빈 껍데기가 되고, 비워낸 자리에 또다른 욕망이 끼어들기 쉽다.
"무엇이 나를 평온하게 하는가?그 질문에 답할수 있는 사람만이, 비워낸 자리에 올바른 것을 남길수있다. "

- 우리는 얼마나 자주, 내 마음이 '지금 이대로 괜찮다'고 느끼는 순간을 경험할까? 불안하지 않고, 초조하지 않고, 조급하지 않고, 누군가를 부러워하지도 않으며 바라는 것도, 후회하는 것도 없이 가만히 머무를 수 있는 순간. 에피쿠로스는 그 상태를 아타락시아(Ataraxia)'라고 불렀다.
"가장 큰 쾌락은 고통이 없고, 마음이 동요하지 않는 상태이다.
에피쿠로스 철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단순히 기분 좋은 감정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지속 가능한 기쁨' 다시 말해 마음이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상태 그 고요한 바닥을 삶의 중심으로 삼으려 했다.

- 진정한 쾌락은 잔잔하고 지속되며, 마음을 휘어잡지 않고 부드럽게 감싼다.
우리는 더 자극적인 것이 아닌 더 깊고 지속되는 삶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길의 이름이 바로 아타락시아'다.

- 감정은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관찰의 대상이다
에피쿠로스는 감정을 제거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감정이야말로 삶의 일기처럼 우리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라 여겼다. 중요한 것은, 감정에 붙잡혀 끌려다니지 않고 한걸음 물러나 감정을 관찰할 수 있는 여유를 기르는 것이다.
"감정은 적이 아니다. 단지 너무 가까이 두면, 삶을 흐리게 만든다."
우리가 감정을 적절한 거리에서 바라볼 수있을 때 비로소 마음은 조용해지고 삶은 다시 고요한 중심을 회복한다.

- "평온은 스스로 선택하고 지켜야 하는 삶의 방식이다.
그리고 철학은, 그 선택을 매일 다시 하게 해주는 도구다."

- "삶에 쓸모없는 관계는, 쓸모없는 무망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소음이며, 혼란이며, 마음의 평온을 해치는 감정의 부유물이다."

- "우리가 살아 있을 땐 죽음은 없다. 그리고 죽음이 찾아왔을 땐 우리는 없다. 그렇다면 죽음은 언제나 우리 '밖에 있는 것이다."
죽음은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상태다. 고통도, 감각도, 자각도 사라진 그곳에는 내가 느낄 수 있는 두려움의 주체'조차 없다.
"죽음이 나에게 오기 전까진 걱정할 이유가 없고, 죽음이 왔을 땐 걱정할 주체가 사라진다."
이 철학은 단지 이론이 아니다. 그는 실제로 죽음의 순간까지 평온을 유지했고 자신의 제자들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이야말로 가장 큰 쾌락으로 가는 문이라고 가르쳤다.

- 삶이 복잡할수록 우리는 중요한 것을 놓친다. 정보가 많아질수록 내 마음은 흐려지고, 욕망이 많아질수록 지금의 만족은 줄어든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무언가를 '비우면' 우리는 그동안 가려져 있던 것을 선명하게 마주하게 된
다. 에피쿠로스는 그감각을 삶의 회복이라고 불렀다.
"검소한 삶은 단순한 삶이 나니라. 본질에 닿은 삶이다."
"무엇이 나에게 필요한지를 아는 사람만이, 무엇을 버려야 할지도 알게 된다. "

- 많은 이들이 평온을 원한다. 하지만 대부분 그것을 어디론가 도달해야 할 목표처럼 여긴다. 더 공부하면, 더 많이 가지면, 더 성공하면.. 그때쯤이면 마음이 좀가라앉을 거라고 믿는다. 에피쿠로스는 이 믿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평온은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가는 것이다."
그는 평온을 앞으로 향하는 무언가'가 아니라 '내가 원래 갖고 있었던 감각과 질서를 되찾는 것'으로 보았다. 즉, 더하는 게 아니라 덜어내는 일이었다. 본래 우리는 평온할 수 있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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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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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세기에 이르러 한자동맹의 활발한 무역활동이 암스테르담에는 더 큰 성장을 위한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게다가 15세기에는 네덜란드 청어 어업 육성정책 덕분에 프랑스, 플랑드르, 브리튼섬으로 수출하는 소금에 절인 청어 주요 공급 기지로 떠오르면서 한자동맹 도시들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15세기 초에는 한자동맹의 본진이나 다름없는 독일과 발트해 연안시장까지 장악했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근대 세계 체제라는 책에서 네덜란드를 헤게모니 국가'로 정의했다.
자본주의적 '세계 경제' 역사를 통해 헤게모니 국가로 거듭난 나라는 네덜란드, 잉글랜드, 미국 세 국가밖에 없다.
특정 중심국가의 생산 효율이 지나치게 높거나 그 국가의 생산물이 다른 중심 국가에서 경쟁 우위를 차지하는 상태에 있는 국가를 '헤게모니 국가'라고 부른다. 윌러스틴은 세계시장을 자유로운 상태로 유지함으로써 그 국가가 가장 큰 이익을 누릴 수 있게된 상태라고 정의한다. 또 그는 한 나라가 헤게모니를 확립해 나가는 유형도 설명한다.
한 나라가 '헤게모니 국가'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먼저 농업과 공업에서 생산 효율이 압도적 우위를 차지해야 하고 세계무역에서 유리한 지위를 확보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런 나라들은 두 가지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첫제, '세계무역의 중심'이라는 핵심적 지위를 차지할 수 있다. 둘째, '눈에 보이지 않는 상품' 즉 운송.통신.보험 등의 시스템과 인프라를 지배함으로써 막대한 무역 외 이익을 챙길 수 있다. 헤게모니 국가가 확보한 이러한 상업적 패권은 금융 부분에서 더욱 강력한 지배력을 확립할 수 있게 해준다.

- 헤게모니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첫 단계, 즉 '농업, 공업에서 압도적 생산 효율성을 확립한 분야'가 이매뉴얼 윌러스틴이 지적한 대로 '청어 어업'이었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유통은 물론이고 금융 분야에서도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고 난 뒤에도 암스테르담이 '청어 뼈 위에 세워진 도시'라는 별칭으로 불린 데는 이런 역사적 맥락이 있다.
잉글랜드는 바다 건너에서 네덜란드가 활화산처럼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어내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렇다. 말그대로 잉글랜드인은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잉글랜드인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하는 동안 네덜란드인들은 수많은 바위스선을 몰고 다니며 청어를 잡아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사정이 이쯤 되자 잉글랜드인도 더는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되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법, 당연히 잉글랜드인 사이에 신흥 강국 네덜란드에 반발심이 거세어졌다.

- 네덜란드 어업 쇠퇴의 가장 큰 원인을 꼽아보라면 '끊임없는 전쟁'을 들 수 있다. 네덜란드는 1652년 제1차 잉글랜드-네덜란드 전쟁이 시작된 후 1713년 위트레흐트 조약(Trcaty of Uucecht)으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종료될 때까지 60여 년 동안의 대부분을 잉글랜드나 프랑스, 혹은 두 나라 모두와 전쟁을 치르며 보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된케르크 해적은 잠시도 잠잠할 새 없이 약탈과 살육을 반복했다. 바다에서 아무리 잘나가는 해양 강국 네덜란드라도 사방에서 몰려드는 적에게는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알고 나면 어업에 관한 권리를 한 치도 양보하려 하지 않던 네덜란드의 외교 방침이 과연 옳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같은 신교 국가인 잉글랜드와 손을 잡고 동맹 관계를 강화하는 방향이 월씬 현명하지 않았을까. 네덜란드 부의 원천은 동인도에도 있었으니 청어 어장 정도는 양보해도 좋지 않았을까. 물론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말이다.

- 보장금(어업진흥을 위한 기금제도)가 잉글랜드에 조성되었다. 1718년에는 수출되는 소금에 절인청어 한통당 2실링 8펜스, 알배기 레드헤링은 한통당 1실링 9펜스, 품질이 떨어지는 쇼튼 헤링은 한통당 1실링의 보장금을 지급했다. 국부론을 집필하고 자유주의를 주창한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9-1790)는 이 보장금 제도를 당연히 낮게 평가했다.
요즘 배들은 고기잡이에는 도통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어부들은 염불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많아 보인다. 물고기가 잡히든 안 잡히든 상관없이 오로지 보장금만 타내면 그만이라는 한심한 풍조가 오늘날 만연해 있다.
애덤 스미스는 보장금 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찰스 L. 커팅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그는 이 보장금 제도가 18세기 잉글랜드, 스코틀랜드의 청어잡이 성장에 나름대로 효과가 있었다고 주장한다. 1755년 7만 통의 청어가 야머스에서 보존.가공되었는데 그중 5만 2,000통이 수출 길에 올랐다. 스코틀랜드에서는 보장금 제도 덕분에 청어잡이에 나선 바위스선 수가 1751년부터 1756년 사이의 3척에서 1787년에서 1798년 사이에 293척까지 껑충 뛰어올랐다. 당시 보존.가공된 청어 양도 264통에서 5만 9.000통으로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스튜어트 왕조의 청어에 걸었던 꿈은 하노버 왕조 시대에 비로소 이루어진 셈이다.

- 셰익스피어 작품 속에서 청어는 늘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왜 그 시대의 잉글랜드인은 청어라면치를 떨었을까? 우선 음식에 관한 당대인의 통념이 여기에 한묶했다. 당시 사람들은 음식을 '고기 vs. 생선'이라는 이분법 구도로 나누어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인식은 '피시 데이'의 생성 기반이 되었다. 사람들은 소고기 등 육류를 '뜨거운 고기'라 하여 남자다움, 성욕. 양기 등
양성을 상징하는 음식 재료로 보았다. 그들은 대구나 청어같은 물고기류를 '차가운 고기'라 하여 여성스러움, 음습한 성격등 음성을 상징하는 음식 재료로 인식했다. '차가운 고기' 생선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사순절은 평범한 시민에게는 날마다 맛없는 청어를 질리도록 먹어야 하는 끔찍한 기간을 의미했다. 이런 이분법적 관점과 우울한 현실이 셰익스피어 작품에 잘 드러나듯 당대인이 청어를 기피하고 천대하는 사고방식과 태도의 기반이 되었던 게 아닌가 싶다.

- 청어와 달리 대구는 회유어가 아닌 까닭에 대이동하지 않아 기본적으로 일년 내내 고기잡이가 가능하다. 산란기가 되면 비교적 얕은 해역에 모여 상업적으로 매우 중요해진다. 성장속도는 서식 장소에 따라 제각각 다르며 개체 크기에 따라 보존, 가공 방법도 다르다 단일종 어업임에도 어장에 따라 교역에 필요한 조건에 크게 차이가나는 것은 그래서다. 이는 보존, 가공방법에 따라 적절한 시장이 다르기 때문이다.

- 세익스피어 시대의 '소금에 절인 청어'가 그 형태로 완성된 시기는 14세기다. 1000년 전후의 소금에 절인 청어는 내장을 빼지않고 말 그대로 통째로 절이는 저장 식품이었다. 비록 소금에 절인 청어가 염장을 거치며 보존 기간이 늘어나긴 했으나 대륙과 대륙을 넘나들 정도로 장거리 항해를 했던 바이킹에게는 여전히 적합하지 않은 음식이었다.
그런데 바이킹의 식량 문제를 해결해준 기특한 먹을거리는 바로 '스톡피시'였다. 이렇게나 뛰어난 상품을 이재에 밝은 상인들이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상인들 눈에 스톡피시는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보였다. 노르웨이의 로포텐 제도의 스톡피시는 노르웨이 남서부 베르겐에서 곡물과 거래되었다. 그리고 10~13세기 무렵에는 독일 상인들이 베르겐을 찾아와 거래했다. 1350년 무렵 한자동맹은 베르겐에 사무소를 설치했다. 비슷한 시기인 14세기 중반에 한자동맹은 스톡피시 무역을 독점했다.

- 생선 처리 방법은 크게 세 종류로 나눌수있다. 
첫째, 스톡톡시로 소금을 쓰지 않고 볕에 말리는 방법이다. 
둘째, '그린 피시'로 소금에 절이기만 하고 말리지 않는 방법이다. 
셋째, '잉글랜드식 대구'로 소금에 절인 다음 말리는 방법이다. 잉글랜드식 말
린대구는 크기와 말리는 정도에 따라 몇 가지 종류의 상품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솔트 피시라고 하면 대구를 뜻하는 '코드(Cod)'를 붙이지 않아도 대구를 의미했다.

- 이 세 종류 중 보존성이 가장 좋은 상품은 '소금에 절인 대구'였다. 즉 스톡피시보다 항해를 위한 식량으로 더욱더 적합해 냉동기술이 개발되고 상용화할 때까지 적도를 넘어도 변질되지 않는 몇 안 되는 보존식품이었다
신항로 개척시대라는 말을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나? 아마도 대다수 사람이 '황금'이나 '보물', '항신료'등의 화려한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지 않을까. 그러나 스복피시와 소금에 절인 대구가 없었더라면 신항로 개척시대가 그 정도로 폭발적인 반항율 일으키지는 못했으리라 추정하는 연구자가 많다. 마치 그보다 월씬 오래전에 스톡피시가 바이킹의 뛰어난 항해 능력을 든든하게 뒷받침해주었듯 말이다.

- 스톡피시가 시장에서 유통되기 시작하자 소금에 절인 청어보다 더 큰 인기를 얻게 된다. 보존성이 뛰어날 뿐 아니라 맛도 좋기 때문이었다. 14세기에 한자동맹은 청어만이 아니라 조금 늦게 등장한 스톡피시 무역까지 독점했다. 게다가 북해 청어잡이는 네덜란드가 장악해버렸다. 잉글랜드가 네덜란드와의 경쟁에서 패한 탓이었다. 브라이언 페이건은 이러한 두 가지 요인으로 인해 잉글랜드가 엄청나게 많은 대구가 서식하는 아이슬란드 해역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고 말한다. 물론 잉글랜드로서는 접근성이 가장 좋은 북해에서도 대구가 잡히지만 아이슬란드 해역과 비교하면 상대가 안 될 정도였다. 아무튼 청어 경쟁에서 한번 밀린 잉글랜드는 어업 영역에서 계속 밀려났다. 얼마 후에는 청어와 마찬가지로 대구잡이에서도 네덜란드에게 우위를 빼앗기게 된것이다.

- 가까운 만과 개천에 농어가 넘쳐났으나 우리에게는 튼튼한 그물이 없어 기껏 그물을 쳐도 물고기들이 그물을 찢고 달아나 버렸다. 바다에는 대구가 넘쳐나는데도 우리의 작은 돛단배는 변변한 미끼나 그물이 없어 손 놓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손으로 주워 모을 수 있는 조개가 있는 곳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우리는 굶어죽는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느님이 일용할 양식으로 하늘에서 은혜로운 만나를 내려주시지 않는 한 말이다
식민지 건설 초기에 정착민은 멀정한 농경지를 두고도 한동안 굶주림에 시달렸다. 독실한 신앙심 이외에 무엇 하나 변변히 가진 게 없었기 때문이다. 가장 비참한 때는 신대륙에 상륙한 첫해 겨울이었다. 하필 한겨울에 상륙하는 바람에 추위를 막을 주거 시설을 제대로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탓에 수많은 이민자와 선원이 메이플라워호 안에서 오들오들 떨며 추위를 견더야 했다. 결국 이민자 스무 명 중 절반 이상이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 필그림 파더스가 세운식민지가 사라지지 않고 미국이라는 나라로 성장한 사실은 그야말로 기적이나 다름없다. 사실 초기 잉글랜드의 식민지 계획은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때까지 벌써 몇번이나 실패했으며 그나마 성공 사례로 꼽던 버지니아 식민지도 실제로는 기아로 인해 상당수 이민자가 사망하는 등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뉴플리머스에서의 실패 이후에도 잉글랜드인은 두번에 걸쳐 식민지 건설을 시도했다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머스에서 한번, 케이프앤에서 또 한번. 1622년과 1624년의 이었었. 안타깝게도 이 시도들은 모두 실패로 끝났
다. 그러나그 모든 실패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건설에 활용할 변변한 기술도, 심지어 충분한 식량조차 제대로 준비하지 않은채 그저 신앙심만 돈독한 집단이 혹독한 한겨울에 도착해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 만약 어업이 발전하지 않았다면 과연 서양 세계가 오늘날의 수준으로 인구를 늘릴 수 있었을까? 단언하건대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육류는 식민지가 급속히 확대되며 그와 비례하여 자연스럽게 생산량이 증가했다. 한편 청어와 대구는 가난한 사람도 식탁에 올릴 수 있는 소중한 단백질 공급원으로 신약성서에서 보여준 물고기의 의미를 세상에 드러내 보여준 셈이었다. '필그림 파더스'의 사례는 물고기의 상징성이 조금 특이한 형태로 표출된 사건에 불과하다.
오늘날 그 물고기에는 새로운 성스러움이 부여되었다. 바로 기독교에서 파생한 민주주의라는 정치사상에서 중핵적인 가치를 담당하는 '자유'의 개념이다. 애덤 스미스의 말대로 이 '자유'야말로 어부들의 행복과 뉴잉글랜드 번영의 주춧돌이 되었다. 뉴잉글랜드 어부들 사이에 구전되어 온 전승은 물고기가 지닌 이 두 가지 성스러움과 부합한 결과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매사추세츠주 의회당에서 지금도 의사 진행 과정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는 성스러운 대구 조형물은 서양 세계에서 물고기가 맡은 종교적, 경제적, 군사적 역할의 연장선 위에 있다. 
국가와 대자본을 거느린 상인집단의 규제와 압박을 불편한 마음으로 바라보던 어부들에게 민주주의야말로 반드시 구현해야할 정치 체제가 아니었을까. 그런 맥락에서 앞으로도 오랫동안 매사추세츠주의 성스러운 대구는 역사라는 바닷속을 유유히 헤엄쳐 다닐 것이다.

- 기독교가 단식 기간에 특히 금기로 여겼던 음식이 있다. 먹으면 죄가 되는 음식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바로 '고기'다. 라틴어 번역 성서를 처음으로 완성한 성 히에로니무스는 이렇게 말했다.
"고기를 먹고, 와인을 마시고, 배가 두둑이 찰 때까지 먹는 행위는 육욕의 온상이다."
히에로니무스는 육욕이야말로 신이 금지한 선악과를 먹은 탓에 발현된 죄로 여겼다. 다시 말해 육욕은 기독교 낙원인 에덴동산에서 가장 불경스럽게 여겨지는 욕구인 셈이다. 그러므로 그는 기독교 신자라면 마땅히 최선을 다해 이 욕구를 물리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기와 와인을 육욕과 결부 짓는 태도의 배경에는 그리스와 로마 세계에서 발달한 의학지식이 자리하고 있다. 이는 기독교가 성립하기 이전부터 발달한 지식이었다. 또한 고대 그리스.로마시대의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가 주창한 체액 이론이 바로 그 지식의 요체였다.

- 18세기 이전에 서민들은 싱싱한 날고기를 연중 사계절을 통틀어 여름에만 먹을 수 있었다. 여름이라도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서민에게 고기는 일상적으로 구할 엄두조차 내기 어려운 사치스러운 음식이었을 것이다. 겨울에는 초목이 자라지 않아 가축을 먹이는 데 필요한 여물을 구하기가 어려웠으므로 사실상 축산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가을이 오면 번식을
위한 가축을 제외한 거의 모든 가축을 도살한 뒤 고기를 소금에 절여 보관했다. 비단 고기만이 아니었다. 부활절이 지날 무렵까지 버터와 치즈, 달같도 충분한 양을 얻지 못했다. 사순절 단식은 갈무리해둔 식량이 떨어져 고통받기 시작하는 때와 시기적으로 정확히 겹친다.

- 부활절은 유럽에서 사람들이 태음절을 주로 사용하던 시기에 정해진 축일이다. 그러므로 본격적으로 태양력을 사용하게 되고 나서는 해마다 날짜가 바뀔 수밖에 없다. 아무튼 매년 3월21일부터 4월25일 사이 중 어느 일요일이 부활절에 해당하는데 그46일전인 재의 수요일(AshWednesday)부터 사순절이 시작된다. 사순절자체는 글자 그대로 40일이지만 그기간에 일요일이 들어 있어 총'46일'이라는 기간이 나온다. 부활절이 해마다 달라지면 사순절이 시작되는 시기도 덩달아 달라져서 2월 4일부터 3월 10일 중 어느날부터 시작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 시기에 고기를 먹지 않는 관습은 경제적으로도 합리적인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4세기 초 동로마 제국의 리키니우스 황제는 특정한 날에 생선을 먹도록 명을 내렸다. 그는 왜 그런 명령을 내렸을까? 아마도 양에 제약이 있는 육류 소비를 억제하려는 경제적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이는 석기 시대에서 최근까지 잉글랜드에서의 음식과 음료 에서 C. 앤 월슨이 추정한 내용이다. 그러나 단식일이 지닌 경제적 의미와 가치는 단지 육류 소비의 절약에만 머물지 않았다.

- 단식일은 사순절 기간의 40일로 끝나지 않았다. 시대에 따라 달랐지만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금요일과 수요일, 심지어 토요일이 단식일로 지정된 시기가 있었다. 또 주요 성인을 기리는 축일에도 사람들은 자주 단식했다. 심지어 각종 비용을 결산하는 날이던 '사분기 결산일(Quareridy, 잉글랜드에서는 3월 25일 성모 영보 대축일, 6월 25일 세례자 요한 탄생 대축일인 미드 서머 데이, 9월 29일 성 미카엘 대천사 축일, 12월 25일 크리스마스)'도 단식일로 정해졌다.
그러고 보면 당시만 해도 1년의 거의 절반 가까이가 단식일이었던 셈이다.
경제학적 관점에서볼 때 단식일은 '고기를 먹을 수 없는 날'이라는 약간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날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보다는 기독교 세계에서 모든 신자가 '생선을 먹는 날'이다. 그로 인해 1년의 절반 정도 기간 엄청난 양의 생선 수요가 발생한다. 이렇듯 단식일이 '고기를 먹지 않는 날'에서 '생선을 적극적으로 먹는 날'로 탈바꿈함에 따라 생선은 기독교 세계 경제 시스템의 주인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기독교 세계의 역사를 좌우하는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다.
사람들이 단식일을 '생선 먹는 날'로 받아들이게 하는 데에는 몇 가지 필수조건이 있었다. 그게 무엇이었을까? 우선 아무리 생선을 먹고 싶어도 생선이 없으면 먹을 수 없다. 유통과 보존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과 달리 대량 운송 기관도 냉장고도 없던 시대에 생선을 먹어야 한다는 종교적 관습을 지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 물론 가톨릭이 국교이거나 대세인 나라에서는 피시 데이가 신앙의 증거로서 엄격히 지켜졌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세부 규칙과 기간이 지나치게 엄격하다고 느끼면서도 신앙에 따라 사순절 식단을 고수하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많다.
미국의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 동물원(1944)에서 톰은 누나인 로라에게 소개하려고 직장 동료를 집으로 초대하기로 한다. 어머니인 어맨다가 동료의 이름을 문자 톰이 대답한다.
"그 녀석 이름은 오코너(o'Connor)에요."
오코너는 전형적인 아일랜드 이름이라 당연히 가톨릭 신자라고 지레짐작한어맨다는 이렇게 대꾸한다.
"그럼 당연히 생선을 준비헤야겠네. 내일이 금요일이니까."
종교개혁 이후에도 구교 국가에서는 생선을 계속 열심히 먹었다. 반대로 신교 국가에서는 피시 데이가 완전히 폐지되거나 폴리티컬 피시 데이로 제정되어 국가가 강제하더라도 국민이 성실하게 지키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신교 국가인 네덜란드가 구교 국가들의 종교적 요청에 따라 탄생한 생선 수요를 경제적으로 뒷받침했고그 대가로 거대한 부를 축적했다는 점이
다.이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다. 네덜란드의 뒤를 이어 어업 강국으로 부상한 나라 역시 구교 국가가 아닌 신교국가였다. 그 나라는 바로 잉글랜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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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202

Quote of the day 2025. 12. 2. 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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