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의 광기

사회 2014. 10. 29. 22:55

 


성장의 광기

저자
마인하르트 미겔 지음
출판사
뜨인돌 | 2011-05-20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독일의 탁월한 사회학자인 마인하르트 미겔은 선언한다. 이 세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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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의 위와 옷장은 가득차 있음. 그런데도 국가를 위해 그것들을 다시 가득 채우고 소비하라고 자극하는 것은 국민을 우롱하고, 미성년으로 취급하는 것임. 국가가 일자리르 유지하려면 그럴 수 밖에 없다는 억지스러운 논쟁도 이를 정당화시킬 수 없음. 잘사는 나라에서 소비자들이 자발적으로 구매하지 않는 것은 더 이상 생산할 필요가 없음. 이제 역사적 조건에서 탄생한 순생산 구조와 분배구조로부터 벗어나서 소득안정, 사회보장비 지급, 사회적 연대와 사회적 지위를 달성하기 위해 정치, 경제, 사회의 적절한 형태를 모색해야 하는 시기가 왔음. 일자리를 창출하고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성장을 추구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임
- 오늘날까지도 대다수 독일인들이 성장이 없으면 살아남지 못하고 모든 것은 아무 의미 없다고 표현함. 이와 동시에 개인적으로 더 많이 가지려고 노력하지 않거나 또는 적은 양으로 만족한다고 대답하는 모순은 시대적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낳은 후속 반응일 수 도 있음. 손자 손녀가 "만일 우리가 더 이상 경제성장을 이룰 수 없고 경제를 꽃피우지 않으면 뭐가 남나요?"라고 물었을 때 조부모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항상 많은 물질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단다. 하지만 재화를 생산하고 우리나라가 강국과 함께하는 것을 보며 수출 챔피언임을 확인하고자 하지. 그것이 우리에게 삶의 발판을 마련해주고 자신을 인정하게 해준단다." 도길과 유럽이 원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삶의 발판과 자아 확인.
- 유행하는 상표가 붙은 물건을 갖지 못한 유치원생들은 무리에서 창피를 당함. 이는 아이들의 부모도 마찬가지임. 아이들이 학교에 입학하면 전투는 더욱 치열해져서 가장 유행하는 옷을 입어야 하고, 최신 휴대전화를 가져야 함 이로부터 몇 년 뒤에는 단순히 옷이나 기술적 장치들이 아니라 자동차, 집, 직업과 소득을 두고 전투가 더욱 치열해짐.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그들의 능력을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는 묻지도 물어서도 안됨. 이것은 전쟁, 사회적 지위를 두고 벌이는 전쟁이며, 전쟁중에는 아무도 질문해서는 안되기 때문.
- 중요한 것은 생산성이나 성과가 아니라 사회에서의 위치이며, 지위임. 사람들은 언제나 사회적 지위를 원함. 사회적 지위가 누구에게나 돌아갈만큼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물질로 신분과 지위를 쌓고자 함. 이 때문에 수탉들은 격렬한 싸움을 하고 공작들은 끔찍한 소리를 지르며 동그란 무늬가 있는 꽁지깃을 커다란 부채모양으로 만듬
- 머지않아 우리는 지상에서 얻는 재화를 소중하게 여기겠지만, 재화가 더 이상 사회적 명예를 선물하지 않는다는 사실 역시 알게 될 것임. 최신 유행 옷을 입고 있는지, 대형차를 모는지, 계좌에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지 등은 주변 사람들에게 더 이상 관심을 불러일으키거나 흥미롭지 않을 수도 있음. 앞으로 사람이 사회적으로 존경 받는다는 것은 타인을 위한 배려, 도와줄 자세, 교양, 음악을 연주하고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능력, 주변 사람들을 즐겁게 만드는 재주 등에서 비롯되리라고 생각함. 요컨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지닌 충동, 즉 인정과 사회적 지위를 얻기 위해 투쟁하려는 충동은 더이상 물질로 싸우는 전쟁이 아닐 것임.
- 선진국 등 여러 국가에서 경제성장이란 더이상 인간의 삶을 오랫동안 밝혀주고 풍요롭게 해주며 빛고 온기를 제공해주는 등불이 아님. 경제성장은 대다수의 생각과 느낌을 통제하는, 합리적 고민과 비판적 숙고와는 거리가 먼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었음. 이데올로기로서 경제성장은 손으로 잡을 수 있는 지상의 범속한 차원을 떠나 형이상학적인 종교의 차원을 띠게 되었음. 성장은 어느덧 우리 시대의 종교로 발전했고, 합리적인 정당성이 더이상 필요없어짐.
- 경제가 이처럼 숭배의 대상으로 변해버린 현상은 다음의 경우에 잘 나타남. 개인뿐 아니라 오래전부터 엄청난 복지를 누린 국민 전체가 자신의 행복은 점점 더 믈어나는 복지에 달려 있다고 말할 때임. 잘사는 나라의 정부가 높은 성장률이 없으며 공동체를 운영할 수 없으며, 민주주의도 가꾸지 못할 것이라고 설명할 때다. 또한 탄탄하기 그지 없는 기업이 폭발직전까지 몸집을 부풀리 때다. 이것을 보건대 성장은 더 이상 높은 목표를 달성하기 우한 수단이 아님. 성장 그 자체가 목표임. 성장은 3이 2보다 더 많고 더 낫다라는 원칙을 따르고 있음.
- 경제학자들은 속임수를 써서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일종의 덫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시도. 경제성장을 비물질적인 것으로 만들고 인간의 환상이 이뤄낸 결과물이라고 설명함. 가령 다음과 같은 식이다. "경제학자들이 실제의 경제성자엥 관해 말한다고 해서 이것이 반드시 더 많은 재화와 용역의 생산을 의미하지 않음. 그보다는 더 많은 가치가 창조되었다는 뜻에 가까움. 예를 들어 신발, 옷, 자동차를 소비하고 휴가여행을 하는 것에 대한 평가가 더 올라갔다는 의미다. 경제적 성장은 무엇보다 머리에서 일어나는 추상적 현상이다."
- 산업화 이전 시대의 사람들은 자연과 환경을 소비할 능력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그러기를 원하지도 않았음. 그들에게 자연은 신의 창조물이었고, 위협적이었으며 완벽했음. 자여은 커다란 전체를 형성하고 인간도 그 안에 속한다고 생각. 따라서 당시 사람들은 자연훼손을 사악함으로 받아들임. 신과 자연의 경계가 모호했음. 세계의 많은 종교와 민족가운데 아직도 그런 시각을 가진 경우가 많음. 하지만 산업화를 통해 선진국이 된 나라의 대부분은 그러한 시각을 갖고 있지 않음. 기본적으로 자연에 대해 전투적 태도를 취함. 자연은 속여야 하고, 억누르고, 필요하면 싸워 이겨야 하는 대상이었음. 근대에 이르러 이런 태도는 진정된 분위기였음. 하지만 산업화를 진행중이던 사람들은 갈등이 일어나면 대체로 자연의 반대편에 섰음.
- 산업혁명의 전제조건은 시민 대부분의 정신적 황폐함이었음. 한대 깊었던 신앙심은 여러가지 이유로 달아나버렸음. 믿음을 던져 버리는 대신 뭔가 새로운 것을 추구했고, 물질적인 이승의 삶에서 답을 찾으려 했음. 이들은 오늘날가지도 그렇게 믿고 있고, 전세계의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런 믿음을 나누고 있음. 이들은 아무리 다 써도 다 써버릴 수 없는 신에 대한 상상을, 다 써버릴 수 있는 지구와 교환해 버림.
- 갑작스러운 인구증가는 18세기 말에 일찍부터 산업화된 유럽에서 시작. 19세기에 유럽인구는 135%증가하여 1억7천만명에서 4억으로 증가. 나머지 지역 인구는 64% 늘어나서 유럽 인구증가율의 절반에 머뭄. 모험심 때문에, 혹은 일자리와 미래를 잃고 다른 땅에 정주한 사람들이 거의 유럽인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유럽 인구의 폭발력은 보다 더 뚜렷해짐. 그 이후로 19세기에 유럽인 수는 세배 늘어난 데 비해, 그외 다른 민족은 소박하게 50%증가했을 뿐임. 20세기가 되자 상황은 완전히 변화. 유럽외 지역 인구는 450%늘어났으나 유럽인은 80%늘어남. 이런 추세는 21세기에 더욱 극단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음. 2050년까지 유럽인은 7천만명, 즉 유럽인구 10%가 줄어들 것임. 하지만 다른 대륙 인구는 40억명 증가할 것으로 보임. 이러한 반전은 21세기 중반쯤 끝이 보일 것으로 전망됨. 유럽인이 아닌 인류도 유럽인과 같은 방향으로 변화할 것임. 다시 말해 인구가 줄어든다는 의미
- 사람들에게 선택지가 많아지면 아이들에게는 불리함. 반면 물질적으로 부족하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적은 사회에서는 아이가 인생설계에서 독점적 위치를 점함. 그런 사회환경에서 일하고 아이를 키우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교육을 많이 받은 사회에서는 아이가 후순위로 밀려남. 이럴 경우에 아이들은 여러가지 다른 인생설계와 경쟁해야 하고 경쟁에서 질때도 있음. 결론은 분명함. 한 사회의 선택지가 적으면 적을수록, 사람들은 더 많은 아이를 가짐.
- 서구사회는 결코 평등한 공동체가 아님. 공정과 기회균등은 기껏해야 서구사회를 인도하는 북극성일 뿐임. 실제로 서구는 분명하게 경계가 그어진 그룹, 윤리적/문화적이 아닌 사회적이고 거의 신분으로 정의내릴 수 있는 두 그룹으로 구성됨. 이들의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 국가는 연대의식에 주문했음. 그런데도 두 그룹 사이의 틈은 더욱 벌어지고 유대감은 더욱 약해져감.
- 이주민을 수용하면 젊은 사회를 유지할 수 있다는 가정은 크림을 지속적으로 바르면 피부를 영원히 젊게 가꿀수 있다는 착각과 비슷. 독일이 현재의 연령구조를 안정화하려면 수십년 동안 임신가능한 여성이 평균 4명의 아이를 낳거나 매년 360만명의 젊은 사람들이 이주해와야 함. 하지만 두가지 방법 모두 비현실적일 뿐더러 바랄만한 가치가 없기 때문에 선진국 국민은 앞으로 1세대 또는 2세대가 지나면 오늘날 기준으로 늙었다고 부르는 사회에 적응해야 함.
- 꼬치꼬치 파고드는 사상가, 기술자가 아니라 감성적이고 사회적인 사람들이 커다란 변혁을 일어나는 시기에 사회를 단결시켜줌. 대가도 없이 자발적으로 이웃의 아이들을 돌봐주는 여자, 이웃 아이들에게 멋지게 골대에 골 넣는 방법을 보여주는 남자가 그들임. 21세기의 교육체계는 바로 이런 재능을 후원하고, 가르치는 이에게 명예도 안겨주어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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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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