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빅터 프랭클은 죽음만이 존재하는 듯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그곳에서 그는 살고 죽는 문제가 육체적 힘이 아닌 포기하지 않는 마음에 달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항상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 하지만, 그것을 삶에게 물어서는 안된다. 반대로 자신의 삶에게 그 대답을 해주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해야할 일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무기력가 패배주의, 분노와 혐오, 고립과 외로움... 오늘날 청년들은 세상의 부침 속에서 다양한 고통과 함께 끝없는 좌절감에 시달리고 있다. 때로는 절벽 끝에서 선 것처럼 막막하겠지만, 삶을 지속해야할 이유를 찾는다면 언제나 희망은 있다. 이제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자신의 인생을 향해 말해줄 차례다.
- 미국 철학자 휴버트 드레이퍼스는 현대를 무기력의 시대라 칭함. 전 세계적 경제위기 속에서 젊은이들은 노력해도 안된다는 생각 끝에 노력의 당위성을 부정하기에 이름. 시간에 쫓기고, 일에 치여 열심히 사는 듯하지만 사실은 반복하는 습관처럼 그냥 살아가고만 있는 사람이 부지기수. 무슨 일에도 흥미가 생기지 않다가 점점 주변의 모든 것에 무관심해짐. 그리고 마침내 삶의 이유마저 잃어버림.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감정을 되찾는 일이 우선이다. 나는 무기력한 사람들을 상담할 때 생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무조건 살아야 한다고 설득하기보다는 그 혹은 그녀들이 무뎌진 감정의 촉을 다듬을 수 있도록 돕는다. "'나는 지금 어떤가', '지금 어떤 감정이 올라오는가'를 스스로 끊임없이 묻고 답하세요'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회복할 것을 주문한다.
- 아무리 기운 내라고 해 봤자 없던 기운이 솟아나지는 않는다. 마구 다그친다고 해서 사라졌던 의욕이 돌아오지 않는다. 무기력한 사람들이 먼저 튜브를 찾아 바다에 가는 법은 없다. 시원한 물이 몸에 닿는 느낌, 그 상쾌한 기분과 만족감이 떠오를 때에야 바다에 가고 싶어지는 것. 나도 모르게 잃어버렸던 혹은 일부러 잘라냈던 감정을 되살리는 작업이 선행되어야만 삶의 생생한 순간을 느끼고 살고자 하는 욕구가 생겨남.
슬픔과 불쾌함, 서러움과 같이 부정적이라고 생각되는 감정조차도 정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 기쁠 때는 이런 감정이, 슬플 때는 또 저런 감정이 생기는구나, 파악하게 되면 각각의 감정에 따라 춤을 출 수 있게 된다. 춤을 춘다는 것은 기쁜 일이 있을 때 충분히 기뻐해서 그 감정을 강화한다는 뜻. 물론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그 다음에는 복잡다양한 감정의 파노라마를 얇게 조각내서 원하는 대로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
- 미국 정신의학자 머레이 보웬은 이처럼 한 사람이 자신의 부모와 정서적 관계를 끊는 행위를 정서적 단절이라 명명. 가족이라는 공동체에서 한 사람의 감정은 다른 구성원에게 전이되기 마련. 특히 부모의 감정이 자식에게 미치는 영향은 강력함. 예컨대 엄마가 우울하면 자녀도 긴장과 불안을 느끼게 됨. 자식은 때가 되면 부모로부터 감정과 사고가 분리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사람의 경우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할 것 같은 두려움에 부모와 물리적이거나 심리적 거리를 두려 하는 것임. 이런 정서적 단절 역시 오늘날 청년들의 사회적 고립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임.
- 성격이란 그 사람만의 독자적이고 일관된 표현방식, 그리고 사고체계와 신념을 의미. 이런 복합적인 것들이 한데 모여 타인에게 보이는 것이 한 사람의 성격이다. 대인관계에서 오는 갈등은 보통 잘못되고 삐뚤어진 이 성격이란 것에서 문제가 빚어져 발생함. 선택적 오류를 범하거나, 과잉된 일반화를 보인다거나, 편향된 시각을 갖는 등 건강하지 않은 성격은 본인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힘들게 함. 반대로 건강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면 세상의 갈등은 참 많이 줄어들 수도 있을 것임. 그렇다면 건강한 성격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아들러는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해나가는 것이 건강한 성격이라 설명. 융은 개성화를 추구해 가는 것이라 했으며, 프로이드는 자신이 가진 에너지를 잘 분배하는 것이라고 함. 매슬로우는 자아실현을 하는 인간을, 빅터프랭클은 자아초월적 삶을 사는 인간을 건강한 성격, 건강한 인간이라 말한다. 여기서 빅터 프랭클이 말한 자아초월적 인간이란 지금 나의 모습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잠재적 능력들을 발견하고 한 단계 발전시키는 것. 여러 심리학자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결국 건강한 성격이란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내면 깊숙이 스스로를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을 의미.
- 시지프 신화에서 까뮈는 어떤 희망도 없이 바위만 굴리고 있는 시지프의 삶에서 불현든 희망을 발견한다. 이 끔찍한 삶을 끝내지도, 자신을 버리지도 않는 시즈프를 보면서 까뮈는 그에게 성실성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는 살아 있는 동안 영원이 바위를 굴리는 이 부조리함을 묵묵히 수행하는 시지프를 통해 역설적으로 구원을 얻는다.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을 회피하기보다 바위 굴리는 일의 괴로움을 온몸으로 느끼며 그 안에서 다시 생의 열정을 얻는다.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 불행한 시지프, 영원한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할 시지프는 그렇게 다시 우리에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그래비티의 스톤박사가 눈앞에서 죽어가는 동료를 보고도, 광활한 우주에 홀로 남아 떨어지는 운석 앞에서도 끝까지 삶을 포기하지 않은 것은, 시련을 온몸으로 버티면서 내면에 잠재된 삶의 의지를 찾아냈기 때문. 우리에게도 영화제목은 중력처럼 끊임없이 발을 땅으로 끌어당기는, 살아가려는 의지가 깊숙이 존재함. 홀로 남겨저 바위를 들어올리고, 운석과 싸우는 일생을 산다는 것은 정말이지 사무치게 외로운 일이다. 그리고 누구나 그런 삶을 산다. 하지만 버티고 또 버티는 순간, 그것이 바로 삶을 살아내는 방식임을 깨닫게 될 것임. 길고긴 인생이란 레이스를 포기하지 않고 그간 살아왔다는 것. 그 자체로 우리는 완주한 것이 된다. 그러니 우리 모두 제발 살아주길 바란다.
- 빅터 프랭클은 이 세상이 성취해야 할 의미로 가득 차 있다고 믿었다. 삶의 의미를 찾고 의미있는 삶을 선택하는 것은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 삶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며, 그 책임을 질 사람은 오직 본인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갇혀 남의 기준대로 사는 데 익숙하다. 비교로 인한 박탈감, 강하고 잘나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동안 알게 모르게 스스로를 학대한ㄷ.
책임이 두려워 선택을 회피하고 삶을 방관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생의 주인공이 되지 않으면 책임은 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기가 이룬 성과마저 온전히 누릴 수 없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을 깨달아 추구할 때야말로 더 나은 삶을 향한 길이 펼쳐진다.
- 가끔 우리는 자신에게 한없이 냉정하고, 타인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울 때가 있음. 그렇게 좋은 사람이 지금 자신에게 가장 필요함. 그때의 나는 너무 어렸다. 괜찮다, 지금은 다 괜찮다, 라고 말하면 등을 두드려줄 지금의 나를 기다리고 있다. 마음껏 울지 못했던 나를 보듬고 울고 싶을 때까지 우는 것. 그것이 현재의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이는 전혀 유치한 일도 아니고, 당시의 내가 부족해서 나타난 감정도 아니다. 누구에게도 위로받지 못했던 그때의 심각하고 아픈 상처가 남아 있어 그런 것일 뿐이다.
이제 살면서 문득, 과거의 나를 만나더라도 놀라거나 화가 난다는 이유로 냉정하게 그냥 지나치지 않도록 하자. 침착하고 담담하게, 그 나이의 나와 직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충분히 당당하게 맞설 수 있는 용기를 지닌 사람이다. 과거의 나를 알아봤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미 상처를 치유할 준비가 되었기 때문이다. 남에게 한없이 너그러운 손을 바로 지금 스스로에게 내밀어 보는 것은 어떨까?
- 가끔은 인생이 일인극 같다는 생각을 한다. 가족도, 친구도, 심지어는 나를 스쳐가는 엑스트라 한 명 없이 혼자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에 외로움이 찾아오기도 한ㄷ. 어두컴컴한 객석을 쳐다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어쩌다 슬럼프에 빠지면 다 집어치우고 싶기만 하다. 그럴 때는 잠시 쉬어도 좋다. 연극에는 2막도 있고, 3막도 있다. 언제든 숨을 돌렸다가 다시 시작하면 된다. 다만 그 무대가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만 잊지 않았으면 한다. 절망의 순간에도 남은 인생을 마저 살아가야 하듯 결국은 연극을 마치는 것도 주인공의 역할 아니겠는가. 모노드라마가 끝나면 텅 비어 있는 줄로만 알았던 객석에서 박수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주인공은 박수를 받을만한 자격이 있다.
-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자신의 환경을 바꿀 수는 없다. 바꿀 수 있는 것은 주어진 조건에 대한 자신의 마음가짐, 태도뿐이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빅터 프랭클이 말하는 삶의 의미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유일무이한 것이라는 점. 그는 '삶의 의미를 찾아서'라는 저서를 통해 '유일무이하다는 것은 어떤 상황이 지닌 특성일 뿐만 아니라 인생 전체의 특성'임을 강조. 인생은 유일무이한 상황들의 연속이며,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본성에 있어서 그리고 존재에 있어서 모두 유일무이한 존재다. 개인이 유일무이한 존재고 그들 각자의 삶의 유일무이하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다른 사람과의 비교란 아무런 의미도 없어진다.
이렇게 다시, 우리는 빅터 프랭클의 이론으로 돌아가게 된다. 다른 사람과 삶을 바라보며 끝없이 비관할 것인가, 어떻게든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할 것ㅇ니가, 그 갈림길에 서 있다면 우리는 후자를 택해야 한다.
- 언젠가 내 마음에 울림을 준 시 한 편을 발견한 적이 있다. 시의 화자는 '항상 잘해주고 기다려주는 나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당신'에게 '왜 나는언제나 당연한 사람인가' 묻는다. 당신은 어떤가? 당연한 사람인가? 어째서 사람 사이에 당연한 것이 있을 수 있는가? 사람들은 흔히 주는 기쁨이 받는 기쁨보다 크다는 말을 한다. 사랑하는 사이뿐 아니라 모든 관계에 있어 이 말은 마치 진리처럼 여겨진다.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주는 일은 분명 아름다운 일이지만 오로지 주기만 하는 것은 자신을 가장 빠르게 방전시키는 소모적인 행위다. 세상에 일방적인 관계는 없으며, 있다고 해도 옳은 것이 아니다.
걷다 쓰러질 만큼 무거운 짐을 고스란히 안고 가는 사람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 내가 더 사랑하니까, 그나마 내 형편이 제일 나으니까, 이렇게 할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까..., 그 어떤 이유로든 당연한 사람이 되지는 말라고. 혼자 짊어질 수 없는 짐은 내려놓고, 나눠 들어라. 그것은 당신에게 당연하게 주어진 숙명이 아니다.
- '결정장애 세대'의 저자 올리버 예게스는 전쟁이나 경제적 어려움을 겪지 않은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자라 오히려 더 많은 기회와 선택의 기로에 놓여 어떤 결정도 잘 하지 못하는 이들을 메이비 세대라고 함. 그는 이들이 어떤 시대보다 더 많은 옵션들이 놓여 있고, 사상 최대의 과잉 기회와 씨름하고 있다고 설명. 그래서 결정을 내리는 일도 어렵고, 심지어 어떻게 내려야 하는지도 모르는 것이 이들 세대의 문제라고 지적. 올리버 예게스의 말대로 우리는 너무나 많은 선택들에 잠식되어 선뜻 결정하지 못하는 걸까? 혹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자기결정권을 갖지 못해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결정에 수반되는 무거운 책임을 피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 빅터 프랭클의 로고테라피(의미치료)는 사람이 살아가는 근본적 동기와 이유가 삶의 참된 의미를 탐구하는 데 있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의미에의 의지를 중요시하는 이론이자 인간으로 하여금 그거서을 찾도록 도와주는 치료법. 빅터 프랭클은 놀랍거나 뜻깊은 경험뿐 아니라 고통스러운 시련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성취할 수 있으며, 행복이란 의미에의 추구와 성취를 통해 자연스레 주어지는 것이라 보았음.
우리가 로고테라피를 통해 배워야 할 것은 자신을 둘러싼 세상과 자기만의 인생을 향한 긍정이며, 고난 속에서도 숨어 있는 삶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적극적 의지다. 그 어느 순간에도 삶은 살아볼 만한 것이라는 사실을 믿을 때야말로 세상이란 성취해야 할 의미로 가득 차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임.
- 빅터 프랭클은 수용소에서도 살아가기 위해 공사장에서 자신의 옆에서 친구에게 하루에 한가지씩 재미난 이야기를 만들어 내자고 제안했다. 그는 유머야말로 자기보존을 위한 투쟁에 필요한 또 다른 무기이며, 어떤 힘든 상황 속에서도 이를 딛고 일어서는 능력과 초연함을 가져다준다고 했다. 언제 죽어나갈지 모르는 수용소에서의 일상에서도 사람들은 웃음을 열망했고, 극단적 상황도 웃음으로 승화시키려고 노력했다.
- 살면서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시련. 온전히 스스로 시련을 짊어지고 가는 사람은 그 과정을 거치며 이전의 삶보다 더욱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다고 빅터 프랭클은 설명한다. 온몸으로 시련을 경험하면서 깨달은 무언가는 온전히 스스로의 것이기 때문. 그래서 빅터 프랭클은 당당하게 터널로 걸어 나와 눈부신 빛이 무엇인지 경험하기를 권한다. 그것이 자신의 삶을 산다는 증거이고, 삶의 내것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기 때문. 그리고 결국 터널에서 빠져나오는 일도, 터널로 다시 들어가는 일도 모두 자신의 선택이다. 터널 앞에 서 있는 그대, 당신의 선택은 무엇인가?
-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아는 것만으로도 삶의 질과 방향은 달라짐. 사람은 무엇을 원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을 때 쉽게 무너지지 않으며, 자기자 원하는 일을 조금씩이나마 해나갈 때 활력을 얻음. 이 활력은 삶의 재미없는 부분을 견딜 수 있게 하고, 지루한 시간마저 의미있게 만드는 에너지가 됨.
빅터 프랭클은 행복에 대해 인간은 그것을 추구할 필요가 없으며, 추구할 수도 없다고 단언. 쾌락이란 목표가 아닌 하나의 결과로서 얻어지는 것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다시 말해 행복은 어떤 목표를 달성했을 때 부수적으로 얻을 수 있는 결과다. 궁극적으로 행복을 소원하면서도 정작 행복을 어떻게 얻는지 모르는 우리들에게 빅터프랭클의 말은 더욱 날카롭게 다가온다.
행복을 염두에 두고 그것을 얻으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그저 내 삶에서 의미있는 일을 묻고, 찾고, 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다 보면 행복은 시나브로 당신 곁에 찾아올 것이다.
'심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간은 왜 박수를 치는가 (0) | 2025.02.20 |
---|---|
죽음의 수용소에서 (0) | 2025.02.19 |
아픈 줄도 모르고 살아가는 요즘 어른을 위한 마음공부 (4) | 2024.12.21 |
다시 행복을 풀다 (10) | 2024.11.09 |
불확실한 걸 못 견디는 사람들 (2) | 2024.10.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