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저자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출판사
동녘 | 2013-08-30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왜 1퍼센트의 부에 침묵하는가? 지그문트 바우만, 침묵하는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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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재물에는 반드시 큰 불평등이 따른다. 큰 부자 한명이 있으려면, 적어도 오백명의 가난뱅이가 필요하다 (아담 스미스)
- 부자와 권력자에 대해서는 거의 숭배에 가까운 감탄을 표하면서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은 경멸하거나 무시하는 이런 성향이야말로 우리의 도덕감정을 타락으로 이끄는 주된 원인이자 가장 일반적인 원인이다. (아담 스미스)
- 대략적으로 전세계 최고부자 1000명의 부를 모두 합하면 가장 가난한 25억명의 부를 모두 합한 것의 거의 두배가 됨. 헬싱키에 본부를 두고 있는 세계개발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오늘날 전 세계 인구중에서 최상위 1% 부자들의 부의 총합은 하위 50%에 속한 사람들의 부의 총합보다 거의 2000배나 됨
- 유엔개발계획의 인간개발 보고서 98년 판 서문에는 전 세계 인구의 20%가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모든 재화와 서비스의 86%를 차지하고 있는데 비해 가장 가난한 20%는 불과 1.3%를 소비한다고 보고됨. 이때로부터 거의 15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더 나빠졌음. 전 세계 인구 중 상위 20%가 생산된 재화의 90%를 소비하고 있는 반면, 가장 가난한 20%는 불고 1%만을 소비. 또한 전 세계 최고부자 20명의 재산 총합이 가장 가난한 사람 10억명의 재산의 총합과 같은 것으로 추정됨.
- 경제적 정설에 따르면 극심한 불평등은 경제의 효율성과 경제성장의 속도를 높여줌. 상위에 있는 사람들의 보수를 올려주고 세금을 낮춰주면 기업가 정신이 고양되어 경제적 파이가 더 커지기 때문이란 것. 그렇다면 불평등을 확대시켜 온 지난 30년간의 실험이 성과가 있었는가? 증거에 따르면 그렇지 않음. 빈부격차는 급증한 반면 약속과 달리 경제발전은 없었음. 80년 이후 영국의 경제성장률과 생산성은 지금보다 평등주의적이었던 전후시기에 비해 3분의 1이 떨어졌고 실업률은 5배 높아짐. 80년 이후 맞이한 세차례의 불황기는 50년대와 60년대의 불황기보다 더 심각하고 길었으며 지난 4년간의 위기에서 절정에 달했음. 80년 이후의 실험은 대체로 경제를 양극화시키고 위기에 더 취약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
- 사회적 비용이 큰 선택일수록 선택될 확률이 낮음. 그리고 선택하는 사람들이 고분고분 선택할 때 받게 되는 보상처럼 압력을 받고 있는 선택을 거부할 때 드는 비용도 주로 사회적 용인, 지위, 위신이라는 소중한 통화로 지불됨. 우리 사회에서 이 비용들은 불평등과 불평등의 공적, 사적 결과에 대한 저항을 매우 어렵게 만들고 따라서 저항하기보다 체념하고 얌전히 굴복하거나 아니면 자발적으로 협력하는 길을 시도하고 추구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조정됨. 자본주의적이고 개인주의화된 소비자 사회의 주민인 우리가 인생이라는 게임의 전부 혹은 대부분에서 계속해서 던질 수 밖에 없는 주사위들은 대부분의 경우에 불평등에서 이익을 얻거나 혹은 이익을 얻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유리하게 정해져 있음.
- 일반적으로 아무런 증거가 없이도 명백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암묵적 전제들.
(1) 경제성장은 공생에서 생기게 마련인 과제들을 처리하고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2) 영구적으로 늘어나는 소비 혹은 더 정확히 말해 새로운 소비대상들의 가속적 교체는, 인간의 추구하는 행복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길이거나 혹은 적어도 중요하면서도 가장 효과적인 길일 것이다.
(3) 인간들의 불평등은 자연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삶의 가능성들을 삶의 불가피성에 맞춰 조절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반면, 삶의 원칙들을 함부로 변경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손해를 초래할 수 밖에 없다.
(4) 경쟁은 사회질서의 재생산과 사회정의의 필요충분조건이다.
- 보편적 복지에 이익이 되게 작용한다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은 실제롤 보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누구의 손이고 누가 그 손의 움직임을 조종하는지는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음. 은행과 자본이동에 대한 탈규제는 부자들이 최대의 이익을 가져다줄 최고의 착취지역들로 자유롭게 이동함으로써 더 부유해지도록 함. 반면에 노동시장에 대한 탈규제는 가난한 사람들이 자본 소유자들(투자자들)의 해외진출을 막거나 최소한 해외진출 속도를 늦추기는 커녕 그들의 활약을 추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더 가난하게 만듬. 더욱이 가난한 사람들이 취직해서 생활임금을 받을 가능성은 이제 부를 좇는 자본의 변덕에 맡겨져 있음. 동시에 경쟁 때문에 자본의 변덕이 만성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놓이게 되고 심각한 정신적 불안과 끊임없는 걱정과 만성적 불행을 초래할 가능성, 다시 말해 비교적 안전한 짧은 기간에도 없어지지 않은 채 계속 가난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골칫덩이가 될 가능성이 있음.
- 경제성장은 소수에게는 부의 증가를 의미하지만, 수많은 대중에게는 사회적 지위와 자존감의 급격한 추락을 의미. 갈수록 해로움을 더해가는 집단적 경험을 통해 접하게 되는 경제성장은 도처에서 분명히 볼 수 있는 끔찍한 사회문제들에 대한 보편적 해결책이 아니라 그러한 문제들을 지속시키고 심화시키는 주된 원인으로 보임.
- 고분고분히 말 잘 듣고 결코 주인의 뜻을 거스르는 법이 없이 순종적이 되어가는, 즉 점점 더 사용자 친화적이 되어가는 전자기기들의 판매를 통해 막대한 이윤을 올리고 있는 전자부문의 호황은 새로 발견되어 개발되는 또 하나의 처녀지로서의 모든 특징을 가짐. 이제 소비자 시장들은 또 다른 정복에 성공하고 있는 셈. 관심, 걱정, 욕망, 노력 등의 영역은 지금까지는 보통사람들의 주체적 결정이나 가내수공업, 집에서 빵만들기 등에 맡겨져 있었고 시장의 관점에서 볼 때 수익성이 없었지만 이제는 성공적으로 상품화, 상업화되기에 이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많은 활동영역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영역에서의 활동들도 일상을 벗어나 잠시 동안의 기분전환을 구매하는 행위로 변질되었고 쇼핑몰로 향하게 되었음. 다시 말하지만, 기만적인 주장들과는 반대로 소비자 시장이 가장 최근에 개척한 영역은 사랑의 영역이 아니라 나르시시즘의 영역임
- 개인의 능력과 능력들의 자연적 불평등에 대한 믿음은 수백년 동안 사회적 불평등 없이 무리없이 수용되는 데 기여한 가장 강력한 요소중 하나였음.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사회적 불평등의 확대를 제어하는 매우 효과적 브레이크의 역할도 수행. 다시 말해 그것은 불평등의 부자연스러운(실제로는 지나친) 정도, 즉 부정의한 정도를 탐지하고 측정하는 기준을 제공했고 그것의 수정을 요구했음. 사회적 복지국가의 전성기에 볼 수 있었듯이, 때로 그것은 사회적 위계의 상층과 하층간의 간극을 얼마간 좁히는 역할도 했음. 하지만 오늘날의 사회적 불평등은 자연스러움이라는 가면을 쓰지 않고도 스스로를 영속화하는 방법들을 찾아내고 있는 것 같음. 결론적으로 말하면, 사회적 불평등은 패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승리한 것으로 보임. 실제로 사회적 불평등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서는 이제는 다른 논증들이 필요. 하지만 사회적 불평등은 그렇게 하는 대신에 자연스러움에 근거한 자기변호를 중단해 버렸음. 그리하여 부자연스러움이라는 둘도 없는 벗을 근거로 이루어지던 지나친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비판은 제거되거나 최소한 축소되었으며, 사회적 불평등의 결과들은 중립화될 수 있게 되었음. 이제 사회적 불평등은 스스로를 영속화할 수 있는 능력에다 스스로를 선전하고 강화할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게 됨. 이제 사회적 불평등의 행진을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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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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