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지리의 힘

dalai 2023. 6. 18. 08:43

- 아프리카의 경우는 지리가 최대의 장애물이며 따라서 고립의 영향 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면, 유럽은 지역과 지역을 연결해서 근 대 문화를 생성하게 한 평야지대와 일정한 크기의 선박들이 항행할 수 있는 가항하천들의 가치가 특히 돋보이는 곳이다. 아프리카와 유럽 간의 발전의 차이는 <배를 띄울 수 있는 강>들의 유무에서 시작되 었다. 아프리카에는 큰 강들이 많지만 주로 고지대에서 낙하하면서 거대한 폭포를 이루고 게다가 서로 연결되지도 않는다. 이런 조건은 실제로 무언가를 운반하는 교역로로 이용하는 데는 무용지물이다. 반면 유럽의 경우는 라인 강, 다뉴브 강 등이 평지에서 서로 연결되면 서천연 국경 역할을 했고 쉽게 배를 띄울 수 있는 조건은 이 지역 교 역 시스템의 발전을 부추겼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남유럽은 지리적 위치 때문에 서유럽이 누리는 지리적 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하고 있 다. 이로 인해 최근에는 유럽에 불어닥친 재정 위기로 인한 구제금융 과정에서 북쪽의 유럽과 남쪽의 유럽 사이에 이념적 분열과 함께 <지리적 분열> 또한 가시화되고 있다.

- 수세기 동안 중국과 인도 간의 교역은 매우 미미한 수준에 그쳤는데 이 국면이 조만간 바뀔 것 같지는 않다. 물론 현실적인 국경이 티 베트-인도 국경이고 보면 중국이 늘 이 지역을 통제하려고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중국에게는 일종의 지정학적 공포가 있다. 만약 중국이 티베트를 통제하지 못하게 되면 언제고 인도가 나설 것이다. 인도가 티베트 고원의 통제권을 얻으면 중국의 심장부로 밀고 들어갈 수 있는 전초기지를 확보하는 셈이 되는데 이는 곧 중국의 주요 강인 황허, 양쯔, 그 리고 메콩 강의 수원이 있는 티베트의 통제권을 얻는 거나 다름없다. 티베트를 <중국의 급수탑>이라고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미국에 버금가는 물을 사용하지만 인구는 다섯 배나 많은 중국으로 서는 이것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
사실 관건은, 인도가 중국의 강물 공급을 중단시키고 싶은가가 아 니라 과연 인도에게 그럴 능력이 있는가이다. 수세기에 걸쳐 중국은 이런 일만은 절대로 발생하지 못하도록 해왔다. 배우 리처드 기어와 자유티베트운동Free Tibet Campaign은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부당한 점령을 줄곧 규탄해 왔고 이제는 한족의 티베트 정착 정책에 대해서 도 항의하고 있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 티베트 독립운동 단체, 할리우드 스타들과 세계 2위의 경제대국과의 싸움은 그 결과가 불을 보듯 뻔하다.
리처드 기어가 됐든 오바마 대통령이 됐든, 서구인들이 티베트 문 제를 거론하면 중국은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한다. 위험하다거나 체 제 전복을 시도하는 것도 아닌데도 신경질적으로 반응한다. 중국인 들은 티베트 문제를 인권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보기보다는 <지정학 적 안보>의 틀에서 본다. 중국인들은 서구인들이 중국의 안보를 침해 하려 한다고 믿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중국의 안보가 저해된 적은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설사 티베트에서 한족 에 대항하는 봉기가 일어난다고 해도 인구학과 지정학이 티베트 독립에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 예전에는 만주와 내몽골, 신장 지역 주민의 대다수는 만주족과 몽골인, 그리고 위구르족이었다. 그러나 이 세 지역의 대다수도 중국계 한족이 점하고 있거나 적어도 다수에 근접해 가고 있다. 그리고 티베 트라고 예외가 아니다.
이 상황은 한족에 대한 분노로 2008년에 일어난 봉기처럼 자주권 을 주장하는 행동이 앞으로도 이어질 거란 의미를 갖는다. 당시 라싸 에서 중국계 티베트인들에 반발해 일어난 시위에서 상당수 한족의 재산이 방화 및 약탈당했고 21명이 죽고 수백 명이 부상을 당했다. 당 국의 엄격한 탄압은 지속될 것이며, 자유티베트운동 또한 중단되지 않을 것이며, 티베트인들의 고난을 전 세계에 알리려는 승려들의 분신도 끊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한족 또한 끊임없이 몰려올 것이다.
- 막대한 인구의 대다수가 심장부에 몰려 있는 중국은 이들을 분산시킬 곳을 찾고 있는 중이다. 미국인들이 서부로 눈을 돌렸듯이 중국인들도 먼 곳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철마가 유럽 이주민들을 코만치와 나바호족 땅에 실어 날랐듯이, 현대의 철로 만든 수탉(즉 기차)은 한족 을 티베트 땅으로 실어 나르고 있다.
- 예전에 나는 런던 주재 중국 대사를 한 고급 프랑스 식당에서 만난 적이 있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질문에 대한 저우언라이 총리의 답 변으로 많이 인용된 그 유명한 말을 듣게 될 거라고 은근히 예상하고 서 말이다. 당시 닉슨은 이렇게 물었다.
"프랑스 혁명의 영향이 무어라고 보십니까?"
이에 대한 저우언라이의 답은 이랬다.
“그에 대해 얘기하기엔 너무 이른 것 아닌가요?"
아쉽게도 내 예상은 빗나갔지만, 대신 나는 인권이라 부르는 것들 이 중국에 전면적으로 도입되었을 경우 어떻게 폭력과 사망이 만연 하게 된다는 것인지를 묻는 내 질문에 대한 답으로 그에게서 엄중한 훈계를 들어야 했다.
"당신들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문화에서 당신들의 가치가 먹힐 거 라는 생각은 대체 어디서 나온 겁니까?"
- 중국 선박들은 태평양을 향하든 인도양을 향하든, 남중국해를 나서는 순간부터 여전히 난관에 직면한다. 하지만 중국에게 가스와 원유를 수송하는 이 물길이 없다면 중국은 생존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걸프 만의 산유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베트남을 지나가야 한다. 주목할 점은 베트남이 최근 들어 미국에 접근을 시 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미국의 전통적인 우방인 필리핀 근해 도 지나야 한다. 그러고 나면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가 마 주하고 있는 말라카 해협이 나온다. 이 세 나라 또한 외교적, 군사적 으로 미국과 연결돼 있다. 말라카 해협의 길이는 거의 8백 킬로미터 에 달하는데 가장 좁은 곳의 너비가 채 3킬로미터를 넘지 않는다. 따 라서 이곳은 늘 요충지이자 관문으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그리고 중 국은 여전히 여기에 묶여 있는 취약한 입장이다. 말라카 해협 인접국 들, 그리고 중국이 접근하기에 가까운 모든 국가들은 하나같이 중국 의 부상을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들 나 라의 대다수가 중국과 영유권을 놓고 다투고 있는 상황이다.
- 중국은 남중국해의 거의 전 지역은 물론 그 아래를 지나는 것으로 여겨지는 에너지 공급의 소유권도 주장한다. 말레이시아, 대만, 베 트남, 필리핀, 그리고 브루나이까지도 중국과는 물론이고 자기네끼 리도 영유권을 두고 갈등하고 있다. 일례로 필리핀과 중국은 미스치 프 암초를 놓고 날선 공방을 벌이고 있다. 남중국해의 난사군도에 위치한 넓은 암초인 미스치프도 언젠가 제 이름에 맞는 역할을 하게 될 날이 오겠지만 수백 개에 달하는 산호섬 하나하나도, 심지어 물 위 로 불쑥 솟아 있는 바위 하나까지도 외교적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 작은 바위 하나라도 전관수역(연안국이 어업과 자원 등을 발굴할 수 있는 특 권수역)이나 탐사권, 영유권 문제에 관한 잠재적 분쟁의 소지가 될 수 있다.
영유권 다툼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중국은 준설과 간척사업을 병행하면서 분쟁 대상인 일련의 암초들과 산호섬들을 인공섬으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한 예로, 파이어리 크로스 리프는 이름 그대로 단순한 암초였는데 중국이 항만과 활주로를 건설해서 버젓이 난사군도의 한 섬으로 만들어 버렸다. 또 다른 암초에는 아예 포병대를 배치하기도 했다. 새로 건설한 활주로로 전투기를 착륙시킬 수 있게 된 중국은 현재의 영공을 넘어서는 항공통제권까지 확보할 수 있었다. 2015년 여름 미 국방장관 애시 카터는 이런 발언을 했다.
"물속의 바윗덩어리를 비행기 이착륙장으로 만들어 버리는 행동은 주권 행위로 볼 수는 없으며 이는 국제 항공 및 해상 운송의 규제 대 상이다."
이 발언은 중국이 이 지역의 군사 태세를 방어에서 공격과 방어 양 쪽으로 전환하고 있다고 발표한 직후에 나왔다. 이러한 움직임은 규칙 제정자가 되고자 하는 중국의 의도를 강조하고 있지만 인접국들 에게는 당근과 채찍 모두가 될 수 있다.
- 지정학 전문 저술가인 로버트 D. 카플란은 20세기 초반에 카리브 해가 미국의 손에 들어갔듯, 남중국해가 중국의 손아귀에 들어갈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조목조목 설명한다. 미국은 자국의 육상 영토를 공 고히 통합하고 나서 대서양과 태평양을 아우르는 대양 강대국이 되었 다. 그리고 쿠바에서 스페인을 몰아내면서 주변의 해양을 평정했다. 중국 역시 태평양과 인도양을 아우르는 대양 강국이 되고자 한다. 이 목표를 위해 중국은 미얀마,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스리랑카 등지 의 심해 항구에 투자하고 있다. 이들 나라와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 해서 향후 중국 해군이 이곳을 방문하거나 주둔하게 될 경우는 물론 통상 라인을 중국 본토와 연결하는 것까지 염두에 두면서 이곳을 사들이고 있다.
인도양과 벵골 만의 항구들은 중국의 미래를 공고히 다지는 보다 큰 계획의 일부분이다. 중국은 미얀마 서부 해안부터 시작해서 벵골 만을 지나 중국 남서부로 들어가는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을 건설했 다. 이는 에너지 공급량의 거의 80퍼센트가 말라카 해협을 통과하는 것에 불안을 느낀 베이징 정부가 그 의존도를 줄여보려고 고안해낸 방법이다. 중국이 몸이 달아오를 수밖에 없는 사정이 얼마간 이해되는 것은 2010년 미얀마 군사 정권이 조금씩 바깥 세계를 향해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했을 때 이 나라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나라들 가 운데 중국이 끼지 못했다는 점이다. 반면 미국과 일본은 미얀마와 잽 싸게 우호 관계를 수립했고 오바마 대통령과 아베 총리는 미얀마 정 부에 개인적인 호감을 표하기까지 했다. 이들 나라가 미얀마에 영향 을 미칠 수 있다면 중국을 지속적으로 견제하는 데 도움이 된다. 지금 까지 중국은 지구라는 거대한 체스판에서 벌어지는 특별한 게임에서 선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이 미얀마 정부를 신뢰하는 한 워싱턴은 미얀마를 수호하는 한편 언제고 중국을 이곳에서 밀어 낼 수 있다.

- 1803년, 미합중국은 프랑스로부터 뉴올리언스가 있는 루이지애나 지역 전체의 지배권을 사들였다. 이 지역은 멕시코 만에서 시작해서 북서쪽으로 로키 산맥의 미시시피 강 지류들의 상류까지 뻗어 있다. 이 땅의 면적은 오늘날의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그리고 통 일 독일을 합친 넓이와 맞먹는다. 신생 미합중국은 이 땅을 흐르는 미 시시피 강의 유역을 기반으로 번영으로 가는 길을 닦는다.
1천5백만 달러짜리 서명 하나로 1803년에 미국은 루이지애나를 구 입하여 영토를 두 배로 늘렸다. 이는 곧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내륙 수로 수송권을 확보한 셈이었다. 이를 두고 미국의 역사학자 헨리 애덤스는 이렇게 썼다.
"미합중국이 투자 대비 이렇게 많은 것을 얻은 일은 이제껏 없었다.”
거대한 미시시피 유역에는 전 세계 다른 하천들에 비해 훨씬 긴 가항수로들이 많다. 수원이 산악지대에 있지도 않으며, 그토록 광대한 거리를 가로질러 대양으로 가는 길 내내 그만큼 차분하게 흐르는 강 은 그 어디에도 없다. 풍부한 유역 수계의 공급을 받는 미시시피 강은 미니애폴리스 부근에서 발원해서 남쪽으로 약 2,897킬로미터를 흘러 멕시코 만에서 끝난다. 이렇듯 강들은 큰 항구로 이어지며, 수상 기를 이용한 운반은 예나 지금이나 육로운송보다 훨씬 싸게 들어 당 시 한창 상승일로이던 교역을 위한 천연 수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처럼 미국은 지리적으로 전략적 깊이를 확보함과 동시에 방대하 고 비옥한 토지, 그리고 사업을 펼치기에 적합한 대서양 항구들이라 는 대안을 얻었다. 또한 동부 해안을 새 영토와 연결해 주는 동서 루 트를 확보했고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수계는 인구 밀도가 희박한 지 역들을 서로 묶어주면서 단일 통합체를 형성하는 데 일조했다.
- 당시 신생 국가는 거인, 다시 말해 대륙의 강대국이 되고자 하는 의식이 있었다. 미국인들은 점차 서쪽으로 전진하면서도 남쪽을 호시탐탐 엿본 것은 물론 <왕관에 박힌 보석>인 미시시피의 수호에도 신경 쓰는 것을 잊지 않았다.
1814년, 영국은 물러갔고 프랑스는 루이지애나를 포기했다. 이제 스페인 사람들만 내보내면 됐다. 그리고 이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 었다. 스페인은 유럽에서 나폴레옹과 전쟁을 치르느라 이미 지칠 대 로 지쳐 있었다. 미국이 세미놀족을 스페인령인 플로리다까지 밀어 내자 스페인 본국은 머지않아 정착민 물결이 밀려오리라는 것을 감지했다. 1819년, 스페인은 플로리다뿐 아니라 덤으로 꽤 넓은 토지까지 미합중국에 넘겼다.
- 루이지애나 구입은 미국 입장에서는 심장부를 얻은 격이었다. 그런 데 1819년에 맺은 대륙횡단조약도 거의 이에 버금가는 가치를 안겼 다. 스페인은 미국이 현재 캘리포니아와 오리건의 경계인 북위 42도 선 위인 극서부 지역에서 사법권을 행사하는 것을 인정했다. 반면 스 페인은 그 아래인 미국 영토의 서쪽을 지배한다는 계약 내용을 받아 들였다. 그리하여 미합중국은 <태평양>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 즈음 대다수 미국인들은 1819년에 플로리다를 얻은 것을 가장 큰 승리로 여겼지만 당시 국무장관인 존 퀸시 애덤스는 일기장에 이 렇게 기록했다.
"결정적으로 태평양 방향의 경계선을 획득한 것이 우리 역사에 위 대한 시대를 열게 한다."
- 19세기가 지나면서 스페인의 힘은 점점 쇠약해졌지만 여전히 강력한 군대를 보유한 건 사실이었다. 1898년, 미국은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했다. 그리고 군대를 파견해 쿠바, 푸에르토리코, 괌은 물론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까지 손에 넣었다. 이 모든 지역이 유용했지만 특히 괌이야말로 필수적인 전략적 자산이었다. 쿠바 또한 강대국이 지배19세기가 지나면서 스페인의 힘은 점점 쇠약해졌지만 여전히 강력한 군대를 보유한 건 사실이었다. 1898년, 미국은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했다. 그리고 군대를 파견해 쿠바, 푸에르토리코, 괌은 물론 필리 핀에 대한 지배권까지 손에 넣었다. 이 모든 지역이 유용했지만 특히 괌이야말로 필수적인 전략적 자산이었다. 쿠바 또한 강대국이 지배19세기가 지나면서 스페인의 힘은 점점 쇠약해졌지만 여전히 강력한 군대를 보유한 건 사실이었다. 1898년, 미국은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했다. 그리고 군대를 파견해 쿠바, 푸에르토리코, 괌은 물론 필리 핀에 대한 지배권까지 손에 넣었다. 이 모든 지역이 유용했지만 특히 괌이야말로 필수적인 전략적 자산이었다. 쿠바 또한 강대국이 지배한다면 전략적 위협이 될 소지가 있었다.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으로 그 위협은 제거됐다. 그리고 1962년, 소련과의 분쟁에서는 소련이 마지못해 굴복함으로써 다시 한 번 그 위협은 제거됐다. 현재 특별히 쿠바를 지원하는 강대국은 없는 상황 이고, 쿠바 또한 문화적으로나 어쩌면 정치적으로도 점차 미국의 영 향권 아래 다시 들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2014년 말, 미국과 쿠바의 국교 정상화가 선언됐다.)
미국은 신속히 움직였다.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이긴 미국 은 쿠바와 플로리다 해협을 확보함으로써 카리브 해에 성큼 다가 설 수 있었다. 미국은 이에 그치지 않고 하와이의 퍼시픽 아일랜드 를 합병해서 자국의 서부 해안으로의 안전한 접근을 도모했다. 또한 1903년에는 파나마 운하의 배타적인 권한을 보장받는 조약을 체결했 다. 무역 붐이 일어났다.
이 시기야말로 미국에게는 세계무대로 나선 것 이상을 보여주는 시기였다. 전 세계를 향해 무력시위 이상의 것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다.
- 금세기에 치명적인 게임은 향후 중국과 미국, 그리고 그 지역 다른 국가들이 체면을 잃지 않고 서로 분노와 원망의 우물을 깊이 파는 법 없이 위기를 얼마나 잘 관리하느냐에 성패가 달려 있다.
쿠바 미사일 위기는 대체로 미국이 승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런데 덜 알려진 사실은 러시아가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하고 몇 달 뒤 미국도 모스크바가 사정권에 드는 주피터 미사일을 터키에서 철 수했다는 점이다. 이는 곧 양측이 타협했다는 얘기다. 다시 말해 자국 국민들에게는 자기들이 굴복하지 않았다고 내세울 수 있게 한 일종의 절충 행위였던 것이다.
21세기에 태평양에서는 강대국들 간에 이뤄야 할 타협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단기적으로는, 100퍼센트 장담할 수는 없지만, 다 른 나라들에게 분쟁 지역 내로 들어오기 전에 통지할 것을 요구하며 방공식별구역을 선포한 중국과, 일부러 통지하지 않고 비행을 강행 하는 미국 간의 타협 여부가 초기 사례로 부각할 가능성이 높다. 중국 은 방공식별구역을 지정하고 쟁점화하면서 얻은 게 있다. 또 미국은 이를 준수하지 않는 것처럼 보임으로써 얻은 것이 있다. 결국은 기나 긴 게임이 될 것이다.
- 거의 모든 국가들이 복잡한 외교적 퍼즐로 얽혀 있는 이 문제의 지 역에서 핵심 국가들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그리고 싱가포르인 것 같다. 이 세 나라들은 비좁은 말라카 해협에 걸터앉아 있는 형세 다. 날마다 이 해협을 통해 1천2백만 배럴의 원유가 점점 더 목이 마 른 중국과 이 지역 다른 나라들로 향한다. 이 세 나라들이 친미 성향을 버리지 않는 한 미국은 핵심적인 이익을 수호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중국이 정치적으로 이념을 내세우지 않는다는 점이다. 중국은 굳이 공산주의를 전파할 생각이 없다. 냉전시대 러시 아처럼 보다 넓은 땅에 대한 욕망을 불태우지도 않는다. 중국은 자국의 상품들이 전 세계로 전달되는 항로 대부분의 경비를 미국이 담당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미국의 영향력 이 중국에 지나치게 근접하지 않는 선에서의 얘기다.
물론 논쟁의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중국은 때로 민족주의를 국 민의 단결을 공고히 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 래도 양측은 타협점을 찾을 것이다. 다만 서로의 입장을 잘못 해석하 거나 지나친 도박을 걸 경우 사태는 위험해진다.
이 경우에도 발화점은 있다. 미국과 대만이 맺은 조약에 따르면, 중 국이 자국의 23번째 성으로 주장하는 대만을 침공할 경우 미국은 개 입하게 되어 있다. 중국의 대만 침공을 촉발할 임계점은 미국이 대만 을 공식적으로 승인하는 경우나 대만의 독립선언이다. 그러나 아직 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아서 이 지역의 수평선에서 중국군이 쳐들어 오는 장면은 보기 어려울 것 같다.

- 앞서 봤듯이 프랑스는 유럽의 기후와 교역로 그리고 천연 국경선의 수혜를 가장 많이 누리는 최적의 위치를 점한 나라다. 하지만 프랑스 는 현재 독일 땅이 된 북유럽평원의 평야지대로 인해 지리적으로 완 전히 보호받는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실 독일이 단일 국가가 아닐 때 는 이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프랑스는 러시아에서도 꽤 멀고, 몽골 유목민들과도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있으며, 영국과는 해협이 가로막고 있다. 이는 곧 전면적인 공격 시도나 프랑스 전 국토에 대한 점령 시도는 격퇴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실제로 프랑스는 모 스크바 턱밑까지 치고 들어가 세력을 과시할 수 있었을 정도로 유럽 대륙에서는 막강한 나라였다.
그런데, 독일이 통일되고 말았다. 원래 독일은 일종의 개념으로만 존재해 오고 있었다. 그런 상태가 수세기 동안 이어졌다. 즉 10세기에 신성로마제국이 되는 동프랑크 족의 지역이 이후 5백 년 동안 게르만 군소 왕국들이 모여 있어 때로 게르마니아라는 이름으로 불리곤 했던 것이다. 1806년 신성로마제국이 와해된 뒤 1815년 비엔나 의회에서 39개 소규모 주들의 연합체 가 독일 연방이라는 이름으로 모였다. 이는 북독일 연방의 결성으로 이어졌고, 독일의 승전부대가 파리를 점령하면서 보불전쟁이 끝나자 1871년 마침내 독일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프랑스는 지리 적으로는 자신보다 몸집이 크고 인구는 같은, 그러나 산업화에서 훨 씬 앞서서 더 높은 성장을 자랑하는 이웃을 곁에 두게 되었다.
독일의 통일 선언은 프랑스를 무릎 꿇리고 난 직후 파리 베르사 유 궁에서 행해졌다. 이로써 프랑스의 방어선에서 가장 취약한 지 점이었던 북유럽평원이라는 틈을 메우기는 더 어려워졌다. 그로부 터 70년 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런 일이 한 번 더 일어난다. 프랑 스가 전쟁 대신 외교를 통해 동쪽으로부터의 위협을 중립화하려는 시도를 하려 했다가 또 다시 독일에게 당하기 때문이다.
- 독일은 독일대로 항상 프랑스보다 훨씬 심각한 지리적 문제를 겪고 있었다. 북유럽평원의 평야지대는 독일이 발 뻗고 잘 수 없는 이유 두 가지를 안겨주었다. 서쪽에는 통일 강국 프랑스가 오랫동안 버티고 있으며, 동쪽에는 러시아라는 거대한 곰이 웅크리고 있었다. 독일에 게 최악의 상황은 이 둘이 통로인 북유럽평원을 건너 한꺼번에 침공 해오는 것이다. 물론 실제로 이런 일이 발생할지는 알 수 없는 노릇 이지만 이에 대한 공포는 재앙 수준의 결과를 예상한다.
프랑스는 독일을 두려워하고, 독일은 프랑스를 두려워한다. 1907년 프랑스가 러시아, 영국과 손을 잡고 3자동맹을 맺었던 것도 이런 배 경에서였다. 독일이 이 세 나라 모두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당시 영 국 해군은 필요할 경우 독일의 북해와 대서양 접근을 차단할 수 있는 범위를 추가했다. 그래서 독일의 해결책은 또 다시 프랑스를 선제공격하는 것밖에 없었다.
독일이 처한 지리적 위치라는 딜레마와 호전성은 흔히 독일 문제로 알려진 상황을 야기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공포 이후 실제로는 수세 기에 걸친 전쟁을 뒤로하고 유럽이 이에 대한 해답으로 삼은 것은 유 럽 땅에서 유일한 압도적인 세력, 즉 나토 설립을 주도하고 향후 유럽 연합의 태동을 가능케 한 미국이라는 존재를 인정하는 거였다. 전쟁 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러나 미군에 의해 보장받은 안전으로 유럽인 들은 경이로운 실험에 착수했다. 바로 서로를 믿으라는 요구를 실천 하는 것이었다.

- 현재도 영국인에게는 <위대함에 대한 집단적 기억>이 남아 있다. 이 기억에 따르면 세계가 그렇게 되길 원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영국 은 그것을 해야 할 나라들 가운데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생 각은 여전히 많은 영국인들에게 설득력을 지닌다. 영국은 유럽 가운 데 남아 있으면서도 여전히 유럽 바깥에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해결해 야 할 숙제다.
영국을 유럽연합의 바깥쪽으로 자꾸 내모는 두 가지 쟁점은 서로 연결돼 있다. 그것은 바로 <주권>과 <이민자 문제>다. 일부 유럽 통합 회의론자들의 지지를 받는 반反유럽연합 정서는 유럽연합이 정하는 엄청난 분량의 법률과 그 내용에 반발한다. 하지만 회원국들 간의 합 의의 일부이므로 영국도 이를 준수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의 언론은 언론대로 유럽인권보호조약 때문에 강제로 추방할 수 없는 외국인들이 영국에서 저지른 심각한 범죄들을 대서특필한다.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몰려오는 경제적 이민과 난민의 물결 속에서 영국에 오기를 희망하는 이민자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반유럽연 합 정서 또한 더욱 거세지고 있다. 영국인들은 다른 유럽연합 국가들 이 더 많은 이민자들을 영국으로 보내려 한다고 믿고 있다.
이민자들에 대한 편견은 최근 유럽이 겪고 있는 경기 침체로 인해 더욱 깊어지고 있다. 그 영향은 대륙 전체에 걸쳐 우파 정당의 약진 등 범민족주의에 반대하는 일체의 행위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결과 적으로 유럽연합이라는 구조도 약화시킨다.

- 러시아라는 개념이 성립된 시기는 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우 크라이나인 드네프르 강 연안의 도시들과 키예프 공국으로 알려진 동슬라브 부족들의 느슨한 연합 형태가 그 기원이다. 그러나 당시 한 창 제국을 확장해 나가던 몽골인들이 남부와 동부 지역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13세기 무렵이 되자 이들의 공세는 정점에 치달았다. 결국 당시 막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러시아는 모스크바 북동쪽과 그 주변 에 다시 터를 잡았다. 모스크바 대공국으로 알려진 초기 러시아는 방어력이 취약하기 짝이 없었다. 산지는 물론 사막도 없고 변변한 하천도 드물었다. 사방이 허허벌판인데다 남쪽과 동쪽의 스텝 지대를 넘어서면 몽골인들의 땅이었다. 침입자는 맘만 먹으면 언제든 진격해 올 수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에게는 점령할 만한 천연 방어 진지들도 거의 없었다.
최초의 차르인 이반 4세는 <방어로서의 공격> 개념을 실전에 도입한 인물이었다. 일단 내부를 공고히 평정하고 확장한 다음에야 비로소 바깥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이 방침은 멋지게 성공했다. 이반 4세야말로 개인이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이론을 증명하는 데 손색이 없는 인물이었다. 극도의 무자비함과 뛰어난 선견지명이 혼재된 이 인물이 없었다면 러시아 역사는 다른 식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신생국 러시아는 이반의 조부인 이반 대제Ivan the Great 아래서 조 심스레 확장의 발걸음을 내딛었다. 1533년 권좌에 오른 이반 대제는 확장의 속도를 부쩍 높였다. 러시아는 동쪽의 우랄 산맥지대와 남쪽 의 카스피 해, 그리고 북으로는 북극권 한계선까지 잠식해 갔다. 카스 피해에 대한 접근 권한을 획득한 것을 시작으로 흑해까지 손을 뻗었 고, 이윽고는 몽골 제국을 부분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캅카스 산맥을 활용할 수 있기에 이른다. 그 즈음 러시아는 몽골의 황금 군단이든, 오스만 제국이든, 페르시아든, 누가 됐든 장래의 침입자들을 지연시 키려는 목적으로 체첸에 군사 기지를 설치했다.
다소 주춤한 시기도 있었지만 다음 세기에도 러시아의 확장은 멈추 지 않았다. 러시아 군주들은 우랄 산맥 쪽으로 밀어붙이고 시베리아 쪽으로도 파고 들어가더니 마침내는 저 멀리 동쪽 태평양 연안의 모 든 땅을 손에 넣었다.
- 대양으로 바로 접근할 수 있는 <부동항의 부재>는 늘 러시아에게는 아킬레스건이었다. 북유럽평원만큼이나 전략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러시아는 지리적 약점을 지녔지만 그 나마 석유와 천연가스 덕분에 더 약한 나라로의 추락만은 모면했다. 일찍이 1725년에 표트르 1세가 후손들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남긴 이유도 납득이 간다.
"할 수 있다면 콘스탄티노플과 인도로 가까이 접근하라. 누가 되 든 그곳을 통치하는 자야말로 세계의 진정한 통치자가 되리라. 그러 므로 꾸준히 싸움을 도발하라. 터키뿐 아니라 페르시아에서도! 할 수 있는 한 페르시아 만 멀리 침투할 것이며, 할 수 있는 한 인도의 안까 지도 깊숙이 들어가라."
- 러시아에게 세바스토폴은 단 하나밖에 없는 진정한 부동항이다. 그 렇지만 흑해를 나서서 지중해로 진출하려면 1936년 몽트뢰 협정으로 보스포루스 해협의 관리를 위임받은 나토 회원국 터키의 간섭을 받 을 수밖에 없다. 러시아 군함들은 그 해협을 항해할 수는 있지만 제 한된 인원만이 가능하며 분쟁 시에는 이마저도 허용되지 않는다. 혹 시 러시아 군함이 보스포루스를 통과했다 하더라도 지중해에 도달하 려면 에게 해도 건너야 한다. 마찬가지로 대서양에 도달하려면 지브 롤터 해협을 통과해야 한다거나 인도양으로 나가려면 수에즈 운하로 내려가는 것까지 허락받아야 하는 규정이 여전히 유효하다.
- 우크라이나가 벨기에나 미국의 메릴랜드에 버금가는 영토를 잃었는 데도 아무도 도와주러 달려오지 않았다. 우크라이나와 그 이웃 국가 들은 이른바 지리적 진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예컨대 나토에 속해 있지 않다면 모스크바가 가까울 것이요, 워싱턴 D. C.는 한참 멀다는 것이다. 러시아에게 이는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그들은 크림 반도를 잃었을 때 대처할 방도가 없지만, 서방에는 있다.
유럽연합은 러시아에 대해 제한적인 제재만을 가했다. 이 제제가 제 한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독일을 포함한 여러 유럽 국가들이 겨울용 난방연료를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동과 서를 가 로지르는 가스 파이프라인을 열거나 닫는 권한은 크렘린에 있다.
정치적 무기로써 에너지는 시간을 벌게 해주며, 러시아 민족이라는 개념은 향후 러시아가 저지르는 그 어떠한 행동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될 것이다.

- 18세기에 한국이 얻은 <은자의 왕국Hermit Kingdom>이라는 별칭은 수 세기에 걸친 정복과 점령, 약탈 혹은 어디론가 가기 위한 경유지의 대 상이 된 뒤에 이 나라가 스스로 고립을 택한 데서 나온 명칭이다. 만 약 다른 나라나 다른 민족이 북쪽에서 내려오면 일단 압록강을 건넌 뒤 해상까지 진출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천연 장벽은 거의 없다. 반대 로 해상에서 육로로 진입한다 해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이런 배경에 서 몽골이 한반도에 들어왔다 나갔고 이어 명나라, 만주족의 청나라 그리고 일본도 수차례나 침입했다. 한국이 여러 교역로들과 단절하고 홀로 있기를 희망하면서 바깥 세계와 엮이지 않는 편을 택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이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20세기에 들어서 일본이 다시 들어왔고 1910년에는 아예 이 나라를 통째로 합병해 버렸다. 그러 고 나서 일본은 한국 문화 전체를 말살하는 정책을 개시했다. 한국어 사용이 금지됐고 한국 역사를 가르치는 것 또한 금지됐다. 신사참배 도 의무적으로 시행됐다. 일제 강점기는 오늘날까지도 한일 양국의 관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 일본 헌법 2조 9항은 정부가 자위대를 해외에 파병하는 것을 어렵 게 해놓고 있다. 그래서 아베 내각은 9항을 유연하게 해석하면서, 이 제 일본이 이 지역에서 좀 더 대담한 역할을 담당할 필요가 있다는 식 으로 헌법 개정에 회의적인 국민들을 설득하려 한다. 특히 집단 안보 의 한 축으로 동맹을 지원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말이다. (일본의 집권 자민당은 2016년 7월 10일에 실시된 참의원 선거에서 압승함으로써 보통국가, 즉 군사력을 갖고 당당하게 외교 및 군사 활동을 펼칠 수 있는 국가로 갈 수 있도록 헌법을 개정할 수 있는 개헌 발의 가능 의석을 확보했다.)
이런 배경에서 2015년의 일본 방위비는 유례없이 큰 규모로 책정 되었다. 그 금액의 대부분은 해군과 공군의 장비 현대화에 투입되는 데 이 가운데에는 미국산 F-35A 스텔스 전투기 구입도 포함돼 있다. 2015년 봄, 일본 정부는 일명 헬리콥터 수송 구축함이라고 하는 장비를 공개했다. 군사 전문가라면 이내 눈치 챘을 것이다. 이 배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항공모함으로 사용되다가 1945년 항복과 함께 사용이 중지된 당시의 항공모함만큼 덩치가 크다는 사실을. 이 전함 은 고정익 항공기 동체에 날개가 고정되어 있는 항공기) 수송용으로 전용될 수 있다. 하지만 일본 국방장관은 "이것을 항공모함으로 이용할 생각 은 하고 있지 않다."라고 말했다. 이는 곧 오토바이를 사놓고 오토바 이처럼 타지 않을 것이니 자전거라고 우기는 것과 다름없다. 현재 일 본은 항공모함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 일본이 번쩍대는 이런저런 신무기에 돈을 쓰는 행동의 의도는 그것 이 배치되는 지점만 보더라도 명확하다. 열도 주요 부분을 방어하고 있는 오키나와의 군사 시설은 앞으로 더욱 개량될 것이다. 이를 통해 일본은 2013년 중국 정부가 선언한 확대된 방공식별구역과 겹치는 자국의 방공식별구역을 감시하는 데 보다 큰 유연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일본과 중국의 영토 주장이 겹치는 구역에는 현재 일본이 실효적 지배 중이지만 중국 또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는 일명 센카쿠(일본 명) 또는 댜오위다오(중국명) 제도가 있다. 류큐 제도의 일부이기도 한 이 지역이 특히 민감한 것은 적대적인 세력이 일본의 중심부로 접근하려면 이곳을 꼭 지나야 하기 때문이다. 또 이곳은 일본에게는 상당 한 해양 영토를 보장할 뿐 아니라 해저에는 개발 가능한 가스전과 유 전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도 알려졌다. 일본 정부가 필요한 모든 수 단을 동원해서라도 이곳을 붙들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한편 동중국해에서 중국이 선언한 확대된 방공식별구역은 공교롭 게도 중국, 일본, 대만, 그리고 한국까지도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 는 지역과 겹쳐진다. 중국 정부는 이곳을 지나는 어떤 비행 물체도 필 히 신고를 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자위권적 조치에 직면할 것이라 고 공언했다. 하지만 일본, 한국 그리고 미국의 대응은 이 말을 무시 한 채 신고하지 않고 그대로 비행하는 것이다. 현재 중국은 이에 대해 군사적인 대응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정부의 선택 여하에 따라 언제 라도 최후통첩이 떨어질 가능성도 있다.

- 니카라과 대운하는 파나마 운하보다 더 길 뿐 아니라 결정적으로 폭도 더 넓고 수심도 깊어서 아주 덩치가 큰 유조선과 컨테이너 운반선들도 통과할 수 있다. 중국 해군 함정들은 말할 필요도 없다. 또 현 재 파나마 운하가 북에서 남으로 가로지르고 있다면 니카라과 대운 하는 동과 서를 가로지른다. 그런데 운하의 중간부를 위해 니카라과 호수를 파낼 것인데 이로 인해 환경론자들은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 장 큰 청정 담수호가 오염될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회의론자들은 파나마 운하를 남쪽으로 수백 킬로미터 정도 확장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굳이 니카라과 대운하가 필요한지 묻는다. 하지만 중국은 더 큰 선박들이 운항할 수 있는 이 운하의 관리권을 쥐 어서 오로지 중국만이 감당할 수 있는 규모의 경제를 확보할 것이다. 그렇다면 니카라과 운하의 향후 수익성에 관한 질문이 나온다. 수익 을 내려면 앞으로도 수십 년은 걸릴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당장의 상업 적 이익보다 중국의 국가 이익이 걸린 문제로 보인다.

- 100년 전만 해도 아르헨티나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10개 나라 가운데 하나였다. 프랑스나 이탈리아보다도 앞섰다. 그러나 산업 다각화의 실패, 계층화되고 불공정한 사회, 허술한 교육 제도, 연 이은 쿠데타, 게다가 지난 30여 년간의 민주 정부 시대에 주먹구구식 으로 남발된 경제 정책 등으로 아르헨티나의 위상은 급속히 추락하 고 말았다.
브라질에는 이 고상한 체하는 이웃을 비꼬는 농담이 있다. 브라질 사람들은 아르헨티나 사람들을 두고 〈그러한 세련됨이 그처럼 엄청난 난장판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일한 국민>이라고 한다. 아르헨티나는 이를 바로잡아야 할 필요가 있다. 죽은 소만이 그들을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 죽은 소 혹은 바카 무에르타는 이 나라에 퍼져 있는 셰일층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이 지역에는 아르헨티나가 150년 동안이나 쓰고도 남 을 에너지에 수출까지 할 수 있는 양이 매장돼 있다. 아르헨티나 중부 지역인 파타고니아, 즉 칠레와 맞대고 있는 서쪽 국경지대에 위치하 고 있는 이 지역은 벨기에만한 면적으로 나라로 치면 상대적으로 작 겠지만 셰일층의 규모로는 꽤 큰 편이다. 현재까지는 잘 진행되고 있 다. 만약 셰일에서 생산되는 에너지에 대한 반감만 없다면 말이다. 단 조건이 있다. 일단 셰일에서 가스와 기름을 얻기 위해서는 막대한 규 모의 해외 투자가 필요한데 아르헨티나는 해외 투자자들에게 우호적 인 국가로 인식되고 있지 않다.

- 사실 세계는 아프리카의 지리에 대해 그릇된 인식을 갖고 있다. 아 프리카가 얼마나 큰 대륙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도 많지 않다. 이 는 우리 대부분이 메르카토르 Mercator 방식의 지도를 쓰는 데서 비롯 됐다. 이 도법은 평평한 면에 지구를 그리다 보니 고위도로 갈수록 면 적과 형상이 왜곡된다. 따라서 실제로 아프리카는 일반적으로 지도 에 그려진 것보다 훨씬 길다. 이는 희망봉을 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 한 일인지, 또 교역에서 수에즈 운하라는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지 새 삼 깨닫게 해준다. 희망봉을 도는 일은 기념비적인 업적이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게 되자 서유럽에서 인도까지의 해상 여행은 9,656킬로 미터로 단축되었다.
먼저 세계지도를 보면서 머릿속으로 알래스카를 캘리포니아에 갖 다 붙여보자. 이어 미국을 완전히 뒤집어 보면 일부 들쑥날쑥한 부분 들이 있겠지만 아프리카 대륙과 대충 들어맞는 것을 보게 된다. 하지만 실제 아프리카는 미국보다 3배는 크다. 다시 표준 메르카토르 지도를 보자. 그린란드가 아프리카와 같은 크기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아프리카는 그린란드보다 14배는 더 크다. 미국, 그린란드, 인도, 중 국, 스페인, 프랑스, 독일, 그리고 영국까지 다 합쳐도 아프리카 대륙 에 모두 집어넣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덤으로 동유럽 대부분을 집어넣 을 만큼의 공간도 남는다. 우리는 아프리카가 거대한 대륙이라는 것을 알지만 정작 지도상에서는 아프리카가 얼마나 큰지 제대로 알 수 없다.
- 인류의 기원이 아프리카에서 시작됐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우리 모 두는 아프리카인인 셈이다. 그런데 기원전 8천년 무렵부터 인종의 법 칙이 바뀌기 시작했다. 중동과 지중해 주변을 떠돌던 어떤 이들이 방 랑벽을 버리고 정착하더니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이윽고 마을과 도 시를 이루며 모여 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아프리카 남쪽으로 돌아가 보면 재배할 식물도 별로 없고 동물들조차 많지 않았다. 땅의 상당 부분은 정글과 늪, 사막 혹은 가 파른 고원지대다. 이런 지형에서는 밀이나 쌀을 재배하기도, 또 양을 치기도 적합하지 않다. 게다가 아프리카의 코뿔소나 가젤, 기린 등은 짐을 나르는 짐승이 되기를 완강히 거부한다. 재레드 다이아몬드 역시 인상적인 표현으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만약 아프리카의 군대가 농가에서 키운 기린 고기를 먹고 커다란 코뿔소에 올라탄 기병대의 지원을 받으면서 유럽으로 밀고 들어와 그곳에서 양고기를 먹으며 시원찮은 말 등에 올라탄 병사들을 쓸어 버렸다면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그러나 아프리카는 일찍 출발했지만 다른 것을 발전시키는 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려서 오늘날까지도 과거에 붙들려 있는 실정이다. 더 운 기후가 초래한 말라리아와 황열병 같은 악성 질병들은 밀집된 생 활환경과 열악한 보건시설로 인해 현재는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나 타나고 있다. 물론 인도아대륙과 남아메리카 같은 다른 지역들도 사 정이 비슷하지만, 특히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는 후천성 면역 결 핍증 같은 질병의 타격이 큰데다 특히 모기와 체체파리의 만연으로 인한 문제도 심각하다.
- 아프리카 대륙의 강들 또한 문제다. 대개 고지대에서 발원한 강들이 가파르게 꺾여 내려오기 때문에 배를 띄우는 것조차 쉽지 않다. 일례로 아프리카에서 네 번째로 긴 장대한 잠베지 강을 보자. 길이만도 장장 2735킬로미터에 달하는 이 강을 마주한 관광객들은 하얗게 부 서지는 급류와 빅토리아 폭포에 매료될 게 분명하지만 정작 이 강은 교역로로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잠베지 강은 여섯 개 나라를 지나는데 모잠비크에서 인도양과 합쳐질 때는 무려 해발 1천4백여 미터의 높이에서 흘러내린다. 이 강의 일부에서는 얕은 배를 띄울 수 는 있지만 이 부분마저도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아 물자 수송은 제한 돼 있다.
- 다뉴브 강이나 라인 강을 갖고 있는 유럽과는 달리 아프리카 하천 들의 이러한 결점은 지역 간의 교류와 교역의 발전을 저해했다. 이런 약점은 경제 발전에 영향을 미쳤고 대규모 교역 지역의 형성을 막았 다. 니제르 강, 콩고 강, 잠베지 강, 나일 강을 비롯한 대규모 하천들 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단절은 인간 요소라고 다 르지 않다. 러시아, 중국, 미국처럼 거대한 지역에서도 단일 언어를 쓰는 것이 교역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른다. 그런데 아프리카 에는 족히 수천 개가 넘는 언어들이 있으며 비슷한 규모의 지역을 지 배할 만한 공통 문화도 자라지 못했다. 이에 비해 유럽은 소통할 수 있는 공통어를 가질 만큼의 작은 크기인데다 상호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지형이었다.

- 콩고민주공화국이 차지하고 있는 영토는 아홉 개 나라들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이 나라들 또한 하나같이 이곳에 근심거리를 더하다 보 니 콩고 내전이 아프리카판 세계대전>으로 알려진 것도 과언이 아니 다. 이 나라의 남쪽에는 앙골라가, 북쪽에는 콩고공화국과 중앙아프 리카공화국이, 동쪽에는 우간다, 르완다, 부룬디, 탄자니아, 그리고 잠비아가 자리 잡고 있다. 콩고 내전의 기원은 수십 년을 거슬러 올라 간다. 그 중에는 1994년 르완다를 강타한 재앙으로 발발한 내전과 그 후폭풍으로 서부 지역이 전쟁에 휩쓸렸던 최악의 시기도 있었다.
르완다 대학살 이후에 살아남은 투치족과 비교적 온건한 후투족은 투치족이 이끄는 정부를 설립했다. 그러자 후투족 민병대의 살인 기 계들인 인테라함웨interahamwe는 콩고민주공화국 동부로 도주해 오 면서 국경 지역에서 불법 침입을 자행했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국 경 근처에 거주하는 투치족을 살해할 목적으로 콩고민주공화국군 일부 분파에 가담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부룬디와 에리트레아의 지원 을 받는 르완다와 우간다 군대가 그 지역으로 밀고 들어왔다. 콩고민 주공화국의 반정부 민병대와 손을 잡은 이들은 인테라함웨를 공격했 고 나중에는 아예 콩고민주공화국 정부를 전복시켜 버렸다. 그리고 그들 또한 이 나라의 천연 부존자원의 상당 부분을 통제하면서 휴대 폰과 컴퓨터 칩을 만드는 데 쓰이는 콜탄의 수십 톤을 특히 르완다 쪽 으로 실어 날랐다. 그러나 콩고민주공화국 정부군은 쉽사리 항복하 지 않았고 바야흐로 앙골라, 나미비아, 짐바브웨까지 개입한 상태에 서 전투는 이어졌다. 결국 이 땅은 20여 개가 넘는 파벌이 싸우는 거 대한 전장으로 변했다.
이 전쟁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줄잡아 10만 명의 인명을 앗아갔고 질병과 굶주림으로 6백만 명을 죽음으로 내몬 결과를 낳았다. 특히 유엔의 추산에 따르면 희생자들의 거의 절반이 5세 이하의 어린이들 이라고 한다.
최근 들어 최악의 전투는 잦아들었지만 이 나라는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최악의 분쟁의 본산이면서 언제 또 발발할지 모를 전면전을 방 지하기 위해 유엔의 전면적인 평화 유지 임무가 여전히 요구되는 지 역이기도 하다. 콩고민주공화국은 한 번도 하나였던 적이 없었기 때 문이다. 그들이 실질적으로 평화롭게 함께할 수 있는 길을 찾을 때까 지는 단지 분열 상태를 유지하는 수밖에 없다. 유럽 식민주의자들은 닭도 없이 달걀을 만들어 냈다. 그로 인해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서 논 리적 부조리가 반복되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은 이 지역에 지속적으 로 출몰하고 있다.

- 나일 강이 없으면 아무도 없다. 이집트가 거대한 나라이기는 하나 8천4백만 명에 달하는 인구 대다수가 나일 강에서 불과 반경 십여 킬 로미터 이내에 살고 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으로만 보면 이집 트는 세계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나라 가운데 하나인 셈이다. 대다수 유럽인들이 아직 움막에 살고 있을 때 이미 이집트는 민족 국가를 확립했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이집트는 어디까지나 지역 강국에 지나지 않았다. 국토의 3면이 사막의 보호를 받고 있으 니 지중해의 강대국이 될 수 있었을 테지만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 다. 바로 나무가 귀하다는 점이다. 대다수 역사에서 나무가 귀한 나라 치고 세력을 과시할 만한 강한 해군력을 구축한 나라는 없었다. 물론 이집트에 해군이 없었던 적은 없었다. 이집트는 선박을 건조하기 위 해 많은 돈을 지불하고 레바논에서 삼나무를 수입해 오기도 했다. 하 지만 결코 대양해군이 돼 보지는 못했다.
- 오늘날의 이집트는 미국의 군사 원조 덕에 아랍 세계에서 가장 강 력한 국방력을 갖춘 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이집트의 군사력은 사막 과 바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맺은 평화 조약의 제약을 받고 있는 형편 이다. 특히 시나이 반도에서 툭하면 터지는 이슬람 봉기를 상대하고, 매일 전 세계 교역량의 8퍼센트가 드나드는 수에즈 운하를 지키면서 8천4백만 명에 달하는 인구를 날마다 먹여 살리느라 고군분투하는 것만으로도 이집트는 여전히 뉴스거리임에 분명하다. 전 세계 석유의 2.5퍼센트가 매일 이 수에즈 운하 길을 통과한다. 혹시라도 이 운하가 폐쇄된다면 유럽은 15일, 미국은 10일의 수송 시간을 더 잡아야 한다.

- 중국의 접근은 많은 아프리카 정부들에게는 매력적인 제안이 아닐 수 없다. 베이징 정부나 중국의 대형 기업들은 인권이라는 미묘한 문제에는 입도 뻥긋하지 않을 뿐 아니라 경제 개혁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일부 아프리카 지도자들에게 국부를 착복하는 행위를 멈추라는 요구도 하지 않는다. 일례로 중국이 수단의 가장 큰 교역 상대국임을 감안하면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도 지속적으로 수단의 편을 들고 국제사법재판소가 오마르 알 바시르 대통령에 대한 체포 영 장을 발부했음에도 그를 지원하고 있는 배경에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하지만 이런 행태에 대한 서구의 비판에도 베이징 정부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동안 아프리카에서 서구가 행한 일들 의 역사를 볼 때 이는 단지 중국의 사업을 방해하려는 또 다른 권력게임이자 위선적 행태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아프리카 지도자들을 훈계하는 것은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세계 경제의 가혹한 현실과 이슬람주의의 위협으로 인해 시대에 뒤떨어진 행동이 돼버린 것이다. 2015년 7월, 오바마 대통령이 케냐와 에티오피아를 방문했을 때 케 냐에 만연한 동성애 혐오증과 부패 그리고 에티오피아의 인권 상황 을 비판했다 하여 서구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실상 그 비판은 형식에 그친 것이었다. 두 나라 모두 소말리아에서 싸우고 있는 아프리카연합African Union의 중추 세력인데다 유엔 또한 이슬람 테러와의 전쟁에서 이 두 나라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필요 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라고 아프리카 대륙에서 비즈니스 측면 에서 자신들이 중국에 뒤처지는 입장임을 왜 모르겠는가.
중국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석유, 광물, 귀금속, 그리고 시장이다. 이는 정부 대 정부 관계로는 공평하지만, 대형 공사에 투입되는 지역 주민들과 중국인 인력 간에 긴장이 증가하는 현상 또한 나타날 것이 다. 그리고 이 상황은 베이징 정부로 하여금 그 지역 정세에 그만큼 더 많이 관여하게 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소규모나마 여러 나라에서 군사력이 요구될 수도 있다.

- 아프리카에서 중국의 최대 교역국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이다. 이 두 나라의 우호적인 정치 및 경제 협력의 역사는 꽤 길다. 오늘날 국영, 민영을 망라한 수백 개의 중국 기업들이 더반, 요하네스버그, 프리토 리아, 케이프타운 그리고 포트엘리자베스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경제는 나이지리아에 이어 아프리카 대륙에 서 두 번째로 큰 규모다. 경제(앙골라보다 세 배나 큼), 군사, 인구(5천3백 만명) 등 어느 모로 보나 이 나라가 남쪽의 강국인 것은 자명하다. 남 아프리카공화국이 여타의 아프리카 국가들에 비해 훨씬 빠른 발전을 이룬 데는 대륙의 최남단에 위치하여 양 대양으로 진출하기 수월한 위치도 한몫했다. 또 금과 은, 석탄의 매장량이 풍부하며 대규모 식량생산이 가능한 기후와 토양을 지닌 덕도 있다.
대륙의 맨 끝단에 위치한데다 연안 평지가 가파르게 높아지는 바람 에 모기가 번식하기 힘든 조건이 돼준 것도 남아프리카공화국이 말 라리아의 저주에서 고통받지 않는 몇 안 되는 아프리카 국가 가운데 하나가 된 이유였다. 이 조건 덕분에 유럽 식민주의자들은 말라리아 가 맹위를 떨치는 열대 지역보다 훨씬 멀리 빠르게 내륙 깊숙한 곳에 정착해 소규모 산업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 산업이 모태가 되어 오늘날 남아프리카공화국 경제의 주요 부문들을 성장시켰다.
남아프리카의 대부분 지역에게 바깥 세계와 사업을 한다는 것은 프 리토리아나 블룸폰테인, 케이프타운과의 거래를 의미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자국의 천연자원과 지리적 위치를 이용해서 인접국들을 수송 시스템에 편입시켰다. 이는 곧 이 나라에 양방향 철도가 있으며 이스트런던, 케이프타운, 포트엘리자베스, 더반의 항만들로부터 쭉 쭉 뻗어나가는 컨베이어벨트와 같은 도로망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 다. 이 수송망은 짐바브웨, 보츠와나, 잠비아, 말라위 그리고 탄자니 아를 통해 북쪽으로 뻗어 올라가서 콩고민주공화국의 카탕가 지역과 동쪽으로는 모잠비크까지 뻗어나간다. 중국이 건설한 카탕가에서 앙 골라 해안에 이르는 새 철도가 콩고민주공화국의 교통량을 흡수해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이 독점하다시피 하던 기존 수송 시스템에 어느 정 도 도전이 되겠지만 그래도 남아프리카공화국이 갖고 있는 이점은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 유럽 식민주의는 아랍인들을 민족 국가의 형태로 묶어서 그들의 통 치자들이 자신의 출신 부족과 자신이 속한 이슬람 종파에게만 호의 를 베풀게 하는 유산을 남겼다. 이들 독재자들은 유럽인들이 그어둔 인위적인 선들 사이의 영토 전체를 자신들이 통치할 수 있는 위임장 을 보장받기 위해 국가라는 구조를 이용했다. 그 선들이 역사적으로 올바른지 혹은 어느 날 느닷없이 함께 묶여져 버린 서로 다른 부족들 과 종교들에게 공정한지 등은 아예 무시한 채 말이다.
그 결과가 야기한 분쟁과 혼란을 이라크만큼 적절하게 보여주는 사 례가 또 있을까. 시아파 가운데서도 신심이 더 깊은 이들은 수니파가 이끄는 정부가 시아파의 성지인 나자프와 그들의 순교자인 알리와 후세인이 묻혔다고 전해지는 카르발라를 지배 통치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이러한 집단 정서의 근원은 수세기도 넘는 옛 시절로 올라간다. 이라크 국민으로 불린 고작 수십 년의 세월이 그 기나긴 감정을 희석시킬 순 없었다.
오스만 제국의 통치자들이었던 투르크인들은 쿠르드족이 장악하고 있는 암벽 투성이 산악지대가 서서히 줄어들면서 바그다드로 향하는 평지가 되고 현재 시리아가 되는 서쪽에서는 거주민들 대다수가 수 니파 아랍인들인 것을 보았다. 그러다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라는 거대한 강들이 나타나더니 뒤이어 습지대인 샤트알아랍 강(수로)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이라크 남동부 바스라 시에서는 대다수가 시아파 인 아랍인들을 더 많이 보게 되었다. 투르크인들은 이런 상황에 따라 이라크 지역을 모술, 바그다드, 바스라라는 세 개의 행정 구역으로 나 누어 다스렸다.
보다 오래전인 고대에도 이 지역들은 이 구분과 대체로 부합했는데 당시는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수메르라는 명칭으로 알려졌다. 페르 시아는 그곳을 통치하면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분할했으며 후일 우마이야 왕조도 비슷한 방식을 따랐다. 그 런데 영국인들은 같은 지역을 보면서 원래 분할돼 있던 세 곳을 자기 들 멋대로 하나로 합쳐 버렸다. 이는 어디까지나 기독교도들이 삼위 일체를 통해서나 풀 수 있는 논리적 불가능성이지, 이라크에서는 <거룩하지 않은 난장판>으로 귀결됐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