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

큰 나라 중국 쩨쩨한 중국인

dalai 2025. 5. 27. 07:01

- 쩨쩨함의 뿌리는 가장 큰 최대와 가장 많은 최다에 있다. 다시 '지대물박'이다. 최대와 최다가 존재하기 때문에 가장 작은 최소와 가장 적은 최소도 존재한다. 엄청나게 크고 넓은 땅에서는 웬 만큼 크거나 작아서는 주목받기 어렵다. 이때는 아주 거대하거나, 차 라리 아주 작은 쪽이 오히려 눈에 띄기 쉽다. 그래서 복잡하고 미묘한 인간관계에서도 최대와 최소가 공존하며, 디테일하게 안배하고 배려함으로써 상대의 마음을 얻으려 한다. 따라서 이것이 어긋나면 그 섭섭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배신은 쩨째하게 깊아야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갚지 않는다면 모르겠지만 깊는다면, 깊아야 한다면 디테일하고 째째하게, 정말이지 상대를 뼈저리게 만들 정도로 철두철미해야 하지 않겠는가? 중국은 가장 큰 것이 가장 많은 나라인 동시에 가장 작은 것도 가장 많은 나라다. 다양함을 수천 년 동안 축적하고 또 경험하면서 중국은 어느 나라 보다 디테일에 강한 나라가 되었고, 그것을 인간관계에 고스란히 적용 해왔다. 째째함의 이면에 역시 예의 '크기'가 버티고 있는 것이다. 이래저래 중국과 중국인을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는 '절대 크기'다. 그리고 '째째함', 즉 정교함이 함께 자리 잡고 있다. 우아하게 표현해서 '지대물박'이고 박대정심'이다 

- 창힐은 눈이 네 개에 눈동자가 두 개씩이어서 아주 총명했다고 한다. 어느 해인가 창힐이 남방으로 사냥을 나가 강을 내려다보다가 등에 푸른색 문양이 선명한 큰 거북을 보게 되었다. 창힐은 거북을 가져다 꼼꼼하게 연구했다. 보고 또 본 끝에 창힐은 거북 등의 문양에 어떤 뜻이 있음을 발견했다. 문양이 어떤 의미를 나타낸다면 그에 따른 규칙을 정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전달하고 일을 기록하면 되지 않겠느냐는데 생각이 미쳤다 창힐은 밤낮으로 생각에 빠졌고, 가는 곳마다 모든 것을 관찰했 다. 하늘의 별자리 분포와 산천 대지의 모양은 물론 새, 짐승, 벌레의 흔적과 초목의 형상을 관찰하고는 그것을 그린 다음 서로 다른 부호를 만들어냈다. 그러고는 부호들에 각각의 뜻을 부여했다. 창힐은 이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자신의 설명을 덧붙이고는 '자'라 불렀다. 거북 등의 문양을 뜻하는 문과 자가 합쳐져 '문자'가 된 것이다. 그런데 창힐이 글자 발명에 성공한 날 괴이한 일이 일어났다. 대낮에 갑자기 밤송이만 한 비가 내리더니 밤에는 귀신의 곡소리가 들렸다. 왜 낮에 느닷없이 비가 내렸을까? 창힐이 문자를 만들어 이것으로 마음을 전달하고 일을 기록할 수 있게 되었으니 축하의 뜻으로 비가 내렸다고 한다. 그렇다면 밤에 왜 귀신이 곡을 했을까? 혹자는 문자가 생김으로 써 사람들의 지혜는 밝아지는 반면 덕이 쇠하여 속이고 죽이는 일이 갈수록 많아져 천하가 더 이상 태평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기에 귀신조차 불안해서 통곡했다고 주장한다. 성경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를 떠 올리게 한다. 인간들이 신에게 다가가기 위해 바벨탑을 쌓자 신은 인간들의 말이 통하지 않게 했고, 그 결과 서로 소통하지 못하게 되어 결국 바벨탑이 무너졌다는 이야기다. 귀신은 문자라는 소통 수단이 결국 인간사의 갈등을 초래할 것으로 예상했기에 통곡한 것 아닐까? 또 어 떤 이는 훗날 지식인들이 글 때문에 화를 당하는 이른바 '문자옥, 필화'를 예견하고 통곡했다고 추측하기도 한다. 창힐의 문자 창조를 알게 된 황제는 크게 감동하여 그에게 창이란 성을 내렸다. 얼마 뒤 하늘에서도 이 일을 알게 되어 곡식알 같은 비를 내려 창힐을 격려했고, 여기서 24절기 중 하나인 곡우가 비롯되었다고 한다. 

- 사드 사태와 관련하여 앞서 이야기한 키워드 '보복'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 앞에서 '저렇게 큰 나라가 어째서 그렇게 쩨째하게 구는지'에 관해 이야기했다. '큰 나라'의 쎄째한' 행동은 결국 '보복'으로 귀결 된다. 우리로서는 큰 나라가 작은 나라에 그렇게 보복하는 행태가 잘 이해되지 않았고, 더욱이 그렇게 쩨째하게 행동하는 것은 더 이해하기 힘들었다. 사실 세 개의 키워드에서 핵심은 '보복'이다. '보복'이 아니라 '큰 나라'와 쩨쩨하게'에 방점을 찍다 보니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다. 왜 그렇게 보복하나? 왜 보복할까? 이 질문이 먼저여야 했다. 그래야 중국인 특유의 은혜와 원수(원한)에 대한 뿌리 깊은 관념, 즉 은원관의 이면에 있는 여러 이유를 알 수 있다.

- 중국 속담에 "군자의 복수는 10년 뒤라도 늦지 않다는 말이 있다. 또 "은혜와 원수는 대를 물려서라도 같아라"라는 조금 섬뜩한 속담도 있다. 중국 영화와 드라마, 특히 사극이나 무협 영 화의 주제는 대부분 배신과 원한, 은혜와 복수로 점철되어 있다. 그만큼 중국 사람의 정신세계에 은혜와 원수의 관념인 은원관이 뿌리 깊게 박혀 있다는 방증이다. '은원관'은 우리나라 사람들도 다른 나라 사람들 못지않지만, 중국인에게는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서 DNA에 새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은원관은 어디서 비롯되었나? 우선은 제왕을 정점으로 하는 수천 년간의 신분.관료 체제와 그 체제를 둘러싼 권력투쟁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은원관은 가문의 원한과 복수에서 개인의 원한과 보복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인간관계에 작용한다. 조금 과장하면 중국 역사 자체가 은혜와 원수의 관계로 얽혀 있다. 

- "은혜와 원한은 대를 물려서라도 깊아라"라는 중국 속담은 은혜와 원한에 대한 중국인의 관념을 짙게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은원관 과 복수관은 수천 년 전부터 형성되었다. 하지만 여기에 깔린, 특히 복수 심리의 연원은 멀리 원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달리 말하면 원한에 대해 복수하려는 심리는 중국인뿐만 아니라 보편적 인간의 본성과 맞물려 있다. 남에게 도움을 받고 이를 갚는 보은의 심리도 같은 차원이다. 다만 중국은 이런 심리가 그들만의 역사와 문화에 짙게 투영되어 내려오면서 생활 속 깊이 파고들었기 때문에 지금도 은혜와 원한에 대한 관념이 강하게 남아 있다. 중국 문명이 황허강에서 발상한 이래 지금까지 단절되지 않고 지속된 지구상 유일한 문명이자 역사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은원관의 뿌리가 무척 멀리 거슬러 올라갈 것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 산시성의 성회 시안은 진시황릉, 병마용갱 외에도 한나라와 당나라의 황제릉 등 수많은 역사 고적이 있다. 10리가 멀다 하고 유적이 눈앞에 나타나는 3천 년 고도여서 전 세계의 수많은 사람이 찾는 명승지이다 시안 관광이나 여행에서 빠지지 않는 코스 중 하나는 중국어로 자오쯔엔이라고 부르는 만두 정식을 맛보는 것이다. 기본 반찬을 제외 하고 최소 여덟 가지에서 수십 가지의 만두를 한자리에서 맛볼 수 있 는 시안의 명물이다. 시안의 만두 정식은 1900년 청나라의 서태후가 8개국 연합군의 침공을 피해 이곳으로 도망쳐 왔을 때 나온 음식이라 한다. 사치와 향락의 아이콘이었던 태후가 시안에 와보니 불편하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특히 먹을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불만이 컸다. 시안 사람들이 고심 끝에 태후를 위해 이곳 주식인 밀가루로 다양한 만두를 만들어 대접하니 겨우 만족했다 고 한다. 이로부터 만두 정식은 시안의 명물이 되었고, 나아가 세계적 명성을 얻기에 이르렀다 

- 춘추시대 초나라 장왕은 전투에서 힘겹게 승리 하자 너무 기쁜 나머지 큰 연회를 베풀었다. 술자리는 밤을 이어가며 계속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 어둠을 밝힌 횃불이 모두 꺼졌다. 이 틈에 누군가 장왕이 아끼는 애첩의 몸을 더듬는 불경스러운 일이 터졌다. 애첩은 민첩하게 그자의 갓끈을 잡아당겨 끊었다. 불만 밝히면 범인이 드러날 순간이었다. 그러나 장왕은 모든 장병의 갓끈을 끊으라고 명령한 다음 술자리를 이어갔다. 이것이 '갓끈을 끊고 이어 간 술자리', 즉 ' 절영지연'이다. 리더가 되기란 쉽지 않다. 술자리에서는 더욱 그렇다. 리더는 예리해야 하지만 때로는 모른 체할 줄 알아야 한다. 리더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아랫사람을 대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때 요구되는 리더십 중 하나는 필요할 때 모르는 체하는 것이다. 이로써 민심을 얻을 수 있으며, 자신을 위해 목숨 바치도록 할 수 있다. 애첩의 몸을 더듬은 그 장수는 훗날 목숨을 아끼지 않고 장왕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장왕이 술 자리에서 발휘한 통큰 리더십이 큰 보답을 받았다 

- 요컨대 중국인과의 비즈니스나 관계 형성에서는 여지와 여운을 남기는 요령이 필요하다. 그렇게 자신의 의중을 상대가 스스로 헤아리게 만들어야 한다. 내 의중을 헤아리면 십중팔구는 세세한 배려로 돌아온다. 그렇지 않고 내 속을 다 내보이면 상대가 헤아릴 거리, 배려할 거리가 사라지는 것이고, 이는 곧 나에 대한 실망으로 이어진다. 요즘 말로 비유하면 신비주의 전략이 필요하다. 앞에서 언급한 동양화의 여백과 같은 맥락이다 중국인과의 관계나 비즈니스에서는 '절반만 말하고' '1절만 부르라'고 충고하고 싶다. 중국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모든 의중을 드러내 지 않는 습성이 몸에 배어 있다. 이 때문에 다소 답답하고 조바심이 날 때도 있지만 참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허풍은 금물이다. 술자리에 서의 허풍은 더더욱 금물이다. 중국 사람은 누구 못지않게 술자리를 좋아하고 즐기지만 좀처럼 취하지 않는다. 술자리에서도 상대를 살피고 속내를 파악하는 데 익숙하다. 큰소리도 치지만, 역시 의중이 반영된 의도된 큰소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려서 들어야 하고, 무턱대고 믿어서는 안 된다 

- 972년 중국과 미국은 그동안의 적대를 청산하고 관계를 정상화 한다는 놀라운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이로써 중.미 관계가 정상화되 었고, 세계는 냉전시대를 끝내기 시작했다. 이 세계사적 사건을 연출 한 주인공은 중국의 저우언라이와 미국의 당시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 (1923-2023)다. 두 사람은 1971년 극비리에 만나 관계 정상화에 합의했 는데, 이 자리에서 키신저는 1969년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성공을 이 야기하며 달에서 가져온 월석을 선물로 내놓았다고 한다. 미국의 달 정복을 은근히 자랑한 것이다. 이에 저우언라이는 우리 중국은 이미 수천 년 전에 달을 정복했다고 응수하며 바로 항아 신화를 언급했다고 한다 이후 중국 지도자들은 우주 탐사에 관심을 가졌고, 1994년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하면서 달 탐사 공정의 이름을 항아공정'으로 지었다

- 중국은 달 탐사 프로젝트에 항아'라는 신화 속 여신 이름을 붙였 듯이 이번에도 위성에 특별한 이름을 붙였다. 이름하여 '묵자호'이다. 묵자는 춘추시대 말기에서 전국시대 초기에 활동한 사상가 로, 본래 이름은 묵적이지만 존칭의 의미가 담긴 묵자로 부른다. 그는 전쟁을 반대한 평화주의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래서 묵자호를 묵자의 평화 사상과 연결하는 기사가 눈에 뜬다. 하지만 이는 잘못 짚은 해석이다 묵자는 사상가였지만 동시에 과학자이자 발명가였다. 목수로 보기도 한다. 이 때문에 중국 사람들은 그는 '과학(계)의 성인'이란 뜻의 과성으로 추앙한다. 묵자가 남긴 책 '묵자'는 신학, 정치, 경제, 교육, 윤리, 철학, 군사, 논리 등 거의 모든 학문 분야를 포괄하는 백과 전서에 가깝다. 특히 물리학과 수학 이론도 적지 않게 기록되어 있어 수학자와 과학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양자역학과 관련하여 묵자는 최초로 광선이 직선으로 진행하는 성질을 인식하여 작은 구멍을 통하 면 물체의 상이 거꾸로 맺힌다는 놀라운 이론을 남겼다. 이 이론은 아이작 뉴턴이나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비하면 무려 1천8백 년 가까이 앞선다. <묵자>의 이같은 과학 이론은 양자역학의 이론과 많이 닮아 있고, 그래서 중국은 양자 과학 실험 위성의 이름을 '묵자호'로 부른 것이다. 
 
- 마오쩌둥은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을 몹시 존경하여 "사마천은 후난성(마오쩌둥의 출신지)을 유람했고, 시후()에서 배도 탔으며, 쿤룬산에 오르기까지 했다. 그는 명산대천을 두루 돌며 자신의 가슴을 더욱 넓혔다"라고 했다. 또 <인민을 위한 복무>라는 글에서는 사마천과 <사기>의 가치를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나 죽음의 의미는 모두 다르다. 중국 고 대의 문학가 사마천은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기 마련이다. 어떤 죽 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 죽음을 사용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인민의 이익을 위해 죽는다면 태산 보다 무거운 죽음에 비할 수 있고, 파시스트에게 몸을 팔고 인민을 착취 하고 인민을 박해하는 사람의 죽음은 새털만도 못하다 할 것이다. 
마오쩌둥은 정치가이자 혁명가였다. 인민과 함께 공산혁명을 이 끈 투사였다. 그는 중국 인민을 바른길로 이끌고 계몽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기 의식을 철저히 개혁해야 하고, 그 바탕은 독서와 공부 라고 확신했다. 어릴 적부터 이어진 그의 독서 습관과 역사 공부는 이런 자각으로 더욱 굳어져 죽는 순간까지 계속되었다 

- '시진핑의 30년'은 단순히 시진핑 집권을 염두에 둔 용어가 아니 라 중국의 미래가 담긴 상징적 구호이자 14억 중국인의 구심점이다 또 30년이란 숫자는 한 세대를 가리키는 시간인 동시에 시진핑뿐만 아니라 개혁개방을 수식하는 숫자이고, 이전에도 여러 차례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30년이 포함된 용어는 시진핑 이전에도 사용된 바가 있다. 크게 는 세 개의 30년이 있다. 그것들의 의미는 무엇일까 
첫 번째 30년은 1921년부터 1949년까지를 가리킨다. 중국은 공산주의 국가다. 중국에서 공산당이 창립된 해는 1921년이다. 그리고 치열한 내부 투쟁인 공산혁명을 거쳐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해는 1949년이다. 1921년부터 1949년에 이르는 이 기간이 첫 번째 30년이다. 당시 중국 인민은 엄청난 희생과 대가를 치른 끝에 약 1백 년에 걸친 반봉건, 반식민지 상태의 낡은 중국을 끝내고 신중국을 수립 했다. '공산혁명 30년'이라 줄여서 부르기도 한다.
두 번째 30년은 1949년부터 1978년까지를 가리킨다. 이 기간에 중국은 사회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건설에 박차를 가해 국제사회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0여 년에 걸친 '문화대혁명'이라는 극심한 계급투쟁과 지독한 병목 위기를 겪었지만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 안정을 되찾고 덩샤오핑의 주도로 개혁 개방에 돌입했다. 이 30년을 '마오쩌둥의 30년'이라 부르기도 한다. 
세 번째 30년은 1978년부터 2012년 18차 인민대표대회 때까지를 가리킨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에 따라 중국은 놀라운 성장과 발전을 이룩했다. 개혁개방 전 15위에 불과했던 GDP는 2012년 세계 2위로 뛰어올랐다. 이 30년을 흔히 덩샤오핑의 30년'이라 부른다. 
네 번째 30년은 2012년 18차 인민대표대회부터 신중국 건국 1백 주년이 되는 2049년까지를 가리킨다. 이 기간이 '시진핑의 30년'이다 이 기간은 중화 민족의 부흥과 중국몽'을 실현하는 최후의 30년이자 관건이 되는 30년이라고 말한다.

- 중국은 21세기에 '두 개의 100주년'을 맞이했거나 맞이한다. 2021 년은 공산당 창립 1백 주년이 된 해였고,2049년은 공산당 정권, 즉 신중국 수립 고백 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 사이 중국은 14억 인민이 풍요로운 삶을 누리는 '소강사회'를 완성하고, 나아가 미국을 앞지르고 입으로 우뚝 선다는 목표 달성에 매진하려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혁개방을 전면 심화시켜야 하며, 따라서 개혁개방과 마찬가지로 한 세대인 30년이 필요할 것이라고 본 것이다. 이 책무를 시진핑이 짊어졌고, 그래서 30년이란 시간을 부여하면서 '시진핑의 30년'이란 구호를 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