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래가 확대되면서 상인들은 더는 상품을 가지고 다닐 수 없었으며, 따라서 대리인에게 의존해야 했다. 상품이 창고를 떠나면 복식부기는 판매에서 수익이 확정될 때까지 그것을 손실로 판단했다. 상품을 내보내고 거기에서 수입을 잡는 활동을 기록할 방법은 오직 차변과 대변의 균형을 맞추는 것뿐이었다. 최초의 복식장부는 하나의 문단을 이루는 문장 형식이었으며 차변 문단과 대변 문단이 상응했다. 그러던 것이 나중에는 문단과 서술 대신 순수하게 숫자만 이용해 나란히 붙은 두 개의 열에 기록하는 이원적(bilateral) 형식으로 바뀌었다. 최초의 복식 기장의 예는 1340년 제노바 중앙원장에 기록된, 제노바 상인 야코부스 데 보니카(acobus De Bonicha)의 수익성 좋은 후추 교역 거래에 관한 것이다. 이 기록은 복 식 기장으로 기록된, 현존하는 최초의 정부 회계장부로 알려져 있다 당시 제노바의 활발한 해상 무역과 비잔티움과의 풍부한 교역을 고려하면. 이러한 장부가 제노바에서 처음 등장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자료는 이원적 형식과 총계가 일치하는 복식 기장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엿볼 수 있게 해준다.
- 코시모에게 돈은 권력이었다. 그는 돈을 버는 데 능했고. 상당 부분 이것은 그가 돈을 관리하는 방법을 알았던 덕분이다. 코시모는 당대 최고의 인문학 교육을 받았을 뿐 아니라, 교황의 계좌를 다루는 아버지의 은행 로마 지점에서 훈련도 받았으며, 사업의 모든 측면에 익숙했다. 수많은 장인 길드의 규정들은 구성원들이 복식장부를 기록하도록 요구했고. 이런 사항은 카타스토 세금을 걷기 위해 국가가 의무화 하기도 했다. 원장은 또한 재정 분쟁에서 법적 계약서로 간주되었다 피렌체 판사들은 재정 권한을 결정할 때 장부를 뒤지는 습성이 있었다. 부실 장부는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상인의 교육은 부기에 뿌리를 두고 있었고, 코시모 같은 지도자들은 어린 나이부터 부기를 배웠다. 어느 가업에서건 어렸을 때부터 가문의 상점이나 해외 지점에서 도제 생활을 했다. 실제 부기는 경험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었다. 피렌체가 교역과 부기에 관한 법률과 더불어 그처럼 풍부한 회계 전통을 창조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점에서 연유했다. 회계의 전통은 문화와 법 모두에 깊이 배어 있었다. 상인들은 교환 서신을 작성하고 옮겨 적는 작업부터 장부 기록에 이르기까지 상점 운영의 기본 사항을 전부 기계적으로 고스란히 외웠다
- 100년간 외면당한 복식회계의 교과서
인쇄된 복식부기 편람이 최초로 등장한 때가 유럽에서 이탈리아의 힘이 쇠퇴하기 시작한 시점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1494년 도미니크회 수사이자 인문주의자이자 수학자였던 루카 파치올리(1445~1517년)는 산술. 기하. 비율 및 비례 총론을 출판했다 이때는 이탈리아에 대한 침략이 시작되어 공화정 체제가 무너지고 이 탈리아 반도에 프랑스와 스페인 왕권이 수립된 시기다. 복식회계는 200여 년을 존속했지만 르네상스 상인들의 힘이 약화된 바로 이때 회계 방법이 접근 가능한 편람으로 인쇄된 것이다. 파치올리의 이야기는 책으로 출간된 최초의 회계 편람에 관한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이 편람이 어떻게 거의 100년 동안 상인들과 사상가들 모두에게 홀대를 당했는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기사도 정신과 신플라톤주의의 세례를 받은 군주에 의해 통치된 16세기 전제군주 시대에 비록 왕과 군주들이 재정 관리를 위해 성실한 회계사를 찾으려고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회계 자체는 저속한 상업적 기술로 멸시를 받았다. 회계에 대한 이런 선입견은 스페인 제국의 계속되는 파산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 정치경제학의 초석이 된 파치올리의 책
파치올리는 고전적 인문주의자와 정치 지도자들이 복식부기를 지식의 필수 형태로 평가하던 세계에서 살았다. 파치올리는 베르길리우스와 성 바울. 성 마태오. 단테를 인용하며 나태하지 않고 이웃에게 베풀고 근면하며 계산을 할 줄 아는 일꾼을 신께서 보살펴줄 거라고 강조했다. 회계장부에서의 균형은 신의 도덕적 평형을 상징했다 다티니가 종업원들에게 조언을 했다면. 파치올리는 하나의 세계관을 제시했다. 근면한 노동과 회계와 이윤은 신성한 가치였다. [산술. 기하. 비율 및 비례 총론, (이하 총론. )에서 회계에 관한 장인 계산에 관하여는 훗날 정치경제학의 초석이 되는데, 이는 재무의 기초 원리를 명시하고 왜 그것이 공화정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지를 설명했기 때문이다. 파치올리는 상업과 산업과 이익이 건강한 국가와 공공 재무 행정의 기초임을 암시했다. 그 책은 이탈리아 중세와 르네상스의 도구를 품고 근대를 내다본 책이었다.
- 500여 년 전에 파치올리가 총론을 출판한 이래로 회계의 기본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이 토스카나 수도사는 자신이 새로운 것을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질서정연한 회계장부 기록'에 대한 체계적인 안내서가 없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그는 공작의 백성들이 좋은 상인이 되는 데 회계가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고, 책에 공작의 영토에서 신용과 거래가 번성할 거라고 헌사를 썼다. 거래를 충실하게 기록한다면 상인들에게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신에게도 큰 도움이 될 터였다. 그것은 '믿을 만하고 올바른' 일이니까. 그는 수학의 명료성과 정보를 장부에 기록하는 방식을 통해 신뢰와 선으로 가는 길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 파치올리의 말에 따르면 베네치아 시스템은 차변과 대변의 균형을 바탕으로 이익과 손실을 추정했으며, 이문 통해 인간 세상에 신적 질서가 도달한 수 있게 했다.
- 파치올리의 회계는 상인들에게 자본주의의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도구, 즉 자신의 자산과 부채를 언제라도 계산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다. 건전한 회계의 첫 단계는 집과 토지와 보석류에서 현금, 은식기, 리넨. 침구. 향신료. 가죽 등등에 이르기까지의 자산 목록을 만드는 것이다. 자산은 차변과 대변으로 이루어진 자본이다. 그런 다음 장부를 기록해야 하는데. 수입과 지출을 자본 소유와 관련 하여 기록한다. 이때 네 가지 장부가 필요한데. 자산 목록과 비망록 (memorandum. memoriale). 분개장(journal, giomnale: 비망록에 기록한 거래를 질서정연한 규칙대로 옮겨 적은 장부ㅡ옮긴이), 원장(ledger, quaderno: 분개장의 기록을 받아각 요소마다 정리. 요약한 것ㅡ옮긴이)이 그것이다. 비망록에는 상인이 당일의 거래를 적고 영수증을 붙였는데, '시시 각각' 자신이 '사고판 것을 모두' 상세히 열거했다. 비망록은 정보의 실시간 기록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통화로 이루어질 수 있는 다양한 금전 거래를 빼놓지 않고 기록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했다 이런 다양한 통화들은 나중에 단일한 통화 가치로 계산해야 했다 하루를 마감하면서 상인은 비망록의 기록과 영수증, 거래 요약을 분기 장에 차변과 대변으로 나누어 체계적으로 옮겨야 했다.
분개장은 날짜, 대리인, 상품, 통화를 비롯해 각각의 거래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일어난 시간순으로 기록한 것이었다. 모든 것이 차변(per)이나 대변(avere) 항목에 기입되어야 했다. 그런 뒤 시간순으로 된 이 차변과 대변 기록은 원장으로 옮겨진다. 거래를 원장에 옮길 때마다, 해당 거래를 해당 장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표시하기 위해 문자(A, B. C)가 기입되었다. 그런 다음. 대변이 옮겨졌음을 표시하기 위해 해당 거래에 빨간 줄을 긋고, 상응하는 차변으로 균형이 맞추지 면 두 번째 빨간 줄을 그었다. 원장은 '생강' 같은 특정 제품이나 특정 사업별로 제목을 정해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파치올리는 복식부기가 무엇인지 설명했을 뿐 아니라 구체적인 거래 유형의 예를 제시했다. 따라서 독자들은 특정 형태의 계정을 기록 하는 방법을 정확히 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가계. 출장. 합자 회사 시 공공 계정을 관리하는 방법과 약국 대출금을 처리하는 방법을 설명했다. 그는 기존 회사의 장부 기재를 예로 제공하며 메디치가가 깬 규칙, 곧 소유자가 경영자를 감사해야 한다는 규칙을 강조했다.
- 파치올리의 책은 다티니와 코시모가 사용한 방법을 모든 사람이 보고 따라할 수 있도록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설명했다. 그것은 단순히 상인들을 위한 본보기 이상이었다. 또한 좋은 공공 재무를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방법과 윤리적 통제의 개요를 제시했다. 현실적인 이탈리아 독자들은 파치올리의 책을 번영하는 공화정 관리를 위한 완벽한 안내서로 보았을 것이다. 지극히 흔하지만 가장 개인적인 이탈리아의 지식이었던 것이 이제 모든 이에게 공개된 것이다. 회계실의 비밀은 벗겨져 곧 국제화되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이제 어떤 도시나 군주도 파치올리의 책으로 회계 학교를 세우고 파치올리가 묘사한 행정 엘리트를 훈련시킬 수 있었다.
상거래는 이제 수사법, 다시 말해 논증과 증명의 방식을 갖게 되었다. 인문주의자들은 논증을 펼치고 증명을 제시하는 수사법이 위대한 시민적 덕목이라고 주장한 로마의 법률가 키케로를 추종했다. 좋은 시민은 공개적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자신의 논점을 증명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시민의 의무였다. 회계장부도 도덕적 목적을 지닌 논증과 같았다. 장부의 정보가 제시되고 집계되었으며, 그 최종 합계가 성패를 위한 논증이었다. 계산은 복잡할 수 있지만, 최종 집계는 의심할 없는 주장으로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재무적으로나 법적으로나 권위를 가졌다. 잠재적으로 파치올리의 인쇄된 편람은 모든 독자에게 수학과 비율 이론과 회계를 가르칠 수 있었다. 파치올리는 자신의 책이 성공하리라는 희망을 품었다.
- 파치올리의 책은 복식부기 이론을 널리 확산시키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파치올리의 탓만은 아니었다. 파치올리의 책이 출판되는 순간, 이탈리아 상인들의 세계는 스페인과 프랑스 전제군주들에 의해 문자 그대로 공격을 받고 있었다. 총론이 발표된 해인 1494년에 프랑스와 스페인이 연이어 이탈리아 반도를 침략해. 이탈리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을 무려 60여 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로 만들어버렸다. 이탈리아 공화국 시대가 기사도의 시대로 이행했다고 흔히들 이야기하지만, 그러한 이행은 잔인했다. 그와 함께 시민적이고 상업적인 인문주의도 무력에 의해 귀족적 이상. 나아가 제국주의적 이상에 의해 무너져버린 것이다. 이 떠오르는 왕국과 제국의 새로운 시대에, 건강한 공화국과 좋은 상인에 대한 파치올리의 오랜 격언 같은 이야기는 그다지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사업과 금융과 회계장부의 윤리는 신권을 부여받은 전제군주에게도 군대에게도 궁정인에게도, 이탈리아 상업 경영자에게 그랬던 것만큼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 경제적으로는 풍요로있어도 1567년 네덜란드는 자유 국가가 아니었으며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의 지배를 받았다. 네덜란드는 원래 펠리페 2세의 부친인 카를로스 1세(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는 카를 5세)의 영토였다. 합스부르크 왕조가 통치하는 플랑드르와 네덜란드의 국민들은 국제 금융과 무역으로 (그리고 고래 기름과 어업과 치즈 생산으로) 번영을 누렸지만. 또한 스페인 제국의 과중한 세금을 견더내야 했다. 강압적인 제국의 감사관들은 늘 파산 상태인 스페인 제국을 지탱하기 위해 네덜란드 사람들의 주머니를 쥐어짜려 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스페인 정부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제도를 마련했다. 채권(공채)이 필요한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부유한 시민들에게 종신연금(복지수당처럼 매년 지불하여 만기가 되면 생명보험이나 연금을 받는 형태)을 강제 판매하여 공적 기금을 조성하는 방법을 고안했다. 네덜란드는 여기서 나오는 돈을 스페인으로 보냈다. 이자가 붙는 종신보험은 새로운 점이 전혀 없었다. 이탈리아 도시국가와 프랑스. 영국도 그런 제도를 시도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네덜란드에는 효과적인 지방세 징수 시스템인 네덜란드 재무국이 있었다는 점이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정부가 이자를 지불할 거라고 믿었다. 당시 유럽의 금리(4~5퍼센트)는 네덜란드 채권에 연동되었는데, 네덜란드의 지방세 수입이 믿을 만하다고 생각되어서 그랬던 것이다. 조세 수입은 종종 복식부기로 관리 되었고. 더 나아가 공적 조사의 대상이었다. 환금성뿐 아니라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가 신뢰를 낳았다. 그러나 누구도 지방세 징수원이나 중앙 정부의 회계 담당자에 대한 감사를 요청하지 않았다. 그들이 자기 일을 잘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 1638년 9월 1일. 프랑스의 전 섭정 왕후이자 루이 13세의 모후인 마리 드 메디시스는 의기양양하게 암스테르담을 4일간 국빈 방문했다. 펠리페 2세가 네덜란드에 대한 불운한 탄압을 시작한 지 50년 만에 많은 것이 바뀌었다. 펠리페 2세가 이끄는 무적함대의 대실패는 스페인의 쇠락에 쐐기를 박았고. 그와 함께 네덜란드의 황금기가 시작되었다. 메디치 가문 출신의 프랑스 왕비는 풍요로운 문물을 구경 하러 암스테르담에 온 것이 아니었다. 암스테르담의 대형 회사인 네덜란드 연합 동인도회사(Vereenigde Oost-Indische Compagnie, VOC)'가 이루어낸 경이로운 기적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17세기가 시작할 무렵, VOC는 잉글랜드 동인도회사보다 선적 물품은 두 배. 자 본 투자는 무려 열 배에 달했으며, 이익 면에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앞섰다. VOC는 암스테르담, 브라질, 맨해튼에서 중국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국제 교역 물품의 가격을 정했다. 또한 전함과 요새를 건설하고 군대를 배치했다. 민간 출자 회사였던 VOC는 네덜란드 정부의 국제 사업부였으며, 거의 100년 동안 작은 나라 네덜란드를 세계 무역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당시 메디치 가문의 왕후(비록 리슐리와 추기경에게 추방된 몸이 였지만)가 종교적 관용 정책이 채택되고 상대적으로 정치적 자유가 보장되고 각종 물품을 가득 실은 선박이 가득한, 운하와 기업들의 활동으로 북적이는 은행과 증권거래소가 있는 암스테르담의 부유한 시장 도시를 방문한 것에는 대단한 상징성이 있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마리 드 메디시스는 마치 미래를 방문한 것 같았다. 암스테르담은 유럽인들이 세계의 이국적인 물건들을 처음으로 볼 수 있는 경이로운 도시였으니 말이다.
- 네덜란드 사람들이 회계를 선호하는 경향이 단순히 상업 윤리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물 관리라는 네덜란드 문화의 오랜 전통에서 나왔다. 제방이 무너져 물이 범람하기라도 하면 저지대 네덜란드는 사라져버릴 터였다. 따라서 충실한 지방 관리는 생사의 문제가 되었고, 이것이 네덜란드 사람들이 회계와 책임성을 그토록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한 가지 이유가 되었다. 지역 물관리위원회가 관리하는 이러한 제방과 사구와 배수 시설과 수로가 없었다면 네덜란드는 생존할 수 없었다. VOC의 다른 지역위원회들과 마찬가지로, 물관리위원회의 수장은 지역 주민들에게 직접 설명할 책임이 있었다. 그래야 마땅했다. 만일 공공기금과 공공사업을 잘못 관리하면, 지역이 물에 잠겨 많은 사람이 죽게 될 터였다 '피해를 입는 자가 물을 막는다"라는 네덜란드 속담이 있다. 네덜란드 최고의 공학자이자 복식 부기의 대가인 스테빈이 최고 감찰관이 된 것도 아마 그 때문이리라 그것은 또한 지방 회계가 건전해야 하고 비교적 투명해야 하는 이유도 설명할 수 있다. 현지 감사는 건전한 지방 행정과 치수를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실용적 합의'로 인식되었다.
- 콜베르의 죽음 이후 중세에 갇힌 프랑스
재무 정보가 국가의 중앙 원장으로 가지 못하자 프랑스는 계속 중세의 전통에 머물렀다. 한 대신의 재무 기록은 국가의 재산이 아닌 개인의 소중한 재산으로 간주되었다. 18세기 프랑스 정부의 끝없는 실패는 비밀스럽고 어리석은 국왕의 명령과 끔찍한 재정 관리에서 기인 했을 뿐 아니라, 국가 기구를 분열시킨 루이 14세의 정책에서도 기인한다. 국가의 회계 능력은 제한되고 몇몇 대신과 그 가족의 손에 놓여 있었다. 이것이 모든 가능성과 재능과 힘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프랑 스가 정체되고 몰락하기 시작했는지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1715년 루이 14세가 사망할 무럽, 프랑스는 효과적인 회계 시스템 없이 파산한 상태였다. 이제 75년간의 재정 위기와 엄청난 심판이 프랑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 월폴은 회계와 수학적 계산이 정치적 삶의 일부가 된 영국 특유의 환경에서 성장했다. 영향력 있는 정치가이자 경험론의 창시자인 프랜 시스 베이컨(1561~1626년)은 정치 행정에 과학적 사고와 상업적 방법의 전통을 세웠다. 베이컨은 자연과 자연의 관리, 상거래를 주의 깊거 살피는 것이 물질적 세계에서 관찰을 통해 신의 존재를 연구하는 행 위의 일부라는 관념을 개척했다. 베이컨과 정치 철학자 토머스 홉스 모두 회계를 상업적 관리의 도구일 뿐 아니라 정치적 사유의 도구로 보았다. 홉스는 리바이어던, (1651년)에서 논리적 이성의 탄생 자체를 회계 또는 계산의 공으로 돌렸다. 홉스는 덧셈과 뺄셈 없이는 정치를 할 때 과연 무엇이 도덕적으로 올바른지 찾기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때까지 누구도 회계와 윤리학과 철학을 그토록 단호하게 연관 지은 적이 없었다.
- 사업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부가 정확한 회계의 토대 위에 있음을 알았다. 증기기관을 발명한 과학자이자 스코틀랜드 장로교도인 제임스 와트(James Watt, 1736~1819년)는 다양한 사업과 공장에서 회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다. 도제 생활을 하던 젊은 시절에 와트는 아버지에게 돈을 빌렸고. 부채를 갚고 아버지에게 진전된 상황을 보여주기 위해 매일 열두 시간 넘도록 일한 뒤 따로 시간을 내서 복식장부를 기록했다.
와트의 동업자 매튜 볼턴(Matthew Boulton, 1728~1809년)은 실험실과 공장과 회계장부를 생산 시설의 일부로 보았다. 그는 과학에서 필요로 하는 꼼꼼함과 정확함이 회계장부에도 동일하게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볼턴과 와트 회사의 수석 회계사는 한 생산 주기에서 실제로 이익이 발생하는지 보고 싶어 한 상인과 제조업자를 위해 특별한 종류의 회계를 창안했다. 산업 생산이 증가하면서 기록할 항목이 늘어남에 따라, 와트 같은 실업가들은 주체할 수 없이 많은 재무 서류를 기록하고 관리하느라 진을 빼야 했다. 실제로 와트는 진한 잉크로 쓴 문서를 특수한 얇은 종이로 압착하여 잉크가 찍히도록 하는 복사기를 발명했는데, 부분적으로 이것은 재무 기록을 보존하는 데 필요한 회계 필경사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서였다. 회계가 산업 경쟁력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인식한 그는 다른 회사들이 장부를 얼마나 잘 기록하고 있는지 염탐했다. 그는 회계 방법이 산업 기밀일 수 있음을 이해한 최초의 인물 중 하나였다.
- 웨지우드는 생산 원가와 노동, 가격 책정을 관리할 수 있게 해주는 상세한 원가 회계를 창조했을 뿐 아니라 회계 이론을 제시했다. 원가 회계에 관한 그의 글들은 경제사에서 가장 기본적인 이론이 되었다. 웨지우드는 예상 비용을 예측하기 위해 원가의 분류학 또는 순위를 고안했다. 그리하여 확률이 그의 방정식과 경영 방법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웨지우드의 경우에 그 방식은 효과가 있었다. 1773년 가격 폭락이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어 도자기와 기타 상품에 영향을 미쳤 다. 웨지우드는 생산 비용을 낮추고 전략적으로 가격을 책정하고 생산과 국제 시장 진출을 확대했다. 웨지우드 브랜드의 장수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웨지우드 브랜드는 오랜 경제적 풍파를 견더냈고 웨지우드는 큰 부자가 되었다. 1795년 웨지우드 사망 시점의 재산은 약 50만 파운드였다(오늘날 가치로 4,500만 파운드에 해당하지만. 구매력 기준으로 볼 때 18세기에는 휠씬 더 가치가 컸다).
- 존 애덤스가 1778년 파리 여행에서 프랑스가 날로 심각해지는 빈곤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와중에도 구체제 프랑스 왕실과 특권층 귀족들은 호화롭게 번쩍이는 세계에 둘러싸여 있다고 지적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정부는 일부 지출을 삭감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정부가 이자를 지불하지 못할 위험성 때문에 금리가 급등했다. 부채와 인플레이션, 금리를 낮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인구의 3퍼센트에도 못 미치지만 프랑스 재산의 약 90퍼센트를 소유하고 있는 프랑스의 오만한 귀족 계급 대지주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었다. 100여 년 동안 프랑스 엘리트들은 자신들에게 5퍼센트 이상의 세금을 부과하려는 시도. 또는 결과적으로 세금 부과로 이어질 수 있는 모든 개혁에 저항했다. 특히 국가적 회계감사를 자신들의 재산을 측정하여 그만큼의 세금을 부과하기 위한 첫 단계로 보고 강력하게 저항했다
- 공장보다 회계장부에 의존한 식민지 개척 '사업
자크 네케르의 보고서는 프랑스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그의 글과 회계 개혁은 미국 헌법 입안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유럽과 신세계의 건국자와 행정가들은 오랫동안 존재해온 회계라는 방법의 새로운 쓰임새를 발견했다. 회계는 정치적 책임성의 이상을 토대로 헌법을 제정한 젊은 국가에서 비옥한 땅을 찾았다. 건설된 이곳 미국에서 회계의 원칙을 중심으로 정부를 구성할 기회가 새로 생긴 것이다.
미국은 헌법의 국가이기 전에 회계장부의 땅이었다. 많은 이들이 고귀한 계획이라고 여겼던 것이 애초에는 상업적 동기의 모험으로 시작되었다. 1620년 메이플라워 서약(신세계로 항해 여행을 하기로 한 청교도들의 약속)은 투자 동업자들이 수익과 지출을 공유하기로 서명한 상업적 계약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계약은 회계장부에 기록되었다. 그들은 종교적인 이상에서 영감을 얻은 사람들이었지만, 초기 아메리카의 식민지 개척 사업은 이익을 내기 위해 조직되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네덜란드.프랑스.잉글랜드의 동인도회사와 마찬가지로, 아메리카에서 활동한 초기 식민지 개척 기업은 영국령 북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영국 왕실이 무역 독점권을 인정한 칙허 회사였다
매사추세츠베이컴퍼니(The Massachusetts Bay Company)는 잉글랜드 국왕 찰스 1세로부터 칙허를 받은. '도급자(지사와 부지사, 경리관)'들이 설립한 민간 주식회사였다. 보스턴 청교도 필그림의 지도자 존 화이트가 추진한 매사추세츠베이의 '플랜테이션' 프로젝트는 식민지 개척 사업이자. 찰스 1세가 통치하는 잉글랜드에서 박해받던 청교도 칼뱅주의자들에게는 안전한 피난처와 종교적 자유를 찾기 위한 시도였다 1629년 잉글랜드의 케임브리지에서 매사추세츠베이컴퍼니의 주주들이 만나서 케임브리지 협정에 서명했다. 존 윈스럽과 토머스 더들리가 이끄는 주주들은 이주를 원치 않는 일부 주주들을 뒤에 남겨놓고 타르를 칠한 목재로 만든 90피트짜리 배를 타고 (이미 거주자가 있었 지만) 미지의 땅으로 2개월에 걸친 힘겨운 대서양 횡단을 감행하여 보스턴과 뉴타운이라는 도시를 건설했다. 찰스 1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찰스 강의 '대형 굴발'(찰스 강에 구두주걱처럼 생긴 대형 굴이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옮긴이)을 사이에 두고 보스턴 맞은편에 위치한 뉴타운은 훗날 케임브리지라는 이름으로 개칭된다
- 비록 방종하긴 했지만, 워싱턴은 네케르도 월폴도 감히 하지 못한 일을 해냈다. 자신의 진짜 장부와 엄청난 지출을 공개했으며, 그러고도 권력에 타격을 입지 않은 것이다. 그는 또한 지금까지 극소수의 사람만이 이루었던 위업을 달성했다. 전쟁에서 이기고 국가를 건설한 것이다. 분명 그런 점 때문에 그의 회계 기록이 덜 터무니없게 보였을 테다. 1789년 4월 30일.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기 한 달쯤 전에. 그는 선거인단 전원의 만장일치로 초대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마음 만 먹었다면 평생 머물 수 있는 자리였고 사치스러운 취향을 가졌던 그였지만 두 번의 임기만을 마치고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났다
- 공인회계사의 등장
자본주의가 대륙과 제국의 경계를 넘어 팽창함에 따라, 정부도 더디지만 체계적으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대규모 철도 관리는 끊임없는 재무 정보와 함께 심각한 재무 스캔들과 위기를 낳았고, 대기업을 규제하기 위해 정부도 팽창해야 했다. 철도는 위험과 자유방임 경제의 불가능성까지 노출시켰다. 철도 회사가 붕괴하거나 투자자를 삼켜버 린다면 자본주의는 물론이고 사실상 국가와 정부도 제 기능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관리∙감독이 필요했고. 회계사들은 근대 자본주의의 공식 규제자로 승격되었다. 정부 규제자와 민간 회계 법인은 철도 회사가 만든 회계 정보를 중심으로 발전했고, 철도 회사는 철도 회사대로 정부 규제자에게 대응하거나 규제자의 눈을 피하기 위해 회계 기록을 재단해야 했다
- 미국 회계 산업의 선두 주자, 프라이스워터하우스
회계 원리를 토대로 건국된 미국은 아직 이런 산업 팽창에 대처할 만큼 회계라는 업종이 발달하지 못했다. 1870년대에 미국은 찰스턴에서 로체스터에 이르기까지 잉글랜드계와 스코틀랜드계 회계사들이 넘쳐났다. 프라이스워터하우스앤드컴퍼니는 미국 시장에서 조기에 성공하여 두각을 나타낸다. 1890년 9월 11일, 이 회사는 루이스 데이비스 존스를 뉴욕으로 보내 브로드웨이 45번가에 지사를 열고 미국 동부와 중부, 남부의 업무를 처리하게 했다. 1890년대에는 일련의 다 규모 기업 합병을 시작한 J. P. 모건이 30여 개 회사를 사들여 아메리 칸스틸앤드와이어를 세웠고, 농기구 회사 다섯 군데를 합병하여 인터 내셔널하비스터를 만든다. 모건은 자신이 구입한 회사들을 감사하고 싶어 했고. 그 일을 맡게 된 프라이스워터하우스는 1897년에 이전 5 년간의 수익을 합한 것보다 더 많은 수익을 올렸다. 이 수익을 기반으로 프라이스워터하우스앤드컴퍼니는 미국 회계 산업의 선두 주자가 된다.
- 모르긴 몰라도 가장 중요한 개혁은 감가상각을 일회성 지출이 아닌 지속적인 필수 지출로 간주하여 운영비와 별도로 계산해야 한다는 주장일 것이다. 회계사들이 묻고 싶은 질문은 '수익이 얼마인가?'였다. 그런데 감가상각 비용(시간의 경과에 따른 유지∙보수 비용)을 감안하면 그것은 무척 까다로운 질문이었다. 수익을 가져오는 자산이 장기적 비용을 숨기고 있을 수 있으며, 그래서 궁극적으로 이익을 잠식할 수 있었다. 1880년 찰스 E. 스프라그는 '회계는 가치의 역사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회계 대수학(algebra of accounts)'을 창조했다. 그의 방정식 자산=부채+소유권(A=L+P)'은 자본을 평가할 때 가치 하락과 위험을 고려했다. 달리 말해, 자본이나 자기자본 또는 소유권(실제 소유한 재산)은 자산에서 부채와 필수 지출, 가치 하락을 뺀 값이다. 스프라그의 방정식을 사용하면 거래를 계산하고. 순재산. 골 부채를 전부 제외한 소유 재산을 판단할 수 있었다. 이로써 회계사들은 철도와 같은 복잡한 데이터 집합에서 이익과 공정 가격을 계산할 수 있었다. 훈련받지 않은 눈으로는 그 모든 작동 부품들에서 자본과 부채를 분리할 수 없었다. 1800년대 말에는 감가상각이 회계 이론의 중심 요소가 되었고. 프레더릭 W. 차일드 같은 회계사들은 가치 하락을 측정할 뿐 아니라 그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특별 계정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볼 때 가치 하락 비용을 상쇄하기 위해서는 보유 현금이 필요했고, 따라서 그것을 목록으로 만들어야 했다.
- 테일러는 기업 내에서 원가를 보고하고 정보를 유통하는 새로운 시스템을 조직했을 뿐 아니라. 회계 사무실을 기획실 내부로 옮겨 회계 분석에서 곧바로 산업 및 경영 전략을 개발할 수 있도록 했다. 먼저 생산 공정의 각 부문에서 원가를 열거한 카드를 작성하도록 했고, 원가 부서는 이 원가 카드를 수집하고 분석했다. 이때 생산 사슬의 모든 부문을 분석할 수 있도록 각각의 원가를 분류하고 집계했다. 또한 원가 평가를 정확하게 하도록. 원가 사무실을 만들어 회계 사무실에 보 고하게 했다. 이익이란 정확한 이익 계산에 입각하는 것이며. 이 이익 계산은 정확한 노동 원가와 재료비, 생산에 필요한 시간의 정확한 평가에 입각하는 것이라고 그는 결론지었다. 효율성은 노동자들의 게으름과 무지를 만회하므로 결국 이익을 산출했다. 존 듀이는 테일러의 논리에 따라 제러미 벤담의 계산이 노동자들은 노동과 고통을 동일시하며 그래서 본질적으로 게으르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테일러주의는 계산에서 이러한 손실을 만회했다. 테일러의 방법은 많은 차원에서 성공적이었다. 그는 베들레헬철강에서 생산을 증대하여 막대한 수익을 올렸을 뿐 아니라. 최초의 경영 컨설턴트가 되었고 그의 조수들은 철도와 노동자의 심리를 관리하기 위한 이론을 제시했다. 시카고 대학의 회계사 제임스 매킨지에 의해 시작된 유명한 컨설팅 회사 매킨지앤드컴퍼니와 마찬가지로, 하버드 경영대학원도 부분적으로는 테일러에게서 영감을 받아 설립된 것이다
- 미국의 감사 법인 파트너들은 정부가 금융시장을 규제하는 데 너무 큰 역할을 맡아서 재무 독립성과 혁신을 저해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19세기 중반 이래로 미국 정부에 감사와 표준을 제공해온 회계감사 회사 측에서는, 의무적으로 감사를 실시할 경우 금융 회사에 적대적일 수 있는 정부 감사관이 공인회계사의 역할을 대신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1929년의 혼란스러운 여파로 무능한 금융 부문에 대한 신뢰도가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상황에서 이러한 주장은 설득력을 잃었다. 규제를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프 라이스워터하우스의 조지 0. 메이 사장은 차라리 시장 개혁과 규제를 돕는다면 감사관들의 독립적인 역할과 신뢰를 유지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여전히 존경받던 민간 회계사들은 정부의 규제 임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회계사들은 자발적으로 SEC 재무제표 제출 양식을 설계하고 공식적인 감사 지침을 작성했
다. 메이도 오늘날 갭(Generally Accepted Accounting Principles, GAAP)으로 알려진. 일반적으로 수용되는 회계 원칙의 기본 규칙을 작성하는 일을 도왔다.
- 자제력과 높은 기준은 철저한 훈련을 통해 얻을 수 있다고 앤더슨은 믿었다. 그는 "똑바로 생각하고 똑바로 말하라"라고 한, 노르웨이 출신 어머니의 단순한 원칙을 바탕으로 회계 유토피아를 건설하려 했다. 도덕적 청렴성과 자제력. 치열한 경쟁에 대한 앤더슨의 이상은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의 토대가 된다. 아이비리그와 다른 경쟁 대학 출신들을 이용하는 대신. 앤더슨은 자신이 직접 훈련시킬 수 있는 중서부 출신의 근면한 인재들을 찾아냈다. 그리고 시카고 외곽 세인트찰 스에 있는 전 세인트도미니크 대학 캠퍼스 5만 5.000에이커의 부지어 회계 대학을 세웠다. 전성기에는 500명의 정규 직원과 1800명의 정규 학생. 6만 8000명의 시간제 학생이 매년 이 캠퍼스를 거쳐 갔다 이 완벽한 회계의 세상에서. '껍질콩(green bean)'이라고 불리는 신참 들은 캠퍼스에서 생활하며 훈련을 받았다. 가까운 숙소 건물에는 피트너들이 상주하며, 셔츠와 넥타이뿐 아니라, 노동절에서 현충일까 지는 펠트 모자를, 그 이후에는 밀짚모자를 지정된 옷걸이에 걸게 하는 등 종교 집단을 방불케 하는 엄격한 규율을 주입시켰다 '앤드로이드(Android)' 라고 불리기도 하는 앤더슨의 직원들은. 시카고 출신이건 런던 출신이건 쿠알라룸푸르 출신이건, 모두 분명한 기준과 경쟁력. 위계적 충성이라는 동일한 모델에 맞도록 훈련되었다. 이 모델은 1970년에도 변함없이 유지되었다. 1990년대에 한 신참은 앤더슨 훈련 과정에 처음 참여한 순간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건 크메르 루즈 시대의 개막이다. 모두들 마치 방금 태어난 신생아가 된 것 같다." 처음부터 아서 앤더슨은 프라이스워터하우스의 영국 전통에서 탈 피했다. 엄격한 청렴성을 지키며 일한다는 전제하에, 회계사는 '새로운 기업에 대한 투자나 기존 사업 확대의 타당성'에 대한 컨설턴트 역 도 해야 한다고 믿었다. 원가 계산 모델을 이용하여 사업 전체를 재설계할 수 있고 업계의 동향도 재설계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빅 에이트(Big Eight)' 라고 불리는 여덟 군데 감사 법인(프라이스워터하우 스, 딜로이트, 해스킨스앤드셀스, 피트마워미첼, 아서앤더슨, 투쉬로스, 쿠퍼스앤 드리브랜드. 언스트앤드위니. 아서영)들 간에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모두들 이제 컨설팅으로 영업 범위를 확대해야 할 상황에 처했고, 너나 할 것 없이 자신들이 독립적으로 감사를 수행해야 할 똑같은 기업으로부터 막대한 컨설팅 계약을 수주함에 따라 독립성의 기준선도 희미해졌다.
- 인플레이션은 가치를 측정하는 방법에 대한 생각 자체와 회계의 정 확성을 위태롭게 했다. 인플레이션으로 통화의 가치가 하락하면, 통 화의 평가절하. 곧 역사적 가치(취득원가부터 시간 경과에 따른 변화를 합 산한 수치)가 항상 자산의 실제 가치(회계 용어로 대체원가와 취득원가의 차액)를 반영하지는 않았다. 이는 기업들이 통화의 평가절하, 평가절상 의 수치를 허위로 기재해 수입을 적게 반영하고 수치를 조작할 수 있 었기 때문이다
기업의 회계 조작을 관리할 방법을 찾던 회계사들은 '손상차손 인식' (impairment recognition: 시장가치의 급격한 하락 등으로 자산의 미래 회수 가능액이 장부 금액보다 낮아질 가능성이 있으면 이를 재무제표상 손실로 인정하 는 것을 말함ㅡ음긴이)이라는 개념을 고안하고, 이 개념에 따라 허위 보 고를 고려하여 진정한 기업 자산을 계산하려 했다. 그들은 기업 자산의 '공정 가치'를 평가하기 위해 '시장 대 시장' 방법을 이용했다. 이것은 역사적 원가(과거에 실제로 발생한 거래 금액을 뜻함. 실제원가 올긴이 또는 취득원가가 아니라 현재의 시가를 기준으로 기업을 평가하는 것 을 뜻했다. '공정 가치' 회계는 또한 달러의 가치가 늘 동일하지는 않다는 생각을 토대로 했다. 당일의 달러 가치는 종합물가지수를 이용 해 1달러의 가치가 얼마인지에 따라 계산해야 했다. 이는 과거의 달 러 액수가 현재의 `실제' 구매력으로 바뀌는 것을 뚝하다. 그러나 모든 회계사가 공정 가격이 최선의 도구라는 데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공정 가격 역시 조작될 가능성은 있었다. 가치에 대한 개념이 불확실해짐에 따라, 회계는 추측성이 강해졌고 회계장부는 정확히 감 사하기가 한층 더 힘들어졌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회계 스캔들과 불가해한 경제 논쟁이 계속 됨에 따라 대중이 이런 주장들 속에서 길을 잃을 뿐 아니라 감사와 대차대조표에 대한 신뢰가 떨어져서 그런 것들을 아예 무시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당시 프라이스워터하우스의 사장 헤르만 베비스는 대중이 회계 법인에 기대하는 것과 회계 법인이 실제로 할 수 있는 것 사이에 격차가 있다고 불평했다. 문제는 대중의 신뢰만이 아니었다, 1966 년 무렵 회계감사 회사들은 연방소송규칙(Federal Rules Procedure)' 과 1931년 울트라마레스(Ultramares) 판결의 기준이 적용됨에 따라. 그들 이 감사한 기업이 저지른 분식회계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되었다. 울트라마레스 판결은 개별 주주들에 대한 책임이 기업의 외부 회계감사 회사에 있다고 간주했다. 만일 어떤 기업이 허위 장부나 보고서를 제 출했는데 회계사가 이를 인식하지 못했거나 보고하지 않은 경우, 해당 기업과 회계감사 회사 모두 법적 조치에 직면하게 된다는 판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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