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경제
- 더 늦기 전에 부유함을 통장 잔액에 한정 짓지 말고 지성verstan 능동적인 '상위' 인식능력을 의미하며, 수동적인 '하위' 인식능력인 감성과 대립된다 - 편집자주과 생명을 중시하고, 행복과 사랑을 공급하는 탈물질의 약속과 법칙을 마련해야 한다. (구경제와 신경제가 죽은 이후에 오게 될) 이런 탈물질 경제 시스템을 나는 양자경제Quantum Economy 라고 이름 붙였다.
- 양자경제(Quantum Economy)란?
* 기존 경제 체제를 새롭게 바라보는 시선이다.
* 식량, 주거, 안전이라는 명백한 물리적 욕구를 넘어 소속감, 자존감, 자아실현 같은 심리적 욕구까지 통합한다.
* 순환하며 잠재적으로 무한하다.
* 생산자와 소비자의 거리를 좁히고, 직접적 거래를 가능하게 한다.
* 양자세계만큼 예측 불가처럼 보이지만, 양자물리학만큼 현실적이다. · 상호의존 시스템이다.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인간과 기계도 협력한다.
* 분야 간의 경계를 허물어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통합한다.
* 분권적이고 상호연결된 구조를 둔다.
* 우리의 소비 인식을 되돌아보게 하고 비물질적 성장으로 가는 길을 열어준다.
* 지성사회, 의식혁명, 순환하는 무한성, 철학적 사고로 구현된다.
- 양자는 이미 과학의 영역을 넘어섰다. 정치학자 알렉산더 웬트 Alexander Wendt는 '양자사회학자'를 자처하며, 새로운 과학이 인간 과 자연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생각하게 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는 2015년에 《양자적 마음과 사회과학 Quantum Mind and Social Science)에 서 사회학 전체가 오류를 기반으로 한다고 썼다. 그의 주장에 따르 면 사회학자들은 약 150년 전 사회학이 시작된 이래로 줄곧 인간의 사고와 사회가 고전 물리학 법칙을 따른다고 확신해왔다. 언뜻 이런 기본 가정은 여전히 타당해 보인다. 넓게 보면 인간은 어차피 책상 이나 의자와 똑같이 물질에 속하므로 같은 법칙을 따를 수밖에 없지 않겠나. 그러나 인간의 의식과 사회는 고전 물리학 법칙을 따르지 않 는다. 오히려 '비국지성'과 '얽힘' 같은 양자물리학의 특징을 갖는다.
게임이론은 양자이론 영향의 또 다른 사례이다. 고전적 접근법에 서는 둘 이상의 행위자가 어떤 상황에서 하는 전략적 상호작용이 규정된 규칙과 결과로 모형화된다. 이는 경제학에서 인기 있는 접근법이다. 고전 게임이론에서 더 발전한 것이 양자게임이론이다. 양자게임이론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뗄 수 없게 서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경제 시스템과 행복추구를 통합해서 봐야 한다.
양자적 관점에서 세상을 보는 가장 큰 걸림돌은, 양자물리학이 여 전히 전문가들만이 입에 올리는 이해할 수 없는 '수리수리마수리'로 통한다는 것이다. 양자물리학자이자 게임이론가인 존 폰 노이만ohn von Neumann 같은 탁월한 과학자조차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당신은 양자역학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저 익숙해질 뿐이다.” 아인슈 타인 역시 체념하듯 이렇게 적었다. “양자 이론은, 매우 지능적인 편집증 환자의 비일관적 사고요소로 구성된 속임수 체계를 연상시킨다.
- 세기의 천재들조차 양자 세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설명할 수 없는데, 왜 굳이 우리가 양자역학을 알아야 할까? 이유는 간단하다. 지금까지 풀 수 없었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지금 당장 가 진 접근법이 양자역학뿐이며 그것이 최선의 접근법이기 때문이다.
의식은 매우 근본적인 것이다. 인간과 기계의 본질적 차이를 가 르는 것이 의식의 유무이다. 고전 물리학으로는 물질에서 어떻게 의 식이 발달하는지 설명할 수 없다. 인간 의식의 신비는 더더욱 설명할 수 없다. 특정 행동에 의식이 동반하는 이유는 뭘까? 물리적 과정이 어떤 방식으로 뇌에서 주관적 경험을 불러낼까? 이 질문에 우리는 대답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조차 모른다. 사회적 경제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양자안경을 쓰면 새로운 통찰이 가능하다. 양자의 관점으로 보면 모든 것이 모든 것과 연결되며 서로 영향을 미친다. 세계는 개별 입자의 합이 아니다. 세계는 원자로(만)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 이다. 과학자들은 세기가 지날수록 개별 입자를 점점 더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서로 맞지 않는 퍼즐 조각을 헤아 릴 수 없이 많이 만들어냈다. 각각의 퍼즐은 모두 현실에 근접하지 만, 일치하진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점점 더 명확히 깨닫는 것처 럼 현실은 '양자적'이기 때문이다. 현실이 양자적이라는 말은, 리처 드 파인만Richard Feynman 이 경고했듯이 우리가 현실을 이해할 수 없 다는 뜻이다. “당신이 현실을 이해했다고 믿는다면, 당신은 현실을 정말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 거대기업의 최고경영진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을 막으려 면, 자연과학과 철학을 포함한 모든 분야의 강력한 협업이 필요하다. 전 미국무장관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는 2018년 《디 애틀랜틱 (The Atlantic)》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만약 인공지능이 반복 훈 련을 통해 인간보다 기하급수적으로 학습할 수 있다면, 실수 역시 인 간보다 더 빨리 더 큰 규모로 저지를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인공 지능이 윤리적 혹은 분별 있는 결과를 내도록 알고리즘을 조종할 수 있다는 인공지능 연구자의 생각은 환상일 수 있다. 모든 개별 학문 분야는 개념 정의에서 의견 일치를 이루지 못한 인간의 무능함에서 생겨났다. 이제 인공지능이 심판자로 나서게 될지 모른다.”
이런 악몽 같은 시나리오를 막기 위해, 고령의 미국 정치학자는 철학협의회 설치를 권고했다. “내가 기술 세계에 문외한이 정치와 철학에 문외한인 인공지능 개발자는 제기된 질문을 숙고하고 기술적으로 실현 가능한 대답을 찾아야 한다. 미국 정부는 철학자로 구성된 협의회를 설치하여 사회 비전을 수립해야 한다.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우리가 빨리 행하지 않으면, 너무 늦었다는 걸 곧 깨닫게 될 것이다.”
키신저의 지적처럼 철학의 르네상스가 필요하다. 수학과 사회학, 기술과 철학의 접근법과 지식을 서로 연결하는 분야 통합적 진보가 필요하다. 여기에서 의식혁명이 시작되어야 한다. 이 일은 지금 시작해야 한다.
- 애덤 스미스가 예언했듯이,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물질적 풍요를 지구에 선사했다. 그러나 동시에 무자비한 탐욕과 이익 극대화의 독을 뿌렸고 그 독이 몇 세대 안에 우리의 생활기반을 광범위하게 파괴했다. 메가급 거대기업들은 시장을 자기들끼리 나눠 가졌다. 수많은 혁신 기업이 탄생하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스타 트업 투자의 80퍼센트가 네토크라시Netocracy, 인터넷 귀족계급이라는 뜻의 신조어 옮긴이라 불리는 인터넷 슈퍼갑부들로부터 나온다. 경쟁으로 사업에 활기가 생기기는커녕, 승자독식이라는 결과만 생긴다. 그런 데 파멸의 대가는 우리 모두가 치르고 있다.
가장 부유하고 기술적으로 진보한 곳에서조차 상류층과 빈곤층의 사회적 격차가 파괴적 수준에 도달했다. 상위 1퍼센트의 소득이 비약적으로 높아지는 동안 나머지 99퍼센트의 소득은 겨우 조금 오르거나 동결됐다. 텔레비전쇼에서 젊은 스타트업 창업자의 발명 정신과 대담성을 축하하지만 실상 스타트업 시대는 오래전에 끝났다. 구글, 아마존,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페이스북으로 구성된 이른바 '빅 파이브Big Five'와 알리바바를 필두로 등장한 새로운 아시아 기업들 이 새로운 기회와 정보를 흡수하고 알고리즘화하여 나눠 가지고 있 다. 새로운 스타트업이 올림푸스 정상에 진입할 짜 기회는 사라졌 다. 데이브 에거스Dave Eggers가 《더 써클The Circle)에서 썼듯이, 그들 은 구글, 우버 혹은 알리바바 같은 '고래'의 '플랑크톤'에 불과하다.
- 선거 때 유권자들이 감정에 이끌리는 것은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인간은 어차피 완벽한 합리적 존재가 아니다. 이미 고대 그리스의 평민회에서도 카리스마 넘치는 사람이 가장 많은 표를 받았다. 로마에서 카이사르에 매혹된 대중은 그들의 정책이 자신의 이익에 정면으 로 반하더라도 그에게 환호를 보냈다.
원인은 '무지한 유권자'에게 있지 않다. 알고리즘과 소셜 미디어의 시대에 모든 이념가는 아날로그 시대의 선전가보다 비교할 수 없이 효과적인 메커니즘을 가지게 됐다. 일부 좌파가 우파 이데올로기를 이용하기 시작하고, 우파 포퓰리스트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전통적인 좌파 주제를 채택하는 아이러니한 정치 풍경이 생겨났다. 폴란드의 민족주의 집권당인 PIS(법과 정의)가 후자의 좋은 사례인데, 이 당은 장학금과 의료 시스템을 개선하고 연금수령연령을 낮추는 등 사 회복지정책을 확장하여 지지를 획득했다. 터키의 에르도안, 미국의 트럼프 같은 포퓰리즘 정치인조차 토마스 만의 소설 《마리오와 마술 사Mario und der Zauberer》에 나오는 최면술사 치폴라처럼 유권자들 의 두려움과 혐오를 이용한다. 이미 오늘날 알고리즘 기반의 AI 기계들이 구글이나 페이스북을 통해 여러 면에서 우리 자신보다 우리에 대해 더 잘 알게 됐다. 무엇이 우리를 부추기고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바라는지 잘 알고 있다. 기계들은 포퓰리즘 정치인을 위해 페이스북 같은 소셜 미디어 이용자의 데이터를 정밀하게 감시하고 의도적으로 '소셜 봇'을 투 입하여 특정 유권자 그룹의 태도와 결정을 조작할 수 있다. 코로나19 위기 동안 일어났던 감시 앱을 둘러싼 논쟁과 뇌-기계 인터페이스 외에도 바이오 및 나노 기술로 우리의 몸에 칩을 이식하는 기술 발전으로 인해 그런 시나리오의 상상에는 한계가 없어졌다.
- 정신의학자 다니엘 에이멘Daniel Amen 이 자신의 책 《여성의 뇌는 힘이 세다Inleash the Power of the Female Brain》에서 설명한 바에 따르면, 여성은 신경학적으로 현대세계의 요구와 잘 맞다. 에이멘이 여성의 강점 중 특히 리더의 자질로 인정하는 다섯 가지는 공감, 협동, 직관, 자제력, 책임의식이다.
이 다섯 가지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뛰어난 이유는 뭘까? 성호르 몬의 차이 때문이다. 여성의 뇌는 태아 때부터 여성 성호르몬 에스트로겐으로 가득하다. 반면 남성의 뇌는 남성 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 으로 가득하다. 최신 연구에 따르면, 전두엽이나 전전두엽의 발달은 에스트로겐의 영향을 특히 강하게 받는다. 따라서 여성의 전두엽이 남성의 전두엽보다 평균적으로 더 크고 더 빨리 발달한다.
인지(지식)와 의사결정은 전두엽이 관장한다. 인지와 의사결정은 점점 복잡하게 점점 빨리 변하는 세계에서 기업 경영과 리더십의 핵심 요소로 떠오르고 있다. 특히 오른쪽 전두엽은 미래 숙고와 관련이 있고 이것은 능동적인 프로젝트 관리에 대단히 중요한 능력이다. 그 러므로 학교든, 대학이든, 직장이든, 주로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더 능동적으로 과제를 일찍 끝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남성의 경우 테스토스테론 때문에 공격성과 성적 충동이 강하다. 그들은 신체적으로 여성보다 강하지만 21세기에 필요한 기술 면에서는 확실히 여성보다 약하다. 남성은 근육을 더 많이 더 크게 키울 수 있고 더 대담하게 몸을 던질 수 있다. 남성은 기한 압박 속에서 과 제를 해결해야 할 때는 여성보다 잘 적응한다. 스트레스를 통한 동기 부여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남성의 경우 시간 압박이 클수록 도파민 과 노르에피네프린 같은 신경전달물질이 더 많이 분비된다. 반면 여성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장기 과제에서도 지속적으로 의욕을 유지한다.
여성들은 위험한 상황에서도 상대적으로 침착성을 유지하는데, 뇌 연구자들은 이것의 이유도 찾아냈다. 대뇌변연계에 있는 아몬드 모양의 편도체라는 뇌 영역은 여성이 남성보다 명확히 작다. 뇌의 이 오래된 영역은 본능적인 행동 패턴인 공격성과 분노를 담당한다. 싸움 혹은 도주 모드에서 우리의 뇌는 전두엽을 끄고 편도체를 켠다.
그러면 우리는 순식간에 원시 사냥꾼(혹은 도주하는 사냥감)으로 변한다. 남성의 편도체는 여성보다 더 클 뿐 아니라 수많은 안드로겐 수 용체를 가지고 있어서 남성 호르몬의 분비가 많을 때 특히 활기를 띤다. 반면 여성의 뇌에서는 합리적 '자아'를 담당하는 전전두엽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원시적인 뇌 부위의 공격성과 패닉 프로그램을 잘 통제한다.
여성의 뇌가 평정심을 쉽게 잃지 않는 것은 앞쪽의 대상피질과 관 련이 있다. 여성의 경우, 충동을 통제하는 대뇌변연계가 남성보다 명확히 더 크다. 해부학적 차이가 여성의 낮은 모험성향을 부분적으로 나마 해명한다고 연구자들은 가정한다. 작은 편도체와 큰 앞쪽 대상 피질의 조합 덕분에 여성은 높은 압박 아래에서도 감정을 통제하고 최고의 해결책을 숙고할 수 있다. 또한, 배선'에서도 중요한 차이가 있다. 남성의 뇌에는 뉴런이 더 많지만, 여성의 뇌에는 좌뇌와 우뇌 사이의 연결이 더 많다. 남성은 전형적으로 이해력, 논리, 패턴인지를 담당하는 좌뇌를 더 많이 사용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중심 목표에 집중하고 과제에 체계적으로 접 근하는 것을 잘한다. 스스로 동기를 부여할 수 있지만, 주변 환경을 무시하고 독불장군처럼 행동하려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여성은 주로 우뇌를 사용하는데, 우뇌는 공감하고 소통하 며 사회적 구조를 만들고 창의적 해결책을 찾을 수 있게 해준다. 또 한 여성은 남성보다 좌뇌와 우뇌를 동시에 사용하는 능력이 상대적 으로 더 뛰어나다.
여성은 섬엽도 남성보다 크다. 섬엽은 직관과 '직감'의 자리로 통한다. 섬엽은 공감 능력, 정서적 인식, 언어 중재적 사고를 담당한다. 그러므로 여성이 (다른 영장류와 마찬가지로) 남성보다 소통을 더 잘하 고, 얼굴을 더 잘 인식하며 감정을 더 잘 표현한다. 또한 다른 사람의 감정을 더 잘 해석하고 종종 남자들은 알아차리지도 못한 감정의 의 미를 읽어낸다.
평균적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기억력이 더 좋다.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가 남성보다 더 크고 더 활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성은 남 성보다 더 잘 배우고 배운 것을 더 오래 기억한다. 또한 청각 피질이 남성보다 더 큰데 이 부위는 학습 내용과 기억 내용을 언어로 표현하는 일을 담당한다.
- 앞으로 10년 안에 우리는 두 세력의 싸움을 경험할 것이다. 한 세력은, 사회에서 물러나 영성적 공동체 삶의 '자연'으로 돌아가는 사 람들이다. 그들은 개별 자아가 아니라 보편적 공동체와 참여 문화를 믿는다. 그들은 긍정적 공동체, 공동 창조, 협력을 믿는다. 그들은 자 연에서 친밀감을 느끼며 통일된 국가 정체성이 없다. 그들은 관심 있 는 공동체와 관계를 맺고 정치 이념에 매몰되지 않는다.
반대편에는 또 다른 세력, 즉 사회적으로 덜 성숙한 사람들, 특히 사회와 '시스템'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끼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자신의 좌절감을 공격적으로 표출하고 더 나아가 이념으로 무장한 테러집단이 아닌 외로운 늑대로 주변을 공격한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는 자동화와 과학기술의 희생자'가 되어 할 일을 잃은 수많은 사람이 있다. 사회 안정을 유지하려면 이 사람들에 게 (긍정적) 미래 전망을 제공해야 한다.
- 세계 최고의 물리학자조차 양자물리학이 정확히 무엇인지 혹은 양자이론이 정말로 우리의 현실을 이해하는 근본 이론인지 확실히 말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양자역학은 PC, 트랜지스터, 레이저 혹은 원자력발전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수많은 기술에 적용되고 있다. 그러나 양자이론에 관한 과학적 합의는 없다. 오히려 해결할 수 없는' 다양한 문제를 내포한 다양한 이론들이 공 존할 뿐이다. 게다가 양자역학은 우리가 인식하는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 것 같다. 아원자 혹은 우주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을 우리는 아 직까지 완전히 과학적으로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
막스 보른Max Born이 1924년 자신의 저서 《양자역학에 관하여Zur Quantenmechanik》에서 처음으로 양자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양자이론은 특히 막스 플랑크와 아인슈타인의 연구를 통해 수년에 걸쳐 발 전했다. 그러나 연구를 통해 이 용어를 도입하고 확립한 사람은 보른 과 그의 동료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 그리고 볼프강 파울리wolfgang Pauli였다.
1927년 10월에 브뤼셀에서 제5차 솔베이 학회가 열렸는데, 이 학 회는 오늘날 물리학과 화학 분야의 가장 중요한 대표자들의 역사적 만남으로 유명하다. 양자역학의 '오스카' 이자 전자와 광자를 주제로 한 이 학회는 에르빈 슈뢰딩거, 볼프강 파울리,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폴 디랙Paul Dirac, 루이스 드 브로이Louis de Broglie, 막스 보른, 닐스 보어, 막스 플랑크, 마리 퀴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같은 과학자와 사상가들의 유일한 만남의 장소였다.
아인슈타인과 보어 같은 인물들이 서로 다른 견해, 획기적 발견, 온갖 해석을 토론하면서 학회는 거인들의 충돌로 발전했다. 예를 들어 아인슈타인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의문을 제기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이 학회가 열리기 얼마 전에 한 입자의 위치가 정확히 특정될수록 그것의 운동량은 덜 정확하게 특정되며 그 반대 의 경우도 성립한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한 입자의 정확한 위치 와 운동량(운동상태 혹은 진동)을 동시에 특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고, 막스 보른과의 서신교환 과 닐스 보어와의 대화에서 다음과 같이 물었다. “양자역학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 이 이론은 많은 것을 전달하지만 우리를 오랜 비밀에 더 가까이 데려가지는 못합니다. 어쨌든 나는 신이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고 확신합니다.” 이 인용문은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 는다" 라는 축약형으로만 알려졌다.4 반면, 보어와 하이젠베르크는 철학자들이 수세기 동안 경고했던 근본적 문제를 과학이 마침내 해 결했다고 믿었다. 보어는 아인슈타인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우리의 과제는 신이 세상을 어떻게 통치해야 할지 지시하는 것이 아 닙니다. 양자역학의 파동함수 혹은 상태함수를 설명하는 슈뢰딩거 방정식은 양자역학의 핵심이다. 파동함수는 기본적으로 입자가 공간과 시 간의 특정 지점에 있을 확률을 설명한다. 그러니까 파동함수는 슈뢰딩거의 방정식을 사용하여 우리의 현실을 확률로 설명한다.
- 물리학자 슈뢰딩거는 1935년에 사고 실험을 통해, 양자역학의 법칙이 뉴턴의 법칙과 얼마나 모순되는지를 설명했다. 우리의 거시적 현실이 양자역학의 중첩원리에 지배된다면, 예를 들어 고양이를 그 들의 환경에서 격리하여 죽었으면서 동시에 살아있는 어떤 상태에 둘 수 있을 터이다. 격리가 해제되는 순간 고양이는 살지 혹은 죽을 지 결정해야만 한다.
슈뢰딩거의 이런 사고 실험을 근거로 이름 붙여진 '고양이 상태’ 는, 고전 자연과학의 시각에서 보면 혼란스럽고 정말 터무니없다. 아인슈타인은 양자물리학의 기이한 결과를 입증하는 데 생애 마지막 20년을 썼다. 그는 근본적 오류를 찾아내거나 둘을 연결할 법칙을 발견하리라 확신했었다. 아무튼, 그는 뉴턴처럼 원칙적으로 세계의 계산 가능성을 믿었다.
슈뢰딩거 방정식에는 문제가 있다. 뭔가를 측정하고 관찰하는 시점을 서로 다르게 정의하는 상태가 되고, 이것은 다시 설명하다'와 관찰하다가 무슨 의미이고 이 두 활동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정의해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혹은 바탕에 깔린 양자파동함수가 정의되지 않은 잠재된 구조와 무한히 많은 다양한 세계로 분할된다.
특히 양자 얽힘이 아인슈타인에게 두통을 안겨주었다. 그는 이것을 “유령 같은 원격효과”라고 기술했고, 오류나 결여된(또는 숨은) 변수를 찾는 데 자신의 천재성을 총동원했다.10 과학자 보리스 포돌스키Boris Podolsky 와 나탄 로젠Nathan Rosen과 공동으로 그는 1935년에 사고 실험에 관한 논문을 출간했는데, 그것은 '아인슈타인 포돌스 키-로젠-실험' 혹은 줄여서 'EPR-실험'으로 유명해졌다.
이 실험에서는 양자시스템에 있는 얽힌 두 소립자(T1, T2)의 위치와 운동상태가 관찰된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에 따르면, 보완 성질 때문에 정확한 측정이 불가능하다. EPR-실험에 따르면, T1의 운동상태를 측정하면, 얽힌 두 번째 소립자의 운동상태도 변하며, T2 의 운동상태 측정에서도 똑같은 결과가 나온다. 만약 운동상태 대신 에 T1의 위치를 측정하고 이어서 T2의 위치를 특정해도 마찬가지다.
아인슈타인, 포돌스키, 로젠은 양자역학이 '불완전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것이 고전 이론의 요구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완전한 이론이 되려면 측정값이 정확히 예측되고 시스템을 방해하지 않으 면서 물리학적 크기를 측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 은 1955년 사망 직전까지 약 20년 동안 양자역학의 소위 결여된 퍼 즐조각을 찾아내고자 했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헛된 일로 남았다.
불행히도 2차 세계대전 당시 주요 물리학자들이 최초의 핵무기 개발이라는 군비경쟁에 뛰어들면서 관심의 초점이 바뀌었다. 특히 맨해튼 프로젝트로 미국의 핵폭탄을 개발했던 로스 알라모스 연구소 소장 로버트 오펜하이머Robert Oppenheimer에게 그랬다. 그는 역사상 가장 중요한 물리학자로 통하는데, 불행히도 양자물리학 연구를 계속 이어갈 수가 없었다. 힌두교의 핵심 경전인 바가바드 기타를 인 용한 그의 유명한 말 “이제 나는 죽음,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폭격의 끔찍하고도 슬픈 역사를 강조한다. 미 국 수학자이자 이론물리학자인 리처드 파인만은 오펜하이머를 위해 일했고 1965년에 양자전기역학 연구로 노벨상을 받았으며 양자이론 을 올바른 길로 되돌려놓았다. 그는 오늘날 최초의 양자컴퓨터 개발 의 선구자로 통한다. 1982년 사고 실험이 아니라 실험실 실험에서, 양자역학 이론이 아니라 EPR-실험에 오류가 있었음이 입증되었다. 양자시스템에 있 는 소립자의 비국소성은 참이었다. 아인슈타인은 끈질긴 연구로 자신의 의도와는 달랐지만 새로운 과학 분야의 지식 진보에 공헌했다. 그러나 EPR-효과에도 불구하고 어떤 정보도 광속보다 빨리 전 송될 수 없음이 드러났다. 상대성이론의 이 공리는 양자세계에도 통 한다. 얽힌 두 소립자의 경우, 만약 첫 번째에서 측정이 이루어지면 두 번째 소립자의 상태가 곧바로 바뀌기 때문이다. 두 번째 소립자에 서도 상관관계가 실제로 측정되고 고전적 방식으로, 그러니까 광속 이하에서 소통될 때 비로소 인식되고 계산될 수 있다.
이것과 별개로 아인슈타인은 틀렸다. 세계는 그가 인지하고자 했 던 것보다 훨씬 더 기이하다. 그렇더라도 고전 물리학과 양자물리 학 사이의 현재의 극복할 수 없어 보이는 모순을 제거하는 어떤 연결, 공통적인 제3의 것이 틀림없이 있다. 어차피 맨눈으로 볼 수 없는 양자세계는 기이한 효과를 가지고, 눈에 보이는 모든 물체의 모든 양자에 들어있다. 당신이 앉아있는 의자에, 당신의 몸에, 우주 멀리 에 있는 모든 별똥별에도.
그러나 양자세계에서 우리는 무한성 개념과 씨름해야만 한다. 우 리가 과학적 설명을 찾지 못하고 다양한 학문 분야를 통합하고 철학 적 사색을 활용하여 그저 '진리'에 더 다가갈 수 있다면, 그것은 무엇 을 의미할까? 그렇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떤 세계에 사는 걸까? 우리 의 정체성을 설명할 수 있는 지각된 우주를 우리는 이해하는가? 적어도 당신은 이제, 우리가 단단한 물질로 만들어진 뉴턴과 데카르트의 안정된 세계에 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리라.
- 일생 동안 양자세계와 씨름하고 끊임없이 탐구하고 이해하려 애썼던 아인슈타인은 생애 마지막 날에 양자세계가 실제로 얼마나 기이한지를 간결하게 요약했다. 그는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코르넬리우스 란조스Cornelius Lanczos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신이 쥔 카드를 엿보기란 아주 힘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현재 양자이론이 추측하는 것처럼) 신이 주사위 놀이를 하고 텔레파시를 쓴다는 걸, 나는 한순간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묻는 것이 중요하다. 현실은 일종의 의식적 관찰자가 필요하고 그래서 관찰의 영향을 받고 고양이 상태'로 존 재하는 기이한 입자가 있다고 당신은 믿는가? 그래서 어쩌면 당신의 의식이 어떤 방식으로든 우주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는가? 양자물리 학은 실제일까, 아니면 양자수준의 뭔가를 확률로 설명하는 데 필요한 도구에 불과할까? 우리는 평행우주에 살고 있을까? 우리의 수많은 복제가 서로 상호작용할 수 없는 여러 다른 우주에 살고 있을까?
충격적으로 들리겠지만, 이 모두는 참이다. 서로 강하게 모순되는 이런 다양한 해석들은 가장 똑똑한 물리학자들이 고안한 우리 우주 를 가장 잘 설명해 준다. 가장 타당해 보이는 모델을 선택할 때 우리 가 쓸 수 있는 건 직관뿐이다. 물론 가장 쉬운 비상구를 선택하여 모든 것을 더 높은 힘에 맡기고 문제를 다른 차원(신의 문제)으로 가져 갈 수 있지만, 그것은 너무 간단하다. 지금은 칸트 철학을 받아들여, 시간과 공간 속에서 '경험'과 '직관'이 의미하는 바를 자세히 살펴보고, 우리의 생각을 과학 진보와 연결하여 우리 스스로 새로운 계몽의 일부가 될 시간이다.
- 1981년 리처드 파인만은 '고전 컴퓨터가 양자물리학을 현실적으로 시뮬레이션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파인만은 양자 컴퓨터가 이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그는 결과적으로 양자컴퓨터 모델의 최초 설계자가 되었다.
같은 해에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의 저명한 컴퓨터과학자와 물 리학자들이 양자컴퓨터 개발을 위해 한 학회에 모였다. 여기에서도 리처드 파인만이 선구자였다. 그는 1988년 사후에 노벨상을 수상했 는데,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졌다. “내가 만들 수 없는 것은 이해할 수도 없다. 이것은 전 세계의 대학생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메시지일 뿐만 아니라, 모든 과학자들에게 아이디어를 실현하고 실행하라는 호소이기도 했다. 몇십 년이 더 걸리긴 했지만, 오늘날 양자기술의 실용적 응용이 마침내 등장하고 있고, 파인만이 이것을 본다면 아주 뿌듯하리라.
양자기술의 응용은 두 번째 양자혁명을 주도하고 우리를 양자패러다임으로 안내할 것이다. 양자컴퓨터의 기능방식은 고전 물리학이 아니라, 양자역학 원리 중에서도 특히 얽힘과 중첩 특성에 기반한다. 고전 컴퓨터는 정보를 비트 즉 1 혹은 0으로 저장한다. 반면 양자 비트(큐비트)는 중첩 효과로 인해 두 상태에 동시에 존재하고 그래서 시간 단위당 두 배로 더 많은 정보를 처리할 수 있다. 2019년에 구글은 자신의 양자 컴퓨터 칩이 고전 컴퓨터의 성능을 능가하는 이른바 '양자우월성'에 도달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이 구글의 컴퓨터는 53큐비트로 최소 6천 옥틸리언 측정을 수행할 수 있다고 발표됐다. 6천 옥틸리언은 60000 뒤에 0이 48개나 붙는 수이다. 고전 슈퍼컴퓨터라면 약 1만 년이 걸릴 계산을 구글 컴퓨터는 약 200초만에 수행할 수 있으리라.29
새로운 기술을 사용할 준비가 되려면, 과학자들은 몇 가지 주요 장애물을 극복해야 한다. 양자컴퓨터가 상용화되기에는 아직 오류율이 너무 높다. 아주 작은 온도변화에도 큐비트의 결맞음이 파괴될 수 있다. 두 가지 양자상태에 동시에 존재하는 능력이 없어질 수 있 다. 갑자기 등장하는 결맞음 오류율이 큐비트 수와 비례하여 증가한 다. 현재 연구자들이 결맞음을 유지하고 오류율을 낮추는 효과적인 방법을 열심히 찾고 있다. 또한 에너지 소비와 관련해서도 극복해야 할 몇 가지 문제가 있는데 에너지 소비가 아직 너무 높기 때문이다.
- 생각하므로 존재하는가 ... 아니면 존재하므로 생각하는가?
"고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s) stum,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의 이 말을 한번 쯤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계몽주의자 데카르트는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독창적인 사상가이자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러나 그의 결론이 맞을까? 사 고과정을 의식적으로 인식했다는 것에서 '내가 이 사고를 불러냈다. 는 결론이 나올까? 데카르트는 자아, 주체에게 사고의 저작권을 부여했고 그것으로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을 주장했다. 두 개의 독립된 실체(존재)가 있다는 그의 가정은 오늘날까지 뇌와 의식 연구에 각인되어있다. 그러나 여기에 논리적 오류가 있을 수 있다. 어쩌면 '자아'는 주로 무의식적이고 자아로부터 거의 영향을 받지 않고 진행되는 사고과정의 아 주 작은 일부를 관찰하는 존재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러나 뇌와 신체 를 모방하여 의식을 창조하려는 오늘날의 과학적 노력에서는 여전히 데카르트의 가정과 전제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프랑스 계몽주의자는 모든 실체(정신과 육체)에 정체성과 기능에 필수적인 일련의 특성(본질)을 지정했다. 사르트르는 300년 뒤에 이런 '본질주의'에 맞서 '실존주의'를 주장했다. 실존주의 철학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자유로운 활동가로서 존재하고 자아는 오로지 자 발적 의지에 바탕을 둔다. 사르트르가 생각하는 자아는 그의 유명한 표현처럼 수많은 타인 속에 있는 “세계에 던져진” 신체적 객체다5 다시 말해 이 실존주의 철학자는 데카르트의 기본공식을 뒤집었다. "숨 에르고 코기토Sum ergo cogito, 나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 한다. 사르트르에게 자아는 사고과정의 저작권자가 아니다. 또한 의 식과 이성 역시 언제든 맘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데카르트와 사르트르, 둘 중 어느 쪽이 진실에 더 가까울까? 데카 르트는 인체를 기계로 정의했다. 데카르트의 관점에서 보면, 세계는 최고의 엔지니어인 신이 창조한 거대한 기계와 같다. 그러나 데카르트 자신도 이 모델에 허점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았다. 데카르트는 1637년 《방법서설Discours de la méthode)에서 무엇보다 메카니즘 이 론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창의적 언어형성의 문제를 다룬다. 아무튼 메카니즘 이론은 물체의 모든 움직임이 다른 물체와의 충돌에서 기 인한다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한다. 그러나 이 전제조건은 천체의 움 직임과 일치하지 않는다.
뉴턴이 마침내 이 문제를 중력의 법칙으로 해결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이후 50년 뒤 뉴턴은 자 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로 힘의 메커니즘 을 확장했다. 그러나 뉴턴의 이론으로 비록 중력의 효력을 (비교적) 정확하게 계산할 수 있지만 중력의 근원이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퍼지는지는 설명하지 못했다. 뉴턴은 즉각적이고 원격적인 효력이 빈 공간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여겼었다. 뉴턴은 '원격 작용Action at a distance’으로 알려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죽을 때까지 애썼지만 끝내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오늘날까지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양 자 얽힘으로 인해 아원자 차원에서 이것과 비슷한 현상이 등장했다. 둘 혹은 그 이상의 소립자 사이에 있는 '유령 같은 원격효과'를 아인 슈타인은 20년 넘게 해명하려 애썼다. 그러나 지금도 과학자들은 여 기서 한 걸음도 내딛지 못했다. 그들은 수수께끼의 근원을 해명하 는 대신 이론과 모델을 개발한다. 비록 그것이 세계를 점점 더 정확 히 묘사하지만 세계가 왜 어떻게 존재하는지는 여전히 해명하지 못 한다.
- 데카르트가 가정했던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은 뉴턴이 중력의 법 칙을 발견하면서 끝이 났다. 몸은 기계가 아니고 정신은 신이 부여 한 신성한 존재가 아니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개념 역시 대답을 주 지 못하지만 올바른 질문을 제기한다. 내가 생각한다고 생각할 때, '내’ 두뇌와 몸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의식은 어떻게 생겨나고 무엇을 기반으로 할까? 의식은 뇌에 어 떻게 고정되어 있고, 뇌의 어떤 영역이 의식 과정에 관여할까? 의식 적인 사고과정은 도대체 왜 있을까? 신경 과정의 대부분은 무의식적 으로 진행되는데, 어째서 우리는 통증이나 두려움 같은 일련의 자극 을 인지할까? 이미 오래전부터 신경학자와 컴퓨터과학자, 물리학자 와 심리학자뿐 아니라, 철학, 정신분석, 영성 등 수많은 분야의 유명한 사상가와 몽상가들이 이 질문에 몰두해 왔다.
인간 뇌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몇십 년 뒤에 혹은 21세기 말에 얼 마나 발전하게 될까? 현재 우리는 인간 뇌의 기능방식을 이해하려 면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리고 의식 연구에서는 여전히 초기 단계에 있다.
- 대니얼 카너먼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분리된 혀로 말하고 생각하고, 두 가지 서로 다른 현실을 나란히 인지하고 경험하고 기억한다. 카너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리 각각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경험하는 자아'와 '기억하는 자아 두 자아는 우리에게 하나의 똑같 은 자아로 느껴지지만, 둘은 가장 다른 특징과 관심사를 가졌다. 함 정에 다시 빠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이 두 자아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경험하는 자아는 기본적으로 오로지 현재만 산다. 순간들을 연쇄 적으로 경험하는 현재. 긍정적 자극을 동반하는 그런 순간들이 강렬하게 축적될수록 좋다. 경험하는 자아는 그것을 더 많이 원한다.
기억하는 자아는 반면 이야기꾼이다. 우리가 기억에 저장한 모든 것은, 항상 같은 패턴으로 만들어진 이야기이다. 기억하는 자아는 결 정적 상황, 무엇보다 모든 일화의 끝을 인지하고 그것을 저장하여 의 미를 부여한다. 그러나 이야기에 아무것도 공헌하지 않는 것들은 삭 제되는데, 모든 순간의 압도적 대다수가 그렇게 삭제된다.
하필이면 경험하는 자아가 중시하는 것은 기억에 잘 저장되지 않 는다. 반면 기억하는 자아는 마치 노련한 이야기꾼처럼, 자신이 기대 하는 효과를 내기에 유리한 곳에 중요한 장면을 재배치한다. 실제 시 간순서 혹은 이따금 모든 것이 부차적이거나 반복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 기억하는 자아가 내적 심리적 정보의 모든 결정을 내린다. 기억하는 자아는 폭군처럼, 경험하는 자아를 끌고 가서 원치 않는 경험을 하도록 강요한다. 우리는 결정을 내릴 때 경험이 아니라 경험에 대한 기억을 따른다. 기본적으로 이 기억은 실제 경험한 것의 모조품이다. 이야기꾼이 우리의 자아상과 계획에 맞게 멋대로 다듬고 왜곡한 것 이다.
정리하면 우리 내면의 자료보관자이자 결정권자는 진실을 정확히 따지지 않는다. 성공적으로 대중을 현혹하는 사람들은 이를 잘 알고,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자리한 이 '폭군'과 조용히 은밀하게 동맹한다. 거짓말 기술자들 사이에서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이런 '폭군' 이 명료하게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당신 자신을 통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트럼 프나 에르도안 같은 거짓말 곡예사뿐 아니라, 소셜 미디어 설계자들 도 당신을 사로잡는 법을 정확히 알고 있다. 당신을 조종하기 위해 당신 내면의 자료보관자가 좋아할 만한 자극적인 이야기를 들려주 려 할 것이다. 기억하는 자아는 무의식적 의사결정자다. 그러므로 의 식적 결정에 당신의 지성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음을 깨닫기 전까 지는 트럼프와 저커버그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끌려갈 수밖에 없다.
- 미래는 직선적으로 발달하지 않고, 언제나 뭔가 새로운 것에 의한 파괴와 창조를 통해 비약적으로 발달한다. 그러므로 데이터에 의존 하는 합리적 과학적 접근법 이외에 철학적 접근법이 필요하다. 반추, 의심, 그리고 합리적 관점에서는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영역을 연결 하는 '단락 회로가 필요하다.
우리는 두개골 안에 있는 논리적인 뇌뿐 아니라, 장에 있는 직관 적 통찰의 뇌에도 주의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왜?'를 묻는 것은 (여기에 있는 것은 왜 있고, 없는 것은 왜 없는가?) 철학이다. 이런 질문은 과학성과 합리성만으로는 제기되지 않고, 대답은 더욱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에게 제안한다. 당신의 직관에 주의를 기울이 고 당신의 판단력을 훈련하라. 그래야 진정한 계몽이 가능하다. 현대 정보사회에서 나온 전형적인 시나리오를 우리는 안다. 즉, 당신은 조 작된 외적 요소에 이끌려 어딘가로 끌려갈 것이다. 마음이 썩 내키지 않더라도, 당신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미끼를 물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명확히 인식하라. 인공 지능보다 뛰어난 인간의 고유한 능력인 직관, 장뇌, 내면의 심판자를 깨워야 한다.
- 양자물리학에서처럼, 우리는 양자경제학과 양자 미래의 발달에서 도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개념들을 하나로 합칠 때 한걸음 나아갈 수 있다. 오로지 한 분야만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그럴 능력이 없다.
심리학과 철학에 경제학을, 철학적으로 반추하는 정신분석학에 자연과학을 단락 회로로 연결할 수 있고, 교차 사고를 할 줄 아는 사상가가 필요하다.
- 양자경제는 사회를 안정시키고 연대공동체로 이끌 것이다. 아직은 직선적 사고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우리가 계산할 수 있는 것만 진짜이고 가치가 있다고 여긴다. 반면, 양자경제는 직선적 세계 혹은 분산된 조각이 구성하는 세계가 아니라, 모든 것이 모든 것과 연결된 세계를 기반으로 한다. 그리고 비록 물질 자원은 제한적이지만 총체적 세계는 무한하다는 통찰을 기반으로 한다. 끝이 없다. 계속해서 옛것이 멸망하고 새로운 것이 피어난다. 핵심은 지속이다. 목표는 무한성이다.
사람과 기계, 지구와 문명의 토대. 모든 것이 연결되어있다. 따라 서 시급히 필요한 창조적 해결책을 찾으려면 고전 물리학의 기계론 적 세계관과 수학적 관점에서 벗어나야 한다. 세계는 기이하고 예측 불가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창조의 여지와 뜻밖의 비약적 발전이 있을 수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 우리는 지난 100년 동안, 예를 들어 1929년 주식시장 붕괴, 2007 년 금융위기 또는 2020년 코로나 위기 동안 시스템의 취약성과 한계 를 계속해서 감지했다. 지금까지 해결책은 국가시스템이 자본시장 에 돈과 신용도를 펌프질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구조 및 복구노 력은 시스템의 근본적 오류를 바로잡지는 못한다. 그것은 곪아터진 상처에 붙이는 반창고일 뿐이다. 우리의 거시경제 시스템을 장기적 으로 안정시키려면 양자경제를 토대로 우리의 경제 및 금융 모델을 근본적으로 재고해야 한다. 붕괴는 기술이 아니라 기술을 사용하는 방식에서 온다. 현재 생존 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주요 은행의 이사회가 10년 전에 과감하게 철학자와 함께 한 걸음 뒤로 물러났더라면, 아마도 지금 더 나은 미래로 가는 길에 있었을 터이다. 어느 주말에 문득, “은행이 왜 필요하 지?”라고 간단히 묻는다면, 그것을 계기로 은행의 사회적 역할과 미래의 은행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으리라. 전통적 입장을 계속 고수하고 권력다툼에 빠져 제 때에 방향을 바꿀 기회를 놓치는 대신 이렇게 한 걸음 물러났더라면 은행 이사회는 아마 “물리적 은행은 필요치 않지만 여전히 은행거래와 관련 서비스는 필요하다”는 간단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으리라. 그랬더라면 아마도 오랜 세월 쌓아온 신뢰를 바탕으로 고객과 함께 새로운 비즈니스모델을 도입할 수 있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