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은 자신의 출발점인 무와 자신을 완전히 에워싼 무한을 모두 보지 못한다. (파스칼)

- 우리는 이상한 종류의 신문 독자라서 헤드라인을 읽으면서 마치 자신이 그 생각을 처음 해낸 것처럼 공치사를 한ㄷ. "방금 좋은 생각이 났어" 기쁨에 차서 이렇게 말하지만 사실은 이 천재적인 발상이 뇌리에 떠오르기 전에 뇌가 이미 엄청난 양의 작업을 해놓았다. 막후에서 어떤 아이디어를 올려보낸다는 것은, 신경회로가 몇 시간, 며칠, 몇 년 동안 정보를 통합하고 새로운 조합을 시험하는 작업을 해왔다는 뜻. 그런데도 우리는 막후에 숨어서 움직이는 이 광대한 기계에 별로 감탄하지 않고 그 공을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
이런 우리를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뇌는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엄청난 마법처럼 아이디어를 만든다. 그 거대한 운영시스템을 의식이 인지하고 조사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뇌는 자신을 숨긴채 작전을 지휘한다.
그렇다면 훌륭한 아이디어를 떠올린 공은 정확히 누구의 것인가? 스코틀랜드의 수학자 맥스웰은 1862년 전기와 자기를 통합한 중요한 방정식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임종을 앞둔 어느 날 기묘한 고백을 했다. 자신이 아니라 자신 안의 어떤 것이 그 유명한 방정식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는 아이디어가 자신을 찾아오는 과정을 전혀 모른다고 시인했다. 아이디어가 그냥 떠오를 뿐이었다. 윌리엄 블레이크도 긴 이야기 시인 밀턴과 관련해서 비슷한 경험을 이야기했다. "나는 미리 생각해둔 것이 없어서 즉석에서 구술하듯이 한 번에 12행쯤, 때로는 무려 20행까지 쓰는 방식으로 이 시를 썼다. 심지어 내가 원하지 않는데도 시가 써질 때도 있었다.' 괴테도 중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쓸 때 자신의 의식이 기여한 것은 사실상 없었다고 주장했다. 마치 손에 쥔 펜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고 했다.
영국 시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의 사례도 생각해보자. 그는 1796년부터 아편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원래 치통가 안면 신경통을 누그러뜨리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곧 돌이킬 수 없이 중독돼서 매주 아편제 2쿼트(약 2.3리터)를 꿀꺽꿀꺽 마셔댔다. 이국적이고 몽롱한 이미지로 이루어진 시 쿠빌라이 칸을 쓸 때 그는 아편에 취한 상태였는데, 일종의 환상과 같았다고 설명했다. 그에게는 아편이 잠재의식 속 신경회로에 접근하는 통로가 된 것이다. 우리가 쿠빌라이 칸의 아름다운 시어들을 콜리지의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아닌 그의 뇌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정신이 멀쩡할 때는 그런 단어들을 잡아낼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 시의 저자는 정확히 누구인가?
칼 융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내면에는 우리가 모르는 다른 누군가가 있다."
핑크 플로이드는 이렇게 말했다. "내 머릿속에는 누가 있는데, 내가 아니야."

- 등에서 오는 신경신호가 시각을 대체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보인다면, 시각을 전달하는 수많은 신경신호의 경로가 등의 신경신호 경로와 다를뿐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뇌는 두개골 안에서 절대적 어둠 속에 갇혀 있다. 뇌 자체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자신에게 전달되는 작은 신호를 알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세상의 모든 색채와 빛과 어둠을 인식할 수 있다. 뇌는 어둠 속에 있어도, 우리 정신은 빛을 구축한다.
뇌에게는 신호가 어디서 오는지 중요하지 않다. 눈에서 오든, 귀에서 오든, 완전히 다른 곳에서 오든 상관없다. 우리 움직임, 즉 밀거나 쿵 하고 때리거나 발로 차는 움직임과 그 신호의 상관관계가 일관되게 유지되기만 한다면, 뇌는 우리가 시각이라 부르는 그 직접적 지각을 구축할 수 있다.

- 뇌의 기능에 관한 초창기 가설들은 컴퓨터를 비유대상으로 삼았다. 뇌는 정보가 입출력되는 장치이고, 이 장치가 다양한 단계를 거쳐 감각기관의 정보를 처리해서 종착점에 이른다는 것.
그러나 뇌 회로가 단순히 A-B-C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런 조립라인 모델에 의심의 눈길이 쏠리기 시작. 뇌 회로에는 C에서 B로, C에서 A로, B에서 A로 연결된 피드백고리가 있다. 뇌 전역에 정보를 앞으로 보내는 회로만큼이나 많은 피드백 회로가 있는데, 이것을 전문용어로는 순환이라고 하고 구어로는 그냥 고리가 많다고 한다. 시스템 전체의 모양은 조립라인보다 시장과 아주 많이 닮았다. 주의 깊은 관찰자라면, 신경회로의 이런 특징을 보고 시각지각은 눈에서 시작되어 뇌 뒤편 어느 신비로운 종착점에서 끝나는 고속 정보처리과정이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을 즉시 떠올릴 것이다.

- 도널드 매카이는 56년 시각피질이 근본적으로 세상의 모델을 만들어내는 기계와 같다는 의견을 내놓음. 1차 시각피질이 내부모델을 구축하며, 그 덕분에 망막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데이터를 미리 기대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 피질은 자신의 예측을 시상으로 보내고, 시상은 눈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와 예측 사이의 차이를 보고한다. 그리고 그 차이게 관한 정보만 피질로 회신한ㄷ. 즉, 예측되지 않는 정보만 보낸다는 뜻이다. 내부 모델은 이 정보로 수정돼서 미래에 발생할 차이를 줄인다. 뇌는 이렇게 자신의 실수에 주의를 기울이는 방식으로 외부세계 모델을 다듬는다. 매카이는 1차 시각피질에서 시상으로 향하는 섬유조직이 반대방향의 조직보다 열 배나 된다는 해부학적 사실에 이 모델이 어긋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
이 모든 설명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내부 예측과 감각기관 정보를 적극적으로 비교한 결과가 지각에 반영되어 있다는 것. 이 덕분에 우리는 더 커다란 개념, 즉 감각기관의 정보가 예측과 어긋났을 때에만 주의에 대한 의식이 발생한다는 개념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뇌가 외부세계의 모습을 성공적으로 예측한다면, 뇌가 일을 아주 잘 하고 있다는 뜻이므로 우리가 의식할 필요가 없다. 예를 들어 처음 자전거를 배울 때는 의식적으로 몹시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흘로 감각-운동예측이 완벽하게 다듬어지면, 자전거 타기는 무의식적 활동이 됨. 물론 자신이 자전거를 타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은 아님. 핸들을 잡는 법, 페달에 가하는 압력, 몸통의 균형잡기를 일일이 의식하지 않게 된다는 뜻.
광범위한 경험 덕분에 뇌는 앞으로 무엇을 예측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강한 바람이나 타이어 펑크 등 뭔가 변화가 생기지 않는 한 자신의 움직임도 감각도 의식하지 못한다. 새로운 상황이 발생하면 평소의 예측이 어긋나게 되므로, 의식이 활동을 개시해서 내부모델을 조정한다.

- 우리 감각에 대한 첫번째 교훈은 감각을 믿지 말라는 것. 우리가 어떤 것을 사실로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사실이라고 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사실이 되지는 않는다. 전투기 조종사에게 가장 중요한 격언은 계기판을 믿어라다. 우리 감각이 가장 망신스러운 거짓말을 하기 때문. 조종실 계기판 대신 그 감각을 믿었다가는 추락할 것이다. 그러니 다음에 누가 '거짓말을 하는 네 눈과 내 말중 무엇을 믿을래?'라고 물으면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어쨌든 우리는 바깥세상을 아주 조금만 인식할 뿐이다. 뇌는 시간과 자원을 절약하기 위해 미리 여러 짐작과 가정을 하고, 꼭 필요한 만큼만 세상을 보려고 한다. 우리는 세상의 많은 것들에 대해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기 전에는 그것들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자기발굴 여행의 첫발을 내디뎠다. 우리가 접근할 수 없는 뇌의 여러 부위에서 바깥세상에 대한 지각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이제 우리는 알게 되었다.

- 암묵적 자기중심주의는 우리가 직업을 결정할 때도 영향을 미침. 펠럼의 연구팀은 여러 직업의 관련단체 주소록을 분석한결과 이름이 데니즈 혹은 데니스인 사람 중에는 치과의사가 유난히 많고, 이름이 로라 또는 로런스인 사람 중에는 법률가가 많고, 이름이 조지나 조지나인 사람 중에는 지질학자가 유난히 많다는 사실을 발견. 또한 지붕수리 회사의 소유주 중에는 이름 첫글자가 H인 사람보다 R인 사람이 더 많았으며, 철물점 주인 중에는 이름 첫글자가 R인 사람보다 H인 사람이 더 많았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무료로 접속가능한 온라인 직업DB를 조사한 결과, 의사의 성에 doc, dok, med가 유난히 많이 포함된 반면, 법률가의 성에는 law, lau, att가 유난히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짐.
정신나간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이 모든 연구결과는 통계적 의미라는 기준을 통과했다. 이름 철자의 영향이 크지는 않아도, 분명히 확인할 정도는 된다. 우리가 접근할 수 없는 충동, 위의 연구들에서처럼 통계적으로 사실이 드러나지 않았다면 우리가 결코 믿지 않았을 충동이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 신체 상태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결과와 연결되어 있다. 나쁜 일이 일어나면 뇌는 온몸(심박, 내장수축, 근육약화 등)을 지렛대 삼아 그때의 느낌을 기록한다. 그래서 그 느낌이 그 사건가 함께 연상되게 된다. 나중에 그 사건을 생각할 때, 뇌는 일종의 시뮬레이션을 돌려 그때의 신체적 느낌을 다시 경험한다. 그렇게 해서 그 느낌은 차후 의사결정에 지침(아니면 반대로 편견)역할을 한다. 어떤 사건을 겪을 때의 느낌이 나빴다면, 우리는 그때의 행동을 주저하게 된다. 반면 좋은 느낌은 같은 행동을 격려하는 역할을 한다.
이 주장에 따르면 신체상태는 행동의 방향을 조종할 수 있는 육감을 제공한다. 이런 육감은 단순히 우연으로 보기 힘들만큼 정확할 때가 많다. 우리 무의식이 먼저 상황을 알아차리고, 의식이 그 뒤를 따라가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 대체로 우리는 자신의 머리가 가장 잘하는 일을 가장 인식하지 못하낟. (마빈 민스키, 마음의 사회)

- 숨어서 활동하는 신경 프로그램이 감지하는 것은 번식능력만이 아니다. 가임기 여성이 모두 똑같이 건강한 것은 아니므로, 그들의 매력도 똑같지 않다. 라마찬드란은 남자가 금발여성을 더 좋아한다는 말이 생물학적 진실의 씨앗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한다. 피부가 하얀 여성이 병에 걸리면 쉽게 병색이 드러나는 반면, 피부가 가무잡잡한 여성은 결점을 비교적 쉽게 위장할 수 있다. 건강에 대한 정보가 많을수록 선택에 도움이 되므로, 하얀 피부가 선호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 스치든 지나간 사람을 실제보다 아름답게 판단했을 때는 되돌아가서 그 사람을 다시 보기만 하면 실수를 바로 잡을 수 있다. 별로 힘든 일이 아니다. 반면 매력적인 상대를 매력적이지 않은 사람으로 잘못 판단했을 때는 어쩌면 장밋빛이 될 수도 있었던 유전자의 미래에 안녕을 고하게 될 수 있다. 따라서 지각 시스템은 언뜻 스치듯 지나간 사람이 매력적이라고 허풍을 떨 필요가 있다. 다른 사례와 마찬가지로 의식적인 뇌가 아는 것은 믿을 수 없을만큼 아름다운 사람이 방금 반대편 차선에서 차를 타고 스쳐갔다는 사실 뿐이다. 이런 믿음을 만들어낸 신경기계나 진화의 압력에는 의식이 접근할 길이 없다.

- 여성은 월경주기 중 임신가능성이 가장 높을 때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 월경을 시작하기 약 열흘 전이다. 미모를 평가하는 사람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그녀가 무슨 행동을 하든 결과는 같다. 심지어 사진으로 평가할 때도 마찬가지다. 즉 미모가 임신가능성을 널리 알리는 셈이다. 비비의 엉덩이색 보다는 더 섬세한 신호지만, 같은 공간에 있는 남성들의 뇌에서 이 일만을 전담하는 무의식 조직을 자극할 수만 있으면 된다. 남성들의 신경회로에 그 신호가 닿으면 임무완수다. 그런데 이 신호가 다른 여성들의 신경회로에도 닿는다. 여성들이 다른 여성의 월경주기가 일으키는 변화에 상당히 민감한 것은 아마도 짝을 놓고 다툴 때 경쟁상대를 평가하기 위해서인 듯하다. 임신가능성을 알려주는 신호가 정확히 무엇이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어쩌면 피부상태(배란기에 피부색이 더 밝아짐), 배란 직전 며칠 동안 여성의 귀와 젖가슴의 좌우대칭이 평소보다 더 강화되는 것이 그런 신호인지도 모른다. 단서가 무엇이든 뇌는 그것을 설명하기 어렵고 전능한 욕망의 힘을 감지한다.
배란과 미모효과는 실험실 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측정 가능. 뉴멕시코주 학자들은 인근 스트립클럽의 댄서들이 받는 팁을 조사해서 월경주기와의 상관관계를 살펴보었다. 임신가능성이 가장 높을 때 그들은 시간당 평균 68불을 받았다. 월경 중일 때 받는 돈은 고작 35불이었다. 
 이 여성들은 한 달 내내 최고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을 텐데도, 그들의 임신가능성 변화가 체취, 피부상태, 허리-엉덩이 비율 등의 변화를 통해 고객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그들 자신의 자신감 또한 시기에 따라 변했을 가능성이 높다. 흥미로운 것은 피임약을 복용하는 스트리퍼의 실적에서 뚜렷하게 치솟는 기간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 그들의 월평균 수입은 시간당 37불에 불과했다.(피임약을 사용하지 않는 스트리퍼의 평균수입은 시간당 53불) 그들의 수입이 적은 것은 피임약이 호르몬 변화를 일으켜 임신초기와 비슷한 상태가 되기 때문인 것 같다. 

- 사람이 트롤리 문제를 생각할 때 뇌를 촬영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육교 시나리오에서는 운동계획과 감정을 담당하는 영역이 활성화되는 반면, 선로 스위치 시나리오에서는 이성적 사고를 담당하는 측면 영역만이 활성화된다. 누군가를 직접 밀어야 할 때는 감정이 작동하고, 단순히 스위치를 움직이기만 하면 될 때는 뇌가 스타트렉 시리스에서 오로지 합리적 이성만으로 움직이는 미스터 스폭처럼 행동한다.

- 고결한 사람이란 유혹받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유혹에 저항할 수 있는 사람이다. 싸움의 추가 즉각적인 만족을 향해 기울어지지 않게 하는 사람. 우리가 이런 사람을 높게 평가하는 것은, 충동에 굴복하기는 쉽지만 충동을 무시하기는 터무니없이 어렵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열정과 욕망 앞에서 지성이나 도덕의 주장은 힘이 없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절제를 권유하는 캠페인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종교가 끈질기게 힘을 발휘하는 것도 이성과 감정의 이런 불균형 때문일 수 있겠다는 의견도 있다. 세계적 종교들은 감정 네트워크를 파고드는 데 최적화되어 있으며, 이런 자석같은 힘 앞에서 이성의 위대한 주장은 거의 힘을 내지 못한다. 소련도 종교를 말살하려고 했으나 부분적 성공을 거두었을 뿐이다. 소련 정부가 무너지자마자 종교적 의식이 곧장 풍부하게 되살아났다.

- 사람들이 단기적 욕망과 장기적 욕망의 갈등을 관찰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고대 유대교 문헌은 몸이 상호작용을 주고받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몸은 항상 지금 당장 만족을 얻으려 하고, 영혼은 장기적 관점을 갖고 있다. 독일 사람들도 만족을 뒤로 미루려 하는 사람을 기발하게 표현한다. 그 사람이 반드시 innerer Schweinehund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을 번역하면 내면의 멧돼지 사냥개라는 당혹스러운 표현이 된다.
우리가 하는 행동은 뇌 안에서 벌어지는 전투의 최종결과일 뿐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더 재미있어진다. 뇌 안의 여러 정당이 상호작용에 대해 학습할 수 있기 때문. 따라서 상황은 단기적 욕망과 장기적 욕망 사이의 간단한 팔씨름 수준을 금방 넘어서서, 놀라울 정도로 정교한 협상의 영역에 들어선다.

- 라이벌들로 이루어진 팀이라는 가설이 뇌에 관한 전통적 가르침과는 다른 시각을 제공한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뇌에서 사람얼굴, 집, 색깔, 몸, 도구사용법, 종교적 열정 등을 담당하는 영역을 깔끔하게 구분해서 나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19세기 초 골상학도 이런 희망을 품었다. 골상학자들은 두개골에 튀어나온 부분이 있으면, 그 안의 뇌 영역의 크기가 그만큼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뇌 지도에서 각각의 지점에 이름표를 붙일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생물학적 현상이 그런 식으로 전개되는 경우는 아예 없거나 거의 없다. 라이벌들로 이루어진 팀이라는 가설은 같은 자극을 다양한 방식으로 처리하는 뇌 모델을 제시한다. 뇌의 각 부분이 어떤 기능을 수행하는지 쉽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이라던 과거의 희망에 종말을 고하는 모델이다.

- 뇌 영상 촬영으로 뇌를 시각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면서, 과거 골상학의 충동적 생각이 슬금슬금 되살아났다. 과학자와 일반인 모두 뇌의 구체적 위치에 각각 기능을 하나씩 부여하고 싶다는 유혹에 쉽게 빠져든다. 단순하고 효과적인 표현을 찾아내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인지, 언론의 꾸준한 보도로 이러이러한 기능을 수행하는 뇌의 특정 영역이 방금 발견되었다는 식의 잘못된 인상이 만들어졌다. 이런 보도는 쉽게 뇌 영역을 구분하고 싶은 대중의 기대와 희망을 부채질하지만, 현실은 이보다 훨씬 더 흥미롭다. 신경회로망이 저마다 독자적으로 발견한 다양한 전략을 이용해서 기능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뇌는 복잡한 세상을 잘 헤쳐 나가지만, 명확한 지도를 그리는 솜씨는 형편없다.

- 비밀이라는 개념을 생각해보라. 비밀에 대해 알려진 사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비밀을 지키는 것이 뇌에는 건강하지 못한 행동이라는 점. 심리학자 제임스 펜베이커의 연구팀은 강간과 근친관계 피해자들이 수치심과 죄책감 때문에 그 일을 비밀에 부치고자 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연구. 몇 년에 걸친 연구끝에 펜베이커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다른 사람과 그 일을 의논하지 않거나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는 행동이 그 일 자체를 경험한 것보다 더 많은 피해를 입힐 수 있다. 그의 연구팀은 피험자가 깊숙이 간직한 비밀을 고백하거나 글로 썼을 때, 그들의 건강이 나빠져 병원을 찾는 횟수가 줄어들고 스트레스 호르몬 수치도 눈에 띄게 줄어드는 것을 발견.

- 라이벌들로 이루어진 팀이라는 가설 안에서는 비밀이라는 개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비밀은 뇌에서 정당들이 서로 경쟁하며 투쟁한 결과. 뇌의 한 부분은 어떤 사실을 밝히고 싶어 하지만, 다른 부분은 밝히지 않으려 한다. 이렇게 엇갈리는 투표 결과가 나온 것이 바로 비밀이다. 어느 정당도 굳이 밝힐 생각이 없는 사실은 그저 재미없는 사실일 뿐이다. 양당이 모두 밝히고 싶어하는 사실은 좋은 이야기다. 라이벌 관계라는 틀이 없다면, 우리는 비밀이라는 개념을 이해할 수 없다. 비밀은 라이벌관계의 결과물이라서 의식에 감지된다. 늘 하던 일이 아니므로, CEO를 불러와 처리하게 하는 것이다.
비밀을 누설하지 않는 중요한 이유는 장기적 결과에 대한 걱정이다. 비밀누설로 인해 친구가 나를 나쁘게 생각할 수도 있고, 연인이 마음의 상처를 입을 수도 있고, 동네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 사람들이 실제로 이런 걱정을 한다는 증거는 바로 생면부지의 사람에게는 비밀을 털어놓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 모르는 사람 앞에서는 아무런 대가 없이 뉴런들 사이의 갈등이 사라져버릴 수 있다. 그래서 비행기에서 만난 낯선 사람이 자신의 가정불화에 대해 시시콜콜 아주 솔직하게 털어놓기도 하고, 세계 최고의 종교 중 하나인 카톨릭에서 고해소가 여전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기도의 매력도 비슷한 맥락에서 설명 가능. 특히 신자의 말에 전적으로 귀를 기울이며 무한한 사랑을 보여주는, 몹시 친밀한 신들을 지닌 종교에서 기도의 매력이 크다.
낯선 사람에게 비밀을 말하고 싶다는 이 오랜 욕구의 변형은 온라인 익명게시판의 형태를 띠고 있다. 여기서 사람들은 익명으로 속내를 털어놓는다. 

- 인공지능 연구가 왜 발목을 잡혔을까? 답은 분명하다. 지능 그 자체가 엄청나게 어려운 문제라는 사실이 드러났다는 것. 자연은 수십억 년 동안 몇 조번이나 실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반면 인간이 이 문제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한 지는 겨우 수십년 밖에 되지 않는다. 그것도 대부분의 기간동안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지능을 만들어내는 연구만 하다가, 최근에야 연구의 방향이 바뀌었다. 생각하는 로봇을 만드는 연구에서 의미있는 진전을 이루려면, 자연이 찾아낸 비결들을 해독해낼 필요가 있음을 이제는 우리도 분명히 안다.
나는 라이벌드로 이루어진 팀일는 가설이 인공지능 연구의 발목을 풀어주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본다. 과거의 연구는 분업이라는 유용한 걸음을 내디뎠지만, 그 결과로 만들어진 프로그램들은 의견 차이가 없어서 무능하다. 생각할 줄 아는 로봇을 만들고 싶다면, 단순히 각각의 문제를 영리학 해결하는 하위 에이전트를 고안할 것이 아니라, 서로 겹치는 해결책을 지닌 하위 에이전트를 끊임없이 만들어내서 서로 경쟁시켜야 한다. 각 파벌이 서로 겹치는 기능을 갖고 있으면, 뜻밖의 시각으로 문제를 영리하게 풀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퇴화도 방지할 수 있다.
인간 프로그래머는 문제를 해결할 최선의 방법이 있을 것이라는 가정하에 문제에 접근함. 또는 로봇이 문제를 해결할 때 반드시 따라야 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기도 함. 그러나 우리가 생물학에서 얻을 수 있는 중요한 교훈은 서로 조금씩 겹치기는 하지만 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공략하는 한 팀으로 길러내는 방법이 더 낫다는 점읻. 라이벌로 구성된 한 팀이라는 가설은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영리한 방법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버리고 대신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들이 다수 존재하는가? 그리고 그들 사이에 서로 겹치는 부분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택하는 것이 최선임을 암시한다.
팀을 길러내는 최선의 방법은 십중팔구, 진화를 흉내낸 접근법일 것이다. 작은 프로그램들을 무작위적으로 만들어서, 그들이 작은 변이를 가진 자손들을 만들어내게 하는 것이다. 이 전략을 사용하면, 아무것도 없는 고에서 완벽한 해결책 하나를 생각해내려고 애쓰기보다 끊임없이 해결책을 찾아나서는 것이 가능해진다. 

- 진화가 사람보다 똑똑하다. 만약 내가 생물학의 법칙을 만든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해결책들을 진화시켜라. 해결책을 발견하더라도 멈추지 마라."
기술은 지금까지 민주적인 구조, 즉 라이벌들로 이루어진 팀이라는 가설을 이용하지 않았다. 컴퓨터는 전문화된 부품 수천 개로 만들어졌지만, 그 부품들이 협동하거나 언쟁을 벌이지는 않는다. 나는 갈등을 기반으로 한 민주적 조직이 생물학에서 영감을 얻은 기계의 풍요로운 새시재를 열 것이라고 생각한다.

- 금기에서 벗어난 행동은 전측두엽 치매환자에게서 흔히 나타남. 전측두엽 치매는 전두엽과 측두엽이 퇴화하는 비극적 질병. 이 부위의 뇌조직이 사라진 환자는 숨은 충동을 통제하는 능력을 잃는다. 그들이 사회적 규정을 어기는 온갖 방법을 한없이 생각해내기 때문에, 주위의 사랑하는 사람들은 좌절을 느낀다. 환자들은 가게 주인 앞에서 물건을 훔치고, 공공장소에서 옷을 벗고, 정지 신호에 뛰어가고, 아무때나 노래하고, 쓰레기통에서 주운 음식을 먹고, 물리적 공격성을 드러내거나 성추행을 저지른다. 그래서 법정에 설 때가 많은데, 그들의 변호사와 의사, 그리고 당혹스러워하는 성인자녀들은 그 범죄가 정확히 말해서 환자의 잘못이 아님을 판사에게 설명해야 함. 뇌의 대부분이 퇴화해버린 그들의 상태가 더 악화되는 것을 막아주는 약은 현재로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 정신생활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의 긴 목록에는 화학물질만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신경세포의 세부사항도 포함됨. 간질을 예로 들어보자. 간질발작이 측두엽의 특정한 지점에 집중되어 있다면, 운동발작보다는 잘 눈에 띄지 않는 증상이 나타날 것임. 일종의 인지발작인데, 성격변화, 과종교증, 하이프그라피아(종교에 관한 주제에 관해 길게 글을 쓰는 것), 외적인 존재가 없는데도 있다고 느끼는 것, 신의 목소리로 여겨지는 목소리를 듣는 것 등이 특징적 증상. 역사속 예언가, 순교자, 지도자 중 일부는 측두엽 간질환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백년전쟁의 흐름을 바꾸어 놓은 16세 소녀 잔다르크를 보자. 그녀는 대천사 미카엘, 알렉산드리아의 성 카타리나, 성 마거릿, 성 가브리엘의 목소리가 자신에게 들린다고 믿었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면, "열 세살 때 나 자신을 다스릴 수 있게 도와주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처음에 나는 겁에 질렸다. 목소리가 나를 찾아온 때는 정오경이었다. 여름이었고, 나는 아버지의 정원에 있었다." 나중에는 이런 말도 했다. "하느님이 내게 가라고 명령하셨으니 나는 반드시 가야 한다. 하느님이 명령하셨으니, 내게 100명의 아버지와 100명의 어머니가 있었어도, 내가 왕의 딸이었어도, 나는 갔을 것이다." 이제 와서 확실한 진단은 불가능하지만, 그녀의 전형적인 묘사, 신앙심의 증가, 지속적으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확실히 측두염 간질증상과 일치. 뇌의 특정한 지점이 활성화되면 사람들은 목소리를 듣는다. 의사가 간질약을 처방해주면 발작도 사라지고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우리 현실은 생물학적 현상에 달려 있다.
인지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 중에는 인간이 아닌 아주 작은 생물도 포함됨. 바이러스나 박테리아 같은 미생물이 몸 속에서 보이지 않는 전투를 치르며, 지극히 구체적인 방식으로 우리 행동을 쥐고 흔든다. 미생물이 거대한 기계의 행동을 장악하는 사례로 내가 즐겨 인용하는 것은 광견병 바이러스다. 한 포유류가 다른 포유류를 물면, 작은 탄환 모양의 이 바이러스가 신경을 타고 측두엽으로 올라간다. 거기서 인근 뉴런으로 파고들어가 국지적 활동패턴을 바꿔서, 숙주가 공격성과 분노, 상대를 물려고 하는 경향을 드러내게 만든다. 이 바이러스는 또한 침샘으로 들어가서 숙주가 어떤 대상을 물때 그쪽으로 넘어가 새로운 숙주로 삼는다. 동물의 행동을 조종해서 다른 숙주로 퍼져나갈 길을 확보하는 것. 생각해보라. 지름이 고작 750억분의 1미터에 불과한 이 바이러스가 자기보다 2500만배나 큰 동물의 몸을 조종해서 살아남는다니. 이것은 사람이 키가 4만 4800미터나 되는 생물을 찾아내서 아주 영리한 방법을 동원해 멋대로 휘두르는 것과 같다. 여기서 중요한 교훈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변화가 뇌에서 일어나면 행동이 크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내리는 선택은 뇌의 작디작은 부분들과 불가분의 관계로 묶여 있다.
우리가 생물학적 현상에 휘둘린다느 마지막 사례로, 유전자 하나의 아주 작은 변이가 행동을 바꿔놓는다는 점. 헌팅턴병을 생각해보자. 전두피질에서 서서히 진행되는 손상 때문에 성격이 변해서 공격성, 성욕과다, 충동적 행동, 사회적 규범 무시 등이 나타나는 병이다. 이런 일이 몇년 동안 진행되다가, 팔다리가 경련하듯 눈에 띄게 움직이는 증상이 나타남. 여기서 중요한 점은 유전자 하나의 변이가 헌팅턴병의 원인이라는 사실. 로버트 새폴스키는 이렇게 요약했다. "수 만개의 유전자 중 하나만 바뀌어도, 사람이 인생을 약 절반쯤 살았을 때 성격이 급격하게 바뀐다." 이런 사례들 앞에서, 우리의 본질이 세세한 생물학적 현상에 달려 있다는 결론 외에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헌팅턴병을 앓는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발휘해서 그 이상한 행동을 그만두라고 말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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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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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리학자들은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끌리는 이유를 메시야 콤플렉스, 즉 구원자를 자처하는 심리라고 함. 극단적 자기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고통을 당하는 자에게 해결자로 나선다.
이렇듯 자신을 구원자로 여기면, 적어도 고통을당하는 사람에게만큼은 자신이 필요한 존재로 인정받게 됨. 그래서 자신을 원하는 사람에게 손해를 무릅쓰고라도 자신을 기꺼이 내어준다. 하지만 그 내면 깊은 곳에는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이 자리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은 과거에 그런 존재로 인정받지 못한 상처에 대한 보상심리가 작동하는 것.
메시아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들은 동정심이 많으며, 기어이 나서서 대화하고 치유하려 애쓴다. 특히 그런 일련의 관계들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받고 싶어한다. 주위에 있는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면 못할수록 더욱더 불쌍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유대관계를 맺는 경우가 흔하다.

- 라틴어 알테르 에고는 또 다른 자아를 의미. 흔히 분신, 또 다른 나, 제2의 자아 등으로 번역됨. 심리학에서 알테르 에고는 숨겨두거나 억압해온 욕망이나 감정을 표현할 뿐 아니라 위험한 행동을 거침없이 하도록 한다. 만일 자신에게 알테르 에고가 있다면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능력이나 성격적 특성의 반영일 수도 있지만, 억압하고 있는 자신의 욕망일 수도 있다. 알테르 에고를 이해한다면 자신의 부족한 면을 인식하고 보완하는 데 도움이 된다.

- 프로이트는 성인의 인격구조와 신경증 유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적절한 해결여부와 이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 이는 인간의 성장과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이슈로, 이것을 해결함으로써 개인이 보다 더 건강하고 안정적 인격구조를 형성할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책임감 있는 규범과 요구를 받아들이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과정은 자아발달에 필수적 요소다. 이는 아버지를 본으로 삼고 본받는 동일시 과정이 자아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의미가 된다. 결론적으로 아버지의 역할은 자녀의 성장과 발달에 있어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하며, 이를 인식하고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중요. 고흐의 여러 정신적 불안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잘 해결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고흐가 진정한 삶의 기쁨이자 아버지에게 원했던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제폼의 포로를 보며 고흐가 늘 말했던 진정한 자유였다. 자녀양육에서 아버지의 역할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의 자녀들을 있는 그대로 따뜻하게 받아들이며 자유로움을 최대한 보장할 이유가 여기 있다. 또 다시 불행한 고흐를 탄생시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 파리에서 고흐는 자신의 화풍을 내려놓고 동료들의 화풍을 모방하고 흉내내며 자신만의 스타일로 승화시킴. 그동안 어둡고 무겁게, 덫칠로 표현했던 그의 화풍이 밝고 가볍고, 빠른 붓질로 변했다. 하지만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과 동일한 느낌을 전하는 대신, 고흐는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고흐는 자신의 작품과 삶에 대해 새로운 전환을 경험했다. 이전에는 나르시시스트적 태도와 강박적 성향으로 주변환경을 조절하려 했지만, 이제는 타인을 존중하고 그들의 역할을 인정하였따. 자신이 사실주의, 인상주의, 신인상주의, 점묘파 등 모든 영역에서 인정받는 관종이 되기를 포기했다.
그랬더니 자신에 대한 강박과 집착이 줄어들면서, 고흐의 그림은 거북함과 폭렬적 강렬함이 사라졌다.

- 향수는 지난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과거를 그리워하는 정서적 상태. 문득 어릴 때 먹던 음식에 식욕이 당기거나, 여름 휴가지를 꼬마 친구들과 물장구쳤더 냇가로 정하거나, 어른들이 불렀던 가락을 흥얼거린다면, 일단 향수에 취한 것이다. 뇌과학에 다르면 과거의 기쁨으로 가득한 순간을 떠올릴 때 도파민이 분비되어 우리에게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향수는 뇌의 보상시스템과 관련이 깊다. 불확실한 현실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을 때 우리의 뇌는 행복했던 과거를 추억하며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현재의 도전에 대해 이미 맛본 감각의 강한 끌림이 불안한 현실에 안정감을 제공하기 때문. 

- 편집증은 불안이 원인이 되어 자신의 생각이나 상상에 부합하는 해석을 하려고 하며, 이는 종종 현실을 왜곡하는 경향을 보임. 과도한 의심과 불신, 그리고 타인의 행동에 대한 비이성적 해석이 특징이다. 편집증 증세가 심한 고흐는 고갱과 테오를 비롯하여 주변 사람들이 자신에게 나쁜 짓을 할 것이라고 믿었다. 
결국 병세가 깊어진 고흐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성탄절 기간이면 매년 찾아오는 무서운 형상들로 괴로움을 겪었다. 하지만 두려움 속에서 이런 환상은 대수롭지 않다고 애써 자신을 세뇌시켰다. 

- 십 대 시절에 영웅으로 삼았던 찰스 디킨스는 지금 고흐가 본 저 별속에서 "모든 위대함과 사소함을 지닌 하나의 온전한 세계"가 보인다고 했었다. 고흐은 머리에 가득한 별빛이 궁극의 평온함으로 자신을 이끄는 것 같았다. 저 별빛의 무한한 가능성과 꺼지지 않는 광채를 화폭에 담고 싶었다. 고흐는 가로질러 놓은 손바닥만한 창틀 너머로 바라본 달과 별들을 스케치했다.
증세가 호전되면서 결국 이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중경에는 상상력을 동원해 별빛 아래로 잠든 마을 풍경과 산꼭대기의 능선을 덧붙였다. "어떤 평온이나 행복을 더해주는" 묘하고 이상한 느낌을 붓놀림으로 만들었다. 사이프러스 나무에까지 그 소용될이를 그려 넣어 광대무변한 빛과 에너지를 유지했다. 평범한 시선으로 본 어떤 세계와도 다른 고흐만의 밤하늘을 상상과 현실을 결합하여 만들어냈다. 맥동하는 불빛과 소용돌이치는 별, 빛을 내뿜는 구름, 태양만큼이나 환하게 빛나는 달로 어우러진 장관이었다.
별이 빛나는 밤은 고흐를 힘들게 했던 경쟁사회와 동떨어진,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고흐는 밤마다 별빛을 보며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 귀를 일부 절단하고 자해한 사건은 그의 예술성에 있어서 중대한 분수령이 된다. 이후 생레미 병원에서의 하루하루는 여전한 고독과 번민으로 가득했고 눈감으면 끔찍한 악몽에 시달림. 과도한 스트레스와 빈약한 식사, 비타민 결핍 등으로 고흐는 더 예민해져서 종종 자신을 통제하지 못했다. 사람들을 만나거나 외출하는 것이 두려워 죽을 것처럼 외로웠지만 별이 빛나는 밤이 그려지면서 그는 고독한 예술가의 길을 묵묵히 감당해 나갔다.
고흐의 증세를 연구한 기록에 따르면 이 증세는 어느정도 견딜수는 있어도 완전한 회복은 쉽지 않다고 함. 그래서 그의 치료과정에서 탄생한 별이 빛나는 밤은 당대 정신의학과 예술에 대한 통찰을 지금까지도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이런 의의를 떠나서 꼭 짚어보고 싶은 게 있다. 다시 서두에 인용한 말의 전문을 보자.
"형은 가끔 정상처럼 보이지만 이내 자신만의 세계에 갇혔다. 너무 고통스러워 도울 방법이 없어 보였다. 마음을 터놓을 만한 사람이 있었다면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아를의 병원에서 정작 이 말을 했던 테오는 도울 방법을 찾지 못했던 것인지, 아니면 자신을 의지하려는 형이 너무 버거웠던 것인지 고흐 곁에 머물지 않았따. 아픈 형의 곁에 단지 두시간만 있었을 뿐 고갱과 함께 파리로 돌아갔다.

- 올리브나무를 그리면서 고흐가 품었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신약에 따르면 예수는 처형되기 전달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기도를 올렸는데, 그곳은 올리브나무가 무성한 곳이었다. 이 말씀에 근거하여 고흐는 담 너머에 있는 올리브나무 숲을 겟세마네 동산과 같은 고뇌의 장소로 여겼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나의 소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기도를 했듯이, 고흐 또한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려고 했다. 그래서 이 그림들은 고흐가 겪던 정신적 고통과 다가올 증상들을 묵묵히 받아들이면서 화가의 길을 가겠다는 그의 결단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고흐는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올리브나무 그림을 해바라기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대표적으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올리브나무는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그의 내면적 강인함과 예술적 의지를 다시 세운 상징적 선언으로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다. 

- 심리적으로 힘든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고흐가 굳건히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더 이상 사람을 모델로 삼지 않고 그 대신 아몬드나무나 올리브 나무 같은 자연을 그리려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 주의 회복 이론은 우리의 정신적 에너지를 회복하는 데 도움을 주는 방법으로 자연의 역할에 대해 설명. 이 이론에 따르면, 산만하게 흩어졌던 주의를 다시 집중하려면 네가지 요소가 중요함. 그것은 탈주, 확장, 끌림, 융합이다.
첫째, 탈주는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
둘째, 확장은 우리의 시야를 넓혀 더 멀리 더 높게 보는 것,
셋째, 끌림은 억지로 집중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관심을 갖는 것,
넷째, 융합은 자신의 취향과 적합하게 연결시키는 것을 말함.
고흐는 요양원을 벗어나(탈주), 자신의 시야를 숲과 하늘로 넓히고(확장), 나무와 꽃, 하늘에 매혹되었으며(끌림) 거기서 자신의 예술적 의지를 결합할(융합) 수 있었다. 그 결과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주의를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죽음 본능을 프로이트는 타나토스라 했다. 타나토스는 그리스어로 죽음을 의미. 모든 인간은 삶의 본능인 에로스와 함께 파괴와 죽음을 향한 본능인 타나토스를 갖고 있다. 특히 프로이트는 말년이 되어 타나토스의 긍정적 측면을 강조하면서 생명체가 자신의 근원인 흙과 같은 무생물의 상태가 되고 싶은 욕구라고 했다. 이 세상에서 어떤 여한도 없이 정해진 수명만큼을 받아들이고 '흙이나 흙으로 돌아가리라'는 인간본능을 말한다.

- 고흐는 밀밭을 그리려고 가로 길이가 세로길이의 두배에 달하는 긴 캔버스를 들고 언덕으로 향했다. 밀밭과 하늘의 경계를 길게 가로질러 거친 붓질로 표현했고, 주변에는 나무 한그루도 없고 집 한채도 찾아볼 수 없으며 교회의 첨탑 하나조차 눈에 띄지 않는 황량한 벌판만 두었다. 밀밭 가운데로 사람의 흔적이라곤 전혀 없는 외길만 이어져서 땅과 하늘의 경계선과 맞닿아 있다.
그림을 보면 가로로 길게 놓인 경계선과 세로로 굽은 길이 맞닿은 교점이 어느 순간 떠오르면서 마치 그 공간으로 까마귀떼가 모여드는 착시를 경험한다. 어두운 밤하늘과 거친 밀밭, 까마귀께다 고흐를 불길한 어디론가 몰아가려는 듯하다. 그곳은 자연의 광대함 속에서 느껴지는 극단적 고독의 장소인 것 같다. 고흐는 편지로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남겼다. "삶의 뿌리가 위협받는다. 내 발걸음은 불안정하다."

- 고흐의 죽음이 자살인가 타살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그가 사용한 총이 지역 소년 르네 세크레탕의 것이었으며, 사고 또는 타인의 가담 가능성도 제기됨. 짓궂은 소년 르네는 무모한 장난으로 고흐를 자극하며 갈등을 빚곤 했었다. 고흐의 삶은 동네 아이들에게까지 조롱과 괴롭힘을 당하는 쉬지 않은 삶의 연속이었다. 이들 사이의 관계가 그의 죽음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은 여전히 연구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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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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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의 의미

심리 2025. 4. 4. 07:05

- 갈증은 세상이 물이 존재한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세상에 물이 없다면 인간이 어떻게 갈증을 느낄 수 있겠는가? (프란츠 베르펠)

- 무의미는 세상에 의미가 존재한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세상에 의미가 없다면 인간이 어떻게 무의미하다고 느낄 수 있겠는가? (빅터 프랭클)

- 의미에의 의지가 좌절되면 그 자리를 쾌락에 대한 의지, 즉 쾌락의 원칙과 권력에 대한 의지가 차지함. 쾌락의 원칙은 정신분석 심리치료에서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는 핵심동기.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에서는 신경증의 원인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을 우월성을 얻고자 하는 투쟁, 권력(힘)에 대한 의지라 보았다. 프로이트와 아들러는 신경증 환자들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환자들의 좌절된 의미에의 의지의 자리가 쾌락에의 동기와 권력에의 동기로 채워졌다는 것을 알지못했고, 신경증을 일으킨 원인이 단지 채워지지 않은 쾌락이나 권력에의 동기라 보았기 때문에 인간이 기본적으로 의미가 아니라 쾌락이나 권력에 관심을 갖는 것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연구결과 의미에의 의지가 좌절된 자리를 쾌락에의 의지가 대체한다는 것이 분명히 밝혀짐. 임상심리학자 루카으의 연구에 따르면, 빈의 시립 놀이동산 공원 프라터를 자주 방문하는 사람들이 빈에 사는 일반 시민들보다 실존적으로 더 좌절감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대도시에 거주하는 시민들도 동일한 정도의 실존적 좌절을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 쾌락에의 의지는 인간의 자기초월성을 부정하고 반대할 뿐 아니라 자기초월성 자체를 좌절시킨다. 우리는 행복을 추구하기 때문에 오히려 행복을 얻지 못한다. 행복추구 자체가 행복을 방해한다. 행복은 추구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오는 것이다. 즉 행복이란 오직 자기초월적 삶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부산물이다. 삶의 의미를 실현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행복은 자동으로 따라오게 되어 있다. 그러나 행복을 목표로 하면 할수록 그 목표는 더욱더 빗나가게 된다. 이는 특히 불감증이나 발기부전 같은 성적 신경증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성적 행위와 경험은 그 자체가 주의(관심)의 대상이 되거나(과도한 숙고) 의도하는 목적(과도한 의도)이 되는 경우 방해를 받게 된다.

- 의미는 발견하는 것. 주어질 수 없다. 그리고 의미는 스스로에 의해, 즉 자신의 양심에 의해 발견되어야 한다. 의미를 준다는 것은 결국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잘못인지 윤리적, 도덕적으로 판단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그러나 만약 이미 존재하는 윤리적 기준을 갖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외부에서 판단해 말해준다면 인간은 자신이 하지 말아야 하는 것에 반하여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 더 이상 스스로 판단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선한 것이란 본질적으로 존재의 의미 실현을 돕는 것이며, 악한 것이란 존재의 의미 실현을 방해하는 것이라 정의할 수 있따. 윤리적, 도덕적 가치는 존재론적이어야 할뿐 아니라 실존적이어야 한다. (존재론적이라는 말은 그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를 말하며, 실존적이라는 것은 그것이 무엇인가를 넘어서 삶을 통해 실현되어야 하는 것을 말함. 따라서 도덕적 가치또한 그것이 무엇인가를 넘어서 삶을 통해서 구현되어야 한다는 뜻에서 실존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의사가 환자에게 의미를 줄 수 없으며, 교수가 학생에게 의미를 줄 수 없다. 교수가 학생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진리탐구에 헌신하는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교수는 진리탐구에 헌신하는 자신의 모습을 실존적 삶의 모범으로 학생에게 보여줄 수 있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은 오직 온전한 자신의 존재로부터 찾을 수 있다. 자신의 삶이 바로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정답인 것이다.

- 초월성이 인간실존의 핵심이라는 것은 로고테라피 원칙중 하나. 이 원칙이 의미하는 바는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향할 때 인간이 진정으로 실존한다는 것. 인간존재가 그 자체로 존재의 의미가 될 수는 없다. 인간을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고들 말한다. 그렇다면 이 말이 인간 자체가 본질적으로 목적이라는 것을 의미할까? 이 말은 인간은 자기자신을 인식하고 실현하도록 만들어졌다는 뜻일까? 나는 인간은 가치를 의식하고 실현하는 존재라 말하고 싶다. 인간은 다른 어떤 것을 위해 혹은 누군가를 위해, 즉 어떤 대의를 위해, 자신의 동료를 위해 혹은 신을 위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릴 때만 오직 자신을 찾을 수 있다. 인간이 만약 자유롭게 자신이 선택한 의미에 자신을 헌신하지 않는다면 존재 자체의 빛을 잃게 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인간의 자유로운 선택이다.

- 의미에의 의지
로고스란 그리스어로 의미라는 뜻. 프로이트의 정신분석과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에 이어 빈의 3대 심리치료라 불리는 로고테라피는 인간존재의 의미와 인간의 의미추구에 초점을 맞춘다. 로고테라피는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미추구의 노력을 인간의 1차적 동기로 설명. 이것이 바로 내가 의미에의 의지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서 중심으로 하는 쾌락의 원칙과 아들러의 개인심리학에서 강조하는 권력에의 의지아 대조되는 것으로 말하는 이유다.

- 의미에의 이지는 믿음이 아니라 사실이다. 만약 의미에의 의지가 인간을 움직이는 1차적 동기라는 나의주장에 증거가 필요하다면 몇년전 프랑스에서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가 그 증거가 될 수 있다. 통계조사에 참여한 사람들 중 89%가 인간에게는 살아야 할 어떤 것이 필요하다고 응답했고, 61%는 자신의 삶에 목숨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소중한 것이나 소중한 사람이 있다고 응답했다. 내가 일하는 병원에서도 환자들과 직원들을 대상으로 동일한 여론조사를 해보았다. 조사결과는 프랑스에서 수천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연구결과와 거의 똑같이 나왔다. 차이는 2%에 불과했다.

- 적당한 정도의 긴장이란 이미 성취한 것과 앞으로 성취해야 할 것 사이의 긴장이며, 이는 내가 어떤 존재인가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사이의 차이다. 이런 긴장은 인간에게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으며, 정신건강과 심리적 안녕에 필수적이다. 따라서 인간은 실현해야 할 잠재적 의미에 대한 도전에 주저해서는 안되며, 그럼으로써 잠재된 의미에의 이지를 불러 일으킬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인간에게 1차적으로 필요한 것이 균형의 유지 혹은 생리학에서 말하는 항상성, 즉 긴장이 없는 상태라는 가정이 정신건강 예방차원에서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자신에게 가치있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노력과 투쟁이다. 즉 어떻게든 긴장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완수되기를 기다리는 자신의 잠재적 의미에의 소명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항상성이 아니라 내가 영적 역동성이라고 지칭한 것이다. 즉 한쪽 끝에는 완수되어야 할 의미가 자리하고 다른 한쪽 끝에는 그것을 완수할 인간이 자리하는, 의미와 인간 사이의 긴장이라는 축에 놓인 영적 역동성이 필요.
그리고 영적 역동성이 정상적인 사람에게만 필요하다고 여겨서는 안된다. 오히려 신경증이 있는 사람들에게 훨씬 더 필요함. 만약 건축가가 약해진 아치형 문을 튼튼하게 하고 싶다면, 문 위에 더 무거운 것을 올려놓아야 한다. 그래야 문의 부속품들이 더욱 단단하게 조여질 것이기 때문이다. 즉 치료자가 환자의 정신건강을 향상시키고 싶다면 삶의 의미를 향한 재교육을 통해 환자가 짊어져야 하는 무게를 늘리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 지난 반세기 너무나 오랫동안 정신의학은 인간의 마음을 단지 기계적 측면에서 해석하려 해왔고, 결국 정신질환에 대한 치료는 주로 기법의 측면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나는 이런 상황이 끝이 났다고 믿는다. 이제 동이 트며 나타나는 것은 심리학화된 의학에의 그림이 아니라 인간화된 정신의학이라는 그림이다.
그러나 여전히 자신의 주된 역할이 기술자라고 해석하는 의사가 있다면, 그는 질병 뒤에 숨겨진 인간의 참된 모습을 보는 것이 아니라 환자를 단지 기계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셈이다.
인간은 물건이 아니다. 물건은 스스로 결정할 수 없지만, 인간은 궁극적으로 스스로 결정하는 존재다. 자신이 무엇이 될 것인가는 바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다. 살아 있는 생지옥의 실험실 같았던 나치 수용소에서 나는 인간의 그러한 환경에서도 스스로 무엇이 될 것인가를 결정하는 존재라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 중 누군가는 돼지처럼 행동했는가 하면 누군가는 성자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 인간은 돼지 혹은 성자라는 두가지 잠재성을 자신 안에 모두 가지고 있다. 돼지나 성자 중 어떤 것이 될지는 조건이나 환경이 아니라 자신의 결정에 달려 있다.
2차대전을 겪은 세대인 우리는 인간이 진정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 지극히 현실적이고 경험적 방식으로 깨달아가고 있다. 인간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가스실을 발명한 존재다. 그러나 또한 허리를 꼿꼿치 세우고 주님의 기도를 드리며 가스실로 들어가는 존재이기도 하다.

- 인간은 자시 자신을 무시하고 잊을 수 있을 때만 세상 속에 있는 것과 세상의 것들을 인식할 수 있다는 근원적 진리를 상기할 대 이러한 주관주의적 사고가 진정한 인간의 인지해우이의 핵심을 간과했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인간은 오직 자신의 관심을 자기 이외의 주변으로 옮겨갔을 때만 자신을 넘어서 온전하게 대상을 인지할 수 있게 된다. 이는 눈을 예로 들어 설명할 수 있겠다. 만약 눈이 눈 자체를 바라본다면 눈은 병에 걸리게 된다. 눈이 눈 자체를 보면 볼수록 세상과 세상 속의 대상을 더욱 볼 수 없게 된다. 눈의 볼 수 있는 능력은 눈이 눈을 볼 수 없다는 것에 달려 있다. 인간의 유한한 인지능력은 인지작용의 내재된 주관성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주관적 인지작용이 단지 자기표현이 되고 주체 자신의 구조를 투자하면 할수록 인지작업은 점점 더 큰 오류를 범하게 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댜. 즉 인지란 자기표현과 반대될 때 그리고 진정으로 자기초월성을 포함할 때 비로소 진정한 인지라고 말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인간을 개별적 존재로 한정한 이러한 이론들은 항상성 이론에서와 마찬가지로 긴장의 감소에 기반을 두든 혹은 자아실현에서와 같이 세상에 내재되어 있는 가능성들을 최대한 많이 실현하는 것에 기반하고 있든 뭔가 결여되어 있는 듯하다. 
나는 인간에 대한 관점은 오직 항상성을 넘어서서, 그리고 자아실현을 넘어서서, 심지어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넘어서서 의미와 가치라는 객관적 세상 한가운데서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가와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인간존재 초월성의 영역으로 넘어갔을 때 비로소 올바르게 정립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 역설적 의도에는 건강한 유머감각이 내재되어 있다. 유머는 어떤 것과 자기 사이에 거리를 두게 하는 탁월한 방법 중 하나라는 점에서 유머가 왜 역설적 의도에 내재되어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유머는 인간이 자기와 거리를 두고 자신을 떨어져서 볼 수 있게 함으로써 자신이 처한 곤경에서 스스로 빠져나와 어려움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도와준다. 그래서 유머는 영적 차원에 속한다. 

- 호주 원주민이 사용하는 부메랑은 던진 사람에게 되돌아온다. 그러나 실제 호주에서 내가 들은 이야기는 부메랑은 던진 사람이 목표물을 놓쳤을 때만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인간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갖는 사람은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게 되고, 자신의 목표를 놓치게 되어 결국 부메랑이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 삶은 세가지 방식으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첫째, 우리는 세상에 주는 것(창조적인 일)을 통해 의미를 발견할 수 있고, 
둘째, 세상으로부터 받은 것(가치난 자연 그리고 문화에 대한 경험)을 통해 의미를 발견할 수 있으며,
셋째, 더 이상 바꿀 수 없는 운명적 상홍(불치병, 암)에 용기있게 직면하는 것을 통해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은 누구도고통, 죄책감, 죽음이라는 삶의 3대 비극을 피할 수 없다. 고통이란 말 그대로 삶의 피할 수 없는 고통을 의미하며, 죽음과 죄책감은 인간의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과 잘못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죄성을 의미한다.

- 오늘날 의사들이 만약 자신들의 책임이 질병을 치료하는 것뿐 아니라 인간 자체에 있다는 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인다면 삶의 의미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용기를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삶의 의미에 대한 의구심이나 삶의 의미의  부재로 인해 느끼는 절망감은 사실 질병이 아니기 때문. 오히려 이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 특성이다. 과거에는 회의적 사람과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성직자를 찾아갔다. 그러나 오늘날 이들은 도움을 받기 위해 정신과 의사를 찾아간다. 이러한 사실은 의사에게 신체적, 심리적 질병을 넘어 환자를 단지 병자로서만이 아니라한 인간으로서 이들의 요구에 반응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말해준다. 환자의 신체적, 심리적 측면보다 삶의 의미와 같은 영적 측면을 과대평가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지만, 환자를 한 인간으로 대하고 이들의 삶의 의미의 문제에 반응하는 것이 의사라는 직업의 한계를 위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또한 잘못된 것이다.

- 환원주의는 미국에서 인간을 사물화한다는 것은 마치 우리가 단순히 물건을 다루는 것처럼 인간을 그렇게 다룬다는 뜻이다. 그러나 인간을 사물화하는 데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미국의 젊은 사회학자인 톰슨의 말을 인용하자면, 최근 그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인간은 의자나 책상처럼 존재하는 물건이 아니다. 인간은 살아 있다. 만약 자신의 삶이 의자나 책상과 같은 단순한 존재로 전락했다는 것을 안다면 인간은 자살하게 될 것이다."

- 젊은이들이 실존적 공허라는 상황이 신경증의 증상은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실존적 공허를 느끼는 것이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랑스러워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이죠. 실존적 공허를 느낀다는 것은 바로 어딘가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실존적 공허의 느낌을 통해 우리는 의미를 찾아나설 수 있게 됩니다. 특히 이는 젊은이들에게는 특권입니다. 따라서 의미가 인간존재에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그저 당연하게만 생각하지 말고, 존재의 의미라는 문제에 대해 질문하고 도전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실존적 공허란 부끄러운 신경증이 아니라 자랑스러워해야 하는 인간성취입니다. 굳이 이를 신경증이라고 말한다면 아마도 이는 집단적 신경증일 것입니다. 집단적 신경증이란 인류 전체의 신경증입니다.

- 심리치료는 프로이트 시대 이후 두단계로 발전해왔다. 첫번째 단계는 본능에 의해 결정되는 자동반사적 존재에서 스스로 결정하는 존재로의 단계이고, 두번째 단계는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는 자율적 존재에서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초월적 존재로의 단계다.
이 두단계들은 필연적인 것이었는데, 첫번째 단계는 인간이란 절대 순수본능과 자동반사만으로 그려낼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며, 두번째 단계는 인간에 대한 완전한 그림은 인간이 그저 자율적으로 어떤 것을 내재하고 있는 존재라는 틀을 뛰어넘는 존재라는 것. 다행스럽게도 오늘날 초월성이라는 개념을 인간본성을 설명하는 데 포함시키거나 심지어 인간의 질병의 본질을 설명하는 데 적용할 때조차도 이를 이제는 그리 귀에 거슬리게 여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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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이 다른 인간을 자신의 그림자에 불과한 존재로, 말하자면 물리적 차원에 존재하는 신체와 영적인 차원을 초월하는 정신을 소유하고 있으며 내면적 깊이를 지닌 주체가 아닌 사물로 바라볼 때 악이 실현될 가능성은 상당 수준 증대된다. 이렇드 타인을 주체가 아닌 사물로 바라보고 사물처럼 대하는 심리적 과정이 대상화. 대상화 개념은 어떤 독립적인 변수가 아니라 일종의 오해의 스펙트럼으로 인식할 때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음. 다시 말해 타인을 대상화한다는 것은 타인을 총체적 종재로 바라보지 못하고 그보다 못한 존재로 오해하고 있음을 의미. 그리고 이 오해의 스펙트럼은 경미한 수준에서 심각한 수준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범위를 아우를 수 있다. 경미한 수준의 대상화가 일어나는 경우에는 타인, 특히 가족과 친척 등 가가운 지인을 제외한 사람들과 최소한의 정서적 관계만 맺는 일상적 무관심이 두드러지게 나타남. 나와 거리가 먼 타인의 고통을 알게 되었을 때 정서적으로 크게 불편하지 않다면 우리는 일상적 무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부분의 상황에 이 경미한 수준의 대상화를 경험한다.

- 타인의 주체성을 오해하는 경향은 깊은 통찰을 지닌 이들이 오래전부터 인지해온 더욱 근본적인 문제, 즉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자신이 다른 존재들과 분리된 별개의 존재라고 인식하는 문제의 증상에 해당. 동양의 사상가들은 지난 수천년 동안 이 문제를 중대한 인지적 오류로 여겨왔다. 달라이라마 성하가 남긴 말에는 그런 동양적 관점이 요약되어 있다.
무엇이 고통을 낳는가? ... 오염된 행동들이다. 무엇이 오염된 행동을 낳는가? 욕정과 증오라는 파괴적 감정들이다. 그 감정들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무지에 있다. 그렇다면 가장 심각한 무지는 무엇인가? 내가 원래부터 존재했다는 착각이다. 당신 스스로 하나의 완전히 독립적인 개체로 존재한다는 그릇된 생각은 결과적으로 자신과 타인을 인위적으로 분리하게 만든다. 이 같은 분리는 자기편인 것에는 애착을 느끼고, 타인의 편인 것에는 저항하도록 부처겨 자만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젖히고 부, 교육, 신체적 외양, 인종적 혈통, 명성과 같은 실제의 혹은 상상의 자질을 부풀려버린다.

- 철학자 제이컵 니들먼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위대한 지혜의 가르침들을 분석하고 그중에서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포괄적인 관념들을 걸러내면 다음과 같은 세가지 주요 관념이 도출된다고 주장. 놀랍지 않게도 니들먼이 제시한 고대 지혜의 상당부분은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압축적으로 담고 있다.
1. 인간은 환상과 외양의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2. 인간이 자기 정체성에 대해 느끼는 일반적 감각, 이른바 인격은 진정한 근본적 정체성이 아니다.
3. 하나의 지배적 실체(모든 존재의 보편적 근본바탕)가 존재하며, 이 실재는 우주에 질서를 부여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을 연결해 하나의 거대한 전체로 만든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위대한 영적 가르침과 철학을 따르는 사람들을 떠올려보면 각자가 지닌 교리나 주장이 구체적 측면에서는 매우 다를 수 있지만 전반적인 세계관은 니들먼이 제시한 앞의 기본적 세가지 관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세가지 일신교 전통도 앞에서 언급한 관념을 지지하고 있고, 다신교인 힌두교도 마찬가지. 

- 인간의 정체성은 개인적 관심을 중심으로 규정되었다가 자신과 유사한 타인에 대한 관심을 통해 규정된 뒤 최종적으로는 모든 사람, 즉 모든 존재와의 관계에 대한 관심과 깨달음을 통해 규정된다고 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도 생의 말년에 이 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인간은 우리가 우주라고 부르는 시공간이 제한된 전체의 일부분일세. 인간은 자기 자신, 자신의 생각, 자신의 감정을 마치 다른 것들과 분리된 것처럼 경험한다네. 일종의 시각적 망상처럼 말이지. 이 같은 망상은 우리가 사적인 욕망과 애정을 극소수의 주변인에게만 품도록 옥죄는 모종의 감옥이라네. 우리에게 주어진 과업은 모든 피조물과 자연 전체가 지닌 아름다움을 끌어안을 수 있는 연민의 영역을 확장해 이 감옥에서 스스로 자유로워지는 것이지. 누구도 이 과업을 완벽하게 성취할 수는 없지만,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행위 그 자체가 해방의 일부이자 내적 안정감을 이루는 토대가 된다네.

- 호모 로콱스, 즉 언어적 인간은 바벨탑을 쌓아올릴 때 그러했던 것처럼 여전히 순진하게 자신이 이룬 최고의 업적에 기뻐하며, 여전히 무기력하게 자기 언어의 희생양으로 남아 있다. (올더스 헉슬리)

- 대상의 심층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 그 대상과 분리되어 있다는 인식은 강해지고, 대상화가 일어날 가능성도 더욱 커짐. 총명함과 효율성은 얻게 될지 몰라도 그 대가로 심오한 지혜를 잃는 희생을 감수해야 하며, 외부로부터 분리된 존재는 타락한 열정으로 인해 갈망와 애착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된다. 틱낫한은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름은 얼마든지 위험해질 수 있다. 현실의 본질을 건드리는 동시에 단어의 의미를 파헤치고자 한다면 단어는 단어일 뿐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고 단어에 현혹되어서는 안된다. 이름과 단어는 분별과 연관된 느낌과 감정 및 관념을 불러일으키는 경향이 강하다. 이러한 사실을 인식한다면 단어와 이름에 갇히지 않는 방법을 알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유형의 철학에 따르면 어떤 문제를 해결할 탈출구는 부처의 은총을 받아 행하는 자발적 창조행위를 통해서만 발견할 수 있다.
상과 명을 걷어내고 온갖 분별행위를 중단하고 나면 각 사물이 진실된 본질이 남는데, 그 본질의 속성은 예측불가능한 것이기에 실재의 진여라고 부른다. 보편적이고 미분화되어 있으며 불가해한 이 진여는 유일무이한 실재이지만, 진리, 마음의 본질, 초월적 지성, 숭고한 지혜 등으로 다양하게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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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당수의 사람은 명령이 합법적 권위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는 한, 그 행동의 내용과 무관하게 양심의 제약없이 시키는 대로 행동한다. 아마도 이것은 우리 연구의 가장 기본적 교훈일 것이다. 즉 평범한 사람들이 아무런 적대감 없이 단순히 자기 일을 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파괴적 과정의 행위작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스탠리 밀그램, 권위에 대한 복종)

- 밀그램은 자신의 역누를 통해 얻은 복종수준을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사람들이 실험자의 명령을 따를 때 자신의 주체성과 책임을 실험자에게 넘긴다고 설명. 그들은 생각 없는 행동주체가 되어 대리적 상태에 들어간다. 그러나 어떤 학자들은 사람들이 명령에 복종하는 대리적 상태가 되었다는 그의 이론에 동의했지만 어떤 학자들은 그가 모든 참가자로부터 체계적 보고를 받은 것은 아니었기에 그 타당성을 우려했다. 예를 들어 밀그램은 그의 초기 연구를 여러가지로 변형해 수행했는데 그 변형 실험들 사이에서 복종의 정도가 달랐다. 실험자가 전화로 재촉할 때나 학습자가 같은 방에 있는 경우 복종률이 감소. 일부 학자는 대리적 상태이론에 따르면 명령을 실행하는 사람으로부터 실험자에게 주체성과 책임이 이전될 경우, 실험 상황이 어떻든 모든 참가자가 비슷한 행동을 보일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이 주장은 뇌의 작용과 환경간의 상호작용을 상당히 무시한 것이다. 단일 작용만으로 전체 행동을 포괄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밀그램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한 동료학자들은 두번째 문제로 그의 연구에서 대리적 상태 이론을 뒷받침할 만한 자료가 거의 제공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 예를 들어 그는 몇몇 참가자들이 예일대가 참가자들의 안전을 책임진다는 생각을 했다고 밝혔지만, 그는 모든 참가자와 체게적 인터뷰를 실시하지는 않았다.
- 밀그램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처음에는 부족했음에도 명시적, 암묵적, 전기생리학적, 신경영상학적 방법을 결합한 실험연구는 밀그램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물론 사람들이 명령에 따르거나 따르지 않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하지만 일단 그들이 따르기로 동의하면 뇌가 정보를 다르게 처리하기 시작하며, 이로 인해 자신이 따르는 복종행위에 대한 책임과 주체성이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남. 그러나 복종상황에서는 책임감가 주체성만 변화하는 것이 아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밀그램이 미국과 독이에서 다양한 사회적 배경과 다양한 교육수준을 가진 남녀 수백 명을 대상으로 실험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실험에서 어떤 특정 범주의 사람들이 복종할 가능성이 더 적다는 결과를 한 번도 발견하지 못했다.

- 건강한 인간은 주체의식과 책임감을 느끼는 생물학적 성향을 갖고 있음. 명렬에 따르면 뇌 수준의 주체의식이 영향을 받음. 이는 복종상황의 강력한 힘을 보여준다. 더불어 이러한 발견은 집단학살 가해자가 명령을 따랐을 때 그 일에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기소를 피하려고 개인의 책임을 줄이려는 시도가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선택한 결과 그것이 한 사람의 주체의식과 책임감에 부정적 영향을 미쳐 자신의 온전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것일 수 있다.

- 진화론적 관점에서 잠재적으로 상처를 줄 수 있는 상황을 피하게 해주며 생존에 필수적인 고통의 인지와 관련된 신경 메커니즘은 인간이 사회적 종으로 진화하기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진화과정에서 사회적 포용은 집단 내 생존을 위해 매우 중요해졌다. 현대 과학계의 주요 이론에 따르면 집단에 참여하지 않은 개인을 처벌하기 위해 사회적 배제가 신체적 고통과 관련된 기존의 뇌 신경망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고 한다.
인간의 생물학적 성향은 집단의 일원이 되도록 동기를 부여하여 자연스럽게 자신이 속할 집단을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인간의 자기분리 성향은 때로 자기 집단을 보호하기 위해 다른 집단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만들기도 한다. 외집단에 대한 이런 편견적 태도는 부정적 사고부터 시작해 반사회적 태도, 친사회성 감소, 사회적 배제, 증오표현, 그리고 더 극단적인 형태인 전쟁과 집단학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 도덕적 감정은 우리의 도덕적 행동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이나 죄책감 같은 도덕적 감정은 자유롭게 선택할 때보다 명령에 복종할 때 약화됨. 복종이 요구되는 상황에서는 행위에 대한 주체성과 책임감이 줄어들기 쉬움, 이런 결과는 위계적 상황의 강력한 영향을 보여주며, 권위에 대한 복종이 잔혹한 행위를 정당화하게 되는 이유를 설명한다. 이는 타인을 해치는 행위에 대한 본능적 거부감이 왜곡되기 때문.
하지만 위계적 상황에는 명령에 따르는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명령을 내리는 사람도 있다. 최소한 명령을 내리는 사람은 피해자에 대한 책임감과 공감을 느낄 것이라고 기대하겠지만 뇌 검사 결과는 반드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 참가자가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하 명령자)의 역할에 있을 대와 명령을 전달하는 중간자의 역할에 있을 때 피해자에게 전달하기로 결정한 전기충격의 횟수를 비교했다. 비교를 위해 참가자들은 두 가지 다른 실험조건에서 각각의 역할을 맡았다. 우리는 참가자들이 중간자 역할을 할 때 명령자 역할을 할 때보다 충격버튼을 더 자주 누른다는 것을 관찰. 이런 결과는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명령과 행동으로부터 거리가 있으면, 반사회적 행동이 증가함을 시사하는 것일 수 있다.

- 신경과학 및 신경학 연구를 통해 스트레스가 어떻게 뇌의 신경화학적 기능가 스트레스 반응에 관련된 뇌 회로를 변화시켜 뇌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관한 중요한 정보가 밝혀짐. 예를 들어 과거연구에 따르면 PTSD환자는 PTSD가 없는 대조군에 비해 편도체 활성화 역치가 낮은 것으로 나타남. 다르게 표현하면 PTSD환자는 모든 상황을 좀 더 잠재적 위협으로 인식. 예를 들어 한 연구진은 PTSD가 있는 집단과 없는 집단을 모집. 그리고 참가자들에게 몇 밀리초의 매우 짧은 시간 동안 두려움 자극과 행복자극을 보여주었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두려움 자극을 목격했을 때 PTSD가 있는 참가자들은 없는 참가자들보다 편도체 활동이 더 활발한 것으로 나타남. 이는 위험한 상황이라고 판단하는 역치가 낮아졌음을 의미. 이것이 바로 여러분에게는 거의 스트레스를 유발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누군가가 과잉반응을 보일 수 있는 이유다. 즉 그들의 뇌는 주변환경을 정상적 방식으로 처리하지 못한다.

- PTSD 환자처럼 지속적으로 스트레스나 위험을 느끼면 신체는 계속해서 코르티솔을 방출함. 코르티솔 농도가 높아지만 특히 뇌의 해마에 신경독성 효과가 나타날 수 있따. 해마는 변연계의 일부로서 단기 및 장기기억을 위한 정보통합, 정보검색, 그리고 공간기억과 방향감각에 중요한 역할을 함. 정상노화란 어떤 질명의 악화도 없이 진행하는 노화. 이때 해마는 60세가 넘으면 변화가 일어나고 최종적으로 그 부피가 1-2% 미만으로 줄어든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어떤 사건을 기억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노인이 되면 PTSD 증상이 나타날 가능성도 커짐.  노인의 기억을 조절하는 뇌 부분은 젊은 사람들에 비해 이미 효율성이 떨어지는데 나이가 들면서 해마의 부피가 줄어들며 더욱 위험해짐. PTSD환자의 경우 이런 변화는 스트레스 증가에 따른 지속적 신경화학적 반응의 결과다. 
실제로 자기공명영상을 활용한 여러 연구에 따르면, 트라우마 경험은 PTSD 증상의 유무와 관계없이 해마의 부피 감소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남. 이는 트라우마 경험에 노출되는 동안 노출된 후에 기억을 조절하기 어려운 이유를 설명해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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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와 떨어져 있게 되면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데 이것이 뇌의 발달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태어나서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어미와 몇 시간 떨어진 동물이 다 자랐을 때 뇌를 조사해보니 그렇지 않은 동물과 비교했을 때 수용체의 수나 신경섬유의 활동에 명확한 차이가 있었던 것. 실제로 이런 새끼는 스트레스에 과민반응을 보임. 성장함에 따라 아이는 어머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만 공교롭게도 어머니와의 애착이 안정된 아이일수록 모험을 즐기고, 활발하게 바깥 세계를 탐색하며, 타인과 교류하려 한다. 애착대상에 대한 신뢰감이나 안도감이 아이가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데 든든한 방패가 되는 것. 이 방패막이 기능을 안전기지라고 부름. 애착이 안전된 아이는 사회성과 활동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지능도 높은 경향을 보임. 안전기지가 아이의 학습능력이나 사회적응 능력을 향상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

- 회피형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 부탁을 하거나 도움을 요청하는 경우가 없다. 타인에게 기대를 품을 수 없다는 생각이 강하기 때문. 함부로 약한 모습을 보이면 비난을 받거나 공연히 힘든 상황에 처할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인간에 대한 불신감을 갖고 있다. 그래서 문제나 사건이 생겨도 자신만의 힘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 만약 자기한계를 넘는 스트레스나 해결이 어려운 문제와 맞닥뜨리면 궁지에 몰려 자신을 소모하게 됨. 더 이상은 무리라는 판단이 설 때까지 계속 버티다가 갑자기 좌절해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에도 자신의 괴로운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호소하지 않고, 그냥 도망침으로써 자신을 지키려 하는 것. 어떻게든 참을 수 있을 때는 문제 따위 전혀 없다는 듯 태연한 표정을 짓는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도 이상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하지만 마음보다 몸이 먼저 비명을 질러서 두통이나 복통, 설사, 구토, 두근거림, 현기증 같은 신체증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많음. 안정형 인간은 이와 똑같은 스트레스 상황에 처했을 때, 다른 사람과의 관계나 접촉을 원한다. 타인이 전해주는 온기에서 안도감을 느끼려고 하는 것임. 하지만 회피형 인간 특히 방치당안 유형의 인간은 오히려 혼자가 되려 한다. 그들에게는 다른 사람의 도움조차 번잡스러운 일이 되고 만다. 최근 늘어나고 있는 회피형 인간 중에는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강한 지배를 받은 유형이 있는데, 이 유형의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지 못하거나 반대로 과도하게 의존하는 측면을 동시에 갖는다. 그래서 부모 밑에서 벗어나 자립하는 일이 어려워진다.

- 정서적 측면을 억제하는 회피형 인간의 성향이 장점이 되는 경우도 있음. 슬픈 장며이나 힘든 장면과 마주치더라도 냉정하고 쿨하게 대처가능. 그래서 일이나 취미에소 집중할 수 있다. 실제 회피형 인간은 정서적 문제와 얽히지 않는 일 쪽에서 능력을 잘 발휘함. 이런 회피형 인간의 특성은 또 다른 특성과도 연결됨, 그것은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것에서 편안함이나 즐거움을 맛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방치당한 회피형 인간도, 과도한 지배를 받은 회피형 인간도 마찬가지. 전자의 경우 인간관계를 즐기는 회로가 성장하지 못하고 후자의 경우에는 비난을 받거나 무리한 요구가 들어오지 않을까하여 긴장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타인과 함께 있으면 어색하거나 거북함을 느끼고 만다. 이렇듯 타인과 기분좋게 교류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를 드러내거나 감정 표현하는 것을 힘들어한다는 특징과도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 타인과 거리를 둠으로써 자신을 지키려 하는 것은 회피형인간의 기본전략이며, 이것은 자신의 안전이 위협받을 만한 상황일수록 강해짐. 실제로 배우자가 신상에 문제가 생겨 고통스런 표정을 드러낼수록 회피형 인간은 분노를 느기고, 부정적 반응을 보인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언뜻 보면 헌신적으로 행동하는 것 같지만, 그 경우에도 자연스러운 감정에 의해 그렇게 했다기보다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더욱 성가시게 되거나 헌신적인 척 하면 유리하게 일이 진행될 것 같다는 이해타산이 작용한 결과. 타인의 고통이나 괴로움에 대한 회피형 인간의 태도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공감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냉담, 무관심, 분노, 초조, 연민 등이다. 여기서의 연민도 상대방에게 감정이입하는 것이 아니라 우월한 자가 열등한 자를 내려다보면서 느끼는 감정의 성격을 띤다.

- 회피형 인간은 인간관계에서 득점을 쌓아 자신의 평가를 올림으로써 살아남는 전략은 쓸 수 없다. 일에서 성공하기 위해 믿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전문적 기능이나 실력뿐이다. 그래서 회피형 인간 중에 성공한 사람은 보통의 경우보다 훨씬 더 일에 엄격하고, 높은 기술과 실력을 갖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누구도 참견할 수 없을 만한 기능과 지식, 능력을 보이지 않으면 자신이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므로 타협하지 않고 실력을 키우는 사람이 많다.
- 적당히 인간관계르 얼버무리고 대충 사랑온 사람과는 달리 실력만큼은 진짜다.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철저히 그 둘 중 하나만 선태갛기 때문에 결과에 대해서도 엄격한 눈길을 보낸다. 모호한 태도는 납득하지 못한다. 실적을 명확히 하기 위해 수치에 얽매이는 측면도 있다. 주관적 평가보다 답이 확실한 쪽을 믿는 것이다.
이러한 특성은 실적과 숫자로 움직이는 자본주의 경영체제와는 잘 맞는다고 할 수 있다. 저서나 연고에 좌우되지 않는 회피형 인간의 냉철한 일처리는 오늘날 비즈니스 감각과 잘 맞는다. 그런 의미에서 완전한 회피형 인간은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회피형 인간의 특징을 갖고 있는 사람쪽이 관리자나 경영자로서 유리한 측면이 있다.

- 롤링이 작가로서 성공하기 위해 원고와 계속 씨름하고 있었을 때는 그 작품이 정말 성공할지, 아니 출판될 수 있을지조차 완전히 미지수였다. 그녀의 원고가 어떤 편집자의 눈에 띄지 않았다면, 그 편집자가 자신의 딸에게 그 원고를 읽어보라고 하지 않았다면 롤링은 이름도 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아마추어 작가 중 하나였을 것임. 하지만 만약 그녀가 실패했다 하더라도 자신의 가능성을 시험해본 것은 무의미한 일이 아니다. 가능성을 시험한 것 자체가 회피로부터 가능성을 시험한다는 것 자체는 회피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는 뜻. 그것이 사회의 기준과는 어긋난 일이라고 해도 오히려 그 자리에서 자신의 길을 발견할 수도 있다.

-  회피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삶의 주체성을 되찾는다는 말과 거의 동의어다. 그를 위한 첫걸음은 지금까지 피하기만 했던 문제와 마주하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이다. 그것은 완전한 회복을 위해 피해서는 안 되는 꼭 필요한 단계다. 회피에서 벗어날 때는 반드시 이 단계를 거쳐야 한다. 그것이 불만이나 분노, 절망 같은 것이라 해도 먼저 그것을 말하고, 자신이 상처받은 지점과 마주하는 것이 거꾸로 답답한 상황을 타개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 심리치료는 생겨난 증상만을 문제삼고, 그것을 줄여가는 것으로 대처하려 한다. 회피의 근저에 있는 원인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거기에서 이차적으로 파생된 불안이나 분노, 신경과민 같은 것을 안정제 등을 통해 억제시켜 버리는 것이다. 그 결과 일상의 고통은 완화되지만 근본적인 회복에서는 오히려 멀어진다. 회피하고 있는 상황 그대로 고정되어 버릴 뿐, 회피 자체를 벗어나는 방향으로는 가지 않는다.
물론 상처받은 체험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그저 한탄하고 절망과 슬픔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회복이 이루어질 수 없다. 이 작어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그동안 실패했다고 생각했던 일에도 긍정적인 측면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여기에 회복의 열쇠가 있다.

- 회피하는 습관에 빠져버린 사람의 뇌는 불안한 상상으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은 예기불안이라고도 하는데, 현실에서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하는 게 특징이다. 폭로요법은 예기불안에 빠진 사람이 현실에서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그 문제의 상황속으로 뛰어들어 가 스스로 만들어낸 공포를 극복하도록 해 준다.
이 요법을 행할 때는 우선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여 이야기하는 것부터 시작. 상처가 깊은 회피형 인간의 경우 그저 그걸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괴로워서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평정심을 잃기도 하지만, 그럴 경우에도 자신을 격려하면서 그 마음에서 도망치지 않고 계속 그 상황을 느껴봐야 한다. 본인이 도망치지 않고 맞설 수 있다면 공포와 불안은 점차 희미해지면서 상황을 극복하는 힘을 얻게 된다.

- 안전기지란 안정감을 회복시켜주는 존재. 한마디로 어느때든 괜찮다고 말해주는 존재다. 그 기본적인 태도는 공감을 바탕으로 한 응답이다. 상대가 원할 때 그 사람의 입장에서 응답해주는 것. 원하는 것을 무시하거나 거부하면 안정감에 상처를 입힌다. 또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거나 쓸데없는 참견을 하면 안정감이 자존감에 상처를 주고 만다. 어디까지나 그 사람의 의사와 페이스를 존중해주는 게 중요하다.

- 부모자식 관계나 부부나 연인관계에서 안전기지 역할을 해주는 쪽이 정상적으로 행동하지 못하는 이유느느 상대방을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이려고 하기 때문. 설령 자식이나 배우자라 해도 독립된 인격을 가진 존재로소 존중하고, 주체성을 침해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스스럼없는 관계라는 말과 안전기지는 동일어가 아니다. 상대방이 어쩔 수 없이 맞춰주고 있을 뿐, 속으로는 싫어하거나 성가셔하는 경우도 있다. 종기를 만지듯 하다는 표현은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지만 그런 정도의 신중함이 필요하다. 실제로 애착관계에 상처를 입은 사람은 그 상처가 곪은 것이나 마찬가지라서 아무렇게나 만지면 좋을 리 없다.

- 인생의 벽에 부딪히거나 궁지에 몰렸을 때에 잘 돌아보라. 현재 발등에 떨어진 문제만이 아니라 자신이 줄곧 방치하던 문제가 새삼슬 욱신거리는 경우도 많을 것이다. 자기 존재가 흔들릴  정도로 큰 사건을 당했을 때, 사람은 자신을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발아보며 일어서야 하는 상황에 몰리게 된다. 그것은 위기이지만 동시에 기회이기도 하다.
대지진이 나서 집이 거의 부서진 이후, 지금까지 방치했던 집의 결함을 파악하고 좀 더 견고한 집으로 고칠 기회로 삼듯, 인생에서도 지진과 같은 사건을 겪으면서 애착관계에서 비롯된 상처와 마주하고 그것을 복구할 기회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 회피하는 습관에서 벗어나는 일은 자신의 인생에 주체성을 되찾는 일. 그러나 모든 일이 자기 맘ㄷ로 될 만큼 인생은 단순하지 않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의 대부분은 우리 스스로의 의지와는 관계없는 무수한 인과의 사슬과 우연의 결과에 불과하다. 아무리 당신이 자신의 인생을 완벽하게 관리하려 해도 온갖 우발적 요소와 타인의 행동에 의해 영향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소망하는 것, 기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처해버리는 경우도 왕왕 있다.
우리는 인생의 아주 적은 부분만을 우리의 의지대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생각지도 못한 위기가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 찾아오는 경우도 있지만, 생각지도 못한 기회가 자신의 노력과는 관계없이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기회의 대부분은 그렇게 우연히 나타난다. 중요한 점은 기회가 왔을 때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을 거인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 운명이 자신에게 무엇을 시키려고 하는가, 그런 관점에서 상황을 되돌아보는 일은 의미가 있다. 그리고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느꼈다면 순순히 그것을 따라야 한다.
실패하지 않을까, 잘 안 되지 않을까, 폐를 끼치지는 않을까 싶어 겨우 찾아온 운명의 목소리에 귀를 막지 않아야 한다. 하늘의 뜻이라는 순간이 평생 몇 번인가는 있다. 그때는 일단 해보는 것이다. 해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다.
회피형 인간은 지금의 상황을 바꾸고 싶어도 바꿀 수 없다는 교착상태에 빠지기 쉽지만 외부에서 손을 당겨주면 의외로 움직인다. 만약 누군가가 손을 내민다면 그것에 순순히 매달려보자. 꼼짝도 않고, 아무것도 바꿔보려 하지 않는 것보다는 훨씬 재미있는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다.

- 결과는 실패라 하더라도 도전할 자유가 있다. 실패하는 결과에만 사로잡혀 살 것인가, 아니면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가능성이라는 과정을 음미하며 살아갈 것인가, 결국 인생은 결과에 의미가 있지 않다. 그 묘미는 과정에 있다. 도전에 있는 것이다. 그것을 피하면 인생이라는 과일을 맛보지 못한 채 썩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과일은 어차피 썩게 마련이다. 그러니 썩기 전에 먹는 게 무슨 문제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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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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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다양한 의류와 장신구를 몸에 걸치는 유일한 동물. 아이블 아이베스펠트는 세상의 다양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관찰을 통해 문화가 달라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의류와 장신구의 특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 보고한 바 있다.
그 중 하나가 위엄과 엄숙함을 드러내야 하는 상황에서 몸에 걸치는 의류, 장신구에서 보이는 어깨를 부풀려 강조하는 것이다. 그는 이런 현상의 이유로 현존하는 둥물 중 분류학적으로 인류와 가장 가까운 침팬지와 인류가 특정한 자세와 동작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꼽고 있다.
침팬지는 상대를 위협할 때 어깨를 추켜 올리고 어깨에 난 털을 곤두세워 부풀어 보이도록 강조. 오늘날 인류의 체모는 가늘어지고 짧아졌지만, 어깨에 난 털 모양을 분석해보면 침팬지와 동일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확인 가능. 인간의 자율신경이 흥분하여 공격적 기분이 되었을 때, 어깨에 탄 털이 어깨가 부풀어 보이도록 어깨 중심을 향해 곤두선다는 사실이 입증됨.
인류와 침팬지가 공통된 선조에서 갈라져 나온 약 600만년 전부터 현생 인류 호모 사피엔스에 이르기까지, 중간과정에 존재한 선조 인류종은 권위와 엄숙함을 드러내야 하는 상황에서 어깨 털을 세워 부풀린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어깨를 부풀린 상대방의 감정을 읽어야 하는 인지계는 부풀어 오른 어깨를 보면 상대방은 공격적인 기분이 되었다고 해석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덧붙이자면 이 어깨부풀리기 자세를 만드는 운동계와 거기에서 공격적인 기분을 감지하는 인지계는 유전적 프로그램에 따라 발달하는 형질로 여겨지고 있다.
체모가 옅어진 인류 역시 이와 같은 기능을 하는 운동계와 인지계는 남아 있기에, 위엄과 엄숙함을 어필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깨를 부풀려 강조하는 의류, 장신구를 착용하게 되었다.

- 남성이든 여성이든 상대에게 우호적인 신호를 보내려고 할 때는 저도 모르게 높은 목소리를 내게 된다. 애인이 서로의 귓전에 친밀하게 속삭일 때도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욱 높아진다고 알려짐. 실수한 부하가 상사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말을 건넬 때 역시 목소리는 높아짐.
한편 상대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을 때 사람은 목소리를 낮게 낸다. 위협하고 을러댈 때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좋은 예. 듣는 사람도 목소리 높이에 따라 상대방은 자신에게 우호적 감정을 품고 있는지, 적의를 품고 있는지를 무의식적으로 판단하게 된다.
예를 들어, 워싱턴대 패크리시아 쿨 연구팀의 연구에 의해 촉발된 일련의 연구에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밝혀짐. 미국과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의 부모들은 아기에게 말을 걸 때 목소리의 음정을 일부러 올리는 경향이 있으며, 아기는 높은 목소리를 들었을 때 웃는 빈도가 높아진다는 것.
사실 낮은 목소리가 적의의 신호로 작용하고 높은 목소리가 친근하고 온화한 감정을 드러내는 데 쓰이는 것은 사람말고도 많은 동물에게서 확인되는 현상. 개들도 사랑하는 주인을 기꺼이 맞이할 때는 높은 목소리로 짖고, 낯선 사람에게 적의를 표현할 때는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린다.
붉은사슴 수컷은 암컷을 둘러싸고 다른 수컷과 싸움이 붙었을 때 울음소리의 음정을 점점 낮춘다. 그리고 마지막에 상대방이 따라하지 못할 만큼 낮은 음정으로 운 수컷이 승자가 된다. 실제로 뿔을 부딪치며 싸우기 전에 패자가 더 낮은 목소리를 낸 개체가 몸이 크기 때문에 나는 이 개체에게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는 것. 원래 낮은 목소리는 몸이 크지 않으면 낼 수 없다. 몸이 큰 만큼 직접 싸울 때 유리하다는 것을 상대에게 과시하는 의미가 있다.

- 씨름, 야규, 축구와 같은 운동경기에서 관람객이 선수이름을 부르며 응원할 때, 가부키에서 배우 이름을 부르며 환호할 때도 목소리는 높아지는 경향이 있음. 목소리가 아닌 다른 예로는 콘서트장이나 운동경기장에서 응원할 때 삐이, 삐이하는 소리가 나는 호적을 불 때가 있는데, 이 소리 역시 음정이 높다.
박수 또한 친화적 특성인 높은 소리를 발생시킨다. 사람의 피부가 지닌 물리적 특성에 의행 양손바닥이 마주치면 짝! 하는 높은 소리가 난다. 
그렇다면 선수에게 불만이나 적의를 드러낼 때는 어떨까? 신발로 바닥을 치면서 탕탕 하는 낮을 소리를 내거나 우우하고 야유하는 낮은 목소리를 내게 된다.

- 마사타카 노부오 교수 연구팀에 의하면 유아의 음성 중에서도 특히 모음 음성과 억양이 올라가는 음성은 그 효과가 크다고 함. 이 역시 사람이라는 종에는 특정한 패턴의 소리자극을 받으면 그에 대응해 특정한 정보처리를 수행하는 뇌 속 신경회로가 유전적으로 갖추어져 있기 때문.
그리고 이런 선천전 인지회로는 영화효과음이나 클래식 음악에도 곧잘 이용됨. 예를 들어 영화의 스토리가 전개되다가 공포가 절정에 달한 장면에서는 비명처럼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고, 절정이 지나고 긴장이 완화되는 장면에서는 음정이 낮아지면서 수그러드는 느낌의 소리가 사용됨.
오르골과, 오키라니 소리도 비슷한 특징이 있다. 바로 어린이가 종알거릴 때 내는 소리의 특징이다. 힘이 많이 들어가 있지 않고 부드러우며 편안한 느낌이다. 리듬은 느린 편이고, 통 하고 튀는 듯한 첫 소리에 이어 평탄한 소리가 이어진다.
어린이가 종알거리는 소리는 그 소리를 듣는 사람에게 상대방이 천진난만하고 가녀린 존재라는 느낌, 순수하게 제 이야기에 몰입하고 있다는 느낌을 줌으로써 마음을 차분하고 편안하게 함. 내 생각에는 느리게 이어지는 오르골이나 오카리나 연주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뇌 속 인지신경회로를 작동시키고 있는 것 같다.

- 선글라스를 쓰면 눈과 눈 주위의 상태변화가 보이지 않음. 즉 고정된 표정은 '당신은 내가 굳이 에너지를 쓸만큼 중요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당신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메시지를 보냄. 무시하는 것과 비슷. 이것이 선글라스가  건방지다, 공격적이다, 와 같은 느낌을 주는 이유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자세도 결국 선글라스를 쓴 얼굴과 비슷한 효과. 주머니에 손을 넣은 자세는 곧 팔에서 힘을 빼고 편하게 쉬고 있는 상태. 에너지 사용을 줄이는 자세임. 따라서 타인 앞에서 주머니에 손을 넣는 행위는 '당신은 내게 있어 에너지를 사용하여 반응해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럴 필요가 없을 만큼 하찮은 사람입니다'와 같은 메시지를 준다.

- 경어, 존댓말, 높임말은 보통 쓰는 말보다 길고, 그만큼 발성하기 위해 여분의 에너지를 쓴다. 그 여분의 에너지 사용이 곧 상대에 대한 '나는 당신을 위해서라면 많은 에너지를 기꺼이 소비하겠습니다'. '나는 항상 당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된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I want to...'를 공손하게 말할 때는 'I would like to...'라고 한다. 대체로 존경어가 통상어보다 길게 되어 있다.
물론 사용된 단어나 문장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결과적으로 발화되는 문장이 길게 되어 있다는 것 자체도 중요하다. 지역과 문화의 차이에 좌두되지 않는 인류 보편의 '발화의 길이-에너지의 크기=상대의 이익을 증대하려는 의도'라는 인지경향이 존재한다는 것, 발화의 길이로서 그러한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 동물에 대한 반응의 남녀차를 만들어내는 주된 요인으로서 내가 생각한 것은 남녀의 수렵채집 생활에 대한 적응이다. 특히 남성의 사냥에 대한 정신적이 적응, 여성의 육아에 대한 정신적인 적응이다.
포유류 같은 동물이 눈앞에 있을 때, 남성은 종종 사냥을 관장하는 뇌의 신경영역이 강하게 활성화되어 동물을 쫓거나 자신이 원하는 장소로 유도하고 싶은 충동이 끓어오른다. 한편 여성은 육아에 관계된 뇌의 신경영역이 더욱 강하게 활성화되어 스킨십을 하거나 보살피고 싶은 충동이 끓어오른다. 이는 충동의 성차가 염소나 햄스터 등에 대한 행동패턴의 남녀차이를 초래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 우리가 외부에서 받은 자극을 오감을 통해 정보로서 뇌 속으로 전달할 때는 크게 두갈래 경로가 이용된다. 첫번째는 이를테면 눈으로 들어온 시각정보가 시상이라는 곳까지 옮겨진 뒤 대뇌를 경유하지않고 편도체로 보내지는 경로. 두번째는 눈으로 들어온 시각정보가 시상이라는 곳까지 옮겨진 뒤 거기에서 일단 대뇌로 보내지고 그 다음에 편도체로 보내지는 경로다. 시각정보가 아니더라도 청각이든, 후각이든 기본적으로는 동일한 경로가 존재.
첫번째 경로는 그때그대 일어나는 사태에 재빨리 대처하기 위해 갖추어진 경로라고 생각하면 됨. 세부적 정보는 분석되지 않고 대략적 특징만 인식됨. 만약 그 특징이 자신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정볼면, 바로 그 분석결과를 편도체에 보내서 그에 따른 감정을 발생시키고 행동을 일으키거나 행동을 준비하게끔 한댜.
두번째 경로에서는 들어온 정보를 대뇌에서 이제까지의 기억 등을 종합하여 조금 더 자세히 분석한다. 그리고 그 분석결과를 편도체에 보내는데, 경우에 따라서 편도에체서 긴급하게 발생시키고 있는 감정을 필요없다고 판단하여 소실시키기도 한다. 둘 다 호모 사피엔스가 생존하는 데 있어 중요한 경로다.

- 동물이 포식자 주위에 머무르며 경계행동을 거듭하는 것을 모빙이라 하는데, 조류와 포유류에게서 곧잘 관찰됨. 모빙은 특히 조류의 경우에 잘 발달됨. 예를 들어 둥지 근처에서 여우를 발견한 갈매기는 무리지어 울며 여우 주변을 끊임없이 날아다닌다.
동물학자 한스 크루크의 연구에 따르면 갈매기는 여우 옆에 갈매기 시체가 있을 때 평소보다 더욱 활발하게 모빙을 수행한다고 함. 시체가 있다는 사실은 그 여우가 또 다른 갈매기를 습격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뜻하고, 따라서 갈매기는 그 여우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얻고자 하는 것이라 추측.
자신에게 위험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는 상대에게 가까이 다가가 유심히 관찰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도 이익이 되는 행동. 특히 사람이 진화해온 자연환경 속에서는 다른 사람을 습격한 동물, 다른 사람이 먹고 죽을 뻔한 식물, 다른 사람이 사고를 당한 자갈밭과 가파른 언덕 등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은 생존에 있어 중요한 행동임.
이렇게 생각하보면 우리가 현대사회의 위험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는 대상, 즉 화재, 싸움, 사고, 살인현장을 보고싶어 하는 충동은 다른 동물의 모빙행위와 동일한 기능(관찰해서 정보를 얻는 기능)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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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심리 2025. 2. 19. 07:04

- "성공을 목표로 삼지 말라. 성공을 목표로 삼고, 그것을 표적으로 하면 할수록 그것으로부터 더욱더 멀어질 뿐이다. 성공은 행복과 마찬가지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이다. 행복은 반드시 찾아오게 되어 있으며, 성공도 마찬가지다. 그것에 무관심함으로써 저절로 찾아오도록 해야 한다. 나는 여러분이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소리에 따라 확실하게 행동할 것을 권한다. 그러면 언젠가는, 이야기하건대 언젠가는! 정말로 성공이 찾아온 것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성공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 이 세상에는 사람의 이성을 잃게 만드는 일이 있는가하면 더 이상 잃을 이성이 없게 만드는 일도 있다. (레싱)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비정상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너무 정상적이다. 심지어 나와 같은 정신과 의사들도 비정상적인 상황, 예컨대 정신병원에 수용된 상태라거나 평소보다 비교적 정상적이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을 때는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자신이 수용소에 들어오게 된 상황에 대해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 역시 그들의 비정상적인 정신상태를 반영한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따지자면 이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으로, 어떤 주어진 상황에 대한 전형적 반응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반응들은 며칠이 지나면서 바뀌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첫번째 단계에서 두 번째 단계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 다음 단계는 상대적 무감각 단계로, 정신적으로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감정과는 별도로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으면서, 그 고통을 약하게 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무엇보다 먼저 찾아오는 것은 집과 가족에 대한 끝없는 그리움이다. 이 그리움은 너무나 간절해서 그리워하는 데 자기 자신을 완전히 소진할 정도가 된다.
그런 다음 혐오감이 찾아온다.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혐오감, 심지어 그저 생긴 모양에서도 혐오감을 느낀다.
수용자 대부분에게는 줄무늬 수의가 입혀졌다. 허수아비나 어울릴 듯한 넝마같은 옷이다. 수용소 막사와 막사 사이는 오물로 뒤덮여 있었는데, 오물을 치우려 하면 할수록 더 많은 오물을 묻혀야 했다. 수용소에 처음 들어온 사람들은 화장실을 청소하고 시궁창의 오물을 치우는 일에 배정됐다. 늘 있는 일이지만 땅이 울퉁불퉁하기 때문에 오물을 버리러 가는 동안 똥물이 얼굴에 튀기도 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싫은 기색을 보인다거나 얼굴에 묻은 똥을 닦아내려고 하면 카포가 가차 없이 주먹질을 해댔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사람들 사이에서는 어떤 일에 대해 정상적 반응을 보이지 않는 현상이 가속화됐다.

- 수용소에서는 신체적으로나 지적으로 원시적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지만, 영적인 생활을 더욱 심오하게 하는 것이 가능했다. 밖에 있을때 지적인 활동을 했던 감수성 예민한 사람들은 육체적으로는 더 많은 고통을 겪었지만 정신적 측면에서 내면의 자아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비교적 적게 손상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혹한 현실로부터 빠져나와 내적인 풍요로움과 영적인 자유가 넘치는 세계로 도피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별로 건강해보이지 않는 사람이 체력이 강한 사람보다 수용소에서 더 잘견딘다는 지극히 역설적인 현상도 이것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 강제수용소에 예술 비슷한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워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예술뿐만 아니라 유머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더욱더 놀랄 것이다. 비록 그 흔적이 아주 희미하고 몇 초 혹은 몇 분동안만 지속되지만, 유머는 자기보존을 위한 투쟁에서 필요한 또 다른 무기였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유머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능력과 초연함을 가져다준다.

- 강제수용소 수감자들이 지니고 있던 전형적인 심리적 특징에 관한 문제를 정신의학적인 측면에서 소개하고, 정신 병리학적으로 설명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독자들은 인간이 철저하게 그리고 필연적으로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됐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자유는 어떤가? 어떤 주어진 환경에 대한 사람들의 행동과 반응에 아무런 정신적 자유도 없단 말인가? 우리가 믿고 있는 이론, 즉 인간은 여러 조건과 환경적 요인(생물적, 심리적, 사회적 성격으로 이루어진)이 만들어낸 하나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일까? 인간은 이런 여러 요소들에 의해 우연히 만들어진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강제수용소라는 특별한 상황에서 수감자들이 보인 반응이 인간은 주변환경의 영향을 피할수 없다는 이론을 입증해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 환경에 직면한 인간에게는 자기행동을 선택할 자유가 없단 말인가?
이론은 물론, 내가 직접 체험한 것을 통해서도 나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내릴 수 있다. 수용초 체험으로 나는 수용소에서도 사람이 자기행동의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을 입증해 주는 예, 즉 무감각 증세를 극복하고 불안감을 제압한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가혹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받는 환경에서도 인간은 정신적인 독립과 영적인 자유의 자취를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강제 수용소에 있었던 우리들은 막사를 지나가면서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마지막 남은 빵을 나누어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물론 그런 사람이 아주 극소수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다음과 같은 진리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함. 그 진리한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 있어도 단 한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 수용소에서는 항상 선택해야 했다. 매일같이, 매시간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찾아왔다. 그 결정이란 당신으로부터 자아와 내적인 자유를 빼앗아 가겠다고 위협하는 저 부당한 권력에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판가름하는 것이었다. 그 결정은 당신이 보통 수감자와 같은 사람이 되기 위해 자유와 존엄성을 포기하고 환경으 노리개가 되느냐 마느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볼때,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이 보이는 심리적 반응은 어떤 물리적, 사회적 조건에 대한 단순한 표현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수면부족, 식량부족, 다양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 환경이 수감자를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할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결국 최종적으로 분석해보면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근본적으로는 어떤 사람이라도, 심지어는 그렇게 척박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강제수용소에서도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없게 되는 것이다.

- 수용소에는 남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과 친해진 후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이 말을 자주 머릿속에 떠올렸다. 수용소에서 그들이 했던 행동, 그들이 겪었던 시련과 죽음은 하나의 사실, 즉 마지막 남은 내면의 자유를 결코 빼앗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언해 준다. 그들의 시련은 가치 있는 것이었고, 그들이 고통을 참고 견뎌낸 것은 순수한 내적 성취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삶을 의미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다.

- 사람이 자기 운명과 그에 따르는 시련을 받아들이는 고정, 다시 말해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아가는 과정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삶에 보다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폭넓은 기회를 제공함. 그 삶의 용감하고, 품위있고, 헌신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아니면 이와는 반대로 자기 보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고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여기에 힘든 상황이 선물로 주는 도덕적 가치를 획득할 기회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선택권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 그리고 이 결정은 그가 자신의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느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기도 함.
이런 생각이 너무 비현실적이고 실제 삶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바란다. 물론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그렇게 지고한 도덕적 수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수감자 중에서 아주 적은 사람만이 충만한 내면의 자유를 지키고 시련을 견딤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치를 얻었다. 하지만 단 한가지 예만으로도 인간이 지닌 내면의 힘이 외형적인 운명을 초월해  그 자신의 존재를 높인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데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이 비단 강제 수용소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도처에서 인간은 운명과 시련을 통해 무엇인가를 성취할 수 있는 기회와 만난다.

- finis라는 라틴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끝, 완성을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이루어야 할 목표를 의미. 자신의 일시적인 삶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사람은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를 세울수가 없다. 그는 정상적인 삶을 누리는 사람과는 반대로 미래를 대비한 삶을 포기한다. 따라서 내적인 삶의 구조 전체가 변하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삶의 다른 영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퇴행현상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실직자가 이와 비슷한 처지라 할 수 있다. 그의 삶 자체가 일시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미래를 대비할 수 없고, 목표를 세울 수도 없다. 실직한 광부를 대상으로 한 연구보고서를 보면 그들이 아주 기이한 형태의 변형된 시간감각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이것은 실직이라는 특별한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수감자 역시 기이한 시간감각을 경험했다. 시시때때로 자행되는 폭력과 배고픔이 하루를 꽉 채우고 있는 수용소에서는 하루라는 작은 단위의 시간은 영원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보다 긴 단위의 시간, 예를 들어 일주일은 아주 빠르게 지나간다. 수용소에서 내가 한번은 동료에게 하루가 일주일보다 더 길게 느껴진다고 이야기하자, 그 친구도 내 말에 동의한다고 했다. 우리의 시간감각이 얼마나 역설적인가!

-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위대한 영적인 고지에 오를 수 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세상일에서의 실패와 죽음을 통해서도 이런 위대함을 성취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그들은 평범한 환경에서는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그런 위대한 성취를 이루어낸다. 평범하고 의욕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비스마르크의 이 말을 들려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인생이란 치과의사 앞에 있는 것과 같다. 그 앞에 앉을 때마다 최악의 통증이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새 통증이 끝나 있는 것이다."
강제수용소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는 인생의 진정한 기회가 자기들에게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곳에도 기회가 있고 도전이 있었다. 삶의 지침을 돌려놓았던 그런 경험의 승리를 정신적 승리로 만들 수도 있었고, 그와는 반대로 도전을 무시하고, 다른 대부분의 수감자처럼 무의미하게 보낼 수도 있었다.

- 매일같이 시시각각 그런 하찮은 일만 생각하도록 몰아가는 상황이 너무 역겹게 느껴졌다. 나는 생각을 다른 주제로 돌리기로 했다. 갑자기 나는 불이 환히 켜진 따뜻하고 쾌적한 강의실의 강단에 서 있었다. 앞에서 청중들이 푹신한 의자에 앉아 내 강의를 경청하고 있었다. 나는 강제 수용소에서의 심리상태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순간 나를 짓누르던 모든 것들이 객관적으로 변하고, 일정한 거리를 둔 과학적 관점에서 그것을 보고 설명할 수 있게 됐다. 이런 방법을 통해 나는 어느 정도 내가 처한 상황과 순간의 고통을 이기는 데 성공했고, 그것을 마치 과거에 이미 일어난 일처럼 관찰할 수 있었다. 나 자신과 문제는 내가 주도하는 흥미진진한 정신과학 연구대상이 됐다. 스피노자가 그의 '윤리학'에서 무엇이라고 했던가?
감정,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그 순간에 고통이기를 멈춘다.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수감자는 불운한 사람이다.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과 더불어 그는 정신력도 상실하게 된다. 그는 자기 자신을 퇴화시키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퇴락의 길을 걷는다. 일반적으로 이런 현상은 아주 갑자기 위기라는 형태를 띠고 일어난다.

- 인간의 정신상태(용기와 희망 혹은 그것의 상실)와 육체의 면역력이 얼마나 밀접한 연관이 있는지 아는 사람은 희망과 용기의 갑작스런 상실이 얼마나 치명적 결과를 초래하는지 이해할 것이다. 내 친구의 죽음을 초래한 결정적 요인은 기대했던 해방의 날이 오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그는 몹시 절망했으며, 잠재해 있던 발진티푸스균에 대항하던 저항력이 갑자기 떨어진 것이다. 미래에 대한 믿음과 살고자 하는 의지는 마비됐고, 그의 몸은 병마의 희생양이 됐다. 결과적으로 꿈속 목소리가 했던 말이 맞기는 맞았던 것이다.
내가 이 경우를 통해 관찰하고 도출해낸 결론은 후에 수용소 주치의에게 들었던 말과도 일치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44년 성탄절부터 45년 새해에 이르기까지 일주일간 사망률이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추세로 급격히 증가했다는 것이다. 주치의는 이 기간에 사망률이 증가한 것은 보다 가혹해진 노동조건, 식량사정 악화, 기후변화, 새로운 전염병 때문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대부분의 수감자들이 성탄절에는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희망적인 소식이 들리지 않자 용기를 잃었으며 절망감이 그들을 덮쳤다. 이것이 그들의 저항력에 위험한 영향을 끼쳤고, 그중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기에 이른 것이다.

- 살아야 할 이유
수용소에서 정신력을 회복시키려면 그에게 먼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는 데 성공해야 한다. 니체가 말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 만약 어떤 사람이 시련을 겪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 시련을 자신의 과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유일한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낼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질 수도 없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 기회다.

- 시련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명백하게 밝혀지면서 우리는 수용소 안에서 자행되는 폭력을 무싷거나 거짓 상상을 하거나 억지로 만들어낸 낙관적인 생각을 즐기는 것으로 그것이 주는 고통을 감소시키려는 시도를 하지 않게 됐다. 시련으로부터 등을 돌리기를 원하지 않았다. 시련 속에 무엇인가 성취할 수 있는 기회가 숨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릴케가 '우리가 완수해야 할 시련이 그 얼마인고'라는 시를 쓴 것도 아마 시련속에 이런 기회가 숨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릴케는 마치 작업을 완수한다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이 시련을 완수한다라고 했다. 우리에게는 완수해야할 시련이 너무나 많았다. 따라서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나약해지지 않고, 남몰래 눈물 흘리는 일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고통과 대면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눈물 흘리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눈물은 그 사람이 엄청난 용기, 즉 시련을 받아들일 용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그것을 깨닫는다.

- 갇혀 있다가 석방된 죄수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을 정신의학적 용어로 이인증이라 한다. 모든 것이 꿈처럼 비현실적이고, 있을 법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그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지난 몇 년간 우리가 얼마나 많이 꿈에게 사기를 당해왔던가! 자유의 날이 와서 석방돼 집으로돌아가고, 친구와 인사를 나누고, 아내를 포옹하고, 테이블에 앉아서 그동안 우리가 겪었던 일들을 모두 이야기하는 꿈, 그런 꿈을 꾸었다. 오히려 너마나 자주 꾼 경향이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호루라기 소리가 들린다.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그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자유의 날을 맞은 그 꿈도 끝이 나고 만다. 이제 그 꿈이 지금 실현됐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로 그 꿈을 믿을 수 있을까?

- 수용소에 있을 때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세상에 나가도 우리가 그동안 겪었던 시련을 보상해 줄 만한 속세의 행복은 없을 것이라고, 당시 우리가 바라던 것은 행복이 아니었다. 행복을 바라면서 스스로 용기를 얻고, 우리가 겪는 시련과 희생과 죽음에 의미를 부여했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불행을 견딜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적지 않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이런 환멸현상은 극복하기가 아주 어려운 것이며, 나같은 정신과 의사도 도와주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낙담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작극을 받는다. 
지금 이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언젠가는 그때를 돌아보며 자기가 그 모든 시련을 어떻게 견뎠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날이 올 것이다. 마침내 해방의 날이 찾아와 모든 일들이 아름다운 꿈처럼 여겨진 것과 같이 수용소에서 겪었던 모든 시련들이 언젠가는 하나의 악몽으로 생각될 날이 올 것이다.
살아 돌아온 사람이 시련을 통해서 얻은 가장 값진 체험은 모든 시련을 겪고 난 후 이 세상에서 신 이외에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경이로운 느낌을 갖게 된 것이다.

- 사람은 어느정도 긴장 상태에 있을 때 정신적으로 건강하다. 그 긴장이란 이미 성취해 놓은 것과 앞으로 성취해야할 것 사이의 긴장, 현재의 나와 앞으로 돼야 할 나 사이에 놓여 있는 간극 사이의 긴장이다. 이런 긴장은 인간에게 본래부터 있는 것이고, 정신적으로 잘 존재하기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내면에 잠재된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도던장을 던지는 일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야만 그동안 숨어 있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를 일깨울 수 있다.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마음의 안정 혹은 생물학에서 말하는 항상성, 즉 긴장이 없는 상태라고 흔히 말한다. 나는 정신건강에서 이것처럼 위험천만한 오해는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있는 목표, 자유의지로 선택한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던 긴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성취해야 할 잠재적 의미를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성이 아니라 정신적인 역동성이다. 말하자면 한쪽 극에는 실현돼야 할 의미가, 다른 극에는 의미를 실현시킬 인간이 있는 자기장 안의 실존적 역동성이다.
이것이 정상적인 상황에서만 유효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신경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 더 효력이 있다. 낡은 아치를 튼튼하게 할 때, 건축가는 오히려 아치에 얹히는 하중을 늘린다. 그래야만 아치를 구성하고 있는 각 부분이 서로 잘 밀착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환자의 정신건강을 증진시키려는 심리요법가는 삶의 의미를 갖도록 지도하는 과정에서 환자 마음에 어느 정도 긴장을 유도하는 것을 주저해서는 안된다.

- 삶에서 마주치는 각각의 상황이 한 인간에게는 도전이며, 그것이 그가 해결해야할 문제를 제시한다. 때문에 실제로는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 바뀔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물어서는 안된다.그보다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짐으로써만 삶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오로지 책임감을 갖는 것을 통해서만 삶에 응답할 수 있다. 

- 존재의 본질
로고테라피에서 책임감을 강조한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로고테라피 행동강령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인생을 두번째로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지금 당신이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번째 인생에서 이미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 이제 우리는 삶의 의미란 끊임없이 변하지만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로고테라피에 의하면 우리는 삶의 의미를 세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
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 인간존재가 본질적으로 일회적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있는 로고테라피는 염세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인 것. 염세주의자는 매일 같이 벽에 걸린 달력을 찢어내면서 날이 갈수록 그것이 얇아지는 것에 두려움과 슬픔으로 바라보는 사람과 비슷하다. 반면 삶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사람은 떼어낸 달력 뒷장에 중요한 일과를 적어놓고, 그것을 순서대로 깔끔하게 차곡차곡 쌓아놓는 사람과 같다. 그는 거기에 적혀 있는 풍부한 내용들, 그동안 충실하게 살아온 삶의 기록들을 자부심을 갖고 즐겁게 반추해볼 수 있다. 자신이 늙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것이 그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될까? 젊은이들을 보면서 부러워하거나 잃어버린 자신의 청준에 대해 향수를 가질 이유가 있을까? 무엇 때문에 그가 젊은이를 부러워하겠는가? 그 젊은이에게 놓여 있는 잠재 가능성 때문에? 아니면 그가 지닌 미래 때문에? 천만의 말씀. 그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가능성 대신에 나는 내 과거속에 어떤 실체를 갖고 있어. 내가 했던 일, 내가 했던 사랑뿐만 아니라 내가 용감하게 견뎌 냈던 시련이라는 실체까지도 말이야. 이 고통들은 내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지. 비록 남들이 부럽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지만 말이야.

-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해 '네'라고 대답하는것. 어떤 상황에서도,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이다.
또한 이 말은 인간이 삶의 부정적 요소를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창조적 능력을 갖고 있다는 전제가 되기도 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중요한 것은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것읻. 최선은 라틴어로 옵티멈이라고 하는데, 내가 비극 속에서의 낙관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낙관은 비극에 직면했을 때 인간 잠재력이 첫째 고통을 성취와 실현으로 바꾸어 놓고, 둘째 죄로부터 자기 자신을 발전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며, 셋째 일회적인 삶에서 책임감을 가질 수 있는 동기를 끌어낸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명심해야 한다. 낙관적인 생각은 명령이나 지시를 받아 생기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모든 가능성과 모든 희망에 대해 가리지 않고 낙관적이어야 한다고 강요할 수는 없다. 희망에 적용되는 것은 나머지 두 가지에도 적용되는데, 말하자면 믿음과 사랑도 명령하거나 지시할 수 없다는 말이다.
유럽 사람의 눈에는 미국문화가 인간에게 행복하기를 끊임없이 강요하고 명령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행복은 얻으려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 사람이 행복하려면 행복해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일단 그 이유를 찾으면 인간은 저절로 행복해진다. 알다시피 인간은 행복을 찾는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내재해 있는 잠재적 의미를 실현시킴으로써 행복할 이유를 찾는 존재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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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빅터 프랭클은 죽음만이 존재하는 듯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그곳에서 그는 살고 죽는 문제가 육체적 힘이 아닌 포기하지 않는 마음에 달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항상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 하지만, 그것을 삶에게 물어서는 안된다. 반대로 자신의 삶에게 그 대답을 해주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해야할 일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무기력가 패배주의, 분노와 혐오, 고립과 외로움... 오늘날 청년들은 세상의 부침 속에서 다양한 고통과 함께 끝없는 좌절감에 시달리고 있다. 때로는 절벽 끝에서 선 것처럼 막막하겠지만, 삶을 지속해야할 이유를 찾는다면 언제나 희망은 있다. 이제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자신의 인생을 향해 말해줄 차례다.

- 미국 철학자 휴버트 드레이퍼스는 현대를 무기력의 시대라 칭함. 전 세계적 경제위기 속에서 젊은이들은 노력해도 안된다는 생각 끝에 노력의 당위성을 부정하기에 이름. 시간에 쫓기고, 일에 치여 열심히 사는 듯하지만 사실은 반복하는 습관처럼 그냥 살아가고만 있는 사람이 부지기수. 무슨 일에도 흥미가 생기지 않다가 점점 주변의 모든 것에 무관심해짐. 그리고 마침내 삶의 이유마저 잃어버림.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감정을 되찾는 일이 우선이다. 나는 무기력한 사람들을 상담할 때 생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무조건 살아야 한다고 설득하기보다는 그 혹은 그녀들이 무뎌진 감정의 촉을 다듬을 수 있도록 돕는다. "'나는 지금 어떤가', '지금 어떤 감정이 올라오는가'를 스스로 끊임없이 묻고 답하세요'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회복할 것을 주문한다.

- 아무리 기운 내라고 해 봤자 없던 기운이 솟아나지는 않는다. 마구 다그친다고 해서 사라졌던 의욕이 돌아오지 않는다. 무기력한 사람들이 먼저 튜브를 찾아 바다에 가는 법은 없다. 시원한 물이 몸에 닿는 느낌, 그 상쾌한 기분과 만족감이 떠오를 때에야 바다에 가고 싶어지는 것. 나도 모르게 잃어버렸던 혹은 일부러 잘라냈던 감정을 되살리는 작업이 선행되어야만 삶의 생생한 순간을 느끼고 살고자 하는 욕구가 생겨남.
슬픔과 불쾌함, 서러움과 같이 부정적이라고 생각되는 감정조차도 정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 기쁠 때는 이런 감정이, 슬플 때는 또 저런 감정이 생기는구나, 파악하게 되면 각각의 감정에 따라 춤을 출 수 있게 된다. 춤을 춘다는 것은 기쁜 일이 있을 때 충분히 기뻐해서 그 감정을 강화한다는 뜻. 물론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그 다음에는 복잡다양한 감정의 파노라마를 얇게 조각내서 원하는 대로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 미국 정신의학자 머레이 보웬은 이처럼 한 사람이 자신의 부모와 정서적 관계를 끊는 행위를 정서적 단절이라 명명. 가족이라는 공동체에서 한 사람의 감정은 다른 구성원에게 전이되기 마련. 특히 부모의 감정이 자식에게 미치는 영향은 강력함. 예컨대 엄마가 우울하면 자녀도 긴장과 불안을 느끼게 됨. 자식은 때가 되면 부모로부터 감정과 사고가 분리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사람의 경우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할 것 같은 두려움에 부모와 물리적이거나 심리적 거리를 두려 하는 것임. 이런 정서적 단절 역시 오늘날 청년들의 사회적 고립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임.

- 성격이란 그 사람만의 독자적이고 일관된 표현방식, 그리고 사고체계와 신념을 의미. 이런 복합적인 것들이 한데 모여 타인에게 보이는 것이 한 사람의 성격이다. 대인관계에서 오는 갈등은 보통 잘못되고 삐뚤어진 이 성격이란 것에서 문제가 빚어져 발생함. 선택적 오류를 범하거나, 과잉된 일반화를 보인다거나, 편향된 시각을 갖는 등 건강하지 않은 성격은 본인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힘들게 함. 반대로 건강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면 세상의 갈등은 참 많이 줄어들 수도 있을 것임. 그렇다면 건강한 성격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아들러는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해나가는 것이 건강한 성격이라 설명. 융은 개성화를 추구해 가는 것이라 했으며, 프로이드는 자신이 가진 에너지를 잘 분배하는 것이라고 함. 매슬로우는 자아실현을 하는 인간을, 빅터프랭클은 자아초월적 삶을 사는 인간을 건강한 성격, 건강한 인간이라 말한다. 여기서 빅터 프랭클이 말한 자아초월적 인간이란 지금 나의 모습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잠재적 능력들을 발견하고 한 단계 발전시키는 것. 여러 심리학자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결국 건강한 성격이란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내면 깊숙이 스스로를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을 의미.

-  시지프 신화에서 까뮈는 어떤 희망도 없이 바위만 굴리고 있는 시지프의 삶에서 불현든 희망을 발견한다. 이 끔찍한 삶을 끝내지도, 자신을 버리지도 않는 시즈프를 보면서 까뮈는 그에게 성실성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는 살아 있는 동안 영원이 바위를 굴리는 이 부조리함을 묵묵히 수행하는 시지프를 통해 역설적으로 구원을 얻는다.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을 회피하기보다 바위 굴리는 일의 괴로움을 온몸으로 느끼며 그 안에서 다시 생의 열정을 얻는다.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 불행한 시지프, 영원한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할 시지프는 그렇게 다시 우리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그래비티의 스톤박사가 눈앞에서 죽어가는 동료를 보고도, 광활한 우주에 홀로 남아 떨어지는 운석 앞에서도 끝까지 삶을 포기하지 않은 것은, 시련을 온몸으로 버티면서 내면에 잠재된 삶의 의지를 찾아냈기 때문. 우리에게도 영화제목은 중력처럼 끊임없이 발을 땅으로 끌어당기는, 살아가려는 의지가 깊숙이 존재함. 홀로 남겨저 바위를 들어올리고, 운석과 싸우는 일생을 산다는 것은 정말이지 사무치게 외로운 일이다. 그리고 누구나 그런 삶을 산다. 하지만 버티고 또 버티는 순간, 그것이 바로 삶을 살아내는 방식임을 깨닫게 될 것임. 길고긴 인생이란 레이스를 포기하지 않고 그간 살아왔다는 것. 그 자체로 우리는 완주한 것이 된다. 그러니 우리 모두 제발 살아주길 바란다.

- 빅터 프랭클은 이 세상이 성취해야 할 의미로 가득 차 있다고 믿었다. 삶의 의미를 찾고 의미있는 삶을 선택하는 것은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 삶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며, 그 책임을 질 사람은 오직 본인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갇혀 남의 기준대로 사는 데 익숙하다. 비교로 인한 박탈감, 강하고 잘나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동안 알게 모르게 스스로를 학대한ㄷ.
책임이 두려워 선택을 회피하고 삶을 방관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생의 주인공이 되지 않으면 책임은 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기가 이룬 성과마저 온전히 누릴 수 없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을 깨달아 추구할 때야말로 더 나은 삶을 향한 길이 펼쳐진다. 

- 가끔 우리는 자신에게 한없이 냉정하고, 타인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울 때가 있음. 그렇게 좋은 사람이 지금 자신에게 가장 필요함. 그때의 나는 너무 어렸다. 괜찮다, 지금은 다 괜찮다, 라고 말하면 등을 두드려줄 지금의 나를 기다리고 있다. 마음껏 울지 못했던 나를 보듬고 울고 싶을 때까지 우는 것. 그것이 현재의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이는 전혀 유치한 일도 아니고, 당시의 내가 부족해서 나타난 감정도 아니다.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했던 그때의 심각하고 아픈 상처가 남아 있어 그런 것일 뿐이다.
이제 살면서 문득, 과거의 나를 만나더라도 놀라거나 화가 난다는 이유로 냉정하게 그냥 지나치지 않도록 하자. 침착하고 담담하게, 그 나이의 나와 직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충분히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이다. 과거의 나를 알아봤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미 상처를 치유할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남에게 한없이 너그러운 손을 바로 지금 스스로에게 내밀어 보는 것은 어떨까?

- 가끔은 인생이 일인극 같다는 생각을 한다. 가족도, 친구도, 심지어는 나를 스쳐가는 엑스트라 한 명 없이 혼자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에 외로움이 찾아오기도 한ㄷ. 어두컴컴한 객석을 쳐다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어쩌다 슬럼프에 빠지면 다 집어치우고 싶기만 하다. 그럴 때는 잠시 쉬어도 좋다. 연극에는 2막도 있고, 3막도 있다. 언제든 숨을 돌렸다가 다시 시작하면 된다. 다만 그 무대가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만 잊지 않았으면 한다. 절망의 순간에도 남은 인생을 마저 살아가야 하듯 결국은 연극을 마치는 것도 주인공의 역할 아니겠는가. 모노드라마가 끝나면 텅 비어 있는 줄로만 알았던 객석에서 박수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주인공은 박수를 받을만한 자격이 있다.

-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자신의 환경을 바꿀 수는 없다. 바꿀 수 있는 것은 주어진 조건에 대한 자신의 마음가짐, 태도뿐이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빅터 프랭클이 말하는 삶의 의미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유일무이한 것이라는 점. 그는 '삶의 의미를 찾아서'라는 저서를 통해 '유일무이하다는 것은 어떤 상황이 지닌 특성일 뿐만 아니라 인생 전체의 특성'임을 강조. 인생은 유일무이한 상황들의 연속이며,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본성에 있어서 그리고 존재에 있어서 모두 유일무이한 존재다. 개인이 유일무이한 존재고 그들 각자의 삶의 유일무이하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다른 사람과의 비교란 아무런 의미도 없어진다.
이렇게 다시, 우리는 빅터 프랭클의 이론으로 돌아가게 된다. 다른 사람과 삶을 바라보며 끝없이 비관할 것인가, 어떻게든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할 것ㅇ니가, 그 갈림길에 서 있다면 우리는 후자를 택해야 한다.

- 언젠가 내 마음에 울림을 준 시 한 편을 발견한 적이 있다. 시의 화자는 '항상 잘해주고 기다려주는 나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당신'에게 '왜 나는언제나 당연한 사람인가' 묻는다. 당신은 어떤가? 당연한 사람인가? 어째서 사람 사이에 당연한 것이 있을 수 있는가? 사람들은 흔히 주는 기쁨이 받는 기쁨보다 크다는 말을 한다. 사랑하는 사이뿐 아니라 모든 관계에 있어 이 말은 마치 진리처럼 여겨진다.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주는 일은 분명 아름다운 일이지만 오로지 주기만 하는 것은 자신을 가장 빠르게 방전시키는 소모적인 행위다. 세상에 일방적인 관계는 없으며, 있다고 해도 옳은 것이 아니다.
걷다 쓰러질 만큼 무거운 짐을 고스란히 안고 가는 사람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 내가 더 사랑하니까, 그나마 내 형편이 제일 나으니까, 이렇게 할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까..., 그 어떤 이유로든 당연한 사람이 되지는 말라고. 혼자 짊어질 수 없는 짐은 내려놓고, 나눠 들어라. 그것은 당신에게 당연하게 주어진 숙명이 아니다.

- '결정장애 세대'의 저자 올리버 예게스는 전쟁이나 경제적 어려움을 겪지 않은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자라 오히려 더 많은 기회와 선택의 기로에 놓여 어떤 결정도 잘 하지 못하는 이들을 메이비 세대라고 함. 그는 이들이 어떤 시대보다 더 많은 옵션들이 놓여 있고, 사상 최대의 과잉 기회와 씨름하고 있다고 설명. 그래서 결정을 내리는 일도 어렵고, 심지어 어떻게 내려야 하는지도 모르는 것이 이들 세대의 문제라고 지적. 올리버 예게스의 말대로 우리는 너무나 많은 선택들에 잠식되어 선뜻 결정하지 못하는 걸까? 혹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자기결정권을 갖지 못해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결정에 수반되는 무거운 책임을 피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 빅터 프랭클의 로고테라피(의미치료)는 사람이 살아가는 근본적 동기와 이유가 삶의 참된 의미를 탐구하는 데 있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의미에의 의지를 중요시하는 이론이자 인간으로 하여금 그거서을 찾도록 도와주는 치료법. 빅터 프랭클은 놀랍거나 뜻깊은 경험뿐 아니라 고통스러운 시련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성취할 수 있으며, 행복이란 의미에의 추구와 성취를 통해 자연스레 주어지는 것이라 보았음. 
우리가 로고테라피를 통해 배워야 할 것은 자신을 둘러싼 세상과 자기만의 인생을 향한 긍정이며, 고난 속에서도 숨어 있는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적극적 의지다. 그 어느 순간에도 삶은 살아볼 만한 것이라는 사실을 믿을 때야말로 세상이란 성취해야 할 의미로 가득 차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임.

- 빅터 프랭클은 수용소에서도 살아가기 위해 공사장에서 자신의 옆에서 친구에게 하루에 한가지씩 재미난 이야기를 만들어 내자고 제안했다. 그는 유머야말로 자기보존을 위한 투쟁에 필요한 또 다른 무기이며, 어떤 힘든 상황 속에서도 이를 딛고 일어서는 능력과 초연함을 가져다준다고 했다. 언제 죽어나갈지 모르는 수용소에서의 일상에서도 사람들은 웃음을 열망했고, 극단적 상황도 웃음으로 승화시키려고 노력했다. 

- 살면서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시련. 온전히 스스로 시련을 짊어지고 가는 사람은 그 과정을 거치며 이전의 삶보다 더욱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고 빅터 프랭클은 설명한다. 온몸으로 시련을 경험하면서 깨달은 무언가는 온전히 스스로의 것이기 때문. 그래서 빅터 프랭클은 당당하게 터널로 걸어 나와 눈부신 빛이 무엇인지 경험하기를 권한다. 그것이 자신의 삶을 산다는 증거이고, 삶의 내것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기 때문. 그리고 결국 터널에서 빠져나오는 일도, 터널로 다시 들어가는 일도 모두 자신의 선택이다. 터널 앞에 서 있는 그대, 당신의 선택은 무엇인가?

-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것만으로도 삶의 질과 방향은 달라짐. 사람은 무엇을 원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을 때 쉽게 무너지지 않으며, 자기자 원하는 일을 조금씩이나마 해나갈 때 활력을 얻음. 이 활력은 삶의 재미없는 부분을 견딜 수 있게 하고, 지루한 시간마저 의미있게 만드는 에너지가 됨.
빅터 프랭클은 행복에 대해 인간은 그것을 추구할 필요가 없으며, 추구할 수도 없다고 단언. 쾌락이란 목표가 아닌 하나의 결과로서 얻어지는 것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다시 말해 행복은 어떤 목표를 달성했을 때 부수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결과다. 궁극적으로 행복을 소원하면서도 정작 행복을 어떻게 얻는지 모르는 우리들에게 빅터프랭클의 말은 더욱 날카롭게 다가온다.
행복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얻으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그저 내 삶에서 의미있는 일을 묻고, 찾고, 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다 보면 행복은 시나브로 당신 곁에 찾아올 것이다.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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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이 되면 자살률이 높아짐. 여러 이론으로 이 현상을 설명하는데, 그중 하나는 이즈음 사람들이 사회적 비교를 통해 자신의 정서상태를 인식하기 때문이라는 논리. 겨우내 우울했던 사람이 봄이 되었는데도 기분이 좋아지지 않자 날씨가 화창해졌는데 여전히 나는 활기가 안 생겨...라며 환하게 밝아진 세상과 어두운 자기 내면의 차이를 인식하면서 절망에 빠짐. 비교를 많이 할수록 우울할 때 느끼는 고통은 더 커짐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은 사회적 비교를 활용하는 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름. 불행한 이들은 사회적 비교를 많이 한다. 자신이 타인에 비해 우월한지 아닌지를 알려주는 정보에 민감하게 반응.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자신의 실제상황보다 남들과 비교했을 때 자신의 위치를 판단하고 그것에 크게 영향받음. 

- 행복한 사람들은 사회적 비교정보를 무시. 사람마다 살아가는 방식은 천차만별이고 각자 나름대로 목표를 향해 살아가는 게 인생이라 여김. 누구의 삶이 옳다, 그르다 평가하지 않고 기쁨의 원천을 알며 그것이 충족되면 충분하다고 느낌. 이런 가치관이 행복감을 결정함.

- 정서문제를 다루는 치료의 핵심은 두가지.
첫째, 감정 해상력을 키우는 것. 열심히 공부했지만 시험에서 떨어졌다면 슬픈게 당연. 슬픔은 일차 감정이다. 난 노력해도 안되나봐...라며 자책하고, 맞아, 내 인생은 언제나 불운으로 가득했어...라며 한탄하는 건 메타감정이다. 괴로워도 견뎌내야 하는 일차감정에서 자신을 두번 아프게 만드는 메타감정을 분리해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첫번째 치료목표. 이렇게 구분해서 관찰할 수만 있어도 고통의 무게가 줄어듬
감정이 자신을 괴롭힐 때는 미래보다 현재에 집중해야 함. 중요한 시험을 목전에 두고 불안을 느낄 때 '앞으로 대체 어떤 일이 닥칠까?'라는생각에 파고들면 메타감정이 소용돌이처럼 일어남. '지금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을 위해 당장 무엇을 해야할까?'로 생각을 돌려 놓아야 함.
살면서 누구나 겪는 고난이 불러일으킨 감정은 잘못된 게 아니고 그걸 느끼는 자신이 비정상인 것도 아님. 일차 감정으로 인한 괴로움은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히 옅어짐. 싫든 좋은 당연히 경험하게 되는 감정이라면 그것을 안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치료의 두번째 목표다

- 변화를 위한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과 태도를 묻는 질문에 누군가는 밝고 긍정적인 마음가짐과 적극적 태도라는 이도 있을 것이고, 변하고자 하는 목표를 향한 투지와 집념이라고 답하는 이도 있을 것임. 모두 어느정도 맞는 이야기지만 저는 다르게 답하겠습니다. 결정적 요인은 따로 있습니다. 그건 바로 경험에 대한 개방성. 치유적 관계를 맺기 위해서도, 희망을 갖게 하기 위해서도, 치료기법을 상담에 적용하기 위해서도 환자의 마음이 새로운 경험을 향해 열려 있어야 변화가 일어남. 이것이 변화를 일으키는 핵심요소. 
삶은 경험이고 경험 그 자체가 인생이다. 인생의 의미를 찾은 일도 경험을 통해야만 가능함. 비록 원하는 바를 이룰지 확신이 들지 않더라도 간절히 소망하는 것을 향해 나를 던져 놓고 또 뛰어들고 또 다시 부딪혀 나가는 동안 무수한 체험들이 나란 사람을 성장하게 만듬. 이 세상 사람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인생의 목표란 게 있다면, 그것 또한 세상이 던져주는 경험을 온몸으로 끌어안아 나란 사람을 점점 더 충분하게 만드는 것이다.

- 자신의 손등을 몇 분간 뚫어져라 바라보면, 손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도 마치 손 위로 개미가 기어가거나 맥박이 뛰는 듯한 이상한 감각을 느끼게 됨. 평소에는 모르고 있었던 이상한 점 같은 것이 눈에 띄어 괜히 쓸데없는 걱정에 빠지기도 함. 자기를 뚫어지게 관찰하는 것이 오히려 자신의 부정적인 점에 초점을 기울이고 별것 아닌 것을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이는 것임. 실제로 사회불안장애, 수행불안장애를 가진 환자는 이런 자기초점 주의가 과도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음.
남의 평가대로 자신을 규정짓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나와 어떻게 관계 맺을지 집중해야 함. 자기자신을 부끄러워하고 다른 무언가로 바꾸려고 하면 자기초점 주의에 빠져들어 더 긴장하게 되고 자신감은 떨어짐. 실수도 잦아짐. 나는 누구인가? 내 성격은 어떤가? 하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여서는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나를 벗어난 무엇, 혹은 누군가를 향해 헌신하면 불안은 저절로 옅어짐.

- 등산을 해보면 산을 오를 때 눈에 띄지 않던 꽃들이, 산을 내려갈 때 오히려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는 경험을 하게 된다. 젊은 시절에는 힘겹게 위를 향해 걷느라 놓치고 살았던 것들이, 삶의 지향이 바뀌는 중년이 되면서 비로소 마음에 들어오게 되는 것.
은퇴 후 삶은 자기 삶의 의미를 새롭게 부여하는 시기. 사회적 성공이나 경제적 부 등 세속적 성취를 했느냐가 아니라 '내 삶은 어떤 의미가 있나, 그리고 앞으로는 남은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해야하나'라는 질문에 답을 해야하는 시가.
젊다는 것은 아직 가슴 아플 일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을 아직 두려워한다는 것. 은퇴한 지금이 두렵ㄷ면 당신에게는 아직 해야할 일이 많다는 뜻. 그리고 여전히 젊음을 가슴에 간직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 미래 시간관이 강한 사람은 현재를 받아들이지 못함. 현재를 희생하고 현재 삶에 주어진 경험을 거부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해서는 살아 있다는 느낌, 그래서 행복하다는 느낌을 경험하기 어려움. 희생에 따른 피로와 무기력이 언젠가 따라온다.
미래에 몰두해 있는 사람은 현재지향성을 증가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함. 지금 현재의 경험에 충실하기 위한 시간이 더 필요. 사람은 시간이 흐르고나면 자신이 한 일보다 하지 않은 일을 더 후회함.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다보면 나중에는 결국 후회만 남게 됨.
앞으로 닥칠일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손끝에 스치는 바람의 느낌을 음미해야 함. 쏟아지는 햇빛을 즐겨야 한다. 현재의 감각에 집중하고 느끼는 연습이 필요.

- 아프리카 전통에 우분툴는 개념이 있다. 우분투는 '사람은 사람을 통해 사람이 된다.'는 의미. 나라는 사람이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이 필요. 옆 사람이 없다면 인생의 의미도 없어짐.
외향인에게는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줄 그런 사람이 필요함. 누구라도 좋다. 그 사람을 마음에 떠올렸을 때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런 사람을 만나야 한다. 지금 전화해서 '지금 네가 필요하다'고 말해야 한다. '너의 따뜻한 위로가 필요하다'고 말해야 한다.

- 마음의 성장은 익숙하고 편안한 곳에서 벗어날 때 시작됨. 후지와라 신야는 여행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굴곡 없는 일상에 지쳐갈 무려 새롭게 활기를 불어넣어준다는 의미에서 일부러 약간 위태롭게 보이는 다리를 건너갈 필요가 있다. 트래블에 트러블이 때로는 필요한 법이다.'

- 나쁜 사고 한번 없이 인생을 산다는 건 불가능하다. 우울증이라는 질환의 관점에서는 이렇게 외부적인 환경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받는 스트레스를 일컬어 일차적 문제라고 부름.
문제는 스트레스 그 자체가 아니다. 환자가 스트레스를 주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우울증 치료에서 초점을 맞추어야 할 핵심. 삶에 던져진 스트레스에 대응하려고 취하는 행동이 오히려 부정적 감정을 강화할 수 있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우울증이라는 질환이 발병할 위험이 커짐.
살면서 일차적 문제에 압도당한 사람은 꼼짝 못 한 채 자기자신을 놓아버리기 쉬움. 혼란스러운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혼자 있을 하는 건 자연스러운 반응. 고민에 빠지는 것도 당연함. 왜 직장을 잃게 되었는지 왜 건강이 나빠졌는지 왜 사고가 생겼는지 자꾸 고민하는 것은 사고하는 동물인 인간의 본성이다. 문제를 되돌아보고 반성하는 것도 우리 마음의 보편적 구동방식. 문제는 이런 자연스런 반응이 반복되고 강화될수록 우울증이 발병할 위험이 커진다는 것.
이렇듯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지는 것이 당연하지만 스트레스가 닥쳤을 때 나타나는 이런 행동반응들이 우울증을 일으키는 진짜 원인. 일차적 문제가 생겼을 때 우울증을 유발하는 개인의 행동반응을 일컬어 이차적 문제라고 한다.
-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잠만 자는게 이차적 문제다. 스트레스가 생겼을 때 난 안돼...라며 자책하는 것도 이차적 문제. 고통을 잊으려고 술을 마시는 것, 온종일 방안에 틀어박혀 게임만 하는 것, 사람을 만나지 않고 고립되어 생산적인 활동을 하지 않고 '나에게 왜 이런 문제가 생겼을까' 라는 생각에만 빠져 있는것. 모두 이차적 문제. 우울증 치료에서 가장 중요하게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이차적 문제다.
정리하면 일차적 문제는 외부에서 발생하여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을 뜻하고 이차적 문제는 일차적 문제에 대처하며 나타내는 비효율적인 행동반응에서 비롯됨. 일차적 문제를 맞닥뜨린 모든 사람이 우울증에 걸리지는 않지만 이차적 문제가 생기면 우울증에 빠지고 만다. 보통 우울증에 걸리면 일차적 문제에 매몰되어 있긴 쉽지만 실은 나를 옭매고 있는 이차적 문제들을 살펴봐야 함. 눈먼 황소의 뿔에 받쳐도 꿋꿋이 살아날 가능성은 여기에서 시작됨.
일차적 문제는 대체로 금방 해결되지 않음. 노력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우울증에 빠져 있다면 일차적 문제를 감당할 수도 없고 그런 상태에서 해결하려고 덤벼들면 오히려 실패할 가능성만 크다. 아니, 실패할 수밖에 없다. 우선은 이차적 문제 즉 우울증을 일으키는 자신의 행동반응으로 무엇이 있는지 알아차리고 거기서 벗어나야 함. 일차적 문제는 그 이후에 해결할 수 있다.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위한 열쇠는 행동에 있다. 우울증 치료는 우울증 환자의 행동이 자기 의도화는 다르게 자신을 더 무기력하게 만든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 기쁨과 충족감을 느낄 수 있는 활동이 늘어나서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재구성하게 하는 것이 우울증 치료의 목표

- 무기력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심리적 회피를 인식하고 그것을 멈추어야 함.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집착할 것이아니라 우선 내 안에서 심리적 회피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냉정하게 이해하는 일이 필요함. 심리적 회피를 멈추기만해도 무기력에서 벗어나기 위한 큰 발걸음을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다. 
우울증 환자가 회피행동을 보이는 중요한 이유는 흥미감소와 의욕저하 때문이지만 이외에 숨겨진 다른 결정적 요인이 있는데 바로 문제해결능력의 저하다. 우울증으로 인해 전두엽 기능이 저하되면서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하려는 방안이 머릿속에 잘 떠오르지 않는 것. 우울증 환자에게서 인지장애가 동반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결정과 수행능력의 장애는 우울증, 양극성장애 환자 모두에게서 관찰되고 있음.
우울증이 새어나올 틈을 막고자 항상 바쁘게 산답시고 중독에 빠지는 것은 심각한 악순환의 고리에 빠지는 것임. 술, 약물, 성관계, 도박, 일에 중독되어 슬픈 감정으로부터 도망치려는 것인데 이런 중독행동은 일종의 회피행동임. 일시적으로 기분을 좋게 만들기 때문에 벗어나기 힘들뿐더러 중독행위가 끝나고 하면 우울증이 더 심해짐. 우울증, 중독 다시 우울증, 이런 악순환에 빠짐.

- 지금 어깨에 우울증이라는 괴물이 앉아 있다고 상상해보세요. 이 괴물이 무겁게 나를 짓누르고 있어서 내가 힘든 것인데, 우울증에 걸린 나는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는 자신을 비난합니다. 어깨 위 괴물이 올라타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괴물을 없애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 한채 말입니다. 때문에 우선 괴물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게 중요. 그리고 자기비난 대신 연민어린 목소리로 자신을 대해야 함.
치료현장에서는 은유를 자주 사용합니다. 우울증 환자에게 종종 말하는 부러진 다리 은유가 있다. 우울증이 있는 내담자는 증상으로 힘들어하고 좌절하는데 정작 이들은 우울증이 빨리 좋아져야 한다며 자신을 다그치고 압박함. 이럴 때 저는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다리가 부러진 직후에도 이렇게 자신을 질책하시겠어요?" 라고 말입니다.
부러진 다리가 치유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1.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을 필요는 없다.
2. 인간은 그 자체로 가치 있느느 존재다
3. 사람은 누구나 실수와 실패를 한다
4. 삶은 본질적으로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5.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6. 미리 걱정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7. 회피보다는 수용, 도피보다는 직면을 선택함으로서 삶의 어려움을 더 잘 극복할 수 있다
8. 사람은 누군가에게 의지해서 힘을 얻지만 항상 그럴수는 없다
9. 다른 사람 때문에 내 감정이 전적으로 변한다면 내 감정에 대한 통제력을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이나 다름없다.
10. 모든 감정을 옳다. 부정적 감정을 없애는 것에만 집중하면 삶의 진정한 가치를 위한 행동에 전념할 수 없게 된다

- 우울증에 걸리면 아침에는 좀처럼 활동을 시작하기 힘들어져 대낮이 될 때까지 이불 밖으로 나오지 않는 사람이 많다. 밤에는 기분이 그나마 나아져 활동하기가 수월함. 반대로 조증일때는 새벽부터 일어나 활동을 시작. 하루의 수면-각성 리듬은 흔히 생체시계에 의해 조절되는데 우울증과 조증은 생체시계의 고장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야간 활동이 많아져 수면시간이 줄거나 야간에 인공 빛에 과도하게 노출되면 생체리듬이 교란되고 이렇게 어그러진 생체시계는 우울증의 발생위험을 높임.
일상 루틴이 붕괴되면 우울증이 지속됨. 이는 다시 말해 건강한 일상 루틴을 만드는 것이 우울증 재발을 예방한다는 뜻. 이왕이면 일과가 가치지향적 방식으로 구성될 때 더 효과가 크다. 건강한 일과는 정서를 건강하게조절함.

- 통곡물, 과일, 채소, 견과류, 콩, 살코기, 해산물을 많이 섭취하는 것이 우울증 예방과 치료에 도움이 되지만 탄수화물과 가공식품은 발병위험을 높임. 오메가3 지방산, 아연, 마그네슘, 철분, 비타민B 같은 영양소는 우울증 예장에 특히 효과가 좋음.
영양정신학에 따르면 연푸른색의 아보카도,연어살, 호두, 시금치, 포도 등 색깔이 다채로운 식탁이 시각적으로도 영양학적으로도 뇌를 즐겁게 하고 정신건강도 지켜줌. 기분과 음식이 신경으로 연동되기 때문. 무엇보다 항우울제 효과를 내는 비타민B가 풍부한 음식이 좋다. 붉은색 고기, 통곡물, 소간 혹은 시금치처럼 색이 짙은 채소에 비타민B가 많다.
비타민D는 천연 항우울제다. 햇볕뙤고 걸으면 비타민D가 생성되고 우울감은 사라짐. 연어, 고등어 등 기름진 생선과 달걀노른자 등에 비타민D 원료성분이 많다. 오메가3 지방산은 뇌구조와 기능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 개선에 도움된다는 연구도 있을 정도인데, 굴, 콩, 호두, 씨앗류, 들기름 등에 많다.
아연, 마그네슘 등 전해질은 항불안 효과를 내는데 이는 결핍시 불안장애 위험이 커진다는 의미. 아연은 살코기, 호박씨, 게, 검은콩, 두유, 아몬드, 치즈에 많다. 요즘 영양제 성분으로 많이 거론되는 글루타치온 등 아미노산은 기분조절 단백질을 생산하고 뇌세포 손상시 복구하는 데도 기여. 글루타치온이 많은 음식은 달걀, 콩, 아스파라거스, 감자, 고추, 당근, 아보카도, 호박, 멜론 등이다.
- 요즘 주목하고 있는 것은 프로바이오틱스, 유산균. 장 건강을 위해 복용하는 장내 유익균을 프로바이오틱스라고 하는데, 이는 신체건강뿐 아니라 정신건강에도 결정적 역할을 함. 우리 뇌가 장과 미주신경을 통해 연결되어 있기 때문. 쉽게 말해 뇌가 장에 사는 박테리아의 종류를 바꾸기도 하고 장내 세균이 신경화학물질을 생성해서 뇌기능을 조절하기도 함. 기분을 결정하는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의 신체 공급량 중 95%는 장내 세균에 의해 생성됨.

- 20세기 초반 득세했던 정신분석적 정신치료는 환자의 무의식을 탐색. 그 안에 있는 갈등, 방어기제, 욕구를 치료자와 함께 찾는 것임. 치료자는 환자의 과거경험, 중요한 사람과의 관계, 그리고 치료자와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전이를 다루고 해석함. 환자가 자신의 내면을 탐색하면서 감정과 욕구 그리고 갈등과 방어기제를 이해하고 무의식을 의식화할 수 있게 이끄는 것.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것이 우울증 치료에 효과가 있는지는 확실히 증명되지는 않았다. 그러다보니 20세기 후반에 이르자 치료경향이 변함. 인지행동치료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아론 벡은 정신분석적 정신치료가 우울증을 치료하는데 효과적인지 의문과 회의를 느꼈다.
벡은 부정적으로 왜곡된 인지가 우울증을 일으키는 핵심이라고 봤고 이를 수정함으로써 치료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봤다. 인지치료를 개발하게 된 것인데 여기에 행동치료가 결합되어 인지행동치료로 자리잡음. 인지치료는 자신과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부정적 해석과 믿음을 수정하는 데 초점을 맞춤. 왜곡된 사고를 확인하고 그것의 현실성과 타당성에 문제를 제기하고 오류를 수정하여 우울증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끊어줌.

- 대표적인 항우울제가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로, 현재까지 가장 많이 처방됨. 이름처럼 이 계통의 항우울제는 세로토닌 외에 다른 신경전달물질 수용체에는 영향을 주지 않음. 아주 선택적으로 세로토닌이 뉴런에서 재흡수되는 것을 억제함으로써 세로토닌의 활성도를 높임. 프로작, 서트랄린, 페록세틴, 시탈로프람, 에스시탈로프람, 플루복사민 등의 약제가 SSRI에 속함.
같은 계열의 약제이나 효과와 부작용은 다름. 플로옥세틴은 SSRI제재의 원조에 해당하는 약제로서 같은 계열의 다른 약제에 비해 식욕저하와 항거식 작용이 있고, 서트랄린은 세로토닌뿐 아니라 도파민 활성도도 증가시키기 때문에 인지 및 주의력 향상에 도움이 됨. 파록세틴은 진정효과가 크고 에스시탈로프람은 같은 계열의 약제 중에서 세로토닌에 대한 특이성이 가장 커서 부작용과 다른 약물과의 상호작용이 적다는 이점이 있다.

- 환자가 감정적으로 불편해할 만한 이야기는 우선 피ㅎ라.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은 금물. 너무 사소한 질문을 하거나 디테일한 것들을 일일이 언급하면 환자가 부담을 느낌. 옳고 그름을 따지거나 환자의 말에서 오류를 찾아내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음. 특히 환자가 자신의 우울증에 대해 남 탓이나 비난을 쏟아냈을 때 바로잡아 주려고 하면 안된다. '지금 너무 힌들어서, 견디기 어려워서 그러는 거구나'하고 헤아려 줄 것.
가벼운 대화가 제일 좋다. 우울증 환자가 부담을 느끼지 않을 만한 주제를 다루는 것. 구체적 정보나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보다 재미와 기쁨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좋다. 반려견, 텔레비전 프로그램, 날시, 스포츠, 대중문화, 패션 등에 대해 가볍게 이야기를 이어간다. 물론 이야기 소재도 개인의 선호와 취향에 따라 다르다.

- 솔직한 대화도 조심해야 함. 속마음을 다 털어놔봐...라던가 그동안 말 안하고 참고 있었던 것을 꺼내봐라, 함께 이야기하면서 털고 가자, 라고 하면 환자는 오히려 감정적으로 힘들어함. 솔직한 대화라는 건, 보통 사람들도 평소에 하기 힘든 법. 건강할 때도 다루기 힘든 주제의 이야기를 우울한 기분에서 꺼낸다는 건 더 어려운 일.
가족에게 힘든 대화주제가 있다. 환자가 가족을 비난하고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이 아버니, 어머니 때문이라고 원망하는 경우. 그걸 듣고 있는 가족은 참기 어려울 때가 많을 것임. 억울한 마음은 이해가지만 그렇다고 바로 반박하거나 방어적으로 나가면 대화가 끊어짐. 환자의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해도 일단은 가만히 듣고 있는 것이 좋다. 그렇다고 억지로 "네 말이 다 맞다. 부모인 내가 다 잘못했다"며 무조건적으로 인정하는 것도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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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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