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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5.01.22 우리는 인간다운 죽음을 꿈꾼다
  3. 2025.01.22 블루베일의 시간
  4. 2025.01.22 후회없이 살고 있나요? 1
  5. 2025.01.22 글로벌 푸드 한국사 3
  6. 2025.01.22 20250122

젓가락

역사 2025. 1. 22. 07:44

- 젓가락은 서양의 나이프와 완전히 다르다. 젓가락은 음식을 베거나 찌르거나 난도질하거나 잘라내는 것을 거부하는 식사도구다. 젓가락으로 먹는 음식은 이제 더 이상 폭력을 가해서 얻은 먹이가 아니라, 조화롭게 이동된 물질이다. 젓가락은 이전에 새모이와 밥으로 뚜렷이 구분되던 물질을 한 줄기 젖으로 바꾸었다. 젓가락은 지치지 않고 어머니가 밥을 한입 떠먹이는 것 같은 몸짓을 하는 반면, 창과 칼로 무장한 서양의 식사방식에는 포식자의 몸짓이 여전히 남아 있다.
이러한 바르트의 숙고는 고대 중국에서 젓가락이 식사도구로 바뀌게 된 과정과 이유에 영향을 끼친 문화적 요인들을 검토하는 데 매우 유용. 바르트에 따르면, 젓가락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하는 사람들처럼 음식을 폭력적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점에서 젓가락은 약탈적이지 않다. 이런 주장을 편 사람은 바르트 말고도 많다. 16세기 아시아를 여행하며 젓가락을 본 많은 서양인은 아시아인의 젓가락 사용을 좀더 문명화된 식습관이라고 생각하면서 비슷한 느낌을 공유했다.
중국인에게 이것은 소중한 문화적 신념이 되었다. 옥스퍼드대 중국학자 레이먼드 도슨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표현.
"중국인에게 문명인과 야만인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젓가락으로 밥을 먹는 사람인지, 손가락 또는 나중 일이지만 나이프와 포크같은 하등한 도구로 밥을 먹는 사람인지만큼, 그렇게 명확한 기준은 없다."

- 왕런샹의 주장에 따르면 "포크의 사용은 고기 섭취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포크는 숟가락이나 젓가락과 달리, 음식물(고기)을 나르는 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고대 중국에서 포크 사용은 일반적이지 않았따. 포크를 사용했던 사람들, 즉 육식을 하는 사람들은 상류층에 한정된 반면, 민중 대부분은 초식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일반 민중은 고기를 먹을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포크를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 왕런샹의 지적은 오늘날 포크가 고기뿐만 아니라 채소를 먹을 때도 효과적이라는 사실 때문에 힘을 잃을수도 있지만, 고대중국의 조리습관에 대한 그의 주장은 여러 고고학 유물과 역사연구가 뒷받침하고 있다. 전혀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먹는 음식의 종류에 따라 먹는 도구도 달라지게 마련. 

- 음식사가펠리페 페르난데스 아르메스토에 따르면, "대부분의 역사에서 (과학적 종자개량의 고된 과정을 통해 오늘날 놀랄 만큼 수확량이 다양한 밀 종자를 생산해내기까지) 쌀은 세상에서 견줄만한 것이 없는 수확량이 가장 많은 음식이었다. 다양한 토종종자가 있는 쌀은 1헥타아르당 평균 5.63명을 부양하는 반면, 밀은 3.67명, 옥수수는 5.96명을 부양한다. 역사 전반에 걸쳐, 쌀을 주식으로 하는 동아시아와 남아시아 문명은 다른 지역보다 더 인구가 많고, 생산성이 강하고, 더 창의적이고, 더 산업화되고, 더 기술이 발전하고, 더 강력한 무기를 보유했다."
중국이 바로 이런 나라였다. 북부지방에서 고대 중국문명을 육성한 것이 기장이라면, 쌀은 남부지방의 문화를 발전시킨 주역. 시간이 흐르면서, 쌀은 농업과 먹거리체계에서 훨씬 더 막중한 자리를 차지했다.

- 고려말, 몽골의 발흥과 뒤이은 한반도 침략은 한국의 음식과 요리문화에 중요한 변화를 일으킴. 몽골이 한반도를 점령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몽골은 수십 년동안 고려와 전쟁을 벌인 끝에, 1270년대 마침내 한반도를 평정하겨 거대한 몽골제국의 한 행정구역으로 편입. 몽골의 지배 덕분에, 그동안 불교의 영향으로 한국요리에서 배제되었던 고기를 사람들이 먹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인의 식탁에 고정적으로 오르는 음식이 됨. 물론 고기를 먹을 정도로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 한해서 그랬다는 말이다. 숯불에 고기를 굽거나 뜨겁게 달군 냄비에 얇게 썬 고기를 넣고 끓이는 것과 같은 몽골식 조리법도 고려인에게 소개됨. 중국인들의 여행기는 한국인이 13세기부터 어떻게 고기를 다시 먹기 시작했는지에 관해서 매우 흥미진진하고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서긍은 선화봉사고려도경에서 고려인이 12세기에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양고기, 돼지고기를 거의 먹지 않는다고 전한다. 그러나 1488년 명나라 사신으로 조선에 온 동월이 쓴 조선잡록에는 조선사람들이 쇠고기, 양고기, 돼지고기, 거위고기를 어떻게 먹었는지 설명하면서, 그 가운데 양고기를 가장 좋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식생활에서의 이같은 두드러진 변화는, 말할것도 없이 한반도에서 몽골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의미. 다시 말해, 금속제 식사도구가 한국인 사이에서 꾸준히 인기가 있었고, 지금까지도 그 명맥을 이어온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금속제 식사도구가 널리 사용되었던 당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고기를 먹는 것과 관련해 더욱 내구성이 높고 견고한 식사도구가 필요했기 때문일 수도 있음. 두 경우 모두 양고기 등 여러 동물고기의 섭취가 총체적으로 늘어난 것을 포함해, 유목민의 요리와 문화의 영향력 때문이라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 없다.

- 젓가락 두 짝을 한데 모았을 때 또 다른 기능은 음식조각을 꼭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꼭 집는다는 말이 지나치게 강하고 공격적인 표현이기는 하다. 왜냐하면, 음식물은 그것을 집어올리고 나르는 데 딱 피룡한 만큼보다 더 큰 압력은 결코 견뎌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젓가락의 움직인은 재질(목기나 칠기)에 따라 훨씬 더 부들워질 수 있다. 그 동작에는 안아 옮길고 아이를 조심스레 다루는 어머니의 손길 같은 그런 포근함이 있다. 그때 가해지는 힘은 더 이상 강제로 눌러서 밀어내는 힘이 아니다. 우리가 음식을 대하는 중요한 태도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젓가락은 결코 음식물을 찢거나 썰거나 길게 자리지 않으며, 결코 손상을 입히지 않는다. 다만 음식물을 분류하고 뒤집고 옮길뿐이다. (롤랑 바르트, 기호의 제국)

- 일본어로 하시라고 말하는 젓가락은 다리를 뜻하는 말과 발음이 같다. 일본인에게 젓가락은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에서 실제로 사람과 사람, 인간의 영역과 신의 영역, 그리고 산 자와 죽은 자, 현세와 내세 사이의 영적 소통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예컨대 군인이 전쟁터에 나간 것처럼 누군가가 집을 멀리 떠나 있을 경우, 나머지 가족 구성원은 집에서 밥을 먹을 때 밥상에 그의 젓가락도 놓고 음식도 차려놓고는 한다. 이렇게 차려진 밥상을 가게젠이라 부르는데, 객지에 나간 사람의 안전과 안녕을 비는 마음을 표현한 것. 일본인은 어떤 사람이 쓰던 젓가락에 그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의 안전을 기원하는 가족의 소망이 그 다리를 통해 전달될 수 있다고 생각함. 사람이 한 번 쓴 젓가락에 그의 영혼이 깃든다는 이런 믿음은 일본인이 일회용 젓가락을 즐겨 사용하는 이유도 되었다.

- 일본인은 현세와 내세를 서로 소통시키는 행위를 하시와타시(다리를 놓음)라 부름. 따라서 젓가락은 고인을 저 세상으로 보내는 마지막 임무를 완수하기 위한 장례식 때 반드시 있어야 하는 필수품이다. 갓 태어난 아기를 어른이 젓가락으로 먹이는 의식과 마찬가지로, 임종한 사람에게도 그가 가장 좋아하는 밥그릇에 젓가락 한 쌍을 꽂아서 밥을 준다. 밥그릇은 베갯맡에 두기에 그것을 마쿠라메시(우리말로 사자밥)라고 부르고, 밥그릇에 꽂은 젓가락은 세워서 꽂는다 하여 다테바시라 부른다. 고인에게 마지막 식사를 바친 뒤, 젓가락은 일본 전통 장례식에서 한 가지 역할을 더 수행한다. 그것은 하시와타시 행위다. 불교의 영향을 고려할 때, 일본인이 시신을 화장하는 것은 오랫동안 확립되어온 풍습이었다. 시신을 화장한 뒤, 상가의 가족들은 젓가락을 한 쌍씩 들고 타고 남은 잿더미에서 유골들을 집어서 옆 사람에게 줄지어 전달. 이 행위는 그들과 죽은자, 현세와 내세 사이를 영적으로 연결하려는 것임. 실제로 일본인은 인생은 젓가락에서 시작해 젓가락으로 끝난다는 격언을 즐겨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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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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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자는 마지막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감각이 존재한다. 몸의 기능이 소진되어 거절의사를 표현하거나 고통에 저항하지못할 뿐이다. 억지로 심폐소생술을 실시하면 혼수상태의 환자가 갑자기 깨어나 눈을 번쩍 뜨고 고통스런 신음을 내지를 수도 있지만 심폐소생술을 멈추는 환자는 곧 혼절한다. 
가족들은 환자를 떠나보내기 실은 마음에 의사에게 할 수 있는 응급처치를 모두 해달라고 하고, 의사도 가족에게 차마 나쁜 소식을 알릴 수 없어서 전력을 다해 응급처치를 한다. 이 경우 가족들이 보는환자의 마지막 얼굴에는 평온함을 찾아볼 수 없다. 심지어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이 되고 눈도 감지 못하거나 피를 토하기도 한다. 

- 뇌사판정 기준에 따르면, 환자에게 산소를 충분히 공급하고 인공호흡기를 제거한 후 10분 안에 자가호흡을 하지 않으면 뇌사로 판정. 하지만 의사들은 그 아이에게 섣불리 뇌사판정을 내릴 수가 없다. 부모들의 간절한 희망을 매정하게 깨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산소를 충분히 공급한 후 인공호흡기를 제거하고 10분을 기다리는 것은 몸 안에 산소가 충분한 상태에서 10분 동안 대사가 일어나 세포들이 깨어날 경우 이산화탄소가 만들어지고 증가한 이산화탄소가 뇌간을 자극해 호흡을 유발하기 때문.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10분 내에 자가호흡을 해야 한다. 만약 자가호흡을 하지 못한다면 뇌간이 이미 기능을 상실했다는 뜻이다.

- 죽음을 앞둔 환자를 각종 기계로 포위해 놓으면 환자를 기계로 대하게 된다. 의사가 마음으로 환자와 가족을 보살필 수는 없을까? 환자를 살릴 수 있다고 판단된다면 의사는 가족에게 앞으로의 치료계획을 정확히 알려주어야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환자의 가족을 기약도 없이 허공에 매달아 놓아서는 안된다.
의사가 생명을 구하기 위해 환자에게 취하는 조치들은 의료상식에 따른 합리적 방법이어야 한다. 의사는 그런 방법을 이용해 환자가 어떻게 사망할 것인지를 결정하고 사망시간을 뒤로 미룰 수도 있다. 하지만 의술이 한계에 다다른 상황에서는 의료상식에 따르는 것이 오히려 환자와 가족을 고통에 빠뜨린다.
외국에서는 회복될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중환자실에서 인공장치로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 살릴 수는 있지만 살릴 기회를 얻지 못해 죽는 환자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에 이를 의료자원의 낭비와 불공평한 분배로 인식.
하지만 가끔은 가족들이 환자를 포기하지 못하고 의사를 고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바람에 의사가 포기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음. 쇠약할 대로 쇠약해져 점점 죽음과 가까워지고 있는 환자를 인공호흡기로 지탱시키며 에크모, 간투석, 신장투석 등을 계속 행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낭비인가.

- 세속적인 시선을 배제하고 죽음을 바라본다면 죽음은 모든 가족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죽음 앞에 서면 누구나 걸음을 멈추고 과거를 돌이켜보게 된다. 사람이 살면서 반드시 해야 할 네 가지 일은 사랑, 감사, 사과, 작별이라는 말이 있다. 쉬운 것 같지만 실제로 하려면 마음과 시간이 필요한 것들이다. 사랑하고, 감사하고, 사과하고, 작별해야 할 일이 있다면 미루지 말자. 서두르지 않으면 너무 늦어 버려 평생의 한이 될 수도 있다.

- 음식물을 투여할지, 항생제를 사용할 것인지에 대해서 법적인 강제규정은 없다. 하지만 학리적으로는 이렇게 정의된다. '환자의 편안함과 존엄성을 위해 말기 환자에게 부담을 줄 수 있는 모든 치료는 중단할 수 있다.'
사망과정에 대해 일반 의사들은 자세히 알 필요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중환자실 의사들은 경험이 풍부한 몇몇 의사 외에는 임상을 통해 배워감 환자를 대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환자의 혈압이 50-60밖에 되지 않을때는 음식물을 공급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 장이 연동운동을 하지 않기 때문. 그런 경우 음식물을 계속 공급하는 것은 환자의 부담만 가중시킨다. 이걸 모르는 일부 간호사들이 DNR 동의서를 작성했다고 해서 환자에게 음식물도 주지 않고 방치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 환자의 사망이 임박했을 때 의사가 가족들에게 환자가 병원을 떠날 때 입을 옷을 준비하라고 할 수 있다. 관에 들어갈 대 입는 수의가 아니라 염을 하기 전까지 잠시 입고 있을 옷이다.
중환자실에서 사망하는 환자들은 심박을 유지하기위해 각종 주사제와 수액을 24시간 투여받는데 환자의 대사기능이 매우 약하므로 수분을 배출하지못해 몸이 심하게 부어오른다. 불과 며칠 사이에 체중이 10키로 가까이 늘어나고 얼굴이 가족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변형된다.
의료진이 가족들에게 마지막 순간에 입을 옷을 준비해 달라고 말하지 못한 경우에는 가장 큰 치수의 환자복을 입힌다.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가족딜이 환자가 평소에 입던 옷을 갖고 왔다가 옷이 들어가지 않아 당황하며 울음을 터뜨리는 경우도 많다.

- 환자는 고통없이 존엄을 지키며 아름답게 세상을 떠나게 하고, 환자의 가족들은 안타까운 응어리를 남기지 않고 하루 빨리 슬픔을 극복해 정상적 생활로 돌아가게 하며,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죽음이라는 것을 통해 인생의 의이를 배우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호스피스 의료의 목표다.

- 일반적으로 환자의 혈압이 떨어지고(수축기 혈압 40정도) 심박이 함께 느려지기 시작하면 인고호흡기를 부착했을 경우 그로부터 3-4시간 후가 환자의 예상 사망시점이다. 그때쯤이면 심장의 기력이 저절로 소진되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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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베일의 시간

인문 2025. 1. 22. 07:42

- 나에게 기적은 다시 얼어서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내와 하루하루를 함께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삶은 날마다 기쁨이고 기적입니다. (크리스토퍼 리브)

- 인생이라는 시내에서 황금빛 순간들은 빠르게 흘러가고 우리가 보는 것은 모래뿐이다. 천사들이 찾아오지만, 우리는 그들이 떠나 버린 뒤에야 그들이 왔다갔음을 안다. (조지 엘리엇)

- 임종하시는 그분들은 정말 고단하고 힘든 삶을 살아왔다. 태어나는 자리가 굉장히 축복받고 축하받는 자리인 것과 똑같이, 마지막 인생의 무대를 내려가는 자리 또한 축복받는 거룩한 자리다. 그분이 살아온 인생을 박수쳐 드리면서 정말 고생하셨다고, 수고하셨다고, 이제 편안해지시라고 인사를 드립니다. 그래서 저는 사망선고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 죽음을 삶와 떨어뜨려서 생각하면 두렵고 어둡게만 느껴지는 것 같아요. 삶의 끝자락에 오는 것이 죽음이고, 어쩌면 삶의 일부거든요. 삶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죽음은 삶의 완성되는 시점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삶과 죽음이 순환되는 것이 자연의 섭리고, 한 세대가 가고 또 다음 생애가 이어지쟎아요. 어떤 신부님께서 '내 정신은 후손에, 내 육체는 자연에, 내 영혼은 하느님께 드리는 온전한 봉헌이 죽음이다'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 임종을 앞둔 환자분들께 뭘 원하는지 물어보면, 아프지 않고, 추하지 않은 모습으로 가고싶다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아요. 가족들한테 짐이 되지 않게 해달라는 말씀도 하시구요. 그 말씀은 곧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품위를 잃지 않고 가고 싶다는 이야기거든요.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보면, 일단 육체적 고통이 조금 완화되어야 해요. 어떤 분들은 마약성 진통제에 대한 오해를 갖고 있어서 그런 걸 벌써 쓰면 어떡하나, 지레 겁먹고 통증을 참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부분은 도움을 받는 게 좋습니다.
통증이 완화되면 비로소 우리가 해야 하는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본인이 가고 난 빈자리가 혼란스럽지 않게 뒷 일을 정리할 필요가 있어요. 사회적, 경제적, 법적인 책임을 이임하고 정리해야죠. 
그 다음단계에서는 용서와 사랑을 표현하면서 가족과 친지들과의 관계를 정리해야죠. 
그리고 나와 나 자신의 관계를 정리해야 합니다. 많은 환자분이 자신의 인생을 돌아봤을때 허무하다고 느끼시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생에 대해 가치와 의미를 재발견하고 '내가 잘 살았구나'하며 평화롭게 마무리하는 것이 좋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절대자와 대면하게 되는 것 같아요. 종교가 있는 분이나 없는 분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나라는 존재, 인간으로서의 유한성을 받아들이고 초월자에게 겸허히 맡기는 모습으로 생을 마무리하는 게 정말 아름다운 임종인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것을 혼자서는 할 수 없어요.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진정으로 이해해주고 사랑해 주는 한 사람이 동반해주는 게 꼭 필요한 것 같아요. 그게 가족일수도 있고, 간병인일수도 있고, 친구일수도, 의료인일수도 있죠.

- 가진 것을 다 내려놓고 가벼워지는 연습을 많이 해야 실제로 임종순간이 왔을 때 그것이 가능한 것 같아요. 갑자기 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힘들게 돌아가시는 분들의 공통점을 보면 물질적 집착이 있는 분들이나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한 분들이엥. 곁에 있는 사람들이 결핍을 채워줘야 하니 많이 힘들죠. 또 다른 사람한테 상처를 많이 준 사람들은 죽음 앞에서 많이 몸부림치는 것 같습니다. 남에게 준 상처들이 죄의식이나 죄책감으로 자신의 무의식속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지요. 죽음은 절대자이자 초월자라 직면하는 것이라서, 죽음과 직면할 때 죄의식이 자기자신을 괴롭히는 거라고 생각해요.

- 아름다운 임종을 맞이 하기 위해서는 먼저 죽음이 뭔지 알고 받아들여햐 하겠죠. 죽음을 앎으로써 내 생명의 본질도 이해하게 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도 배우죠. 그렇게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죽음과 맞닥뜨렸을 때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일은 아니에요. 성장과정에서부터 죽음에 대해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아요. 부정적 관념보다 좀 더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죽음을 나의 한 부분이라고 인정하면서, 살아 있는 동안 최대한 행복하게 즐기려는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또한 사람으로서 누릴 수 있는 자유, 기쁨, 보람, 이런 모든 것을 누리고 잘 살았을 때 죽음을 아름답게 준비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행복하게 살 때만 행복한 죽음이 찾아옵니다. 삶의 연속이 죽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 죽음을 맞이한다는 표현이 더 긍정적인 힘을 주지 않나 생각합니다. 당한다고 생각하면 너무 억울하고, 분하고, 화가나고, 분노가 생기는 그런 부정적 느낌이 들죠. 그래서 회피하게 되고, 계속 두려워하게 됩니다. 저는 죽음을 맞이하고 싶거든요. 맞이한다는 건 내가 마음을 열고 나아갈 때만 가능한 거쟎아요. 죽음을 당한다는 개념보다 맞이한다는 마음으로 살면 좀더 생동감있고 활발하게, 자유롭고 편안하게 살 수 있습니다.
죽음의 자세는 삶의 자세와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생명에 대한 존엄성이랄까, 이끌림에도 영향을 주죠. 많은 철학자들이 이렇게 말합니다. "삶을 잘 살았을 때 죽음도 잘 맞이한다.", "아름답게 살아갈 때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한다." 맞는 말입니다. 한 분 한 분 돌아가시는 모습은 각자 조금씩 차이가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세상을 살아오신 분들을 보면 모든 것이 넉넉하고, 수용을 잘 하시고, 편안해하시죠. 

- 잘 사는 사람은 잘 죽습니다. 그리고 평소 긍정적인 사고를 하시는 분이나 활기차게 지내는 분들은 막상 그런 상황이 닥쳐도 비교적 잘 넘기시더라구요. '내가 지금까지 다섯 개를 할 수 있었는데, 이렇게 되면 그래도 하나는 할 수 있지 않을가? 다행히 숨은 쉴 수 있지 않을까, 당장 여기서 숨이 멈춘게 아니니까. 내가 생각은 할 수 있지 않나?' 이런 식으로 매번 긍정적인 사고로 바꾸는 분들도 계시더라구요. 
밤에 잔다는 것은 오늘을 마감하는 거잖아요. 어떤 면에서는 죽는다고 볼 수도 있죠. 내일은 새로운 삶이죠. 우리는 항상 오늘을 살지요. 오늘을 살면서 동시에 내일에 도달할 수는 없죠. 지금 이순간,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근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돌아가시는 분들을 보며 느꼈습니다. 내일로 미루지 말자고. 내일은 우리한테 그냥 다가오지 않으니까 오늘을 잘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밤새 자다가 그냥 갈 수도 있으니까요. 심장마비가 오면. '밤새 잘 주무셨어요? 밤새 안녕하셨어요?' 우리 인사말에 그런 말이 있잖아요. 돌아가시는 분들 옆에서 계속 보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가족들에게도 우리 오늘 하루만 생각하자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이렇게 아픈데 내일을 어떻게 생각하나, 그런 생각은 하지 말고 오늘 하루만 기쁘게 잘 살자고. 숨만 쉬고 있을지라도, 그래도 숨을 쉬고 눈을 뜨고 있기 때문에 이 가을이 오는 것을 볼 수 있지 않나, 생각하면서 오늘에 감사하자고. 내일은 우리가 알 수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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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살아온 대로 죽어간다. 기적같은 마무리는 머릿속에서나 존재할 뿐이다. 때가 되면 몸도 마음도 준비가 되겠지, 내 마지막은 우아하고도 담담하겠지, 하고 생각하지만 삶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지 않는 이상 마지막 순간은 생각만큼 아름답지 않다.

-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라는 질문을 평생 놓지 않았다고 함. 죽음을 통해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연금술사, 퀴블러 로스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까닭은 자신이 영원히 살 것처럼 삶을 영위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면 그 하루의 삶을 손해보는 셈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날은 바로 오늘입니다.
타임아웃은 끝이자 시작입니다. 만약 지금의 상황이 힘들고 아프고 몸서리치게 싫다면 잠시 타임아웃을 요청하고 자신이 정말 힘들고 어려웠던 순간을 생각해보십시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저 지나가는 일의 한 부분일 뿐입니다."

- 죽는 법을 배워라. 그러면 그대는 사는 법을 배우게 되리라. (티벳 사자의 서)

- 언제든지 죽음이 닥쳐올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죽음은 우리 인생에서 가장 큰 스승이자 가장 큰 공부입니다. (정목스님)

- 죽음을 앞둔 환자들은 종종 익숙한 환경을 떠나 응급실로 내몰리기 때문에 죽음은 더욱 외롭고 비인간적인 것이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환자들은 건강한 상태에서라면 결코 참을 수 없는 일들을 겪는다. 온갖 소음과 조명, 기계 속에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퀴블러 로스, 죽음과 죽어감)

- 병원에서 환자는 시간이 갈수록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물건처럼 취급받음. 환자는 마음의 안정, 편안한 분위기, 존중 같은 것을 기대하기 어렵고 모든 결정은 환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뤄진다.

- 누구나 이따금 '내 삶이 달랐더라면' 하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오히려 마음에 상처만 남길 뚠 달라지는 건 없다. 그저,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의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한 자세다. 삶은 피하도록 되어 있는 게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살아내도록 되어 있다.

- 무기력하고 고통받는 한 인간을 보는 순간 겁에 질려 외면하지만 않으면 우리는 어떻게든 환자에게 남아 있는 능력을 살려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환자들이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식물인간처럼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살아 있도록 돕는 것이 곧 그들이 죽음을 돕는 것이다. (퀴블러 로스)

- 하루하루를 후회없이, 오늘 하루가 얼마나 행복한 순간인지 소중한 시간인지 알게 된다면 우리의 삶이 어떻게 달라질까?

- 불교에서는 임종순간을 굉장히 중요시함. 임종이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면 그 후유증이 남아 영혼의 다음 여행길이 힘들다고 한다. 의학적 사망진단이 내려진 이후에도 영혼은 자신의 몸에 들락거리며 죽음을 실감하는 과정에 있는데, 이때 가하는 작은 고통도 영혼은 강렬하게 느낀다고 함. 따라서 염을 하는 과정도 마치 신생아를 목욕시키듯 조심스러워야 한다. 어떤 면에서는 임종단계를 또 다른 탄생으로 여겨 숭고하고 편안하게 만들워주어야 한다는 입장.
무속에서는 교통사고 같은 끔찍한 상해를 당한 영혼은 반드시 굿을 해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가령 진오기굿은 임종 닷이에 큰 충격을 받은 영혼을 달래주는 의례다. 영혼이 큰 충격으로 몸에서 이탈한 뒤 육신이 온갖 상처로 뒤덮인 걸 보면 극도의 분노와 한이 남기 때문. 이로 인해 자기가 뜻한 곳으로 가지 못하고 한을 풀기위해 구천을 떠돌거나 나쁜 방향으로 갈 수 있으므로 영혼의 상처를 달래줄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 만약 우리에게 마음이 있고 영혼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마지막 순간이 이토록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 이 모든 비극 중에서 최악의 비극은 젊어서 죽는 것이 아니다. 일흔 다섯살까지 살지만 한 번도 진정으로 살지 않은 것, 그것이 가장 큰 비극이다. (마틴 루서 킹)

- 오늘 아침 당신이 깨어난 이유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절대 자신을 포기하지 마라. 당신이 이 세상에서 가져다줄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하지 마라. 살아 있는 한, 당신은 이 세상에서 필요한 존재다. (레지너 브릿)

- 당신이 태어났으르 땐 당신만이 울었고 당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미소를 지었습니다.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날 때엔 당신 혼자 미소짓고 당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울도록 그런 인생알 사십시오. (김수환)

- 제대로 마주하지 않아 처리하지 못한 슬픔은 언젠가 스스로 드러나며 그것도 다른 방향으로 드러나는 속성이 있다.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슬픔은 무감각, 공격성,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 등으로 바뀌는 경향이 있다. (인생의 진정한 법칙, 캔 드럭)

- 우리가 어떤 아픔을 겪었을 때 그 아픔이 무뎌졌거나 덮어졌어도 그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이 필요해요. 그 아픔이 물에 잠긴 쓰레기라면 그것을 걷어내기 위해 물은 다시 한 번 흙탕물이 될 수밖에 없어요. 그 과정, 그 여과가 필요한 거에요. 얌전하게 쓰레기만 건지지는 못해요. 물을 한번 뿌려야 해요. 그 쓰레기를 다 건져냈을 때 물은 흙탕물이 되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물은 다시 맑아져요. 치유가 되려면, 아픔 이후의 깨달음을 얻으려면 이런 과정과 과도기를 거쳐야 해요. (헬레나 수녀)

- 삶은 잠을 통해서 우리를 죽음에 길들이고, 꿈을 통해서 또 다른 삶이 존재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타나토노트 중에서)

- 신께서 계획하신 길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능할까요? 
네, 가능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건 실수입니다. 
고통을 피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가능합니다. 하지만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할 겁니다.
무언가를 정말로 경험하지 않고도 안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네,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 일들이 진정으로 당신의 일부가 되지는 못할 겁니다. (파울로 코엘료, 알레프)

- 삶의 마지막 시간에 이르렀을 때 우리에겐 수용단계, 즉 자기 자신을 구원할 기회가 오지만 사람이 살아온 태도와 습관과 성격은 마지막까지도 참 변하기가 힘들다. 신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다. 너를 해방시키라고, 너를 구원하라고. 하지만 준비된 자만 그 구원의 선물을 받을 수 있다. 수용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 않는다. 오로지 준비된 사람에게만 찾아온다. 우리는 준비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 순간 신이 주신 기회, 그 마지막 구원을 위해

- 우리는 병원에서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끝없이 치료를 받는 게 최선이라고 잘못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비용을 떠나 환자 자신이 불필요하게 커다란 고통을 겪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한 생명으로서 삶을 마무리할 시간을 잃는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불행한 일입니다.

- 사별 후 남은 가족은 대부분 크고 작은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 사람은 갔는데 나는 이렇게 잘 살고 있다는 것, 잘 먹고 있다는 것, 행복해한다는 것 등 평범한 일상에 대한 미안함이다. 
이런 끊임없는 반추는 남겨진 사별가족이 일상으로 회귀하는 것을 가로막는 거대한 마음의 장벽이다. 사별가족 모임을 주선하는 한 수녀는 사별가족의 뿌리깊은 죄책감은 매우 위험하다고 말한다. 그런 죄책감은 행복의 싹 위에 무겁게 놓여 있는 거대한 바위와 같다. 스스로 놓은 그 바위를 옆으로 옮기지 않는 한 행복과 평온은 결코 싹트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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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푸드 한국사

역사 2025. 1. 22. 07:40

- 진짜 위스키는 너무 비쌌다. 또 희석식 소주에 익숙한 한국 주당들에게 위스키의 알콜 농도는 너무 높았다. 폭탄주는 이런 사장으로 탄생한 한국 주당들의 창작물이다. 80년 서울의 봄이 실패로 끝아고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한국경제는 급속히 성장. 80년대 초중반 서울 강남지역은 스탠드바와 나이트클럽, 그리고 룸살롱 등 유흥업소의 전성시대였다.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이곳에서 폭탄주를 돌리며 값비싼 위스키를 마셨다는 만족감에 도취. 90년 위스키 수입 자유화로 외국 정통 위스키를 맛볼 수 있게 되었지만, 이미 폭탄주에 취한 한국인은 값비싼 수입 위스키조차 맥주를 섞어 폭탄주로 남용하거나 뇌물로 주고받음. 97년 IMF 위기가 닥치기 전까지 아시아에서 한국이 새로운 위스키 시장으로 부상한 배경도 여기에 있다.
한국 위스키 시장 개방 초기인 91년에는 스탠다드급 위스키가 많이 판매되었지만, 90년 중반부터 프리미엄급 위스키의 판매가 급속도로 상승. 그러다 01년에 들어서면 스탠다드급의 판매가 점차 하향추세를 보이고, 대신 슈퍼 프리리엄급이 새로운 시장을 형성하며 상승추세를 보임.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전반적인 한국 위스키 시장은 와인시장에 밀려 퇴보의 길을 걸음. 알콜농도가 높은 독주가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부정적 인식이 만들어낸 결과. 여기에 기업의 접대방식이 변화한 것도 한몫했다. 더욱이 경제성장이 둔화하며 비싼 위스키는 주당들의 입맛만 당길 뿐이었다. 룸살로에서 수백만원에 달하는, 권력의 상징 같던 위스키 폭탄주 대신 소주와 맥주를 섞은 소맥이 대중적 폭탄주로 자리잡음.
2000년대 이후 국내에서 유통되는 위스키 가운데 국내산은 4%에도 미치지 못함. 나머지는 수입산. 그래도 한국의 주당들이 위스키를 즐기는 방식에 변화가 나타남. 2010년대 초반 수도권을 중심으로 위스키바가 생김. 룸사롱 문제가 사회적으로 주목받으면서 위스키를 진심으로 즐기는 주당들이 위스키바를 찾기 시작. 2020년 코로나 상황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혼술 경향이 생기며 젊은 주당들이 위스키에 주목. 좋은 품질, 독특한 맛의 위시키를 찾는 매니아도 생겨났지만, 좀더 대중적으로 위스키를 즐기게 된 만큼 가성비 좋은 미국의 버번 위스키 수입이 급속하게 늘어남. 또 2020년 이후 한국의 젊은 주당들은 위스키와 탄산을 섞은 하이볼을 즐김다. 91년이 한반도에서 진짜 위스키가 법률적 시민권을 얻은 해라면, 2022년은 위스키의 진정한 맛을 아는 한국인이 탄생한 해로 기록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 초콜릿은 카카오 나무 열매의 씨를 볶아 분쇄한 가루와 밀크, 버터, 설탕, 향료 등을 섞어 만든 식품. 카카오 나무는 멕시코와 중미 북서부를 포함하는 메소아메리카 열대지역이 원산지. 열매는 긴 타원형으로 길이는 10-30센티. 카카오 열매는 노란색이나 짙은 갈색을 띠면 수확함. 이 딱딱한 열매 속에는 30-50개 정도의 씨앗이 들어 있다. 이 씨앗을 발효시키면, 불그스름한 갈색으로 변하며 향이 난다. 이것을 물로 씻어 건조한 후 가루 낸 것이 바로 초콜릿의 주재료다.
- 1828년 네덜란드 화학자 쿤라트 반 호텐은 카카오 열매 씨앗을 압착해 지방성분인 카카오 버터를 분리해 내는 기계를 발명. 그렇게 하면 초콜릿의 지방함량을 낮추고 가루를 쉽게 얻음으로써 그 가루를 덩어리로 뭉칠 수도 있었다. 게다가 그는 알칼리염 처리를 해 초콜릿의 떫은 맛을 줄이고 더 진한 색을 띠게 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에도 유통되는 네덜란드식 초콜릿이다.
하지만 네덜란드식 초콜릿의 상품화는 1847년 영국인 조셉 프라이가 프라이스 앤드 선이라는 회사에서 대량생한하면서 시작됨. 이후 유럽과 북미에서 다양한 종류의 초콜릿을 만들어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의 초콜릿이 세상에 나왔다. 20세기에 들어 초콜릿은 대량생산의 길을 걸었고,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다국적 기업의 등장으로 지구촌 구석구석 초콜릿이 퍼져나감.
초콜릿의 지구사를 펴낸 사라 모스와 알렉사더 바데녹은 20세기 초콜릿 광고가 여성성, 포르노그라피, 건강과 영양, 어린이, 단란한 가정 등의 이미지를 주로 사용하여 초콜릿을 이상화했다고 보았다. 이 광고들 속에 검은 그림자, 곧 인종, 이국정서, 노예라는 이미지가 판타지로 묘사되었음을 분석. 헨젤과 그레텔, 찰리와 초콜릿 공장, 심슨 가족과 같은 동화, 영화, 드라마에 그려진 초코릿의 이미지는 그 이면에 숨어 있는 불공정무역과 노동착취를 숨기는 장치로, 혹은 그러한 그림자에 빛을 던져주는 도구였다. 한국 기업의 초콜릿 광고에도 이런 양상은 적지 않음. 아프리카 카카오 열매 생산지인 가나가 마치 유토피아처럼 느껴지도록 유도하는 광고가 한때 인기를 누린 것처럼 말이다.

- 커리의 지구사를 쓴 콜린 테일러 센은 지구촌 곳곳에 존재하는 커리를 단 하나로 정의하기 어렵자고 밝혔다. 그래도 정의를 내린다면, 커리는 '향신료를 넣은 고기, 생선, 또는 채소로 만든 스튜로, 밥과 빵, 옥수숫가루를 비롯한 탄수화물 음식과 함께 먹는다'라고 규정. 이 정의대로라면 향신료가 들어간 모든 음식을 커리라 할 수 있지만, 커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향신료를 쓰느냐가 중요. 센은 커리나무의 잎이나 강황, 커민씨, 코리앤더씨, 고추, 호로파를 섞어 만든 가루로 맛을 낸 모든 음식을 커리라고 볼 수 있다고 했다.

- 2000년대 이후 인도를 방문하는 한국인이 증가하며 카레라는 이름도 커리로 바뀌어 감. 21년 3월 한 식품회사에서는 인도의 델리와 마드리스, 타이의 유명한 커리들을 레토르트 제품으로 내놓아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전자렌지에 1분만 돌리며녀 바로 먹을 수 있는 이 제품은 국내 카레시장의 판도를 바꾸어 놓음. 그러자 기존 카레시장을 독점해 오다시피한 기업에서도 본고장의 맛에 가까운 커리제품을 시장에 출시. 22년 현재 한국의 커리시장은 어느 업체의 제품이 본고장의 커리맛에 가까운가를 두고 경쟁중이다.
80년대 이후 음식의 역사를 연구하는 일부 학자들은 제국과 식민지의 관계가 해체된 후에 오히려 식민지 음식이 제국으로 이동하는 사례가 있음을 증명하기 시작. 가장 대표적 사례가 커리다. 인도 사람들이 외국으로 나가면서 커리는 다양한 형태로 진화. 영국인이 만들어낸 커리파우더는 북미와 오스트레일리아와 일본으로 전해짐.
60년대부터 한국 사회는 일본식 카레를 한국식으로 바꾸어갔다. 이 과정에서 카레국수, 생선카레튀김, 카레참치캔, 카레치킨 프라이드 등이 개발됨. 그려나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인은 인도아대륙과 동남아 본고장 커리 맛에 푹 빠져 있다. 미국 민속학자 루시 M 롱은 국제적 관광이 확장될수록 사람들은 관광지에서 맛보았던 음식을 귀국후에도 먹고 싶어 한다고 보았다. 2010년대 이후 한국 커리시장의 변화는 해외여행을 통한 한국인의 타 문화 경험이 가져온 결과다. 본고장의 커리맛을 알고 즐기는 사이에 한국식 카레의 자취도 엷어지고 있다.

- 독일의 한 소비자 데이터 분석기업은 2018년 기준 전 세계 도시 중 바게트, 식빵, 롤빵 같이 반죽을 부풀려 만든 로프르레드 1키로당 값이 가장 비싼 도시로 서울을 꼽츰. 서울의 1키로당 빵값이 15.59달러인 데 비해, 파리는 6.33달ㄹ, 홍콩은 4.16달러였다. 왜 서울 빵값이 세게에서 제일 비쌀까? 빵 재료 대부분을 수입하기 때문. 하지만 밀과 설탕을 수입하는 홍콩도, 심지어 도쿄 현의점에서 판매하는 빵값도 서울보다 훨씬 싸다. 몇몇 대기업이 빵집 프랜차이즈를 독점하고 있다는 것과 빵은 한국인의 주식이 아니라서 정부의 물가통제 대상에 들지 않는다는 점을 그 이유로 들 수 있음. 
- 밀가루 외에도 빵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는 효모다. 효모를 넣으면 밀가루 반죽이 부풀어 먹기 좋게 됨. 빵을 부풀리는 방법은 역사상 세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강한 열을 반죽에 가해 반죽에서 나오는 증기로 부풀리는 방법. 효모를 사용하지 않고 이렇게 만든 빵이 플랫브레드다. 
다른 하나는 공기중 젖산균을 이용해 자연적으로 발효시키는 사워도 발효법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스트 발효법이다. 사워도 발효버과 이스트 발효법을 이용해 만든 것이 로프브레드다.
빵의 역사를 연구한 학자들은 고대 이집트에서 보리술을 만들며 생긴 박테리아가 제빵사에게 전해져 사워도 발효빵이 만들어졌다고 추정함. 19세기 후반까지 유럽의 제빵사 대부분은 보리술, 그중 에일을 만드는 과정에서 생긴 침전물에서 이스트를 구해 밀가루나 곡물가루의 반죽에 넣어 빵을 부풀려 구워냈다.

- 차가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전분음식과 비전문음식을 한꺼번에 먹는 식사방식을 가진 한국인에게 식후 짠맛을 상쇄해주는 음료는 본래 숭늉이었다. 70년대 말 이후 전기밥솥이 널리 보급되며 더는 가정에서 숭늉을 만들 수 없게 됨. 그러면서 숭늉의 자리를 커피, 그중 커피믹스가 대신하기 시작. 숭늉에서는 탄수화물에서 나온 포도당의 단맛과 탄맛이 나는데, 커피믹스 역시 단맛과 탄맛이 난다.
이것이 커피믹스가 숭늉을 대신할 수 있었던 이유. 그러나 단맛이 없는 차는 '밥+탕+반찬'의 식사를 하는 한국인에게 식후 음료로 적당하지 않음. 이것이 한국인이 커피와 달리 차를 가까이 하지 않는 이유중 하나다.
2010년대 이후 해외여향을 하거나 해외에 머물며 다양한 차를 마셔본 젊은 층을 중심으로 차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늘고 있음. 이들은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외국차의 소비를 지속하고 있음. 또 그즈음 단맛이 아는 홍차를 비롯해 영국, 프랑스, 캐나다 등의 블렌딩티가 한국에 들어옴. 하지만 2020년대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차는 한국인들로부터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잇음. 그 이유 중 하나는 커피에 대한 한국인의 엄청난 열정이다. 차는 한국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글로벌 푸드다. 하지만 한국의 차는 재배지가 좁고, 조선시대 성리학에 밀렸고, 20세기 이후 커피와 산업음료에도 밀리며 여전히 식탁의 가장자리에서 겨우 버티는 중이다.

- 2020년대 한국의 젊은이들은 마라의 맛에 푹 빠져 있다. 마라는 고추, 후추, 천초, 이 세가지를 적절하게 조합. 마라의 매운맛 중 '마'의 맛은 천초와 후추에서, '라'의 맛은 고추에서 나옴. 또 마라탕에는 진피, 초마, 초장, 강즙, 산향, 마장, 개말같은 매운맛 향신료와 조미료도 들어 있음. 2000년대 후반 중국 마라탕은 서울 베이징식 중국음식점과 중국교포가 운용하는 꼬치구이집에서 판매되기 시작. 핫소스와 불닭의 매운맛에 매료되어 있던 한국의 젊은이들은 익숙지 않은 향신료가 가득한 마라탕을 예상보다 쉽게 받아들임. 미국식 핫소스인 스리라차의 매운맛도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음. 

- 콜럼버스를 비롯해 유럽인이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이후,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견된 산물 대부분은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상인에 의해 유럽을 비롯한 아프맄, 아시아에까지 전파됨. 아메리카 대륙의 산물은 어느 특정한 시기에 어느 특정한 산물이 전파되었다고 보아서는 안됨. 곧 다양한 전파경로와 과정을 통해 전 세계로 퍼짐. 이런 점에서 한국고추를 비롯호 전 세계의 각종 칠리페퍼에 관한 식물학적 연구가 이 논쟁에 앞서 제시되어야 함. 칠리페퍼의 야생종은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 널리 발견됨. 한국고추의 한반도 자생설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한국고추의 야생종이 한반도에서 발견되어야 함. 그리고 유전학적 연구를 통해 칠리페퍼의 식물학적 계통을 밝히고, 한국고추가 아메리카 대륙의 칠리페퍼와 서로 다른 유전학적 계통임이 검증되어야 할 것임.
- 청양고추는 83년 중앙종묘에서 개발함 품종. 중앙종묘는 커리 제조에 필요한 캡사이신 추출용으로 타이 재래종과 제주도 재래종을 잡종교배하여 신품종을 개발했는데, 예상보다 캡사이신 추출률이 높지 않아 경제성이 떨어졌ㄷ. 중앙종묘는 이 품종을 버리기 아까워 시험재배에 참여한 경북 청송과 영양 농민들에게 무료로 씨앗을 주었다.
농가에서 재배한 청양고추의 풋고추를 인근 횟집에 제공했는데, 횟집에서 매운탕에 넣었더니 손님들의 반응이 좋았다. 이 사실이 중앙종표에 알려져 신품종 고추는 청송과 영양에서 따온 청양고추라는 이름을 판매되기 시작. 그러나 중앙종묘는 97년 IMF로 이듬해 멕시코 종자회사 세미니스에 인수됨. 세미니스는 다시 미국 몬산토에 넘어감. 오늘날 청양고추의 재산권은 몬산토에 있다.

- 20세기 100년 동안 한국인의 식탁은 고추의 양이 엄청나게 늘어났고 그 품종도 다양해졌으며, 매운 정도도 그 전에 비해 훨씬 강해짐. 하지만 그 이면에는 식재료의 신선도와 다양한 조리법을 매운맛의 고춧가루로 덮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더욱이 70년대 외식업의 성장은 한국음식의 매운맛을 더욱 강화. 심지어 멕시코의 핫소스를 응용한 새로운 외식업이 소비자의 입맛을 자극하면서 20세기 말에는 새로운 매운맛의 시대가 열림. 돌이켜보면 식민지기 의학자들이 제기했던 고추의 다량식용문제는 오늘날 한국음식에서 크게 개선해야 할 문제가 되었다.

- 고추와 달리 후추, 정향, 육두가, 석란육계는 수입에 의존. 이 가운데 석란육계는 여성 냉증 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하여 수요가 늘어났지만, 수입이 쉽지 않았다. 60-70년대에는 석란육계를 비롯해 후추까지 정부가 나서서 수입을 금지. 외화유출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80년대 들어 시나몬커피가 유행하며 석란육계 수입이 증가. 이런 현상은 수입상과 다국적기업의 입김이 작용한 결과임. 
2000년대 들어서도 외국향신료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늘어남. 한 식품업쳬 관계자는 소비유형의 서구화와 퓨전화가 가속화되며 국내 향신료 시장이 꾸준히 성장하리라 예측했는데, 그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이제 백화점과 마트의 향신료 전문매장에서는 외국의 향신료뿐 아니라, 직접 제조한 다양한 향신료를 판매하고 있음. 이는 2000년대 이후 매년 국내 향신료 시장이 20-30% 성장한 결과임.
한국의 식품시장에서 향신료가 중요상품으로 잡았다. 90년대 이후 해외여행이나 해외거주경험이 있는 한국인이 많아지며 세계 향신료 시장에 한국인의 식탁이 포섭되기 시작한 결과. 조선시대 약재로 여겨졌던 후추, 정향, 육두구, 석란육계 등의 다양한 향신료를 이제 백화점이나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향신료의 지구사의 저자 프레드 차라는 '이제 집과 슈퍼에 있는 향신료를 비롯한 다른 식품의 포장용기를 확인해 보라. 음식점에서 식사할 때는 향신료 재료를 물어보고 인터넷에서 향신료 산지가 어디인지, 각각 고유한 역사를 지닌 이 향신료를 사용한 요리법은 어떤 것이 있는지 검색해 보라'고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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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122

Quote of the day 2025. 1. 22.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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