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후와 인류의 생존
- 260만년 전에서 11700년전 사이인 플라이스토세 동안에는 기후변화는 인간이 거주지를 확대해가는 패턴을 정형화했다. 초기 인류는 플라이스토세 동안 심각한 기후변동을 경험했는데, 빙상이 발달하는 빙하기와 빙상이 후퇴하는 간빙기를 연속적으로 겪었다. 플라이스토세 동안 빙상의 성장과 후퇴는 지구공전궤도의 변화와 지구 자전축 경사의 변동, 지축의 세차운동과 같은 밀란코비치 사이클이라 알려진 지구의 궤도변화와 관련. 태양주위를 도는 지구궤도의 모양, 즉 편심성은 지구가 궤도를 도는 동안 태양에 얼마나 가까이 접근하는지를 결정. 완벽한 원이라면 일년 내내 지구가 태양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있겠지만, 편심성의 타원형은 일 년 중 일정 기간은 지구를 태양에서 더 멀리 떨어지게 하고, 나머지 6개월 동안은 태양에 더 가깝게 다가가도록 함. 지구가 거의 원에서 타원형의 편심성을 갖게 되는 것은 아주 느리게, 10만년에서 44만3000년 정도의 시기에 걸쳐 일어남. 지구 자전축 경사의 변동, 즉 지구축의 기울어진 정도는 지구날씨가 계절에 따라 변화하도록 만듬. 현재 기울기는 23.5도인데, 이는 41000년 주기로 변하는 기울기의 값의 범위(22-24.5도)의 중간쯤에 해당. 기울기가 클수록 겨울과 여름의 차이가 커짐. 마지막으로 지구 궤도의 회전운동과 함께, 회전하는 구의 꼭대기처럼 지구 축의 흔들림에 의해 대략 22000년 단위의 기후변동이 일어남. 알려진바와 같이 춘분점세차는 지구가 어느 계절에 태양과 가장 가까워지는 근일점에 도달하는지를 결정. 북반구는 현재 겨울철에 근일점에 접근하지만 11000년 전에는 여름철에 근일점에 접근했다.
- 약 270만년 전에 시작된 이 세가지 사이클은 상호작용을 통해 지구가 빙하기와 간빙기를 반복해서 겪도록 한다. 밀란코비치는 북반구의 고위도 지역에서 여름동안 지구로 들어오는 태양 복사열의 양 즉 일사량의 변화가 대형 빙상의 성장과 쇠퇴의 원인이라 주장. 이 시나리오에서, 여름철 일사량이 최소치에 도달하면 얼음판이 겨울철까지 남아 있게 되어, 시간이 지나면서 빙상이 확장됨. 시원한 여름을 야기하는 최소 기울기의 지구궤도와 여름철에 태양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지게 하는 일그러진 타원형 궤도, 즉 더 큰 비대칭성은 빙상이 발달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을 형성. 반대로 여름일사량이 최대가 되면 얼음은 녹고 간빙기로의 전환이 시작됨. 밀란코비치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70년대 바다 퇴적물에 묻힌 플랑크톤 껍질을 분석하면서 발견됨. 이 껍질들을 구성하는 탄산칼슘의 산소 동위원소들을 분석하면 과거 해양온도와 지구의 얼음 부피를 추정 가능. 동위원소 분석 결과는 밀란코비치 이론에 따라 예상되는 빙하화와 일치하는데, 다양한 지질학적 샘플을 바탕으로 한 수많은 연구들도 역시 같은 결과를 보여줌. 이 증거들은 4만 1천년 주기의 지구자전축 경사변동 사이클이 290만년전부터 90만년 전까지의 기후변화를 지배했음을 보여줌. 그 이후로 빙하기와 간빙기는 10만년 주기의 사이클을 보이는데, 90만년 전 이후로는 그 전에 비해 온도의 격차가 더 뚜렷해짐. 빙하기가 정점에 이를 때는 지구상의 물이 얼음 형태로 전환되므로 해수면 높이가 낮아짐
- 네안데르탈인은 해부학적인 현대인이 도착하기 전부터 유럽과 서아시아에서 살았으며, 현대인들과 적어도 수천 년 동안 공존. 네안데르탈인은 호모사피엔스보다 키가 작았고, 더 다부졌고, 팔다리도 더 짧았다. 그들은 플라이스토세의 호모 사피엔스와 같은 크기의 큰 뇌를 갖고 이었다. 호모 사피엔스가 종국에는 더 복잡한 도구들을 만들어냈지만, 네안데르탈인 역시 어느 정도 정교한 도구를 만들었고, 불을 사용했고, 시신을 묻었따. 그렇다면 그들은 왜 멸종했을까? 이 멸종의 원인이 호모 사피엔스와의 경쟁이나 기후변화, 또는 네안데르탈인에게 특히 불리한 어떤 시스템적 문제, 아니면 이런 요소들의 조합 때문이었을까?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 둘다 마지막 최대빙하기 이전의 최대 빙하기에서 살아남았다. 호모 사피엔스는 2만년 전의 가장 최근 최대빙하기보다 앞선 13만년 전의 최대빙하기에 아프리카에서 존재. 예를 들어, 19만년 전에서 13만년 전 사이의 추운 기후는 작은 규모의 호모 사피엔스 인구에 병목 현상을 유발하고 남아프리카 해안 지역으로 몰아냈다. 네안데르탈인 또한 그들 나름대로 두 번째 마지막 최대빙하기에서 살아남음. 실제로 네안데르탈인의 짧은 손과 발은 추위를 견디는 데 최상은 아니었겠지만 호모 사피엔스보다 추위에 더 잘 적응했다는 증거임.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 둘다 한계 거주지역에선 최대빙하기의 추위속에서 이동하고 살아남기 위해 옷을 필요로 했을 것임. 최대빙하기는 네안데르탈인을 남쪽으로 밀어냈고 유사 종들을 멸종으로 내몰았다. 네안데르탈인은 인구축소로 점점 더 위험한 상태에 처함. 인간은 다른 포유동물보다 유전적 다양성이 낮아 환경변화에 취약. 예를 들어 현대의 호모사피엔스는 침팬지에서 발견되는 것보다 훨씬 더 적은 유전적 변이를 보임. 네안데르탈인의 DNA를 분석한 결과 호모사피엔스보다도 유전적 다양성이 훨씬 낮은 것으로 드러남. 네안데르탈인은 고립된 상태에서 인구가 줄었기에 사망률이 약간만 증가해도 멸종을 향한 길로 내달을 수 있었다.
- 수천년에 걸친 추운 북쪽 기후에서의 생활은 인간에게 작지만 눈에 띄는 신체적 특징을 남겨놓음. 호모 사피엔스에게 이성 파트너에 대한 나름의 선호도가 있었을 가능성을 입증하거나 아예 무시할 수는 없지만, 현재 인종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는 체형이나 피부색, 눈동자색의 차이는 날씨의 영향을 시사함. 예컨대, 창백한 피부는 북쪽 고위도 지역에서 비타민 D를 생성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 수천년의 인간 문명 역사와 비교해볼 때, 인간의 조상이 진화해온 수백만년과 호모사피엔스가 출현한 이후 수십만년은 상대적으로 긴 기간임. 이 긴 시기로부터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인간 조상종들과 초기 인간종들이 모두 기후에 매우 의존적이면서도 또한 기후변화를 견딜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줌. 기후변화는 여러 시기에 걸쳐 자연선택의 압박을 가해 인간이 출현할 수 있도록 했다. 아프리카가 추워지고 건조해지면서 열대우림은 축소되었고, 따라서 더 넓은 범위의 덤불 숲에서 식량을 찾아낼 수 있는 인간개체가 생존에 유리해짐. 결국 사바나 위주의 생활은 먹거리를 찾기 위해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는 개체들과 의사소통에 더 능하고 협력적으로 일할 수 있는 개체들에게 우위를 안겨줌. 아프리카 서식지의 기온강하는 영장류가 출현하고 이후 호모 에렉투스가 출현하게 된 주요한 원동력이었다.
- 빙하기와 간빙기의 교차패터은 호모 에렉투스와 이로부터 진화한 호모 사피엔스, 또는 우리 인간과 가까운 인류종들에게 영향을 미침. 빙상이 물을 가두게 되면서 만들어진 육지다리는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벗어나 외부로 확산하는 것을 도왔다. 반면에 최대빙하기는 인류가 번성할 수 있는 지역을 축소하기도 했다. 인간은 기후에 의존적이긴 하지만, 기후의 변동이나 심지어 급작스런 변화에 대해 상당한 회복력도 역시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간빙기와 최대 빙하기 사이의 변동은 인류 문명이 시작된 이후의 훨씬 짧은 기간에 비해 훨씬 더 큰 규모의 기온과 해수면 변화를 야기. 인류는 또한 몇 차례 거대한 화산폭발과 하인리히 시기의 도래에 따라 갑작스레 발생한 기후변화들 속에서 생존해옴. 심지어 LGM(최후 빙하기) 기간 동안에도 일부 사람들은 영구적 거주가 불가능한 빙상 근처 북쪽 지대에서도 생존에 필요한 자원을 확보할 줄 알았다. 우리는 적어도 기후변화에 의해 진화되어 왔는데, 우리 조상들은 최근의 인류가 경험한 것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기후 시스템을 겪음. 잡식이 가능한 인간은 육식동물을 본떠 사냥 범위를 넓히고 사냥감에 집중하는 능력을 갖추었으며, 고기 이외의 먹거리도 섭취할 수 있었으므로 경쟁관계에 있는 육식동물에 비해 환경에 더 잘 적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러 차례의 거대한 기후변화 속에서도 살아남은, 해부학적으로 현대인과 동일한 당시 인간들은 현재의 우리와 큰 차이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아주 다른 사회적 환경에서 살았다. 그들의 총 인구는 지금의 인구에 비해 작은 규모였는데, 개체 수가 수천명까지 줄어들 정도의 심각한 인구 병목 현상을 거치며 생존 자체를 위협받기도 했음. 마찬가지로 개체수가 감소하던 네안데르탈인은 결국 사라짐. 인구의 급격한 감소는 멸종의 위기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대규모 고정 정착지가 필요없다는 이점도 안겨줌. 당시 호모 사피엔스의 총 인구는 오늘날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보다 훨씬 적은 음식과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위는 유사 종들을 멸종시켰고, 많은 호모 사피엔스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2. 농업의 시작
- 영거 드러이아스의 추위에 대한 국지적 대응이나 홀로세의 온난화에 대한 적응 노력이 농업이 등장한 유일한 계기였다고 규정할 수는 없다. 중동 지역에서만 해도 농업이 한 곳 이상에서 등장했기 때문. 만약 영거드라이아스가 막 인구가 늘어난 상태였던 수렵채집인 집단이 작물을 재배하도록 압박하는 데 기여했다면, 내륙의 고지대 추운 곳에선느 작물을 키우기가 어려웠을 것이라는 추정도 가능. 작물화의 속도와 시기는 아직 불확실하지만, 초기 경작에 대한 증거들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의 여러 곳에서 발견됨. 호밀과 보리, 밀, 콩과류 등의 작물이 이 지역 일대에서 발견됨. 시간이 지나면서 각 지역에서 재배되는 농작물의 수도 증가.
- 중국에서도 홀로세 이전과 홀로세 초반의 기후변화는 농업의 등장가 경작의 잠재력에 영향을 미쳤다. 비옥한 초승달 지역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수렵채집인들은 작물을 경작하기 이전에 곡식을 채집. 발견되는 토기와 맷돌의 제작시기는 멀리 LGM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감. 중국의 후기 플라이스토세 시기 사람들은 채집인으로 살았다. 그들은 사슴, 영양, 야생돼지와 같은 동물들을 먹었다. 발굴된 고고학적 유물들은 그들이 몇몇 지역을 단지 짧게 거치며 거주지를 자주 옮겼다는 것을 보여줌. 또한 농업이 시작되기 수천년 전에 그들은 야생풀에서 식량을 얻었고 맷돌을 사용했다. 영거 드라이아스의 추운 기후에서는 저장 가능한 음식에 더 많이 의존해야 했기에 경작을 시작하게 되었을 수 있다. 홀로세에는 기후가 더 따뜻하고 습했기 때문에 중국에서 곡물재배가 더 촉진되고 활성화될 수 있었다.
- 최초의 인간조상과 그 이후의 인간들은 수렵채집인으로 수십만년 동안 살아오다가 농업으로 전환했는데, 그 전환은 비교적 빠르게 진행. 홀로세에 인간은 한 지역에서 다음 지역으로 이동할 때 작물화된 곡물의 경작을 전파해갔다. 어느 정도의 인간들은 수렵채집인으로서 계속해서 생존했는데, 그들의 인구비율은 계속 줄어 최종적으로 20세기 초반까지도 극히 일부의 사람들은 수렵채집인으로 생활. 사냥과 채집에서 벗어나 농업으로 전환해가는 인류의 규모는 단지 하나의 요인에 의해 변화한 게 아니었다. 많은 연구들이 식물의 재배와 동물의 가축화가 증가한 이유에 대해 여러 설명을 내놓음. 먼저 기후변화가 경작조건에 영향을 미침. 또 다른 역사 모형에 의하면, 인구증가가 농업으로의 전환을 촉진. 이 둘을 연계해, 기후변화가 농업의 확산을 수월하게 했고 그 결과 인구도 증가했다고 설명 가능. 두번째 관점에서 보면, 홀로세에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더 많은 식량을 확보해야만 했다. 실제로 인구는 홀로세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증가하고 있었다. 일례로 유전자 분석에 의하면 동아시아에서는 약 13000년 전에 인구증가가 시작됨
- 넓은 관점에서 보면 홀로세 기후는 곡물경작과 가축사육을 광범위하게 증가시킴. 호모 사피엔스는 우리가 파악하고 있듯이 몇 만년 전부터 오늘날의 인류와 거의 같은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농업화는 홀로세의 기후가 과거 수만년 동안 인류가 겪어보지 못한 수준으로 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LGM시기의 자연환경을 상상해보면 이해가 쉬운데, 인간은 이 시기 다양한 자원을 확보하여 생존하는 능력을 보여주었지만, 당시의 스텝과 툰드라 지역은, 홀로세의 따뜻하고 강수량이 풍부했던 지역과 농사여건 면에서 결코 비교가 될 수 없었다.
- 지축의 세차운동에 의해 태양 복사열이 줄어들면서 습한 아프리카 시기가 막을 내렸고, 이는 인간에게 큰 난관을 안김. 원시 호수가 메마르자 일부 사람들이 이동하기 시작. 일부는 사하라 사막에서 빠져 나와 나일 계곡의 남쪽과 동쪽 지역으로 옮겨감. 나일 강을 다라 인구가 집중되는 현상은 곧이어 이집트의 파라오 등장으로 이어짐. 다른 일부는 변화하는 환경에 가장 유리할 법한 생활방식을 한층 강화해 나감. 급속한 건조화는 식량 확보를 위한 새로운 방식을 보다 확실히 강구하게끔 압박. 땅이 급속히 메말라가는 가운데 건조화 현상이 심화되면서 가축 사육에 타격을 입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농업기술의 발전이 촉진되기도 했다. 사냥과 채집으로 조달할 수 있는 물품이 부족해지자, 가축사육에 의지해 살아가는 방식의 이점은 더욱 커졌다. 바위에 그려져 있는 그림과 도자기에 남아 있는 우유지방성분 흔적을 보면 북아프리카에서 기원전 5000년에 소를 사육했음을 알 수 있음. 당시 사람들은 유당을 소화시키지 못했지만, 버터나 치즈, 요구르트 형태로 우유글 가공해 유제품을 섭취할 수 있었다. 이집트 남서부 고원지대의 와디박트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은 약 5500년 전 급격한 기후변화를 겪었다. 그들은 약 4500년 전 건조기의 마지막 단계를 거치며 그 지역을 버리고 떠나기 전까지 이곳저곳 옮겨다니며 목축민 생활을 했다. 건조화 추세는 인구를 분산시키기도 하고 밀집시키기도 했던 것으로 보임. 서아프리카의 경우 기후가 전반적으로 건조해지면서 니제르강 주변으로 인구가 몰렸고, 이에 따라 보다 중앙집권화된 도시지역이 탄생할 여건이 조성됨
- 근동지역의 인구와 도시의 성장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기원전 2000년 경 인간의 정착 패턴이 더이상 기후의 패턴과 직접적으로 일치하지 않게 됨. 이런 사실은 인류문명이 어떠한 기후충격에도 결코 무너지지 않게 되었음을 입증하기 보다는, 회복력이 크게 향상되었음을 보여줌. 좋은 기후가 농업에 이롭게 작용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건기 동안에도 인구는 계속 증가할 수 있었다.
- 홀로세에 기후와 인류 역사 모두 결정적 전기를 맞이. 이전의 수만년 동안 호모사피엔스는 기후변동이 훨씬 급격했던 시기를 겪었다. 영거 드라이아스 이후에도 기후가 안정적이진 않았지만 그 변동폭은 훨씬 덜해짐. 수천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우리는 이 안정적 기후를 표준으로 인식하고 있음. 인류사회는 홀로세에 들어서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변화를 겪음. 수렵채집인으로 살았떤 인류 종의 후손들은 차츰 농부가 되어감. 수렵채집인들이 순식간에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농사를 짓고 대체로 복잡한 사회에서 생활하는 인구비중이 증가. 최근 들어 농업의 효율성과 생산성이 급격히 높아짐에 따라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 비율은 하락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농작물과 가축사육을 홀로세 이전보다 훨씬 많아진 인구를 부양하는 기본적 수단으로 여김

3. 기후변화, 문명의 부흥과 몰락
- 현대인이 배출하는 양보다는 적긴 하지만 홀로세의 목축인과 농업인들도 온실가스 배출을 증가시켰다. 동물 가축화와 목축활동의 증가는 메탄가스 발생량 증가 가능성을 높였음. 땅을 개간하고 나무를 태우는 것 역시 신석기와 청동기시대에 이산화탄소 배출 가능성을 높임. 03년 윌리엄 루디먼이 처음 제기한 초기 인위적 온실가스 배출가설에 따르면, 인류는 산업혁명 훨씬 이전부터 농경과 토지이용을 통해 기후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 7000년전부터 대기중에 이산화탄소가 증가하기 시작한 것과 5000년 전부터 메탄이 증가하기 시작한 것이 그 근거. 온실가스의 이런 증가 패턴은 이전 간빙기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산화탄소가 증가한 시점은 농업을 위해 토지를 개간하기 시작한 시점과 일치하며, 메탄의 증가시범은 벼농사를 위해 논의 면적을 늘리고 가축사육을 확대한 시점과 일치. 초기 문명이 기후에 미친 영향은 여전히 논의의 대상이긴 하지만, 초기 인류에 의한 온실가스 배출가설은 고대기후학과 고고학의 여러 기록을 해석하는 데 도움이 됨
- 홀로세 기간 동안 국지적으로 건조해진 곳은 피해를 입었지만, 반대로 보다 기후가 안정적으로 바뀐 지역은 문명들에게 이롭게 작용. 예를 들어, 기원전 400년경부터 서기 200년경까지 로마지역의 기후가 비교적 온난하고 안정적이었던 시기를 우리는 로마기후 또는 기후최적기라 표현. 이런 표현들은 복합사회들과 고대의 강력한 제국들이 그 시대의 기후로부터 혜택을 받았다는 생각에서 유래. 물론 이러한 최적 기후의 조건은 상대적이어서, 어떤 제국들에게 매우 불리했던 특정 기후상태가 다른 집단에게는 최적이었을 수 있다. 말하자면 훨씬 추웠던 LGM시기는 순록에게 최적의 기후로 묘사될 수 있음. 따라서 최적이라는 용어 자체가 기후변화와 인류 역사 사이의 밀접한 관계를 암시하고 있는 셈. 고대의 가장 크고 강력한 두 왕국인 유럽의 로마와 중국 한나라는 기후 최적기에 번성했다.
- 로마의 승리에는 너무 많은 요인들이 관여했기에, 최적의 기후조건을 로마가 팽창한 유일한 원인 또는 주요원인이라 단정하기란 불가능. 로마에게 패배한 다른 도시나 국가, 부족연합들도 거의 같은 기후 여건하에 있었다. 로마가 기후상의 변화 때문에 카르타고를 이기거나 갈리아를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님. 다만, 당시의 비교적 안정적 기후는 로마의 왕권과 제국이 수세기에 걸쳐 지속되는 데 도움이 됨. 기후 최적기 동안 로마의 인구와 경작지는 증가. 로마의 인구에 대해서는 전 지역을 일제히 조사한 기록이 없으므로 추정하기가 어렵지만, 대체로 서기 2세기경까지 내내 증가해 최대 5000만에서 7000만에 이르렀을 것으로 본다. 방대하면서도 계속 증가하는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이고 믿음직한 식량공급이 필수적이었음. 넓은 지역에 흩어져 있는 대규모 인구를 먹여 살리는 로마의 역량은 인간의 적응력과 유리한 기후조건에 달려 있었다. 로마는 단순히 성장만 한 것이 아니라 식량을 거두고 분배하는 능력도 키움
- 로마 장군과 황제의 업적 대신 로마 기후최적기의 역사를 보자면, 수목과 올리브, 포도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할 수 있다. 로마시대 저술가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기후 최적기 동안 밤나무류를 비롯한 수목들의 서식지와 올리브 및 포도 재배지의 범위에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서기 1세기의 작가 콜로멜라는 "과거에 그 지역은 계속되는 혹독한 추위 때문에 포도나무나 올리브나무를 키우기에 불안했으나, 지금은 추위가 가시고 기후가 온화해짐에 따라 올리브가 열리고 좋은 포도주가 풍부하게 생산된다."고 적음. 올리브는 새로운 지역에서도 재배되었다. 실제로 로마의 통치 하에 갈리아, 즉 현재의 프랑스 지역에서 올리브 재배가 확대됨. 또한 로마는 포도재배를 늘리기 위해 북쪽으로 땅을 넓혀감. 정복한 지역으로 로마인이 이주하고 정복지의 식민지화가 진행되면서 이런 농작물에 대한 수요가 계속 창출되었는데, 다행히 기후 최적기는 그 농작쿨의 재배지를 확대를 수월하게 해주었다.
- 중국의 역사기술도 주로 역대 왕조들의 흥망성쇠나 지배와 통합방식 등에 초점을 두고 있어서 기후의 역할에 대해서는 강조하지 않지만, 로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당시 기후 최적기의 안정적 기후여건은 농업 생산량 증대에 도움이 되었다. 한나라시대의 농부들은 다양한 형태의 기구와 기술을 이용해 농업 생산성을 높였고, 국가는 관개사업을 지원했다. 농업전문가들은 향상된 농업기술에 관한 개괄적인 기록을 남겼다. 서기 1세기 초반 심각한 홍수가 발생해 인구가 급격히 줄어든 적은 있지만, 당시 인구는 2000만 명대에서 한나라 중기까지 6000만 정도로 증가. 로마 제국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한나라의 경계를 결정짓는 데도 기후가 영향을 미쳤다. 한무제와 같은 야심찬 통치자들은 엄청난 대가를 치르며 중국의 국경을 서쪽을 확장. 한나라는 중국의 농경지를 안정적으로 지배했지만, 서쪽과 북쪽의 건조하고 추운 지역에서는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야 했다. 한나라는 북부 지역에 요새화된 도시를 건설. 북쪽 국경지대에서는 흉노족으로 알려진 유목민들을 다스리는 데 특히 집중. 몽골과 독일 지역의 환경은 매우 달랐지만, 중국인들이 흉노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인식은 로마딘들이 게르만에 대해 지녔던 인식과 같았다. 한무제에게 가혹한 벌을 받은 역사가 사마천은 흉노의 땅을 굴종적인 황무지로 묘사. 중국도 많은 인구를 지탱하기 위해서는 물을 성공적으로 관리해야 했다. 실제로 중국은 황하를 매우 효과적으로 이용했고 그래서 공사 규모 자체가 큰 위험이 되기도 했다. 황하의 홍수 통제사업으로 건설된 제방은 그 규모가 수백킬로에 달했다. 늘어나는 거대인구를 부양하기 위해 농업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면서 토양침식이 증가했고, 이는 추가적 제방건설로 이어짐. 서기 14년부터 17년까지 많은 사망자 발생으로 제국에 위기를 초래한 일련의 대규모 홍수로 인해 제방 시스템이 붕괴되었다. 이때 발생한 발란으로 한 제국의 통치가 잠시 중단되었으나 이후 한나라는 수도를 동쪽으로 옮겨 뤄양에서 다시 일어섰다. 로마제국과 한나라는 최고 전성기에 인류가 자연환경을 이용하는 전반적인 방식에 있어 새로운 이정표를 보여줌. 인류 역사상 그 전까지는 그렇게 대규모로 밭을 갈고, 그렇게 많은 양의 곡식을 재배하거나, 그렇게 많은 가축를 길러본 적이 없었다. 농경직 개간으로 산림이 차츰 황폐해지면서 대기 중 이산화탄소동 증가. 또한 2000년 전부터 대기 중 메탄농도의 상승이 관찰되는데, 벼농사을 위해 논에 물을 대기 시작한 것이 그 주된 이유라 할 수 있으며 가축의 증가 역시 메탄가스 배출을 증가시켰다.
- 제국 몰락의 원인으로 여러 시나리오가 제기되는 가운데 기후변화가 로마 제국과 한나라의 운명을 결정지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기후에 대한 많은 연구는 기후변화가 두 제국의 흥망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로마의 경우, 물을 관리하고 식량을 조달하는 역량을 통해 기후 변동에 탄력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지만, 인구증가는 로마를 결정적 기후 충격에 더욱 취약해지게 만들었음. 로마시대 후기의 불안정한 기후는 농작물 생산에 영향을 미쳤다. 3세기 기후 건조화 현상이 발생한 그 동일한 시점에 로마는 거의 붕괴에 이르러 있었다. 풍작은 어느덧 보기 드문 일이 되었다. 고대 로마 후기에 발생한 이 기후변동이 동쪽 제국에서는 다른 형태로 전개됨. 동부 지중해와 아나톨리아 지역은 높은 습도와 강수량 덕분에 농사여건이 향상되었다. 좋은 기후는 동로마 지역의 문화가 서로마 지역보다 더 오래 견뎌낼 수 있었던 몇 가지 이유중 하나였다. 동로마 제국의 주거지들은 아나톨리아 남서부 내륙 등으로부터 곡물과 올리브, 호두, 과일 등을 풍부하게 공급받았다. 그러나 6세기 말 기후가 변동하자 농부들은 밭과 과수원, 초지를 버리고 떠났으며 유목이 증가했다. 아나톨리아 남부 중앙지역도 고대 로마시대 말 건조기를 맞아 곡물과 호두를 재배하던 농지가 소나무와 삼나무 숲, 초지로 바뀌기 전까지는 인구가 증가. 팔레스타인에서도 골란 고원과 같은 지역은 습한 기후의 혜택을 받다가 7세기에 이르러 농업이 위축되었다.
- 로마제국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의 기후변동도 제국의 운명에 영향을 미침. 제국시대 후기에 발생한 나일강의 홍수는 농사를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중앙아시아에 계속되는 대규모 가뭄은 중국의 왕조와 로마 제국에 대한 압작을 가중시켰을 수 있다. 대규모 가뭄은 여러 부족의 이동을 재촉했던 것으로 보인다. 훈족과 아바르족 등은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로마의 국경까지 서쪽으로 이동해 주요한 군사적 위협을 가했다. 중국 중북부 지역 나무의 나이테를 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중앙아시아는 서기 360년, 460년, 550년 세 차례에 걸쳐 각각 수십 년간의 가뭄을 겪었으며, 각 가문의 시기는 이 지역 부족들의 침략 시점과 거의 일치함
- 로마가 특정 야만인의 한 차례 침략으로 인해 붕괴되거나 패망한 것은 아니지만, 오랜 기간 지속된 전쟁과 난민들의 유입으로 인해 누적된 부담은 서로마 제국을 약화시켰고 동로마 제국도 압박했다. 우리는 흔히 야만인들을 부유한 지역에 침투해 보물을 탈취해가는 약탈자로 여기거나, 또는 문명의 경이로움에 매료되어 그 문화와 풍습을 모방하고 도입하며 때로는 위협하기도 하는 오지의 원주민 정도로 생각한다. 이렇게 오랜 기간 이어져온 야만인들의 습격에 있어서 기후변화는 또 다른 전환점을 제공. 문명에 대한 선망은 여전히 야만족들이 제국의 중심부로 이동해간 이유를 잘 설명해주는 하나의 유효한 요인이다. 그런 한편으로 심각한 가뭄 역시 인구의 이동을 촉발했다.
- 중세 초기 유럽의 기후와 자연. 서로마 제국의 종말과 함께 대부분의 유럽지역에서 고전적인 인간의 풍경도 사라짐. 고고학자들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고대 또는 고전시대에 인간이 거주했던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많은 지역들이 6세기에서 7세기 사이에 버려졌다. 예컨대 프랑스 남부의 론 계곡의 경우, 5세기 당시 인간거주지 수가 2세기 때보다 3분의 1 수준으로 감소. 갈리아의 북동쪽에서는 다수의 로마시대 별장과 농가가 버려졌다. 현재 프랑스의 북부지역에 해당하는 곳은 토지용도로 바뀌었다. 사람들이 거주했던 지역 배후에 있던 경작지 면적은 줄었고 숲지대는 늘어났으며, 농장의 가축들도 로마시대보다 크기가 작아졌다.
- 서유럽에서 로마가 무너진 이후 수세기 동안 인간의 거주지는 계속해서 축소되었다. 흔히들 그 원인을 야만인들의 지속적인 이주 탓으로 돌리곤 하지만, 사실 폭력적인 파괴징후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심한 추위와 폭우와 같은 극단적 기후가 중세 초기 자연환경의 지속적인 변화에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임. 특히 6세기와 7세기에 론 강이 범람하고 알프스 빙하가 팽창했다는 증거가 발견된 바 있다.
- 청동기시대부터 철기시대까지, 홀로세의 기후는 복합사회와 문명의 출현 및 농경에 전반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제공. 복합사회의 규모와 면적은 농경 마을의 출현에서 로마제국과 한나라에 이르기까지 수천년에 걸쳐 커졌다. 도시생활과 복합적인 국가체제가 농작물의 잉여생산에 의해 지탱되는 일반적 패턴은, 최소한 서로마 제국이 급격학 축소되기 전까지는 여러 지역으로 확산됨. 정치적, 사회적 역사는 많은 단절과 불연속성을 드러내지만, 여러 정치적 전화을 거쳐 유지되는 문명의 기본적인 패턴이나 모델은 회복력을 보여준다. 홀로세의 여러 차례 기후변동 가운데 건조화 추세는 심각한 도전을 안겨줌. 가장 극단적인 경우, 몬순벨트의 이동은 인더스 강 유역의 도시사회를 쇠퇴시킨 주요 요인이었다.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아주 오랜기간 유지된 도시문명의 역사는 기후변화에 오랫동안 적응해온 결과이지만, 청동기시대 말기에는 기후변화에 의해 대부분 쇠락하고 말았다. 보다 건조해지고, 지역에 따라 더 추워진 환경은 중앙아시아의 유목민과 반유목민들이 로마제국을 향해 서쪽으로 이주하도록 만들었다. 기후변화와 인간의 활동은 상호작용을 통해 인간의 생활풍경을 만들어냈다. 로마 제국이 농작물과 농경에 대해 남긴 기록들과 설명들은 기후의 역사를 파악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는 한편, 경제와 문화에 대한 로마인의 선호도 또한 작물재배에 영향을 미쳤다.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그런 풍경들을 만들어내는 데 있어 인간의 역할이 더욱 커졌다.

4. 중세시대 기후와 생활
- 무엇이 바이킹을 스칸디나비아로부터 그토록 여러 방향으로 멀리까지 항해하도록 했을까? 그들이 빼앗은 많은 수도원과 놀라운 양의 보물은 그들의 목적이 약탈이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런 관점에서 바이킹은 해적에 가까웠다. 이러한 견해는 유목부족들이 복합사회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을 쟁취하기 위해 초원지대를 가로질러 이주했다는 해석과 유사.
- 바이킹이 보물에만 관심을 가졌다고 평가한다면 역사적으로 올바른 평가는 아님. 그들은 단순히 훔치기 위해서만 항해한 것은 아니었다. 바이킹에 대해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이미지는 아마도 길쭉한 선박이나 전장의 전사일 테지만, 많은 남녀 노르드인들은 땅을 경작하고 가축을 키우는 농부들이었음. 일부는 자기 소유의 땅을 경작했고 나머지는 족장 소유의 땅을 일구었다. 그들은 또한 상업가 무역에도 관여. 예컨대 영국에서 바이킹들은 조르빅 또는 요크라고 불리는 경작지를 세웠고, 그곳에서 광범위한 무역에 종사. 또한 노르드인들은 새로운 정착지를 찾기 위해, 또 찾을 수 있었기 때문에 멀리 항해했다. 바이킹은 긴 보트를 능숙하게 다루었고 먼 거리를 항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동시에 스칸디나비아에서의 생활여건이 그들에게 떠나야 할 동기를 제공했을 수도 있다. 한 가지 해석은 인구는 늘어나는데 경작지는 제한적이고 농작물의 생장기간이 짧았다는 점이 이주를 촉진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바이킹은 스칸디나비아에서 농사를 계속 지었음. 그들은 스칸디나비아 내외부 모두에서 새로운 땅을 개간. 실제로 바이킹의 정착지는 고국인 스칸디나비아에서도 14세기까지 계속 확대됨.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바이킹의 이주를 온전히 설명할 수는 없음. 사실, 역사가들은 한 가지 원인에서 몇 가지 복합적인 흐름이 파생되었다고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바이킹은 단지 기후 때문에 스칸디나비아에서 빠져나온 것은 아니지만, 중세 시대의 지역적인 기후변화는 몇 가지 측면에서 바이킹의 확장을 용이하게 해주었다. 이 기간에 북반구 고위도 지역에서 온난화가 진행되면서 인구가 계속 증가했고, 항해가 쉬워졌으며, 바이킹 식민지 주민들의 삶의 질이 향상됨. 식물의 생장기간이 길어지고 겨울이 짧아지면서 스칸디나비아의 인구가 증가했기 때문에 바이킹은 새로운 땅을 찾아 떠나게 되었을 것이다. 일단 스칸디나비아를 떠나 서쪽으로 항해하다 보면 어느새 해빙이 줄어들어 장거리 항해가 상대적으로 쉬워졌다. 그렇게 북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사이 따뜻해진 기후는 식민지 건설을 위한 더 좋은 조건들을 조성해주었을 것이다. 예컨대, 아이슬란드는 짧은 식물생장 기간, 대규모 빙하, 빈번한 화산활동 탓에 식민지화하기 어려운 곳이었지만, 바이킹이 지배하는 동안 아이슬란드 인구는 약 8만명으로 증가. 과도한 방목, 삼림벌채, 매우 느린 토양회복 속도, 그리고 화산폭발은 그 인구를 계속 유지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 로마제국이나 한나라의 경우와 마찬가디로, 당의 몰락에 대해서도 정치적, 군사적 분석과정에서 기후적 요소를 단순히 배경으로만 다루곤 한다. 하지만 9세기에 사막화가 심화됨에 따라 기후조건은 당나라가 후기에 직면한 문제들을 심화시킴. 중국에서 한 석순을 분석한 자료에 의하면 190년부터 530년까지도 약한 몬순이 지속되는 가운데 몇 차례 최소화된 기간이 있었다. 마야문명이나 당나라의 몰락을 초래햇을 가능성이 높은 이런 몬순 변화는 ITCZ(열대수렴대)가 남쪽으로 이동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기후는 중국의 왕조들과 북방 유목민들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 영향을 미친 여러 요인들 중 하나에 불과했지만, 일반적으로 당나라 후기와 같이 춥고 건조한 기간에는 유목민들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기간에 유목민 집단들은 남부 평야지대 중심부를 향해 세력을 확장했다
- 로마, 한나라, 중세 유럽 어느 곳이든 온난한 기후는 농업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국가가 팽창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 몽골의 경우 정말 중요한 것은 말이었다. 몽골 말은 강인하기로 유명했지만, 수천마일에 걸쳐 군사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많은 말이 필요했고 각각의 몽골 전사는 여러필의 말을 갖고 있었음. 13세기 초 기후가 좋았떤 시기는 습하고 따뜻해서 말을 사육하고 먹이를 조달하기 용이했기에 몽골은 힘을 키울 수 있었음. 몽골인은 또한 군대가 진군하는 동안에도 말의 먹이를 조달해야 했다. 사실 많은 수의 말들을 쉽게 먹일 수 없었던 지역에서는 몽골인이 그리 무섭지 않았음. 말을 먹이는 이러한 어려움 때문에 몽골인들이 남아시아 남쪽과 동남아로 이동할 때는 전투력이 무뎌졌다. 따라서 기후는 몽골제국이 영토를 확장해가는 데 있어 궁극적 한계가 되었던 셈
- 고전시대 또는 축의 시대라 불리는 시기에 유라시아에서 가장 강력했던 제국이 무너진 이후 중세시대를 맞이. 중세시대에 기후와 인류문명이 어떤 상관성을 가졌는지 살펴보면, 지역적 기후의 변화가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음을 알 수 있다. 유럽의 중세 전성기 동안에 기후가 온난했다는 뚜렷한 증거는, 유럽인들의 유럽 내부적으로 또 북대서양으로 팽창해갈 수 있었던 것이 좋은 기후때문이었다는 것을 보여줌. 중앙아시아, 중미, 그리고 현재 미국의 내륙과 남서부지역 등 다른 여러 지역들 역시 지역적인 기후변화, 특히 강수량의 변화가 복합사회에 제약요소로 작용. 인류사회는 홀로세 기간 동안 기후변화에 대한 상당한 회복력을 발달시켰지만, 복합국가들은 오랜 가뭄이 닥칠 경우 필요한 자원들을 충분히 비축하지 못하는 어떤 한계에 봉착하고 만다. MCA(중세온난기, 중세 기후이상기)는 최근 기후변화에 대한 논의에서 자루 거론됨. 특히 인간의 활동이 기후변화의 주범이었음을 보여주는 기후과학적 자료나 발견된 사실들을 공격하는 사람들은 무기로 MCA를 자주 꺼내든다. 그런 주잗들 중 하나는, 당시의 꽤 높았던 기온을 감안하면 현재의 지구 기온상승 추세는 놀라울 게 없다는 것. 이렇게 주장하는 측에서는 MCA 당시의 가장 인상적인 증거를 종종 내세우는데, 가령 영국의 포도농장이나 북미의 빈랜드 사례 같은 것들이다. 포도 경작은 다른 여러 작물들과 마찬가지로 기후변화의 중요한 증거 중 하나가 될 수 있지만, 다른 여러 요인에도 영향을 받음. 농장주들은 소비자들의 취향 변화나 다른 농장과의 경쟁을 피해 포도나무를 심거나 또 그것을 다른 작물로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바이킹이 빈랜드를 언급한 사실이나 그린란드라는 명칭을 지었다고 해서 이것이 과거의 정확한 기온정보를 제공해주는 것도 결코 아님. 산업혁명 이래로 인간의 활동이 지구 온난화를 초래했다는 점을 부정하기 위해 MCA를 이용하는 것의 또 다른 문제점은, MCA기간에는 온난화가 국지적이었다는 점. 어떤 지역들은 오늘날처럼 따뜻했지만 온난화는 지역적인 현상이었고 전 지구적으로는 지금처럼 따뜻하지 않았다. MCA기간 동안 기후가 지역적으로 변했던 이유는 약간의 일조량 증가에 의해 촉발된 기후 시스템 내부의 변수들, 즉 ENSO(엘니뇨 남방진동)와 NAO(북대서양진동)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마지막으로, 중세의 기후변화 원인은 현재와는 달랐기 때문에 중세의 따뜻했던 날씨를 현재의 온난화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근거로 사용할 수 없다. 중세의 인류는 농업과 함께 많은 경제적 활동에 종사했는데, 그중 일부는 이탄이나 석탄을 연료로 사용하긴 했지만 산업혁명 이전이었기 때문에, 내연기관이 있었거나, 화석연료의 채굴과 사용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시키는 성장은 없었다.

5. 소빙하기
- 1400년부터 1850년까지 LIA(소빙하기) 기간동안 전반적으로 추웠던 가운데 가장 추위가 두드러진 시기는 17세기였다. 16세기 후반과 17세기에 LIA의 추위와 기후변동성은 여러 지역에서 광범위한 격변과 위기를 몰고 왔다. 토머스 홉스는 1651년에 발간된 그의 저서 리바이어던에서 당시의 반란과 정권의 붕괴에 대해 비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 성과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산업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그 결과 지구상에 문화도 없고, 항해도 없으며 바다를 통해 들어오던 상품도, 널찍한 건물도, 많은 힘을 들여 이송할 물건도 없다. 지상의 것들에 대한 지식도, 시간의 개념도, 아무런 예술이나 편지, 사회도 존재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불행한 것은 계속되는 두려움과 폭력적인 죽음의 위험, 그리고 고독하고, 가난하고, 고약하고 잔인한, 짧은 인간의 삶." 홉스의 주 관심사는 국가가 강력한 주권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었지만, 그의 글에는 정치적 범위를 넘어서서 당시 광범위하게 퍼진 비관적 분위기가 드러나 있었다. 이후 역사학자들은 "17세기의 전바적 위기"라는 개념을 유럽 역사에 적용. 17세기 동안 수많은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 1618년과 1648년 사이에 벌어진 30년 전쟁은 독일과 그 인근지역을 황폐화시킴. 영국에서는 왕과 신하들 사이에 오랜 알력다툼이 벌어졌고, 1642년과 49년에는 시민전쟁과 혁명으로 비화되어 찰스 1세가 의회에 의해 처형당함. 또 다른 혁명인 명예혁명으로 1689년 제임스 2세가 폐위됨. 프랑스에서는 루이 14세 통치 초기인 1648년에서 53년 사이 프롱드의 난이라 불리는 귀족들의 반란이 일어남. 저지대에서는 네덜란드가 합스부르크 왕조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는데, 합스부르크는 이베리아와 이탈리아에서도 반란에 직면
- 요동치는 기후와 추위, 기근의 경험은 문화와 사회에 영향을 미칠수밖에 없다. 유럽사회와 유럽인들의 정착지가 소빙하기에 대해 문화적, 사회적으로 어떻게 대응했는지는 잘 문서화되어 있다. 우리가 유럽인들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강렬한 이미지와 그들의 문화적 선호도들은 유럽인들이 많은 눈과 얼음 속에서 살았던 소빙하기의 특별한 기후를 떠올린다면 자연스레 느껴진다. 예컨대 스피드 스케이팅은 네덜란드 최고 스포츠 중 하나다. 소치 올림픽에서 네덜란드는 장거리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23개의 메달을 획득. 네덜란드에는 수많은 프로 스피드 스케이팅 클럽과 장거리 트랙 스케이팅 링크가 있다.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보여주는 네덜란드의 이런 기량은 분명 현대적인 것이지만 오래된 전통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그 뿌리는 소빙하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 소빙하기 기간 동안 마녀에 대한 재판과 처벌이 늘었는데, 특히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추운 시기에 마녀사낭과 마녀재판이 급증. 낮은 기온은 통계적으로 마녀처벌 기록과 일치함
- 소빙하기는 많은 국가와 문명사회에 위기를 초래했는데, 결국 가장 선진화된 복합사회는 회복력이 증가했으을 보여줌. 정확한 시점에 대한 논쟁은 있지만, 그리고 가장 뚜렷한 추위의 시기는 지역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혹독한 추위가 있었다는 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존재. 북대서양과 유럽에서는, 소빙하기 초기에 북쪽 고위도 지역과 산간지방 고지대에 사는 사람들이 가장 심각한 위협에 맞닥뜨렸다. 동아시아와 동남아 지역에서는 ITCZ(열대수렴대) 가 이동하면서 강수량을 변화시켜 크메르제국 등이 위기에 빠짐.
- 16세기 말에 시작되어 17세기까지 이어진 강한 추위 기간은 가장 잘 문서화된 소빙하기 단계들 중 하나다. 이 추위는 역사가들이 17세기의 전반적 위기라 묘사한 시기의 원인. 왕조들간의 다툼, 종교적 갈등을 포함한 많은 다른 요인들이 17세기 위기에 기여했지만, 추위는 기근을 악화시켰고, 중국에서는 가뭄이 명나라가 직면했던 여러 어려움을 가중시켰음. 동시에 소빙하기의 오랜 기간 동안 일부 선진 사회는 기후와 상관없이 성장을 구가. 예컨대 네덜란드는 17세기의 위기 속에서도 번영했고, 근대초기의 유럽국가들은 기근의 위협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6. 산업화 시대의 기후변화
- 산업화와 도시화, 그리고 화석연료에 의해 추진되는 경제발전은 기후와 인간과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고 또 재정립. 복합사회들은 근대 초기와 근대시기를 거쳐 오면서 이미 기후변화에 대한 회복력을 갖게 되었다. 농업의 발전, 더 짜임새 있는 행정능력, 더 나은 교통수단은 전성기 당시의 영국과 청나라와 같은 몇몇 사회가 심각한 생존위기의 시대를 끝낼 수 있게 해주었다. 전 세계적으로 산업화가 확산된 새로운 시대는 이러한 경향을 극단으로 이끌었다. 인구가 밀접한 지역은 식량을 충분히 생산할 수 있는 기후대에서 훨씬 멀리 떨어지게 되었다. 산업화 이전에는 런던과 같은 도시들의 인구가 증가하기 위해서는 그 도시로의 물자 공급이 뒷받침되어야 했다. 동물들이 도살장으로 가기 위해 도로로 내몰리는 모습은 산업화가 성숙되기 전에는 항상 볼 수 있었다.
- 산업화와 세계화, 인구증가와 같은 복수의 물결들에 의해 증가하는 이산화탄소 배출은 인간사회를 기후충격에 더 취약하게 만들었다. 수천년 동안 인류사회는 가장 안정화된 홀로세 기후 속에서 기후변동에 영향을 받지 않고 번영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왔음. 하지만 산업화를 통해 인간은 기후 불안정성을 극단적인 수준으로 높였다.

7. 이미 시작된 미래
- 기후변화는 홍수와 가뭄 양쪽 모두 극단적이 될 가능성을 높였다. 따라서 이미 가뭄에 취약한 지역에서는 심각하고 장기적인 가뭄이 발생할 위험이 높아졌다. 극단적인 홍수의 경우가 마찬가지로, 덥고 건조한 어느 특정한 날씨가 기후변화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는 어떤 면에서는 맞는 이야기지만, 많은 극한의 날씨를 어느정도 기후변화와 연결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증명이 되고 있다. 일례로 많은 연구들이 13년 호주의 예외적 더위가 인간이 초래한 기후변화와 관련이 있음을 증명. 10년 러시아에서 발생한 대규모 가뭄의 경우, 초기분석으로는 지구 온난화와의 연관성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이후 진행된 연구는 그 가뭄이 지구 온난화가 아니라면 일어날 수 없었던 것이라고 결론을 내림. 온난화 경향이 개별적 가뭄들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없는 경우에도, 온난화는 물의 증발을 가속화하기 때문에 가뭄을 더욱 악화시키게 됨. 캘리포니아에서는 14년과 15년에 닥친 더위가 가뭄의 원인이 되었다. 강수량이 부족해서 시작된 가뭄이었지만, 더위로 인해 그 가뭄이 지속되었고 더욱 악화됨
- 수온상승과 이에 따른 백화현상, 그리고 수질오염만이 산호초에 위협이 되는 것은 아님. 바닷물이 이산화탄소 증가로 인해 산성화되고 있다. 대기중의 이산화탄소 농도가 증가하면, 수온상승에 따라 용해도가 낮아지더라도, 결과적으로는 해수에 더 많은 이산화탄소가 녹아들어가게 됨. 이산화탄소가 물에 용해되면, 물분자와 반응하여 탄산을 생성하고, 이는 다시 이온으로 분해됨. 전체적 결과는 pH의 감소, 즉 바닷물의 산성화다. 해양은 화석연료 연소에 의해 방출된 이산화탄소이 약 30-50%를 흡수했는데, 이에 의해 해수의 산성도는 산업혁명이 시작된 이후로 약 30% 증가했다. 바닷물의 산성화는 탄산칼슘으로 이루어진 껍질 형성을 억제하기 때문이다. 그 영향은 이산화탄소가 풍부한 해수가 심해로부터 상승하는 퓨젓사운드(미국 워싱턴주 해안의 긴 만)와 같은 해안에서 이미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태평양 북서쪽에서는 광범위하게 산성화된 바닷물이 조개류를 녹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05년경부터 굴의 유충이 대량으로 소멸하기 시작. 이 지역의 조개류 생산자들은 굴의 부화장에서 산도를 인위적으로 조절하여 이에 대응하고 있다.

8. 기후변화에 대한 논란
- 이산화탄소가 계속 증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온을 기록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10년 동안 상승속도가 무뎌졌다. 회의론자들은 이러한 기온상승의 공백을 온난화 추세를 반대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하지만 기후과학자들은 여전히 온난화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지구상에 계속 추가되는 에너지의 상당부분이 대기가 아니라 바다에 축적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설명. 또 어떤 과학자들은 기온상승이 사실은 멈추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한다. 14년까지 수집된 기온 데이터로는 14년이 역사상 기록된 기온으로서는 가장 따뜻한 해였다. 15년은 역사상 가장 따뜻한 해로서 새로운 기록을 세웠고, 바로 뒤이어 16년에 또 다시 새로운 최고기록을 세운 것으로 나타남. 역사상 가장 더운 해들은 2000년 이후로 대부분 발생. 나사의 분석을 보아도, 과거 가장 더웠던 17년 중 16년이 01년 이후에 찾아왔다.
- 기후 예측모델이 개선되고 예측결과에 대한 신뢰도가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불확실한 영역은 여전히 남아있다. 예컨대, 기후모델들은 구름이 따뜻한 세상에서 어떤 모습일지 예측하기 어렵다. 구름이 지구 온난화에 음성적 또는 양성적으로 피드백 영향을 미치는 점이 부분적으로 구름의 불확실성 요인이다. 낮은 높이의 구름이 증가하면 구름이 흡수하는 열 에너지에 비해 더 많은 햇빛을 반사하기 때문에 냉각효과가 온실효과보다 커져 음성적인 피드백 효과가 발생. 그러므로 낮은 높이의 구름이 증가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온난화 추세를 상쇄할 것이다. 반대로, 높은 높이의 구름은 우주로 반사되는 햇빛의 양에 비해 지구의 열에너지를 더 많이 흡수하기 때문에 온난화 효과가 냉각효과보다 더 크다. 현재 기후모델들의 예상은 높은 구름이 증가하여 온난화 추세가 증폭되는 것이지만, 이 분야에 대해서는 여전히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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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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