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그문트 바우만'에 해당되는 글 6건

  1. 2014.10.29 사회학적으로 생각하기
  2. 2014.10.18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3. 2014.10.18 지구화, 야누스의 두얼굴
  4. 2014.10.18 쓰레기가 되는 삶들
  5. 2014.10.18 모두스 비벤디
  6. 2014.10.18 리퀴드 러브

 


사회학적으로 생각하기

저자
지그문트 바우만, 팀 메이 지음
출판사
서울경제경영 | 2011-10-25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사회학적으로 생각하기』. 사회학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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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 다른 학문적 영역을 나타내는 인간세계의 자연스런 구분은 없음. 오히려 인간행위를 연구하는 학자들간의 분업만이 있음. 이것은 각 전문가 집단들이 그들의 영역에 속하거나 속하지 않는 것을 결정하는 독점적 권리와 더불어 각각 전문가들의 상호분리에 의해 재강화되고 있음
- 우리가 속한 집단들의 방법과 수단에 길들여짐으로써 우리는 자유를 누릴 수 있지만, 그 대가는 특정한 생각이나 영역의 제한임
- 외집단은 내집단이 집단의 정체성, 응집성, 연대감, 감정적 안정을 위해 필요한 것과는 반대로 가정하게 됨. 그래서 집단의 범위 안에서 한쪽에서는 지지하면서 협력할 준비를 하지만 적대적 집단과는 협력을 거부하는 것임. 이것은 마치 안정을 위해 혼란의 두려움을 필요로 하는 것과 같음. 이러한 것을 유지하기 위한 이념은 연대감, 상호 신뢰감이며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이 이름 붙인 통합, 공동유대가 바로 그것임.
- 경계개념의 핵심은 상징적 경계구분의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깨닫게 되면서 우리의 자의식이 가지는 한계를 이해하는 것.
- 습관적인 그리고 감정적인 행위를 흔히 비합리적이라고 함. 그런 행동을 바보스럽거나 무익하거나 잘못 혹은 나쁜 것으로 보아서는 안되며, 행동의 유용성으로 평가하고자 해서도 안됨. 왜냐하면 많은 습관화된 일상은 유익하고 유용할 수 있기 때문. 실제로 그런 행동들이 우리의 일상적 삶을 보충하는 실천적 활동을 만들어냄. 더구나 행동하기 전에 모든 행위를 심사숙고하는 부담을 덜어줌. 마찬가지로 결과를 예정하지 않고 분노를 폭잘하는 것은 그 사건이나 행위 혹은 쟁점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가를 다른 사람이 이해하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음. 이런 점에서 비합리적 행위는 합리적 행위보다 효과적임.
- 비인간적 목표를 받아들이는 관료제는 근무자뿐만 아니라 관료조직의 경계를 넘어서까지 도덕적 동기를 침묵하게 하는 능력을 활발하게 보여주었음. 관료제는 자기보존의 동기에 호소함으로써 이런 것을 성취하지만 동시에 집단학살의 관료적 운영은 많은 희생자들의 협력과 많은 방관자들의 도덕적 무관심을 가져왔음. 희생될 사람들은 심리적 포로가 되었고 관료적인 운영에 순응하면서 얻게 될 보상을 환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마치 마법에 걸린 것 같았음. 억압자들이 무턱대고 분노하지 않고 그들의 협력이 인정을 받는다면, 구제될 뭔가가 있고 위험도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망없는 희망을 계속가졌음. 많은 경우 희생자들은 미리 의도된 대로 열심히 따라줌으로써 억압자들을 즐겁게 했음. 이런 방법에서 희생자들의 순응은 예상할 수 있음.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들은 자신의 운명을 피할 수 없다고 보았음. 그래서 집단학살의 통제자는 무질서를 크게 경험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목표를 획득하였고 가스실로의 기나긴 행렬을 감독하기 위한 간수들도 많이 필요하지 않았음.
- 사랑받는 다는 것은 그 어떤 사람과는 달리 자신만 독특하게 다루어지는 것을 의미.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받는 사람이 가진 이미지나 그들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 보편적인 규칙에 호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인정. 즉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의 주권, 상대가 주장하는 자율성의 선택권리를 받아들이고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 본질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의 절대적인 고집센 주장마저도 인정하는 것을 의미. 내가 누구이든, 무엇을 하든, 어디에 있든 상대를 인정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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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저자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출판사
동녘 | 2013-08-30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왜 1퍼센트의 부에 침묵하는가? 지그문트 바우만, 침묵하는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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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재물에는 반드시 큰 불평등이 따른다. 큰 부자 한명이 있으려면, 적어도 오백명의 가난뱅이가 필요하다 (아담 스미스)
- 부자와 권력자에 대해서는 거의 숭배에 가까운 감탄을 표하면서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은 경멸하거나 무시하는 이런 성향이야말로 우리의 도덕감정을 타락으로 이끄는 주된 원인이자 가장 일반적인 원인이다. (아담 스미스)
- 대략적으로 전세계 최고부자 1000명의 부를 모두 합하면 가장 가난한 25억명의 부를 모두 합한 것의 거의 두배가 됨. 헬싱키에 본부를 두고 있는 세계개발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오늘날 전 세계 인구중에서 최상위 1% 부자들의 부의 총합은 하위 50%에 속한 사람들의 부의 총합보다 거의 2000배나 됨
- 유엔개발계획의 인간개발 보고서 98년 판 서문에는 전 세계 인구의 20%가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모든 재화와 서비스의 86%를 차지하고 있는데 비해 가장 가난한 20%는 불과 1.3%를 소비한다고 보고됨. 이때로부터 거의 15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더 나빠졌음. 전 세계 인구 중 상위 20%가 생산된 재화의 90%를 소비하고 있는 반면, 가장 가난한 20%는 불고 1%만을 소비. 또한 전 세계 최고부자 20명의 재산 총합이 가장 가난한 사람 10억명의 재산의 총합과 같은 것으로 추정됨.
- 경제적 정설에 따르면 극심한 불평등은 경제의 효율성과 경제성장의 속도를 높여줌. 상위에 있는 사람들의 보수를 올려주고 세금을 낮춰주면 기업가 정신이 고양되어 경제적 파이가 더 커지기 때문이란 것. 그렇다면 불평등을 확대시켜 온 지난 30년간의 실험이 성과가 있었는가? 증거에 따르면 그렇지 않음. 빈부격차는 급증한 반면 약속과 달리 경제발전은 없었음. 80년 이후 영국의 경제성장률과 생산성은 지금보다 평등주의적이었던 전후시기에 비해 3분의 1이 떨어졌고 실업률은 5배 높아짐. 80년 이후 맞이한 세차례의 불황기는 50년대와 60년대의 불황기보다 더 심각하고 길었으며 지난 4년간의 위기에서 절정에 달했음. 80년 이후의 실험은 대체로 경제를 양극화시키고 위기에 더 취약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
- 사회적 비용이 큰 선택일수록 선택될 확률이 낮음. 그리고 선택하는 사람들이 고분고분 선택할 때 받게 되는 보상처럼 압력을 받고 있는 선택을 거부할 때 드는 비용도 주로 사회적 용인, 지위, 위신이라는 소중한 통화로 지불됨. 우리 사회에서 이 비용들은 불평등과 불평등의 공적, 사적 결과에 대한 저항을 매우 어렵게 만들고 따라서 저항하기보다 체념하고 얌전히 굴복하거나 아니면 자발적으로 협력하는 길을 시도하고 추구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조정됨. 자본주의적이고 개인주의화된 소비자 사회의 주민인 우리가 인생이라는 게임의 전부 혹은 대부분에서 계속해서 던질 수 밖에 없는 주사위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불평등에서 이익을 얻거나 혹은 이익을 얻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유리하게 정해져 있음.
- 일반적으로 아무런 증거가 없이도 명백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암묵적 전제들.
(1) 경제성장은 공생에서 생기게 마련인 과제들을 처리하고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2) 영구적으로 늘어나는 소비 혹은 더 정확히 말해 새로운 소비대상들의 가속적 교체는, 인간의 추구하는 행복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길이거나 혹은 적어도 중요하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길일 것이다.
(3) 인간들의 불평등은 자연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삶의 가능성들을 삶의 불가피성에 맞춰 조절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반면, 삶의 원칙들을 함부로 변경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손해를 초래할 수 밖에 없다.
(4) 경쟁은 사회질서의 재생산과 사회정의의 필요충분조건이다.
- 보편적 복지에 이익이 되게 작용한다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실제롤 보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누구의 손이고 누가 그 손의 움직임을 조종하는지는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음. 은행과 자본이동에 대한 탈규제는 부자들이 최대의 이익을 가져다줄 최고의 착취지역들로 자유롭게 이동함으로써 더 부유해지도록 함. 반면에 노동시장에 대한 탈규제는 가난한 사람들이 자본 소유자들(투자자들)의 해외진출을 막거나 최소한 해외진출 속도를 늦추기는 커녕 그들의 활약을 추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더 가난하게 만듬. 더욱이 가난한 사람들이 취직해서 생활임금을 받을 가능성은 이제 부를 좇는 자본의 변덕에 맡겨져 있음. 동시에 경쟁 때문에 자본의 변덕이 만성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놓이게 되고 심각한 정신적 불안과 끊임없는 걱정과 만성적 불행을 초래할 가능성, 다시 말해 비교적 안전한 짧은 기간에도 없어지지 않은 채 계속 가난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골칫덩이가 될 가능성이 있음.
- 경제성장은 소수에게는 부의 증가를 의미하지만, 수많은 대중에게는 사회적 지위와 자존감의 급격한 추락을 의미. 갈수록 해로움을 더해가는 집단적 경험을 통해 접하게 되는 경제성장은 도처에서 분명히 볼 수 있는 끔찍한 사회문제들에 대한 보편적 해결책이 아니라 그러한 문제들을 지속시키고 심화시키는 주된 원인으로 보임.
- 고분고분히 말 잘 듣고 결코 주인의 뜻을 거스르는 법이 없이 순종적이 되어가는, 즉 점점 더 사용자 친화적이 되어가는 전자기기들의 판매를 통해 막대한 이윤을 올리고 있는 전자부문의 호황은 새로 발견되어 개발되는 또 하나의 처녀지로서의 모든 특징을 가짐. 이제 소비자 시장들은 또 다른 정복에 성공하고 있는 셈. 관심, 걱정, 욕망, 노력 등의 영역은 지금까지는 보통사람들의 주체적 결정이나 가내수공업, 집에서 빵만들기 등에 맡겨져 있었고 시장의 관점에서 볼 때 수익성이 없었지만 이제는 성공적으로 상품화, 상업화되기에 이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많은 활동영역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영역에서의 활동들도 일상을 벗어나 잠시 동안의 기분전환을 구매하는 행위로 변질되었고 쇼핑몰로 향하게 되었음. 다시 말하지만, 기만적인 주장들과는 반대로 소비자 시장이 가장 최근에 개척한 영역은 사랑의 영역이 아니라 나르시시즘의 영역임
- 개인의 능력과 능력들의 자연적 불평등에 대한 믿음은 수백년 동안 사회적 불평등 없이 무리없이 수용되는 데 기여한 가장 강력한 요소중 하나였음.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사회적 불평등의 확대를 제어하는 매우 효과적 브레이크의 역할도 수행. 다시 말해 그것은 불평등의 부자연스러운(실제로는 지나친) 정도, 즉 부정의한 정도를 탐지하고 측정하는 기준을 제공했고 그것의 수정을 요구했음. 사회적 복지국가의 전성기에 볼 수 있었듯이, 때로 그것은 사회적 위계의 상층과 하층간의 간극을 얼마간 좁히는 역할도 했음. 하지만 오늘날의 사회적 불평등은 자연스러움이라는 가면을 쓰지 않고도 스스로를 영속화하는 방법들을 찾아내고 있는 것 같음.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회적 불평등은 패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승리한 것으로 보임. 실제로 사회적 불평등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서는 이제는 다른 논증들이 필요. 하지만 사회적 불평등은 그렇게 하는 대신에 자연스러움에 근거한 자기변호를 중단해 버렸음. 그리하여 부자연스러움이라는 둘도 없는 벗을 근거로 이루어지던 지나친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비판은 제거되거나 최소한 축소되었으며, 사회적 불평등의 결과들은 중립화될 수 있게 되었음. 이제 사회적 불평등은 스스로를 영속화할 수 있는 능력에다 스스로를 선전하고 강화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게 됨. 이제 사회적 불평등의 행진을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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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화 야누스의 두 얼굴(교양 교양인 3)

저자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출판사
한길사 | 2003-09-13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전세계적으로 진행되고 또한 거론되는 지구화 담론과 현상을 묘사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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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들 가운데 일부는 완전하고도 진정한 지구적이 될 것이며, 일부는 지역성, 즉 지구적인 것이 살아가는 게임의 규칙이 강요되는 세상에서 전혀 쾌적하지도 않고 참을만하지도 않은 곤혹스러운 상태에 처하게 될 것임. 지구화된 세상에서 지역적이 된다는 것은 사회적 박탈과 하락의 징조. 지역화된 존재의 불편함이란 사람들의 삶이 도달할 수 이쓴ㄴ 공적 공간의 범위를 지역화된 곳에 제한해 버리는 상황에서, 해당 지역의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의미생성과 의미결정 능력을 가질 수 없도록 만들고 그럼으로써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해석행위와 주어진 감각에 의존하도록 만들어버린다는 데 있음.
- 역사상 금세기의 마지막 25년은 공간으로부터 독립전쟁으로 막을 내릴 것이라는 점은 확실한 것 같다. 아무런 경고없이 갑자기 이동할 수 있는 권력은 자유롭게 착취하지만 착취의 결과는 무시해버릴 수 있는 권력이다. 결과에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것은 가장 은밀하고 소중한 전리품이다.
- 투자자들이 획득한 이동성은 새로운 것이며, 실제로 급진적인 무조건성이란 측면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며, 의무로부터 권력이 단절되는 것을 의미. 이 의무란 피고용자에 대한 것일 뿐만 아니라 노약자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들, 그리고 모든 사람의 생존조건의 자체적 재생산에 대한 것이기도 함. 요컨대 그들의 자유란 공동체의 영속과 일상생활에 기여할 의무로부터의 자유인 것. 권력의 영토적 본질과 삶 전체의 영속하는 영토적 본질 사이에 새로운 비대칭성이 출현하고 있음. 그것은 이제 닻을 올린 권력으로, 아무런 경고 없이 갑자기 이동할 수 있는 그 권력은 자유롭게 착취하지만 착취의 결과는 무시해버릴 수 있는 권력임. 결과에 대해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것은 가장 은밀하고 소중한 전리품임. 새로운 이동성은 지역에 묶이지 않고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는 자본을 탄생시킴. 투자의 효율성을 계산할 때 그 결과에 대해 책임져야 할 비용을 고려해야 할 필요가 없어짐.
- 과거의 이른바 밀접하게 엮인 공동체들은 소규모 공동체 내부의 즉각적인 의사소통(그 규모는 두뇌의 질, 즉 인간의 시각과 청각 그리고 기억용량 같은 자연적 한계에 의해 결정됨)과 지역들 간의 시간의 크기와 정보교환에 필요한 비용 사이의 격차에 의해 존재했고 또 생존해 왔음. 반면에 오늘날 공동체가 쉽게 파괴되고 생존기간이 짧은 것은 근본적으로 그러한 차이가 더불어 소멸되거나 축소된 결과임. 공동체 내무의 의사소통과 공동체 사이의 의사소통이 모두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면, 공동체 내부의 의사소통은 공동체 사이의 의사소통보다 그다지 큰 이점을 가질 수 없게 됨.
- 기술적인 시간/공간 거리의 무효화는 인간조건을 균질화하기 보다는 오히려 양극화하는 경향이 있음. 그것은 특정한 인간들을 영토적 제약에서 해방시키며 특정한 공동체 생성의 의미를 외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한편, 영토를 박탈당하는 다른 특정한 인간들은 계속해서 제약을 받게 되어 공동체 생성 의미와 정체성 부여능력을 상실하게 됨. 어떤 사람들에게 그것은 물리적 장애로부터 유례없는 자유를 나타내며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거리로부터의 이동과 행동능력을 상징함.
- 파놉티콘적 권력의 도입은 다수가 소수를 관찰하는 상황에서 소수가 다수를 관찰하는 상황으로의 근본적인 변형을 표현함. 권력의 행사에서 감시가 구경거리를 대체함. 전근대 시기에 권력은 평민들이 경외심과 두려움을 가지고 화려함, 부, 황홀함을 감탄하면서 보게 함으로써 민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데 사용되곤 했음. 근대 권력은 신민들의 시선을 끌기 보다는 신민들을 관찰하는 방식으로 음지에 머물러 있는 것을 선호
- 파놉티콘에서는 선택된 지역 사람들이 다른 지역민들을 관찰 (파놉티콘 이전에는 보통의 지역민들이 그들 가운데서 선택된 지역민들을 관찰했음.) 시놉티콘에서는 지역민들은 지구를 관찰. 후자의 권위는 원거리성에 의해 확보됨. 이때 지구는 문자그대로 지역 세계의 바깥이며, 지역 세계 위를 선회하는 것은 한떼 그리스도교 세계 위를 선회하던 천사의 그것보다 훨씬 가시적인 것으로서 일상적인 것일수도 있고 돌출적인 것일수도 있음. 그것은 가시권내에 존재하지만 동시에 비접근적인, 우뚝 솟아 있고 우주적인 것으로서, 무한하게 우월하여 추종하거너 추종을 꿈꾸는 열중한 자들에 대한 빛나는 사례들로 존재. 그것은 존경받는 동시에 갈망됨. 즉 지배하는 대신에 충성심을 획득함. 지역들은 지구위에서 서로 격리되고 분리된 채 천상의 정규적인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지구를 만나고 있음. 만남의 메아리는 모든 지역적 소리들을 억누르지만, 지역적 소리들은 감옥에 가로막혀 지구적으롤 반향하게 되며, 그러한 반향을 통해 폭로되고 재강화됨
- 초국적인 성격의 세력을 주조하는 것은 익명적이고 따라서 정체를 파악하기 힘듬. 그것들은 통일된 체계 또는 질서를 형성하지 않음. 그것들은 보이지 않는 행위자들에 의해 조작된 체계들의 응집임. 문제가 되는 세력의 의도적 조화나 통일체는 존재하지 않음. 시장은 경쟁하는 세력들의 상호적인 협상행위라기 보다는 조작된 요구, 인위적으로 창조된 욕구, 빠른 이윤획등을 위한 욕망의 밀고 당김임.
- 소비능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소비자들에게는 절대 휴식이 허용되면 안됨. 그들은 새로운 유혹에 노출된 채 늘 깨어 있고 또 늘 경계상태에 있어야 하며, 그리하여 결코 자극이 시들어가지 않는 상태(그리고 영속적인 의심의 상태, 항상적인 불평의 사태)로 남아 있어야 함. 그들에게 명령하고 주목을 돌리게 하는 미끼는 불만을 벗어날 것을 약속해주는 한편, 계속해서 의심을 확인시켜주는 것임
- 보편적 경쟁의 패턴과 보편적 숭배의 개인적 주인공으로서 치장되는 부유한 자들은 한때 자수성가한 사람들이었음. 그들의 삶은 엄격하고 완고한 노동윤리 및 자애로운 분별력으로 전형화되었음.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그렇지 못함. 숭배의 대상은 이제 부 자체임.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이지, 무엇을 해야 한다거나 무엇을 했느냐가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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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가 되는 삶들

사회 2014. 10. 18. 16:47

 


쓰레기가 되는 삶들

저자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출판사
새물결 | 2008-08-27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포스트모던 이후 실종된 거대 담론, ‘삶의 쓰레기화’로 복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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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잉여로 취급되지 않을까 하는 X세대의 걱정은 이전 세대들이 경험하고 기록한 걱정과는 다름. X세대 역시 이들 세대에 고유한 전통과 괴로움을 겪고 있음. 하지만 그들이 전례없는 일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님. 현대가 시작된 이래 각 세대는 자기 세대의 난파선들을 사회적 진공속에 버려두었음. 이 난파선들은 진보에 수반된 희생자라는 이름을 달고 있음. 다른 사람들이 점점 더 속도를 내고 있는 차에 뛰어 올라타는 데 성공해 승차감을 만끽하는 동안 이들보다 덜 영리하고, 덜 기민하고, 약삭빠르지 못하고, 힘이 없거나 덜 모험적인 다른 많은 사람들은 뒤처지거나 만원이 된 차량이 들어가지 못하게 저지당했으며, 그나마 차바퀴에 깔려 완전히 박살나지 않으면 다행이었음. 진보라는 차의 좌석과 입석 수는 통상 차에 타려는 승객을 모두 수용하기에 충분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승차는 언제나 선별적이었음. 아마 이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차에 올라타는 것이 달콤한 꿈이 되었던 것 같음. 진보는 더 많은 사람에게 더 많은 행복을 이라는 구호하래 선전됨. 그러나 차를 계속 달리게 하는데, 속력을 높이는 데, 한때는 협상하고 침락하고 정복하는 데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필요했던 높이까지 오르는 데 이제는 더 적은 사람만이 필요. 그리고 이것이 아마도 현대의 트레이드마크인 진보가 마침내 드러낸 본모습임
- 농업은 연속성을 대변함. 하나의 낟알은 더 많은 낟알로 되돌아오며, 한마리의 양은 여러 마리의 양을 낳음. 변한 듯해도 변한 것은 없다. 존재의 재확인과 재긍정으로서의 성장...상실없는 성장...도중에 아무것도 잃지 않음. 죽음은 재생으로 이어짐. 농촌사회가 존재의 영원한 연속성을 당연시 하는 것은 자연스로운 일임.
- 반면 광업은 단절과 불연속의 전형. 새로운 것은 어떤 것이 버려지거나 폐기되거나 파괴되지 않는한 태어날 수 없음. 새로운 것은 목표제품과 그것의 출현에 방해되는 다른 모든 것을 빈틈없고 무자비하게 분리하는 과정에서 생김. 가치의 고하를 떠나 순수한 금속은 광석에서 불순물과 찌꺼기를 제거하고서야 얻을 수 있음. 광업은 죽음이 자궁 속에 새로운 탄생을 잉태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함. 대신 광업은 새로운 것의 탄생이 옛것의 죽음을 요구한다는 가정아래 진행됨. 그리하여 각각의 새로운 창조물은 조만간 뒤로 밀려나 썩거나 분해되어 더 새로운 창조물의 길을 열어주었던 것들과 운명을 공유하게 됨. 광업이 통과하는 각 지점은 되돌아갈 수 없는 지점임. 광업은 뒤로 돌아갈수도 취소할수도 없는 일방통행로를 따라 움직임. 광업의 역사는 다 캐내어져 버려진 광맥과 갱도들의 무덤의 역사임. 쓰레기 없는 광업은 생각할 수 없음
- 수많은 그럴싸한 말들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민족이라는 관념은 국가정체성이라는 공허한 원군을 빼면 아무것도 아니며, 모두 그렇게 인식하고 있음. 여전히 이 문제에 관해 회의적인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관점에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살펴보면 도움이 될 것임. 한편으로 강대국들은 민족없는 국가(쿠웨이트)를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든다. 다른 한편으로, 국가없는 민족(쿠르드, 아르메이나, 팔레스타인, 바스크, 이산한 유대인)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는 자들에 의해 억압되고 절멸될 수 있음. 한 민족의 운명은 오직 국가 정체성일수 밖에 없고 민족개념은 시민권 개념 안에서 다시 명문화되어야만 의미가 있음
- 인구과잉의 정도는 해당 국가의 보유자원이 부양할 수 있는 사람들 수와 인간적인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지역 환경의 잠재력에 기초해 측정되어야 한다는 것. 그러나 에얼릭 부부의 지적에 따르면 네덜란드가 기록적 인구밀도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수많은 다른 나라들이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 예를 들어 84년~86년에 네덜란드는 약 4백만톤의 곡물, 13만톤의 기름, 그리고 48만톤의 완두콩, 강낭콩, 렌즈콩을 수입했는데, 이들은 모두 세계 상품거래소에서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평가되는 품목들. 반면 네덜란드는 수출전용 우유나 식욕 육류를 생산해 지독하게 높은 가격으로 팔 수 있었음. 부국들이 높은 인구밀도를 유지할 여유가 있는 이유는 그들이 고엔트로피의 중심으로서 세계의 나머지 지역에서 자원을 끌어오고, 대신 전세계 에너지 공급의 상당량을 소모하고 소진하고 파괴하는 산업적 공정의 결과로 산출된 공해성 (종종 유독성) 쓰레게를 그곳에 돌려주고 있기 때문. 비교적 인구가 적은 부국들이 전세계 에너지 사용량의 약 3분의 2를 소모함.
- 복지국가라는 사고는 개인적 위험을 사회하하고 이런 위험의 감소를 국가의 임무와 책임으로 삼겠다는 의도를 천명한 것. 국가권력에 대한 복종은 국가가 개인의 불행과 재난에 대비한 보험증서를 보증하는 것에 의해 정당화되었음. 지금 정치 권력에 대한 그런 공식은 과거 속으로ㅗ 사라지고 있음. 복지국가 제도는 점점 해체되고 퇴출되는 반면 비즈니스 할동과 시장에서의 자유경쟁 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에 부각되었던 이전의 제약은 제거되고 있음. 국가의 보호기능은 고용이 불가능한 소수의 사람들과 병약자들만 포함할 정도롤 줄어들고 있으며, 이런 소수 집단마저 사회적 보호 문제가 아니라 법과 질서의 문제로 재분류되는 경향이 있음. 시장의 게임에 참여할 수 없는 무능력이 갈수록 범죄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는 것임. 국가는 자유시장의 논리 또는 비논리로부터 야기되는 취약성과 불확실성에서 손을 떼고 있으며, 이제는 그러한 문제들을 사적인 문제로, 개인들이 사적으로 보유한 자원으로 다루고 대처해야 할 문제롤 정의하고 있음.
- 경제이주자와 망명자의 이미지는 둘다 폐기된 인간을 상징하며, 이 둘가운데 어느쪽을 이용해 분노와 노여움을 불러일으키든 분노의 대상, 즉 화풀이를 할 상대방은 크게 다르지 않음. 그러한 행위의 목적 또한 다르지 않음. 지구화되는 세상에서 내부와 외부 사이의 공허한 구분(그다지 존중받지 못하고 주기적으로 파괴되는)을 수호하기 위해 곰팡이가 슬고 부식되는 벽을 강화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 두가지의 폐기된 인간들 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망명자는 통상 질서서례와 구축의 열정이 차곡차곡 쌓여 생긴 생산물인 반면 경제적 이주자는 이제는 지구 전체를 포괄하게 된 경제적 현대화의 부산물이라는 것뿐.
- 파슨스에 따르면 모든 체계가 생존하기 위해 수행할 필요가 있는 악명높은 과업인 긴장관리와 유형유지는 현재 거의 전적으로 인간 쓰레기를 사회의 나머지 사람들과 철저히 분리하는 것, 사회의 나머지 사람들이 그 속에서 생활을 영위하는 법적제도로부터 그들은 면제하는 것. 그리고 그들을 중립화하는 것으로 요약됨. 더는 인간쓰레기를 멀리 있는 쓰레기처리장에 버려버리거나 정상적인 생활이 닿지 못하는 곳으로 확실히 옮겨 놓을 수 없음. 따라서 철저히 밀폐된 용기에 밀봉해 버려야 함. 형벌제도가 그런 밀폐용기를 제공해줌. 재활용 시대에 교정 부문의 심층부로 기능했던 감옥들은 오늘날 훨씬 더 명시적으로 배제와 통제 메커니즘으로 인식됨. 이제 감옥이란 제도의 가장 중요하고 가치있는 요소로 간주되는 것은 담장이지 담장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님. 재활, 교화, 재교육을 통해 길 잃은 양을 무리롤 되돌려보낸다는 의도는 기껏해야 단지 이따금씩 입에 발린 말로만 표현될 뿐임
- 영원성은 인류가 시작된 이래부터 신뢰할 수 있는 인간의 동반자/안내자였던 것처럼 보임. 그러나 영원성에 이르는 길과 인간의 길은 서로 갈라졌거나 막 갈라지려고 하는 듯함. 사람들은 이제 어린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어렴풋하게 조차 본인들의 여행의 의미를 알지 못한 채 그리고 여행에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확신조차 하지 못한 채 걸어가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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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스 비벤디

사회 2014. 10. 18. 16:46

 


모두스 비벤디

저자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출판사
후마니타스 | 2010-10-12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동하는 근대” 시리즈 최근작! 불확실성의 ...
가격비교

- 모두스 비벤디는 견해가 서로 다른 이들 사이의 협약을 의미하는 라틴어. 영어로 번역하면 삶의 양식으로, 서로 갈등하는 이들 사이에 삶이 지속될 수 있도록 해주는 일시적 합의를 의미. 국제정치 분야에서 이는 좀더 실질적이고 완전한 조약으로 대체할 것을 염두해 두고, 잠정적으로 체결하는 협약을 뜻함. 바우만은 유동하는 근대의 삶의 양식이 바로 이런 갈등하는 이들 사이의 일시적이고도 잠정적인 공존과도 같다고 말함. 이방인과 공간을 공유하는 도시주민의 삶의 양식, 전지구적 엘리트들과 지역적 주민들이 불안하게 공존하면서 만들어가는 삶의 양식, 난민과 도시민, 인간 쓰레기가 뒤어여 만들어 내는 삶의 양식들이 바로 유동하는 근대사회의 모습인 것
- 한 지역의 복지는 어떻게든 다른 곳의 불행과 연결된다. 밀란 쿤델라의 말을 빌리며, 지구화를 통해 실현된 것 같은 인류의 통합은 주로 도시피할 곳이 없다는 것을 의미
- 공포라는 자본은, 온갖 투자처로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는 유동자산처럼, 사업에서든 정치에서든 이윤만 있으면 어디든 파고들 수 있고 또 실제로도 그러고 있음. 그러므로 모든 종류의 마케팅 전략에서 주요한 그리고 어쩌면 유일한 강조점은 바로 개인의 안전임. 점점 더 개인의(더 정확하게 말하면, 육체적인) 안전에 대한 약속으로 환원되어 가는 법과 질서는 정치적 선언과 선거운동에서 주요한 그리고 십중팔구 유일한 강조점이 되었음. 그런가 하면 대중매체는 개인의 안전을 위협하는 것들을 보여주는 일을 시청률 전쟁의 주요한 그리고 어쩌면 유일한 항목으로 삼았으며, 이를 통해 공포라는 자본을 끊임없이 공급해 공포가 마케팅과 정치 모두에서 더 큰 성공을 거두게 만들었음. 레이서렛의 말처럼, 텔레비전에 비친 세상은 '양을 지키는 개-경찰'이 '양떼-시민'을 '늑대-범죄자'로부터 보호하는 모습과 닮아 있음.
- 2000년도까지 실시된 연구들 대부분이 교도소 수감과 시장과 무관한 사회급여 및 그 급여에 사용된 국내총생산의 백분율 사이에는 모정의 강한 부의 상관관계가 있음을 보여줌. 하지만 형사정책의 엄격성과 형사 범죄의 빈도 사이에 의미 있는 상관관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없음. 요컨대, 개인의 신체적 안전과 재산을 위협하는 위험들과 범죄에 새롭게 초점이 맞춰진 것은 불안정한 분위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과 경제규제가 철폐되고 그에 따라 사회적 결속력이 개인의 자기책임으롤 대체되는 속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이 분명하게 밝혀짐
- 백년전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렇게 주장. 자본주의는 발전을 위한 발판으로 비자본주의적인 사회조직들을 필요로 하지만, 자체의 존립을 보장해줄 수 있는 조건을 동화시킴으로써 발전한다. 비자본주의적인 사회조직들은 자본주의가 자랄 비옥한 대지를 제공하고 자본은 그런 조직들의 잔해를 먹고 살아간다. 그리고 자본축적을 위해서는 이런 비자본주의적인 배경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자본축적은 이런 배지를 대가로, 즉 그 배지를 먹어치우면서 진행된다. 자본주의 자체에 내재된 역설은, 자본주의는 자기꼬리를 잘라먹고 살아가는 뱀과 같다는 것.
- 과거에 쓰레기를 만들어내던 자들은 자신들이 지역적으로 만들어낸 문제를 전지구적 차원에서 해결할 수 있는 방책을 모색하고 찾아냄. 반면에 후발 주자들은 전지구적 차원에서 발생한 문제를 지역적 차원에서 해결해야 함. 더구나 해결책이라고 해도 기껏해야 미비할 뿐이며 성공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경우가 많음. 자발적이든 강요된 것이든 후발주자들은 전지구적 압력에 굴복해 자본과 상품이 거침없이 유통되고록 영토를 개방하게 됨. 한째 대부분의 가족과 지역사업체는 새로 태어나는 사람들을 모두 흡수하고 채용하고 부양해 대체로 그 생존을 보장할 수 있었고 또 기꺼이 그렇게 했음. 그러나 개방은 대부분의 가족과 지역사업체를 위태롭게 만듬. 근대 세계의 후발주자들은 이제야 가구경제와 사업의 분리, 이로 인해 나타나는 모든 사회적 격변과 인간적 곤경을 경험하고 있음. 반면에 근대의 선두주자들은 자신들이 안고 있던 문제를 전지구적 차원에서 해소해버릴 수 있었기 때문에 그 과정을 어느정도 완화할 수 있었음. 가족적 제약과 지역적 제약에서 벗어난 경제가 더 이상 흡수할 수 없는 잉여인구를 안치하는데 쉽게 사용할 수 있었던 비어잇고, 임자 없는 많은 땅이 그 해결책이었던 것. 그러나 후발주자들은 이런 사치를 누릴 수 없음
- 노베르튼 엘리아스의 유명한 개념을 빌리면 기득권자들은 아웃사이더의 유입에 직면하면 위협을 느낄 수 밖에 없음. 특정한 아웃사이더, 즉 난민들은 우리들 가운데 섞여 잇는 모든 이방인들이 체현하고 있는 거대한 미지의 세력을 상징하는 것 외에도 기득권자에게 안전하고 익숙한(익숙하기 때문에 안전한) 일상적 삶의 보호막이 얼마나 쉽게 뚫기거나 짓밟힐 수 있는지, 그리고 기득권자들의 안전이 얼마나 기만적인지 등을 생각나게 하는, 멀리서 들려오는 전쟁의 소음, 약탈당한 집과 불탄 마을의 악취를 뼈저리게 느끼게 함.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망명지에서 지적한 것럼, 난민은 불행을 예고하는 사람임.
- 70년대는 전후 재건사업과 사회적 협약, 그리고 제국주의 체제의 해체와 신생국의 증가로 인한 발전론적 낙관주의로 점철된 영광의 30년이 어느덧 과거 속으로 묻혀버리고, 국경들은 사라지고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지며 지구화가 걷잡을 수 없이 진행되면서, 한편에서는 부가 넘치고 다른 한편에서는 가난이 창궐함에 따라 풍요로운 북반구에서 흥청망청 대는 동안 다른 세계에서는 좌절감과 소외감이 깊어져 가는 멋진 신세계가 열리던 시기였음. 되돌아보면, 이 10년은 근대사의 진정한 분수령이었음을 알 수 있음. 70년대가 끝나갈 즈음, 삶의 도전에 직면한 모든 이들은 이미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근본적으로 변화해 버린 상황속에서 기존의 삶의 지혜들은 무효화되어 버리고 삶의 전략을 전면적으롤 재검토하고 수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됨
- 다양한 근대적 불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은 인간의 악행과 악한에 대한 공포. 공포는 다른 사람들과 그들의 의도에 대한 의심, 그리고 인간적 동반자 관계의 항상성과 신뢰성을 불신하는 마음에서 시작되며, 궁극적으로는 계속 유지하고 신뢰할 수 있는 동반자 관계를 맺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함 그리고/또는 의지 부족에서 비롯됨. 카스텔은 이런 시대가 벌어지게 된 것은 근대의 개인화 때문이라고 말함. 그는 근대사회가 좀처럼 벗어나기 힘든 불확실성(우발성)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고 지적. 과거에는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던 공동체와 조합들이 보호의 규칙을 정하고 그 규칙이 적용되는지 감시하는 역할을 했지만 이제는 개인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살피며, 스스로를 보호하고 구제해야 하는 상황으로 바뀌었기 때문. 이런 사회에서는 도처에 위험이 숨어 있다는 공포와 실존적 불안에 대한 의식이 전염병처럼 퍼질 수 밖에 없음.
- 위험으로부터의 보호는 메소포타미아의 고대촌락에서부터 중세 도시를 거쳐 아메리카 원주민 정착촌에 이르기까지, 보통 거대한 담이나 울타리에 의해 경계가 규정된 도시들을 건설하게 만든 주된 유인이었음. 벽과 해자, 방책은 우리와 그들, 질서와 무질서, 평화와 전쟁을 구분하는 경계였음. 담장 저편에 머물기만 하고 들어오도록 허락받지 못한 사람이 바로 적이었음. 그러나 도시는 비교적 안전한 장소이기는 커녕, 최근 백년 동안 안전보다는 위험을 연상케하는 장소가 됨. 기이하게도 역사적 역할과는 반대로, 그리고 본래 도시 건설자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오늘날 도시는 위험을 막아주던 피난처에서 위험의 주요 근원으로 빠르게 변하고 있음. 천년 동안 문명과 야만과의 관계가 역전되었음. 도시생활은 도처에 공포가 도사리고 있는, 두려움이 지배하는 자연상태로 바뀌었음.
- 상류층 사람들은 관심사가 다른 곳에 있기 때문에 거주지에 대해서는 소속감을 느끼지 않음. 그들은 홀로 남겨져 존재하며, 매우 자유로와서 자기만의 소일거리에 완전히 몰두할 수 있고, 일상적인 안락함을 누리는데 필요한 서비스는 언제든지 보장되어 있으므로 자신들의 거처가 위치한 도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음. 과거의 도시 엘리트나 공장소유자, 또는 소비재와 아이디어를 파는 상인에게, 도시주민은 그들이 풀을 뜯는 초원이고 부의 원천이었으므로 관리하고 보살피며 책임져야 할 보호대상이었으나 이제는 그렇지 않음. 대체로 오늘날의 도시 엘리트는 그들의 도시 일에는 무관심함. 그 도시는 단지 많은 지역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음.
- 이질공포성의 뿌리는 지극히 평범해 그 정확한 위치를 찾아내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으며, 그것을 경감시비는 것은 쉽지 않겠지만, 그것을 이해하기란 매우 쉬운 일임. 리처드 세넷이 주장하는 것처럼, 비슷해지려는 욕망을 나타내는 우리라는 느낌은 사람들이 서로를 깊이 들여다보아야 할 필요성을 회피하는 방법이다. 그 느낌은 일종의 정신적 안정을 약속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즉 차이의 한가운데서 차이와 더불어 사는 데 요구되는 이해와 협상, 타협을 해야하는 수고를 덜어줌으로써 함께 지내는 것을 거 감당하기 쉽게 만드는 것임. 공동체의 일관성 있는 이미지를 형성하는 과정에는 실제 참여를 회피하려는 욕망이 내재되어 있음. 공동이 경험이 없는데도 처음부터 공동의 유대감이 일어나는 이유는, 사람들이 참여와 그 위험 및 어려움, 그리고 그에 따르는 고통을 두려워하기 때문. 유사성의 공동체를 향한 충동은 외부의 타자성 뿐만 아니라 내부의 생동적이지만 동요를 일으키고 활기 있지만 귀찮은 상호작용에서도 물러나 틀어박히겠다는 신호. 동일성의 공동체는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세상에서 일상의 삶에 가득한 위험에 대비하는 보험증서와 같은 매력을 갖고 있음. 그러나 동일성 속으로 숨는다고 해서 그것을 유발한 위험이 줄어드는 것은 아님. 물론 그런 위험을 피할 수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음. 모든 완화제들처럼, 그렇게 숨는 것은 기껏해야 그런 위험이 미치는 가장 직접적이고 가장 두려운 일부 영향을 막아주는 피난처만을 약속해줄 뿐임
- 분리주의가 이방인이 상징하는 위험을 해결할 수 있는 근본적인 해법으로 제공되고 받아들여 진다면 이방인과 같이 사는 것은 갈수록 어려워질 것임. 거주구역들을 동질화하고 그들 간의 모든 상업과 의사소통을 줄여서 더 이상 어쩔 수없을 정도로 최소화하는 것은, 배제와 분리의 충동을 강화하고 심화하는 가장 확실한 처방임. 이런 조치는 이질 공포증에 걸린 사람이 받는 고통을 일시적이나마 도움을 줄수도 있음. 하지만 이 치료법은 자체가 발병의 원인이며 고통을 가중시키고 치유하기 어렵게 만들므로, 고통을 참을 수 있는 수준으로 유지해 줄 더 강한 새로운 약이 늘 필요하게 됨. 공간 분리에 의해 강조되고 강화되는 공간의 사회적 동질성은 거주자들의 차이에 대한 내성을 약화시켜 이질 공포증적인 반응들이 표출될 기회를 증가시키며, 도시생활을 안전하고 편안하며 쾌적하게 만들기보다는 더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만듬. 이질 애착증과 같은 감정이 자리잡고 자라날 수 있도록 하는데에는 그와는 반대되는 건축 및 도시계획 전략이 더 적합할 것임. 모든 범주의 도시 주민이 마음을 열고 자주 찾을 수 있는 매혹적인 열린 공공 공간을 늘리는 전략이 그것임. 한스 가다머가 그의 진리와 방법에서 지적해 널리 알린 것처럼 상호이해는 지평의 융합에 의해 촉진됨. 상호이해가 요구하는 융합은 공유된 경험의 산물일 수 밖에 없음. 그리고 경험을 공유한다는 것은 공간을 공유하지 않고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임.
- 예전에 유토피아는 요원하지만 사람들이 갈망하고 꿈꾸는 목표를 의미했음. 인간의 필요에 더 잘 복무하는 세계를 추구하는 이들이 진보를 통해 도달해야 하며, 도달할 수 있는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도달하게 될 목표 말이다. 그러나 현대인의 꿈을 보면 진보는 개선의 결과를 함께 누리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생존을 이야기하는 담론으롤 변한 것 같음. 사람들은 진보를 앞으로 돌진하려는 충동의 맥락에서 생각하지 않고 경주에서 살아남으려는 필사적인 노력과 연결해서 생각함. 진보를 의식하면 조심스러워 지고 경각심을 갖게 됨. 세월은 유수와 같다는 말을 들으며, 뒤처지지는 않을까, 달리는 기차에서 떨어지지는 않을가, 의자뺏기 놀이에서 앉을 의자가 없지는 않을까 걱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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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퀴드 러브

사회 2014. 10. 18. 12:33

 


리퀴드 러브

저자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출판사
새물결 | 2013-04-1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힐링'과 '관계의 우울'에 중독되어 있는 우리 시대, 새로운 ...
가격비교

- 욕망이 소비를 원한다면 사랑은 소유를 원한다. 욕망의 충족은 대상의 소멸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반면 사랑은 대상을 자기 것으로 하면서 커지고, 오래 지속될수록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욕망이 자기파괴적이라면 사랑은 자기영속적이다. 욕망과 마찬가지로 사랑은 대상에 대한 위협이다. 욕망은 대상을 파괴하고, 그 와중에 자신도 파괴한다. 사랑이 기꺼이 대상에 둘러치는 보호망은 그 대상을 노예로 만들어 버린다. 사랑은 범인을 체포해 구금한다. 체포영장을 발부하는 것이다. 수인을 보호하기 위해서. 욕망과 사랑이라는 행위의 목적은 상반된다. 사랑이 영원을 향해 던진 그물임에 비해 욕망은 그물을 짜는 성가신 일을 피하기 위한 전략이다. 본질 그대로 사랑은 욕망을 영속화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욕망은 사랑의 족쇄를 피하고 싶어한다.
- 소비시장의 막강한 힘이 동하면 지르는 것을 일상적 행위방식 속에 깊이 세뇌시킴에 따라 욕망을 따르는 것은 안절부절 어색해하고 불안해 하면서도 이제 어떤 것이 약속하는 것이 얼마나 멋지냐 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것 같다.
- 소비지상주의는 재화의 축적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재화를 사용하고, 사용한 후에 다른 재화와 그것의 사용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그것을 없애는 것에 관한 것이다.
- 소비생활은 가벼움과 속도를 좋아한다. 또한 그것들이 조장하고 촉진시켜 줄 새로움과 다양성을. 소비하는 인간의 삶에서 성공의 척도는 구매량이 아니라 구매빈도다.
- 휴대폰은 서로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접촉할 수 있도록 해준다. 휴대폰은 접촉하고 있는 사람들이 따라 떨어져 있을 수 있도록 해준다.
- 모든 것이 유동적이고 개체화된 현대 사회를 향한 길 위에서 훨씬 더 많은 일이 일어났는데, 이 사회는 장기간에 걸친 헌신이 드물고, 장기간 사귀는 일은 거의 기대할 수 없으며, 무슨 일이 일어나든 서로 돕기로 하는 의무따위는 현실적이지도 또 굳이 그럴 가치도 없는 것으로 만들고 있다.
- 빠르게 지구화되는 세계에서는 누구도 그야말로 글로벌 조작자가 아니다. 글로벌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전세계를 누비는 엘리트의 구성원들이 할 수 있는 최대의 것은 자신들의 이동성을 위한 영역을 넓히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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