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년 7월 닉슨독트린 선언이후 미국과 중국은 새로운 동아시아질서를 만들어감. 닉슨 정부는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통해 수렁과도 같은 베트남전에서 빠져나오고 더불어 소련을 견제하고자 했다. 중국도 69년 국경에서 무력충돌까지 벌인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과의 관계개선이 필요했다. 71년 7월 미 대통령 안보보좌관 헨리키신저가 비밀리에 북경을 방문했으며, 72년 2월에는 닉슨대통령이 중국을 공식방문. 곧이어 72년 9월에 일본과 중국도 국교를 정상화. 미국과 중국의 관계개선도모는 타이완에 커다란 충격을 가했다. 71년 10월 중화민국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유엔가입과 함께 상임이사국으로 선출되면서 유엔에서 축출되었고, 또한 72년 미국과 일본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의 정통정부로 인정함에 따라 국제적으로 고립되는 상황에 처함. 이처럼 급변한 동북아 국제질서를 놓고 보면 박대통령이 72년 10월 17일 유신선포 특별선언문에서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에 대응하기 위해 체제를 시급히 구축해야 한다는 논지를 편 것은 일견 타당해 보임. 그러나 동북아 국제질서의 변화가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민주헌정질서를 무너드리는 극단적 권위주의 체제를 수립해야 할 정도로 한국을 위기상황에 빠뜨렸다는 근거는 없음. 오히려 박정권은 한국이 미중관계 개선을 위한 희생양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남북대화를 진행하고 있는 북한이 경제개발을 위해 군비축소를 바라고 있으며 전쟁을 원치 않는다는 점도 인지하고 있었다. 이미 71년 남북대화를 시작할 때부터 박정권은 북한을 즉각적인 군사위협으로 여기지 않았다. 또한 미국정부의 주한미군 철군이나 북한의 군사적 위협이 억압적 통치체제를 정당화시킬 정도의 상황을 만들어내지도 않았다.
- 투기열풍과 빈부격차 확대, 생존권조차 보장되지 않는 저임금 노동조건, 2차 석유파동을 인한 불경기와 가계경제를 짓누르는 고물가, 여기에 정치적 독단까지 더해지면서 유신체제에 대한 대중의 분조는 폭발직전에 이름. 대중의 분노는 그해 10월 부산대학교 학생들의 유신철페 가두시위에 대한 시민들의 대거동참으로 나타남. 부마항쟁은 비상계엄령의 선포와 공수부대 투입으로 겨우 진압되었지만, 항쟁의 충격은 권력핵심부의 균열을 초래할 정도로 컸다. 부마항쟁은 대규모 항쟁의 전조였다. 김재규는 민주화 항쟁이 다시 일어나면 대규모 유혈사태를 일으켜서라도 강경진압하려 했던 박대통령과 입장을 달리했다.
- 유신시대 학교도 지배체제 재생산의 수단으로 전락. 유신선포 직후 박정권은 유신과 남북대화에 대한 정부시책을 학교교육에 반영하기 위해 사회, 군사, 반공 교과서를 대대적으로 손질. 중등과정의 경우 한 권에 불과했던 반공교과서가 각 학년별로 구분되어 세권을 바뀜. 68년 1.21 사태 이후부터 강조된 반공교육이 단지 양적인 확대가 아닌 체계적 교육을 실시하는 방향으로 정리된 것이다. 반공교육의 체계화는 반공정신의 생활화를 주요 목표로 삼음. 이런 반공교육 방침의 변화기조는 유신체제 수립전부터 드러나 있었다. 70년에 이미 교육헌장에서는 반공교육이 공산당은 무조건 나쁘다는 인식을 불어넣는데 그쳐 반공의 중요성을 절박하게 인식하도록 만들지 못했다는 비판이 제기됨. 또한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 반공교육은 통일대업에 참여하는 국가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도 불어넣지 못한다는 비판도 나왔다. 이런 기존 반공교육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강조된 것이 반공정신의 생활화. 반공정신의 생활화나 올바른 국민 정체성이 강조된 배경에는 남북대화가 이뤄지면서 한국사회에서 평화통일에 대한 기대가 커지는 상황을 우려스럽게 바라보는 박정권의 인식이 깔려 있었다. 그렇다면 유신체제에 부합하는 건전한 국민상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박정권의 안보위기론과 유신선포를 지지한 교육자들은 유신선포로 민족주체를 제대로 양성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고 보았따. 이들이 구상한 민족주체는 국가지상주의 사고와 태도를 철저히 받아들인 민족. 민족주체의 태도는 자신과 국가의 동일시, 국가와 민족의 우위성 긍정, 국가와 민족의 목표에 동화, 국가/민족 발전을 위해 부여된 임무의 자각과 완수로서 설명되었다. 국가지상주의 교육목표가 주창되는 현실에서 국가가 사회의 부조리를 개혁할 수 있는 국민을 양성하는 교육이 제대로 이뤄질리 없었다.
- 유신시대 학생의 일상와 지금 학생으 일상은 크게 달라보인다. 그러나 남북의 분단, 대립이 강화되고 민주주의가 약화되면 국가안보를 명분으로 억압적인 지배체제를 정당화하는 정권이 다시 등장하고 교육정책도 퇴보할 수 있다. 16년 교과서 국정화라는 유신시대 교육정책의 부활은 학교를 자율적 배움의 공간이 아니라 억압적 체제의 재생산 기반으로 삼으려는 사고방식이 여전히 불식되지 않고 뿌리깊게 남아, 언제든지 신세대의 학교교육을 왜곡시킬 수 있음을 보여줌. 유신시대 학교를 다닌 기성세대가 학교생활을 사진첩 속 아련한 추억으로 넘기지 말고 비판적인 성찰을 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 있다
- 공장 새마을 운동은 잘살기 운동, 범국민 약진운동으로서 조국 근대화를 위한 노동자의 역할을 강조하고, 노동자와 직장과 조국이 운명공동체라는 가상의 신념을 불어넣음. 한편으로 그것은 국가와 자본의 주도로 노동자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데 근본한계를 지니며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대립하는 본질을 은폐한다는 한계와 모순을 가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작업장 규율을 유지하고 소집단 활동을 고양함으로서 노사협조주의를 확산하고 기업공동체주의를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 노동자의 노동조건과 공장생활에서 뚜렷한 이분화가 나타난 것은 70년대의 특징. 크게 보아 국영기업과 독점대기업이 주종을 이루는 중화학공업과 노동집약의 경공업 부문 사이에서 차이가 두드러졌다. 전자는 도시에서 교육받은 고학력의 사무, 관리직과 숙련 남성의 영역. 후자에서는 농촌출신의 배우지 못한 미숙련의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여성이 주류를 이루었다. 중화학 공업의 대규모 사업장은 국가의 강력한 억압이 집중되어 기존 어용노조가 존재하고 방위산업체와 병역특례의 제약을 받았으며, 좀더 나은 보수와 노동조건을 누렸기 때문에 노동운동이 활성화되지 못했다.이와 달리 대규모 공장의 남성 노동자들에 비해 동질성이 강했던 분야의 여성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과 공장생활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면서 70년대 민주노동운동의 역사를 만들어나갔다. 노동자들의 공장생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신의 노동에 대한 대가로서의 임금이다. 하지만 당시의 임금은 인간이라면 누려야 할 권리로서의 생활임금이나 기본소득에 입각한 임금과는 거리가 있었다. 인간다운 삶의 지향을 반영하기는 커녕 노동에 대한 대가로서의 임금도 아니었다. 생산성 향상과 물가상승에 기준을 둔 자본의 생산성 임금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러하듯이 이 시기에도 주류를 이루었다. 이에 대해 노동자들은 생계비 임금을 내세웠고, 이 모형은 노조가 제시한느 임금인상의 틀로 보편화됨. 노동자들이 바라는 노동의 대가라는 것이 생계 유지에 필요한만큼을 요구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생산성에 기반을 둔 임금의 실제는 그 절반도 채우지 못하는 열악한 수준이었다.
- 국가와 자본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편으로는 농촌의 몰락을 통해 산업화를 추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 몰락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대책마련이 시급했다. 즉 농촌은 무제한적인 노동력을 공급해주면서도 안정적 식량증산을 이루어내야했고, 또 정권의 든든한 정치적 지지세력도 되어야 했다. 농민들은 도시로 나가 노동자가 되는 동시에 시골에 남아 식량증산도 책임져야했고, 이 고단한 삶 속에서도 언제나 유순한 유권자가 되어 여촌야도 투표를 해야했다. 게다가 도시가 소돔과 고모라같은 타락의 공간이었다면, 농촌은 단군이래 민족전통을 보존하는 성스러운 공간으로 존재해야 했다. 요컨대 농민은 유순하고 효율적인 슈퍼농민이 되어야 했다. 농촌의 몰락과정에서 농민들의 불만이 팽배하게 된 것은 당연했다. 여당에 대한 지지철회가 그 정치적 표현이라면, 도시로의 대탈출은 절박한 사회,경제적 표현이었따. 그러나 그 와중에 긍정적 전망에 대한 갈망도 공존. 산업화가 어떻게 농촌과 농업을 파괴적으로 재편할 것인지 그 결과를 확신할 수 없던 농민들에게 마지막 희망 같은 것이 필요했는지도 모름. 하나둘 도시로 떠나는 이웃들을 보면서도 아직 완젆나 절망은 아니라고 판단하는 농민들이 많았다. 농민들에게 삶의 모든 것을 바꿔야만 하는 도시로의 탈출은 어쩌면 농촌에 남는 것보다 더 위허하고 두려운 것이기도 했다. 위기인 것은 분명했지만 무언가 그 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 희망과 대안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버릴 수 없었던 그들에게 어느날 국가가 손을 내밀었다. 새마을 운동의 시작이다.
- 60년대 중후반부터 박정희 체제는 산업화에 따른 서구화를 우려하여 자유주의나 물질만능주의, 이기주의 등을 모두 서구에서 유래한 것으로 규정하고 극도의 혐오감을 숨기지 않음. 이에 장발과 미니스커트 단속처럼 개인의 신체와 기호까지 통제하고자 하는 반자유주의적 정책이 나타났는가 하면, 국민교육헌장에도 나와 있듯이 근대화는 서구화가 아니라 조상의 빛난 얼을 되살리는 것으로 의미부여됨
- 60년대까지 농촌과 농민은 후진성의 상징으로 근대화의 1차대상이었기에 늘 국가로부터 설교조의 계몽연설을 들어야만 했다. 그런데 새마을 운동에서츼 농촌은 타락한 도시에 대비되어 근면하고 성실한 민족의 상징처럼 제시되었다. 도시는 서구화 및 물질문명의 번성에 따라 타락한 곳이 되었고 도시민은 민족적 순수성을 유지하고 있는 농촌, 농민을 따라 배워야 했다. 이렇게 새마을 운동은 농촌과 농민을 모델로 전국민을 성실하고 근면한 민족적 주체로 구성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 70년대 농촌의 생활개선에 대해 묻는 질문에 응답한 농민의 50%가 많은 개선이 있었다고 했으나, 주된 이유로 든 것은 신품종 개발이나 미가상승(50%)이었고, 새마을 운동은 고작 25%. 한 마을에 대한 구체적 조사에서도 환경개선사업은 어느정도 성과를 거두었지만, 소득증대 사업은 오랜기간 동안 유지되지 못했고 주민들에게는 실패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고 했다. 농민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농업생산력 증가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것은 고미가 정책과 신품종 도입. 즉 다수확 품종이 대대적으로 보급되고 그 수확물을 국가가 고가로 매입하면서 농민들의 생산의욕이 고조된 것이 결정적 이유였다. 그런데 다수확 품종보급은 이미 60년대부터 시도된 것이었고 고미가 정책도 68년부터 시행되었다.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60년대에는 희농 품종이 개발되기도 했다. 여기에 농약, 비료 등이 대량으로 공급되기 시작하면서 농업생산력 제고에 큰 역할을 하기 시작. 특히 통일벼와 같은 신품종은 냉해와 병충해에 약해 보온 못자리와 농약이 필수적이었다. 공업생산력 증가에 따라 농업또한 공업제품에 의해 생산력이 증대되는 구조를 갖게 됨. 농업도 산업인 만큼 캠페인이나 운동보다 경제조건 변화에 더 큰 영향을 받았던 것. 새마을운동을 통한 소득증대 사업이 지지부진했다는 점은 정부 공식통계에서도 확인된다.
- 새마을 운동은 한국의 독특한 근대화과정의 중요한 측면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한편으로 그것은 자본주의적 삶을 일반화하면서 농민들이 그에 걸맞은 인간형으로 거듭날 것을 추구. 이윤동기와 경제적 합리성을 아는 호모 에코니미쿠스가 농민의 미래상으로 제시된 셈. 이는 분명 자본주의에 최적화된 자유주의 기획으로 이해할 수 있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새마을운동은 집단주의와 민족주의의 기획이기도 했다. 국가는 자유주의를 기각하고 집단주의를 강조하면서 개인보다 전체집단에 대한 헌신을 강조. 이는 각자도생의 세계를 만들면서 집단적 생존을 주문하는 것이었다. 이 모순이 비단 새마을운동에서만 나타난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근대사회의 일반적 모순이기도 하다. 이 모순은 근대사회 거의 모든 부면에 걸쳐서 재현되었다. 그중에서도 1인1표의 민주주의와 1주1표의 자본주의간의 모순은 근대 국민국가 체제의 영원한 딜레마이기도 하다. 이 모순과 딜레마에 대해 한마디 하지 않은 정치사상가도 거의 없을 정도이다. 박정희 체제가 선호한 슬로건은 자유와 책임, 권리와 의무였다. 물론 근대적인 것 대부분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 또한 수입품이었다.
- 60년대 후반 산업화의 효과가 가시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사회분화와 양극화는 점차 심화. 텔레비전 보급률의 증가와 주간지붐 등 미디어 환경의 변화와 소득수준 향상으로 대중의 소비욕구가 증대하고 있었고, 대중문화에서 체제의 관점에서 퇴폐, 향락으로 규정할만한 요소들이 확산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싸우면서 건설하자는 박정희 체제의 요란한 선전에 순응하며 산업화의 대열에 나서기도 했지만, 체제가 설정해놓은 경계안에 머물러 있지만은 않았다. 70년대 박정희 체제가 국민총화를 유난히 강조했던 것을 뒤집어보면, 총화되지 않는 대중의 분열과 규범이탈자들이 항시적으로 존재했음을 의미. 박정희 체제는 그 경계 밖을 넘는 대중의 행동을 퇴폐, 방종, 타락, 무질서, 사치, 허영 등의 단어로 규정하여 금기시했고, 명랑하고 건전한 문화기풍으로 이같은 대중문화의 병폐를 치유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명랑하고 건전한 문화기풍을 만들려는 정권의 정책의도와는 달리, 70년대 사람들은 권력자의 시선으로 볼 때, 퇴폐적이고 저속한 대중문화를 향유하며 체제의 규범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다.
- 역사를 성장과 발전이라는 틀에 따라 직선적, 목적론적으로만 이해할 경우, 역사 속에 숨겨진 다양한 층위의 이야기는 사라지고 심지어는 왜곡이 일어나기도 함. 유신독재가 경제성장을 위해 불가피한 것으로 정당화되거나, 경제성장을 최우선하는 풍조 속에 민주주의나 사회정의 같은 가치들은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역사적 사유의 중요성은 결과론적 관점에 따라 과거를 사후에 정당화하는 것을 방지하는 데 있다.
- 박정희는 경제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 15호, 이른바 8.3조치를 통해 파격적으로 전경련의 요구에 응답했다. 8.3조치의 핵심은 모든 기업의 사채를 동결시키고 이를 전부 신고하도록 하여, 신고사채를 월리 1.35%(연리 16.2%) 3년거치 5년 분할상환조건의 채권/채무관계로 전환하거나 기업에 대한 출자로 바꿀 것을 명령. 또한 정부는 2000억 규모의 특별금융채권을 발행하고, 중소기업 신용보증기금 등을 정부출연으로 확대했으며, 500억 규모의 산업합리화 자금을 방출하도록 했다. 8.3 조치는 기업에 대한 정부의 전폭적 지원책이었다. 전경련 김용완 회장은 8.3조치에 대해 새로운 차원의 발전을 위한 활력소 구실을 할 것이라며 크게 환영. 그반면 영세기업인이나 소상인은 자금조달의 어려움을 우려했다. 8.3조치는 사유재산을 동결하는 초헌법적 조치라 부작용도 많았다. 사채업자가 가장 큰 피해를 보았지만, 사채로 돈을 불리던 서민들의 자금 역시 동결됨. 경제학자들은 8.3조치가 부실기업 문제의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없으며, 기업의 재무구조 개선과 경영합리화가 더 시급하다고 주장. 8.3 조치는 정부가 기업에 일종의 면죄부를 주었다는 점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특히 부실기업 정리가 미온적인 상태에서 이루어진 기업의 자금난 해소에 초점을 맞춘 정책이 시행되자, 부실기업들의 사채가 동결되면서 사실상 부실기업을 지원하는 효과가 나타남. 또 다른 부작용은 위장사채. 72년 10월 국회 재무위 국정감사에서 신민당 의원들은 전국적으로 282억에 이르는 소재불명의 사채가 드러났다며, 이는 권력층의 위장사채가 아니냐고 추궁. 실제로 당시 10여개 대기업들이 1억 이상의 위장사채를 가진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8.3조치는 정부가 기업의 자금난을 일시에 해소해줌으로써 대기업의 재무상황을 호전시키고, 수출실적을 증진시키는데 일정한 기여를 했단. 8.3조치로 한국은 72년 후반부터 73년 사이에 경제위기에서 벗어나 일시적 호황을 맞이하기도 했으나, 자본의 과잉투자 재개로 74년 부터 기업 재무구조가 다시 악화됨
- 안방의 가족실 기능은 한국전쟁으로 무너진 집을 다시 세우고 경제성장이 고도화된 60년대 말 이후 가정으로 널리 확대됨. 가족의 공간사용에 대한 민속지학적 연구는 이같은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부유한 집이나 전통적 양반집을 제외한 대부분의 가정이 방이 부족해 동성끼리 혹은 대가족하의 소규모 핵사족 집단단위로 방을 공유한 60년대와 달리, 70년대에는 도시 이주와 산아제한으로 부부만을 위한 공간, 아이들의 방이라는 개념이 생김. 사회보편적으로 가족공간의 기능분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 그 결과 안방의 텔레비전이 거실로 진출. 이른바 문화주택이라는 아파트와 연립, 심지어는 새롭게 신축되는 단독주택에도 거의 예외없이 거실 혹은 응접실이라 일컫는 공간이 도입됨. 70년 전후로 주택공사가 한강변에 아파트를 건설한 이래 현대식 집단주택 및 연립은 어떤 개성이나 상상력, 창의력도 없이 대청(리빙룸)을 중심으로 하는 설계패턴을 한결같이 묵수해 옴. 이 모델은 안채(안방), 사랑채(사랑방) 등으로 구성된 전통적 주택구조를 바꿔 외부와의 접근성을 약화시킨 대신, 공간내 이동성을 높이고 가족의 휴식과 단란한 가족을 위한 공간적 기능을 강화. 거실이 남긴 갑작스러운 넓은 공간, 갑작스러운 넓은 벽면은 가족의 이력과 사회적 지위를 보여주는 갖가지 물건으로 장식됨. 70년대 대규모로 발굴된 각종 문화재와 장서, 사진, 그리고 피아노같은 고가의 악기 역시 그 집안과 가족의 이력을 보여주는 장신구였다. 여기에 온가족이 이용하는 텔레비전이 자리잡았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문화에서 낯설기 짝이 없는 텔레비전을 보는 자리라는 뚜렷한 기능이 대청에 부여된 것. 더불어 거실은 가족실 역할을 하는 지극히 사적인 공간이면서도, 이방인을 응접할 때 그 집의 삶의 수준을 보여주는 공적 공간의 측면도 포함하고 있었다.
- 여가활동에 임하는 남성과 여성의 동기의 차이점에대해 76년 주간한국 보도에 나타나 있다. 도시 주민들의 생활시간을 보면 노동이 7~8시간, 취침이 6~7시간, 식사와 몸단장, 세면 등 기타 3시간을 제외하고 6~7시간의 여가를 유용하고 있다. 여가활동은 크게 일상생활의 답답함에서 탈출, 공동사회적 인간관계 회복, 개인주의적 생활행동 촉진, 체력의 회복 등인데, 남자는 일상생활에서의 답답함을 탈피하고자 함을 1차목적으로 하고 있는 반면, 여자는 가족, 친구와의 관계를 강하게 의식하는 공동사회적 인간관계 회복이 1차 목적이었다. 남성은 텔레비전에 대해 오락 및 휴식의 동기에 주목했다면, 여성은 관계형성 혹은 촉진의 동기에 주목.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40여년전 여가시간이 6~7시간이었다는 것인데, 지금과 비교하면 오히려 생활이 더 여유로웠던 듯 하다.
- 지역대결 투표행태는 금권선거, 사랑방 좌담회 같은 여당의 선거운동방식에 의해 조장된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당시 유권자 대중이 능동적으로 부응하고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기도 했다. 일반 대중의 입장에서 야당이 내거는 국가차원의 정책, 자신의 계급적, 계층적 이해관계를 만족시킬 수 있는 여러 정책들은 물론 호소력이 있었다. 실제로 많은 유권자들이 여기에 희망을 걸고 야당에 표를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당시 선거는 이미 기울어진 경기장, 그것도 언제 뒤집힐지 모르는 경기장에서 진행됐다는 것. 야당이 집권하여 실제로 일너 정책을 추진할 가능성이 있는지 또 야당이 이런 가능성을 현실화할 수 있는 역량을 확보할 수 있는지가 극히 의심되는 상황에서, 유권자들은 김대중이 내세운 정책공약 같은 것에 희망을 걸기보다 당장 자신의 마을앞에 도로와 다리를 세워준다는 데 더 솔깃해질 수 밖에 없었다.
- 지역대결 정치구도는 또한 박정희 정권의 지배이데올로기인 조국 근대화론이 대중의 의식과 행동을 원천적으로 규율한 결과이기도 했다. 조국근대화론의 요체는 불균등한 세계체제 속에서 국가의 상승이동을 추구하는 것. 즉 불균등한 세계 체제 그 자체에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철저히 순응해 그 안에서 상승이동을 추구하는 것. 대중들이 이와 같은 상승논리, 성장논리를 자기규율화하면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사회구조 내에서 가족별로 흩어져 출세경쟁에 집착하고, 지역적 불균등성을 심화시키는 경제정책을 시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기에 편승해 자기지역의 발전과 지위향상을 도모하는 행태를 보이게 됨. 민주화 이전의 한국 정치체제는 민주주의적 법과 제도적 틀은 존재하지만 실제정치는 집권자와 소수 집권세력이 권력을 독점하고 독재를 하는 양상이었다. 비록 독재체제였지만 형식적 차원에서는 민주적 제도와 법률이 존재했다는 것은 이후 국민들이 민주화를 추진하는 데 나름대로 의미있는 자산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반대의 측면도 확실히 존재. 형식적 민주주의 제도들이 오랜기간동안 원천적으로 또한 교묘하게 왜곡되어 운영되는 과정에서 형성된 정치행태들은 국민들이 민주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더 치유되기 힘들고, 장기지속하는 질곡으로 작용할 여지가 있었다. 오랫동안 정치에 희망을 걸지 못하고 탈정치화된 광범위한 대중과, 이들을 효과적으로 동원해내는 지역대결 정치구도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지역대결 정치구도는 87년 민주화 이행 이후 더욱 강하게 자리잡아감. 이것이야말로 박정권 시기 근대화 정치가 남긴 아주 긴 그늘이라할 수 있다.
- 뇌과학자 안토이노 다마지오는 우리 인간이 특정대상과 특정정서간의 관계를지각하고 어떤 대상과 상황을 우리 환경에 허락하느냐, 그리고 어떤 대상과 환경에 우리의 시간과 관심을 쏟아붓느냐를 결정함으로써, 고의로 자신의 정서를 조절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기억하는 과정을 통해 기억이 만들어진 당시의 정서까지도 불러올 수 있다고 말한다. 게다가 현실속에 실재하는 이미지든 기억으로부터 되살려 재구성한 이미지든 그 효과는 동일하고 그것이 정서적으로 유효한 자극이라면 곧 정서가 뒤따르게 된다고 한다. 단지 그 강도에서만 차이가 있을 수 있는데, 수많은 연기자들이 연기를 할 때 이런 방식을 쓴다는 것. 즉 특정 생각은 특정 정서를 불러일으키고 반대로 특정 정서는 특정 생각을 불러일으킨다는 말. 이것은 근래에 밝혀진 거울 신경세포로도 확인 가능. 이런 연구결과는 극장안에서 진행되는 공연과 음악을 통한 감정훈련으로 개인의 감정, 나아가 사회적 감정의 일치를 기획할 수 있음을 의미. 항일혁명문학예술이 담고 있는 집단주의와 위계화의 체득이 뮤지킹으로 가능함을 보여주는 연구결과이기도 함. 감정과 가장 밀접한 예술의 갈래가 음악이기 때문. 그리고 관객이 극장을 벗어난 작업장에서도 기억으로 극장에 있을 때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그때의 몸상태가 되어 배우의 삶을 살 수 있음을 보여준다. 배우가 연기를 하듯 말이다. 그런데 관객이 배우의 삶을 현실에 재현하기 위해서는 기억 외의 다른 것이 필요. 음악은 관객이 공연당시의 감정상태를 불러일으키는 것을 적극적으로 기획하고 주재할 수 있게 한다. 노동자들이 작업장에서 공연을 관람하거나, 작업시간 전후, 중간에 해당작품의 노래를 부르는 행위들이 바로 그것이다.
- 음악을 이용해 정치를 한다거나 음악과 정치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의 기원은 더 이른 시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조선 성리학의 음악에 대한 관점, 즉 악관이 담겨 있는 악학궤범 머리말에는 군도에 따라 악도를 바르게 해서 백성을 다스리고 풍속을 바르게 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물론 성리학의 악과 현대의 음악이 같은 개념은 아니지만,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음은 분명하다. 어쨌든 이런 성리학의 악관과 북한의 음악정치는 음악과 정치의 상관성에 높은 비중을 두었다는 점에서 통한다. 성리학의 악관과 북한의 음악정치는 음악과 정치의 연결말고도 비슷한 점이 또 한가지 있다. 성리학의 악관에 따르면 백성과 하늘은 임금과 지배층의 권위에 가로막혀 직접 만나지 못한다. 이처럼 북한의 음악정치도 인민대중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당적 지도에 따라야 함. 북한의 대중운동은 항상 이렇게 위로부터의 대중운동이었다.
- 70년대 내내 GNP에서 차지하는 군사산업과 중공업 투자율은 30% 이상을 유지했고, 66년부터 75년까지 10년 동안 국가투자의 40%가 삼선건설에 투자되었다. 삼선건설은 전쟁에 대비해 공업기지를 구축한다는 구상인데, 80년대 개혁, 개방 이후에는 연안지역 위주로 경제개발이 일어났기 때문에 제대로 설비가 가용되지 못하고 비효율적인 투자가 되어버린 측면이 크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전체적으로 60년대와 70년대에 중국은 외교적 고립속에서 마른 행주의 물을 짜듯 잉여자본을 다 털어 중공업에 투자했기 때문에, 다른 어떤 나라보다 빠른 속도로 중공업 기반을 갖춤. 이런 투자는 80년대 이후 중국이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면서, 수입대체 공업화에서 다시 수출지향 공업화로 전략을 바꿔 급격히 경공업을 발전시킬 때 보틀넥을 해소하고 설비확장을 추진해 나갈 수 있었던 기반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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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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