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한국
- 모순을 수용하고 활용하는 능력은 단순히 교육으로 만들기 어렵다. 오히려 민족 고유의 특질, 예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적 DNA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한국인이 가진 이런 특성은 산업화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폄하되고 숨겨져 왔지만, 그 보물을 발견한 한국 기업 덕분에 지금까지 소중하게 이어져 내 려올 수 있었다. 따라서 한국 기업이 지닌 장단점의 근본을 거 슬러 올라가면 한국인의 특성 또한 찾아볼 수 있다. 한국인이 가진 모순적 특성을 가장 극적인 형태로 설명한 글이 있다. 바로 ‘푸른 눈의 영국 기자'라고 불리는 마이클 브린 Michael Breen 이 쓴 『한국, 한국인』이라는 책이다.
브린은 한국인이 '좋으면서 싫고, 기쁘면서 슬픈' 모순되는 감정뿐만 아니라 이런 주장도 쉽게 수용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나머지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것도 마지못해 수긍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고방식은 둘 중 어느 한쪽을 선택하면서 다른쪽을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결국 가격도 저렴하고 질도 좋은 제품을 요구한다든지, 안전에 필요한 비용을 줄이면서 더 안전해지기를 바란다든지, 일을 꼼꼼하게 하면서도 빨리 해내려고 하는 것이다.
- 필자는 이런 한국인의 '모순'을 경영에 적용해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했다.
▶ 집단 안에서 강한 주체성을 지닌 모순
▶ 개방성과 폐쇄성이 공존하는 모순
▶ 빨리빨리 속 은근과 끈기의 모순
▶ 다양성을 받아들여 융합해내는 모순
공존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모순을 품어내는 것이야말로 전 세계 어디에서도 나타나지 않는 한국식 경영'의 실체와 본질이다.- 오히려 천성적으로 모순적이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욱 적 절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모순은 아래처럼 새로운 능력으로 다시 정의될 수 있다.
▶ 양극단을 모두 유연하게 오가는 능력
▶ 상황에 따라 특정한 능력을 발휘한 후 다시 회복하는 능력
▶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 감각을 유지하는 능력
▶ 서로 배타적인 것을 화해시키는 능력
물리적 세계에서의 모순은 서로 양립할 수 없지만, 정신세계를 가진 사람에게 나타나는 모순은 세상을 바라보고 대처하는 새로운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 일본식 경영'이라는 말이 탄생한 것은 1970년대다. 미국은 당시 일본 기업의 미국 진출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그들의 방식 을 '일본식 경영'이라 명명하며 그것에 대해 구체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경영학자들이 '일본식 경영'이라고 부른 방식은 철저하게 집단적 의사결정이 중심을 이룬다. 이런 시스템에서는 합 의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당연히 의사결정이 지연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일단 의사결정이 이뤄지면 일의 진행 속도가 빨라 지고 그 일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도 적다. 즉 모든 구성 원이 문제에 대해 이해하고 공유하는 시간을 많이 갖는 것이 일 본식 경영의 특징이다.
- 이런 특징은 집단주의와 의사결정 방법으로 설명된다. 집단주의는 개인보다는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하고, 개인보다는 그들이 속한 집단에서 정체성을 찾는다. 일본의 집단주의는 집단의사결정 체제로 연결된다. 집단 구성원의 동의를 먼저 이끌어내고, 그 동의를 바탕으로 행동을 독려한다. 이런 일본식 경영은 1980년대 말까지는 전 세계에서 기세를 떨쳤다. 경영학의 측면에서 본다면, 불량률 제로에 도전하는 고도의 인간 정신이 강조됐고, 완벽한 적기 생산을 위한 기법이 고안됐다. 일본식 경영이 가진 또 하나의 특징은 끊임없는 개선을 통해 완벽을 추구하는 '카이젠Kaizen, 世人'의 문화다. 일본은 창의성을 높이는 것보다 만들어진 아이디어의 완성도를 높이는 방향이나 아이디어가 상품화되는 과정을 개선함으로써 혁신을 추구한다. 문제는 이런 일본식 경영이 1990년대에 접어들며 한 계에 부딪혔다는 점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경영에서는 '원가절감'보다는 '고부가가치 창출'이라는 새로운 요구가 대두됐다. 불량률을 줄이는 것도 중요하고 적기에 납품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점차 세상은 '창의적인 제품'을 만드는 시대로 바뀌었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일본 기업의 어려움이 시작됐다. 한국과 달리 개인의 주체성이 드러나지 않는 집단주의는 창의성 발현에서 빈약한 모습을 드러냈고, 조금씩 개선하는 카이젠으로는 파괴적 혁신을 만들어낼 수 없었다. 오늘날 글로벌 기업 전쟁에서 일본 기업이 많이 쇠퇴한 것은 바로 이런 점에 기인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은 일본과 같은 집단주의에서 출발했으면서도 주체성을 드러내는 모순적 전개를 품고 있었다. 덕분에 창의성의 시대에 조금씩 적응할 수 있었고 더 나아가 시대를 이끌어가게 됐다.
- 일본의 문회심리학자 이누미야 요시유키 大同行는 『주연들의 나라 한국 조연들이 나라 일본에서 한국인과 일본인의 행 등 차이를 규명한다. 그는 두 나라의 가장 큰 차이점으로 '자기 개념'을 꼽으며, 한국인은 주체성 자기 개념'을, 일본은 '대상성 자기 개념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주체성 자기 개념은 자신을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주체로, '대상성 자기 개념은 스스로를 사회적 영향력을 수용하는 대상으로 인식한다. 그에 따르면 일본의 버스 운전사는 지정된 정류장 외의 장소에서 정차하는 경우가 없다고 한다. 정해진 규칙이고, 개인은 그 규칙에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아주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운전사는 이를 따른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버스 운전사가 지정된 정류장 외의 장소 에서 버스를 세우는 경우가 많다. 버스를 뒤늦게 발견하고 뛰어오는 승객을 위해, 혹은 내리는 곳을 지나쳐 하차를 요구하는 승객을 위해 운전사는 경우에 따라 정해진 정류장이 아닌 곳에서 정차한다. 요시유키에 따르면 일본과 한국 운전사의 행동은 자기 개념의 차이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집단주의는 '역동적으로 살아 있는 집단주의'를 만든다. 이는 과거 산업화 시대에는 패스트 팔로워 전략에 적합했으며, 앞으로의 불확실한 미래에는 스스로 대안을 만들고 함께 전진해가는 미덕으로 발전할 것이다.
- 한국의 문화적 뿌리를 설명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키워드는바로 '변격變格이다. 그 안에는 '예술에서의 멋'에 관한 한국인의 관점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말 자체에 일정한 모순이 내포돼 있다는 점이다. 일정한 ‘격格'이라는 것이 기존에 존재하고, 그것으로부터 '변變이 가미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변격이란 격에서 완전히 벗어난 변형이 아니고 격에 갇힌 변형도 아닌, '격과 함께하는 변형'이다. 바로 ‘격'과 변'이 오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상태다.
변격에 대한 설명을 시인 조지훈의 「멋의 연구」를 통해 더욱 자세히 살펴보자. 그에 따르면 멋이란 형식상의 격식을 바탕으 로 한다. 즉 멋은 격에 맞아야 한다. 하지만 격식에만 맞는다고 멋이 갖춰지는 것도 아니다. 격식에는 완벽히 맞지만 멋이 없는 예술이나 행위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격식에 맞으면서도 격식을 뛰어넘을 때, 즉 격이 맞는 변격, 그리고 변격이면서 격에 제대로 맞을 때 우리는 멋을 느 낀다. 조지훈은 이를 '초격미格美’라고 부르는데 '변격이합격 變格而合格, 즉 '격에 들어가서 다시 격에서 나오는 격'을 말한다.
변격의 매력은 자유로우면서도 새로움을 지향하는 데 있다. 관습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늘 새로움을 동경하고, 동경을 위한 창의적 도전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 자유와 파격성은 한국인이 '멋을 느끼는 순간'을 살펴보면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한국인은 무엇인가 강렬하게 전개된 이후 맞이하는 정적 혹은 정지 상태에서의 멋을 느낀다. 예를 들어 가야금 연주에서는 선을 강하게 튕기면서 연주를 할 때보다 연주가 정지된 상태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서 멋을 느낀다. 또 한 가지, 조금 어긋난 데서 오는 멋도 발견할 줄 안다. 이를 두고 민속학자이자 국문학자 정병욱은 멋은 조화를 기저로 '원 상原狀에서 약간의 변화를 줬을 때 느껴지는 일종의 미의식'이라 고 말했다. 즉 한국적 미는 원형을 벗어나서 파격성을 띨 때 가장 확실하게 보인다는 의미다. 한국의 사물놀이가 매우 자유롭 고 파격적인 형태의 즉흥적 흐름이 많다는 점, 그리고 마당놀이 가 진기한 상황에서 파격적인 익살과 해학을 터뜨린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 쿡은 잡스가 전날 180도 다른 입장을 취했다는 것을 잊게 만들 정도로, 어떤 문제에 대해 입장을 아주 빨리 바꿨으며, 매일 그런 것을 봐왔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무엇을 바꾼다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며, 잡스는 자신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그것이야말로 잡스가 가진 능력gift 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잡스의 이런 성향은 오늘날 경영 환경에서 '말 바꾸기를 잘하는 비일관적인 모습이 아니라 '용기'라고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물론 전제 조건이 하나 있다. 일관적 비일관성'이 관철되기 위해서는 비일관성이 있기 전에 일관성이 전제돼야 한다. 잡스는 제품에 관한 확고한 철학, 즉 완전하게 전제된 일관성을 갖고 있었다.
▶ 고객의 니즈를 창조할 수 있는 직관적인 제품
▶ 무결점의 완벽한 제품
▶ 하드웨어, 시스템, 콘텐츠를 통합한 제품
- 이처럼 흔들리지 않는 일관성이 있었기에 잡스는 시시각각 비일관적인 전략 수정을 통해 일관성을 추구할 수 있었다. 리더는 목적을 위해 언제든 방법론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 심지어 반대되는 성격의 방법론으로 변경할 수도 있다. 어제 이 야기한 것과 오늘 이야기한 것이 반대된다는 이유로 일관적이 지 않다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변덕이 아니라 목적을 이 루기 위한 유연성'이다.
- 보통 리더에게 필요한 역량이라고 하면 의사결정 역량, 혹은 의사소통 역량 등이 떠오른다. 그러나 변화가 빠른 시기에는 이 런 역량만으로 모순된 활동으로부터 대처하기 쉽지 않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인지 복잡도'다.
보통 사람은 복잡한 환경에서 의사결정을 할 때, 그리고 대안 이 너무 많을 때 판단을 어려워한다. 이때는 객관적 자료보다는 본인의 경험과 가치관을 우선순위에 두면서 판단할 가능성이 더 높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다양한 가능성을 모두 감안해 서 판단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인지 복잡도가 높은 사람'이다. 이들은 다양한 측면을 살펴보는 넓은 시각을 통해 논리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모순적 상황에서도 두 요소를 함께 고려할 수 있다. 인지 복잡도가 높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일상 의 평범한 상황에서도 차이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