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5세기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이후, 사람들 대부분이 문맹이었던 유럽은 깊은 침체에 빠졌다. 그들은 그나마 보유하고 있던 예술이나 건축술은 물론 실내 배관기술, 심지어 농업 지식까지 모조리 잊어버렸다. 로마 중앙정부와 유럽의 무역 네트워크가 제 기능을 잃은 상태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전염병까지 창궐해 기승을 부리자 도시 인구는 급격히 감소했다. 로마의 지배 아래 사용했던 지식과 기술은 전부 쇠퇴했다. 그 결 과유럽은 로마가 지배하기 이전 시대보다도 더 형편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로마인들이 유럽에 전파한 신기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양어법인데, 연못이나 수로에서 식량으로 쓸 어류를 양식하는 기술을 말한다. 양어법으로 길러낸 다양한 어류 중에서도 특히 강꼬치고기와 잉어는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자 식단을 다양하게 해주는 식재료가 되어 유럽 서민들에게 환영받았다.
- 사람들은 유럽에 퍼진 선페스트를 두고 보통 벼룩에 물렸을 때 감염된다고 생각했다. 오늘 날에는 많은 사람이 동아시아 지방에서 출발한 배에 우연히 올라 탄 게르빌루스라는 쥐에 있던 페스트균에 감염된 벼룩이 이 병을 옮겼다고 믿고 있다. 이 게르빌루스쥐들이 유럽에 도착했을 때 쥐에 기생하던 벼룩은 도처에 널린 유럽 쥐들에게로 옮겨갔다. 균을 보유한 벼룩들은 시궁쥐들에 올라타 도시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그들의 숙주였던 시궁쥐들이 죽으면 사람이나 가축에게 향했다. 그리고 사람이나 가축이 죽게 되면 다시 시궁쥐들에게 돌아갔다. 즉 시궁쥐 입장에서는 사람이 자기들에게 벼룩을 옮겼다고 비난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다. 이런 전염 방식의 핵심은 도시 시궁 쥐와 사람이 얼마나 가깝게 사는지에 있다.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유기물 쓰레기를 만들어내고 시궁쥐는 이를 처분한다. 선페스트는 황폐화를 유발하기도 하지만 사실 대도시 전역으로 퍼지기에는 놀라울 만큼 허약한 구조다. 연쇄 고리의 구성요소인 벼룩과 시궁쥐와 인간은 박테리아가 전염병을 유발시키기에 적합하도록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전염을 일으키는 균은 제대로 옮겨가지 못하고 흐지부지 사라져버린다. 이는 왜 전염병 이 유럽을 계속해서 감염시키지 않고 수백 년에 한 번씩 나타나 유행하는지, 또 전염병이 왜 1668년 파리에서 소멸되었는지 설명해준다.
- 1960년대에는 MSG가 포장음식과 통조림 시장에 마법 같은 돌풍을 일으켰는데, 이런 현상은 미국에서 특허 심해 미국 쇠고기산업은 이에 대응해야 할 필요성을 느 꼈던 듯하다. 1968년 무렵, 사람들에게서 두통, 발한, 심계항진, 안면마비, 메스꺼움, 무력감 같은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MSG의 부작용을 호소하는 사례들이 갑자기 쏟아지게 된 것에 쇠고기산업이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는지, 쇠고기산업이 이로부터 이익을 얻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무엇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은 대중의 건강에 관한 보고서들이 나오게 된 것은 쇠고기산업 마케팅의 현대화와 로비 덕분이라는 것이다. 지역이나 국가 차원의 쇠고기협회 중에는 거의 100년의 역사를 지닌 단체도 있는데, 이들은 MSG의 위협에 맞서 싸우기 위해 힘을 합쳤다. 그들은 1973년에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리처드 닉슨에게 '스태그플레이션' 아래에서 경제적으로 점점 힘겨워지는 생활을 감내해야 하는 국민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쇠고기 가격을 동결 시켜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쇠고기 가격을 깎는 동시에 MSG를 허용한 것은 끔찍한 실수였 다. MSG의 명성이 타격을 받긴 했지만 1980년 대까지 많은 사람의 입맛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오래 가지 않았다. MSG와 관련 있는 다양한 질병을 모두 포괄하는 용어인 '중국식당증후군Chinese Restaurant Syndrome'은 글루탐산모노나트륨의 종말을 초래했다. MSG 의 가치는 떨어졌고 음식 재료 목록에서 조금 씩 사라졌다. MSG는 그보다 앞서 나온 물질인 자가분해효모와 가수분해단백질로 대체되었는데, 이 물질들은 소금과 결합하면 MSG로 변하는 글루탐산을 포함하고 있는데도 식품성분표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 아즈텍인들은 소, 돼 지, 양, 염소 같은 초식동물을 전혀 기르지 않았다. 심지어 기니피그조차 사육하지 않았다. 따라서 테노치티틀과 틀라텔롤코(현재 멕시코에 속한 지역)에 살던 주민 대부분은 전적으로 옥수수에 의지했고 늘 기아 상태였다. 불균형적인 식량체계 위에 위태롭게 서 있는 도시, 융통성 없는 수직적 조직체계를 지닌 사회, 늘 성이 나 있어 달래줘야만 하는 신들, 옥수수를 기반으로 하는 식단 때문에 주민들이 우연히 맛있는 음식이 되어버린 상황을 고려하면,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먹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불가피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투피남바족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인육 요리를 위한 레시피를 개발했다. 아즈텍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에르난 코르테스와 함께 싸운 스페인 정복자인 베르날 디아스 델 카스티요의 회고록인 <신 에스파냐 정복의 진정한 역사>에는 사람을 소금, 후추, 토마토와 함께 끓이는 방법에 관한 표준 레시피 같은 것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인육을 재료로 하는 동시대 최고의 레시피인 동시에 고추를 첨가한 최초의 기록된 레시피이며, 100년이나 앞서 토마토를 사용한 레시피이기도 하다(토마토는 유럽에서 17세기 말까지도 대중화되지 않았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우연히 카스티요가 칠리 요리에는 원래 콩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기록한 덕에 칠리 콘 카르네[간 소고기에 강낭콩, 칠리 가루를 넣고 끓인 매운 스튜-옮긴이]에 관한오 랜 논쟁이 끝났다). 멕시코시티 근처에서 발견된, 향료 때문에 빨장고 노랑게 물든 아즈텍인의 뼈에 대한 최근 연구는 카스티요의 레시피가 실재 했음을 입증해주었다. 연구진은 스튜의 흔적에서 호박씨, 칠리 그리고 아나토를 발견했는데, 이는초기 두더지 요리에 인육이 재료로 사용되었 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신 토마토는 조 리된 인육의 단맛을 돋워주기 때문에 미각적 관점에서 보면 모두 말이 된다.
폴리네시아는 18~19세기에 식인 풍습으로 유명해졌다. '폴리네시아'라는 말은(번역이 의심스럽긴 하지만) 조리된 인육을 가리키는 유명 한 단어인 '롱 피그long-pig'의 어원이다. '롱 피그'라는 단어의 용법은 인육에서 돼지고기 맛이 난다는, 확인할 수도 부인할 수도 없는 널리 퍼진 개념에 근거를 둔다.
- 19세기 말, 화학자 존 리JohnLea와 윌리엄 페린스william Perrins가 우스터셔소스Worcester shire sauce(우스터소스라고도 함-옮긴이)를 발명한 일은 항상 운 좋은 사건이라고 묘사된다. 현재 전해지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동양에서 막돌아온 '샌디스 경Lord Sandys'이 그곳에서 가지고 온 레시피대로 소스를 만들었는데, 맛이 끔찍해서 지하실에 방치해두었다. 몇 년뒤 리 와 페린스가 지하실에 버려둔 통을 치우기 위해 갔을 때 풍미 짙은 익숙한 소스로 숙성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상상할 수 있겠지만 그들은 몹시 기뻐했다.
이처럼 우연한 사고에서 비롯된 음식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는 마요네즈, 멕시코의 전통요리인 몰레 포블라노, 리즈의 땅콩버터 컵Peanut Butter Cup(초콜릿의 일종-옮긴이), 감자튀김, 두부를 포함해 수십 가지나 있다. 모두 믿기 어렵겠지만 사실이다. 어쨌든 나는 진실이 무엇인지 알아내고야 말겠지만 대개의 이야기는 불편하고 다루기 힘든 사실들을 감추거나 단순화하기 위해 꾸며낸 것들이다.
- 조지 고든 노엘이 언급한 '호기심을 일으키는 생선소스'는 버제스Burgess의 앤초비 진액에 대한 광고 문구에서 빌려온 것인데, 앤초비 진액은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 리딩소스Reading Sauce(루이스 캐럴Lewis Carroll의 시 <시인은 태어 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Poeta Fit, Non Nascitur>[1869]와 질 베른Jules Verne의 <80일간의 세계일주Around the World in 80 Days)[1873] 라는 모험 소설에서 언급된) 그리고 지금은 사라진 여러 생선소스와 시장에서 경쟁했던 아주 인기 많았던 조미료였다. 조지 고든 노엘은 (버섯) 케첩과 함께 콩으로 만든 소스(영국이 중국과 일본에서 수입한 비교적 새로운 품목인 간장)를 언급 한다. 현재 이 두 소스는 농축된 글루탐산과 강력한 우마미 맛 때문에 애용되고 있다. 간장의 수요는 급격히 증가해서 도처에서 가정식 레시피가 등장했다. 집에서 간장을 만들려면 콩을 삶고 으깨서 모양을 다진 뒤 이를 건조한 다음 몇 달 동안 발효시켜야 한다. 오래 걸리는 일이 지만 연어와 간장을 모두 사기 위해 비싼 가격을 지불하지 않으려면 선택의 여지가 없다. 19세기의 첫 10년 동안 간장 레시피는 빠르게 보급 되었는데, 콩이 최신 글루탐산 첨가제로서 단기 간에 크게 유행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런데 간장과 우스터셔소스를 어떻게 연결시켰을까? 19세기 중반부터 간장이 우스터셔소스의 비법 성분 중 하나라고 인식되었는데, 2009년에 리&페린스Lea&Perrins 사가 고용한 회계사가 우연히 잡동사니 속에서 초창기 레시피를 발견한 덕분에 이사실이 확인되었다. 영국의 우스터셔소스는 기본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소스 재료인 콩과 앤초비에 향신료와 다른 재료를 섞은 것인데, 처음 보는 것 같은 매우 이국적인 혼합물은 아니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는 간장과 다른 액체를 섞어 또다른 조미료를 만들어 낸 긴 역사가 있다. 츠유소스(생선을 기본으로 하는, 면 요리에 주로 사용되는 소스), 폰즈쇼유소스(유자를 베이스로 한 폰즈소스와 섞은 것) 그리고 와리시타소스(스키야키에서 데친 소고기에 곁들이기 위해 소금, 설탕, 간장을 혼합한 것)는 모두 이와 같은 원리로 제조된 것이다. 영국에서는 앤 새클퍼드Ann Shackleford의 <현대 요리법Modern Art of Cookery>(1767)에 나온 레시피가 버섯케 첩으로 만든 우스터셔소스의 원형을 본뜬 것인 데, 호두피클, 마늘, 앤초비, 고추냉이, 붉은 고추를 일주일간 발효해 만든다. 따라서 우스터셔소스는 벵골 주지사였던 샌디스 경(그의 이력을 추적하기란 불가능하다)의 지시에 따라 혼합되었을 수 있다. 이후 세계적인 조미료로 기적적으로 등 장하기 전까지 지하에 몇 년간 방치되었지만, 이는 분명 결정적 조건은 아니었다. 필수조건은 바 로 우스터셔소스가 냉혹한 소스 전쟁에서 살아 남아 버제스, 리딩 그리고 초창기 케첩들을 능가하는 독특한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는 점이다.
- 아시아의 세 소스, 곧 생선소스(로마제국에서 널리 발견되었지만 '중세암흑기' 때부터 자취를 감추었고 최근에 와서야 아시아의 수출 품목으로 등장 했다), 간장(중국, 나중에는 일본에서 수입했다) 그 리고 타마린드를 기본으로 한 카레소스는 리와 페린스가 주장했듯 한꺼번에 유럽으로 흘러들어간 것은 아닐지 몰라도 함께 아시아를 떠난 것만은 분명하다. 어쨌든 공격적 마케팅과 더불어 오랜 항해에도 잘 변질되지 않는 우스터셔소스의 특성 때문에 19세기 항해시대를 맞아 모 든 항구의 선박에서는 이 소스를 볼 수 있었다. 리와 페린스는 영리하게도 이 소스를 영국의 모든 해운사에 공급했고 승무원이 승객에게 제공하게끔 혜택을 줌으로써 어디에서나 이 소스를 맛볼 수 있게 만들었다. 바다를 항해하는 일은 너무 길고 지루했으며 음식 맛은 밋밋했기 때문 에우스터셔소스에 혀가 길들여진 사람들은 뭍에 도착한 뒤에도 소스 병을 들고 집으로 돌아 갔을 것이다. 우스터셔소스는 바이럴마케팅(입 소문으로 퍼지는 것-옮긴이)으로 널리 퍼진 세계 최초의 음식이었을 것이다. 영국인과 영국 배가 지나간 곳이라면 어디든 이 소스도 함께 전파되었다. 그런데 이 소스 때문에 세계의 음식 맛이 모두 똑같아진 건 아닐까? 다행히도 전 세계 사람들이 이 이상한 소스를 접한 뒤 많은 요리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 우스터셔소스는 인기가 많았지만 때로는 이소스의 묽은 성질 때문에 특정한 상황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경우도 생겼다. 세기가 바뀔 즈음 누군가가 제3의 타마린드소스를 걸쭉한 갈색 소스로 바꿔야겠다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 놨다. 그는 생선과 간장 대신 토마토를 기본 재료로 삼았는데 우마미 맛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토마토는 유리 글루탐산free glutamates 함량이 가장 높은 채소 중 하나다). 이렇게 해서 HP소스가 탄생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소스가 우스터셔소스와 원료나용도, 생김새, 점도가 많이 다른데도 오랫동안 사람들이 HP소스와 우스터셔소스를 성격이 조금 다른 가족의 한 구성원처럼 인식했다는 점이다. 정말 이 두 소스는 연관이 있는 걸까?
- 일본은 19세기 중반 메이지 천황 아래 제국주의 국가가 되었다. 일본이 겪었던 사회 변혁 가운데 중요한 하나는 서양의 문물과 사상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서양 사상의 일부는 일본인들의 먹거리까지 새롭게 규정했는데, 이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서양 음식과 음식에 대한 관념들이 일본으로 들어오는 것이 불가피했다. 들리는 바에 따르면 이 가운데 하나가 돈가츠라고 하는 튀긴 돼지고기 요리와 신맛이 덜한 HP소스(같은 이름의)였다.
메이지시대에 유럽(슈니첼을 우적우적 먹는 오스트리아인들이 전해주었을지도 모른다) 에서 일본으로 돈가츠가 전해졌을 법하다는 이야기는 기록에 가타카나가 아닌 간지로 쓰여 있어 어쩌면 과장된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빵가루를 입혀 튀긴 고기 요리가 이미 일본에 있었다는 걸로 봐서 일본인들은 유럽의 요리법과는 상 관없이 돼지고기를 굽고 튀기는 조리법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돈가츠소스의 인기는 실로 엄청나다. 돈가츠소스는 커틀릿만이 아니라 부침개나 수프, 국물, 면 요리, 쌀 요리에도 활 용된다. 일본인들은 어떤 브랜드의 소스가 가장 좋은지, 그리고 집에서 직접 소스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가장 인기 있는 상표는 불독Bulldog인데, 이 이름은 영국이 원산지라는 느낌을 주는데다 외국 것에 대한 동경심을 자극하려는 의도로 지은 것 이다.
그래서 이 타마린드를 기본으로 한 소스는 거의 100년간 우스터셔소스의 친척빨로 숨어 지내다가 지구를 반바퀴 돌아 아시아 소스로서 영국에 수입되었고, 다시 고스란히 지구를 반바퀴 돌아 영국 소스로서 아시아에 유입되어 쌀로 만든 요리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것이 갈색 소스의 뜻밖의 여정에 대한 이야기(볼킨의 책 제목에 비유함-옮긴이)다.
- 1828년 네덜란드의 초콜릿 제조업자인 콘라트 판 하우텐은 코코아버터 로부터 코코아가루를 분리하는 방법을 개발했으며, 그 나라 사람들은 더칭Dutching 또는 알칼 라이징alkalizing을 통해 가루를 더욱 곱게 만드는 과정을 발전시켰다. 카카오가루의 분리로 현대의 초콜릿 음료는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중립국으로 유명한 스위스의 노력은 콘칭으로 이어졌는데, 이는 초콜릿이 부드럽고 균 질해질 때까지 프레스 사이에서 앞뒤로 굴리는 것으로, 이 과정에서 휘발성 방향족 화합물(그리고 수분) 80퍼센트가 증발해버렸다. 결국 산업의 발전은 전 세계에서 상업적으로 대중화된 달콤하면서도 무미건조한 밀크초콜릿을 만들어 냈다. 초콜릿을 만드는 과정에서 시간과 열을 가하는 공정은 또다른 풍미를 활성화시켰으며, 상 업적으로 제조된 초콜릿은 화학적으로나 맛에 있어서 예전과는 무척 달라졌다. 두 차례 세계 대전에서 병사들은 초콜릿바를 가지고 파병되었는데, 폭력성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기운을 북돋고 행복감을 주려는 상징적인 의도였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폭력성을 고무시키고 경계심을 높이기 위해 배포된 암페타민이 독일 탱크 승무원들 사이에서 탱크 초콜릿으로 불린 것 은 우 적절한 것이었다.
만약 여러분이 전갈 꼬리 모양을 한 제대로 된 초콜릿을 맛보고 싶다면, 여전히 상온에서 설탕 결정을 공들여 손으로 간 뒤 코코아와 코코아버터를 넣어 맛이 풍부한 초콜릿을 만드는 시칠리아의 모디카로 여행하길 권한다. 그러나 시장실 창문에 돌을 던지고 타이어에 불을 지르고픈 이상한 충동에 사로잡힐지도 모른다.
- 결국 진함은 부와 편안함의 대명사가 되었고, 풍부한 갈색 풍미는 벽난로 옆에서 먹는 배부른 저녁 식사를 상징했다. 음식 농도의 진함과 맛의 풍부함이라는 개념은 시간이 지나면서 너무나 밀접해져서 시거를 물고 실크 모자를 쓴 산업화 시대의 거물들이 마치 걸쭉하고 맛이 풍부한 갈색 음식 덩어리처럼 거리를 느릿 느릿 걸어가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19세기를 거치면서 그레이비를 비롯한 여러 소스는 본질적인 특징보다는 '크림처럼 진한'' 계란처럼 진한' '밀가루처럼 진한' '버터처럼 진한' 같이 점도 측면에서 요리책에 묘사되기 시작한다. 1899년의 대중적인 요리책은 토마토소스가 너무 물으면 침을 넣으라고 조언했고, 영국의 주간지 펀치Punch는 1841년판에서 그레이비는 너무 진해서 그 위에서 스케이트를 타더라도 빠지지 않을 것이라는 다소 재미없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점성이 그레이비에서 다른 소스나 양념으로 퍼져나가자 점성을 높일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 필요해졌다. 저소득층이나 중산층은 점성을 높여주는 음식을 구입했고, 점점 실감하기 어려운 풍부함과 편안함을 느끼게 해 준다는 듯 그레이비소스라는 이불을 단단히 둘러쌌다.
- 산업화가 계속됨에 따라 점성을 높이거나 이상적인 그레이비를 흉내 내는 방법들이 더욱 복잡해졌다. 처음에는 새로운 전분과 루 기법이 점성에 대한 중독을 충족시켜주었다. 그 다음에는 비스토Bisto가 등장했는데, 이는 1908년에 출시된 대중적인 영국 그레이비가루 상표로서 밀과 감자전분의 점성을 강화하는 물질로 사용 되었다. 또한 고기 맛을 흉내 내는 글루탐산의 풍미를 더하기 위해 이스트 가루를 가미한 것이 었다. 샐러드드레싱으로 예전에는 병에 든 조미료가 사용되었지만 최근에는 그레이비소스를 비롯한 여러 소스가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 소스들은 전분과 달리 설탕으로 분해되지 않아서 따로유화제가 필요하다.
중세시대부터 요리의 점성을 높이고 안정화 시키기 위한 다양한 수액이 사용되었다. 프랑스의 약제사 겸 예언가면서 노스트라다무스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진 미셸 드 노스트르담은 그가 좋아하는 16세기의 유명한 음식을 요리하곤 했는데, 설탕으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만들 때 트래거캔스고무(콩과 나무줄기 에서 채취하는 끈끈한 고무 분비물을 문헌 물질로의 약품이나 접착제 등으로 사용됨-옮긴이)를 추천했다. 아라비아고무는 아직도 몇몇 후식류에 들어가며, 구아르고무guar gum나 메뚜기콩 고무locust bean gum는 식품 생산에 흔히 사용된다.그러나 대부분의 고무는 일반적인 레시피에 대량으로 사용하기가 너무 어렵거나 원하는 점성을 만드는 데 있어서도 부적합하다.
점성을 높이는 재료는 미국이 가장 필요로 한다. 20세기 중반 소련이 유리 가가린을 로켓에 태워 성층권으로 발사시키면서 미국은 우주 경쟁에서 선두를 내주었을 뿐 아니라, 음식의 점성을 높이는 경쟁에서도 뒤처졌다. 러시아인들 은사워크림을 모든 음식에 넣어 먹었지만, 미국인들은 전후 미국의 꿈과 희망을 집어 삼키고 있는 음식의 점성도 차이가 주는 위협을 극복 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자 다시 한번 자본주의가 구원에 나섰다. 미국 농무부가 뛰어든 것이다.
20세기 초반, 고기를 살 수 없는 사람들에 게 고기 맛이나마 제공하기 위해 고기 국물용 고형과 마마이트가 발명된 것처럼, 대중들에게 영혼을 달래는 소스를 제공하기 위해 점성을 높이는 물질이 연구되었고, 이렇게 개발된 그레이 비는 전후 시대 사람들의 두꺼워진 뱃살과 상응했다(더 진해진 소스만큼 뱃살 역시 두꺼워졌다는 의미-옮긴이). 1960년대 초 쿠바 미사일 위기와 가가린의 로켓 발사 사건 이후 미국 농무부는 식물에 병을 일으키는 크산토모나스 캄페스 트리스xanthomonas campestris라는 박테리아가 분비하는 다당류를 건조시키면 음식을 진하게 만드는 훌륭한 재료 겸 유화제가 된다는 사실 을 발견했다. 이렇게 해서 20세기 최고의 상품이자 음식의 점성을 다용도로 진하게 하는 크산 탄고무xanthan gum가 탄생했다.
- 이런 고무와 점성을 높이는 재료가 자본주의의 행진과 긴밀하게 얽혀 있다는 것은 이제는 놀랍지 않다. 전분은 오랫동안 섬유 제조에 사용되었지만, 지금은 의약품, 종이, 콘크리트 생산에도 이용된다. 구아르콩의 산물인 구아르고무는 요구르트, 수프, 아이스크림을 진하게 하는 데 이용되곤 했지만(물이 포함된 음식이 얼 때 얼음 결정이 생성되는 것을 막아준다) 지금은 석유시추 기술로 알려진 수압 파쇄 과정에 더 많이 사용된다. 이는 구아르고무 때문에 걸쭉해진 액체에 압력을 가해 땅속으로 쏘아서 천연가스나 석유 매장층을 밀어내 채취하는 방식이다. 서부 텍사스 지역은 오로지 이 수압 파쇄만을 위해 구아르 숲을 만들었다. 하지만 구아르고무의 세계 최대의 생산국은 인도로, 한 해 300만톤의 구아르고무를 서양으로 수출하고 있다. 인도의 숲이 파괴되는 상황은 변한 게 없다. 우리는 자신이 진하고 걸쭉한 것에 빠져 있다는 것을 더이상 의식하지 못한다. 이는 마치 산업혁명 뒤에 생겨난 광산이나 철도처럼 우리 삶의 한 부분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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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어에서 '경제'라는 말은 현재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 말은 수나라 때 최초로 보이지만, 여기에서 말한 '경제'는 경세제민 (나라를 잘 다스리고 백성을 구 제하다)의 줄인 말로 오늘날의 경제와는 전혀 다른 의미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경제'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의 oikonomia(집을 관리하다, household management)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을 일본인이 한자로 맨 처음 옮겼고 만청 시기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양계초가 이 명칭을 중국에 소개한 이후 중국도 '경제'라고 부르게 되었다. 경제학에서 '경제'는 사람과 사회가 희소한 생산 자원을 어떻게 제품을 생산하는 데 사용할 것인가와 생산된 제품을 어떻게 사회의 각 성원이나 집단에게 분배하여 소비하게 할 것인가를 말한다.
경제는 인류의 가장 중요한 활동이다. 엥겔스는 1883년 마르크스의 장례식에서 "다윈이 유기체의 발전 법칙을 발견한 것처럼 마르크스는 인류 역사의 발전 법 칙을 발견했습니다. 지금까지 이데올로기의 과잉 성장 아래 감추어진 단순한 사실은 인류가 먼저 먹고 마시고 은신처와 옷을 가진 이후에 정치, 과학, 예술, 종교 등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라고 연설했다. 그러므로 간단히 말해 경제는 인간의 생존 문제를 해결해주 는 것이다. 과거의 경제가 바로 '경제사'다.
- 과거에 중국 역사를 연구할 때에는 외부 변화를 중시하지 않았다. 실제로 '지구촌의 일부가 된 중국의 운명은 외부 세계와 밀접한 연관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미국 역사가 조너선 스펜스는 "적어도 1600년 이후부터 중국이라는 한 국가의 운명은 다른 국가와 연관되어 있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다른 국가와 함께 희소 자원을 찾고 상품을 교환하며 지식을 풍부하게 해야 했다"라고 말했다. 미국 정치사회학자 시모어 립셋은 "단지 하나의 국가만 이해하는 사람은 실제로 어떤 국가도 모르는 것이다'라고 했다.
- 특히 아메리카 항로의 개척은 더욱 큰 의미가 있었다. 페르난데스 아르메스토는 "1492년에는 기독교 세계의 겉모습만 바뀐 것이 아니라 전 세계가 질적으로 변화했다"라고 했다. 그는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현대 세계의 절대적인 부분이 1492년에 시작되었기 때문에, 글로벌 역사에서 특정 연대를 연구하는 역사학자에게 1492년은 확실한 선택이다. .... 1492년을 이야기할 때 가장 일반적으로 연상되는 것은 콜럼버스가 이 해에 아메리카로 가는 항로를 발견한 것인데, 이것은 세계를 변화시킨 중대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후 구세계는 신세계와 접촉하며 장벽이던 대서양이 교류의 통로가 되었고 과거에 나뉘어 있던 문명이 하나로 결합해 명실상부한 글로벌 역사 - 진정한 '세계체계'가 가능하게 되어, 각지에서 발생한 사건이 이어진 세계 안에서 서로 영향을 주게 되었다. 또한 사상과 무역이 일으킨 반응이 마치 나비 효과처럼 겹겹의 바다를 건너 전 세계에 퍼지게 되었다. 유럽에서 오랜 기간 존립한 제국주의가 이때 전개되기 시작해 전 세계를 한충 새롭게 만들었다. 아메리카가 서방 세계의 판도 안으로 들어오면서 서방 문명의 자원이 대폭 증가하자 아시아에서 패권을 갖고 있던 오래된 제국과 경제체제가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위대한 발견의 시대에 콜럼버스와 다가마 등이 항해를 통해 가져온 위대한 성과다. 이 성과를 간단히 말하면, 무역이 주도하는 세계, 즉 근대 세계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 기술 진보, 무역 등은 내재적 성장을 이끄는 단 하나의 원인이 아니라 내재적 성장의 변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일면이다. 내재적 성장이 이루어지는 과정에는 많은 요소가 있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지식혁명을 꼽을 수 있다.
지식혁명이란 무엇일까? 미국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지식의 의미가 근본적으로 변화함으로써 산업혁명, 생산력 혁명과 경영 혁명의 기초가 만들어졌다. 1700년이 시작된 후 단 50년 만에 과학기술이 세상에 나왔다. 과학기술Technology은 '기술Techne'과 '학문 Logy '이 합쳐진 말로 전자는 물건을 만들어내는 비결을 의미하고 후자는 조직적이면서 체계적이고 목적을 지닌 지식을 의미한다." "지식의 정의가 급격히 변하면서 산업혁명으로 이어졌다. 지식은 줄 곧 '존재'와 관련 있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다 하룻밤 사이에 지식이 '행동Doing'과 관련 있는 것으로 바뀌었다. 지식이 일종의 자원으로 바뀐 것이다. 줄곧 사유재산으로 여겨지던 지식이 하루아침에 공공재로 둔갑했다. ... 지식은 세 가지 혁명을 낳았다. 지식의 정의가 획기적으로 달라진 첫 번째 단계가 장장 100여 년 동안 지 속되며 지식이 도구, 공정, 제품 등에 응용되었고 마침내 산업혁명을 일으켰다. 두 번째 단계는 1880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될 때까지로 지식의 새로운 정의가 노동과 연관을 맺으면서 생산력의 혁명을 태동시켰다. 마지막 단계는 제2차 세계대전 종결 후에 전개되었는데, 지식이 '지식' 자체로 운용되기 시작하면서 오늘날까지 이르렀다. 자본, 노동력과 더불어 현재는 지식이 중요한 생산 요소가 되었다."
-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인쇄술, 대포, 기구, 마취약 같은 발명품은 중국이 우리보다 앞섰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이들 발명품이 즉시 생기발랄하게 일종의 신기한 물건으로 발전 했다면 중국에서는 여전히 배아 상태 그대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정체되어 있었다. 중국은 정말로 태아를 보존하고 있는 알코올 병이었다"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루쉰음표 선생 또한 "외국은 화약을 사용해 포탄을 만들어 적을 방어하는데 중국은 여전히 그것을 사용해 폭죽을 터뜨리며 귀신을 섬기고 있다. 외국은 나침반을 가지고 항해를 하는데 중국은 풍수나 살피고 있다"라고 했다. 중국과 유럽 국가는 지식혁명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기 때문에 각자 다른 발전의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 나는 이것이 여러 사람들이 이야기한 '니덤 난제'"'에 대한 하나의 답이라고 본다.
중국은 줄곧 이 문제의 해답을 얻지 못하다가 개혁개방' 이후에 야 비로소 '지식이 곧 힘'이라는 전 국민의 공감을 얻게 되었다. 지 식을 중시하는 것으로부터 중국에서 진정한 지식혁명이 시작되어 40년 동안 천지개벽할 거대한 변화를 만들어냄으로써 글로벌 역사에서 화려한 하나의 장을 이루어가고 있다.
- 베네치아는 향료인 후추를 수입하는 임무를 주로 맡았고 제노바는 지중해 동쪽(이집트, 흑해 연안 등)에서 곡물을 운송해오는 일을 책임졌다.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중세 국제도시로 전체 유럽을 대표하는 대외 창구로 중세 유럽에서 가장 규모 가큰 발전했다. 이탈리아 도시가 동방무역의 중심이 된 원인으로 다음의 세 가지 요인을 들 수 있다.
첫째, 역사적 요인이다. 이탈리아는 고대 로마제 국의 중심 지역으로 공업과 상업 발달의 전통을 일정 부분 계승해 왔다. 그렇다고 중세 이탈리아에서 영향력 있던 국제무역도시의 기 을 고대 로마제국에서 찾을 수 있다는 의미는 물론 아니다.
둘째, 지리적 요인이다. 전체 유럽에서 보자면 이탈리아는 동방 세계와 가장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을 지녔다. 또한 바다에 면해 있어 해상무역을 전개하기에 편리했다.
셋째, 정치적 요인이다. 중세 초 이탈리아의 많은 지역이 비잔틴제국에 종속되어 동방과의 교류와 교환이 비교적 손쉬웠다. 시칠리아는 한동안 아랍에게 점령당했기에 그들과의 왕래가 용이했다.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된 지중해 국제무역은 12세기에 이르러 기본적으로 베네치아와 제노바로 세력 범위가 나뉘었다. 베네치아는 동지중해 무역을 장악했고 제노바는 서지중해 무역의 패권을 차지했다.
- 1494년 여름, 이탈리아 국제체제 내에서 제멋대로 행해지던 권력 정치의 결과 밀라노 섭정 루도비코 스포르차(재위 1494~1499)가 재앙에 가까운 결정을 내렸다. 그는 알프스 산맥 너머 프랑스 국왕 샤를 8세(재위 1483~1498)에게 나폴리를 정복하고 제노바를 점령하도록 도와주겠다고 약속하고는 이탈리아로 출병을 요청했다. 샤를 8세는 이 기회를 틈타 이탈리아로 세력을 대 거학장했다.
루도비코 스포르차가 이리를 끌어들여 이탈리아 전체를 전화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것을 알게 된 이탈리아인들이 유일하게 생각해낸 구제 방법은 바로 스포르차를 모방하는 것이었다. 즉 또 다른 이리인 스페인을 끌어들여 이탈리아에서 프랑스를 몰아내기로 했다. 이로써 이탈리아 국제체제는 붕괴되었고 아펜니노반도는 막 떠오르기 시작한 근대 유럽 국제체제의 열강이 치열하게 다투는 무대가 되었다. 이는 곧 서구의 중심이 이탈리아와 지중해에서 유럽 대륙의 서쪽인 북대서양 동쪽으로 이동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국제정치학자 조지 모델스키Gcorge Modelski는 1494년을 근대 국제체제와 근대 세계 정치의 시작으로 보는 것은 앞서 언급한 사건 때문만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바로 같은 시기에 전개된 지리상의 발견에 따른 유럽의 해외 확장 이 첫 번째 글로벌 체제가 1494년에 나타나도록 이끌었다는 것이다. 1494년 6월 초, 샤를 8세가 이탈리아로 진격하기 7주 전에 포르투갈과 스페인 대표가 스페인 서북부의 작은 마을 토르데시야스에서 만나 조약을 체결했다. 초기 유럽 해외 진출의 주인 공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전 세계 대양 항해, 장거리 무역, 식민지 경영을 두고 동경 48도선(브라질 아마존강 하구 부근을 지난다)을 따라 동서 큰 범위로 나누어 각각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독점한다고 규 정했다. 토르데시야스 조약의 더 큰 의의는 "글로벌 수준에서 상호 작용하는 체제, 세계 최초의 글로벌 정치체제"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근대 국제체제가 갓 태어난 시기에 역사적 이정표가 될 만한 중대한 사건이 많이 발생했다. 이 체제의 출발점이 된 프랑스의 이탈리아 침략 외에 이와 유사한 사건을 계기로 유럽은 전 세계로 확장해 나가며 세계 정치에 커다란 영향을 주는 위치를 차지했다. 이에 따라 국제 정치 구조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 향후 450년간 세계 권력의 중심은 점점 서쪽으로 옮겨갔다.
- 합스부르크제국과 균형을 이루던 오스만제국의 국력이 급속도로 약해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 1571년 오스만제국의 해군은 스페인-베네치아 연합 함대에게 레판토에서 대패했다. 또 헨리 8세의 딸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영국 여왕 메리 1세(재위 1553~1558)는 펠리페 2세가 스페인 왕위를 계승하기 얼마 전에 그와 결혼해서 영국은 스페인의 예속 국가처럼 되었다. 유럽 안꾸은 보편 제국을 이룩하려는 합스부르크의 힘을 다시는 막을 수 없을 것 같 았다.
그러나 역사의 필연성과 우연성이 동시에 작용해 펠리페 2세의 제국 앞에 패권 추구를 가로막는 두 세력이 나타났다. 첫째, 네덜란드공화국United Provinces of the Necherlands으로 1568년에 시작해 13년 동안 계속된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성과였다. 둘째, 개신교 영국으로 메리 1세가 1558년에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신교도 엘리자베 1세(재위 1558~1603)가 뒤이어 왕위에 올라 통치하게 되었다.
넓은 의미에서 영국과 네덜란드는 모두 해상 강국의 부상이며 유럽 국제 정치에 대한 반작용으로 해외 확장을 추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속에 담긴 중요한 메커니즘의 핵심은 이렇다. "해외 확장이 국제체제와 동시에 탄생한 것은 서방 세계의 경계를 뛰어넘은 생기발랄한 모습이며 동시에 그것의 통일을 무너뜨린 것이다."
영국과 네덜란드, 두 해상 강국은 펠리페 2세의 패권 추구를 실패로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들은 펠리페 2세의 패권 추구를 좌절시켰을 뿐만 아니라 해양 강국이 유럽 대륙의 여러 국가와 연합해 반패권주의를 이끌면서 유럽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하나의 운영 방식을 개척했다. 이런 것이 모두 초기 근대 국제체제 에서의 중요한 발전과 변화라고 할수 있다.
-1587년에 엘리자베스 1세는 펠리페 2세와 영국 내 가톨릭 세력이 연합해 정권을 전복하려는 것을 막기 위해 오랜 기간 구금되어 있던 전 스코틀랜드 여왕이자 영국 왕위를 계승할 수 있던 메리 스튜어트를 처형했다. 이로써 영국 내부의 호응을 얻으려던 펠리페 2세의 희망을 완전히 없애버렸을 뿐 만 아니라 스페인에게 큰 치욕을 안겨주었다.
1588년 5월 대규모 스페인 무적함대가 리스본을 떠나 '골리앗이 다윗을 공격한" 것처럼 곧장 영국을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이 결정적인 대결은 예상치 못한 결과로 마무리되었다. 스페인 무적함대가 영국 해군의 공격을 받아 큰 타격을 입고 돌아가는 길에 폭풍우를 만나 거의 완전히 파괴된 것이다. 최대 강국의 패권적 지위가 이로부터 급전직하했다는 점에서 이 해전은 세계 근현대사에서 다른 어 떤 해전보다도 큰 의미를 지넌다. 이듬해에 나바라의 앙리가 프랑스 왕에 등극해 앙리 4세Henry IV(재위 1589~1610)가 되었다. 그는 프랑스의 국가 이익을 종교 분쟁보다 우선했으며 몇 년 후 새롭게 통일된 프랑스로서 스페인에게 선전 포고했다. 이를 계기로 프랑스는 유럽 강국으로서의 지위를 회복했고 영국과 네덜란드와 더불어 합스부르크 스페인의 또 하나의 큰 적수가 되었다.
1598년 펠리페 2세가 세상을 떠났다. 이는 16세기 합스부르크 제국의 두 차례에 걸친 거대한 패권의 조류가 막을 내렸음을 의미한다. 80여 년에 걸쳐 이어진 이 과정은 유럽 근대사에서 첫 번 째 관건의 시기로 국제 구조 측면에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이 과정에서 출현한 두 해상 강국 가운데 영국의 발전이 특히 중요하다. 프랑스는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오래 지속될 수 있는 강대국을 이룩했다. 합스부르크제국이 전성기를 지나 쇠퇴기에 접어들면서 남긴 것은 대략 50년 이후부터 되돌릴 수 없는 이류 국가로 전락한 스페인과 이후 300여년 동안 억지로 열강의 지위를 유지한 오스트리아다. 몇몇 강국이 중심이 된(다극화된) 근대 국제체제의 탄생과 공고화는 이후 3세기 동안 어떤 패권 야심국도 펠리페 2세 제국 이 전성기에 지녔던 우월한 지위에 도달할 수 없게 만들었다.
- 한자동맹이 몰락하고 해체됨으로써 네덜란드가 유럽의 항해 무역에서 패권을 차지할 수 있었다. 한자동맹은 13세기에 독일의 몇몇 도시가 체결한 상업 동맹으로 뤼베크가 그 중심이었다. 14세기에는 한자동맹 가입 도시가 160여 개로 늘었는데 독일뿐 아니라 발트해 연안의 국가와 도시도 동맹에 가입해 발트해 지역의 해운과 무역을 독점했다. 그러나 15세기에 들어서서 몰락의 길을 걷던 한자동맹은 1669년에 정식으로 해체되었다. 이런 상황은 네덜란드가 발트해 해운과 무역을 장악하는 좋은 기회로 작용했다.
한편 신항로 개척 이후 유럽 상업의 중심이 지중해 지역에서 대서양 연안의 항구 도시로 이동했다. 서구 역사에서는 이 사건을 상업혁명'이라고 한다. 이에 따라 대서양 연안의 안트베르펜, 암스테르담, 런던이 재빨리 유럽의 상업 중심을 차지하고 그 지역 경제 발전을 촉진했다. 1575년 스페인 군대의 공격을 받은 안트베르펜은 이후 스페인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 대서양으로 통하는 출구를 폐쇄했는 데, 이것이 안트베르펜에게 재앙이 되었다. 그들 자신의 출구를 잃게 된 안트베르펜은 상업, 금융업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북쪽의 암스테르담에게 넘겨주었다. 1585년부터 암스테르담이 안트베르펜을 대신해 당시 서구에서 가장 중요한 상업과 금융의 중심이 되었다.
또한 네덜란드공화국은 융통성 있는 외교 정책을 채택해 자유무 역에 유리한 국제 환경을 조성했다. 상업 이익을 모색하기 위해 네덜란드는 유럽 열강 사이의 대립을 충분히 이용하면서 형세 변화를 따라 끊임없이 외교 책략을 조정했다. 30년 전쟁 기간에 네덜란드는 영국, 프랑스, 덴마크, 스웨덴 등과 동맹을 맺고 독일과 스페인을 약화시켰으며 결과적으로 스페인은 네덜란드의 독립을 정식으로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영국을 물리쳤다. 1668년에 프랑스가 네덜란드를 침입하자네덜란드는 다시 태세를 전환해 영국, 스웨덴과 동맹을 맺고 프랑스를 물리쳤다. 이처럼 종횡으로 다양하게 동맹을 맺는 외교 정책은 네덜란드의 안전을 보장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17세기에 해상 패권을 차지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영원한 친구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다'는 외교 원칙을 네덜란드인이 영국인보다 더 일찍 인식하고 실 천했다고 볼 수 있다.
- 기생적이던 네덜란드 경제
네덜란드 경제에 산업이 일정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고는 해도 그 핵심적인 역할은 '중간상'의 색채가 강한 해운, 무역, 금융에 있었고 이들 덕분에 네덜란드는 '황금시대'를 맞이해 엄청난 부를 쌓을 수 있었다. 특히 네덜란드가 상업과 금융 강국이 된 이후 네덜란드인 사이에 상업적 이윤과 대출 이자를 추구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 일반화되었으며 심지어 이자 수입으로 살아가는 계층이 생겨나기까 지 했다. 동시에 국외 투자 이윤(6~7퍼센트)의 유혹을 마주한 네덜란드인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이윤이 높은 외국 산업에 투자하며 국내 산업 생산의 투자는 등한시했다(당시 네덜란드 국내 산업 생산 이윤은 4.5~5퍼센트였다).
18세기에 네덜란드는 세계 최대 채권국이었다. 영국 국채의 대부분을 네덜란드가 가지고 있어 영국은 매년 네덜란드에게 대출 이자로 2,500만 굴덴을 지불해야 했다. 프랑스가 네덜란드공화국에서 빌린 차관도 2,500만 굴덴에 달했고 스페인, 러시아, 스웨덴과 몇몇 독일의 작은 제후국이 네덜란드에서 빌린 차관 또한 3,000만 굴덴 가까이 되었다. 대량의 자금을 국내외에 빌려주고 이윤을 추구하게 되면서 네덜란드 국내 산업 생산에 투입할 자금은 부족한 상황이 발생했다.
- 콜베르가 보좌하는 동안 루이 14세는 짧은 기간에 눈부신 프랑스제국을 건설했다. 눈부신 제국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첫째, 프랑스가 절대군주제의 중앙집권왕국을 건설해 '짐이 곧 국가' 라고 할 정도로 '태양왕' 루이 14세의 왕권이 강성해져 장기간 지속되면서 방대하고 통제하기 힘들었던 봉건 잔재를 일소했기 때문 이다. 둘째, 프랑스가 스페인 상속권을 구실로 일으킨 네덜란드 전 쟁(1667~1668년)과 그 이후 영국, 스웨덴 등과 동맹해서 일으킨 네덜란드 침략 전쟁(1672~1678년 )을 거치며 프랑스가 정식으로 유럽을 제패했기 때문이다. 셋째, 문치와 무공이 함께 빛난 시기였기 때문이다. 국왕은 대프랑스 영토를 확대하는 한편 각계 문인을 초빙하고 문화, 예술, 과학 사업의 인재를 발탁했다. 또 베르사유궁을 건축하고 '루이 법전'을 반포하는 등의 업적을 이루었다. 결론적으로 이때는 제국의 권위와 왕권이 극에 달했다고 볼 수 있다.
부르봉 왕조의 국왕 루이 14세는 장장 72년 동안 재위했는데, 이 기간에 그는 왕성한 정력을 바탕으로 부지런히 정무에 힘쓰면서 행동거지를 엄격히 자제했다. 그래서 독일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라이프니츠는 그를 "유사 이래 가장 위대한 군주"에 속한다고 칭송했고 괴테는 "자연이 빚은 완벽한 제왕의 표본"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루이 14세는 중국 청나라를 61년간 통치한 강희제 (재위 1661~ 1722)와 거의 동시대인이면서 둘은 내치와 국방 모두에서 훌륭한 업적을 세웠기 때문에, 중국 사람들은 루이 14세를 '프랑스의 강희제'라 부른다. 중국과 유럽의 이 두 군주 사후 5~6대가 지나고 나서 두 나라가 공전의 대위기를 맞게 된 것 역시 그들의 공동 숙명이었다.
그러나 유사한 제국의 전성기를 거친 후 서로 전혀 다른 발전 추세를 보여주었다. 동방의 경직되고 정체된 왕조의 순환과 달리 서방의 프랑스는 근대화의 전환기로 들어서서 근대 산업을 발전시키고 해외 역량을 키워나갔다. 이들은 중상주의라는 완전히 새로운 체계 아래에서 콜베르가 온 힘을 다해 추진한 정책이다.
콜베르는 이때 야금, 무기, 조선, 방직, 군량, 가정용품 등을 생산하는 공장을 설립해 이탈리아, 스페인, 영국, 네덜란드 등으로부터 가져오던 대규모 상품 수입을 대체했다. 그래서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콜베르가 집권한 이후부터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대공업이 일어났다"라고 이야기했다. 동시에 콜베르는 17세기 초 이래로 계속된 전 대미문의 재정 흑자를 이용해 전통적으로 육지를 중시하고 바다를 경시하던 민족이 빠른 속도로 많은 전함을 보유하게 만들었다. 이로부터 프랑스 해군, 무역과 식민지 사업 발전을 위한 기초를 다졌으며, 프랑스는 18세기에 네덜란드를 앞질러 영국과 최강국 지위를 놓고 다투는 라이벌이 되었다.
- 프랑스의 산업화와 근대화는 정책 방향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진행되었는데. 중요한 것은 중상주의 정책을 일관되게 실행하지 않 았다는 점이다. 17세기에는 콜베르주의가 크게 힘을 얻었지만 콜베르가 세상을 떠난 이후 그의 정책은 중단되었다. 18세기 중반 다시 세력을 얻은 중상주의는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중농주의에 의해 다시 약화되었고, 영국과 체결한 통상조약이 성장 중인 프랑스 산업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후 대혁명과 전쟁이 항구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으나 당시 상황에서 공업과 대외무역은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1815년 이후 중상주의로 회귀하며 프랑스는 지속적인 성장기를 맞이했지만 1860년 영국과 다시 통상조약을 체결한 데 이어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프랑스 경제는 성장 동력을 잃고 전례 없는 침체기로 들어섰다. 이러한 상황은 19세기 말 재차 중상주의를 받아들일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처럼 엎치락뒤치락 반복을 거듭한 프랑스의 발전 양상은 영국과 분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영국은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 일관되게 중상주의 정책을 실시했다. 그 결과 19세기 초에 이르러 산업 분야에서 이미 세계에서 적수가 없게 되었고 그때 비로소 체계적으로 자유무역을 실행했다. 영국은 산업이 아직 성숙하지 않았을 때에는 가능한 한 중상주의의 보루 뒤에 숨어 실력을 쌓으며 경쟁력을 강화한 후 자유무역을 통해 자신의 우세한 점을 기반으로 전략지를 공략하는 규율을 꾸준히 따라갔다.
이런 면에서 영국이 중상주의에서 자유무역으로 탈바꿈한 것은 합리적이면서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반면 프랑스는 중상주의를 시행해야 할 때 자유화 정책을 시행하고 자유화 정책을 시행해야 할 때 중상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바꾸어 말하면 프랑스의 경제정책은 산업의 성장, 성숙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불일치, 왜곡, 반복의 양태를 보임으로써 프랑스의 산업화와 근대화 과정은 장기화되고 복잡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불일치, 왜곡, 반복은 국민성 같은 제반 요소와도 관련이 있겠으나 더욱 직접적인 원인은 프랑스에 안정된 헌정 체제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이른 시기는 말할 것도 없고 프랑스대혁명부터 프랑스 제5공화국에 이르기까지 프랑스는 14개 헌법을 실행했고 또한 헌법이 없거나 헌법이 마련되기를 기다리던 사실 정치체와 임시 정치체제도 16개나 있었다. 그래서 2세기도 안 되는 기간 동안 프랑스 에서는 모두 36개의 정치체제가 출현했다.
- 프랑스 역사에서 정부의 역할은 지나치게 큰 반면 근대화가 결핍 되어 있었다. 그 결과 가장 크게 영향 받은 것은 바로 재정 금융 분야다. 영국과 프랑스는 1689~1815년 사이 일곱 차례에 이르는 대규모 전쟁을 했고, 영국도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매년 군사 부문 지출이 국가의 세수를 초과했다. 그러나 1660~1685년에 영국 정부의 세수 체제는 정해진 세금을 분할 납부하는 포세제를 없애고 재정부가 관장하는 비교적 합리적인 근대적 조세 제도를 완성했다. 이로써 정부의 조세 수입이 크게 늘어 명예혁명 이후 30년 만에 영국의 세수는 20배 넘게 성장한 동시에 정부의 행정 운영 관련 지출은 비교적 낮은 수준에서 통제할 수 있었다. 같은 기간 프랑스의 전통적인 조세 제도는 크게 변화하지 않고 징세비가 계속해서 증가하는 상황이었다. 1735~1780년에 세수는 늘지 않고 줄어들었으나 정부의 지출은 오히려 증가했다. 프랑스인의 조세 부담은 영국인이나 네덜란드인보다 적었지만, 세수 체제의 혼란과 불공평으로 인해 프랑스인의 조세를 향한 불만은 점점 높아졌다. 세수 외에 더욱 중요한 국채라는 금융 제도가 있었다. 그러나 이 영역에서 프랑스 정부는 재정적 신용이 없었고 금융 제도가 전반적으로 낙후되어 있었다. 1720년 금융 개혁이 실패한 후 지페, 은행. 채권, 증권에 대한 프랑스인의 믿음은 더욱 약해져 정부의 자금 동원 능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이와 상반되게 영국은 의회가 부여한 신용 담보로 네덜란드에게서 대량의 신용 대출을 해올 수 있었고, 특히 단기 채무를 장기 채무로 바꾸어줄 수 있는 잉글랜드은행이 있었으며, 규범을 충족하는 채권이 시장에서 유통되었다. 이처럼 국내와 국외, 현재와 미래의 더 큰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에 있어 프랑스는 속수무책이었다. 마침내 1756~1763년에 벌어진 7년 전쟁 중 프랑스 정부의 재정이 다시 파산하자 영국은 이를 틈타 프랑스가 지니고 있던 넓은 해외 식민지를 차지하며 세계 패권국의 지위를 거머쥐었다.
- 빌헬름 2세 시대 독일의 세계정책은 표면적으로는 성공적으로 보였다. 우선, 독일 해군은 초보 함대에서 세계 제2대 해군으로 신속하게 성장했다. 식민지 쟁탈에서 보면, 1914년에 독일은 이미 영국과 프랑스 다음가는 세계 제3대 식민제국이 되어 160만 제곱킬로미터의 땅과 인구 1,500만 명의 식민지를 거느리게 되었다. 그런데 독일이 자신의 역량을 지나치게 드러낸 세계정책으로 인해 독일과 다른 열강 사이 대립이 격화되었고 기존의 세계 질서에 대한 독일의 도전은 다른 열강이 단결하도록 만들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독일은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았다. 독일이 전력을 다해 해 군을 확대하고 식민지를 확보하자 영국의 해상 패권과 식민제국으로서의 지위가 위협을 받으며 영국과 독일 양국은 적대적인 관계가 되었다. 독일과 프랑스는 아프리카에서 대립하는 동안 두 나라 사이의 오래된 원한이 해소되지 않은 가운데 새로운 원한이 더해지게 되었다. 특히 중근동 지역에서의 독일의 확장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주요 관심 사안이 되었다.
독일의 위협적인 공세에 대응하기 위해 영국, 프랑스, 러시아 3국은 마침내 이전에 품었던 원한을 버리고 독일의 위협에 맞서 연합하기로 했다. 유럽은 마침내 독일ㅡ오스트리아 이탈리아를 한 축으로 하고 영국-프랑스-러시아를 또 다른 한 축으로 하는 양대 군사 진영으로 나뉘게 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세계를 제패하려던 독일의 정책은 전쟁에 패배하며 물거품이 되어버 쪘다. 1918년 한 시대를 호령하던 독일제국이 몰락했다. 이로 인해 독일의 급속한 발전과 도전도 중단되었다.
- 흔히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고립주의'에 들어선 것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다. 실제로 어떤 미국의 정부도 '고립주의'를 채택한 적은 없다.
1. 어떤 국가도 세계 최고의 힘과 영향력을 보여준 이후 일반 국가 상태로 되돌아간 적이 없다. 미국도 예외가 아니다.
2. 미국은 각국의 기대와 달리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에 가입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미국 내 당정 간 분쟁 때문이었지 외교 전략에서 이해를 달리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3. 1921년 독일과 전쟁 상태를 끝낸 후 미국은 유럽 국가의 채권을 회수하는 데 집중했다. 이듬해 미국은 전시외채관리위원회를 조직했는데, 그 주요 목적은 각 채무국의 상환 능력에 근거해서 협의를 이루는 것이었다. 당시 유럽의 30개 독립 국가 가운데 17개 국가가 미국에게 103억 달러에 달하는 채무를 지고 있었다. 1920년대 미국 대통령 워런 하딩Warren G. Harding(재임 1921~1923), 캘빈 쿨리지, 허버트 후버Herbert C. Hoover(재임 1929~1933)는 모두 유럽의 상황을 경시하지 않았고 무시할 수도 없었지만, 우드로 윌슨 전 대통령의 서글픈 결말과 국내에 만연한 혼란을 감안할 때 미국 정부는 외교 문제를 처리할 때 국내 우선 정책을 계승할 것임을 천명했다. 즉 국제연맹 가입의 형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달러 패권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당연히 달러 패권을 확립하는 것은 순조롭지 않았다. 국제 문제에 있어 정치와 경제는 더욱 분리하기가 어렵다. 경제 불황과 부채 사슬이 붕괴되자 세계적인 경제 위기가 폭발했다. 4년에 걸친 세계 경제 불황이 반전되기 시작했을 때, 아시아와 유럽에서 두 개의 전쟁 발원지가 연이어나타났다. 바로 일본과 독일이었다. 이처럼 제1차 세계대전 이후 20년 동안을 흔히 '20년의 위기'라고 하는데, 이 시기에 세계는 또 다른 세계대전 속으로 빠져들었다. 5년 뒤 독일과 일본의 파시스트들이 패전하기 직전에 주요 전승국이 미국 브레턴 우즈에 모여 전후 국제통화 체제 구축 방안을 논의했다.
- 1964년 달러의 지위가 도전받기 시작했으며 이 도전은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다. 샤를 드골(재임 1959~1969) 대통령의 경제 고문이던 경제학자 자크 뤼에프는 "달러는 이 체제에서 결코 적은 돈을 벌지 않았으며 미국은 달러를 발행해 다른 나라에서 생산된 상품과 노동력을 구매한 후 해외 투자로 전환해 세계 자본가의 지위를 유지했다"라고 지적했다.
중국학자 딩이판과 뉴원신해의 설명은 아주 재미있다. 그들이 함께 쓴 달러 패권 (2014)에서 미국인이 마음대로 환율을 이용해서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비아냥대듯 말했다. "한 미 국인이 10만 달러를 위안화로 환전할 때 환율이 1:6.5라고 한다면 65만 위안이 된다. 그가 1년 동안 중국을 여행하면서 돈을 물 쓰듯이 쓰고 난 후 50만 위안을 남겼고, 그 남긴 돈을 달러로 환전하려고 할 때 달러 대 위안화의 환율이 1:5라고 한다면 그는 10만 달러를 환전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미국인 한 명 혹은 몇몇 미국인, 아니면 전체 미국인이 중국에서 1년 동안 위안화를 흥청망청 써도 결국 1년 전과 같은 액수의 달러를 다시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물 론 이 말은 농담이지만, 미국이 마음대로 달러 환율을 이용해 자국의 이익을 꾀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미국은 이러한 지적과 경고를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1960년대 달러의 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해 1971년에 전후 최초로 달러의 위기가 나타났다. 이때가 바로 리처드 닉슨(재임 1969~1974) 정부의 시기다. 닉슨은 새로운 경제정책을 채택하며 줄곧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했던 브레턴우즈 체제의 종결을 선언 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1. 닉슨은 전후 미국이 과중한 부담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동맹국과 그 부담을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2. 브레턴우즈 체제 자체가 미국의 일부 경제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달러가 지배하는 상황에서 화폐를 과도하게 발행해서는 안된다.
3. 당시 미국의 몇몇 전후 동맹국은 경제가 회복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금융 분야를 포함해 세계 경제와 정치에서 미국이 지고 있던 책임을 분담할 필요가 있었다.
- 브레턴우즈 체제의 붕괴가 현재 글로벌 경제의 불확실성에 주는시사점은 무엇일까?
1. 당시 대영제국은 미국과 동등한 지위를 확보하려고 했지만 미국의 해리 화이트는 영국의 존 케인스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미국 경제가 더 건전하고 강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과 일본은 경제가 회복됨에 따라 미국의 패권 지위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영국 경제사학자 니얼 퍼거슨Niall Ferguson이 지적한 것처럼, 미국은 그들이 제조업에서 보유한 우월적 지위를 회복하고 계속 유지해야 했다. 오늘날 미국의 창의력과 첨단 기술은 여전히 세계 일류지만 미국 본토의 제조업은 크게 오도되어 미국인이 해외 투자를 추구하고 일부 저가 산업을 해외로 이전하면서 미국의 중하층민은 미국 경제 발전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소비자 부채가 더욱 증가하게 되었다. 이것이 미국이 쇠락한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다.
2. 현재 패권국은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통화 특권을 어떻게 신중하게 행사할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애초에 달러의 위상은 한때 미국에게 세계 유통 통화를 발행하는 특권을 주어 다른 나라의 정치, 금융, 통화 등에 영향을 미치게 했다. 그러나 미국이 특권을 남용하 자 미국을 향한 다른 나라의 신뢰가 크게 약화되었고 심지어는 다른 대안을 찾게 만들었다.
3. 패권국인 미국은 전후 다자주의 약속을 지키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했다. 이 체제가 안정될 수 있을지 여부는 미국이 다자주의를 지지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70여 년 전에 만들어진 브레턴우즈 체제는 다자간 합의의 산물이었고 많은 국가가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이었다.
따라서 배리 아이켄그린이 말한 달러가 지위를 회복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세계화로 인한 다극화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미국 경제 전체의 건전한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 또 달러 환율의 변동에만 의지해서는 안 되며 공정한 세제와 사회 복지를 시행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미국이 달러 지위를 계속 유지하는 데 있어 중요한 포인트다.
- 일반적으로 1980년대 초에 인플레이션을 강력하게 억제한 폴 볼커의 정책은 달러에 대한 서방 세계의 신뢰를 재편했으며 미국 경제 가 다시 정상 궤도에 진입해 20년 동안 주요 경제 대완화를 형성하 는 데 큰 공을 세운 것으로 인정된다. 플라자 회의는 브레턴우즈 체 제가 붕괴되고 서방이 변동 환율제를 채택한 이후 달러가 다시 세 계 기축통화의 지위를 확립한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환율 조정 폭에 있어 참여 국가의 기대에 부응했으며 미국과 일본, 미국과 세계 간 무역 불균형 조정도 주기가 더 길어졌다는 면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은 셈이었다. 학문적 관점에서 볼 때 플라자 회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브레턴우즈 체제 시대의 전문가와 관리들의 집념 어린 실험이었으며 특히 1년여 뒤에 이루어진 '루브르 합의Louvre Accord'에 이러한 집념이 반영되어 변동 통화 구간을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1980년대를 마감하면서 이러한 생각은 다시는 주류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브레턴우즈 체제와 변동 환율의 사전 동요를 경험한 것은 신용 통화가 된 달러가 다시 세계 통화 체계에서 주도적 지위를 확립 하도록 만들었다.
간단히 정리해보자. 플라자 회의(합의)는 서방 5개국이 처음으로 공동 조율에 참여한 행동으로 적절한 타이밍에 가장 나쁘지 않은 옵션이었다. 중국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 규모가 미국의 60~70퍼센트에 접근할 때마다 미국은 추격자들을 억제해왔는데 플라자 회의가 그 전형적인 예라는 견해가 존재한다. 그러나 미국의 환산에 따르면, 플라자 합의 이전인 1984년 일본의 GDP는 미국의 30퍼센트를 막 넘어섰는데 이 비율은 1978년보다 높지 않은 것 이었다. 일본의 GDP가 미국의 70퍼센트에 도달한 때는 1995년이다. 1978년과 1995년의 비율이 높은 이유 중 가장 중요한 요인은 달러 대비 엔화의 가치 상승이었다.
그러나 1995년 이후 미국과 일본의 무역 마찰은 이미 종결 단계에 접어들어 더는 억제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밖에 경제 역량 면에서 현재 전 세계에서 미국과 어깨를 견줄 만한 곳으로는 유럽 연합Europcan Union, EU밖에 없는데, 양자는 서로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상황이다. 미국은 EU에 어떠한 압력도 가하지 않았으나 중국 내 많 은 평론가들은 미국이 유로화를 억제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오해일 뿐이다. 실제로는 유로화의 창립과 발전에 미국의 지원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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