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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부터는 인생관을 바꿔야 산다

dalai 2021. 8. 12. 20:35

-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보는 행위는 지난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중년이 되고 나서 과거를 돌아볼 때, 역시 “그때 이렇게 할 걸 그랬어"라며 후회하기 쉽다. 물론 새삼스럽게 생각해봐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괴테도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청년의 실수를 노년으로 가져와서는 안 된다. 노년에는 노년만의 결점이 있기 때문이다. (요한 페터 에커만의 《괴테와의 대화》)
- 나이가 쉰을 넘어 인생의 후반에 접어든 우리에게는 질투 심도 주의해야 할 감정이다. 옛사람들도 질투심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예를 들면, 니체는 질투라는 감정을 극도로 싫어했다.
질투의 불꽃에 둘러싸인 자는 마침내 방향을 돌려 전갈처럼 자기 자신을 독침으로 쏘게 된다. (니체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는 르상티망ressentiment, 즉 원한 · 증오 · 질투 같은 감정은 가치 없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런 감정을 자기에게 허용하지 않고, 청산했다고도 말했다(니체의 이 사람을 보라).
- 지나간 일이라도 원한이나 회한 같은 마음의 상처는 좀처럼 회복하기 어렵다. 그럴 때는 시간의 치유력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 치유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게 하는 방 법이 있다. 의식적으로 시간을 무조건 빨리 돌리는, 간단히 말하자면 일정을 최대한 촘촘하게 짜는 방법이다. 여행을 떠나는 것이 가장 좋다. 하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 다면 영화를 계속해서 본다든지, 사람을 많이 만난다든지 하는 것도 방법이다. 독서 같은 정적인 활동보다는 몸을 움직여서 환경에 변화를 주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다 보면 불과 사흘 전에 일어난 일도 “그런 일이 있었던가. 시간이 많이 지난 것 같은데...” 하고 아주 오래전 일처럼 느껴진다.  마음속에 응어리가 졌을 때 나는 당일치기 여행도 자주 간다. 그렇게 강행군을 하다 보면 바로 어제 일도 일주일 전 의 일처럼 아득히 느껴진다. 아니면 좀 특별한 식사를 해보면 어떨까? 가령 몸 상태 나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지금은 장어를 먹고 몸보신하는 수 밖에 없어”라며 자신을 위해 소박한 사치를 누려본다. 그럴 때를 대비해서 평소에는 되도록이면 그 음식을 먹지 않고 아껴둔다.
- 소설가 알베르 카뮈의 스승이었던 프랑스의 장 그르니에라는 작가는 《섬》이라는 철학 에세이에서 “자신은 선천적으로 개를 좋아하지만, 고양이를 키워야 할 것 같아서 고양 이를 키운다"고 썼다.  정말 재미있는 표현이다. 고양이에게는 자기 시간, 자기 세계가 있다. 인간과 어울리지 못하지만 인간과 같은 공간 에서 산다. 그런 고양이의 존재 방식에서 배울 점이 있다는 이야기다.
- 자기 자신의 자존심과 사이좋게 지내기란 쉽지 않다. 그 | 러나 그 자존심을 버리고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받아들여야 한다.
예를 들어, 옛날에 밴드를 했던 사람이 언제까지나 '나도 실은 뮤지션이 될 수 있었는데...'라고 생각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다만 음악가가 되지 못한 것이 진심으로 안타깝다면 왜 한 번도 도전해보지 않았는지 궁금할 뿐이다.
프로야구 입단 시험을 치는 것도 마찬가지다. 시험을 쳐 보고 나서 “나는 절대 프로가 되지 못할 거야”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꿈과 타협할 수 있다. 이는 일도 마찬가지다. 젊었을 때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살다 보면 실제로 해보니 자신은 해낼 수 없다. 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것이 바로 '성숙'이다. 직접 자신이 시도해보고 “이것은 도저히 나한테는 무리야.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었네” 하고 느껴서 포기할 수 있는 힘이 남은 생을 살아갈 추진력이 된다.
- 50세 이후의 삶에서 지루함과 어울리는 방법은 하나의 중요한 주제다. 이것은 지루함을 참는다거나 지루하지 않도록 자극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루함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다. 지루함에 익숙해지는 것 또는 지루함을 더는 지루 하다고 느끼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지루함을 두려워하는 것은 현대인 특유의 감정이 라고 보고, 지루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책을 낸 적이 있다. 나는 그 책에서 “현대는 누구나 지루함을 두려워하고 자극 을 원하는 시대다. 한편 사회도 그 요구에 부응해서 사람들 이 싫증 내지 않도록 점점 더 자극을 제공하며 고도로 자극적으로 변해간다” 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자극이 많다고 사람들이 정말 행복해질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그리고 이 고도로 자극적인 사회에 저항해서 살아남으려면 옆에서 보기에는 지루해 보일지 몰라도 당사자는 지루함을 느끼지 않고 기쁨을 발견해가는 힘, 즉 '지루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고 했다.
- 나는 '지루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해 생각할 때, 영국의 논리학자이자 철학과 교육학에 공적을 세운 버트런드 러셀의 사고방식을 참고했다. 1950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기도 한 러셀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성인으로 손꼽힌다. 러셀은 《러셀의 행복론》의 '지루함과 흥분'이라는 장에서 '일반적으로 위대한 사람들의 특징은 조용한 생활' 이라고 했다.
위대한 책은 한결같이 지루한 부분이 있고, 위대한 생애에는 하나같이 지루한 기간이 있다. 위인들의 인생도 두세 번의 위대한 순간을 제외하면, 늘 흥 분으로 가득한 인생은 아니었다.
또한 러셀은 지루함이 너무 두려운 나머지 강한 자극만 추구하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고, 그보다는 차라리 실 속 있는 지루함이 낫다고 믿었다.
- 어쩌면 우리 삶의 주체는 미토콘드리아라고 생각할 수 도 있다. 소설 미토콘드리아 이브로 화제를 모았던 세나 히데아키와 분자·세포생물학자 오타 시게오가 공동으로 저술한 미토콘드리아의 힘을 읽어보면, 인간은 미토콘드 리아를 살리고자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미토콘드리아는 인간과 같은 생물의 세포 내에 존재하 면서 산소호흡으로 에너지를 생산하는 데 중요한 기능을 하는 소기관이다. 원래는 다른 생물이었던 것이 진화 과정 에서 인간의 먼 조상의 몸속에 들어간 것으로 밝혀졌다. 인간은 미토콘드리아 없이는 살아갈 수 없고, 이 미토콘 드리아는 유전을 통해 다음 세대로 전승된다. 어떻게 보면 '인간은 미토콘드리아를 살리려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닌가 하는 의문도 생겨난다. 더 나아가 우리가 죽고 나서 화장되는 땅에 묻히든 인간 은 결국은 소립자로 남는다. 그렇다면 '의식'이라는 것은 우 연히 생긴 것이 아닐까? 살고 죽는 것보다 더 큰 흐름 속에 우리가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면 “나는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나 인가?”, “인간은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인간인가?”라는 심오한 의문에 봉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