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운명이라고 불렀던 것들
- 과학에서는 이미 우연의 긍정적인 측면을 깨닫고서 그것을 활용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전기 회로 같은 민감한 시스템은 우연한 효과로 안정화될 수 있으며, 우리의 뇌도 그렇게 기능한다. 또한 우연 은 진화의 엔진일 뿐 아니라 창의성의 엔진이기도 하다. 아울러 이 타심, 동정심, 도덕심 같은 타인을 위한 마음도 인간의 행동을 예측 할 수 없기 때문에 존재한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우연의 선물을 얻기 위해 대가를 치러야 한 다. 대가는 바로 불확실함이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우리는 불쾌함을 느끼므로 우리는 불확실한 상황을 가능하다면 피하려 한다. 그리고 그 결과 많은 기회를 잃어버린다.
- 우연은 신이 자기 이름으로 서명하기 싫을 때 사용하는 신의 가명이다. (아나톨 프랑스)
- 어차피 마주해야 할 우연이라면
우리는 그 어느 시대보다 우연의 얼굴을 더 자주 대한다. 우리는 네트워크화된 세계의 위험성을 한탄하지만 이런 세계가 어떤 기회를 제공하는지를 간과한다. 소설 『해리 포터로 실업자에서 백만장자가 된 조앤 K. 롤링을 생각해보라. 아무도 그의 성공을 예상하지 못 했다. 출판 전문가들조차 해리 포터』 1권 원고를 보고 출판을 거절 했다고 하지 않은가.
또한 독일이 어떤 무력 충돌도 없이 그렇게 빨리 통일되리라는 것을 예견했던 사람이 있었던가? 독일을 통일에 이르게 한 결정적 계기 역시 아주 우연한 사건이었다. 1989년 11월 9일 동베를린 정치 국의 대변인이었던 귄터 샤보브스키는 카메라 앞에서 너무 긴장한 나머지 동독 주민들의 비자 없는 서독 여행을 '지금부터, 즉시' 허가 한다고 말실수를 했다. 그 소식은 곧바로 퍼져나갔고 열광하며 베를 린 장벽으로 달려든 동독 군중들 앞에서 국경 수비대는 맥을 못추 었다. 그렇게 장벽은 무너졌다.
- 이런 복잡한 세계 속에서 중심을 잡고 태연하게 살려면 우연이라는 현상과 친숙해져야 한다. 더는 어느 곳에서도 안전성은 보장되 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연과 친해지려고 마음먹은 사람은 우연 이 카오스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실제로 전혀 예 측할 수 없는 일도 법칙을 따른다. 그것을 파악하기 위해 우리는 우 연을 더 잘 알아야 한다. 그러면 믿기지 않는 일에 대한 의문과 변덕 스러운 삶에 무방비 상태로 맡겨져 있다는 느낌을 덜 수 있다. 백쇼 부자의 재회나 독일 통일과 같은 행복한 우연 속에 숨겨진 원칙과 친해지는 사람만이 우리 시대가 제공하는 기회를 유익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 우리는 어떤 사건의 원인을 완벽하게 알 수 없을 때에 우연을 경험한다. 하지만 어떤 사건이 발생한 원인의 일부가 자신이라면 이 원인은 관찰되는 사건과 분리될 수 없고, 이런 상황에서는 피드백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피드백은 원자물리학에서와 같이 규명하고자 하는 현상이 그 연 구에 투입되는 수단과 분리될 수 없는 경우 개입된다. 피드백은 우 리 일상에서도 끊임없이 등장한다. 가령 부모는 자녀를 양육하면서 도리어 자녀의 영향을 받는다. 주식 투자자들은 앞으로 어떤 주식이 오를까를 생각하여 매수를 결정하지만 주가의 등락은 바로 투자자 들의 결정에 영향을 받는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이런 식으로 삶을 예측할 수 없게 만드는 상황에 대해 더 살펴볼 것이다.
- 우리는 우리 스스로 미래를 만들어내고, 우리의 결정으로 미래에 영향을 끼칠 수 있으며 바로 그렇기에 미래에 대해 제 한된 진술밖에 할 수 없다. 우리가 어떤 일에 더 많이 관여하고 더 큰 영향을 끼칠수록 그 결과는 더욱더 예측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므 로 우리가 삶을 임의로 계획할 수 없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대가라 할 수 있다. 우리의 뇌는 미래를 내다보도록 만들어지지 않고, 프랑스 작가 폴 발레리의 말처럼 "미래를 만들어 나가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심리학자들은 우리가 주변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미묘한 영향을 끼치는지 연구했다. 그들은 백인 대학생들에 게 다양한 피부색의 지원자들에 대한 가상 면접을 실시하도록 했다. 그런데 이 실험에서 백인 대학생들은 지원자가 흑인일 경우 신체적으로 더 거리를 두고, 자꾸만 말이 꼬였으며, 서둘러 대화를 끝냈다. 물론 악의는 아니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나중에 비디오로 자신의 행동을 보고는 매우 놀라워했다. 그러나 지원자들은 면접관들의 기 분을 민감하게 느꼈다. 그리하여 흑인 지원자들은 백인 면접관들의 이런 태도로 인해 도리어 불안해져서 실수를 저질렀고 그 결과 백인 경쟁자들에 비해 나쁜 점수를 받았다.
그다음 실험에서 연구자들은 가상 면접관들에게 이번에는 흑인 지원자들에게 의식적으로 친절하게 대하고 백인 지원자들에게는 무 뚝뚝하게 대하라고 했다. 그러자 이제 백인 지원자들이 떨어졌다. 신 경이 예민한 상태에서는 그만큼 자신 없는 행동이 나오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을 판단할 때 우리는 자로 재듯이 할 수 없다. 오히려 인간관계에서 우리는 입자 실험을 하는 물리학자들과 비슷한 형편 에 처한다. 어떤 상태를 관찰하려고 할 때마다 그 상태를 변화시키 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그런 피드백을 통해 우연이지 않게 미래학자들은 현재 상황을 미래에 투사시켰다. 위원회 보고 는 2000년에는 달에 유인 우주정거장이 생길 것이며 바다 밑에 집 을 짓고 살 거라고 예견하였다. 그런 것들은 오늘날 기술적으로 불가능하지는 다. 다만 아무도 거기에 관심이 없을 뿐이다. 게임 규 칙이 변한 것이다.
컴퓨터의 사용은 그런 반작용의 좋은 예다. 전자공학의 발전은 칸의 시대와는 다르게 컴퓨터를 사용하도록 했고, 이것은 다시금 기술의 발전을 다른 쪽으로 유도하였다. 그러므로 미래학자들은 다른 투자자들의 태도가 변하는 바람에 전략을 갑자기 제대로 써먹지 못 하게 된 증권 투자자들과 비슷한 딜레마에 빠진 셈이다. 마치 양쪽 눈을 가리고 책장을 조립해야 하는 사람과 비슷하다. 책장에 필요한 모든 부품을 가지고 있으나 어떤 규칙으로 그것들을 맞춰야 할지 몰 라 더듬더듬 찾는 사람들. 가끔 제대로 명중시킬 때도 있지만 그것 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미래학자들은 기술 분야의 명중률에 대해서는 조금도 부 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일어날 확률이 아주 높은 것으로 찍은 100가지 중 30가지가 현실이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인간 행동과 관련한 예언일수록 더 빗나갔다.
- 계획적 사고의 오류
칸과 그의 동료들은 무제한으로 발달되는 기술이 미래에 우리에게 영화 같은 삶을 선사할 것이라고 희망했다. 그들은 우리가 꿈꾸는 미래에 따라 사회가 전개될 거라 믿었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복잡한 세계에서 계획에 착착 들어맞는 공동생활은 존재할 수 없다. 계획이 있으려면 계획을 세우는 사람, 즉 모든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이런 정보의 기초 위에서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위원회 같은 것이 필요하 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의 경제학자 하이에크는 씨족 사회보다 조 금만 더 복잡해져서 노동이 분화되기 시작하면 사회는 계획대로 진행될 수 없으리라 전망했다. 국가뿐 아니라 회사나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 어느 기업에서 계획에 따라 모든 것을 진행한다면 경영진은 결정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수뇌부 한 사 람이 전체의 공장을 훤히 꿰고 있을 수는 없으므로 그는 다른 소식 통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역시 현실을 그대 로 전달해줄 수는 없다. 그들이 아무리 사사로운 이익을 챙기지 않 는다 해도 오해가 생기는 것은 불가피하고, 자연스럽게 저 밑에서 일어나는 일과는 다른 정보를 전달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현실에 맞지 않는 결정들을 내리게 되고 계획은 원래의 의도대로 실행되지 못한다.
모든 회사원의 책상에서 자료들을 불러올 수 있는 컴퓨터도 이런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정보들이 준비되고 요약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자료가 요약되지 않으면 결정자들은 나무 하나하나에 신경 쓰다가 숲을 보지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요약은 불가피하지 만 요약하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해석의 여지가 생기며 그로써 오류 가 발생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더구나 한 사람이 도맡아 중요한 결 정을 내릴 수 없으므로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지도부가 회의하면 서로 다른 의견들이 충돌할 수밖에 없으며, 결국 그 문제를 최적으 로 해결할 수 있는 협상안이 도출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일은 다시 원래 의도에서 빗나가게 된다.
그 밖에 공장에서 일하는 선반공은 수뇌부에게는 없는 전문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지도부에서 선반공에게 일을 어떻게 수 행하라고 지시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선반공이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반공이 자신의 직접적인 관심사를 스스로 알아서 결정하다 보면 다시 우연이 시스템에 개입될 수밖에 없다. 선반공은 그의 결정으로 함께 일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니 말이다.
하지만 다른 선택은 없다. 지도부가 능력을 발휘할수록 상황은 더 악화된다. 사회주의 국가의 계획경제도 좋은 의도를 가지고 출발 했지만 좌초할 수밖에 없었다. 계획하는 사람들이 정보를 제대로 평 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모스크바의 행정부는 우즈베키스탄에 얼 마나 많은 신발이 필요한지를 알 수 없다. 그것은 현지의 구두장이나 신발 상인만이 알아낼 수 있다. 행정부가 무리하게 그런 일을 결 정할 때 사람들이 꽁꽁 언 발로 신발가게 앞에 길게 줄을 늘어서는 일이 발생한다.
- 잠자리에 비해 파리는 우둔한 생물처럼 보인다. 더 작을 뿐 아니라 나는 동작도 유연하지 못하며 비행 속도도 잠자리의 반에도 못 미친 다. 1분당 날갯짓하는 횟수는 잠자리보다 다섯 배나 많으면서도 말 이다. 그래서 유유한 날갯짓을 하는 잠자리의 비행은 우리 귀에 들 리지 않지만, 파리가 윙윙대는 소리는 자못 시끄럽기까지 하다. 천 부적인 몸 구조를 가진 잠자리는 근육과 연결된 네 개의 날개를 각 각 자유자재로 움직여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멋진 비행을 한다. 그에 반해 파리는 날개가 두 개밖에 없으며 그나마 그것도 근육과 직접 연결되어 있지 않아서 날아오르려 할 때마다 등판을 움직여 날 개를 젖은 손수건처럼 아래위로 쳐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파리가 잠자리보다 구식일 거라고, 기본형에 가까운 진화의 선배일 거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다. 진짜 순서는 반대다. 공중을 날아다닌 첫 곤충이 잠자리와 비슷한 부류였고 파리는 잠자리와 비슷한 몸 구조를 가진 조상으로부터 잠 자리보다 최소한 1억 년은 늦게 분화된 곤충으로, 못생겼지만 굉장 히 성공적으로 살아남은 곤충이다.
파리에 이르는 과정에서 잠자리의 탁월한 몸 구조와 비행 능력은 사라지고 말았다. 진화는 이미 이룩한 클라이맥스를 다시 저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대신 튼튼하고 적응력이 뛰어난 파리가 탄생했 다. 오늘날에는 파리라는 커다란 집단에서 또 다른 곤충이 분화되어 나오고 있다(모기도 그에 속한다). 그에 반해 잠자리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변방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처지다.
이런 현상이 가능한 것은 진화가 우연히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자 연이 목적 지향적으로 최상의 해결책만을 추구한다면 곤충의 발전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을 것이다. 잠자리처럼 놀랄 만한 작품을 어떻 게 더 개선한단 말인가? 잠자리는 3억 년 전 날개가 두 개뿐인 곤충 이 먼 미래에 자신을 능가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연은 앞날을 내다볼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저 무작위적인 걸음을 어디론가로 옮길 뿐이다. 우연에 의해 유전인자가 변화할 때도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
- 대부분의 우연한 실험들은 생존 능력이 없는 존재들을 배출한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 계획에 따른 진보라면 도저히 배출하지 못했을 걸출한 작품 하나가 그동안의 모든 실패를 무마시킨다. 우연의 원칙 에 따른 발명품이 없었다면 진화는 거의 제자리걸음을 했을 것이다. 진보가 계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문화와 기술 에서도 경험한다. 구글리엘모 마르코니는 전화의 대용품으로 라디 오를 발명했다. 전화선을 놓을 수 없는 배 같은 곳에서 전화 대용으 로 사용하려고 만들었지 그 이상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마르코니는 훗날 자신의 발명에 기초하여 휴대전화와 위성 텔레비전까지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 1940년대 IBM의 경영진 역시 기술자들이 처음 나온 전자계산기(컴퓨터)에 매달리고 있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공연히 기술개 발비만 남용한다는 생각이었다. IBM 경영진은 컴퓨터 같은 것은 전 세계적으로 몇 대만 필요할 것이라고 추측했기에 혁명적인 컴퓨터 개발 대신 타자기를 업그레이드하는 데 주력했다. 그리하여 트렌드 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뒤늦게 컴퓨터 개발에 착수함으로써 위 기를 겪었다.
계획에 따른 진화는 업그레이드된 타자기를 선사할지는 몰라도 컴퓨터를 선사하지는 못한다. 그것은 기껏해야 약간 더 세련된 잠자 리를 만들어 낼 뿐 파리를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 1980년대에 분자생물학자들은 드디어 초파리의 난세포에서 몸 의 기본 구도를 결정하는 것으로 보이는 유전자 그룹을 발견했다. 바로 혹스 HOX 유전자들이었다. 혹스 유전자는 파리 몸의 올바른 위 치에서 올바른 기관이 자라도록 발생을 지휘하는 역할을 한다. 각각 의 혹스 유전자가 특정한 부위를 담당하는데, 애벌레가 성숙하기 시 작하면 이 혹스 유전자들이 차례로 활동에 들어가 막 형성되고 있는 유기체를 각각의 부위로 분절한다. 그리고 머리가 자라나야 할 부분 에서는 나중에 등이나 꼬리가 될 부분과는 다른 단백질을 분비한다. 이런 단백질, 즉 호메오 프로테인은 몸의 각 부분을 위한 발생 프로 그램을 시작하고 체절과 다리, 날개 등이 자라나는 것을 담당하는 하위 유전자들이 활동에 들어가도록 한다.
그리하여 혹스 유전자가 우연에 의해 뒤죽박죽되면 기형 파리가 태어난다. 연구자들은 초파리의 훅스 유전자 시퀀스를 바꿈으로써 머리에 다리가 돋아나고 눈이 생겨야 할 자리에 날개가 돋아나는 괴 상한 파리를 얻을 수 있음을 확인했다. 혹스-설계도의 모든 작은 변 화가 새로운 종류의 (종종 생존 가능한) 곤충을 만들어낸 것이다.
다른 동물들에서도 이런 혹스 유전자가 발견되자 놀라움은 더욱 커졌다. 벌레건 가재건 원숭이건 종류를 가리지 않고 이런 혹스 유 전자가 설계 원칙에 따라 배아의 발생을 조종했다. 고등생물일수록 혹스 유전자는 더 많았다. 그리하여 초파리의 경우 혹스 유전자가 8 개인 데 반해 인간을 포함한 척추동물은 38개였다.
- 발전은 잘 알고 있는 것을 가지고 곡예를 부리는 것이다. 자연뿐 아니라 우리 인간도 기존의 것을 조합해서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 1857년 제프모저는 자신의 식당에서 소시지 속을 채우다가 굵기가 가는 창자가 다 떨어지자, 남은 고기를 두꺼운 창자에 채워 끓는 물에 삶아서는 손님들에게 특별 메뉴로 대접했다. 이것이 최초의 뮌헨식 흰 소시지다.
- 체계적인 예방 접종법을 마련한 루이 파스퇴르의 일화는 어떻게 새로운 발견에 이르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1878년부터 닭 콜레라의 병원체를 연구하던 파스퇴르는 예기치 않은 일이 생기는 바람에 잠시 연구를 중단하고, 인공 배양된 박테리아를 여름 내내 실험실에 방치해놓았다. 그리고 가을에 다시 연구를 시작하여 아무 생각 없이 이 변질된 병원균을 닭 몇 마리에게 주사했다. 그러자 그 닭들은 가 볍게 앓더니 이내 회복되었다. 파스퇴르는 겉으로 보기에도 썩은 것 같은 이 배양액을 버리고 새로이 병원체를 배양했다. 그리고 새로 배양한 박테리아를 새로 들여온 닭들과 썩은 박테리아 배양액을 맞고 회복된 닭들에게 주사하였다. 그러자 놀랍게도 처음 실험에 임한 닭들은 심하게 앓다가 죽어버렸지만 이미 한 번 가볍게 앓았던 닭들 은 수월하게 견디어냈다.
파스퇴르는 이런 사실을 더 빨리 깨달을 수 없었을까? 그보다 100년도 더 전에 의학도였던 에드워드 제너가 천연두 백신을 발견 했고 유럽의 모든 학자가 이를 알고 있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때까 지 아무도 제너의 방법으로 다른 병도 예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 하지 못했다. 인체가 어떤 미생물과 처음 접촉했을 때 이를 병원체 로 인식하면 무장을 갖추어 다음 공격에 더 잘 방어할 수 있다는 예 방 접종의 원칙을 몰랐던 것이다.
- 파리의 화가이자 물리학자였던 루이 다게르는 빛에 민감한 판에 그린 그림을 오래 보관하는 법을 찾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했으나 번 번이 헛수고로 끝났다. 그러던 1835년 봄, 다게르는 은도금이 된 동 판 하나를 화학약품을 넣어두는 장에 아무렇게나 세워놓았다가 얼 마후 다시 꺼냈다. 그런데 그곳에 그림이 나타나 있는 게 아닌가. 부주의한 행동이 성공으로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약품 장에서 수은 이 흘러나왔고 수은 증기에 의해 노출된 부분에 상이 생겼던 것이 다. 다게르는 그 현상에 착안하여 사진술을 발견했다.
그런가 하면 인류가 페니실린을 갖게 된 것은 박테리아 배양액 덕분이다. 런던의 세균학자 알렉산더 플레밍이 휴가 동안에 실험실에 박테리아 배양액을 방치해두자 배양액에 곰팡이가 피게 되었는데 곰팡이가 무성하게 생긴 곳에 박테리아가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것을 목격했던 것이다. 마침 그는 10년 동안 박테리아 감염에 대항하는 물질을 간절하게 찾던 중이었다.
이런 이야기는 얼마든지 있다. 연금술사 요한 뵈트거는 작센의 선 제후에게 금을 만들어내겠다고 큰소리쳤지만, 실패가 거듭되자 전전 긍긍하던 중 유럽 최초로 도자기를 만드는 데 성공하여 간신히 교수 형을 면했고, 스카치테이프라고 불리는 투명 접착테이프는 원래 반 창고를 만들려다가 생겨난 것이다. 비아그라는 효과가 신통치 않은 심장병 약이었는데, 그것을 투여받은 남자 환자들이 이상하게 그 약을 끊으려 하지 않는 것이 연구자들의 눈에 띄면서 그 효능이 연구되 었다. 리히텐베르크는 “모든 발명품은 우연의 작품"이라며 "똑똑한 사람들이 책상 앞에 앉아 편지를 쓰듯이 발견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 했다.
새로운 발견은 불만의 해결책과 오류를 참아내며 많은 실험을 하고 적은 선택을 하는, 다소 불편해 보이는 진화의 법칙을 통해서 탄생할 뿐이다. 우연과 직관이 이성을 대신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 다. 논리적 사고가 있어야 우리의 착상이 얼마나 의미 있는지를 점 검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2차적 단계다. 처음에는 언제나 우연에 대해 열려 있는 개방적인 사고가 존재한다. 그리하여 프랑수아 자코 브는 혁명적인 발견을 추구하는 것을 '밤의 과학night science3'이라 명 명했다.
- 우연한 관용이 이익을 준다
우연만이 보복의 악순환을 깨뜨릴 수 있다. 반복되는 죄수의 딜레 마 속에서 때때로 한쪽이 협력을 섣불리 포기하지 않고 관대하게 행 하고 상대방의 잘못을 참아주면 장기적으로 둘 다 유리하다. 그러나 그럴 때 자신이 상대방의 어떤 부당함을 묵인하고 참아줄 수 있는지 를 알려주어서는 안 된다. 그럴 경우 상대방이 악용할 수 있기 때문 이다. 관용이 너무 자주 반복되지 않고, 무엇보다 무작위적으로 행 해지면 양쪽에 유익이다. 계산할 수 없게끔 행동할 때에만 우리는 좋은 사람이 된다.
- 카를 지그문트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실험한 결과, 죄수의 딜레마에 빠진 게이머들 중에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법칙을 엄격하게 따른 사람들보다 때때로 상대방의 잘못을 참아준 사람들이 감옥살이를 적게 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베른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도 결과는 같았다. 대 학생들에겐 형량을 줄이는 대신 금전적 보상을 내걸었다. 실험에서 죄수의 딜레마에 빠진 학생들 중 약 3분의 1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기본으로 하되 때때로 관대해지는 지그문트의 전략을 선택했다. 그리고 나머지 3분의 2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원칙을 엄격 하게 지켜 이전에 자신의 선택이 먹혀들면 그 선택을 고수하고 그렇 지 않으면 선택을 바꿨다. 실험 결과 후자의 학생들처럼 과거를 기 준으로 행동할 때 더 불리한 것으로 드러났다. 교대로 차례가 돌아오므로 우연의 전략을 구사한 사람들이 더 성공적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예측 불가능한 행동으로 이익을 얻는다. 예측 불 가능한 행동은 경쟁에 유리하고, 협력과 신뢰를 가능하게 한다. 인 간 행동을 예측하기 어려운 이유는 우리 뇌가 복잡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우리 스스로 우리의 의도를 숨기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무래도 자연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놓은 듯하다.
- 존 메이너드 스미스를 위시한 많은 진화생물학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때때로 자신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게 만드는 메커니즘이 우리 안에 있다고 추정한다. 물론 그 대가로 우리는 더욱 불확실해 질 것을 감수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계획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자신의 의도도 알 수 없으니까 말이다. 확실한 규범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계획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완벽한 포커페이스를 만들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리면서 우 리 자신을 드러낼 뿐 아니라, 눈빛이나 행동 또는 어쩌다 나온 말을 통해 자신의 의도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자신의 의도를 자신도 모를 때만이 그런 일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메이너드 스미스의 말마따 나 우리는 머릿속에 룰렛판을 가지고 있다.
- 타고난 소질과 환경의 상호작용이 더욱 예측 불가능한 것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일방통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육의 불확실함을 주 장하는 세 번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부모가 자녀에게 영향을 줄 뿐 아니라, 자녀도 부모에게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부모의 관심 을 계속 요구하는 아이는 부모에게 거부당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 러는 것일까? 아니면 하도 치대는 아이에게 질린 나머지 부모가 아 이에게 등을 돌리는 것일까? 아마도 둘 다 맞을 것이다. 모든 인간관 계에서처럼 양육에서도 피드백 효과가 나타난다.
어떤 시스템이 환경의 영향을 받는 동시에 환경에 스스로 영향 을 끼칠 수 있을 때면 으레 우연이 작용한다. 양자물리학(측정기가 관 찰하고자 하는 입자를 방해)도 그렇고, 진화론(어떤 종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 하는 동시에 환경을 변화시킴)도 그렇고 인간이 함께 사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마찬가지다.
- 자녀에게 적절히 고무적인 환경을 만들어주고 자신을 시험할 수 있는 기회를 되도록 많이 주는 것은 아이에게 단순한 재능 계발 이 상의 도움이 된다. 그들을 세상에서 유일한 개성을 지닌 존재로 여겨주는 것이 바로 자녀를 존중하는 일이다. 아랍의 철학자 칼릴 지브란은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자녀에게 자기 자신이 되도록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녀를 여러분과 똑같이 만들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생명은 뒷걸음 치지 않으며 어제에 머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좌뇌는 세계가 때로는 아주 단순하며, 어떤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상황도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듯하다. 좌뇌는 끊임없이 그럴 듯한 연관을 고안하면서 불확실함을 몰아내고자 한다. 때로 증권 딜 러가 주가의 상승 트렌드를 예측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고객들의 돈 을 날리는 것도 좌뇌가 체계와 규칙을 좋아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우연이 우리를 바보로 만들 때 우리는 대부분 좌뇌의 지휘 하에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규칙을 배우고, 규칙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능력이 고도로 발달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하는 대가다. 이런 능력 덕분에 생존했지만, 이런 능력 때문에 체계와 규칙에 매 달리게 되며, 규칙을 찾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심지어 우리를 해롭게 하는 시점이 언제인지를 분별하기 힘들어진다.
- 정신과 의사들은 이렇게 자기를 파괴하면서까지 이유를 찾아다 니는 것을 '생존자 신드롬'이라고 부른다. 충격적인 경험을 한 상당 수의 사람이 이 신드롬에 시달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불행 중 다 행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과연 살아남을 자격이 있는지 의심하 는 것이다.
커다란 고통에 직면한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왜 이런 일을 겪어 야 하는지 의미를 찾다가 더욱 고통스러워지기도 한다. 많은 암 환 자가 병에 걸린 이유를 자신이 살면서 지은 잘못 때문이거나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한다. 걱정을 쌓아두면 암이 발생한다는 입증되지 않은 믿음이 많은 환자에게 부가적인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 많은 연구에도 불구하고 어떤 정신적인 원인이 암 을 유발한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에 반해 유전자의 우연한 변화가 거듭되어 암이 유발된다는 증거는 아주 많다. 환경 오염, 잘 못된 영양, 흡연도 유전자 변이의 빈도를 높일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암에 걸리는 것은 우연한 사건이다.
- 아이들에게는 동화가 필요하고 어른들에겐 신화가 필요하다. 우리는 삶에서 위기를 겪을 때뿐만 아니라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경험 을 의미와 연관 지으려고 노력한다. 좋은 징조에 대해 기뻐하고, '운명의 눈짓'을 따르며 삶의 중요한 전환기마다 더 높은 계획이 작용했다고 믿는다.
이런 태도는 해석과 사실을 구분하고, 상상의 산물을 결정의 근 거로 활용하지 않는다면 문제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려면 이중장 부를 쓰듯이 하나의 경험을 두 가지 현실로 분류하는 것이 중요하 다. 한편으로는 점검 가능한 사실의 세계에 발을 딛고 사실만을 행동의 근거로 삼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해석과 환상의 영역으로 들어가 경험을 신비로운 시각으로 관찰하고 평가하는 것이다.
두 가지 시각을 모두 포기하지 않으면서 명백히 선을 그으라니. 말로는 굉장히 어려워 보이지만 실제로 해보면 훨씬 간단하다. 극장 에서 영화를 볼 때 우리는 손쉽게 이중장부를 쓴다. 멜로 영화에 감동하여 눈물 콧물을 흘릴 때 그 감정은 진짜이지만 우리는 한순간도 이 영화가 허구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처럼 일상에서도 현실과 환상적인 해석 사이에서 선을 그을 수 있다. 일상에서의 주인공은 영화배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이렇게 표현했다.
"모든 날은 의미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 의미는 우연에서가 아닌 나에게서 나온다."
- 우리는 작은 것은 과대평가하고 큰 것은 과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현상을 로가리즘이라고 하는데, 이 로가 리즘 덕분에 우리는 귓속말도 확성기 소리만큼 잘 들을 수 있고, 촛 불을 켜고도 환한 햇빛 속에 앉아 있는 것만큼이나 무리 없이 책을 읽을 수 있다. 뇌는 모든 것을 중간 정도로 확대하거나 축소한다. 이 런 현상은 먹이의 양이나 돈의 액수에도 적용된다.
그리하여 30만 유로는 직관적으로 10만 유로의 정확히 세 배가 아닌, 그보다 훨씬 적게 느껴진다. 그래서 요정이 제안한 내기의 기 대치는 20만 유로보다 더 작게 다가온다. 이 내기를 받아들이려면 요정은 돈을 더 많이 걸어야 한다. 인지의 메커니즘을 거슬러 리스크를 받아들이려면 프리미엄이 필요하다. 응답자들은 평균적으로 30만 유로가 아니라 최소 40만 유로는 되어야 안전한 금액을 포기하고 내기를 할지 생각해보겠다고 대답했다.
대기 시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운이 없을 경우 8년을 기다려야 하지만 그 8년은 우리에게 정확히 4년의 두 배로 다가오지 않는다. 운이 없을 경우 추가적으로 기다려야 하는 두 번째 4년보다는, 애초에 주어진 4년이 더 길게 느껴진다. 그리하여 우리는 운이 없을 경우 8년 기다릴 것을 감수하고 2분의 1의 확률로 당장 돈을 손에 쥐기를 꿈꾸는 것이다.
- 기업들은 늦게서야 리스크 연구자들의 인식을 경영에 도입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 몇몇 대기업들이 리스크 처리 담당 부서를 둔 것이다. 미국의 대기업 GE 캐피털에서 첫 '리스크 매니 저'가 업무에 들어간 것은 1993년이었다. 리스크 매니저와 그의 동 료들의 과제는 중요한 결정에 직면하여 위험 요인들을 분석하고, 회 사가 실패로 인한 충격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는 것이다. 이제 최소 한 대기업들은 리스크 경영을 도입하고 있다.
리스크 경영과 마찬가지로 필요하지만,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것이 기회 경영이다. 직관이 일으키는 착각은 기회를 인식하고 올바 로 평가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더구나 우리의 관심은 긍정적인 기회보다는 부정적인 위험에 더 쏠리게 마련이다. 찌르레기가 안정 된 먹이를 위해 더 많은 먹이를 포기했던 것처럼 많은 기업과 정부 는 이윤으로 연결된다 해도 불확실한 기회는 꺼린다. 안전하지 않다 는 것을 과도하게 의식하여 기대되는 이윤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하지만 리스크를 너무 두려워하면 기업은 물론 심지어는 경제에까 지 심각한 해가 될 수 있다. 새로운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담만 쌓기 때문이다.
- 과보호가 오히려 고집과 의존성을 키운다는 것이 다. 또한 아이에게는 리스크를 다루는 훈련이 필요하다. 과보호 속 에서 자란 아이들은 위험에 대한 감각이 떨어지기 쉽다. 독일의 표 준 계단 규정에 따라 몇십 년 동안 18~19센티미터의 계단에 익숙해 진 사람은 야무지지 못한 현장 감독이 2센티미터만 벗어나게 시공 해도 비틀거려 넘어진다.
완벽주의는 독일인의 제2의 본성이 되어버렸다. 이런 특성은 분 명 장단점이 있지만 변화하는 조건에 적응하기 힘들게 한다. 규정들 은 경직성을 띤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동 시에 세계가 긴밀하게 연결되어가고 있는 때에는 속도와 융통성이 정확성과 예측 가능성보다 더 중요한 게 아닐까?
복잡한 상황에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것은 절대 잘하는 것이 아니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면 그만큼 속도가 떨어지고, 결과와 오류를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점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완벽함을 위해서는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하며 그로 인한 낭비는 그로써 얻는 안전성을 능가한다. 킬의 경제학자 헤르베르트 기어는 "한 번도 비행기를 놓쳐보지 않은 사람은 그만큼 많은 시간을 공항 대합실에서 허비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 다양한 비극과 참사를 연구해온 미국의 기술사회학자 찰스 페로 의 견해에 따르면, 위험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개별적인 부분이 긴밀하게 연결되면서 확대된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세계가 복잡할 수록 우리는 행동의 결과를 더욱 예측하기 힘들며, 안전한 것과 위 험한 것을 구별하기가 더 힘들어진다. 이는 점점 광범위해지는 기술 이 만들어내는 가능성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비행기 조종실에는 40개 남짓한 스위치가 있지만, 이 스위치로 1조 개가 넘는 연결을 'on', 'off' 할 수 있다. 그중 대부분은 문제없이 기능한다. 그러나 어 떤 것은 위험할 수 있다. 하지만 무엇이 위험할지 어떻게 예측한단 말인가?
그리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지 않은 케이블 철도만 해도 수천 개 의 부품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온풍기와 브레이크 선이 만나면 어 떤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를 비롯한 만일의 경우를 모두 고려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 미국의 비행기 엔지니어 에드워드 A. 머피는 2차 세계대전 후 실험 중 결정적인 순간에 측정기가 고장 나자 "잘못될 가능성이 있는 일은 꼭 잘못된다"라고 말했다. 끊임없이 우리의 다리를 걸어 넘어 뜨리고, 희생자로 만드는 것은 운명이나 누군가의 무능력이 아니라 가차 없는 확률의 법칙일 따름이다. 머피를 불멸의 존재로 만들어준 이 문장에 대해 머피의 미망인은 머피가 약간 다르게 말했다고 주장 했는데, 바로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어떤 일을 하는데 한 가지 이상의 방법이 있고 그 방법 중 하나가 재난을 초래한다면 반드시 그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
- 시스템 붕괴는 인간의 몸속에서도 일어난다. 가령 체세포 안의 유전자가 우연히 돌연변이가 되면 암이 발생한다. 처음에 돌연변이는 100만 분의 1밀리미터보다 더 작은 원자 몇 개에서만 일어난다. 하 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치료 메커니즘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면 파괴된 세포들은 걷잡을 수 없이 증식한다. 그리하여 종양이 자라나 고, 그것이 전신에 퍼진다. 처음의 돌연변이에서 환자의 죽음까지는 수십 년이 걸릴 수도 있다. 그리하여 초기에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 다가 나중에 발견했을 때는 의사들도 손쓸 수 없는 지경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비극은 예외적인 경우다. 돌연변이는 어느 누구의 몸에서나 계속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돌연변이는 대개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유전자의 실수는 저절로 개선되거나 최악의 경우 문제가 확산되지 않도록 해당 세포들이 자동적으로 자살 프로그램을 실행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종양이 커진다면 그것이 더 커지지 않도록 그쪽으로의 혈액 공급이 줄어든다.
이외에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안전 메커니즘이 더 많이 있을 것 이다. 우리 몸은 아주 복잡한 구조물이라서 분자생물학이 아무리 발 전한다 해도 체내에서 조절되는 모든 시스템을 알아내는 것은 불가 능하다.
하지만 엔지니어들은 신체에서 몇 가지를 배울 수 있다. 신체는 엔지니어들이 설계하는 대부분의 기계들과는 다른 원칙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지금까지 존재했던 그 어떤 기술보다 고장이 없도록 만들어져 있다. 유기체 안의 과제는 수많은 세포들이 각자 분담하고 있다. 그리고 각각의 세포는 막을 통해 외부세계와 단절되어 독립적 인 기계처럼 작동한다. 매일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수천 개의 세포가 사멸하고, 또 새로 생겨난다. 심지어 신장 하나를 떼어 주고 뇌의 일부가 손상되어도 계속 살 수 있다. 뇌 손상이 발생하면 종종 이웃한 세포들이 뛰어들어 손상된 부분이 담당하던 일을 떠맡 는다.
이는 중앙권력이 유기체 안의 일을 지배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 사고 실험은 이런 역할 분담의 구조가 얼마나 월등한지 보여준다. 우리 뇌가 컴퓨터처럼 구성되어 있다면 뇌 속에는 모든 뇌 기능을 조절하는 중앙 프로세서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예기치 않은 우발 사건이 전체 시스템의 다운을 유발할 수 있고 치명적인 결과를 일으킬 수 있다.
짐을 되도록 많은 사람이 나눠 들으면 우연의 파괴력은 줄어든 다. 이것은 복잡한 구성에서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한, 가장 효과 적인 전략 중 하나다. 엔지니어들은 오늘날 이런 원칙을 이용하고 있다. 그리하여 에어버스 A320에는 네 대의 컴퓨터가 각각 승강타 를 확인하고 있고, 네 대 모두 다운되는 날에는 부가적으로 전기역 학적 조종을 할 수 있다.
스페이스 셔틀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서로 독립적으로 기능하고 서로 다른 팀에 의해 프로그래밍된 컴퓨터 세 대가 우주 비행을 조 종한다. 때로 컴퓨터들이 서로 다른 결과를 내놓으면 결정은 다수결로 이루어진다. 이런 민주적 전략은 프로그램의 오류로 셔틀이 추락할 위험을 줄인다.
- 복잡한 상황에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모두 생각하려 하면 최악의 경우 어떤 행동도 할 수 없게 된다. 건초 두 더미 사이에서 한 더미를 먹고 다른 더미를 남겨둘 논리적인 이유를 찾지 못해 굶어 죽었다던 중세 논리학자 뷔리당의 당나귀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때로 실수를 저지르고자 하는 용기가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럴 때도 무조건 직관에 의존할 필요는 없다. 실수가 발생할 확률과 그 결과를 제한하는 몇 가지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는 맨 처음 떠오른 방안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그 방안 이 최소한의 요구 조건을 충족시킨다면, 그보다 더 나은 대안이 있 느냐와는 상관없이 말이다. 신속하게 여행 목적지를 결정해야 한다 면 반드시 충족되어야 하는 몇 가지 기준을 생각한다. 가령 '따뜻한 곳일 것', '조용한 곳일 것', '아름다운 자연이 있는 곳일 것', '출발한 지 여섯 시간 이내에 목적지까지 도달할 수 있을 것' 등을 최소한의 기준으로 정할 수 있다. 그런 다음 여행 상품을 죽 훑어보다가 이런 기준에 적합한 상품이 나오면 고민을 끝내고 그 상품을 예약한다. 그러면 이제 유쾌한 휴가를 보낼 좋은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더 싸 고 더 멋진 상품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상품을 고르려면 시간이 더 들고 골치가 아프다.
- 불확실한 상황에서 단순한 레시피에 따라 빠르고 확실하게 결정하는 방법을 인지심리학자들은 '단순한 발견'이라 부른다. 이런 식으로 여행지를 고르는 것이 석연치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 방법 은 복잡한 상황에서 활용할 수 있는 유일한 이성적인 방법일지 모 른다. 그리하여 루프트한자 항공사도 조종사들이 위기를 맞았을 때 이 방법으로 결정하도록 훈련한다. 비행기에 화재가 발생하거나 동 력장치가 멈추거나 다른 위험한 상황에 부딪히면 조종사는 가장 먼 저 떠오르는 해결법을 검토하여 그 방법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안전하다면 곧장 그 방법을 택한다. 승객들이 힘들거나 기체에 손상 이 가도 개의치 않고 말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어떤 방법이 나을 까 계속 고민하다가 최선의 결정을 내리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무능한 시장과 유능한 시장의 차이는 예측할 수 없는 일에 접근 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유능한 시장들은 과제를 더 작게 세분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도시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구 했고 자신들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지문했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의 말을 귀담아들을 줄 알았다. 그리하여 유능한 시장들은 목 표를 위해 무능한 시장들보다 더 자주, 더 많은 결정을 내렸다. 대신 각각의 결정이 미치는 영향력은 작았다. 유능한 시장들은 한 걸음 한 걸음 단계를 밟아가면서 예기치 않은 일에 최선의 방법으로 대처 할 수 있었다.
- 우리는 작은 걸음으로 겸손하게, 하지만 성공적으로 전진하는 것에 그리 익숙하지 않다. 우리는 최종적이고, 단호한 해결책을 찾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대부분 이런 기대는 비현실적이다. 삶을 변화시키려고 하거나 변화시켜야 할 경우 작은 걸음으로 가는 것이 최상의 길이다. 삶을 운명적으로 확 바꾸어버리는 것은 영화감독이나 낭만적 작가들이 불어넣은 환상이다. 현실적으로는 너무 위험한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홈런을 꿈꾼다. 이런 꿈은 정치인이 계속 이랬다저랬다 한다고 비난하며 단번에 효과를 발하는 정책을 촉구하는 신문이나 잡지의 사설에서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현대 사회처럼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한 사회에서는 작은 걸음으로 걸으며 계속적 으로 규칙을 조정해 나가는 것이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최상의 방법이다. 연방의회에서 한 연설가가 콘라트 아데나워가 자꾸만 견 해를 바꾼다고 비난하자 아데나워는 이렇게 말했다.
"매일매일 더 영리해지지 못할 이유가 뭡니까?"
- 어떤 일을 조망할 수 없음을 인정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행운의 여신을 믿기는 정말 힘들다. 결국 우리는 자신의 진로 를 주사위 몇 개나 동전 하나에 위임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우리의 현실 인식에 커다란 구멍이 있고, 그럼에도 결정해야 한다는 것! 뇌는 우리에게 거짓된 확신을 불어넣으면서 이런 불 쾌한 사실을 은폐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은근한 불쾌감을 느낀다. 우리 조상들은 이런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려운 결정을 앞두고 신탁을 구한다든지, 점쟁이나 예언자를 찾아간다든지 했다. 마약에 취한 여사제가 모호한 언어로 던지는 충고들은 동전 던지기 나 다를 바 없이 우연하다. 그러나 동전 던지기와 비할 수 없는 안도 감을 준다. 높은 힘과 접촉하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새들의 비 행을 해석하고, 제비를 뽑고, 점을 치고∙∙∙∙∙∙. 결국 우연에게 결정을 맡기는 것이나 다름없지만 바로 그렇기에 이 모든 방법은 정당성을 가진다.
- 무엇보다 그런 방법은 우리가 접어든 길이 별로 유리하지 않은 것으로 입증될 경우 후회를 덜어준다. 우리는 '살면서 점점 영리해 져간다'는 것을 알기는 해도 종종 과거에도 지금 알고 있는 것들을 고려할 수 잇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상상하면서 괴로워한다. 물론 그것은 불합리하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다르게 결정했을 것이기 때 문이다. 하지만 신탁에 그 책임을 위임하는 사람, 또는 이런 류의 트 릭이 없이는 최적의 결정을 내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받아 들이는 사람은 그런 자기 비난에 빠질 필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