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동자대투쟁은 6월항쟁의 정치적 효과를 제대로 이어받지 못했다. 그 주요원인 중 하나는 6월 항쟁 지도부였던 국민운동본부의 급속한 해체. 야당과 재야의 연합체인 국민운동본부는 직선제 개헌이라는 목표가 6.29선언으로 성취되자 노동자대추쟁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임. 야당은 당면한 대선국면을 주도하기 위해 정치 협상에 주력하면서, 정부가 노동자들의 파업을 폭력적으로 탄압하는 데 반대함과 동시에 노동자대투쟁의 확산도 우려. 명망가 중심의 재야세력은 기층, 지역의 노동운동에 대한 통제력이나 동원력을 갖고 있지 못했으며 적극적인 전략을 제시하지도 못했다. 또한 직선제 개헌이라는 국민운동본부의 목표는 한편으로 광범위한 대중들을 거리의 정치로 운집시키는 효과를 발휘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6.29선언을 통해 정부가 그것을 수용한 후에는 더이상 대중적 힘을 모아내지 못하는 한계로 작용. 이런 한계가 결국 군사독재가 타도되지 않은 직선제 개헌으로 귀결된 것.
- 87년에서 91년까지 대략 4년 동안 한편으로는 혁명적 민주화의 열망이 전국적으로 불타오르고 민중운동 세력이 기초적인 조직화의 틀을 마련해나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89년 황석영, 문익환, 임수경의 방북과 관련된 공안통치와 90년 1월 22일 보수대연합이라 불리는 3당합당을 통해 노태우 정권은 민주화 과정을 끊임없이 역전시키려고 했다. 민주화의 힘과 탈민주화의 힘이 교차적으로 대립하는 국면. 4년의 시공간은 민주화가 확대될 것인가, 축소될 것인가를 가늠하는 지배세력과 저항세력의 중대한 결전의 장이었지만, 91년에 결과적으로 민중운동세력은 패배했고, 민주화 과정은 최소한의 극히 제한적인 정치적 민주주의만 허용되는 것으로 귀결됨.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재야,지식인운동은 고립되거나 해체되고, 혁명이라는 화두는 89~91년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와 더불어 한국사회에서 유의미성을 상실했다.
- 음식문화와 관련한 중요한 지표는 GDP 500달러. 이 수준을 넘어서면 경제성장의 성과로 육류소비가 빠른 속도로 증가하기 시작. 이런 변화를 영양학적 전환이라고 함. GDP가 5000달러를 넘기면, 기아와 기생충, 그리고 감염성 질환대신 심장질환이나 암 또는 당뇨같은 식원성 질환이 더 중요한 질병으로 부상하는 역학적 전환이 일어남. 이런 역학적 전환시점에 음식문화 수준에서는 외식산업이 본격적으로 발전. 흥미로운 것은, 정치학자들은 1인당 GDP 5000불을 민주화가 이루어질 경우 그 성과가 쉽사리 역전되지 않는 문턱이라고 말한다는 점. 이런 사실은 음식문화, 경제성장, 정치적 민주화 사이에 모종의 연관성이 존재함을 시사. 1인당 GDP 5000불 시기부터 증가하는 육류소비는 5000불 즈음에 발생하는 역학적 전환의 중요 원인가운데 하나다. 육류소비의 증가가 심혈관 질환의 원인이 되는 지방섭취를 늘리기 때문. 하지만 영양학적 전환을 역학적 전환으로 이끄는 경제성장은 식단의 변화나 외식사업 성장같은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다양한 변화를 야기함. 예컨대 소비와 주택의 개선, 가족구조의 변화와 성별불평등의 완화, 그리고 교육수준의 향상 등 다양한 사회, 문화적 역량의 향상을 동반. 이런 욕구분화와 역량강화는 정치적 수준에서는 민주화를 촉진하는 힘이기도 함. 우리의 경우 1인다 GDP 500불을 넘긴 때가 74년이고, 5000불을 넘긴때는 89년이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이 시점 사이에서 영양학적 전환과 역학적 전환, 그리고 민주화의 진전을 이루었다.
- 원조 밀가루 요리는 다양성에 일정한 기여를 하는데, 그것은 매우 전국적이고도 포괄적인 현상이었다. 밀은 전후의 가난한 시절에 칼국수와 수제비를 통해 널리 퍼졋고, 곧 건면과 인스턴트 라면, 그리고 짜장면을 거쳐 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음식 레퍼토리와 빠르게 접맥되어 갔으며 소비량도 급격히 증가. 국가가 식생활에 개입한 것도 밀소비 증가에 크게 기여. 원조 농산물 결제가 달러 차관결제로 전환되기 시작한 60년대말부터 박정희 정권은 달러 유출을 막기 위해 두가지 노력을 기울임. 하나는 국내 쌀 증산을 위한 통일벼 재배 시도이고, 다른 하나는 여전히 주곡인 쌀 소비를 줄이기 위한 혼분식 장려. 통일벼 사업은 처음엔 성공하는 듯 했지만, 70년대 말 연속된 냉해로 인해 실해하는데, 한국형 녹색혁명의 싱거운 종말인 셈이다. 혼분식 장려는 사실 모자라는 것은 덜 먹게 하고 남는 것은 더 먹게 하라는 매우 간단한 전략. 하지만 사람들의 미각이란 그렇게 간단히 변하지 않음. 따라서 국가가 원하는 수준의 혼분식을 위해서는 대중의 저항을 분쇄하는 강력한 동원이 필요했다. 폭력적이다시피 한 국가동원의 대표적 사례는 학교에서의 혼식검사와 분식강제 그리고 정부에서 수요일과 토요일 점심을 무미일로 지정해 식당에서 밥을 팔지 못하게 강제한 것. 이런 국가개입의 결과는 밀의 영양학적 우수성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되고 밀에 대한 대중적 취향이 강화되는 것.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대기업의 밀수입이 이루어짐으로써 제분업 및 제과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했음. 80년대 음식문화 변동의 중심축이 식단의 육식화였다고 한다면, 60~70년대에는 식단의 분식화라고 할 수 있음. 이런 사실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이른바 분식집이라는, 요리법 내지 요리전통이 아니라 식재료가 그 정체성을 규정하는 음식점의 증가였다.
- 쇠고기 수입을 통한 가격조절 그리고 수입쇠고기와 국내산 쇠고기의 가격차이에서 정부가 얻는 수입을 축산기금으로 운용하며 국내 축산업을 개선하려 했던 정부의 노력이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80년대 들어서도 쇠고기 가격의 등락은 계속해서 발행했지만 사회분위기는 70년대 중반 성난 분위기와 비교하면 한결 약화됨. 그보다 더 눈에 띄는 현상은 쇠고기 소비욕구의 고급화 경향. 그리고 그런 현상의 중심에는 갈비가 자리잡고 있다. 82년 신문들은 신사동과 논현동 일대의 10여개의 대형 가든의 풍경을 전한다. 거대한 주차장, 대형 수족관, 고급 관상수, 인공폭포가 있고, 수백개의 외등과 내등으로 치장한 휘황찬란한 대형 숯불갈비집들은 사회적 부가 집결되던 강남의 자신감과 팽만한 소비욕구를 상징하는 곳이었다. 이런 갈비에 대한 열망과 선호가 어느정도인지는 갈비라는 말이 다름이 아니라 소갈비를 가리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하지만 고급 쇠고기에 대한 소비욕구를 대변하는 갈비는 수요만큼 충분히 공급하기 어려운 부위다. 소 한마리에서 고작 26대가 나오고 그중에서도 아래쪽 갈비는 구이용으로 상품성이 떨어짐. 그래서 사람들은 모자란 갈비에 대한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돼지갈비도 선호했고, 80년대부터는 닭갈비 같은 요리마저 유행. 특히 닭갈비 유행은 사람들이 닭을 먹을때조차 상징적으로 갈비를 먹고 싶어했음을 말해준다. 대중이 갈비소비 욕구를 해소하게 된 계기는 한국의 대미무역 흑자를 이유로 농축산물 개방을 요구한 미국의 압력으로 88년부터 본격화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었다.
- 대중적으로 소비될 수 있는 것, 가격장벽을 상실한 것은 선망의 지위를 잃는다. 갈비의 대중화는 갈비의 지위상실 과정이기도 했다. 갈비 대신 선망의 지위를 차지한 것은 등심이었는데, 거기엔 90년대 본격화된 축산업의 논리가 작동. 본래 갈비를 선호한 이유는 식육이 목적이 아니었던 소를 도축해서 얻을 수 있는 대부분의 부위기 질긴데 비해, 갈비뼈 부위는 운동량이 적은 부위여서 덜 질긴데다 양념이 될 경우 갈비뼈 속의 성분까지 녹아나와 감칠맛이 훌륭했기 때문. 공장식 축산은 운동량이 적고 옥수수 사료를 먹고 자라 근내 지방량이 충분한 어린 소들의 연한 쇠고기를 공급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등심이 소의 등급을 결정하는 부위가 되자 공장식 축산업은 갈비공급에서 유리한 황소를 기피하고 암소와 거세우를 선호나는 방향으로 진화. 이에 따라 갈비는 점차 공급량이 적고 발골과 손질에 비용이 많이 드는, 이윤이 적은 고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80년대를 거쳐 90년대 초반까지 진행된 갈비에 대한 대중소비의 길이 완성되자 전통시대로부터 최고의 식육자리를 지켜온 갈비는 축산업과 식육식당이 선호하는 등심에 그 자리를 내어주었다. 공급측면에서 선호되는 것이 결국은 미각의 변화를 유도한다는 일반적 법칙이 이런 식으로 관철된 셈이다
- 양돈산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두가지 문제 해결이 필요했음. 하나는 돼지고기 소비의 계절적 변동성 극복. 우리는 여름에 돼지고기 먹기를 꺼리는 데 비해 일본에서는 여름에도 돼지고기 소비가 왕성해, 양돈산업의 관점에서 보면 일본수출은 돼지고기 소비를 균등하게 만들어주는 효과가 있었다. 다른 하나는 도축된 돼지고기 부위들이 특별히 기피되는 곳 없이 고르게 소비되는 것. 판매를 위해서는 부위별 요리와 그것에 상응하는 소비가 중요. 적당한 지방량과 씹는 맛이 좋은 목살과 갈비는 구이가 된다. 등심과 안심은 돈가스가 된다. 다리살은 불고기감이나 찌개거리가 되고, 발은 족발이 되고, 뱃살은 기름이 흥건한 삼겹살구이나 수육이 될 것이다. 여하튼 문제는 국내에서 너무 수요가 많아 공급이 따르기 어렵거나 국내에서 별로 선호되지 않는 부위다. 일본으로의 수출은 이런 문제를 일부 해결해 줌. 국내에서도 60년대 이래 경양식집이 소비처가 되어주었지만 그다지 왕성하게 소비되지는 않던 등심과 안신을 일본이 수입해간 것이다.
- 80년대를 통해 식육문화에서 영광의 길을 걸은 것은 닭고기. 이 시기를 지나면서 더이상 닭고기로 불리지 않고 치킨이라는 국제화된 명칭을 얻었고, 끊임없이 새로운 요리법과 유행의 진원지가 되었기 때문. 전체로서의 치킨산업 성공에는 닭고기가 가진 자질과 역사적 그리고 문화적 행운이 작용. 치킨산업 성공의 정점에는 양념통닭이 자리잡는데, 양념통닭에는 해방후 한국인의 미각이 걸었던 모든 행로가 응결되어 있다. 어떤 식육이 특정 시기에 역사적 승리를 얻기 위해서는 일정한 행운이 작용. 특히 경쟁자의 제거는 그런 행운 가운데서도 으뜸이다. 전근대 사회에서부터 비교적 최근에 이르기까지 한국인은 여름에 돼지고기를 소비하길 꺼렸다. 여름에는 소의 도축도 좋지 않았다. 농번기이기도 했지만 여름에 도축된 소는 맛이 떨어졌다. 온대 계절풍 지대의 더운 여름을 나기 위해 한국인들은 닭과 개를 먹었다. 이 말은 식육의 관점에서 개와 닭은 경쟁관계라는 의미. 하지만 이 역사적 경쟁관계는 86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이루어진 도심에서의 개고기 판매금지조치로 인해 쉽게 결판이 났다. 졸지에 뱀탕, 토룡탕과 더불어 도매금으로 혐오식품이 되어버린 개고기를 파는 식당들은 영업을 계속하기 위해 개장국을 사철탕 같은 희한한 이름으로 바꾸는 수치를 감내해야 했다. 하지만 도심에서 밀려난 영세한 음식점들이 국가의 공식적 식육관리 밖에 자리하며 합리적이고 위생적인 도축을 입증할 길없이 개고기를 팔아야 하는 상황, 그리고 애완견 문화가 빠른 속도로 확산되는 상황으로 인해 개고기는 우리의 식육문화에서 급속히 쇠퇴. 하지만 승리를 위해서는 경쟁자의 몰락만으로 부족. 비워진 공간을 채울 능력이 있어야 함. 이 점에서 닭고기는 매우 뛰어난 자질을 보유. 소와 돼지는 사육기간이 길어 공급탄력성이 떨어짐. 이에 비해 닭은 사육기간이 짧음. 품종개량과 사료 발달로 육계의 출하시기는 대락 부화후 35일. 출하에 6개월 이상이 필요한 돼지나 2년 이상이 필요한 소에 비하면 닭은 생산자 관점에서 가장 유리.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것은 닭고기가 적절한 요리법을 거쳐 완성된 음식으로서 미각의 수준에서 환영을 받아야 함. 여름철 백숙과 삼계탕에 한정된 소비를 넘어서야 하는데, 이는 계절적으로 집중된 소비를 연중소비로 확장하는 것이기도 해야 함. 그런 의미에서 닭고기 요리에서 이정표를 세운 것은 60년대 초에 유명세를 얻은 전기구이 통닭이다. 이는 닭고기를 삶는 요리에서 오븐요리로 이전시켰고 닭고기를 겨울에도 즐기기 좋은 음식으로 만들었다.
- 치킨산업 연구자 정은정이 재치있게 말했듯, KFC와의 싸움에서 KFC(코리안 프라이드 치킨)이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은 두가지. 우선 KFC가 하지 않은 두가지 전략을 활용했기 때문. 하나는 배달이고 다른 하나는 맥주와 함께 파는 것. 전자는 식민지 시대 냉면배달에서 짜장면 배달로 이어져온 긴 문화적 전통의 활용이고, 후자는 치맥이라는 하나의 문화를 창조하는 것. 그 다음으로 양념통닭의 개발. 확실히 양념통닭은 분식점이나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일상적으로 떡볶이를 먹어온 사회가 만들어낼 수 있는 음식이었다. 분식을 수용하고 밀떡을 맛나게 먹기 위해 만들어진 음식이 다음 시기 식육문화의 길을 연 것이다. 염지단계에서 글루탐산이 활용되고, 식용유로 튀기고 그럼으로써 35일 키워진 닭의 무미함을 감추고, 튀김옷의 느끼함을 다시 고추장 양념으로 삭히고, 매운맛은 다시 달콤한 설탕과 콘시럽으로 달래고, 실파도 얹고, 마늘도 다져 얹은 이 음식에는 산업과 미각이 서로를 강화하며 달려온 우리의 역사가 담겨 있는 것이다.
- 대중의 동요와 불만 속에서 출현한 전두환 정권은 60~70년대 국가주의 스포츠 정책을 극한까지 밀어붙였다. 81년 8월 서울올림픽 유치결정이 그 결정적 계기가 됨. 정권은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지상과제를 내걸고, 여기서 통치의 정당성을 찾음. 통금해제와 해외여행 부분적 자유화 등 일련의 자유화 조치들도 올림픽 개체를 위한 사전작업의 일환으로 진행됨. 집권 초기 신문, 방송 등 언론계를 통폐합해 권력의 통제아래 두는 데 성공한 전정권은 신문의 스포츠면을 100% 이상 늘리는 등 스포츠 붐을 조성하는 데도 적극적이었다. 올림픽 종목에 포함되는 전략스포츠 분야의 경우 올림픽에서 성과를 내도록 하는 데 모든 초점이 맞추어짐. 전면 개정된 국민체육진흥법은 노골적으로 86,88 양 대회의 지원을 목적으로 했음을 밝힐 정도였다.
- 80년 출범한 전정권은 70년대와 다른 방향의 사회정치를 추구. 유신정권은 두발과 복장까지 단속할 정도로 규제를 강화했으나 80년대는 개방화와 자율화에 초점이 맞추어짐. 야간통행금지 해제와 교복자율화 등이 대표적 사례로, 이는 사회라는 대상에 접근하는 방식의 변화와도 관계 있음. 신군부는 박정권과의 차별화를 도모하는 한편 좀더 대중적 이미지를 위해 사회정의, 사회복지, 민주주의를 강조. 이례로 신군부의 정권접수가 막바지에 이른 80년 8월, 그들은 민주복지국가건설을 내세움. 같은 맥락에서 신군부는 82년부터 시작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이름을 경제사회발전 5개년 계획으로 바꿈. 복지를 중시하겠다는 뜻에서 사회를 추가한 것. 정권은 또 새마을 운동을 대체할 사회정화운동을 출범시켜 도시인들의 생활과 행동에 개입하기 시작. 경제성장 우선이나 민족주의 활용 같은 발전국가의 특성은 계속 이어졌지만 말이다.
- 올림픽은 전정권이 추구하던 정책들의 수행에 매우 유용했다. 예로부터 스포츠는 민족주의를 강화하고 좀더 극적으로 드러내는 장의 역할을 해왔다. 선진국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올림픽개최는 발전주의와 쉽게 연결될 수 있음. 나아가 사회에 대한 국가의 개입과 규율, 시민사회의 정치적 동의 확보에도 매우 유용했다.
- 정권과 언론은 88올림픽이 선진국 도약의 계기가 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을 전하는 한편, 올림픽을 내세워 다양한 갈등을 봉합하고자 했다. 그들은 사회문제로 여겨지는 것들을 없애, 풍요롭고 평화로운 우리 사회의 모습을 세계에 과시하고자 했다. 그러한 정권의 의도가 얼마나 실현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올림픽 이후 풍요를 과시하는 분위기가 더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흐름을 대표하는 공간이 바로 강남이다. 88년 압구정에 1호 맥도날드 체인점가 1호 원두커피 전문점이 들어섬. 강남은 처음부터 중산층 이상의 거주지였지만, 8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이렇다할 기반시설이 없어 베드타운에 가까웠다. 그러나 80년대 중반부터 강남에 백화점들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이곳이 소비의 중심지로 떠오름. 한편 가시권의 무질서와 비위생을 제거하려던 정권의 움직임은 역설적의로 빈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탄생시킨 계기가 됨. 올림픽 준비로 생계를 위협당안 철거민과 노점상들은 89년 전국빈민연합을 결성. 신문기사에 빈민과 위화감이라는 표현이 가장 많이 등장한 것도 이해였다. 올림픽 준비과정에서 행해진 사회정치는 우리 사회에 뚜렷한 차이를 지닌 2개 집단을 부상시켰다. 풍요를 과시하게 된 이들과 감시대상이 되거나 사회로부터 배제당한 이들 말이다. 올림픽을 계기로 전정권이 펼친 사회정치는 사회에 균열의 선을 긋는 것으로 귀결되고 말았다.
- 80년 12만 2683호의 단독주택과 7만 6889호의 아파트가 건설됨. 호수로만 보면 아파트가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6%정도였으나, 80년대의 출발이 되는 이 해는 우리나라에서 단독주택이 아파트보다 많이 지어진 마지막해임. 이후 아파트는, 비록 2000년대 초반 전체 공급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0%까지 떨어지긴 했지만, 언제나 다른 형태의 주택들보다 더 많이 지어졌다. 그런 점에서 80년대는 아파트의 증가세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던 시기이자, 아파트가 향후 한국의 대표적 주거형태로 자리잡게 될 것임을 예측하게 만든 시기.
- 80년대는 비교적 물가가 안정된 시기였다. 그러나 주택과 관련된 지표는 그렇지 않았다. 80년대 초반 초저물가 시대 초고가 부동산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킴. 주택시장을 통제하고자 했던 정부정책으로 인해, 역설적으로 민간기업, 특히 대형 건설사의 주택건설은 태업이라 할 만큼 부진했고, 공급량이 부족해짐에 따라 집값이 상승. 80년 초화화 아파트의 분양가가 평당 100만원 정도였는데, 90년 소형 아파트의 평당 분양가는 215만원에 달했다. 원가연동제를 통해 주택가격이 꾸준히 상승했기 때문. 주택가격이 안정된 시기에도 전셋값은 요동을 쳤다. 87년 1월에는 한달만에 강남 소형아파트 전세값이 30%나 오른 일도 있었다. 87년에는 서울을 포함한 전국 모든 주요도시에서 주택 임대료가 상승. 이 무렵 집값은 안정세를 이어갔던 탓에 전세가가 집값의 70~80%선까지 오름. 춘천, 원주와 서울 강남구 일부 아파트에서는 전세가와 집값이 역전되는 현상도 나타남. 이유는 여러가지 였다. 3저호황, 노동자의 실질임금 상승, 번후 베이비붐 세대의 주택시장 진입, 도시의 2차산업발전과 제조업 노동력의 확대, 정부의 물가통제와 이에 따른 주택건설업계의 공급부진, 집값안정으로 인한 주택매입욕구저하, 증시호황에 따른 부동산 유입자금 감소 등이 전셋값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이 가운데 주택부족 및 가격상승, 세입자의 증가 및 주거상황 악화 등은 정부가 직접 행동에 나서게끔 이끌었다. 87년 민주화 이후 극심한 사회변화 속엣 집권한 노정권은 88년 향후 6년간 200만호를 건설할 것이라 발표. 그럼에도 부동산 가격 상승이 멈추지 않자 이듬해 4월 정부는 다시 30만호를 한꺼번에 공급하는 5개 신도시계획을 발표. 민간건설을 조장하지 않고는 주택공급 목표량을 채울 수 없는 상황에서 정부는 여전히 모순에 빠져 있었다. 한편으로는 토지공개념을 도입해 부동산투기를 잡겠다고 약속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집값이 올라야만 작동하는 민간공급장치를 유지했기 때문. 어찌됐든 88~91년 동안 서울지역 아파트값이 평균 2.6배 상승하고, 당시 건설역량을 뛰어넘는 신도시 주택대량공급계획이 시행된데다 89년 10월 기존의 분양가 상한제가 폐지되고, 원가연동제가 도입되면서 민간건설업체들의 주택공급량도 급증
- 북한은 왜 80년대 중반 전자음악을 본격적으로 수용했을까? 80년대는 북한체제가 가장 안정적이었던 시기. 정권 수립 초기에는 권력을 둘러싼 내부 갈등이 있었고, 60년대에는 중국, 러시아와의 외적갈등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내부의 권력다툼은 60년대부터 김일성에게 권력이 집중되고,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이어지는 권력 후계구도 역시 70년대를 지나면서 안정됨. 여기에 80년대 들어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어느정도 성과를 내면서 경제적 상황도 나쁘지 않았다. 정치와 경제의 안정 속에서 인민들의 문화적 욕구또한 높아짐. 이전까지 북한의 문화는 항일무장투쟁이나 미제와의 전쟁처럼 외부세력과의 투쟁과 승리의 역사를 주된 내용을 했음. 그러나 이제 북한체제 내부의 문제를 다독여줄 문화가 필요하게 된 것. 체제안정으로 인한 자신감 상승과 함께 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의 등장도 북한문화의 새 변수로 다가왔다. 80년대는 광복으로부터 40년, 6.25전쟁으로부터는 30년 가까이 지난 시점이었다. 새로운 세대의 등장은 새로운 시대적 감성을 요구. 우리식 음악으로는 그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음악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김정일은 인민들의 다양한 생활을 반영한 가요가 부족하다고 지적. 음악인들이 인민을 정치적으로 교양하는데 집중하느라 근로자들의 다양한 생활과 정서를 반영하는 데는 관심을 돌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 또한 김정일은 처녀에 대한 노래를 비롯해 여성에 대한 노래도 나오는 것이 없다고 지적하며, 이를 봉건사상의 잔재에 의한 것으로 보았따. 이 밖에도 어린이를 위한 노래나 자장가, 결혼식, 환갑잔치에 부를 노래가 없다는 지적도 있었다.
- 86년부터 거품이 붕괴한 90년까지 5년간 일본은 거품경제에 지배되었다. 실질경제성장률은 크지 않은데도, 부동산과 주식가격이 비정상적으로 폭등해 소비가 크게 늘고 호경기가 이어짐. 달러가치 하락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대일 무역적자가 크게 개선되지 못하자, 미국은 일본 상품 수입규제 같은 보호조치를 취하는 한편, 일본에 시장의 추가개방을 요구. 이에 일본은 나카소네 총리가 직접 나서 미국제품을 사라고 선전하는 것으로 대응. 한편 일본은행은 내수확대를 위해 87~88년 공정이율 2.5% 저리정책을 실시. 엔화가치 상승으로 내부자금이 넘쳐났던 대기업은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필요가 없었다. 반면 엔고에 따른 수출경쟁력 하락으로 제조업 신규투자는 크게 줄었다. 빌려가는 사람이 없어 은행에 돈이 쌓여 있으니 일본시장에는 돈이 넘쳐나는 과잉유동성이 발생. 일본정부는 엔고에 따른 수출시장 위축을 감안해 내수를 확대하기로 했다. 87년 금융완화와 재정확대로 시중에는 더 많은 돈이 풀림. 부동산과 주식가격이 폭등하자, 쌓인 돈을 주체하지 못하던 은행이 나서서 부동산에 대한 직접투자와 부동산 투자회사 및 제2금융권에 대한 대출을 크게 늘림. 여기에 박차를 가한 것이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혁명. 1,2차 석유파동이후 세계 금융시장에는 런던을 중심으로 오일달러시장이 발달. 금리규제를 받는 미국은 예금금리가 5% 정도지만, 규제없이 자유금리 체계를 운용하는 유로시장에서는 금리가 15%까지 치솟음. 자연스레 자금은 금리가 높은 유로시장으로 흘러들어갔고, 국가가 자금흐름을 통제할 수 없는 구조가 나타남. 이에 따라 증권회사들이 예금금리 규제를 받지 않는 고금리 금융상품을 개발하고 은행도 금리규제 철폐를 요구하면서 금융자유화의 시대가 열림. 미국은 84년부터 일본에 금융시장 개방을 요구. 정부도 국제자본의 이동과 금융업무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며 단계적으로 금융자유화를 추진. 이리하여 거품경제 상태의 일본에는 국내자본에 해외자본까지 가세한 투기성 자금이 몰려들었다. 여기에 미국과 유럽의 투기성 금융상품기법까지 도입되면서, 일본 거품규모는 계속 커짐.
- 땅값은 천정부지로 올랐다. 90년 일본 전체 토지가격 총액은 85년 말의 2.4배로 폭등하여 미국전체 토지가격의 4배나 되었다. 물론 전후 일본경제동향을 살펴보면, 55년부터 90년까지 소비자물가가 약 5배 오른데 반해 전국 평균주택가격은 약 72배나 올랐다. 부동산불패 신화가 생기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했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항해 시대 (0) | 2017.10.21 |
---|---|
1900, 조선에 살다 (0) | 2017.10.09 |
한국현대 생활문화사_1970년대 (0) | 2017.07.15 |
한국현대 생활문화사_1960년대 (0) | 2017.07.09 |
한국현대 생활문화사_1950년대 (0) | 2017.07.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