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의 미래
- 2017년, 세계보건기구(WHO)는 전 세계적으로 증가하는 추세 인 우울증이 21세기 선진국에서 가장 심각한 질병 중 하나가 될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했는데, 이는 문명화의 종료라는 문제와 밀 접하게 연관되어 있기도 하다.
우리 인간은 '의미'를 에너지로 삼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의 미도 의의도 느끼지 못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긴 힘들다. 우리 사회가 앞으로 커다란 위기에 맞닥뜨리게 된다면, 틀림없이 경제 적인 쇠퇴와 물질적인 부족이 아니라 의미의 상실이 그 원인일 것이다.
19세기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는 근대 화로 인해 물질적 풍요를 손에 넣은 사람들이 의미의 상실에 빠 질 것이라고 예언했다. 니체는 물질적 풍요로움이 증가하는 한편 과학의 발전으로 종교라는 규범의 해체가 진행되는 세계에서 서 민들은 의미의 상실이라는 깊은 병에 걸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니 체의 주장에 따르면, 의미를 상실한 사람들은 니힐리즘에 빠지게 된다. 니체는 니힐리즘을 '무엇을 위해서?'라는 물음에 답하지 못 하는 상태라고 정의했다.
니힐리즘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최고의 가치가 상실된다는 것 을 뜻한다. 거기엔 목표가 없다. '무엇을 위해서?'라는 물음에 대 한 답변이 없다. (프리드리히 니체, 권력 의지)
- GDP의 실태에 관한 진실
첫 번째는 아무리 보완하고 수정하더라도 GDP는 결국 자의성이 포함된 수치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GDP를 산출하려면 항상 머리가 핑핑 돌 정도로 많은 데이터를 취합하면서 어떤 것을 계산에 넣고 어떤 것을 계산에 넣지 않을지 주관적 으로 판단해야 한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 가나의 GDP는 2010년 11월 5일부터 다 음 날인 6일까지 하룻밤 사이에 60%나 성장해서 저소득 국가(1인 당 국민총생산(GNP)이 750달러 이하인 국가-역주)에서 저중소득 국가 (1인당 GNP가 750~1500달러인 국가-역주)로 등급이 올랐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까닭은 GDP 산출에 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저소득 국가와 저중소득 국가는 국제기관이나 금융기 관에서 받을 수 있는 경제 지원과 금리 우대 등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수치를 적용하는 것이 더 이득일까?' 하는 물 음에 대한 정치가의 판단에 따라 정치적 조정이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 더 파고들자면, 계산상의 여러 가지 약속 사항을 어떻게 적용 하느냐에 따라서도 수치가 크게 달라진다. 모든 국가의 GDP는 최종적으로 미국 달러를 기준으로 산출되는데, 각국의 통화를 달 러로 환산할 때 환율을 기준으로 해 달러로 환산하느냐, 아니면 물가 수준(구매력 평가)을 기준으로 환산하느냐에 따라 10% 이상 차이가 발생한다. 사람들은 GDP 성장률이 0.5%만 오르락내리 락 해도 법석을 떨지만, 애초에 GDP란 그러한 미미한 차이의 논 의를 감당할 수 있는 하드 데이터(Hard Data, 생산 수량이나 매출, 가 격 등 실제 경제 활동의 결과를 집계한 객관적인 통계 수치 -역주)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합의된 방침에 따라 각국의 통계 담당자가 자의 적으로 골라낸 수치로, 말하자면 하나의 의견일 뿐이다. 무형자 산과 관련해서 종종 '현재의 GDP는 경제 전반의 실태를 정확히 보여주지 않는다'라는 지적이 있는데, 애초에 GDP에 '실태' 같은 건 없다.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두 번째 논점이 떠오른다. '이 새로운 계산 방법을 도입하는 데는 상황에 딱 맞는 목적 합리 성이 있는가?' 하는 문제다.
- GDP는 100년 전쯤 미국에서 세계 공황의 영향으로 나날이 종잡을 수 없게 변화해가는 사회와 경제 상황을 전체적으로 파 악하겠다는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당시 미국 대통령 허버트 후버 (Herbert Hoover)에게는 어떻게든 대공황을 극복해야만 하는 막중 한 임무가 있었지만, 당시 의회가 확보한 자료는 주가나 철 등의 산업재 가격, 도로 운송량 등 단편적인 수치밖에 없었으며 정책 을 구상하는 데 참고가 될 만한 통계 자료가 갖춰져 있지 않았다. 의회는 이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1932년, 사이먼 쿠즈네츠(Simon Kuznets)"라는 러시아계 미국인 경제학자에게 '미국은 얼마나 많은 물건을 만들 수 있는가?' 하는 조사를 의뢰했다. 몇 년 후 쿠즈네츠가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에는 현재 우리가 GDP라고 부르는 개념의 기초가 제시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문제가 먼저 존재했 고, 이를 측정하기 위한 지표가 나중에 도입된 것이다.
일련의 흐름에서 문제가 먼저, 지표가 나중'이라는 점에 주목 하길 바란다. 오늘날 GDP에 관한 논의는 주로 '지표가 먼저, 문 제가 나중'이 되고 말았다. 측정할 수 있는 것을 측정하고 거기서 발생한 이슈를 문제 삼는 식의 사고체계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문제란 '원하는 이상적인 모습'과 '실제로 관찰된 현재의 모습' 사이의 차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정의를 GDP의 새로운 방침에 적용해서 생각하면 이상적인 모습을 구상하지 못하고 문 제의 정의도 명백히 규정하지 못한 채, 수치를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는 지표를 대강 짜 넣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GDP를 산출하는 것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간다는 건 무엇일까?' '더 좋은 사회란 어 떤 사회인가?'를 논의한 뒤에, 그렇다면 무엇을 측정해야 그 달성 정도를 측정할 수 있을지 생각하는 일이다. 경제학자를 비롯한 많 은 전문가가 이런 종류의 논의를 꺼리는 이유는 명백하다. 이렇게 추상적이고 철학적인 논의 과정에서는 전문가로서 권위를 발휘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적어도 선진국에서는 물질적 부족이라는 문제는 해결되었다. 이미 물질적으로 풍족해진 사회 에서 '얼마만큼의 물건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하는 지표를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는 데 골몰한다면 결과적으로 낭비와 사치를 부 추기고 물건을 쉽게 버리는 행동이 미덕으로 칭송받는 사회를 양 성하게 될 뿐이다. 우리는 정말로 그러한 사회를 원하는 것일까?
- 중요한 점은 기술적인 면에서 세계의 최전선을 차지하고 있는 국 가에서 1인당 산출된 성장률이 오랜 세월에 걸쳐 연 1.5%를 상회 한 국가의 역사적 사례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과거 수십 년 의 기록을 살펴보면, 최고 부유국의 성장률이 훨씬 낮다. 1990년 부터 2012년에 걸쳐 1인당 산출은 서유럽에서는 1.6%, 북미에서 는 1.4%, 일본에서는 0.7%였다. 앞으로 논의를 진행할 때 이 현실 을 반드시 염두에 두길 바란다. 대다수 사람들이 성장이란 적어 도 3~4%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역사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이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토마 피케티, 《21세기 자본》)
피케티 자신은 이 책에서 GDP 성장률 예측에 관해서는 '잘 모르겠다'고 미리 밝히고 나서 '과거 두 세기의 역사를 되돌아보 면 그 수치가 1.5% 이상이 될 가능성은 상당히 낮다'고 지적했다. 덧붙이자면, 경제학자나 민간 경제가 장기적인 경제예측을 내놓 을 때는 전반적으로 실제 가치보다 부풀려지는 경향이 커서 실측 치가 예측치의 아래쪽에 위치하는 사례가 대부분이라는 점을 기 억해두는 것이 좋다."
이들 수치를 확인하다 보면 성장이란 일종의 종교와 같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 나는 2017년(한국에서는 2018년 출간-역주)에 출간한 저서 《세 계의 리더들은 왜 직감을 단련하는가》에서, 비즈니스와 관련된 의사 결정을 할 때 너무 과학에 치우친 탓에 오히려 비즈니스가 위축되고 취약해졌다고 설명하고, 인간성에 바탕을 둔 감성과 직 감을 되살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경제와 사회에 관한 인식 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확실히 반대라고 느낀다. 그 이유는 단순 히 무한한 성장이라는 사고가 비과학적인 판타지일 뿐이기 때문 이다.
- GDP 성장률이 둔화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당연한 이야기지 만, <도표8>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여기서도 고원으로의 연착륙 상 황을 알아차릴 수 있다. 선진 7개국의 노동생산성 상승률은 1960 년대 정점을 찍은 이후 단기적인 변동은 있지만, 선진국 전체의 추세를 보면 하락세가 명확해 보인다.
유일한 예외라고 해도 좋은, 1990년대 미국에서 나타난 중 기적인 노동생산성 상승에 관해서도, 이를테면 전자기기류의 성 능 향상을 반영한 물가 계산, 소위 헤도닉 물가지수(hedonic price index, 개별성이 강한 재화의 물가 지수를 작성할 때, 그 성능의 표준화에 의 해 회귀적으로 산출되는 물가 지수-역주)를 도입해 인플레이션율을 낮 추거나, 혹은 기업에서의 소프트웨어 구입 비용 명목을 중간재 구 입에서 설비투자로 변경하는 등 1990년대 말 GDP 계산 방법을 다양하게 변경함으로써 과거 몇 년 동안의 GDP 절대치 및 성장률이 크게 신장했다는 사실을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헤도닉 지수를 도입하고 소프트웨어 구입 항목을 투자로 변경함 으로써,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전반에 걸친 실질적 GDP 성장률은 외관상으로 크게 신장되었다. 실제로 세상은 호경기였 으며 GDP가 완전히 거짓이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변경 으로 인해, 실제 이상으로 경제 상황이 호조로 보였을 가능성을 부인할 순 없다. 게다가 헤도닉 지수에 의한 계산을 처음 도입한 나라가 미국이었기 때문에 유럽 국가들이나 일본에 비해 미국 경제가 막강하게 보였던 것은 확실하다. 바다 건너편에서는 경제정 책 담당자가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컴퓨터는 어느 국가의 어떤 기업에서도 공평하게 이용할 수 있는데 왜 컴퓨터 혁명에 의한 생산성 향상 효과는 미국에서만 나타나는 것일까. (다이앤 코일, GDP 사용설명서)
미국의 통계에서 나타난 1990년대의 일시적인 성장 추세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 노동생산성을 언급할 때 일본이 패자라는 식의 자학적인 말들이 자주 나오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단편적인 모습을 바탕으로 한 도토리 키재기식 평가일 뿐이다. 중장기적으 로 보면 선진국은 대체로 노동생산성 상승률의 장기적인 하락세 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 인터넷 관련 기술이 업무 현장에 사용되기 시작한 1990년대 후반 이후, 우리의 업무 방식이 급격히 변화되자 결과적으로 생산 성도 크게 개선되었다고 여기기 쉬운데 실제로 도표를 보면 최첨단 기술로 무장해봤자 생산성의 둔화 곡선은 바꾸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나날이 진화를 거듭하는 기술을 활용해 노동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는데도 노동생산성 상승률은 왜 장기 적으로 하락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해 노스웨스턴대학교 경제학 교수인 로버트 고든 (Robert Gordon)은 '하락하고 있는 게 아니라 정상으로 돌아가고 있을 뿐이다'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바꿔 말하면, 1960년대 같은 높은 생산성과 높은 성장률은 결코 자본주의의 예사로운 상태가 아니라, 인류사적으로 볼 때 매우 특수한 전무후무의 이상 상태였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노동생산성 상승률은 하락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예전에 비정상적으로 높았던 것이 정상적인 상태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의미다.
- 종신고용과 연공서열 같은 인사 정책을 일본 기업의 전통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있을 법한 오해이지만 사실과는 전혀 다르다. 우선 종신고용과 연공서열이라는 용어는 보스턴 컨설팅그룹의 초대 도쿄사무소장을 지낸 제임스 아베글렌(James Abegglen)이 1958년에 출간한 저서 《일본의 경영(The Japanese Factory)》에서 처음 사용한 용어다. 역사적으로 보면 불과 60년쯤 전에 미국인이 만든 용어이지, 결코 일본 기업의 전통적인 제도가 아니다. 즉, 연공서열과 종신고용으로 대표되는 사회 시스템 대다 수는 일본의 오랜 역사를 비추어 볼 때 극히 짧은 기간 동안 운용된 매우 특수한 제도였던 셈이다.
오늘날 일본 사회에선 다양한 문제와 알력이 분출되고 있는데, 이는 저성장 자체가 야기했다기보다는 성장을 전제로 한 사회 시스템과 고원으로 연착륙하고 있는 현실 사회가 서로 부정합을 일으켜서 발생했다고 봐야 옳다. 일본 사회에선 1868년 문명 개화 이후, 100년 이상에 걸쳐 작용해온 '무한의 상승, 성장, 확대를 추구하려는 압박감과 최근 여러 해 동안 점점 강해지고 있는 '서서히 고도를 낮춰 연착륙하려고 하는 자연의 인력' 두 가지 힘이 서로 마찰을 일으켜 갖가지 비극과 혼란을 빚어내고 있는 것이다.
- 마르크스가 종교를 민중의 아편이라고 지적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그렇기에 러시아혁명 이후 소련과 중국 등 공산 주의 국가에서는 더더욱 명확한 정책적 의도를 가지고 종교를 탄 압했는데, 마르크스주의와 마르크스주의가 강하게 부정한 정전종 교正宗敎)가 실은 같은 골자의 이야기를 주장했으며 수십억 명 의 사람들이 그 이야기에 도취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통찰 을 가져다준다. 이는 우리 인간이 '지금 열심히 노력하면 언젠가 좋은 미래가 찾아온다'는 식의 희망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뜻이다. 또한 이를 반대로 말하면, 그런 희망적인 이야기가 없으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를 아무도 하지 못하게 된 세상이 지금 가까이 다가와 있다.
- 우리가 판단의 근거로 삼는 수많은 도덕과 규범은 미래를 위 해 현재를 수단화한다는 사고방식을 전제로 하며, 이 사고방식은 미래를 완성하기 위해 역사가 진보한다 또는 내일은 오늘보다 분 명히 좋아진다는 확신을 기저에 두어야 비로소 합리화된다. 하지 만 시간이 지나면 이러한 규범과 가치관의 근거는 와해되고 만다. 지금 이만큼의 물질적인 번영으로 윤택한 생활을 하는데도 우 리 사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허감으로 가득 차 있다. 만약 우 리의 역사가 이미 마지막 순간을 맞이해 시간이 소멸되고 심지어 많은 사람이 그 사실을 어렴풋이 알아차리고 있다면, 미래의 실현 을 위해 현재를 수단화하라는 사회적인 규범과 가치관에 사람들 이 공허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어떠 한 이상을 실현해야 하는지는 모르는, 그런 시대를 우리는 살 아가고 있다. 만물을 지배하고 있지만 자신을 지배하지는 못한 다. 풍부한 재능을 갖고 있으면서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막막 해한다. 결국 현대 세계는 전에 없는 자산, 지식, 기술을 보유하 고 있으면서도 가장 불행한 시대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 《대중의 반역》)
- 페이스북의 CEO인 마크 저커버그는 인터넷의 발달이 끝없이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온다고 믿고 있는데, 그러한 신념을 공유하 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보여주는 다수의 보고서와 논문이 있 다. 한 예로, 아프리카 등 신흥국에 특화된 전략 컨설팅 회사 달 베르크(Dalberg Global Development Advisors)가 발표한 보고서에는 '인터넷이 지닌 의심할 여지 없이 막대한 힘이 아프리카의 경제 성장과 사회 변혁에 기여할 것이 틀림없다'라고 쓰여 있다. 이 사실이 거의 명백해서 이런저런 증거를 들어 독자를 번거 롭게 할 것까지도 없다고 생각했는지 아무런 데이터도 인용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말해야겠다. 그런 데이터 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진국에 관한 한, 인터넷의 출현으 로 새로운 성장이 시작되었다는 증거는 일절 존재하지 않는다.(아브히지트 바네르지, 에스테르 뒤플로, 《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
- 선진국 가운데서도 경제성장률이 가장 높은 미국이 수많은 기술 혁신의 발상지라는 사실에서 이를 안일하게 연관 지어 '기술 혁명이 경제 성장을 견인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바네르지와 뒤플로 두 교수가 지적했듯이 기술 혁명과 경제 성장 의 관계성을 증명하는 데이터는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은행이 발 행하는 <세계 개발 보고> 2016년도 판에는 아주 모호하게 '인터 넷이 경제에 끼친 영향력에 관해서는 아직 결론을 낼 수 없다'고 서술되어 있다. 인터넷이 보급된 지 25년이 더 지났는데도 여전히 결론을 낼 수 없다면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결론이 나온다는 것일까.
- 왜 이토록 거대한 기술 혁신이 경제성장률이 상승하는 데 공 헌하지 못하는 것일까. 생각할 수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로, 러한 혁신의 대다수가 본질적인 의미에서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 지 못하고 단순히 기존의 시장 내부에서 돈을 이전시킨 데 지나 지 않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내가 사회적 혁신(social innovation) 을 중시하는 반면에 상업적 혁신(commercial innovation, 기술 혁신에 의지하지 않고 기존 상품을 포지셔닝이나 디자인, 포장 등을 바꿔 새로운 고 객 가치를 높이는 전략-역주)은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유의 핵심이 바로 이 점에 있다. 최근 20여 년 동안 사회에서 이루어진 혁신이 대부분 기존의 '돈 버는 시장'에 혁신을 도입해 '극히 일부 사람만 더 벌어들이는 시장'으로 바꿨을 뿐,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 소하는 데 공헌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격차 확대라는 사회 문제를 빚어낸 원흉이 되었기 때문이다.
- 오늘날 직원이 수십만 명에 이르는 공룡 기업이 수없이 존재하는데 이러한 기업이 출현한 것은 19세기 후반 이후다. 역사상 최초로 1만 명 이상의 직원을 둔 기업은 1870년에 창업한 스탠더드오일(Standard Oil Co.)"이다. 그전까지는 직원이 몇만 명 있는 회사가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경영사학자인 앨프리드 챈들러(Alfred D. Chandler)는 저서 《보이는 손》에서 '1880년대에 들어서고부터 대기업이 급격히 증가했다'라고 언급했다. 왜 19세기 말 대기업이 생겨나고 늘어났는지는 앞의 설명에서 명백히 알 수 있다. 지리적으로도 인구동태적으로도 보편적인 문 제를 낮은 비용으로 처리하려면 규모가 중요한 경쟁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지리적으로 넓은 범위에 흩어져 있는 조직을 효율적으 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문서와 권한 규정으로 체계화된 거대한 관 료 기구 시스템이 필요하며, 비용 삭감의 강력한 압박은 단계별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단번에 관통하는 가치 사슬(Value chain) 모형을 추구한다.
- 지금까지 고찰한 내용에서 다음의 두 가지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한 가지는 경제 합리성 한계곡선의 바깥에 있는 문제는 시 장 원리에 의존해선 영원히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금전적 대가야말로 모티베이션 의 원천이다. 경제 합리성 한계곡선의 바깥에 있는 문제를 해결하 는 데 금전적 보수로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시 말 해, 현재 잔존하는 '희소하지만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는 경제 합 리성과는 별개의 모티베이션을 발동시켜야만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뒤에서 상세히 설명하겠지만, 이러한 문제와 관련해 모티베이션의 원천으로 삼을 만한 것은 인간성에 기인한 충동밖에 없다.
이 '충동'이야말로 근대 자본주의를 이륙시키는 엔진이었다는 사실을 돌이켜봐야 한다. 일찍이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발흥한 자본주의를 구동하는 정신을 인간 본래의 충동, 즉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s) 이라고 명명했다.
투기로 인한 불안정성 외에도 인간성의 특성에 기인한 불안정성, 즉 우리가 하는 적극적 활동은 대부분 도덕적이든 쾌락적이든, 혹은 경제적이든 간에 수학적 기대치에 의존하기보다는 오히려 저절로 생겨난 낙관에 좌우된다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불안정성 이 있다. 며칠이 지나야 결론이 나오는 일이라도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 려는 결의는 대부분 오로지 혈기(야성적 충동)라고 불리는, 가만히 있기보다는 활동으로 몰아가는 인간 본래의 충동에 따른 결과 로 이루어지는 것이지, 수량화된 이득에 수량화된 확률을 곱한 가중평균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존 메이너드 케인스,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 이론》)
- 여기서 케인스가 주장하는 '수량화된 이득에 수량화된 확률을 곱한 가중평균의 결과'란 분명 경제 합리성의 한계를 확인하기 위해 산출되기 마련이지만, 케인스는 경제 활동이 그러한 검증을 통한 경제 합리성에 의해 구동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한편, 오늘날 기업들이 신규 사업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수량 화된 이득에 수량화된 확률을 곱한 가중평균의 결과'와 관련, 세 세한 부분까지 파고들어 논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경제합리성 한계선의 바깥에 자리한 과제를 해결하는 '사건'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 리눅스 개발 일화는 또한 물질적 만족도가 이미 높은 수준에 이른 고원사회에선 노동을 통해 지식과 기술, 창조성을 발휘하는 즐거움이 더욱 중요한 보수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리눅스 개발에 관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IBM과 인텔 등 기업 에 근무하는 바쁜 전문가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왜 무상으로 자신 의 지식과 기술, 그리고 시간을 제공한 것일까. 이유는 단순하다. 즐거웠기 때문이다. 이는 다시 말해, 리눅스 개발에 참여한 사람 들은 확실히 경제적 보수는 얻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노동 자체에 서 높은 정신적 보수를 받았다.
이러한 현상을 이 책 머리말에서 사용한 용어로 바꿔 말하 면, 리눅스 개발에 관여한 사람들에게 그 일은 '경제적 보수 를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수단적인 일 = 인스트루멘털 (instrumental)'이 아니라 '활동 그 자체가 보수인 자기충족적인 활 동 = 컨서머토리 (consummatory)'였다고 할 수 있다.
- 미래의 사회 비전은 이것이다
시장 원리가 일찍이 사회에 존재한 수많은 문제를 경제 합리 성에 기초해 해결한 결과, 현재 사회에는 경제 합리성 한계곡선의 바깥에 있는 문제들이 남아 있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경제 합리성을 넘어서는 모티베이션이 필요하다고 강 조했는데, 이들 문제가 경제 합리성 한계곡선의 바깥에 있는 이상, 이를 해결하려는 사람이나 조직은 필연적으로 큰 불확실성과 리스크를 짊어지게 된다. 이때 '충동'에 기인해 문제 해결을 시도 했다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는 사람이 잇달아 경제적으로 파산 한다면, 그러한 충동에 근거해 활동하는 사람은 모두 사라질 것이다. 경제 합리성 한계곡선의 바깥에 있는 문제를 개개인의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충동'으로 해결하고자 한다면 경제적 으로 파산할 걱정이 없는 사회적 보호망이 필요하다.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 결론은 앞으로 다가올 고원사회에 남아 있을 희소하고도 중대한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우리가 의지해온 신자유주의와 시장만능주의에서 사회민주주의 쪽으로 더욱 방향을 돌려 야 한다는 사실이다.
앞서 설명한 대로, 시장 원리는 사회에 다수의 물질적 문제가 남아 있던 시대에 극히 효율적이어서 이들 문제를 해소하는 데 유용했다. 하지만 현재 우리 사회에 남아 있어 있는 문제의 대다 수는 더 이상 경제 합리성에만 의존해서는 해결할 수 없다. 따라 서 경제 합리성의 장벽을 가볍게 뛰어넘을 수 있는 인재가 부당 하게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 사회 기반의 정비가 꼭 필요하다. 이 런 점에서 볼 때, 우리는 지금까지 미국이 제시해온 신자유주의 와 시장만능주의 사회에 대한 비전에서, 북유럽형에 가까운 사회 민주주의의 방향으로 사고를 전환해야 할 시기에 와 있는 것으로 보인다.
- 마케팅이라는 용어 자체는 20세기에 생겨났으며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개념으로 정착된 것은 1960~1970년 대의 일이다. 오늘날에도 비즈니스스쿨에서 마케팅 강의의 대표 적인 교과서로 사용되고 있는 필립 코틀러(Philip Kotler)의 <마케 팅 관리론》이 미국에서 출간된 것은 1967년이다.
이 1967년이라는 해와 관련해 인연의 신기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가만히 내버려둬도 사회가 잇달아 해결해야 하는 문제 를 던져준다면 마케팅은 굳이 필요 없다. 마케팅이 체계적인 기술 로써 사회에 필요하다는 사실은 사업자가 스스로 문제를 개발하 지 않으면 새로운 욕구를 만들어낼 수 없게 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 이 책의 제1장에서 우리의 세계가 '고원으로의 연착륙'이라는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다양한 지표를 이용해 설명했는 데, 18세기 이후 200년에 걸쳐 계속 상승세를 보인 경제성장률과 인구성장률이 처음으로 완만한 곡선을 그리기 시작한 때가 바로 1960년대 후반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이 시기에 비즈니스의 역사적 역할이 피날레의 서장으로 접어든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면, 같은 시기에 '인위적으로 사회의 욕구와 갈망을 만들어내기 위한 기술 체계인 마케팅이 소위 비즈니스를 연명하기 위한 조치로 산업 사회에서 강하게 요구되고, 그 러한 스킬을 가진 인재가 노동시장에서 높게 평가받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 나는 2013년에 출간된 저서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조직을 만드는 법을필할 때, 애플을 공동 창립한 컴퓨터 엔지니어 스티브 워즈니악 (Stephen Wozniak)을 비롯해 세계에서 혁신가로 명성 높은 인물 70여 명을 인터뷰했다. 그때 혁신을 일으키겠다고 마음먹고서 혁 신을 일으킨 사람은 막상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 들은 혁신을 일으키고자 하는 동기가 있어서 일에 매진한 게 아 니라, '어떻게든 이 사람들을 도와야겠어!' '이것이 실현된다면 굉 장하겠는걸!' 하는 충동에 마음이 움직여 그 일에 몰입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항은, 혁신가들이 '이걸로 돈을 벌 수 있겠 어' 하는 경제 합리성 때문만이 아니라, '이대로 방치해둘 수는 없 지' '이 일을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어' 하는 강한 충동(이것은 종종 예술가에게서도 공통으로 볼 수 있다)에 의해 혁신을 실현했다는 사실이다. 과거에 일어난 혁신을 조사해보면, 핵심 아이디어가 싹튼 동기에선 경제 합리성을 초월한 충동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관찰된다.
* 폭우가 쏟아지는 인도 델리의 교외에서 어린 두 자녀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이동하는 가족을 보고 '누구나 살 수 있는 값싸 고 안전한 자동차가 필요하다'고 느낀 라탄 나발 타타
* 꽁꽁 얼어붙은 한겨울 밤에 아이들을 데리고 포장마차에 라면을 먹으러 와서 덜덜 떨며 길게 줄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집에서 간편하고 맛있는 라면을 먹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든 안도 모모후쿠.
* 제록스 팰러앨토 연구소(Palo Alto Research Center)에서 컴퓨터 의 미래를 시사하는 시연을 접하고 "이건 혁명이다! 이 위대함을 모르는가!" 하고 외친 스티브 잡스(Steve Jobs).
* 20세기 전반, 종종 크게 유행해 많은 어린이의 목숨을 앗아간 폴리오를 근절하기 위해 백신 개발에 생애를 바쳤으며 특허를 내지 않고 백신의 보급을 우선한 조너스 소크(Jonas Salk).
경제 합리성을 초월한 충동은 예술가의 활동에서 자주 볼 수 있지만, 기업가에게서도 똑같은 심성이 종종 관찰된다. 현재 상 황에서 계속해서 논의의 주제로 오르내리는, 소위 예술적 사고와 비즈니스의 결절점이 여기에 있다. 고원사회에서 경제 합리성이 꼭 보장되지는 않는, 잔존해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비즈 니스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예술가와 같은 심성이 필요 하다.
- 창의적인 사람들은 풍부한 행복 감수성을 갖고 있으며 흥미와 기쁨을 느끼는 일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려고 하는 한편, 따분하다 고 느끼면 재빨리 짐을 챙겨 그 자리를 떠난다. 이러한 행동은 흔히 '제멋대로'라고 비난받는 경향이 있지만 칙센트미하이는 이러한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이야말로 창의적인 사람들에게 공통되 는 유일한 특징이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무료하다, 시시하다' 투덜거리면서 새로 운 일을 찾지도 않고, 그렇다고 지금 하는 일에서 의미를 찾아내 려 애쓰지도 않은 채로 더없이 소중한 인생의 하루하루를 무의식 중에 흘려보내고 있다. 바로 여기에 고원사회를 실현하는 데 있어 해결해야 할 최대 과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 자신이 어떤 일에 몰입할 수 있는지 미리 알아내기 어려운 까 닭은 '몰입'이 '마음 상태'를 뜻하는 것으로, 이지적으로는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몰입할 수 있는 일을 찾지 못한 채 인생 을 끝내는 사람이 많다. 칙센트미하이가 지적했듯이, 자신이 몰입 할 수 있는 일을 찾기가 그다지도 어려운 까닭은 아무리 머리로 생각해봐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우선 이것저것 다양하게 시도해 본 다음에 신체 감각으로 파악해 알아내는 수밖에 없다. 우리가 '지성'이라는 말을 들으면 대개 떠올리는 이미지와는 크게 다른 '신체적인 지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자신이 무엇에 열중할 수 있을지는 결국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그것이 설령 무엇에 도움이 될지 모르는 일이라도 많 은 시간과 노력의 낭비와 헛수고를 겪은 뒤에야 마침내 '인생'을 발견할 수 있다는 린드버그의 지론은 커리어론에 관한 많은 연구 에서도 증명되고 있다.
- 창조라는 유희
자기충족적인 충동과 수단적인 규범의 알력에 관해서 니체도 재미있는 말을 남겼다. 니체는 우리의 정신이 '낙타' '사자' '아이' 의 순서로 발전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그대들에게 정신의 세 가지 변화에 관해 말하고자 한다. 어떻게 정신이 낙타가 되고 낙타는 사자가 되며, 사자는 아이가 되는지를 말해보겠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앞서 말한 틀에서 설명하자면 낙타는 수단적인 규범에 무비판 적으로 따르는 인물을 가리킨다. 낙타는 규범에 따라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그에 기뻐한다. 이 낙타가 마침내 자유를 얻기 위해 싸 우기 시작하면서 사자로 변모한다. 사자는 낙타였던 시절에 자신 을 지배하던 거대한 용과 맞서 싸운다. 이 용의 이름이 '너는 해야 한다'이다.
정신이 더 이상 주인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신이라 부르려 하지 않 는 거대한 용의 정체는 무엇인가. '너는 해야 한다' 이것이 그 거대한 용의 이름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규범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런 노력도 필요로 하지 않지만, 사회가 강요하는 무의미한 규칙에 저항하려면 강인한 정 신이 필요하다. 니체는 그 강인함을 '사자'라는 메타포로 표현했 다. 일찍이 신성시했던 '너는 해야 한다'라는 용의 명령에 사자는 '나는 할 것이다' 하고 울부짖는다. 하지만 이 사자도 할 수 없는 일이 있다. 그것은 창조와 놀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내 형제들이여. 사자도 하지 못했지만 아이만 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왜 강탈하는 사자가 아이가 되어야만 하는가. 어린아이는 순진무구요 망각이다. 새로 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으로 도는 바퀴, 최초의 운동이며 그렇다'는 신성한 긍정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아이는 관념의 포로가 되지 않는다. 옳고 그름이나 선악을 따지지 않고 세상에서 그때 그 순간의 자기충족적인 충동이 모든 것을 긍정한다.
우리 사회에는 인간성에 기초한 자기충족적 행동을 금기시하 는 수많은 규범이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다시금 생각해보면 수호 신을 모신 숲에서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받으며 아이들이 신사에서 꺼내온 불상을 가지고 노는 광경 이상으로 아름답고 성스러운 모습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
- 가치 사슬은 '구매·소비'가 이루어진 후에 아무것도 없는 데 드 엔드(dead end)인 데 비해 이 도표는 '구매·소비'가 다시 새로 운 '노동·생산'에 에너지를 주는 오픈 엔드(open end) 시스템이 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가치 사슬을 대체한다는 의미에서 이것을 '가치 순환'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가치 순환에서 소비자는 지금까지와 달리, 단지 '소비하는 사 람'일 수만은 없다. 이런 관점에서 소비자는 소위 노동자와 생산 자에게 노동과 생산을 위한 경제적, 정신적 에너지를 제공하는 자원(resource)이 된다.
이와 같은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를 이미 19세기에 구상한 사람이, 바로 카를 마르크스였다. 마르크스는 초기의 초안 노트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나의 생산물을 네가 향유 혹은 사용하는 동안에 나는 직접 다음과 같은 기쁨을 갖게 될 것이다. 즉, 나의 노동으로 어떤 인간적인 욕구를 만족시키는 동시에 인간적인 본질을 대상화했다고. (카를 마르크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마르크스 엥겔스 전집(Marx Engels Gesamtausgabe)》)
이러한 사회에서는 소비, 혹은 구매는 우리가 현재 생각하는 것처럼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증여나 응원에 가깝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는 예술가와 후원자의 관계에 비유할 수 있을 정도다. 즉, 사회에 어떤 가치를 창출하려고 활동하는 사람 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그 사람들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그들이 만들어낸 가치에 대해 가능한 한 '큰' 대가를, 거의 증여라 는 개념에서 함께 제공하려고 하는 관계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