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오버타임

dalai 2022. 6. 1. 21:28

- 노동시간은 자본주의 작동에 워낙 중요해 서, 마르크스는 《자본론》의 한 장 전체를 19세기 잉글 랜드에서 노동시간을 감축하기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 에 할애했다. 그는 당대 산업 분쟁 보고서를 활용해 고 용관계의 본성을 고찰했고, 노동시간 길이는 다양한 요청들이 사회적 관계로 굳어짐으로써 결정되기 때문 에 가변성을 띤다는 점을 강조했다. 마르크스는 하루 노동시간이 오직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생산하는 정도의 길이인 상황을 상상해보라며 우리를 부추긴 다. 실제로 인류 역사에서 수십만 년에 달하는 오랜 기 간 동안 먹을 것과 그 외 생계수단을 해결하는 데에는 주당 약 15~17시간 정도가 걸렸다. 나머지 시간은 다른 소일거리에 쓰였으리라.
자본이 지배하기 전이었던 불과 수백 년 전만 해도 많은 이들의 생존은 주로 해야 하는 노동의 양 에 의해 결정됐다. 농노들은 그들 자신과 가족이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마련하기 위해 공유지를 경작했다. 시 계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우리 노동생활의 관점에서 볼 때, 중세시대 일과 시간의 관계는 분간하기 어렵다. 사람들은 공유지 안에서 필요한 만큼 고된 노동을 하 거나, 그들 각자에게 주어진 땅쾌기에 대한 답례로 주 인에게 잉여를 제공했다. 노동은 계약된 시간보다는 계절의 순환과 공물 및 소유권을 둘러싼 전통적인 위 계에 아주 많은 지배를 받았다.
- 물론 여기서 장밋빛 환상을 품어서는 안 된다. 전자본주의 시대 생활과 노동은 이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회가 고용자의 시계에 좌우되지는 않았지 만 가부장적 친족 구조며 그 밖에 바꿀 수 없어 보이는 관습 같은 것들에 지배되었던 것이다. “길드 장인은 일꾼을, 귀족은 농노를, 남성은 여성을, 노인은 젊은이를 착취했다.
- 어째서 우리는 케인스가 예측한 노동시간 단축 근처에도 가지 못했는가? 영국에서는 아직도 주 당 평균 40시간 이상 일하고 있음을 잊지 말자. 이는 케인스가 2030년에 도달하기를 바랐던 주당 15시간 노동과는 한참 떨어져 있다.
경제성장과 이런 성장의 이익을 분배하는 문제에 대한 케인스의 낙관적 태도는 설명이 필요하 다. 일단 그가 경제성장에 걸었던 믿음은 크게 어긋나 지 않았다. 1930년대 초부터 2000년대 사이에 서유럽 과 북아메리카에서는 1인당 GDP가 네 배 이상 증가 했다. 하지만 북반구 경제가 (케인스의 예측대로) 전보 다 훨씬 부유해졌는데도 어째서 주당 노동시간은 이 런 증가세에 맞춰 감소하지 않았을까? 이는 분배의 중 요성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케 인스의 낙관론에 내재한 결함이 드러난다. 기실 19세 기 말과 20세기 초 수십 년간 이루어진 생산성 증대와 노동시간 단축 간의 상관관계는 경제적 또는 자연적 '법칙'의 결과가 아니라, 노동시간 단축을 주장하는 노동조합과 공인들의 정치 캠페인이 힘을 얻게 된 결과였다. 
- 가장 유명한 예술가, 작가, 지식인들 은 집안이 부유한 경우가 많다. 이들은 재력 덕분에 매 일 밥벌이를 해야 하는 고난을 멀리할 수 있었고, 더 창의적인 것을 추구하는 데 에너지를 쏟을 수 있었다. 러셀도 분명 알았으리라. 그 스스로가 (우리가 그 자체 로 목적'이라고 부를 만한) 인생의 이런 측면에 공간과 시 간을 들여 즐길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소수였기 때문이 다. 이 세상 다수에게 단지 무언가를 자유롭게 시도해 볼 만한 시간이나 물질적 안정이 없어 얼마나 많은 미 술품, 음악, 시, 영화가 빛을 보지 못했는지는 상상에 맡길 뿐이다. 
- 역성장과 탈성장 지지자들은 긴축과 희소성, 불경기라는 운명(일반적으로 평탄하거나 성장하지 않는 경제와 결부되는 사회경제적 결과들)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경제 모델을 내세우는 대신 나눔과 흥겨움, 돌봄과 공동선이라는 원칙을 근간으로 한 대안적 생활양식을 진작하는 경제적 척도와 목표를 옹호하는 주장을 펼친다. 선도적인 생태경제학자 이오르고스 칼리스와 그의 동료들은 이렇게 요약한다.
지속가능한 역성장은 생산 및 소비 규모를 공정하게 줄임으로써 지역과 세계 규모에서 장단기적으로 생 태학적 조건을 향상하고 인간 행복을 증진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지속가능한' 이라는 형용사는 역성장이 무한하게 지속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행/변환 과정과 최종 상태가 생태적·사회적으로 이 롭게 지속가능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역성장 이 제안하는 패러다임은 경제성장 없이도 인간의 진 보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 역성장 지지자들이 생각하기에 새로운 경제로의 이행은 자원 채취보다는 자원 순환에 기초한 경제활동을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다양한 정책 수단에 의해 뒷받침될 것이다. 여기에는 기본소득(개인의 수입이나 고용 상태와는 관계없이 소득최저선을 지켜주는), 광범위한 보편 서비스(무료 대중교통, 주택, 의료 서비스, 교육), 개인 자산에 대한 높은 세율과 규제(소비주의를 위축시키고 에너지와 자원을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하게 사용하도록 고무하는)가 포함되곤 한다.
역성장 프로그램의 핵심 요소 중 하나는 노 동시간, 그리고 그 단축과 관련이 있다. 적게 일하기 는 노동과정의 일부로 사용되는 자원의 절대적인 양 을 감소시킬 뿐만 아니라 줄리엣 쇼어Juliet Schor가 말한 '노동지출 순환에 따라오는 탄소 집약적인 소비의 양 역시 감소시킨다. 27개 OECD 국가의 환경 영향 을 평가한 연구에서 쇼어와 동료들은 노동시간을 4분 의 1 단축할 경우 탄소 발자국을 30%나 줄일 수 있다. 고 추정했다. 평균적인 영국 노동자의 경우 이는 주 당 42 시간의 노동을 31 시간을 조금 넘는 수준으로, 또는 주 4일 노동으로 줄인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 적게 일하기 위한 투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하루 노동시간에 대한 정량적인 감정을 바꾸는 것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세계 많은 나라에서 토요일은 고된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날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이는 원래부터 그랬던 것이 아니라 역사적 성취라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대다수 노동자들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당연시하는 이틀간의 주말을 누리지 못했다. 이틀간의 주말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노동자가 매주 이틀을 연이어 쉴 수 있는 권리를 정치적 의제로 만들고 캠페인을 벌인 노동조합과 사 회운동이 힘겨운 투쟁 끝에 얻어낸 승리 덕분이었다.
20세기 노동자운동이 이틀간의 주말을 위해 싸웠듯, 21세기에는 금요일을 일하지 않는 날로 지정 하기 위해 싸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 투쟁은 더 이상 공장에 국한되지 않고 가정에서 여성이 부불 노동자로서 수행하는 노동에 도전하고 이를 되찾는 과정을 거치며 모든 사회 영역에서, 그리고 우리 아이들의 미래 세계에서도 벌어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