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Quote of the day 2024. 3. 29.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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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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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체는 우리에게 귀한 도구를 하나 마련해주었다. 바로 '위대한 건강'이라는 개념이다. 아무 문제 없이 반짝반짝 빛나는 그러한 '좋은 건강'이라는 이상은 많은 사람을 소외시킨다. 반면 '위대한 건강'은 상처, 상흔, 모순, 장애, 질병을 모두 끌어안는다. 위대한 건강은 경직되는 법 없이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한다. 심지어 우리 가 지닌 모순도 우리를 명징함에 가까워지는 길로 인도할 수 있 다. 우리의 약한 부분이 무엇이건 상관없다. 우리는 한 걸음씩, 밀 리미터만큼 미미할지라도 조금씩 길을 나아갈 수 있다. 잘못 내디 딘 발걸음과 날마다 겪는 근심 걱정의 한가운데에서도 자신을 단 련할 수 있다.
- 고대 그리스인들은 지혜에는 밀접하게 연결된 두 가지 측면, 즉 소피아 sophia 와 소프로시네 Sophrosyne가 있다고 생각했다. 지혜를 뜻하는 소피아는 관조적이 고 이론적인 지혜이자 어떤 관점에서는 이지적인 탁월함을 의미 한다. 실천적 지혜인 소프로시네는 특히 감정을 절제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마음의 균형을 잡는 일은 매우 섬세한 작업일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실행하는 데는 즐거움이 따른다. 이것은 '지혜'라는 말의 라틴어 어원에 '풍미 Savour'의 뜻이 담긴 것을 보면 알 수 있 다. 사피엔티아 Sapientia, 즉 지혜를 함양하는 자는 거기에 몰두하면 서 기쁨과 즐거움을 느낀다. 거짓 행복과 현실 왜곡에 작별을 고하는 자유의 기쁨, 세상을 편향된 눈으로 보게 하여 결국 세상을 고통스럽게 인식하도록 만드는 오해들로부터 해방되는 기쁨을 경험하는 것이다.

- 내가 철학에 매료된 이유는, 철학이 그 유명한 아타락시아Ataraxia, 즉 영혼이 아무런 문제도 겪지 않는 마음의 평정 상태를 약속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나를 돌아보니, 마음을 흔드는 수많은 근심 걱정에서 벗어나는 행운은 내게 전혀 없는 것 같다. 그래도 명상 덕분에 매일매일 일종의 기적이 일어 나고 있다. 번민이 몰려와도 그냥 웃어넘기고, 더는 두려움을 두 려워하지 않는 경지에 이르는 경우도 많다.
이런 경지에 도달하는 데 꽤 도움 되는 훈련 비법이 하나 있다. 두려움, 번민, 슬픔 등을 경험하는 의식은 절대 동요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하면 된다. 사람의 마음 안에는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고 무사한 상태로 남아 있는 부분이 존재한다. 상처를 주 는 그 어떤 충격도 건드릴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부분, 의식이다. 의식은 커다란 곰솥에 비유할 수 있다. 곰솥 안에는 온갖 것이 다 들어 있다. 기분을 좋게 해주는 당근, 상추, 병아리콩도 있고 눈물 을 쏙 빼게 하는 양파도 들어 있다. 불행에 빠지면 자아는 다른 맛 은 음미하지 않은 채 양파만 씹는다. 하지만 우리의 의식을 곰솥 과 같다고 생각하면, 분노와 아픔에 이르지 않고 감정을 그냥 홀 려보낼 수 있다. 이것들은 그저 많은 재료 중 하나에 불과하니까.

- 늘 불안에 떠는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떠나 이 세상의 규 칙을 따르지 않는 또 다른 세계에 산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 이 런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 이 가상의 세계에서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그곳에서는 위험성이 1/10억에 불과할지 라도 이런 미미한 가능성에 사로잡힌다. 이는 불안을 모르는 사람 들의 세계에서 작동하는 논리와 다르다.
따라서 불안을 극복하고 평정심을 되찾기 위한 최선책은 현실 로 돌아오는 것이다. 걷기, 자연 감상하기, 일하기, 외출하기, 움직이기, 친구와 수다 떨기 등 때로 터무니없어 보이는 방법을 동원 하면 된다. 그러면 우리는 지금 여기 존재하고 있는 것, 우리에게 맞서 싸울 자원이 있음을 상기시켜주는 것 안에서 다시 닻을 내리 고 정착하게 된다. 한밤에 찾아오는 번민이 가장 격렬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밤에 혼자 있는 데다 활동이나 취미로 기분 전 환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역설적이지만 불안에 떠는 사람들은 막상 어려움이 닥치면 그 시련에서 잘 벗어난다. 하지만 어려움을 상상하고 예측하고 기다 리고 계획하느라 완전히 지쳐버린다. 왜냐하면 불안한 뇌는 많은 에너지를 써가면서 무척이나 근엄하게 가상을 현실처럼 취급하 기 때문이다.
이때 도움 되는 방법이 있다. 두려움이 제자리를 지키도록 기꺼 이 받아들이되, 두려움이 전부가 되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마음 챙김 명상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두려움 외의 모든 것에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명상이란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빠지는 게 아니 라 온몸을 동원하는 것이다. 명상하는 동안 우리는 자기 호흡에 주목하고, 자기 몸과 다시 연결하고, 자기 주변의 소리를 듣는다. 이렇게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현실의 도움을 받아 극단적인 불안 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다.

- 친절은 콘크리트 포장길 사이를 비집고 나와 싹을 틔운 작은 풀과 같다. 우리가 보기에는 들어설 자리가 없는 듯하지만, 결국 이겨내 고 따뜻한 분위기를 만드는 게 바로 그것들이다.
친절과 자신의 가치판단을 분리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모든 인 간은 친절을 베푸는 대상이 될 자격이 있다. 친절은 보상이 아니라 그들의 인간미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능한 한 친절해지자. 우리와 다른 사람들, 우리가 판단하기에 악한 사람들에게도 말이다. 친절은 그들에게 인간미와 죄의식을 일깨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날마다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최선을 다해 친절한 시선과 몸짓, 말을 아끼지 말자. 가능한 한 늘 '친절을 베푸는 사람'이 되자. 나무가 산소를 만들 때, 인간이 친절을 만들어낼 때, 지구와 인류는 더 건강해진다.

- 행복은 지혜의 목적이 아니라 결과다. 호기심, 뒤로 물러서기, 친절, 세상과 인간과 삶에 대한 사랑 등등. 이 모든 것이 행복해지는 데 도움 되지 않는다면 어떨까? 이것은 잠이 그렇듯, 모든 감정이 그렇듯, 행복한 상태도 돌연히 등장하기 때문이다. 행 복은 소환할 수도, 선언할 수도 없다. 그저 촉진할 수 있을 뿐이다. 행복이 찾아오는 데 필요한 조건을 다 찾아 모으면 행복이 올 가능 성이 커진다. 그래도 찾아오지 않는다면? 뭐, 그래도 큰 문제는 아니 다. 지혜는 행복의 직접적 원천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흥미롭기 때문 이다.

- 영적 삶에서 이루어야 하는 대업 중 하나는 우선 우리가 통제력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 경우, 코헬렛이 큰 도움이 된다. 이 구약을 읽으면 평화를 발견 해야 하는 곳은 바로 희망 없는 혼란 속이라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성경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유명한 후 렴구를 좋아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요, 바람을 붙잡는 일이다.'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면 많은 환상에서 치유되고, 내가 내 인생의 흐름을 좌지우지한다고 믿고 싶은 유혹에서 벗어난다. 언젠가는 모두 무너지게 마련이며 모든 것이 무상한 법이다.

- 나는 모든 것이 무너지기 쉽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일종의 해방감을 느낀다. 마침내 기쁜 마음으로 안정과 확고부동함을 포기 하고 무상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법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내 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영원히 정착할 육지를 찾으려 든다 면 가혹하지만 실망하게 될 것이다. 붓다의 가장 고귀한 진리의 가르침은 모든 것이 고통이요 무상임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나 는 티베트 학자도 산스크리트 학자도 아니지만, 용게이 밍규르 린 포체 Yongry Mingyour Rinpotche가 《지혜의 행복》에서 지적하듯, 붓다 의 진단을 '모든 것이 삐걱거린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겠다. 또한 우리가 무엇을 하든, 아무리 우리가 내적으로 완벽한 상태에 있더라도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일은 늘 있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베 르나르 캄팡Bernard Campan이 말했듯, 유쾌히 삐걱거리게 놔두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명상 수행은 이 세상을 빠져나오는 것이 아 니라, 이런 삐걱거림 속에서 평화를 이루며 공생하는 법을 터득하 는 것이다.

- 자기 몸을 돌본다는 말은 몸에, 몸의 외향과 탁월함에 집착한다는 뜻이 아니다. 휴식, 긴장 풀기, 쾌락, 양식, 운동 등 자기 몸에 필요한 것을 딱 필요한 만큼만 제공한다는 의미다. 이렇게 돌보면서 몸에 평화가 오면 몸은 스스로 알아서 어려운 상황을 극복한다.

- 법리적 유죄가 아닌 심리학적 의미에서 죄책감이란 이런저런 식으로 행동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느낌, 따라서 잘 못을 저질렀다는 느낌을 말한다. 간혹 죄의식은 현실과 동떨어지 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들은 사소한 일로도 아주 쉽 게 죄책감을 느끼지만, 같은 상황에서도 무슨 일이 되었건 죄책감 을 거의 느끼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심리적 죄책감과는 달리, 후회의 감정에는 잘못의 도덕적 측면 이 포함되지 않는다. 우리는 저지른 실수를 단순히 후회할 뿐 덜 감정적이고 더 이성적인 시선으로 자신이 한 일과 그 결과를 바라 본다. 그래서 "죄책감을 느낀다"라고 하지만 "후회감을 느낀다"라 고 하지는 않고 단순히 "후회가 든다"라고 한다. 이런 표현의 차이 를 통해 죄책감을 지배하는 측면을 잘 알 수 있다.
죄책감과 후회에는 심리적 기능이 있다. 우리가 저지른 실수를 평범한 일이 되게 만들지 않고, 우리에게 압박을 주어 실수를 깊 이 생각하고 기억 속에 새겨서 다시 반복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들게 한다. 따라서 죄책감은 유용한 것이다. 문제 되는 것은 죄책감이 지나치거나 잘못 어긋나는 경우다. 그런데 어떤 면에서는 좋은 신호이기도 하다.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대개 공감력이 있고 타인에게 신경을 쓰며 올바르게 행동하려 마음 쓰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 실수와 잘못을 혼동하지 말라. 실수했다고 인식하면 후회하게 되는데, 이는 발전에 도움 된다. 반면 잘못했다고 느끼면 죄책감 때문에 심히 괴로워지는데, 이는 발전보다는 수치심 에 갇히게 된다.
죄책감에 직면하면? 받아들이도록 한다. 한때 '성찰'이라고 했던 작 업을 실행해서 미래를 위한 교훈을 얻도록 한다앞으로는 어떻게 다르게 해 야 할까? 가능할 때마다 고치고 사과한다.

- 당신 내면을 황폐하게 만드는 문제에만 집중하지 않도록 해요. 당신이 의기소침해지거나 절망감을 느낀다면, 그건 아마 상황이 정말로 의기소침할 만하거나 절망적이어서 당장은 간단한 해결 책이 없기 때문일 거예요. 해결책이 있다면 분명히 나타날 테고, 없다면 다른 일들이 생길 거예요. 어떤 경우가 됐건, 눈앞의 문제 를 필요 이상으로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 마음속 한 귀퉁이에만 틀어박혀 있지도 마세요. 집 밖으로 나가고, 움직이고, 정리 정돈 을 하고, 달려보세요. 혼자만 있지 말고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눠 보세요. 꼭 당신 문제에 관해 이야기할 필요는 없어요. 당신을 좋 아하는 사람, 당신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사람, 당신에게 조언과 위 로를 줄 수 있는 사람과 교류하세요.
그런 다음, 이렇게 의기소침하거나 절망적인 시기를 벗어나면 그냥 넘어가지 않는 것이 중요해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되 돌아보고, 앉아서 글로 써보고, 곰곰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세요. 지금은 그 절망에서 벗어나 어디쯤 와 있는지도 잘 관찰해보 세요. 왜 지금은 절망이 없는지, 어떻게 해서 사라졌는지 그 이유 를 파악해보세요. 아마 절망이 슬픔으로 바뀌었을 뿐일 거예요. 이제 당신은 더는 절망적이라고 느끼지 않아도 돼요. 그렇다면 왜 전에는 절망의 구렁에 빠졌던 걸까요? 그때의 당신 상태는 어 땠나요?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떤 단계들을 밟았나요? 결국 당신이 살아남은 그 '별일 아닌 일'로 말미암은 절망, 또는 거의 별일 아닌 일 때문에 생긴 절망의 순간들을 기억하세요. 그리고 절망의 '심미가'라고도 불리는 에밀 시오랑 Emil Cioran 의 말 '우리 는 모두 어릿광대다. 우리는 각자의 문제를 딛고 살아남는다'를 명심하세요."

- 우리 뇌에는 명상은커녕 주의를 분산하려는 습성이 있다. 기본적으로 평온함은 뇌의 취향과 맞지 않는다. 뇌는 판단하고, 비난하고, 비교하고, 근심하고, 과거로 도피하고, 앞질 러 생각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한마디로 허튼짓을 하고 망 상에 빠지게 마련이라는 말이다. 용게이밍규르 린포체가 설파한 독특한 수행법은 하루에 열 번 멈춰 서서 관찰하는 것이다. "아, 이런! 나는 철저히 명상을 안 하고 있군."
다시 말해 '난 완전히 주의가 분산되었어'라고 깨달으라는 뜻이 다. 자신의 주의가 분산되었음을 깨달을 때가 바로 마음속에 정신 이 현존하는 순간이다. 자, 그러면 자유는 이미 시작된 것이다! 우 리 마음을 이루는 요소들은 밤낮으로 모든 일에 관심을 가지고 중 시하게 만든다. 하지만 나는 세상에서 가장 평화롭고 고요한 상태 가 되면 이 거대한 잡동사니 같은 감정과 경솔한 판단을 거의 비 웃는 듯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아, 이런! 내가 삶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었네!'
'오늘 하루를 다 망쳐놓은 주인공이 바로 이놈의 엉뚱한 생각이었군.'
마음 수련이란 자기도취에 조금도 빠지지 않고 무한한 해석 능력을 지닌 우리 뇌를 자세히 살펴보려는 작업이다.

- 누구나 그렇듯, 나도 실패보다는 성공이 좋다. 성공이 더 기분 좋고 만족스러울뿐더러 가치 있기 때문이다. 그러 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실패했을 때 더 많이 성찰하고 다시 검토 하게 되어 결국 발전할 수 있었다. 요컨데 내게는 두 영역 모두 필 요했던 것 같다. 성공의 기쁨이 주는 에너지와 자신감, 그리고 실패의 불편함으로 얻게 된 신중함과 연습 말이다.

- 직업상 항상 쉬운 일만은 아니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의사들은 평균적으로 환자의 말을 20초나 30초만 듣고 끼어든다고 한다. 이들은 증상을 찾고, 환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을 신속히 찾고, 대 화의 주도권을 잡는 경향이 있다. 내 동료들 중 경험 많고 나이 지 긋한 몇몇 일반의의 말을 들어보면, 환자를 볼 때 저지르는 실수 는 모두 경청하는 과정에서 나온다고 한다. 환자들이 하고 싶은 말을 충분히 다 하게 하지 않았거나, 환자들에게 충분한 질문을 하지 않았거나, 의사로서 생각하는 방향으로 환자들을 너무 일찍 유도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진단 후 처방하고 조언하는 것이 치료 라고 생각한다. 환자의 말을 경청하기보다 약을 제공하고 조언해 주는 것이 치료라고 생각한다. 부모가 자녀를 대하는 경우도 이와 조금 비슷하다. 우리는 자녀에게 충고하고, 자녀를 교육하고, 위로하고, 회복시키려 한다. 그러면서 자녀의 말을 충분히 경청하지 않고, 자녀의 말이 중요한 순간에 그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는 경향이 있다.

- 더욱 잘 경청하려면, 부분적으로 자기 마음속에서 비워야 하는 것들이 있다. 바로 두려움(무슨 말을 할지 모를 수 있다는 두려움, 대답해줄 말이 없을 수 있다는 두려움), 확신, 싫증이다.

- 정신의 잠재적 변화 가능성을 과소평가하지 말라. 수많은 대안을 열린 마음으로 대하고, 필요한 경우 유연하게 방향을 바꾸며, 실패 할 경우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서 평정심을 찾아라. 누구도 우리에 게서 내면의 평화를 누리는 자유를 앗아가지 못한다.

-  우리 마음에 독이 되는 모든 것의 일차적 근원이 바로 자아 의 굴레다. 미국에서는 부모와 교사가 아이들에게 아침부터 밤까 지 '너는 특별해!'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한다. 그런데 심리학자 로 이 바우마이스터 Roy Baumeister 교수가 상당히 많은 연구를 종합해 본 뒤 내린 결론은 뜻밖이다. 학교, 부모, 치료사가 아이들의 자존 감을 높이기 위해 투자한 모든 노력과 비용이 미미한 효용밖에 없 다는 것이다.
“이 많은 세월 동안 연구한 결과로 이런 권고를 하게 되어 유감 입니다만, 자존감은 그만 잊어버리고 자기통제에 집중하십시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반대편 극단으로 치닫는 것은 안 되지만, 자 아라는 작위적인 개체에 집착하는 것이 안정적인 자신감을 얻는 길은 아니다.

- '나'는 우리의 현재 상태를 경험하는 것과 관련된다. 인격이라는 개념은 우리 개인의 역사를 반영한다. 우리 삶 전체로 확장된 하 나의 연속체인 인격에는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측면이 모두 통 합되어 있다. 그 시간적 연속성 덕분에 우리는 과거에 속하는 우 리 자신의 표상과 미래와 관련된 표상을 연결할 수 있다. 이제 남 은 것은 자아다.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자아가 우리 존재의 핵심이 라고 여긴다. 유년기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를 특징하는 분리할 수 없고 변하지 않는 가장 중요한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아 는 '내 몸', '내 의식', '내 이름'의 주인이다. 본디 우리 의식은 항구 적으로 변화하는 역동적인 파도임에도, 우리는 강물의 흐름을 타 고 떠내려가는 배와 같은 별개의 개체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일단 '나'와 '인격'에 대한 인식이 자아라는 훨씬 더 강한 정체감안에서 명확해지면, 우리는 이 자아를 보호하고 만족시키고자 한다. 그래서 자아를 위협하는 것에는 반감을 드러내고, 자아를 즐 겁게 하고 위로하는 것에는 끌린다. 이런 두 가지 반응으로부터 충돌된 갖가지 감정 분노, 욕망, 선망, 질투 등이 탄생한다.
이런 자아를 조금만 살펴보면 이것이 어느 정도까지 우리 자신 의 정신이 만들어낸 속임수에 불과한지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자 아의 위치를 확인해보자. "네가 날 때렸어"라고 말하지, "네가 내 몸을 때렸지만 괜찮아. 그건 내가 아니니까"라고 하지는 않는다. 내 몸과 자아를 잘 연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내 의식은 타격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네가 내 마음을 아프게 했어"
- '내' 감정, '내' 의식, '내' 이름, '내' 몸이라고 할 때는 자아가 그 모든 것의 주인으로 부상한다. 우리는 고유한 존재를 부여받은 하나의 개체가 마치 어릿광대처럼 어떻게 상호 양립 불가능한 이 모든 정 체성을 지닐 수 있는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 따라서 자아는 어떤 역동적 과정에 붙이는 하나의 정신적 꼬리표이자 개념에 불과할 수 있다. 확실히 자아는 우리에게 유용하다. 변하는 상황 전체를 연결하고 우리의 감정과 생각, 환경에 대한 인식 등을 하나의 일 관된 총체로 통합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아는 결 국 우리 마음속에서 어떤 한 상상의 개체 생명을 유지해주는 연속 적인 정신 활동의 산물이다.
- 결론적으로 두 가지 사항을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자아는 렌터 카처럼 필요악적인 존재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려면 운송 수단이 필요한 것처럼 삶을 헤쳐가려면 우리에게는 자아가 필요 하다. 수도원 밖으로 나가지 않은 채, 자신의 자아를 내려놓는 일 이 더 간단하다고 생각하는 도사나 명상가가 아니라면 말이다. 삶 이라는 길 위에는 다른 차량보다 오염물질을 더 많이 배출하는 차 량이 있다. 연료를 많이 소비하는 덩치 큰 4륜 구동차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싶어 하고 길을 양보받고 싶어 한다. 이와 반대편에 는 공기를 오염시키지도 않고 소음도 내지 않는 작은 자전거가 있 다. 나는 우리가 자아를 떼어내버리거나 창문 밖으로 던져버릴 수 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의 자아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오 염원이 되지 않고 우리에게는 너무 비싼 대가에너지, 관리, 보수 등의 측면 에서를 치르지 않게 할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로 지적할 사항은 무시하는 방법으로 자아를 떼어낼 수 있으리라 기대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자존감 부족으로 고통스러워하는 환자들의 경우, 해결책은 자신을 계속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흔히 이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동시에 자기 자신 에게 화가 나 있다. 여기서 다시 한번 떼어내버리는 것과 집착을 갖지 않는 것의 차이를 짚고 넘어가고 싶다. 중요한 건 강박적인 방식으로 자아를 떼어내버리는 게 아니라, 자아에 집착하지 않는 방향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폴 발레리 Paul Valery가 남긴 유 명한 문구처럼 말이다.
'나는 나 자신을 미워했고 나 자신을 좋아했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늙어갔다.'

- 모든 감정을 사랑하자!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모두 우리의 욕구에 대한 신호다. 긍정적 감정은 우리의 욕구가 충족되었거나 충족되는 중이라는 것을 말한다. 부정적 감정은 충족되지 않았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우리 감정에 귀를 기울이고 우리의 기본욕구가 균형을 유 지할 수 있도록 가장 적합하게 행동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보자.

- 나는 고뇌로 가득한 삶의 여정을 가는 동안 마티유의 여사친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우리 가족이 한국에서 돌아와 한창 이사 하느라 분주할 때 내가 너무 걱정을 많이 하자, 그 여사친이 불쑥 던진 말이 있다.
"뭐, 완전 난장판이지만 문제 될 건 없어!"
그때부터 나는 이 말을 내 만트라로 삼고 있다. 혼란 속에서 난 기류를 헤쳐 나아갈 때면 나는 모든 게 진짜 난장판이지만 그렇다 고 꼭 비극은 아니라고 되된다. 거대한 걱정 제조기 같은 우리의 정신은 과장하게끔 되어 있다. 행복에 겨운 낙관주의에 빠지지 않 는다면, 고통에는 두 가지 유형 혹은 감히 말하자면 두 가지 계층 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는 존재의 비극질병, 지진, 장애, 죽음, 외로움 등 이며, 다른 하나는 자아에 의해 날조된 수많은 과장된 감정이다. 다행히 우리는 이런 내면의 괴물을 무찌르고 점진적으로 없애버 릴 수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 안에 살고 있는 재난 예언자 기질에 더는 완전히 속아 넘어가는 일이 없게 된다.

- 초감 트룽파가 《마음공부에 관하여》에서 다음과 같은 핵심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백번 옳은 일이다.
'유머 감각은 한낱 익살스러운 농담이나 말장난을 하거나 일부러 재미있으려 애쓰는 것이 아니다. 양극단을 나란히 놓고 근본적 인 아이러니를 간파해서 이런 극단적인 것들을 더는 근엄하게 받 아들일 수 없도록 만들고, 이들이 만들어내는 두려움과 희망의 게 임에 근엄하게 임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유머 감각이다.'

- 누군가의 마음에 증오의 불이 붙었을 때, 그런 마음 앞에서 성난 미치광이를 대하는 의사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이 바로 연민이다. 먼저, 그 사람이 누구든 해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 의사가 미친 환자의 머리를 망치로 박살 내지 않으면서 그의 정신을 갉아먹는 병을 치료하려 애쓰듯, 폭력이나 증오에 빠 지지 않으면서도 문제를 해결할 모든 방법을 고려해야 한다. 증오에 증오로 응수한다면 문제는 절대 끝나지 않는다.

- 현실을 온전히 인식하는 것이 실제로 그 무엇이 일어났을 때 충 격에 빠지지 않는 최선책이다.
어떤 개체가 다음 순간에도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경우가 생 긴다면, 이것은 그 개체가 무상을 초월했다는 뜻이 된다. 이런 경 우, 그 개체는 그 상태로 영원히 고정된다. 현실을 왜곡하면, 다시 말해 우리 자신이나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 우리 소유물이 변함없 이 존속할 것이라는 생각, 이들이 정말로 '우리 것'이라는 생각에 집착하면 고통의 원인을 키우게 된다. 그러면 결국 우리가 우리 소유물과 우리 인생을 포기하지 않으려 해도, 우리 소유물과 우리 인생이 우리를 버리게 될 것이다!

- 인간의 뇌는 불확실성을 싫어한다. 다음 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면 어떻게 인생을 계획할 수 있을까?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면 될까? 너무 소모적이다. 그렇다면 최선을 기 대해야 할까? 너무 태평스럽다. 우리는 계획을 세우기 위해 예측 하고 추정한 뒤, 우리가 세운 가설을 고수하고 이를 현실로 간주 한다. 환상을 품지 않는 것이 지혜가 아니라면, 지혜란 적어도 자 신이 환상을 품는다는 사실을 늘 인식하는 것이라 하겠다. 불확실 성이 주는 불편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 뇌가 먼저 예상하고 상상 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런 예상과 상상을 거침없이 믿는 행동은 자제할 수 있다. 폴 발레리가 문학 계간지 <텔>에서 멋지게 표현하듯 말이다.
'새가 가지에서 가지로 날아가는 것처럼 마음도 어떤 어리석음 에서 다른 어리석음으로 옮겨 간다. 달리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 이다. 핵심은 스스로 그 무엇에 대해서도 확고부동하다고 조금도 느끼지 않는 것이다.'
지혜란 스스로 이렇게 되뇌는 것이리라.
'나는 모른다. 그러니 내가 모르는 한 나는 환상을 품지 않는다.'
그러면 많은 불필요한 억울함과 걱정을 피할 수 있다.

- AI의 토대는 특출나게 고도화된 인간의 두뇌로도 저장할 수 없는 막대한 데이터빅데이터의 활용에 있다. 역설적이지만, 피라미드 건설이나 심장병에 관한 모든 정보를 즉각적으로 얻는다고 해서 우리가 더 지혜로워지거나, 더 친절해지거나, 더 균형 잡힌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이런 점에서도 '빅데이터'의 등장은 그 어느 때보다 정보와 지혜의 차이를 부각한다.

- 예수는 정확히 말해서 현자의 표본이 아니다. 간혹 선동적이기도 하고 역설적이거나 난해하기도 하며 까다롭거나 급진적이기도 하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상이다. 예수는 현자 가 아니라 메시아였으며 예언자이자 구세주였기 때문이다. 우리 는 현자를 자주 만나면 기분이 좋아지고 더 나은 사람이 된다우리 가 현자를 인정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기도 하다. 반면 예언자를 자주 만나면 마음이 동요되고 충돌하고 뒤죽박죽이 된다. 예언자는 자신의 말 에 귀를 기울이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복종하고 따르라고 한 다. 예언자를 상대할 때는 잘못된 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결말이 좋지 않다. 사이비 예언자보다는 사이비 현자가 아 픔을 덜 주는 법이다.

- 그러자 처음으로 어떤 외침이 울려왔다. 스피노자는 슐러에게 보낸 유명한 서간문에서 이렇게 진단한다.
'틀림없이 이 돌멩이는 자신의 노력만 의식하고 초연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할 것이다. 또한 자신이 끈기 있게 낙하 운동을 지속하는 유일한 이유는 자신이 그것을 욕망하기 때 문이라고 믿을 것이다. 모든 인간이 갖고 있다고 자랑하는 인간의 자유도 이와 마찬가지다. 인간의 자유는 인간이 자신의 욕망은 의 식하나 그 욕망을 결정하는 원인은 모른다는 데 있다.'

- 진정한 자유는 자신의 정신을 생각에 따라 표류하게 두는 것이 아니라 통제하는 것이다. 마치 자신이 선택한 목적지를 향해 자유 롭게 항해하는 선원처럼 말이다. 그는 자신의 배를 암초에 좌초시 킬 수도 있는 바람과 해류에 따라 표류하게 두지 않고 통제한다. 달리 말해 자유롭다는 것은 조건화에 의해 단련된 습관적 성향과 자아의 독재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다.
우리는 거의 모두가 방황과 조건화, 충동, 내적 갈등, 떠도는 생각, 동요를 일으키는 감정에 놀아난다. 이런 종속 상태는 많은 고 뇌의 근원이다. 때때로 우리를 무기력하고 체념하게 만드는 이런 메커니즘의 감옥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렇게 하기 어려운 주된 이유는 분별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정 신적 요소의 정체를 파악하지도, 우리를 구속하는 생각들이 어떤 유형인지 간파하지도 못한다. 우리에게는 자유를 되찾게 해줄 지 혜와 통찰력, 역량이 부족한 경우가 너무 많다. 따라서 내면의 자 유를 획득하려면 우리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잘 이해하고 행 복과 고통의 메커니즘을 밝혀내야 한다. 이런 분별력은 고통을 주 는 정신 상태를 여유 있고 현명하게 관리하도록 하는 마음의 훈련 과 병행되어야 한다.

- 의학에서는 치유를 뜻하는 표현으로 '병과 싸우다', '암과의 전쟁' 등을 자주 사용한다. 나는 이런 종류의 담론과
그 안에 내포된 시각이 항상 많이 불편하다. 내가 보기에 이런 표 현들은 우리를 상당 부분 진실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 같다. 병 은 적도 아니고 상대편도 아니다. 그저 하나의 불균형 상태, 우리 의 건강을 유지하는 섬세한 메커니즘이 변질한 것일 뿐이다 생명과 마찬가지로 건강은 작은 기적이다!. 내 눈에는 자기 자신을 보살피고, 두려 움이나 분노의 감정을 평화롭게 진정시키는 것, 간단히 말해 내면 의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게 상상의 적과 맞서서 스트레스를 유발 하는 전쟁을 벌이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지 싶다.

- 지혜를 추구하려 노력하는 우리에게 명상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먼저, 분별력의 열쇠가 되는 주의력과 감정을 안정시킨다. 그다음, 의식을 확장한다. 명상이란 다른 사람들과 세상을 향해 자발적으로 고요하게어쩔 수 없이 정신이 분산되는 경우와는 다른 방식이다 마음을 열고, 그들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우리를 연결하는 상호의 존성과 소속감을 깨닫는 것이다. 이를테면 자기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 외부의 시선을 선택해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즉, 자기 자신 에게서 벗어나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에게 시선을 돌리는 것 이다.

- 불교적 자기성찰에는 두 가지 방법이 동원된다. 하나는 분석적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관조적 방법이다. 분석적 명상은 만물의 내면 깊은 곳까지 파고든다. 만물은 늘 변함이 없는가, 아니면 무 상한가? 만물은 자립적으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상호의존적으로 존재하는가? 고통의 직접적이고 궁극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나 그러니까 자아는 고유한 존재를 지닌 단일한 개체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약정에 의해서만 존재하는 하나의 편리한 신기루에 불과한가? 이런 분석적 명상을 통해 반박할 수 없는 결론에 도달하면, 관조적 명상은 마음이 이 새로운 깨달음 안에서 차분히 쉴 수 있게 한다. 그래야 물이 땅에 스며들 듯 명상이 마음에 동화된다.
처음에는 우리 마음이 무척 동요하기 때문에, 분석적 명상을 성 공적으로 수행해서 연민을 기르고 의식의 본성을 관찰하는 것이 꽤 어렵다. 그저 생각의 소용돌이에 대적하는 것만으로도 바쁜 처 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서 살펴보았듯, 어느 정도 고요한 상 태에 도달하는 것이 가장 먼저 밟아야 할 첫 번째 단계다. 몽둥이 로 때리듯 정신을 혼미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명확하 고 안정적인 정신 상태가 되게 해야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명상 은 호흡을 관찰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실용적이면서도 단순하고 섬세한 방법이다. 따라서 호흡은 주의력을 가다듬기 좋은 탁월한 대상이 다. 그러나 이 단순한 훈련법은 쉽지 않다. 처음 시작하면 '예전보 다 생각이 더 많아졌는걸, 나한테 명상이 맞지 않나봐' 하는 생각 이 들면서 심지어 낙담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결과는 반드 시 생각이 더 많아져서 그런 것은 아니다. 단지, 무슨 일이 일어나 는지 깨닫기 시작하고 타격받는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 시작해서 그런 것이다. 폭포수가 골짜기를 타고 흐르는 급류가 되 고 다시 강이 되고 마침내 맑은 호수가 되듯, 시간이 지나면 마음 도 고요해진다.
그렇게 몇 주, 몇 달이 지나면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이제 더 유연하고 융통성 있는 마음을 지니게 된 나는 잘 훈련된 말처럼 마음을 지휘할 수 있다. 마음을 향해 "연민에 전념하도록 해" 하는 말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진행 단계는 반드시 준수되어야 한 다. 몇 단계를 건너뛰는 것은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다. 마음이 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데도 연민에 관해 명상하려 든다면, 연민 을 기르기는커녕 정신만 분산된다.
이러한 물음을 가질 수도 있다.
'최종적으로 명상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나인가, 의식인가?' 이제 나는 이 모든 문제의 본질을 분석할 수 있다. 더 관조적이 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탐구를 심화할 수도 있다.
'이런 모든 생각 뒤에는 무엇이 있는가? 깨달음을 얻은 현존, 즉 모든 정신적 사건의 원천이 되는 벌거벗은 의식의 모습이 숨어 있 는 것 아닌가?'
이때부터 나는 모든 생각 뒤에 감춰져 있는 것, 먹구름 뒤에서 움직이지 않고 존재하는 하늘처럼 늘 그 자리에 있는 것을 어렴풋 이 보기 시작한다. 그런 뒤에는 이렇게 깨달음을 얻은 현존 안에 서 정신을 쉬게 할 수 있다.

- 고대 그리스철학에는 메타노이아라는 매우 아름다운 개념이 있다. 내면의 전환을 위해 스스로 노력한다는 이 개념은 슬픈 열정과 반사적 행동, 이기심, 습관의 감옥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데 적합한 삶의 기술을 끌어안고자 자기 자신이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온 세상을 위해 앞으로 나아가며 정진하는 것, 마음을 무겁게 하는 그 무엇에서 벗어나고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도전이다.

-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유명한 문구 'Dilige et quod vis fac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라'를 통해 사랑과 자선이 중 심적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는 우리가 사랑 안에 뿌리내리고 있는 한 선을 향해 걸어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의 유명한 서간문에서 그는 그 길을 밝혀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네게 이 짧은 교훈을 준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일을 하라. 조용히 한다면 사랑으로 조용히 하고, 말한다 면 사랑으로 말하며, 고친다면 사랑으로 고치고, 용서한다면 사랑 으로 용서하라. 마음속 깊은 곳에 사랑의 뿌리를 내려라. 사랑의 뿌리에서는 나쁜 것이 절대 나올 수 없다.'

- 플라톤은 《파이돈》에서 철학은 죽음을 연습하는 것 플라톤처럼 그리 스어로 표현하자면 멜레테 타나투Meletê Thanatou 이라고 했다. 그는 정진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에게서 몸과 열정을 분리해내고, 자신을 노예 상 태로 묶어두고 감옥에 가두었던 곳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한 다고 생각했다. 몸을 족쇄나 속박으로 여기는 것에서 단 한 걸음 만 옮기면 되는 일이다. 그런데 그리스어로 '소마soma, 몸'는 얄궂 게도 '세마séma, 무덤'와 유사하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의 유한성과 무상함을 명상하는 데는 슬픈 구석이 조금도 없다. 자신과 결별하 고 계속되는 우리 삶의 변화를 경험하려면, 바로 여기에서 지금을 사는 일에 전념하는 영원한 혁신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 다. 그러면 정신이 온 힘을 다해 매달리며 얼굴을 찡그린 채 싫은 내색을 한다. 확고한 것을 손에 넣고 싶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일 시적이고 모든 게 지나가지만, 정신은 안전과 불변을 추구한다. 그렇기에 한 무더기의 고통과 끊임없는 공포, 중단없는 불만족이 생겨나는 것이다.

- 용서란 무엇인가? 내가 상처나 공격을 받거나 누군가가 내게 해코지하는 경우라면, 용서에는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까? 우리는 용서에 대해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심리치 료에서 용서라고 하면, 사람들은 가장 먼저 '사면' 혹은 어떤 의미 에서는 '복종'이라고 이해한다. 용서치료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첫째, 용서는 어떤 형태의 속박에도 구속되지 않아야만 의미가 있 다용서는 상처받은 사람 쪽에서 자유로이 결정해야 한다. 둘째, 용서는 법적 전개 와는 철저히 분리된 내밀한 행위다. 환자가 용서하는 방향으로 가 기를 바라는 치료사는 용서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는 공식적인 화 해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설명해야 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자기 마 음속으로 용서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악행을 잊거나 부정하는 것 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용서는 이런 고통에서 자유로워지겠다는 개인적이고 내밀한 결정이다. 용서는 내가 고통당한 만큼 다른 사 람도 고통받기를 바라는 마음과 원한을 극복할 수 있도록 우리를 해방하는 행위다.

-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가르침》을 쓴 고대 그리스의 전기작 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에 따르면, '철학'이라는 용어를 만든 사람은 피타고라스라고 한다. 현자란 평화와 고요, 그 유명한 아 타락시아를 맛보아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여정에 오른 현자의 옆에는 문자 그대로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 철학자가 있다. 그는 지혜를 갈망하며 온 힘을 다해 자신이 가는 방향으로 정진한다. 칸트의 《논리학》에서 발췌한 어느 유명한 글은 주요 화두를 이렇 게 요약하고 있다.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 가? 무엇을 기대해도 되는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스피노자가 말했듯, '철학함'이란 생각을 전환하고, 방향을 바꾸 고, 다시 돌아오고, 평생 현명하게 만들어진 삶의 기술을 통째로 이해하여 현명한 존재를 정립하는 것이다.
이런 모험에 뛰어든 나에게 철학자 진 허쉬Jeanne Hersch는 마치 구명튜브를 던져주듯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틀어 올린 머리를 한 이 스위스 출신 여성 철학자는 《철학적 놀라움》이라는 굉장한 책 에서 서양사상사를 되짚어본다. 이 책은 내가 플라톤 발췌서 다음 으로 접하게 된 첫 번째 철학책이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 책은 나의 구원자였다. 며칠 동안 나는 이 황홀한 책을 탐독하느라 마 치사경을 헤맬 듯 앓았다. 그 속에서 나는 내 삶의 여정을 함께할 새로운 동반자들을 만났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성 아우 구스티노, 스피노자, 키르케고르, 니체 등이 유쾌한 철학자 군단 은 삶의 비극성을 조금도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삶을 그토록 아름 답고 가벼운 것으로 만든다. 삶의 여정을 한마디로 짧게 표현해야 한다면 나는 스피노자의 말을 빌리고 싶다.
'착하게 행동하고 기쁘게 지내라.'

- 치료 과정에서 우리 의사들은 세 가지 질문을 스스로 해보라고 조언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야 환자가 깊이 생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반추하는 것인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1. 당신이 이 문제에 관한 생각을 시작한 이후로 그 덕분에 해결 책을 발견하는 데 도움 된 적 있는가?
2. 해결책을 찾지 못했더라도 적어도 문제점이 조금은 분명해졌는가?
3. 해결책을 찾지도 못하고 문제점이 더 뚜렷해지지도 않았다 면, 그렇게 생각한 덕분에 마음이 가벼워졌는가?
이 세 질문에 "아니오"라고 대답한다면, 당신은 문제를 깊이 생 각하고 있는 게 아니라 반추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 반추에서 벗어날 최선책은 정원 손질을 하거나 산책하거나 조깅하거나 타 인을 도와주는 등 다른 영역에서 무언가를 하는 것이다. 아니면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다. 그러면서 함께 반추하라는 말 이 아니라, 다른 일들을 떠올리라는 뜻이다!

- '붓다는 붓다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그를 붓다라 부른다
《금강경》에 나오는 이 단순한 후렴구는 내게 순간순간 사고의 전환을 가져오는 엄청난 도구가 되었다. 내가 거의 항상 하고 있 는 이 수행법은 삶의 부침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도움 된다. 사 는 것이 힘겹게 느껴질 때면 나는 이 금강경을 꺼내 든다. 싸움에 필요한 무기를 끄집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삶의 도구를 얻기 위해서다.
'장애는 장애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장애라 부른다.'
이 후렴구는 아무것도 고수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러면서 무 엇이건 재앙도 되고 동시에 기회도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준다. 이는 이분법적 논리와 이원론의 감옥에서 벗어나라는 뜻이다. 매 순간 나는 장애를 다르게 체험할 수 있다. 하루에도 수천 번씩 내 정신이 모든 것을 고정하고 사방에 꼬리표를 붙이려 들면, 나는 이렇게 되뇐다.
'알렉상드르는 알렉상드르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그를 알렉상드르라 부른다.'
이 마법 같은 문구가 대단한 이유는 절대로 우리를 자신의 상처 안에 머물게도, 그렇다고 그 상처를 부인하게도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우리가 현실에 숱한 선입견을 씌운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그 다음에 이런 선입견들을 조금씩 걷어낼 수 있다. 그러면 나는 현 실이 늘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빡빡하다는 걸 알면서도 직설적 으로 말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자신에게서 벗어나고, 모든 이기 적 고정관념을 버리고, 끊임없이 삶의 변화를 받아들이도록 수련 해야 한다. 예컨대 "내 아내는 내 아내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그 녀를 내 아내라 부른다" 하는 것처럼 말이다. 금강경이라는 이 눈 부신 경전 덕분에 나는 사람들이 무한한 부자라는 사실을 매일 발 견한다. 그리고 더는 사람들을 전형적인 모습 안에 가두어버리지 않는다. 내 마음속에 생각과 감정의 강물이 흐른다는 사실을 깨달 으면, 그것만으로도 내 머릿속을 스치는 모든 걸 너무 근엄하게 생각하지 않게 된다.

- 나는 구약성서 중에서 불교와 멋지게 연결되는 측면이 있는 코헬렛에서 한 가지 수행법을 빌려 왔다. 코헬렛은 비관적인 분위기 아래에서 모든 것을 벗겨내고 우리의 환상을 하 나씩 뽑아버린다. 나는 이 성경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유명한 후렴구를 좋아한다.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불안정하고 부서지기 쉽다는 것을 깨 달으면 더 심오한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데 도움 된다. 이 방법은 싼값으로 마음을 달래는 경향이 있었던 내 영혼을 치유해준다. 사 실, 내가 평화를 발견할 때는 혼란에 빠져 있는 동안이다. 모든 것은 지나가게 마련이건만, 참으로 불행하게도 나는 그냥 흘려보낼 줄 모른다. 스스로 옭매이면서 몇 번이고 다시 고통스러워한다. 사실, 코헬렛은 치유한다는 생각 자체로부터 나를 치유해주었다. 그토록 품고 있던 환상과 잘못된 기대를 하나씩 잃어가면 어느 정 도 평온함으로 가는 문이 열린다. 그러면 싸움이 멈추고, 고된 전 투가 지나고, 평화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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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e of the day 2024. 3. 28.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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