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날 저온살균처리를 거친 우유는 식중독을 일으킬 확률이 1퍼센 트 미만인 매우 안전한 식품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요즘 저온살균처 리가 되지 않은 우유를 마시는 사람들이 늘어남에 따라 우유로 인한 질 병의 비율이 다시 증가하고 있다. 2007년과 2009년 사이 미국에서는 살 균을 거치지 않은 우유를 마시고 박테리아 캄필로박터균Campylobacter, 살모넬라균salmonella 및 대장균E.coli과 관련된 질병에 감염된 사례가 30건이나 발생했다. 2010년과 2012년 사이에 그 숫자는 51건으로 증가 했다. 사람들이 생우유를 찾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는데, 이들은 생우 유가 살균된 우유보다 맛이 좋고, 영양가가 높으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사람의 몸은 생우유를 마시도록 되어 있고, 소비자는 우유의 살균 여부 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저온살균을 거부하고 더 자연적인 생우유를 택하는 사람들은 저온살균처리법이 개발되기 이전 수천 명의 사람이 우유로 인해 장기 부전, 유산, 실명, 마비를 겪고 결국 사망에 이 르렀다는 사실을 아마도 모르는 것 같다.
저온살균처리를 거부할 때 사람들은 자신이 정확히 무엇을 거부하고 있는 것인지 완전히 이해하고 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저온 살균은 직관에 반한다. 세균이 반직관적이기 때문에 저온살균 또한 반직관적일 수밖에 없다. 세균이란 눈으로 볼 수 없는 생물들이다. 그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우리가 알 수 없게 전달되며, 그 결과 우리는 감 염되고 나서 몇 시간 또는 며칠 후에야 몸이 아프다는 걸 느끼게 된다. 또 다른 반직관적인 개념은 음식물을 질병의 근원으로 변화시키는 세균 이 열에 의해 제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세균을 죽이기 위해 음식을 가 열하는 것은 식품산업에서 아주 널리 퍼진 방법이다. 우유뿐만 아니라 맥주, 와인, 주스, 과일 통조림, 야채 통조림 등 여러 종류의 음식이 가열 로 살균처리를 거쳐 생산된다. 살균되지 않은 우유를 고집하는 사람들 이 살균처리된 맥주 또는 복숭아 통조림에 대해서는 반대하지 않는 데 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저온살균 우유에는 타당성이 없지 만, 다른 식품에는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더 가능성이 있는 이유로 저온살균이 무엇인지, 왜 식중독을 예방하는 데 필요한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일 수 있다.
저온살균에는 명확한 과학적 근거가 있지만 세상의 많은 사람이 그 과학적 근거를 거부하고 있다. 사실 그들은 저온살균에 대한 과학뿐만 아니라 모든 과학-면역학에서부터 지질학, 유전학도 거부한다. 최근 에 미국 성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인간이 오랜 시간 에 거쳐 진화했다고 믿는 사람은 65퍼센트에 불과했다. 반면에 세계 최 대 과학 단체인 미국과학진흥협회 AAAS: American Association for the Advance- ment of Science 회원들은 98퍼센트가 진화가 사실임에 동의한다. 또한 지 구 온난화가 대부분 인간에 의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미 국 성인의 50퍼센트에 불과한 반면 AAAS 회원은 87퍼센트다. 그리고 미국 성인의 37퍼센트만이 유전자 변형 식품이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 하지만, AAAS 회원은 88퍼센트다.

- 직관적 이론은 세상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따로 배우지 않고 우리가 자발적으로 터득한 설명이다. 스스로 관찰했던 모든 사건에 대 해 나름대로 짐작한 이유, 그리고 그 일에 우리가 어떻게 개입할 수 있 는지에 대한 추측들이다. 직관적 이론은 중력에서 지질학, 질병에서 진 화적 적응까지 모든 종류의 현상을 포함하며, 영유아기부터 노년기까지 줄곧 작동한다. 다만 문제는 그 직관들이 종종 틀린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질병에 대한 우리의 직관적 이론은 미생물에 대한 사실이 아니라 우리의 행동(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에 근거 한다. 따라서 우유를 그냥 마시는 것은 위험하지만 가열하면 안전하다 는 이야기나, 백신 접종과 같이 죽은 바이러스를 우리 몸에 주입하면 질 병에 면역이 생긴다는 이야기는 믿기 힘들 수밖에 없어진다. 마찬가지 로 지질학에 대한 우리의 직관적 이론에서는 지구를 동적계가 아니라 정적인 계로 간주하기 때문에, 우리는 수압파괴법hydraulic fracking으로 지진을 일으킨다거나 탄소 배출이 지구 온난화의 원인이 된다는 등 인간 이 지구 자체를 변화시킨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직관적 이론은 양날의 검이다. 세상에 대한 직관적 이론은 우리가 여 러 현상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또한 우리의 시야를 넓혀주기 때문에 그 어떤 이론도 가지지 않은 것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직관적 이론과 일치하지 않는 정보들에는 우리 의 마음을 닫아버리게 함으로써, 그 현상들에 대한 진정한 설명과 이치 를 깨닫는 데 장애물이 된다. 기존에 있는 직관들은 현실을 잘못 이해하 도록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직관에 반하는 사실들을 무시하게 함으로써 진실에 대한 우리의 눈을 멀게 할 수도 있다. 따라서 이 책을 쓰는 나의 목표는, 독자들에게 우리의 머릿속에 있는 직관적 이론들에 대해 알리 고, 그 직관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우리가 생각의 길을 잃게 만드는 지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 직관적 이론은 과거에 과학적 지식이 충분치 않았을 때 어쩔 수 없이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따라서 현재 우리가 전적으로 과학적인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미래에 세상 모두가 과학적 정보 를 쉽게 얻을 수 있는 때가 오면 직관적 이론은 사라질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과학에 대해 많이 알게 된다 해도 직 관적 이론은 절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직관적 이론은 인간 인지 능 력의 한 부분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이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직관은 어린아이 시기에 형성되며, 아이들은 과학적 정보의 유용성이나 접근성 의 변화에 큰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아이들이 어른들 보다 집중력이 부족하거나 자연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아무리 새로운 과학적 지식을 가르친다 해도 아이들은 그것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데 필요한 기본 개념들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열을 예로 들어보자. 아이들은 물체의 온기, 즉 물체가 얼마나 효율 적으로 열을 전달하는지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열에너지 자체는 인식 하지 못한다. 분자들의 움직임을 직접 지각할 수 있는 감각기관이 없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이 열의 과학적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물 질이 눈에 보이지 않는 분자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이론을 터득해야 한 다." 물론 아이들도 물질에 대한 원자론을 배우긴 하지만 그것은 대부 분 중학교 때고, 그때는 이미 열을 과정이 아닌 물질로 취급하는 직관적 이론(제2장 참고)이 자리 잡힌 후다.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조기 교 육에 원자론을 도입하여 아이들에게 일찍부터 올바른 원리를 가르칠 수 도 있겠지만, 원자론 자체가 반직관적인 것이 문제다. 어떻게 유치원생 에게 분자를, 또는 전자 및 화학적 결합을 설명할까? 어떻게 아이들이 열에 관련된 단어들('열', '뜨거움', '냉기', '시원함'을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개념들('물질', '막음', '흐름'과 연관시키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 많은 사람들이 시각은 외부에 있는 빛이 눈으로 들어와 이루어진다는 '유입설intromissionist'적인 설명과 눈에서 나온 광선이 외부 사물에 반사 되어 다시 되돌아온다는 '유출'적인 설명 중에서 후자를 강하게 확신 한다." 예를 들어, 눈이 그려진 그림을 주고 시각정보의 흐름을 나타내 는 화살표를 그리는 과제가 주어졌을 때 사람들은 안구에서 나오는 방 향으로 화살표를 그린다. 또한 전구와 같은 발광물체를 우리가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요청하면 사람들은 전구에서 나온 빛이 우리 눈에 닿는다고 하지만, 발광물체가 아닌 꺼진 전구와 같은) 사물들에 대 해 같은 질문을 하면 다른 답을 한다. 이 결과는 사람들이 발광물체에서 나오는 빛은 우리 눈으로 들어온다는 것을 알지만, 빛 자체가 모든 시각 의 근원이라는 것은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최근 연구에서는 과학자들에게 모든 사람들이 올바르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와 과학자만 올바르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를 제시하고, 이 문 제들을 푸는 동안 참가자들의 두뇌를 fMRI로 촬영했다. 첫 번째 유형의 문제에서는 과학자와 일반인이 모두 유사한 신경 활동 패턴을 보이지 만두 번째 유형의 문제에서는 과학자들의 뇌에서 통제 및 갈등 감시와 관련된 뇌 영역인 전전두엽 피질과 전측 대상피질의 혈류량이 증가하는 것으로 관찰되었다. 과학자들은 전문 지식을 이용해 어려운 과학문제를 풀 수 있지만, 그러기 위해 과학지식과 충돌하는 개념들을 통제해야 한 다. 즉 자기 자신 안에 잠재되어 있는 틀린 직관들을 억제해야 하는 것 이다.

- 하나의 개념을 수정하기 위해서 동시에 다른 개념들도 수정해야 하면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철학자 오토 노이라트Otto Neurath는 이 문제를 바다 한가운데서 배를 만드는 것에 비유했다.  "우리는 빈 서판tabula rasa에서 시작할 수 없다. 우리의 생각이 시작될 때 떠오르는 단 어와 개념에 의존해야만 한다. 우리의 일은 바다 한가운데서 배를 처음 부터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재구축하는 것이다. 대들보 하나를 제거 하는 것과 동시에 새로운 대들보를 세워 넣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배 자체가 지지대가 되 주어야 한다. 이처럼 배의 오래된 대들보를 유목들 로 대체한다면 배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가 되겠지만, 그 과정은 점진적 인 재구축일 것이다."
노이라트는 심리학자가 아닌 철학자였지만 그의 은유는 과학 개념을 배우는 과정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설명할 때도 유효하다. 우리 는 그런 개념들에 대한 틀을 갖추고 있지 않으므로 이를 습득하는 과정 도 느리고 어려울 수밖에 없다. 우리는 실제 현상에 대한 하나의 근사 적 해석(예: "바닥과 접촉하지 않으면 물체는 떨어진다.")을 다른 근사적 해석 (예: "질량중심 아래에서 바닥과 접촉하지 않으면 물체는 떨어진다.")으로 반복적 으로 교체해야 한다. 그러한 수정을 수없이 거치고 난 이후 우리가 얻게 된 새로운 이론은 예전의 오래된 이론과는 완전히 달라지겠지만, 그것 이 어디서부터 기원했는지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모든 천문학자는 한 때 사람들이 지구 반대편에서 살 수 없다고 믿는 어린아이였고, 모든 물 리학자 또한 한때 튜브를 따라 내려가는 공을 추적할 수 없었던 어린아 이였다. 우리는 그런 초라한 소형선에서 얼마나 위대한 대형선박을 만 들어내는가!

- 지구가 구체라는 것을 알아내는 것은 우주와 그 속에 있는 우리의 위치 를 이해하는 첫 번째 단계에 불과하다. 다른 우주 현상들 - 낮과 밤의 반복, 계절의 변화, 밀물과 썰물, 별자리의 움직임, 그리고 달의 위상에 대해서도 설명이 필요하다. 우리는 수천 년 동안 이러한 현상들을 목격 해왔지만, 지구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마찬가지로 이 현상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 또한 본질적으로 편향되어 있다. 
-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 아닐까?" 비트겐슈타인이 대답했다. “지구가 축을 중심으로 도는 것처럼 보이려면 어 떤 상황이 돼야 하는 것일까? 
낮과 밤의 주기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만, 그 해석은 지 구의 형태에 대한 심성 모델에 의해 제한된다. 예를 들어, 중공 구형 모 델을 가진 어린이는 해와 달이 하늘 돔 안에 들어 있다고 믿는다. 그렇 기 때문에 달이 구름이나 산과 같이 돔 내부의 무언가에 의해 가려져 있 을 때가 낮이고, 태양이 그 물체들에 의해 가려지면 밤이 된다고 생각한 다. 반면, 편평한 원형 모델을 가진 어린이는 지구를 해와 달과 별개로 해석하므로 사람들이 살고 있는 편평한 평면 위에 태양이 떠오르면 낮 이 되고, 달이 떠오르면 밤이 된다고 믿는다. 구형 지구 모델에서는 지 구가 태양을 돈다고 하든,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하든 상관없이 낮과 밤 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상황이 더욱 복잡해진다. 그리고 그 도는 동 작은 지구 자체의 자전일 수도 있고 태양을 중심으로 한 공전일 수도 있 고, 심지어 진동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불분명한 점이 많다.

- 우리는 지진, 화산, 쓰나미, 간헐천과 같은 지질학적 현상을 경험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그저 호기심의 대상에 그치지 않는다. 극적이고 간 혹 치명적이기도 한 이런 현상들에 대해 우리는 그것이 왜 발생하는지 알고 싶어 한다. 물론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기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일련의 인과적 상호작용들이 이 현상에 관여되어 있으며, 그중 많은 작 용이 시공간적으로 이 현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화산의 분출에는 적어도 여덟 가지 단계가 포함된다. (1) 지각판이 움직인다 (2) 움직이는 판이 아래에 있는 다른 판을 밀게 된다 (3) 충돌하는 지각판들 사이에서 마찰과 압력이 축적된다; (4) 지각판 사이에 있는 암석이 녹기 시작한다; (5) 용융된 암석(즉, 마그마)은 주변 암석보다 밀도가 낮아 지각 안에서 상승한다: (6) 상승하는 마그마가 지 하 공간에 축적된다; (7) 이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암석이 약해지고 균 열이 생긴다; (8) 마그마가 있는 공간에 압력이 축적되면서 마그마는 균 열된 틈을 통해 대기로 분출된다. 이 일련의 사건을 완전한 인과관계 순 서로 통합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한 연구"에서 연구자들은 지구물리학 시스템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또 다른 측면은 여기에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관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해변에서 바위 를 보고 그 바위들이 풍파를 겪어 결국에는 모래로 변할 것임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본능적으로 이러한 결말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질학자들은 우리가 경험에서 느낄 수 있는 시간과 구별하기 위해 지 질학적 사건에 내포되어 있는 시간을 '아득한 시간deep time'이라고 부른 다. 아득한 시간과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은 은하와 원자만큼이나 다르 지만, 우리는 종종 그 차이를 깨닫지 못하곤 한다.
스스로에게 한번 물어보자, 공룡시대의 흙이 오늘날 우리가 보는 흙 과 같은 것인가? 설마! 당신은 단박에 말도 안 된다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아마도 다음 질문에는 주춤할 것이다. 만약 우리의 흙이 공룡시대의 흙과 같지 않다면, 공룡시대의 흙은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우리의 흙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 놀랍게도, 흙은 영원히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바람과 비에 의해 침식되고, 홍수로 씻겨 나가며, 빙하에 긁히기도 하고, 무기물질(토사, 재, 먼지) 또는 유기물질(부패되는 동물, 썩어가는 식물)에 덮여 있기도 하며, 지진 때문에 지각 위로 노출되기도 하고, 산사태에 묻히기도 하고, 지구 자체 로 다시 재활용되기도 한다. 공룡은 6억 5천만 년 전에 멸종되었는데, 이는 흙이 변하기에 충분히 긴 시간이다. 하지만, 우리의 눈앞에서 그러 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보기는 어렵다. 인간의 수명은 대부분의 지질 학적 사건보다 기하급수적으로 짧기 때문에, 우리는 흙, 산, 섬, 계곡과 같은 지질학적 특징을 그것들을 생기게 한 역사적 과정과 연결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 환경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모든 활동은 기후 변화와 관련 있는 것으로 여겨지곤 하지만, 쓰레기 줍기, 살충제 사용 또는 에어로졸 캔 사용 과 같은 일부 활동은 적어도 직접적으로는 관련이 없다. 실제로 기후 변 화와 관련된 활동들 가운데 일부는 다른 활동보다 훨씬 큰 영향력을 가 지고 있지만, 우리는 그 차이점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예 를 들어, 교통수단에서 발생하는 탄소는 전체 탄소 배출량의 14퍼센트 를 차지하는 반면 쓰레기는 4퍼센트를 차지한다. 이처럼 쓰레기 문제는 교통 문제보다 기후 변화에 대한 영향력이 적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교통 문제(대중교통 이용 또는 항공여행 최소화)를 해결하는 것보다, 쓰레기 문제(소비 절감 또는 재활용 확대)를 해결하는 데 더 신경 쓴다. 
교통 습관을 변화시킬 때 수반되는 희생을 감수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휴지통에서 재활용품을 분리하면 지구를 구할 수 있을 것 이라고 스스로를 속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지구 온난화를 줄이기 위해 필요한 행동의 변화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 았을 때 생기는 결과만큼이나 우리들의 삶을 크게 바꿀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암묵적으로는 알고 있지만 명시적으로는 받아들이지 않 고, 기후 변화가 심각하다는 것, 심지어 기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조차 부정하기도 한다.
- 요약하자면, 우리는 다음의 물리적 이론을 다루었다.
1. 물질에 대한 직관적 이론에서는 물질을 미립자로 구성되어 나눠질 수 있다고 여기기보다는 다른 물질과 구분되는 하나의 전체로서 여긴다.
2.에너지에 대한 직관적 이론에서는 열, 빛, 그리고 소리를 물리적 시 스템의 미세 구성요소들의 창발적 특질로 여기기보다는 단순한 물 질로 취급한다.
3. 중력에 대한 직관적 이론에서는 무게를 질량 및 중력장과 연관시키기보다는 물체의 본질적인 특성이라고 본다.
4. 움직임에 대한 직관적 이론에서는 힘을 물체의 움직임을 변화시키는 외부적인 요인이라기보다는 물체 간에 전달되어 움직임을 일어나게 하는 것으로 본다.
5. 우주에 대한 직관적 이론에서는 지구를 태양 주위의 궤도를 도는 구체가 아니라 오히려 태양이 그 주위를 회전하는 움직이지 않는 평면이라 본다.
6. 지구에 대한 직관적 이론에서는 대륙과 산 같은 지질학적 특징들을 일시적이고 역동적이라기보다는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으로 본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 생활에 적합한 방식으로 환경을 인식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직관적 이론들을 만들게 되었지만, 이 방식들은 자연의 진정한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우리는 물질들을 무 게와 크기가 아니라 묵직함과 큼직함으로 인식하고, 열에너지를 열과 온도가 아닌 따뜻함과 차가움으로 인식하며, 중력을 지구를 향해 끌어 당기는 힘이 아니라 그저 아래로 당기는 힘으로 인식한다. 또한 우리는 속력을 관성의 형태가 아닌 힘의 산물로 인식하고, 지구를 거대한 구체 가 아닌 편평한 평면으로 인식하며, 지질학적 시스템을 연속적인 과정 이 아닌 서로 구분되는 사건들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편향된 인식들은 우리가 자연현상들의 원인에 대한 이론들을 만들 때 과학적으 로 의미가 없는 개념들을 만들어내게 하는 반면 과학적으로 의미가 있 는 개념들은 간과하게 만듦으로써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하게 된다. 오직 과학적 이론만이 올바른 개념들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하기 때문에, 오직 과학적 이론만이 일관되고 정확한 광범위하게 적용될 수 있는 설 명들과 예측들을 우리에게 제공해줄 수 있는 것이다.

- 잠을 자는 것은 움직임이나 감각이 없는 상태라는 점에서 죽음과 비 슷하고, 여행은 우리의 삶에서 사람들과 헤어진다는 점에서 죽음과 비슷하다. 더군다나 어른들이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마치 잠을 자는 듯 "영원히 잠에 들다eternal slumber", "물고기들과 잠을 잔다sleeping with the fishes", "흙 속의 낮잠dirt nap", "편히 쉬다rest in peace"라는 표현을 쓴다거나 마치 여행하는 듯 "떠났다moved on", "떠나갔다passed away", "더 좋은 곳으 로 갔다 gone to a better place", "이 세상을 떠났다departed this world"라고 표현함 으로써 죽음의 음침한 현실을 가리기도 한다. 우리 또한 죽음을 이런 식 으로 표현하는데 죽음에 대해서 혼란스러워하는 아이를 어찌 탓할 수 있으랴. 때로는 죽음에 관한 은유적인 표현 속에 가려진 죽음의 진정한 모습과 대면하기 위해서는 미라를 만나는 경험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 생물학적인 움직임에 대한 본능적인 관심은 어린아이들이 살아 있다 는 말을 "스스로 움직일 수 있다”는 말과 동의어로 생각하게끔 한다. 유 치원생들은 새, 포유류, 물고기는 살아 있다고 말하지만 꽃, 버섯, 또는 나무는 자기 스스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살아 있지 않다고 말한다. 유 치원생들은 때로는 스스로 움직이지만 생물체가 아닌 것들(구름, 강, 연 기, 해)도 살아 있다고 여긴다. 이렇게 사고하는 것은 서양과 동양, 선진국 및 개발 도상국의 어린이들 모두에게서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전세계의 네 살짜리 어린아이는 일반적으로 해는 살아 있지만 해바라기는 살아 있지 않다고 말한다.
네 살짜리 아이들은 이 세상의 어떤 개체들이 먹고, 숨쉬고, 성장하고, 번식하는 생물학적 활동들을 하는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 아이들은 인 간이 이러한 활동들을 한다는 것은 알지만 종종 다른 유기체들은 그렇 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의 일부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유기체들이 매우 다른 형태로 생물학적 활동들을 영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문제는 생물학적 활동들을 다른 유기체에 적용시킬 만한 어떠한 원리도 알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살아 있는 것을 스스로 움 직일 수 있는가를 바탕으로 이해하며, 생물학적 과정에 대해서도 심리 작용에 근거해 이해한다.

- 아이들의 죽음에 대한 이해는 아이들의 정신 건강에 해를 미치는 것 이 아니라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이 결과는 죽음을 경험하고 슬퍼하는 아이들을 상담하는 의사들이 직접적인 상담 경험을 통해 오랫동안 믿어 왔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의사들은 대부분 부모들에게 죽음에 대해서 피하거나 은유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명료하고 구체적인 표현을 통해 죽음을 정면으로 이야기해주기를 권한다. 죽음에 대한 생물학적 설명은 아이들에게 당혹스러울지 모르겠으나, 그런 당혹스러운 설명이 어떤 설 명도 해주지 않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죽음을 이해하기 한참 전부터 죽음에 대해서 알고 있다. 처 음에는 죽음을 삶의 변형된 형태로 여긴다. 계속해서 음식과 물을 필요 로 하는 사람을 땅에 묻는다거나, 여전히 생각하고 고통을 느끼는 사람 을 화장한다는 것이 아이들에게는 얼마나 소름 끼치는 짓이겠는가. 사 랑하는 사람이 집을 떠나 다른 곳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아이들에게는 얼마나 슬픈 일이겠는가. 죽음을 생물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고릴라는 전혀 겪지 않겠지만) 아이들이 겪게 되는 이러한 근거 없는 두려움을 잠재 울 수 있다.

- 우리는 뼈는 그저 뼈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그것이 뼈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즉 우리의 신체가 기능을 다한 후에도 그것을 초월하는 우리의 어떤 일부분이라고 여긴다. 많은 사람들은 죽음이 모든 인간 활동, 특히 심리적 활동에 마침표를 찍는다 고 완전히 믿지 않는다." 이를 반박할 만한 어떠한 직접적인 증거도 갖 고 있지 않음에도 말이다. 우리가 죽음을 생물학적인 종결로 받아들이 기를 꺼려하는 이유는 보통 "존재하지 않음"이라는 개념에 대한 우리의 감정적 반응에서 비롯되지만, 삶과 죽음 자체에 대한 혼동에서 비롯되 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어린아이들처럼 이러한 혼동을 바로 드 러내지는 않지만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식물이 살아 있는지에 대해 어른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가장 좁은 의미로 생물을 정의한다 해도 식물은 분명 생물이다. (바 이러스나 신체 내부 기관들을 생물로 볼 수 있는지는 생물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식물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생 각할 때 그것을 살아 있는 것처럼 여기지 않는다. 동물에 대한 대화와 견주어 볼 때, 식물에 대한 대화 중에 우리는 "삶"이나 "살아 있다"라는 용어를 오 분의 일 정도만 사용한다." 이 비율은 아이들보다 높은 게아 니다. 우리는 동물에 비해 식물에 대해 훨씬 더 적게 알고 있다. 우리는 수백 가지의 포유동물의 이름을 손쉽게 열거할 수 있지만 기억할 수 있 는 나무의 이름은 소수에 불과하다. 식물의 특성들에 대해서 물어보면 식물이 주변 환경을 감지한다든가, 서로 의사소통을 한다든가, 또는 스스로 움직이는 등의 어떤 의도가 있는 행동들을 보인다는 것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곤 한다.
- 과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생명력이란 결국 에너지의 생화학적인 공급 일 뿐이므로 활력론은 신진대사 기능을 칭하는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을 지 모른다. 그러나 활력론은 신진대사 기능을 담당하는 신체 조직이나 신체 기관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어도 이해 가능하다. 생물학의 역사에 있어서 활력론은 물질론materialistic (또는 기계론mechanistic)에 비해 수천 년 앞서서 등장한다' 다른 문화권에서 생명력이라는 개념은 생의 약동élan vital, 영적 동물spiritus animus, 차크라, 영혼, 기chi, 체액humors 등의 다른 이 름으로 불렸다. 그러나 이런 개념들의 목적은 매한가지다. 쉽사리 설명 이 되지 않는 건강, 운동, 지향, 지각, 성장, 그리고 발달의 과정들을 설 명하기 위함이다.
가장 강한 의미에서의 활력론에서는 생명을 물질 이상의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생명에 대한 생화학적 접근에 부합하지 못한다. 하지만 약 한 의미에서의 활력론에서는 일종의 내부에너지에 의해 외부 활동이 일 어난다고 여기기 때문에 생명의 생화학적 관점에 부합한다. 활력론은 생명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대략의 개요를 제공한다면, 생화학 적 관점은 그 자세한 내용을 제공한다고 볼 수 있다.
발달학적 관점에서 볼 때, 활력론은 제7장에서 다룬 기계론적인 개념 들과 마찬가지로 조금 더 복잡한 생물학 개념으로 넘어가는 디딤돌이 된다. 아이들은 생물학적인 현상들에 대한 기계론적 설명을 받아들이기 한참 전부터 활력론을 받아들인다. 우리가 왜 먹는지를 설명하는 데 있 어서 활력론에 근거한 설명("왜냐하면 우리의 위장은 음식으로부터 에너지를 얻기 때문에")과 기계론에 입각한 설명("음식이 위장에서 변환되어 몸속으로 흡수되기 때문에) 사이에서 유치원생과 초등학교 저학년 어린이들은 전자 를 더 선호한다.
이는 다른 신체적 기능에 관해서도 나타난다. 우리는 왜 심장을 갖 고 있는가에 대해서 어린아이들은 "심장은 피를 통해 에너지를 내보내 는 일을 하기 때문에"라는 활력론의 설명을 "펌프처럼 작동하며 피를 순 환시키는 일을 하기 때문에"라는 기계론적 설명보다 선호한다. 왜 우리 는 공기를 마시는가에 대해서는, "우리의 가슴은 공기로부터 에너지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라는 활력론적 설명을, "우리의 폐가 산소를 받아들 여 이를 이산화탄소로 전환시키기 때문"이라는 기계론적 설명보다 선호 한다. 반면, 조금 더 나이가 많은 아이들과 어른들은 활력론적 설명보다 기계론적 설명을 선호한다. 우리에게 활력론적 설명들은 이해가 얕은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 식품 산업에서도 활력론에 입각한 논리가 광고에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인식한 듯하다. 이들은 성인 대상의 건강식품을 선전할 때 영양소에 대한 정보를 더욱 강조한다. 어른들도 채소가 정크푸드보다 건강에 더 좋다는 것을 대략적으로는 알고 있긴 하지만, '홀푸드Whole Foods'와 '트 레이더조Trader Joe's'와 같은 회사들은 그들이 판매하는 식품이 건강에 어 떤 효과를 지니는지 짚어주는 것이 광고 전략으로서 매우 효과적이고 수익성도 높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에 따라 케일, 미역, 그리고 아사이베 리가 맛없는 식물에서 '슈퍼푸드super food'로 급부상했다. 반면에, 초코 바, 햄버거, 오렌지 탄산음료는 맛있는 군것질거리에서 '침묵의 살인자' 로 전락하고 말았다.
- 아이들은 아직 노화와 성장을 연결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노화에 대한 아이들의 혼동은 일반적인 생물학적 과정에 대한 혼동과 함께 나타난다. 학교에 들어간 후 저학년 시기 동안 아이들은 노화와 성장을 연결시킬 수 있게 되는데, 이 연관이 주는 파급 현상들을 평생 완벽하게 이 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어른이 되어서도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일어나 는 불가피한 육체적 변화(흰 머리, 처진 피부, 늘어나는 허리둘레 등)와 심리 적 변화(새로운 태도, 새로운 가치관, 새로운 관심사)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한 다. 20 심리학자들은 우리가 특히나 후자에 대해 망각하고 산다는 것을 발견했다.
스무 살 된 청년들에게 지난 십 년간 그들이 선호하던 것들(예: 음악, 음 식, 취미, 그리고 친구 등)이 얼마나 변했는지 물어보면 그들은 그들의 선호 사항들이 엄청나게 바뀌었다고 말할 것이다(평균 40퍼센트). 그런 다음, 이들에게 다음 십 년간 현재의 선호하는 것들이 얼마만큼 바뀔지 예상 하느냐고 물어보면, 그들은 이들이 별로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한 다(평균 25퍼센트). 즉, 그들은 테일러 스위프트를 다른 가수보다 초밥을 다른 음식보다, 그리고 요가를 다른 취미보다 늘 선호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다음 십 년간 계속에서 테일러 스위프트, 초밥, 그리 고 요가를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스무 살 청년들이 지금 그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앞으로도 계속 좋아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옳은지도 모르겠다. 청소년기는 매 우 빠른 성장시기고 그 시기가 끝날 무렵에 생기는 취향들은 그 이전의 것들보다 더 안정적일지도 모른다. 다만 이 같은 해석의 허점은 서른 살 먹은 사람들도 스무 살 청년들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는 데 있다. 그리고 사십 살이 되어도, 오십 살이 되어도 같은 기대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이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은 현재 좋아하는 것들이 과거에 좋아 했던 것들에 비해 더 변함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지난 십 년간 의 삶이 앞으로의 십 년간의 삶보다 우리의 정체성 성격(예: 개방적인, 양심적인, 외향적인, 상냥한, 그리고 신경이 예민한)과 핵심 가치관 (예: 성취, 쾌락, 자기주도성, 자비, 전통, 순응, 안정 그리고 권력에 우리가 부여하는 가치)의 형성에 더 크게 기여한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 어른들조차도 개인의 정체성이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화 하는지에 대해 그릇된 이해를 갖고 있다. 우리 어른들은 그러한 변화를 직접적으로 자주 접해왔으나, 여전히 미래에 일어나게 될 변화에 대해 서는 평가절하한다. 우리는 매 순간 우리가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에 있어서의 마지막 지점, 즉 우리의 인성 발달에 있어서의 정점에 도달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아이들보다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육체적 변화의 가능성을 인지하는 데는 더 나을지는 모르나,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정신적 변화의 가능성을 인지하는 데는 딱히 더 뛰어나지 않다. 현재의 나 자신은 항상 "진짜 나이고, 그것은 과거의 그리고 미래의 나의 정체성이다.

- 유전자는 변한다. 즉, 암을 일으키는 물질이 있거나 복제에 문제가 있 으면 유전자 변이가 발생한다. 유전자는 균일하지 않다. 즉, 유전자는 여 러 종류의 다양한 형질이 발현하는 과정에 관여한다. 유전자는 서로 구 분되지 않는다. 즉, 유전자는 다른 몇몇의 유전자와 더불어 활동한다. 그 리고 유전자는 선천적인 것이 아니다. 유전자는 그것이 어떻게 메틸화 되며(즉, 화학적으로 변형되며) 어떻게 발현되는지에 있어서 유기체의 일생 에 걸쳐 변화한다.
유전자와 본질을 연관시켜 생각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한 태도와 행동 들을 야기할 수 있다. 우리는 부모로부터 유전될 가능성이 높다고 여기 는 특성들(예: 지능, 충동성, 정신병에 유전자가 기여하는 정도를 과대평가 하여, 이러한 형질들이 변하지 않고 결정적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적 구 분(예: 인종, 성별, 성적 성향)이 유전적으로 결정되는 것으로 여길 때 우리 는 각각의 사회적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의 차이점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된다. 우리는 범죄적 행동들이 유전적이라고 여길 때(예: 약물 남용, 가정 폭력, 강간), 이러한 범죄에 가담한 개인들의 도덕적 책임을 최소화시킨 다. 그리고 우리는 유전자 변형한 종의 유전체에서 다른 종의 유전체 로의 유전자 이식을 통해 생산된 음식을 섭취하는 것을 꺼린다' 이 음식들을 먹어도 안전하다고 이미 입증되었음에도 말이다.
유전에 대한 정보를 본질론적 사고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정확하지 도, 그렇다고 생산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유전에 대한 우리의 사고방식 은 보편적으로 본질론에서 출발하므로, 우리가 이러한 정보들을 해석하 는 데 있어서 본질론은 계속해서 장애물이 된다. 유전공학자들조차도 한때는 생물학적 세계를 구분 가능한, 불변의 본질로 이해하고자 했던 유치원생들이었으니 말이다.

- 니콜 셰이Nicole Shea라는 교육학 연구원은 그 기사들이 어떤 종류의 지식을 필요로 하는지 분석한 결과, 유전자 관련 기사를 이해하려면 독자들은 몇 가지의 생화학적 사실들을 꼭 알아야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1. 유전자는 단백질을 생성하는 데 필요한 설명서를 담고 있으며 이 설명서는 모든 생물체에 있어서 똑같은 분자들만의 언어로 쓰여져 있다.
2. 단백질은 분자들을 운반하거나 화학적 반응을 조절하는 것과 같은 세포 기능을 수행하고, 이 기능들은 단백질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
 3. DNA의 염기 서열은 종마다 (또는 개인마다 다르고, 이러한 다양성 은 서로 다른 유전적 구조가 어떻게 서로 다른 형태 구조를 이루게 되는지를 알려준다.
4. 환경적 요인들은 유전자 변이를 일으키며 유전자 발현도 바꿀 수 있다.
- 유전자가 우리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보다 유전자에 대한 믿음이 우 리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크다. 이를테면 수학 성취도의 경우, 선 천적인 성별에 따라 수학 성취도에 차이가 생긴다는 증거는 약하나, 사 회적으로 부과되는 성별에 따라 차이가 생긴다는 증거는 강하다." 과학 자들은 유전자가 행동에 미치는 영향이 제한적이라는 것도 밝혀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유전의 영향력이 조금이라도 존재한다는 인식 자체가 우리를 운명론자로 이끈다. 우리의 유전자는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지 않으나, 유전자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이를 허용한다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할지도 모른다.

- 자연 현상에 대한 지식 중 인간이 진화 과정에서 얻게 된 선천적 지식이 있다면 그것은 질병에 대한 지식일 것이다. 병균과 기생충은 생존과 번 식을 위협하기 때문에 병을 피하는 것은 진화론적 관점에서 분명히 이 로운 일이다. 그리고 실제로 전 세계 공통적으로 인류는 병균과 기생충 을 포함하고 있는 것에 대해 혐오감을 가진다. 신체 분비물(토사물, 배설 물), 신체 분비액(침, 땀), 신체를 감싸는 표면의 침입(신체의 훼손과 피), 눈 에 띄는 감염의 증상살이 붓고, 색이 변하는 것), 기생충(진드기, 구더기), 그 리고 부패한 유기물(썩은 고기, 상한 우유)이 그것이다.
이러한 것들을 접했을 때 우리가 짓는 표정은 전 세계 누구든 그것이 혐오감을 나타내는 표정임을 알아볼 수 있다. 이 표정은 찌푸린 코와 쑥 내민 혀가 특징인데, 그 두 가지 특징은 실제로 도움이 된다. 찌푸린 코 는 오염된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을 제한하며, 내민 혀는 입으로부터 오 염된 물질을 뱉어내게 한다.

- 균과 병의 관계는 어른들에게도 분명하지 않다. 흔히들 추위에 노출되 면 감기에 걸린다고 생각한다. 동서양 문화권을 막론하고 어른들은 이 러한 생각을 갖고 있어서, 감기를 쫓는 방법으로 무거운 외투, 두꺼운 목도리, 그리고 따뜻한 양말을 처방하곤 한다. 그러나 단순히 추위에 노 출되는 것만으로 감기에 걸리는 확률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면역학 자들은 한 세기에 걸친 여러 연구들을 통해 추위와 감기는 상관성이 없 다고 밝혔다." 추위로 인해 감기에 걸려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그 저 할머니들이 하는 이야기, 또는 심리학자들의 용어를 빌리자면 '민간 신앙 folk belief'에 지나지 않는다.
병에 대한 민간신앙은 질병의 전염에 대한 어떠한 지식도 요하지 않 으면서도 예방책을 제공하기 때문에 호소력이 있다. 병이 균으로 인해 생긴다고 믿든지 또는 4체액에 의해서 발생한다고 생각하든지 상관없 이, 누구든 몸을 따뜻하게 하고, 공기를 건조하게 유지하라는 조언을 따 를 수 있다. 그러나 민간신앙은 틀릴 때가 많으며, 따라서 그에 따른 처 방법 또한 종종 부적절하다. 병의 인과 관계에 대한 지식만이 건강을 지 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 테리 오의 연구들에서, 감기와 독감의 미생물적인 특성에 대해 배운 아 이들은 더이상 전염병의 원인으로 추운 날씨와 습한 기후를 거론하진 않았지만, 전염병의 원인에 대한 또 다른 '민간신앙'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초자연적인 특성의 민간신앙이었다. 여기서 질병 은 속세의 영역을 넘어서 신, 천사, 조상, 그리고 영혼과 관련된 문제로 여겨진다.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에게 병으로부터의 해방은 그들이 신에게 올리는 가장 흔한 기도 중 하나다." 이들은 폐렴이나 간염과 같은 전염병 을 치료하는 데 있어서도 신의 도움을 구한다. 이는 그들이 세균에 의 해 전염병이 발생한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신과 세균을 상호 보완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신은 인간의 건강을 관장하는 원 격적 행위자이고 세균은 근접적 행위자다. 다시 말하면, 신은 왜 우리가 병에 걸리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고, 균은 우리가 어떻게 병에 걸리 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서구인들은 병에서 낫게 해달라고 신에게 기도를 올리는 것은 별로 이상하게 여기지 않지만, 결핵이 마법에 의한 것이라는 미국 남부 크리 올Creole 사람들의 믿음, 간질이 귀신에 씌어서 생기는 것이라는 먀오족 의 믿음, 에이즈AIDS가 주술에 의해 걸리는 병이라는 아프리카인들의 믿음 등 다른 문화권에서 나타나는 초자연적인 믿음은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믿음들이 신이 인간의 건강에 관여한다는 유대-기독교 믿음과 같은 형태를 지니고 같은 역할을 한다 는 것을 발견했다.

- 진화론이 제공하는 가장 심오한 통찰 중 하나는 모든 삶의 형태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구상의 모든 유기체는 공통조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인간은 유인원 및 원숭이뿐만 아니라 참새, 개구리, 해파 리, 그리고 해조류와도 공통된 조상을 갖고 있다. 인간과 해조류의 공통 조상은 아주 오래전, 수십억 년 전에 살고 있었으며 인간보다는 해조류 와 분명 더 많이 닮아 있었다. 아무도 이 조상의 표본을 발견하지 못했 으나, 인간과 해조류가 세포 단계에서 너무나 흡사한 이유를 설명할 다 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공통의 조상이 존재했다고 확신한다. 인 간과 해조류는 유전적 정보를 전달하는 메커니즘(DNA와 RNA)은 물론, 염색체, 리보솜, 미토콘드리아, 그리고 소포체를 공유한다.
공통조상은 생물계와 그 속에서의 인간의 위치를 이해함에 있어서 심 오한 함의를 지닌다. 생물학자들은 수십 년간 이러한 함의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하지만 생물학자가 아닌 대부분의 사람은 종들은 아 주 극소하게만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의미들에 대해 별 관심을 갖지 않는다. 본질론적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이 다른 영장류들과 근본적인 본질을 공유한다는 것은 있을 법한 얘기로 들리지만, 인간이 해파리나 해조류와 근본적인 본질을 공유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 창조론적 설명은 인간 역사상 줄곧 각광받아 왔고, 여기에는 그럴 만 한 이유가 있다. 창조는 진화보다 훨씬 더 단순하기 때문이다. 창조는 한 번에 일어나는 것인 반면, 진화는 더디고 복잡하다. 창조는 우리에게 익숙한 의도적 설계 과정을 거쳐 일어나지만, 이에 반해 진화는 변이와 선택이라는 그다지 잘 이해되지 않는 과정을 거쳐 일어난다. 창조는 완 벽한 형태를 낳는 반면에, 진화는 생존에 적합한 형태를 낳는다. 그리고 창조는 종이 영원하다는 것을 함의하는 반면, 진화는 종이 상당 부분 예 측 불가능한 방식으로 변화해왔고 그리고 계속해서 변하고 있다는 사실 을 함의한다.
창조는 진화보다 간단하기 때문에, 아이들은 종의 기원에 대한 설명 으로 창조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유치원생이나 어린 초등학생들에게 어디서 도마뱀이 처음 생겨났는지, 또는 어디서 곰이 처음 생겨났는지 물어보면, 대체로 창조-신에 의한 창조("신이 동물을 만들었다."), 혹은 그 보다 덜 구체적인 형태의 창조("무언가가 만들었다." "누군가가 만들었다." "어 느 날 그냥 나타났다."를 언급한다." 이것은 진화가 하나의 선택 답변으 로 제시되었을 때 "신이 만들었을까, 아니면 다른 형태의 동물로부터 변화되었 을까?")도 마찬가지다. 가장 놀라운 것은, 아이들은 그들의 부모들의 믿 음(창조론이냐 진화론이냐)과 상관없이 창조적 설명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즉, 그들의 부모가 같은 질문에 대해 진화를 언급한다 할지라도 아이들은 창조를 언급한다.
창조론에 대한 어린이들의 선호는 이후 신학적으로 더욱 정교한 믿음 체계(예: 창세기에 묘사되는 창조에 걸린 7일)로 이어진다. 이러한 믿음들은 결국 아이들이 자라서 진화를 받아들이는 것을 차단시키는 식으로 영향 을 준다. 몇몇의 연구'에 따르면 진화에 대한 회의적 태도를 가장 잘 예 측하는 지표는 종교적 믿음인 것으로 나타났다. 종교는 나이, 성별, 교육 수준, 정치적 견해, 유전학에 대한 지식, 분석적인 사고력, 그리고 과학 에 대한 태도보다도 진화에 대한 태도를 더 잘 예측한다.
- 자연에서 인간의 위치에 대한 진화적 해석은 종교적 관점에서는 불 쾌하게 느껴질지 모르나, 세속의 관점에서 볼 때 오히려 삶에 대한 의욕 을 고취시킬 수 있다. 인간이 생명이라는 거대한 나무의 수백만 가지 중 하나의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은 자연에 대한 일체감을 주고 자 연 보존을 위한 행동을 촉구할 수 있다. 인간이 물질로 이루어졌다는 생 각은 지금 바로 이 순간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돕고, 자아이해와 자아 실현을 촉구할 수 있다. 또한 삶이 본질적으로 불공평하다는 생각은 광 범위한 차별 행위를 자각하게 하고, 사회 정의를 위한 행동에 나서게 할 수 있다.
진화론자들은 악인 중에서도 가장 악한 사람"혐오스러운, 추악한, 똥 무더기"-으로 책망받았다. 그러나 진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결코 잔 인함, 이기심, 또는 방관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 반대로, 인간의 존 재를 소중하고 경이로운 선물로 받아들이고,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이 선물을 최대한 알차게 활용하는 쪽으로 이끈다.
- 보통 사람들은 전혀 조심스러워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가 실제로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무지 개나 다른 자연 현상들(예: 지진, 혜성, 조류)에 대한 그들 자신의 이해력을 평가해보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간 정도의" 이해력(4 정도)으 로 평가한다. 그런 후, 사람들에게 이 현상들에 대해 설명해달라고 하면 (예: "자 그럼, 무지개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말씀해주시겠어요?"), 스스로의 이해 력에 대한 자신감이 4에서 3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이들이 가진 지식의 수준을 진단하기 위한 질문을 하면 "왜 무지개는 일직선이 아니라 아치형일까 요? 왜 무지개의 색들은 항상 같은 순서로 나타날까요?", 그들의 자신감은 3에 서 2로 떨어진다.
자연 현상에 대한 스스로의 이해를 과대평가하는 경향은 '설명적 깊 이에 대한 착각illusion of explanatory depth'이라고 불린다. 이는 직관적 이론 에 바탕을 둔 우리의 설명적 지식이 실제 그런 것보다 더 깊다고 여기는 착각이다. 이 착각은 4살부터 40살에 이르는 다양한 나이대의 사람들 에게서 나타나며, 과학을 그다지 많이 접해보지 못한 사람들부터 대학 원 수준의 교육을 받은 사람까지, 다양한 교육 수준의 사람들에게서 나 타난다. 관련 영역에 관해 상당한 수준의 직접적 경험을 쌓은 사람들도 마찬가지다(예: 사이클링 선수에게 자전거의 역학을 설명해보라고 했을 때)? 나 는 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은 이 분야의 전문가임에도 불구하고, 심리학 주제들에 대해 새로운 강의를 준비할 때마다 어김없이 설명적 깊이의 착각에 빠진다. 한 시간 분량의 수업을 꽉 채울 만큼 수업 주제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다고 확신하면서 강의 준비를 시작하지만, 금세 내가 가 진 지식이 5분 분량의 강의를 할 만큼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 다. 내가 처음 교수로 부임하고 1년간은 설명적 깊이의 착각으로의 힘 들고도 긴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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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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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이론이 얼마나 훌륭한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당신이 얼마나 똑똑한지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실험과 일치하지 않으면 잘못된 것이다." (리처드 파인만 Richard Feynman)

- 뉴로해킹에는 규칙이 많지 않다. 다만 안전하고 효과적인 뉴로해킹에는 네 가지 원칙이 있다. 나는 그것을 '뉴로해커의 신조'라고 부른다.
1. 뉴로해커는 자가 실험을 설계한다. 뉴로해커는 누군가 특정 방법으 로 정신적 성과를 높였다고 해서 그 방법이 자신의 정신적 성과 또 한 향상시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특정 방법의 사용 전과 후에 자신의 정신적 성과를 측정한다. 이런 검사와 평가 과정은 자 기 이해와 자기계발로 가는 통제 가능한 경로를 제공한다.
2. 뉴로해커는 검사와 개입을 주의 깊게 선택한다. 뉴로해커는 호기심 이 많지만 신중하다. 그들은 가장 타당하고 믿을 만한 검사를 택하 며, 개입을 시도하기 전에 자신을 검사한다. 두 가지 개입이 비슷 한 효과를 가져오리라 예측된다면, 뉴로해커는 부작용이 가장 적은 개입을 선택한다.
3. 뉴로해커는 자가 실험을 일반화시키지 않는다. 뉴로해커는 모두의
두뇌가 다르고 모두의 라이프 스타일이 다르며 모두의 목표가 다 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고도로 개인화된 실험이야말로 가장 성 공적인 자가 실험이다. 뉴로해커는 각자로부터 혹은 광범위한 연 구들로부터 배움을 얻지만 같은 계획을 따르는 두 사람이 정확하 게 같은 결과를 얻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4. 뉴로해커라고 해서 무조건 혼자 일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뉴로커 는 자가 실험을 설계할 때 교사, 의사, 치료사, 기타 전문가들과 협 력한다. 또한 동료들, 즉 나름대로 뉴로해킹의 길을 가고 있는 모 험가와 함께 일하기도 한다. 짝을 지어 혹은 여러 명이 함께 하는 뉴로해킹은 모두가 책임의식을 잃지 않게 해주며 자가 실험을 즐 거운 경험으로 만들어준다.

- "인생에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없다. 다만 이해해야 할 것이 있을 뿐이다. 지금은 두려움을 덜기 위해서 더 많은 이해가 필요한 때이다." (마리 퀴리 Marie Curie)

- 인기를 끄는 식이요법들은 특정 식품군을 배제하는 경우가 많아 영양 결핍의 위험을 높인다. 채식주의자거나, 글루텐을 섭취하지 않거나, 저 탄수화물, 팔레오, 케토 식단을 따르는 사람들은 영양 결핍의 위험이 높 다. 예를 들어 근력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근육 크기를 키우고 순발력을 높이기 위해 사용하는 물질인 크레아틴creatine은 아데노신 3인산adenosine triphosphate을 생성하는 능력에 큰 영향을 미친다. 아데노신 3인산은 근육 이나 두뇌가 심한 노동을 할 때 도움을 주는 물질이다. 천연으로 크레아 틴을 얻을 수 있는 음식은 붉은 고기이기 때문에 채식을 하는 사람들은 크레아틴을 얻기가 힘들다. 여러 연구가 크레아틴 보충제 섭취로 채식주의자들의 추론 능력과 작업 기억이 눈에 띄게 높아졌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고령자들은 동물성 단백질을 덜 소비하므로 크레아틴 결핍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실천하고 있는 식이요법이 당신에게 잘 맞다면 굳이 중단할 필요는 없다. 다만 주요 비타민과 미네랄의 혈중 수치를 주기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좋겠다.

- 그가 가끔씩 던지는 질문을 통해 그가 친구들의 이야기를 매우 주의 깊게 듣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의 주장을 종합하면서도 우리의 생각을 새로운 방향으로 살피게끔 유도하는 질문 들이었다.
그는 우리 토론의 큰 그림을 볼 뿐 아니라 세부 사항에도 관심을 가졌 고 대화 과정에서 우리 중 누가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까지 기억했다. 한 번에 대단히 많은 것을 마음속에 담아내는 능력, 다른 사람이 편견에 치 우치지 않도록 자신의 의견을 억누르는 능력, 대화의 한 부분에서 다음 부분으로 유연하게 넘어가는 능력, 이렇게 세 가지 능력이 눈에 띄었다. 그는 우리의 표정을 지켜보고, 우리 주장의 경중을 가늠하고, 일종의 내 부평가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매우 빠르면서도 쉽 게 진행되는 듯했다.
- 그의 이러한 능력들을 관찰하면서 나는 세 가지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의 마음속에는 남들보다 큰 공간이 있어서 큰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처럼 특정한 순간과 관련된 모든 정보를 수용할 수 있는 것일까? 그는 어떻게 보통의 아이들보다 강한 자제력을 발휘하는 것일까? 그는 정신의 '변속 기어'를 더 빨리 바꿀수 있는 것일까?
이미 짐작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소년의 성은 '저커버그'였다. 몇 년 후 그는 페이스북을 만들었다. 고등학교 때의 토론이 그의 사업 경로에 어 떤 영향을 주었는지도 아무도 모를 일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려고 하는 건 페이스북의 홍보도, 비판도 아니다. 오래전 그가 '실행 기능'이라는 정 신 능력의 핵심적인 세 가지 측면을 보여줬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 이다. 마크가 보여주었던 이 세 가지 측면, 즉 마음속에 현재 가장 적절한 정보를 담아 두는 큰 공간, 자신의 의견을 필요할 때까지 억누르는 능력, 인상적인 정신적 유연성은 모두가 실행 기능의 핵심 요소다.
- 실행 기능은 그 이름이 암시하듯이 두뇌의 다른 능력들을 책임지는 정신 능력이다. 우리 두뇌의 '경영진'은 하루 종일 무슨 일을 할까? 그들 은 CEO처럼 계획을 세우고, 결정을 하고, 오류를 바로잡고, 문제를 해결 한다. 그들은 예상치 못한 상황을 처리하고 두뇌의 다른 부분이 끙끙대 며 처리하는 과제를 감시하고 필요하다면 그 해결에 개입한다. 그들은 외부 세계의 위협과 기회에 주의를 기울이고, 새로운 정보를 정리하고 이해하려 노력하며, 그것을 이전의 경험들과 비교한다.
- 실행 기능이 CEO라면 그 CEO는 내가 'WIF 팀'이라고 부르는 능력들, 즉 작업 기억working memory, w, 억제 inhibition, I, 정신적 유연성 mental flexibility, F이라는 하위 능력들을 데리고 다닌다.
'작업 기억'은 정보를 마음속에 저장할 뿐 아니라 적절히 처리하는 능 력이다. 전화번호를 듣고 마음속에 저장된 숫자를 전화기에 입력해야 할 때, 큰 수를 종이와 펜 없이 곱할 때, 당신이 귀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고 생각해서 자신이 한 이야기를 반복해보라고 청하는 사람에게 그 요청 대로 이야기를 할 때 이 능력이 발휘된다. '억제'는 농담의 반전 부분을 발설하지 않게 하고 다이어트를 할 때 케이크 대신 샐러드를 선택하게 하며 쓸데없는 동영상을 보는 대신 중요한 이메일에 집중하게 한다. '유 연성'은 하나의 아이디어에서 다른 아이디어로 주의를 이동시키고, 필요하다면 여러 개의 아이디어를 한 번에 통합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 능력 은 이메일을 체크하다가 다른 일로 전환하거나, 다양한 곳에서 얻은 아 이디어를 종합하면서 보고서를 쓸 때 등장한다. 그리고 이 세 능력을 합 친 실행 기능은 지속적인 집중, 목표 지향, 여러 과제를 순차적으로 처리 하는 능력, 체계를 유지하는 능력, 새로운 과제를 다루는 능력을 준다.
실행 기능이 하는 역할에는 각성 수준(얼마나 명료한 상태인지, 얼마나 몰두하고 있는지)을 감시해서 당신을 안전하고 효율적인 상태에 두는 것 도 있다. 그런 이유로 각성 수준을 분석해 어려운 과제를 얼마나 잘 처리 할 수 있는지를 예측할 수 있다. 지나친 불안감을 가질 때는 매우 단순한 과제만을 완성할 수 있다. 하지만 매우 졸린 상태라면 그조차도 힘들 것 이다. 어려운 과제에 성공하고 싶다면 지나치지 않은 중간 정도의 각성 이 필요하다.

- 감정 조절 능력이 강한 사람은 두 가지 본질적인 특성을 갖는다.
*감정 표현을 지연시키는 능력: 예를 들어 장례식에서 갑자기 웃고 싶은 기분이 들었더라도 그들은 자신을 통제한다. 그렇지만 상황이 허락하면 그들은 웃음, 눈물 등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현한다.
*자신의 감정, 사고, 생리에 영향을 미치는 능력: 감정 조절에 어려움을 겪 는 사람은 중요한 발표를 앞두고 긴장으로 심장이 뛰는 것을 죽음이 임 박했다는 신호로 해석하여 한층 더 불안감을 느낀다. 반면에 발표를 앞 둔 초조함을 알아차리고 자신에게 가슴이 뛰는 건 내가 무척 기민하고 예리한 상태라는 의미야 아주 좋아!"라고 말하는 것은 효과적인 감정 조절이다. 감정 조절을 잘하는 사람은 이렇게 상황을 재규정함으로써 차분하고 꾸준하게 성과를 향상시킨다.
- 감정이 격앙된 상황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4단계 방법이 있다. 성공적인 감정 조절을 위해서는 벌어지는 각 단계를 인식하고 각 시점에서 의식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
*1단계. 인식: 감정이 격앙된 상태임을 깨닫는다. 예를 들면 손바닥이 축축한 것을 느끼며 자신이 긴장했음을 알아차린다.
*2단계. 선택: 상황 안에서 무엇에 주의를 기울일지 선택한다.
*3단계. 해석: 상황을 어떻게 해석할지 선택한다.
*4단계, 반응: 상황에 대한 반응을 선택한다.

- IQ 외에 특정 유형의 사고가 새로운 아이디어와 발명, 새로운 시각을 도출하기도 한다. 선형적 사고는 논리와 추론에 연관되는 반면, 창의성 은 가능한 많은 해법을 만들어냄으로써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산출하는 확산적 사고 divergent thinking, 대상을 다른 시각에서 봄으로써 문제를 해결 하는 수평적 사고lateral thinking, 수렴적 사고 convergent thinking, 혹은 종합적 사고 synthetical thinking와 연관된다. 또한 사고의 능숙도(아이디어가 얼마나 뛰어난지와 상관없이 아이디어를 얼마나 빨리 생각하고 얼마나 많이 떠올리는지 에 대한 것)도 창의성과 연관이 있다.
- 베스트셀러 작가인 스티븐 킹 Stephen King 은 이렇게 말했다.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라면 양이 질을 보장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양이 절대 질로 이어질 수 없다고 말한다면, 그건 우월감에 젖은 무의미 한 주장이며 명백히 사실이 아니다.""
우리가 역사상 가장 창의적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은 커리어를 이어가면서 놀라운 수의 작품을 내놓았다. 찰스 다윈은 120편의 논문을 발표했고,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250편,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330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토머스 에디슨은 2,000개에 가까운 발명품에 대한 특 허를 가지고 있었다.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1,000편 이상의 작품을 썼 다. 파블로 피카소는 2만점의 그림, 조각, 드로잉을 남겼다."

- "세상의 중요한 업적 중 대부분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도전한 사람들이 이룬 것이다." (데일 카네기 Dale Carnegie)

- 위약이 어떻게 효과를 내는지 설명하는 데에는 몇 가지 다른 기제가 있는 것 같다. 그중 세 가지를 알아보자.
먼저 통증 경감의 경우, 위약이 두뇌의 오피오이드opioid 시스템을 통 해 우리 몸의 천연 진통제 중 하나인 엔도르핀endorphin 이 분비되도록 자극한다." 손가락을 심하게 베였을 때 고통이 계속되지 않고 시간이 좀 지난 후에 통증이 줄어드는 느낌을 받은 적 있는가? 신체에서 만들어진 진통제 덕분이다. 위약은 기분, 수면, 식욕을 조절하는 세로토닌serotonin 같은 화학전달물질(신경전달물질)이나 보상을 조절하는 도파민 dopamine 같은 두뇌의 화학전달물질을 자극하는 것 같다." 도파민 분비는 파킨슨 병이 위약에 반응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파킨슨병의 원인 중 하나는 도파민을 분비하는 흑질 내부 뉴런의 퇴행이다. 따라서 위약과 연관된 도파민의 방출은 경직, 안정시떨림, 운동협응 저하 등 파킨슨병이 보이 는 주요 증상들의 근원인 도파민 부족에 대항하는 역할을 한다. 우울증 도 위약에 반응하는데, 이는 세로토닌의 역할 때문인 듯하다. 효과가 좋 은 일부 항우울제는 뇌의 세로토닌 수치를 높이는 작용을 한다. 위약 연 구의 선봉에 선 하버드 의과대학의 테드 캡트척Ted Kaptchuk과 그의 동료 들은 위약이 바로 그런 세로토닌 매개 경로로 작용함으로써 우울증 치료 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 위약의 형태도 효과에 영향을 미칠까?
2016년 나는 하버드 대학에서 테드 캡트척의 강연을 들었다. 캡트척 은 위약 효과에서는 세부적인 사항들이 매우 중요하며 이때 문화의 영향 을 많이 받는다고 강조했다. 일부 국가(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알약이 생 의학적 장치를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큰 위약 효과를 낸다. 일부 문화에 서는 주사가 가장 효과가 좋다. 흰 가운과 벽에 걸린 학위증은 병원 방문 의 효과를 높일 수 있다. 적절한 가격 책정도 차이를 만든다. 듀크 대학 의 댄 애리얼리Dan Ariely가 진행한 연구에 의하면 참가자들은 저렴한 약 보다는 고가의 약에서 더 큰 위약 효과를 경험했다. "
캡트척의 연구 논문을 더 읽으면서 나는 사용된 가짜 알약의 색상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흥분제로는 붉은색의 위약이 가장 좋은 효과를 냈고, 제산제로는 흰색 알약이, 긴장을 푸는 항불안제에는 녹색 이, 밝은 기분을 가져오는 데에는 노란색 알약의 효과가 가장 좋았다."
- 위약은 집중력도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다
옷도 위약 효과를 만든다. 옷이 실제로 사람의 정신적 성과에 변화를 준다는 사실을 여러 연구가 밝혀낸 바 있다. 가장 연구가 활발한 항목은 제복, 부적(행운의 목걸이나 팔찌 같은), 행운의 양말이다. 이상하게도 미신에서 비롯된 이런 물건들이 실제 효과를 가져온다. 사람들이 믿음을 가 진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참가자들에게 무작위로 주의력 과제를 할당 한 한 연구를 살펴보자. 피험자들 일부는 실험실 가운을 입고 과제를 수 행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가운을 입지 않았다. 실험 결과 가운을 입은 사 람들의 성과가 더 좋았다. 후속 연구에서는 참가자를 임의로 두 그룹으 로 나눈 뒤, 한 그룹에는 그 흰 가운이 어떤 의사의 것이었다고 말하고 다 른 그룹에는 화가의 것이었다고 말해주었다. 의사의 가운이라는 이야기 를 들은 참가자들은 화가의 가운이었다는 말을 들은 참가자들보다 집중 력 과제에서 더 좋은 성적을 거뒀다. 18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연구자들은 참가자들이 전형적으로 과학자와 의사의 복장인 연구실 가운을 주의력과 연관시켰다고 추정했 다. 실험실 가운이나 의사 가운을 입은 참가자들은 그들이 상상하는 과 학자나 의사처럼 사고했을지도 모른다. 주의 깊고 조심스럽게 말이다. 만약 연구자들이 창의적인 과제를 맡겼다면 화가의 가운을 입고 있다는 말을 들은 참가자들이 더 좋은 성과를 냈을 수도 있다.
- 모든 사람이 위약에 반응할까?
논문 <강력한 위약>이 발표된 1955년부터 헨리 비처는 위약에 반응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 많은 실험 들이 이어졌고 연구자들은 반응을 보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 에는 심리적 및 생물학적으로 차이가 있으며 이를 통해 반응을 예상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어쩌면 심리학적 차이는 그리 놀랍게 느껴 지지 않을 수도 있다. 실제로 위약에 반응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경험에 대한 개방성이 높고 내수용 자각 interoceptive awareness, 즉 체내에서 일어나 는 자극이나 변화를 감지하는 자기 인식적 특성이 강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생물학적으로도 유의미한 차이가 있었다." 특정 신경해부학적, 신경생리학적 요인으로 위약 치료에 대한 개인의 반응을 예측할 수 있었 던 것이다. 또한 도파민 수치가 높은 유전적 변이형을 가진 사람들은 통 증 증상을 완화하는 위약 치료로 효과를 볼 가능성이 더 높았다.
- 정신과 의사이자 하버드 의과대학의 교수인 존 레이티 John Ratey와 과학저술가 에릭 헤이거먼Eric Hagerman 이 쓴 《운동화 신은 뇌》에서 내가 가 장 좋아하는 부분은 걷거나 뛰거나 전력 질주를 할 때 일어나는 생물학 적 변화를 다룬 챕터다. 이 부분에서는 움직임의 강도에 따른 효과를 철 저히 조사한다.
- 걷기 : 만족감을 주는 선택
레이티와 헤이거먼은 심박수의 55~65퍼센트로 걷는 것이 기분을 좋 게 만드는 이유를 설명한다. 이런 저강도 운동 중에 사람은 지방 연소상 태에 있게 되며, 이는 혈류 내 유리 트립토판 free tryptophan 의 양을 증가시킨다. 트립토판은 만족과 행복의 감정을 준다고 알려진 신경전달물질로, 세로토닌의 전구물질일 뿐만 아니라 노르에피네프린 norepinephrine과 도 파민이 분비되는 방식도 변화시키는 물질이다. 세로토닌의 증가와 노르 에피네프린이 주의력에 미치는 역할, 도파민이 동기 부여에 미치는 역할 을 결합시키면, 우리 조상들의 뇌가 왜 산책을 즐기도록 진화했는지 알 수 있다.
조깅: 당장은 스트레스, 이후에는 걱정 완화
조깅(혹은 최대 심박수 65~75퍼센트 정도의 중강도 운동)은 특유의 효능 을 갖고 있다. 중강도 운동은 기본적으로 스트레스 훈련이다. 중강도 운동 중에 아드레날린adrenalin 과 코르티솔이 혈류로 주입되기 때문에 신체 의 회복력이 향상된다. 당신의 몸은 스트레스 반응의 일환으로 그런 화 학물질의 조절에 나서는데 그것을 조절하는 부분이 시상하부 뇌하수체 축이다. 뇌유래신경영양인자brain-derived neurotropic factor, BDNF (레이티가 두 뇌가 가진 '기적의 분자' miracle-Gro라고 부르는)는 새로운 뉴런의 구성 요소 로, 이 역시 신경 회로 강화에 관여한다. 심근에 의해 생성되는 펩타이드 호르몬인 심방나트륨이뇨펩티드 atrial natriuretic peptide 도 스트레스 완화에 도움을 준다. 엔도르핀과 엔도칸나비노이드 endocannabinoids는 통증을 줄 이고 차분함을 증가시킨다.
- 달리기 혹은 전력 질주: 당장은 고통, 이후에는 더 큰 성장
고강도 운동(예를 들어 최대 심박수의 75~90퍼센트에 달하는)을 하면 몸 은 당신이 위기 상황에 처했다고 생각한다. 혐기성 구간(혈류에서 구할 수 있는 에너지뿐 아니라 근육에 저장된 에너지까지 사용하는)에 진입하면 뇌하 수체는 인체성장호르몬 human growth hormone, HGH의 분비를 자극한다. HGH는 두뇌의 크기를 증가시키고 위에서 언급한 많은 성장 인자들을 관리하고, 신경전달물질 수치를 조절하고, 뉴런의 성장을 촉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HGH는 운동을 마친 후 몇 시간 동안 혈류 속에 존 재하며 열심히 활동을 한다. 레이티와 헤이거먼은 《운동화 신은 뇌》에서 영국 바스 대학에서 이루어진 연구에 대해 설명한다. 30분 동안 전력으 로 자전거를 탄 단 한 번의 운동으로 HGH가 600퍼센트 상승했다. 또한 HGH의 상승은 운동 후 2시간동안 계속 이어졌다.

- 자제력을 키우고 싶다면 운동이 답이다
감정 조절은 기본적으로 감정과 행동의 통제에 관한 일이다. 놀랍게도 운동은 장기적으로 자제력 또한 높이는 것으로 밝혀졌다. 오스트레일리 아 맥쿼리 대학의 연구자들은 참가자들에게 4개월 동안 자신의 행동을 추적하게 했다." 2개월 후, 참가자들은 규칙적인 운동 요법을 시작했다. 참가자들은 자제력의 여러 측면에서 '통제 기간'에 비해 상당한 개선을 경험했다. 스트레스, 감정적 고통, 흡연, 알코올, 카페인 소비가 감소했 고, 보다 몸에 좋은 음식을 먹었고, 자신의 감정을 보다 잘 조절하고, 집 안일을 더 많이 하고, 약속을 잘 지키고, 학습 습관을 개선하고, 지출을 보다 잘 관리했다고 보고했다.

- 빛의 색깔은 빛에 대한 뇌의 반응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밤늦게 컴퓨 터 화면을 보는 것이 숙면에 좋지 않다는 얘기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시 차를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햇볕을 쬐는 것이라는 이야기도 익숙할 테다. 태양은 자연적인 청색광의 원천이며, 우리는 청색광의 양과 시간 대를 연관시키도록 진화해왔다. 한낮의 눈부신 빛과 대조되는 따뜻한 주황색의 석양을 생각해보라. 우리의 일주기 리듬은 이렇게 색에 기반 한 변화에 맞춰져 있다. 밤늦도록 컴퓨터를 하거나 스마트폰을 쳐다보는 것이 불면증으로 이어지는 이유는 컴퓨터 화면에서 나오는 청색광 때 문에 뇌가 지금을 한낮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잠이 오지 않 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잠자리에 들기 전 마지막 1시간 동안 청색 광을 차단하는 주황색 렌즈의 안경을 쓴다. 또 컴퓨터 화면 조명을 시간 대에 따라 짧은 파장(파란색)에서 긴 파장(노란색과 빨간색)으로 부드럽게 바꿔주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사용한다. 잠자리에 들 때쯤이면 컴퓨 터 화면이 호박색이 된다. 이런 기능을 하는 많은 소프트웨어 프로그램 들이 있다. 나는 수년 동안 노트북과 전화기에 무료 프로그램을 사용했 다. 설정에서 색상 전환 타이머를 변경할 수 있다.

-인간의 뇌는 매시간마다 매우 다른 뇌파를 보여주는데, 특정한 뇌파 가 많이 발생하는 것은 특정한 정신적 상태와 연관되는 경우가 많다. 초 당 주파수가 8~12헤르츠인 알파파는 이완과 차분한 집중의 상태와 연 관되며 스트레스와 불안을 많이 느끼는 사람들은 알파파를 늘리는 것이 좋다.
불균형한 베타파의 출현은 각성과 문제 해결 상태와 연결된다. 어린 이들의 뇌파를 들여다보면 TV를 볼 때보다 수학 숙제를 할 때 더 많은 베타파가 출현함을 볼 수 있다. 감마파가 많은 것은 심도 높은 학습이나 창의성과 연관된다.

- '공부'와 '게임'은 더 이상 적이 아니다!
특정 유형의 비디오 게임은 뇌의 물리적 변화와 실행 기능의 개선을 가 져온다. 앞서 논의했듯이, 게임을 하지 않다가 비디오 게임을 시작한 사 람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은 게임이 피질 영역을 두껍게 만들고 특정 두 뇌 네트워크의 효율을 높인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게임 과 관계가 없는 다른 성과로의 전환 또한 가능함을 알려주었다. 즉 게임 을 하는 사람들은 겉으로는 게임과 아무 관련 없어 보이는 인지 검사에 서도 성적의 향상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 게임은 직접적으로 감정을 변화시킨다
게임은 가끔 이전의 생각에서 주의를 돌리게 함으로써 이전에 느끼고 있던 감정을 게임이 불러온 감정으로 대체시킨다. 이런 관심 돌리기 혹 은 '감정 대체'emotion replacement가 어떻게 감정에 대한 더 나은 통제력을 얻는 데 도움을 줄까? 이런 감정 대체가 일어난다는 것을 미리 알고 의도적으로 게임을 도구로 이용하는 데에서 효과가 나타난다. 나는 남편 에게 직장에서 스트레스가 많은 기간에 게임을 하는 버릇이 생긴 이유를 물었다. 그는 게임을 스트레스에 대한 '구급약'으로 이용한다고 설명했 다. 그는 이 특정한 문제가 단기적이라는 점(직장에서라면 힘든 시기도 거 쳐야 하지만 이런 시기가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다)을 알고 있다. 그 사이에 남편은 의도적으로 게임을 통한 관심 돌리기와 인위적인 감정 고양을 단 기적인 대처 기제로 사용했던 것이다.
- 1. 신경 자극을 위한 방법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 가장 안전하고, 저렴하 고, 연구가 많이 이루어져 있으며, 이용하기 가장 쉬운 것은 경두개직류 자극, 즉 tDCS이다. tDCS에서는 아주 적은 양의 전류를 두뇌에 보낸다. 
2. 특정 tDCS 프로토콜은 실행 기능, 감정 조절, 학습 및 기억력, 창의성 증진에 도움을 주었다.
3. tDCS는 부작용이 많지 않지만 섬광을 보는 것, 약한 피부 자극 및 화상, 두통이 나타날 수 있다.

- 누트로픽 제조업체만이 아닌 보충제와 비타민 업체 전체가 제품의 신 뢰성과 순도에 대해서 비난을 받기 시작했다. 과거의 나는 '두뇌 활성 비 타민'이나 보충제 섭취로 마주할 수 있는 위험이 기껏해야 아무 효과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많은 제품이 두뇌에 전혀 효과를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약물이 혈액-두뇌 장벽을 통과할 수 없기 때 문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실수로 너무 많은 양을 복용했을 경우 그저 소 변으로 배출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가정은 대 부분 틀렸다. 혈액-두뇌 장벽을 지나는 화합물은 극히 적지만 일부 화합 물은 체내에 남아 축적된다.
- 보충제 업계는 규제에서 비교적 자유롭기 때문에 일부 기업은 알츠하 이머와 같은 심각한 질병을 고칠 수 있다고 과학적 근거가 없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2019년 FDA와 미국연방거래위원회 Federal Trade Commission, FTC는 여러 제조업체에 허위 광고를 중단하라고 경고했고 소비자들에게 보충제 복용에 각별히 유의할 것을 당부했다.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고 주장하는 누트로픽 회사가 내놓는 연구 결과를 읽을 때면 그들의 술 책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거의 모든 연구가 인간이 아닌 쥐를 대상으 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게 왜 문제가 될까? 생의학 연구는 보통 동물 실험에서 시작하지만 결국에는 인간에게 효능이 있다는 것을 반드시 증 명해야 한다. 여러 가지 이유로 쥐의 뇌에는 좋은 효과를 보이지만 인간 의 두뇌에 적용되었을 때는 효과가 상당히 떨어지는 개입이 많다. 이런 실패율은 주요 제약사들이 두뇌에 좋은 신약 개발에서 뒷걸음을 치는 이 유중 하나다.
- 일부 보충제 제조업체들이 하는 또 다른 부도덕한 일이 있다. 누트로픽 제조법을 뒷받침하는 연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제품 전체가 아닌 화합물의 '특정한 일부분'에 대한 연구일 때가 많다. 중요한 것은 사용된 화학 물질의 양과 그들 사이의 작용이다. 이렇게 상 상해보자. 체리 케이크를 먹으면 오래 산다고 주장하는 연구가 있다. 당 신은 이런 연구 결과를 보고 놀랄 것이다. 케이크는 '몸에 좋은 음식'과 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이 어떻게 그런 결론에 이르렀는지 묻자 연구진은 한 연구에서 체리를 먹은 쥐들이 그렇지 않은 쥐들보다 오래 살았다고 답했다. 그렇다면 케이크에 담긴 다른 성분의 건전성은? 허브, 보충제, 비타민 제품이 품질이 낮거나 뒷받침하는 연구가 존재 하기 힘든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돈이 없기 때문이다. 제약회사들은 값비 싼 임상 실험을 진행할 여력이 있다. 특허권의 보호로 그들의 제품이 시 장에 출시되어도 최소한 몇 년간은 다른 회사가 제품을 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 허브, 보충제, 비타민은 특허를 취득할 수 없다. 
- 일부에서는 '공부 잘하는 약'(예를 들어 시험 기간에 벼락치기를 하려고 먹는 ADHD 치료제 애더럴Adderall)이 큰 인기를 모으고 있지만 거기에는 대 단히 심각한 단점이 있다. 우선, 이런 행동 자체가 불법이다(한국에서는 애더럴과 유사한 효능을 가진 메틸페니데이트methylphenidate를 제외한 대부분의 ADHD 치료 약물이 금지되어 있다. -옮긴이). 예를 들어 미국 법무부는 처 방 없이 처방약을 복용하는 것을 불법으로 간주한다." 가족이나 친구에 게 처방된 약을 복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제한을 두는 데에는 아 주 중요한 건강상의 이유가 있다. 이런 약은 오래되었을 수 있고(일부 약 은 시간이 지나면 예측할 수 없는 상태가 되기도 한다) 완전히 오염되었을 수 도 있다." 또한 남용과 오용의 가능성이 높다." 흥분제를 남용 혹은 오 용할 경우, 끔찍한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 환각, 공황, 떨림, 복통, 심장 이상 등 다 열거하기도 힘든 많은 증상을 겪을 수 있는 것이다. 
- 일부에서는 흥분제가 정신적 성과를 개선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지만 여러 연구가 이런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고는 할 수 없더라도 최소한 불 완전하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밝혀내고 있다. ADHD 진단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암페타민 사용으로 혜택(기억력부터 수학적 능력까지)을 보았다 고는 하지만 그 효과는 ADHD가 있는 사람에 비해 훨씬 낮다. 연구자들 은 큰 효과가 나타난 경우에도 표본을 신뢰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좋 은 반응을 보인 일부 참가자가 활동 과잉이거나 공식적으로 ADHD 진 단을 받지 않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공부 잘하는 약'의 효능을 믿는다. 이는 ADHD가 없는 사람에게 이런 약물이 에너지와 의욕을 높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약물은 더 민첩해지고 집 중이 잘 된다는 '느낌'을 준다. 그들의 '실제 역량'에 변화가 있는 것이 아 니고 자신의 역량에 대한 '인식'에 변화가 있는 것이다.
- 실제 ADHD 환자들의 경우에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ADHD가 있는 두뇌는 충분한 노르에피네프린(핵심 신경전달물질)이나 그것을 구성하는 화학 성분(도파나 도파민)이 부족한 경우가 많은데, 각성 제가 이런 결핍을 교정할 수 있다." ADHD인 내 대학 동창은 약을 먹었 을 때와 끊었을 때의 IQ를 측정했다. 약을 먹었을 때의 IQ가 20점 이상 높았다. 검사를 감독한 내게는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약을 먹지 않 고 검사를 할 때는 계속 딴생각을 하는 것을 지켜보았기 때문이다. 이 때 문에 그녀는 시간이 끝나기 전까지 몇 개의 문제를 풀지 못했다. 하지만 약을 먹었을 때는 시험 시간 내내 집중력을 유지하고 모든 문제를 풀었 다. 

- 항상 상호작용과 부작용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의사의 조언을 받아야 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해야겠다. 내 친구 하나는 예상치 못했던 부 작용으로 병원에 입원했던 적이 있다. 그녀는 만성적인 경증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비처방 보충제(CBD 오일)를 사용해왔다. 어느 날, 그녀는 감기 기운을 느끼고 처방전 없이 살 수 있는 일반 감기약을 먹었다. 그리 고 다음 날, 예상치 못한 그리고 희귀한) 부작용으로 결국 병원에 입원했 다. 몇 달이 지난 후에도 그녀는 기억력 부분에서 문제를 겪었다. CBD 를 나쁘게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물질이 어떤 상황에서는 무해하지 만 다른 물질과 결합하면 해로울 수 있다는 얘기다." 허브는 알코올 및 카페인과도 위험한 상호작용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 L-테아닌은 카페인의 조금은 광적인 에너지를 보다 매끄럽고 통제가능한 종류로 바꿔주는 똑똑한 조수 역할을 한다. 녹차를 한 잔 마시고 나면 활력이 생기되 커피를 먹었을 때처럼 과민해지지는 않는 것을 느낀적이 있는가? 그것이 L-테아닌의 작용 때문이다.
카페인과 L-테아닌을 같이 섭취한 사람들은 카페인을 섭취한 사람들 과 마찬가지로 피로감이 감소하고, 각성도가 높아지고, 두통이 줄어들 고, 반응 시간이 짧아지고, 심지어는 단어 인식 과제에서 속도가 빨라진 다고 보고했다." 지금까지의 연구를 기반으로 하면 그 외에도 카페인과 L-테아닌을 같이 섭취했을 때 주의력을 통제하는 능력(하나의 과제에서 다른 과제로 전환하는 능력)이 향상되고, 주의를 흩뜨리는 일에 대한 민감 성이 낮아지며, 전반적인 집중력이 개선됐다.
카페인을 섭취했을 때의 부작용에는 과민이나 불안, '카페인 크래 시'caffeine crash (처음에는 활력을 느끼지만 이후 신체가 물질을 대사를 시키면서 갑자기 기운이 떨어지는 현상), 두통, 구역질, 혈압 상승, 초조함, 안면 홍조, 불면증, 불규칙한 심박, 근육 경련, 위장병, 말이나 생각에 조리가 없는 현상 등이 있다."
- 카페인을 섭취했을 때 얻을 수 있는 긍정적인 인지적 효과의 대부분은 카페인 섭취량이 많아질수록 사라진다. 이렇게 내성이 생기는 것을 피하려면 카페인 섭취의 주기를 만들어야 한다. 카페인 섭취가 많은 사 람이라면(하루 커피 네 잔 이상) 한 달 동안 커피를 끊어야 다시 카페인을 처음 사용하는 사람과 비슷하게 효과를 볼 수 있다. 카페인을 지속적 사용하면 인지적 효과는 약해지지만 각성의 능력은 지속된다. 이는 금 단 증상을 감소시키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일 수도 있다. 커피 한 잔을 마셨을 때 좋은 기분을 느끼는 이유는 커피가 기분을 좋게 만들어서가 아니라 당신이 더 이상 카페인 금단의 부작용을 느끼지 않기 때문일 가능성이 있다.
- 집중력을 높이고 기분을 좋게 하며 에너지를 북돋우는 다른 음료들도 있 다. 물론 모두 합법적이고 나로서는 부작용을 전혀 경험하지 않았지만, 아직 과학적 증거가 충분치 않다. 과학적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강력 히 추천하기가 망설여지지만 스스로 자주 사용하면서도 여기에 언급하 지 않는다면 위선적인 일이 되리라는 생각에 공개하기로 했다.
첫 번째는 유사Guayusa다. 아마존이 원산지인 이 차는 커피만큼 많 은 카페인을 함유하고 있지만 과민 반응이 훨씬 덜하고 다른 어떤 차보 다 항산화 물질이 많이 들어 있다. 기분을 좋게 만드는 효과가 있으며 내 경우에는 이 차를 마셨을 때 창의성이 향상됐다. 글을 쓸 때 딱 맞는 음료다. 열대우림, 특히 에콰도르가 원산지이기 때문에 이 차를 마심으로써 열대우림 보호와 식목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 과유사를 홍보하는 레 오나르도 디카프리오 Leonardo Dicaprio 같은 유명인들이 지적하듯이 과유 사를 마시는 것은 환경을 위한 훌륭하고도 대단히 필요한 행동이다.
집중력 향상에 효과가 있는 셰르바 마테 Yerba maté, 노루궁댕이버섯, 차 가버섯도 즐겨 먹는다." 셰르바 마테는 차로 마시고 노루궁뎅이버섯과 차가버섯은 커피에 첨가한다. 이들 식물은 동물을 대상으로 실험이 이루 어졌고 일부는 생화학적 분석이 이루어졌지만 인간의 정신적 성과에 미 치는 일반적인 영향을 파악하기까지는 아직 갈길이 멀다.
- 1. 구매 시 주의할 점: 미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에는 뇌 건강과 증진을 목적 으로 하는 비처방 비타민, 보충제, 음료, 허브에 대한 규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당신이 사는 제품의 순도가 형편없을 수 있다는 의미다. 다 시 말해 얼마나 많은 양의 화합물을 섭취하는지 알 수 없고, 복용 기준을 정하기가 어려우며, 알려지지 않은 부작용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 
2. 처방약은 검증된 질병을 위한 것이다. 당신 앞으로 처방된 약만을 복용해 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상한, 심지어는 위험한 부작용을 겪을 수 있다. 3. 허브는 감정 조절, 실행 기능, 학습 및 기억에 효과가 있지만 25세 이하 이거나, 임신을 했거나, 심각한 질병이 있는 경우라면 허브의 복용을 피 해야 한다. 또 사용하기 전 반드시 의사와 상담하라.

- 인간의 뇌는 포식자를 피하고, 먹잇감이 될 만한 것을 은밀하게 감시하고, 열매들을 찾고 모으는 데 집중했던 지난 2만 년 동안과 크게 달라 지지 않았다. 우리의 주의 시스템은 새롭고 빠르게 움직이는 정보를 우 선하며 그런 정보가 들어올 때면 에너지와 집중력을 추가적으로 이끌어 낸다. 하지만 현대의 작업은 대부분이 반복적이고 세부 지향적이다. 따 라서 오늘날의 과업들과 2만 년 된 뇌를 짝짓는 것은 오류로 가는 지름 길이다. 자료 수집(소매업체에서 고객 정보를 관리할 때처럼 동일한 질문이 계 속해서 제기되는 경우)과 고속도로 주행은 지루하고 반복적인 작업의 대 표적인 사례다. 인간의 뇌가 실수를 저지르거나 잠에 빠지기 쉬운 종류 의 작업인 것이다. 자동화가 사람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논의가 있 지만, 적절한 자동화는 우리의 직장 생활을 보다 쉽고 즐겁게 만든다. 자 율주행차는 사람과 달리 피로를 느끼지 않고, 운전자를 폭행하지 않고, 전화를 받기 위해 핸들에서 손을 떼지도 않는다. 인간과 AI가 함께라면 인간이 실행 기능에서 가진 선천적인 약점이 기계의 강점으로 보완되고 그 반대도 가능한 가장 안전한 운전 경험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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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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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의 힘

과학 2024. 3. 27. 06:59

- 헝가리 출신의 다재다능한 미국인 수학자 존 폰 노이만 John von Neumann 은 "나는 매개변수 4개로 코끼리를 만들 수 있고 5개로는 코끼리가 몸을 움찔 거리게 만들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항이 많은 다항식 같은 모델들 의 집합이 충분히 많으면 거의 모든 행동을 나타내는 함수를 만들 수 있다 는 뜻이다. 하지만 그런 곡선은 현실세계에 관한 유용한 내용을 알려주지 않는다. 따라서 오컴의 면도날 Ockham's razor (어떤 사실이나 현상에 관한 설명들 가 운데 논리적으로 가장 단순한 것이 진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원칙-옮긴이), 다시 말해 단순한 모델에 대한 보편적인 선호에 입각해 설명이 너무 복잡하고 정교하 다면 그것이 타당하다고 여길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의심해봐야 한다.

- 일단 쪼개어 생각하라
위대한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 Enrico Fermi의 이름을 딴 페르미 추정 Fermi estimation은 흥미로운 사고방식의 한 예로서, 실생활에서도 매우 유용하다. 페르미가 이 추론을 통해 거둔 가장 유명한 업적은 1945년 7월에 시행된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에서 폭발 위력을 추정한 일이다. 그는 몇 장의 종이 를 떨어뜨린 뒤 폭발 충격파로 인해 얼마나 멀리 날아가는지를 측정해 결과를 알아냈다. 종이가 날아간 거리와 종이를 떨어뜨린 대략적인 높이를 가늠해 원자폭탄의 충격파가 종이에 가한 압력을 추산했다. 이어서 자신이 폭발 지점과 떨어진 거리를 추정하고, 폭발에서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방 출돼야 해당 거리만큼 떨어진 종이에 자신이 추산한 압력이 가해지는지를 알아냈다. 놀랍게도 페르미는 이런 조잡한 방법으로도 오차범위가 최종 확 인값의 2배 이내에 있는 간단한 근삿값을 계산해냈다. 2020년 8월에 일어 난 베이루트 공항 폭발 사고에도 비슷한 방법이 적용됐다. 폭발 충격파로 인해 날아간 신부의 드레스가 담긴 영상을 바탕으로 폭발 규모를 추정해낸 것이다.
- 이 추론의 원리를 알아두면 좋다. 대표적인 사례가 "브리스틀에 피아노 조율사는 몇 명 있을까?"라는 오래된 면접 질문이다. 무작정 짐작해볼 수도 있지만 페르미 추정을 이용해 여러 단계로 나눠 생각해볼 수도 있다. 브리스틀에는 몇 명이 살까? 브리스틀 사람 중 몇 퍼센트에게 피아노가 있 을까? 피아노는 얼마나 자주 조율해야 할까? 피아노를 조율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사람들은 하루에 몇 시간, 1년에 며칠 일할까? 이 수치들을 하나씩 알아내면 최종 수치를 무작정 짐작한 것보다 더 합리적으로 추산할 수 있다. 그러고 나서 각각의 결과를 종합하면 질문에 적절한 답이 나온다. 예를 들어 브리스틀 인구가 대략 50만 명이라고 해보자. 그중 2퍼센 트에게 피아노가 있다고 하면 조율할 피아노는 약 1만 대다. 피아노는 1년 에 한 번 조율해야 하고 한 번 조율하는 데 1시간쯤 걸릴 것이다. 따라서 브 리스틀에 있는 모든 피아노의 조율 시간은 1년에 약 1만 시간이다. 보통 조율사는 하루에 8시간, 1년에 200일 일하므로 조율사 한 명이 1년에 약 1,600시간 일한다. 그렇다면 피아노 조율사가 브리스틀에 6명쯤 필요하지 않을까? 구글에 검색해보니 브리스틀에는 9~10명의 조율사가 있는 듯하 다. 정확히 맞히지는 못했지만 이 정도면 완전히 빗나간 답은 아니다.
페르미 추정은 이런 각각의 근삿값을 절묘하게 종합해 전체 문제에 대 한 답을 낸다. 분명히 각각의 근삿값이 정확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여러 가지 근삿값을 올바르게 곱하면 대략적인 답을 얻을 수 있다. 합리적 으로 생각해보면 각각의 근삿값이 너무 크거나 너무 작을 확률이 엇비슷하 기 때문에 오차가 서로 상쇄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도출한 최종값은 놀 라울 정도로 정확할 수 있다.

- 로그스케일을 사용하면 영국의 팬데믹 전개 양상을 빠르게 이해할 수 있다. 다음 그래프는 2020년 3월에서 2022년 6월까지의 일일 사망자 수 그래프이며 6가지 국면이 나타난다.
첫 번째 국면에서는 Ro가 3에 가까우며, 일일 사망자 수가 대략 지수적으로 증가하면서 가파르게 상승하는 직선을 그리다가 사회적 거리두기 의 효과로 약간 평평해진다. 이어서 두 번째 국면에서는 2020년 9월 초까 지 지수적 증가보다 느린 지수적 붕괴가 나타난다(내려가는 직선). 봉쇄 가 시행되어 Ro가 1 밑으로 내려가면서 사망자 수는 감소했다. 세 번째 국 면은 2020년 9월부터 2021년 1월까지로 더욱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전반 적으로 기울기는 덜 가파르지만 여전히 일정하게 지수적으로 증가하는 단계로서, Ro는 다시 1을 넘었다. 하지만 제2차 전국 봉쇄의 효과가 나타나면 서 켄트에서 발견된 알파 변종이 확산되기 전에 잠시 사망자 수 곡선이 평 평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021년 1월 이후의 네 번째 국면에서는 백신 접종과 제3차 봉쇄의 효과가 이어지면서 지수적 붕괴가 일관되게 나타났 다. 다섯 번째 국면은 2021년 6월 초반부터로, 델타 변종의 확산과 전국적 인제한 조치 완화로 인해 사망자 수가 지수적으로 증가했다. 마지막으로 2021년 9월 이후 영국의 사망자 수는 유동적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새 변종이 출현하면서 지수적 증가와 백신 추가 접종으로 인한 지수적 붕괴가 비교적 짧은 주기 동안 교대로 나타났지만 추세에 전반적인 방향성은 나타 나지 않았다.
감염자 수는 앞에서 살펴본 박테리아 사례처럼 영원히 증가하지는 않는다. 4장에서 설명할 전염병 확산 모델에 따르면, 면역력이 있는 사람들의 비율이 증가하면서 로그스케일의 감염자 수 직선이 저절로 평평해지기 시 작한다. 인구 중 25퍼센트가 감염된 뒤 면역력을 갖게 되면, 이전에는 새로 감염됐을 접촉자 중 4분의 1이 더 이상 감염되지 않기 때문에 Ro가 낮아지 는 것이다.
실제로 충분히 높은 비율의 인구가 감염되고 나면 그 효과로 Ro는 1밑 으로 떨어지고 당연히 전염병의 확산 규모가 줄어든다. 이것이 바로 사람 들이 HIT를 논의할 때 언급하는 효과다. 하지만 전통적인 전염병 모델에 따 르면 집단면역의 효과가 나타나기까지는 인구의 상당수가 감염돼야 한다.

- 골드만삭스 Goldman Sachs의 최고재무책임자는 2007년 9월 <파이낸셜타 임스 Financial Times》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며칠 연속으로 25 표준 편차 변동이 발생했습니다." 무슨 뜻인지 설명하겠다. 어떤 정규곡선에서 기댓값으로부터 2 표준편차(분포 정도를 나타내는 또 다른 값, 분산의 제 곱근)를 벗어난 결괏값이 나올 확률은 약 5퍼센트다. 정규곡선에서 기대값 보다 굉장히 큰 결괏값이 나올 확률은 급격하게 감소한다. 따라서 기댓값 으로부터 25 표준편차만큼 벗어난 결과값이 나올 확률은 약 10-136으로 어 마어마하게 작은 수다. 며칠 연속은 고사하고 우주가 존재하는 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다. 저 말은 골드만삭스의 예측 모 델이 틀렸으며, 세계 경제에 재앙을 일으킬 극단적인 사건의 발생 확률을 과소평가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데이터세트를 볼 때는 중앙값과 양쪽 분포 뿐 아니라 극단값을 함께 파악해야 한다. 모델을 설계할 때 표준적이지만 틀린 가정을 하는 바람에, 세계 금융시장 붕괴라는 매우 심각한 사건이 발 생할 가능성을 안이하게 평가하고 말았다. 똑같은 일이 기후변화에서도 일 어날 수 있다.

- 무작위적인 대상을 0과 1의 수열을 이용해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개념을 데이터압축 data compression 이라고 한다. 결과의 리던던시 redundancy (중복 성이라는 뜻과 더불어 데이터를 전송할 시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추가하는 잉여 정보 를 가리킨다-옮긴이) 또는 예측 가능성을 찾아내 제거함으로써 비트를 더 적 게 사용해 표현하는 방법이다. 스마트폰 카메라가 저장하는 데 수억 비트 가 필요한 사진을 찍을 때 이런 과정을 거친다. 데이터압축 덕분에 필요한 비트의 몇 퍼센트만 차지하는 jpg 파일을 만들 수 있다. 핵심은 이미지를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파란색 픽셀이 푸른 하늘이라는 큰 영역의 일부라면 그때 이웃한 픽셀들은 편향된 동전처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분자들이 일정한 공간을 차지하기 때문에 실내의 모든 공기를 완전한 진공 상태로 압축할 수 없듯이, 섀넌은 데이터를 압축하는 데에 한 계 지점이 있다고 봤다. 이는 엔트로피에 따라 결정된다. 예를 들어 섀넌에 따르면 어떤 편향된 동전도 결코 한 번 던질 때 필요한 비트가 평균 0.5 비 트미만이 될 수 없다.

- 도프만은 미군에 입대하는 남성의 매독 검사에 참여했다. 당시의 매독 검사는 비용이 많이 들었고 매독 발병 자체도 드물었다. 검사 방법을 고민 하던 도프만은 한 번에 한 명씩 검사하는 대신에 여러 명의 검체를 합쳐 집 단별로 한꺼번에 검사해도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집단에서 아무도 매독에 걸리지 않았다면 해당 집단의 검체에는 매독균이 없으므로 검사 결 과는 음성일 것이다. 모든 병사가 매독에 걸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는 데 단 한 건의 비용만 들 뿐이다.
한편 집단에서 누군가가 매독에 걸렸다면 검체에는 매독균이 있을 것 이며 검사 결과는 양성일 것이다. 그러면 해당 집단의 어느 병사가 매독에 걸렸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조사해야 한다. 감염자를 찾으려면 해당 집단의 각 개인을 다시 검사하면 된다.
도프만은 질병의 유병률이 낮을 때 이 전략이 꽤 효과적임을 알아냈 다. 대부분의 집단에는 감염자가 없을 테니, 그 구성원 모두가 단 한 번의 검사로 비감염자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추가로 개인 검사를 할 수도 있겠 지만 이런 경우는 드물다. 따라서 이 방법으로 검사 횟수를 상당히 줄일 수 있었다.
도프만의 아이디어가 대규모로 실행되지는 못했지만 이후 수학자와 생물학자의 관심을 끌었다. 도프만의 단순한 방법보다 더 나은 검사 전략 을 설계하고 집단에서 누가 감염됐는지를 확인하는 효율적인 방법을 찾으 려는 노력은 학계 차원에서 꾸준히 이뤄졌다. 이러한 집단검사는 생물학과 사이버보안, 통신 등에도 적용됐다.
집단검사에서 가능성의 한계를 이해하는 일은 지금도 활발하게 연구 되지만 섀넌의 연구를 통해 한 가지 핵심 고려 사항을 알 수 있다. 각각의 검사에서 최대한 많은 정보를 얻으려면 양성 · 음성 진단 확률이 엇비슷해 야 한다. 그래야 검사당 1비트의 정보를 모두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 가 비트들을 합산하기 위해 연속적으로 시행한 검사 결과들은 최대한 독립 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비슷한 사람이 모인 집단을 검사해 비용을 낭비하 지 말고 많이 겹치지 않는 사람들을 섞은 표본을 검사한다. 이런 검사 전략 은 결과가 독립적이며 발생 확률이 같아야 한다는 섀넌의 목표에 부합한 다. 이렇게 하면 편향된 동전 던지기보다 공정한 동전 던지기 결과와 더 가 까워진다.
- 또 다른 과제가 있다. 지금까지 설명했듯이 이 검사는 한 집단에 감염자가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양성으로, 없으면 결과가 음성으로 나올 것이 라는 점에서 완벽하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이것은 이론적으로만 가능하다. 8장에서 살펴봤듯이 검사에서는 거짓음성과 거짓양성이라는 오류가 생길 수 있다. 이 문제는 검체가 합쳐지면서 더 심각해진다. 한 양성 검체가 많 은 음성 검체에 휩쓸려 감염이 드러나지 않는 '희석dilution' 효과가 일어나 거짓음성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런 소음의 문제는 집단검사 알고리즘의 관점에서 보면 충분히 해결 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이론이 계속 발표되고 있으며 정보이론의 개념들 이 이를 뒷받침한다. 또한 이는 최근 몇 년 동안 내가 연구하고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이 모든 이론 연구를 바탕으로, 팬데믹 기간 동안 집단검사가 중국, 이스라엘, 르완다, 미국 일부 지역에서 대규모로 활용됐고, 코로나바이 러스 검사 효율이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섀넌의 개념들이 이 분야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생생한 증거다.

- 패턴은 생각보다 흔치 않고, 기적은 생각보다 흔하다
데이터를 추적하다 보면 인간이 놀라울 정도로 수치에 서사를 부여하고 싶 어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선거 운동 기간에 한 정당이 성공하는 데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실제로는 무작위 변동의 결과일 뿐일 수도 있는 여론조사 데이터에 패턴이나 추세가 있다고 확신한다.
금융계에서도 비슷한 현상을 볼 수 있다. 10장에서 봤듯이 주가에 관 한 자연스럽고 성공적인 모델은 브라운운동이다. 이는 독립적인 동전 던지 기의 연속적인 결과를 토대로 나타나는 현상이며, 랜덤워크와 비슷하게 앞 으로 주가가 올라갈지 내려갈지에 대한 가능성은 각각 같고 대칭적으로 변동한다. 주가가 정말로 브라운운동으로 모델링된다면 본질적으로 예측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증시 분석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금융 데이터 의 궤적에서 특별한 패턴을 찾아내 앞으로 어떻게 변동할지 예측하려고 한 다. 이것이 훌륭한 전략일지는 확실치 않다.
인간이 무작위적인 수를 생성하는 데 능숙하지 않은 것처럼, 어떤 수가 진짜로 무작위적인지 판단하는 데도 능숙하지 않다. 동전을 200번 던진 결 과 앞면이 7번 연속 나왔다면, 동전이 공정하지 않다거나 결과가 독립적으 로 생성되지 않았다는 확실한 증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 정도 시 행 결과는 무작위적 우연으로 일어난다고 예상할 만한 범위다. 오히려 앞 면이 6~7번 연속으로 나오지 않는 경우가 더 이상하다.
우연이 예상보다 훨씬 발생 가능성이 높은 또 다른 경우는 생일 문제다. 방에 23명이 있을 때 그중 2명의 생일이 같을 확률은 대략 50퍼센트다.
방에 40명이 있을 때는 확률이 90퍼센트로 높아지고 60명일 때는 99퍼센 트가 넘는다. 이처럼 우연히 생일이 같을 확률은 예상보다 훨씬 높다. 다시 말해 23명이 있을 때 생일이 같을 수 있는 사람들의 쌍은 253가지이므로, 우연히 생일이 같을 경우의 수가 253가지다. 60명이라면 1,740쌍이 있으 므로 생일이 같은 경우가 없기가 오히려 어렵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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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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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럴 링크

과학 2024. 3. 25. 07:31

- 살아 있는 예쁜꼬마선충은 불과 302개의 신경세포만으로 다 양한 감각 정보를 받아들이고 이를 일반화해 새로운 상황에도 적절히 대응하는 놀라운 적응력을 보여준다. 최근에는 자율주 행 분야의 연구자들이 예쁜꼬마선충의 이러한 능력에 주목하고 있다. 2021년, IST 오스트리아의 마티아스 레치너 Mathias Lechner 교수 연구팀은 예쁜꼬마선충의 커넥톰 구조를 활용해 자율주 행 시스템을 위한 인공지능을 구현했다고 발표했다. 레치너 교 수의 연구에 따르면, 예쁜꼬마선충의 커넥톰 구조를 모방해서 만든, 고작 19개의 신경세포로 구성된 인공신경망이 돌발 상황 에도 잘 대처하는 훌륭한 자율주행 성능을 보이는데, 이 인공신 경망 구조는 기존에 주로 사용되던 합성곱 신경망convolution neural network, CNN 구조보다 무려 63배나 간단한 구조다. 오랜 시간 가 장 효율적인 형태로 진화해 온 생명체의 커넥톰이 인간이 만든 인공지능을 압도할 수 있음을 입증한 것이다.
- 버스바이스나 레치너의 연구는 인간의 커넥톰을 컴퓨터 안에서 구현했을 때 인간과 유사하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인공지능 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충분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물론 현재의 기술로는 302개의 신경세포와 7,000여 개의 시냅스를 가진 단 순한 선충조차 완벽하게 컴퓨터에 업로드할 수 없는 수준이니, 860억 개의 신경세포와 100조개에 달하는 시냅스로 구성된 인 간의 뇌를 컴퓨터로 시뮬레이션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 인다. 그럼에도 나는 우리 인류가 '마인드 업로딩'이라는 목표를 향해 계속해서 나아갈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과학사를 돌이켜 보면 단 1퍼센트의 가능성만을 바라보고 자신의 일생을 바친 수많은 과학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 1997년에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버클리캠퍼스의 신경생물학과에 부임한 양 댄Yang Dan 교수는 하버드대학교 의과대학에서 박사후 연구원으 로 일하는 동안 포유류의 뇌에서 시각 정보가 처리되는 원리에 대해 연구했다. 그녀가 특히 주목한 뇌 부위는 측면슬상핵 lateral geniculate nucleus, LGN이라는, 포유류의 뇌 중앙에 위치한 작은 시각 중추로서, 망막 시신경이 뇌로 보내는 전기신호가 가장 먼저 도 달하는 뇌 부위로 알려져 있다.
댄 교수는 뇌의 시각 정보 처리 과정에서 관찰되는 시각위상 visuotopy (혹은 망막위상retinotopy)이라고 불리는 특성에 주목했는데, 이는 눈앞에 펼쳐진 어떤 장면이 작은 화소pixel들로 구성되어 있 다고 가정할 때 화소 하나하나가 측면상에 있는 신경세포 하나하나에 대응되는 현상을 가리킨다. 그녀는 곧 측면슬상 에 위치한 신경세포들의 활동 신호를 읽어내면 눈앞에 있는 장면을 그림의 형태로 복원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댄 교수는 자신의 박사후 연구원이었던 개럿 스탠리 Garrett B. Stanley 박사와 함께 자신의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시작했다.
댄 교수는 고양이의 측면상에 바늘 모양의 전극 177개를 꽂아 넣고 177개의 신경세포가 고양이 망막의 어느 위치에 대응 되는지를 알아냈다. 이를 위해 그녀는 고양이 눈앞의 여러 위치 에서 밝은 빛을 보여준 다음 어떤 신경세포가 반응하는지 관찰 했다. 이 과정이 마무리되고 나자, 그녀는 고양이 눈앞에 흑백 동 영상을 여러 개 보여주고 고양이의 측면상에서 측정되는 신 경신호를 이용해 영상을 복원했다. 결과는 실로 놀라웠다. 고양 이에게 보여준 영상과 비슷한 윤곽의 영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 댄 교수의 연구 결과는 많은 뇌과학자들을 흥분의 도가니로 밀어 넣기에 충분했다. 인간의 시각중추, 예를 들어 대뇌의 시각 피질visual cortex에 전극을 조밀하게 삽입하고 신경세포의 활동을 기록하면 꿈을 저장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뜻 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사물을 볼 때뿐만 아니라 꿈을 꿀 때, 심 지어는 상상을 할 때도 대뇌 시각피질을 사용한다. 따라서 대뇌 시각피질의 활동을 정밀하게 읽어낼 수만 있다면, 아침에 일어 나 밤새 꾸었던 꿈을 재생해 보는 것도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 니다.
- 우리 뇌는 몸보다 더 빠르게 반응한다. 뇌파를 측정하 는 동안 팔을 움직이면, 우리 뇌에서는 실제 팔이 움직이기 수백 밀리초에서 1초 전에 '준비 전위readiness potential'라는 뇌파가 관 찰된다. 준비 전위는 그 이름처럼 우리의 뇌가 팔을 움직일 것이 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준비하는 과정이 뇌파에 반영되는 것이다. 만약 자동차 운전자의 뇌파를 계속해서 측정한다면, 준비 전 위로부터 핸들을 꺾어 방향을 바꾸거나 브레이크 페달을 밟아 급정거하려는 의도도 미리 알아챌 수 있지 않을까? 닛산의 시스 템은 이처럼 운전자의 뇌파로부터 급회전이나 급정거 의도를 미리 알아내, 보다 부드러운 주행을 가능하게 하거나 사고를 미 연에 방지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문제는 크고 복잡한 뇌파 측정 장치다. 닛산의 시스템은 아직 실험실 안의 차량 시뮬레이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운전자 의 머리에는 뇌파 측정을 위한 전극 캡(모자)이 쓰여 있고, 수많 은 뇌파 전극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하지만 실제 운전자가 탑승할 때마다 이런 뇌파 측정 시스템을 머리에 뒤집어쓸리는 없지 않겠는가.
- 물론 최근에는 간편하게 착용 가능한, 헤드밴드headband 형태 나 이어버드ear-bud 형태의 뇌파 측정기도 출시되고 있다. 하지 만 자동차 업계에서는 이마저도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데, 운전자가 어떤 형태든 머리에 무언가를 착용하는 것 자체를 불편해할 것이라고 예상하기 때문이다.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기술이 자동차에 적용되기 위해서는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이 기술을 꼭 써야만 하는 '킬러 애플리케이션'이 먼저 개발되어야 하지 않을까?
- "수업 시간에 배운 것들을 잊지 않고 모두 기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중고등학교 강연을 다니다 보면 자주 받는 질문이다. 그렇다. 우리 인간은 모든 것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물론 잊는 것이 약이라는 말도 있듯이, 때로는 괴로운 기억은 잊는 편이 나을 때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보고 들은 모든 것을 마치 사진을 찍듯이 기억할 수 있다면 틀림없이 공부가 아주 쉬워질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망각이라는 것을 할까? 우리 뇌에 860억 개에 달하는 신경세포가 있는데도 말이다.
인간이 망각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기억을 만들 때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장기 기억을 뇌에 각인할 때 단백질이 필요하다. 그런데 우리 뇌가 쓸 수 있는 에너 지와 영양분은 제한되어 있기에, 우리가 모든 것을 기억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을 기억하고 어떤 것을 망각할 것 인지는 대체 무엇이 결정하는 것일까?
- 우리는 종종 무의식적으로 행동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손이 입이나 코를 만지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챈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의도적으로 손을 움직여 입이나 코를 만진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이처럼 행동이나 생각을 우리가 인지하는 것을 '의식'이라고 하고, 인지하지 못하는 것을 '무의 식'이라고 한다. 의식을 나타내는 영어 단어인 'consciousness'는 무언가를 안다는 뜻을 지닌 어원 'sci'에서 유래했고, 과학을 의 미하는 'Science' 역시 여기서 유래했다.
그런데 우리가 의식적이라고 믿는 행동들도 사실 우리 뇌의 무의식이 만들어 내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 주장은 인간의 식 연구의 아버지로 불리는 벤저민 리벳Benjamin Libet 교수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뇌과학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실험 으로 꼽히는 '리벳 실험'을 고안했다. 우리 뇌에서는 신체 일부 를 움직이기 전에 준비 전위라는 뇌파가 발생한다. 움직임을 준비하는 뇌파인 셈이다. 그런데 리벳 교수가 의아하게 여긴 부분은 이 준비 전위가 팔을 움직이기 무려 1초 전에 발생한다는 점 이었다. 여러분이 실제로 팔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면, 의식적인 생각과 거의 동시에 팔이 움직인다는 것을 쉽게 알아챌 수 있다. 리벳 실험에서는 실험 참여자들이 손을 움직일 때마다, 손을 움직이겠다고 마음먹은 시점, 준비 전위가 발생한 시점, 실제로 손을 움직인 시점을 정확하게 측정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손 을 움직이겠다고 마음먹은 시점보다도 준비 전위가 더 빨리 발 생한다는 결과가 관찰되었다. 우리의 의지에 앞서 뇌가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는 뜻이다.
리벳 실험의 결과에 수많은 뇌과학자들이 충격을 금하지 못했다. 리벳 교수의 연구 결과가 사실이라면 우리가 의식적으로 행한다고 믿은 많은 행동들이 실제로는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 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연구 결과는 인간의 '자유의 지free will'를 부정하는 데 쓰일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된다면 인간 이 저지르는 실수와 범죄를 정당화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리벳 교수가 세상을 떠난 뒤,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의 존 딜 런 헤인즈John-Dylan Haynes 박사 등이 리벳 교수의 이론을 계승했다. 헤인즈 박사는 2007년에 사람이 의식적인 선택을 내리기 10초 전부터 이미 뇌가 결정을 내리고 있다는, 다소 파격적인 연구 결 과를 발표해 뇌과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인간이 자유의지 를 갖고 있는지 아닌지는 아직 결론나지 않았지만, 인간 행동의 많은 부분이 무의식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 어 보인다. 우리 뇌의 주인은 사실 우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 사람의 감정을 실시간적으로 가장 정확하게 알아낼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뇌파를 이용하는 것이다. 뇌파에는 사람의 긍정/부 정상태나 정신적인 스트레스와 같은 감정 상태뿐만 아니라 집 중도나 지루함, 이해도 등과 같은 뇌의 다양한 상태 정보가 포함 되어 있다. 예를 들어, 2022년 캐나다 뉴펀들랜드메모리얼대학 교의 마샤 바게리 Masha Bagheri 교수와 세라 파워Sarah Power 교수는 뇌파를 이용해 사용자의 인지 부하cognitive load *와 스트레스 정도 를 높은 정확도로 알아내는 기계학습 기술을 발표했다. 그녀들 은 피실험자 18명을 대상으로 특정한 과제를 수행하도록 하면서 실시간으로 인지 부하와 스트레스 정도를 측정했는데, 개인 의 주관적인 평가 결과와 80퍼센트 이상의 일치도를 보였다. 우 리 연구팀에서 같은 해에 발표한 연구에서는 머리둘레를 따라 10여 곳에서 측정된 뇌파에 기계학습을 적용했을 때 긍정 또는 부정 감정을 90퍼센트 이상의 정확도로 분류해 낼 수 있었다. 이처럼 뇌파로부터 사람의 감정을 읽어내는 수동형 뇌-컴퓨 터 인터페이스 기술은 가상 비서 서비스와 결합되어 기존에 없 던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어 낼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찜찜하게 남아 있는 문제가 있다. 뇌파를 측정하기 위해서 는 여전히 머리에 무언가를 뒤집어써야 한다는 것이다. 손목시 계조차도 거추장스럽다며 착용하지 않는 이들이 많은데, 과연 가상 비서에게 자신의 감정을 알려주기 위해 뇌파 측정 장치를 머리에 쓰고 다닐까? 이는 실용성과 관련된 어려운 문제다.
- 나를 비롯한 일부 뇌공학자들은 인공지능의 미래가 인공 감정artificial emotion에 있다고 주장한다. 인공지능이 인간과 교류하 고 함께 살아가려면 인간과 감정을 교류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 만 아직 인간의 뇌에서 감정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는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뇌과학의 발전이 지속되어 인간의 감정에 대 한 이해도가 높아지면, 그에 따라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 하는 인공지능도 만들어지지 않을까? 심지어 우리가 말을 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 도대체 왜 건강식과는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작업기억 과제를 수행한 이후에 건강식을 선택하는 성향이 높아진 것일까? 우 리 연구팀은 이를 '점화 효과priming effect'로 설명했다. 점화 효과 란 심리학에서 널리 사용되는 개념으로, 앞서 접한 정보가 이후 에 접하는 정보의 해석에 영향을 주는 현상을 뜻한다. 예를 들어 '빵'이라는 단어보다 '의사'라는 단어를 먼저 접하면 이후에 등 장하는 '간호사'라는 단어를 인식하는 속도가 더 빨라진다.
인간의 뇌에서도 이에 대응되는 비슷한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배외측전전두피질은 우리 뇌에서 이성적인 의사결정을 할 때 활동하는 영역으로, 하전두회는 인간의 행동을 억제하는 일 종의 브레이크 시스템의 일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런 뇌 영역들이 작업기억 과제를 수행하는 동안 활발히 활동하게 되 자 작업기억 과제 이후에 진행된 건강식 선택 과제에도 영향을 끼친 것이다. 말하자면, 뇌 영역에서의 점화 효과인 셈이다. 라 면을 끓이기 위해 물을 데우면 금방 식지 않는 것처럼, 우리 인 간의 뇌도 한번 활발하게 활동한 영역은 관성에 의해 그 활동성 이 금방 줄어들지 않는다. 작업기억 과제 도중 활발했던 배외측 전전두피질과 하전두회 부위가 건강식 선택 과제를 수행하는 동안에도 여전히 (점화 효과에 의해) 활성화 상태를 유지하면서, 순간적인 쾌락은 억제하는 한편 이성적인 의사결정은 더 잘 내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 실험 결과를 설명할 때마다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 있다. "여러분, 다이어트를 하고 싶으면 입으로 먹지 말고 뇌로 마음 의 양식을 드세요." 실제로 마음의 양식인 책을 많이 읽으면 배 외측전전두피질을 포함한 전전두엽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이런 활동에 의한 점화 효과는 점차 길어지며 결국 전전두엽의 전반 적인 활동성을 높일 수 있다. 평소 책을 읽고 깊이 사색하는 습 관을 들이면 치매가 예방될 뿐만 아니라 정크 푸드에 대한 욕구 도 줄일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은 양식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실제로 이런 뇌의 점화 효과를 이용한 뇌-컴퓨터 인터페이스 기술도 있다. 바로 '뉴로피드백'이라고 불리는 자가 뇌 조절 기술로, 뇌의 특정 영역의 활동을 억제하거나 강화하는 훈 련을 지속적으로 수행함으로써 뇌의 상태나 기능을 변화시키는 훈련 방법이다. (특정 뇌 영역의 활동을 잘 조절하고 있는지를 다양 한 피드백을 통해 알려주기에 '뉴로피드백'이라고 부른다.) 뉴로피드 백에서 사용되는 관찰 방법으로는 뇌파, 근적외선분광법, 기능 적 자기공명영상 등이 있는데, 이들은 이미 국내 대형병원의 정 신건강의학과나 재활의학과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의료기기이 기도 하다.
- 신경가소성은 뇌 질환을 치료하는 데도 유용하게 쓰일 수 있 다. 예를 들어, '중풍'이라고도 불리는 뇌졸중이 오른팔의 움직 임을 담당하는 왼쪽 운동영역에 발생했다고 가정해 보자. 뇌졸 중으로 오른팔을 움직이기가 어려워진 환자에게는 마비된 오른 팔을 계속해 움직여 주는 것만으로도 오른팔의 기능을 회복하 는 데 도움이 되는데, 오른팔의 움직임에 의해 고유수용감각이 느껴지면 뇌에서는 손상된 왼쪽 운동영역을 계속 호출하기 때 문이다. 왼쪽 운동영역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유도하면, 왼쪽 운동영역의 기능이 다른 인접한 뇌 영역으로 옮겨 가 회복 가능성 을 높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재활 과정에서는 단순히 수동적 으로 로봇에게 팔을 맡기는 것을 넘어 오른팔을 움직이는 상상 을 함께 진행하면 재활 효과를 더 높일 수 있다. 오른팔을 움직 인다고 상상할 때도 왼쪽 운동영역을 호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활 훈련을 장기간 하다 보면, 집중력과 의지가 점차 낮아지며 로봇에게 다시 수동적으로 몸을 맡기게 될 수 있다. 하 지만 이때 왼쪽 운동영역에서 발생하는 뇌파나 근적외선분광 신호를 측정해 재활 훈련 중인 환자에게 막대그래프로 보여준다면? 환자는 막대그래프의 변화를 실시간으로 지켜보며 왼쪽 운동영역의 활동을 높이기 위해 다시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와 비슷한 방식으로, 초기 치매 환자의 인지재활 훈련 과정에서 환자들이 인지재활 훈련에 얼마나 집중해 참여하고 있는지 모 니터링하고 적절한 피드백을 제공하는 것도 가능하다. 최근에 는 감정과 관련된 정서 질환의 치료 과정에서 치료 대상의 감정 상태를 모니터링하고 피드백을 제공하기 위해 뉴로피드백 기술 이 활용된다. 가까운 미래에는 일반 가정에서도 웨어러블 뇌파 기술의 도움으로 뉴로피드백을 통한 뇌 질환 치료가 가능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 미니어처 뇌, 뇌 오가노이드
1920년대 초, 독일의 동물학자인 한스 슈페만Hans Spemann은 발 생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실험이자 그에게 노벨 생리의학 상을 안겨준 위대한 실험을 진행했다. 슈페만은 도롱뇽의 알이 분화하는 과정에서 원래 뇌가 되어야 하는 부분의 세포를 잘라 다른 부위에 붙여보았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세포를 붙인 부위 에 새로운 신경관이 만들어지더니, 머리가 둘 달린 '괴물 도롱 뇽'이 탄생했다. 중고등학교 생물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이 유명한 실험은 세포의 발생 과정이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런데 도롱뇽 알의 경우와 비슷하게, 우리 인간의 수 정란에서 생겨나는 배아줄기세포도 주변 환경을 적절하게 조절 해 원하는 형태의 세포로 유도하는 것이 가능하다.
줄기세포로부터 특정 신체 기관을 유도하는 연구는 2000년대 후반부터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신체 기 관은 '유사 장기' 또는 '오가노이드organoid'라고 불린다. 2000년 대 후반, 생물학자들은 소장이나 신장의 오가노이드를 만드는 데 성공했지만 인체에서 가장 복잡한 기관인 뇌 오가노이드는 만들어 내지 못했다. 그래서 2010년대 초까지도 수많은 뇌과학 자들이 뇌 오가노이드를 만들기 위해 밤을 지새웠다. 그런데 과 학의 역사에서 숱한 발견들이 그러했듯이, 뇌 오가노이드도 아 주 우연한 기회에 만들어졌다.
2013년, 오스트리아 분자생명공학연구소MBA에서 박사후연 구원으로 일하던 젊은 여성 뇌과학자 메들린 랭커스터 Madeline Lancaster 박사는 쥐의 줄기세포로부터 신경세포를 발생시키는 연구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실험 도중 자신이 관리하던 배양접시에 지름이 2밀리미터 정도인 희고 둥근 물체가 둥둥 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녀도 처음에는 그 물체가 무엇인지 전 혀 짐작하지 못했고, 배양접시가 오염된 것으로 여기고 접시째 버리려고 했다. 그럼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물체를 한번 잘 라보았는데, 놀랍게도 그 물체 안에는 수많은 신경세포들이 뭉 쳐진 뇌 조직이 들어 있었다! 랭커스터 박사는 이 결과를 즉시 <네이처에 발표했고, 곧 뇌과학 분야에서 가장 주목받는 뇌과학자가 되었다.
- 인간이 만들어 낸 이런 미니어처 뇌, 뇌 오가노이드는 생물학적 신경망과 인공지능을 결합하는 연구에도 쓰일 수 있 다. 그 가능성을 가장 먼저 보여준 연구는 2022년에 발표되었 다.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에 있는 뇌과학 스타트업, 코르티컬 랩스Cortical Labs의 공동창업자인 브렛 케이건Brett Kagan 박사는 영 국 유니버시티칼리지 런던의 칼 프리스턴Karl Friston 교수 연구팀 과 함께 생물학적 신경망을 컴퓨터와 연결해 간단한 게임을 수 행하게 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위해 케이건 박사 연구팀은 먼저 신경세포의 활동을 정밀하게 읽어 들일 수 있는 2차원 고밀도 마이크로 전극 배열 위에 신경세포를 배양했다. 이때 신경세포 는 전극 배열 위에서 이웃한 신경세포와 새로운 시냅스 연결들을 만들어 내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매우 복잡한 생물학적 신경망 구조를 형성한다. 이런 배양법은 오가노이드 제작 기술이 발 표되기 전부터 생물학적 신경망을 관찰하기 위해 자주 사용된 방식인데, 반도체 칩 위에 신경세포를 배양한다고 해서 '뉴런 온 어칩 neuron-on-a-chip'이라고도 불린다. 마이크로 전극 배열은 신 경망을 구성하는 개별 신경세포의 활동을 정밀하게 측정할 뿐 만 아니라 특정한 신경세포에 전기 자극을 가함으로써 활동을 유도할 수도 있다.
- 해마 칩처럼 머릿속에 삽입하는 브레인 칩을 구현할 때 가장 큰 이슈는 배터리다. 커넬은 사람의 두개골 자리에 배터리와 신 호 측정, 신호 변환, 전기 자극이 모두 가능한 전자회로를 삽입 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뉴럴링크가 만든 '링크'와 비슷한 방식 이다. 하지만 뉴럴링크가 개발 중인 신경 인터페이스와는 달리 커넬의 해마 칩은 깨어 있는 동안 연속적으로 전기 자극을 해야 하기에 배터리 소모량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대용량 배터리를 삽입하는 수술은 상대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향후에는 브레인 칩에 자체적으로 전기에너지를 생산하는 '에너지 하베스팅energy harvesting 기술이 적용될 것으로 예상하는 연구자가 많다.
에너지 하베스팅이란 문자 그대로 에너지를 수확한다는 뜻이 다. 사람이 움직일 때의 운동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변환하거나, 두피 표면에 태양전지를 부착해 수집한 전기에너지를 배터 리에 전달하는 방식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 로는 에너지를 상시로 수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항상 일정한 전기에너지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는 생체연료전지biofuel cell 기술이 개발되고 있다.
인간의 뇌와 두개골 사이를 채우고 있는 액체인 뇌척수액에 는, 다시 인체로 재흡수되지 않고 배출되는 글루코스가 다량 존 재한다. 글루코스는 세포의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아데노신 3인 ATP)를 생산하는 포도당을 의미한다. 글루코스는 화학반응을 통해 전기에너지로 변환할 수 있는데, 체내의 글루코스로부터 전기를 생산하는 '글루코스 연료전지 기술이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2010년대 초반부터 연구된 글루코스 연료전지는 해를 거 듭할수록 작은 크기와 높은 효율을 경신해 가고 있다. 2022년 미국 MIT와 독일의 뮌헨공과대학교의 공동 연구팀이 발표한 글루코스 연료전지는 사람 머리카락 굵기의 100분의 1 수준인 400나노미터의 두께로, 제곱센티미터당 43마이크로와트의 전 기를 생산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현재 인체에 삽입되는 임 플란트가 소모하는 전력량이 수백 밀리와트 수준이므로, 연료 전지의 면적은 최소 100제곱센티미터는 되어야 한다. 정사각형 형태로 제작한다고 가정하면 한 변이 10센티미터는 되어야 한 다는 것인데, 이는 아직 뇌에 삽입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그 렇지만 현재 기술로도 충전식 배터리와 동시에 사용할 경우 배터리의 크기를 줄이거나 충전 시간을 단축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연료전지의 효율이 계속해서 높아지고 있 기 때문에, 머지않아 외부에서 배터리를 충전할 필요 없이 인체 내에서 반영구적으로 사용이 가능한 브레인 칩이 개발될지도 모른다.

- 우리 뇌에 질환이 생기면 대체로 수술이나 약물로 치료한다. 그런데 퇴행성 뇌 질환의 일종인 파킨슨병 환자들 중에는 약물 로 증상이 개선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이런 환자를 대상으로 '심부뇌자극deep brain stimulation, DBS'이라고 불리는 장치가 머릿속 에 이식되고 있다. 이 장치는 뇌의 깊은 곳에 가늘고 긴 바늘을 찔러 넣고 펄스 형태의 전류를 흘려보내 뇌 활동을 조절한다. 이 미 미국 식품의약품안전처의 승인을 받고 사람의 뇌에 이식되 기 시작한 지도 30년이 넘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의료 기기 다. 뇌 속에 전자 장치를 삽입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들 수도 있지만, 의외로 많은 환자들이 심부뇌자극 장치를 머릿속에 삽 입하는 수술을 받는다. 심부뇌자극 장치는 전 세계적으로 10만명이 넘는 이들의 머릿속에 이식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적지 않은 이식 수술이 진행되고 있다. 특히 파킨슨병의 경우에 는 뇌에 전기 자극을 가하는 동안 손의 떨림이 멈추고 걸음걸이 도 정상으로 돌아오는 극적인 효과가 관찰되기도 한다.
파킨슨병은 뇌의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흑질substantia nigra 이라는 영역의 도파민 뉴런이 손상되어 도파민이 잘 분비되지 않는 장애와 관련 있다. 심부뇌자극 장치는 이 부위에 전기 자극 을 가해 인위적으로 도파민 생성을 유도한다. 그런데 이 긴 바늘 처럼 생긴 전극을 자극하고자 하는 뇌의 위치에 정확하게 집어 넣는 것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 전극을 몇 번이나 머릿속에 넣었다 빼기를 반복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런 데 신기하게도 우리 몸의 모든 감각 정보를 수용하는 뇌 자체에 는 정작 통각수용기가 없어서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 대부분의 뇌 수술이 국소마취만 한 상태에서도 진행할 수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뇌 수술을 하는 도중 언어 영역이나 운동영역과 같은 중요 영역을 잘못 건드릴 수도 있는데, 이런 뇌 부위를 아주 조 심스럽게 자극하면서 언어 기능이나 운동 기능이 달라지는지를 관찰하기도 한다.
이렇게 깨어 있는 상태에서도 뇌 수술이 가능하기에, 긴 바늘 형태의 전극을 머릿속에 집어넣고 여러 전기 자극을 가해보면 서 파킨슨 환자의 증상이 좋아지는 자극 깊이나 위치를 찾아낼 수도 있다. 초기 심부뇌자극 수술을 시행하던 신경외과 의사들 은 이 과정에서 아주 흥미로운 현상을 발견했는데, 흑질 부근의 특정한 뇌 영역을 자극했을 때 환자들이 갑작스레 이유 없이 행 복한 미소를 지었던 것이다. 어떤 환자는 심지어 소리 내어 웃음 을 터뜨리기도 했다. 자신의 머리를 열고 뇌 수술이 진행되는 동 안에 말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특정한 뇌 영역이 다름 아닌 보상중추의 핵심 부위인 측좌핵이었다.

- 2012년, 존스홉킨스대학교의 저명한 정신과학자 토머스 슐래 퍼Thomas Schlaepfer 박사는 우울증 환자들의 측좌핵에 심부뇌자극을 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영역을 자극할 때 자극 전류 의 강도를 점차 높여가면서 자극하면, 기분이 좋아지는 정도에 서 시작한 만족감이 나중에는 행복감을 넘어 쾌락에 가까운 감 정을 느낀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뇌를 직접 자극하지 않더라도 여러 가지 중독에 빠진 사람들은 중독 대상에 노출되거나 중독 관련 행동을 할 때 측좌핵이 활동하고 많은 양의 도파민이 분비 되는데, 이는 알코올 중독, 약물 중독, 쇼핑 중독 등 중독 대상을 가리지 않고 공통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이다. 그런데 이런 외부 자극 없이도 심부뇌자극을 통해 이 영역에 직접 전류를 흘려 뇌 를 자극해 주면 마치 중독 대상이 주어진 것처럼 도파민이 분비 되고 쾌감을 느끼는 것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토머스 슐래퍼 박사 연구팀은 한 신경과학 학술지에 '얼마나 행복한 것이 아주 행복한 것인가? 행복감, 신경윤리, 그리고 측좌핵의 심부뇌자극How Happy Is Too Happy? Euphoria, Neuroethics, and Deep Brain Stimulation of the Nucleus Accumbens'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 다. 이 논문에서 저자들은 중요한 윤리적 질문을 던진다. "행복 이라는 것이 버튼을 한번 누르는 것만으로도 쉽게 얻어진다면 이는 과연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을까?" 또한 “행복감을 만들어 내는 심부뇌자극 기술이 정신질환 환자가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쓰인다면 예상치 못한 사회문제가 생기지는 않을까?" 저자들은 사람들이 그저 순수하게 자신의 기분을 좋게 만들기 위해 이 기 술을 사용하는 미래가 올지도 모른다고 예측했다. 그들은 뇌를 자극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행복감을 높이는 것이 비윤리적이지 는 않다고 주장했다. 다만 행복의 '적절한 수준'이 어느 정도인 지, 그리고 행복의 수준을 너무 높일 경우 어떤 위험이 따를지는 한번 따져볼 문제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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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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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과학공부

과학 2024. 3. 19. 07:16

- 몸의 기능을 연구하는 생리학 physiology에서 파생한 피지션physician은 의사, 특히 내과의사를 뜻한 다. 오랫동안 의사는 곧 피지션이었다. 피지션이 되려면 대학에서 생리학을 공부해서 학위를 받아야 했다. 피지션은 환자를 주로 약 으로 치료했다. 반면 외과의사를 뜻하는 서전surgeon의 어원은 그리 스어 cheiros (손)와 ergon(일)의 합성어다. 이것이 라틴어로 chirur- gus, 다시 영어로 surgeon이 되었다.' 요컨대 외과의사는 '손 기술 자'란 뜻이다. 수술surgery도 결국 손 기술이란 뜻이다. 서전은 대학 도 나오지 않았고 생리학도 몰랐다. 아버지나 선배로부터 배운 칼 쓰는 기술로 환자를 치료했다. 게다가 그 칼로 면도와 이발도 해 주었다. 그래서 이발사 ·외과의사barber surgeon는 하나의 직업으로 분 류되었다. 서전의 지위는 제빵사나 양조업자와 비슷했다. 당연히 피지션은 서전을 동료로 여기지 않았다.
- 마취제는 일견 사소해 보이나 의학은 물론 사회에도 엄청난 영 향을 미쳤다. 백신, 항생제와 함께 의학의 위대한 발명품으로 꼽 히기에 손색이 없다. 마취제를 사용하면서 외과의사들은 환자의 고통에 대한 부담과 시간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리스턴의 다리 절단 30초 세계 기록(무슨 올림픽도 아니고)도 별 의미가 없어졌 다. 이제는 복잡한 수술을 얼마나 정밀하게 할 수 있는가가 관건 이 되었다. 요컨대 외과가 마취제를 계기로 현대화한 것이다. 인 체 깊숙이 위치한 복강, 흉강 등은 기존 의사들의 손이 닿지 않던 곳이었다. 마취제를 통해 비로소 이곳들이 의사 앞에 모습을 드러 냈다. 또한 뇌, 장기 이식 등 이전에는 상상도 못 하던 고난도 수술 도 가능해졌다. 마취가 가져온 효과는 수술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수면 내시경의 보편화로 좀 더 많은 사람이 손쉽게 몸 안의 위협 요인을 미리 제거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최근 10여 년 동안 대 장암 사망자 수가 꾸준히 감소한 것은 내시경 검사의 확대와 연관 이 깊다.
- 연합군의 승리 요인으로 페니실린을 빼놓을 수 없다. 인류의 가 장 위대한 발명품으로 꼽히는 이 약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부터 대 량 사용되어 강력한 효과를 입증했다. 물론 약의 원리 자체는 과 학의 발견이었다. 그러나 평상시였다면 이 약이 그토록 단기간에 널리 쓰이지 못했을 것이다. 페니실린의 상용화에는 과학 못지않 게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영향을 미쳤다. 전장에 공급된 페니 실린은 수많은 부상 병사를 살려 전력 강화에 공헌했다. 페니실린 을 원자폭탄, 레이더와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의 승패를 가른 기술 적 요인으로 꼽는 이유다.
- 1941년 플로리와 히틀리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 정부든 제 약회사든 설득해서 대량생산을 해볼 요량이었다. 이 선택은 그대 로 적중했다. 우선 미국 농무부의 노던 리저널 연구소와 협업해 옥수수 찌꺼기를 배양물질로 써서 생산량을 여섯 배 늘렸다. 이 연구소가 미국 중서부의 넘쳐나는 옥수수를 산업에 응용할 방법 을 연구하는 곳이어서 가능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진주만을 공 습당한 미국이 마침내 참전을 결정했다. 선전포고 5일 뒤 미국 정 부는 페니실린의 긴급 생산 계획을 입안했다. 미국 농무부, 영국 의 연구자들, 그리고 머크Merck&Co.와 화이자fizer 등 제약회사들이 컨소시엄을 구성했다. 그래도 여전히 대량생산은 어려웠다. 1942년 6월까지 미국의 전체 생산량은 겨우 환자 열 명분에 불과했다.' 너무 귀해서 임상시험 환자의 오줌을 걸러 페니실린을 다시 회수 할 정도였다.
1942년 가을 화이자에서 묘안이 나왔다. 지금이야 화이자가 굴 지의 제약회사지만, 원래는 싸구려 레몬을 수입해 콜라에 넣는 구 연산을 추출하던 업체였다. 1919년 화이자는 설탕을 곰팡이로 발 효시켜서 구연산 제조 원가를 6분의 1로 낮춘 이력이 있었다. 여 기서 힌트를 얻은 엔지니어 재스퍼 케인Jasper Kane은 크고 깊은 발효조를 사용하는 딥탱크deep tank 발효법을 고안했다. 이 방법은 구연산보다 의약품 원료에 더 적합했다. 덕분에 화이자는 제약회사 로 변신했고, 페니실린 컨소시엄에도 참여했다. 화이자도 처음에 는 과학자들에게 배운 대로 소형 플라스크를 써서 푸른곰팡이를 배양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이걸로 대량생산은 택도 없었다.
케인은 딥탱크 발효법을 페니실린에 적용하자고 주장했다. 한 마디로 도박이었다. 성공을 장담하기도 어렵지만, 핵심 생산 라인 을 푸른곰팡이 배양에 사용하면 다른 제품에 타격을 줄 것이 뻔 했다. 화이자는 회사의 명운이 걸린 이 문제를 두고 장고했다. 결 국 이사회 표결 끝에 케인에게 개발을 맡겼다. 도박은 보기 좋게 성공했다. 1944년 3월 브루클린의 옛 얼음 공장에서 페니실린 생산이 시작되었다. 계획의 다섯 배가 넘는 생산량이 쏟아졌다. 미 국 정부는 화이자의 동의를 얻어 이 제조법을 19개 회사에 공유하 고, 지원 물품과 자금을 마구 살포했다. 페니실린이 전략 물자여 서 가능한 일이었다. 옥스퍼드 연구소의 페니실린 생산량은 푸른 곰팡이 1세제곱미터당 1~2단위에 그쳤다. 이것이 1944년 상반기 6840억 단위, 1945년에는 7조 5000억 단위까지 치솟았다. 말 그 대로 '천조국' 미국의 위엄이었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 작 전에 투입된 미군의 90퍼센트는 페니실린을 갖고 있었다. 페니실 린은 폐렴, 패혈증에 의한 사망과 부상으로 인한 사지 절단을 현 격히 줄였다. 그 결과 연합군 병사의 약 12~15퍼센트가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 페니실린의 위력은 전쟁 후에도 이어졌다. 일단 대량생산으로 가격이 크게 떨어져 누구나 쉽게 구하는 약이 되었다. 1943년 미 국 정부는 페니실린의 자연 추출을 넘어 인공 합성하는 연구도 추 진했다. 14년 뒤 마침내 합성법이 개발되었고, 페니실린은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범용약물로 여러 증상에 맞는 변형체들을 만드 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매독, 임질, 결핵, 폐렴, 괴저 등 답이 없던 질병들이 페니실린으로 극복되었다. 페니실린이 구 한 생명은 1942년 이후 2억 명 이상일 것으로 추정된다.  인류 역사에서 하나의 약이 이렇게 많은 생명을 구한 사례는 없었다. 
- 과학사적으로도 페니실린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페니실린으로 거대과학 연구가 본격화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페니실린 개발사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이들의 직업적 정체성은 다양하다. 예컨대 플레밍은 과학적 발견에 천착한 과학자였고, 히틀리는 정제 기술을 개발한 엔지니어였으며, 케인은 대량생산을 조직한 기업가였다. 이렇듯 페니실린은 정부, 기업, 재단, 대학 등을 망라 하는 집단작업의 결과였다. 또한 페니실린을 계기로 과학 연구에 서 국가 역할이 부각되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페니실린 대량생산 의 결정적 순간은 미국 정부가 화이자의 제조법을 (특허 따위는 무시 하면서) 공유하고, 엄청난 자금과 자재를 지원한 데에 있었다. 이는 과학 발전이 국가 규모의 지원이 필요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함의한다. 이후 맨해튼 계획, 아폴로 계획 등에서도 비슷한 패턴이 반복되면서 과학과 국가는 불가분의 파트너십을 맺게 되었다.
- 왓슨과 크릭이 그저 우연히 프랭클린의 사진을 본 것만으로 DNA 구조를 규명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 사진만으로 가능한 일이었으면 진작에 윌킨스나 프랭클린이 해냈을 것이기 때문이 다. 왓슨과 크릭에게는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친, 그들만의 뛰어 난 역량이 있었다.
첫째로 직관이다. 왓슨과 크릭은 주어진 정보들을 조합하여 창의 적 결론을 도출해 내는 직관력이 뛰어났다. 51번 사진을 보자마자 유레카를 외칠 수 있었던 것도, 샤가프 본인도 의미를 몰랐던 샤가 프의 법칙을 응용할 수 있었던 것도, 네 종류 염기의 복잡한 결합 구 조를 완벽히 맞춘 것도, 이런 능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둘째는 융합이다. DNA 구조 규명은 기존 유전학적 지식을 넘어서는 과업이었다. 예컨대 화학물질에 대한 이해도 필요했고, X 선 결정학으로 대표되는 물리학적 방법론도 갖춰야 했다. 이 점에 서 왓슨과 크릭은 환상의 콤비였다. 원래 동물학과 유전학을 전 공한 왓슨은 DNA 연구를 하고자 생화학과 물리학도 익혔다. 크 릭은 비슷한 시기 많은 학자가 그랬듯 물리학에서 생물학으로 전 환한 경우였다. 양자역학을 확립한 닐스 보어와 에르빈 슈뢰딩거 는 생명 현상의 물리학적 이해를 강조하여 이러한 전환에 큰 영향 을 미쳤다. 이로써 근본적인 요소에 근거하여 거시적 현상을 해석 하는, 물리학의 환원주의가 생명과학에도 들어오게 되었다. 이는 DNA 구조 규명을 계기로 생명 현상을 분자 수준에서 연구하는, 분 자생물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만들어낸다. 가장 근본적인 유전물 질을 규명함으로써 생명 현상 전반에 대한 이해로 나아간다는 점 에서, 분자생물학과 물리학은 유사한 방법론적 기초를 공유했다.
- 그 과정은 이렇다. 우선 세포 속의 DNA가 어떤 단백질을 만들 지에 대한 정보를 RNA에 전달한다. 이것이 전사transcription다. 이때 전사된 RNA가 mRNA다." mRNA가 세포핵 밖으로 나가면 리보 솜이 부착된다. 그러면 가져온 유전정보에 부합하는 아미노산만 차례로 붙어 사슬(폴리펩티드)을 이룬다. 이를 번역translation이라고 한다. 그리고 폴리펩티드는 여러 형태로 가공되어 단백질을 만들 어낸다. 비유하자면 RNA는 우리 몸의 설계도(DNA)를 암호화해 서 생산 공장(리보솜)으로 가져가, 몸의 기본 재료(단백질)를 만들어 내도록 복호화한다.
이렇게 DNA의 유전정보가 RNA로 복제되고 단백질 생산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생명과학의 중심 원리 central dogma라고 한다. 이때 생성된 단백질은 인체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호르몬과 효소 가 만들어지며, 면역과 대사 등의 활동도 결정되기 때문이다. 
- mRNA 연구 60년
mRNA는 1961년 DNA의 단백질 생성 메커니즘을 밝히는 과 정에서 알려졌는데 발견과 함께 의학적 활용 가능성도 크게 주목 받았다. mRNA가 생명 현상의 원초적인 조절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이에 1976년, 헝가리의 한 대학원생이 중요한 아이디어를 내 놓았다. mRNA를 바이러스 방어에 이용하자는 발상이었다. 이 대 학원생이 바로 커털린 커리코다. 후일 바이오엔테크의 부사장으 로서 코로나19 바이러스 백신 개발을 이끄는 인물이다.
백신은 후천면역의 기억이라는 특징을 이용한다. 즉 병원체의 전부 혹은 일부를 인체에 사전 노출해서 감염이나 증상 없이 면역 학적 기억이 생기게 만든다. 그러면 실제 병원체가 침입해도 인체 는 그 면역 기억을 살려서 바이러스를 퇴치할 수 있다. 가공된 병 원체가 면역반응을 일으키는 항원이 되는 원리다. 기존의 백신 발에는 이 항원이 꼭 필요했다.
mRNA 기반 백신은 항원 대신 항원을 만들 수 있는 '설계도'를 넣어줌으로써 패러다임을 바꿨다. mRNA가 수행하는 이 설계도 전략의 장점은 신속성과 유연성이다. 병원체의 유전정보, 즉 설계 도만 알면 빠르게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발 플랫폼이 정비 되면 기간은 더욱 단축된다. 초기 개발 시간과 비용이 적게 들어 서 환자의 수가 적은 병도 대비할 수 있으며, 기존 대비 소규모 설 비로도 생산 가능하다. 안전성도 강점이다. mRNA는 인체 내부의 물질이므로 독성이 없다. 또한 제조 과정에 정제된 효소를 사용하 므로 위험한 물질이 들어갈 우려도 적다. 기존의 어떤 백신보다 안전하다고 평가받는 이유다."
물론 실제 개발은 쉽지 않았다. 일단 세포에 존재하는 mRNA를 필요한 만큼 만들어낼 방법이 없었다. 이 문제는 1980년대 유전자증폭 기술의 개발로 해결되었다. DNA의 특정 부분을 복제·증폭 하여 mRNA를 대량 합성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합성 한 mRNA를 동물에 주사했더니 또 문제가 생겼다. mRNA가 세포 안까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공률이 0.01퍼센트 에 불과했다. 게다가 심각한 면역반응이 일어나 동물들이 죽기도 했다. 10년을 넘게 이어온 개발 과정은 그대로 벽에 부딪혔다.
다시 10여 년이 지나서야 한계를 돌파할 기술이 등장했다. 매 사추세츠공과대학교MIT 교수 로버트 랭거와 다니엘 앤더슨이 개 발한 지질나노입자라는 물질이다. 이것으로 mRNA를 감싸면 세 포 내부까지 안전하게 도달시킬 수 있었다. 2005년 커리코는 펜실 베이니아대학교 동료 교수 드루 와이스먼과 함께 지질나노입자로 면역반응을 유발하지 않는 변형 mRNA를 개발했다. mRNA 백신 의 기반 기술이 확립되는 순간이었다.
- 사람, 자본, 지식의 선순환
기술이 확립된 다음부터는 기업의 몫이었다. 스탠퍼드대학교의 박사후연구원 데릭 로시는 커리코와 와이스먼의 논문을 읽고 유레 카를 외쳤다. 그리고 지질나노입자 개발자 랭거를 만나 2010년 벤 처기업을 설립했다. 그게 바로 모더나다. 모더나는 'Modified RNA', 즉인공 RNA의 줄임말이다. 이름에서 보듯 mRNA를 기반으로 한 백신과 치료제 개발이 주력 사업이다. 특히 2011년 스테판 방셀이 CEO에 취임하면서 성공 가도를 내달렸다. 방셀은 특유의 사업 감 각으로 벤처캐피털과 글로벌 제약회사들의 대규모 투자를 유치하 고, 미국 연방정부의 연구비 지원도 받아냈다. 모더나는 민관협력 의 구심과도 같은 기업이었던 셈이다. 창업 10년이 채 안 돼 노벨 상 수상자를 비롯한 최정상급 인력과 인프라를 구축했으며 이것 이 바탕이 되어 mRNA 체내 전달 기술을 완성할 수 있었다.
커리코와 와이스먼도 연구실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자신들 의 기술에 특허를 내면서 사업화에 뛰어들었다. 2011년 커리코는 변형 mRNA 기술의 사용 권한을 바이오엔테크라는 신생 기업에 넘겼다. 튀르키예 이민자들이 설립한 이 독일 회사는 이를 계기로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커리코도 25년간 재직하던 펜실베이니아대학교를 떠나 바이오엔테크의 부사장으로 합류했다. 그리고 2017년 에는 화이자와 협약을 맺고 mRNA 백신 개발을 본격화했다.
모더나와 바이오엔테크의 '대박'이 원천기술 덕분만은 아니었 다. 기업의 성공을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역시 돈이다. 특히 스타트업은 초기에 안정적인 투자를 확보하여 런웨이를 늘 려나가는 것이 관건이다. 모더나와 바이오엔테크도 이 과정을 거 쳐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여기에는 보스턴 근교 케임브리지 의 켄들스퀘어 Kendall Square로 상징되는 혁신 클러스터가 중요했다. 켄들스퀘어는 한마디로 미국 생명과학의 총아다. 하버드, MIT 같 은 명문대학을 필두로 1000개가 넘는 글로벌 제약회사와 벤처캐피털이 모여 있다. 뛰어난 과학자, 의사, 엔지니어, 사업가, 투자가 등이 매일 부대끼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혁신적 지식 이 나오고, 이것이 곧바로 창업과 투자로 이어진다. 이렇듯 켄들 스퀘어에는 고위험 고수익 high risk, high return 연구와 투자에 거리낌 없는 문화가 존재한다. 어제까지 실험실에서 연구하던 학생이 갑 자기 창업에 나서고, 듣도 보도 못한 사업 모델에 투자가 몰리는 일은 이곳에서는 일상과 같다. 사람, 지식, 자본으로 이어지는 선 순환이 혁신 산업의 붐을 일으킨 것이다.
- 17세기 인류는 극심한 식량 위기를 겪었고, 사망률도 높아 졌으며, 전쟁도 잦았다는 것이 골자다. 특히 유럽에서는 반유대주 의와 마법에 대한 맹신이 팽배하기도 했다.' 이렇게 흉흉했던 사 회 분위기는 소빙하기의 추운 날씨와도 연결된다. 따라서 온난한 기후는 걱정보다는 바람의 대상이었다. 마침 산업혁명이 본격화 하고 벨 에포크가 도래하면서 미래에 대한 낙관이 높아졌다. 지금 이야 따뜻해지는 기후가 부정적 뉘앙스를 띠지만, 당시에는 안락 함과 풍요의 의미가 더 컸을 것이다.
- 킬링은 1960년 남극의 측정치를 근거로 이산화탄소 농도 증가는 명백한 사실이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2005년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까지 측정을 멈추지 않았다. 그 47년 동안 이산화탄소 농도는 평 균 연 2피피엠씩 증가했다. 이 추이를 기록한 그래프, 즉 킬링 곡 선은 그대로 기후변화의 상징이 되었다. 킬링 곡선은 해를 거듭 하며 마치 파도처럼, 지수함수적으로 치솟았다. 이는 세계에 충격 을 던져주었다. 흔히 알고 있는 온난화의 위험, 즉 빙하가 녹고 해 수면이 높아져 도시들이 물에 잠길 수 있다는 예상이 현실의 위협 으로 여겨졌다. 온실효과를 실험으로 입증한 틴들로부터 100년이 넘게 걸려 도달한 결론이었다.
킬링 곡선의 가파른 상승은 과학자들의 위기의식을 부추겼다.
이제 기후변화는 과학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회적으로 공론화되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1975년 《사이언스》에 실린 월리스 브 로커Wallace Broecker의 논문은 기념비적이었다. 이 논문은 1800년부 터 지구 온도의 장기 변화를 추적하여, 산업혁명 이후 온실가스 배출이 바다의 탄소 흡수 능력을 약화시켰음을 논증했다. 브로커 는 뛰어난 과학 커뮤니케이터이기도 했다. 과학의 논리를 대중의 언어로 쉽게 바꿔 설명했다. 일례로 지구온난화는 브로커가 1975 년 논문의 제목으로 쓰면서 널리 알려졌다. 브로커는 의회나 언론 에 나가서 온난화의 심각성을 알리는 데도 열심이었다. 그는 사람 들이 온난화를 칵테일 마시는 시간의 호기심 거리로 여긴다며, 기 후라는 변덕스러운 야수가 인간을 파국으로 몰 것이라고 독설을 쏟아냈다.

- 천조국의 위엄
이론적 가능성만 있었던 원자 에너지의 현실적 구현은 당연히 쉽지 않았다. 그 과정은 육군이 미국과 캐나다 곳곳에 대규모 실 험 시설을 짓고, 과학자들이 이를 운영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것은 일반적인 연구소를 만드는 규모를 훨씬 넘어섰다. 오펜하 이머는 집단연구와 보안 유지를 위해 사람이 없는 오지에 인력 을 몰아넣는 방법을 제안했다. 즉 외부와 격리된 실험 단지를 조 성하여 각 프로젝트를 집중 수행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동의한 그 로브스는 미국 전역을 돌며 적당한 부지를 골랐다. 시카고에서는 페르미의 주도로 핵분열 연쇄반응의 제어 장치, 즉 원자로를 만들고 테스트했다. 오크리지에서는 콤프턴이 폭탄의 재료인 우라 늄-235의 대규모 농축 작업을 지휘했다. 버클리에서는 로런스가 사이클로트론으로 우라늄-235 와 플루토늄을 분리했고, 워싱턴주 핸퍼드에는 플루토늄 추출 시설이 들어섰다. 로스앨러모스는 이 를 화룡점정하는 마지막 퍼즐 조각이었다. 오펜하이머가 각 프로 젝트의 결과를 종합해 최종적으로 폭탄을 설계하고 조립했다. 이 모든 것이 비밀이었다. 맨해튼 계획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에서는 핵물리학 관련 논문이 아예 사라졌다. 또 계획에 동원된 수만 명 의 인력 중에는 자기가 하는 일을 정확히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았 다. 원래 살던 주민들은 집 근처에 이런 연구시설이 있는지도 몰 랐다.
- 어떤 방법이 성공할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가능한 모 든 방법이 동원되었다. OSRD는 우라늄과 플루토늄 폭탄을 모두 시도하기로 했다. 가장 난제였던 우라늄-235의 분리에는 전자기 분리법, 기체확산법, 열확산법이라는 세 가지 기법이 쓰였다. 효율 성만 따졌을 때는 셋 다 실패에 가까웠다. 들이는 자원과 노력에 비해 결과가 너무 적어서였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이 모 든 것을 정당화했다. 미국이 원자폭탄 개발을 결정하기까지는 오 랜 시간이 걸렸지만 일단 만들기로 한 뒤에는 약간의 가능성만 보 여도 인력과 물량을 쏟아부었다. 난다 긴다 하는 과학자들도 그렇 게 조건 없는 대규모 지원을 받으며 연구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맨땅에 헤딩하듯 시작한 계획은 단 3년 만에 성과를 냈다. 1945년 7월 뉴멕시코 앨라모고도에서 테스트에 성공했고, 한 달 뒤 히로시 마와 나가사키에 두 방의 폭탄이 떨어졌다. 1억 총옥쇄를 외치며 결사항전을 준비 중이던 일본은 곧바로 항복했다. 3년간 총 13만 명의 인력과 20억 달러의 예산이 투입된 결과였다. 2023년 기준 330억 달러, 원으로 환산하면 약 39조 9600억 원이다. 그러니까 2023년 한국 국방 예산(약 57조원)의 70퍼센트 정도 된다. 이러한 대규모 물량과 천재적 두뇌의 조합은 맨해튼 계획의 성공, 나아가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이끈 원동력이었다. 전 세계에서 오직 '천조국' 미국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 가속기 실험은 입자에 전기장을 걸어서 속도를 빠르게 높이면 서 이루어진다. 이때 가속하는 입자에 따라 장치의 종류와 실험 목적도 나뉜다. 우선 입자가속기는 전자, 양성자, 중입자, 중이온 등을 다른 입자나 물질에 충돌시켜서 일어나는 현상을 연구한다. 양성자가속기는 주기율표 1번인 수소에서 양성자를 분리하여 물질에 충돌시킨다. 여기서 쪼개져 나오는 소립자를 반도체, 소재 연구 등에 활용한다. 중입자가속기는 암세포 사살의 명사수다. 수 소보다 무거운 탄소 입자를 빛의 속도 70퍼센트 정도까지 가속하 여 암세포에 쏜다. 기존 방사능 치료에 비해 암세포를 더 많이 죽 이고 정상세포는 덜 죽인다. 중이온가속기는 우주에 존재하는 수 많은 원소를 연구한다. 무거운 원소(탄소, 우라늄 등)를 이온화하고 가속해서 표적 원자핵에 충돌시킨다. 그럼 핵반응이 일어나고, 알려지지 않았던 희귀동위원소가 생성될 수 있다. 즉 중이온가속기 실험에서 뭔가 나오면 화학 교과서의 주기율표가 바뀐다.
반면 방사광가속기는 전자를 가속하여 빛을 생산한다. 전자는 만들기가 쉽고 무게도 수소의 1800분의 1에 불과하다. 그래서 속 도를 빛의 99.9퍼센트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 이렇게 가속한 전자 로 만들어낸 빛은 태양 밝기의 100억 배에 달한다. 이걸로 원자와 분자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일들을 관찰할 수 있다. 몇 년 전 국내 연구진은 수소 원자 두 개와 산소 원자 한 개가 결합해 물 분자H2O가 만들어지는, 1000조 분의 1(펨토)초 순간을 포착했 다. 방사광가속기가 초고성능 거대 현미경으로 불리는 이유다. 이 러한 특징 때문에 물리학과 화학은 물론 구조생물학, 의약학 등에 도 폭넓게 쓰인다.

- 요컨대 아폴로 계획은 과학이 정치, 경제의 전폭적 지원을 받으 면 어떤 위업을 이룰 수 있는지 보여준다. 순수하게 과학 연구만 의 목적만 있었다면 아폴로 계획은 시작조차 못했거나, 금방 좌초 했을 것이다. 소련과의 체제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시대적 목표 가 있었기에 반대 여론과 천문학적 비용에도 불구하고 계속될 수 있었다. 이를 뒤집어 생각하면, 아폴로 11호로 목표의 상당 부분을 이뤘기에 더 이상 계속되기 어려웠음을 함의하기도 한다. 원래 아 폴로 계획은 20호까지 계획되었으나,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17호 로 끝났다. 그리고 냉전 질서가 완전히 해체된 이후, 더 이상 달에 가려고 막대한 비용을 쏟아부을 이유도 없어져 버렸다.

- 과학과 기술의 연결
요컨대 과학혁명은 과학 자체의 위상과 성격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기존의 과학이 철학에 가까웠다면, 근대부터는 기 술에 훨씬 가까워졌다. 오늘날 과학기술이라는 말은 당연하게 들 리지만 연원을 따져보면 별로 당연하지 않다. 과학과 기술은 별개 의 전통을 갖기 때문이다. 두 전통이 합쳐지는 것은 과학혁명이 초래한 자연관과 방법론의 변화 때문이었다. 이것이 18세기 산업 혁명의 지적 기반이 되었다. 다만 이 과정이 흔히 생각하듯 과학 적 발견을 기술이 응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과학 의 이론적 발전이 산업혁명에 직접적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는 뜻 이다. 과학과 기술이 한층 가까워진 것은 분명하나, 그 연결의 형 태는 간접적이고 모호했다. 그것은 과학적 방법의 공유와 인적 연결이라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우선 기술자들이 과학의 방법을 수용했다. 즉 기술자들이 과학 적 연구 방법, 실험적인 분석 태도를 통해 기존 기술을 혁신할 수 있게 되었다. 와트의 증기기관 개량도 이런 경우였다. 와트가 의 뢰받은 뉴커먼 증기기관을 그저 수리만 했다면 혁신도 없었을 것 이다. 그는 기계의 구조와 시스템을 분석하고, 열효율 문제의 원 인을 파악함으로써, 분리형 응축기라는 기술적 대안을 도출해 낼 수 있었다. 여기에 고도의 수학이나 과학 이론은 필요하지 않았 다. 기존 데이터를 귀납적으로 분석하여 더 효율적인 조합으로 재 구축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산업혁명기에는 이 정도만으로도 상 당한 기술혁신을 이룰 수 있었다.
또한 과학 지식을 매개로 과학자, 기술자, 기업가 등이 활발히 교류했다. 근대과학의 꽃을 피운 뉴턴주의자들은 과학과 기술을 그 렇게 딱 떨어지게 구분하지 않았다. 그들은 지식으로 현실의 개선 을 이뤄야 한다는 베이컨의 과학관에 따라, 이론적 탐구는 물론 기 술의 개발과 혁신에도 많은 관심을 두었다. 산업혁명의 동력이 되 었던 계몽주의는 바로 이러한 실용적 배경을 두고 있었다. 흔히 산 업혁명의 지적 기원으로 꼽히는 루나 소사이어티가 그 전형이었다. 이 모임의 구성원들은 과학자, 사업가, 교수, 의사, 수리기사 등 다 양한 직업을 가졌지만, 과학이라는 공통의 관심사를 매개로 교류했 다. 그리고 여기서 근대를 만든 다양한 발명과 사상들이 나올 수 있 었다. 와트의 증기기관만 해도, 그가 이 모임에서 윌킨슨을 통해 알 게 된 배럴 기계가 아니었다면, 개발이 훨씬 늦어졌을 것이다.

- 서양과 동양의 운명이 갈린 1776년
과학혁명, 산업혁명, 경제성장은 16세기 이후 서양과 동양의 차 이를 가른 핵심 사건들이었다. 이는 아주 긴 시간대를 거치며 진 행되어 단기간에 극적인 변화가 포착되지 않는다. 그만큼 특정 시 점, 또는 계기가 결정적이었다고 꼬집어 말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어떤 기준에서 봐도 1776년이 상징적인 해였음은 분명 하다. 그해 《국부론》이 출간되었고, 개량된 증기기관이 시장에 등 장했으며, 미국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이 세 가지는 서양과 동 양의 가장 큰 차이였던 과학기술과 자유사상의 결정판과도 같은 사 건들이었다. 이로써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의 불이 댕겨지고, 근대라 는 새 시대가 열릴 수 있었다. 그 선구자인 세 사람, 즉 애덤 스미스, 제임스 와트, 벤저민 프랭클린에게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는 루나 소사이어티의 회원이었다는 것. 세 사람은 과학자, 기술자, 기업가들의 연대를 상징한 이 모임에서 활동하며 역사를 바꿀 성과들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이것은 이 모임이 지향한, 새 로운 지식에 대한 적극적 수용이라는 기조 덕분이었다. 공통의 관 심사로 묶인 이 개인들에게 전공 분야나 국적은 별로 중요하지 않 았다. 심지어 식민지 출신이었던 프랭클린은 이 모임에서 모국인 영국에 비수를 꽂을 지식체계를 갖추기까지 한다.
둘째는 과학자가 아님에도 과학에 조예가 깊었다는 것. 스미스 는 재무장관 찰스 타운센드의 부탁을 받고 그 아들의 견문을 넓혀주고자 함께 프랑스를 여행했다. 이때 중농주의 경제학자 프랑수 아 케네를 만났다. 중농주의는 physiocracy라는 영어 이름에서 보 듯 생리학physiology에 기초한 경제학 사조였다. 의사 출신 케네는 체액이 원활히 순환하면 인체가 스스로 균형을 회복하듯, 정부 통 제를 줄이고 자연법 체계에 경제를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에 감명을 받은 스미스는 과거 《도덕감정론》에서 정립한 이 기심 개념과 중농주의의 자유방임 논리를 결합해서 《국부론》을 저술했다. 수리기사였던 와트도 과학자들과 교류하며 증기기관 개량의 단서를 얻었고, 프랭클린은 일찍부터 전기에 관심을 가져 번개 실험도 해보았다. 그리고 독립선언서를 쓸 때는 <프린키피 아》의 논리 구조를 적용하여 미국 독립의 정당성을 절대적 진리 로부터 도출되는 것으로 보이도록 구성했다.

- 1차 산업혁명이 기술자와 사업가의 혁신으로 이루어졌다면, 2차 산업혁명은 과학의 난제 해결이 산업적 파급력으로 이어졌다는 차 이가 있다. 이때부터 과학은 인류의 진보를 이끄는 학문으로 위상 을 공고히 하게 되었다. 물론 이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초창기만 해도 전자기학이 그렇게 엄청난 가능성을 갖고 있음은 아무도 몰 랐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순수하게 궁금했던 질문, 예컨대 전기와 자기는 다른 종류의 힘인지, 서로 변환될 수 있을지를 탐구했을 뿐 이다. 이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 패러데이의 실험실로 정부 관료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전자기 실험을 보고 물었다. "이 런 걸 어디다 씁니까? 이거 돈이 됩니까?" 패러데이의 답이 걸작 이다. "갓 태어난 아기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훗날 이것에 세금 을 매길 수 있을 겁니다."사실 이런 연구가 돈이 되냐는 현대과학에서도 꾸준히 반복되는 질문이다. 하지만 전자기학의 발전 과정 에서 보듯, 과학 연구는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이 가져올 결과는 과학자 본인도 대부분 알 수 없다. 그저 시대가 당 면한 난제의 해결에 최선을 다하면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인 류의 삶이 진보하기도 하는 것이다. 패러데이와 맥스웰의 전자기 학은 이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준다.

- 코페르니쿠스도 본래는 프톨레마이오스주의자였다. 그러나 그 복잡성 때문에 결국 스승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것이 어떤 과학적 근거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코페르니쿠스는 프톨레마이오스 체계 를 철학적, 심미적 직관에 따라 문제 삼았다. 신이 창조한 우주는 간단명료해야 했다. 이는 당시 유행하던 신플라톤주의 철학의 영 향을 받은 것이다. 신플라톤주의에 따르면 우주는 신비한 힘으로 충만하고 수학적 조화를 이룬다. 이것은 철학적으로 타당할 뿐만 아니라 미적으로도 아름답다. 따라서 코페르니쿠스는 80여 개의 원이 난무하는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를 이렇게 받아들였을 것이 다. "나의 신이 만든 우주는 이렇게 너저분하지 않아!"
- 코페르니쿠스 필생의 목표는 이 체계를 조화롭게 단순화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지구와 태양의 위치를 맞바꾸면 많 은 문제가 해결됨을 깨달았다.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발상 은 분명 상식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완전히 새로운 생각도 아니었 다. 이미 기원전 3세기에 아리스타르코스가 이와 같은 주장을 했 기 때문이다. 즉 역사 최초의 지동설 제창자는 코페르니쿠스가 아 니라 아리스타르코스다. 하지만 철저한 비주류 견해였고, 프톨레 마이오스가 천문학을 평정하면서부터는 완전히 잊혔다. 그로부터 1700년이 지나서 코페르니쿠스가 묻혀 있던 이 학설을 꺼내어 복 원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새로운 '발견'보다는 '선택'에 더 가까웠다.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는 훨씬 간결하고 우아해진 지동설 체계 를 선보였다. 이로써 태양계는 각 행성이 조화를 이루며 질서정연 하게 궤도를 돌게 되었다. 흔히 말하는 오컴의 면도날, 즉 경제성 원칙에 근거한 논리적 추론의 전형이다. 코페르니쿠스는 책머리에 교황 바오로 3세에 대한 헌사를 썼다. 다음의 문장이 유명하다.
이는 한 화가가 각각 다른 모델로부터 잘 그려진 손, 발, 머리 등을 모아 자신의 그림을 완성하나, 그것이 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것과 같으며, 조각들은 서로 전혀 어울리지 않으므로 그 결과물은 사람이라기보다는 괴물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한계도 있었다. 코페르니쿠스가 계산한 지동설 체계와 실제 행성 운동 사이에는 오차가 존재했다. 겉보기에 복잡해도 수 학적으로 완벽했던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와는 대비되었다. 사실 코페르니쿠스도 죽을 때까지 이 문제를 고심했으나 이유를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오차가 누적되자 결국 편법을 쓸 수밖에 없었다. 코페르니쿠스도 프톨레마이오스의 궤도 보정 장치 (주전원, 이심원) 를 똑같이 가져다 썼다. 그 결과 천동설과 지동설은 태양과 지구의 위치라는 근본 발상만 다를 뿐, 세부 논리와 방법론은 서로 비슷해졌다.
오차는 행성들이 등속원운동을 한다는 잘못된 전제 때문에 발 생했다. 코페르니쿠스도 원이 완벽한 도형이라는 과거의 관념을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코페르니쿠스가 발상의 전환을 통해 혁신적 아이디어를 제기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아직 '학문으로 서의 과학'은 존재하지 않았다. 실험 방법론도 정립되지 않았고, 관측에 필요한 망원경도 발명되기 전이었다. 요컨대 천문학이 과 학보다는 철학에 훨씬 가까웠던 시대였다. 그래서 이 책에는 과학 연구서로 보기 힘든 요소들이 눈에 띈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부 분이다.
모든 것의 중심은 태양이다. 이 가장 아름다운 신전에서 사방을 비출 수 있는 이곳 말고 대체 어디에 눈부시게 빛나는 이 불빛을 둘 수 있겠는가? ... 그래서 태양은 왕좌에 앉아 그 주위 를 돌고 있는 그의 가족, 즉 행성들을 지배한다."
마치 고대의 서사시 같다. 코페르니쿠스가 고대의 세계관을 완 전히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문장이기도 하다. 코페르니쿠 스의 한계는 그로부터 시작된 과학혁명의 후배들이 극복했다. 요 하네스 케플러는 행성들의 궤도가 원이 아니라 타원이라는 사실 을 밝혀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망원경을 이용해 지동설의 경 험적 증거를 관측했다. 아이작 뉴턴은 행성 운동의 법칙을 수학으로 정립했다.
이렇듯 코페르니쿠스는 '경계'를 상징하는 학자였다. 중세와 근 대, 철학과 과학, 프톨레마이오스와 뉴턴의 경계에 그가 서 있었 다. 천동설에서 지동설로의 전환은 역사에 이런 복합적인 경계들 을 함께 만들어냈다. 과학철학자 토머스 쿤이 그를 '최초의 근대 천문학자이자 최후의 프톨레마이오스 천문학자'로 규정한 이유이 기도 하다.'

- 중세의 연쇄적 균열
흔히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는 성경에 반하는 내용 때문에 교 회의 탄압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이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 다. 교회가 이 책을 금서로 지정한 것은 출간 73년 뒤인 1616년이 다. 즉 교회는 꽤 오랫동안 이 책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미 교회는 출간 훨씬 전부터 지동설을 인지하고 있었다. 1533년 지동 설 강의를 들은 교황 클레멘스 7세와 추기경들이 코페르니쿠스에 게 출간을 재촉할 정도였다. 코페르니쿠스는 평생 가톨릭에 봉직 한 사제로서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교황에게 헌정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는 중세 사상체계의 급소를 겨냥하고 있었다. 이것은 중세의 천문학이 신학, 물리 학, 화학, 의학 등과 구분이 어려울 만큼 통합되어 있었다는 사실 에서 기인한다. 일례로 천상계는 신학의 성경과 곧바로 연결되었 다. 또한 점성술 및 의학에서는 행성이 인간의 기질에 영향을 미 친다고 이해되었다. 행성은 지상의 금속과 관련이 있었고, 인체는 소규모의 우주로 여겨졌다. 코페르니쿠스도 천문학자인 동시에 점성술사였으며 신학자이자 또 의사였다. 그래서 천문학이 한 번 뒤집히자, 사상의 전 체계가 연쇄적으로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 다. 천장지제궤자의 혈潰, 작은 개미구멍으로 인해 높 은 둑이 무너지는 모양새였다.
코페르니쿠스는 지구와 태양의 위치가 뒤바뀌었다는 세계관의 전환을 상징한다. 지구는 천지창조의 중심에서 우주의 변방으 로 밀려났다. 신이 만든 세계에서 보살핌을 받는다고 믿었던 인간 들은 강제로 홀로서기를 당했다. 그리고 각성했다. 우리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우주를 구성하는 수많은 물질 중 일부일 뿐이라 고. 이로써 인간은 중세를 지배한 종교적 믿음에서 벗어나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었다. 근대를 만든 새로운 세계관, 과학적 사유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 뉴턴역학에 열광한 것은 과학자뿐만이 아니었다. 철학자들도 지대한 관심을 표했다. 당시 절대왕정과 교회의 지배에 맞서 계몽 주의가 퍼지고 있었다. 부르주아 계급을 대변한 계몽주의자들은 사회계약론과 무신론을 받아들였다. 그럼으로써 오직 이성에 의 해서만 운영되는 사회를 꿈꿨다. 당연히 왕권신수설과 같은 신 중심 세계관과는 대립했다. 계몽주의자들은 구체제를 무너뜨릴 이 론적 무기를 뉴턴역학에서 발견했다. 어떠한 신비나 권위도 인정 하지 않고, 이성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는 점에서 뉴턴역학과 계몽주의는 궤를 같이했다.
이는 뉴턴역학의 일반화 과정이라고 할 만했다. 뉴턴의 후예들 에는 이과생뿐만 아니라 문과생도 있었다. 라플라스와 르 베리에 같은 이과 후예들은 뉴턴역학을 정교하게 다듬어 과학 전반으로 확장했다. 반면 볼테르Voltaire, 존 로크John Locke 등의 문과 후예들은 뉴턴역학의 원리를 적용하여 새로운 사회를 설계했다. 이러한 시 도들은 기존의 가치와 지식 체계를 무너뜨리는 과정을 동반했다 는 점에서 혁명적이었다. 중세의 인류는 이 혁명을 거치면서 근대 로 나아가게 되었다.

- 과학적 사유의 방법
과학혁명, 편지 공화국, 계몽주의, 시민혁명은 뉴턴에서 촉발된 하나의 역사적 흐름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는 과학과 철학이 분리되지 않은 시대 상황을 반영한다. 뉴턴의 후예를 자처한 로 크, 볼테르, 벤담, 제퍼슨은 요즘으로 치면 문과생이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과학과 철학은 다른 학문이 아니었다. 과학도 자기 전공 의 일부로 여겨 공부하고 연구했다. 물론 이들의 과학 지식이 그렇게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었다. 볼테르는 15년 동안 뉴턴을 공 부하고 번역했지만 <프린키피아>에 대한 이해는 피상적이었다.
다만 자연보다는 인간, 과학의 결과보다는 과정을 더 중시했 다. 계몽주의자들이 과학에 열광한 이유는 어떠한 권위나 독단 없 이 합리적으로 진리에 이르는 그 '방법'에 있었다. 이러한 과학적 방법, 과학적 사유는 그들이 설계했던 사회에 꼭 필요한 핵심원 리였다. 근대세계를 만든 청사진에는 이렇게 과학의 지분을 무시 할 수 없다. 하지만 오늘날 이에 대한 이해는 문과와 이과처럼 완 벽히 분리되어 있다. 계몽주의는 문과의 세계사에, 뉴턴은 이과의 물리학에 갇혀서 서로 다른 지식으로 기능한다. 어디서 접근하든 반쪽짜리 이해에 머무른다. 인문학과 과학의 통섭을 지식의 확장 보다는 시원으로의 회귀로 받아들여야 할 이유다.

- 《종의 기원>으로 다윈은 진화론의 대명사가 되었다. 그러나 다 윈을 진화론과 동일시하는 관념은 다른 각도에서도 볼 필요가 있 다. 첫째로 진화가 다윈만의 발명품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전에도 생물이 진화한다는 관념은 막연하게나마 존재했다. 고대 그리스 에도 시간에 따른 생물의 변화라는 발상이 있었고, 중세 이슬람에 서는 동물이 생존투쟁을 거치며 변형된다는 이론도 등장했다. 《종 의 기원》 출간 즈음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진화를 연구하고 있었 다. 다윈의 공로는 진화를 자연선택이라는 논리적 설명을 통해 과 학으로 정립한 것이다. 둘째로 다윈은 진화 개념의 사용에 매우 신중했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의 오해와 달리 다윈은 《종의 기원>초판에서 evolution(진화)이라는 명사를 쓴 적이 없다. evolved (진화했다)라는 동사를 마지막 문장에서 단 한 번 썼을 뿐이다. 《종의 기 원》에서 가장 유명한 문장이기도 하다.
처음에 몇몇 또는 하나의 형태로 숨결이 불어 넣어진 생명이 불변의 중력 법칙에 따라 이 행성이 회전하는 동안 여러 가지 힘을 통해 그토록 단순한 시작에서부터 가장 아름답고 경이로 우며 한계가 없는 형태로 전개되어 왔고 지금도 전개되고 있다 는, 생명에 대한 이러한 시각에는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
1859년 초판에 대한 서울대 장대익 교수의 번역이다. 여기서 '전개'로 번역한 원문의 단어가 'evolved'다. 기존 역자들은 '진화' 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다윈은 1872년 6판부터 진화라는 명사를 썼다. 이전까지 다윈이 썼던 표현은 “변이를 수반한 계승descent with modification”이었다. 진화라는 간단한 명사를 두고 이렇게 여러 단어 를 조합한 데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었다. 진화가 '더 나은 상태로 의 진전'이라는 목적론적 함의를 가졌기 때문이다. 즉 진화는 진 보와 구별되지 않는다. 하지만 다윈이 정의한 자연선택은 어떤 목 적이나 진전, 개선을 전제하지 않았다. 자연선택은 특정 종이 우 월해서가 아닌, 우연히 그 환경에 적합해서 이루어진다. 장대익 교수의 번역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반영한 것이다.

- 상보성의 개념
플랑크, 아인슈타인, 드 브로이, 슈뢰딩거의 혁신은 어디까지나 고전물리학 내에서 제기된 논점에 고전물리학적으로 대응한 것이었다. 따라서 기존 체계를 허물고 새 패러다임을 도입하려는 의도 가 전혀 없었다. 실제로 이들 모두는 후일 양자역학에 부정적이었 다. 이들의 연구가 양자역학에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다는 점을 생 각해 보면 역설적이다.
양자역학이라는 뉴웨이브의 선두에는 보어가 있었다. 보어는 원자핵을 발견한 어니스트 러더퍼드의 원자 모델이 가진 오류를 해결해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이것은 전자의 궤도나 에너지가 정수로 떨어지고 불연속적이라는 양자적 가설을 도입해 가능했 다. 보어는 연구도 잘했지만 리더십도 뛰어났다. 코펜하겐대학교 에 이론물리학연구소를 세우고 많은 학자를 초청했다. 양자역학은 그들의 협업으로 탄생한, 일종의 집단연구 성과였다. 이들이 공유한 양자역학의 표준적 해석을 '코펜하겐 해석'이라고 한다. 과학에 해석이란 단어는 좀 낯설다. 이는 양자역학의 독특한 성 립 과정을 반영한다. 뉴턴역학이나 상대성이론은 기본이 되는 공 리를 토대로 세워졌다. 한 명의 천재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만들 어서 완결성도 높다. 반면 양자역학은 그렇지 않다. 양자가설이나 광양자가설에서 보듯 기묘한 현상을 이리저리 해석하면서 결과가 짜 맞춰졌다. 완결성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가장 권위 있고 표준적인 해석이 필요했다. 그걸 체계화한 이들이 보어와 그 무리였기에 코펜하겐 해석이라고 한다.
보어가 제창한 상보성이 그 핵심 개념이 된다. 원자 내부에는 물체의 여러 상태가 동시에 존재한다. 보어에 의하면 서로 배타적 인 두 명제를 보완적으로 합쳐야 비로소 이러한 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 둘 중 하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보통의 상식으로는 서로 배 타적인 관계에서 둘 중 하나가 참이면 다른 것은 거짓이어야 한 다. 실제로 고전물리학의 논리가 그러하다. 입자와 파동은 상호배 타적 개념이며 하나의 현상에 동시 적용할 수 없다. 하지만 원자의 세계를 이해하려면 이러한 상식을 버려야 한다. 보어의 설명이다.
처음 보면 이러한 현상이 대조적이겠으나, 원자에 대한 모든 정보를 보편의 언어로 모호함 없이 정확하게 표현하려면 둘 다 가상보적임을 깨달아야 한다.
- "대립적인 것은 보완적이다Contraria sunt complementa." 1947년 보어 가 기사 작위 문장에 직접 써넣은 라틴어 문구다. 과학의 명제가 아니라 철학의 선문답 같다. 장자의 제물론을 생각해 보라. "저것 은 이것에서 나오고, 이것 역시 저것에서 비롯된다." 만물 어느 곳 이든 도가 있다는 장자의 철학은 기나긴 시공간을 건너 양자역학 과 만난다. 실제로 보어는 주역을 비롯한 동양철학에 관심이 지대 했다. 그래서 위의 문구와 함께 음양을 상징하는 태극 문양으로 기사 문장을 만들었다. 음양론에 의하면 음과 양이라는 대립적 성 질이 균형을 이뤄 만물의 존재 양식을 이룬다. 신기하게도 양자역 학의 입자파동 이중성과 서로 뜻이 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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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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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 유전 변이를 분석한 결과 작물화가 꽤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됐 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예전에는 작물 대다수가 야생 식물에서 한 차례 작물화가 일어나 퍼진 뒤 지역이나 문화에 맞게 재래종이 확립되고 때 로는 이들 사이에서 교잡이 일어나곤 했다는 시나리오를 따른다고 생 각했다. 그러나 작물과 야생 근연종의 유전자 또는 게놈을 비교하자 작 물화 과정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즉 앞의 시나 리오를 따르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다수는 다음 세 가지 가운데 하나에 해당한다.
먼저 야생 식물 한 종에서 한 차례 작물화가 일어난 뒤에도 야생식 물과 작물 사이에 교잡이 일어나 유전자를 주고받는다는 시나리오다. 벼와 밀, 기장과 조, 사과와 토마토 등 많은 작물이 이 시나리오를 따른 다. 이처럼 야생 식물과 작물이 서로 유전자를 주고받다 보니 기장처럼 진짜 야생 식물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
두 번째 시나리오는 야생 식물 한 종에서 두세 차례 독립적으로 작물 화가 일어나고 그 뒤 작물 품종 사이 또는 야생 식물과 작물 사이에 교 잡이 일어났다는 시나리오다. 보리와 수수, 코코넛, 강낭콩 등의 작물 이 이런 과정을 겪었다.
끝으로 두 종의 야생 식물에서 잡종이 나오고 여기서 작물화가 일 어나거나 작물 두 종의 교잡으로 새로운 작물을 얻는 시나리오다. 감귤류와 바나나, 땅콩, 딸기 등의 작물이 이런 복잡한 과정을 통해 태 어났다.

- 아시아벼의 학명은 분류학의 아버지 칼 린네가 지었다. 속명 'Oryza'는 쌀을 가리키는 라틴어이고 종소명 'sativa'는 재배한다는 뜻 이다. 그런데 린네는 벼를 꽤 다른 두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은 몰랐다. 서구에서 벼는 주요 작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상태로 150년 이 흘렀다.
1920년대 일본의 저명한 육종학자 가토 시게모토 박사는 북방 계 벼와 남방계 벼가 생김새도 꽤 다를 뿐 아니라 교잡해도 자손이 불 임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관찰로부터 둘을 별개의 아종으로 봐야 한다 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일본을 포함한 동북아에서 주로 재배하는 북방 계 벼에는 자포니카라는 이름을 붙였고 인도와 동남아에서 주로 재배 하는 남방계 벼에는 인디카라는 이름을 붙였다. 둘 다 꽤 재배하는 중 국은 애매해 대신 인도를 택한 것 같다. 중국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는 작명이지만 이미 정해진 거라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인도식당에서 몇 번 인디카 쌀밥을 먹어본 적이 있는데, 밥알의 생 김새가 길쭉하고 서로 달라붙지 않고 나풀거려 식감이 꽤 달랐다. 인도 정통 카레에는 인디카 쌀로 지은 밥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뜻밖에도 오늘날 인디카 벼 재배 면적이 더 넓고 쌀 생산량도 자포니카 의 두 배가 넘는다. 우리가 먹는 자포니카 쌀은 전체 생산량의 30%가 채 안 된다.
- 흥미롭게도 쌀 뿐 아니라 다른 곡물도 찰기가 많은 종류가 있고 쌀 과 마찬가지로 앞에 '찰'을 붙인다. 찰보리, 찰기장, 차조, 찰수수, 찰 옥수수가 있다. 곡물의 찰기는 녹말을 이루는 두 고분자인 아밀로오스 amylose와 아밀로펙틴amylopectin의 비율에 따라 정해진다.
아밀로오스는 포도당 분자 수백~수천 개가 일렬로 붙어 있는 고 분자다. 반면 아밀로펙틴은 포도당 24~30개당 하나꼴로 곁사슬이 난 고분자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밥을 해 먹는 멥쌀은 아밀로오스가 15~20%이고 아밀로펙틴이 80~85%다. 반면 찹쌀은 거의 아밀로펙틴 이고 아밀로오스는 0~2%에 불과하다.
멥쌀은 아밀로펙틴 사이 공간에 아밀로오스가 박혀 있어 단단한 녹 말 과립이 형성된다. 반면 찹쌀의 녹말 과립은 물이 침투하기 쉬워 녹 말이 풀어지며 찰기가 커진다. 한편 우리가 먹는 멥쌀보다도 찰기가 덜해 밥알이 따로 노는 인디카 멥쌀은 아밀로오스 함량이 25%를 넘는다.

- 보리는 옥수수, 밀, 쌀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이 생산되는 곡물임에도 연간 생산량이 1억 5,700만 톤(2020년)으로 2, 3위권인 쌀과 밀에 한 참 못 미친다. 게다가 옥수수와 마찬가지로 주식으로서 소비되는 보리 의 양은 그리 많지 않아 전체 생산량의 5%에 불과하다. 보리 생산량의 75%는 가축 사료이고 나머지 20%는 맥아, 즉 엿기름의 형태로 변형 돼 쓰이는데 주된 용도는 맥주와 위스키 양조다. '몰트 위스키malt whisky' 의 몰트가 바로 맥아를 뜻하는 영어다.
식혜를 만들 때는 엿기름을 걸러낸 용액의 아밀레이스가 익은 쌀알 표면의 녹말을 맥아당(엿당)으로 분해해 달짝지근한 맛을 내는 것이라 면 맥주를 만들 때 몰트는 아밀레이스가 보리 알곡의 배젖 주성분인 녹 말을 맥아당으로 분해하는 것이다(따라서 시간이 훨씬 더 많이 걸린 다). 맥아당은 포도당 두 분자로 이루어진 이당류다. 그 뒤 효모가 맥아 당을 먹고 배설물로 에탄올을 내보낸다. 바로 알코올 발효다. 홉을 더 한 상태에서 발효해 얻는 게 맥주이고 홉 첨가 없이 발효해 얻은 술을 증류한 게 위스키다.
- 보리의 부활을 꿈꾸며
1965년 우리나라 사람 1인당 연간 보리 소비량은 36.8kg로 쌀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곡물이었지만 한 세대가 지나는 사이 급감해 1998 년에는 1.5kg에 불과했다. 보리는 이 기간 동안 우리나라에서 재배 면적이 가장 가파르게 줄어든 작물이다. 대신 그 자리의 태반을 거의 수입에 의존하는 곡물인 밀이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보리가 건강 곡물로 재인식되고 있다. 보리의 식이섬유 함량은 16%로 쌀의 열 배에 이른다. 그 결과 수분을 많이 흡 수해 장의 활동을 돕는다. 특히 수용성 식이섬유로 저밀도 콜레스테롤 LDL을 흡수해 혈중 수치를 낮추는 효과가 있는 베타글루칸 함량이 5%나 된다. 고지혈증과 비만, 당뇨 등 대사질환이 있는 사람들은 쌀밥만 먹 는 것보다 보리를 섞어 먹는 게 좋다. 

- 역사는 우리가 죽음을 맞는 전쟁터는 기념하면서, 번영의 터전인 논밭은 비웃는다. 역사는 왕의 서자 이름은 줄줄이 꿰고 있지만 밀의 기원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저지르는 어리석음이다. (앙리 파브르)
- 글 앞에 인용한 파브르의 말은 육천 년 빵의 역사』 1장에서 야콥이 인용한 글귀다. 1장에는 '풀들의 경쟁'이라는 절이 나오는데 저자는 여 기서 밀의 작물화 과정을 간단하게 언급하고 있다. 즉 풀 가운데 기장이 가장 먼저 작물이 됐고 뒤이어 보리가 선택돼 기장을 밀어내고 사 랑받다가 마침내 밀이 작물화된다. 보리와 밀은 다정하게 공존했으나 고대 이집트에서 밀가루로 효모(이스트) 발효 빵을 만드는 방법을 개발 하면서 밀은 '곡식의 왕이 됐고 그 지위를 오늘날까지 계속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밀에는 글루텐이 풍부해 반죽에 효모를 넣고 숙성시키면 효모가 토 해내는 이산화탄소 기체가 글루텐 막을 빠져나가지 못해 반죽이 부푼 다. 이를 오븐에 구우면 보들보들한 빵이 나온다. 반면 보리는 딱딱한 빵만 만들 수 있다. 참고로 반죽이 부풀어 부드러운 빵을 만들 수 있는 건 밀과 호밀뿐이다. 참고로 호밀빵이 다소 부푸는 이유는 다른 성분이 기체를 잡아주기 때문이다.
책에는 밀의 재배 과정도 소개돼 있다. 야콥은 “이집트에서 재배한 밀은 오늘날 미국, 캐나다, 우크라이나의 광대한 들판을 뒤덮고 있는 밀과는 사뭇 달랐다. 그것은 초기 재배종인 엠머밀emmer wheat이었다"라 며 “고대 로마인은 이 최초의 밀과 다른 밀을 교배하여 얻은 개량품종 을 이집트 전역에 심었다”고 쓰고 있다.
우리가 밀이라고 알고 있는 작물이 이 개량품종으로 보통밀common wheat 또는 빵밀bread wheat 이라고 부른다. 오늘날 엠머밀은 거의 재배되지 않고 거기서 유래한 듀럼밀durum wheat이 재배되고 있는데 주로 파스타용 으로 쓰이기 때문에 마카로니밀이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듀럼밀은 카 로티노이드가 들어 있고 단단해서 스파게티 면은 빵밀로 만든 면과 달리 색이 노르스름하고 더 오래 삶아야 한다. 듀럼밀은 전체 밀 생산 량의 5%를 차지하고 있다.
나머지 95%는 차지하는 게 빵과 면, 과자를 만드는 빵밀이다. 야콥 의 설명과는 달리 빵밀은 엠머밀의 개량품종인 정도가 아니라 아예 다 른 종으로 엠머밀과 염소풀의 게놈이 합쳐져 생겨났다. 90년 전 우장 춘 박사가 발견한 '종의 합성', 즉 배추와 양배추 게놈이 합쳐져 유채라 는 신종이 나온 것과 같은 원리다. 사실 엠머밀도 다른 종의 밀과 다른 종의 염소풀의 게놈이 합쳐서 생겨난 신종이다.
오늘날 밀의 경작 면적은 2억 2,000만 헥타르로 작물 가운데 가장 넓다. 한반도 면적이 2,200만 헥타르이므로 10배에 해당하는 넓이다. 밀의 수확량은 7억 6,100만 톤으로 11억 톤이 넘는 옥수수 다음으로 많고 쌀과 비슷하다.
- 이 엠머밀과 듀럼밀은 이배체 밀(AA)과 이배체 염소풀(BB)의 게놈 이 합쳐서 생겨난 사배체 신종(AABB)이다. 빵밀은 엠머밀과 다른 이 배체 염소풀(DD) 사이 잡종에서 전체게놈중복이 일어난 육배체 신종 (AABBDD)이다.
식물 게놈이 하나둘 해독되면서 식물의 진화 과정에서 전체게놈중복 이 여러 차례 일어났던 것으로 밝혀졌다. 속씨식물의 경우 10만 번에 한 번 꼴로 다배체가 나오는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게놈중복이 일어나 면 유전자도 중복되므로 세대를 거치며 점차 소멸한다. 이 과정에서 염 색체가 재배열하기도 한다. 그 결과 다시 이배체로 돌아가는데, 이 과 정을 '이배체화diploidization'라고 부른다. 오늘날 이배체 게놈을 지닌 식물 도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다배체 조상을 만난다는 말이다."
- 글루텐의 두 얼굴
미국의 저술가 마이클 폴란은 2007년 펴낸 책 『요리를 욕망하다」에 서 빵밀을 이렇게 평가했다.
"에이커당 더 많은 칼로리를 생산하고(옥수수, 쌀) 재배가 더 쉬우며(옥수수, 보리, 호밀) 영양소가 더 많은(퀴노아) 곡물들이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밀의 세계정복은 믿기 어렵고 그래서 더욱 인상적이다. 성공 비결이 뭘까? 바로 글루텐이다.”
폴란이 말한 밀은 물론 빵밀이다. 사실 빵밀이 듀럼밀에 승리를 거두 게 된 데 기여한 또 다른 요인도 바로 글루텐gluten이다. 글루텐은 밀가루 를 반죽하는 과정에 형성되는 단백질 네트워크로 반죽을 탱탱하면서도 유연하게 만든다. 우동 면발의 쫄깃함이 바로 글루텐 덕분이다. 쌀이나 메밀 같은 곡물의 가루로 반죽을 빚어 면을 만들면 뚝뚝 끊어지지만, 밀가루 면은 글루텐 네트워크로 형태를 유지한다.
한편 밀가루에 효모라는 발효 미생물을 넣고 반죽한 뒤 숙성하면 효 모가 증식하며 배출된 이산화탄소가 글루텐 네트워크에 갇혀 반죽이 부풀어 올라 구우면 폭신한 빵이 된다. 쌀은 물론 같은 밀족인 보리에 서도 불가능한 현상이다. 오늘날 빵밀이 곡물의 왕이 된 건 효모를 만 났기 때문이다.
글루텐은 7세기 중국 승려들이 처음 발견했다고 한다. 속세 시절 고 기 맛을 못 잊어 식물성 식재료로 고기의 촉감을 낼 수 없을까 고민하 다가 우연히 밀가루 반죽을 찬물 속에서 주무르자 녹말이 빠져 나오면 서 고무 같은 덩어리만 남았던 것이다. 이 가운데 글루텐이 70~80%나 된다. 채식주의자를 위한 콩고기나 버섯고기의 핵심 재료도 알고 보면 글루텐이다.
밀알도 다른 씨앗처럼 배와 배젖으로 이뤄져 있다. 배는 식물체로 자 랄 부분이고 배젖은 싹이 광합성을 할 때까지 영양을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 밀알의 배젖은 탄수화물(녹말)과 저장단백질이 엉겨 있는 상태로 싹이 트면 이들을 분해하는 효소가 활성화돼 영양분으로 쓰인다. 밀의 저장단백질은 글리아딘aladin과 글루테닌olutenin 두 종류다.
물론 다른 곡류의 배젖도 비슷한 방식으로 탄수화물과 단백질을 저 장해 공급하지만, 종마다 저장단백질 종류가 다르다. 예를 들어 쌀의 배젖에는 글리아딘에 해당하는 단백질이 거의 들어 있지 않다. 반면 밀 족 곡식인 호밀과 보리의 배젖에는 글리아딘과 글루테닌에 해당하는 단백질이 있다.
밀가루에 물을 넣어 반죽하면 글루테닌 단백질이 서로 결합해 스프 링처럼 되면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글리아딘이 그 사이에 들어가 완 충재 역할을 한다. 바로 글루텐이다. 반죽을 치댈수록 글루텐 네트워크 가 더 치밀해져 탄성이 커진다.

- 쌀, 보리, 기장, 조, 콩(대두),
우리 조상들이 주식으로 여겼던 오곡이다. 쌀의 파트너였던 보리 와 된장, 간장, 두부의 재료인 콩은 수긍이 가는데 기장과 조는 뜻밖이 다. 기장과 조는 낟알이 너무 작아 도무지 주식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오죽하면 좀스러운 사람이나 행위에 조의 낟알인 '좁쌀'이라는 은유를 쓸까. 기장과 조 대신 밀이나 수수 또는 팥이 오곡에 들어가야 어울릴 것 같다. 다만 옥수수는 한반도에 들어온 역사가 짧아 어색하다.
사실 일반인은 기장과 조의 낟알을 구분하지 못할 수도 있는데, 나란히 놓고 비교하면 기장이 조보다 확실히 더 크다. 아무튼 우리 조상들이 둘에 전혀 다른 이름을 붙인 걸 보면 그만큼 두 작물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기장과 조는 한자어처럼 보이지만 둘 다 순우리말이다. 흥미롭게도 영어에 서는 둘뿐 아니라 작은 낟알을 지닌 여러 볏과 작물을 아울러 'millet'이라고 부른다. 심지어 수수조차 'great millet'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과학문헌에서는 포함하지 않는다. 번역가가 영어 원서에서 millet를 만나면 앞뒤 문맥을 파악해서 적당한 번역어를 골라야 할 것이다.
이런 차이는 식량에서 기장과 조의 비중이 달라서였을 것이다. 즉 서 아시아와 유럽에서는 지금도 주식인 밀과 보리가 최초의 작물이라 뒤에 들어간 기장과 조의 중요도가 낮았다. 반면 동북아시아에서 처음 작물화 된 곡식이 바로 기장과 조다. 앞서 1장에서 벼를 가장 먼저 소개하는 이 유 가운데 하나가 '우리의 주식 작물이기 때문이라고 말했지만, 벼가 주 식이 된 것은 수천 년 동안 기장과 조를 주식으로 먹고 난 뒤의 일이다. 이런 역사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식량작물로서 기장과 조의 비중은 워 낙 낮아 연간 생산량이 각각 500만 톤에 불과하다. 쌀과 밀의 1%도 안 되는 양이다. 조의 상당 부분은 새 모이로 쓰인다. 기장과 조에 다른 작 은 낟알 곡물millet을 다 합쳐도 연간 생산량은 3,000만 톤이 채 안 된다. 참고로 수수는 6,000만 톤으로 보리에 이어 생산량 5위인 곡물이다. 

- 20세기 전반까지만 해도 기장과 특히 조는 중국과 한국의 주식 작물이었다. 그러나 벼농사 기술과 벼 품종 향상으로 쌀수확량이 급증하고 밀을 수입하면서 사람들이 기장과 조, 수수를 외면하자 재배 면적이 급 감했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이들 세 작물에 대한 관심이 살아나고 있다. 당뇨, 심혈관계질환 등 성인병에 좋은 곡물이라는 인식이 퍼지며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실제 기장과 조, 수수에는 쌀(백미)에 비해 각종 미네랄과 비타민, 피토케미컬이 풍부하게 들어 있다. 특히 기장은 쌀과 궁합이 잘 맞아(기장밥) 수요가 많이 늘었지만, 아직은 국내 생산량이 턱없이 모자라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다행히 수년 전부터 제주에서 본격적으로 기장을 재배하기 시작해 2019년 1,257헥타르에서 1,265톤을 생산했다. 이는 전국 재배 면적의 70%에 이르는 넓이다. 기장은 재배 기간이 짧아 무, 양배추, 당근 같은 월동 채소의 사이 작물로 적합하다(이모작). 지난 수년 사이 제주 지역 에 적합하고 수확량이 많은 한라찰, 올레찰 등 신품종이 잇달아 개발됐 고 시험재배를 거쳐 2023년부터 본격적으로 보급될 계획이다. 한국인 의 소울푸드 기장이 많은 가정과 식당의 식탁에 다시 오르기를 바란다.

- 하지만 왜 다른 작물은 안 심고 옥수수와 콩만 심는가?
"우리는 이곳에서 산업적 음식사슬의 맨 밑바닥에 있어요. 이 땅에서는 대부분 동물에게 먹일 단백질과 에너지(탄수화물)를 생산하고 있죠. 옥수수는 에너지를 생산하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고, 콩은 단백질을 생산하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이죠." (마이클 폴란, 잡식동물의 딜레마)
- 전이인자 transposable element 또는 transposon는 염색체 곳곳에 자리하고 있는 특정한 염기서열을 지닌 DNA 조각으로 다른 위치로 이동하거나 사본 을 만들어 다른 위치에 들어가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전이인자 자체 는 개체의 생존이나 번식에 도움이 되는 어떤 기능을 지니고 있지 않 다. 따라서 게놈에 무임승차하고 있는 기생충 같은 존재라고도 볼 수 있다.
전이인자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매클린톡이 발견한 DNA 트랜스포존DNA Transposon으로, 염색체에 박혀 있다가 활성화되면 빠 져나가 다른 위치로 옮겨 들어간다. 컴퓨터 워드프로세서 용어로 '잘라 붙이기 cut and paste'인 셈이다. 따라서 전이 자체로 전이인자 수가 늘어나 는 건 아니다.
- 다음으로 레트로트랜스포존retrotransposon은 '복사해 붙이기 copy and paste' 방식이다. 즉 염색체에 박혀 있는 DNA 조각을 주형으로 해서 RNA 복사본이 만들어지고 이를 주형으로 다시 DNA 복사본이 만들어진 다. DNA 주형에서 RNA가 만들어지는 게 전사이므로 RNA 주형에서 DNA가 만들어지는 건 '역전사retrotranscription'라고 부른다. 레트로트랜스포 존에서 레트로는 역전사를 뜻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DNA 조각은 게놈에서 특정한 염기서열을 인식해 그 사이에 끼어 들어간다. 원본 DNA 조각은 그대로 있으므로 레트로 트랜스포존이 활성화될 때마다 수가 늘어나고 따라서 게놈도 커진다. 대다수 생물체의 게놈에서 레트로트랜스포존이 차지하는 비율이 DNA 트랜스포존보다 크다.
- 게놈에서 전이인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식물마다 천차만별이다. 그 결과 게놈 크기도 큰 차이를 보인다. 같은 볏과 작물임에도 보리와 밀 게놈이 벼나 조 게놈보다 열 배 이상 큰 것도 전이인자 때문이다. 식물 에 따라 게놈에서 전이인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이처럼 다른 이유는 아 직 잘 모른다. 다만 어떤 환경의 변화가 전이인자를 활성화시키는 것으 로 보인다. 특히 잡종이나 전체게놈중복처럼 게놈에서 큰 변화가 일어 났을 때 이런 경향이 크다고 한다.
전이인자는 한동안 게놈에 존재하는 일종의 '기생체'로 여겨졌다. 하 는 일도 없으면서 '숙주인 게놈에 자리하면서 세포분열 과정에서 게놈 이 복제될 때 무임승차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람 게놈의 45%를 차지하는 전이인자를 없앨 수 있다면 게놈 크기가 31억 염기에서 17억 염기로 줄어든다.
게다가 전이인자가 자리를 옮기거나(DNA 트랜스포존) 복사본을 끼 워 넣을 때(레트로트랜스포존) 자칫 숙주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생존에 중요한 유전자 중간에 들어가 유전자를 망가뜨리거나 유 전자 발현 조절 영역에 들어가 전사가 안 되거나 지나치게 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숙주 게놈은 전이인자가 날뛰지 못하게 비활성 화하는 메커니즘을 지니고 있고 그 결과 전이인자 대다수는 비활성 상 태다.
그럼에도 전이인자의 활동이 숙주에 꼭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건 아 니다. 드물게는 생존이나 번식에 더 유리한 특성을 갖게 만들 수도 있 고 이런 개체가 선택돼 우점종이 되거나 새로운 종으로 분화할 수 있 다. 야생 식물의 작물화 과정에서 트랜스포존이 기여한 예도 발견되고 있다. 옥수수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 이 얘기를 하기 전에 옥수수
- 잡종 작물 시대 열어
20세기 100년을 거치며 곡물 수확량이 크게 늘었다. 화학비료로 작물의 성장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올리고 농약을 써서 병충해 손실을 줄 인 것과 함께 새로운 품종을 개발한 덕분이다. 특히 옥수수는 단위면적 당 수확량이 100년 사이 8배나 늘었다. 여기에는 앞의 요인과 함께 잡 종 옥수수를 개발한 것도 큰 역할을 했다. 1920년대 미국에서 잡종 옥 수수 재배가 시작된 이래 오늘날 재배되는 옥수수는 대부분 잡종이다. 밀 등 다른 작물에서도 잡종이 개발돼 널리 재배되고 있다.
잡종 옥수수는 '잡종강세hybrid viger'라는 현상을 이용해 수확량을 늘린 옥수수다. 품종이 다른 암수 사이에서 태어난 잡종의 몇몇 특성이 부모의 중간이 아니라 부모 양쪽보다 더 우세하거나 양쪽의 장점만을 지닌 경우가 종종 나타나 이를 잡종강세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수확량이 많 은 A품종과 병해충 저항성이 큰 B품종 사이에서 나온 1세대 잡종(F1) 은 수확량이 A보다 더 많으면서 병해충에도 강한 식이다.
다만 잡종 작물은 재래종이나 순계 품종과 달리 농부들이 해마다 종 자회사에서 씨앗을 사서 심어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잡종 작물에서 열 린 씨앗(2세대 잡종(F2))은 먹을거리로는 전혀 문제가 없지만, 감수분 열 과정에서 염색체 재조합이 일어나 게놈 조성이 제각각이다. 즉 재배 한 잡종 작물에서 얻은 씨앗을 이듬해 심었다가는 농사를 망치게 된다. 종자회사가 씨앗을 매년 팔아먹으려고 일부러 이런 유전적 조작을 했 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는 잡종 작물의 본질적인 문제다.

- 곡물의 파트너 작물
세계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콩과 식물이 작물화된 데에는 크게 두 가 지 이유가 있다. 먼저 콩은 작물 가운데 단백질 함량이 단연 많다. 수렵 채집 대신 농사를 택한 인류는 사냥을 나갈 여유가 없어졌지만 그렇다 고 고기를 얻기 위해 가축을 대규모로 키울 수도 없어 육류 섭취가 부 족해졌다. 따라서 고기를 대신할 단백질 공급원인 콩이 탄수화물(에너 지) 공급원인 곡물(물론 단백질도 약간 들어 있기는 하지만)의 파트너 로 함께 작물화된 것이다. 서아시아에서는 밀, 보리와 함께 렌틸콩과 병아리콩이 작물화됐고 동아시아에서는 벼와 대두가, 아메리카에서는 옥수수와 강낭콩이 짝이었다.
다음으로 땅심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보통 같은 자리에 작물을 반복 해 심으면 토양 영양분이 고갈돼 수확량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콩과 작물은 토양미생물과 공생으로 질소고정을 하는 능력이 있고 그 결과 땅을 비옥하게 한다. 따라서 다른 작물과 콩을 번갈아 심으면 땅 심을 유지할 수 있다. 이런 농사법을 윤작 또는 돌려짓기라고 한다. 콩 의 단백질 함량이 높은 것도 질소 원소가 단백질 구성단위인 아미노산 의 뼈대를 이루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여러 콩과 작물 게놈이 해독됐지 만 여기서는 콩과 작물 생산량에서 압도적인 1위이면서 원산지에 한반 도가 포함된 대두의 게놈을 주로 다룬다.
- 질소고정 박테리아는 토양에서 독립생활을 할 수 있다. 주변에 콩과 식물이 없어도 자연계에서 식물들이 그럭저럭 살아가는 이유다. 그럼 에도 토양이 척박해 질소고정 미생물이 제대로 활동하지 못하면 질소 화합물이 부족하고 그 결과 식물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악순환에 빠 질 수 있다.
그런데 속씨식물의 진화 과정에서 대략 1억 년 전 몇몇 식물이 질소 고정 박테리아와 공생하는 길을 찾았고 그 결과 척박한 환경에서 생존 에 유리한 지점에 올라섰다. 물론 식물도 거저먹는 건 아니고 박테리아 를 위해 뿌리조직까지 변형시켜 미생물의 집이라고 할 수 있는 뿌리혹 을 줄줄 달고 있고 그 안에 사는 박테리아에게 지상부의 잎이 광합성으 로 만든 영양분을 운송해 공급한다. 식물과 박테리아 사이에 탄소화합물과 질소화합물을 물물교환하는 셈이다.
때로 콩과 식물만이 질소고정 능력이 있는 것처럼 서술되고 있는 데, 실제로는 10개 과의 식물들이 질소고정 능력이 있다. 다만 콩과 식물은 종이 워낙 많고 구성원 대다수가 질소고정 능력이 있지만, 나 머지 9개 과는 일부 속의 종들에서만 질소고정이 일어난다. 공생하는 질소고정 박테리아의 종류도 다른데, 콩과와 삼과(장미목) 식물은 그 램음성균인 리조비아hizobia이고 나머지 8개 과는 그램양성균인 프란키 아Frankia다." 아무튼 380여 과로 이뤄진 속씨식물 가운데 10개 과에서 만 질소고정을 할 수 있는 식물이 존재하므로 여전히 예외적인 능력인 셈이다.
- 뜻밖에도 질소고정 관련 유전자 대다수가 질소고정 능력이 없는 속 씨식물의 게놈에도 존재한다. 즉 앞서 4개 목의 공통조상 식물에서 질 소고정을 위해 새로운 유전자들이 만들어진 게 아니라 기존에 존재하는 유전자들이 새로운 기능을 갖거나 새로운 네트워크를 이뤄 질소고정 박테리아와 공생할 수 있게 진화한 것이다. 이 역시 C4 광합성과 비슷한 패턴이다.
지난 2019년 학술지 사이언스에는 콩과 식물 뿌리혹의 진화적 기원 을 유전자 네트워크 차원에서 밝힌 연구 결과가 실렸다." 토양에 질소화 합물이 충분하면 콩과 식물도 굳이 뿌리혹을 만들지 않는다. 이들과 공 생관계를 맺는 박테리아인 리조비아rhizobia도 토양에서 혼자 살 수 있다. 그런데 질소화합물이 부족해지면 식물 뿌리에서 유인물질을 내보내 고 이를 감지한 리조비아가 이동해 뿌리털에 감염한 뒤 노드 인자Nod factor를 내보내 뿌리털에서 뿌리 피질세포로 이어지는 관인 감염사infection thread를 만들게 하고 피질세포의 일부가 분열해 혹원기 nodule primordium를 만 들게 유도한다. 감염사를 따라 이동해 혹원기를 이루는 세포의 내부로 들어간 리조비아는 일종의 세포소기관으로 자리잡고 질소 분자를 암모 늄으로 바꾼다. 혹원기가 커지면서 뿌리혹root nodule 이 된다.

- 고구마와 감자가 구황작물이라지만 한반도에서 재배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고구마는 18세기 중반 일본 대마도에서 들어왔고 감자는 이보 다도 늦어 19세기 초반 청나라에서 들어왔다. 즉 이들이 우리 조상들에 게 구황작물 역할을 한 건 100여 년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그 이전 수천 년 동안은 메밀이나 조, 마 같은 작물로 배고픈 시기를 버텼을 것이다. 고구마와 감자 모두 중남미가 원산지이자 작물화된 곳으로 15~16 세기 유럽인들이 가져갔고 아시아로 퍼졌다. 중국에서 고구마는 감저 藉 또는 감서'로 불렸다. 여기서 서와 저는 마를 뜻한다. 마는 동북 아시아가 원산인 식물의 이름이자 그 덩이줄기 이름이다. 즉 고구마의 생김새가 마와 비슷하면서 단맛이 특징이라 감저, 즉 직역하면 '단마'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 사실 한반도에 처음 고구마가 도입된 시기는 18세기 후반이 아니라 17세기 초 광해군 시절로 보인다. 다음 왕인 인조 11년(1633년) 고구 마를 보급하려고 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효과적인 재배 법을 찾지 못해 흐지부지된 것 같다. 고구마의 원래 이름이 감자였다는 사실이 이 역사를 뒷받침한다. 감자는 한자어 감저가 한글화된 이름이 다. 지금도 고구마를 감자 또는 감저라고 부르는 지역이 있다. 소설가 김동인인 1925년 발표한 단편소설 「감자의 감자는 사실 고구마다.
한편 감자는 중국어로 마령서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에 북감 저라고 불렀다. 그 뒤 지역에 따라 감저 또는 감자로 부르면서 혼란 이 생겼다. 그러다 고구마보다 재배가 쉽고 저장성이 좋으면서 채소로 쓸 수 있는 감자가 한반도 대부분 지역에서 자리를 잡으면서 결국 이름 까지 빼앗은 것이다. 대신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가리키는 일본어 '고코사실 한반도에 처음 고구마가 도입된 시기는 18세기 후반이 아니라 17세기 초 광해군 시절로 보인다. 다음 왕인 인조 11년(1633년) 고구 마를 보급하려고 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효과적인 재배 법을 찾지 못해 흐지부지된 것 같다. 고구마의 원래 이름이 감자였다는 사실이 이 역사를 뒷받침한다. 감자는 한자어 감저가 한글화된 이름이 다. 지금도 고구마를 감자 또는 감저라고 부르는 지역이 있다. 소설가 김동인인 1925년 발표한 단편소설 「감자의 감자는 사실 고구마다.
한편 감자는 중국어로 마령서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에 북감 저라고 불렀다. 그 뒤 지역에 따라 감저 또는 감자로 부르면서 혼란 이 생겼다. 그러다 고구마보다 재배가 쉽고 저장성이 좋으면서 채소로 쓸 수 있는 감자가 한반도 대부분 지역에서 자리를 잡으면서 결국 이름 까지 빼앗은 것이다. 대신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가리키는 일본어 '고코이모'가 우리말화돼 쓰이기 시작했고 오늘에 이르렀다.
- 고구마의 당분이 4%라지만 생으로 먹으면 그렇게 달지는 않다. 그런 데 요리를 하면 꽤 달아지고 특히 군고구마는 더 달다. 이 역시 베타- 아밀레이스 때문이다. 특이하게도 고구마의 베타-아밀레이스 효소 활 성은 5°C에서 가장 높고 75°C가 넘으면 열로 변성되면서 활성을 잃는 다. 따라서 조리 과정에서 베타-아밀레이스가 녹말과립 표면의 녹말 상당량을 맥아당으로 분해해 단맛이 강해진다. 맥아당의 단맛은 설탕의 3분의 1 수준이다. 고구마를 구울 때는 찔 때보다 고구마 내부의 온도가 천천히 올라가므로 효소가 더 오래 작용해 더 달다.

- 감자를 재배할 때 씨가 아닌 씨감자를 쓰는 이유도 상동염색체 사이 의 차이인 이형접합성이 이렇게 크기 때문이다. 감수분열 과정에서 염 색체 재조합이 일어나면서 게놈 구성이 제각각인 생식세포가 얻어지므 로 이형접합성이 클수록 이게 수정해서 맺히는 씨앗의 편차 역시 크다.
게다가 오늘날 재배되는 감자는 대부분 동질사배체, 즉 상동염색체 두개가 아니라 네 개가 쌍을 이루고 있어 이런 경향이 더 심하다.
수천 년 전 남미 안데스 산지에서 감자가 작물화될 때부터 농부들은 식물체의 특성을 유지하는 무성생식 방법, 즉 씨감자로 다음 해 농사를 지었다. 씨감자에서 나온 싹은 모체와 게놈이 동일한 클론이므로 매년 같은 특성의 감자를 수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씨감자 농사는 몇 가지 단점이 있다. 먼저 씨에 비해 씨감자는 덩치가 훨씬 크므로 수확량에서 손실을 보기 마련이다. 또 바이러스 같은 병원체에 감염된 상태가 다음 개체로 이어질 위험성도 크다.
- 싹이 난 감자를 먹으면 안 되는 이유
제철 감자가 싸다고 상자로 사서 두고 먹다 보면 어느 순간 싹이 난 감자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다. 이 부분을 칼로 도려내지 않으면 맛 도 쓰지만 몸에 안 좋고 많이 먹으면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 솔라닌 이라는 물질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가지속 식물은 잎과 열매에 글리코알칼로이드glycoalkaloid 라는 구조의 피토케미컬을 지니고 있다. 감자에는 솔라닌solanine과 차코닌chaconineo 있고 토마토에는 토마틴tomatine이 있다. 이 가운데 감자의 덩이줄기에도 존재하는 솔라닌이 널리 알려져 있다. 솔라닌은 1820년 역시 가지속 식물인 까마중(학명 Solanum nigrum)의 열매에서 처음 분리돼 이런 이름을 얻었다.
가지속 식물이 만드는 글리코알칼로이드는 이를 먹은 동물의 세포막 을 불안정하게 만들고 신경전달물질인 아세틸콜린을 분해하는 효소의 작용을 방해한다. 그 결과 소화계와 신경계를 교란시키고 고농도로 섭 취하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다만 글리코알칼로이드는 맛이 쓰기 때 문에 보통은 치사량을 먹기 전에 피하기 마련이다.
식물의 작물화 과정에서 맛이 쓰거나 독성이 있는 피토케미컬은 농 도가 낮아지는 쪽으로 선별이 이뤄졌다. 따라서 작물 감자와 토마토 역시 야생 식물에 비해서는 글리코알칼로이드 함량이 꽤 낮지만, 감자처럼 상황에 따라서는 많이 만들어져 독성을 띨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감자를 빛에 노출한 채 보관하면 싹이 나면서 껍질에서 솔라닌 합성이 활발해지고 엽록체가 많아져 녹색을 띤다. 이때 껍질째 감자를 요리해 먹으면 다량의 솔라닌을 섭취할 수 있다. 참고로 솔라닌 은 안정한 분자라 웬만한 열로는 분해되지 않는다. 의학사를 보면 소위 '솔라닌 중독'으로 불리는 사례가 여럿 보고됐는데, 2,000여 명의 발생 사례 가운데 사망자가 30명이나 된다.
토마토 역시 잎과 열매에서 글리코알칼로이드인 토마틴이 만들어진다. 다만 작물화 과정에서 열매의 토마틴 함량이 크게 줄었을 뿐 아니라 열매 가 성숙하면서 토마틴이 인체에 무해한 라이코페로시드lycoperosides와 에 스큘레오시드 esculeosides로 바뀌기 때문에 감자처럼 위험하지는 않다.

- 2017년 사이언스에는 현대 상업 품종 토마토의 향미가 떨어진 이 유를 밝힌 논문이 실렸다." 향미 lavor는 맛과 향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오늘날 토마토 열매가 과일이 아니라 채소로 취급되는 건 단맛과 함께 향기도 약해졌기 때문이다.
상업 재배품종과 야생종, 재래종 등 398가지 토마토를 분석한 결과 상업 재배 품종에서 향미와 관련된 휘발성 분자 13종의 농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들쩍지근한 토마토 특유의 향을 부여 하는 2-메틸-1-부탄올2-methyl-1-butanol nol과 바나나 향인 3-메틸-1-부탄
-3-methyl-1-butanol, 은은한 꽃향기인 베타-아이오논-ionone 같은 화합물이다. 생산량과 저장성, 질병 저항성 등에 집중해 개량하다 보니 이런 대 사산물을 만드는 유전자 네트워크가 부실해져도 방치한 결과다. 연구 자들은 관련된 유전자들의 변이를 야생 또는 재래종 형태로 되돌린다 면 향미가 풍부한 토마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 새 술은 새 포대에
2018년 학술지 네이처 생명공학에는 맛과 향이 진한 토마토를 만드는 새로운 전략을 소개한 논문 두 편이 나란히 실렸다. 즉 기존 상업 재배품종 토마토에 잃어버린 유용한 특성을 복구시키는 대신 야생 토 마토에 게놈편집기술로 작물 토마토의 특성을 부여해 향미는 유지하면 서 열매 크기 등 단점은 개선한 작물로 만드는 것이다. 지난 수년 사이 토마토 작물화 과정에서 일어난 게놈 변이가 많이 밝혀졌기 때문에 이 런 접근이 가능해졌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시간은 줄일 수 있을지 몰 라도 재배 품종에 야생 토마토를 교배하는 전통 육종법과 같은 결과물 이 나오는 것 아닐까.
그렇지 않다. 게놈 차원에서 보면 기존 육종법은 염색체가 재조합되 는 과정이고 이때 표적이 되는 유전자에 가까이 있는 여러 유전자들도 같이 바뀐다. 그 결과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를 잃는 일이 흔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게놈편집 기술을 쓰면 원하는 유전자만 콕 집어서 바꿀 수 있으므로 이런 부작용을 피할 수 있다.
- 연구자들은 토마토 작물화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 이는 유전자 6개를 바꾸기로 했다. 즉 3세대 게놈편집기술인 크리스 퍼/캐스을 써서 족집게 분자육종을 시도한 것이다. 식물체의 성장에 관여하는 SP 유전자와 열매 모양에 관여하는 유전자, 열매 크기에 관여하는 FAS 유전자와 FW2.2 유전자, 열매 개수에 관여하는 MULT 유전자, 영양분(라이코펜lycopene)에 관여하는 CycB 유전자를 작물형 또 는 바람직한 특성을 띠는 변이형으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야생종에 비해 열매 크기가 3배가 됐고 개수는 무 려 10배가 됐다. 즉 식물 한 개체 당 열매가 양으로 30배 더 달린 것이 다. 게다가 라이코펜 함량도 두 배로 늘었다. 이는 시장에 나와 있는 토 마토의 라이코펜 함량의 5배에 이르는 농도다. 라이코펜은 항염증 작 용이 있고 심혈관계질환 및 암 위험성을 낮춰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로 라이코펜 관련 유전자인 CycB는 라이코펜을 베타카로틴으 로 바꿔주는 효소를 지정하고 있다. 기존 토마토 작물화 과정에서는 이 유전자의 활성이 강화돼 라이코펜 함량이 줄어들었다. 예를 들어 방울 토마토의 라이코펜 함량은 60~120mg/kg인 반면 야생 토마토는 최대 270mg/kg에 이른다. 그런데 게놈편집으로 이 유전자를 아예 고장내 자 라이코펜 함량이 500mg/kg까지 올라갔다. 이 경우는 기존 작물화 와 반대 방향으로 바꾼 것이다.
- 수입 관세 때문에 법적 다툼
토마토가 채소든 과일이든 무슨 상관이냐 싶지만 1893년 미국에서는 이 문제가 대법원까지 올라가 판결이 내려지기도 했다. 한때 뉴욕 관세청장 을 지내기도 했던 미국 21대 대통령 채스터 아서는 관세를 낮춰 달라는 여론에 1882년 관세 인하 검토를 지시했다. 그 결과 위원회는 10% 인하 안을 의회에 제시했으나 보호론자들의 입김으로 이듬해 관세법을 평균 1.47% 인하하는 데 그쳤다.
- 이 과정에서 수입 과일은 무관세가 돼 서민들의 부담을 꽤 덜어줬다. 반면 수입 채소에는 여전히 10%의 관세를 매겼다. 이때 토마토는 과학보 다는 관습(상식)에 따라 채소로 분류됐고 그 결과 관세 대상이 됐다. 이 에 수입업자들이 불만을 품었고 이 가운데 뉴욕에서 가장 큰 과채류 수 입업체였던 존닉스&컴퍼니가 뉴욕항 세관 책임자 에드워드 헤든을 상대 로 재판을 걸어 대법원까지 올라가는 치열한 법정 공방을 벌였다. 원고측은 열매인 토마토가 식물학적으로 엄연히 과일이므로 틀린 분류 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사전까지 갖고 가 들이밀었지만, 법정은 "어떤 단 어가 무역이나 상업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지 않는 한 일상의 의미 로 쓰여야 한다"며 사전을 증거로 채택할 수 없다고 못 박았다. 판결을 맡은 그레이 판사는 “토마토는 덩굴식물에 열리는 열매이지만 디저트보 다는 주요리에서 주로 먹기 때문에 채소로 봐야 한다"며 "호박과 오이. 완두, 강낭콩도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우리나라의 경우 과일은 목본 식물의 열매에 한정하고 초본 식물의 열매 는 채소로 본다. 채소는 먹는 부위에 따라 엽채류(잎)와 근채류(뿌리), 과 채류(열매)로 나뉜다. 토마토는 고추, 호박, 오이, 참외, 수박과 함께 과 채로 분류된다. 완두나 풋콩은 씨앗이지만 과채류로 본다.

- 후추와 마늘도 그렇지만 양념 작물이나 기호 작물의 정체성은 해당 작물이 만드는 이차대사물secondary metabolites에서 온 다. 탄수화물이나 단백질 같은 영양분, 즉 일차대사물primary metabolites. es을 섭취하려고 먹는 음식에 맛을 돋우기 위해 넣는 양념 작물은 종류에 따 라 독특한 이차대사물 프로파일을 지니고 있다.
이차대사물은 대부분 식물이 각종 스트레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드는 분자다. 특히 식물체를 공격하는 생물체에 대항하는 무기 로서 이차대사물은 식물의 진화 과정에 따라 특화돼 있다. 고추속 식물 은 캡사이시노이드capsaicinoid로 불리는 알칼로이드 합성 전문가들이다. 고추의 매운맛을 내는 분자로 알려진 캡사이신capsaicin은 대표적인 캡사 이시노이드다. 한편 알칼로이드alkaloid는 질소를 함유한 염기성 유기화 합물을 가리킨다.

- 토마토와 고추의 차이
토마토와 고추는 가짓과 식물로 가까운 사이이지만 열매가 익는 과 정에서 결정적인 차이를 보인다. 토마토는 전형적인 열매의 길을 걷는 것이므로 고추 열매가 별난 경우다. 식물이 씨방을 부풀려 영양분이 들 어 있게 하는 건 씨를 퍼뜨리기 위함이다. 따라서 씨가 여물기 전까지 는 열매가 딱딱하고 타닌과 유기산이 많아 맛도 떫거나 시고 색도 녹색 이다. 씨가 성숙하면 열매의 세포벽이 약해지고 떫은맛과 신맛 대신 당 분이 올라가 단맛이 난다. 여기에 달콤한 향이 더해지고 색도 빨갛거나 노랗게 바뀐다. 동물들에게 빨리 와서 먹으라고 신호를 보내는 셈이다. 토마토 열매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 최 교수는 "토마토씨를 본 적이 있느냐?"며 고추씨보다 작은데다 미 끌미끌한 젤에 싸여 있어 포유류가 씹어 먹어도 거의 파괴되지 않고 장 을 통과할 때도 제대로 소화되지 않아 대변에 섞여 온전하게 빠져나온 다고 설명했다. 반면 고추씨는 상대적으로 크고 노출돼 있어 설치류 같 은 작은 포유류가 씹어 먹게 되면 십중팔구 상처를 입고 장의 소화 작 용으로 파괴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열매를 진 화시켰다.
고추에서는 씨가 여물면 열매의 색이 녹색에서 붉게 바뀌기는 하지만 세포벽이 약해지지도 않고 캡사이신이 사라지지도 않는다. 포유동 물이 먹기에는 여전히 꺼리는 상태다. 반면 새들에게는 먹기 좋은 열매 다. 빨간 열매가 녹색 잎과 보색대비를 이뤄 눈에 잘 띄고 새들은 캡사이신의 매운맛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결국 고추 열매를 먹은 새들 이 어디론가 날아가 배설을 하면 배설물 속의 소화되지 않은 씨앗이 발 아해 다음 세대를 이어간다.
- 고추가 새를 선택한 것
생태계 현장 조사 결과 이 가설이 맞는 것으로 밝혀졌다. 고추의 원산지인 중미와 북미 남서부에 사는 새인 굽은부리쓰래셔(curve-billed thrasher. 지빠귀와 비슷하게 생긴 앵무과의 새)는 고추를 즐겨 먹는데 배설물을 조사해 보니 온전한 고추씨가 들어 있었고 그 결과 널리 퍼질 수 있었다. 실제 발아율이 70%에 이르렀다. 반면 이 지역에 사는 소형 설치류인 숲쥐나 선인장쥐는 야생 고추를 외면하고 심지어 캡사이신이 없는 재배 품종 고추를 줘도 망설이며 조금밖에 먹지 않는다는 발견이 지난 2001년 학술지 네이처에 실렸다.
포유류와 조류는 거의 3억 년 전에 공통조상에서 갈라졌다. 따라서 둘 의 TRPV1 역시 지난 3억 년 동안 각자 진화하며 구조도 꽤 달라졌을 것 이다. 예를 들어 조류는 체온이 포유류보다 4°C 정도 높은 40~44°C이기 때문에 TRPV1이 활성화되는 온도도 그만큼 더 높아야 한다. 실제 조류 의 TRPV1의 활성화 온도를 측정해 보면 46~48°C로 그만큼 더 높다. 세 팅 온도의 차이는 구조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반면 토마토와 고추는 약 2,000만 년 전에 공통조상에서 갈라졌다. 즉 고추의 조상이 이차대사물인 캡사이신을 발명한 역사는 2,000만 년이 안 된다는 말이다(아마도 수백만 년일 것이다). 결국 고추 조상은 포유류 로부터 씨앗을 물리적으로 보호하는 대신 열매 자체를 못 먹게 화학적으 로 지키는 전략으로 시행착오를 거쳐 포유류의 TRPV1에만 달라붙는 구 조의 화합물, 즉 캡사이신을 만드는 생합성 유전자 네트워크를 진화시켰 다는 말이다.

- 프룩탄은 소장에서 소화가 잘 안 되는 탄수화물인 가용성 식이섬유로 대장으로 넘어가서 장내미생물의 먹이가 된다. 즉 프로바이오틱스probiotics로 장 건강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지나치게 섭취하면 문제를 일 으키기도 한다. 미생물 발효가 왕성해지면 배에 가스가 차고 복통, 설 사 같은 증상이 생길 수 있다. 프룩탄을 포함해 소화가 잘 안 돼 장내미 생물 발효로 문제를 일으키는 물질을 가리켜 포드맵FODMAP이라고 부른 다. FODMAP은 '발효가 되는 올리고당류, 이당류, 단당류 및 폴리올 fermentable oligosaccharides, disaccharides, monosaccharides, and polyols'의 머리글자다.
개인에 따라 포드맵이 소장에서 소화되는 정도와 대장에서 발효되는 정도가 다르다. 예를 들어 우유에 들어 있는 이당류 젖당(유당)도 포드 맵이지만, 소장에서 젖당분해효소가 충분히 나오는 사람에게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반면 효소를 전혀 만들지 못하는 사람은 우유를 조금 만 마셔도 배탈이 난다.
마늘에는 프룩탄이 많이 들어 있지만, 양념으로 먹는 양으로는 별문 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늘이나 양파를 즐겨 먹는데 평소 속이 더부룩하다면, 섭취를 줄일 때 속이 편해지는가를 살펴보는 게 좋다. 참 고로 프룩탄은 밀에도 들어 있다. 빵이나 면 같은 밀가루 음식을 먹고 나서 속이 안 좋다면 역시 포드맵에 민감한 체질이 아닌가 의심해 볼 만하다. 한편 쌀에는 프룩탄이 없다. 그러고 보면 우리 조상들이 주식 은 잘 정한 것 같다.

- 종의 합성은 오늘날 용어로 이질배수성allopolyploidy이라고 부르는 현상으로 당시로는 충격적인 발견이었다. 앞서 3장 밀의 게놈에서 설명했듯이, 오늘날 많은 작물의 등장에는 이질배수성이 한몫했다. 엠머빌과 빵밀도 이질배수성, 즉 종의 합성으로 생겨난 작물이고 앞으로 나올 딸 기와 인삼 등 많은 예가 있다.
종의 합성은 단순한 잡종과는 다른 얘기다. 배추와 양배추 사이에서 잡종이 종종 나오지만 생식력이 없다. 배추는 염색체(2n)가 20개, 양배 추는 18개라 그 사이의 잡종은 염색체가 19개다. 부계 생식세포의 염 색체(n) 10개(또는 9개)와 모계 생식세포에서 9개(또는 10개)가 수정돼 합쳐진 결과다. 그런데 1세대 잡종 개체가 생식세포를 만들려고 하면 짝이 안 맞아 감수분열이 제대로 일어나지 않고 따라서 불임이 된다. 그런데 드물게 감수분열 없이 염색체 19개를 지닌 상태 그대로 생식 세포가 만들어질 수 있다. 우연히 이런 생식세포 둘이 만나 수정되면 염색체 38개로 이뤄진 세포를 지닌 개체가 나온다. 바로 유채다. 이경 우 배추와 양배추 염색체를 온전히 지니고 있고 감수분열의 결과인 생 식세포는 염색체 19개를 갖고 있다. 배추와 양배추 두 종의 게놈이 합 쳐져 새로운 종인 유채가 나왔으므로 종의 합성이라고 부른다. 우 박사 는 오래전 자연에서 일어난 이 사건을 실험실에서 재현해 증명했다.

- 작물화로 쓴맛이 많이 지워졌지만...
가끔 오이를 먹다가 특히 꼭지 쪽에서 꽤 쓴맛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눈치를 보는 자리가 아니라면 씹던 음식을 뱉어낼 정도다. 예 전에 참외를 먹다가도 이런 '쓴맛을 본 적이 있다. 오이나 참외뿐 아니 라박과 식물에는 공통으로 이처럼 쓴맛이 강하게 나는 물질인 큐커비 타신cucurbitacin이 들어 있다. 분자 이름도 박과cucurbitaceae에서 따왔다. 큐 커비타신은 탄소원자 30개로 이뤄진 트리테르펜triterpene으로 몇 가지 종 류가 있다. 오이는 큐커비타신C, 멜론은 큐커비타신B, 수박은 큐커비 타신E를 지니고 있다.
쓴맛이 나는 다른 피토케미컬과 마찬가지로 큐커비타신은 동물을 쫓 아내는 방어물질이다. 대부분의 식물에서는 씨앗이 여물면 열매가 익 으면서 쓴맛이나 신맛이 나는 물질은 사라지고 대신 조직이 물러지고 단맛이 올라가지만 박과 식물의 열매는 익어도 쓴맛이 남아 있다. 이는 쓴맛에 둔감한 대형 포유류만을 끌어들이기 위함으로 보인다. 열매를 대충 씹어 넘기면 손상되지 않은 씨앗이 장을 통과해 똥에 섞여 빠져나와 발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박과 식물의 작물화 과정에서 중요한 개량 포인트가 바로 열 매에서 큐커비타신의 쓴맛을 최대한 줄이는 것으로, 수박에서는 완전 히 성공했지만 오이속 작물인 오이와 참외에서는 완벽하게 없애지 못 했다. 최근 당뇨에 좋은 걸로 알려져 찾는 사람이 늘고 있는 여주(학명 Momordica charantia)는 예외인데, 작물화됐음에도 여전히 쓴맛을 꽤 지닌 채 몇몇 요리에 식재료로 쓰이거나 술을 담글 때 들어간다.
- 박과 식물이 동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드는 분자인 큐커비 타신cucurbitacin은 미량 존재해도 과육이 굉장히 쓰다. 따라서 작물화 과정에 서큐커비타신생합성을 억제하는 쪽으로 선별이 일어나기 마련인데, 오이 와 참외에서는 여전히 불완전하다. 반면 수박을 먹다가 쓴맛을 느낀 적은 없을 것이다. 큐커비타신 생합성 경로가 완전히 막혀있기 때문이다.
게놈 분석 결과 이런 변화는 에구시수박에서 처음 나타났다. 이번에 분석한 16개 유전자원 가운데 12가지에서 쓴맛이 없었는데, 큐커비타 신생합성 경로를 조절하는 Bt 유전자 변이가 일어난 것으로 나타났 다. 그리고 달콤한 수박의 경우 전부 변이형 Bt 유전자였다. 작물화 초 기 일찌감치 쓴맛이 없는 형질이 고정됐다는 말이다.
작물화 과정에서 열매가 커지고 방어물질이 줄어들거나 없어지면 식 물은 각종 병충해에 취약해지기 마련이다. 수박도 예외는 아니어서 덩굴쪼김병(곰팡이), 흰가루병(곰팡이)이나 선충의 공격에 시달린다. 또 가뭄 같은 스트레스에도 취약하다.
육종학자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야생 식물의 유전자를 이 입introgression하는 전략을 즐겨 쓴다. 달콤한 수박 역시 이 목적으로 쓴사 과수박이나 시트론수박과 교잡을 한 흔적이 이번 게놈 분석을 통해 드 러났다(267쪽 그림). 즉 이들 종에서 여러 스트레스 저항 유전자들이 이입된 것이다.

- 와인의 역사가 수천 년에 이르다 보니 세계 각지에서 재배되는 포도 (비니페라)의 품종이 7,000가지에 이른다. 비록 한 종이지만 수천 년, 수백 년 동안 따로 재배된 결과 서로 게놈이 꽤 다르다. 최초로 해독되 는 품종이 포도 참조 게놈이 될 것이므로 신중히 선택해야 한다.
여기서 대표적인 와인용 포도 품종을 잠깐 살펴보자. 앞서 언급했듯 이 프랑스 서남부의 보르도 지방과 중북부의 부르고뉴는 자웅을 겨루 는 와인 산지다. 보르도를 대표하는 적포도주 품종인 카베르네소비뇽 Cabernet Sauvignon은 독특하고 강한 향과 짙은 색, 타닌의 떫은맛이 조화된 남성적인 와인을 만든다. 와인용 포도의 왕이라고 할 만하다.
반면 부르고뉴 일대에서 재배되는 피노누아Pinot Noir는 화사한 꽃이 연상 되는 향과 투명한 붉은색으로 우아한 여왕이 떠오른다. 타닌도 적어 어 찌 보면 레드와인과 화이트와인을 블렌딩한 것 같다. 그런데 실제는 그 반대다. 카베르네소비뇽은 떫은맛이 강해 향이 풍부하면서도 타닌이 적 은 메를로Merlot 품종과 종종 블렌딩하지만, 피노누아는 너무 섬세해 다른 품종이 섞이면 균형이 무너지기 때문에 100% 피노누아로 술을 빚는다. 카베르네소비뇽 와인은 저가에서도 잘 고르면 꽤 괜찮은 맛을 찾을 수 있지만 피노누아는 싼 게 없을뿐더러 고가 제품에서야 제대로 된 맛 과 향을 느낄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 향에 관여하는 유전자 많아
과일이 다 그렇지만 포도는 특히 향이 풍부하다. 다른 술에 비해 와 인에서 향을 중요시하는 것도 원재료 덕분이다. 냄새 분자는 종류도 많고 구조도 다양하지만 꽃이나 과일 향기의 많은 부분은 모노테르펜 monoterpene이라는, 탄소원자 10개를 기본골격으로 하는 분자들이 기여한 다. 포도의 경우 장미가 연상되는 꽃향기가 나는 제라니올과 리날롤을 비롯해 시네올, 알파-테르피네올 등이 주성분이다.
- 포도 게놈에는 테르펜합성효소TPS 유전자가 89개로 30~40개 수준 인 애기장대나 벼, 포플러보다 두 배 이상 많다. 이 가운데 모노테르펜 합성효소가 40%나 돼 15%에 불과한 애기장대의 대여섯 배에 이른다. 참고로 분자 골격이 탄소원자 10개 단위인 화합물을 테르펜이라고 부 른다. 10개는 모노테르펜(1×10), 20개는 디테르펜diterpene (2×10), 30 개는 트리테르펜riterpene (3×10)이다.
한편 프랑스 사람들이 비슷한 식단인 영미권에 비해 심혈관계질환에 덜 걸리는 게 와인에 들어 있는 레스베라트롤resveratrol 때문이라는 얘기 가 널리 알려져 있다. 포도 껍질에 많이 들어 있는 레스베라트롤은 폴 리페놀의 일종인 스틸벤bene이라는 기본 구조를 지닌 분자로 항산화 효과가 뛰어나다.
포도 게놈에는 스틸벤합성효소STS 유전자가 43개나 있다. 물론 사람 건강에 좋으라고 포도가 레스베라트롤을 만드는 건 아니다. 흥미롭게 도 포도에 노균병을 일으키는 난균류를 감염시키면 STS 유전자 20개 가 발현된다는, 게놈 해독 이전의 연구 결과가 있다. 즉 레스베라트롤 은 병원체가 침입했을 때 방어물질 역할을 한다.

- 복숭아의 맛과 향이 뛰어남에도 꺼리는 사람들이 있다. 과피에 까끌 까끌한 솜털이 나 있기 때문이다. 과피에서 떨어진 솜털이 몸에 묻거나 제대로 씻지 않은 복숭아를 껍질째 먹으면 피부가 벌겋게 되거나 입술 이 부풀어 오르는 알레르기 반응이 생기기도 한다.
복숭아 과피의 솜털은 전문용어로 트리콤trichome이라고 부르는데, 표 피세포가 변형된 구조로 외부 스트레스에서 식물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보통 트리콤은 잎 표면에 많은데, 특이하게도 복숭아는 과피에도 존재한다. 일부 사람들에게 복숭아 트리콤에 있는 단백질이 항원으로 작용해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
- 이런 사람들이나 솜털이 난 복숭아가 먹기 번거로운 사람들이 찾는 게 바로 천도복숭아로 과피에 솜털이 없다. 그뿐 아니라 맛과 향도 다 소 달라 천도복숭아는 백도나 황도와는 다른 종인 것처럼 느껴진다. 실제 영어로 천도복숭아는 nectarine으로 복숭아peach와 전혀 다른 이 름으로 불리고 있다. 어떻게 보면 복숭아와 자두 사이의 잡종 같기도 하다.
그러나 천도복숭아는 복숭아의 한 종류일 뿐으로 자두와는 관계가 없다. 교배 실험을 통해 천도복숭아가 솜털이 없게 한 유전자 변이는 열성으로 밝혀졌다. 즉 대립유전자 둘 다 변이형이어야 과피에서 트리 콤이 생기지 않는다. 천도복숭아는 2천여 년 전 이미 중국에서 알려져 있었는데, 앞의 황도처럼 변이지, 즉 체세포 돌연변이로 생겨났을 것이 다. 참고로 천도복숭아도 과육 색에 따라 백도와 황도로 나눌 수 있다.

- 탐스러운 사과는 곰의 작품?
사과 50여 종의 열매는 체리나 살구 크기에 시큼한 맛이지만 유독 시에비르시만은 자그마한 사과 크기까지 자라고 단맛이 강한 이유는 무엇일까. 시에비르시의 자생지에 그 답이 있다. 우즈베키스탄과 중국 의 국경지대에는 동서로 텐산산맥이 펼쳐져 있는데, 지형적인 영향으 로 토지가 비옥하고 수량도 충분해 각종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특히 과일나무가 많은데 사과만 해도 여러 야생종이 자생한다. 이들은 크기 도 제각각이고 맛도 차이가 많다.
이들 사과의 유전자 염기서열을 분석한 결과 흥미로운 사실이 밝혀졌 다. 큼직하고 달콤한 종, 즉 재배사과의 조상인 시비르시와 체리만한 사과가 열리는 다른 야생종의 유전자가 매우 비슷했던 것이다. 이들의 관 계를 연구하자 이 일대에 사는 불곰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이 밝혀졌다.
불곰은 나무에 올라가 달린 열매를 먹거나 땅에 떨어진 열매를 갈퀴 같은 발톱으로 긁어모아 먹는다. 원래 육식성이었다가 잡식성으로 진 화한 불곰의 턱은 과일을 씹기에는 여전히 비효율적인 구조다. 대충 어 석어석 씹어 삼킨 사과는 위 소장 대장을 거쳐 과육은 소화되고 씨는 배설물과 함께 땅에 뿌려졌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크기가 작은 사과 는 제대로 안 씹혀 거의 온전한 채 배설된다. 사과를 비롯해 많은 열매 에는 씨앗이 붙어 있는 자리인 태좌에 씨가 발아하는 것을 억제하는 물 질이 함유돼 있다. 따라서 온전한 채 배설된 사과에서는 씨가 발아하지 않는다. 한편 체리나 살구만한 열매는 주로 새나 작은 포유류가 먹고 씨를 퍼뜨리므로 발아에 문제가 없다.
불곰이 먹을 때는 열매가 클수록 제대로 씹혀 과육과 태좌가 소화되 면서 씨가 노출돼 배설된 곳에 싹을 틔웠다. 이런 식으로 열매가 큰 사 과의 씨가 발아될 확률이 높았으므로 점차 알이 굵어졌다. 한편 곰은 단것을 무척 좋아해 배가 어느 정도 채워지면 달콤한 열매가 열리는 사 과나무만 골라 공략했을 것이다. 결국 곰이 많이 사는 이 일대에서 오 랜 세월에 걸쳐 열매가 크고 달콤한 사과나무가 진화했다. 
- 한국 능금의 씁쓸한 역사
한반도에 자생하는 사과속 식물은 2종으로 야광나무(학명 M. baccata)와 능금나무(학명 M. asiatica)다. 이 가운데 능금은 달콤하고 살구 크기라 먹을만했다. 그래서 조상들은 오래전부터 능금나무를 재 배했다.
그러다 17세기 후반 중국에서 빈과로 불리는 사과가 한반도에 소 개됐다. 숙종은 북악산 뒤 자하문 밖 일대에 빈과나무를 심게 했고 다 른 곳에서도 재배되기 시작했다. 구한말 자하문 밖 과수원에 봄이 오면 빈과나무 20만 그루에서 핀 사과꽃으로 장관을 이뤘다고 한다. 그렇다 면 빈과의 실체는 무엇일까.
- 앞서 말했듯이 재배 사과는 톈산산맥 일대에 자생하는 시에베르시 와 서아시아의 코카서스사과, 유럽의 유럽꽃사과 사이에 태어난 잡종 이다. 그런데 실크로드를 따라 톈산산맥 동쪽으로 간 시에베르시는 중 국 각지에 분포한 야광나무와 만났고 잡종이 태어났다. 대략 2,000년 전 중국인들이 이 잡종을 재배하기 시작했다. 바로 빈과다. 즉 유럽에 서 완성된 재배 사과와 마찬가지로 중국 재배 사과 역시 시에베르시의 후손들이다.
과일의 관점에서 빈과가 능금보다는 나았지만 오늘날 상업 품종의 수준은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 조상 대다수는 여전히 능금을 재배하고 즐겨 먹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 서양 선교사들이 서구의 개량 품종 을 하나둘 들여오고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일본 농민들이 한반도에 본 격적으로 진출하면서 서구의 재배 사과를 도입했다. 그 결과 빈과와 능금 재배는 몰락의 길을 걸었고 마침내 사라졌다.
이때 일본 사람들이 들여온 사과 품종들 가운데 대표적인 게 바로 홍 옥과 국광이다. 그리고 이들 역시 부사에 밀려 지금을 볼 수 없거 나 가을에 잠깐 시장에서 볼 수 있을 뿐이다. 처음에는 후지라는 일본 이름으로 더 알려졌던 부사는 국광과 레드딜리셔스Red Delicious라는 품 종을 교배해 얻어진 품종이다.
1930년대 말 일본 아오모리현 후지사키의 농림수산성 과수시험장에 서 만든 후지는 1962년 시장에 나왔고 그 뒤 승승장구해 오늘날 '사과 의왕'이 됐다. 레드딜리셔스를 먹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국광물이 많아 시원하다)과 레드딜리셔스(달콤한 맛과 향)의 장점만이 발현된 품 종이 부사인 것 같다. 국광의 경우처럼 더 뛰어난 개량 품종에 밀려 사 라지는 건 과일뿐 아니라 작물의 숙명 아닐까.

- 세계로 눈을 넓히면 바나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먹는 과일이다. 바 나나의 연간 생산량은 1억 6,000만 톤이 넘어 1인당 소비량이 20kg이 나 된다. 특히 더운 지방에서는 수백kg에 이르는 곳도 많다. 실제 지구 촌에서 4억 명이 바나나를 주식으로 삼고 있다. 과일을 어떻게 밥으로 먹는지 의아할 수도 있는데, 우리가 먹는 바나나가 바나나의 전부는 아 니다.
바나나는 먹는 방식에 따라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디저트 바나나이고 다른 하나는 요리용 바나나다. 보통 바나나는 과일로 생 식하는 디저트 바나나를 뜻하고 요리용 바나나는 플랜틴plantain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플랜틴은 디저트 바나나에 비해 당 함량이 낮고 녹말 함량이 높다. 따라서 생으로 먹기에는 다소 부담스러워 쪄먹거나 요리 재료로 쓴다.
연간 생산량을 나누면 디저트 바나나가 1억 1,983만 톤이고, 플랜틴 이 4,312만 톤이다(2020년), 플랜틴의 주요 생산국은 콩고민주공화국, 카메룬, 가나, 우간다, 나이지리아 등 사하라사막 이남 아프리카 나라 들이다. 이 지역에서는 플랜틴이 주식, 즉 식량작물이라는 말이다.
사실 바나나와 플랜틴의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생김새는 둘 다 바나 나로, 다만 플랜틴이 좀 더 크고 생김새가 각진 경향이 있다. 당도와 녹 말 함량이 어중간한 경우 바나나로 부르건 플랜틴으로 부르건 관계없 이 생으로 먹기도 하고 요리해서 먹기도 한다. 식물 분류학의 관점에서 는 디저트 바나나 사이의 다양성이 오히려 더 크다. 즉 플랜틴은 바나 나의 몇몇 계열에서 나온 저당 고녹말 품종들의 별칭이다.
- 밀과 감자, 딸기 등 많은 작물이 다배체 식물이지만 삼배체인 바나나 처럼 홀수인 경우는 드물다. 기본염색체 세트가 홀수일 경우 감수분열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제대로 된 성세포가 나오기 어렵고 따라서 수정 이 일어나 씨가 맺힐 가능성이 거의 없다. 우연히 삼배체 식물이 나오 더라도 자손을 보지 못해 사라진다는 말이다.
다만 유성생식과 함께 무성생식 수단을 진화시킨 식물에서는 삼배체 로 유성생식이 사실상 불가능해지더라도 무성생식, 즉 복제 식물체인 클 론clone으로 삶을 이어갈 수 있다. 바나나도 이런 경우로, 땅속에 저장조 직인 알줄기com가 있고 여기에서 흡근sucker이라고 불리는 새순이 나온 다. 바나나 농사는 이 새순을 베어내 옮겨심는 방식으로 이어 나간다.
- 바나나 게놈에서 가장 관심이 많은 건 병해충 방어 관련 유전자와 숙성 과정과 관련한 유전자로 각각 바나나 재배와 유통에서 중요한 변수 다. 숙성 관련 유전자를 먼저 살펴보자. 산지인 열대 또는 아열대 지역 에서는 수많은 종류의 바나나가 재배되고 있지만 세계 각지로 수출되 는 바나나는 거의 캐번디시 계열로 전체 바나나 생산량의 40%가 넘는 다. 캐번디시의 대성공은 과일에서 중요한 요소인 맛과 향이 좋아서라 기보다는 오랜 운송 기간을 버텨내고 일정 수준 이상의 품질이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수출용 바나나는 껍질이 녹색인 덜 익은 상태에서 수확해 운송된 뒤 식물 호르몬인 에틸렌을 처리해 어느 정도 숙성시켜 밝은 노 란색으로 바뀐 상태(끝에 연둣빛이 여전히 남아 있다)에서 마트에 오 른다. 이때 바로 바나나를 먹으면 당도가 덜하고 약간 떫은맛도 느껴 지며 과육이 다소 단단하다. 일단 숙성이 시작되면 과일 스스로 에틸 렌을 만들어 숙성 속도가 빨라진다. 그 결과 며칠 지나면 식탁에 둔 바나나가 샛노랗게 바뀌고 군데군데 짙은 갈색 점인 소위 '슈가 스팟 sugar spot'이 보인다. 이때가 바나나를 먹기에 최적인 상태로, 달콤한 맛 과 향에 부드러운 식감이 일품이다. 이처럼 바나나는 후숙, 즉 덜 익 은 상태에서 수확한 뒤 익어가는 과일로 이 과정의 유전자 네트워크 를 이해하면 맛과 향은 뛰어나지만 숙성 속도 조절이 어려워 운송과 유통을 버티지 못하는 다른 여러 품종의 저장성을 개선하는 데도 도 움이 될 것이다.
숙성 과정에 따른 유전자 발현 패턴, 즉 전사체를 분석한 결과 597 개 유전자의 발현량이 바뀌었다. 세포벽을 허무는 효소의 발현이 크게 늘어났고 (그 결과 육질이 부드럽게 된다) 녹말 합성효소 유전자 발현은 줄고 녹말을 당으로 분해하는 효소인 아밀레이스 유전자의 발현은 늘었다. 식탁 위의 바나나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달콤해지는 이유다.
- 그런데 바나나는 무성생식으로 재배하므로 특정 품종의 모든 개체가 클론, 즉 복제 식물체다. 게다가 대규모 상업 재배는 주로 그로미셸 한 품종이고 특히 수출용은 99%를 차지했다. 따라서 그로미셸에 치명적 인 병원체가 등장하면 세계 바나나 산업 자체가 휘청거릴 위험성이 있다. 20세기 들어 파나마병이 등장하면서 이런 우려가 현실이 됐다.
당시 중남미에서 바나나 농장을 운영하던 미국 기업들은 파나마병이 생긴 농장을 폐쇄하고 숲을 개간해 새 농장을 여는 방식으로 수십 년 동안 대응했지만, 범위가 점점 넓어지며 한계에 이르렀다. 결국 파나마 병에 저항성이 있는 기존 품종을 찾거나 새 품종을 개발하는 수밖에 없 었다. 지역 재래종 가운데는 저항성을 보이는 종류가 꽤 있었지만, 수 출용으로 적합한 특성도 지녀야 했고 그 결과 찾은 게 캐번디시다.
캐번디시 역시 그로미셸에 비해서는 상품성이 떨어졌지만 대안이 없 었다. 1953년 스탠더드프루트(1964년 돌Doll로 사명을 바꿨다)가 캐번 디시를 본격적으로 심기 시작했고 1970년이 되자 수출용 바나나 농장 은 거의 모두 캐번디시를 심었다. 오늘날은 몇몇 지역에서만 그로미셸 이 재배되고 있다. 만일 파나마병이 창궐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그로미셸을 먹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한가롭게 그로미셸을 아쉬워할 때가 아니다. 꿩 대신 닭 이라고 생각하며 먹는 캐번디시 역시 파나마병으로 위험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로미셸을 공격한 건 푸사리움 옥시스포룸 쿠벤스 가운데 열대종1Tropical Race1 (이하 TR1)이고 이에 대해서는 캐번디시가 저항성이 있다. 그런데 1990년대 초 동남아시아에서 캐번디시를 비롯해 TR1 저 항성이 있는 여러 품종을 공략할 수 있는 새로운 변종인 열대종4TR4가 등장한 것이다.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와 호주, 서아시아, 아프리카 모잠비크까지 퍼 진 TR4는 2019년 마침내 남미 콜롬비아에 상륙했다. 중남미는 캐번 디시 최대 생산지로 수출 바나나의 85%를 차지한다. TR4 역시 마땅한 농약이 없어 농장마다 철저한 격리와 검역을 통해 확산 속도를 늦추는 식으로 대응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캐번디시도 그로미셸처럼 사라질지 모른다. 그 전에 TR4에 저항성을 띠는 대안을 찾아야 바나나가 세계인 의 과일로 남을 수 있다.

- 사탕수수 생산량 1위 작물로서 연간 수확량이 18억 6,970만 톤에 이른다(2020년). 2위인 옥수수가 11억 톤이니 큰 차이다. 물론 사탕수 수 생산량은 수숫대 무게이므로 산물인 설탕으로 따지면 옥수수는 물 론 쌀과 밀에도 밀린다. 설탕의 연간 생산량은 1억 8,500만 톤(2017 년)으로 이 가운데 80%를 사탕수수에서 만들고 나머지는 사탕무, 단수 수 등에서 얻는다.
최근 화석연료가 고갈되고 이산화탄소 배출로 지구온난화가 심각해 지면서 사탕수수가 재생가능 에너지원으로 주목받고 있다. 사탕수수 수액을 발효시켜 만든 에탄올이 휘발유를 대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 제 오늘날 바이오에탄올의 40%를 사탕수수 발효에서 얻는다. 사탕수 수 연간 생산량이 7억 5,710만 톤으로 세계 1위인 브라질에서 에탄올 자동차 보급률이 높은 이유다.
품종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설탕 1톤을 얻으려면 대략 수숫대 9톤이 있어야 한다. 만일 사탕수수가 좀 더 빨리 자라고 더 높은 농도로 수액 을 저장할 수 있다면 재생가능 에너지원으로서의 가치는 좀 더 올라갈 것이다.

- 인삼이 약초의 왕 자리에 오른 건 진세노사이드라는 유효성분 때문 이다. 진세노사이드는 사포닌saponin의 일종으로 탄소원자 30개로 이뤄 진 스테로이드 골격이 배당체에 붙어 있는 구조다. 흥미롭게도 인삼속 식물만이 진세노사이드를 만들 수 있고 종류는 150가지가 넘는다.
만병통치약을 뜻하는 라틴어가 학명일 정도이니 많은 과학자들이 인 삼의 약리효과를 검증했고 실제 여러 질병에 유효하다는 사실이 드러 났다. 즉 종양 억제, 고혈압 완화, 항바이러스 활성, 면역조절 활성 등 의 효과가 보고돼 있다.
물론 다른 식물처럼 인삼 역시 사람의 건강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을 위해 진세노사이드를 만들게 진화한 것이다. 진세노사이드는 뿌리의 안쪽인 수질medulla보다 바깥쪽인 주피periderm와 피질cortex에 더 높은 농도로 존재해 병원체로부터 식물체를 방어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진세노사이드는 꽤 복잡한 분자이고 종류도 많아 생합성에 관여하 는 효소 유전자가 무려 5,000개에 가깝다. 전체 유전자의 10% 가까이 가 투입된 셈이다.
인삼 제품을 보면 '6년근'을 강조하는 문구가 많다. 6년은 재배해야 약성이 제대로 나온다는 말인데 일리가 있다. 인삼은 나이가 들수록 진 세노사이드 함량이 올라가기 때문에 적어도 4년근은 돼야 쓸만 하다. 유전자 발현 패턴을 분석한 결과 이는 진세노사이드 합성이 아니라 수 송이 활발해진 결과다. 진세노사이드는 지상부(잎과 줄기)에서 합성돼 뿌리로 이동해 축적된다.

- 커피나무가 아라비카와 로부스타 두 종으로 나뉘듯이, 차나무는 한 종이지만 중국 변종(Camellia sinensis var. sinensis)과 아삼 변종(var. assamica)으로 나뉜다. 중국 변종은 나무가 작고 잎도 작은 대신 상대 적으로 추위에 강하다. 향과 맛이 섬세하고 카페인 함량이 낮은 중국 변종은 녹차와 홍차 등 다양한 차로 만든다. 녹차를 즐겨 마시는 우리 나라에서 재배하는 차나무가 바로 중국 변종이다.
인도 북동부와 중국 남서부 등지에서 재배하는 아삼 변종은 나무가 크고 잎도 크지만 추위에 약하다. 그 자체로는 중국 변종에 비해 품질 이 좀 떨어지지만 카페인 함량이 높고 홍차를 만드는 과정에서 향미가 살아나므로 대부분 홍차용으로 쓰인다. 중국 변종이 아라비카라면 아 삼 변종은 로부스타인 셈이다.
- 음료에 들어 있는 카페인 함량을 나타내는 자료를 보면 커피가 차 보다 두 배 이상 많고 코코아는 미미하다(대신 다크초콜릿에는 꽤 들 어 있다). 커피도 종이나 추출방식에 따라 카페인 함량이 다르듯이(로 부스타가 아라비카의 2배이고 드립커피가 에스프레소보다 1.5배 정도 다), 차도 변종과 추출조건에 따라 다르다.
즉 아삼 변종이 중국 변종보다 카페인 함량이 높고 추출할 때 물의 온도가 90°C 이상인 홍차에서 80°C 내외인 녹차보다 카페인이 더 많이 우려진다. 즉 아삼 홍차는 우전 녹차에 비해 카페인 함량이 서너 배나 돼 커피에 육박한다. 홍차를 좋아하는 사람이 카페인이 걱정된다면 오 후에는 중국 변종으로 만든 다즐링Darjeeling을 추천한다.
- 커피 향에는 약 655가지, 차에는 467가지 휘발성 성분이 들어 있다. 딸기에는 약 360가지, 토마토에는 400가지 향기 분자가 존재한다. 심지어 냄새가 약한 쌀에서도 100가지 화합물이 발견된다. 감자에는 140가지가 있다. - A. S. 바위치, 「코가 뇌에게 전하는 말 
- 아라비카 커피는 아버지인 로부스타 커피에 비해 향이 섬세하고 카 페인 함량이 적다. 반듯이 그런 건 아니지만 아라비카가 부계와 모계의 중간 특성이라면 어머니인 유게니오이데스 커피는 향이 더 섬세하고 카페인 함량이 더 적은 걸까.
오늘날 유게니오이데스(EE 게놈)는 케냐와 우간다 등 동아프리카에 자생하고 있다. 아마도 수만 년 전에는 에티오피아에서도 자랐을 것이 고 이때 로부스타(CC 게놈)를 만나 수정이 일어나 가끔 잡종 나무(CE) 가 생겨났을 것이다. 그리고 잡종에서 감수분열 오류로 사배체인 아라 비카(CCEE)가 태어났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아라비카의 특성 가운데는 정말 로부스타와 유게니오이 데스의 중간인 경우가 있다. 나무 키를 보면 부계인 로부스타가 10m에 이르고 모계인 유게니오이데스가 2~3m인데 아라비카는 4~5m다. 원 두의 카페인 함량 역시 로부스타가 2.7%이고 유게니오이데스가 0.6% 인데 아라비카는 1.5%다. 그리고 유게니오이데스 원두로 내린 커피의 맛과 향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왜 유게니오이데스는 상 업 작물이 되지 못한 걸까.
무엇보다도 생산성이 너무 낮다. 유게니오이데스는 나무가 작을 뿐 아니라 열매도 적게 열리고 그나마 원두 크기도 아라비카의 절반 수준 이다. 그 결과 나무 한 그루에서 불과 320g의 원두를 수확할 수 있다. 몇몇 커피 농장에서 유니오이데스를 재배해 아는 사람들에게 고가에 공급하고 있지만 웬만한 커피 마니아도 맛볼 기회를 얻기 힘들 것이다.

- 카카오 열매가 익으면 수확해 카카오 콩이라고 부르는 씨앗을 빼 내 발효시킨 뒤 말린다. 그리고 껍질을 벗겨내고 빻아 코코아 매스cocoa mass를 얻는다. 코코아 매스는 탄수화물과 단백질, 지방 혼합물로 지방 이 약 50%를 차지한다. 코코아 매스에서 분리한 지방이 바로 코코아 버터 cocoa butter다. 나머지가 코코아 가루cocoa powder로 흔히 코코아라고 부 른다. 코코아에는 여전히 지방이 남아 있어 함량이 14% 수준이다. 오 늘날 카카오 콩과 코코아의 연간 생산량은 각각 580만 톤과 370만 톤 에 이른다(2020년).
씨의 배젖 세포에 저장된 중성지방인 코코아 버터에도 초콜릿의 향 과 맛을 내는 성분이 일부 녹아 있지만 대부분은 코코아에 들어 있다. 화이트 초콜릿이 초콜릿 느낌이 날 뿐인 것도 코코아매스 없이 코코아 버터로만 만들었기 때문이다.
- 한편 코코아에 많이 들어 있는 플라보노이드flavonoid는 식물이 만드 는 이차대사산물로, 페놀 고리(C6) 두 개와 헤테로사이클릭(탄소 원 자 외에 다른 원자가 포함된 고리) (C3) 하나로 이뤄진 기본 골격(C6- C3-C6)을 지닌 구조다. 플라보노이드는 분자에 따라 식물체에서 여러 기능을 하는데, 특히 스트레스 대응에 관여하는 종류가 많다. 즉 해충 이나 병원체에 대해 독성을 지니고 있거나 세포에 해로운 자유 라디컬 이나 자외선을 흡수한다. 어떤 종류는 유익한 공생 생물이나 수분 동물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카카오 씨에 많이 들어 있는 프로안토시아니딘proanthocyanidin은 플라보 노이드 여러 개가 결합된 고분자로 최근 연구에 따르면 심혈관계나 신 경계 건강에 좋고 암 화학요법의 부작용을 줄이는 작용을 한다는 보고 도 있다. 코코아 함량이 높은 다크초콜릿이 건강에 좋은 이유다. 게
- 테오브로민은 카페인에 비해 각성 효과가 약하지만 혈관 확장 효과가 있고 이뇨 작용도 한다. 과량 복용하면 심박수 증가, 두통, 속쓰림 같은 부작용이 있지만 초콜릿에서 섭취하는 양 정도로는 별문제가 없다. 그 런데 동물, 특히 개와 고양이가 먹게 되면 큰일이 날 수 있다. 사람과는 달리 이들은 테오브로민을 제대로 대사하지 못한다. 단맛을 못느끼는 고양이가 초콜릿을 먹을 일은 거의 없지만 개는 그럴 위험성이 있어 조 심해야 한다. 소형견은 다크초콜릿을 5g만 먹어도 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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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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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쉬는 과학

과학 2024. 3. 3. 07:04

- 45억 년 전 지구가 생성됐을 때, 대기에는 산소가 없었다. 사실 우리는 대기에 산소가 있는 다른 행성을 아직 알지 못한다. 대기에 산소가 있을 가능성이 생긴 것은, 5억 년쯤 지나 고 나서 단세포 유기체들이 산소를 만들어내기 시작한 뒤부터였다. 하지만 대기는 또 10억 년 동안 무산소 상태로 유지됐다. 원시 식물 이 생산한 모든 산소를 수소가 삼켜버렸거나, 철이나 다른 지질학적 물질과 반응하는 데 소모했기 때문이다. 이 상태는 광합성이 시작되기 전에 약 10억 년 동안 지속됐고, 광합성이 진행된 다음에야 산소가 대기에 축적되기에 충분해졌다. 그와 동시에 화산에서 나오 는 수소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약 23억 년 전부터 대기의 산소 농도는 약 3퍼센트까지 꾸준히 상승하기 시작했고, 아주 오랜 기간 같은 수준에 머물렀다. 정말 로 아주 아주 오랜 시간, 7억 년 전이나 그 무렵까지 유지됐다. 그 뒤로 산소 농도는 미친 듯이 오르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 그 러니까 불과 5000만 년 동안 가파르게 상승해 13퍼센트까지 올랐 고, 약 3억 년 전 석탄기에 사상 최고 수준까지 한 번 더 급격하게 상승한다. 그 무렵 산소 농도는 지금보다 50퍼센트 더 높았다. 이런 산소 농도는 생물의 형태를 주목할 만하게 발달시켰다. 이를테 면 갈매기만 한 잠자리, 다리 길이가 거의 0.5미터에 이르는 거미, 몸길이가 1미터까지 뻗은 지네' 등이다. 이런 무시무시한 벌레들은 산소를 30퍼센트 이상 포함하는 대기 덕에 큰 몸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 호흡이 가능했기에 존재할 수 있었다.
3억 년 전 무렵 산소 농도가 증가한 원인은 탄소를 포함한 어마 어마한 숲이 급속히 매장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탄소가 없어졌다는 건 광합성으로 생산된 산소가 대기 외에는 갈 곳이 없다는 뜻이다. 산소는 가장 높은 농도일 때 대기에 약 35퍼센트까지 축적될 수 있 었다. 하지만 결코 현재에 만족하지 않는 우리 인류는 부지런하게 지난 200년 동안 이 균형을 바로잡고 있다. 편리하게도 석탄이나 석유로 바뀐 오래된 숲들을 파내, 열과 전기를 생산하기 위해 불태 우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한, 지구는 산소를 생산하는 유일한 행성이다. 우리 는 대기에 산소가 있는 다른 어떤 행성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생 명이 진화할 수 있는 기준을 충촉하는 다른 행성이 있을지도 모르 지만, 확실히 산소를 기반으로 한 생물의 증거는 찾지 못했다. 만약 산소가 풍부한 다른 대기를 찾는다면, 이것은 그 행성에서 생물이 진화했고 활발히 광합성을 했다는 강력한 징후다.

-우리는 주로 지름이 10마이크로미터(μm) 이하인 입자들을 다루어왔다. 이것은 '흡입성 미립자'로 불리곤 했지만, 지 금은 일반적으로 'PM'이라고 한다. 엄밀히 따지면, PM10은 '공기 역학 직경 10마이크로미터에서 50퍼센트를 걸러내도록 설정된 입 구를 통과한 입자'를 뜻한다. PM이 무엇인지 궁금하게 여긴 적 이 있다면, 그리고 왜 PM이라고 부르는지 궁금했다면 이제 알았 을 것이다. 나는 여러분이 묻기를 잘했다고 생각하기를 바란다. 이 입자들은 입과 코를 통해 흡입될 정도로 작지만, 우리 폐에 들어가 기에는 크다. 따라서 관심은 PM2.5 혹은 PM 이라고 하는 더욱 작은 입자에게 돌아갔다. 즉, 지름 2.5마이크로미터 이하거나 1마이 크로미터 입자들이다. 이 입자들은 우리가 호흡할 때 (숨을 들이마실 때) 곧장 폐로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PM2.5를 '호흡성' 입자상 물질 (초미세먼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PM0.1을 연구하기도 한 다. 이것은 지름 0. 1 마이크로미터 이하인 입자다. 1마이크로미터는 100만분의 1미터, 혹은 1000분의 1밀리미터다. 따라서 자에 표시 된 밀리미터 눈금 두 개 사이에 PM2.5 입자 500개를 줄 세울 수 있 다. 물론 웬만큼 따분한 오후가 아니고서야 이런 일을 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림은 사람의 머리카락과 바닷가의 모래알에 비교한 PM의 크기다.

- 오존층 파괴 물질들에 대한 몬트리올 의정서가 불과 2년 뒤에 체결 됐다. 여기에 더해 문제를 일으킨 물질의 사용을 금지하고 대체하 는 조치가 이어졌다. 어떤 경우에는 금지된 물질을 대체하는 물질 이 기존 물질만큼이나 나쁜 것으로 밝혀져, 다시 금지되기도 했다. 몇 가지 요인 덕분에 이렇게 신속한 조치가 가능했다. 첫째, 과학이 상당히 분명하고 모호하지 않았다(오늘날 기후 변화에 대한 인간의 영 향과 매우 유사하다). 둘째, 건강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고 쉽 게 인식할 수 있었다. 셋째, 문제 해결에 필요한 수단을 상품 개발자와 제조업자들이 만들 수 있었다. 에어로졸 분무제나 냉장업계는 대체 화학물질을 상당히 빠르게, 합리적인 가격에 찾아내고 실행했 다. 결과적으로 가격 상승이나 다른 행동을 요구하는 등 소비자에게 호응을 얻지 못할 가능성이 있는 대규모 변화는 필요하지 않았다. 따라서 지금 해야 할 일은 우리가 이미 대기에 집어넣은 염소와 불소가 성층권으로 올라가 거기 있어야 하는 오존에 최악의 손상을 입히는 70년 정도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오존층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것뿐이다. 2016년에 측정한 오존홀의 크기는 1991년부터 2016년까지의 평균보다 약간 작았다. 2015년에 비해서 면적이 약 간 작아졌고, 깊이도 약간 줄었다. 따라서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지만, CFCs가 있기 전의 평균보다는 훨씬 작다. 아직 해결되기 에는 이르다.

- 탄화수소와 질소산화물, 태양광이 있는 한 탄화수소는 점진적으 로 산화한다. 그 과정에서 OH에서 R, RO2, RO, HO2, OH로 그 리고 다시 OH로 순환하는 동안 점점 더 많은 오존을 만들어낸다. 이 순환이 일어날 때마다, 일산화질소는 이산화질소로 산화되고, 이것은 상당히 빠르게 또 다른 오존 분자를 만든다.
바로 그 점이 문제다. 조건이 맞으면 순환하면서 매번 오존을 만 들어낸다. 그 결과로 오존이 급속히 형성된다. 수많은 탄화수소와 수많은 이산화질소 그리고 약간의 태양광이면 지저분한 연무의 성 스럽지 못한 삼위일체가 형성된다. 우리가 광화학적 스모그라고 부 르게 되는 바로 그것이다. 이 고삐 풀린 오존 농도 증가는 눈의 염 증과 작물 피해를 일으키는 원인이다. 하지만 어떤 조치를 취하기
는 어렵다. 오존 노출을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해가 많이 내리쬐 지 않는 곳에 사는 것이다. 하지만 캘리포니아 주민에게 캘리포니 아에서 살지 말라고 이야기해보아라. 그렇게 극단적인 방법을 제외 하면, 전략은 오존으로 가득 찬 대기 분수계를 만드는 두 가지 주재 료인 탄화수소와 질소산화물의 배출량을 줄이는 데 집중된다.

- 저고도 지상 오존의 핵심은 매우 반응성이 높은 화학물질인 오 존히 접촉 가능한 많은 물질을 산화시킨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작 물이나 자연 생태계의 특수 식물, 우리의 목과 폐가 있다. 착각하지 마라. 오존은 고약한 것이다. 우리는 때로 사무실 복사기 프린터 근처에서 오존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복사기에서 사용하는 밝은 빛이나 고압 방전이 첫 번째 반응, 즉 이산소 분자가 산소 원자 둘로 나뉘는 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용기만 있다면 번개가 내리친 직후 공기 냄새를 맡아봐도, 같은 냄새가 불쑥 올라올 것이다. 번개를 맞아 까맣게 그을린 골퍼의 향 기가 아니라, 전기적 불꽃이 대기를 지나가며 형성한 오존 냄새다.
- 독일 화학자 크리스티안 쇤바인은 1840년 이 기체를 최초로 분리해 냈고, '냄새'를 뜻하는 '오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당시 질소와 산 소를 포함해 대기의 기본 구성은 잘 알려져 있었지만, 오존의 화학 식은 1865년까지 규명되지 않았다. 아마도 오존의 독특한 냄새 때 문에, 어쩌면 강력한 산화제로서의 소독 작용 때문에 오존은 발견 당시부터 건강에 이롭다고 널리 알려졌다. 사실 내가 경솔하게 추 측했던 것과 달리 '오존ozone'이라는 이름에 든 그 모든 O는 산소와 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 말은 그리스어로 '냄새 맡다'라는 뜻의 'ozein'에서 온 것이다.
내게 오존 냄새는 유쾌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19세기로 돌아간다면, 오존은 소독제로서뿐 아니라 건강과 안녕에 좋은 물질 로서 대중 의식에 확고히 박혀 있는 걸 발견할 것이다. 사람들은 건 강을 주는 오존을 찾아 해변으로 가거나 심지어 크로이던 [영국 런던 남부 지역]의 오존 수영장으로 갔다. 해변 특유의 톡 쏘는 냄새는 (적 어도 영국 주변에서는 오존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냄새' 중의 냄새라고 생각했다. 깨끗하고, 과학적이고 원기를 회복시키는 것이 라 여겼다. 오존은 사람에게 아주 좋은 것이고, 19세기의 온갖 질병 으로부터 회복하게 도와주는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을 것이다. 요즘 은 인기가 덜하니 천만다행이다. 
- 하지만 이미 잘 알고 있다시피, 해변 특유의 냄새 중 대부분은 사실 오존이 아니다. 해변의 특징은 보통 사무실 복사 장비의 상쾌한 향기가 아니다. 해변의 냄새는 주로 부패하는 해초의 유기황화물 때문에 발생한다. 부패하는 해초나 냄새나는 황화물을 강조하기 보다는 싱싱하고 신선하게 들리는 '오존'을 내세우는 편이 경쟁적인 20세기 초 해변 휴양지 비즈니스 세계에서 더 나은 영업 전략이었 음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요즘처럼 정보가 풍부한 사회에서 는 대기화학과 오존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이해가 널리 보 급돼 있어 오존이 건강에 좋다고 정말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오존에 대응하기
이제는 오해를 바로잡은 것 같다. 오존은 확실히 기분 좋은 화학 물질이 아니며, 가능하면 피해야 한다. 하지만 이 점을 잊지 말자. 비록 우리 가까이에 있으면 나쁘지만, 성층권의 오존은 태양의 유 해한 자외선을 대부분 흡수하는 훌륭한 일을 한다. 오존은 파장이 100~300나노미터인 가장 유해한 태양광이 거의 우리에게 닿지 않 는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 세상이 우리가 사는 세상인 한. 그것은 좋은 일이다. 우리는 성층권의 오존이 계속 우리를 위해 자외선 복사를 흡수해주길 원한다. 그래야 우리가 계속해서 밖으로 나가 햇빛을 받으며 라임레지스나 토키, 빅터하버 혹은 크로이던과 같은 멋진 장소에 갈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소중한 오존층을 거의 잃을 정도로 아슬아슬한 상태에 있다.
따라서 이상적으로 우리는 여기 아래쪽 대류권에는 오존 농도를 최소한으로 유지하고, 저 위쪽 성층권에는 충분한 오존이 남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가 정확히 그 반대를 만들었다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저 위쪽 성층권 오존층에는 구멍을 만들고, 동시 에 여기 아래쪽 지면 높이에서는 오존 농도를 높였다. 우리가 원하지 않았던 딱 그 상황이다!
저고도 오존의 문제는 오존 자체를 배출하는 어떤 원천도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몇몇 오염원에 대해 그랬듯이, 배출을 제한할 수 없다. 이것은 인간 활동이 오존 농도에 아무런 기여도 하지 않는 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지상 오존 농도는 대기 중 질소산화물과 휘발성 유기화합물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태양광의 세기에 의해서도 결정된다. 이것은 내가 '성스럽지 못한 삼위일체'라고 불렀던 것이다. 낮 동안에는 태양광의 작용 때 문에 오존과 질소산화물과 이산화질소 사이에서 끊임없는 순환이 일어나고, 이것은 오존의 재생성으로 이어진다. 물론 밤에는 태양 광이 없으므로 오존은 일방통행로에 들어서고 가능한 만큼 많은 일 산화질소와 반응한다.

- 만약 휘발성 유기화합물의 농도 가 질소산화물(그래프의 중앙에서 대각선 아래로 향하는 선) 농도의 약 8배라면 질소산화물이나 휘발성 유기화합물, 혹은 양쪽 모두를 줄 임으로써 오존 농도를 줄일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질소산화물에 비해 휘발성 유기화합물이 훨씬 더 많 다면, 휘발성 유기화합물를 줄이거나 늘리는 것은 오존 농도에 큰 변화를 주지 않는다. 이것은 표에서 'NOx 의존'으로 표시된 구역이 다. 이런 상황에서는 오존 농도를 빠르게 줄이는 방법은 질소산화 물 농도를 줄이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만약 휘발성 유기화합물에 비하여 질소산화물이 훨씬 많다면 질소산화물 농도를 줄이는 것은 오존을 줄이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도시의 환경에서 보이는 전형적인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오존 농도를 개선하는 가장 효과적인 접근법은 휘발성 유기화합물 농도를 줄이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과학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대기질을 개선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살펴보고 있는 만큼, 실용 성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과학은 우리에게 질소산화물 농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지역(예를 들어 시골 지역)에서 오존 농도를 줄이려 면 질소산화물 농도를 더 줄여야 한다고 말한다. 질소산화물 농도 가 어떻게 감소하든지, 감소한 오존 농도가 그에 부합하는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저농도인 오염원의 배출량을 줄이는 것은 언제나 힘든 일(근본적으로는 비용이 많이 든다는 뜻이다)이라 는 게 문제다. 배출량을 더 줄이고자 고를 수 있는 선택 사항이 많 지 않다. 좋다, 그러니까 우리는 휘발성 유기화합물 농도를 살펴볼 것이다. 더 끌리는 선택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는 오존 농도를 줄이는 면에서 어떤 이득이라도 보려면 그에 앞서 배출량을 상당히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반대로, 질소산화물 농도가 높은 지역에서는 질소산화물 배출량 을 줄이는, 비용 효율이 높은 선택권이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에게 자가용 이용을 줄이도록 권장하거나, 고배출 차량에 부담금을 물리 고, 도시 개발자에게 전기 차량 충전소 설치를 의무화하고, 난방과 온수 공급에 무공해 기술을 사용하도록 권장하는 일 등이 있다. 모두 훌륭하다. 그리고 배출량을 충분히 줄일 수 있다면, 이것은 결국 오존 농도 개선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질소산화물 농도가 높은 지역에서 배출 감소 계획을 시행하더라도 초기 단계에서는 오 존 농도에 좋은 변화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대기에서 오존을 제거하는 일산화질소의 가용성이 감소하기 때문에 심지어 오존 농 도가 증가할 수도 있다.
- 수백 년의 기간에 걸쳐 우리는 접근 가능한 화석연료를 거의 다 소비하 게 될 테고, 다른 에너지원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한 다음 에는, 그리고 우리가 대기로 밀어 넣은, 긴 수명의 온실가스가 마침 내 제거된 다음에는, 어쩌면 지구 기후가 회복되는 길로 접어들지 도 모르겠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 같다. ‘기 후 변화에 관한 정부간 패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산화탄 소 배출이 멈추더라도 기후 변화의 양상은 대부분 수 세기 동안 지 속될 것이다. 이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이산화탄소 배출이 만들 어낸 여러 세기에 걸친 상당한 기후 변화라는 약속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변화된 기후에 갇힌 모양새다. 그리고 더 높은 해수면과 예 측 불가능한 날씨처럼 기후 변화에 수반되는 그 모든 것에서 앞으로 오랫동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
화석연료에서 멀어지는 장기적인 변화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이것이 향후 200년 동안 삶의 질을 결정하는 요소 중 하나가 될 것 이다. 뒷걸음질 쳐서 1000년 전에 했던 것처럼 바이오매스에 의존 할 수도 있고, 아니면 기존 재생 가능 에너지 기술과 어쩌면 새로운 기술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화석연료의 가용성이 앞 으로 수십 년, 수백 년 내에 감소하면서, 좋든 싫든 화석연료의 사 용은 머지않아 줄어들 것이다. 에너지 가격과 세계적인 긴장이 상 승하며, 우리는 열, 전력, 물, 음식, 이동성을 공급하려고 안간힘을 쓸 것이고, 위안이 되지 않겠지만 화석연료의 종말은 적어도 대기 오염 측면에서는 좋은 소식이 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에너지 효율 이 높고 배출이 적은 기술과 생활 방식을 개발한다면 그렇게 될 것 이다. 그러지 않고 나무와 동물의 배설물을 태워 요리하고 난방하 는 방식으로 돌아간다면, 심신을 쇠약하게 만드는 대기오염의 영향 에 계속 시달릴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인류는 아마도 더 긴급한 문제를 걱정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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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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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자역학에 따르면 전자는 띄엄띄엄한 에너지만을 가질 수 있다. 그렇다고 타원 궤도의 크기가 띄엄띄엄한 것은 아니다. 전자는 궤도 자체를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말들이 독자를 혼란에 빠뜨릴 거 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도는 동안 지구가 지나는 경로를 궤도라 한다. 전자도 원자핵 주위를 도니까 궤도가 있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전자 의 궤도를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양자역학의 핵심이다. 어차피 이책 에서 양자역학을 다루지 않기로 했으니 궤도가 없다는 말의 의미를 설 명하기보다 궤도 없이 전자의 운동을 기술하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 할 것이다. 이제부터 우리는 전자가 어디에 있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있는지에 주목할 거다. 즉 양자역학은 전자의 '위치'가 아니라 '상태'를 기술한다.
- 수소 원자에는 전자가 하나 있다. 이 전자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아는 것이 수소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이다. 전자가 가질 수 있는 가 능한 상태를 원자호텔의 비유로 설명해보자. 전자가 투숙객이라면, 상태는 호텔 객실이다. 호텔 객실은 층과 호수로 표현된다. 예를 들어 2층 3번째 객실이면 203호다. 전자가 어떤 상태를 갖는다는 것은 그 객실에 들어간 것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수소 원자를 이루는 한 개의 전자는 객실 하나에 들어가야 한다. 이 호텔에서는 층이 높을수록 전 자의 에너지가 크다. 보통의 호텔은 층마다 객실의 개수가 같지만 이 호텔에서는 층마다 객실의 개수가 다르다. 1층에 1개, 2층에 4개, 3층에는 4개의 객실이 있다. 이 수들이야말로 원자, 나아가 세상 만물의 특성을 결정짓는 마법의 수다. 차차 이야기하겠지만 이 숫자가 조금만 바뀌어도 세상의 모습은 지금과 완전히 달라진다.

- 지구상의 다세포 생물은 대개 산소 호흡으로 에너지를 얻는다. 앞서 이야기한 탄수화물, 지질을 산소로 태워 에너지를 얻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산화탄소가 발생한다. 호흡의 부산물이다. 우리가 탄소를 자연에 되돌려주는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 같은 동물은 다른 동물이나 식물을 먹어서 탄소를 얻는다. 식물도 생물이니 탄소가 필요하다. 식 물은 동물이 배출한 이산화탄소에서 탄소를 얻는다. 원자는 영원불멸 한다. 생명의 원자인 탄소는 동물과 식물 사이를 오가며 여러 가지 물 질의 일부가 될 뿐 결코 사라지거나 만들어지지 않는다. 동물과 식물 은 이산화탄소를 통해 탄소를 주고받는다. 동식물 간 원활한 탄소 교 환이 가능한 것은 이산화탄소가 기체이기 때문이다.
- 규소 기반 생명체가 있어서 탄소 기반 생명체와 비슷한 방식으로 살아간다면, 이산화탄소 대신 이산화규소(SiO2)를 통해 규소를 교환해 야 할 거다. 하지만 이산화규소는 상온에서 기체가 아니라 고체다. 이 산화규소 기체를 얻으려면 무려 2950도의 온도가 필요하다. 고체로 자유로이 물질을 교환하기는 힘들다. 규소 기반 인간은 쉴 새 없이 이 산화규소 알갱이를 입 밖으로 뿌려대거나 수시로 배설해야 할 거다. 더구나 이것들은 무거워서 땅으로 떨어질 테니, 식물은 땅에서 규소를 흡수한 뒤 중력을 거슬러 몸의 각 부분으로 이동시키는 수밖에 없다. 이산화탄소는 잎에서 기공이라는 작은 구멍을 열어두기만 하면 공기 에서 얻을 수 있다. 원자의 특성은 생명의 형태를 결정한다.

- 2개의 질소 원자가 결합하면 질소 분자(N2)가 만들어진다. 이것은 3개의 팔로 강하게 결합된 분자다. 그래서 삼중결합이라 부른다. 탄소 의 경우도 탄소 2개로 분자(C2)를 형성할 수 있지만 3642도 이상의 높 은 온도에서만 가능하다. 반면 질소 분자는 상온에서 존재할 뿐 아니 라 그 결합이 산소 분자나 수소 분자의 결합보다 두 배 가까이 강하다. 지구에서 보통의 생물이 이것을 깨기는 대단히 힘들다.
질소는 생물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우선 단백질 골격의 절반이 질소 다. DNA의 코드인 염기를 만드는 데도 질소가 꼭 필요하다. 이 정도만 말해도 충분하리라. 그런데 공기의 80퍼센트가 질소다. 질소는 주위에 지천으로 널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식물의 탄소 공급원인 이산화탄소가 공기의 0.03퍼센트라는 걸 고려하면 질소는 거의 무한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생물은 공기 중의 질소 분자를 활용할 수 없다. 질소 분자의 삼중 결합을 깰 수 없기 때문이다. 집에 쌀이 배달되었는데 특수 강철 상자에 담겨 있어 쌀을 꺼낼 수 없는 거랑 비슷하다. 질소가 삼중결합이 아니라 한두 개의 팔로 결합된 상태에 있을 때 '고정 질소'라고 부른다. 생물은 질소 분자는 이용할 수 없지만 고정 질소가 되면 쉽게 이용할 수 있다.
고정 질소는 단백질이나 염기, 암모니아 등의 여러 형태로 변화하 다가 일단 삼중결합의 질소 분자가 되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셈이다. 다시 말해 생물은 점점 줄어드는 고정 질소를 놓고 서로 피비 린내 나는 전쟁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자연에서 질소 분자로부 터 고정 질소가 만들어질 수도 있다. 우선 번개다. 번개가 칠 때 그 엄 청난 에너지 때문에 삼중결합이 깨질 수 있다. 사실 드물지만 질소 분 자의 결합을 깨는 생물도 존재한다. 질소고정박테리아인데 질소고정 효소라는 특별한 단백질을 가진다(단백질 만세!). 콩과 식물의 뿌리에 기 생하여 살기 때문에 뿌리혹박테리아라고도 부른다." 이 두 가지 과정이 거의 전부다. 그렇다면 지구상 생물의 총량은 번개 치는 횟수와 뿌리혹박테리아의 주당 근무 시간에 의존한다고 말할 수 있다.
몇 년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작물로 농사를 지으면 밭의 생산성이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농부들은 지력이 떨어졌다고 말한다. 그 런데 몇 년에 한 번씩 콩을 심어주면 그런 문제가 사라진다. 이제 당신 은 이유를 알 수 있으리라. 생산성이 떨어진 것은 밭의 질소가 고갈되 었기 때문이다. 농작물이 밭에 있는 고정 질소를 모조리 훑어 먹어버린 것이다. 질소가 부족하면 탄소나 산소가 아무리 많아도 생물은 생존할 수 없다. 라면을 끓이려면 면, 스프, 물이 필요하다. 스프와 물이 아무리 많아도 면이 없으면 라면을 먹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콩을 심으 면 콩과 식물의 뿌리에 기생하는 질소고정박테리아가 공기 중의 질소 분자를 고정 질소로 바꾸어준다. 우리는 이런 땅을 비옥하다고 한다. 물론 고정 질소가 들어 있는 물질을 직접 땅에 뿌려도 효과가 있다. 바 로 인간과 가축의 배설물이다. 물론 동물을 죽여서 땅에 뿌려도 된다. 동물의 몸에도 질소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여서 땅에 뿌릴 동물이 있다면 일단 그 동물을 맛있게 먹고 소화되어서 나오는 배설물을 뿌리 는게 현명할 거다.

- 만물은 원자로 되어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모습은 따지고 보면 원자의 특성에서 그 기 원을 찾을 수 있다. 지구상 생명체는 수소 이온을 배터리로 사용하여 에너지를 저장한다. 식물은 광합성을 통해 수소 이온을 모으고, 동물 은 호흡을 통해 수소 이온을 모은다. 동물의 호흡은 식물이나 다른 동 물을 먹이 삼아 얻은 음식을 연료로 이용하니까 결국 그 근원은 식물 이다. 식물의 광합성이 태양 빛을 이용하고, 태양이 수소 핵융합 반응 으로 빛을 낸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수소는 지구상 모든 생명 에너 지의 근원이라 할만하다. 이는 수소가 양성자와 전자를 하나씩만 가진 단순한 구조이기 때문이다. 탄소는 양자역학으로 이해되는 4개의 팔 을 이용하여 다양한 형태의 분자를 만드는 뼈대가 되는데, 이렇게 생 명이라는 건축을 디자인한다. 질소는 공기 중에 널려 있지만 3개의 전 자가 만드는 양자역학적 삼중결합 때문에 쉽사리 재활용되지 못한다. 하버 - 보슈법이 아니었다면 인류는 맬서스의 암울한 예측을 현실로 마 주했으리라. 산소는 독이다. 비어 있는 전자의 자리를 채우려는 산소 의 양자역학적 욕망 때문이다. 하지만 산소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존재 할 수 없다. 2장에서 다룬 수소, 탄소, 질소, 산소는 당신의 몸을 구성하 는 원자의 99퍼센트를 이룬다.
세상 만물은 원자로 되어 있다. 세상 모든 것을 원자로 환원할 수는 없지만 원자는 세상이 왜 이런 모습인지 알려준다.

- 사람의 혀는 나트륨 이온이 닿으면 짜다고 느낀다. 맛을 느끼는 과정은 복잡하지만 혀가 감지하는 것은 원자가 아니라 전하다. 나트륨 이온과 똑같은 전하량을 가지는 리튬 이온이나 칼륨(K) 이온 모두 짠 맛이 나는 이유다. 물론 같은 전하량을 가지더라도 루비듐(Rb)이나 세슘(ssCs)처럼 이온의 크기가 너무 커지면 다른 종류의 짠맛을 느끼게 된다. 나트륨 이온과 칼륨 이온은 우리 몸에 꼭 필요하다. 지금 이순 간 당신이 이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눈으로 얻은 시각 정보가 뇌 에 전달되기 때문이다. 몸에서 정보는 전기 신호로 전달되는데, 정확 히 말해서 나트륨 이온과 칼륨 이온이 세포막을 이동하며 만드는 전 류 신호다.' 이런 이온들이 없으면 신호가 멈출 것이고 우리는 바로 죽 을 것이다. 숨을 쉬려고 해도 숨 쉬기에 관여하는 근육을 움직일 신호 가 필요하다.
나트륨이 생존에 중요하기에 우리는 짠맛에서 행복을 느끼고 쉽게 중독된다. 아니, 짠맛에 심드렁했다면 생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 가끔 이상한 짓을 하는 사람이 있다. 자동차 부동액으로 사용되는 에틸렌글리콜(C2H4(OH)2)을 실수로 마셨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질문이냐는 생각이 드셔도 좀 참으시라. 답은 에탄올 (C2H5OH), 그러니까 술을 퍼마시는 거다. 에틸렌글리콜은 몸의 효소와 반응하여 옥살산(C2H2O4)을 만들어내는데 이 녀석이 콩팥에 해를 입힌 다. 에틸렌글리콜은 탄소, 산소, 수소 10개가 모인 분자다. 이 분자는 산 소와 수소로 구성된 -OH 작용기를 가지고 있다. 에탄올도 마찬가지 다. 에틸렌글리콜이 몸에서 처음으로 반응하는 효소는 '알코올탈수소 효소'다. 에탄올을 잔뜩 마시면 에탄올이 탈수소효소를 독점하게 되므 로 에틸렌글리콜은 몸에 해를 끼칠 기회를 얻지 못하고 배설된다. 탈수 소효소가 에탄올과 에틸렌글리콜을 혼동하기 때문이다. 

- 설파제 sulfanilamide는 연쇄상구균 감염에 효과가 있는 항생제다. 설파제가 개발되기 전 치러진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총에 맞아 죽은 사람 보다 세균 감염으로 죽은 사람이 더 많았다. 세균은 파라아미노벤조산 이라는 화합물에서 엽산이라는 물질을 만든다. 이 물질은 생명체의 생 존에 꼭 필요하다. 인간은 비타민B의 형태로 엽산을 섭취해야 한다. 설 파제의 구조는 파라아미노벤조산과 유사하다. 세균이 항생제 설파제와 파라아미노벤조산을 놓고 혼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결국 세균의 엽산 생산이 방해를 받고 성장이 둔화된다. 이렇게 설파제는 세균을 퇴치한 다. 분자에서 중요한 것은 원자들이 배열된 구조, 특히 작용기의 구조다.

- 원자를 기술하는 양자역학으로 돌멩이 같은 일상적 크기의 물체의 운동을 설명하려고 시도해볼 수는 있지만(물리학자들은 그렇게 해도 뉴턴 역 학과 같은 결과라 나올 거라 믿는다) 그냥 뉴턴 역학을 사용하는 것이 편하다. 이 두 가지 방법이 연속적으로 연결되는지, 불연속적인지 아직 불분명 하지만 대상에 따라 두 가지 방법 가운데 하나를 골라 사용하는 것이 좋은 전략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돌멩이의 낙하를 설명하기 위해 양자 역학으로 계산을 해야 한다면 우리는 돌멩이가 언제 떨어질지 영원히 알 수 없을 거다. 하지만 원자를 설명하려면 양자역학이 반드시 있어 야 한다. 그렇다고 자유의지를 갖고 살아가는 사람의 행동을 원자로부 터 이해하려는 것은 불가능하다. 원자에서 분자, 분자에서 세포, 세포 에서 인간으로 층위가 바뀔 때마다 이전 층위에서 없던 새로운 성질이 창발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층위에 따라 다른 법칙을 적용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많은 것은 다르다More is different.

- 축의 시대는 지금으로부터 거의 2500년 이전의 시기다. 하지만 우 리는 지금까지 축의 시대가 보여준 통찰을 넘어선 적이 없는 것 같다. 축의 시대 현자들은 하나같이 공감과 자비를 이야기했다. 다른 사람을 친절히 대하고 관대하게 행동하면 세상은 좋아진다. 다른 사람은 다른 생명으로 나아가 우주 전체로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이런 깨달음을 얻 기 위해 신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니다. 지리적으로 떨어져 있고 문화적으로도 상이한 여러 지역에서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은 축의 시대의 깨달음이 인류의 본성에 대해 뭔가 심오한 이야기를 해준다고 볼 수 있다.
자연에 존재하는 인과율의 존재를 깨닫는 순간, 인간에게 세상을 인과적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생긴 것 같다. 이해할 수 없는 많은 부 분이 '신'의 의도로 채워졌다. 신이 인간에게 내리는 규율은 이기적이 고 호전적인 호모 사피엔스가 그나마 서로 죽이지 않고 협력하는 기반이 되었으며,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신의 밥상에 숟가락을 얹었다. 신에 대한 탐구는 축의 시대를 거치며 상이한 문화 권에서 비슷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바로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과 자 비다. 기하학에는 왕도가 없지만 신이라는 초월적 존재에 이르는 길에는 왕도가 있었던 거다. 이후 종교는 세속화되기도 하고 권력과 더 긴밀히 결탁하기도 했지만, 그 핵심 내용은 지금까지 크게 변하지 않은 채 전해지고 있다. 결국 신은 인간이 다른 인간과 함께 조화롭게 살기 위해 만들어낸 궁극의 상상력이었던 것이 아닐까.

- 산소와 알루미늄은 만나면 쉽게 결합한다. 그렇다면 녹이 잘 슨다는 말이다. 알루미늄이 잘 녹슬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단단하고 치밀한 알루미늄 산화물의 특성 때문이다. 알루미늄은 표면 에만 녹이 슬고 멈춘다. 표면을 뒤덮은 단단한 산화알루미늄 막이 내 부의 금속 알루미늄을 지켜주는 것이다. 녹으로 녹을 막는 셈이다. 창 틀에 있는 알루미늄새시는 이 정도 방어막으로 충분하지만 음료수 캔 은 그렇지 않다. 추가로 캔을 코팅해줘야 한다.
맥주는 화학 반응성이 크지 않아 캔을 코팅하지 않아도 된다. 맥주에 들어 있는 단백질이 산소를 용해시켜 알루미늄과 반응하는 것을 막는다. 오렌지주스도 비타민C가 산소를 제거하여 알루미늄 캔이 산화 되는 것을 방지한다. 다른 과일에 비해 오렌지주스가 비교적 일찍 캔 의 형태로 판매된 이유 중 하나다. 하지만 콜라는 다르다. 콜라는 녹을 생기게 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음료다. 그래서 맥주 캔이 나오 고수십 년이 지나서야 콜라 캔이 나오게 된다. 필자가 어릴 적 콜라는 유리병에만 담겨 있었다. 콜라 캔의 알루미늄은 눈에 보이지 않는 플 라스틱 막으로 코팅되어 있다. 부식만 생각한다면 맥주 캔에 코팅할 필요는 없지만 요즘은 맥주 캔도 코팅을 한다. 부식을 막으려는 것이 아니라 이산화탄소가 빠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녹이 슬지 않아 도 김이 빠지면 맥주의 가치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 지구 표면에서 가장 많고 중요한 원자는 산소 다. 지각의 거의 모든 물질은 산화물의 형태로 존재한다. 산화는 생명 이 에너지를 만드는 방법이기도 하다. 규소는 무생물의 뼈대이고, 탄 소는 생물의 뼈대다. 규소와 탄소가 모두 14족 원자인 것은 우연이 아 니다. 게르마늄도 14족 원자이지만 지각에서 그 양이 규소의 100만분 의 1에 불과하다. 뭔가 중요한 역할을 하기는 힘들다는 이야기다. 단언 할 수는 없지만 규소로 된 땅바닥, 그 위에서 살아가는 탄소 생명체, 그 리고 모든 물질을 넘나들며 변화를 일으키는 산소라는 구도는 생명체 가 존재하는 지구형 행성의 보편적인 모습일 가능성이 크다.

- 자연에서 큰 결정이 저절로 만들어지기는 매우 어렵다. 쉽게 말해서 귀하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정도 크기가 되는 결정을 보통 '보석'이라 부른다. 지각에 가장 흔한 산소와 규소가 만나 결정을 형성 하면 '수정'이라는 보석이 된다. 이 과정에 수분이 더해지면 수정이 무 지개 색을 띠게 되는데, 이것이 '오팔'이라 불리는 보석이다. 지각에 가장 많은 금속인 알루미늄과 지각에 가장 많은 원자인 산소가 결합 한 산화알루미늄이 결정으로 성장할 때 크로뮴 원자가 약간 첨가되면 붉은색 '루비'가 되고, 타이타늄과 철 등이 더해지면 파란색 '사파이 어'가 되며, 베릴륨, 크로뮴이 더해지면 초록색 '에메랄드'가 된다. 결 국 보석을 이루는 원자는 지각을 이루는 흔한 원자들이다. 보석이 귀 한 것은 그것을 이루는 재료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보석의 색이 아름다운 것은 소량의 불순 물 금속 원자 때문이다.

- 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려면 경쟁하는 두 가지 힘을 알아야 한다. 첫째, 별은 수축하려고 한다. 별을 이루는 입자들 사이에 작용하 는 중력 때문이다. 중력은 서로 당기는 힘이므로 한 점으로 모여든다. 둘째, 별은 팽창하려고 한다. 원자핵의 융합으로 방출된 에너지는 막 대한 열이 되어 입자들을 격렬하게 운동시켜 바깥쪽으로 밀어낸다. 별 은 이 두 힘의 평형으로 존재한다. 균형이 깨지면 수축하거나 팽창하 게 된다. 팽창을 막지 못하면 초신성처럼 폭발하게 되고, 수축을 막지 못하면 블랙홀이 될 수 있다.
태양의 사진을 보면서 격렬한 핵융합 반응으로 표면이 폭발하듯 이글거린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태양의 표면 온도는 5500도 정도로 핵융합이 일어날 만큼 뜨겁지 않다. 핵융합은 태 양 중심에서 일어나는데 온도가 1000만 도에 달한다. 수소가 융합하 면 헬륨이 된다. 수소가 무한정 존재하는 것은 아니니까 결국 중심부 의 수소가 모두 헬륨으로 바뀌는 날이 올 것이다. 그렇다면 태양은 꺼 지는 걸까? 상황은 다소 복잡하다. 이때가 되면 중심 근방에 수소는 없 고 헬륨뿐이다. 수소가 융합하여 모두 헬륨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 만 중심에서 조금 벗어나면 여전히 수소가 있다. 그곳은 온도가 중심보다 낮아 아직 융합 반응이 시작되지 않아서 그렇다. 태양이 복숭아 라면 헬륨은 복숭아씨에 해당하고 복숭아 과육에 수소가 있는 셈이다. 이제 이 부분의 수소가 융합하며 탄다. 중력이 충분히 강하다면 헬륨 도 짓눌려 융합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이제 헬륨도 수소 역할을 하는 것이다.
중심에서는 헬륨이 융합하고 그 바로 바깥쪽에서는 수소가 융합하 는 것이다. 이제 태양은 부풀기 시작하는데 안타깝게도 결국 엄청나게 커져서 지구를 삼켜버릴 것이다. 50억 년 이상 지나야 올 일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라. 이때의 태양을 적색거성이라 부른다. 2번 헬륨이 융 합되고 있는 중심에서는 6번 탄소와 8번 산소가 만들어진다. 이 탄소 와 산소는 먼 훗날 우주의 어딘가에서 탄소 기반 유기 생명체의 일부 가 될지도 모른다.
태양보다 더 무거운 별은 이런 융합으로 모두 철이 될 때까지 반응이 계속된다. 철보다 무거운 원자핵은 철보다 불안정하므로 이런 방식 으로 만들 수 없다. 핵융합으로 철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면 별의 종말 이 온 것이다. 더는 탈 것이 없으므로 밖으로 밀어내는 힘이 사라지고 중력만 남는다. 그러면 별이 급작스럽게 수축하다가 폭발하게 되는데, 바로 초신성이다. 엄청난 폭발 속에서 철보다 불안정한 원자들도 서로 융합할 기회를 얻게 되고, 이때 철보다 무거운 원자들이 만들어진다. 초신성 폭발 이후 남는 물질은 중성자별이나 블랙홀이 된다.

- 표준 모형에 중력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은 물리학자의 입장에서 비극이다. 중력은 역사적으로 가장 먼저 발견된 힘이다. 물리 학은 뉴턴이 중력을 설명하며 탄생했다. 그 이후 발견된 모든 힘과 입 자는 하나의 통합된 시각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데 중력만 예외다. 거의 모든 중국요리를 할 줄 아는 인공지능 로봇이 짜장면을 만들 줄 모르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중력은 시공간과 관련한 힘이며 우주의 거대한 규모에서만 중요성을 갖는다. 원자 규모에서 중력 효과는 무시 할만한 수준이다. 표준 모형의 힘은 물질을 설명하며 원자 규모에서 중요성을 갖는다. 하지만 시공간에 대해서는 많은 설명을 해주지 못한 다. 표준 모형이 중력을 포함하도록 확장되는 날, 우주의 모든 것을 명 징하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 표준 모형의 내용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물리학자인 나도 답하기 어렵다. 양자역학이 탄생했을 때, 인류는 비로소 원자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은 원자의 집합체이며 그 자신의 존재가 원자, 분자들의 생화학 과정에 의존한다. 우리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자연 현상도 분자들 사이의 화학 반응으로 일어난다. 지구 표면에서 흙, 암석, 생명체 등을 이루는 분자들은 안정된 원자구조를 이룬다. 이 들의 결합을 깨뜨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은 태양에서 온 빛 에너지 다. 다행히 태양에서 온 빛의 에너지는 원자구조를 깰 정도로 크지 않 다. 우주선이라 불리는 높은 에너지 입자가 지구로 쏟아지고 있지만 지구 자기장이 이를 막아준다. 따라서 지구 표면에서 원자는 쪼개지지 않는 물질의 최소 단위로 보아도 큰 무리는 없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의 대부분은 전자가 이동하거나 원자들이 뭉쳤다가 흩어지는 것이다. 원자를 이해하면 지구에서 일어나는 세상만사를 이해하는 것 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원자를 이해하자 인류 문 명의 모습 자체가 바뀌게 된다. 19세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컴퓨터, TV, 플라스틱, 스마트폰, 인터넷, 형광등, 합성 섬유, 항생제, 인공위성, 생명 공학 기술 등이 20세기에 나타난 것은 20세기 초 인간이 원자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표준 모형은 원자의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원자핵의 세부 사항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핵에서 일어나는 일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표준 모형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표준 모형의 이해 자체가 인류 문명의 기술적 진보에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준 사례는 아직 없는 듯하다. 우리 주변에서 원자력 발전을 제외하고 원자핵을 깨뜨릴만한 에너지를 쉽게 얻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물론 표준 모형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인터넷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HTTP 통신 규약이 발명되었 고, 거대 가속기를 건설하는 동안 부산물로 수많은 기술적 진보가 있 었다. 하지만 쿼크나 글루온을 이용한 새로운 통신이나 에너지원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적어도 인류 문명이 태양계 내에 머무는 한 이 런 지식이 직접적으로 인류의 편의를 위해 사용될 날이 올지는 불확 실하다.

- 생명은 우주에서 가장 흔한 원자로 되어 있지만, 우주는 죽음으로 충만하다. 생명은 지구에만 존재하는 특별한 것이니 (지금까지는 지구 밖에 서 생명이 발견되지 않았다) 우주 전체를 통해 보면 죽음이 자연스러운 것이 고 생명이야말로 부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죽음으로 충만한 우 주에 홀연히 출현한 생명이라는 특별한 상태. 어쩌면 우리는 죽음이라 는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잠시 생명이라는 불안정한 상태에 머무는 것 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죽음은 이상한 사건이 아니라 생명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생명이 부자연스러운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고통으로 가득한 것은 아닐까? 물리학자의 눈으로 죽음을 바라보면 생명 은 더없이 경이롭고 삶은 더욱 소중하다. 이 기적 같은 찰나의 시간을 원하지 않는 일을 하며 낭비하거나 남을 미워하며 보내고 싶지 않다.
죽음이 우주에서 자연스러운 상태라는 이야기는 막상 사랑하는 이 의 죽음을 마주한 사람에게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생명이 없는 우주 에서는 생명이 놀라운 일일지라도, 이미 생명을 가진 존재에게 생명은 당연한 것이라 죽음은 인간에게 속수무책의 재앙일 뿐이다. 하지만 누 군가는 물리학적인 죽음에서 소소한 위로를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죽음은 피할 수 없지만, 죽음으로 모든 것이 소멸된다는 생각에서 벗어 날 수는 있다. 죽음 이후에도 우리는 무언가를 남기고 또 무엇이 된다.

- 지금으로부터 약 35억 년 전, 그러니까 지구상 생명이 탄생한 지 몇 억 년 지나지 않아 시아노박테리아가 광합성을 시작했다. 산소는 광합 성의 쓰레기다. 시아노박테리아는 수십억 년 동안 정말 열심히 일을 했고, 그 결과 지구는 산소로 가득한 행성이 되었다. 산소 호흡하는 생 물들에게는 천국이 구현된 것이지만 산소를 이용하지 못하는 생물에 게는 재앙이었을 것이다. 산소는 반응성이 강한 원자다. 만약 외계인 이 지구를 방문한다면 유독가스로 가득한 위험하기 그지없는 행성이 라 생각할지 모른다. 물리학자의 눈에 광합성이란 물을 분해시키는 것이다. 반응성 강한 산소에 찰떡같이 들러붙은 수소를 떼어내는 것이다. 여기에는 빛이라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호흡은 탄소와 수소가 천천히 연소되는 현상으로 등불이나 촛불이 타는 것과 모든 면에서 흡사하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숨을 쉬고 있는 동물은 살아 있는 연소체다.
1790년 앙투안 라부아지에가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에 보낸 논문에 나오는 글이다. 숨을 쉰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다. 성경에도 신 이 아담에게 숨을 불어넣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호흡은 신성한 것이 다. 호흡은 생명 그 자체다. 그런데 호흡이 연소 현상에 불과하다고? 당시 시인들이 라부아지에의 이론에 크게 반발한 것은 이해할만하다. 라부아지에가 이야기한 연소 현상이 허파가 아니라 모든 세포에서 일 어난다는 사실은 1870년이 되어서야 밝혀진다. 그렇다면 세포 내부 정확히 어디에서 호흡이 일어날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1949년에야 얻어진다. 바로 미토콘드리아다.

- 양자역학에 따르면 산소는 전자를 좋아한다(사실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많은 중요한 일의 원인을 추적해보면 대개 산소가 범인이다). 다른 원자에 비해 전 자를 강하게 당겨서 전자가 원자핵에 가까이 있게 된다. 전자기학에 따르면 양전하(원자핵)와 음전하(전자)는 가까이 있을수록 에너지가 낮 다. 서로 당기기 때문인데 중력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하늘에 떠 있는 인공위성보다 지면에 있는 인간의 에너지가 낮다. 인간이 인공위성보다 지구 중심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당신이 인공위성의 위치에 도달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하다. 인공위성을 그 위치에 올려놓기 위해 로켓에 실어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며 날려 보내는 이유다.
호흡에서 일어나는 일은 간단하다. 탄소 주위에 있던 수소를 싹 걷어 내서 (전자라면 환장하는) 산소 원자에게 던져주는 것이다. 수소의 전자를 산소가 차지하면 전기력에 의해 에너지가 낮아진다. 산소가 전자를 가 까이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또 탄소 주위에 산소가 하나(포도당)에서 둘 (이산화탄소)로 늘어나는데, 역시나 산소가 탄소의 전자쌍을 빼앗아 에너 지가 낮아진다. 결국 산소가 전보다 전자를 더 가까이 가져가서, 즉 전자 가 원자핵에 더 가까이 낙하하면서 에너지가 낮아진 것이다. 에너지 보 존 법칙에 따르면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고 형태만 바뀔 뿐이다. 포도당 과산소가 반응하여 물과 이산화탄소가 되면서 처음보다 에너지가 낮아 졌으니 처음과 나중의 차이에 해당하는 남는 에너지가 존재한다. 바로 이 남는 에너지를 이용하여 동물은 생존한다.
- 미토콘드리아 내부에서 아세틸 COA는 시트르산 회로라고 불리는 연쇄 화학 반응을 점화시킨다. 옥살로아세트산이 아세트산으로 변하 면서 시작되는 이 반응은 7단계를 거쳐 다시 옥살로아세트산으로 돌 아온다. 세포 호흡의 과정에서 최종 산물의 하나인 이산화탄소가 생성된다. 아세틸 COA가 공급되는 동안 이 연쇄 반응은 지속된다. 마치 물 (아세틸 COA)이 쏟아지는 동안 물레방아(시트르산 회로)가 도는 것과 비슷 하다. 물레방아는 피스톤을 움직여 밀을 빻아주지만 시트르산 회로는 ATP 2개와 두 종류의 분자를 만든다. 이 두 종류의 분자야말로 호흡 에서 최대의 부가가치를 갖는 물질이다.
우선 두 종류의 분자는 전자를 내놓고 양이온으로 변한다. 분자에 서 나온 전자는 전자 전달계라 불리는 단백질 집단을 거치며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전자전달계는 말 그대로 전자를 전달하는 장치다. 전자전달계를 지난 전자는 최종적으로 물을 만드는 데 쓰인 다. 전자가 전자전달계를 지나는 동안 어떻게 에너지를 만들어낼까?
이 문제는 생물학의 오랜 난제였다. 이 과정에서 생산되는 ATP의 개 수는 일정하지 않다. 세베로 오초아Severo Ochoa (1959년 노벨생리의학상 수 상)가 38개라는 숫자를 처음 알아냈지만 이후 실험마다 28~38개까지 다른 숫자들이 나왔다. 숫자가 일정하지 않다는 것이 골칫거리였다. 이게 뭐 대수냐 할 사람도 있겠지만, 화학을 배운 사람은 이것이 재앙 이라는 것을 안다. 중고등학교 화학 시간에 하는 일은 대부분 화학 반 응의 반응물과 생성물의 양을 계산하는 것이다. 회계 장부에서 수입과 지출이 딱 맞아야 하듯이 화학 반응의 반응물과 생성물의 양도 정확히 일치해야 한다.
1961년 피터 미첼 Peter Mitchell (1978년 노벨화학상 수상)은 놀라운 제안을 한다. 사람들이 10년 가까이 그의 이론을 철저히 무시한 것만 봐도 그의 이론이 정말 놀라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첼은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막스 플랑크Max Planck의 말을 인용했다. "새로운 과학 개념 은 반대자들이 설득되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죽기 때문에 정착된다." 10년 동안 겪었을 내면의 고통이 느껴진다.
이제 미첼의 아이디어를 살펴보자. 미토콘드리아는 이중의 세포막 을 가지고 있다. 내막內膜과 외막外膜이라 불리는 두 개의 막사이 공간 에 비밀이 숨어 있다. 전자전달계는 사이토크롬이라 불리는 단백질들 의 집단으로 내막에 박혀 있다. 전자가 전달되는 동안 사이토크롬들이 순차적으로 산화-환원 반응을 거듭하게 된다. 산화-환원 반응이 전자 를 잃거나 얻는 것이니 전자가 이동할 때 산화-환원 반응이 연쇄적으 로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흥미롭게도 이때 나오는 에너지로 곧장 ATP를 만들지 않고 세포 내부의 양성자를 막 사이의 공간으로 이동시키는 데 사용한다. 이것이 바로 미첼의 핵심 아이디어다. 결국 전자 전달계는 막 사이 공간으로 양성자를 펌프질하여 농축시킨다. 물건을 팔 고돈(ATP)이 아니라 쿠폰(양성자)을 받는 셈이다. 왜 이러는 걸까?
우리 주변의 공기 밀도는 균일하다. 안방이 거실보다 공기가 희박 하거나 하지 않다는 말이다. 열역학 제2법칙 때문이다. 풍선 내부의 공 기 밀도를 주위보다 높게 하려면 뭔가 일을 해줘야 한다. 입으로 불거 나 공기 주입기로 공기를 주입해야 한다. 아무튼 그렇게 하면 주위보 다 풍선 내부 공기의 압력이 커진다. 이제 풍선을 열면 공기가 뿜어져 나온다. 여기에 바람개비를 놓으면 회전할 것이다. 전자전달계에 의 해 농축된 양성자가 정확히 이렇게 사용된다. 막 사이 공간에 농축된 양성자는 내막에 구멍이 생기면 풍선 내부의 공기가 뿜어져 나오듯 세 포 내부로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실제로 'ATP합성효소'라는 단백질 은 원통 모양의 구멍을 가지고 있어 양성자가 구멍으로 통과한다. 양 성자가 이동할 때 바람개비처럼 생긴 회전자 단백질이 돌아가며 ATP 가 만들어진다. 바람개비가 돌아간다는 것은 비유가 아니라 실제 벌어지는 일이다. 양성자가 이동할 때마다 회전자는 120도씩 회전한다.
처음 120도를 돌 때 ADP가 효소에 결합한다. 다음 120도 도는 동안 ADP에 인산이 붙어 ATP가 만들어진다. 마지막 120도 회전할 때 ATP 가 떨어져 나온다.
전자전달계는 전자가 지나가는 동안 ATP를 만들지 않고 양성자 저수지에 에너지를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쓴다. 더구나 저장된 양성자는 ATP 생성만이 아니라 다른 용도로도 사용된다. 그래서 산화 적 인산화 과정에서 생성되는 ATP의 개수가 들쭉날쭉했던 것이다. 정 리해보자. 포도당은 해당 과정을 통해 피루브산으로 바뀐다. 피루브산 은 미토콘드리아 내부로 들어가 시트르산 회로를 점화시킨다. 여기서 만들어진 물질이 전자전달계에 전자를 준다. 전자전달계는 미토콘드 리아 내막과 외막 사이에 양성자를 농축시킨다. 농축된 양성자가 내막 을 가로질러 이동할 때 ATP가 만들어진다.

- 생물은 원자로 만들어진 화학 기계다. DNA, RNA, 단백질 모두 원 자로 되어 있고, 이들 사이의 화학 반응은 양자역학에 따라 작동한다. 화학 반응을 지시하는 존재는 따로 없다. 충분히 많은 분자가 빠른 속 도를 갖고 무작위로 움직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일 뿐이다. 원자 수 준에서 이것을 위한 어떤 의도나 목적은 없는듯하다. 하지만 수많은 원자들이 모여 생명의 몸체를 이루는 순간, 외부 변화에 저항하며 자 신을 유지하고, 나아가 자신의 복제품을 만드는 '것'이 탄생한다. 적어 도 현재의 물리학으로 원자 수준에서 생명이 있어야 할 필연성을 끌어 낼 수는 없다. 물리학은 이미 존재하는 생명을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생명도 물리 법칙에 따라 작동된다. 하지만 생명을 설명하려면 우리는 원자의 층위에서 한 단계 올라가야 한다. 생명을 원자의 집단이라고 말하기는 쉬워도 생명을 단순히 원자의 집단으로 환원하기는 힘들다. DNA는 유전 정보를 저장할 수 있는 유일한 원자구조인가? 아미노산 가운데 생명의 단백질로 20개만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생명의 에너지 대사에 사용되는 화학 반응 이외에 다른 가능성은 없었나? 우 리는 이런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기 힘들다. 따라서 지구 밖 우주의 어 딘가에 생명이 있다면 그것을 이루는 분자가 지구의 생명과 얼마나 다 를지 예상할 수 없다.
생명은 자신을 복제한다. 자신에 대한 모든 정보를 DNA에 저장하 고 이것을 복제한다. 복제의 전 과정은 물리적이다. DNA로부터 자신 을 만드는 과정 또한 물리적이다. 과정에 참여하는 개별 원자와 분자들은 열운동을 할 뿐이다. 모든 과정은 양자역학에 따라 진행된다. 하지만 생명이 왜 자신을 복제하려고 하는지 우리는 아직 알지 못한다. 복제하려는 어떤 의도나 목적이 이런 원자 구조물을 만들었을까? 아 니면 우연히 만들어진 원자구조물이 복제의 특성을 얻어 아무런 이유 없이 그냥 끝없이 복제하고 있는 것일까? 물리학은 우주에 의도나 목 적이 없다고 말해준다. 그렇다면 생명은 우연히 생겨난 자기 복제 기 계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지구 밖에서 다른 생명체를 발견하는 날 이 문제에 대한 중요한 단서가 나올 것이라 생각한다. 만약 외계 생명체 의 화학 체계가 지구의 생명과 유사하다면 생명의 보편 원리가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보편 생명에 대한 이론을 구축해야 한다. 지구 밖에 생명체가 없다는 것은 우주 전체를 샅샅이 확인할 때까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외계에 생명체가 없다고 가 정하면 우리는 그냥 엄청난 우연의 산물일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 아마도 최초의 생명체는 열수분출공 기둥 내부의 기포와 같이 작 은 공간에서 탄생했을 것이다. 생명체가 외부 환경과 구분되기 위해서 는 외부와 격리된 공간이 필요한데, 기포 공간이 그 역할을 한 거다. 에 너지는 양성자의 형태로 외부에서 공짜로 공급되니까 이것으로 당장 생명에 필요한 물질을 만들 수 있다. 물론 그 물질이 무엇이며 어떻게 작동하는지 아직 알지 못한다. 그리고 어찌어찌하여 기포 공간을 대체 할 세포막이 형성되자 생명체는 자유를 찾아 열수분출공을 떠나게 된 다. 독립에는 고통이 따르게 마련이다. 이제는 스스로 양성자 농도차 를 만들어야 한다. 호흡이나 광합성 장치를 제작해야 한다는 뜻이다. 기포 공간은 변형이 일어나기 힘들지만 세포막은 유동적이라 둘로 나 뉘는 것도 가능하다. 자신을 둘로 분열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 면 이제 DNA만 있으면 복제도 가능하다. 이 이야기에는 허점이 많다.
하지만 열수분출공에서 출발한 생명은 처음부터 광합성이나 호흡 같 은 복잡한 생화학 과정의 발명 없이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최초 생 명체의 강력한 후보로서 많은 과학자의 관심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 것은 아직 그럴듯한 가설일 뿐 최초의 생명체가 무엇인지 아직 알지 못한다. 그럼 자신을 유지하며 복제하는 생명체가 탄생했다고 하자. 그다음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 공생, 진화를 추동하다
최초의 생명체인 원핵생물은 세포막으로 둘러싸인 세포질 내에 각종 단백질 및 DNA가 뒤섞여 존재하는 형태였을 것이다. 하지만 진핵생물은 핵막, 미토콘드리아, 소포체와 같은 소기관을 가지며 그 크기 와 복잡성에 있어 원핵생물과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쉽게 말해서 진 핵생물이 부서별로 방이 따로 할당된 사무실로 구성된 대기업 건물이 라면, 원핵생물은 칸막이도 없이 모든 부서가 한 방에 모여 있는 원룸 오피스텔이라고 할 수 있다. 복잡한 진핵생물은 단순한 원핵생물들의 공생으로 탄생했다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다.
21억년 전 어느 날 원핵생물 하나가 또 다른 원핵생물인 산소 호 흡하는 호기성 프로테오박테리아를 집어삼켰다. 이유는 모르지만 프 로테오박테리아는 소화되지 않고 원핵생물 내에 살아남았다. 프로테 오박테리아 입장에서 볼 때 소화되지 않을 수만 있다면 포식자 원핵생 물 내부에 있는 것이 안전했다. 밖에 나가봐야 다른 포식자에게 잡아먹힐 것이기 때문이다. 프로테오박테리아를 삼킨 원핵생물 입장에서 도 내부의 프로테오박테리아는 유용했다. 프로테오박테리아는 점차 적응하여 미토콘드리아가 되었을 것이다. 당시 산소 농도가 증가하고 있었는데, 산소는 반응성이 강한 원자다. 쉽게 말해 '독'이다. 미토콘드 리아는 산소호흡으로 에너지를 생산한다. 내부의 미토콘드리아가 산 소도 제거해주고 에너지도 만들어주니 일석이조라 할만하다. 숙주인 원핵생물이 할 일은 먹이를 공급해주는 것이다. 아마도 원핵생물-미 토콘드리아 연합체는 다른 원핵생물들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식 세포가 되었을 것이다. 식세포가 움직이는 데 필요한 막대한 에너지 는 미토콘드리아가 공급했을 것이다. 참고로 오늘날 세포 하나당 대략 2000개의 미토콘드리아가 있다. 이 정도면 원시 지구에서 무적의 원 자력 항공모함 전대라 할만하다. 엽록체도 미토콘드리아와 마찬가지로 세포 내 공생의 산물이다.
공생설의 중요한 증거 중 하나는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 모두 고 유의 DNA를 가진다는 사실이다. 원래 DNA는 핵 안에만 있어야 한 다. 핵이야말로 세포의 중앙 정보 보관소 아닌가. 하지만 미토콘드리 아와 엽록체는 핵과 별개의 DNA를 독자적으로 보유한다. DNA야말 로 그 세포가 누구인지 말해주는 신분증이며 복제의 주인공이다. 따라 서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는 한때 독자적으로 복제를 했을 것이다. 초 기원핵세포 내부에서 공생하던 미토콘드리아나 엽록체가 죽었을 때, 몸이 분해되며 그 DNA도 숙주 세포 내에 흩어졌을 것이다. 이런 쓰레 기 DNA와 숙주의 DNA가 한동안 뒤섞였다는 증거가 현재 진핵세포 의 DNA에 흔적으로 남아 있다. 결국 숙주가 자신의 DNA를 지키기 위 해 핵막을 만드는 진화를 한 것으로 보인다. 핵막으로 둘러싸인 핵은 진핵세포와 원핵세포를 구분 짓는 특성으로 세포 내에서 DNA를 격리 해 보관하는 특별 창고다.
- 핵막이 없는 원핵생물, 즉 세균은 다른 죽은 세균들의 DNA를 받아들여 쉽게 변이를 일으킨다. 이 때문에 인간과 병원균의 전쟁에서 신 약이 개발되는 속도보다 세균의 돌연변이가 빠를 수 있다. 진핵생물 은 핵막을 만들어 공생 개체들의 DNA로부터 자신의 DNA를 보호할 수 있었지만 다른 개체의 DNA를 바로 자기 DNA에 삽입하여 빠른 변 이를 일으킬 수 있는 원핵생물의 장점은 잃어버렸다. 좀 더 다양한 유 전 정보를 갖는 자손을 얻기 위해 진핵생물이 고안한 발명품은 성性을 통한 유성생식이었다. 공생이 아니었으면 성sex의 기쁨도 없었을 거란 이야기다.
- 정리해보자. 단세포 생물이 함께 공생하여 진핵생물이 탄생한다. 단세포 진핵생물이 모여 군락을 이루다가 해면동물이 탄생한다. 해면동물은 조직을 가지고 있지 않으나 자포동물이 되면 촉수와 입. 항문 의 조직을 갖게 된다. 조직을 운용하기 위해 원시적인 신경계가 나타 난다. 자포동물은 방사형 형태를 가지나, 운동성이 중요해지자 좌우대 칭 동물이 탄생한다. 좌우대칭 동물은 머리와 꼬리, 분리된 입과 항문, 조직화된 신경계와 뇌를 가진다. 운동하는 좌우대칭 동물은 포식자가 되어 캄브리아기 대폭발을 일으킨다. 뇌에서 등을 따라 뻗어나가는 신 경삭을 등뼈에 넣은 척추동물이 등장하자 동물은 육지로 여행을 떠난 다. 체외 수정하는 양서류를 거쳐 알을 낳는 파충류로 진화가 일어나 고 새끼를 낳는 포유류가 탄생한다. 포유류 가운데 완전한 형태의 새 끼를 낳는 태반류 영장목의 동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인간이다.

- 1939년 영국의 앨런 호지킨Alan Hodgkin과 앤드루 헉슬리 Andrew Huxley"는 대왕오징어의 신경계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대왕오징어는 이름 그대로 눈에 보일 만큼 큰 신경을 가지고 있었는데, 신경이 클수 록 다루기 용이하고 신호 전달 속도가 느려서 실험하기 쉬웠다. 이들이 대왕오징어로부터 알아낸 신경 신호 전달의 원리는 놀라운 것이었 다. 우선 신호 전달에 사용되는 전하는 전자가 아니라 나트륨 이온이다. 나트륨 이온'은 신경을 따라 직접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파도 타기를 하듯이 신호를 전달한다.
신경세포의 외부는 내부보다 나트륨 농도가 대단히 높다. 신경세 포의 막에는 나트륨 이온만 통과할 수 있는 채널이 있다. 파이프같이 생긴 신경이 피리라면, 채널은 피리에 뚫린 구멍이라고 볼 수 있다. 나 트륨이 통과하는 구멍, 즉 채널은 조건에 따라 열리고 닫힌다. 신경세 포의 막을 따라 늘어선 채널들에 차례로 1번, 2번 같은 번호를 붙여보 자. 1번 채널이 열리는 순간, 외부의 나트륨이 채널을 통해 신경세포 내부로 쏟아져 들어간다. 나트륨을 먹물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편 하다. 파이프 외부에 먹물이 가득하고 내부는 깨끗한 물만 있을 때, 깨 끗한 물을 감싸고 있는 벽에 구멍을 뚫으면 외부의 먹물이 내부로 쏟 아져 들어올 것이다. 그러면 이번엔 2번 채널이 자동으로 열린다. 2번 채널이 열리면 이제 3번 채널이 자동으로 열린다. 이어서 4번이..., 즉 이 채널들은 내부의 나트륨 농도가 높아지면 열리는 거다. 물론 열린 채널은 잠시 후 자동으로 닫힌다. 일단 하나의 채널이 열리면 눈사태 가 일어난 것처럼 연쇄적으로 이웃한 채널이 열리게 된다. 이렇게 나 트륨이 쏟아져 들어가는 양상은 신경을 타고 이동한다. 마치 야구장에 서 관중들이 파도타기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 신경세포는 내부로 들어 온 나트륨을 끊임없이 외부로 퍼낸다. 이걸 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채 널이 열려도 나트륨이 쏟아져 들어오지 않을 거다. 나트륨을 퍼내는 데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이 때문에 인간의 뇌가 몸 전체 에너지의 20퍼센트를 소모한다. 호지킨과 헉슬리는 신경 신호 전달의 원리를 밝 한 공로로 1963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 다시 이야기하지만, 뇌는 신경세포들이 모인 집단일 뿐이다. 신경세포의 집단이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신경세포가 서로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 다. 신경세포들 사이에 전기 신호만 이동한다면 그냥 파이프 같은 통 로로 연결되어도 무방할 거다. 하지만 신경세포들은 시냅스라는 좁은 간격을 사이에 두고 연결되어 있다. 이 간격은 20~40나노미터 정도에 불과해서 바이러스 하나가 들어가기에도 좁다.
1920년대 오토뢰비 Otto Loewi와 헨리 데일Henry Dale은 신경을 타고 이동한 전기 신호가 시냅스에 이르러 화학 신호로 바뀐다는 사실을 알 아냈다. 나트륨 이온의 파도로 진행하는 전기 신호가 신경세포의 한쪽 끝에 있는 시냅스에 도달하면, 시냅스에서 화학 물질이 분비되기 시작 한다. 화학 물질의 이름은 '아세틸콜린acetylcholine'이다. 아세틸콜린이 시냅스를 지나 상대 신경세포에 도착하면 그쪽 신경세포에 전기 신호 가 만들어진다. 비유를 하나 들어보자. 편지를 전달하는 전령이 '나트륨 이온'이라는 말을 타고 도로를 달린다. 도로 끝에서 시냅스 강을 만나면 아세틸콜린이라는 사공에게 편지를 넘긴다. 사공은 배로 강을 건 너 건너편 나루터에서 대기하고 있는 새로운 전령에게 편지를 전달한 다. 전령은 다시 말을 타고 도로를 내달린다. 뢰비와 데일은 시냅스의 화학 작용을 밝힌 공로로 1936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자,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던져보자. 신경세포는 왜 시냅스라는 것 을 만들어서 전기 신호를 화학 신호로 바꾸는 걸까? 시냅스로 인해 신 호 전달이 지체될 뿐 아니라, 괜히 구조만 복잡해지는 것 아닐까? 뭔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 않다면 시냅스야말로 자연의 중대한 실수일터다. 시냅스의 놀라운 점은 유연하다는 것이다. 시냅스를 통한 신호 전달의 크기는 조건에 따라 변화한다. 앞에서 사용한 배와 사공의 비 유를 재활용해보자. 편지가 자주 시냅스 강을 건넌다는 것은 배와 사 공의 수가 증가한다는 뜻이다. 반대로 시냅스 강을 자주 건너지 않으 면 사공이 줄어든다. 즉 자주 사용하는 시냅스 연결은 강화되고 사용 하지 않는 연결은 약화된다. 이것이야말로 기억과 학습의 근본 원리로 '신경가소성 neuroplasticity'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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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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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주는 어떻게 창조되었나? 물질은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생명의 본질은 무엇인가?"와 같은 보편적 질문 대신 "돌은 어 떻게 낙하하는가? 관 속에서 물은 어떻게 흐르는가? 피는 혈관 속 에서 어떻게 순환하는가?" 같은 제한된 질문을 던지기 시작한 때 를 현대 과학의 출발점으로 잡을 수 있다. 이렇게 질문을 바꾸자 경이로운 결과가 나왔다. 보편적 질문은 제한적 답으로 이어졌던 반면, 제한적 질문은 오히려 점점 더 보편적인 답을 내주는 것으로 드러났다. (프랑수아 자코브, 1977년)

- <의존하는 유전자》를 쓰던 1990년대 말에 나는 아버지와 발달의 본질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다. 아버지가 처음에 이 문제에 흥미를 느낀 이유는 본인이 의사이기 때문이었지만, 이후에도 동 시대 과학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 질문에 꾸준히 관심을 기 울였다. 하지만 내가 '후성유전epigenesis'이라는 생물학적 과정에 관심이 있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는 그 용어가 어쩐지 못마땅하다 고 하셨다. 'epi'라는 접두사가 그리스어로 '위에', '겉에', '위쪽에' 라는 뜻임을 알고 있는데, 유전자 '위에 뭔가가 있다는 개념을 납득할 수 없다는 얘기였다. 나는 유전자의 기능에 영향을 미치고, 결과적으로는 발달에도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이 존재한다는, 그 러니까 은유적 의미에서 유전자 위에 어떤 요인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포착한 단어라고 응수했다. 과학자들이 후성유전 에 관해 이런 식으로 말할 때는, 한 유기체의 발달에 영향을 주는 비유전적 요인들, 예컨대 호르몬이나 동물이 살아가는 사회적 맥 락 등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의사인 아버지는 이런 은유적 설명을 부적절하게 여겼고, '후성유전적epigenetic'이라는 단 어를 쓰려면 그건 물리적으로 유전자 위에 존재하는 것만을 지칭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90년대 당시 후성유전에 관한 나의 이해 는 잘 봐주어도 어렴풋한 수준이었으니, 아버지에게 이 이론을 납 득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 그로부터 20년이 채 지나지 않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이제 후성유전학은 생물학의 한 분야로 자리매김했고, 후성 유전학자들의 새로운 발견은 종양학, 영양학, 심리학, 철학 등 여 러 다양한 학문 분야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우리의 DNA 위 에 있는 혹은 DNA에 달라붙은 뭔가(이를 '후성유전적 표지'라 부른 다)가 실제로 존재하며, 이들이 DNA가 기능하는 방식에 결정적 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런 이유로 후성유전 과정은 우 리의 거의 모든 특징에 영향을 미친다. 아직은 과학자들이 후성유 전적 표지에 관해 알아야 할 사실들을 막 알아가기 시작한 단계지 만,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만으로도 확실히 획기적이다. 경험(그리 고 우리가 처한 환경 속 여러 상황)이 일부 후성유전적 표지에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일란성 쌍둥이 사이의 차이, 식생활이 건강에 미 치는 영향, 어머니의 행동이 성인이 된 자녀의 스트레스 상태에 미 치는 영향 등 아주 다양한 것들을 후성유전적 표지로 설명할 수 있 다. 후성유전학의 이런 발견들은 본성 대 양육 논쟁을 뿌리째 뒤흔 드는 데 일조했다. 요컨대 후성유전적 사건들은 DNA와 환경의 접 점에서 발생하므로 이를 알면 우리의 특징들이 언제나 본성과 양 육 두 가지 모두의 결과라는 것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식민지 주민들과 그들이 처한 상황 두가지 모두가 최초의 아메리카 식민 지의 성공과 실패를 판가름했던 것처럼.
- DNA와 표현형의 관계
BRCA1에 관한 연구 결과를 집중적으로 읽으면 얻을 수 있 는 더 포괄적인 메시지가 하나 있다. BRCA1 유전자라는 DNA가 유방암을 유발하지 않는 데는 타당한 이유가 있는데, 그건 바로 어 떤 DNA도 단독으로는 그 어떤 질병도 유발할 수 없기 때문이다. DNA는 우리의 그 어떤 특징도 단독으로 만들어낼 수 없다! 이 말 이 놀랍게 들릴 수도 있겠다. 사람들은 대부분 DNA 속 유전자들 이 우리의 일부 표현형(우리의 특징이나 성격을 일컬어 생물학자들이 사용하는 단어다)을 만들어낸다고 분명히 배웠으니 말이다. 표현형 은 신체적인 것일 수도 있고 심리적인 것일 수도 있으며, 눈동자 색과 머리 크기부터 음악적 재능, 주의력 지속 시간, 술에 잘 취하 는 성향 그리고 그 사이 모든 것을 포함한다. 하지만 유전자가 표 현형을 결정하지 않는데도, 세상에 나와 있는 다수의 생물학 교과 서는 여전히 유전자가 표현형을 결정하는 것처럼 기술하고 있고, 그렇게 일종의 유전자 결정론을 유포하고 있다. 눈동자 색은 특히 짚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다수의 생물학 교과서가 학생들에게 눈 동자 색이라는 표현형이 유전적으로 단순한 방식으로 결정된다 는 인상을 심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 미국국립보건원 암 연구소에서 일하는 정상급 유방암 전문가들이 펴낸 BRCA 유전자 변이에 관한 자료 속 다음 구절을 읽어보면, 우리가 그런 종류의 예측치를 대할 때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특별히 주의 해서 보아야 할 부분은 강조 표시를 했다).
BRCA1과 BRCA2 변이와 관련하여 유방암과 난소암이 생길 위 험의 예측치는 [암에 걸린 사람이 많은 대가족들을 대상으로 한] 연 구 결과로 계산한 것이며 (...) 이는 꼭 지적해야 할 중요한 사항 이다. 가족 구성원들은 서로 일정 부분 유전자를 공유할 뿐 아 니라 환경도 공유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이 가족들에게서 나타난 다수의 암 발병 사례는 어느 정도는 다른 유전 요인이나 환경 요인의 결과로도 볼 수 있다. 따라서 [1] 위험 예측치는(...) 전체 인구에서 BRCA1과 BRCA2 변이 보유자들의 발병 위험 정도를 정 확히 반영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더욱이 전체 인구에서 [대조군 을 제대로 사용하여 암 발병 위험성을 연구한] 장기 연구에서 나온 데이터가 없으므로, (・・・) 위에서 제시한 확률 수치는 더 많은 데 이터가 나오면 달라질 수 있는 추정치다."
- 후성유전이란 다양한 맥락 또는 상황에 따라 유전 물질이 활성화되거나 비활성화되는, 즉 발현되는 방식을 일컫는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DNA는 껐다 켰다 할 수 있는 전등 스위치처럼 작동 한다고 말이다. 아니, 조명을 약간만 밝히거나 적당한 밝기로 맞추 거나 눈이 부실 정도로 밝게도 조절할 수 있는 조광기처럼 작동한 다고 보는 게 더 낫겠다. 어떤 DNA 분절DNA segment (유전자)이 얼 마나 활성화되는가는 그 분절의 후성유전적 상태에 달려 있고, 그 상태는 그 분절이 처한 맥락 등의 요인에 달려 있다.
이런 정의는 유전자 및 유전자의 작용을 바라보던 관점에 상당히 급진적인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려준다. 전통적 관점에서는 우리가 어떤 유전자를 갖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 관점에 따르면 당신의 눈이 파란 것은 파란 눈과 관련된 유전자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유방암과 관련된 유전자를 갖고 있다면 유방암이 발병할 위험성이 높다는 뜻이다. 그러나 후성유전의 정 의에 따라 생각해보면, 이런 일들을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다. 유전자의 활동 정도가 다양한 환경에 따라 변화한다는 점 을 감안하면,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DNA가 무엇을 하는지다. 유전자의 스위치가 '꺼질 수 있다면 그 유전자를 갖고 있는지 아 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후성유전학의 관점에서 볼 때 특정 유전자를 가진 것은 열쇠 하나를 가진 것과 비슷한 일이며, 딱 맞는 열쇠구멍이 없다면 그 열쇠는 있어도 무용지물이라는 말이다. 벤저민 프랭클린의 말을 인용해보자면, 그런 유전자는 “광산에 묻혀 있는 은"과 같아서 별 의미가 없다.

- 후성유전의 작동 방식을 아주 잘 보여주는 예로 '잘 놀라는 쥐들의 사례'를 들 수 있다. 몬트리올의 어떤 과학자들은 아주 주 목할 만한 연구에서 어미 쥐의 행동이 새끼 쥐의 스트레스 반응 조 절을 담당하는 일부 유전자의 활동에 변화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새끼를 핥아주고 털을 다듬어주는 데 많은 시간을 쏟은 어미 쥐는 그 행동으로 새끼 쥐의 특정 유전 자들을 효과적으로 '고', 이 유전자들이 켜진 결과 새끼 쥐는 스 트레스가 심한 일에도 여유롭게 반응하는 성체 쥐로 자랐다. 헌신 적이지 않은 어미 쥐의 새끼는 스트레스에 훨씬 건강하지 않은 방 식으로 반응했다. 사람의 신경계도 쥐의 신경계와 매우 유사한 방 식으로 스트레스에 반응하기 때문에 이 발견이 지닌 의미는 대단 히 중요한 것으로 인정된다.
- 일단 우리는 DNA가 맥락의 영향을 받으며 환경이 DNA에 중요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은 알게 됐다. 하지만 DNA와 맥락이 어떻게 기계적인 방식으로) 함께 작동하여 현재의 우 리를 만들어내는지를 알아내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이미 1960년대 중반 즈음 일부 발달생물학자들은 유전자가 환경 요인의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50년이 지난 지금도 우 리는 환경이 어떻게 우리 몸속 분자들에 영향을 미치고 유전자와 협력하여 우리를 형성하는지 이제 막 어렴풋이 알아가는 수준이 다. 앞으로 이 책에서는 그 모든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몇 가지 예를 들어 살펴볼 것이다.
- 자신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후성유전적 이상 때문에 생긴 질병에 시달리면서 후성유전에 관해 알게 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 다. 후성유전 현상은 암 외에도 몇몇 자가면역질환 그리고 프레더 윌리증후군과 엔젤만증후군 등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질환에 도 연루된 것으로 알려졌다. 조현병이나 양극성장애(조울증) 등 몇 몇 정신장애도 후성유전적 이상과 연관이 있다. 그런가 하면 학습 및 기억 형성, 우리가 잠들고 깨어나게 하는 하루 주기를 만들어내 는 것 등 일상적인 기능에서 담당하는 역할 때문에 후성유전을 알 게 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후성유전의 대물림이 진화에 관한 현재 생물학자들의 이론, 즉 신다윈주의 혹은 '현대' 종합설이라 불리 는 이론에서 갖는 의미 때문에 후성유전을 중요하게 여길 것이다. 지난 60년 동안 생물학에서 진행된 거의 모든 연구의 밑바탕을 이 루는 신다윈주의 종합설은 우리가 살면서 획득하는 형질, 즉 경험 의 결과로 얻게 되는 형질은 절대 유전될 수 없다는 주장을 견지한 다." 하지만 후성유전의 대물림 현상이 발견되면서 그 주장이 사 실과 어긋난다는 것이 밝혀졌고, 따라서 생물학의 기본 견해 일부 를 재고할 수밖에 없다. MIT의 과학사 및 과학철학 교수인 이블린 폭스 켈러에 따르면 "그 사실이 발견되고 유전학에 통합되면서 주 류 유전학의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 아마도 후성유전학은 질병 치료법의 개발, 구체적으로는 후성유전적 표지를 표적으로 하는 식이요법이나 약물요법 개발 분 야에서 가장 중요하게 적용될 것이다. 예컨대 현재 후성유전학 분 야에서는 아동기에 경험한 트라우마와 관련된 극심한 스트레스 반응을 효과적으로 치료할 '맞춤 의약품'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연 구가 진행 중이다. 이런 치료법이 발견된다면 그야말로 획기적이 고 기념비적인 일이 될 것이다. 행동 후성유전학의 이런 다양하고 흥미진진한 의미에 관해서는 뒤에서 더 살펴볼 것이다.

- 후성유전학의 등장
새 배아가 어떻게 이렇게 작동할 수 있는지 알아내기까지 는 수십 년이 걸렸지만, 오늘날 우리는 드리슈가 발견한 현상을 가 능하게 하는 것이 후성유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의 선구적인 연구 이후, 우리는 아주 어린 배아의 세포들이 '다능성' 세포임을 알고 있다. 즉, 이 배아세포들 각각은 간세포, 피부세포, 뇌세포 등 몸을 구성하는 서로 무척이나 다른 다양한 세포 중 어떤 세포로도 발달할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머리를 만드는 데 필 요한 자원과 꼬리(그리고 신체의 다른 모든 부위)를 만드는 데 필요 한 자원 모두가 어린 배아를 이루는 모든 세포 각각에 분명히 존재 하며, 이 세포들을 일컬어 이른바 배아줄기세포라고 한다. 이 세포 들이 다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서로 다른 세포 속에서 서로 다른 DNA 분절들(발달 자원들)이 활성화되거나 비활성화됨으로써 그 각각의 세포가 결국 서로 다른 종류의 세포로 발달하게 하는 후 성유전 과정이, 생물 발생의 핵심임을 의미한다. 후성유전이 우리 몸속에서 하는 일 가운데 가장 근본적이고도 중요한 역할은, 처음 에는 서로 구별되지 않는 똑같은 줄기세포들이 각자 독특한 형태 와 기능을 갖춰가며 다양한 세포로 성숙하게 만드는 것이다.
- 드리슈의 연구에서 나온 중요한 통찰 하나를 꼽자면, 세포의 발달은 그것이 처한 맥락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다. 완전히 똑 같은 세포라도 다른 상황에 두면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발달할 수 도 있다는 말이다. 어느 줄기세포 하나를 그냥 두면 그것이 독립적 인 한 사람으로 발달할 수도 있지만, 바로 그 세포를 다른 세포에 붙여 두면 예컨대 우리 뇌 속에서 정보를 처리하는 세포인 뉴런으 로 발달할 수도 있다. 태아가 자궁 속에서 발생 과정을 거치는 동안 우리의 뇌와 심장(각자 고유한 뇌세포와 심장세포들을 지녔다)은 바로 이런 식으로, 원래는 정확히 똑같았던 줄기세포로부터 분화된다.
이처럼 발달은 세포와 맥락의 상호작용에 달려 있다. 세포들이 하는 어떤 작용은 그 세포 속에 들어 있는 것 때문이고, 또 어떤 작용은 세포 밖에 있는 것 때문이다. 표현형(이 말이 세포의 특징 을 일컫는 것인지 전체 사람의 특징을 일컫는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을 결정하는 것은 내부에 있는 것 또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부와 외부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방식이다. 노벨상 수상자인 크 리스티아네 뉘슬라인 폴하르트가 2006년에 잘 요약한 것처럼, '세 포질'이라는 세포 속 물질은 “환경으로부터 신호와 정보를 받는데, 이 환경에는 이웃한 세포들도 포함된다. 이 정보는 이어서 유전자 로도 전달된다. (...) 이렇듯 한 세포의 운명은 세포질과 외부 영향 력 둘 다에 의존한다."

- 좀 어처구니 없지만, 대부분의 서로 다른 스플라이싱 산물은 한 사람의 서로 다 른 세포 유형 사이에서 발견되지만, 어떤 차이는 개인과 개인 사이 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정말 믿기 어렵지만 이런 발견은 험프리 보가트와 프랭크 시나트라의 정확히 똑같은 유전자가 뭔가 다른 일을 했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최근의 데이터는 선택적 스플라이싱이 경험에 따라 유도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예컨대 새로운 환경을 학습할 때 쥐의 뇌세 포들은 특정 단백질을 만드는 특정 DNA 분절을 사용하여 그 경 험을 기억으로 만든다. 그런데 쥐들이 전기 충격에 노출되면, 마 치 징벌 같은 이 경험을 환경과 결부시켜 기억을 형성하는 동안 바로 그 전에 사용한 것과 똑같은 DNA 분절을 사용하여 다른 종류 의 단백질을 만든다고 한다. 그러니까 DNA 분절 하나, 즉 유전 자 하나로 특정 경험에 반응해서는 특정 산물을 만들고, 그와 약간 다른 종류의 경험에 반응해서는 또 다른 산물을 만든다는 말이다. 따라서 후성유전학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더라도 맥락과 무관하게 항상 특정 표현형만을 초래하는 유전자가 존재한다는 말은 미심 쩍어 보일 수밖에 없다.
1999년에 생물학자들은 선택적 스플라이싱이 우리 DNA 가운데 많아야 3분의 1 정도의 전사 과정에서 일어날 거라고 생각 했고, 당시에는 그것도 꽤 높은 비율처럼 보였다. 하지만 알고 보 니 이건 심하게 과소평가한 수치였다. 2003년에 한 연구팀은 “인 간의 멀티 엑손 유전자 중 적어도 74퍼센트에서 선택적 스플라이싱이 일어난다""라고 결론지었고, 그로부터 5년 후의 여러 연구 는 선택적 RNA 스플라이싱이 "실제로 인간 유전자의 보편적 특 징"22임을 보여주었다. 연구소에 따라 인간 유전자의 92퍼센트23 내지 95퍼센트24에서 선택적 스플라이싱이 일어난다고 밝힌 것 이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다. 성숙한 RNA 중 어떤 것은 하나 의 DNA 가닥 상에서 서로 꽤 멀리 떨어진 DNA 분절들로부터 만 들어진 둘 이상의 RNA 전사물이 이어 붙어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 보다 더 놀라운 건, 현재 분자생물학자들이 서로 완전히 다른 두염 색체에서 추출된 RNA 전사물들을 스플라이싱하여 하나의 단백질 부호화 서열을 만들 수도 있음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ENCODE 프 로젝트를 이끄는 과학자들은 부분적으로는 이런 현상의 발견 때 문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유전체 전체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DNA 서열들에 의해 부호화되는 이런 유전자 산물에는, 유전 자를 '하나의 위치(즉 염색체상의 특정 자리)'로 보는 고전적 개념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 "

- '유전자'를 정의하려는 최근의 시도들은, 유전체가 "생명이 있는 존재를 위한 운영 체제" 28 같은 것이라는 생각으로까지 나아 갔다. 이 직유를 따른다면 유전자를 컴퓨터 과학자들이 사용하는 일종의 '서브루틴'으로 정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유전자를 정의하려는 시도 역시 ENCODE 프로젝트 이후에는 사그라들 수밖에 없었다. 물론 ENCODE팀도 자신들만의 (그리 직관 적이지는 않지만) 새로운 정의를 내놓았는데, "유전자란 잠재적으 로 중첩될 수 있는 기능적 산물들의 일관된 집합을 부호화하는 유 전체 서열들의 연합체"라는 것이다. 어쩌면 다소 불명료한 이 정 의가 결국.... 최종적인 정의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로서 는 정통한 생물학자들의 공동체에서 모든 구성원을 만족시키는 방식으로 '유전자'라는 단어를 정의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지 아직 알 수 없다.

- 가장 잘 연구된 히스톤 변형은 아세틸기라는 원자 무리와 연 관된다(그림 6.1) 16 히스톤 메틸화는 히스톤에 메틸기가 부착되는 현상이듯, 히스톤 아세틸화는 히스톤에 아세틸기가 부착되는 과 정이다. 히스톤 아세틸화와 DNA 메틸화는 기본적으로 정반대의 효과를 낸다. 히스톤 아세틸화는 아세틸화된 히스톤 근처에 있는 DNA 부분이 열려서 접근 가능해지게 만든다. 따라서 DNA 메틸 화가 일반적으로 DNA를 접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으로 여겨지 는 반면, 히스톤 아세틸화는 유전자 활성화와 관련된다. 이 아세틸 화 과정이 직접 영향을 미치는 것은 DNA가 아니라 히스톤이지만, 그래도 히스톤 아세틸화는 유전자의 발현 증가와 연관된다. 그리고 히스톤 아세틸화는 거의 항상 유전자 활성화와 연관되기 때문 에, 앞으로 이 책에서 자주 이 과정을 만나게 될 것이다.
DNA 메틸화이든 히스톤 변형이든, 이 과정들은 DNA의 특 정 분절에만 영향을 미치고 나머지 다른 분절에는 영향을 주지 않 는다. 그러므로 염색질의 서로 다른 각 부분은 각자 독립적으로 '열리'거나 '닫힐 수 있다. 따라서 어떤 부분들은 읽힐 수 있는 상 태가 되는데 다른 부분들은 전사 장치에서 아예 숨겨진 상태로 남기도 한다." 이런 방식으로 후성유전적 변형 시스템은 특정 유전자로부터만 단백질 생산을 증가시키는 식으로 정밀하게 유전자 발현을 조절한다.
아마도 DNA 메틸화와 히스톤 변형 사이의 가장 중요한 차 이는 DNA 메틸화가 훨씬 더 안정적이라는 점일 것이다. 히스톤 변형과 달리 DNA 메틸화는 유전체에 표지를 남길 수 있어서 한 세포의 표현형이 그 유기체의 평생에 걸쳐 유지될 수 있다. 이처 럼 장기간 지속 가능하다는 점에서 DNA 메틸화는 '후성유전의 프 리마돈나'라 불린다. 물론 히스톤 변형도 유전자 조절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DNA 메틸화와 비교하면 훨씬 가변적이다. 두 경우 모두 그 과정의 효과는 염색질의 조성을 바꾸고 그럼으로 써 유전자 활동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 가령 당신에게 천 개의 세포가 있고, 그 모든 세포에는 접근 가능하며 따라서 연관된 단백질을 마음껏 만들 수 있는 특정 유전 자가 있다고 상상해보자. 이 경우 세포들은 단백질을 아주 많이 만 들어낼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포들 모두가 유전자를 억제했다면, 단백질을 아주 조금만 만들어낼 것이다. 그러나 만약 5백 개의 세 포는 유전자에 접근할 수 있고 나머지 5백 개의 세포는 접근할 수 없다면, 이 세포군은 모두가 활성화된 세포군이 만들어낸 것과 모 두가 침묵화된 세포군이 만들어내는 것의 중간 정도 되는 양의 단 백질을 만들 것이다. 이런 식으로 유전자가 정말로 '전부 아니면 무'의 양자택일적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하더라도, 유전자 활성화 에는 단계적인 정도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 2005년, 마드리드 소재 스페인 국립암센터는 전 세계의 공 동연구자들과 함께) 일란성 쌍둥이 40쌍의 후성유전적 상태에 관한 중요한 연구 보고서를 발표했다. 연구자들은 이 쌍둥이들의 유전 체 전체에서 일어난 DNA 메틸화와 히스톤 아세틸화를 모두 검토 하여 젊은 일란성 쌍둥이들이 서로 극히 유사한 후성유전적 표지 패턴을 지니고 있음을 발견했다. 하지만 쌍둥이들이 나이 들면서 각자 삶에서 서로 다른 경험이 쌓일수록 그들의 후성유전적 상태 도 서로 달라졌으며, "나이가 더 많고, 서로 다른 생활방식을 영위 하며, 함께 보내는 시간이 줄어든" 쌍둥이에게서는 유전체 전체 에 나타난 DNA 메틸화와 히스톤 아세틸화에서 현저한 차이의 증 거가 보였다. 이 연구에 담긴 의미는 살면서 겪은 경험들이 DNA 에 '표시'를 남기며 이 표시들이 우리의 유전체가 발현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2005년 이후로 다른 일란성 쌍둥이 연구들도 진행되었지 만, 모두 같은 결론을 내놓은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두 건의 연구 는 일란성 쌍둥이들이 서로 다른 후성유전 프로필을 갖고 태어나 며, 어떤 경우에 그 차이는 쌍둥이의 태내 환경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고했다. 게다가 한 연구는 마드리드 연구와 달리, 출 생 시점에 존재한 후성유전의 차이가 나이가 들수록 증가하지 않 았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최소한 다섯 건의 연구는 DNA 메틸화 패턴이 나이가 들면서 분명 변화했음을 발견했다. 그러므로 일란 성 쌍둥이의 후성유전 프로필이 출생 시 정말 다르다고 하더라도 스페인 국립암센터의 연구가 제시했던 경험이 유전자가 하는 일 에 영향을 미친다는 견해는 여전히 유효하다.

- 여왕님의 식사와 그 후성유전적 효과를 논하기 전에 우선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 일'이라는 말과 '결과의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요인'이라는 말 사이의 차이를 짚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이 런 상황, 그러니까 A 먹이를 먹으면 일벌이 되고 B 먹이를 먹으면 여왕벌이 되는 상황에 직면하면, 먹이 하나만으로 일벌에게 꽃가 루 바구니와 벌침이 발달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싶어진 다. 결국 모든 벌은 유전적으로 동일하고 벌들의 환경에서 유일한 차이는 먹이뿐이니 말이다. 하지만 A 먹이가 단독으로 꽃가루 바 구니를 발달시킨다는 말이 사실일 가능성은 없다. 만약 내가 갑자 기 암꿀벌 애벌레를 일벌로 키운 먹이를 먹기 시작한다고 해도 내 다리에 꽃가루 바구니가 발달할 리는 없으니 말이다! 꽃가루 바구 니가 생기는 것은 먹이와 꿀벌의 유전체 사이의 상호작용 때문이 다. 그러므로 여왕벌과 일벌의 차이는 먹이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지만, 그 먹이 자체가 단독으로 벌들의 행동이나 표현형을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여기서 이 점을 짚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이 유는, 차이를 만드는 것이 이 예시의 먹이처럼 환경 요인일 때 어 떤 특징을 초래한다는 것과 특징의 차이를 설명할수있는 요인이라는 것이 서로 다른 일임을 머릿속에 새겨두기가 더 쉬울 듯해서다. 상 황이 반대여서 차이를 만드는 것이 유전자라면, 우리는 이 상황의 차이를 놓치고서 유전자만이 원인을 제공할 능력을 지녔다고 가 정하기 쉽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 유전학자가 X라는 질병이 있 는 모든 사람에게는 존재하지만 그 병이 없는 사람에게는 존재하 지 않는 유전자 하나를 발견했다고 상상해보자. 이 경우, 많은 사 람이 단독으로 그 병을 초래하는 유전자가 발견되었다고 결론지으려 할 것이다. 하지만 새롭게 발견된 이 유전자가 그 병의 표현 형을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이 유전자가 환경 요인과 무관하게 그 표현형을 초래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실 섭식이 단독으로 한표 현형의 발달을 초래할 수 없듯이 유전자 역시 그럴 수 없다. 정말 복잡하지만, 유전 요인도 환경 요인도 독립적으로 표현형을 초래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먹이가 꿀벌의 몸에 미치는 영향 연구 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전반적인 교훈은, 각각의 특징들이 현재 와 같은 상태를 갖춘 것은 환경적 원인과 유전적 원인 둘 다 때문 이라는 것이다.
먹이가 꿀벌에게 중요하다는 건 분명하다. 암벌의 생애 중 애벌레 초기 단계에, 일벌은 각자의 머리 꼭대기에 있는 샘에서 분비되는 로열젤리라는 물질을 애벌레들에게 먹인다. 이렇게 사흘을 먹인 뒤 보모 벌들은 대부분의 발달 중인 꿀벌의 먹이를 다른 '일꾼 먹이'"로 바꾸지만, 여왕이 될 애벌레들에게는 엄청난 양의 로열젤리를 계속 공급한다. 계속 로열젤리를 먹는 암컷 애벌레는 여왕벌로 분화하고, 이들은 남은 긴 생애 동안, 자신들의 쌍둥이 자매들이 (그리고 대부분의 자손까지) 죽은 뒤로도 오랫동안 계속 로 열젤리를 먹는다.
이 과정에 관해서는 아직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지만, 계속되는 연구로 그 이야기가 더 명확히 규명되기 시작 했다. 로열젤리 안에 들어 있는 어떤 단백질이 암컷 애벌레가 여왕 별로 분화되는 데 이바지하는 호르몬 농도를 높이는 것으로 보인 다. 하지만 어떻게 특정 동물이 먹는 한 가지 단백질이 그것을 먹지 않는 경우와 그토록 다른 모습으로 발달하게 만드는 것일까? 10년 전, 발달 중인 여왕벌과 일벌의 유전자 발현을 검토하던 연구 자들은 암벌들이 동일한 유전체를 공유하지만 여왕벌이 될 운명 인 애벌레들은 일벌이 될 애벌레들과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자신 들의 유전체를 사용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발견은 섭식 요인 이 애벌레에게 유전자 발현을 바꾸는 영향을 미쳤을 수 있고, 그럼 으로써 다른 경로를 따라 발달이 추진되도록 했을 가능성을 암시 했다.
사실 지금은 거기서 놓치고 있던 고리가 바로 후성유전이라 는 것이 명백해졌다. 과학자들이 특수하게 설계한 분자들을 직접 주입함으로써 후성유전적 상태를 조작하자 애벌레들은 꼭 로열젤리가 풍부한 먹이를 먹은 것처럼 확실히 여왕벌로 발달했다." 결 정적으로 이 연구가 증명한 사실은 여왕벌이 되려면 일반적으로 일벌들에게서 메틸화되어 있는 DNA가 탈메틸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이 꿀벌 퍼즐에는 아직도 다 맞춰지지 않은 조각들 이 남아 있다. 예컨대 로열젤리에 들어 있는 특정 단백질이 만들 어내는 후성유전 효과가 직접적인 방식인지 간접적인 방식인지는 여전히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확실한 한 가지는 섭식이 후성유전 메커니즘을 통해 유전자 발현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꿀벌의 몸과 행동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 후성유전적 변형의 중요성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유전자 전사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알아야 한다. 전사는 '전사인자'라 는 분자들이 DNA의 '조절 부위'라는 곳에 달라붙을 때 시작된다. 조절 부위 자체도 DNA 분절이므로 조절 부위는 전사인자와 '결 합할 수 있는, 다시 말해 전사인자가 부착될 수 있는 특별한 뉴클 레오타이드 염기서열로 이루어져 있다. 전사인자가 조절 부위에 결합하면 그 부위와 관련된 유전자의 전사가 시작된다. 그러므로 조절 부위라는 이름은 아주 적절하다. 각 조절 부위가 특정 유전자 의 발현을 조절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물론 조절 부위들이 항상 자신이 조절하는 유전자들 근처에 있기만 하다면 상황이 훨씬 단순 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어떤 조절 부위들은 조절하는 유전 자 가까이에 있지만 일부는 DNA 가닥 상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기도 하다. 놀랍게도 어떤 염색체에 있는 유전자들은 다른 염색 체상의 조절 부위와 짝을 이뤄 조절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때로는 한 염색체에 있는 조절 부위가 완전히 다른 염색체에 있는 유전자 의 활동을 조절하기도 한다는 말이다.'
이 정도로는 충분히 복잡하지 않다는 듯, 자연선택은 전사인자와 조절 부위를 단순한 열쇠와 자물쇠와 같은 방식으로 만들 지 않았다. 즉, 하나의 열쇠가 단 하나의 유일한 자물쇠를 열 수 있 고 하나의 자물쇠가 단 하나의 유일한 열쇠로만 열리는 식과는 다 르다는 말이다. 오히려 상황은 몇 개의 열쇠가 몇 가지 자물쇠를 열 수 있고 몇 개의 자물쇠가 여러 종류의 열쇠로 열리는 것과 더 비슷하다. 현재 생물학 교과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하나의 유전자는 다양한 전사인자들과 결합하는 여러 DNA 조 절 부위에 의해 조절될 수 있다. 반대로 하나의 전사인자는 유 전체의 여러 부위에 부착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여러 유전자의 발현을 조절한다
- 문제를 더 복잡하게 하려는 건지, 일부 전사인자들은 어떤 DNA 가닥 위에서 서로 가까이 있을 때 상호작용하기도 하는데, 이 상호작용은 유전자가 전사되는 방식에 한층 더 영향을 미친다. 다시 한번 교과서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힌트를 찾아보자.
유전자의 조절 부위는 유전자 발현을 위한 일종의 통합 센터로 생각할 수 있다. 세포들은 서로 다른 자극들에 노출되면 서로 다른 전사인자들을 합성함으로써 그 자극에 반응하며 (...) 특 정 유전자가 전사되는 정도는 추정컨대 [그 유전자의 조절 부위 혹은 부위들에 존재하는 전사인자들의 특정 조합에 달려 있는 듯 하다.
- 히스톤 아세틸화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일반적으로 유전자 발현을 활성화하지만, 어떻게 그런 일을 해내는지에 관한 논쟁은 아직 계속되고 있다. 한 가지 가설은 특정 히스톤의 꼬리에 있는 특정 아미노산에 아세틸기가 더해지면 그 히스톤의 양전하 가 감소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 히스톤과 가까이 있는 DNA는 그 히스톤에 '자기적으로 덜 끌리게 되고, 이렇게 DNA가 히스톤 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전사인자들이 접근하기가 더 쉬워져 RNA/단백질 생산 과정이 개시된다는 것이다. 또 다른 가설은 아 세틸기가 일종의 도킹 스테이션처럼 작용하여 그 부위로 또 다른 단백질들을 끌어들이고 그 단백질들이 염색질 리모델링에 기여한 다는 것이다.
아세틸기를 정확한 히스톤 꼬리에 있는 정확한 아미노산에 붙인다는 것이 내가 말한 것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우선 히스톤은 네 가지 종류고, 히스톤 꼬리를 이루는 아미노산도 라이신, 아르기닌, 세린 등 여러 종류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나의 히스톤 꼬리 에 있는 아미노산의 종류도 다양하다. 하나의 꼬리에 특정 종류의 아미노산이 여러 개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는데, 같은 종류라도 어 떤 아미노산을 아세틸화하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 다. 예를 들어 H3 히스톤의 꼬리에는 아세틸기가 붙을 수 있는 라 이신이 최소한 일곱 개 있으며, 각 라이신은 서로 똑같기는 하지 만 각자 다른 위치에 있다는 사실도 큰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라 이신이 몇 개 변형되는가 하는 문제 못지않게 어느 라이신이 변형 되는가도 중요하다. 현재 우리는 메틸화되는 라이신이 하나인가 둘인가 셋인가에 따라 서로 다른 생물학적 결과가 만들어질 수 있 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므로 후성유전 표지들이 만들어내는 구체적인 효과는, 어느 히스톤이 변형되는가(H3인가, H2A인가), 어느 화학물질기가 일으키는 변형인가(아세틸기인가, 메틸기인가), 어느 아미노산에 결 합되는가(H3의 꼬리 9번 위치에 있는 라이신인가, 같은 꼬리의 27번 위 치에 있는 라이신인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아미노산이 변형되는가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단메틸화인가, 삼중메틸화인가) 등에 따라 결 정된다. 그리고 분명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이 벌어 지고 있을 것이다. 다양한 변형의 조합에서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은, 아세틸화 같은 과정들이 닥치는 대로 일어나게 그 냥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 현재 행동 후성유전학자들 사이에서는 생애 초기 경험이 다양한 뇌 영역 속 광범위한 유전자의 발현에 영향을 미치며, 그 경험을 한 이후 여러 해가 지난 뒤에도 영향을 감지할 수 있다는 합의가 형성되고 있다. 쥐의 스트레스 반응에 관한 미니 연구팀의 발견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와 포유류 친척들이 진화를 통해 갖춰온 스트레스 반응 시스템은 매우 복잡 해서, 그 모든 것이 작동하는 방식에 관해서는 아직 알아내야 할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경험이 몸과 뇌, 마음에 미 치는 영향에 관한 우리의 생각을 후성유전학 연구가 바꿔 놓으리 라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의 스트레스 시스템이 경험에 반응한다는 것이 당연한 일로 여겨진 지도 수십 년이 되었고, 경험에 반응하는 것은 애초에 스트레스 시스템이 존재하는 이유다. 이 장에서 논한 설치류 연구 는, 경험의 영향이 꼭 실시간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새로운 증 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오히려 삶의 어느 시점에 한 경 험이 이후 다른 시점에서 유전자 발현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 이 는 어떤 후성유전적 변화들이 사실상 이전 경험을 간직한 기록 역 할을 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경험은 우리 몸속으로 들어 올 수 있을 뿐 아니라,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그 안에 새겨 질 수도 있다.
- 후성유전적 변형은 자연이 기억 시스템을 창조할 때 선택했을 법한 바로 그런 종류의 메커니즘이다. 어찌 보면 후성유전적 변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항상 기억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분화된 세포가 다른 세포들과 구별되는 특징을 갖는 이 유는 후성유전 상태가 반영된 특유의 유전자 발현 프로필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분화된 세포들이 분열할 때는 항상 그 특유의 후성유전 상태를 각자의 '딸세포'에게 전달함으로써 딸 세포들도 모세포와 동일한 유형의 세포가 되도록 한다." 예컨대 간세포가 분열하여 두 개의 새로운 간세포를 만들 때, 간세포 안 에서는 어떤 유전자들이 활성화되어야 하고 어떤 유전자들은 활 성화되면 안 되는지에 관한 정보를 보존하는 방식으로 세포분열이 이루어진다. 이는 바로 간에서 새로 만들어진 세포는 모두 반드시 간세포가 되고, 우연히라도 위 내벽에서 위산을 분비하는 세포 를 만드는 일이 (이건 계획에서 대단히 어긋난 일일 테니까) 절대 벌어 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새 세대 세포들 속 후성유전적 표지는 앞 세대 세포 속에 존재하던 정보를 그대로 보유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세포의 '정보 보유'는 일종의 세포 '기억'으로 볼 수 있다.
물론 후성유전적 표지가 운반하는 세포 '기억'과, 우리 뇌가 사실 정보와 자전적 정보를 유지하는 데 사용하는 심리적 기억 사 이에는 중요한 차이점들이 있다. 하지만 자연선택은 아마추어 실 험가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자연선택은 세포분열의 맥락에서 정보를 보유하기 위해 쓸 수 있는 시스템을 이미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 점을 잘 활용해 다른 맥락에도 그 시스템을 가져다 쓸 가능 성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식의 전략은 자연선택에서는 워낙 전형 적이어서, 진화생물학자들은 이 전략에 따로 굴절적응 exaptation 이 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제는 고전이 된 한 논문에서 스티븐 제 이 굴드와 엘리자베스 브르바는 굴절적응을 현재는 적응에 유리 한 특징이지만 "자연선택이 현재의 역할을 위해 만든 것은 아닌" 특징이라고 정의했다." 그들이 제일 먼저 제시한 예는 깃털이다. 오늘날의 새들에게 날개는 날 수 있게 해주므로 적응에 유리하다. 하지만 깃털은 날지 않는 일부 공룡들에게도 있었다. 그래서 어떤 이론가들은 깃털이 원래는 비행이 아닌 다른 용도를 위해, 아마도 공룡의 체온 조절을 돕기 위해 진화했으리라고 주장했다. 깃털은 다른 이유로 나타났지만 이후에는 비행을 위한 용도로도 사용될 수 있으니 굴절적응의 전형적인 예가 되었고, 자연선택이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화한 특징을 전혀 다른 문제에 직면했을 때도 재사용하는 방식의 실례를 보여주었다.
진화의 작동 방식이 이러하므로 세포 '기억'과 인지 행동적 기억은 단순히 유사한 것 이상일지도 모른다. 실제로는 동일한 세 포 시스템에서 진화한 결과 중요한 특징을 공유하게 된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사실 세포분화를 조절하는 일에 관여하는 몇 가지 분자 메커니즘은 기억의 저장에서도 사용되기 때문에, 20 어쩌면 기억을 정말로 굴절적응 중 하나로 보는 게 가장 적합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신경생물학자 데이비드 스웨트는 동료 조너선 레븐슨과 함께 기억 형성의 후성유전 메커니즘을 다룬 2005년 논문에서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뇌가] 장기기억 을 형성할 때 유전체의 후성유전 표지 붙이기 메커니즘을 가져다 썼다는 결론을 제안한다." 그 개념을 자세히 풀어 설명하는 와중 에 그들은 이런 질문을 던졌다.
발달 과정에서 정보를 저장하는 데 중요한 기본적 후성유전 메 커니즘은 성인기에 행동으로 표출되는 기억들을 저장하는 데도 중요할까? 우리는 이 메커니즘이 성인의 신경계에 보존되어 있 으며, 신경계가 그 메커니즘들을 행동 기억의 형성에 활용하기 위해 가져다 쓴 것이라고 생각한다. 

- H.M. 이 초기 기억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은 새로운 기억 형성에 관여하는 뇌 영역과 기억 저장에 관여하는 뇌 영역이 다름 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해마는 새로운 기억의 형성에서 결정적으 로 중요하지만, 기억이 장기적으로 저장되는 장소는 아니라는 말 이다. 오히려 해마에 의지해 형성된 기억은 응고화라는 별도의 과 정을 거치면서, 최종적으로 저장되는 장소인 대뇌피질의 영역들 에서 장기적인 의탁 상태로 넘어가며,  몇 주 뒤에는 기억을 유지 하는 데 해마의 참여는 필요하지 않다.

- 생쥐의 기억 만들기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스웨트와 동료들은 쥐들의 장기기억 형성에 히스톤 아세틸화가 관여하는지 알아보려 했을 때, 해마 세포의 핵 속에 존재하는 히스톤을 살펴봐야 한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기억 형성 과정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그 전에 쥐의 뇌에 새 기억을 심는 효과적인 기술을 갖춰야 했다. 군소나 쥐나 마찬가지다. 쥐들에게 자기 할아버지의 기억에 관해 그냥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연구자들이 설치류의 기억을 평가하는 데 사용하는 주된 방법은 '맥락적 공포 조건화 패러다임'이다. 듣기에는 끔찍해도(그리고 나처럼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실제로도 끔찍하다), 목적을 달성하는 데는 아주 유용하다. 이 실험 패러다임의 기반이 되는 개 념은 파블로프의 고전적 조건화에서 파생된 것으로 비교적 단순 하다. 쥐 한 마리를 중립적이고 무섭지 않은 '훈련실'에 집어넣고 그 안을 탐색하게 둔 다음 몇 분 뒤 전기 충격을 가한다. 이 쥐의 기 억을 검사하려면 24시간 뒤 훈련실에 다시 들여보내기만 하면 된 다. 만약 훈련실(맥락)에 들어갔을 때 쥐가 공포를 암시하는 경직 반응을 보이면, 이 쥐는 그 훈련실과 전기 충격을 연관 짓는 일종 의 기억을 형성한 것이 분명하다. 레븐슨과 동료들은 실험한 쥐들 의 해마 세포 속 염색질을 검토하여, 이런 종류의 연상 기억을 형성하는 과정에 히스톤 아세틸화 및 그와 연관된 염색질의 구조 변 화가 수반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니까 후성유전적 사건은 생애 초기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과 생체시계를 조절하는 일 에 관여하는 것처럼 기억 형성 과정에도 관여한다는 이야기다.
연구자들은 또 다른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해 설치류의 학습 과 기억의 후성유전적 효과를 테스트했다. 한 방법은 쥐들에게 미 로 속을 달리게 하는 것인데, 이를 통해 과학자들은 쥐들의 공간 기억을 연구할 수 있다. 또하나는 잠재적 억제라는 방법이다. 여러 면에서 이 방법은 맥락적 공포 조건화와 아주 비슷해 보인다. 동물 들을 중립적인 공간에 집어넣고, 충격을 가하고, 그런 다음 그 공 간에 재노출한다. 하지만 잠재적 억제에서는 쥐들이 뭔가 다른 것 을 학습한다.

- 건강과 질병의 발달상 기원
20세기가 끝날 무렵 영국의 임상역학자 데이비드 바커는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종합하여 오늘날 DOHaD, 즉 '건강과 질병의 발달상 기원developmental origins of health and disease'이라고 알려진 패러다임을 만들었다. 그는 출생 시 체중이 낮은 아기들이 "관상 동맥성 심장질환 및 연관 질환, 뇌졸중, 고혈압, 인슐린 비의존성 당뇨병의 발병률이 높은" 어른으로 성장한다는 잘 입증되어 있던 사실에서 출발하여, DOHaD를 출생 전 자궁 내 경험이 표현형에 미치는 장기적 영향을 만들어내는 방식을 연구하는 분야로 확립 하는 데 일조했다. 이 연구의 핵심에는 사람들이 생애 초기에는 가 소적이며 발달 환경에 잘 반응한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바커 는 이런 현상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신체가 발달기에 가소성을 유지하는 것이 진화의 관점에서 유리하다고 볼 충분한 이유가 있다. 가소성은 모든 환경에서 동일 한 표현형이 만들어지는 경우보다 각자의 환경에 더 잘 맞는 표 현형을 만드는 일을 가능하게 한다. (...) 자궁에서 사는 동안 동 물이나 사람이 자기 어머니에게서 '기후에 대한 예고'를 듣고, 그 예고를 통해 자신이 살아갈 세계의 유형에 대비할 수 있는 것은 가소성 덕분이다. 영양 상태가 저조한 임신부 어머니는 뱃 속 아기에게 아기가 곧 혹독한 환경으로 들어가리라는 신호를 보낸다. 아기는 그 신호에 반응하여 몸의 크기를 줄이고 대사를 변화시키는 식으로 적응하며, 이는 아기가 출생 후 식량 부족에도 살아남는 데 도움이 된다. 이런 식으로 가소성은 한 종이 한 세대 안에서 단기적 적응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한다'
그러므로 임신한 여성의 음식 섭취를 제한하는 것이 자녀 에게 장기적 영향을 초래하듯이, 임신한 포유동물에게 고지방 먹이" 혹은 특정 영양소가 결핍된 먹이를 주는 것 역시 장기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특히 자손이 태어난 후 만난 환경이 엄마가 임신 중에 경험한 환경과 다른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이 경우, 태아는 자신이 만나게 될 거라 '예상한 환경에 걸맞았을 적응 방 식으로 발달했지만, 실제로 만난 환경에서는 그 적응이 결과적으 로 부적응이 된다. 임신기 동안 겪었던 환경과 태어난 후 살게 된 환경 사이의 '발달 불일치"가 네덜란드 겨울 기근 동안 엄마 배 속에 있었던 아이들의 특징적 경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섭식 조절로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유전자 발현 조절 메커니즘의 발견은 음식과 건강의 관계에 관심 있던 연구자들에게 연구의 봇물을 열어주었다. 현재까지 몇몇 연구가 비타민 B군과 콜린 외에 다른 식이 인자들이 내는 후성유전적 효과를 보여주었다. 예 를 들어 인도 요리에서 즐겨 쓰이며 생강과에 속하는 향신료인 강 황의 특정 성분은 히스톤에 아세틸기를 전달하는 단백질들(그러 니까 앞 심층 탐구 장에서 이야기한 히스톤 아세틸 전이효소)의 활동을 억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유사하게 녹차 등 다른 몇몇 식품은 DNA에 메틸기를 전달하는 단백질들의 활동을 억제할 수 있다. 그밖에 알코올이나 아연처럼 우리가 섭취하는 다른 물질들 도 SAM 형성에 사용되는 몇 가지 메틸기에 영향을 줌으로써 DNA 메틸화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발견들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다. 예를 들자면, 어미 생쥐가 섭취한 알코올이 생쥐 배아의 후 성유전적 상태(그리고 결국 성체가 된 후의 표현형)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여준 연구는 임신부가 술을 너무 많이 마실 경우 인간 태 아에 어떻게 태아 알코올 스펙트럼 장애 fetal alcohol spectrum disorder, FASD가 생기는지에 관한 우리의 이해에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 그리고 이 분야의 연구는 기근, 알코올, 영양부족 같은 자극들의 파괴적인 영향만이 아닌 그 이상을 밝혀낼 잠재력도 지니고 있다. 즉, 특정 식품의 잠재적인 이점에 눈뜨게 할 뿐 아니라 다양한 질 환의 치료법을 찾는 연구자들에게 필요한 정보와 계속 나아갈 힘 을 줄 수 있다.
- 중력, 공동우물, 안전한 집, 특정 유전체 등 이 모든 요인은 사람이 어떻게 발달하는지에 영향을 주므로, 그 원천(부모, 공동체 의 다른 구성원들, 자연)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발달에 중요한 자원이 다. 그리피스와 그레이의 관점에서 볼 때, 자식 세대는 항상 자신들 에게 제공된 맥락 안에서 발달하며, 이 맥락이 그들의 표현형 발달 에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자식들 역시 성장하여 번 식할 때는 자신의 성공적인 발달에 기여한 것과 같은 종류의 맥락 안에서 자기 자식들을 기르게 된다. 이런 세대 간 환경의 대물림을 이해한다면 경험이 만드는 후성유전의 효과 중 일부가 어떻게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확실히 넘어갈 수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 우리의 형질 중 그 무엇도 '유전적'이 기만 한 '기반'을 지닌 것은 없으므로, 다른 종류의 유전과 구별되 는 유전의 한 유형으로서 '경성' 유전이란 개념은 이미 무너졌다. 유전의 개념은 단 하나이며, 그것은 유전적 발달 자원과 비유전적 발달 자원 모두의 대물림을 포함한다." 다윈도 인정했듯이, 특정 형질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한결같이 복제된다면, 그 일이 어 떻게 일어났든 간에 그 형질은 자연선택의 대상이며 진화적으로 의미를 지닌다. 그러한 형질은 비유전적 요인들에 의존해 발달한 것이라 해도 '유전될 수 있다.
- 이 관점에서 보면 매우 실질적인 의미에서 모든 형질은 '획득 형질이다. 왜냐하면 그 형질들은 모두 접합자 안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발달 과정을 통해 후천적으로 획득하는 것이기 때문이 다. 그렇다면 이런 의미에서, 부모가 '획득한 형질을 자녀가 '물려 받을 수 있다는 발견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특히 부모가 경험했 던 발달상의 사건들과 유사한 일을 자녀가 경험하는 경우라면 더 욱 그러한데, 이런 종류의 일은 말 그대로 항상 일어난다! 그러니 라마르크의 생각은 바이스만과 20세기 생물학자 대부분이 우리에 게 심어준 믿음만큼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
실제로 자녀가 자기 부모를 닮게 되는 방식에는 몇 가지가 있으며, 후성유전적 표지가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 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경우에 따라서 후성유전의 효과가 생식계열을 통해서도 대물림된다는 탄탄한 증거가 존재한다." 하지 만 미니의 연구에서 관찰된 후성유전적 효과는 그와 다르다. 쥐들 이 태어날 즈음이면 그들의 생식세포는 오래전에 체세포와 분리 된 상태이며, 따라서 신생아 쥐들에게 핥기와 털 고르기가 미치는 후성유전적 효과, 즉 쥐들 뇌의 (체)세포 속에 있는 DNA에 영향을 주는 것은 정자나 난자를 통해 대물림될 수 없다. 그러나 다음 장 에서 이야기할 연구들은, 유아기에 핥기와 털 고르기를 받은 쥐들 의 뇌 속에 있는 관련 DNA가 어미의 뇌 속 DNA와 후성유전학적으로 유사하다는 것을 보여줄 것이다. 그러므로 후성유전적 표지가 생식계열을 통해 대물림될 수 없다고 해도, 후성유전적 효과는 '대물 림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진화에서는 대물림이 어떻게 이루어 지는가와는 무관하게 형질들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대물림 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경험이 만든 후성유 전적 효과가 생식계열을 통해 대물림되든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대물림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 지는지는 상관없이, 현재 분명한 것은 후성유전적 효과가 세대에서 세대로 대물림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 부모로부터 자녀에게 전달되는 대물림의 특별히 흥미로운 한 예는 경험의 후성유전적 효과가 생식세포의 DNA에는 후성 유전적 영향을 입히지 않으면서도 '유전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앞서 10장에서 보았듯이 새끼를 많이 핥아주고 털을 골라주는 암 컷 쥐(즉 높은 LG 어미)가 키운 딸 쥐는 자신도 LG가 높은 어미로 자라는데 이때 그 딸을 키운 어미가 생모인지 양모인지는 상관 없다. 그 효과는 높은 LG 양육자에게 받은 딸의 경험에서 나온 것 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러한 양육 스타일의 세대 간 전달에 필 요한 것은 행동 메커니즘이다." 행동을 매개로 한 후성유전적 대 물림에 관한 또 다른 연구에서는 어떤 후성유전적 상태가 부모 의 행동에 영향을 주며, 부모의 이 행동이 이어서 자녀에게 영향을 끼쳐 동일한 후성유전적 상태를 갖도록 유도한다는 것이 밝혀졌 다." 이런 상황은 여러 세대에 걸쳐 이어질 패턴을 설정한다고 볼 수 있다.
- 이 현상을 탐구하기 위해 프란시스 샹파뉴가 이끄는 연구팀은 생모가 아니면서 LG가 높은 어미 쥐 또는 낮은 어미 쥐에게 양육된 암컷 쥐의 뇌 속 에스트로겐 수용체를 연구했다. 28 에스트 로겐 수용체는 암컷 포유류의 주된 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이 모 성 행동 자극을 포함해 제 기능을 수행하게끔 하는 필수 요소다. 29 에스트로겐과 LG는 둘 다 모성 행동에 영향을 주므로, 샹파뉴 연 구팀은 LG가 에스트로겐 수용체 생산에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세웠다. 예상대로 그들은 높은 LG에 노출된 쥐들에게 더 많은 에스트로겐 수용체가 생성됐음을 발견했다. 핥기와 털 고르 기를 많이 받은 쥐들은 연구에서 살펴본 뇌 영역에서 에스트로겐 수용체를 만드는 DNA에 메틸화가 상대적으로 덜 일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핥기와 털 고르기는 암컷 새끼 쥐들에게 뇌 에서 에스트로겐 수용체 수를 증가시키는 후성유전적 효과를 만 들어내고, 이렇게 증가한 수용체는 이 새끼 쥐들이 어미 쥐가 되었 을 때 자기 새끼를 더 많이 핥아주고 털을 골라주게 유도했다. 이런 방식으로 높은 LG 표현형은 다음 세대로 효과적으로 전달됐다." 어미의 모성 행동 자체가 새끼의 모성 행동을 유발하는 DNA 분절 의 메틸화에 영향을 줌으로써 그 행동이 세대를 넘어 유지되도록 한 것이다(그림 18.1). 생식계열은 어떤 영향도 받지 않았음에도, 딸 쥐들이 결국 제 어미 쥐와 같은 메틸화 패턴과 행동 패턴을 지니게 되므로 이는 자식의 경험에 의존하는 세대 간 후성유전 효과의 예 라고 할 수 있다.
- 30년 전, 생물학자들의 '상식'은 이랬다. 첫째, 후성유전적 표지는 세대와 세대 사이에서 완전히 지워지므로' 세대 간 후성유 전적 대물림은 불가능하다. 둘째, DNA 서열정보만이 부모에게서 자녀에게로 대물림될 수 있다. 셋째, 따라서 '경성' 유전만이 유일 한 유전이다. 이런 상식에는 라마르크주의를 향한 바이스만의 불 신이 잘 담겨 있다. 바로 부모는 자기가 살면서 한 경험의 결과를 자녀에게 물려줄 수 없다는 믿음이었다. 그러나 1997년에 생쥐의 생식계열을 통한 후성유전적 대물림이 발견된 뒤 " 이 이야기에는 대대적인 수정이 필요해졌다.
- DNA 메틸화는 경험에서 영향을 받는 것"과 생식계열을 통한 대물림이 둘 다 가능하므로, 이제 획득 형질이 유전될 수 있 다는 라마르크의 생각을 다시 검토해봐야 할 때다. 대부분의 진 화생물학자들처럼 리처드 도킨스는 "모든 증거가 이 개념이 한마 디로 틀렸다는 걸 시사한다"라며 획득 형질이 유전될 수 있음을 힘주어 부인했다. 만약 '획득'이라는 말을 꼭 꼬집어 바이스만이 생쥐에게 가했던 꼬리 절단 같은 것을 가리키는 뜻으로 정의한다면, 도킨스의 말이 옳다. 한 세대가 경험한 절단이 다음 세대에도 나타 나리라고 생각할 이유는 전혀 없다(다음 세대도 앞 세대가 한 것과 똑 같이 절단을 경험하지 않는 한 말이다). 그러나 지금쯤이면 ‘획득’과 '유전(대물림)'이라는 단어를 정의하는 방식이 단 한 가지가 아니 라는 것과 다른 정의는 다른 결론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명백히 이해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유전의 넓은 정의, 즉 어떤 표현형이 이어지는 세대들에서 한결같이 복제되는 한 그 표현형은 '유전' 것이라고 보는 정의를 채택한다면, 다양한 경험이 유전되는 표현 형에 기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어떤 대물림, 이를테면 LG가 높은 어미 쥐의 딸 쥐들 역시 높은 LG 어미 쥐가 되는 대물림, 또는 인간의 내장에 건강을 증진하는 박테리아를 제공하는 유 형의 대물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넓은 정의가 필요하다. 좁은 미로만 대물림을 정의한다면 이런 특징들이 어떻게 가족의 내력 으로 이어지는지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심지어 대물림은 필히 생식계열을 통해야만 한다는 좁은 의미의 정의를 채택한다 하더라도, 획득 형질이 유전될 수 있 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다음 장에서 살펴보겠지만, 일부 표현형은 조상의 표현형에 기여한 것과 같은 경험을 후손들이 하지 않 았을 때조차 후손에게 대물림되기 때문이다. 획득 형질의 유전을 덮어놓고 부인하는 것은 '획득'과 '유전'을 극단적으로 협소한 방식 으로 정의할 때만 가능한 일이며, 이 솔직히 이렇게 협소한 정의는 수많은 세대 간 영향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21세기 생물학이 유전 전반에 관한 사고를 어디까지 수정해야 할지에 대해 아직은 현대 이론가들의 합의가 이루어지 지는 않았지만, 유전자가 결정한 형질만 유전될 수 있다는 생각 을 철저히 고수하는 사람에게 거대한 격변이 몰아치고 있음은 분 명하다.

- 진화에 관해 생각할 때조차 어느 표현형의 발달이 생식계열을 통해 전달된 정보에 의한 것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을 것 이다. 예를 들어, 일본의 원숭이들이 조상들에게서 고구마 씻는 행동을 어떻게 물려받았는지 이해하려 할 때 생식계열을 고려해야 할 이유는 별로 없다. 하지만 사회적 학습을 통해 전달되는 이런 행동도 진화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띨 수 있다. 고구마를 씻는 원 숭이들은 바다에 더 익숙하며, 먹이로 해양 생물을 더 많이 (더 다 양하게) 먹고, 수영 같은 해양 활동을 하게 될 가능성이 크며, 이 런 행동을 한다면 그중 한 하위집단이 이전에는 서식한 적 없던 섬 을 새로운 서식지로 삼고 원래 무리와는 떨어져 새로운 삶을 시작 하게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일종의 번식적 격리 현상이 발생 할 것이며, 그 현상은 진화상의 결과를 초래한다고 알려져 있다." 부모와 조부모에게 배우는 새로운 행동들도 유전자 변이 못지않 게 진화적 변화를 추동할 잠재력을 지니고 있으므로, 매우 중요한 의미에서, 세대 간 표현형의 전달을 일으키는 메커니즘이 무엇인 지 반드시 알아야만 진화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돌아보면 우리는 이를 예상했어야 한다. 다윈은 DNA뿐 아니라 그것이 유전 의 메커니즘에서 담당하는 역할에 관해 아무것도 몰랐지만, 진화 에 관한 올바른 이야기를 알아냈으니 말이다.
반면 형질에 영향을 미치는 일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질이 어떻게 발달하는지가 매우 중요하다. 부모의 목숨을 앗아간 비만을 미리 피하도록 어느 건강한 청년을 돕거나 학대적 양육의 세대 간 대물림을 멈추고 싶다면, 조상의 행동이 어떻게 후손들에 게 다시 나타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파괴적인 생물학적 또는 심리적 상태에 시달리는 사람을 도울 방법을 찾기 위해 과학자들 은 그러한 상태를 초래하는 메커니즘에 계속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 정도로 상세한 수준에서 이해해야만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발달에 개입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여러분도 분명히 느끼겠지만, 나는 우리가 후성유전학(유전학과 심리학 그리고 그사이 모든 단계의 분석들 역시 말할 것도 없이)을 더 깊이 연구하도록 응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학자들은 이러한 분자 수준의 정보에 관한 지식을 기 반으로 어떻게 하면 발달에 유익한 조작을 쉽게 할 수 있을지에 집 중해야 한다. 한편 우리는 생식계열을 통해 전달되는 분자적 정보 한 가지 (그것이 DNA 염기서열 정보든 조상의 경험 때문에 변화한 후성 유전적 정보이든)가 우리의 신체나 마음에 관한 무언가를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다는 생각에는 회의적인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
- 전반적으로 저메틸화는 종양 형성을 유도하지만, 놀랍게도 특정 유전자들의 과메틸화도 암과 연관된다. 얼핏 느껴지는 것과 달리 이는 이치에 닿지 않는 일은 아니다. 정상적인 세포에는 세포 증식에 기여하는 유전자뿐 아니라, 보통은 암을 저지하는 단백질 생산을 돕는 이른바 종양억제유전자도 들어 있기 때문이다. 종양 억제유전자를 억제하는 것은, 위험한 과정의 속도를 더 높이게 되는 것이니 자동차의 브레이크를 고장 내는 일과 비슷하다. 그러니 까 종양억제유전자가 과메틸화되고 따라서 발현되지 않는다면, 종 양발생 확률이 더 높아진다. 암 발생 초기에 후성유전적 변화가 중 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실제로 저술가 중 적어도 한 사람은 발 암 요인을 "후성유전적 조절을 변화시키는 무엇이라고 정의했다."
- 텔로미어는 구조상 메틸화될 수 없지만 텔로미어가 감고 있는 히스톤은 아세틸기를 더하거나 떼어냄으로써 변형될 수 있다.  이렇게 텔로미어의 기능은 후성유전적 사건에서 영향을 받는다. 과학자들은 포유류의 세포에 존재하며 히스톤에서 아세틸 기를 제거할 수 있는 시르투인6(sirtuin-6, SIRT6)라는 단백질을 발견 했는데, 아세틸기 제거는 텔로미어의 기능에 중요한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분자에서 아세틸기를 제거할 수 있는 단백질이 시르 투인6만은 아니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단백질들은 상당히 많으며 이 부류를 탈아세틸화효소라고 총칭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탈 아세틸화효소는 히스톤뿐 아니라 다른 분자들에서도 다소 무차별 적으로 아세틸기를 제거한다." 시르투인의 특별한 재주는 텔로 미어와 관련된 히스톤들만 콕 집어 탈아세틸화한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시르투인6는 텔로미어가 정상적으로 기능하게 해주는 방식으로 히스톤을 탈아세틸화한다. 우리가 이를 아는 이유는 실험적으로 시르투인6을 고갈시킨 인간 세포에서 텔로미어 손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르투인6는 그 후성유전적 작용을 통해 수명을 조절하는 일에 관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실험 연구들은 유전자 조작으로 시르투인이 결핍되었으나 나머지는 정상인 생쥐들에게서 일찍 노화의 징후가 나타난다 는 것을 밝혀냈는데, 이 발견은 시르투인이 젊음을 부여하는 속 성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일 수 있다. 그리고 최근에 그야말로 세상 을 놀라게 한 연구가 있었다. 이스라엘의 한 연구팀이 유전자를 조 작하여 시르투인6을 과발현시킨 생쥐를 만들었더니 아니나 다를 까, 이렇게 유전자가 조작된 수컷 생쥐는 일반 생쥐에 비해 유의미 하게 수명이 더 길어졌다. 연구자들은 "[시르투인6]에 의한 포유류 수명 조절은 (...) 노화 관련 질환 치료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라 고 결론지었다. 27. 28 분명 이는 대단히 흥미로운 연구다. 

- 만성적 사회적 패배 스트레스 프로토콜에서는 수컷 실험생쥐를 매우 공격적인 생쥐와 함께 두는데, 그러면 실험 생쥐는 전 형적으로 달아나려 시도한다. 그리고 달아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 면 보통은 비명을 질러대다가 결국 굴복하는 상태가 된다. 공격적 인 생쥐와 10분 동안 함께 두었다가 그 우리 안의 분리된 칸으로 실험 생쥐를 옮기는데, 여기서 이 생쥐와 공격자 생쥐를 분리하는 것은 구멍이 뚫린 투명한 플라스틱 칸막이뿐이다. 다음 24시간 동 안 실험 생쥐는 자기를 괴롭혔던 생쥐가 바로 옆 칸에 있는 걸 보 고 듣고 냄새를 맡으며 만성적 스트레스 상태로 지낸다. 다음 날에 도 이 전체 과정을 반복하는데, 이번에는 괴롭히는 생쥐가 새로운 생쥐로 바뀌어 있다. 이어서 열흘 연속으로 매일 같은 과정을 반복한다. 이 실험 프로토콜은 사람의 우울증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몇 가지 증상과 유사한 행동을 보이는 '패배자' 동물을 만들어 낸다. 
텍사스주 댈러스의 나디아 찬코바 연구팀은 이 처리법을 사용한 획기적인 연구에서 참담한 경험을 한 지 4주가 지난 패배 자생쥐에게서 꺼낸 해마를 검토했다. 연구팀은 해마 조직의 염색 질에서 특정 유전자들과 관련된 특정 히스톤들의 특정 위치에 더 많은 메틸기가 있음을 발견했고, 이로써 사회적 경험이 포유류뇌 에 장기적인 후성유전의 효과를 남길 수 있다는 생각을 뒷받침해 주었다. 연구자들은 이 결과에 관해 이렇게 썼다. "우리의 발견은 히스톤 과메틸화가 해마에서 스트레스로 유도된 잘 변하지 않을 분자 수준의 흉터를 나타내는 것일 수 있음을, (...) 또한 억제된 유 전자들의 히스톤을 탈메틸화하는 데 효과적인 물질을 찾아내면 그것이 새로운 항우울 물질일 수 있음을 시사한다. "

- 전자에 관한 은유는 부정확하다
후성유전학 연구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유전체에 관해 사용하는 몇몇 은유가 우리의 형질을 초래하는 것에 관한 왜 곡된 관점을 심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적 후성유전학 연구 시 기보다 훨씬 전부터 많은 이론가가 이런 은유들에 경종을 울렸으 며, 후성유전학 데이터는 그들의 주장을 한층 더 보강한다. 노스캐 롤라이나대학교 그린즈버러 캠퍼스의 심리학자 티머시 존스턴은 25년도 더 전에 그러한 염려를 표하며 "혼동으로 가는 길은 설득 력 있지만 부정확한 은유들로 포장되어 있다"라고 썼다.
존스턴이 우려를 표현한 구체적인 은유는 노벨상 수상자인 콘라트 로렌츠가 제시한 은유인데, 로렌츠는 "자연선택이 제공하 는 (...) 정보[는] (...) 유전자 청사진으로서 유전체에 부호화되어 있다"라고 생각했다. 이를 비판하며 존스턴은 이 은유가 “발달에 관여하는 유전자의 성격을 심각하게 [오도한다]"고 강력히 주장했 다. 하지만 청사진 은유는 계속해서 인기를 누렸고, 그러자 다 른 비판자들도 이 논쟁에 가담했다.28 그래도 인기가 누그러들지 않자 뉴욕시립대학교의 과학철학자 마시모 필리우치는 2010년에 청사진 은유가 "한탄스러울 정도로 부적절하며 적극적으로 오해 를 유도한다"라고 썼다. 2
물론 2010년 즈음에는 몇몇 다른 이론가들도 비판적 관점 을 취하면서 다른 좋은 은유들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한 과학자는 2006년에 "유전체는 청사진이라기보다 뜨개질 도안 이나 조리법에 훨씬 더 가깝다"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안타깝게 도 '조리법' 은유도 청사진 은유보다 그리 나을 게 없는 것이, 여전 히 부정확하게" 맥락과 별개로 사용할 수 있는 정보를 자연선택 이 우리 유전체 안에 부호화해서 저장해두었다고 암시하기 때문 이다. 후성유전적 표지가 경험의 영향을 받는다는 발견 때문에 그 러한 은유들은 한층 더 쓸모없어졌다.
또 하나 '정보 은유' 역시 유전체가 발달 사건이 일어나는 순서를 통제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인 것처럼 암시한다. 이 은유는 적어도 유전체가 유전체 이외의 것에서 들어오는 입력들에 반응 한다는 사실은 받아들이는 것이니 청사진이나 조리법 은유보다는 나아진 편이다. 하지만 다른 면들에서는 이 역시 부족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은유의 최근 버전 중 하나는 우리가 유전자를 "거대 한 운영 시스템 속 서브루틴들"로 생각해야 한다고 제안한다.33 그 러나 ENCODE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에 따르면 ENCODE 의 데이터는 "유전자가 거대한 운영 시스템에서 단순히 불러낼 수 있는 루틴이라는 은유와 맞지 않으며"3" 따라서 이 은유 역시 타당 하지 않다. 현재 우리가 후성유전학에 관해 알고 있는 바를 고려할 때, 이러한 은유의 공백을 채워줄 새로운 비유가 있을까?
후성유전학을 다룬 아주 훌륭한 책"에서 네사 캐리는 DNA를 대본과 유사한 것으로 생각하는 게 좋다고 제안한다.
예를 들어 《로미오와 줄리엣>을 생각해보자. 1935년에 조지 큐커 감독은 영화판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레슬리 하워드와 노 마 시어러의 연기를 연출했다. 그로부터 60년 후, 배즈 루어먼 감독은 또 다른 영화 버전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클레 어 데인스의 연기를 이끌었다. (...) 두 편 다 셰익스피어의 대본을 사용했지만, 두 영화는 완전히 다르다. 출발점은 같지만 결과는 전혀 다르다.

- 신다윈주의 종합설은 수정돼야 한다
후성유전학 연구에서 얻은 둘째 교훈은 신다윈주의 진화론(엄격히 유전자 변이 빈도의 관점에서만 진화를 정의하는 이론)은 적 응적 형질을 만드는 일에서 발달이 하는 역할을 무시하기 때문에 생물학의 통합 이론으로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 서 잊지 말아야 할 아주 중요한 점이 두 가지 있다. 첫째, 여기서 필 요한 수정은 일부 지적설계론자의 주장과 달리 창조론의 관점 을 인정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후성유전 연구는 사람이 다른 영 장류와 무관하다는" 신빙성 없는 관념 그리고 생물학적 시스템은 "환원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하기 때문에 다윈주의의 관점으로 는 설명할 수 없다는 터무니없는 관념을 전혀 뒷받침하지 않는다. 또 하나, 신다윈주의에 필요한 수정을 실행하고 나면 사실상 우리 는 다윈이 원래 제시했던 개념들과 일치하는 상태로 돌아가게 된다는 점이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간한 지 80년쯤 지났을 무 렵, 다윈의 개념들을 전통적 유전학과 통합하려 시도하던 신다윈 주의 종합설의 설계자들은 유전자만의 관점에서 진화를 정의했 고, 그럼으로써 발달이라는 단순치 않은 문제는 무시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모든 적응적 형질은 발달에 의존하여 생겨나기(유 전자가 미리 정해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그러한 처사는 여러 문제의 소지를 품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발달을 배제한 유전 자 이론으로 진화를 설명하려 한 신다윈주의의 시도는 '획득한 형 질은 '유전될 수 없다는 가정에 근거한 것이었지만, 우리가 살펴 보았듯이 '유전된' 형질과 '획득한 형질을 칼로 자르듯 구분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다윈은 《종의 기원》에서 일부 획득 형질들이 일관적으로 세대를 넘어 대물림될 수 있다는 생각을 편하게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이므로, 다윈의 원래 관점으로 돌아가는 것이 이치에 맞아 보인다.
발달의 중요성을 반영하여 신다윈주의 종합설을 수정해야 만 한다는 생각은 최근의 후성유전학에서 증거들이 쏟아져 나오 기 전부터 있었으며, 후성유전학의 증거들은 신다윈주의 종합이 론에 수정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한층 탄탄히 해주는 것일 뿐이다. 에바 야블론카와 매리언 램은 정곡을 찌르는 논리로 이 상황을 잘 표현했다.
후성유전적 대물림은 (...) 진화론에 새로운 개념들, 현재의 신다윈주의 관점에서 보면 전복적인 개념들을 도입한다. 후성유전학보다 문화를 먼저 생각해보면 그 이유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상징적 문화에는 의심의 여지없이 늘 진화적 변화 가 일어나고 있다. (...) 유전적으로 동일한 개인들로 이루어진 세계에서조차 우리는 진화적 과정이 여러 다양한 문화를 만들 어내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문화적 변이는 적어도 어느 정도는 DNA 변이와 별개로 분리된다. 그리고 문화적 진화를 이해하려 면 변이의 이러한 자립적 측면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후성유전 의 변이에 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유전 가능한 후성유 전적 변이는 그 말의 정의상 유전자 변이와는 분리된다. 따라서 DNA 변이와는 별개로 진화에 선택될 수 있는 후성유전적 변이 들이 존재하며, 후성유전의 축에서 진화적 변화가 일어나는 일 은 불가피하다.
그러니 후성유전이 진화에 하는 기여를 한마디도 설명하지 않는 진화론은 필연적으로 불충분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수정이 필요하다. 야블론카와 램은 다음과 같이 후성유전이 진화에 관해 암시하는 의미를 요약하며 논문을 마무리했다.
후성유전학은 유전 개념을 확장할 것을, 또한 자연선택을 작동 시키는 유전 가능한 변이에 서로 다른 몇 가지 유형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유전자를 중심으로 하는 현재의 다윈주의, 즉 신다윈주의는 라마르크주의와 양립하지 않지만, 다윈주의는 그렇지 않다. 과거에는 라마르크주의와 다윈주의가 항상 상호배타적인 대안으로 여겨졌던 것은 아니며, 서로 완전 히 양립 가능하며 상보적인 것으로 인정되었다. 후성유전학의 관점에서 보면 그 둘의 관계는 여전히 그렇다. 후성유전 체계가 진화에서 하는 역할을 인정한다면 발달과 진화를 더욱 밀접히 통합하는, 더욱 포괄적이며 강력한 다윈주의 이론을 구축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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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

왜곡하는 뇌

과학 2024. 2. 11. 21:21

- 우리 뇌에 두 개의 분리된 시스템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하나는 들리는 음의 높낮이가 '무엇인지 판 단하는 '무엇 시스템 (what system)'이고, 다른 하나는 소리가 '어디에서 들리 는지를 판단하는 '어디 시스템 (where system)'이다. '무엇 시스템'으로 무슨 소리를 듣고 있는지를 결정할 때는 우세귀에 도달하는 음높이에 주의를 기울이는 한편, 비(非)우세귀가 듣고 있는 음높이에 대한 의식은 억제하 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오른손잡이는 음높이를 파악할 때, 왼쪽 귀보다는 오른 쪽 귀에 주의를 기울인다.) 반면, '어디 시스템'은 완전히 독립적인 규칙을 따르 는데, 실제로 들은 그 음이 높은지 낮은지와는 상관없이, 고음이 들리는 방향의 귀에서 지각된 음이 들린다고 판단한다.
이 모델이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 우선 오른쪽 귀가 우세한 오른손잡이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고음이 오른쪽 귀, 저음이 왼쪽 귀에 전달된 순간, '무엇 시스템'은 오른쪽 귀로 들은 고음을 듣고 있다고 판단 한다. 또한 이때, 고음이 오른쪽 귀에 제시되었기 때문에 '어디 시스템'은 오른쪽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느낀다. 곧이어 저음이 오른쪽 귀, 고 음이 왼쪽 귀에 전달되면, '무엇 시스템'은 우세귀인 오른쪽 귀에 들리는 저음을 듣고 있다고 판단하지만, 왼쪽 귀에 고음이 들리면서 어디 시스 템'의 주의를 끌어 지각된 음이 왼쪽 귀에서 들린다고 판단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연속된 음들의 패턴을 들으면, 오른쪽 귀에서 높은 음이, 왼쪽 귀에서는 낮은 음이 교대로 들리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양쪽의 이 어폰을 바꾸어 끼어도 이 지각 패턴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고, 음의 연 속이 단순한 하나의 음으로 상쇄되는 것처럼 들릴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왼쪽 귀가 우세한 (주로 왼손잡이) 청자에 대한 모델을 생각해보면, 높은음이 왼쪽 귀에, 낮은 음이 오른쪽 귀에 교대로 들려야 한다. 수 많은 실험에 의해 이 모델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옥타브 착청 현상은 심리학자들이 착각적 결합이라 부르는 인지 프로세스의 확실한 예시를 보여준다. 이러한 반복 패턴을 들을 때, 전형적인 오른쪽 우세귀를 가진 청자는 저음이 오른쪽 귀에 제시되고 고음이 왼쪽 귀에 제시되는 순간, 오른쪽 귀에 제시된 음높이와 왼쪽 귀 에 제시된 음의 위치를 결합하여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허상의 음을 지각과정에서 만들어내게 되는 것이다!
- 여기서 중요한 질문을 하나 던질 수 있다. 우리의 뇌는 왜 착청을 듣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걸까? 재생된 실제 소리 그대로 지각하지 않고, 굳이 새로운 착청을 만들어내 듣는 이유가 뭘까?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소리들은 대체로 질서를 가지고 있다. 그 리고 우리의 청각 메커니즘은 이 질서에 부합하던 청각적 경험들을 학 습하면서 앞으로 들을 소리는 어떤 패턴일지 예측하거나 가정하며 들 을 수 있게 발달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음계 착청 같은 패턴은 일상적으 로 듣는 소리의 질서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패턴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런 패턴을 들은 우리 뇌는 두 위치에서 각기 따로 도약하는 음들을 지 각하는 것이 옳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가능성이 없는 결론을 거 부하는 것이다. 그 대신 현실에서 들어봄직한 소리인, 한 곳에서 비슷한 음역의 멜로디를 듣고 다른 곳에서 다른 음역의 멜로디가 들리는 것으 로 가정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뇌의 해석에 따라 공간의 음들 을 지각적으로 재조직해 듣는 것이다.”
- 우리의 감각기관에는 수많은 정보들이 파편화된 형태로 도달한다. 지각 시스템은 그러한 정보의 단편들 사이의 연속성을 유추해서 적절하 게 틈새를 메워야 한다. 가령 우리는 보통 잎에 부분적으로 가려진 나뭇 가지를 보게 되는데, 보이는 부분들 중 어떤 것이 같은 가지로 연결되는 것인지를 유추하게 된다. 이런 추론 과정에서 좋은 연속성과 폐쇄성의 원리를 적용하는 것이다. 한 나뭇가지의 부분들 사이의 틈새를 지각적 으로 채워서 하나의 매끄러운 윤곽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그림 3>의 카니자(Kanizsa)의 삼각형 또한 좋은 예다. 그림을 볼 때 우리의 시각적 시스템은 통합된 전체로 지각하기 위해 틈새를 채우는 과정에서 착각적 윤곽이 만들어진다. 좋은 연속성과 폐쇄성의 원리에 따라 이 그림을 아래의 물체를 가리는 '흰색 삼각형'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효과로, 우리의 청각 메커니즘은 놓친 정보를 지속적으 로 복구하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번화가에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 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지나가는 교통소음들로 인해 간헐적으로 친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이다. 친구가 말하고 있는 것을 따라가기 위해 귀로 들어오는 친구 말소리의 단편들 사이의 연속성을 유추해야 하고, 놓쳤던 소리의 단편들을 채워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작업을 수행하기 위한 메커니즘들이 발달되어 왔고, 그런 메커니즘에 기초하여 쉽게 착 각을 만들어낸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실존하지 않으나 '들리는 소리에 쉽게 속을 수 있다.
- 더글러스 호프스태터(Douglas Hofstadter)는 저서 『괴델, 에서, 바흐'에서 '이상한 고리'라는 표현을 만들었는데, 이는 하나의 위계적 시스템을 이 루는 개별 수준들을 통과해서 움직일 때 처음 시작했던 지점으로 계속 해서 돌아가게 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그는 '거짓말쟁이 패러독스를 무 한히 돌 수 있는 고리의 대표적 예로 보았다.
네덜란드 화가 M. C. 에셔는 '이상한 고리'의 원리를 여러 작품에서 사용했다. 아마도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그림 4.1>의 석판화 <올라가 기와 내려가기>'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수도승들이 끊임없는 여정으 로 계단을 천천히 오르내리고 있는 것을 본다. 이 석판화는 <그림 4.2> 의 펜로즈와 펜로즈(Penrose & Penrose)가 고안한 <불가능한 계단>에 바탕 을 두고 변형시킨 것이다. 시계방향으로 각 계단은 한 계단씩 내려가게 되어 있어서 전체 계단은 끝없이 내려가는 것(혹은 올라가는 것처럼 보인 다. 우리의 지각 시스템은 이 그림이 틀림없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 면서도 이러한 해석을 고집하고 있다. 이론적으로는 그림 속 4개의 계단들에 대해 원근법을 개별적으로 적용하는 방식을 사용한다면 똑바로 이해해볼 수도 있겠으나, 우리는 결코 이런 방식으로 지각할 수 없다. 우리의 지각 시스템은 가장 단순한 해석을 선택한다. 그것이 말도 안 된 다 할지라도 말이다.
- 영화음악 작곡가 한스 짐머(Hans Zimmer)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2017년 영화 <덩케르크>를 위해서, 셰퍼드 음계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연속된 소리를 사용하였다. 그는 끊임없이 상승하는 듯한 관현악 패턴 을 만들었는데, 이는 끝없이 긴장감을 고조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끝없이 상승하고 하강하는 음계는 정서적으로도 강한 영향을 주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끝없이 하강하는 음계를 들으면 마음이 가라앉고 다 소 우울해진다고 말한다. 한번은 대형 강의실에서 이런 음계를 재생했 는데, 들려준 지 약 10초 후에 대다수의 학생들이 반복해서 고개를 내리 고 있었다. 끝없이 상승하는 음계를 들려주었을 때는 반대의 현상이 일 어났는데, 학생들은 활기가 돌았고 대다수가 에너지를 받는다고 말했다.
덧붙이자면, 반옥타브 역설은 청각뿐 아니라 시각에서 일어나는 일 반적인 지각 원리를 보여준다. 우리가 모호한 배열을 지각할 때, 우리 는 그것을 해석하여 가장 이치에 맞는 결론을 내린다. 예술가이자 퍼 즐 제작자인 스콧 킴은 <도치들(inversions)>이라는 시각 작품 시리즈를 통 해 이 지각 원리를 보여주었다. <그림 5.5>는 그중 한 작품인 <upside down(거꾸로)>인데, 이를 똑바로 보거나 거꾸로 뒤집어 보더라도 동일한 단어로 보인다! (윗줄에서 upside, 아랫줄에서 down이 보인다.) 그의 책 『도치들에 서 문자와 단어를 사용하여 만든 다른 시각적 패러독스를 함께 볼 수 있 다. "우리는 영어문자와 단어에 관한 오랜 경험에 근거하여, 우리가 가 장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이 배열을 지각적으로 맞춘다. 이러한 이유로 평소 에 영어를 많이 사용할 일이 없던 독자라면 이미지에서 글자를 찾는 데 시간이 조금 걸릴 수 있 고,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단번에 upside down 글자를 읽어낸다_옮긴이)
같은 원리로 반옥타브 역설을 들을 때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말소 리(주로 유년기에 들었던 부모님의 말소리) 음역에 대한 사전지식과 경험이 우리 로 하여금 소리 패턴을 이 음역에 따라 방향 잡게 한다. 이처럼 킴의 작 품 '도치들'과 '반옥타브 역설' 모두 우리가 지각 세계의 방향을 잡는 방식 에 미치는 하향식 처리의 힘을 보여준다.
- 마지막으로 반옥타브 역설은 '절대음감'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함의를 제시한다. 절대음감은 음이 단독으로 제시되었을 때 음의 이름을 맞힐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된다. 이 능력은 서양에서는 매우 드물다. 하지만 사람들이 반옥타브 역설을 일관성 있게 판단한다면 그들은 이미 절대음 감의 암묵적인 형태를 사용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음고류 나 음이름들에 따라 절대적으로 높거나 낮게 듣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 다. 따라서 반옥타브 역설은 사람들이 음정을 듣고 그 음이름을 말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이미 대부분의 사람이 절대음감의 암묵적 형태를 소 유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어린 아기들이 북경어에 노출되면 자연스럽게 음고와 단어를 결합하고 이를 통해 단어에 대한 절대음감'을 발달시킨다. 따라서 아기들이 음 악교육을 받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는 절대음감을 위한 뇌 회로가 이미 발달한 상태이기 때문에 성조와 함께 어휘를 습득했던 것과 유사 한 방식으로 '음에 대한 절대음감을 발달시키는 것이다. 반면, 영어 같은 비성조 언어에서 음높이를 사용하는 목적은 문법적 구조, 정서적 어조 및 운율 같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함이지, 단어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지는 않는다. 결과적으로 비성조 언어 구사자는 절대음감 습득에 서 불리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연구결과는 나의 기존 가설을 강하게 지지한다. 즉, 유아가 성조 언어를 습득할 때 모국어 성조에 대한 절대음감을 발달시키고 후 에 다른 성조 언어의 성조를 습득하듯이 음악적 음에 대한 절대음감을 습득한다는 가설이 좀 더 힘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결과는 유 아기에 음높이와 단어의 뜻을 결합하는 기회를 갖지 못한 대부분의 영 어 구사자들이, 심지어 충분히 어린 나이에도 왜 음악적 음에 대한 절대 음감을 습득하는 데 훨씬 더 어려움을 겪는지를 설명해준다.
아직까진 이 가설에 관한 증거는 단어의 의미를 결정하는 데 음높이 가 두드러지게 관여하는 '성조 언어 구사자에 한정되어 적용된다. 하지만 일본어나 한국의 특정 지역의 방언과 같은 다른 동아시아 언어에도 동일한 원리가 어느 정도 적용된다. 일본어는 구성하는 음절들의 음높 이에 따라 단어의 의미가 바뀌는 피치-악센트(pitch-accent) 언어이다. 예를 들어 도쿄 일본어에서 '하시라는 단어를 '고저'로 발음하면 '젓가락'을 의 미하고, '저고'로 발음하면 다리(橋)'를 뜻하며, 두 음절 사이에 음높이 차 이가 없으면 '모서리'를 의미한다. 한국에서는 함경도와 경상도 방언이 성조 언어 혹은 피치악센트 언어로 알려져 있다. 예를 들면, 경상남도 방언에서 단어 '손'을 저음으로 발음하면 '손자'나 '손해'를 의미하고, 중간 음으로 발음하면 신체 일부인 '손(hand)'이 되며, 높은 음이면 '손님'이 된다. 유아기에 이러한 피치악센트 언어나 방언에 노출된 사람들은 절대 음감 발생률이 비성조 언어만을 경험한 사람보다 더 높을 것으로 추측 되지만 완전한 성조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에서만큼 발생률이 높지는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비성조 언어 구사자보다 일본어 구사자 사 이에서 절대음감 발생률이 높지만 북경어 구사자들보다는 그 비율이 덜 하다고 보고되었다."
- 절대음감 습득의 '결정적 시기' 가설을 더욱 뒷받침하는 흥미로운 약 리학 연구를 소개한다. 동물 연구에 의하면 발프로에이트, 또는 뇌전증 치료에 사용되는 약물인 발프로산이 뇌의 가소성을 회복시켜서 늦은 연 령에도 결정적 시기를 다시 열어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버드 대학교 의 타코 헨쉬(Tako Hensch)가 이끈 국제 연구팀은 음악 훈련을 거의 받지 않았거나 전혀 받지 않은 젊은 남성들을 모집하여 음과 음이름을 연관짓는 훈련을 실시하였다. 발프로에이트를 복용한 집단은 플라시보를 복용한 대조군보다 음이름 맞히기를 더 잘 학습했다. 이 연구에서 발프 로에이트를 복용한 참여자가 11명, 플라시보 군이 12명으로, 참여자 수 는 적었지만 대규모 연구로 진행할 경우에도 같은 결과가 나온다면 매 우 흥미로울 것이다.

- 종종 절대음감 소유자들은 나이를 먹으면서 음이름 식별 능력이 점 차 쇠퇴하는 것을 경험하곤 한다. 이러한 경향성은 40~50세 즈음 시작 되고, 보통 매우 당혹스러워한다. 젊었을 때보다 음이 조금 높거나 조금 낮게 들리게 되는 것인데, 예를 들어 피아노의 C음을 누르면 B나 C# 음 으로 들리는 것이다. 이러한 지각 수준에서의 음고 이동 현상은 내이( 4) 조직의 변화와 관련이 있는데, 이는 노화 과정에 따른 불가피한 변화 이다.
영국 심리학자 필립 버논(Philip Vernon)은 음고 이동에 관한 자신의 경 험에 관해 상세히 묘사했다. 52세가 되었을 때 그는 젊었을 때보다 반음 높은 조(key)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 상당히 당황스러웠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특정 조마다 특정한 기분을 연관시키는 일종의 공감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죠. 저 에게 C장조는 힘있고 씩씩한 느낌이라면, C#장조는 더 음탕하 고 연약한 느낌입니다. 이 때문에 유명한 C장조 작품인 바그너 의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의 서곡이 C#장조로 연주되는 것으 로 들렸을 때, 듣기가 괴로웠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나 합창단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연주회에서 음악을 들을 때, 항상 습관적으로 조옮김을 했습니다. 즉 제 귀에 C#이나 D로 들리면 실제 음이 각각 C와 C#일 것이라 추론하는 방식이었죠. 이제 71세가 되니 음이 더 높아졌습니다. 최근에는 온음(2반음) 높은 음이나 조로 들리기 시작해서, 바그너의 C장조 서곡이 이 젠 분명한 D장조로 연주된답니다! 
- 위대한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Sviatoslav Richter)에게 절대음감은 그가 듣고 연주하는 음악에 있어서도 필수요소였다. 그는 만년에 자신의 절대음감이 변했다는 것을 알고는 충격에 빠졌다.
저는 절대음감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음악이든 듣고 연주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 청력은 점차 나빠지고 있습니다. 요즘 제게는 조가 뒤죽박죽이고, 실제 음보다 온음 높게 듣거나 때로 는 두 온음 높게 듣습니다. 예외적으로 베이스 음은 원래보다 더 낮게 들립니다. 마치 뇌가 흐물흐물 해져서 제 귀와 청각 시 스템이 조율이 안 된 것 같습니다. 저 이전에도 노이하우스와 프로코피에프도 비슷한 증상으로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프로 코피에프의 경우에는 말년에 모든 음을 3온음까지 더 높게 들 었다고 합니다. 이는 고문 그 자체입니다....
-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 정부는 미술사학자 에른스트 곰브리치(Ernst Gombrich)를 '모니터링 서비스' 감독으로 임명하여 친구와 적의 무선 송 신을 감시하도록 하였다. 당시의 기술을 고려했을 때, 일부 전송은 거의 들리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도청된 소리로부터 메시지를 유추하는 일 은 어려웠을 것이다. 곰브리치는 “청각에 대한 공리, 사색, 그리고 힌트" 라는 제목의 내부 메모에서 이러한 도청된 소리의 해석에는 듣는 이의 지식과 예상이 강한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을 했다. 그의 기록에 의하면, 'Send reinforcements, am going to advance(증원군을 보내라. 전진하겠다)'라는 긴급한 메시지를 어떤 신호원이 엉뚱하게 들은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고한다. 'Send three and four pence, am going to a dance(3, 4펜스를 보내라. 춤추러 간다) 
- 뇌가 모호한 신호로부터 의미 있는 말을 재구성한다는 또 다른 예가 있다. 바로 '사인파 음성(sine wave speech)'으로, 심리학자 로버트 레메즈 (Robert Remez) 연구팀이 제작한 것이다. 사인파 음성은 다양한 길이의 사인파 3~4개를 합성하여 만드는데 각 사인파가 자연스럽게 문장을 말 할 때 나타나는 포먼트 주파수들의 형태와 유사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만든 음원을 문맥 없는 상황에서 재생하면 그저 수많은 휘파람 소리처럼 들린다. 하지만 원래의 문장을 먼저 듣고 나서 이 사인파 음성 을 들으면, 청자가 그 순간 무슨 단어가 등장할지를 알고 듣게 되므로 우리의 뇌는 이런 휘파람 소리 같은 음원을 마치 문장을 말하는 것처럼 인식하도록 소리를 재구성한다. (여기서 포먼트(formant)란, 말소리에서 에너지가 크 게 두드러지는 특정 주파수 대역을 뜻하며, 보통 이 주파수 대역의 조합에 의해 모음을 인식하 게 된다. 사인파, 배음, 포먼트 주파수에 대한 좀 더 상세한 설명이 궁금하다면, 물리학자 에릭 헬러(Eric Heller)의 저서 『왜 우리는 우리가 듣는 것을 듣는가?」를 참고하길 추천한다.
- 그렇다면 어떻게 뇌에서 이러한 재구성이 일어날 수 있는 걸까? 고전 적 인지신경과학의 관점에 따르면 소리가 제시될 때, 소리 신호는 귀의 가장 안쪽에 있는 달팽이관에 의해 전기 신호로 변환되어 청각 경로를 구성하는 일련의 신경회로를 따라 이동하게 된다. 신경회로 각 구조의 뉴런(신경세포)들은 이 전기 신호를 이어진 상위 수준의 구조물로 전달하고 궁극적으로는 소리가 해석되는 청각피질과 연합피질로 보낸다.
하지만 재구성의 과정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다. 상대적으로 상위 구 조인 청각피질의 뉴런은 청각회로에서 더 하위 수준의 뉴런에도 신호를 보내는데, 다시 그 뉴런들은 좀 더 하위 수준의 구조로 계속 연이어 달 팽이관까지 신호를 보내기도 한다. 또한 양쪽 뇌의 뉴런들도 서로 상호 작용한다. 그래서 달팽이관에 전달된 소리에 대한 최종 해석은 정교한 피드백 루프를 포함하게 되며, 그 안에서 신호들은 수차례 변환된다. 문 제를 더 복잡하게 하기 위해 청각 뉴런들은 시각과 촉각을 비롯한 다른 종류의 감각 정보를 전달하는 뇌의 또 다른 구조로부터 신호를 받는다. 그리고 더 나아가 청각피질 뉴런들은 기억, 주의, 정서와 같은 상위 인지 과정을 구성하는 뇌 영역의 신경신호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한다.
- 청각 시스템은 매우 복잡한 상호 연결구조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청각 경로 각 단계를 거치는 소리 신호는 특정 방식(강화되거나 약화되는 방 식)으로 조정되며, 이러한 조정은 청자의 경험, 기대, 정서 상태로부터 향을 받는다. 그 결과, 의식으로부터 지각된 최종 형태를 표상하는 신경 신호는 말 그대로 '뇌 속에서 변형된 것이지만 청자는 그 변형된 형태가 '외부 세계'로부터 도달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말소리에 대한 지각은 청각뿐 아니라 시각 시스템의 입력에 강하게 영향받을 수 있다. 이러한 영향을 확실하게 입증하는 사례가 맥거크 효과(McGurk effect)'이다.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수많은 영상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영상에서 가(ga)'를 발음하는 입모양을 보여주면서 실제 소리는 '바(ba)'를 들려주면, 사람들은 가라고 지각할까? 아니면 바라고 인식할까? 일반적으로 '바' 혹은 '가'를 듣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가 혼합되어 다(da)'를 듣는다.
우리는 일상에서 소음이 있는 상황에서 입 모양으로 말을 인식해야 하는 경우를 종종 경험한다. 비슷한 방식으로 난청이 있는 사람들도 이 러한 인지과정을 거치는데, 맥거크 효과는 입술 움직임 같은 시각적 정 보를 통해 말소리를 추론해낼 뿐만 아니라, 시각 신호가 소리를 듣고 지 각하는 과정에 영향을 끼치고 심지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소리가 '들리도록'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환경이 어떠했는지 상상하는 것은 쉽지 않다. 1877년 토머스 에디슨이 축음기를 발명할 당시만 하더라도, 에디슨은 축음기가 음악을 위해 주 로 사용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속기사 없이 대화록을 받아 적거나 웅변술의 훈련과 같은 언어 기반 활동을 위해 주로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축음기가 특허를 받은 후에 기업가들은 '녹음된 음악'에 엄청 난 상업적 잠재성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음 악 산업은 급속하게 발전하였다. 19세기 후반부터 히트곡을 제작하기 위해 작곡가, 작사가, 편곡자, 출판사, 기획자가 함께 작업했다. 틴 팬 앨 리(Tin Pan Alley)라 불렸던 이 새로운 사업은 뉴욕을 중심으로 어빙 베를 린(Irving Berlin), 조지 거슈윈(George Gershwin), 콜 포터(Cole Porter) 등의 작곡 가들이 참여했다. 작사·작곡을 위한 가이드북도 나왔는데, 노래를 기억 하기 쉽게, 또한 계속 귓가에 맴돌도록 단순하고 친숙하게 만들도록 권 고했다. 1920년 어빙 베를린은 성공적인 대중음악을 쓰기 위한 몇 가지 규칙을 제안했다. 그 규칙 중 일부는 다음과 같다.
제목은 단순하고 쉽게 기억되어야 하며 노래 안에 효과적으로 '주입해야' 한다. 벌스(verse; 절)와 코러스(후렴부) 전반에서 반복해 서 강조되어야 한다. ... 노래는 전적으로 '단순'해야 한다.
또 어빙 베를린은 "새로운 선율 같은 건 없다"라고 말하며, 효율을 아 는 작곡가들은 "옛 악구를 새로운 방식으로 연결해서 새로운 곡조로 들 리도록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새로운 노래는 친숙한 요소를 포함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 녹음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대중음악에서는 반복성이 훨씬 더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1970년대 힙합 디제이들은 동일한 레코드를 카피하 여 두 개의 턴테이블에 두고는 둘을 옮겨가며 특정 음악 구간을 무한히 반복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 그 후 일정한 패턴을 반복하는 루프 (Loops) 테크닉은 랩 음악에서 악기 반주의 기본 요소가 되었다. 후에 디 지털 사운드 레코딩의 발달로 루프는 샘플링 기술을 사용하여 제작되었 고 그 결과 오늘날 가장 인기 있는 음악의 핵심 요소가 되었다.
물론 대중음악의 반복성 경향이 전적으로 기술적 진보로부터 시작되 었다고 볼 수는 없다. 음악이론가 엘리자베스 마굴리스(Elizabeth Margulis)가 저서 「반복에 관하여』에서 설명하듯, 대중음악은 음악의 반복에 대한 인간의 욕구를 자극했을 것이다. 사실 민족음악학자들은 수십 년 동안 반복이 모든 문화에서 나타나는 음악의 근본적인 특징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논리 선상에서 음악에서 반복을 갈망하는 경향성은 우리의 마음 속에서 음악의 단편을 다시 재생하도록 유도하여 '맴도는 음조'를 만들 게 할 수 있다.
- 몇 년 전, 매우 기억하기 쉽고 성공적인 킷캣(KitKat) CM송 Gimme a Break(김미 어 브레이크)>의 작곡가 마이클 A. 레빈에게 CM송 성공 비법 에 관해 '외우기 쉬운 속성 외에 무엇이 있는지 물었다. (이 곡은 보통 가장 기 억에 남는 CM송 중 하나로 불리고, 여전히 그 힘이 강력하여 10대 귀벌레 중 하나로 꼽힌다.) 레빈은 탄 토스트(Burnt Toast)"라는 팟캐스트에서 그가 스폰서들과 상의 하기 위해 탄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 CM송을 작곡했던 것 대해 설명했 다. 레빈은 나에게 보낸 이메일에 다음과 같이 썼다.
제가 피상적으로 느꼈지만 명확히 표현하지 못했던 그 무언가에 관해서, 말콤 글래드웰은 귀벌레의 고유한 속성인 '들러붙 음'이 어느 정도의 '오류(wrongness)'에 달려있다고 표현하더군요. 무언가가 올바르지 않더라도 의식 수준에서 인식될 정도가 아 니라면, 잠재의식이 그것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과정을 계속해 서 반복하게 됩니다. 저는 이런 종류의 약간의 오류, 즉 낮은 수준의 오류를 '인식적 치아 사이에 낀 옥수수 조각 같은 것'이라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 문장은 말콤이 자기 웹사이트에 인용할 만큼 좋아하는 문구입니다.
이는 '상위'와 '하위' 문화 모두에 해당이 됩니다. 모나리자 미소 의 감정적 모호함, 베토벤 5번 교향곡 도입부에서의 리듬적 모호함(셋잇단음표인지, 8분음표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탈출한 노예를 돕는 것이 윤리적인지에 관해 논쟁하는 허클베리 핀의 아이러니, 백여 편의 소네트에 걸쳐 자신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묘사하던 셰익스피어와 그의 한 시구 "그대를 여름날에 비교할까요(Shall I compare thee to a summer's day)", "윈스턴 담배는 담배가 그렇듯 맛 이 좋습니다(Winston Tastes Good Like A Cigarette Should)”에서 “as" 대신 "like"라는 구어체를 사용해서 1950년대 문법학자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
킷캣 광고음악은 켄 슐드먼(Ken Shuldman)의 “기브미어 브레이 크(Give me a break! '그만 좀, 적당히 좀 해!'라는 뜻)"라는 광고 문구가 아 니었다면 그렇게 효과적이진 않았을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킷캣 바는 조각내서 먹는 과자였고, 일종의 말장난을 만든 것이죠. “기브미어브레이크가 원래는 부정적인 표현이라는 중요 한 사실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짜증 섞인 경고와 같은 튕기는 듯한 짧은 어조였다가 이내 초콜릿 한 조각을 달라는 요 구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약간의 음악적 부딪힘이 있는 데 선율의 첫 네 음은 상행하는 5음음계를 내포하고 뒤이어 하 행하는 첫 음은 '블루' 음인 플랫 7도음으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틀린 음 아냐?'라고 소리칠 정도는 아니지만,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라고 다시 생각해 볼 만큼 어색하거나 이상 한 소리이죠.
물론 이러한 모든 분석은 사후에 한 것입니다. 광고 대행사에서 열린 미팅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제 머릿속에서 그 음악을 작곡했는데, 사실 그때 제 손에 들고 있던 켄이 만든 가사들은 두 페이지 분량이었지만, 그중 “Give me a break!(그만좀 해!)"와 "Break me off a piece of that KitKat Bar(킷캣바 한 조각만 떼주라)"가 제가 사용한 전부입니다."

- 왜 하필 청각이 손상되었을 때 음악 환청이 시작될 확률이 높은 걸까? 정상 수준의 청력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 귀에 도달한 소리는 신경 자극으로 변환되어 뇌의 청각 중추로 이동한다. 이곳에서 정보를 분석, 변환, 해석해 소리가 지각된다. 뇌의 감각 영역이 정상적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감각 기관으로부터 입력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입력정보가 부족하면 뇌가 스스로 심상을 만들면서 환청이나 환각을 경험한다.
이런 견해를 방출 이론(release theory)'이라고 한다. 방출 이론은 19세기 영국 신경학자 헐링스 잭슨(Hughlings Jackson)이 제안한 뇌 '조직화 이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잭슨에 따르면 뇌는 계층적으로 조직된 단위 (뉴런 집단)들로 구성되어 있고, 상위 계층의 단위들은 하위 계층 단위들의 활동을 억제(inhibit)한다. 하위 계층 단위들이 일반적인 억제 신호를 받지 못 하면 하위 계층 단위들의 활동이 방출된다. 환청을 설명하기 위해 이 이론이 변형되어 사용되긴 하지만, 사실 환청의 경우에는 이와 반대로 상위 중추가 억제를 담당하기보다는 보통 하위 단위인 귀로부터의 입력 이 뇌의 감각 영역의 활동을 억제한다. 귀가 입력을 제대로 받지 못하면 뇌의 활동에 대한 억제가 풀려 환청이 일어날 수 있다. 또한 감각 경로 가 손상될 경우에도 억제가 풀릴 수 있는데, 이것이 뇌손상 또는 약물 이 환청을 야기할 수 있는 이유라 여겨진다.

- 청각장애가 있는 노인들 사이에 일어나는 음악 환청은, 시력을 잃은 노인들에게 일어나는 환각과 몇 가지 공통적 특징이 있다. 스위스의 박 물학자이자 철학자인 샤를 보네(Charles Bonnet)는 1760년 자신의 할아버지 샤를 룰린(Charles Lullin)의 시력이 떨어지고 있을 때 나타났던 현상들을 처음으로 묘사했다. 한번은 두 손녀가 방문해서 할아버지와 함께 있는 동안, 할아버지의 눈앞에서는 멋진 옷을 차려입은 젊은 남성 둘이 나타났다가 잠시 후 사라졌다고 한다. 이 외에도 이 노인의 눈에서는 아름답게 두건을 쓴 여인들, 작은 입자들의 무리가 비둘기 떼로 변하는 것, 공중을 떠다니는 회전하는 바퀴, 물체가 엄청나게 커지거나 극단적 으로 작아지는 환각이 보였다고 한다. 시력이 떨어진 다른 노인들은 아 름다운 풍경, 정성껏 차려입은 대규모의 남녀 무리, 건물, 차량, 기이하게 생긴 동물, 다른 특이한 물체들을 보았다고 보고했다.
환각적 반복시'는 지속적이거나 반복적으로 보이는 이미지들의 환 각을 나타내는 용어로, 이 증상은 때로 뇌손상에서 비롯된다. 예를 들어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산타클로스를 본 한 환자는 이후 또 다른 파티에 서 자기 주변의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흰색 수염을 보았다고 한다. 또 다른 환자는 누군가가 공을 던지는 장면과 같은 일련의 동작을 구간 반 복되는 비디오 영상처럼 몇 분에 걸쳐 계속해서 봤다고 한다. 하지만 귀 에 박힌 곡조나 음악 환청과 달리, 이러한 맴도는 영상은 몇 분을 넘는 환각을 일으키지는 않고, 매우 드물게 발생한다.
- 음악 환청은 특히 측두엽(귀 윗부분의 뇌)에서 비정상적으로 뇌가 활성화할 경우 발생할 수도 있다. 신경외과의사인 와일더 펜필드(Wilder Penfield)의 기념비적인 연구를 소개한다. 그는 환자들의 두개골을 열어, 측두엽 표면 일부 지점에 미세한 전기자극을 가할 때 환자가 어떤 경험 을 하는지 연구했는데, 이러한 테스트는 뇌전증 완화를 위해 뇌수술이 필요한 환자를 대상으로 진행되며, 발작의 시작점을 찾아내는 데 도움 을 준다. 환자들은 완전히 의식이 있는 상태였고, 고통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 두피에 국소마취만 한 상태였다.
1차 청각피질에 전기자극을 가하자 환자들은 윙윙 소리나 휘파람 같 은 단순한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인접한 부위의 피질에 자극을 가하자 놀랍고 꿈같은 경험을 했다. 환자들은 온갖 종류의 시각적 장면을 지각 했고, 발소리, 개 짖는 소리, 변기 물 내리는 소리, 사람들의 말소리, 속 삭임, 외침, 웃음소리를 들었으며, 음악은 꽤 빈번하게 들었다. 어떤 환 자는 합창단이 <화이트 크리스마스>라는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들었고 또 다른 환자는 여러 노인이 함께 노래하는 것을 들었다. 또한 다른 환 자는 <아가씨와 건달들>이 무대에서 마치 오케스트라로 연주되는 것처 럼 들었고, 또 다른 환자는 멘델스존의 <사제들의 전쟁 행진곡>이 마치 라디오에서 들리는 것처럼 들었다. 모든 환자들은 자신이 수술실에 있 다는 것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고, 수술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고 듣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환청들을 실제인 것처럼 느꼈다.
- 펜필드 박사는 음악을 비롯한 유사한 환상 지각들이 간질 발작이 시 작할 때 발생했다는 것에 주목하여, 환상이 뇌의 전기자극으로 유발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유발되었을 것이라 가정했다. 한 환자는 발작이 일 어나기 직전에는 항상 엄마가 불러준 자장가 <잘자라, 우리 아기>를 들 었다고 한다. 또 다른 환자는 발작의 시작을 알리며 라디오나 춤에서 자 주 듣던 노래, <난 견뎌낼 거야(ill get by)> 혹은 <넌 절대 모를 거야(Youll never know)>를 목소리 없이 오케스트라로 연주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다른 환자는 발작 중에 라디오 광고에서 나오는 음악에 맞춘 단어들을 들었다고 했다.
- 음악 환청은 드물게 나타나는 반면, 말소리를 듣는 환청은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들 사이에서 흔하게 발생한다. 조현병 환자 중 약 70퍼센트는 단어와 구를 말하는 목소리를 듣고 심지어는 긴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환자들은 하나의 목소리를 듣기도 하고, 때론 둘, 혹은 여럿이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 목소리는 비판적이거나 욕설을 퍼붓기도 하며 위협 적이고, 상스러운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환자들에게 다양한 행동을 '지시'하는 것은 흔하게 나타나며, 그들은 그 지시를 꼭 이행해야 한다 고 느낀다.
- 환각은 감각 기관에서 평상시보다 자극이 없어지는 상황에서도 발생 할 수 있다. 다른 말로는 박탈 효과라고 일컫는데, 1950년대에 시작된 존 릴리(John Lilly)의 연구에서는 이러한 감각 박탈 효과를 연구하기 위해 '부유 탱크(Hotation tank)'라는 것을 사용하였다. 부유 탱크 안에서 실험참 가자에게 얼굴을 위로하고 피부 온도와 동일한 사리염이 가득한 물에 떠 있게 한 다음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을 차단시켰다. 감각 자극이 부 족해지자, 잠시 후 참가자들은 환각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극심한 슬픔 또한 환각을 일으킬 수 있다. 최근 사별을 경험한 많은 사람들이 죽은 사람의 환각 혹은 환청을 경험했고, 종종 그들과 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한 연구에서는 1년 전에 배우자가 사망한 70대 초반의 사람들이 배우자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유족들은 그 목소리들로부터 위안을 받는다고 한다.
환청은 조현병과 강한 연관성이 있기 때문에 목소리를 듣는 것은 정 신이상의 증상이라는 믿음이 팽배하고, 그리하여 목소리를 듣는다고 말하면 정신병원에 갇히게 될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 스탠퍼드 대학 교의 교수 데이비드 로젠한(David Rosenhan)은 학술지 <사이언스>에 발 표한 "정신병원에서 정상으로 살아가기"라는 논문에서 놀라운 실험에 관해 기술했다. 그를 비롯한 정신병력이 없는 7명의 가짜환자들은 "empty(빈)", "hollow(공허한)", "thud(쿵)" 등의 말소리가 들린다고 여러 병 원의 접수처에 가서 말했다. 다른 증상은 없었지만 그들 모두 정신병동 에 입원하게 되었다. 입원 직후부터는 더 이상 어떤 증상도 없다고 말하 고 매우 정상적으로 행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자유롭게 퇴 원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최소 7일에서 52일까지의 입원기간이 소요되 었다!
환청으로 말소리를 듣는 사람들이 정신이상일 수 있다는 통념에도 불구하고, 짧게 말소리를 듣는 환청이나 유령을 보는 환시는 건강한 사 람들 사이에서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자주 나타난다. 1890년 대초, 헨리 시즈윅(Henry Sidgwick) 연구팀은 심령연구협회를 대표하여 '온 전한 정신에 깨어있는 상태의 환각을 경험하는 국제 인구조사'를 착수하였다." 응답자 대부분은 영국인이었고, 나머지는 미국, 러시아, 브라질 출신이었다. 연구자들은 설문 집단을 신중하게 검토했는데, 신체적 혹은 정신적으로 명백한 질병을 가진 사람들은 조사에 포함하지 않았 고, 수면에 진입하는 순간 환각을 경험해본 사람 또한 배제하였다. 왜냐 하면 이러한 경험을 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답자의 2.9퍼센트는 목소리를 듣는 것을 경험했다고 보고했다. 추후 연구에 따 르면 기능상의 장애나 고통이 없는 사람들의 약 1.5퍼센트가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 나타났다."
문화적 요인, 특히 종교가 목소리 환청을 듣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구약성경에는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이 아담과 대화했다고 씌어 있다. 또한 모세는 불타는 덤불 속에서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었고, 십계명 을 받아적으라는 명령을 들었다. 아브라함,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욥, 엘리야 모두 신성한 목소리를 경험했다. 신약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악마와 대화했고 유혹을 거부했으며, 성 바울은 자신에게 말하는 목소 리를 듣고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종교적 전통에 따라 많은 독실한 영적 지도자들이 목소리를 들었다. 13세기에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는 하나님의 목소리로 종교생활로의 '부름'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15세기에 잔 다르크는 프랑스 왕이 영국 침 략자로부터 그의 왕국을 되찾는 것을 도우라는 성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주장했다. 목소리를 들은 다른 종교적 인물로는 성 어거스틴, 힐데 가르드 폰 빙엔, 성 토마스 아퀴나스, 시에나의 성 카타리나, 아빌라의 성 테레사가 있다. 오늘날 기도 등 영적 운동에 폭넓게 임하는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은 가끔 환영을 보거나 목소리를 듣곤 한다.
사람들이 환청으로 목소리를 들을 때 대부분은 음악 환청을 경험하 지는 않는다. 그리고 음악 환청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가끔 말소리 같은 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대체로 웅얼거리는 듯하고 분명하지 않아서 알 아듣기는 어려울 수 있다. 그래서 음악 환청과 언어 환청을 일으키는 뇌 회로는 대체로 구별되고 분리된 것으로 보인다.
- 하나의 청각 시스템을 부분적으로 특성화된 기능을 가진 모듈들의 집합으로 보는 관점은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서 스티븐 핑커 (Steven Pinker)가 표현한 바와 유사하다.
마음은 특성화된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특성화된 부분들로 이루어져야 한다. 오직 천사만이 전반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유한한 우리는 단편적인 정보로부터 불완전한 추 측을 해야 한다. 각 마음의 모듈들은, 없어서는 안 되나 또한 옹 호할 근거도 없는 가정을 하면서, 세상이 작동하는 원리에 대해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맹목적으로 풀어나간다. 옹호할 수 있 는 유일한 근거는 그 추정과 가정이 우리 조상이 살던 세계에서 는 충분히 잘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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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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