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월하는 뇌
- 신의 존재를 가정하면 영성을 설명하기가 아주 편해진다. 영성의 기원, 심지어 그 의미도 모두 신에게 돌릴 수 있다. 신이 우리에게 불멸의 영혼을 부여했으며, 이 영혼이 우리를 우주 와 연결해 준다. 성 아우구스티누스saint Augustine가 얘기했듯이 우리의 도덕적 행동과 선악,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은 모두 신 에게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신의 존재를 가정할 경우 영성 의 문제는 이미 그 해답이 나와 있고, 많은 사람이 이런 설명을 선호한다. 반면 그런 신적인 존재를 가정하지 않을 경우에는 영성을 설명하기가 어려워지며, 과학적 세계관과의 접점이 더 커진다. 나는 더 어려운 두 번째 길을 선택했다.
- 로마의 철학자이자 시인인 루크레티우스Lucreius는 이런 영원한 고문과 고통의 암울한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루크 레티우스는 사후 세계란 순전히 미신에 불과하며, 그런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육체와 영혼이 물질 원자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며, 이 원자를 '프리모르디아 레룸primordia rerum', 즉 사물의 기원'이라 불렀다. 사람이 죽으면 그를 이루던 원자들은 "연기가 공중으로 흡어지듯 사라진다. 따라서 우리 에게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루크레티우스는 고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유물론자다. 원 자를 대단히 작은, 파괴할 수 없는 자연의 구성 요소로 보았 던 그의 개념은 수 세기에 걸쳐 반향을 이어오다가 존 돌턴john Dalton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bert Einstcin을 통해 계승됐다. 루크레티우스는 자신의 원자 가설을 그리스 사상가 데모 크리토스Democritos와 에피쿠로스Epicouros에게서 빌려왔다. 루 크레티우스의 사명은 그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덜어주는 것이었다. 그가 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책 한 권 분량의 7400행짜리 시는 이전에 이 주제를 다루었던 다 른 그리스인보다 더 깊고 통찰력 있을 뿐만 아니라 문학적 아 름다움과 열정이 담긴 탁월한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로마의 웅변가 키케로는 루크레티우스의 시를 가리켜 "영감을 불어넣 는 걸출함과 위대한 예술성이 넘친다"6라고 썼다. 초기 기독교 교인들은 이 시가 영원히 존재하는 영혼과 종 교 전반을 부정한다며 이 시를 펌하했다. 그 후 1000년 동안 자 취를 감추면서 영원히 사라질 뻔했지만, 15세기 이탈리아 학자 포지오 브라치올리니의 노력으로 부활할 수 있었다. 그는 독일 수도원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발견하고 이 시를 다시 세상으로 끌고 나왔다. 오늘날 이 시는 라틴어로 쓰인 가장 위대한 문학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 루크레티우스는 원인을 강조하고, 세상을 기계적으로 설 명했다는 점에서 원인보다는 목적에 더 관심을 두었던 플라톤 이나 아리스토텔레스와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아리스토텔레 스도 현상이 일어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네 가지 원인aitia을 목 록으로 제시했다. 바로 초기 물질, 일종의 물질, 변화를 불러일 으키는 주체, 목적이다. 하지만 이 단계는 모두 최종 목적을 염 두에 두고 설명되었으며, 전체적인 개념도 루크레티우스의 원 자보다 휠씬 추상적이었다. 루크레티우스가 제시한 과학과 그 의 추론 과정에는 틀린 점이 있지만 그 감수성만큼은 철저하 게 현대적이었다. 우리는 루크레티우스를 시인이자 철학자일 뿐만 아니라 한 명의 과학자였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는 기본 원리를 통해 세상의 작동 방식을 이해하고자 했다.
- 육체와 정신 너머의 물질세계
중국의 기상학자 겸 천문학자 왕충포은 동양 최초의 유 물론자 중 한 명이다. 왕충은 자신의 책 논형에서 세상 에 대해 대단히 합리적인 관점을 취했다. 그는 천둥이 신이 보내는 메시지가 아니라 열이라고 말했으며, 귀신을 믿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 말했다. 그리고 사후 세계의 존재를 부정하며 이렇게 적었다. "죽은 자의 영혼은 해체되기 때문에 더 이상 사 람의 말을 듣지 못한다."
나는 왕충의 언어("죽은 자의 영혼은 해체되기 때문에")와 루 크레티우스의 언어("영혼 또한 빠른 속도로 허공에 홀어져 사라지 며, 최초의 육체(원자)로 더 신속하게 해체될 것이다")가 유사한 것 에 감명받았다. 물론 중국어와 라틴어로 쓰인 원래의 단어들 이 똑같지는 않지만 개념은 동일하다. 루크레티우스와 왕충 모 두 살아 있는 육체는 일종의 영혼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만 그 영혼은 물질적인 것이어서 죽으면 해체되어 흡어진다고 주장 했다. 반면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누스 등은 영혼/혼령은 불멸 하는 영적인 실체이기 때문에 죽어서도 일종의 정체성을 그대로 유지한다고 주장했다 고대 중국에는 비물질적인 귀신에 대한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지만 왕충은 거기에 대해 논리적이고 재치 넘치는 반론을 제기했다.
천지에 질서가 잡히고 '인간 황제'의 통치가 시작된 이후 로 사람들은 자신의 명에 따라 세상을 떠났다. 중년이나 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들도 수백만 명은 될 것이다. ... 만약 사람이 죽은 후에 귀신이 된다고 가정하면 모든 길모퉁이, 모든 계단마다 귀신이 가득할 것이다. 귀신들이 관청이나 궁궐 등을 가득 채우고, 길과 골목을 가득 메워 길을 막았을 것이다.
-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통해 나는 과학적 차원 못지않게 물질적 원자의 토대를 뛰어넘는 심오한 인간적 차원에 대해 서도 제대로 이해하게 됐다. 우리는 루크레티우스의 삶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지만, 그의 시를 통해 그가 무엇을 가치 있게 여겼는지 알 수 있다. 그 걸작은 내가 영성과 관련지어 생각하 는 여러 가지 개념과 느낌을 그 역시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는 타인의 행복을 가치 있게 여겼으며, 죽음의 공포를 반박하는 이성적인 논증으로 타인을 행복하게 만들려고 했 다. 또한 그는 우정을 가치 있게 여겼다. 이것은 그가 멤미우 스Memmius에게 한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나로 하여금 어떤 수고도 마다하지 않게 만드는 것은 자네의 가치, 그리고 자네와 의 즐거운 우정에서 기대되는 기쁨일세. 그는 선하고 도덕적 으로 사는 것을 가치 있게 여겼다. "사람들 안에 남아 있는 서로 다른 본성의 흔적들은 너무도 사소한 것이어서, 우리가 신 처럼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을 방해할 수 없다." 다음의 문 장이 보여주듯 그는 미적 감각도 갖고 있었다. "젊음을 예찬하 는 조각과 그림이 집 안을 장식하고 화려하게 금박을 입힌 들 보에서는 리라 소리가 울려 퍼지지만, 한편에서는 화창한 계절이 푸른 풀밭 위에 꽃을 흩뿌릴 때 큰 나뭇가지 아래 실개천 옆 부드러운 풀밭에 소박하게 모여 앉은 사람들이 큰돈을 들이지도 않고도 즐겁게 휴식을 취한다." 그리고 이렇게 경외감을 표현하는 글도 있다. "별이 빛나는 밤하늘 아래 강물이 밝게 펼쳐지자 하늘의 고요한 별자리들이 물속에서 반짝이며 대답한다." 루크레티우스도 나처럼 영적 유물론자였다.
- 979년에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 Stephen Jay Gould와 리처드 르원틴Richard Lewontin은 스팬드럴 spandre'이|라는 말을 만들었다. 이것은 동물의 특성 중에서 그 자체로는 적응에 도움이 되지 않지만 생존에 실질적인 이점을 주는 다른 특성에 따라오는 부산물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눈 동자의 색깔과 귓불의 크기는 생존에 특별한 가치가 있는 특성은 아니지만, 몸의 색깔과 귀는 분명 생존상의 이점을 갖고 있다. 시를 쓰는 능력은 명확하게 드러나는 진화적 이점이 없 지만, 소리와 리듬에 대한 감수성에서 비롯된 부산물일지 모른다. 이런 감수성은 실제로 생존상의 이점이 있을 것이다.
나는 영성이 이런 스팬드럴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자연 및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고, 거기에 소속되고 싶은 욕망, 자기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의 일부가 되는 느낌, 아름다움에 대한 공감, 경외감의 경험, 창의적 초월 경험 등은 모두 진화적 이점 이 있는 다른 특성에서 비롯된 부산물이라는 것이 나의 주장 이다. 이것 중 처음에 얘기한 네 가지 경험은 별다른 설명이 필 요하지 않다. 창의적 초월 경험은 우리가 세상에 없던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내거나 새로운 것을 발견했을 때, 순수한 바 라봄의 상태에 빠져 있을 때 느껴지는 짜릿하고 벅찬 감각에 붙인 이름이다. 화가, 음악가, 무용수, 소설가, 과학자, 그리고 우리는 모두 창의적 초월을 경험한다.
- 2004년 이후 심리학자들은 메이어-프란츠 자연 유대감 척 도 검사가 기존에 개발되어 있던 행복 및 웰빙 측정법과 상관 관계가 있는지 조사해 보았다.13 2014년에 심리학자 콜린 카팔디와 그 동료들은 8500명 이상이 참가한 30편의 기 존 연구들을 병합해서 이런 상관관계에 대해 메타분석을 시행 했다. 심리학자들은 자연 유대감과 삶의 만족도 및 행복 사 이에서 강한 상관관계를 발견했다. 특히 행복과 자기를 이해할 때 자연을 포함시키는가에 따라 강력한 상관관계가 나타났다. 그들은 이렇게 적었다. "자연과의 유대감이 높은 사람일수록 더 양심적이고, 외향적이고, 쾌활하고, 마음이 열려 있는 경향 이 강하다. .. 자연 유대감은 정서적, 심리적 웰빙과도 상관관 계가 있다." 이런 결론을 보면 과거 100만 년에 걸쳐 형성된 충동, 본능, 욕망, 친화력이 오늘날까지도 우리 마음속에 여전히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 인간의 공통적 유대감에 대한 뜻밖의 진술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bert Einstcin에게서도 나왔다. 이 위대한 물리학자는 가정에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했고, 대부분의 삶을 외롭 게 보냈지만 1931년에 나온 포럼 앤드 센추리Forumand Century] 에 사람의 유대에 관해 다음과 같은 글을 실었다
우리 인간의 운명은 참으로 기묘하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짧은 체류를 위해 이곳에 온다. 가끔은 느낄 것도 같지만 대체 어떤 목적으로 온 것인지는 자신도 모른다.하지만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아도 자신이 타인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일상생활에서 알 수 있다. 행복한 모습으 로 미소 짓는 모습을 보아야 내가 행복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비록 누구인지 모르지만 공감이라는 끈으로 운명이 함께 묶여 있는 수많은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아인슈타인이 말한 "짧은 체류"가 타인, 그리고 더 큰 우주와 연결되려는 우리의 욕망 뒤에 숨은 가장 큰 원동력이 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죽음과 육체의 한계를 초월하려는 우리의 욕망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물론 3장에서 침팬지 무리 에 대해 얘기했듯이 죽음에 대한 인식은 사람이 아닌 동물에 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우주적 척도에서 존재의 일부가 되고 싶은 갈망을 느끼려면 거기서 더 발전되고 세련된 지능이 필요하다. 그리고 과거 수십만 년 전부터 무한한 미래로 인간이 사슬처럼 계속 이어진다는 인식도 필요하고, 우리 모두가 부모의 부모, 또 자식의 자식을 통해 연결된다는 인식도 필요하다.
- 듀크대학교의 기계공학자 에이드리언 베잔Arian Bgjan은 우리가 황금비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에 대해 눈과 뇌를 바탕 으로 진화적인 설명을 제시했다. 베잔은 뇌와 눈이 시축평면 visual plane(양쪽 눈의 시축을 지나는 평면)에서 뇌로 연결되는 흐름을 극대화하기 위해 진화했 으리라 주장한다. 수평 길이가 l, 높이가 h인 직사각형이 있을 때 눈이 이 직사각형의 면적을 스캔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가로 길이를 스캔하는 시간과 세로 길이를 스캔하는 시간이 같 % 때 제일 짧아진다. 눈의 기하학을 분석한 베잔은 눈이 수직 으로 흙을 때보다 수평으로 흙을 때 1.5배 빠르다는 것을 알 아냈다. 따라서 직사각형 전체를 스캔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최소화해 줄 최적의 l/h 값은 약 3/2(1.5)이다. 황금비와 크게 다르지 않은 값이다. 베잔의 분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자연의 많은 대상 이 황금비를 따라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눈도 자연스럽 게 이 비율을 가진 대상의 정보를 뇌로 보내는 데 최적화된 구 조로 진화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리고 거기서 또 한 걸음 나 아가면 이런 비율이 우리 눈에 기분 좋게 느껴지는 이유도 그 때문이라 주장할 수 있다. 조개껍데기와 알로에에 내재되어 있 는 황금비가 우리에게도 내재되어 있다. 우리의 미적 감각은 말 그대로 자연과의 하나됨을 표현하는 것이다.
- 과학은 결코 신이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할 수 없다. 신은 물리적 우주 바깥에 존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종교가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도 없다. 신에 의해 생긴 것이라고 주장하는 현상과 경험이 모두 원리적으로는 무신론적 원인에 의한 것이라는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서 제안하 고자 하는 바는 세상에 대한 과학적 관점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세상의 물리적 토대로는 온전히 포착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경험을 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이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많은 이에게 과학과 영성을 모두 긍정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에게 필요한 것은 과학의 원동력인, 세상의 작동 방식을 알고 싶은 욕구와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무언가에 순응하고자 하는 의지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우리 인간은 실험자인 동시에 경험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