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삶을 바꾸는 질문의 기술

dalai 2023. 5. 24. 13:17

- 좋은 질문을 던지지 못하는 이유
"우리는 왜 뻔한 질문을 주고받을까?"
이유 1 우리는 좋은 질문을 하기에 너무 이기적이다 
이유 2 질문을 두려워한다
이유3 질문으로는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없다
이유4 우리는 다름을 인정하느라 객관성을 잃었다 
이유 5 우리는 급하게 묻고 급하게 답한다
이유 6 우리는 질문하는 법을 배워본 적이 없다

- 연구에 따르면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뇌에서 도파민이 분비된다고 한다. 도파민은 흥분감을 불러일으킨다. 하버드대학교의 과학자들은 fMRI 스캐너를 사용해서 연구를 진행했다. 먼저 실험 참가자 195명에게 자신의 의견과 생각 에 대해 토론하도록 했다. 그런 다음 실험 참가자들이 자신에 대해 말한 내용과 타인에 대해 말한 내용 간의 신경 활동 차 이를 조사했다. 그 결과,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때 세 개의 영역에서 큰 반응을 보였다. 먼저 내측 전두엽 피질 영역이 두드러지게 활성화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두 영역 측핵 영역과 복측 피개 영역에서도 반응이 나타난다는 것이 밝혀졌 다. 이 두 영역은 사실 변연계의 도파민 시스템으로 섹스, 코 카인, 맛있는 음식 같은 쾌락에 반응하는 부위였다.
이 실험 결과는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섹스나 코카인, 맛있는 음식만큼이나 즐거운 일이라는 사실을 잘 보 여준다. 또 사람들이 왜 자연스럽게 다른 주제보다 자신에 대 해 더 많이 이야기하는지를 잘 설명해준다. 비록 다른 사람들 의 이야기가 더 흥미로울지라도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이 훨씬 더 즐거운 법이다. 타인에게 관심을 갖고 질문을 던 지는 것보다 더 강렬한 결과(도파민, 달콤한 느낌, 보상)를 가져 다주기 때문이다(<다이아나 타미르(Diana Tamir)>, 2012).
- 우리는 신속하게 답을 검색하고 찾는 데 너무 익숙해져서 이런 중요한 질문에도 똑같이 반응한다. 그러나 중대한 의견 차이가 있거나 심사숙고해야 하는 일,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는 역효과가 발생한다. 그러니 우리는 답변을 미루는 법도 배 워야 한다.
- 최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람들은 모순적 증거가 드러나 면 오히려 자신의 견해를 더 강하게 믿는다고 한다. 자신의 의견과 신념은 다른 의견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유연해야 한다. 다름을 인정하는 것과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다르 다. 객관적인 판단 기준이 사라진 채 다름만 인정하다 보면 사실과 의견이 뒤섞이게 되고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은 객관 적으로 판단하고 추론하는 능력을 잃게 된다.
- 메르슈는 "우리는 보통 술 취한 사람이 가로등에 기대는 것처럼 사 실을 사용한다"라고 표현했다. 조명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을 지탱하는 버팀목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항상 자신의 타당 성을 찾고 발견한 정보는 자신의 관점에 맞춰서 걸러낸다.
진지하면서도 호기심이 넘치는 질문을 받으면 우리는 기 존에 갖고 있던 관념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할지 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질문을 원치 않는다. 정당한 불확실성보다 부당하더라도 확실한 것을 원한다. 우리는 생 존 모드에서 어려운 질문에 본능적으로 더 빨리 대처한다. 왜냐하면 질문은 정체성이 위협받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이 다. 물론 "어디에서 살고 있습니까?"와 같은 사실 질문(fact question)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당신의 진술에 대 해 질문하면 긴장하지 않고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 소크라테스처럼 질문하는 법
"나를 버리고 상대의 머릿속으로 들어가라"
1. 지혜는 놀라움에서 시작한다
2. 호기심을 유지하라
3. 용기를 내서 과감하게 질문하라
4. 판단하되 집착하지 마라
5.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가정해보자
6. 연민하되 공감하지 마라
7. 상대가 짜증을 내도 마음에 담지 마라

- 소크라테스는 대화상 대가 지식을 기억해내도록 도왔는데 그 방법을 '산파술'이라 고 했다. 소크라테스는 어머니가 산파여서 출생 과정을 잘 알 고 있었고 다른 사람의 지식을 심화시키는 방법을 출생 과정 에 비유했다.
내가 말한 것 중 일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미 아는 게 없다는 생 각에 모르는 뭔가를 추구해봤자 아무 소용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 다. 하지만 인간은 뭔가를 탐구할 때 더 나아지고 더 용감해지며 덜 무 기력합니다. 이것이 내가 모든 것을 걸고 싸울 주제입니다.
- 소크라테스는 메논에게 이렇게 말했고 결국 마지막 말을 문자 그대로 실행했다. 그는 기소당했고 독약을 마시라는 사 형 선고를 받았다. 당시 그의 나이는 70세였고 죄명은 '신을 부정하고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였다. 일생 동안 비판적인 질문을 던져 많은 사람을 적으로 만들었는데 사람들은 그러 한 비판적 질문들이 청소년의 불복종을 충동질한다고 여겼 다. 또한 일부 사람들은 그를 궤변론자로 분류했다. 당시에 궤변론자는 무신론의 한 부류로서 반사회적이라고 여겼다.
-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변명(Apologie)』에서 소크라테스 의 재판 과정을 설명했다. 소크라테스는 500명의 아테네 남 자 배심원 앞에서 자신을 변론했다. 변론에서 그는 자신이 어 떻게 나쁜 평판을 얻게 되었는지 설명했고 자신을 고발한 자 들에게 조롱을 퍼부었다. 배심원들은 그가 기소 자체를 진지 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과반수 이상인 360표 찬성으로 독약형을 선고했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았다. 그는 죽음을 일종의 무(無), 꿈 없는 영원한 잠 또는 죽은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간다고 여겼다. 두려워할 필 요도, 두려워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철학사의 출발점으로 불려왔다. 어떤 이들은 '철학의 빅뱅'이라고 묘사하기도 한다.
- 나는 바보고 상대방이 전문가다
아이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태어난다. 이는 동물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성인은 왜 그렇지 못할까? 성인들은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밝혀지기도 전에 상황을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이 연습해보자.
* 상대를 해당 주제에 대한 전문가라고 가정하자.
* 당신의 생각, 판단, 의견을 흥미로워하지 마라.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며 알고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 대화 주제와 관련된 다양한 질문을 해보자. “여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정확하게 무엇을 경험했어요?" "알고 있는 다른 거 더 없어요?" "그 일의 결과가 항상 똑같을까요?" "그 일이 다르게 전개되지는 않을까요?" "그 일이 언제, 어떻게 전개될까요?'
이 연습을 자주 하다 보면 질문이 바닥나지 않는다. 만약 질문이 바닥난다면 '난 이미 알고 있어'나 '그 말이 맞아'라고 했던 과거로 돌아간 것이다.
- 에픽테토스는 『담화록』에 판단하려는 경향을 포함해 일상적인 문제에 대해 기록했다. 그는 판단하지 않고 관찰만 하라고 권유
했다.
누군가 빨리 씻는다고 가정하자. 이런 경우 그가 잘못 씻는다고 말하 지말고 그냥 너무 빨리 씻었다고만 말해라. 누군가 와인을 많이 마신 다면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은 나쁜 습관이라고 말하지 말고 그냥 술을 많이 마신다고만 말해라. 그가 가진 동기를 정확히 모르면서 그가 나쁜 행동을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 현대 작가인 마시모 피글리우치는 『당신은 어떻게 스토아학파가 될까요?』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결론은 사실(관찰로 확인된 동의할 수 있는 사실)과 판단을 구별해야 한 다는 것인데, 정보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잠시 생각을 멈춘 후 사실 과 판단을 구분해야 한다.
- 많은 사람이 공감에 호의적이다. 그러나 공감 은 거리를 유지하고 도덕적이고 객관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 때는 최악의 적이다. 『공감의 배신』이라는 책을 쓴 예일대학 교의 심리학자인 폴 블룸은 <보스턴 리뷰>에 다음과 같은 글 을 썼다.
사람들이 나에게 무엇을 하고 있냐고 물으면 나는 종종 공감에 대한 책을 쓰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 보통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 만 “저는 공감에 반대합니다"라고 말을 덧붙이면 불편한 웃음이 이어 진다. 처음에는 이런 반응에 놀랐다. 하지만 공감에 반대하는 말은 새 끼고양이가 싫다는 말과 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농담으로나 받아들 일수 있는 그런 이상한 말이었다.
- 블룸은 도덕성, 연민, 친절, 사랑, 좋은 이웃, 옳은 일,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노력 등에 반대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실이 모두를 지지한다고 했다. 하지만 공감은 그렇지 않다고 했 다. 좋은 사람이 되고 좋은 일을 하고 싶다면 공감은 나쁜 상담자라는 것이다.
-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신과 닮은 사람들, 아주 잘생긴 사람들, 그리고 자신이 속한 사회 집단의 사람들에게 더 크게 공감한다고 한다. 즉, 우리의 공감은 엄청나게 편향되어 있다. 블룸은 공감을 인지적 공감과 정서적 공감으로 구별했다. 당신의 지성을 이용해서 다른 사람의 마음에 당신을 자리 잡 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의사는 자신의 이야기가 환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해야 한다. 이는 합리적인 추측이며 사회적 지능의 현명한 사용법이다. 그러나 감정 이입은 다른 이야기다. "의사도 환자에게 감정적으로 공감해야 합니까?" 라는 질문에 블룸은 아니라고 말한다. 만약 그렇게 되면 의사는 제정신이 아니어서 수술할 수가 없다. 도덕적 판단처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상황에서 공감은 오히려 나쁜 상 담가이다. 도덕적 판단은 공감이 아니라 합리적 성찰을 통해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블룸은 자신의 책과 논문에서 정서적 공감의 대안으로 비 공감적 연민 또는 공감하지 않는 연민을 주장한다.
가장 친한 친구의 파트너가 세상을 떠났다고 상상해보자. 큰 공감 반응은 그 고통을 함께 느끼는 것이다. 공황, 슬픔 등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에 공감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공감이 친구와 당신에게 유익하냐이다. 공감하지 않는 연민은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글자 그대로 고통 속에서 자신 을 잃지 않고 도움과 지원을 제공할 수 있다. 거리를 적절히 뒀을 때 더 편한 상태가 되고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 이야 기에 덜 끌려다니고 상대방의 말을 더 잘 듣고 분석할 수 있 다. 공감이 거의 필요 없다. 다른 사람의 상황을 더 자세히 알 기 위해 던지는 훌륭하고 심층적인 질문은 결국 "공감하지 마세요"라는 말과 같다. 그러니 잠시 공감을 멈추는 게 좋다.
- 소크라테스의 문답식 대화는 종종 '모르겠다'라는 전반적 의미인 '아포리아(aporie)'로 끝난다. 질문은 여전히 질문으 로 머물고 만족스런 답변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함께 생각 해낸 아이디어와 생각은 수없이 많지만 대화를 끝낼 정도로 결정적이지는 않다. 소크라테스의 문답식 대화의 목표는 답 을 찾는 게 아니다. 대화에서 찾은 모든 '답변'에 대해 계속 질문하는 것이다. 더 많은 질문을 해야만 생각이 계속 움직인다. 실제로는 너무 조금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무한한 자유가 주어진다. 계속 호기심을 가지고 생각하며 명백한 것을 포함하여 모든 것에 의문을 품어야 한다. 그러면 자동으로 모든 것을 느끼는 지점에 도달하게 된다. 나는 정말로 답을 모른다. 이 사실을 모르는 무지가 더 강한 무지다. 소크라테스의 문답식 대화를 하다 보면 결국 당신은 문제의 모든 면 을 보고 질문하고 탐색하게 된다. 그리고 대화의 끝인 아포리 아가 자유를 가져다준다.
- 거리를 두고 듣기
상대의 말에 관심을 유지하려면 피상적으로 들어야 한다. 감정 이입을 하면 안 된다. 오직 피상적으로, 문답식으로 들어야 한다. 상대가 사용하는 언어를 들어도 그 의미에 관심을 두지 않아야 한다.
- 가장 먼저 어떤 형태로 말하는지 인식해야 한다. 말의 내용을 듣지 말고 언어의 형태를 들어보자. 질문하는지, 주장하는지, 무언가를 설명하는지, 자신의 발언을 방어하는지 살펴보자. 말을 하면서 어떤 개념을 강조하는지, 반대 주장을 하는지, 논점에 오류는 없는지 잘 들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보통 상상을 펼치며 듣고 자신을 다른 사람의 입장에 놓고 생각해본다. 세세한 부분은 스스로 채우고 무의식적으로 문장을 보충하면서 전체 이야기를 완성한다. 하지만 피상적으로 들으면 이야기의 형태만 듣고 내용은 듣지 않게 된다. 상상하지 않고 상대에게 관심을 유지한 채 상대가 말하는 것만 문자 그대로 듣게 된다.
이를 '적극적인 마음챙김'이라고 부른다. 상대의 언어에만 온전히 관심을 쏟을 수 있어서 오히려 에너지 소모가 덜하다. 자신의 말을 끼워 넣지 않고 완성하지 않으며 보태지도 않는 다. 약간 모자란 사람처럼 행동하며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 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하며 말의 숨은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 짜증 자체는 탐구 과정에서 꼭 필요한 재료다. 짜증을 내는 이유는 질문에 상처를 받았지만 강력하게 자신의 주장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관점을 바꿀 수 없기 때문에 기분이 상해서 짜증을 낸다. 즉, 짜증은 자기 생각에 갇혀 있다는 표시다. "왜 짜증이 나죠?"라고 질문하면서 상대방이 자신의 상태를 볼 수 있게 하고 결국에는 '자기의 생각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야 한다.
- 짜증 견디기
* 지금까지 배운 모든 것을 활용해서 대화를 시작해보자.
* 허락을 구하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어보자.
* 질문을 계속하고 다시 받아치기를 반복하자.
* 상대방이 짜증을 내더라도 침착하자. 그 짜증은 당신 개인에 대한 것이 아니다.
* 질문을 계속해도 될지, 아니면 그만해야 할지에 대해 물어보자.
* "한숨을 쉬는 것을 봤어요. 그 한숨은 어떤 뜻이에요?" "짜증 나 보이던데 왜 짜증이 났나요?" 같은 질문을 해보자.
- '왜'로 시작하는 질문에는 한 가지 결점이 있다. '왜'로 시작하는 질문에 상응하는 단 하나의 분명한 원인을 찾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만사는 단지 하나의 이 유, 원인, 동기 때문에 일어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2차 세계 대전은 왜 일어났을까요?"라는 질문에 딱 한 가지 분명한 이유를 이야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약 좀 더 복잡하고 다양한 답변을 원한다면 질문을 '어떻게'로 시작하는 것이 낫다. "왜 고기를 안 먹나요?"가 아니라 "어떻게 고기를 안 먹게 됐 나요?"라고 질문하면 좀 더 다양한 원인에 대해 들을 수 있다.
- 모든 사람과 대화할 필요는 없다. 가족 파티에서 늘 같은 이야기만 하고 도무지 종 잡을 수 없는 이종사촌이 있다면?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다 면 그만두면 된다. 공감대가 전혀 없고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에너지 소비가 너무 많은 동료가 있다면? 물론 소크라테스의 문답식 대화를 나눌 필요가 없다.
대화를 통해 에너지를 얻는지, 에너지가 빠져나가는지를 주의해서 살펴봐야 한다. 소크라테스의 문답식 대화는 정확 히 말하면 평소 내가 관심 없던 사람들, 나와는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의 생각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 대한 진지한 관심은 그 사람뿐만 아니라 나자신에게도 선물이 될 수 있다. 새로운 생각과 통찰력을 얻을 기회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좋은 대화가 필요하다.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주입하기보다는 함께 지혜로워질 수 있는 대화가 필요하다. 새로운 관점과 이해를 위한 대화가 필요하다. 먼저 이해하고 그다음에 이해받는 대화가 필요하 다. 좋은 대화는 좋은 질문에서 시작한다. 좋은 질문은 호기 심 가득한 마음과 감탄하는 자세에서 시작한다. 즉, 소크라테스의 자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