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

로스차일드 이야기

dalai 2024. 12. 7. 06:40

- 산업혁명은 19세기 들어 본격적 궤도에 진입. 산업혁명이 세계로 전파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이 저금리의 금융산업 발전과 해상무역의 발달이다. 그 중심에 유대인들이 있었다.
유대인 이야기의 사실상 클라이막스는 로스차일드가에서 시작함. 이전까지는 스페인계 세파르디가 유대인 사회를 주도해 왔다면, 로스차일드 가문이후 독일계 아시케나지가 그 바통을 이어받는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산업혁명이 불길처럼 번지고 금융업이 전에 없이 번성하던 시대에 탄생해, 성장하고, 시대를 주도. 이 가문은 국제금융의 설립자로 불리는데, 19세기 당시 지역대부업 수준이던 금융업을 온갖 혁신적 아이디어로 글로벌 금융산업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
독일 프랑크푸르트 게토 출신의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1744-1812)가 본격적으로 국제금융업에 뛰어든 것은 18세기말이다. 당시 독일은 통일국가가 아니었다. 독립주권을 가진 235개의 공국과 51개의 자유도시로 나뉘어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이라는 명목상의 느슨한 연방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폴란드 등 중부와 동부유럽국가들이 거의 포함되었다.
그 무렵 유럽은 18세기 후반에 시작된 산업혁명으로 대자본이 필요해졌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무역증가에 다른 대금결제 필요성도 증대. 게다가 나폴레옹 전쟁에 휩쓸려 있던 시기였는데, 역사적으로 전쟁이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듯 금융산업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이때 새로운 금융기법들이 탄생. 
전시에 유대인은 부를 쓸어모으는 데 탁월한 창의적 재능을 발휘. 창의적이란 원래 평화로운 시기보다는 비상시에 더 빛을 발하는 법이다. 로스차일드는 갓 10대를 벗어난 다섯 아들을 유럽 주요국의 5대도시, 프랑크푸르트, 빈, 런던, 나폴리, 파리에 보내 어음결제은행을 세움. 은행이름은 로스차일드 상사로 메디치가문 이후 최대의 민간 다국적 은행이다. 

- 마이어는 68세나이로 사망. 그는 "우리 집의 자산은 일체 공표하지 말라.", "돈이야말로 유대인을 구원하는 단 하나의 무기라는 것을 늘 명심하라"같은 유언을 남겼다. 그가 남긴 엄격한 유언은 다음과 같다.
1. 가족 구성원은 서로 협력하고 사랑하며, 다투지 않는다.
2. 가문 은행의 요직은 반드시 가문 내부에서 맡아야 한다. 남자만이 상업활동을 할 수 있다.
3. 사촌끼리 결혼함으로써 재산의 외부유출을 막아라.
4. 재산상황을 절대 외부에 공개하지 말라
5. 재산 상속시 변호사를 개입시키지 말라.
6. 집안의 모든 장자가 우두머리다. 가족이 만장일치로 동의할 경우에만 차남을 후계자로 할 수 있다.
7. 유서내용을 위반하는 자는 재산 상속권 일체를 박탈한다.
유언장에 따르면 "그 어떤 경우든, 법원이나 다른 기관이 나의 재산을 조사하는 것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음을 분명히 밝힌다. 동시에 유산의 평가에대한 어떤 법적 조치나 공표도 금지한다. ... 누구든 이 명령을 따르지 않고 가족간 분쟁을 야기하는 어떤 종류의 행동이든 취하는 자는, 나의 유언에 대항하는 것으로 간주될 것이며, 그 행동에 대한 처벌을 받을 것이다." 라고 했다.이 유언장 문구는 이후에도 로스차일드 가문 후손들의 유언장에 예외없이 그대로 반복됨.
이 유서 때문에 오늘날까지 로스차일드 일가의 자산은 비밀에 싸혀 있음. 당시 상황은 이해할 만하다. 그들은 수많은 유력인사와 몇몇 정부와 은밀히 거래했다. 이런 비밀을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한 서류 이외에는 보존하지 않았고, 이마저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파기하곤 했다. 반유대주의를 촉발할 어떤 증거도 남겨두려 하지 않은 것이다.

- 큰 아들 암셸은 나중에 통일독일의 초대 재무장관이 된다. 또한 1822년 오스트리아 황제에 의해 남작에 봉해졌으며 프랑크프루트 로스차일드 상사는 독일 금융의 중심이 된다. 현재 프랑크푸르트는 유럽중앙은행이 자리잡은 유럽 금융의 중심지다. 둘째 살로몬은 빈에서 최고의 직위에 오름. 셋째 나탄은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금융인이 됨. 넷째 카를은 이탈리아 반도를 장악했고, 막내 야콥은 프랑스에서 공화정과 완정에 걸쳐 군림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문장은 한 손에 질끈 묶여 있는 다섯개의 화살이다. 이 화살들은 전 유럽으로 흩어져 집안의 부를 팽창시키던 마이어의 다섯 아들을 의미. 화살처럼 빠르되, 하나로 묶여 있어 어느 누구도 부러뜨릴 수 없는 강한 힘을 지닌 형제애를 의미함.

- 정보망과 수송 네트워크 구축
나탄이 구축한 전용 고속정보망에 힘입어 형제들은 유럽 전체를 커버하는 통신과 마차 수송 네트워크를 완성. 통신은 주로 비둘기를 사용. 날씨가 나빠 도버해협에 비둘기를 날리기 힘들 때는 배를 띄움. 
당시 로스차일드 집안은 영국과 프랑스를 가로막는 도버해협에 자가용 쾌속선을 여러 척 대기시켰다. 나탄은 남들보다 정보를 1시간이라도 빨리 전달해 줄 때는 수고비를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나탄 곁에는 악천후에도 바다로 나서는 용감한 선장이 많았다. 이들은 몇 세대에 걸쳐 로스차일드가에 봉사하며 대대로 충성심을 이어감.
로스차일드 집안은 유럽대륙을 종횡무진 내달릴 수 있는 마차수송 네트워크도 보유. 로스차일드 집안 전용 파발마는 어느 말보다 빨리 전 유럽을 누비고 다님. 그들은 남들이 잘 때 마부를 바구어 밤을 새워 달렸다. 남들이 닷새 걸릴 기도 나흘이면 충분했다. 이 하루차이의 정보가 금융세계에서는 승패를 갈랐다. 예를 들어 혁명 소식을 하루 먼저 접한 로스차일드는 그 나라 채권을 먼저 팔아 치웠고, 다음 날 소식을 접하고 폭락한 채권을 저녁에 다시 헐값에 사들였다. 하루만에 채권의 양이 서너배로 증가. 이들은 보안을 위해 정보를 전하는 편지에는 이디시어와 암호를 섞어 사용.
형제 중 하나가 손해를 보면 다른 형제가 이를 만회. 영국 철도사업에서 실기하면 오스트리아 프랑스 철도건설을 추진하는 식이었다. 그들에게는 실패도 유용한 정보이자 재산이었다.
당시의 정보망과 수송네트워크는 오늘날 인터넷 만큼이나 획기적 시스템이었음. 남보다 한발 빠른 정보를 이용해 나탄은 금과 통화투기로 대박을 터뜨림. 이는 믿고 맡길 수 있고 한마음처럼 움직일 수 있는 형제들끼리만 가능한 제휴플레이였다.
그들의 최대무기는 뛰어난 정보수집력과 더불어 분석력. 융자를 제공할 때는 사전에 유럽의 정세를 분석한 정보를 토대로 치밀하게 조사하여 변제능력을 철저히 검증. 특히 전쟁이 끊이지 않던 격동의 유럽에서 정세분석은 생존과 직결됨. 이들은 정보망을 이중삼중으로 점검하고 분석하는 로스차일드 시스템을 탄생시킴.
당시 군소 유대금융가문들은 이런 로스차일드 가문의 정보 네트워크 일원이 되는게 꿈이었다. 로스차일드 가문과 정보만 공유할 수 있다면, 금융시장의 강자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기 때문. 적어도 정보부재로 실수하는 일은 막을 수 있었다.

- 결국 전쟁은 나폴레옹의 약탈적 금융과 성숙한 채권시장에 기반을 둔 영국 금융 사이의 싸움이 되었다. 영국은 많은 채권을 발행해 순조롭게 전비를 마련. 거기에 대항해 프랑스가 1806년 대륙봉쇄령을 내렸으나, 이미 나폴레옹은 패배의 길로 접어든 셈. 상인과 금융인 전체를 적으로 삼은 꼴이니 말이다. 세상에서 돈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음. 
게다가 나폴레옹이 대적했던 나라는 군자금을 빌려주는 로스차일드가가 있었다. 물론 로스차일드는 나폴레옹에게도 군자금을 빌려주었으나 상대국에 비해 적은 금액이었음. 나폴레옹 전쟁 당시 각국 정부에 1억프랑을 지원하며 나폴레옹을 패하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나탄이었다. 
유대인의 해방을 앞당긴 나폴레옹은 "유럽에는 오직 하나의 힘이 존재한다. 그것은 로스차일드다"라고 한탄함. 결국 전쟁은 자본력 싸움이다.
미국 노동운동가 리오 휴버먼은 자본주의 역사 바로알기에서 자본주의와 노동자의 역사를 쉽게 명쾌하게 다룸. 이 책은 단순한 역사서가 아니라 고전경제학으로부터 시작된 경제학 이론을 그 배혁이 되는 역사발전에 비추어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음. 이 책에서 휴버먼은 "역사책을 보면 이런저런 왕들의 야망과 정복 그리고 전쟁에 관한 이야기가 장황하게 이어진다. 그런 책들의 강조점은 완전히 틀렸다. 왕들의 이야기에 지면을 할애하기보다 왕권 배후에 있는 진정한 힘, 곧 그 시대의 상인과 금융업자의 이야기에 지면을 할애하는 편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 금융역사를 보면 1815년을 분기점으로 큰 변혁이 일어남. 네덜란드 금융시장이 주도하던 1600년부터 나폴레옹 전쟁이 종식되는 1815년가지는 정부공채와 동인도회사 같은 소수 독점기업의 주식만 유통됨. 하지만 1815년 이후 금융시장은 세계화되는데, 이 중심에 로스차일드상사가 있다.
1815년 워털루전쟁 이후 유럽 내 런던 로스차일드의 위상은 매우 높아짐. 나탄은 영국이 유럽 동맹국들에게 제공한 자금 4200만 파운드의 절반을 조달할 정도로 금융계의 강력한 권력자가 됨. 그뿐 아니라 영국 정부의 최고 채권자로 등극하여 공채발행을 주도하고 영란은행 최대주주가 되어 실권을 장악. 영국 통화공급량과 채권금리를 로스차일드가 좌지우지하게 됨.
워털루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찾아오자 시장이 전반적으로 살아나 상승장, 즉 불마켓이 형성됨. 특히 콘솔채를 비롯한 채권 가격이 상승해 주식시장 역시 불붙기 시작. 이때 주식시장이 확대되어, 처음에는 운하, 다음으로 철도 주식이 금융시장이 성격을 바꾸어 놓음.
이런 상승기에 힘입어 로스차일드 일가는 채권시장과 금시장에서 대출을 동원한 투자, 즉 레버리지 투자를 한 것으로 보임. 이후 형제들의 정보분석력과 단합된 힘으로 국채와 금, 환거래, 주식, 광산투자 등에서 연이어 성공함으로서 로스차일드 일가의 자산은 매년 기하급수적으로 증가.
세계 금광업을 장악한 로스차일드는 영국을 1819년 세계 최초의 금본위제 국가로 만듬. 그 무렵 로스차일드가 세계 주요 금광산을 사들여 금을 거의 독점적으로 공급할 때였다. 이렇게 1819년부터 영국 파운드화는 공식적으로 금과 연계됨. 세계 최초로 금본위제가 시행된 거이다. 로스차일드는 이 여세를 몰아 아예 세계 전체를 금본위제로 유도했다. 유럽 주요국들과 미국이 금본위제 시행에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영향이 지대하게 작용.
로스차일드 가문은 금융 중개수준을 넘어 금융와 외혼시장의 글로벌화를 통해 시장의 성격을 바꿈.

- 파운드화, 기축통화가 되다
역사가 시작된 이후 금의 생산량은 감소세이 있다. 1800년대 당시 금은 덩치가 커진 전 세계의 모세혈관까지 흘러들어가기에는 양이 부족. 따라서 금을 대신할 강력한 화폐가 필요해짐. 이때 영국의 파운드화가 가장 먼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영국은 1819년 금본위제를 채택하여, 영란은행이 파운드를 금과 바꿔주는 제도를 실시했기에 파운드화는 금에 맞먹는 지위를 갖고 있었다. 당시 영국 파운드화는 세계무역 가운데 60%를 장악했고, 런던 금융시장은 전 세계 투자의 절반을 소화했다. 영국이 최대교역국이자 주요 운송국이고, 해외자본 수출국이었으니, 영국 화폐가 국제지불수단이 되는 것은 당연. 이렇게 파운드화는 세계기축통화로서 그 힘을 과시하게 됨.
이런 배경에도 로스차일드의 역할이 컸다. 일설에 의하면 로스차일드 가문의 총자산은 약 1억 3600파운드에 이르렀는데, 그중 나탄이 9천만 파운드를 소유. 당시 영국 최고부자로 알려진 왕가의 재산은 500만 파운드 정도. 이때부터 화폐발행과 금가격을 포함한 중요 결정권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수중으로 들어감. 당시 영국 정부는 화폐발행권한이 없었기에 국채를 발행해 로스차일드 소유 영란은행에서 돈을 빌려쓰면서 연 8%의 이자를 내야했다. 영국의 세금뿐 아니라 국채가격과 통화공급량 모두 로스차일드 가문이 마음대로 주물렀던 것. 대영제국의 경제와 금융뿐 아니라 더 나아가 세계경제가 통째로 로스차일드 가문에 들어간 셈.
로스차일드는 각국의 통화를 상품으로 보고 형제간의 네트워크를 활용해 무위험 차익거래를 통해 꾸준히 수익을 올림. 그뿐 아니라 외환시세를 주물러 그 환차 수익 투기에 열을 올림. 그리고 채권시장의 글로벌화와 외환시장의 글로벌화를 동시에 추진하여 런던을 그 중심시장으로 만듬.

 

- 로스차일드가는 금본위제하의 파운드를 기축통화로 만들어 그 세력을 세계로 넓힘. 특히 미국산업발전의 돈줄이 되어 미국 근대산업사와 금융사에 공헌. 이른바 소로스 같은 현대 헤지펀드들이 주로 애용하는 투작기법인 매크로투자가 로스차일드로부터 시작된 것임. 로스타일드 가문은 거대금융에 의한 승자독식시대를 열어 천문학적인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참고로 이후 1870년대 영국의 재정지원을 받고자 하는 많은 나라가 금본위제로의 이행을 서둘렀고, 독일(1872), 프랑스(1878) 등이 영국을 따라 금본위제를 채택. 그리고 1879년 미국이 금본위제에 합류함으로써 세계 주요국이 모두 금본위제를 채택하게 됨. 금본위제는 국제결제 시스템의 효성을 높여 세계 경제발전에 기여

- 유대인은 이슬람 세계에서 500년간 번영을 누렸다. 그러던 중 이슬람 근본주의의 발흥으로 박해받게 되자 스페인 왕국으로 건너갔고, 그 후 해가지지 않는 제국을 건설하며 통일왕국을 이룩한 스페인이 기독교 왕국을 표방하자 다시 전격 추방됨. 이때가 1492년이다.
스페인에서 쫓겨나 종교의 자유를 찾아 척박한 저지대로 몰려간 30여만명의 유대인이 인구 100만의 소국 네덜란드를 당대 중상주의 물결을 타고 최강의 강소국으로 만드는 기적이 100여년만에 펼쳐짐. 네덜란드가 가난한 어업국에서 해운강국으로, 중계무역과 금융강국으로 변신하는 가운데 자본주의 씨앗인 주식회사, 주식거래소, 중앙은행이 탄새이
유대인은 네덜란드의 독립전쟁을 치르며 치열하게 싸움. 특히 전시자금을 모으기 위해 채권시장을 발전시킨 덕에 시중금리가 2-3%대로 떨어짐. 이로 인해 투자가 활성화되어 세계 무역네트워크가 만들어지고, 세계가 하나의 시장으로 커가며 서로 왕래하게 됨.
이후 이들 무역 네트워크와 금융시스템이 후진국 영국으로 통째로 옮겨지는 소설같은 일이 실제 역사에서 벌어짐. 유대인의 이동과 함께 암스테르담의 세계 무역네트워크와 금융시스템이 도버해협을 건너 런던으로 이식된 것.
이런 환경에서 로스차일드 가문이 나타나 세력을 확장하며 유럽대륙을 하나의 금융권으로 묶은 것임. 멀티내셔널 금융그룹의 탄생이었다. 이들은 정보를 토대로 돈을 벌었다. 전쟁, 산업, 외환, 상품, 지역 등에 관한 모든 정보가 돈과 직결되었다. 그리고 정보를 통해 이들이 축적한 천문학적인 자금과 저금리는 산업혁명을 전 세계로 전파. 글로벌 금융의 효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