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왜
- 다만 미국 정치인들이 워싱턴을 너무 존경한 나머지 워싱턴 사후 그를 신의 반열에 올려놓는 모순이 생겼다. 미 국회의사당돔 천장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는데, 워싱턴은 중앙에서 마치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처럼 당당하게 앉아 좌우에는 각각 자유와 승리를 상징하는 여신들이 앉아 있고, 주변에는 연방 정부 초기의 13주를 상징하는 여성이 있다.
이름하여 <워싱턴의 신격화The Apothcosis or washingon>란 작품이다. 국민이 주인 되는 나라를 만든 사람을 정작 후대의 국민이 신으로
추앙한 아이러니가 발생한 것이다
- 민주주의가 발전하는데도 미국에서는 '대통령 영웅화'가 멈 추지 않는다. 이런 관행이 약화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강화됐다. 빌 클린턴의 선거 전략가였던 딕 모리스는 "미국은 역사적으로 군주제를 경험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재미있는 오락거리는 할리 우드에서 찾으려 하는 반면에 백악관에서는 어떤 위대한 지도자 를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 실제로 "구체적인 정책 또는 개별 법안에 대해 미국인 과반수는 민주당의 입장을 지지하지만, 반대로 미국적 가치로 표방되는 커다란 이념적 담론에 대해서는 공화당의 입장을 더 선호한다" 라는 분석이 있다.7 일반적으로 진보와 보수 정당의 스펙트럼이 거의 겹치지 않는 현대 정당 시스템에 비취 볼 때 상당히 이례적 이다. 특히 미국의 선거조사를 통해 정부 개입의 적정한 수준에 대 해 물어보면 미국민의 인식은 진보, 보수의 견해가 35 대 65 정 도로 보수에 휠씬 가깝다. 하지만 거시경제 정책은 진보, 보수가 60 대 40, 교육 정책은 70 대 30, 환경 정책은 75 대 25로 진보에 더 가깝다. 결국 평균적인 미국인은 추상적 수준에서는 보수적이 고 구체적 정책 수준에서는 진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공화당과 민주당은 이를 토대로 각각의 포인트를 공략해 왔던 것이다.
- 루이지애나를 손에 넣은 미국은 서쪽으로 내달려 마침내 태평양 앞바다까지 진출했다. 1776년 동북부 대서양 연안에서 독립을 선언한 지 70여 년 만에 대륙 반대편 태평양 연안까지 4828킬로 미터나 되는 거대한 대륙 국가를 완성했다. 1819년 즈음 당시 국 무장관 존 퀸시 애덤스는 일기장에 "결정적으로 태평양 방향의 경계선을 획득한 것이 우리 역사에 위대한 시대를 열게 한다"라 고 적었다.
그런데 루이지애나가 없었다면? 당시 미국은 동부 지역만으 로도 이미 유럽의 여느 나라보다 큰 나라였다. 다시 말해 이미 큰 평수의 1주택을 소유하고 있었음에도 만족하지 못한 셈이다. 미국은 왜 이렇게 집요하게 부동산 투자에 나섰을까. 미국의 국제정치학자인 조지 프리드먼은 "제퍼슨 등은 대륙 국가로서의 힘이 없으면 미국은 파괴되리라고 믿었다. 북아메리 카에 과거에 존재했던 수많은 국가와 정착지와 마찬가지로"라고 분석했다. 미국이 북아메리카의 일부로 남는다면 자력 생존이 불가능하다고 전망했다는 뜻이다. 북미 대륙에 유럽처럼 수많은 국가가 어깨를 맞대고 빼곡히 들어찬다면, 그들과 마찬가지로 갈기갈기 찢어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게다가 영토가 갑절로 커지면서 미국 안보에 전략적 깊이를 더해 줬다. 동쪽으로는 대서양, 서쪽으로 태평양이란 엄청난 자 연 장벽을 갖게 되면서 대륙 밖의 어떤 나라도 미국을 넘보기 어 려워졌다. 그럼에도 미국은 안보를 더 확실히 하기 위해 19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캐나다를 정복할 것인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했다고 한다. 실제로 미국인은 1812년 캐나다를 정복하겠 다는 의도로 공격한 적이 있다."
- 봉쇄 정책'은 미국 외교관이었던 조지 F. 케넌이 1947년 7월 에 처음 언급한 용어다. 케넌은 1946년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 사관에서 근무하면서 소련의 팽창주의를 간파한 뒤 본국에 사전 경고를 보낸다. 국제정치학 분야에서 유명한 바로 그 `긴 전문(o8 Telerm'이다. 케넌은 이후 자신의 신분을 감춘 채 X'라는 필명으 로 이 내용을 외교 잡지 <포린어페어>에 기고하는데 핵심은 다 음과 같다. "미국의 대소련 정책의 주요 요소가 소련의 팽창 경 향을 장기적이고 끈기 있으면서도 확고하고 주의 깊게 봉쇄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20 케넌은 소련이 팽창하려는 의지는 서구 진영이 무엇을 하든 말든 아무 관계없는 소련 정권 내부의 정치적 이유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냉전 시대를 연구한 전문가 존 루이스 개디스에 따르 면 케넌은 "소련의 당 노선은 국경 너머의 상황에 대한 객관적 분석을 토대로 정해지지 않는다. 소련 내부의 필요에서 비롯된다. 크렘린 지도자들은 정교하지 못해 억압 말고는 달리 통치하는 방법을 모른다"라며 바깥 세계를 "사악하고 적대적이고 위협적 인 존재"로 그리는 것이 그러한 핑계를 정당화하는 방편이라고 분석했다. 21 아울러 케넌은 이런 내부 요인 때문에 당시 가장 강력한 경쟁 자였던 소련이 언젠가는 소멸할 것으로 예측했다. "크렘린이 여 전히 발하는 강한 불빛이 실제론 소멸하고 있는 별자리의 강한 잔광이 아니라고 그 누가 확언할 수 있겠는가.. 소비에트 권력 은 자신이 파악하는 자본주의 세계와 마찬가지로 그 안에서 자 별의 씨앗을 품고 있으며, 이 씨앗이 싹을 띄우는 과정이 착착 진 행되고 있다는 가능성은 여전히 남는다. 내 생각에는 이 가능성 이 유력하다."22 케넌의 이런 생각은 곧바로 미국의 대소런 정책으로 구체화 됐다. 케넌이 '소련 봉쇄 정책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다.
- 남북전쟁 이후 미국 경제는 통계학을 놀라게 할 속도'로 비약 적으로 발전했다. 미국은 1865년부터 1895년까지 30년 동안 미 국 역사뿐 아니라 세계 자본주의 역사상 보기 힘든 경제 성장률 올 기록했다. 우리나라가 한강의 기적'을 만든 1961년부터 1981 년까지 20년 동안의 연평균 경제 성장률은 대략 10퍼센트 정도 였다. 독일의 '라인강의 기적'도 1950년대 8퍼센트의 성장률을 보인 것이 최고 수준이었다. 그런데 남북전쟁 직후 30년 동안 미 국의 경제 성장률은 무려 연평균 15퍼센트를 찍었으니 세계사에 서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서 같은 시기 유럽에서는 지정학적 위기가 폭발하지만, 멀리 떨 어진 미국은 동족상잔의 비극을 빠르게 봉합하면서 자본주의 발 전에 박차를 가한다. 그린스펀은 이 시기를 자본주의의 승리'라고 규정한다. 그는 "미국이 뭉친 여러 위대한 순간"이 있었지만 "남북전쟁에서 남부가 북부에 항복하면서 한때 분열되었던 나라 가 온전한 자본주의 공화국으로서의 운명을 받아들인 순간보다 중요한 순간은 없었다"라고 평가한다. " 결국 남북전쟁이 지금 의 미국을 앞당겨 준 셈이다. 미국이 급속하게 경제 성장을 이루는 데는 무역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확대 재생산 체제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1869년 미 국에서 소비되는 공산품 중 14퍼센트가 수입품이었으나 1909년 에는 그 비율이 6퍼센트로 감소했고, 1869년 모든 제조업 부문에서 수입품의 비중이 10퍼센트 이상을 차지했으나 1909년에는 그 비중이 절반 이하로 감소했다. 쉽게 말해 북미 대륙 안에서도 얼마든지 자급자족이 가능한 규모의 경제를 이룩한 것이었다
- 코네티컷대학교 철학과 교수 마이클 린치는 '트럼프 현상'을 사회학자 앨리 러셀 혹실드의 줄서기 비유로 설명하기도 했다. 보수적인 백인들은 스스로를 아메리칸 드림을 위해 참을성 있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자신과 다른 외모를 가진 사람들이 '새치기를 하고 있 다는 말을 든게 된다. 게다가 해안 쪽에 사는 부유한 사람들이 자기들보다 휠씬 앞에 서서 피부색 짙은 사람들을 위해 자리까 지 맡아 두고 있다고 한다. 백인들은 이 상황을 보고 울화통을 터트린다. 그러자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도리어 나 무라자 백인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차 오른다. 바로 그때 백인들 의 자리를 맡아 놓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다른 사람들이 그 자 리를 채어 가지 못하게 막아 주겠다고 약속하는 사람이 나타난 다. 바로 트럼프다. 결국 트럼프에게 투표한 사람들이 느끼는 울 화는 그들이 마땅히 누려야 하는 앞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는 인식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 실제 미국은 제국에 가갑다. 지난 반세기 넘게 전 세계 구석 구석에 미군을 보냈고 미국식 자유주의 질서를 국제 표준으로 만들었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중 타국을 상대하는 행정 조 직의 이름을 외교나 외무가 아니라 국무라고 사용하는 곳은 미 국방에 없다. 건국 초기에 내무와 재무 역할도 담당하다가(우리로 따지면 외교부와 행정안전부, 기획재정부 등이 결합된 거대 부서였다) 점차 이들 기 능이 떨어져 나간 뒤에도 이름이 그대로 굳어졌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굳이 이름을 역할에 맞게 고치지 않는 건 미국에게는 외교가 곧 국내 문제라는 인식이 반영된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의 거장 한스 모겐소 역시 미국이 느끼 는 국제 관계의 위상을 국내 권력 관계로 설명한 바 있다. 모겐 소에 따르면 어느 나라든지 대다수 국민은 권력 행사의 주체가 되기보다 소수의 타인이 추구하는 권력의 대상물이 되는 경우가 휠씬 많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은 충족되지 못한 권력욕을 국제 관계에 투사한다는 것이다. 국제 무대에서 국가가 권력을 추구하는 것과 자신의 권력욕을 동일시함으로써 대리 만족을 얻 는다는 주장이다. 모겐소는 "미국 국민이 자기 국가의 권력을 생 각할 때면 옛날 로마 시민이 자신을 로마의 권력과 동일시하고 나아가 자신을 이방인과 대비해 나는 로마 시민이다'라고 얘기 할 때 필시 느꼈을 기고만장한 기분과 비슷한 감정을 맛보게 된 다"라고 말했다. 경제 산업적 능력과 물질적 풍요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강대국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기분이 몹 시 좋아지고 굉장한 긍지를 느낀다는 것이다
- 투키디데스 함정'만 알면 미중 패권 다툼을 전망할 때 말 그대로 함정에 빠질 수 있다. 비슷한 듯 다른 함정이 이란성 쌍둥이처럼 존재하는데, 바로 킨들버거 함정Kndlebergser Tap'이다. 한마디로 기 존 패권국의 역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급부상하는 신흥국이 패권 국의 지위를 차지할 의지가 없는 경우 오히려 국제 체제가 불안 정해진다는 시각이다. 미국의 경제학자 찰스 킨들버거는 <대공황의 세계 1929-1939> 에서 1930년대 대공황의 원인을 영국과 미국의 패권 교체 시기 권력의 진공 상태에서 찾았다. 경제 패권국은 개방된 시장을 유지하고, 장기 대출과 환율을 안정적으로 관리하며, 거시 경제 정책을 주도적으로 조율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글로벌 금융 위기가 발생할 경우 유동성 공급에 적극 나서는 '최후의 대출자' 역할을 해야 한 다고 주문했다. 다시 말해 패권국이라면 어느 정도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경제 체제 안정을 위해 직접 나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불안정한 국제 경제 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서는 패권국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절실했음에도 당시 패권국 영국은 하고 싶어도 힘이 없었고, 힘이 충분한 미국은 하고 싶은 의사가 없어서 대공황이란 파국을 맞았다고 봤다. 결국 국제 사회 리더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 공공재를 제 공할 능력과 함께 경제적 부담을 책임질 각오가 필요하다는 것 이다. 그래야 약소국들도 패권국올 믿고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더라"라는 것이다. 이 런 킨들버거 주장은 국제정치학의 패권 안정론과 자연스럽게 연 결된다.
- 투키디테스 함정과 마찬가지로 킨들버거 합정에도 킨들버거 는 없다. 약 50년 후 국제 관계 전문가인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학교 교수가 자유주의 시각에서 패권 다툼과 세력 균형을 설명 하기 위해, 미국의 소극적 대웅이 국제 사회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설명하기 위해, 그리고 이미 유명해진 투키디데스 함정의 현실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킨들버거 함정이라고 명명한 것 이다.
조지프 나이는 1~2차 세계대전 사이 전간기를 '킨들버거 함 정'으로 설명한다. 기존 패권국 영국은 역량이 부족하고 급부상 하는 미국은 패권국이 될 의지가 없는 경우 국제 체제가 불안정해진다는 것이다. 실제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이 터진 건 신흥 강자로 부상한 미국이 패권국 지위를 극구 사양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사실상 미국의 책임에 무게를 둔, 미국 맞춤형 원 포 인트 이론인 셈이다. 두 이론은 다른 듯 비슷하다. 투키디데스 함정이 패권 추구에 따른 충돌 가능성에 초점을 맞춘다면, 킨들버거 함정은 패권 회 피에 따른 불안전성에 초점을 맞춘다. 1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은 이미 패권국으로 부상했지만 아닌 척했다. 국제 경제나 체제 안 정을 위해서는 패권국으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하고 때로는 손해 도 기꺼이 감수해야 하는데 그게 싫었다. 미국은 고립주의 전통 에 따라 북미 대륙 안에서만 편하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사는 데 지장이 없기 때문에 구태여 무거운 책임을 질 이유가 없었던 것 이다.
- 서방의 민주 국가는 수십 년 동안 탐욕에 눈이 먼 나머지 그렇지 않다는 증거가 계속 쌍이는데도 중국의 굴기가 도움이 된 다는 믿음에 집착해 쉽게 속아 넘어갔고 상당한 관용까지 보였 다. 서방은 중국이 굴기하도록 돕다 못해 부추기기까지 했다. 지금 되돌아보면 미국의 낙관론이 얼마나 근거 없는 자신감 이었는지 바로 드러나지만 냉전이 끝난 직후에 중국의 부상을 냉철하게 전망한다는 건 전문가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 이다. 카터 행정부에서 국가안보 담당 특별보좌관을 지냈던 국 제 전략 분야의 거장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중국이 막 WTO 가입하려던 2000년대 초반 중국의 폭발적 성장률이 향후 20년간 지속되리라는 보장이 없다고 내다봤다. 브레진스키는 "최적의 상황을 가정한다고 할지라도 2020년 까지 중국이 주요한 영역들에서 경쟁력 있는 세계적 국가가 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라며 다만 "중국은 순조롭게 동아시아 지 역에서 우세한 힘을 지닌 지역 강국이 되고 있다"라고 전망했 다. 중국이 아시아 역내 강국은 될지언정 미국과 대립하는 글 로벌 양강 구도는 어렵다는 전망인데, 지금 보면 보기 좋게 빗나 갔다. 중국의 생각은 달랐다. 천하를 호령하는 제국의 꿈을 오랫동 안 미국 몰래 품고 있었다. 그렇다. 중국은 패권을 꿈꾸는 전형 적인 현상 변경 국가였던 셈이다. 싱가포르 리콴유 총리는 "급상승하는 중국은 당연히 미국의 패권에 도전할 것"이라 며 "중국이 아시아에서 일등 국가가 되고 결국은 세계 최강국이 되려고 열망하지 않을 리가 없다"라고 예견했다.
- 중국의 꼽은 미국 주도의 국제 질서를 깨야 이뤄지는 꿈이었다. 그런데 당장 미국과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자유주의 경 제 질서의 혜택을 받아 급성장하고 있지만 아직 갈 길이 멀었다. 1980년대 덩샤오핑은 중국이 평온한 국제 환경과 글로벌 경제 에 접근하는 길을 간절히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세계 유일 초강 대국 미국과 소원해지는 건 자멸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리석은 일 이라는 걸 알았다. 중국이 선택한 건 속내를 숨기고 조용히 때를 기다리는 것, 즉 덩샤오핑이 천명한 도광양회 전략이다.
- 그런데 미국이 중국 견제를 위한 아시아 재균형 전략은 본격 적으로 추진하면서 허브 앤드 스포크는 한계에 직면했다. 기촌 체제는 역내의 안보 이슈를 다루는 데 최적화되어 있기 때문에, 유라시아와 인도태평양으로 진출하려는 중국은 봉쇄하기에는 효율적이지 않았다. 중국을 견제하려면 역내 동맹국들의 군사력 을 하나로 통합해 운용하는 게 더 효과적이었다. 동맹 네트워크 확대는 미국의 군사 자산을 통합해 규모의 경 제를 실현하고 미국의 국방 예산 부담을 감소시킬 수 있다. 그 뿐 아니라 일본에 더 많은 재량권을 제공하여 상대적으로 미국 의 전략적 부담도 덜게 된다. 나아가 동북아 한미일 3각 구도는 남중국해, 서아시아 등을 거쳐 유럽으로도 확장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미국은 전 지구적으로 새로운 안보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다. 결국 냉전 시기에는 첨단을 달리던 허브 앤드 스포크 체제 는 이제 몸에도 안 맞고 유행도 지난 올드 패션이 됐다 그래서 고안된 게 이른바 격자형 안보 틀이다. 람 이매뉴얼 주 일 미국대사는 2024년 4월 "지금까지 구축해 온 '허브 앤드 스포크 동맹 구조'는 현 시점에 적합하지 않다"라며 "중대한 전환의 시기 를 맞아 '격자 형 hlceclike 구조'를 구축하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5 그가 언급한 '격자형 구조' 전략은 일부 거점 동맹국 중심의 방식을 탈피해 다양한 소그룹별로 혜처 모여 중국을 더 촘촘히 견제하는 방식이다. 쿼드와 오커스^uKus(미국.영국.호주안보 동맹) 이외 에도 한미일, 미.일.필리핀 3국 회의 등이 그것이다 다만 허브 앤드 스포크 체제는 양자 성격이 크기 때문에 미국 이 아무리 원하더라도 상대의 의사를 무시하고 그만두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미국 입장에서는 다행스럽게도 일본과의 이해가 일치했다. 일본도 미국 못지않게 중국을 견제하는 데 진심이다. 전쟁할 수 있는 보통 국가'를 꿈꾸며 아시아에서 다시 영향력을 회복하고 싶은 일본과 그런 일본을 앞세워 아시아에서 군사력을 효율적으로 운용하고 역외 균형을 이루려는 미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그러자 미국은 2012년 6월 한미 외교 국 방장관 회담 공동선언과 2013년 10월 미일 외교 국방장관 회담 등을 잇따라 열고 한미일 3각 군사 협력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현재의 명백한 위협과 앞으로 떠오를 잠재적 위협에 북한과 중국을 모두 포함시킴으로써 한미 동맹과 미일 동맹의 목표를 일치시키는 사전 정지작업을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