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메멘토 모리 나이듦과 죽음에 관한 로마인의 지혜

dalai 2023. 5. 31. 15:51

- 인명표에 기초해 산출한 고대의 예상 수치로 알 수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신생아의 대략 3분의 1이 출생 한 달 이내 사망했다. 절반 정도는 5세가 되기 전에 사망했다. 주요 사망 원인은 질병, 영양 결핍, 열악한 위생으로 추정된다.
(2) 전체 인구의 약 50퍼센트가 20세 이하였다.
(3) 전체 인구의 근 80퍼센트가 50세에 도달하기 전에 사망
했다.
십대가 장악한 세상이라니, 악몽 그 자체다! 오늘날과 사뭇 대조적이다. 오늘날에는 65세 이상이 전체 인구의 20퍼센트를 넘으며 18세 미만보다 많다.
- 로마 지배계층에 관한 놀라운 사실은 본인이 선택하면 굉장 히 이른 나이에 경력을 시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비긴티비리(vigintiviri, 20인회) 소속 원로원 의원의 자제는 17 세나 18세에 1년짜리 관직을 맡을 수 있었는데, 4개 위원회(처 음에는 6개였다)가 모여 법무, 조폐, 도로 관리 따위의 안건을 다루었다. 키케로가 법정에서 열일곱 살 검사에 맞서 의뢰인을 변호한 기록도 있다! 일부 비문에는 20대 초반에 사망한 남성 이 이미 변호인 및 법학자(법률 자문위원)로 일한 경험이 있다 고 적혀 있다. 의사 직도 마찬가지다. 14세에 수련을 시작해 5년 후 아직 십대의 나이로 의사가 된 일부 사례가 있다. 정계에서 는 17세에서 25세의 젊은 나이에 아주 대단하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권위 있는 자리를 맡은 사례들이 보이는데, 일례로 소 플 리니우스는 18세에 어느 소도시의 보호자가 되었다. 재무관이 되는 것은 중대한 첫걸음이었고, 어떤 시기에는 24세에 재무관직을 맡을 수 있었다. 네로는 황제에 취임했을 때 17세였고 콤모두스는 19세, 엘라가발루스는 14세였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세 명 다 대재앙을 불러왔다.
- 노인들에게 나타나는 어려움으로는 호흡 곤란, 카타르성(점액이 다량 배출되는 염증옮긴이) 기침, 방광 폐색, 배뇨통, 관절염, 신장 질환, 어지럼증, 중풍, 심각한 체중 감소, 전신의 심한 가려움증, 불면증, 장과 눈과 코에서의 묽은 점액 배출, 시력 감퇴, 녹내장으로 인한 시력 상실, 청력 상실이 있다.
여기에 켈수스는 이질과 만성 설사 증세를 덧붙였고, 고대 사 료에 언급된 그 밖의 흔한 증상으로는 치아 손상, 발기 불능, 통 풍, 소화불량, 좌골신경통 등이 있다.
짧은 인생은 자연이 내려준 가장 큰 축복이라는 대 플리니우 스의 말이 전혀 놀랍지 않다. 정신과 신체의 기능 쇠퇴로 고통 받는 사람들은 살아도 '산다'고 하기가 어렵지 않은가.
- 산산이 흩어진 재산
고대의 부는 거의 전적으로 토지 형태로 유지되었다. 토지를 소유한 자는 (1) 땅을 농부들에게 빌려주거나 (2) 하인을 구해 땅을 경작하고 농산물을 팔아 막대한 이득을 올렸다. 이는 금융 거래와 더불어 로마 사회에서 대부분의 귀족 가문이 지위와 신 분을 유지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문제점이 따랐다. 가장이 사망하면 자녀들이 재산을 한몫씩 나눠 갖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그런데 대가족의 경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토지가 잘게 쪼개지면서 이 가문은 결국 거대한 부가 가져다 주었던 '영향력'을 모두 잃을 터였다.
따라서 귀족들은 재산이 지나치게 분산되지 않도록 가족 수를 적게 유지했다. 하지만 이 또한 위험했다. 높은 사망률 때문 에 남자 상속인이 한 명도 없게 될 가능성이 증가했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토지는 딸들과 함께 몽땅 사라져버렸다. 딸들은 자 기 몫으로 받은 토지를 결혼할 때 지참금으로 다른 가문에 들고 갔기 때문이다. 그렇긴 해도 이 문제는 적절한 시기에 양자를 들이는 것 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사실 어느 세대에나 귀족 가문의 약 75퍼센트가 자취를 감추 고 새로운 가문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그러므로 가장은 토지를 누구에게 어떤 조건으로 남길지 잘 생각해야 했다. 그리고 노년 이 길어질 경우를 대비해 어떻게 해야 가족들이 그를 잘 보살펴 줄지에 관해서도 필시 열심히 궁리했으리라.
- 배역을 연기하다
인생을 무대로 보는 생각은 고대에 흔했다. 고대인은 사람이 일생 동안 수많은 가면을 쓰고 벗을 수 있다고 여겼다. 사람을 뜻하는 영어 단어 person이 '무대 가면, 극중 인물'을 뜻하는 라틴어 단어 persona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은 절대 우연이 아 니다.
세네카 역시 이 관점에 동의했다. 세네카는 우리 대부분이 인 생을 살면서 수차례 가면을 바꾸며 오로지 현자들만이 자기 자신의 배역을, 그러니까 자신에게 맞게 설계되었거나 스스로 적응한 배역만을 연기한다고 강조했다.
인생에서 이야기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가 어떻게 연기되느냐다. 어디에서 멈추든 상관없다. 멈추고 싶은 데서 멈추되 다만 좋은 결말을 붙여라.
여기에 핵심이 있었다. 사람은 일생 동안 한 편의 연극을 상 연하며 죽음은 이 연극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아무리 좋은 연극이라 해도 자칫 결말이 전체를 망칠 수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관객이 되어야 하며(세네카) 자신이 선택한 배역에 걸맞게 살기 위해 그리고 죽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 세네카가 강조한 점은 죽음의 순간이란 미리 연습할 수 없다 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기회는 한 번이 전부고, 좋은 죽음은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에 달려 있었다. 임종을 앞둔 아우구스투스황제는 주변에 모인 사람들에게 인생이라는 희극에서 맡은 배역을 잘 연기해낸 자신에게 박수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 목적을 성취하다
카토는 인간의 삶은 자연의 계획을 따른다는 말을 반복하며 이 주제를 마무리한다. 소년에게는 나름의 관심사가 있다. 청년 의 관심사도 그와 같을까? 아니다, 청년 역시 그 나름의 관심사 가 있다. 그 관심사가 인생의 다음 단계로까지 이어질까? 아니 다. 그 단계에는 그 나름의 문제가 있으며 이는 노인이 갖는 관 심사와도 다르다. 그리고 노인의 관심사가 하나둘 사라지면서 "천명을 다한 인생이 비로소 죽을 때를 맞이하는 것”이었다.
대화록은 영혼의 불멸성에 관한 몇 가지 고대 이론들과 카토의 최종 결론으로 마무리된다. 그 일부를 소개한다.
삶이 우리에게 주는 혜택은 무엇일까? 아니, 오히려 삶은 우 리에게 노고를 주지 않던가? 삶의 실질적인 이점이 무엇이든 삶이라는 잔은 여전히 채워지거나 혹은 한도에 도달할 걸세. 나는 내가 살아온 삶을 한탄하고 싶지 않네. 여러 배운 사람 들이 그러하듯 나 역시 살아온 삶에 불만이 없으니까. 나는 내가 아무런 목적 없이 태어났다는 생각이 들 삶을 살지 않았 거든. 더 나아가 나는 삶을 떠날 때 집이 아닌 어느 여관을 나서듯 떠나겠네. 자연이 우리에게 내준 것은 영구적인 집이 아니라 여행중 잠시 머무르는 숙소에 불과하기 때문이지.
- 지배계층 사람들은 대중과 달리 대지를 떠도는 사자의 원혼이나 사후의 고통 따위를 좀처럼 믿지 않았다. 키케로는 "죽은 자가 아직 살아 있다"고 믿는 사람들을 가리켜 인과율에 무지하 거나 헛것에 홀렸으리라고 했다. 망자가 삶의 안락함을 박탈당 했다고 믿거나 지하세계에서 영혼이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비이성적이긴 마찬가지였다. 키케로는 이런 믿음으로 인해 치러지는 의식에 관해 재담을 남기기도 했다. "슬프다고 머리카락을 쥐어뜯는 행동은 참으로 어리석다. 대머리가 된다 고 슬픔이 덜어질 리 있으랴." 대 카토(키케로의 저작에서 인용, 177쪽 참조)와 소크라테스는 이 문제에 관해 희망적인 불가지론적 관점을 보였다.
세네카는 우리가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하듯이 죽을 때도 행 복하게 죽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다시 말해 죽음을 기 쁘게 맞아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불가피한 운명과 싸우려 드는 것은 무의미했다. 그러한 시도는 죽음의 순간을 비참하게 만들 뿐이었다. 세네카는 말했다. "우리를 삶과 묶어주는 끈은 단 하나뿐이니, 바로 삶에 대한 사랑이다.”
- 지금까지 보았듯이 고대인은 사후세계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체로 지하세계를 단죄나 보상이 이루어지는 심판의 장소로 보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한 가지 중요한 결과 를 낳았다. 고대 종교에서는 신앙심이 점수로 매겨졌다고들 말 한다. 제대로 된 의식을 제때에 치르는 것이 신앙생활의 전부였 고, 그저 그것만 잘 지키면 별문제가 없었다. 사후세계에 어떠 한 기대도 없으니 이번 생에서의 성패가 중요했고, 성공은 과연 신들이 내 편에 있는지에 달려 있었다. 결과적으로 누군가가 신 들을 인정하길 거부하여 신들의 지위를 손상시켰다면 그는 처 벌을 받기 위해 사후세계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었 다. 처벌은 지금 이곳에서 당신을 찾아올 것이었다.
- 어떤 식으로든 사람이 죽음을 피해갈 수 있을까? 고대 신화는 이 주제를 탐색했다. 바빌로니아 신화의 영웅 길가메시는 불사(不死)를 추구하여 지하세계로 내려갔고, 여신 칼립소는 트로이아 전쟁을 마치고 아내 페넬로페에게 돌아가려는 오디세우스에게 불멸을 약속하며 자기와 함께 머무르라고 설득했다. 여신 테티스는 아들 아킬레우스를 죽음으로부터 구하려고 스틱스 강에 담갔으며 하지만 발뒤꿈치를 담그는 것을 잊어버렸다 빼어난 가수 오르페우스는 사랑하는 에우리디케를 다시 데려오 려고 하데스로 내려갔다.
- 핵심은 이 모든 시도가 수포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리스인 들은 이 문제에 관련해 그 어떤 환상도 품지 않았다. 그들이 보 기에 필멸과 불멸 사이의 골짜기에는 절대 다리를 놓을 수 없었 다. 그러려고 시도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히브리스 (bubris, 자만심)'며, 피하고자 했던 운명을 오히려 더 확실하게 불러올 방법이나 다름없었다. 에오스(새벽의 여신)와 그녀의 인간 연 인 티토노스의 신화는 신들도 가끔 실수할 때가 있음을 보여준 다. 에오스는 티토노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었지만 영원한 젊 음은 깜빡하고 주지 않았다.
- 계절에 따른 자연의 삶과 죽음은 인간의 삶과 죽음에서 그대 로 반복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로마인이 죽음과 마주할 때 기쁨 으로 전율했다는 뜻은 아니다. 세네카나 루크레티우스 같은 사 상가들이 걱정할 필요 없다고 애써 안심시키는 것만 봐도 확실 히 그렇다. 하지만 로마인은 죽음을 피할 방법이 있다고 생각지 않았으며 죽는다는 사실에 불만을 품지도 않았다. 죽음은 자연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이었다. 죽음과 '싸운다'는 생각은 그들에 게 어불성설이었다. 세네카는 물었다. 당신이 자연에게 복종해 야겠는가, 자연이 당신에게 복종해야겠는가? 
- 우리는 앞서 키케로가 노년의 죽음을 잘 익은 열매가 자연스레 떨어지는 것이나 오랜 여행을 마치고 뭍으로 다가가는 여행자에 비유한 것을 보았다. 스토아주의자였던 마르쿠스 아 우렐리우스 황제는 이렇게 썼다.
삶이란 얼마나 하찮은가. 어제는 한 방울의 정액이었고 오늘은 시신 아니면 재다. 그러니 너는 이 덧없는 순간들을 자연이 너에게 의도한 대로 쓴 다음 흔쾌히 쉬러 가라. 때가 된 올 리브 열매는 자신을 잉태한 대지를 축복하고 자신에게 생명 을 준 나무에게 감사하며 땅으로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