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스러운 한끼
- 우리가 먹는 음식은 우리 몸에 들어가 살이 되고 피가 되고 뼈가 된다. 그뿐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음식물이 지닌 업까지도 함께 먹어 그 사람의 체질과 성격을 형성. 이를테면 육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고기를 먹을 때 고기의 맛과 더불어 그 짐승의 업까지도 함께 먹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 짐승의 버릇과 체질과 질병 그리고 그 짐승이 사육자들에 의해 비정학 다루어질 때의 억울함과 분노와 살해될 때의 고통과 원한까지도 함께 먹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 버터 금지령, 그리고 돈을 주고 버터 섭취권을 사는 행태는 많은 이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종교개혁에 나섰던 루터도 마찬가지. 루터는 95개조의견서를 발표한 지 3년뒤인 1520년 독일지역의 그리스도교인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
또 하나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은 복음서가 알려주듯이 금식은 누구에게든 자유롭게 적용되어야 하며 모든 종류의 음식물 역시 누구나 자유롭게 먹을 수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로마에 있는 저들 자신은 금식을 조롱하면서 로마 밖에 있는 우리들에게 저들이 구두도 닦으려 하지 않는 기름을 먹게 하고, 또 그 후에는 우리에게 버터 및 각종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자유를 팔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우리의 양심을 너무나 불안하고 소심하게 만들어 놓았기에 이 자유에 관해 설교하는 것조차 더 이상 어려울 지경입니다. 그럴 것이 일반백성은 속이고 저주하고 또는 음행을 저지르는 것보다 버터를 먹는 것을 더 큰 죄로 간주하고 꺼려하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버터를 주로 생산하고 먹던 북유럽 국가와 16세기 종교개혁기에 로마 카톨릭교회에서 이탈한 나라가 거의 일치한다는 점. 지금도 올리브오일을 많이 먹는 이탈리아나 스페인, 포르투갈 등 남부유럽은 카톨릭 교세가 강하고 독일, 네덜란드, 스위스 등 버터를 많이 먹는 지역은 개신교 세가 강하다.
버터문제가 독일의 종교개혁에 불길을 부채질했다면 스위스에서는 소시지가 발화점이 되었다. 일명 소시지 사건이 발생한 것. 소시지 사건은 1522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성경을 출판한 인쇄업자 크리스토프 프로샤워가 사순절 기간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소시지를 먹은 데서 비롯된 일. 지금 생각하면 황당할 수 있지만, 당시 사순절 기간에는 육류섭취가 금지돼 있었기 때문에 소시지를 먹는 것은 문제삼을 만한 일이었다. 게다가 여러 사람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소시지를 먹었으니 이는 교회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한 사건으로 여겨짐. 당연히 교회는 이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더욱이 그 자리에는 사제도 있었다. 사순절에, 그것도 교회의 규칙을 위반하는 소시지 식사를 사제가 주관한 것이다. 그가 바로 츠빙글리다. 츠빙글리 역시 루터와 마찬가지로 진리의 유일한 토대는 성경이고, 교황과 공의회의 권력은 허상이라고 생각. 성경에 근거한 기독교인의 자유를 설파하던 그는 사순절 육식금지는 성경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다고 주장. 이후 67개 결의를 제시하며 로마카톨릭교회와 맞섰고, 스위스 종교개혁의 불꽃은 가열차게 타오름. 그는 1531년 신구교간 벌어진 카펠 전쟁에서 사망. 그의 죽음으로 주춤했던 스위스의 종교개혁은 이후 칼뱅을 통해 되살아나게 된다.
- 플레이크 형태의 시리얼은 그야말로 우연히 탄생했다. 통밀을 삶기 위해 냄비를 불 위에 올려놓고 오랫동안 방치한 결과물이었다. 건강증진센터 원장이었던 존 켈로그와 그의 동생 윌은 망쳐버린 통밀을 버리기 아까워 얇은 반죽이라도 만들어볼 작정으로 롤러에 통과시킴. 그런데 물렁하게 익은 통밀이 롤로를 지나면서 바싹 마른 조각이 되어 우수수 떨어졌고 이것이 센터 이용자들에게 환영받은 것.
형인 존 켈로그가 신도를 위한 엄격한 레시피를 고수했다면, 동생 윌의 생각은 달랐다. 신도가 아닌 일반대중도 즐겨 먹을 수 있도록 가공하는 쪽을 택함. 결국 형제는 각자의 길을 가기로 했다. 동생은 회사를 창업해 일반인의 입맛에 맞게 가공한 제품을 내놓음. 이때가 1906년이다. 회사는 급성장했고, 이곳에서 생산한 콘플레이크 제품은 시리얼의 대명사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시리얼 분야에서 켈로그와 양대산맥을 이루는 회사인 포스트의 창업사연도 재미있다. 찰스 포스트는 우울증 때문에 존 켈로그의 요양원에 입원했다고 환자식으로 나온 콘플레이크를 맛보고 사업 아이템을 떠올리게 되었다고 함.
- 다쿠앙이라는 이름은 일본의 유명한 스님이 이름에서 나옴. 일본 대선사 다쿠안 소호 스님이 선식으로 즐겨 먹었던 것을 스님의 법명을 따서 다쿠앙으로 불렀다고 한다. 요리법은 단순하다. 쌀겨와 소금으로 무를 절여서 버무린 뒤 항아리에 담아 익힌 것.
다쿠안 스님은 일본에서도 명성이 꽤 높다. 불교 선종의 한 파인 일본 임제종의 대표적 고승. 검술, 다도, 조경, 수묵화, 글에 두루 능해 일본의 전통문화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일본의 전설적 사무라이 미야모토 무사시의 정신적 스승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 달콤한 맛을 싫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누구나 대체로 좋아하는 맛이다. 그런데 왜 서아시아 사람들은 유독 이처럼 강한 단맛을 좋아하는 것일까?
물론 날시가 더운 탓도 있다. 또 금식기간인 라마단을 지낸 후 기력을 회복하려면 단 음식이 도움이 된다. 흥미로운 것은 여기에 종교적 이유도 있다는 것. 탐식의 시대 저자인 레이철 로던은 달콤한 디저트의 연원을 종교에서 찾는다. 모슬렘은 맛있는 식사를 포함해 현세에서 즐기는 쾌락을 낙원에서 누리는 기쁨의 예시로 여겼다고 한다. 즉 화려하고 다양한 요리는 낙원의 기쁨이 크다는 것을 확인하는 증거였다. 그는 이 책에서 "디저트를 즐기는 것은 믿음의 증거라는 내용이 쿠란에 언급돼 있다"라고 썼다. 그 때문인지 10세기에 쓰인, 현재 전해지는 아랍의 가장 오래된 요리책 키타브 알타비크에 나오는 레시피의 3분의 1이 디저트다. 로쿰, 잘레비, 쿠나파 등도 이 책에 소개되어 있다. 캔디의 일종인 누가, 아이스크림의 유래가 된 셔벗 역시 모슬렘에 의해 서구세계에 전해졌다.
- 달콤한 디저트를 즐기는 것은 종교적 이유뿐 아니라 건강에 도움이 된다는 믿음도 있었기 때문. 아랍권의 대표적 문학작품인 천일야화에는 산더미처럼 음식을 차려내 대접한 뒤 달콤한 과자를 건네며 소화를 돕는 데 탁월한 효능이 있다고 권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키타브 알타비크에도 달콤한 디저트 종류를 모두 식사 끝 순서에 두고 있다.
이 지역에서 특히 디저트 문화가 발달한 것은 페르시아의 영향이 컸다. 언어학자 댄 주래프스키 교수는 음식의 언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바그다드는 메소포타미아에서도 예전에 페르시아에 속하던 지역에 건설됐고, 그곳에서 칼리프의 위대한 요리사들은 달콤한 아몬드 페이스트리 라우지나즈와 끈적끈적한 사탕 팔루다즈, 시크바즈처럼 시큼한 요리, 여러 달콤한 스튜 등 페르시아의 디저트를 빌려오고 더욱 풍부하게 하여 요리의 새물결을 일으켰다.
- 출소할 때 두부는 왜 먹게 되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흰색의 두부를 먹고 순수하게 살라는 의미, 감옥에서 고생했으니 영양보충을 하라는 의미 등이다. 박완서는 산문집 두부에서 이렇게 말했다.
징역살이를 속된 말로 콩밥 먹는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면 출옥한 이에게 두부를 먹이는 까닭을 알 것도 같다. 두부는 콩으로부터 풀려난 상태이나 다시는 콩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두부는 다시는 옥살이하지 말란 당부나 염원쯤 되지 않을까.
두부는 불교와 깊은 연관이 있다. 아마도 불교가 없었다면 현재까지 전해지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도,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 것도 불교의 역할이 컸다.
- 우리나라에 두부가 전래된 것은 중국과 불교문화 교류가 활발했던 통일신라시대 즈음인 것으로 추정됨. 처음부터 두부가 서민층의 음식이었던 것은 아님. 불교가 국교인 고려시대에 두부는 사찰에서 부처님께 공양하는 귀한 음식이었다. 그런 이유로 사찰에서 주로 두부를 만들었다. 당시 사찰은 많은 토지를 소유했고 부가 집중돼 있었기에 음식문화를 선도할 수 있었다. 자연히 두부제조법도 사찰을 중심으로 발전.
두부가 처음 등장하는 문헌은 고려 성종 때 최승로가 쓴 시무28조로 알려져 있음. 이 문헌은 지금 해야 할 일 28가지라는 의미로 신하가 왕에게 올린 건의문이다. 이 문헌에서 최승로는 행인에게 미음, 술, 두붓국으로 보시하는 일은 체통이 서지 않는 일이니 삼가라고 왕에게 건의함. 작은 일에 왕이 직접 나서기보다는 악을 징계하고 선을 권장하는 큰 그림을 그리라는 뜻이었다.
- 성경에 부활절은 레저렉션데이라고 나오지만 영어로는 이스터. 이 말은 고대 북서유럽에 살던 튜턴족 여신 에아스트레에서 유래.
19세기 영국 목사 알렉산더 히슬롭은 부활절뿐 아니라 성탄절 등 기독교의 주요 축일이 성경의 근거에 기인하지 않는다고 주장. 바빌론 신비종교의 축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부활절 달걀의 기원 역시 고대의 신비종교와 연관이 깊다. 고대 켈트족의 성직자인 드루이드는 성직의 신성한 상징으로 달걀을 가지고 다녔고, 아테네에서 열리던 디오니소스 제전, 즉 신비종교 의식에서도 신비로움을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달걀을 사용했다. 서양뿐 아니라 일본과 중국에서도 신성한 종교적 의미로 달걀을 사용. 달걀이 생명가 다산의 상징물로 여겨지게 된 것은 고대 바빌론 시대 유프라테스강에 떨어진 달걀에서 부화한 여신신화에서 시작되었다.
- 프레첼은 어떻게 사순절가 연관을 갖게 되었을까? 먼저 사순절을 알아야 한다. 사순절은 부활절 이전 40일간을 의미.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과정을 되새기며 금식과 특별기도 등 경건한 생활을 이어간다. 고대 로마이후 기독교 문화가 지배해 온 서구에서 사순절은 고행 또는 금욕과 같은 의미였다. 이 시기에는 단순히 종교적 의례를 잘 지키는 것만 요구되는 것은 아님. 식생활에도 큰 제약이 따랐고, 성관계도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는 행위로 여겨져 금기시되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이 극한의 스트레스를 계속 견디고만 살 수는 없는 법이다. 대대적인 고행에 들어가기 직전 사람들은 한바탕 먹고 즐기고 쾌락을 추구하는 난장을 벌인다.
그것이 바로 사육제, 즉 카니발이다. 이 축제의 시간은 욕망의 해방구이자 기존질서를 전복하는 기능으로 작용.
사육제 대는 무슨 짓을 해도 괜찮았다. 교회의 율법도, 신부의 설교도 이때만큼은 공염불이었다. 남녀노소 없이 세상을 번쩍 치켜들고 벌컥컬컥 마셔버릴 듯 기세등등하게 놀았다. 단 며칠 동안이었지만 아무하고나 뒤엉키고, 함부로 욕지거리를 내뱉고, 술독에 머리를 빠뜨리고 드렁드렁 코를 골아도 말썽이 나지 않았다. 새빨간 거짓말을 해도 뒤탈이 없었다. 금식을 하면서 꾹꾹 눌러 참았던 것들을 죄다 풀어내고, 잠시나마 지상의 천국을 만끽했다.
- 40일에 이르는 사순절에 돌입하면 육류는 물론이고 유제품도 먹을 수 없다. 물과 밀가루, 소금만 넣은 간단한 빵 따위로 끼니를 때워야 하는데, 그 빵이 프레첼.
프레첼을 사순절에 먹게 된 것은 400년경부터다. 고대 기독교인이 사순절 대금식 기간에 먹기위해 고안했는데, 금식기간에 먹는 빵이니 만큼 들어가는 재료도 소박해야 했고 빵 모양 역시 거룩하고 경건한 시기에 합당해야 했다. 프레첼의 모양을 보면 숫자8 혹은 하트를 찌그러뜨린 것 같은데, 실제로는 양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팔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고 한다. 흔히 기도하는 모습이라고 하면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손바닥을 붙이거나 손깍지를 끼는 자세를 떠올리게 마련이지만, 고대 기독교인은 양팔을 교차해 손을 반대편 어깨에 대호 기도했다. 비잔틴 예식을 따르는 기독교인은 오늘날에도 그런 식으로 기도한다고 한다. 그래서 라틴어로 작은 팔들이라는 뜻의 브라켈라이에서 독일어 브레첼이 나왔고, 이는 오늘날 프레첼로 이어짐. 즉 기도하는 팔이 빵 모양과 이름이 유래가 된 것임.
- 사찰음식으로 유명한 수원 봉녕사에서 발간한 화보집 봉녕사 사찰음식 대향연의 한구절이다.
* 아침 : 신선이 먹는 때로, 몸에 맑은 에너지를 채운다
* 점심 : 사람이 먹는 때로, 부처님도 하루에 한끼만 드셨다
* 저녁 : 짐승이 먹는 때이며, 해가 지고 먹는 것은 짐승의 마음을 닮아간다고 경계했다
* 밤 : 귀신이 먹는 때이고, 귀신은 달리 표현하면 몸에 나쁜 에너지다.
- 선재스님이 쓴 여러 책 중 당신은 무엇을 먹고 사십니까에는 그동안 스님이 설파해온 사찰음식의 정의와 방향성이 잘 정리되어 있다.
예로부터 불가에서는 나와 가까운 자연의 것을 취해 약으로 사용해왔다. 내가 사는 지역에서 생산되는 농산물들이 내 몸에 가장 좋다. 지역에서 나는 농산물을 이용하거나 이동거리가 짧은 먹을거리를 먹자는 로컬푸드 운동 또한 이미 부처님 시대에 있었던 것이다.
욕망을 다스리려면 제일 먼저 음식에 대한 절제, 비움이 있어야 한다. 음식을 욕망이나 맛으로 먹지 안으며 몸을 살찌게 하기 위해 먹지 않는다. 다만 몸을 유지하기위해 먹으며 도를 닦는 데 도움이 되게 하기 위해 먹는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며 오늘날 사찰음식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