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에게 종결욕구가 필요한 이유
인간에게는 인지적 종결욕구가 반드시 필요. 종결욕구가 없다면 우리가 익히 아는 삶은 불가능함. 이것은 필수적인 심리적 메커니즘이다. 끊임없는 결정거리가 수반되는 삶에는 어느 정도의 확실성이 필요. 우리는 혼잡한 길을 건널때 도로에 다가오는 차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고 싶어한다. 식료품을 살 때는 그 물건이 신선한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때는 아이들이 안전한지, 의사의 조언을 들을 때는 그 의사가 신뢰해도 될 만한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어한다. 이런 계산을 잘못하면 독특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확실성이 없느면 이도 저도 아닌 모호한 상태에 놓이고 만다. 분석마비에 빠진 채 어떤 생각과 행동도 실천하지 못할 수도 있다. 잠재적으로 보면 결정을 내리기 전의 정보수집 단계는 끝이 없다. 옳은 결정이라 확신할 만큼 충분한 증거를 모았다고 알려줄 객관적 신호가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을 정하지 않으면, 결국 이런저런 일들이 불시에 우리를 덮칠 것이다. 세상은 우리가 충분히 준비할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는다. 우리가 결정을 내리지 ㅇ낳으면 상황이 우리대신 결정을 내릴 것이다.
- 음주나 피로, 더위 또는 시간압박에 얽매여 심리적으로 큰 부담감을 느낄 경우, 폭넓게 사고하길 회피하고 서둘러 종결을 추구함. 그런 탓에 종종 충동적으로 행동해서 위험한 일에 휘말리기도 함.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서 더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우선 두 가지 관련 사례만 보자. 세계보건기구에서는 가정폭력의 55% 가량이 음주 후에 벌어지는 것으로 추정하며,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낮 최고 기온이 29.4도 이상인 무더운 날의 전체 평균 범죄율이 2.2퍼센트라면, 폭력범죄 증가율은 5.7%에 이른다고 한다. 지구 온난화 현상을 감안하면 이 연구결과를 가볍게 여길 수 없다. 이 연구를 비롯한 수많은 연구결과에서 알 수 있듯이 폭염에 따른 폭력행위 증가는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한 엄중한 경고장인 셈이다. 또한 충동적인 행동을 통해 불확실성에서 벗어나려는 심리를 이해하는 것이 사회 전반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이유도 짐작할 수 있다.
- 확실성을 갈망하는 심리의 근원은 존립이나 안전이 불확실한 상황이다. 질병에 걸려 고통을 겪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휩싸였던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 좋은 예다. 한마디로, 확실성을 바라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지만, 확실성의 갈망은 불확실성으로 인한 부정적 결과를 인지할 때 일어난다.
- 인지적 종결욕구가 높거나 낮은 사람들은 유전자뿐 아니라 뇌 기능에서도 뚜렷한 차이를 보임. 이것을 증명하는 연구결과들도 있다. 폴란드 야기에우워대의 마우고자타 코소프스카와 동료연구진의 연구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인지적 종결욕구가 높은 사람들은 뇌의 사건관련 전위에서 N1 요소의 활동이 매우 활발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N1요소는 특정한 일에 집중할 때 이것과 관련 없어 보이는 정보를 무시할 수 있는 능력과 연관 있다. 더 쉽게 풀어 말하자면, 종결욕구가 높은 사람들은 대부분 집중력이 좋고 주의가 잘 흐트러지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유리한 강점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불리한 부분도 분명히 있다. 한 가지 생각에 지나치게 집중하고 매달리는 탓에 다른 것은 잘 보지 못한다는 점. 한마디로 인지적 유연성이 떨어진다는 의미. 실제로 마사 비올라와 동료 연구진들이 이런 현상을 실제로 증명했느느데, 뇌의 특정구역(전측 대상피질과 배외측 전전두피질) 사이의 연결이 줄어들면서 유연성이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남. 전기적 연결성의 감소는 뇌의 여러 구역이 서로 소통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결국 이런 사람은 한 가지 아이디어에 갇히거나 사로잡혀 다른 대안을 고려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연구들이 종합적으로 증명하는 바에 따르면, 종결을 갈망하고 불확실성을 꺼려하는 개인의 성향은 어느 정도는 타고난 뇌의 메커니즘에 따라 결저오디며, 이런 뇌 메커니즘은 유전적 구성에 따라 큰 영향을 받는다.
- 불교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에 따르면 서기 4세기와 5세기에 로마제국이 몰락함과 동시에 유대교와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집단의 확산이 일어났다. 로마제국중심의 세계질서가 해체되면서 발생한 혼란과 불확실성이 종결을 향한 강한 욕구를 불러 일으키지 않았을까 추정할 수 있음. 확실성의 추구와 신앙심 사이의 긍정적 관계를 뒷받침하는 자료는 이외에도 많다. 학술 연구로나 우리 주변에서나 쉽게 접할 수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벨기에 루벤대의 연구가 바실리스 사로글루가 발견한 신앙심과 인지적 종결욕구 사이의 긍정적 관계라든다, 01년 9.11테러 공격 다음 주에 일부 소매상에서 성경판매량이 40% 증가한 사례가 인상적이다. 또한 2차대전 도중과 직후에 캐나다와 북미에서 신앙심이 눈에 띌 만큼 뚜럿이 고조된 사례도 있다.
- 상황적 불확실성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통해 밝혀진 중요한 핵심 두가지.
첫째, 불확실하거나 불안감을 일으키는 상황에 대해 생각하도록 유도하는 방식으로 비교적 쉽게 사람들의 자신감을 흔들어 놓을 수 있다.
둘째, 한 사람이 자신의 가치관에서 스스로의 위상을 확인할 기회를 주는 식으로 안정감과 행복감을 회복시키는 일 역시 생각보다 쉽다.
사람들은 안정된 기반과 사회적 지지를 늘낄 때 자신감을 되찾는다. 또한 안정감은 대개 자신이 속한 문화의 가치관을 확인하는 방법으로 얻을 수 있다. 자신이 속한 문화의 가치를 확인함으로써 자신을 사회의 중요한 일원으로 느끼는 것이다.
- 사람들은 불확실한 상황에 직면하면 흑백논리적 관점에 다른 지나친 단순화에 빠지기 쉬움. 이런 경향은 여러 영역에서 표출됨. 오락과 미학적 성향의 영역에서는, 선과 악이 싸워 이기는 도덕적인 이야기에 끌림. 이분법적 사고가 드러나는 영화와 텔레비전 시리즈가 큰 인기를 끄는 현상이 입증하듯, 이런 이야기에는 마음에 위안을 주는 힘이 있다. 불안을 일으키는 현실 세계의 불확실성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힘이다.
선과 악의 이분법적 세계로 도피하는 일은 어느 정도 납득할 만하지만, 불확실성이 키우는 인지적 종결욕구는 심각한 갈등과 긴장을 일으킬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의 이런저런 특징을 싸잡아 경시하는 음모론을 믿도록 조장하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흑백논리적 사고를 공식화한 형태라고 할 만한 포퓰리즘이 힘을 얻고, 실제로도 그런 사례가 종종 있었던 것처럼 독재자의 손에 권력이 주어질 수도 있다. 이런 추세는 대개 반목, 폭력, 파괴를 유발시켜 자칫 사회가 갈기갈기 찢어지게될 가능성도 있다.
- 사람들은 불확실성의 상황에 놓이면 규범이 비교적 느슨하고 자유분방한 민주주의 사회를 못 견뎌 함. 이런 환경에서는 확고한 지침을 제공하고 자신있게 견해를 밝히는 리더를 선호. 사고가 유연하고 반대 의견에 쉽게 흔들리는 리더는 높이 평가하지 않음.
우리에게 확실성을 주는 근원은 가치관을 공유하는 내집단이기 때문에 우리는 내집단 안에서 피할 곳을 찾아 달려간다. 다시 말해, 불확실성의 시기에는 내집단에 대한 충성심이 높아짐. 이런 충성심은 그 자체로 애국심ㅇ르 고양하는 수단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강해진 국가주의와 집단 나르시시즘, 무조건적인 조국 찬미, 자신들이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주장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 종결욕구는 사회적 관계의 거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침. 우리의 사고방식뿐만 아니라 내집단을 향한 감정, 내집단의 현실속 적이나 상상속 적에 대한 감정까지 좌우함. 사고의 영역에서 보면, 종결욕구가 높아질 경우 흑백논리적 관점을 선호하고 고정관념에 매달림. 불충분한 증거를 바탕으로 조급한 결론을 내리면서 타당한 이유도 없이 자신감과 자기확신을 갖는다. 다른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관심을 갖지 않거나 그들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한다. 또한 사람들의 기분이나 그들이 처한 상황을 잘 헤아리지 못하게 된다. 메시지의 전달자(연설자나 작가)로서나 수신자(청중이나 독자)로서나 모두 의사소통 능력에 제약이 있다.
불확실성의 시기에는 닫힌 마음이 기분 좋은 확신감을 갖게 할 수는 있지만, 치르고 싶지 않은 대가를 요구할 수도 있다. 우리가 불확실성과 종결욕구가 높아진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이해한다면 우리의 행동을 미리 예측하여 원치 않는 결과를 피할 수 있다.
- 불확실성을 바라보는 불교의 관점
젊은 싯다르타의 자연스럽고도 대담한 불확실성의 수용과정은 서양의 관점과는 본질적으로 다름. 서양에서는 불확실성을 행동주의적 방식으로 대처하며, 적절한 훈련과 배움을 통해 불확실성을 바람직한 결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 반면 불교의 접근법에서는 불확실성의 수용을 설파함. 불확실성은 좋은 결과와 나쁜 결과 모두를 가져오고, 고통은 인간에게 필연적인 부분이며 고통은 그저 고통일 뿐이라고 말한다. 고통을 없앨수는 없지만 고통을 대하는 자세는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기분 좋은 일이든 불쾌한 일이든 '어떤 일에 놀랄 가능성에 대비하라'고 충고. 세상은 무상함으로 가득하므로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일이든 결코 오래가지 않는다. 성공했다고 그것으로 끝이 아니며, 실패했다고 세상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 라는 윈스턴 처칠의 말이 떠오르는 충고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이유로 만물에 대해 애착을 갖는 일도, 성공할지 실패할지 아직 결과도 모르는 상황에서 갈망이나 두려움 같은 감정에 집착하는 일도 모두 불합리하고 비생산적인 일일 뿐이다. 애착과 집착에 대한 극단적인 반응인 욕망과 회피는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을 병들게 하는 두 가지 주된 독이다. 이 두가지가 인간의 고통 대다수를 초래함.
- 닫힌마음과 열린마음 모두 나름의 단점이 있으며, 대체로 중도를 지키는 것이 가장 유익함. 인지적 종결욕구는 불리한 면들을 갖고 있음에도, 전적으로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님. 높은 종결욕구가 명확성과 결단성을 촉진한다면 낮은 종결욕구는 지나친 분석으로 인해 끊임없는 혼동과 모호함, 우유부단함을 유발할 가능성이 큼. 높은 종결욕구는 어떤 아이디어에 대해서든 혹은 집단이나 관계에 대해서든 흔들림없는 헌신을 북돋우고, 조국이나 가족에 대한 충성심을 불러일으켜 대다수의 사람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을 진척시키고 보호하도록 유도함. 어쨌든 헌신은 인간의 모든 노력에서 기본적 요소다. 헌신없이 이룰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 열린마음 역시 대체로 높이 평가되긴 하지만 전적으로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새로움과 불확실성을 지나치게 좇다간 지속적이거나 가치 있는 무엇인가를 발전시킬 잠재력이 줄어들 수 있다. 다시 말해, 불확실성과의 관계를 헤쳐나갈 때는 대개 중도를 지키는 것이 답이다.
- 불확실성의 과도한 회피나 과도한 추구는 결과에만 너무 치중해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즉,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성공에 대한 만족할 줄 모르는 갈망을 갖게 되면서 생겨나는 결과다. 불교의 접근법에서는 실패를 피해 관습과 전통을 이용해 자신을 보호하거나, 완전히 미답의 영역에서 성공을 추구하기보다는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의연해질 것을 권한다. 삶이 던지는 피할 수 없는 오르막과 내리막에 초연한 감정을 가지면 마음의 펴오하를 얻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접근버에서는 그 무엇도 우리가 그토록 신경을 쓸만큼 중요하지는 않다. 고 조언한다.
리처드 칼슨의 말처럼 모두 사소한 일일 뿐이며, 천 년 전에 쓰인 전도서의 유명하 구절처럼,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된 것이다. 지나친 욕망을 억누르고, 성공과 실패에 덜 신경쓰고,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지금 추구하는 일에서 어느 정도의 초연함을 발휘한다면 건강한 온건함을 촉진시켜 불확실성에 대한 극단적 반응을 피할 수 있다. 그러면 미지의 상황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에도, 끊임없는 호기심과 지나친 모험 추구에도 브레이크를 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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