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에 포위된 아이들

저자
조엘 바칸 지음
출판사
알에이치코리아. | 2013-05-13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존슨즈베이비 로션부터 마이크로소프트 게임까지 내 아이가 보고 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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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가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만큼 그 사회의 정신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도 없다.(만델라)
- 어린이 마케팅을 하는 사람들은 아이들에게 깊숙이 자리잡은 정서를 이용하는 것이 성공공식이라는 걸 깨달은 뒤로 그 공식을 최대한 확장함. 그리고 어떤 거리낌이나 우려도 없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이들의 정서를 이용해 이윤을 남기려 함. 이제 설명하겠지만, 바로 이런 이유로 이들은 미디어에서 폭력성을 늘리고 중독성을 조장하고 소셜 네트워크의 우정을 냉소적으로 이용하고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삼고 소비지상주의를 조장함
- 침팬지는 상추를 얻는 조건으로 주어진 과제를 기꺼이 하지만 포도처럼 더 맛있는 음식을 먹고나면 상추를 준다는 제안을 무시하는데, 이는 게임 개발자 역시 반응을 촉진하는 자극수준을 절대 낮춰서는 안된다는 경고의 의미를 가짐. 그것은 게임을 하는 사람에게는 대단한 고통이며, 게임을 그만두게 하는 원인이 될 수 있음. 비둘기에게 한 시간 동안 30초 간격으로 음식을 주다가 음식을 주지 않으면 새장에 있는 죄없는 다른 비둘기를 쪼아댐. 그 좌절감은 비이성적이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감정이며, 게임개발자는 여기에서 보상을 중단하면 게임에 대한 분노를 유발해 게임을 그만두게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음.
- 텔레비전, 영화, 심지어 전통적 게임과 가상세계처럼 다른 사람의 삶, 다른 곳의 풍경을 보여주는 전통적 미디어와 달리 소셜 네트워크는 아이들을 그들만의 쇼의 주인공으로 만듬. 그들의 친구, 그들이 열광하는 대상, 가십, 생각, 고뇌, 사진, 동영상 등이 컨텐츠가 되고 아이들은 현실과 오락을 기분좋게 섞은 그곳에 온통 마음을 빼앗김. 그것은 곧 궁극의 리얼리티 쇼가 되어 가뜩이나 친구, 연예인, 자신에게 집착하는 아이들을 저항할 수 없게 함. 소셜 네트워크의 빠른 성장세가 시사하는 바는, 그리고 아이들을 겨냥한 시장이 깨닫기 시작한 것은 아이들의 삶과 드라마가 그 자체가 사용자들을 가장 확실하게 붙잡아두는 콘텐츠라는 점이다.
- 소셜 미디어를 기반으로 하는 바이러스성 네트워크에서는 순수한 마케팅이 사라짐. 아이들이 서소를 상대로 마케팅을 하면서 마케팅과 아이들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고, 광고가 콘텐츠를 방해하기 보다는 콘텐츠에 스며들면서 콘텐츠와 광고사이의 경계가 무너지고, 아이들의 삶이 이제 오락의 콘텐츠가 되면서 아이들의 삶과 오락 사이에 경계가 무너짐. 진정한 마케팅 권력의 완성임. 아이들은 이제 원형 교도소 수감자처럼 권력전달자가 되어 스스로에게 마케팅 영향력을 행사하고, 마케팅 담당자들은 원형교도소 감시인처럼 시야에서 사라진 채 권력이 저절로 작동하게 함. 권력은 눈에 보이지 않아 되레 더욱 막강해짐.
- 연구진은 인터넷 게임 중독증세를 보이는 참가자 10명과 그렇지 않은 사람 10명을 비교했음. 연구진이 참가자 모두에게 게임자극을 주자 앞의 집단만 뇌에서 약물의존에 나타나는 약물 갈망에 기여한다고 보고된 부분의 활동이 감지되었음. 이는 인터넷 게임중독에서 나타나는 게임충동/갈망과 약물의존에서 나타나는 약물갈망은 신경생물학적 작동원리가 같을수도 있다는 의미
- 오늘날 대부분의 십대에게 또래 사이에서의 정체성과 지위는 대개 인터넷에서 정해짐. 인터넷에서 자아를 만들고 그것을 관리하는 일이 실제 사회관계에서 위치를 확립하고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이야기. 십대들이 휴대전화가 없거나 인터넷에 접속할 수 없으면 불안하다고 말할 때, 그것은 타인과의 손쉬운 사교생활이 아쉽다는 의미라기 보다는 그러한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자아가 아쉽다는 의미. 이는 중독보다 더 큰 문제이거나 적어도 중독과는 다른 문제임.
- 선정성과 중독, 미디어 폭력 같은 주제를 넘어, 어린이와 십대가 새로운 어린 시절의 핵심 교과과정에서 배우는 더욱 광범위한 교훈은 삶(삶의 의미와 목적)과 인간(우리의 정체성, 가치, 행복, 타인과의 관계)은 물건과의 관계에 달렸다는 점. 아이와 성인에게서 모두 나타나는 지나친 물질주의적 태도는 불행, 불안, 우울과 연관되고, 감정적 애착을 약화시키고, 타인에 공감하고 타인과 협동하는 능력의 저하를 불러오며, 자기도취적이고 약삭빠르고 반사회적인 행동으로 이어짐
- 물질주의와 소비주의의 영향으로 협동은 줄고 경쟁은 늘었으며, 공감은 줄고 속임수는 늘었을 뿐 아니라 친사회적 행위는 늘고 반사회적 행위는 늘었음. 그렇다면 우리가 벼랑끝에 몰렸을 때, 즉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데 절실히 필요한 대인관계, 사회적 능력, 공동체의 능력을 일부 상실할 수 있다는 이야기.
- 부모는 아이가 먹을 음식을 선태갛고 그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게 맞지만, (1) 부모의 선택은 아이가 사달라고 조르는 것에 크게 영향을 받을 뿐 아니라 (그리고 부모는 아이의 기분이나 가족의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을 뿐만 아니라) (2) 아이가 건강에 해로운 음식을 사달라고 조르는 이유는 업계가 아이들의 식욕을 자극하는 광고를 끊임없이 해댔기 때문이기도 함. 결국 아이들에게 무엇을 먹일지는 부모가 결정하지만, 그 결정은 업계의 전략에 조종당하기 마련. 업계는 수십억 달러를 들여 부모의 선택에 압력을 넣고 아이들의 건강보다는 업계의 이익에 도움이 될 선택을 하게 함
- 현재 규제의 기초가 되는 전통적 독성학은 16세기 파라켈수스가 독성학을 만들면서 처음 말한대로 독이 되고 안되고는 용량에 달렸다는 추정에 근거. 따라서 특정 화합물질이 즉각적이고 눈에 보이는 부작용을 가져온다고 증명된 수치가 있을 때, 그 수치 미만은 안전하다고 규정. 이는 성인과 소아의 차이를 규정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음. 특히 이미 발달한 생물조직이 아닌 발달중인 생물조직이 화학물질에 노출될 때의 영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함. 더 깊이 들여다볼수록 독성학계의 패러다임은 경험계에는 맞지 않는다는 걸 절실히 깨닫게 됨. 어른은 특정 화학물질에 다량으로 노출되어도 부작용이 없을지언정 유아, 어린이, 십대, 특히 태아는 미량에 노출되어도 평생토록 심각한 부작용에 시달릴 수 있음.
- 화학물질에 노출되는 타이밍의 중요성은 그 유명한 탈리도마이드 비극이 잘 말해줌. 57년에 나온 진정제 탈리도마이드는 임신한 여성의 입덧을 치료하는 약물로 소개되었음. 4년뒤, 임신중에 이 약을 복용한 여성에게서 태어난 아이 수만명이 심각한 팔다리 기형을 보이면서 이 약은 시장에서 퇴출됨. 여기까지가 사람들에게 흔히 알려진 이야기임. 그런데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은 임신 첫달의 20일부터 24일째 되는 날 사이에 약을 복용한 여성에게서 태어난 아이에게만 기형이 나타났다는 점. 이 닷새는 건강한 팔다리 형성에 복잡한 세포분열이 일어나는 시기인데, 탈리도마이드를 소량만 복용해도 이 과정에 교란이 일어나기 쉬움. 이 시기만 벗어나면, 즉 이 과정에 시작되기 전이나 끝난 뒤에는 약을 복용해도 해가 없음
- 납이 부식하면 하얀 가루가 되는데, 이 가루로 페인트를 만들 수 있음. 20세기 초에는 납을 원료로 한 페인트가 일반 주택에 널리 쓰였고, 그것이 아이들 사이에서 납중독이 크게 증가한 원인으로 판명되었음. 아이들은 벗겨진 페인트와 페인트 입자가 섞인 집안의 먼지를 흡입했고, 혈액에서 이 수치가 일정수준에 이르자 발작이나 혼수상태를 보이면서 사망하는 경우까지 생김. 이 부작용이 20년대에 널리 알려지면서, 유럽의 일부국가(프, 벨. 오)는 30년대에 납 페인트를 금지했음. 그러나 업계의 다양한 의심 양산 작전 덕에 납 페인트는 미국에서 그후 40년 동안이나 합법적으로 사용되었음. 이 시기에 페인트 업계와 납 업계는 납의 유해성을 알리는 보고서를 깎아 내리고 규제정책을 방해하는 데 전력을 다했음. 이들은 정부와 공중보건 당국에 로비를 벌이고 납의 부작용에 관해 이미 밝혀진 사실을 뒤집는 연구를 후원하는가 하면, 사람들의 두려움을 누그러뜨리는 홍보전략을 구하. 이들은 납과 아이들의 건강이 관련이 있다는 결정적 증거가 없다면서, 건강상의 문제에는 다른 요인이 있을 것이며 사실은 납페인트가 아이들의 건강에 오히려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주장. 이런 노력은 결실을 맺었고, 이들은 납보다 더 싸고 좋은 흰색 페인트 원료를 찾아낸 70년대 초까지 납규제를 피할 수 있었음.
- 일제고사는 지식을 상품으로, 즉 눈에 보이는 다양한 보상을 얻을 수 있는 점수로 된 화폐로 전락시킴. 이로써 지식, 호기심, 이성, 비판, 아름다움, 열정 같은 학습의 다양한 단면들이 사라짐.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규정하는 것들, 우리가 세상에 염원하는 것들임. 결국 학교는 지식을 가르치기보다 전달하는 데 그침. 교육이 갈수록 표준화하면서 교양교육은 뒷전으로 밀리는 추세 뒤에 숨은 원인은 다양하고 복잡함. 그러나 간과할 수 없는 단순한 원인 하나는 새로운 시장 친화적 개혁이 거대기업에게 돈이 된다는 사실
- 교육은 들통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불을 지피는 것이다. 불을 지피고, 생각을 촉발하고, 정보력을 갖춘 활력있고 잠재력을 실현하는 개인과 시민을 양성하는 것이 교양교육의 목적이다. 이는 개인의 자아실현을 돕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건재와 번영을 위해 민주사회가 지난 한세기 동안 끌어안은 이상이다. 개인에게도 정보력과 사고력이 필요하듯, 민주주의에도 정보력과 사고력을 갖춘 시민이 필요함. 다른 말로 하면, 교육은 우리가 아이들에게 무엇을 제공하느냐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이 세상에 무엇을 제공하겠느냐의 문제이기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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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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