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학의 힘
- 해럴드 스프라우트Harold Sprout와 마가렛 스프라우트Margaret Sprout는 마한이 1900년 팽창적 러시아의 위협에 관해 주장한 것은 매킨더의 유라시아 하트랜드 heartland 개념을 예견한 것이라고 주장 했다. 마한은 바다를 지배하는 해양 국가이면서 동시에 대륙을 지배 하는 대륙 국가가 될 수는 없다고 말한다. 대륙 국가는 대륙 내에서 상시 발생하는 이웃 국가들과의 국경 분쟁 등으로 해양 지배를 위한 노력을 하기 힘들다는 이유였다. 마한의 이론은 시파워가 랜드파워에 비해 우월하다는 시파워 우위론이다.
미국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제국주의 경쟁 무대에 성공적으로 뛰어든다. 이는 단기간에 구축한 시파워 없이는 불가능했다. 제1차 세 계대전 시 미국은 당시 독일에 고전하던 영국, 프랑스 등을 지원함으 로써 아메리카를 벗어나 유라시아에 개입하기 시작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시파워 대국인 영국의 헤게모니를 대체했다. 미국의 전직 외교관 워렌 짐머만 Warren Zimmerman은 그의 책 《최초의 대승: 어떻게 5명의 미국인이 미국을 세계 대국으로 만들었는가? First Great Triumph: How Five Americans Made Their Country a World Power?)||ROZ을 세계 대국으로 만든 다섯 명 중 한 명으로 마한을 꼽았다. 미 해군대장 출신인 제임스 스타브리디스James Stavridis는 그의 저서 《시파워:세계 대양의 역사와 지정학sea Power: The History and Geopolitics of the World's Oceans)에서 미국이 국제적인 해양 전략을 구상하는 데 마한의 관점은 여전히 불변의 가치를 지닌다고 강조한다. 미 해군은 마한의 공적을 기려 역대 4척의 군함을 마한호로 명명했다.
- 매킨더는 러시아와 독일이 동맹을 맺으면 세계 패권을 차지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방대한 대륙의 자원에 '바다에 접한 육지'가 더해지게 되면 대륙과 바다에서 모두 우월한 강대국을 만들어내기에 충분한 지 정학적 조건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매킨더는 만약 일본에게 조직화된 중국이 러시아를 정복한다면 세계의 자유를 위협하는 황화yellow peril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대한 대륙의 자원뿐 아니라 해양에 접한 대륙의 전면까지 확보하기 때문이다. 이는 중심 지역을 지배한 러시아도 누리지 못한 강점이다. 당시 중국의 국력은 쇠약해졌고 일본이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발돋 움했기 때문에 매킨더는 일본이 주도적으로 조직화한 중국이 러시아 를 제압할 가능성이 있다고 상상한 것이다. 당시 국력이나 세력 관계 로 보아 매킨더는 그렇게 분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 이 지리적 조건만으로도 세계 제국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 점 은 지금 큰 의미를 갖는다.
또 그는 이미 유럽에서 가장 큰 영토를 보유하고 전략적으로 중심 적 위치를 점유한 독일이 막강한 해군력까지 확보해 영국의 시파워를 견제할 것으로 보았다. 미국 또한 꾸준히 성장해 강대국의 반열에 올랐다고 보았다.
매킨더는 지리적 결정론은 피했다. 특정 시기에 이루어진 실제 정치 세력 간의 균형은 한편으로는 경제적·전략적인 지리 조건에 의해 결정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경쟁국의 상대적 인구수, 국민들의 활력, 물질적 설비, 조직력 등에 따라 결정된다고 보았다. 지리, 역사, 제국에 대한 관점이 어우러진 1904년의 이 논문은 국 제 문제에 관한 도발적 성찰을 보여준다. 지리가 갖는 정치적 의미를 간파한 매킨더는 이 논문에서 주요한 잠재적 위협을 제시함으로써 영 국의 국제적 위상을 지켜내려고 했다. 첫 번째 위협은 앞으로 랜드파 워에게 유리한 흐름이 전개되어 세계적 위상을 가진 영국에게 심각한 도전이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두 번째는 랜드파워 러시아의 부상이었다. 매킨더는 독일이 유럽에서 전략적 위상을 가진 것을 인정하면서도 독일은 작은 위협으로 보고 러시아를 주요 위협으로 간주했다. 따라서 영국은 러시아를 봉쇄하여 러시아가 페르시아만 연안에 접근 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고 인식했다. 당시 영국이 장악하고 있던 해 상 무역로를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영국에게 주요한 위협인 러시아와 독일이라는 두 랜드파워가 동맹을 맺는 시나리오도 고려했다. 매킨더는 러시아 단독으로 혹은 러시아와 독일이 동맹을 맺는 경우 세계 제국이 출현할 확률이 더 높아진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를 경계했고 독일 자체는 우려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이 동맹이 결성된다면 독일에 적대적인 프랑스는 해외의 다른 나라와 동맹할 것 이며 프랑스, 이탈리아, 이집트, 인도, 한반도 등이 러시아-독일 동맹 에 맞서는 교두보가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여기에서 한반도를 랜드 파워를 견제하기 위한 핵심적 교두보 중 하나로 인식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한반도의 향후 운명과도 직결되기 때문이다. 시파워 국가의 해군이 교두보 국가들의 육군을 지원하면 랜드파워 중심 국가들 역시 육지에 병력을 배치할 수밖에 없고 그 결과 그들은 해군력 강화에 집 중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랜드파워 봉쇄 정책을 의미하는 데 이는 향후 지정학이나 안보 전략에 중대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 타타르 유목민은 흉년이 들 때마 다 유럽이나 중국 농경 지역을 침공했다. 5세기에는 훈족의 아틸라 대 왕이 헝가리를 침공했다. 그들은 헝가리에서 서북쪽, 서쪽, 서남쪽으로 진공했다. 그로 인해 서북쪽에서 게르만족이 이동하게 됐고 앵글 족과 색슨족은 바다를 건너 브리튼섬에 정착한다. 서쪽으로는 골 gaul 지역까지 진격하는데 거기에서 프랑크족, 고트족, 로마의 속주 등이 연합하여 훈족을 격퇴한다. 이때의 연합이 프랑스의 모체가 된다. 아 틸라는 서남쪽으로는 밀란까지 진격해 파도바, 아퀼레이아 같은 로마 도시들을 파괴했는데 거기서 도망친 피난민들이 바다 옆 늪지에 세운 도시가 베네치아이다. 하트랜드로부터 이런 강력한 공격을 받자 해안 사람들이 대응하는 과정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형성되고 해양 도시 베네치아가 생겨난 것이다. 이런 과정이 유럽을 만들었다. 유럽에는 기 마인들이 서쪽으로 달려오는 걸 막아낼 장애물이 없었다. 훈족의 침 공은 몇 년 후 그쳤는데 이는 맨파워가 그리 강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 이다.
하트랜드에서 유럽으로 열린 통로와 달리 하트랜드와 아시아 동부, 동남부 사이에는 강력한 장애물이 있다. 바로 세계의 지붕인 티베트이다. 티베트는 중국과 인도로 가는 육로를 가로막아서 두 나라의 서북쪽 변경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럼에도 인도와 중국으로 가는 좁고 힘든 길을 통해 하트랜드로부터 계속 침공이 있었고 그 결과 인도의 델리, 중국의 베이징, 시안이 생겨났다.
- 하우스호퍼는 세계를 세 개의 큰 범지역으로 나누었다. 1941년 무렵 그는 미국이 주도하는 범아메리카, 독일이 주도하는 범유럽, 일 본이 주도하는 범아시아로 세 개의 범지역을 제안한다. 독일이 소련 을 침공하기 전이다. 범유럽 경계는 소련 국경에서 끝난다. 하우스호 퍼는 동유럽의 실질적 경계를 페이푸스호에서 드네스트르강 하류로 설정했다. 여기엔 지중해, 중동, 아프리카 전체가 포함되며 이 지역을 표현하기 위해 유라프리카 Eurafica 라는 용어가 사용됐다. 이 범지역은 자급자족이 가능하다. 물리적으로도 서로 분리되어 쉽게 방어할 수 있다. 이 범지역들 간에는 세력균형이 이루어질 수 있 다. 미국은 자신의 범지역에서 중심이 된다. 미국의 먼로주의가 이를 표현한다. 소련은 범지역 구도에서 제외됐는데 이는 네 번째 독자적 범지역을 의미한다. 하우스호퍼는 항상 소련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 길 원했다. 범지역 구상 초기 버전에서는 범러시아 지역을 따로 설정 해 중동 일부를 포함하고 인도양까지 포함시킨다. 그러나 1941년 버 전에서는 하트랜드 소련의 전 지역이 자원과 방어 가능성 면에서 다 른 범지역과 동등한 위상을 갖는 것으로 해석한다. 하우스호퍼의 범지역 개념은 세계를 네 개의 블록으로 나누어 그 블록들이 상호 견제하며 공존하는 구도라는 특징을 갖는다. 미국 주 도의 나프타 NAFTA가 범지역 개념에 근접하다. 그러나 이런 지리적 공존 개념은 나치의 수직적 구조와 맞지 않았다. 유태인과 볼셰비키 (공산 주의)는 제3제국 나치의 최대 적이었다. 게다가 소련은 중부유럽과 너무 가까워 위협적이었다.
다음으로 하우스호퍼는 매킨더의 랜드파워 대 시파워라는 개념을 수용했다. 그는 매킨더의 1904년 논문을 가장 위대한 지리적 세계관이라고 여겼다. 유라시아- 아프리카 대륙은 우선 그 넓이가 세계 최대 인 데다 인구가 가장 많고 가장 풍요로웠다. 이 지배적인 랜드파워는 자급자족을 실현할 수 있다. 그 대륙의 서쪽, 남쪽 그리고 동쪽 주위에는 바다에 접근할 수 있는 시파워 국가가 존재하는데 초승달 모양 으로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자 '유라시아 대륙 블록'을 구축하겠다는 하우스호퍼의 꿈은 물거품이 됐다. 히틀러는 베를린과 도 쿄 사이의 육교를 태워버린 것이다. 헤스가 사라지고 나치가 소련을 침공한 이후 나치 체제에서 하우스호퍼가 설 자리는 거의 없어졌다.
하우스호퍼에게 지정학은 예술이고 정교하게 운용되어야 했다. 자동차 경주가 아니었다. 하후스호퍼는 지리를 친구로 삼아야지 적으 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그가 보기에 로마제국은 지리를 우 군으로 만들었지만 나폴레옹은 적으로 만들었다. 히틀러 역시 나폴레옹과 마찬가지로 지리를 적으로 만들어버렸다. 독일은 악몽 같은 양면전쟁에 말려들었다. 처음에는 성공하는 듯 보였지만 1941~1942년 겨울을 지나면서 역시나 지리는 가장 매서운 적이 됐다. 나폴레옹이 125년 전에 이미 겪었듯이 말이다.
이 상황을 더 악화시킨 사건이 바로 일본의 진주만 공격이었다. 이로 인해 미국이 본격적으로 참전하면서 나치는 더 곤경에 처하게 된다. 일본의 도발은 하우스호퍼의 조언과는 상반된 것이었다. 하우스호퍼는 일본이 만주를 점령하자 만주가 식민지로는 지리적으로 부적합하다고 지적하면서 남쪽으로 진출해야 한다고 권했다. 그런 그가 보기에 1937년 중국 본토를 침공한 것은 실수였다. 일본의 전력을 엄청나게 소모할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본이 중국으로 깊이 들 어가면 익사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나치는 결국 미국과 소련을 동시에 적으로 돌려 패배했다. 독일은 지리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지정학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한 것이다. 1
- 하우스호퍼는 10월 3일 뉘른베르크 법정에 세워져 정식으로 심문을 받았다. 하지만 그때쯤 군 검찰 측은 그가 주요 전범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하우스호퍼가 나치의 침략 전쟁에 직접 가담했는지 여부를 입증하기가 곤란했다. 하우스호퍼의 공개적인 공격 행위가 있었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없고 무엇보다 저술 활동이 형사 범죄에 해 당한다고 보기가 어려웠다. 자칫 하우스호퍼에 대한 재판이 마녀사냥 으로 비칠 염려도 있었다. 게다가 10월 4일 하우스호퍼는 다시 심장 발작으로 쓰러졌다. 담당 판사인 로버트 잭슨 Robert Jackson은 하우스 호퍼의 건강을 고려해 재판을 중지한다. 월시도 이에 동의한다.
- 하우스호퍼는 월쉬에게 자신이 히틀러나 헤스에게 미친 영향력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고 변명했다. 히틀러나 헤스가 그의 아이디어를 이해할 만한 지적 능력을 결여했다고까지 암시했다. 헤스의 장점은 지 능이 아니라 좋은 성격과 마음이라고까지 했다. 그는 히틀러를 제대 로 교육받지 못한 사람으로 묘사했다. 자신이 전달한 지정학 원리를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고 했다. 히틀러가 그저 잘 이해하지도 못한 몇 가지 캐치워드에만 집중했다고 말했다. 월시는 영국에서 송환된 헤스 와 하우스호프를 조우시킨다. 헤스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처럼 연기 해 하우스호퍼를 알아보지 못하는 척한다. 제자이자 25년지기 친구와 의 이 만남은 그에게 너무나 고통스러웠고 그의 건강을 더 악화시켰다.
- 이미 1945년 7월 6일 슈타우펜베르크가 주도한 히틀러 암살미수사건에 연루되어 검거됐던 장남 알브레히트가 게슈타포에 의해 총살된 후였다.
1946년 3월 10일 하우스호퍼는 부인 마르타와 함께 독약을 마시 고 자살한다. 그는 어떤 장례식도, 어떤 종교의식, 부고, 묘비명, 묘 의 표지도 필요 없다고 유언한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나는 잊히 고, 잊히고 싶다”였다. 하우스호퍼와 함께 지정학도 지하에 매장됐다. 지정학이라는 단어 자체가 나치를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하우스호퍼가 나치에 긴밀히 관련했다는 점에서 지정학은 이념적으로 파산했고 도덕적으로도 의심을 벗어나기 어렵게 됐다. 지정학은 철저히 터부시 됐다. 역설적이게도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유태인이자 닉슨 대통령 시설 국무장관을 지냈던 헨리 키신저가 지정학이라는 단어를 다시 살려낸다. 하우스호퍼와 동향 출신인 키신저가 지하에 묻혀 있던 지정학을 다시 지상으로 끌어낸 것이다.
- 강대국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효과적인 중앙집권적 지배인데 이는 중앙과 주변을 연결하는 효율적 교통 시스템이 존재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스파이크먼은 잉카, 페르시아, 로마, 프랑스, 중국, 러시아가 어떻게 도로망과 운하를 만들어 그들의 제국을 통합했는지 설명 한다. 최근에는 철도나 항공이 더 광대한 지역의 효과적인 통합을 가 능하도록 했다고 말한다. 그는 논문을 쓸 당시를 기준으로 50년 후쯤 세계의 4대 강대국은 미국, 소련, 중국, 인도일 것이라고 예측했다.
스파이크먼은 국토 크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위치라고 말한다. 하 지만 위치의 중요성은 교통수단, 교통 루트, 군사기술의 변화 그리고 세계 파워 중심의 이동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위치의 의미는 지리 적·역사적 맥락에서 파악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세계의 파워 중심이 처음에는 중동에서 에게해로, 그다음에 는 지중해로, 이어서 서유럽으로, 그 이후에는 대서양으로 이동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1938년 당시에는 4개의 세력권, 즉 미국의 아메 리카, 일본의 동아시아, 소련의 하트랜드 유라시아, 유럽의 대서양과 인도양이 파워의 중심이라고 설명한다. 스파이크먼은 태평양이 핵심 적 무역 통로로 부상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태평양 유역이 대서양과 경쟁할 수 있고 두 대양의 상대적 위상은 태 평양에 유리하게 이동 중이라고 했다. 스파이크먼은 미국은 대서양과 태평양 유역에 직접 접근이 가능해 세계에서 위치상 가장 혜택받은 국가라고 결론짓는다.
스파이크먼은 아무리 국가 지도자들이 유능해도 국가는 지리를 피할 수 없다고 강조한다. 국가의 대외 전략은 지리를 직시해야 한다. 국가는 지리를 유능하게 다루거나 무능하게 다루거나 혹은 변경할 수 는 있지만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 스파이크먼은 유라시아 둘레의 해상을 '해양 하이웨이.maritime highway of the world'로 묘사했다. 여기에는 발트해, 북해, 서유럽의 연 안해, 지중해, 홍해, 페르시아만, 인도양 그리고 동아시아와 인도차이 나의 연안해들이 포함된다. 그는 하트랜드와 해양 하이웨이 사이의 육지를 큰 동심 버퍼존great concentric buffer zone 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에는 유럽, 페르시아, 중동, 서남아시아, 중국, 인도차이나 그리고 동 시베리아가 포함된다. 스파이크먼은 중동 페르시아만-서남아시아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을 지적했는데 여기에는 유라시아의 큰 유전이 있고 하트랜드로 통하는 육상 통로가 있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미국 의 파워 위상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아주 위험해졌는데 독일과 일본 이 유럽과 아시아에서 세력균형을 깨려고 하기 때문이다. 스파이크먼은 독일과 일본이 승전하면 미국은 막대한 전쟁 능력을 갖춘 두 거대 제국에 둘러싸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스파이크먼은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서반구를 방어하기 위해 바 다 뒤로 후퇴할 수 없다고 역설한다. 바다는 현대의 기술과 항행 및 통신 기술 발전으로 인해 더 이상 방어벽이 아니라 고속도로이기 때 문이다. 그는 서반구만을 방어하는 것은 절대 방어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구세계가 분열되어 있고 세력균형을 이루고 있다면 외부 군사 력이 그 세력 관계에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는 대서양과 태평 양에서 세력균형을 이루는 것이 신세계의 독립과 미국의 파워를 유지 하는 데 있어 절대적 조건이라고 강조한다. 반대로 구세계가 통일되 어 있다면 신세계는 포위되고 신세계의 능력이 부족한 경우 구세계에 굴복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스파이크먼은 미국의 고립주의가 대서양과 태평양이라는 거대한 장애물, 풍부한 자원, 서반구의 범아메리카주의에 기인한다고 보았 다. 그는 미국의 고립주의는 더 이상 대안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통합 된 동반구의 공격에 남미는 방어할 능력이 없고 북미는 방어가 가능 할지라도 경제적 고립을 피하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스파이크먼은 유라시아의 구세계는 신세계의 면적보다 2.5배 넓고 7배의 인구를 보유한다고 지적한다. 두 세계의 잠재적 파워가 갖는 근원적 차이이다. 미국이 신세계에서 패권적 지위를 차지한 것은 유라시아 대륙의 국가들이 결합해 협력할 수 없었고 유라시아 내부의 세력균형으로 인해 미국에 대항할 만한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 제1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은 승전했지만 평화를 잃었다. 스파이크먼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이 유럽이나 아시아에서 패배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미국이 유럽과 아시아에 개입해 패권적 파워 에 대항하는 것은 미국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보았다. 미국이 유럽과 아시아의 세력균형에 지속적으로 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결론 부분에서 스파이크먼은 전쟁의 종료는 파워 투쟁의 종말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독일과 일본의 잠재적 파워를 완전히 제거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는 우랄에서 북해까지 차지한 러시아는 북해부터 우랄산맥까지 차지한 독일과 같다고 예언적으로 경고한다. 즉 지리적으로 확장된 독일만큼 지리적으로 확장된 러시아도 위험하 다는 것이다. 비록 당시 나치 독일이 적국이고 소련은 동맹국이었지만 지리적 현실은 종전 후 소련이 잠재적 적국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따라서 독일이 패전해도 그 군사력을 완전히 제거하지 말고 유지해 장차 소련과 대항할 경우 독일의 군사력을 이용해야한다는 주장한다.
- 마찬가지로 일본 역시 패배했다고 해서 군사력을 완전히 제거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이는 서태평양을 중국이나 러시아에게 넘 겨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영국이 일본을 보호했듯이 중국이나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미국이 일본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 본은 제1차 세계대전 후 유럽 강국들이 아시아에서 후퇴하자 그 기회 를 이용해 동아시아 최강국이 됐다. 스파이크먼은 제1차 세계대전 승 리로 기존의 영일동맹이 미국 안보에 위협이 됐다고 지적한다. 지리 적으로 이 동맹은 미국을 포위하는 것이고 두 나라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시파워가 대폭 강화되어 유럽, 아시아에서 견제받지 않는 상 태였다. 그래서 1921년 워싱턴군축회담 시 미국은 전제 조건으로 두 나라 동맹 종식을 요구해 이를 관철한다. 당시에는 견제받지 않는 파 워인 일본을 약화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 후 동아 시아에서 상대적으로 파워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는 중국과 러시아 의 견제를 위해 적국 일본의 전력을 유지하자는 스파이크먼의 주장은 극히 냉철한 전략적 계산의 결과이다.
- 스파이크먼은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제 질서는 과거와 다르지 않 을 것이라고 인식한다. 국제사회는 기본적으로 동일한 파워 패턴을 따라 계속 움직일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전후 미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유럽과 아시아에서의 세력균형이 계속 필요하다고 말한다. 스파이크먼은 《세계 정치에서 미국의 전략으로 학계뿐만 아니라 대중적으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 직후 출간된 이 책은 시기적으로도 매우 적절했다. 이 책은 1942년 올해의 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미국인들에게 국제정치를 교육하는 데 큰 효과가 있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폭풍 같은 비난도 받는다. 이상적 자유주의 진영으로부터 혐오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많은 미국 학자들은 특권적 파워가 국제 질서를 가능케 하는 주요 요소라는 스 파이크먼의 이론에 기겁을 했다. 자유주의자들은 비미국적인 잔학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해석했다. 스파이크먼이 무도덕적 혹은 비도덕적 이며 미국의 가치에는 관심이 없다면서 그를 비난했다. 프러시아 군 국주의 사상과 다를 게 없다고도 했다. 래디스 크리스토프Ladis Kristof 는 스파이크먼을 미국의 하우스호퍼'라고 혹평했다.
- 《평화의 지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매킨더의 지정학에 대한 분석과 비판이다. 스파이크먼은 매킨더가 랜드파워와 시파워의 관 계를 연구한 최초의 학자라고 평가한다. 스파이크먼은 매킨더의 하트 랜드 개념을 수용했다. 하지만 그는 매킨더가 하트랜드의 잠재적 파 워를 과대평가했다고 생각했다. 세계 정치의 핵심 지역은 하트랜드가 아니라 하트랜드에 인접한 해안 지역, 즉 매킨더가 내측 초승달 지역 이라고 불렀던 지역으로 스파이크먼은 이를 '림랜드rimland' 라고 부른 다. 가장자리 땅이라는 뜻이다. 스파이크먼 이론의 핵심은 이 림랜드 개념이다.
매킨더는 신세계가 구세계의 위성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지만 스파이크먼은 대양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점을 들어 신세계를 독립된 세계로 인정한다. 그러나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는 하나의 거대한 대륙이며 랜드파워에 의해 통일이 가능하다고 본 점은 매킨더와 일치한다.
매킨더가 하트랜드를 중시한 것은 육상 교통수단이 해상 교통수단과 경쟁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한 데다가 스텝 지대의 잠재적 경제력이 높아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시아 전역에 농업력과 공업력이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만약 인도, 중국이 공업 발 전으로 군사력을 강화하면 영국 시파워의 보호가 불필요해지고 러시 아는 우랄산맥 서쪽에 남게 되어 동·남·서남쪽 연안부에 대해 압도 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 스파이크먼은 림랜드를 이렇게 묘사한다. 유라시아의 림랜드는 중간 지역인데 하트랜드와 연안해 사이에 위치한다. 이는 시파워와 랜드파워의 분쟁 시 방대한 완충지대로 기능한다. 바다와 육지 양방 향으로 향하는 이 지대는 양쪽으로 진출할 수도 있고 동시에 양쪽을 방어해야 한다. 림랜드에는 러시아 서쪽, 유럽 대륙, 북아프리카, 중 동, 남아시아, 서남아시아, 동아시아 지역이 포함되며 세계 인구 대다. 수가 거주한다. 또한 이 림랜드는 대부분의 위대한 문명, 종교, 제국 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강대국들의 전략적 경쟁은 대부분 림랜드에서 발생했다.
스파이크먼은 림랜드가 지닌 방대한 잠재적 파워에 주목한다. 잠 재적 파워는 인구와 생산력이 좌우한다. 림랜드에 중국, 인도, 유럽 대륙이 포함된 점을 고려하면 림랜드 전체가 연합하거나 하나의 제국이 출현할 경우 가장 가공할 만한 파워를 가질 것으로 보인다. 반면 림랜드에 미국, 영국, 일본, 러시아가 포함되지 않은 점을 고려하면 당시의 생산력에 비해 인구 비중이 높고 군사력도 상대적으로 열세이다. 하지만 이 나라들은 영국, 일본 등 연안 해안 섬나라들과 결합해 하트랜드보다 더 강한 경제력과 맨파워를 가지고 있고 랜드파워와 시파워를 동시에 갖추고 있다.
- 스파이크먼은 미국 안보에 가장 큰 위협은 하나의 강대국이 유라시아 림랜드 지역을 지배하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래서 “림랜드를 지배하는 자가 유라시아를 지배하고, 유라시아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 를 지배한다”라고 역설했다.
스파이크먼은 제2차 세계대전의 전투 지역인 유럽, 중동, 아시아 의 림랜드 지역이 전후 세계 정치에서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지역 이 될 것이라고 지적한다. 세계의 안보, 특히 서반구의 안보에 결정적 변수는 평화 시 이 지역의 파워 관계라고 말한다. 림랜드 국가들이 반 미를 기치로 연합하는 것이 두려워 '림랜드 분열 전략을 외치는 미국 의 정치학자와 군사학자도 있는데 바로 스파이크먼의 주장을 따른 것 이다.
스파이크먼은 이제 에어파워 없이는 시파워를 효율적으로 행사하기 어렵다고 인식한다. 그는 지상의 공군 기지가 항공모함보다 더 낫다고 여겼다. 따라서 구세계 맞은편에 공군 기지를 확보해야 한다. 스파이크먼은 구세계에서 북해, 유럽지중해, 아시아지중해 그리고 한반도가 포함된 동해가 이 범주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그 역시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 제2차 세계대전 후 소련이 세계 패권의 도전자로 등장한 것은 세계의 전후 파워 구조가 스파이크먼의 림랜드 이론보다는 매킨더의 하트랜드 이론에 더 가깝다는 것을 확인시켜주었다. 미국은 소련의 하트랜드 파워를 이기기 위해 림랜드의 주요 강국 그리고 연안해 섬나 라인 영국, 일본과 동맹을 구축했다. 이후 하트랜드 파워 소련이 몰락 하자 미국의 지정학적 패권에 도전자가 없었는데 최근 림랜드 파워 중국이 미국의 패권에 새롭게 도전하고 있다. 그와 함께 스파이크먼의 림랜드 이론도 다시 조명을 받게 됐다. 스파이크먼이 권고했듯이 미국은 여전히 유럽과 중동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세력균형에 적극 적으로 관여하고 있다. 림랜드에서 지정학적 다원성을 유지하는 것은 여전히 미국의 이익에 있어 핵심적 관건이다.
- 당초 트루먼 대통령은 1950년 4월 7일에 1차 제출된 NSC-68을 승인하지 않았다. 소련이 핵보유국이 된 후에도 트루먼 대통령은 군사비 지출을 억제하려 했다. 그 후 두 달 동안 보고서는 거의 진전되지 않았다. 그런데 1950년 6월 25일 갑자기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그 영향으로 NSC-68의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됐다. 한국전쟁 발발 시 국 방장관 루이스 존슨Louis Johnson의 첫 질문은 주로 소련의 역할이 무 엇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 미 대사관은 북한의 한국 침공이 동남 아시아의 전반적 공산화 작전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했다. 트루먼은 만약 한국을 상실하면 소련은 계속 다른 나라를 침략해 차 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백악관과 국무부는 한국전쟁을 이용해 NSC-68 승인을 위한 우 호적 여론 조성에 나섰다. 한편으로는 고립주의자를 설득하고 다른 편으로는 선제적 공격을 불사해야 한다는 강경 반공주의자를 달래야 했다. 1950년 9월 30일 국가안전보장회의는 NSC-68을 최종 승인했다. 이는 미국 대외 전략의 중대한 분수령이었다. NSC-68은 미국의 외교정책이 소련을 포함한 모든 공산권 국가들에 대한 포괄적 봉쇄전략으로 전환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 전략은 이후로도 지속됐다. 1950년 1월 수소폭탄 개발 결정에 더해 6월에 발발한 한국전 쟁은 미국의 군비 확장을 급속히 촉진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국방 예산은 대폭 증가했다. 단지 한국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공산주의를 배격하기 위해서다. 그 국방 예산은 이후 수십 년 동안 다시는 축소되지 않았다.
- 키신저는 “나의 접근은 전략적이고 지정학적이었다. 나는 사건들을 서로 연관시켜 세계의 어느 곳에 인센티브를 제공하거나 압력을 가해 다른 곳에 영향을 미치려고 했다”라고 말한다. 키신저의 지정학적 사고가 가장 극적으로 빛을 발한 것은 미중 관계 정상화이다. 1969년 3월 중국과 소련이 우수리강에서 군사적 충돌을 했다. 이후 중소 관계는 얼어붙었다. 소련은 영토 야심이 있는데 반해 미국은 그렇지 않다고 중국은 확신했다. 미국 역시 중국과 관계를 개선하면 소련의 야심 도 견제하고 소련의 영향력도 제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소련과 중국이 경쟁적으로 미국과 우호적 관계를 맺고 싶어 하도록 유도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게 전략적으로 유리했다. 키신저는 “지정학적으로 소련이 중국을 지배하거나 혹은 중국이 소련 쪽으로 기우는 것은 미국의 이익에 반한다” 라고 말한다.
한편 미국이 겨냥한 또 다른 외교적 목표는 베트남이었다. 장기간 지속되어 피로감이 심해진 베트남전쟁에서 빠져나올 기회를 포착하 려는 미국에게 베트남의 후원국이던 소련과 중국에 대한 외교적 지렛 대를 확보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했다. 미국이 중국과 소련 중 어느 한 나라와 진전된 관계를 맺으면 베트남은 소외감을 느낄 것이고 미국으로서는 베트남 종전 협상을 유리하게 전개할 수 있었다. 더구나 중국과 관계 개선을 통해 중국이 소련을 견제한다면 미국은 비교적 명예롭게 베트남을 떠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 해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미국으로서는 제한적으로라도 중국이 소련을 견제해줄 수 있다면 베트남전쟁에서 발을 뺄 수 있었던 것이다. 미중 관계 개선은 닉슨과 마오쩌둥 모두에게 어마어마한 정치적 리스크가 있었다. 하지만 키신저의 전략적 통찰과 닉슨의 결단은 새로운 역사를 가능케 했다. 키신저는 미중 양국 지도자들은 처음으로 이념적 시각이 아니라 지정학적 시각으로 서로를 보게 됐다”라고 증언한다. 중미 관계 개선은 냉전 시대에 가장 큰 지정학적 충격이었다. 미국과 중국이 연대해 소련을 견제하는 구도가 성립된 것이다. 소련으로서는 크나큰 전략적 손실이었고 미국으로서는 엄청난 수확이었다. 미국의 핵무기 감축 협상 제안에 대해 줄곧 부정적이던 소련은 닉슨이 중국 방문을 선언하자 그제야 그 제안에 응한다. 키신저는 미국에는 전후 세 가지 전략적 전통이 있다고 지적한다. 첫째는 외교를 선악의 대결로 보는 이상주의적 전통이고, 둘째는 문 제가 생길 때마다 그때그때 해결하는 실용적 전통이고, 셋째는 국제 적 이슈를 법률적 사건으로 취급하는 법률주의적 전통이다. 여기에 지정학적 전통은 부재했다. 그는 이 점을 비판하며 마한의 지정학이 미국에 기여한 바를 언급하면서 미국에도 지정학적 전통이 존재한다. 고 지적했다. 지정학적 전통을 살리려는 의도였다. 그는 소련의 팽창 주의를 저지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지만 미국의 봉쇄 정책이 지나치게 군사적이고 과도하게 이념적이라고 인식했다. 그보다는 오히려 정치 적 세력균형을 이루는 게 바람직했다. 키신저의 사고는 마한, 매킨더, 스파이크먼의 사고와 상통한다. 키신저는 날로 다극화되는 세계에서 세력균형을 확보하는 것이 전략적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키신저는 지정학을 미국의 자유주의적 이상주의 정치에 대항하기 위한 분석 방법이자 이념적인 반공주의의 대안으로서 제시한 것이다.
키신저의 영향으로 미국은 지정학적 관점에서 글로벌 전략을 검토하게 됐고 지정학이라는 단어 자체가 대중화됐다.
- 미국의 패권은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효과적으로 유라시아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하느냐에 달려 있다. 유라시아는 지구에서 가장 큰 대륙으로 지정학적 핵심이다. 유라시아를 지배하면 자동으로 아프 리카도 지배하게 된다. 서반구와 오세아니아는 지정학적으로 세계 중심 대륙의 주변부에 불과하다. 세계 인구의 약 75퍼센트가 유라시아 에 살고 재산과 자산 등 세계 대부분의 물리적 부가 이곳에 있다. 유라시아는 세계 GNP의 60퍼센트 그리고 세계 에너지 자원의 4분의 3을 차지한다. 전체적으로 유라시아의 파워는 미국을 압도한다. 하지만 미국에게는 다행히도 유라시아는 너무 커서 정치적으로 하나가 되기 어렵다. 앞으로 지구상 가장 중요한 경기장인 유라시아에서 미국의 라이벌이 등장할 것이다. 전략적으로 적극적인 플레이어는 러시아, 중국, 인도, 프랑스, 독일이다. 영국, 일본, 인도네시아는 아니다. 우크 라이나, 아제르바이잔, 한국, 터키, 이란은 중요한 지정학적 축이다.
직접적 무력 사용은 이전보다 제약이 있다. 핵무기로 인해 도구나 위협으로써 전쟁을 사용할 필요가 줄어들었다. 경제적 상호의존성 때문에 경제적 위협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도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 그래서 미국은 교묘한 공작, 외교, 동맹 결성, 회유, 정치적 자산의 치밀한 배치 등을 이용해 유라시아 체스판에서 전략적으로 파워를 행 사해야 한다.
미국에게 유럽은 유라시아 대륙의 지정학적 교두보이다. 서유럽 과 중부유럽은 크게 보아 미국의 보호국이다. 현재 서유럽은 문제투성이다. 편안하지만 사회적으로 불안하고 산만한 사회여서 큰 비전이 없다. 유럽의 미래에 대한 프랑스의 구상은 한편으로는 독일을 묶어 두면서 동시에 점진적으로 유럽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는 것 이다.
미군 주둔으로 안전을 확보한 독일은 자유로워진 중부유럽 국가들을 유럽에 동화시킬 수 있다. 최종적으로는 중부유럽을 유럽연합과 나토에 포함시키려 할 것이다. 영국은 확대된 유럽을 선호하는데 그래야만 유럽 통합을 저지할 수단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유럽연합의 확대로 독일의 역할이 증대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더 작은 통합을 선호한다. 이제 강력하고 정치적으로 단합된 유럽은 출현하기 어렵다. 유럽 여러 나라에는 국민국가를 원하는 깊고 깊은 역사적 뿌리가 있다. 나토 없이는 유럽은 취약하고 즉시 정치적으로 분열될 것이다. 유럽연합과 나토의 틀 안에서 프랑스-독일-폴란드 간의 협력 이 강화되어야 하고 이는 확대된 유럽의 안전보장에 핵심 사안이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유럽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포용할 것이다.
- 한국은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축으로 미국과 중국이 분쟁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한국의 미래는 미일 관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미군의 일방적 철수는 새로운 전쟁을 초래할 수 있고 주일 미군 철수로 이어질 것이다. 일본은 미군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고 신속히 재무장할 것이고 이는 지역 내 큰 불안 요소가 될 것이다. 통일 한국 에 미군이 계속 주둔한다면 중국은 자신을 겨누는 것으로 인식할 것 이다. 중국은 미군이 주둔하지 않는 통일 한국에게 중국과 일본 사이 의 비동맹 완충국이 되어야 한다고 요구할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 대 한 적대감으로 한국은 중국에게 기울 것이다. 당분간은 분단된 한국 이 중국의 이익에 부합한다. 미국과 일본도 한반도의 현상 유지를 선호한다.
- 주한 미군과 주일 미군이 현 수준에서 감소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미국은 한국과 긴밀한 유대로 일본을 보호하고 그럼으로써 일본이 독자적인 군사 대국이 되는 걸 저지할 수 있다. 미군의 한국 주둔은 매우 중요하다. 주한 미군이 없다면 현재와 같은 미일 군사 관계가 계속 유지될 수 없다. 한국의 통일은 미군이 한국에 계속 주둔해야 하는 근거를 흔들 것이다. 통일 한국은 미군의 보호가 필요 없을 수 있 기 때문이다. 주한 미군의 철수를 노리고서 중국이 주도적으로 한국 통일을 촉진할 수도 있다. 한국이 통일되거나 혹은 중국 쪽에 경사되 면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역할에 중대한 변화가 초래되고 일본의 역할 도 변하게 될 것이다. 중미 관계 여하에 따라 한미일 3국의 안보 관계도 중대한 영향을 받을 것이다.
- 미국은 현재 유라시아에서 지배적 위치에 있다. 어느 나라도 군사, 경제, 기술, 문화 측면에서 미국의 지위에 도전하지 못한다. 미국 패권이 종식되는 것은 미국이 유라시아에서 철수하거나 성공적 라이 벌이 갑자기 등장할 때이다. 하지만 이는 국제적인 혼란을 조성할 것 이다.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이 무너지면 세계는 무정부 상태에 빠질 것이다. 역사상 최초로 한 국가가 글로벌 파워가 되고 비유라시아 국 가가 글로벌 패권국이 됐다. 하지만 미국은 미국의 파워에 한계가 있으며 점차 파워가 미치는 범위도 축소될 것이라는 인식을 해야 한다. 미국이 글로벌 파워를 건설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시간은 짧을 것이 다. 민주주의 체제는 제국주의와 맞지 않는다. 미국의 글로벌 패권을 위협할 지역 대국이 출현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게 최우선 과제이다.
- 브레진스키는 《그랜드 체스판》에서 미국의 일극 패권 체제가 들어선 이후의 글로벌 정세를 분석하고 미국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전략적 지침을 제공했다. 유라시아에 미국의 패권에 도전할 만한 국 가나 세력이 출현하지 못하도록 관리하는 게 미국의 목표라는 주장이 다. 이는 매킨더와 스파이크먼의 지정학과 궤를 같이한다. 브레진스 키 역시 한국을 동아시아에서 미국 패권 유지에 핵심적 역할을 하는 지정학적 축으로 인식했다. 브레진스키의 인식은 현재 미국의 외교 안보 전략가들의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현재 미국은 브레진스키 가 이 책에서 말한 미국의 전략적 지침을 따르지 않고 있다. 대표적으로 그가 가장 우려했던 중국-러시아 - 이란의 협력 구도가 실현된 것 이 그 방증이다.
- 2025년경 미국이 패권적 지위를 상실한 세계는 중국이 패권 국가로 부상하기보다는 혼란스러운 상태에 빠질 것이다. 민주주의 대신 권위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종교 등에 기반해 안보 전략을 택하는 국가가 늘어날 것이다.
독일과 이탈리아는 경제적 이익 때문에 러시아에 더 가까이 접 근할 수 있고 프랑스와 불안한 중부유럽은 더 긴밀한 유럽연합을 선 호할 것이다. 영국은 유럽 대륙 내에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움직 일 것이다. 터키는 과거 오토만제국 지역에서, 브라질은 남미에서 파 워를 증대하려 할 것이다. 중국은 국가 주도의 시장주의를 추진하는 민족주의적 권위주의 체제이다. 중국은 역사적 자신감을 갖고 더 공세적인 민족주의를 지향한다.
- 러시아, 인도, 일본 어느 나라도 중국이 미국의 자리를 대체하는 걸 용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러시아는 중국의 급속한 발전을 두려워 한다. 러시아, 인도, 일본 사이의 비공식적 반중국 연합은 중국에 심 각한 지정학적 위협이 될 것이다. 미국과 달리 중국은 전략적 포위를 당할 위험에 처한다. 아시아에서는 중국의 팽창주의에 대해 경계하는 목소리가 커질 것이다. 중국에 대항하는 국가들은 미국에 도움을 청 할 것이다. 중국은 남중국해, 동중국해에서 미국의 접근을 저지하는 능력을 키울 것이다. 다오위다오(센카쿠열도), 남사군도, 서사군도 등에 서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 중국이 글로벌 패권국으로 부상하 는 데에는 많은 장애물이 있다. 중국은 아직 향후 수십 년간 세계에서 미국의 역할을 승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미국의 급속한 쇠락은 글로벌 위기를 유발할 것이고 이는 중국에게도 불리하다. 중국의 부 상은 다른 지역 라이벌들과의 경쟁 속에서 기존 국제경제 질서의 안 정에 기반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일본, 인도, 러시아, 유럽 국가들은 이미 미국의 쇠락이 가져올 잠 재적 영향을 계산하고 있다. 일본은 중국을 두려워해 아마 유럽과 가까이하려 할 것이다. 인도와 일본의 협력도 예상된다. 군사적으로 미 국에 의존해오던 일본은 중국이 주도하는 질서를 수용하든지 아니면 인도와 협력해 대항해야 한다. 러시아는 과거 소련 구성 국가들에 눈독을 들일 것이다.
- 미국이 초강대국인 시대는 끝났다. 새로운 군사기술의 발전으로 다른 국가들도 미국에 대항할 수 있게 됐다. 미국의 군사력이 상대적 으로 약해지면서 글로벌 리더로서의 역할은 끝나고 그 결과 세계적 혼란이 뒤따를 것이다. 따라서 두 잠재적 경쟁자 중 적어도 하나와 연 합해 지역적으로나 세계적으로 안정을 추구해야 하고 가장 위험한 국 가에 대항해야 한다. 현재 가장 위험한 국가는 러시아이지만 장기적 으로는 중국이다. 향후 20년이 지나면 새로운 질서가 출현할 것이다.
이 논문은 브레진스키가 미국의 입장에서 국제 질서에 관해 전략적 관점을 담은 마지막 주요 글이다. 경쟁국인 중국이나 러시아 중 하나와 연합해서 안정을 구축해야 한다는 그의 조언은 지정학적 사고의 핵심이다. 그러나 현재 미국의 정책은 브레진스키의 조언과는 거리가 멀다.
브레진스키의 체스 게임은 여기서 멈춘다. 1997년 브레진스키는 유라시아 대륙을 거대한 체스판으로 보고 미국이 드디어 이 체스판을 지배하게 됐다고 선언했으나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후 그는 유라시아는 더 이상 어느 한 대국이 지배할 수 있는 체스판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일극unipolar 시대에서 다극 multipolar 시대로 이전한 것이다. 유라시아는 체스보다 훨씬 더 많은 경우의 수를 고려하며 전략적 사고 를 해야 하는 바둑판이 됐다. 거대한 바둑판인 유라시아를 뒤로 하고 2017년 5월 26일 브레진스키는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다.
- 현실적 지리 공간에서 러시아의 잠재적 가능성이 부각되고 있다. 북극해 항로 개척으로 일어날 세계적 규모의 지각변동이 바로 그것이다. 콜럼버스가 연 대항해시대는 인류 역사에서 최대의 지정학적 변화를 일으킨 마지막 사건이었다. 교통 노선이 변화한 크기가 사상 최대 였기 때문이다. 시파워의 관점에서 보면 북극해는 접근할 수 없는 곳 이었다. 이 전제가 무너진 것은 냉전 직후 시작된 북극권 쟁탈전이다. 알렉산더 세베르스키는 에어파워의 관점에서 지정학적 논의를 시작한 인물이다. 러시아 출신의 미국인으로 전 조종사이자 기업인이다. 그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시작되자 이 양국 간 최단 거리를 잇는 북극해 상공을 결정적인 영역(The Area of Decision 이라고 명명하고 그 중요성을 알렸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미국 디즈니가 만화영화를 제작했다. 그러나 북극권은 기본적으로 인간이 살 수 없는 불모지였다. 북극권 은 대륙 간 탄도 미사일과 잠수함의 통로라는 군사적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북극해가 최근 큰 주목을 끌게 됐다. 두 가지 현상의 출 현 때문이다. 하나는 해저유전 굴착 기술의 발전으로 자원을 채취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러시아는 북극해에 있는 석유와 천연 가스 등 해저 자원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 세계의 미발굴 가스 중 약 30퍼센트가 매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 하나는 지구온난화로 북극해 얼음이 녹으면서 새로운 무역 루트가 출현했다는 것이다. 아직은 얼음이 녹는 여름 동안만이긴 하지만 본격화될 가능성이 높다. 이 새로운 교역로의 출현은 지정학적으로 큰 가능성을 내포한다. 북극해 항로는 3개의 루트가 있다. 러시아 쪽 동북 항로, 캐나다 쪽 서북 항로 그리고 북극점 근처를 가장 빨리 통과하는 항로이다. 제3의 루트는 중국이 개 척을 노리고 있다고 한다. 현재 가장 많이 활용되고 있는 동북 항로를 사용하면 한국에서 유럽까지 거리가 중동의 수에즈운하 주변 경로와 비교해서 30~40퍼센트 정도 줄어든다고 한다. 연료는 20퍼센트 정 도 감소한다. 실제로 여러 나라에서 시험 운행을 시작하고 있다. 북극 해 루트를 통해 오일이나 가스를 운송할 경우 고비용의 파이프라인을 건설할 필요도 줄어든다. 이 경로의 또 한 가지 장점은 해적이 출현하 고 치안이 나쁜 중동-동남아 항로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낮은 기온과 나쁜 기후만 극복하면 짧은 거리, 양호한 치안이라는 장점이 두드러진다. 북극해 항로가 활성화되면 말라카해협의 비중은 낮아진다. 말라카해협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한 미국 시파워의 중요성도 감 소함은 물론이다.
2030년 무렵이면 북극해는 여름에 많은 부분의 얼음이 녹는다. 2025년 무렵 교통량은 10배 증가해 8천만 톤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 다. 2018년 푸틴은 북극해를 진정으로 글로벌하고 경쟁적인 교통 동 맥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중국은 러시아와 그 밖의 국가 사이에 들어서서 이권을 얻을 수 있는지 살피고 있다. 하트랜드 점유자이자 최대의 랜드파워 러시아에게 북극해 항로와 북극해 자원이 더해지면 미래에 새로운 지정학적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 일본 정부와 군부는 1944년 후반에 이미 패전이 불가피하다고 예측했다. 1944년 일본 외무상 시게미츠 마모루重光는 소련이 영미에 대항해 동아시아를 억압에서 해방시켜주는 것이 일본의 범아시아주 의에 부합한다고 발언한다. 일본인을 배척하는 이민정책으로 인해 미국에 대한 이미지가 안 좋았던 데 반해 러시아인은 당시 일본에서 친 근한 이미지였다. 전쟁 전 일본에게 제정 러시아 및 소련은 아시아의 일원이었고 소련 없이는 동아시아의 질서를 생각할 수 없었다.
일본은 스탈린이 영토 확장에 대한 야심이 있는 알렉산더 3세나 니콜라스 2세 같은 차르에 가깝다고 봤다. 소련은 만주와 한반도에 근 거를 확보해 태평양으로 진출하려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조만간 미 국과 충돌할 것이라 예상했다. 일본은 이런 국제정치의 맥락에서 일 본의 패전 후 운명을 구상했다.
일본은 당시 국제 정세를 분석해 미소 관계에 균열이 생기고 있음 을 읽고 거기에서 전후 일본이 소생할 기회를 봤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련이 동아시아에 진입하여 미국의 단독 승리로 확정되지 않는 시점을 노려 일본이 전쟁을 끝내야 한다고 판단했다. 1945년 5월 나치 항복 이후 동아시아에서 소련군이 증강되는 상황을 보고 소련의 대일전쟁 참전 시기도 예측할 수 있었다. 중세 일본에는 사무라이 전략 문화가 있었다. 라이벌 어느 한쪽에 만 줄 서지 말고 양쪽에 모두 줄을 대라는 것이다. 일본의 항복 전략 은 사무라이 전략 문화를 이용해 동아시아에서 미소가 서로 경쟁하도 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소련이 진군하기 이전에는 결코 항 복하지 않아야 했다.
종전 전략 수립을 담당한 해군 소장 다카기 소키치高木忽吉는 1945 년 3월 종전 전략에 관한 중간보고서 초안을 작성한다. 이 보고서는 미국, 영국, 소련의 계산이 서로 다 다른 점에 착안해 각기 다른 접근을 제안한다. 미소 간의 잠재적 대립을 이용해 소련을 개입시켜 미국의 야심을 견제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아시아 단독 지배에 반대하는 소련을 미국 혼자서 대응할 수 없다고 판단될 때만이 일본의 역할을 미국이 인정할 것이고 이 길만이 일본이 미국의 지원을 받아 다시 아 시아에서 지위를 확보할 수 있는 길이라고 다카기는 분석했다. 다카기 소키치는 중간보고서 초안에서 미국이 승전하면 중국 북부, 만주, 한반도를 지배하려 할 것이고 소련은 그 시도를 저지하려 할 것이라 고 예측했다. 참모본부 전쟁지도반장으로 대소 종전공작을 담당한 타 네무라 사코種村佐孝 대령도 일본은 미군의 본토 공격과 관계없이 소련 이 만주와 한반도에 공격을 개시한 후 항복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소련이 동아시아에 참전한 후 최대한 영향력을 확보해야 일본에 유리하다는 것이다.
- 1945년 2월 일본 관동군은 이미 만주 경계 부근의 전략 기지를 포기한 후 남쪽으로 후퇴한다는 계획을 세운다. 또 일본은 1945년 초 한반도 방어 체제를 변경했다. 그해 2월 기존의 조선군사령부를 해체하고 제17지역군을 신설해 한반도 방어 임무를 맡겼다. 일본군은 한반도 병력 배치를 조정해 한반도 남쪽을 미국으로부터 방어하는 데 집중했다. 1945년 8월 18일 당시 북한에 배치된 병력이 11만 7천 명인 데 반해 남한에는 총 23만 명을 배치하고 제주도에만 6만 명 이상을 배치했다. 미군이 우선 제주도를 점령할 것이라 예상했기 때문에 이를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그 상황에서 일본군은 중국에 있던 1백만 명 규모의 병력을 소련 침공에 대항하기 위해 만주로 이동시키지 않았다.
소련은 일본의 이런 행태에 도리어 의아해했다. 결국 소련군은 일본군으로부터 이렇다 할 저항도 받지 않고 신속 하게 한반도와 사할린 쿠릴열도로 진군한다. 제17지역군 병력이 부족 해 소련군에 대항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당시 일본군은 소련군 이 1리 전진하면 일본군은 2리 퇴각하라고 명령했다. 1945년 8월 8일 참전을 선언한 소련은 이미 8월 9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군대를 움직여 총 한 방 쏘지 않고 함경북도 웅기에 상륙했으며 8월 13일에는 벌써 청진으로 진격했다. 반면 미국은 한반도에 진주하지 못했다. 원래 미군은 한반도에 조기 진군 계획이 없었다. 미군은 9월 8일 에야 진군한다.
8월 10일과 11일 사이 미국은 부랴부랴 한반도의 38선 분할안을 작성한다. 소련 단독으로 한반도 전체를 점령할 수도 있는 절박한 상 황이었다. 8월 13일 트루먼이 이를 승인하고 다음 날 스탈린도 이에 동의해 한반도는 분할된다. 일본이 복선을 깔고 소련과 미국이 지정 학적으로 타협한 결과이다.
그 이전 1945년 7월 27일 일본은 포츠담선언을 묵살했다. 당시 포츠담선언에서 소련은 당사자가 아니었다. 스탈린의 서명도 없었다. 일본은 미국이 일방적으로 주도해 소련을 배제하고 미국이 원하는 방식으로 전후 일본을 처리하려 한다고 판단했다. 이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소련을 끌어들여 미소 간 경쟁 구도를 형성하겠다는 일본의 전략에 어긋났다. 그리고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다. 하지 만 알려진 바와 달리 원폭 투하는 항복 선언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 다. 그 증거로 대본영의 '기밀 전쟁일지' 에는 원폭 투하가 많이 언급 되지 않는다. 8월 9일 새벽 소련군의 침공이 시작된 지 30시간 만에 일본은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고 항복한다. 귀족원 의장과 수상을 역 임한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는 소련 참전은 신이 준 선물로 이제 전 쟁을 마칠 수 있다고 말한다. 히로히토 천황은 항복 이유로 두 가지를 들었다. 1945년 8월 14일에는 원자폭탄 투하를, 8월 17일에는 소련군 참전을 그 이유로 든다. 소련의 공을 인정해주는 발언인 것이다.
- 일본이 항복을 지연해서 비록 원자폭탄이 투하됐지만 소련이 동아시아에 개입하게 되어 미국의 단독 지배를 벗어난 지정학적 구도가 형성됐다. 일본의 전략가들이 바라던 대로 동아시아에서 전후 소련이 미국을 견제함으로 미국의 전면적 지배를 저지할 수 있는 발판이 마 련된 것이다. 미국이 패전국 일본을 가혹하게 지배할 수 없는 지정학 적 환경이 만들어졌다. 일본은 미소의 세력 다툼을 교묘하게 이용해 미국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얻는다. 미소 간의 분할 점령으로 분 단된 한반도에서 발생한 한국전쟁으로 경제 회복에도 큰 덕을 봤다.
-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수상은 제1차 세계대전 승자였던 일본보다 제2 차 세계대전 패자였던 일본이 더 낫다고 말한다. 전시 전략가들의 구상대로 생존하고 재건된 것이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패배를 종전'으로 표현한다. 패전'이 아니다.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단지 전쟁 이 종료됐다고 표현하고 싶은 것이리라. 일본은 비록 원폭이 투하되고 전투에서 졌지만 그들이 원하는 전후 동아시아 대립 구도를 만드는 데 성공했으므로 패배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 현재 중국 정부가 추진하는 일대일로는 페르시아만에서 인도양을 거쳐 남중국해까지 중동과 중앙아시아, 중국을 포함하는 지역에서 마 르코폴로가 여행한 길을 재현한다. 일대일로 노선이 마르코 폴로의 행로와 거의 일치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13~14세기 중국을 지배한 원나라를 비롯한 몽골제국은 세계화를 실행했다. 다문화 제 국으로 유라시아 전체를 연결한 것이다. 팍스 몽골리카'를 상징하는 것은 무력이 아니라 바로 이 무역로였다. 이 무역로를 통해 보석, 직 물, 향료, 금속 등이 거래됐다. 전쟁이 아니라 상업에 기반한 것이었 다. 오늘날 중국의 전략을 이해하려면 바로 쿠빌라이 칸의 몽골제국 을 보면 된다. 15세기 후반 16세기 초반 포르투갈의 해상 네트워크는 방대한 유라시아를 새로운 글로벌 시스템으로 통합시켰다. 중국은 미 얀마,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파키스탄, 지부티, 탄자니아 등 인도양 연안 국가들의 항구에 투자해 과거 포르투갈이 했던 것을 재현하려고 한다. 이 항구들은 대략 마르코 폴로의 귀국 루트와 비슷하다. 중국, 러시아, 이란은 미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무역로로 연결될 것이다. 과거 유라시아는 너무 방대해 어느 한 국가나 세력 이 장악하기 어려웠다. 칭기즈 칸과 티무르가 일시적 예외였을 뿐이 다. 중국과 페르시아는 풍요롭고 안정된 농업 문명국이었고 실크로드 를 통해 서로 접촉했다. 둘 다 대제국으로 근세에 서양에 굴욕을 당했 다. 이런 감정적·역사적 기초가 중국과 이란의 관계를 유지해준다. 이 란으로선 실크로드로 중앙아시아보다는 우선 이란 시장과 중국 시장 을 연결하는 것이 급하다. 기술이 거리를 좁히고 무역과 공급 네트워크를 넓히면서 중국, 러시아, 이란을 중심으로 유라시아가 통합될 가능성이 있다. 중국이 마르코 폴로 시절과 마찬가지로 선두에 선다. 지난 세기 서반구를 장악한 미국은 어느 한 국가나 세력이 동반구를 장악하는 걸 저지해왔는데 중국의 일대일로를 통해 유럽, 중국, 러시아, 터키, 이란 등이 연합해 동반구의 지배 세력으로 등장할 가 능성이 생겼다. 유라시아는 작아지고 미국이 어느 한 국가를 다른 국 가와 대립하도록 조종하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혼란과 분쟁 도 있겠지만 경제적 통합이 가속화되는 유라시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줄어들 것이다. 비록 미국은 힘 있는 개별 국가로 남아 있겠지만 유라시아의 통합은 비유라시아 국가인 미국에게 근본적 위협이 될 것 이다.
- 미국은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후 낙관적이었다.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이 경제적으로 성장하면 자유 시장의 힘으로 결국 다당제 시스템으로 이전하고(민주평화이론), 자유무역 세계에서는 경제적 상호 의존 이 군사적 대립을 대체할 것(자유평화이론)이라는 시각으로 중국의 경제 발전을 용인했다. 그러는 사이 국력이 성장한 중국이 지정학적 구도를 흔들었고 미국은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제 중국의 성장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는 미국은 칼을 뽑아들었다.
이런 신냉전이 본격화된 것은 중국이 빠르게 부상한 데서 비롯된 다. 중국은 매킨더와 스파이크먼의 아이디어를 이용해 하트랜드와 림 랜드에 동시에 진출하려 한다. 일대일로 전략이 그것이다. 랜드파워 가 세력을 확대할 것이라는 매킨더의 예언은 조금 빨랐다. 1917년 러시아혁명, 1949년 중국 공산화, 그 후 이어진 40여 년의 냉전으로 실 현이 늦어졌다. 유라시아의 경제성장과 통합이 어려웠고 이념적 장벽과 중소 분열로 인프라 건설이 어려웠다. 하지만 이제는 사정이 변했다. 중국이 굴기한 것이다. 이미 브레진스키는 유라시아를 지배하는 세력이 등장하면 서반구와 오세아니아는 세계의 중심 대륙인 유라시 아의 주변부로 전락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중국의 경제력과 유라시아의 자원이 성공적으로 결합하면 매킨더가 1904년 예언한 대로 '세계 제국이 등장할지도 모른다.
미국이 유라시아 지배를 지속할 수 있는 조건은 유럽을 확고히 장 악하고, 유라시아의 중간 지역이 단일 세력에 의해 지배되는 걸 저지 하며, 유라시아 동부가 하나의 세력으로 통합돼 미국을 축출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미국이 중동에서 발목이 잡혀 있는 동안 중국은 유라시아 중간 지대를 통합하기 시작했고 미국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하고 있다. 오바마는 중동 지역에서 병력을 철수하고 태평양 연안 해군을 증강해 유라시아 대륙을 통제하려고 했다. 지정학의 가르침에 따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경제적·군사적 틀을 만들려던 오바마의 시 도는 트럼프의 등장으로 물거품이 됐다. TPP와 TTIP는 중단되고 트 럼프 정부가 중동에 다시 집중하면서 군사력의 재배치도 유보됐다. 그러다가 트럼프 정부가 중국과 무역 전쟁을 시작함으로 전면적 대립이 가속화되고 있다.
- 시파워 미국이 충돌하고 갈등하는 사이 림랜드의 최강자 중국과 하트랜드의 점유자 러시아는 400년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굳건한 관 계를 맺고 있다. 중국의 투자와 에너지 구매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사태로 인한 서방의 경제제재에 대항할 수 있게 됐다. 러시아는 원유, 미사일, 전투기 등을 판매해 중국의 군사력을 강화시켜 태평양에서 중국과 미국의 군사적 경쟁을 가속화했다. 미국은 유라시아 거인 두 나라 중 최소 하나와 화해해 다른 하나를 고립시켜야 한다. 그러나 현 상황은 미국이 오히려 두 나라의 접근을 촉진하고 있다.
- 돌이켜 보면 러시아가 동아시아로 진출하기 위해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건설한 사건이야말로 한반도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건설로 구체화된 러시아의 동방 팽창은 마찬가지로 대륙으로 팽창하려던 일본에게 중대한 위협으로 다가왔다. 그 결과가 러일전쟁이다.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건설되지 않았다면 전쟁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았을 것이고 아마 전쟁 자체가 발발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건설은 매킨더가 1904년 논문 역사의 지리적 중심을 쓰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러시아와 오랜 기간 그레이 트 게임을 벌이던 영국의 학자인 그는 러시아가 철도 건설로 강력한 랜드파워를 갖추게 될 경우 시파워에 의존하던 영국에게 가해질 위협 을 직감했던 것이다. 그의 너무 빠른 예감과 달리 아직은 미숙했던 랜드파워 러시아는 러일전쟁에서 패배했다. 매킨더가 시파워가 랜드파워를 견제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교두보 중 하나로 지목했던 한반 도는 동아시아의 신흥 시파워 일본에게 점령됐다. 영국이 동의한 결 과였다. 이렇게 대한제국의 멸망은 거대한 지정학적 게임의 한 부분이었던 것이다.
- 스탈린이 한국전쟁 도발에 동의한 것은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이 미국의 태평양 방어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한다는 1950년 1월 12일 연 설 때문이라는 주장이 한때 유행했다. 이 연설로 한반도와 대만은 미 국 보호 범위 밖에 놓이고 한국전쟁은 애치슨 선언 후 반년이 지나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션즈화 교수는 이는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고 강조한다. 1950년 1월 26일 중국은 '창춘철도와 뤼순항 및 다롄항 에 관한 협정'을 소련 측에 전달하고 2년 내에 동북 지역의 모든 주권 을 회수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다. 소련은 기본적으로 중국 측 요구 를 수용한다. 곧이어 1월 30일 스탈린은 북한 주재 슈티코프 대사에게 전보를 보내 김일성의 남침 군사 계획에 동의하고 원조를 제공하겠다는 뜻을 밝힌다. 그 전부터 여러 차례 김일성이 남침에 대한 승인을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유보적이었던 스탈린이 돌연 입장을 바꾼 것은 뤼순항과 다롄항의 상실이 명확히 결정된 직후였다. 소련은 태평양으로 통하는 유일한 부동항을 상실하게 된 것이다. 동 아시아의 전략적 거점을 상실한 것이다. 스탈린이 김일성의 전쟁 발 발에 동의했던 것은 이러한 군사행동을 통해 소련의 전략 거점을 다시 확보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심사숙고했다. 만약 애치슨 선언이 그대로 이행된다면 김일성의 남침은 미국의 이익을 위협하지 않으므로 미국은 군사개입 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이 경우 김일성이 전쟁에서 승리하면 소련은 한 반도 전체를 통제할 수 있고 인천, 부산 등 남한의 항구들로 뤼순항과 다롄항의 역할을 대체할 수 있다. 북한의 철도를 창춘철도와 연결할 수도 있다. 설령 전쟁에 패한다 해도 소련은 여전히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즉 동북아에서 긴장 상태가 조성되면 중국은 뤼순과 다롄에 소련군이 계속 주둔하도록 요청할 것이고 또한 전쟁이나 위기 국면이 발생하면 소련군은 중소협정에 근거해 창춘철도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된다. 소련은 자연스럽게 태평양으로 향하는 철도 노선을 계속 사용할 수 있게 된다. 한반도에서 발생할 무력 충돌은 그 결과에 관계없이 소련이 아시아에서 설정한 전략 목표인 태평양으로 향하는 항구와 부동항의 획득을 보장할 것이라고 스탈린은 판단한 것이다. 스탈린이 중시한 것은 전쟁의 발발이었지 전쟁의 결과가 아니었다. 승 패와 관계없이 소련은 태평양으로 나가는 항구를 통제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스탈린은 서둘러 전쟁 개시를 승인한 것이다. 션즈 화 교수의 이런 해석에 따르면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을 승인하고 지 원한 것은 철저한 지정학적 계산의 결과였다. 제정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소련으로 바뀌었지만 지정학적 욕구는 변함이 없었다.
- 북한의 위협이 없어지면 한국은 미국과의 안전 보장 체제로부터 이탈해 중국과 더 긴밀한 경제 지향적 관계를 구축 할지도 모른다고.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가 이루어지면 미국은 아시아 에서 가장 중요한 안보 거점을 상실할지도 모른다고, 미국의 필요성 이나 중요성은 사라질지 모른다고. 미국은 아시아에서 주변적 플레이 어로 밀려나고 이는 중국에 유리해질 것이라고, 북한과의 긴장 완화 가 주한 미군 철수와 동아시아 지배력 약화로 이어진다는 우려가 사 라지지 않는 한 미국이 한반도 긴장 해소에 나설 이유가 없다. 또 다른 강대국인 중국의 안전에 한반도가 갖는 중요성은 명백하다. 북한은 중국의 뒤뜰이고 완충지대이다. 중국 지도자들은 이러한 지리적 의미를 이해한다.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한반도에서는 안정이 제일이다. 그래서 중국은 한반도의 통일도, 전쟁도, 혼란도 원하지 않는다(不统, 不咸, 不同), 중국은 북한 체제가 안정되고 상대적으로 중국 에 우호적이기를 원한다. 적어도 주적인 미국편이 되지 않기를 원한 다. 만약 미국이 한반도 북부까지 진출한다면 중국은 중대한 위협에 직면할 것이다.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요한 원인도 미국의 북상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중국이 명명한 한국전쟁 이름이 항미 원조抗美援朝 전쟁이다. 미국에 대항하고 북한을 지원하는 전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항미抗美가 본질이다. 중국은 북한의 체제 붕괴에 반대 하면서 동시에 북한이 미국의 영향권 안에 포함되는 것도 반대한다. 통일 한국의 역량이 커질수록 제어하기 힘들어지는데 이는 중국이 원 하는 게 아니다. 분단되고 대립하는 그래서 강국이 되기에 근본적 장 애가 내재된 한반도를 선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