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시아 고유전체 자료는 북방계 또한 원래 남쪽에서 출발한 집단임을 시사함. 남쪽에서 올라와 북방에 정착한 사람들이 다시 남진하여 한반도로 들어왔다는 것. 결국 한반도로의 주된 이주의 흐름이 모두 남쪽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셈인데, 이는 알타이산맥 인근에서 몽골을 거쳐 만주로 동진한 집단을 북방계로 본 과거의 추론과는 다르다. 실제 한국인과 몽골인은 유전적으로 꽤 차이가 난다. 한국인은 몽골인보다는 일본인, 그리고 만주족과 같은 중국 북동부 사람들과 가까움.
- 한반도의 농경민과 관련해서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다. 2000년대 초 중국 우익학자들은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황허강 문명에 대한 관심을 거두고 황허강 동북쪽에 위치한 랴오허강 유역의 문명에 주목. 당시 국내 사학자들은 그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고, 중국 학자들의 그런 행동이 동북공정의 일환임을 인지하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중국은 랴오허 문명을 황허문명 앞에 내세우며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가 중국 왕조의 지방정권이었다고 우기고 싶었던 것. 만주에 위치한 랴오허 유역이 중국의 핵심 문명지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으면 이런 주장을 하기 더 쉬워짐
그런데 랴오허 문명의 중심인 홍산문화나 샤자뎬 문화를 일궜던 고대인과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운 현대인은 한국인이다. 고인골 유전자 자료는 한족보다 한반도인이 랴오허 문명의 주축이었음을 암시. 물론 이는 중국 학계가 원한 결과가 아니었다. 동북아 초기 농경민은 한반도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다. 고립도가 높았던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평지가 좁기 때문. 그러나 기후변화가 이어지면서 이들은 기존의 선입견을 버리고 진취적 생각으로 무장해야 했다. 기후변화로 5000년 전 이후 동북아 지역은 시간이 흐를수록 건조해지고 한랭해졌으므로 북방민들, 특히 랴오시와 랴오둥 지역 사람들은 농경에 좀더 적합한 기후를 찾아 한반도로 꾸준히 내려왔다. 그중 일부는 일본까지 건너갔다. 일종의 기후난민이었던 셈이다.
- 아프리카에서 출발하여 동쪽으로 이동한 호모 사피엔스가 대략 4만년전 동아시아에 도착. 이때는 농경이 시작되기 전이다. 수렵채집민 집단은 어로와 사냥이 용이한 초원지대를 거주지로 선호. 한반도는 동아시아의 가장자리인데다 대부분이 산지여서 그리 인기있는 곳이 아니었음. 하지만 추위가 극심해지자 분위기는 반전됨. 2만 5000년 전 이후 기온이 떨어지면서 많은 북방민이 한반도로 들어옴. 이들은 빙하기가 막판에 다다르면서 기온이 오르자 이번에는 초지를 찾아 북방으로 되돌아감. 홀로세 들면서 한반도는 더욱 온난해짐. 인구는 많지 않았다. 그러다 8200년전 갑자기 추위가 엄습하자 아무르강 하류의 수렵채집민 집단이 추위를 피해 대거 남쪽으로 이동. 홀로세의 양호한 기후로 아무르강 인구가 늘던 와중에 갑작스레 찾아온 저온현상이 식량위기를 불러온 것. 이 한랭기는 200년 가량 지속되다 끝났고, 곧이어 온난하고 습윤했던 홀로세 기후 최적기가 찾아옴. 기후가 좋아지며 동식물 개체수는 늘어남. 먹을거리가 풍족해지자 수렵채집민 인구도 증가.
그러나 홀로세 후반 기온이 떨어지기 시작하지 동북아 전역에서 다시 이주물결이 거세게 일어남. 4800년전 이후 한반도와 주변 지역 기후는 주기적으로 한랭건조해지는 경향을 보임. 주로 열대 서태평양 해수면 온도가 떨어지고 흑점수가 감소할 때 그러했다. 기온이 내려가고 가뭄이 닥칠때면 더 나은 땅을 찾아 움직이는 이주민의 거대한 흐름이 생김. 이들의 이동은 보통 랴오시와 랴오둥에서 시작하여 한반도 남부로 그리고 바다 건너 일본으로 넘어가는 경로를 따랐다. 홀로세 후반, 3000년전, 2000년전, 1000년전 등 대략 1000년마다 나타난 온난기에는 동북아 각 지역사회가 번영을 구가. 식량사정이 양호했으므로 내부갈등은 미미했다. 외부인의 유입도 적어 사회는 안정적으로 유지됨. 그러나 그 사이사이 상대적윽로 추웠던 시기에는 북쪽에서 이주민이 내려오면서 한반도 사회는 큰 혼란을 겪음.
- 북방민이 남하할 때마다 한반도 남부사회는 대내외적인 갈등에 휩싸였지만 동시에 이들이 전해주는 선진문물 덕에 지역이 발전하는 순기능 또한 적지 않게 누릴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중기 청동기 저온기(3800-3400년전)에는 벼 농경 문화가, 철기 저온기(2800-2300년전)에는 동검문화와 아마도 원시 한국어가, 중세 저온기(1900-1200년전)에는 철기 기마문화가 한반도 남부에 처음 전파됨. 이런 신문물은 한반도 부족사회가 고대국가 체제를 갖춰 나가는 데 절대적으로 기여.
이는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음. 한반도에서 전해진 선진문물 덕에 일본은 고유의 독특한 문화를 일굴 수 있었다. 철기 저온기에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벼 농경문화와 원시 일본어를 전했고 야요이 문화를 창출. 중세 저온기에 마한, 가야, 백제 등에서 이주한 사람들은 고훈시대와 아스카 시대를 열며 야마토 문화를 주도. 가야인들은 고훈 시대에 철기기술을 전파했고, 백제인들은 건축, 학문, 예술, 제도, 종교 등 다양한 영역에서 아스카 시대의 문화발전을 도왔다.
애초에 호모 사피엔스는 왜 아프리카를 빠져나왔을까? 무엇보다 호모 속 장체가 다른 동물에 비해 행동반경이 월등히 넓다. 호모는 진화의 결고로 몸의 털이 사라지고 땀을 통해 체온을 조절하면서 장거리 이동이 가능해졌다. 이들은 자신의 장점을 충분히 살려 동물이 지칠때까지 쫓아다니는 사냥전략을 즐겨 사용. 그 과정에서 아프리카 대륙을 빠져나온 종이 호모 에렉투스다. 유라시아로 진입한 호모 에렉투스가 저 멀리 인도네시아까지 도달한 것만 봐도 호모의 이동능력과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얼마나 특출난지 알 수 있음. 이후 70만년 전에는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가 아프리카에서 유라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감. 유라시아로 이동한 하이델베르겐시스로부터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이 나옴. 한편 현생인류 호모 사피엔스는 아프리카에 어물러 있던 하이델케르겐시스에서 분기했다.
호모 사피엔스 또한 호모 에렉투스와 같이 호기심이 많고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종이었다. 대략 13만년 전에 마지막 간빙기인 이미안 간빙기가 지구에 도래하면서 아프리카는 습윤해졌고 사하라 사막 면적은 축소됨. 사막이 초지로 변하자 동아프리카의 사피엔스는 새로 생겨난 초원길을 따라 이동하여 북쪽의 시나이 반도 부근 그리고 남쪽의 바브엘만데프 해협에 도착. 당시 해수면은 빠르게 상승중이었으나 홍해 남북으로 아라비아 반도와 아프리카 대륙은 여전히 육지로 연결되어 있어서 이들은 쉽게 아프리카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세차운동으로 대력 2만-2만 5000년 주기로 기후가 습윤해질 때마다 새로운 사피엔스 집단이 초원길을 따라 아프리카를 빠져나감
- 기후변화의 리듬에 따라 다양한 사피엔스 집단이 아프리카를 떠나 유라시아에 진출. 그러나 7만 4000년 전 엄청난 규모의 화산폭발로 기온이 떨어지자 지구상의 사피엔스 수는 급감.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에 있던 대형 화산 토바가 폭발한 것. 사피엔스뿐 아니라 다른 구인류들도 큰 피래를 봄. 이후 대략 6만년 전에 상대적으로 화산폭발의 영향을 덜 받았던 아프리카에서 새로운 사피엔스 집단이 다시 빠져나와 유라시아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감.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은 그 과정에서 멸종됨. 이 경쟁에서 승리한 사피엔스 집단이 지금 현생인류의 직접적 조상이다.
- 동쪽으로 이동한 집단의 석기문화가 상대적으로 뒤처졌는지 몰라도 이 집단의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력은 매우 뛰어났음. 이들은 강성한 세력을 유지하면서 동남아와 오세아니아에 자리잡고 있던 선배 사피엔스와 데니소바인 집단을 무력화하며 빠른 속도로 퍼져나감. 농경민과 달리 수렵채집민들에게는 노예가 필요없다. 이동에 방해만 된다. 그들을 살려두면 언제 반격을 가할지 모르는 다른 계통의 수렵채집민들을 가차없이 제거하며 전진했다.
- 순다랜드에서 사훌랜드로 건너온 사피엔스가 바다를 건너는 대모험에는 성공했는지 몰라도 유전자 확산 측면에서 보면 이는 패착에 가까웠다. 동쪽으로 이동하여 순다랜드에 도착한 무리 중 남쪽이 아닌 북쪽으로 올라갔던 사피엔스가 결국 넓은 동아시아 전체를 장악했기 때문. 빙기라는 차가운 시기에 따뜻한 곳이 아닌 추운 곳을 택한 선택이 오히려 경쟁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 것. 생존이 힘든 환경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혁신을 거듭해야 함. 반면 남쪽으로 내려간 무리는 태평양 연안과 좁은 섬에서 고립되었기에 세력을 넓히고 싶어도 한계가 있었다. 열대의 안락한 환경 속에서 안정적 삶을 영위하다 보니 변화에 대한 이들의 적응력은 차츰 무뎌짐
순다랜드 북부에서 북쪽을 향해 전진한 사피엔스 무리는 동아시아 곳곳에 자리잡은 후 점차 분화됨. 과거 동아시아에서 분기된 여러 무리 가운데 한반도인의 형성과장에서 유전적으로 크게 기여한 몇몇 집단이 있다. 구석기 시대에는 티안유안, 조몬, 아무르강 집단이, 신석기 시대에는 아무르강, 랴오허강, 황허강, 양쯔강 집단이 바로 그들이다.
- 다지역 기원설은 아프리카 기원설가 대척점에 있다. 아프리카 기원설은 주로 유전학자가 주장하는 반면, 다지역 기원설은 고인골 형태를 연구하는 형질인류학자가 지지. 다지역기원설 옹호자들은 호모에렉투스가 대략 200만년 전에 아프리카를 빠져나와 전 세계로 퍼져나간 후 각기 다른 지역에서 호모 사피엔스로 개별진화했다고 주장. 그리고 그 이후 각 지역의 사피엔스들이 활발하게 교잡하여 유전적으로 균질한 지금의 인류가 출현했다고 봄. 호모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이나 데니소바인과도 교잡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다지역기원설 역시 재고할 가치는 있다. 이 두 구인류를 기원이 다른, 즉 아프리카 기원과 관계가 없는 또 다른 호모사피엔스로도 볼 수 있기 때문.
- 농경은 부족함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니면 풍족함이 그 배경이었을까? 농경은 매우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하는 작업으로 인류가 성공한 최초의 혁신이라 일컬어짐. 농경은 인간사회뿐만 아니라 지구 생태게까지 뒤흔든 대변화였음. 여유로움 속에서 해도 안 해도 그만인 몇차례의 실험만으로 그 어려운 혁신이 완성되었을 것 같지는 않다. 먼 과거에 일어난 사건의 인과관계를 정확히 알 방도는 없음. 그러나 반드시 성공해야 하다는 절박함이 농경문화의 창출로 이어졌으르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
단어가 주는 느낌과 달리 혁신에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함. 장기간에 걸쳐 수많은 아이디어들이 축적된 상태에서 새로운 사고가 방아쇠를 당길 때 혁신이 일어남. 근동의 나투프인들은 뵐링-알레뢰드기의 풍요로움 덕에 정착생활을 즐겼고, 초기 농경과 관련된 다양한 지식을 체득. 이런 지식은 먼 훗날까지 면면히 이어짐. 그러나 대부분 파편화되어 수천년 동안 영향력이 낮은 단순정보에 머물러 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기후변화의 곤경에 처한 인류가 생존을 갈구하다가 그때까지 전해져 내려오던 단편적 지식을 모아 폭발력 있는 혁신을 이끌었다면? 상당히 그럴듯하게 들리지 않는가.
- 한반도에서는 홀로세 기후 최적기가 7600-4800년 전에 도래. 북반구 여러지역에서 초기문명들이 나타나 발전하던 시기와 엇비슷함. 기후가 온난 습윤해지자 전체 산림 면적인 이전 시기에 비해 늘어났고, 나무의 밀도도 높아짐. 최적기의 기후가 뚜렷한 변동없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며 한반도 생태계의 극상종인 참나무 비중이 증가. 대신 교란이 잦은 조건에서 경쟁력을 가진 소나무와 풀은 감소. 온난습윤한 환경 속에서 도토리와 같은 열매, 야생동물, 어패류 등 먹을거리가 풍부해지자 수렵채집민의 이동반경은 줄어듬. 한반도에서는 대략 5500년 전부터 정착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
최적기에는 전체적으로 온난습윤한 환경이 조성되면서 세계 곳곳에서 초기 문명이 발생하고 인구가 늘어남.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홀로세 기후 최적기가 끝나는 순간부터 여러 사회가 뚜렷한 변화를 겪었다는 사실이다. 흥성하던 문명과 집단이 갑작스러운 쇠락을 겪고 사회 구성원들이 대규모로 이동하기 시작. 빈번한 이주는 집단 사이의 갈등으로 이어졌고, 소멸한 기존문화를 대신해 새로운 문화가 들어섬. 중국 양사오 문명화 훙산 문명이 모두 이때 무너짐. 메소포타미아의 우르크가 약해지고 얌나야 유목민이 중앙아시아에서 유럽을 진격하여 농경사회를 제압한 시기도 이때다. 최적기가 끝나고 나타난 기후 악화가 이런 사회변동의 배경이었을 가능성이 큼. 물론 인구증가, 내부갈등, 전염병, 전쟁 등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사회의 혼란과 이주를 초래한 여러 다양한 요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과거를 돌아보면 이와 같은 문제들은 늘 급격한 기후변화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았다.
- 홀로세 후기 기후변동은 대략 500년 주기로 나타났는데, 주기가 항상 500년으로 일정했던 것은 아님. 대략 400-600년까지 차이를 보임. 이유는 홀로ㅗ세 후기의 기후변화를 주도한 것은 저위도 태평양의 해수흐름으로, 이 흐름은 500년 주기의 태양활동이 조절했다. 그런데 여기에 태양활동과는 관계없는, 즉 화산활동, 온실가스, 피드백 등 다른 요인들이 추가로 영향을 미침. 200년의 차이는 이런 연유에서 비롯됨.
약 4600-4700년 전 홀로세 기후 최적기가 끝났고, 약 4200-3900년 전에 전 세계 여러 문명이 동시에 무너짐. 약 3700년 전에는 전차를 보유한 힉소스의 남진으로 이집트 중왕국이 멸망했고, 약 3200년 전에는 해양민족의 침략으로 지중해 동부 청동기 문화가 붕괴. 약 2800-2700년에는 4.2ka 이벤트에 버금가는 기후변동이 발생해 중국이 춘추전국 시대의 혼란으로 빠져듬. 약 2300년 전에는 한반도에서 벼농경 문화가 크게 쇠락하였고, 약 1700년 전에는 중국의 한나라가 멸망하고 위촉오 삼국시대의 격변기로 접어듬.
이어 약 1200년 전에는 멕시코 중부 고지대의 테오티우아칸 문명이 가뭄에 큰 타격을 입었고, 약 600년 전에는 유라시아에 흑사병이 돌아 1억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 가장 최근인 150년 전에는 흑점수가 감소하여 북반구 전역에 흉년이 들고 전염병이 돌았다.
- 홀로세 후기에 400-600년 주기로 기후가 악화된 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개개의 역사적 사건에 당시 기후변화가 어느 정도로 기여했는지 파악하는 것은 어려움. 기후변화의 영향력이 컸던 사건도 미미했던 사건도 있을 것임. 어쨌든 기후가 변했을 때 사회변동이 일어났다면 기후변화의 영향을 깊이 있게 실펴보는 것이 맞다. 기후변화가 사회변동을 촉발한 방아쇠였을 수도 있고 사회변동의 속도를 높인 박차였을 수도 있다. 혹은 이미 다른 내부요인으로 무너져가던 사회에 기후변화가 최후의 일격을 가한 것일 수도 있다.
- 유럽, 인더스계곡, 페르시아, 동북아 등 북반구 대부분의 지역에서 인구집단이 이동하고 섞이는 과정은 엇비슷했다. 마지막 빙기말 수렵채집민들이 지구 대부분의 지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감. 추운 빙기가 끝나고 온난한 홀로세로 접어들며 농경이 시작되었고 인구는 증가. 인구압박에 못이긴 농경민은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섰고 그 과정에서 만난 수렵채집민을 인구수를 앞세워 제암. 한편 내륙의 건조한 초원으로 이동한 농경민은 작물재배를 포기하고 유목생활에 집중. 말을 능숙하게 다루게 된 유목민은 기후가 나빠져 먹을 것이 부족할 때마다 기동성을 살려 정주사회를 공략하고 무너드림. 점령지에서 유목민은 정주민의 생활방식을 따르는 경우가 많았고 유목문화는 점차 위력을 잃어감. 이 일련의 과정에서 수렵채집민, 정주농경민, 유목민의 유전자는 복잡하게 섞임.
- 최적기의 따뜻한 기후와 참나무 원시림은 한반도의 수렵채집사회가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수렵채집민들은 도토리와 같은 열매나 야생동물, 어패류 등을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었다. 과거와 달리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멀리 움직일 필요가 없다보니 이들의 이동반경은 지속해서 감소하였고, 결국 해안이나 하천을 중심으로 정주하는 문화가 나타나기 시작. 한반도의 탄소연대자료를 모아 시기별 주거지수를 추정한 연구결과는 대략 5700-5500년전부터 인구가 증가하고 정착 수렵채집민의 수가 증가했음을 잘 보여줌
이 때는 북방의 랴오허 유역이나 랴오둥반도에서 한반도로 조, 기장 농경ㅁ누화가 처음 전파된 시기와 가까움. 최적기의 온화한 기후 덕에 정주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던 수렵채집민 중 일부가 남들보다 먼저 농경이라는 새로운 실험을 시도했음. 먹을 거리는 풍부했으므로 실패에 대한 부담은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다. 조, 기장, 팥, 콩 등 초기농경은 들이는 시간에 비해 얻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았지만 야생 먹거리가 부족할 때 보조생계수단으로 요긴했음. 농경이 시작된 후에도 주거지 수가 크게 늘지 않았음을 고려할 때 최적기에 조나 기장재배가 본격적인 농경으로 이어지지는 않은 것으로 보임. 그러나 농경이라는 새로운 문화가 더해지며 수렵채집민의 삶이 더욱 풍족해졌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음.
- 최적기가 끝나고 청동기 시대에 들어오면서 기온과 강수량이 차츰 하강곡선을 그리기 시작. 주기적으로 한랭기가 닥칠 때마다 동아시아 전역에서 연쇄적 난민 행렬이 이어졌고 한반도로도 외지인이 들이닥침. 외부 이주민들은 갈등과 혼란을 가져오면서 기존사회의 기반을 약화하는 주범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농경, 야금, 토기제작, 직조술 등 북방 선진문화 또한 전해주었기 때문에 한반도 사회가 발전하는 데 도움이 됨. 한반도 청동기 시대는 벼 농경이라는 신문물이 도입되어 인구가 급성장하는 때. 다른 한편으로 기후의 전반적 악화로 잦은 이주와 사회갈등으로 점철된 시기이기도 함.
- 북방의 농경집단은 농경뿐 아니라 목축과 수렵채집을 함께 영위하며 제너럴리스트의 삶을 살았다. 저위도에 비해 생산성이 현격히 떨어지는 북방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생계방식이 요구되었기 때문. 계절별로 기온차이가 무척 큰 대륙성 기후는 적응력과 기동성이 떨어지는 집단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거친 북방땅에서 경쟁력이 처지는 집단은 따뜻한 남쪽 땅을 끊임없이 갈구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기후가 악화될 때면 여지없이 남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남쪽에 내려와서는 농경에 집중하면서 제너럴리스트의 생활방식을 버리고 스페셜리스트의 삶에 자연스레 동화되어 갔다.
북에서 밀려내려오는 사람들로 한반도의 인구밀도는 차츰 높아짐. 특히 기후가 출렁거릴 때 북방의 이주물결은 세차게 몰려왔고 인구의 섞임은 반복됨. 동시에 제너럴리스트 집단이 엄혹한 북방 땅에서 생존을 위해 일군 여러 혁신 문물이 빠짐없이 남쪽 한반도로 전해짐. 작물, 언어, 말, 금속 등과 관련된 문화는 모두 북에서 비롯하여 한반도로 내려왔고 바다 넘어 일본까지 건너갔다. 북방의 문화는 밝은 햇살이 가득한 남쪽 당에서 다양하게 변주되며 꽃을 피웠다. 차가운 북방문화의 잠재력이 온화한 남방에서 폭발한 것이다. 기후 변화에서 비롯된 인간집단과 문물의 이동은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왕조들이 중국 왕조에 크게 뒤지지 않는 자신들만의 고유한 문화를 구축할 수 있었던 주된 요인이었다.
- 얌나야 집단에서 시작된 유목문화는 서유라시아에서 히타이트와 스키타이로 이어짐. 이들은 유목민의 장점인 제련술과 기마술을 발판으로 철기 기마민족의 정체성을 발전시킴. 홀로세 기후 최적기가 끝난 4900년 전 이후 사방으로 확장한 얌나야, 3700년전경부터 나타난 중기 청동기 저온기에폰틱-카스피해 초원에서 남하하여 아나톨리아에 정착한 히타이트, 2800년 전경부터 시작된 철기 저온기에 중앙아시아에서 서쪽으로 이동한 스키타이는 모두 광활한 유라시아 초원지대에서 유목생활을 하다 기후변화에 자극받아 따뜻하고 물이 풍부한 지역을 찾아 이동했다. 얌나야, 히타이트, 스키타이. 대략 1000년 간격으로 출몰하여 유럽과 중동의 정착민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유라시아 기마민족은 이후에도 1000년을 주기로 살벌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1600년 전에 나타난 훈족과 700년 전에 나타난 몽골족이 그들이다.
- 주나라의 봉건제도가 붕괴한 후 기원전 400년부터 기원전 250년까지 매서운 추위가 이어짐(2.3ka) 주나라가 멸망한 후 치열한 경쟁끝에 살아남은 진, 조, 위, 한, 제, 연, 초의 전국칠웅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전쟁을 거듭하였다. 이른바 전국시대라 불리는 시기. 보통 기후여건이 나빠져 흉년이 들고 전염병이 돌면 내부의 불만화 갈등이 폭증하게 마련. 왕권에 대한 욕심도 있었겠지만 일곱나라 모두 부족한 자원을 확보하고 내부의 분열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전쟁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이들 가운데 중국 동북부에 터를 잡고 중원 이남 여섯나라와 세를 겨루던 연나라는 배후의 고조선이 항상 꺼림직했다. 고조선은 요동뿐 아니라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점유한 강성한 국가였고 당시 인접국인 제나라와도 외교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나라 입장에서는 입의 가시같은 존재였다.
연나라는 기원전 315-312년 전 제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망국의 위험에 처한 적이 있어 제나라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제나라와 제대로 붙어 싸우려면 일단 후방의 군사적 위협부터 제거해야 했다.
고조선과 연나라의 전쟁은 기록으로 남아 있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전쟁으로 발발연대를 기원전 300-290년 정도로 봄. 연나라는 고조선을 침공하여 제압하는 데 성공. 고조선의 전력으로는 당시 진개라는 걸출한 장수가 이끈 연나라 군에 맞서 싸우기에 역부족. 더구나 연나라는 수년 전 고조선 동북쪽 동호와의 전쟁에서도 이미 승리를 거둬 사기가 높은 상태였음. 고조선은 이때의 패배로 세력이 위축되어 한반도 서북부로 쫓겨났고 동시에 다수의 유민이 한반도로 이주하여 남쪽 지방에서 부족사회를 이루게 됨.
- 철기 저온기 내내 북방민이 추위와 갈등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한반도 남부에서는 외부인과 토착민의 갈등이 끊이지 않음. 사회는 혼란스러웠고 인구는 쉬이 늘지 않았다. 500-600년 간 이어지던 추위가 마침내 끝나고 20200년전부터 기온이 회복되는 추세를 보임. 무엇보다 강수량의 증가가 뚜렷했다. 철기 저온기 내내 감소하던 강수량은 2200년 전을 기점으로 방향을 바꿔 상승하기 시작.
2200년 전에서 200년간 비교적 높은 기온이 유지되면서 한반도 사회는 안정을 되찾는 것으로 보임. 하지만 연나라에서 망명한 위만이 기원전 194년 고조선의 준왕을 배신하고 난을 일으켜 왕권을 찬탈하는 일이 벌어짐. 위만에 밀린 준왕은 바다를 통해 전북 익산지역까지 내려옴. 만경강 유역에 터를 잡고 새로운 사회를 조직하여 선진문물을 전파. 계층은 분화되고 권력은 집중되었다. 기후 여건 또한 이전에 비해 한결 나아졌기 때문에 인구는 증가하기 시작.
- 한반도에서 전반적으로 기온이 떨어지던 기원 원녕르 전후한 시기와 3세기경 북방에서 소규모 집단들이 남부로 이주하기 시작. 고구려 유민 온조세력은 남쪽으로 내려와 기원전 18년 한강 하류에 자리잡고 위례성을 축조. 또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의하면 기원후 42년경 경남 김해에 일군의 사람들이 도착하여 김수로를 왕으로 옹립하고 금관가야를 세움. 온조집단과 김수로 집단 모두 북방의 선진문물을 앞세워 토착세력을 누르고 어르면서 지역의 지배권을 거머쥐었을 것임. 당시 한반도 남부에 거주하던 토착민들은 이전에 내려와 정착한 고조선 유민들의 후손들로 보임. 북방에서 내려오는 이들은 농경이나 전쟁에 유용한 최신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토착민과의 경쟁에서 남해안을 중심으로 패총이 확산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당시 기온하강으로 농업생산성이 낮아지자 먹을 것을 찾아 내륙에서 해안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 기후 여건이 좋지 않을 때는 날씨에 민감한 농사에 매달리기보다 해안가에서 어로나 채집활동 비중을 높여야 먹을 거리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
- 문화는 전성기를 향해 달리고 인구는 눈에 띄게 불어났다. 주변 환경이 심하게 교란되며 생태계 회복력이 떨어진다. 이때 대응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폭의 기후변화가 갑작스레 나타나면, 이동이 쉽지 않은 정착민 집단은 유목민이나 수렵채집민들보다 훨씬 타격이 크다. 기후변화는 곧 식량위기로 이어지고 굶주림은 면역력을 저하시킨다. 집단에 전염병이 빠르게 확산하면서 인구가 급감. 인구감소로 사회활력이 급속히 떨어진다. 세금이 걷히지 않으니 사회 안전망이 무너지며 지배층에 대한 불신은 팽배해짐. 물자가 부족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의 것을 약탈하는 제로섬 싸움이 만연. 내부갈등은 더욱 심화되고 민란이 연이어 발생함. 마지막까지 버티던 사람들도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고향 땅을 등지고 끝내 떠나고 만다. 예전의 화려함은 온데간데 없이 이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 황량한 땅으로 변한다. 문화가 발달하고 쇠락하는 과정은 지역을 막론하고 유사함. 이는 인간행동양식의 단일성을 보여준다.
지배층이 통찰력과 정치적 감각을 가졌다면 예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사전에 계획하고 움직이고자 할 것이다. 이때 가장 손쉽게 택하는 방안은 침략이다. 기후변화가 식량위기로 번질 조짐이 보이면 아마 전쟁을 서둘렀을 것이다. 이웃나라로 쳐들어가 우선 부족한 물자부터 확보해야 사람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기 전에 불씨를 잠재울 수 있다. 과감한 계획이 성공을 거둔다면 위기는 곧 기회로 이어짐. 지배층은 탄탄한 지지를 발판으로 자신의 나라를 강고하게 유지하는 동시에 전쟁을 통해 국세를 확장하려는 원대한 뜻을 품게 된다.
- 기후변화는 더 나은 땅을 쫓는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고 내부갈등을 일으키며 외부세력과의 전쟁을 유도. 홀로세기후 최적기가 끝난 후 동아시아 각 지역사회는 잦은 기후변화에 시달림. 농경이 집약적으로 이뤄지기 전, 기후가 변화하는 조짐이 보일 때문 수렵채집민이나 유목민뿐 아니라 정주 농경민 역시 과감하게 이주를 감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작물생산량과 노동투입의 선순환으로 농경사회 규모가 확대되자 위기가 빤히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정주민들은 이주를 주저하였다. 기후변화의 충격은 배가될 수 밖에 없었다. 자원을 두고 벌이는 외부집단과의 경쟁은 가열되었고 계층간 내부갈등은 심화됨. 정주생활이 시작된 후 기후위기에 힘겹게 버티는 시간만 조금 늘어났을 뿐 결국엔 역부족이라는 현실을 실감하고 이내 새땅을 찾아 움직이는 일이 반복됨. 지역 부족들이 뭉치고 중앙집권체제를 갖춘 국가들이 나타나자 기후 변화의 여파는 사람들의 이주로 마무리되지 않았음. 대부분 큰 전쟁으로이어졌다. 전쟁의 패잔병과 난민은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다른 곳으로 피난을 떠나야 했다.
동아시아에 호모 사피엔스가 들어오기 시작한 4만년 전부터 고구려가 남진을 거듭하던 대략 1500년전까지 한반도에서 이주의 물결이 멈춘적은 거의 없다. 그 대부분은 기후변화와 식량위기가 어둡게 그늘을 드리운 곳에서부터 시작.
- 약 8200년전 추위를 피해 아무르강 유역에서 내려온 수렵채집민 집단, 중기 청동기 저온기와 약 3200년 전 산둥, 랴오둥, 랴오시 등에서 이주한 농경민 집단, 철기 저온기에 랴오시와 랴오둥에서 남하한 점토대토기 문화집단, 중세 저온기에 북방에서 내려온 고조선과 부여 유민이 혼합하여 현대 한국인으로 이어짐. 여기에 조금 더 덧붙이면 8200년전 아무르강 수렵채집민이 내려올 당시 한반도에는 만빙기 때 북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눌러앉은 토착집단이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또 한반도 남부에는 조몬 수렵채집민도 살고 있었다. 홀로세 기후최적기에는 랴오시 지역에서 소규모의 기장 농경민이 한반도로 내려왔을 가능성도 있음. 특히 중세 저온기 초반부에 내려온 고저선과 부여의 유민이 현대 한국인에 유전적으로 크게 기여했을 것으로 추정됨. 고조선의 준왕세력, 황허강 집단의 유전성분이 높은 위만조선의 유민, 선비족과 고구려에밀린 부여 유민이 꾸준히 한반도 남부로 이주하며 기존의 삼한사람과 섞임. 물론 이외 수많은 인적 이동이 과거 한반도인의 형성에 관여했을 것임.
대부분 중요한 이주는 한랭화가 진행될 때 발생. 그러나 기후변화와 관계없이 움직인 소규모 무리도 분명 존재했을 것임. 기온이 떨어지는데 오히려 북쪽으로 이동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기온이 온화한 시기임에도 다른 땅을 찾아 더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임.
- 온난화가 계속 이어진다면 결국 지구는 티핑포인트를 넘어 과거에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기후조건인 초간빙기로 들어설 것임. 그후 상황은 예측하기 어렵다. 조금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아마도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생태계가 기능을 상실하면서 인류의 인구는 큰 폭으로 감소. 생존한 사람들은 고온과 가뭄을 이겨낸 적응력 높은 동물과 자원을 두고 경쟁해야 함. 저위도 사람들은 중위로로, 중위도 사람들은 갈등을 피해 고위도로 이동하는 도미노같은 이주와 갈등이 이어짐. 저위도의 가난한 나라들은 기후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사라지고 이곳은 곤충이나 파충류의 땅이 될 것임. 본격적을 초간빙기로 향하며 기온이 빠르게 높아지고,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지역은 고위도 일부 지역으로 제한됨. 하지만 인류는 이 흐름을 저지할 방법이 없다. 끔찍하지만 가능한 시나리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