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함의 숭배

사회 2021. 1. 17. 14:42

- 버락 오바마의 정치적 성공은 국민의 배신감에 공감하는 능력 덕분이었고, 정치적 실패는 그 배신감을 해소시키지 못한 무능력 때문이었다. 오바마의 2008년 선거운동은 혼란과 어둠의 숲에서 헤매고 있던 유권자들의 손을 잡고 희망찬 새 시대의 빛 속으로 나오겠다는 약속이었다. 능력주의가 최우선시되던 당시에 오바마는 그런 약속을 할 자격이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는데, 그가 살아온 삶과 경력이 사회시스템의 정당성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오바마가 후보로 지명될 가능성이 높았던 이유는 2002년 가을 상원 선거 유세에서 이라크 침공을 비판하는 연설로 대중의 신뢰를 얻었기 때문이다. 연설에서 그는 임박한 침공을 어리석은 전쟁'으로 규정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선 경쟁자 들을 포함하여 '똑똑한 사람들이 다들 잘못 알고 있을 때, 오바마는 제대로 알고 있었다. 대통령 후보자들 중 혼자만 임금님이 벌거벗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힐러리 클린턴과 빌 클린턴이 기성 권력의 상징이 된 상황에서 버락 오바마는 그 권 력을 대체하려 했다. 그는 미국의 역사적인 변혁 운동, 기존의 부 당한 사회체제를 공격했던 사회운동을 여러 차례 언급했다. 그리고 부시 정권 말기, 난장판을 초래한 근본적인 불능 상태, 계층 분열, 그리고 권력의 독점이 심화되고 있던 미국 정치를 비판했다. 이라크 전쟁에 대해서는 단순히 전쟁을 끝내는 게 아니라 애초에 전쟁을 일으키려 한 사고방식을 끝내고 싶다'고 했다. 또한 로비스트와 선거운동자금 기부자들이 사회체제를 농락' 하고 있다고 하면서, 그가 대통령에 출마하는 것은 바로 그런 행태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는 '정치권이 돌아가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겠다'고 맹세했고, 선거운동 방향도 그 약속과 맞아 떨어지는 것 같았다. 실제로 오바마의 선거운동은 권위 의식을 버리고 자원봉사자들에게 전례 없이 많은 권한을 줌으로써, 그리고 그 과정에서 무능한 기관들과 스러진 희망에 염증을 느낀 대중의 관심을 마침내 진심으로 믿을 만한 후보자에게 돌림으로써 선거운동 방식에 혁신을 가져왔다.
- 2008년 오바마 시대가 막을 올릴 때는 낙관주의의 물결이 힘 쓴 덕분에 기관에 대한 신뢰도가, 특히 대통령에 대한 신뢰도가 치솟았다. 하지만 1년 동안 하나의 기관으로서 50퍼센트를 웃돌 던 대통령에 대한 신뢰도가 2010년 무렵에는 허리케인 카트리나 의 여파로 급락한 부시 대통령의 지지율과 비슷하게 떨어졌다. 신뢰도가 하락한 요인 중 하나는, 오바마가 선거운동 때 '체제'를 손보겠다고 약속했으면서 그 체제 안에 안주했다는 것이다. 무능한 기관들에 대해 오바마는 굳은 결의를 통해 그 기관들을 제자리로 회복시키려는 방식을 취했다. 기관들의 임무수행 능력이 개선되면 신뢰도와 참여도가 높아지고, 그로 인해 기관들의 임무수행 능력이 더 나아질 거라는 선순환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 기대는 아직도 현실화되지 않았다. 분명한 사실은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기관들의 임무수행 능력이 나아지지 않은 이유는 30년 동안 가속화된 빈부격차가 비정상적인 사회질서를 낳았고, 그런 사회에서 무기력하게 타락해버린 일군의 엘리트 계층을 양성했기 때 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상황을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엘리트를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정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회를 운용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식은 당연히 엘리트주의라고 생각한다. 우리 대신 결정해줄 적임자들이 있을 것이고, 그 적임자들만 찾으면 사회가 매끄럽게 굴러갈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 모든 통치 질서처럼, 능력주의는 그로부터 가장 큰 혜택을 받은 사람들이 적극 헌신하는 이념이다. 훗날 역사에서 고통의 시대로 기록될 이 시대에 가장 탁월하다고 주목받는 사람들은 대부분 능력주의라는 엘리트 양성과정의 산물이다. 사회에서 가장 명석하고 가장 성실하고 가장 야심찬 구성원들을 뽑아 지도자로 키운다고 하는, 서로 연관된 기관들이 배출한 오바마 같은 이들이다.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약사와 임시 교사의 아들로 태어난 벤 버냉키, 미주리 주의 목사와 농사꾼 사이에서 나고 자란 켄 레이, 브롱크스 출신의 정육업자 아들이면서 직계가족 중 처음으로 대 학을 나온, 그리고 컨트리와이드의 최고 경영자가 된 안젤로 모질로, 루마니아 이민 1세대로서 밀워키의 렌터카 사업자 아들로 태어나 메이저리그 총재가 된 버드 셀릭, 브루클린 공영주택단지 에서 자랐으나 골드만삭스의 최고경영자가 된 로이드 블랭크페인, 버밍햄에서 목사의 딸로 태어난 콘돌리자 라이스가 그 산물이다. 능력주의의 맨 꼭대기에 진입한 사람은 동료 실력자들을 믿고 권력자의 측근들이 내세우는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경향이 강하다. 엘리트의 전문성과 판단력에 대한 맹신은 오바마 행정부의 아킬레스건이었다. 조나단 알터는 오바마의 임기 첫해를 기록한 「약속」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오바마는 엘리트를 굳게 믿었다. 그는 전후 미국의 강력한 능력주의에서 덕을 본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오른 계층 사다리의 꼭대기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
- 능력주의는 인종, 성, 성적 취향에 따른 부당한 차별을 철폐하 겠다는 약속이지만, 그 대신 인간은 능력과 진취성에서 근본적으로 평등하지 않다는 인식하에 새로운 계급을 인정하는 신념이다. 능력주의의 이상적인 모델은 똑똑한 사람과 둔한 사람, 부지런한 사람과 나태한 사람에 대해 보상에서 엄청난 차이를 두는 사회다. 극단적인 경우, 이러한 사회 정신은 '재능의 귀족'을 찬양 한다. 그런데 지배계층의 자격에 대한 이 이상은 근본적으로 우 리의 민주주의적 서약과 상충한다. 크리스토퍼 래시가 말했듯이 능력주의는 '민주주의에 대한 희롱'인 것이다. 지난 30년간 이 민주주의에 대한 희롱에 우리가 바친 헌신은 남북 전쟁이 끝나고 이어진 대호황 시대 이후 범위와 규모에서 무서운 속도로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켰다. 빈부격차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원인은 세계화, 과학기술의 발전, 선거운동자금 운용의 부패, 노동조합의 급격한 파괴까지 수없이 많다. 하지만 이 모든 현상의 철학적 토대, 그것이 뿌리내린 비옥한 토양은 우리 모두가 동의한 능력주의다. 근본적으로 우리는 아직도 선발된 소 수가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소수가 되려면 어떤 자격이 필요한지 그 기준을 새로 정해버린 것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전체 사회에 불평등을 용인함으로써 판단력은 흐리고 사익을 추구하면서도 특권을 누리는 엘리트 계층을 양산하고 말았다. 제도의 연속적인 실패와 그로 인한 권위의 위기를 초래한 장본인이 바로 그 엘리트 계층이다. 개별적인 제도의 실패 (메이저리그, 엔론 사태, 이라크 전쟁)에는 특정한 원인, 때로는 우연한 원인이 작용했겠지만 그 모든 사건의 이면에 있는 공통적인 원인은 엘리트의 불법 행위와 부패이다
- 상류층의 존재는 그들의 장점이 기반이 될 때에만 해롭지 않다. (랄프 왈도 에머슨)
- 마이클 영이 만들어낸 '능력주의'는 오늘날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이상이 되었지만, 참으로 역설적인 사실은 영은 암울한 미래를 그리기 위해 이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2001년에 쓴 글에서 그는 『능력주의의 출현이 사회에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진 현실이 개탄스럽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 책은 남다른 재능을 갖고 있다고 판단된 사람들이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굳어져 다른 사람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을 내주지 않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경고하기 위한 풍자” 라고 강조했다. 이곳 미국에서 '능력주의 사회'는 시험제도, 학교 교육, 사회 적 다양성에 대한 미국적 시스템을 가리키는 완벽한 명칭으로 받 아들여졌다. 1960년대의 사회 변혁 이후, 동부 중심의 혈통으로 결정되는 백인 체제를 대신하여 능력주의가 새롭고 다양한 엘리 트를 양성할 시스템으로 여겨진 것이다. 물론 마이클 영이 그 단어를 만들어내고 미국이 그것을 시대 정신으로 채택하기 오래 전부터 '능력주의'와 비슷한 철학은 항상 미국인들의 핵심적인 이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 묘사한 미국 사회는 출신과 지역, 신분의 낡은 장벽이 사라지고 누구나 자신의 재능과 열정을 발휘하여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곳이다. 그는 “미국인들은 소작인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 다. 소작인이라는 말이 나타내는 특정 계급에 대한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그런데 이 나라를 세운 선조들은 그들이 물리친 영국 왕조 체제에 대해 회의적이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평등주의적 시각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저 하나의 계급체계를 다른 체계로 바꾸고 싶어 했을 뿐이다.
- 마이클 영이 고민한 것처럼 능력주의가 철저하게 작동한다면 사회의 불평등은 점점 심화될 것이다. 하지만 그 불평등은 사 회 이동성의 증가가 활발해서 일어나는 불평등이다. 그런 사회에 서는 교육제도와 비즈니스 세계의 원칙에 따라, 타고난 실력자가 어느 계층에 있든 그들을 정확히 찾아내 가난한 집안의 명석한 자녀들은 계층 피라미드 위쪽으로 올려보내고, 가장 뛰어난 이들 의 재능 없는 자녀들은 바닥으로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능력주의의 철칙'이 예측하는 사회는 그와 다르다. 능력주의의 이상을 위해 계층화된 사회는 그에 수반되는 사회 이동성은 없는 불평등을 초래한다. 실제로 시간이 지나면서 사회는 점점 더 불공평해지고 이동성은 둔해진다. 상층부에 오른 사람들 이 자신들의 특권을 유지하고 방어하기 위한 수단을 만들어내며 그 특권을 대물림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1970년대 중반부터 계속 추락한 미국 경제의 궤적도 이런 시스템 때문이다. 불평등의 지속적이고 뚜렷한 증가는 카터 대통령 이후 미국의 정치·경제 분야에서 많은 관심을 받아 연구되는 문제다. 폴 크루그먼은 그것을 일컬어 대분기라고 표현한다.
- 정당의 본성에 대한 미헬스의 통찰력은 시대를 초월한다. 그 의 혜안은 특정 사회주의 정당이 맞이할 결말을 예언자처럼 꿰뚫어 보았다. 그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실제로 독재를 하게 된다면, 그들은 독재는 유지하되 프롤레타리아는 잃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리고 이 예언은 그의 책이 출간되고 불과 몇 년 후에 러시 아에서 증명되었다. “사회주의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자들이 승리할 것이다.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세력이 승리하는 순간, 사회주의는 타락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미국은 아직 폭력이나 끔찍한 상황이라는 결말을 맞지 않았다. 하지만 능력주의의 철칙'이 개개인의 능력 차이와 계층 이동성이라는 똑같이 중요한 원칙을 기반으로 한 사회를 오염시켰다면, 그 결과 어떤 유형의 사회질서가 자리 잡게 될지 자문해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사회는 불평등 지수가 극도로 높고 시간이 갈수록 더 심해지지만, 엘리트의 순환은 거의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회의 주요 기관들을 차지하고 감독하는 사람들은 최고 교육을 받은 야심가들이다. 그들은 막대한 금전적 보상을 받고 막강한 정치권력과 특혜를 누릴 것이며, 어떻게든 처벌과 경쟁, 책임을 피하려 할 것이다.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까지 올라온 이들은 원하던 지위에 올랐으니 자신과 동료들, 그리고 자녀들도 그 자리를 계속 차지하리라고 어느 정도 확신한다. 이러한 지배계급은 능력주의 엘리트를 배출하는 교육기관 내에서도 끊임없는 사취를 통해 정당한 경쟁을 방해하며 온갖 만행을 저지를 것이다. 그들은 맡은 임무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게 나 부정부패의 유혹에 굴복한다 해도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처벌 도 받지 않을 것이다. 이 계급은 원칙도 없이 조직 내 암적인 구성 원들을 비호하고, 실적과 거의 상관없이 많은 보상을 할 것이며, 최고의 수익을 내는 슈퍼스타에게 터무니없이 높은 보너스를 지 급할 것이다. 그리하여 규칙이 붕괴되고 부패와 횡령이 만연한 환경을 만들 것이다. 구제금융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가장 나쁜 특성을 결합한 해결책이었듯이, 이런 사회는 능력주의와 관료주의의 가장 나쁜 특성이 결합된 체제가 될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사회체제는 2012년 무렵에 목격했던 미국의 엘리트 사회와 흡사할 것이다.
- 21세기의 미국인들은 끊임없는 경쟁 속에서 실력에 따라 신분이 달라지는 운동선수 모델을 맹목적으로 숭배한다. 올림픽 기간이면 2분마다 나오는 상품화된 전기를 통해 무명 선수가 일찍 일어나 늦게까지 연습한 끝에 다른 선수들을 앞질러 마침내 세계 일인자가 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지만 야구의 스테로이드 추문이 보여준 것은, 높은 성적에 후하게 보상하는 경쟁시스템에서 부정행위는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 우리는 이미 익숙해진, 점점 극심해지는 모든 불평등 수입재산, 정치인들과의 접촉과 더불어 이제 책임의 불평등이라는 중대한 문제와도 맞닥뜨리게 되었다. 책임과 처벌이 사회정신인 정의로운 사회는 괜찮다. 이런 사회에서는 할렘에서 마약을 거래하는 흑인 아이들과 월가에서 사기성 증권을 판매한 투자 은행가들 모두 그 범행의 대가를 치를 것이다. 혹은 용서와 두 번째 기회가 사회정신인 정의로운 사회도 괜찮다. 이런 사회에서는 월가의 은행뿐 아니라 담보로 집을 빼앗긴 사람들에게도 구제금융을 실시하고, 내부 거래자와 거리의 마약상들 모두 시민권의 혜택을 온전히 유지한 채 너그러운 사회로 복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책임의 원칙은 힘없는 자들에게 적용하고, 용서의 원칙은 힘 있는 자들에게 적용하는 사회는 안 된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이야말로 바로 이런 사회다.
- 남북 전쟁 전, 노예제도가 바탕이 된 남부의 경제는 극소수의 부유한 백인 농장주들에게는 막대한 부를 보장해주었지만 남부 전체의 경제성장은 철저히 가로막았다. 저비용 노동력이 꾸준히 제공되었기 때문에 혁신과 산업 발달에 필요한 자극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남부에는 미국 최고의 부호들이 북부보다 훨씬 많았지만, 남북 전쟁이 일어날 무렵 북부는 남부보다 훨씬 발전해 있었다. 지금은 남북 전쟁 이전의 남부와 상황이 많이 다르긴 하지만,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극심한 빈부격차도 그 나름의 특유한 엘리트 병을 유발하고 있다. 이 병은 엘리트계층을 더 무책임하게 만들고, 부정부패에 물들게 하고, 사회적 지위에 더 집착하게 만들며, 공감 능력과 판단력을 떨어뜨리고, 결정을 내리는 데 꼭 필요한 정보의 피드백에 둔감하게 만든다. 이런 이유로 극심한 빈부격차는 평등한 사회에서보다 능력은 떨어지고 부패는 더 심한 엘리트를 양산한다. 이것이 수십 년 동안의 실패한 능력주의가 낳은 가장 뚜렷하고 역설적인 결과다. 엘리트 사회가 심화될수록 더 저급의 엘리트가 생산되는 것이다.
- 랄프 왈도 에머슨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은 무수한 등급 중에서 자신의 등급을 정확히 나타내는 지표를 눈에 담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그것을 읽는 법을 배우고 있다.” 인간의 이런 기본적인 본능은 21세기 미국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성으로
진화했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는 가장 아름다운 인물들, 가장 영
향력 있는 정치인들, 최고의 부호 500인 같은 온갖 목록과 순위로 들끓고 있다. 온라인 잡지의 편집자로 일해 본 사람은 그런 소소 재가 업계에서 '미끼용 기사'로 통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제목은 아무리 흔해도 독자들이 그냥 지나가지 않기 때문이다. 순위에 대한 집착은 우리 사회가 1등을 향한 무한 경쟁에 불안함을 느끼면서도 그것에 깊이 중독되어 있음을 반영한다. 다람쥐 쳇바퀴같이 끝없이 계속되는 경쟁에 진절머리가 났으면서도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취해 있는 것이다. 전에는 고결함을 위해 했던 일들이 지금은 너무 세속화되었다. 그리하여 너나 할 것 없이 평등에 대한 퇴색한 애정마저 내던지고 실력 계층화가 주는 허황된 약속에 삶을 바친다.
- 일단 각자의 지위를 감지한 단계가 되면, 심리학자들은 '높은 권력'과 '낮은 권력'을 가진 피실험자들이 다양한 과업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관찰한다. 결과는 의외였다. 권력이 높은 사람들은 사고가 더 추상적이었고 세세한 부분에 신경을 덜 썼다. 또한 고정관념이 더 강했고 판단도 즉흥적이었다. 그들은 모험을 추구하고 상황이 잘 풀리리라고 낙관하는 경향도 강했다. 그리고 자극을 받거나 불확실한 상황에 처하면 결단력 있는 행동을 취하는 편이었다. 아마 그 연구에서 예상과 가장 가까운 결과는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자기 합리화를 더 많이 했다는 점일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결과는 권력이 시야를 좁게 만든다는 것이다. 실험 보고서에 의하면, 권력자들은 계급이 낮은 사람의 특성과 시각, 세세한 정보에 별로 관심이 없고 전반적으 로 공감 능력이 떨어진다.  비슷한 연구가 또 있다. 피실험자들을 높은 권력과 낮은 권력의 두 집단으로 나누고, 각자의 이마에 검은색 매직펜으로 최대한 빨리 알파벳 E를 써보라고 지시했다. 높은 권력이 주어진 집단은 대부분 그들이 읽기 편한 방향으로 (즉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좌우가 바뀐 방향으로) E를 쓴 반면, 낮은 권력이 주어진 집단은 상대편이 읽기 쉽도록 좌우를 바꾸어 E를 썼다. 다른 말로 하면 높은 권력이 주어진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그들의 시각을 외부 로 투사하는 반면, 낮은 권력이 주어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시각을 기준으로 삼았던 것이다.  다른 실험들에서도 유사한 결과가 나온다. 공감능력을 측정 한 「사회계급과 맥락주의, 그리고 공감 정확도」라는 논문에서는 지위가 낮은 사람들은 높은 사람들에 비해 공감 정확도 점수가 높다는 결과가 나온다. 상호 소통하는 상대의 감정을 더 정확하 게 판단했다는 말이다. 심지어 사진 속 인물의 눈 주위 근육을 보고 감정을 추정하는 능력도 더 정확했다.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 공감능력이 더 높은 데는 합리적 근거가 있다. 그들의 삶과 재산, 운명이 이웃과 지역민들뿐 아니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변덕에 큰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타인의 감정과 욕구를 추론하는 수단을 정교하게 발달시킨다. 그와 반대로 권력과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타인 에게 의존하는 정도가 낮고, 그래서 그런 능력이 발달하지 않는 다. 혹은 권력이 강해지고 지위가 높아지면서 그러한 능력이 쇠 퇴한다. 이 말은 우리 사회의 주요 기관과 조직의 고위직 엘리트 들은 타인의 관점에 신경 쓰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 첫 번째 평등시대 때는 역사상 최초로 경제적 빈부격차가 대폭 줄었지만, 그 줄어든 격차는 계속되지 못했다. 두 번째 평등시 대에는 그 대신 단편적이고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성, 인종, 그리고 성적 지향의 불평등이 극적으로 줄어들었다. 이러한 역사를 감안할 때 앞으로 우리가 갈 길이 쉽지는 않겠지만 방향은 분명하다. 첫 번째와 두 번째 평등시대에서 쟁취한 최고의 성과를 결합하는 것이다. 그래서 엘리트 사회를 실패로 몰아가는, 점점 더 벌어지는 계급 격차를 해소해야 한다. 첫 단계에 할 일은 대중들에게 엘리트 계층도 포함해서 능력주의라는 신념이 사회 발전을 가로막고 있음을 설득하는 것이다. 1970년대 이후 능력주의의 첫 번째 계명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인종과 성과 성적 지향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한 기회를 제공하라. 하지만 결과의 불평등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매번 깨닫는 사실은 기회의 평등과 결과의 평등이 확 실히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과의 평등에 대해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사회는 시간이 지나면 기회도 불평등한 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 매우 평등한 조건에서 시작해야 진정한 능력주의가 꽃핀다는 것. 이것이 능력주의의 역설이다. 그러므로 능력주의를 원한다면, 평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능력주의는 결과의 실질적 평등을 중요시하는 사회, 사회복지와 사회적 연대 의식을 고취하는 사회, 평등한 기회와 노력을 통한 계층 이동이 활발한 사회에서만 제 기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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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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