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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스트리트 제국

경제 2015. 1. 31. 22:00

 


월스트리트 제국

저자
존 고든 지음
출판사
참솔 | 2002-01-31 출간
카테고리
경제/경영
책소개
어떻게 별 볼일 없던 뉴욕 맨해튼의 작은 샛길이 하나의 금융제국...
가격비교

1. 인간성이 사라진 곳_월 스트리트의 탄생
2. 선한 인간과 악당은 구분되어야 한다_금융시장 형성기의 월스트리트
3. 모든 이윤을 흡수해 버리는 곳_본격적 금융시장으로서의 월스트리트
- 이리운하 개통으로 발생한 뉴욕의 인구와 상업활동의 급팽창은 곧바로 월스트리트 증권브로커들의 급성장으로 이어짐
4. 더 비참한 몰락 외에는..._남북전쟁 직전의 월스트리트
- 초기철도는 기존 교통로가 있닸던 가까운 두 도시를 연결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자본조달 방법은 철도건설로 직접적인 이익을 보는 지역주민들의 모금 위주였지만 철도 규모가 커지면서 지역주민들을 상대로 채권을 발행해서는 필요한 자금을 조달할 수 없었음. 결국 채권발행은 곧 월스트리트 등 대형금융시장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고 금융시장 증권브로커들이 적극적으로 철도건설에 참여.(철도의 출현으로 월스트리트가 대자본의 조달 메커니즘을 터득)
- 1840년대 전신의 등장으로 뉴욕증시가 미국 금융시장의 중심으로 부상. "주식, 채권, 금 등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는 자본은 여러 시장 가운에 가장 활발한 거래가 이루어지는 곳으로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 유동적인 부의 규모가 커질수록 이런 특징은 더욱 두드러진다. 런던이 유럽금융의 중심지가 되었듯이 뉴욕이 미국금융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전신의 등장으로 미국 동부 금융시장에서 주요 시장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았던 뉴욕이 절대적 우위를 점하게 되었고, 뉴욕의 호황과 불황은 미국의 호황과 불황이 되었다.(제임스 메드버리)"
5. 허영과 낭비의 시대가 왔다._남북전쟁기의 월스트리트
6. 누가 이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가?_이리철도 인수전쟁과 월스트리트의 개혁
7. 월스트리트에서 영원한 승자는 없다_1873년 공황전후의 월스트리트
8. 싸게사서 비싸게 파는 것만이..._JP모건의 등장과 그랜트 부자파동
- 1873년 공황이후 경기가 최악의 상황을 맞아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고 있었지만, 이 시기의 불황은 미국 자본주의 체제에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 줌. 주가 회복을 기다리다 지친 유럽 투자자들이 미국의 채권과 주식을 헐값에 내던지는 바람에 1873~79년 사이에 유럽투자자들의 지분가치는 6억불에서 2.51억불로 급감. 이는 월 스트리트의 주가를 더욱 끌어내려 미국 내 투자자들을 괴롭혔지만 산업자본의 미국화의 기회가 됨. 유럽자본이 미국 산업의 동맥인 철도건설 초창기에 주식을 매입한 뒤 공황을 맞아 헐값에 팔아치우는 바람에 미국인들은 싼값에 사들일 수 있었음. 유럽 투자자들은 철도가 완공된 뒤 낳은 수익은 한푼도 얻지 못하고, 미국 철도망 건설에 도움만 준셈이 되었음.
- 유럽투자자들은 미국 경제엔진이 되살아나 주가가 다시 상승하자 비싼값에 철도와 일반기업 주식을 사들여 미국인들의 주머니를 불려줌. 이런 현상은 1870년대만이 아니었음. 식민지 개척시기 영국인들의 주식회사가 미국 동부해안에 수많은 식민도시를 건설한 뒤 파산하는 바람에 모든 과실이 미국인들의 손에 떨어졌고, 1980년대 일본 투자자들이 버블시기를 맞아 최고가격으로 록펠러 센터 등 빌딩을 사들인 쥐 다시 헐값에 파는 바람에 미국인들의 지갑을 두툼하게 해주었음.
- 외국 투자자의 돈으로 미국경제가 막대한 이익을 본 것 이외에도 공황은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으로 운영되던 수많은 기업들을 파산시켰음. 공황이 미국경제의 불순물을 일시에 제거하는 기능을 수행했음. 자본가들은 살아남기 위해 경영과 투자의 효율성을 극대화해야만 했음. 버블시기에 붙은 군살들이 한순간에 제거되었고, 실물과 금융자산은 경쟁력 있는 사람들의 손으로 넘어감. 이후 미국 경제가 회복되고 성장하는 국면에 접어들면서 불순물이 제거된 미국 경제시스템은 엄청난 힘을 발휘함. 그리고 부정과 부패로 얼룩졌던 미국 정치시스템도 1873년 공황을 겪으면서 근대화의 길로 들어섬. 산업화에 따른 독점과 빈부격차 문제가 미국 사회의 이슈가 되면서 각종 개혁운동이 활발해지기 시작.
- 1866년 대서양해저케이블 완성으로 월스트리트와 영국 런던의 금융가인 익스체인지 앨리의 거리는 더욱 좁혀짐. 이 해저 케이블은 익스체인지 앨리보다 월스트리트의 성장에 더 큰 기여를 함. 이 당시 미국은 만성적 자본부족에 허덕이고 있었는데, 월스트리트 플레이어들은 자신들의 이름과 신용으로 외국정부의 채권을 인수해 런던에서 유통시키는 등 해외에 활발하게 진출하기 시작함.
- 모건과 동시대 플레이어들은 선배플레이어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도덕성, 투명성, 집중력 등을 보여주어 미국과 세계경제에서 월스트리트의 위상을 다시한번 제고시킴. 미국인들이 월스트리트를 보는 눈에도 변화가 생김. 드루, 굴드, 피스트 등이 활동하던 당시 대다수 미국인들은 월스트리트를 도박꾼들의 소굴쯤으로 간주했지만, 모건과 동료 투자은행가들의 부상으로 월스트리트는 기업하기에 적절한 곳이라는 명성을 얻기 시작함.
9. 모건씨, 어떻게 하면 되죠?_격동의 19세기 말 월스트리트
- 독립적인 공인회계사의 출현과 회계정보 공시제도의 일반화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자유시장 경제시스템이 발전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건들이었고, 대부분 월스트리트 플레이어들에 의해 완성됨. 놀랄만한 사실은 회계정보 공시시스템이 정착되는 데 당시 미국정부는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했다는 점. 더욱 놀랄만한 것은 일반기업들이 회계정보를 공시하기 시작했던 당시 미국연방정부와 주정부는 여전히 주먹구구식 회계방식을 유지하면서 투명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음.
10. 절대 증권거래를 중단할 수 없다_20세기 최초의 위기와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출범
11. 이런 일이 자주 있습니까_1차 세계대전기의 월스트리트
- 1919년 11월 갑작스런 종전은 월스트리트와 미국 기업에게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킴. 전쟁기간동안 발생한 특수에 맞추어 막대한 돈을 투자해 갖춘 산업설비를 민수용으로 개혁하는 데 심각한 문제가 발생. 갑작스런 군수물자 수요감소와 유럽농업의 부활은 1920년대 초반 미국경제에 짧지만 심각한 불황을 유발.
12. 뉴욕 증권거래소는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_대공황을 앞둔 월스트리트
- 1920년대까지의 40년동안 비약적으로 발전한 미국경제와 유럽대륙에서 치러진 1차세계대전은 뉴욕증권거래소를 세계 최정상의 지위로 올려놓음. 하지만 제도적 관점에서 볼 때 거래소는 처음으로 공식출범한 1817년과 별 차이가 없었음. 전체 투자자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회원들의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단순한 친목모임의 성격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함.
- 19세기 중반 철도와 마찬가지로 20세기 초반 미국경제의 성장엔진이었던 자동차 산업의 지속적 팽창은 활활타고 있었던 1920년대 경제에 기름을 더 부은 꼴이었음. 또한 철도와 마찬가지로 이 시기 자동차 산업도 월스트리트의 호황에 지대한 공헌을 함.
13. 휘트니, 그 친구가?_대공황기의 월스트리트
- 루즈벨트 정부는 글래스 스티겔 법을 통과시킴. 5000불 이하 예금을 정부가 지급보장하는 방법으로 은행파산을 진정시키기 위해 연방예금보험공사가 발족됨. 은행들이 여수신 전문은행과 투자은행 가운데 선택을 하게 함. JP모건 은행은 두개의 조직으로 분리됨. 투자은행을 담당하는 모건스탠리와 여수신 전문은행인 JP모건은행으로 분리됨. 대공황을 겪으면서 쇠락하기 시작한 모건은행은 분리조치로 인해 세계 금융계에서 과거와 같은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됨.
14. 월스트리트는 더이상 음험한 곳이 아니다_2차세계대전~1960년대 월스트리트
- 그레이엄은 기어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 현금 등 유동자산의 가치를 중요시했고, 다음으로 생산설비 등 고장자산을 살펴보았음. 그리고 즉시 현금화할 수 있는 유동자산에서 유동부채를 뺀 차액을 근거로 주식가치를 계산. 이 가치가 높은 기업은 불황을 견뎌낼 여지가 크고 추가상승여력이 있는 것으로 평가. 이를 근거로 종목을 고른 뒤 인내심을 갖고 기다림. 그런데 그의 인내심은 다른 월스트리트 플레이어들이 갖지 못했던 자산이었음.
15. 탐욕을 인정해야 하는 때가 왔다_1970년대 월스트리트
에필로그
- 1929년 대공황과 달리 1987년 대폭락 이후 공황이 발생하지 않은 이유 : 1929년 에는 수많은 개인투자자들은 헤지라는 개념을 알지 못해 위험분산원칙을 무시하였으며, 주가가 상승할 때 자신이 부유하다고 착각에 빠져 소비를 늘리고, 주가가 폭락하자 소비를 줄임으로써 경제가 급격히 위축. 그러나 1987년 투자자들은 포트폴리오 투자이론에 따라 자산을 분산시켜, 주식 가치가 떨어져도 큰 손실을 입지 않고 소비를 급격히 줄이지 않음. 증시 대폭락에 대한 미국 정부와 관료의 반응이 달랐음. 레이건은 뒷전에 물러나 월스트리트에서 늘 일어날 수 있는 사건으로 치부하여 대중의 신뢰를 얻음. 연방준비제도 이사회에서 위기의 순간에 돈의 홍수를 일으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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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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