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증은 세상이 물이 존재한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세상에 물이 없다면 인간이 어떻게 갈증을 느낄 수 있겠는가? (프란츠 베르펠)
- 무의미는 세상에 의미가 존재한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세상에 의미가 없다면 인간이 어떻게 무의미하다고 느낄 수 있겠는가? (빅터 프랭클)
- 의미에의 의지가 좌절되면 그 자리를 쾌락에 대한 의지, 즉 쾌락의 원칙과 권력에 대한 의지가 차지함. 쾌락의 원칙은 정신분석 심리치료에서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는 핵심동기.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에서는 신경증의 원인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을 우월성을 얻고자 하는 투쟁, 권력(힘)에 대한 의지라 보았다. 프로이트와 아들러는 신경증 환자들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환자들의 좌절된 의미에의 의지의 자리가 쾌락에의 동기와 권력에의 동기로 채워졌다는 것을 알지못했고, 신경증을 일으킨 원인이 단지 채워지지 않은 쾌락이나 권력에의 동기라 보았기 때문에 인간이 기본적으로 의미가 아니라 쾌락이나 권력에 관심을 갖는 것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연구결과 의미에의 의지가 좌절된 자리를 쾌락에의 의지가 대체한다는 것이 분명히 밝혀짐. 임상심리학자 루카으의 연구에 따르면, 빈의 시립 놀이동산 공원 프라터를 자주 방문하는 사람들이 빈에 사는 일반 시민들보다 실존적으로 더 좌절감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대도시에 거주하는 시민들도 동일한 정도의 실존적 좌절을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 쾌락에의 의지는 인간의 자기초월성을 부정하고 반대할 뿐 아니라 자기초월성 자체를 좌절시킨다.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에 오히려 행복을 얻지 못한다. 행복추구 자체가 행복을 방해한다. 행복은 추구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오는 것이다. 즉 행복이란 오직 자기초월적 삶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부산물이다. 삶의 의미를 실현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행복은 자동으로 따라오게 되어 있다. 그러나 행복을 목표로 하면 할수록 그 목표는 더욱더 빗나가게 된다. 이는 특히 불감증이나 발기부전 같은 성적 신경증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성적 행위와 경험은 그 자체가 주의(관심)의 대상이 되거나(과도한 숙고) 의도하는 목적(과도한 의도)이 되는 경우 방해를 받게 된다.
- 의미는 발견하는 것. 주어질 수 없다. 그리고 의미는 스스로에 의해, 즉 자신의 양심에 의해 발견되어야 한다. 의미를 준다는 것은 결국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잘못인지 윤리적, 도덕적으로 판단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그러나 만약 이미 존재하는 윤리적 기준을 갖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외부에서 판단해 말해준다면 인간은 자신이 하지 말아야 하는 것에 반하여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 더 이상 스스로 판단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선한 것이란 본질적으로 존재의 의미 실현을 돕는 것이며, 악한 것이란 존재의 의미 실현을 방해하는 것이라 정의할 수 있따. 윤리적, 도덕적 가치는 존재론적이어야 할뿐 아니라 실존적이어야 한다. (존재론적이라는 말은 그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를 말하며, 실존적이라는 것은 그것이 무엇인가를 넘어서 삶을 통해 실현되어야 하는 것을 말함. 따라서 도덕적 가치또한 그것이 무엇인가를 넘어서 삶을 통해서 구현되어야 한다는 뜻에서 실존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의사가 환자에게 의미를 줄 수 없으며, 교수가 학생에게 의미를 줄 수 없다. 교수가 학생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진리탐구에 헌신하는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교수는 진리탐구에 헌신하는 자신의 모습을 실존적 삶의 모범으로 학생에게 보여줄 수 있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오직 온전한 자신의 존재로부터 찾을 수 있다. 자신의 삶이 바로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정답인 것이다.
- 초월성이 인간실존의 핵심이라는 것은 로고테라피 원칙중 하나. 이 원칙이 의미하는 바는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향할 때 인간이 진정으로 실존한다는 것. 인간존재가 그 자체로 존재의 의미가 될 수는 없다. 인간을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들 말한다. 그렇다면 이 말이 인간 자체가 본질적으로 목적이라는 것을 의미할까? 이 말은 인간은 자기자신을 인식하고 실현하도록 만들어졌다는 뜻일까? 나는 인간은 가치를 의식하고 실현하는 존재라 말하고 싶다. 인간은 다른 어떤 것을 위해 혹은 누군가를 위해, 즉 어떤 대의를 위해, 자신의 동료를 위해 혹은 신을 위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릴 때만 오직 자신을 찾을 수 있다. 인간이 만약 자유롭게 자신이 선택한 의미에 자신을 헌신하지 않는다면 존재 자체의 빛을 잃게 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이다.
- 의미에의 의지
로고스란 그리스어로 의미라는 뜻.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에 이어 빈의 3대 심리치료라 불리는 로고테라피는 인간존재의 의미와 인간의 의미추구에 초점을 맞춘다. 로고테라피는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미추구의 노력을 인간의 1차적 동기로 설명. 이것이 바로 내가 의미에의 의지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서 중심으로 하는 쾌락의 원칙과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에서 강조하는 권력에의 의지아 대조되는 것으로 말하는 이유다.
- 의미에의 이지는 믿음이 아니라 사실이다. 만약 의미에의 의지가 인간을 움직이는 1차적 동기라는 나의주장에 증거가 필요하다면 몇년전 프랑스에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가 그 증거가 될 수 있다. 통계조사에 참여한 사람들 중 89%가 인간에게는 살아야 할 어떤 것이 필요하다고 응답했고, 61%는 자신의 삶에 목숨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소중한 것이나 소중한 사람이 있다고 응답했다. 내가 일하는 병원에서도 환자들과 직원들을 대상으로 동일한 여론조사를 해보았다. 조사결과는 프랑스에서 수천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연구결과와 거의 똑같이 나왔다. 차이는 2%에 불과했다.
- 적당한 정도의 긴장이란 이미 성취한 것과 앞으로 성취해야 할 것 사이의 긴장이며, 이는 내가 어떤 존재인가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사이의 차이다. 이런 긴장은 인간에게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으며, 정신건강과 심리적 안녕에 필수적이다. 따라서 인간은 실현해야 할 잠재적 의미에 대한 도전에 주저해서는 안되며, 그럼으로써 잠재된 의미에의 이지를 불러 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인간에게 1차적으로 필요한 것이 균형의 유지 혹은 생리학에서 말하는 항상성, 즉 긴장이 없는 상태라는 가정이 정신건강 예방차원에서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자신에게 가치있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노력과 투쟁이다. 즉 어떻게든 긴장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완수되기를 기다리는 자신의 잠재적 의미에의 소명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항상성이 아니라 내가 영적 역동성이라고 지칭한 것이다. 즉 한쪽 끝에는 완수되어야 할 의미가 자리하고 다른 한쪽 끝에는 그것을 완수할 인간이 자리하는, 의미와 인간 사이의 긴장이라는 축에 놓인 영적 역동성이 필요.
그리고 영적 역동성이 정상적인 사람에게만 필요하다고 여겨서는 안된다. 오히려 신경증이 있는 사람들에게 훨씬 더 필요함. 만약 건축가가 약해진 아치형 문을 튼튼하게 하고 싶다면, 문 위에 더 무거운 것을 올려놓아야 한다. 그래야 문의 부속품들이 더욱 단단하게 조여질 것이기 때문이다. 즉 치료자가 환자의 정신건강을 향상시키고 싶다면 삶의 의미를 향한 재교육을 통해 환자가 짊어져야 하는 무게를 늘리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 지난 반세기 너무나 오랫동안 정신의학은 인간의 마음을 단지 기계적 측면에서 해석하려 해왔고, 결국 정신질환에 대한 치료는 주로 기법의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나는 이런 상황이 끝이 났다고 믿는다. 이제 동이 트며 나타나는 것은 심리학화된 의학에의 그림이 아니라 인간화된 정신의학이라는 그림이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의 주된 역할이 기술자라고 해석하는 의사가 있다면, 그는 질병 뒤에 숨겨진 인간의 참된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환자를 단지 기계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셈이다.
인간은 물건이 아니다. 물건은 스스로 결정할 수 없지만, 인간은 궁극적으로 스스로 결정하는 존재다. 자신이 무엇이 될 것인가는 바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다. 살아 있는 생지옥의 실험실 같았던 나치 수용소에서 나는 인간의 그러한 환경에서도 스스로 무엇이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존재라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 중 누군가는 돼지처럼 행동했는가 하면 누군가는 성자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 인간은 돼지 혹은 성자라는 두가지 잠재성을 자신 안에 모두 가지고 있다. 돼지나 성자 중 어떤 것이 될지는 조건이나 환경이 아니라 자신의 결정에 달려 있다.
2차대전을 겪은 세대인 우리는 인간이 진정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지극히 현실적이고 경험적 방식으로 깨달아가고 있다. 인간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가스실을 발명한 존재다. 그러나 또한 허리를 꼿꼿치 세우고 주님의 기도를 드리며 가스실로 들어가는 존재이기도 하다.
- 인간은 자시 자신을 무시하고 잊을 수 있을 때만 세상 속에 있는 것과 세상의 것들을 인식할 수 있다는 근원적 진리를 상기할 대 이러한 주관주의적 사고가 진정한 인간의 인지해우이의 핵심을 간과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인간은 오직 자신의 관심을 자기 이외의 주변으로 옮겨갔을 때만 자신을 넘어서 온전하게 대상을 인지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눈을 예로 들어 설명할 수 있겠다. 만약 눈이 눈 자체를 바라본다면 눈은 병에 걸리게 된다. 눈이 눈 자체를 보면 볼수록 세상과 세상 속의 대상을 더욱 볼 수 없게 된다. 눈의 볼 수 있는 능력은 눈이 눈을 볼 수 없다는 것에 달려 있다. 인간의 유한한 인지능력은 인지작용의 내재된 주관성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주관적 인지작용이 단지 자기표현이 되고 주체 자신의 구조를 투자하면 할수록 인지작업은 점점 더 큰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댜. 즉 인지란 자기표현과 반대될 때 그리고 진정으로 자기초월성을 포함할 때 비로소 진정한 인지라고 말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인간을 개별적 존재로 한정한 이러한 이론들은 항상성 이론에서와 마찬가지로 긴장의 감소에 기반을 두든 혹은 자아실현에서와 같이 세상에 내재되어 있는 가능성들을 최대한 많이 실현하는 것에 기반하고 있든 뭔가 결여되어 있는 듯하다.
나는 인간에 대한 관점은 오직 항상성을 넘어서서, 그리고 자아실현을 넘어서서, 심지어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넘어서서 의미와 가치라는 객관적 세상 한가운데서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가와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인간존재 초월성의 영역으로 넘어갔을 때 비로소 올바르게 정립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 역설적 의도에는 건강한 유머감각이 내재되어 있다. 유머는 어떤 것과 자기 사이에 거리를 두게 하는 탁월한 방법 중 하나라는 점에서 유머가 왜 역설적 의도에 내재되어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유머는 인간이 자기와 거리를 두고 자신을 떨어져서 볼 수 있게 함으로써 자신이 처한 곤경에서 스스로 빠져나와 어려움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도와준다. 그래서 유머는 영적 차원에 속한다.
- 호주 원주민이 사용하는 부메랑은 던진 사람에게 되돌아온다. 그러나 실제 호주에서 내가 들은 이야기는 부메랑은 던진 사람이 목표물을 놓쳤을 때만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갖는 사람은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게 되고, 자신의 목표를 놓치게 되어 결국 부메랑이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 삶은 세가지 방식으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우리는 세상에 주는 것(창조적인 일)을 통해 의미를 발견할 수 있고,
둘째, 세상으로부터 받은 것(가치난 자연 그리고 문화에 대한 경험)을 통해 의미를 발견할 수 있으며,
셋째, 더 이상 바꿀 수 없는 운명적 상홍(불치병, 암)에 용기있게 직면하는 것을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도고통, 죄책감, 죽음이라는 삶의 3대 비극을 피할 수 없다. 고통이란 말 그대로 삶의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의미하며, 죽음과 죄책감은 인간의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과 잘못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죄성을 의미한다.
- 오늘날 의사들이 만약 자신들의 책임이 질병을 치료하는 것뿐 아니라 인간 자체에 있다는 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인다면 삶의 의미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용기를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삶의 의미에 대한 의구심이나 삶의 의미의 부재로 인해 느끼는 절망감은 사실 질병이 아니기 때문. 오히려 이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 특성이다. 과거에는 회의적 사람과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성직자를 찾아갔다. 그러나 오늘날 이들은 도움을 받기 위해 정신과 의사를 찾아간다. 이러한 사실은 의사에게 신체적, 심리적 질병을 넘어 환자를 단지 병자로서만이 아니라한 인간으로서 이들의 요구에 반응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말해준다. 환자의 신체적, 심리적 측면보다 삶의 의미와 같은 영적 측면을 과대평가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지만, 환자를 한 인간으로 대하고 이들의 삶의 의미의 문제에 반응하는 것이 의사라는 직업의 한계를 위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또한 잘못된 것이다.
- 환원주의는 미국에서 인간을 사물화한다는 것은 마치 우리가 단순히 물건을 다루는 것처럼 인간을 그렇게 다룬다는 뜻이다. 그러나 인간을 사물화하는 데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미국의 젊은 사회학자인 톰슨의 말을 인용하자면, 최근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인간은 의자나 책상처럼 존재하는 물건이 아니다. 인간은 살아 있다. 만약 자신의 삶이 의자나 책상과 같은 단순한 존재로 전락했다는 것을 안다면 인간은 자살하게 될 것이다."
- 젊은이들이 실존적 공허라는 상황이 신경증의 증상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실존적 공허를 느끼는 것이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랑스러워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이죠. 실존적 공허를 느낀다는 것은 바로 어딘가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실존적 공허의 느낌을 통해 우리는 의미를 찾아나설 수 있게 됩니다. 특히 이는 젊은이들에게는 특권입니다. 따라서 의미가 인간존재에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그저 당연하게만 생각하지 말고, 존재의 의미라는 문제에 대해 질문하고 도전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실존적 공허란 부끄러운 신경증이 아니라 자랑스러워해야 하는 인간성취입니다. 굳이 이를 신경증이라고 말한다면 아마도 이는 집단적 신경증일 것입니다. 집단적 신경증이란 인류 전체의 신경증입니다.
- 심리치료는 프로이트 시대 이후 두단계로 발전해왔다. 첫번째 단계는 본능에 의해 결정되는 자동반사적 존재에서 스스로 결정하는 존재로의 단계이고, 두번째 단계는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는 자율적 존재에서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초월적 존재로의 단계다.
이 두단계들은 필연적인 것이었는데, 첫번째 단계는 인간이란 절대 순수본능과 자동반사만으로 그려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며, 두번째 단계는 인간에 대한 완전한 그림은 인간이 그저 자율적으로 어떤 것을 내재하고 있는 존재라는 틀을 뛰어넘는 존재라는 것. 다행스럽게도 오늘날 초월성이라는 개념을 인간본성을 설명하는 데 포함시키거나 심지어 인간의 질병의 본질을 설명하는 데 적용할 때조차도 이를 이제는 그리 귀에 거슬리게 여기지 않는다.
'심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간은 왜 잔인해지는가 (0) | 2025.03.05 |
---|---|
복종하는 뇌 저항하는 뇌 (0) | 2025.03.05 |
나는 왜 혼자가 편할까 (0) | 2025.03.05 |
인간은 왜 박수를 치는가 (0) | 2025.02.20 |
죽음의 수용소에서 (0) | 2025.0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