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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를 반성한다

dalai 2025. 5. 1. 09:45

- 병원산업이 발달하기 전(50년이전)에 죽음이라는 절차는 원래 조용하고 평온한 것이었다. 생을 마무리 하는 당사자에게 본인의 삶이 비로소 완성되는 시간이었다. 떠나보내는 사람들에게도 사랑했던 사람과 이별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 의미있는 순간을 병원이 낚아채면서 더할 수 없이 비참한 것으로 바꾸고 말았다.사람들은 죽음이란 원래 고통스럽고 비참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병원이 개입된 죽음은 고통스럽고 비참한 것이라고 해야 맞다.
심지어 암에 걸린 사람마저도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면 고통없이 평온하게 죽어간다. 
죽기에는 암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암으로 인한 고령층의 자연사를 100건 이상 경험한 지금 그 신념이 확시으로 바뀌었다. 지금도 평균수명을 다한 노인들에게 암으로 인한 사망이 최고라고 권한다. 단, 여기에는 암검진이나 정밀검사 따위를 받지 말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있다. 특별한 징후가 없다가 80-90세에 이르러서야 암이 발견되는 경우는, 편안한 죽음을 위한 때를 놓친 행운이라 할 수 있다. 

- 노인은 어딘가 안 좋은게 정상이다. 그것은 노화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의사를 찾거나 약을 먹어도 더 좋아질 리가 없다. 옛날 노인들은 몸이 작년 다르고 올해 다르다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래서 오히려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매스컴과 제약업계와 병원에서 끝없이 만들어내는 건강에 대한 환상으로 모든 노인이 나이탓을 인정하지 않고, 노화를 질병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 노년기를 편안하게 보내려면 약물과 병원에 의존하지 않고 노화에 순응하며 질병과 동행해야 한다. 나아가 노인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마지막 역할은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죽는 방식을 보여주는 것. 죽는 방식이란 사는 방식과 다르지 않다. 오늘은 어제의 연속이다. 오늘 행복한 사람이 내일도 행복한 법. 다시 말해 지금 이 순간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더 중요하다. 오늘의 내가 사는 방식, 이웃이나 가족과 관계를 맺는 방식, 이 모든 것이 결국 죽음이라는 마지막 장면에 그대로 반영된다. 당연히, 몸이 조금만 안 좋아도 당장 의사나 약물이나 병원을 찾으며 법석을 떠는 사람에게 자연사란 허황된 소망에 불과하다.

- 환자를 앞에 두고 모른다고 하면 돌팔이 취급을 받는다. 그러니 점잖게 고개를 끄덕이다 다 안다는 듯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다. 그런 의사들을 돕기 위해 의학계는 증후군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사전을 찾아보면 특정한 질병의 존재나 발병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일련의 증상이나 상태라고 적혀 있다.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은 쉽게 말하는 법인데 이 설명도 어렵다. 나름대로 말해보면 특징적인 증상들이 비슷하게 나타나는 경우를 합쳐서 말하는 질병군이다. 더 솔직히 말하면 잘 모를 때 뭉뚱그려서 말하는 질병의 이름다.
예를 들면 대사증후군, 과민성대장 증후군, 쿠싱 증후군, 리플리 증후군, 손목터널 증후궅, 새집 증후군 등이 있다. 정말이지 모르면 모른다고 확실히 말하려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만일 모른다는 말을 소리내어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의사라면 당신은 그 의사를 신뢰해도 좋다. 왜냐하면 그는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터득한 의사이기 때문. 그만큼 많은 공부와 경험을 쌓은 의사이기 때문이다.

- 연구에 따르면 혈압이 얼마가 되든 혈압약을 복용하지 않은 사람의 자립도가 더 높게 나타났다. 혈압이 180일 경우 복용자의 자립도는 30%였고, 미복용자는 50%였다. 그러나 120이하의 경우 복용자의 자립도는 30%에 불과한데 반해 미복용자의 자립도는 무려 80%였다. 그러니까 혈압이 어떤 상황이든 혈압약을 먹는 사람에 비해 아무런 약을 먹지 않은 사람의 자립도가 월등히 좋았다. 의사 중에는 혈압이 낮을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약을 먹어서 혈압을 100이하로 끌어내려야 한다는 의사도 있는데, 이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60년대까지만 해도 혈압의 기준치는 나이+90이었다. 의대 교과서에도 그렇게 적혀 있었다. 나이를 먹으면 혈압도 함께 오른다는 것은 의학의 기본 상식. 그런데 10대나 80대나 같은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비상식적인 일이다. 돈때문에 이런 일이 발생한다. 

- 식물도 수명이 있다. 다 죽어가는 식물에 비료를 줘야 할까? 비료를 준다 해도 어차피 흡수하지 못하기 때문에 시들어 죽는다. 그런데 동물(인간)은 수명이 다하면 저절로 입을 닫는다. 몸속에 남아 있는 수분을 조금씩 사용해 삶의 마지막을 조용히 마감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기발한 방법을 고안해 낸다. 코에 호스를 꼽거나 배에 구멍을 뚫어 영양분을 공급하는 방식이 바로 그것이다. 자연사의 아름다운 과정에 수명연장이라는 아름다운 단어로 통장의 잔고를 털어간다.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큰 고통과 비참함을 안겨주는 짓이다. 

- 북유럽에서는 본인이 스스로 먹을 수 있도록 조립법을 궁리하여 눈앞에 놓아둘 뿐이고 손을 대지 않으면 그대로 물려버리는 간호의 방식을 취함. 이시토비고조가 쓴 편안한 죽음을 권하다에 나오는 '영양을 취하지 않고 누워 있는 사람에게 물만 주면서 조용히 간호산다.'라는 미야케섬 선인들의 지혜를 다시 한번 곱씹어 보아야 한다. 자연사에 대한 최선의 간호는 가시는 분에게 고통을 안겨주지 않는 것. 그러려면 가능한 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환자를 지켜보는 것이 최선이다.

- 70년 말, 패혈증이나 과다출혈로 인한 쇼크상태에서 엔돌핀이 분비되는 것으로 알려진 이래, 모든 종류의 신체적 외상을 입었을 때도 엔돌핀 수치가 올라간다는 사실이 의학문헌에 등장. 엔돌핀의 상승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다가오는 고통과 공포로부터 인간을 보호해주는 신체 내부의 메카니즘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인간이 살아남기 위한 방편일 수도 있으므로,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요소가 많아진 선사시대부터 존재했을 것이다. 물론 동물에게도 이와 유사한, 아니 똑같은 메커니즘이 있는지도 모르지만, 인간이 갑자기 들이닥친 공포에도 불구하고 평온해질 수 있다는 축복, 그 축복 아래 많은 생명이 위로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 의학적 관저에서 볼 때 자연사의 실체는 아사, 즉 기아와 탈수의 과정을 거치며 죽게 됨. 물론 기아와 탈수 같은 단어는 누구에게나 비참한 느낌을 준다. 마치 사막에서 길을 잃거나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것처럼, 배고 고파도 먹을 것이 없고 목이 말라도 마실 물이 없는 끔찍한 상황이 연상되기 때문. 그러나 자연사의 경우 좀 다르다. 생명이 꺼져가는 상황에서는 공복이나 갈증을 느끼는 감각기관들도 점점 기능을 멈추기 시작. 즉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 먹고 마시는 게 당연하지만, 생명력이 약해지기 시작하면 그럴 필요성이 사라진다는 이야기다. 기아상태가 되면 뇌 속에 통증을 차단하는 몰핀이 분비되어 기분이 좋아지고 행복감을 느낀다고 전문가들은 연구결과를 발표한다. 탈수 역시 혈액이 농축되는 것이기 때문에 의식수준이 떨어져 몽롱한 상태가 된다.

- 죽음이 가까워지면 호흡상태도 나빠짐. 호흡이란 공기중의 산소를 받아들이고 몸 안에 생긴 탄산가스를 방출하는 작업이다. 만일 이 작업이 원활하지 않으면 산소결핍 상태가 되는데 탄산가스가 배출되지 않고 몸 안에 쌓인다. 산소결핍상태에서는 뇌 속에 모르핀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됨. 유도선수들에게 물어보면 조르기 기술에 걸렸을 때 하나같이 기분이 좋았다고 말한다. 모르핀이 나오기 때문. 그리고 탄산가스에는 마취작용이 있는데 이 또한 죽음의 고통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이처럼 죽음이란 자연의 섭리이며 흔히들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가혹하거나 고통스럽지 않다. 불안이나 공포, 고통이나 괴로움은 죽음에 대한 왜곡된 환상에 불과하다. 자연사란 아무런 고통도 없이 그저 이승에서 저승으로 자연스레 옮겨가는 고정일 뿐이며, 수명을 다하여 노쇠사하는 노인에게 주어진 마지막 특권이다.

- 폐렴에는 오연성 폐렴과 감염성 폐렴 두가지가 있다. 오연성 폐렴은 이물질이 잘못 들어가 폐에 염증이 발생하는 것을 말하며, 감염성 폐렴은 세균, 바이러스, 곰창이 등에 감염되어 폐에 염증을 일으키는 것을 말함. 오연성 폐렴을 일으키면 병원에 입원하여 폐렴치료가 시작된다. 이때 수액주사를 통해 항생제와 수액이 투여됨. 너무 많이 주입되면 폐가 물에 잠기게 되는데 이처럼 과도한 수액공급은 폐를 익사시키는 것과 같다. 한밤중에 간호사가 각 방을 나돌다가 호흡이 멈춰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이유다.

- 먹지 않아서 죽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다하여 자연스럽게 먹지 않는 것일 뿐이다. 병원시스템을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그 인식의 전환이 필요. 생명의 마지막을 맞이한 몸은 수분이나 영양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실제로 요양원 노인의 경우, 먹지 못하게 된 이후 마지막 며칠간의 모습을 지켜보아도, 갈증이나 공복을 호소하는 분은 없다. 몸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소변이 나온다. 그것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몸속을 정리정돈 하는 것이다.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는 것처럼 몸이 죽음에 친숙해져 가는 과정. 이와 같은 상태에서는 몸에서 자연스레 마약성 물질인 엔돌핀이 분출된다. 그래서 고통이 없다.

- 나다카 나호미의 책 시드는 것처럼 죽고싶다를 보면, 프랑스에서는 노인에대한 의료의 기본에 대해 이렇게 정의한다.
본인이 스스로 음식물을 넘기지 못하게 될 때 의사의 일도 그 시점서 끝이 나며, 다음은 목사가 알아서 할 일이다.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괴로움을 줄이기 위해, 혹은 자기만족을 위해 죽어가는 사람엑 비참함을 강요하고 쓸데없는 고통을 안겨주어서는 안된다. 또한 의사와 병원은 그런 식으로 죽음을 상업화해서는 절대 안된다. 아무리 괴로워도 떠나야 할 시기에 제대로 보내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게다가 설령 생명을 연장한다해도 슬픔이 사라지거나 줄어드는 건 아니다. 오히려 조금 더 늦춰지는 만큼 슬픔도 길어질 뿐이다.

- 쪼그린 자세에서 볼일을 보게 되면 변의 무게와 장의 연동운동에 효과적임. 무엇보다 가장 큰 장점은 배에 힘을 줄 수 있다는 것. 반면 누운 자세에서는 의지할 것이라고는 장의 연동운동뿐이라서 변비에 걸리기 쉽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설사약을 남용하게 된다. 그래서 노인병원에서는 누운 채 기저귀를 차고 변을 누는 대신, 좀 힘들더라도 될 수 있는 한 이동식 좌변기에 앉아 배변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 식사할 때 자세도 중요. 병실에서는 환자 대부분이 침대에 기대어 음식을 먹는데 그것 또한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일이다. 우리가 음식을 먹고 마실 때면 으레 몸이 앞으로 기울어진다. 절대 뒤로 젖혀지지 않는다. 건강한 사람도 몸을 뒤로 젖힌 채 식사를 하면 음식이 기도로 넘어가 호흡곤란을 일으킬 수 있다. 따라서 음식을 삼키는 기능이 떨어지는 고령층의 경우 더욱 주의해야 함. 환자가 다소 불편해하더라도 될 수 있는 한 의자에 앉아 몸을 앞으로 숙인 자세에서 식사를 해야 한다.

- 인도에서는 예로부터 인간의 일생을 4주기로 구분. 학습에 전념하는 학습기(1-25세), 일을 해서 재물을 쌓고 사회적 성공을 이루는 가주기(26-50세), 모든 것을 버리고 숲속에 들어가 요가와 명상 등의 수행을 하는 임주기(51-75세), 수행자가 되어 전국을 떠돌며 수행하는 유행기(76-100세)
마치 죽을 때를 깨달은 동물이 모습을 감추듯이, 집을 나온 노인들은 자기도 알지 못하는 땅에서 죽어가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있다. 가족과 함께 있으면 가족들을 수고롭게 만들기 때문. 그래서 가족이 없는 땅에서 조용히 육신을 눕히고자 하는 것. 가족들도 집 나간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위해 기도를 하긴 하지만 찾으려고 허둥대지 않는다. 그렇게 대부분은 자연 속에 흡입되듯 사라져 간다.
각종 기계가 불을 번쩍이는 병실에서 자신도 알지 못하는 미래와 싸우며 죽어간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기계에 연결된 것들의 도움을 받다가 기계음이 사라지면 세상과 이별하는 방식은 참으로 비참한 일이다. 그것은 생명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방법이고 개인의 주체성을 무너뜨리는 죽음이며 생명에 대한 모독이다.

- 수술이 가장 위험하다. 특히 암은 해당 부위를 크게 잘라 내거나 장기 전체를 적출한 후에 관련 림프샘까지 몽땅 제거하는 대수술이 되기 쉽다. 그런데 암은 건드리는 순간 메스가 가해져 혈관이 잘리면 혈액과 함께 암세포도 들러나오 상처부위에 붙게 된다. 그곳에서 암세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전이가 발생.
항암제도 위험하다. 항암제의 독성은 심폐, 골수, 신장의 기능을 떨어뜨리고 병원균과 싸우는 백혈구까지 파괴함. 결과적으로 면역력을 저하시켜 감염에 취약한 몸으로 만든다. 암 표준치료 중에서 비교적 인체가 덜 손상되는 건 방사선 치료다. 비교적 삶의 질을 계속 유지할 수 있기 때문. 그러나 과도할 경우 피부가 헐거나 장기에 구멍이 나고, 뼈도 쉽게 부러진다.
이 3대 치료는 수명을 연장하기보다 죽음을 재촉한다. 부작용이 없는 좋은 하암제가 있다며 항암제 치료를 부추기는 의사들도 많다. 이 말은 부작용을 멈추는 약물과 함께 항암제의 분량을 늘린다는 말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항암제 대부분은 독약이나 극약으로 지정되어 있다. 계속 주입하면 건강하던 사람도 1년 안에 절반이 죽는 독극물이다. 꿈의 신약은 환상이다.

- 죽기에 암이 최고라 생각하는 이유
(1) 자신이 죽어가는 모습을 주변에 보이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마지막 의무라 여기기 때문.
(2) 비교적 마지막까지 의식이 맑은 상태로 의사표시를 하기 때문.

- 항엄제가 잘 듣는다는 것은 치유, 연명효과, 증상완화, 암축소라는 네가지 의미. 항암제가 잘 듣는 것으로 인정받고 채택, 승인되는 데에는 특별한 기준이 있다.
먼저 X선 사진 등 자료상으로 암의 크기가 절반 이하로 줄어든 기간이 4주 이상 지속되어야 하고, 항암제를 사용한 환자의 20% 이상이 그런 상태를 보여야 함. 비록 나머지 80%의 환자가 반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잘 듣는 약으로 인가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 병원과 제약사는 이것을 효과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정을 모르는 환자 측이 효과가 있다는 말을 낫는다, 사라진다고 받아들인다 해도 누구를 탓할 수가 없다.

- 항암제는 거의 독극물의 성격을 갖고 있어서 당연히 심한 부작용이 따른다. 암세포만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정상세포와 신체의 모든 조직을 공격한다.
혈액암과 고환암 등의 경우에는 어느 정도 항암제가 효과를 발휘하기도 한다. 그러나 위암이나 폐암처럼 덩어리가 있는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암이 일시적으로 줄어들 수는 있지만 큰 의미가 없다. 몇 달 정도 연명효과는 있을지언정 부작용이 심해 기진맥진 상태가 일쑤다.
결국 항암제로 인해 고통스러온 기간만 더 늘어날 뿐이라면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 그럭저럭 연명한다고 해도 어떤 상태로 연명하느냐가 문제. 더욱이 항암제는 맹독성 독극물이라서 효과는 없어도 부작용은 반드시 있게 마련. 다시 말해 연명효과는 없어도 생명을 단축하는 효과는 분명히 있다는 말이다. 생명을 연장하려다 비참하게 삶을 마감하는 결과를 낳고야 만다.

- 의사에게 죽음은 패배다. 하루라도 더 늘리는 것이 절대적 사명이기 때문. 환자를 죽게 내버려두는 행위는 의사의 윤리에 반한다고 생각하는 의사가 대부분. 
걷지 못해 휠체어를 끌고 환자를 입원시킨 후,
항암제를 투여하고,
쇠약해지만 호스로 수액을 공급하고,
배와 가슴에 물이 차면 그 물을 뺀 다음 다시 수액으로 채우고,
몸이 부어서 괴로워하면 의료용 마약으로 잠들게 하고,
사망하면 병원 부속건물인 장례식장으로 옮기는 절차로 이어진다.
이것이 현재 일본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죽음의 시스템이다.

- 자기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죽는 방식이 아니라 죽기까지의 사는 방식을 생각하는 것이다. 즉, 생명의 유한성을 자각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나의 방식을 점검하고 그때마다 방향을 수정해 나가자는 뜻. 그렇게 자신의 삶을 충실히, 훌륭하게 살고 나면 다음과 같은 두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1) 마지막 순간, 많은 일이 있었지만 그리 나쁜 인생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2) 더 이상 후회할 일도 없고, 가족과 친구와의 이별 앞에서도 감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