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 같은 고기에 대해서도 사람마다 인식이 다를 수 있음. 예를 들어 쇠고기에 대한 힌두교도의 반응은 개고기에 대한 미국 기독교도들의 반응과 마찬가지. 인식에서의 이런 차이점들은 우리의 스키마 때문이다. 스키마란 우리의 신념과 생각, 인식, 경험을 구조화하는(그리고 역으로 그것들에 의해 형성되는) 심리적 틀. 스키마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자동적으로 정리하고 해석한다. 예컨대 간호사라는 단어를 들으면 아마도 흰 가운을 입고 병원에서 일하는 여성을 떠올릴 것이다. 간호사 중에는 남자도 있고 흰 가운을 안입는 사람도 있으며 병원 밖에서 일하는 사람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환경에서 여러 유형의 간호사들을 자주 접하지 않는 한 우리의 스키마는 이런 일반화된 이미지를 고수한다. 일반화는 스키마가 자기 고유의 기능을 해낸 결과다. 우리에게 끊임없이 다가드는 엄청나게 다양한 자극들을 점검하고 해석한 뒤 일반적 범주들에 나누어 넣는 일 말이다. 스키마는 요컨대 정신적 분류체계다.
- 현실을 왜곡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부정이다. 아무 문제도 없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면 문제에 어떻게 대처할지 걱정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리고 현실을 부정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것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비가시성은 육식주의 시스템의 보루다.
상징적 비가시성은 방어기제인 회피에 의해 가능해짐. 회피는 부정의 한 형태다. 문제의 시스템에 이름 붙이기를 피할 때 우리는 진실을 피할 수 있으며, 그러다 보면 시스템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게 된다.
- 고통의 경험은 주관적이므로 다른 사람의 고통을 부정하기는 쉽다. 바꿔말해 우리는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무엇을 느끼고 있을지는 추정밖에 할 수 없는데, 그들이 고통스러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편이 우리한테 유리하다면 그게 사실이라고 아주 쉽게 믿어버림. 우리의 가정들은 우리의 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타인에게 고통을 가하도록 허용하는 그 신념체계는 자기보존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한다. 그러므로 동물들에게 고통을 주는 육식주의의 관행을 놓고 우리가 잘못하는 건 아닌지 신중하게 고려하거나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는 게 하나도 놀랍지 않다.
- 우유생산을 최대화하기 위해 젖소에게 유전자 조작 성장호르몬 주사를 맞히고 해마다 인공적으로 임신을 시킨다. 미국 대부분 낙농장에서 젖소들은 임신기간 9-10개월을 포함해 1년에 10개월 동안 기계로 젖을 짠다. 지속적 임신과 젖분비는 소의 몸에 극도의 스트레스를 주기 때문에 많은 소가 다리를 절게 되거나, 유선염에 걸려 유방이 크게 부풀어 오르기도 함. 소의 신체시스템이 이처럼 과로하다 보면 정상적 신진대사 과정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우므로, 풀만 먹는 타고난 초식습관을 곡물과 고단백의 육식성 사료(동물에게서 나온 혈액제품, 젤라틴, 기름 따위로 만들어짐)로 보충해줌.
젖소들이 견뎌야 하는 신체적 스트레스가 심각하기는 해도 아마 가장 큰 고통은 해마다 출산 후에 겪는 정서적 트라우마가 아닐까 한다. 새끼가 수놈이면 송아지 고기를 생산하는 데 사용되고, 암놈이면 유제품 생산에 쓰임. 소들은 본디 길게는 1년가지 새끼에게 젖을 먹이면서 대단히 친밀하게 지낸다. 그러나 낙농공장에서는 송아지를 보통 생후 몇 시간 안에 어미에게서 떼어 놓는다. 젖을 인간의 몫으로 돌리기 위해서임. 송아지가 어미 소 앞에서 끌려갈 경우 어미는 흥분하여 큰 소리로 울어댄다. 그래서 어미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다른 장소로 데리고 가 젖을 짜고, 그 사이에 송아지를 끌어가기도 함. 인간과 마찬가지로 어미 소도 새끼가 없어지면 격앙되고 안달을 한다. 여러 날 울부짖으며 미친듯이 송아지를 찾으며, 때로는 폭력적이 되어 몸부림치다 일꾼들을 발로 차기도 함. 심지어 새끼를 찾느라 우리를 탈출해 몇키로나 떨어진 다른 목장까지 가는 소들도 있음.
소들의 타고난 수명은 대략 20년이지만 낙농공장에서는 4년만 지나면 용도폐기가 되어 도축장으로 보내진다. 미국에서 생산하는 분쇄육 중 상당부분이 젖소고기다.
- 우리가 어느 수준에서는 불편한 진실을 의식하지만 동시에 다른 수준에서는 의식을 못하는 일이 가능할 뿐 아니라 불가피하도록 조직되어 있는 것이 바로 폭력적 이데올로기. 알지 못하면서 아는 이 같은 현상은 모든 폭력적 이데올로기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육식주의의 요체다.
나쁜 것은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않는다는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무언의 계약이 이런 폭력적 이데올로기들에 내재한다. 물론 육식주의 업계도 자기들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하지만, 그 일이 쉬워지도록 우리 스스로가 돕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들이 보지 말라고 하면 우리는 고개를 돌린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수십억 마리의 동물이 평화로운 농장의 야외에서 노닌다고 그들은 말하는데,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임에도 우리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처럼 행동하는 까닭은 우리 대부분이 의식의 어느 차원에서는 정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충분한 정보에 근거하여 의사결정하기를 원한다. 자유롭게 생각하고자 하며, 스스로 정보를 찾아 나서는 적극적인 소비자가 되고자 한다. 우리에게는 그럴 자격이 있다. 한데, 애초에 우리가 선택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면 이런 자유는 불가능해질 게 뻔하다. 보이지 않는 이데올로기가 우리의 신념과 행동을 이끌 때,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자유를 빼앗아 버리는 시스템의 희생자가 된다.
우리가 진짜 현실은 어떠한지를 알게 될 때, 그 시스템의 작동원리를 인식할 때, 오직 그때에만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해진다. 시스템에 육식주의라는 이름을 붙이고 육식주의적 생산의 실상을 가려 온 신화를 깨뜨리는 일은 우리가 그 시스템을 꿰뚫어 보는 시발점이 될 수 있다.
- 밀집사육시설 부근에 사는 주민들은 아황산염과 질산염을 포함한 공장폐기물에 중독돼 왔다. 이런 독소들은 공기와 식수를 오염하여 만성 천식과 눈병, 기관지염, 설사, 극심한 두통, 메스꺼움, 유산, 아기의 선천성 결함, 영아사망, 바이러스나 박테리아에 의한 질병 등을 유발할 수 있다.
그리고 고기와 알, 유제품의 소비자들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각종 오염물질을 먹어왔다. 우리가 먹는 육식주의 식품중엔 합성 호르몬이 들어가 있는 게 흔한데, 그런 호르몬의 일부는 각종 암의 유발과 연관이 있어서 유럽연합에서는 동물과 인간 모드에게 사용이 금지되어 있다. 또 과다한 양의 항생제, 발암물질로 확인된 독성 살충제와 제초제 및 살진균제, 치명적일 수 있는 박테리아나 바이러스, 석유, 독극물을 먹은 쥐의 시체, 흙, 털, 똥 따위 온갖 물질이 고기속에 들어가기도 한다.
패스트푸드의 제국에서 에릭 슐로서는 육식주의의 부수적 피해의 요체를 정확히 집어낸다. 고기에는 똥이 들어 있다. 슐로서는 구체적으로 분변을 지적했지만, 그 외에도 많은 것을 포함한다. 부패부터 질병까지 우리가 먹는 고기와 알, 유제품을 더럽히는 모든 요소, 병은 시스템이 낳는 쓰레기들 말이다.
우리가 먹는 고기에는 이런 요소들이 들어가는 방식에 관한 이야기는 육식주의를 비롯한 폭력적 이데올로기들의 핵심적 특성 중 하나에 관한 이야기다. 그 특성이란 이런 시스템은 간접적 피해자들을 기반으로 하여 유지된다느 점이다. 간접적 피해자는 시스템이 낳는 부정적 결과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를 피해자로 만드는 데 참여함으로써 시스템을 돕는 사람이다. 시스템은 실상과는 다른 모습을 내보임으로써 우리가 위험에 처했는데도 안전하다고 착각하게 하고, 강제와 억압을 받으면서도 자유롭다고 느끼게 하면서 이런 피해자들을 만들어냄. 똥이 어떻게 고기에 들어가는지에 관한 이야기는 육식주의에 희생되는 인간들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 단백질 부족에 대한 두려움은 특히 남자들 사이에 흔하다. 동물단백질이 전통적으로 근육 및 힘을 키우는 것과 결부되어 왔기 때문. 고기는 힘과 능력, 생식력을 나타내면서 오랜 세월 사내다움의 한 상징노릇을 해왔다. 반대로 식물성 음식은 여성적인 것으로 여겨져 흔히 수동성과 나약함을 상징. 사내다움, 즉 남성성의 의미가 대체로 지배와 통제, 그리고 폭력을 축으로 구성되어 개인과 사회에 해를 끼치게 된 데에 관한 연구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러고 보면 동물을 소비하는 게 남성의 주요 특징이 된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육식주의의 다른 신화들과 마찬가지로 단백질 신화 역시 오래되고 널리 알려졌으며 실체적인 반대증거들을 무시하며 버티고 있다. 그것은 지속적인 육식주의적 소비를 정당화하고 육식주의 패러다임을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것은 말 그대로 신화일 따름이다.
1900년대 초에 미국인들은 하루에 100그램을 훨씬 넘는 단백질을 섭취해야 한다고 들었다. 더 가깝게 50년대만 해도 건강을 생각한다면 단백질 섭취를 늘여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했다. 오늘날 많은 미국인들은 필요량의 두 배나 되는 단백질을 섭취한다. 과다한 단백질 섭취는 골다공증, 신장질환, 요로결석, 그리고 일부 암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람들의 근육과 기타 체단백질은 아미노산으로 만들어지고, 아미노산은 그들이 먹는 단백질에서 나온다. 콩, 렌즈콩, 곡류 및 채소를 골고루 먹으면 필수 아미노산을 모두 얻을 수 있다. 한때는 단백질의 효과를 제대로 보려면 여러 종류의 식물성 음식을 함께 먹어야 한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최신 연구결과를 보면 그렇지 않다고 한다.
단백질을 충분하되 과다하지는 않게 섭취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육식주의 식품을 끊고 곡류, 채소, 콩류와 과일을 먹으면 된다. 다양한 식물성 음식을 체중유지에 필요한 만큼 먹는 한 단백질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
- 도축장 작업자들이 자기가 죽이려는 동물을 소니 돼지니 하는 산 동물의 이름으로 지칭하지 않고 그들을 가지고 만들 제품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생각해보라. 닭은 브로일러로, 돼지는 래셔 즉 얇게 저민 베이컨으로, 소는 비프로 부른다. 그런가 하면 농무부는 암소를 젖통으로 동물들을 단위로 지칭하고, 육식주의 업계에서는 대체용 수퇘지와 대체 송아지 같은 용어를 쓴다. 우리가 흔히 생물이라는 말도 따지고 보면 살아 있는 물건이라는 이야기니 형용모순이다. 게다가 그걸 깨닫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점도 생각해 보라. 육식주의를 위해서는 우리가 이처럼 대상화하는 언어를 쓰는 게 필요하다. 가령 식당 유리창 안의 회전구이 통닭을 가리키며 무엇이냐 묻지 않고 누구냐고 묻고, 횟집 수조에서 헤엄치고 있는 문어를 그것 대신 그나 그녀라고 부른다고 생각해 보라. 어떤 느낌이 들겠는가?
- 토론토대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도덕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혐오감을 느끼도록 만들어졌는지도 모른다. 연구자들은 실험참가자 20명의 얼굴에 안면 움직임의 변화를 기록할 전극을 연결하고는 그들을 세가지 다른 조건에 차례로 처하게 했다. 즉, 구역질 나는 맛의 액체를 마시라고 주었으며, 더러운 화장실이나 상처따위를 찍은 혐오감 주는 사진을 보게 했고, 실험용 게임에서 불공정하게 취급받도록 했다. 연구자들은 이 세가지 상황에서 피험자들 얼굴의 자동적 움직임이 똑같다는 사실을 발견. 즉, 윗입술을 올리고 코를 찡그리는 근육인 상순거근이 수축했는데, 이는 혐오반응을 나타내는 것. 도덕적 혐오감을 상했거나 오염된 음식을 먹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하는 원초적이며 태곳적부터 있어 온 혐오반응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 톨스토이 신드롬
심리학자들이 확증편향이라 이름붙인 현상은 톨스토이 신드롬이라 불리기도 함. 그는 예술이란 무엇인가에서 자신이 지닌 믿음 때문에 판단력을 잃는 인간성향에 대해 이렇게 썼다.
내가 알기로 대부분의 사람은 가장 단순하고 명백한 진실이라도 그것이 ... 자기 삶의 피륙에 한올 한올 짜 넣은 결론들을 오류로 인정하게 만드는 것일 경우 ... 진실로 받아들이는 수가 거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