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물개입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 장기적으로는 이득보다 해악이 더 많다는 것을 데이터가 보여준ㄷ면 DSM같은 진단매뉴얼에 의해 광범위하게 촉진되는 과잉의료화 또한 그 자체로 나쁜 정신건강결과에 기여하는 중요한 원인이다. 어떤 사람들은 정신가 진단을 받음으로써 인정받는 기분을 느꼈다고 보고하며, 그 진단을 중심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하기도 하지만, 연구는 우리의 정신적 고통을 정신적 질환, 질병, 혹은 기능장애로 재구성하는 것이 회복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 이런 문제를 의학적 문제나 정신질환을로 부르는 관점이 부추기듯,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가 생물학적 이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믿게 되었을 때 특히 그렇다. 예를 들어, 자신의 문제가 화학적 불균형에 의해 초래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은 이런 가설을 거부하는 사람들에 비해 회복에 대해 더 비관적 시각을 보이며, 더 강한 자기낙인가 자기비난을 경험하고, 더 나쁜 기대를 형성할 뿐만 아니라, 치료가 끝난 이후에 더 많은 우울증상을 경험한다. 자신의 고통에 대한 생물유전학적 설명을 수용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유사한 결과가 발견되었는데, 이런 설명은 많은 경우에 환자들과 정신건강 전문가들의 낙인화하는 태도를 증가시킬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상태가 만성적이라고 믿는 사람들의 절망감을 가중시킨다.
우리의 고통을 의료화하는 것이 이처럼 해로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이유중 하나는 사람들이 자신을 정신적으로 아픈 것으로 정체화하게 되면, 스스로를 정상적인 삶에 건강하게 참여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라 믿는 것이 더 어려워진다는 데 있다. 이들은 이제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이 되며, 이는 그를 다른과 구별하게 되고 정신의학 권위에 장기적으로 의존하게 함. 결과적으로 그들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전망과 야망을 다시 생각하거나 심지어 하향조정하고, 주체성의 일부분을 포기하라는 미묘한 암시를 받게 됨.
- 마르크스가 종교에 대한 분석을 통해 발견한 것은 고통을 이해하고 관리하는 데 책임을 지는 사회제도들이 경제의 목적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 이런 제도들은 고통의 진정한 원인을 보지 못하도록 사람들을 진정시킴으로써 정치적으로 위험한 감정들을 완화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 이런 이해가 마르크스 주의로부터 떨어져 나와 주류 사회과학의 일부가 되자, 이런 이해는 정신건강 분야에도 적용되기 시작했고, 80년대부터 여러 새로운 통찰이 등장. 이런 통찰은 우리의 고통이 명백한 경제적 목적을 위해 잘못 해석되고, 부당하게 이용되며, 탈정치화되는 특정 방식들을 드러냈다. 그러한 방식들에 대한 대략적인 목록을 만들어본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 현재의 경제를 비판으로부터 보호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고통을 개념화한다. 다시 말해, 고통의 원인을 사회적인 것보다는 개인적인 것으로 재구성함으로써, 문제가 바뀌어야 하는 것은 경제적, 사회적 체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 믿게 한다
* 경제의 목적과 부합하는 방식으로 개인의 웰빙을 재정의함. 웰빙은 개인이나 공동체에 실제로 좋은지 여부와 관계없이, 경제성장과 생산성 향상에 기여할 수 있는 감정, 가치, 행동을 포함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져야 한다.
* 경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행동과 감정을 더 많은 의학적 개입이 필요하다는 증거로 만든다. 기존의 질서를 뒤흔들고 교란하는 감정이나 행동은 강력한 금융기관과 엘리트들이 경제적 이득을 좌절시킬 수 있기 때문에 의료화되고 치료되어야 한다
* 고통을 더 많은 소비를 위한 활발한 시장기회로 삼는다. 대기업이 소위 해결책들을 제조하고 판매하기 시작하면서, 고통은 대기업에게 매우 수익성 있는 시장이 될 것이다. 이 해결책들이란 수익을 늘리고 이윤과 더 높은 주식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것들이다.
- 촘스키가 보기에 부채는 학생들을 경제순응주의자로 만들고, 그들이 진입하고 있는 체제의 경제현실에 반대하기보다는 이를 수용하도록 강제한다. 다시 말해, 부채는 신자유주의로 편입시키는 사회화의 강력한 형태로, 젊은이들이 일찍부터 현재의 경제상태에 복종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부채가 우리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을 바꿀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견해가 위와 같은 비판을 뒷받침한다. 빚을 갚아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선택권을 축소시킴으로써, 우리가 직접 원하지 않았더 미래의 의무와 활동에 우리를 가둔다.
- 미래의 나를 담보로 돈을 빌린다는 표현은 나의 미래 자유를 담보로 돈을 빌린다는 의미. 내가 오늘 빌린 돈은 오늘의 나를 해방하겠지만, 내일의 나를 옭아맨다. 그에 비해 부채를 지는 것은 너무 쉽게 느껴진다. 종속이 다른 날로 미뤄지면, 단기적으로는 장점만이 느껴진다. 합리적 투자를 위한 부채를 넘어선 부채는 투자와 전혀 관련이 없고, 다만 소비주의 경제에서 합리적으로 기능하거나 생계를 유지하거나 또는 어떤 경우에는 생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관련된다.
- 08년 경기침체 이후 사회적 차원과 개인적 차원을 아우르는 부채의 영향은 광범위하게 보도되어 왔다. 그러나 부채는 경제의 더 뿌리깊은 문제들이 얼마나 많은 반창고 붙이기 식의 해결책으로 관리되어 왔는지를 명백히 보여주는 수많은 예시 중 하나. 80년대 이래로 다른 경제적 반창고들이 출현하게 되었고, 이는 단지 임금, 세금, 부채, 소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우리는 머지 않아 교육, 지방정부, 국민보건서비스, 그리고 물론 정신건강분야를 포함하는 우리의 공공서비스 전반에 걸쳐 경제적 반창고가 활용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임. 여기서 소비자부채의 활용과 상응하는 또 다른 반창고 붙이기가 안전하고, 효과적이며, 유용한 치료를 보편화한다는 명분하래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급속히 확산하게 되었다. 그리고 짐작하다시피 바로 여기서 항우울제 이야기가 등장한다.
-80년대 이후로 부채와 약물이 사회적으로 작동해온 방식에는 무언가 기이한 유사성이 있음. 70년대에는 부채의 사용과 약물의 사용 모두가 그리 대단치 않은 수준이었으나, 80년대 이래 수십년동안 부채와 약물의 사용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리고 부채와 약물의 사용은 폭발적으로 증가. 그리고 부채와 약물 모두에 합리적 사용처가 있다 할지라도, 가계부채와 약물소비는 대부분 장기적으로 유해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부채와 약물소비 모두가 사상최고치를 기록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것, 최소한 깊이 있고 지속가능한 의미에서 삶을 개선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려이 없음. 오히려 그것은 부채와 약물이 감추려고 해온, 우리 사회의 깊은 구조적 문제에 대한 반응이다. 이런 의미에서 부채와 약물 모두는 우리 시대의 완벽한 진정제로 거듭났지만, 이는 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더 많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음.
하지만 둘 간의 유사성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거대기업들이 수중에 어마어마한 부를 쏟아 넣는 것 외에도, 부채와 약물은 이념적으로도 작용하여 사회적 문제를 개인적/내적 장애로 재분류. 부채를 통한 개입은 우리의 병든 재정건강의 원인이라고 생각되는 경제적 무능함을 표적으로 삼고, 정신의학적 개입은 우리의 병든 정신건강의 저변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생물학적 이상을 표적으로 삼음. 부채를 통한 개입과 약물을 통한 개입은 제각기 소위 개인적 결함을 치료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새로운 자본주의의 사상, 제도, 정책의 모든인과적 책임을 교묘히 면제한다.
- 대부분 가족에게는 자신이 겪는 고통의 사회적원인을 변화시키기는커녕 그에 대해 고심해볼 만한 시간과 자원조차 부족.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일상적 의무를 처리하느라 바쁘고, 이런 추가적 문제는 전문가가 해결하도록 놔두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20세기중반의 위대한 사회학자 피터버거가 말했듯이, 현대적 삶의 복잡성과 부산함은 사회적 삶에 대한 몰이해를 자아에 대한 몰이해로 번안하는 것을 매력적인 선택지로 만든다. 특히 일종의 자기이해, 자기숙달과 안심을 제공하는, 간단하고 믿을 만한 것처럼 보이는 해결책이 제공되고 있다면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고, 당황스러우며, 심오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사회적 역학의 힘에 대한 인식을 고양하는 대신, 정신건강 증진도구와 회복탄력성 훈련, 조기개입전략을 택한다.
- 결과적으로 고통의 사회적 원인을 모호하게 만드는 정신건강개입의 힘은 강한 영향력을 행사함. 어떤 치료법에서건, 우리를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더 큰 힘에 대해 이해하고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필수적인 부분임. 우리는 많은 아이에게 있어 가장 진실되고 효과적인 치료법은 약물이나 상담실, 혹은 교실에서의 개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지각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더 가혹한 사회적 힘의 영향을 완화하고자 노력하는 의미있고 애정어린 관계속에 있다.
- 80년대 이래 이루어진 제약업계에 대한 점진적 탈규제화는 정신과 약물이라는 분야에 존재하는 수많은 문제의 주된 원인이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규모로 이루어진 과잉처방문제의 주된 원인이 되어왔다. 탈규제화는 80년대 이래 영국의 정신과 약물 소비가 400%나 증가해 오늘날 영국 성인의 25%가 매년정신과 약물을 처방받게 된 배경이기도 함. 이런 성공신화는 효과적 신약의 개발이나 정신약학의 발전 때문이 아니라, 제약업계가 업계의 이익에 맞는 방식으로 규제제도와 의학계의 여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해준 이데올로기의 부상 때문이었다.
- 팀 카서와 에리히 프롬이보기에 물질주의가 우리가 겪는 고통의 주요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물질주의는 인간욕구의 결핍과 방치를 보상하기 위한 시도다. 물질주의가 이런 요구를 충족해주기보다는 착취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물질주의가 심리적으로 매우 치명적 효과를 초래한다고 보았다. 삶으리 만족스럽고 의미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가치, 활동 및 지지형태와 상충되기에, 물질주의는 우리를 도와준다는 명목을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해악을 끼친다. 수익성 높은 소비자본주의의 지속적 확산은 우리 모두가 우리의 감정적, 관계적 건강에 반하는 방식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함. 그리고 이는 물질만능주의가 부상하는 국가에서 불안과 우울 또한 증가하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요인일지도 모른다.
- 70년대에 새로운 자본주의가 얼마나 강력한 지배력을 행사하게 될지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시 새로운 자본주의는 웨스트민스터, 워싱턴, 베를린, 파리같은 서구 자본주의의 강력한 중심에서 얼마 안되는 정치적 지지자를 보유했다. 새로운 자본주의가 이처럼 지지를 받지 못한 것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2차대전 이후 서구를 지배해온 좀더 사회민주주의적인 자본주의와 비교해보면, 새로운 자본주의에는 유권자들의 열정과 영감을 지필만한 매력적인 도덕적, 윤리적 비전이 부재한 것처럼 보였다. 전후의 사회민주주의적 자본주의는 몇십년에 걸쳐 실행되고 검증되었다. 강한 국가는 특히 부자들에게 세금을 많이 걷어 사회 전체적으로 자원의 더 공평한 분배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보장할 것이라는 이상에 실제 현실이 부합하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말이다. 국가는 공공기관을 강화하고 장기간에 걸친 공공투자를 진행하며, 동등 임금과 낮은 실업률을 지향하고, 강한 규제를 통해 시장의 탐욕을 억제해야 했다. 강한 국가는 모든 시민의 이익들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극단적 부와 가난을 억제하여 더 공평한 중간지대를 만들어내야 했다. 그렇기에 새로운 자본주의는 사회전반에 깊이 동의하는, 이미 존재하는 경제적 이상에 정면으로 도전해야 한다는 문제에 직면했다. 새로운 자본주의는 부자에 대한 세금을 감축하고, 기업에 대한 규제를 약화하고, 국가를 축소하고, 사회서비스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 새로운 자본주의는 완전히 자유로운 시장의 지배를, 사람들이 성공의 부산물을 갖기 위해 다퉈야 하며 경쟁과 사업이 지배하는 세상을 추구했다.
70년대 중반에 이 비전을 가장 열렬히 지지한 사람들은 이러한 비전에서 가장 많은 이득을 볼 사람들, 즉 권력을 갖고 있고, 기업가적이며, 풍부한 자원과 인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전체 유권자중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적었기에, 새로운 자본주의는 투표에서 패배를 거둘 수밖에 없는 것만 같았다. 이런 이유로, 70년대에 새로운 자본주의의 옹호자들은 유권자들을 설득하여 새로운 자본주의가 단지 소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모두에게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유지해줄 것이라고 믿게 만들 최적의 방법을 찾는 일에 열과 성을 다했다. 이들은 모든 사회집단이 열정적으로 옹호할 수 있는 설득력 넘치는 윤리적 비전, 소수의 철학을 다수의 철학으로 만들 수 있는 비전을 찾아야 했다. "이 새로운 비전은 대체 무엇일까?"가 이들의 질문이었다.
- 밀턴 프리드먼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가 70년대에 썼던 여러 저술에서 맹렬히 주장했듯, 새로운 자본주의는 서구문화의 중심을 지탱하는 기둥과 동맹을 맺음으로써 대중적 인기를 얻게 되었다. 진정으로 자유를 수호하는 유일한 경제적 비전은 새로운 자본주의뿐이라고 주장. 공산주의국가 소련의 발흥으로 인한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를 이용해 프리드먼은 "자유를 위한 투쟁"을 새로운 자본주의가 전하는 경제적 메시지의 핵심에 놓음. 프리드먼은 새로운 자본주의가 서구적 자유의 마지막 보루이며, 우리의 국경을 위협하는 공산주의를 방어해준다고 주장. 공산주의적 권위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자본주의의 유일한 버전이라는 것. 대중은 바로 이 주장을 이해해야만 했다.
이러한 서사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프리즈먼은 2차대전 이래 사회민주주의적 자본주의가 채택해온 자유의 관점을 비판. 그러한 자유의 관졈에는 다음과 같은 생각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국가는 우리 모두가 누리는 자유의 진정한 수호자다. 국가는 사회보장을 제공함으로써 가난의 굴레로부터 우리를 해방하고, 무상의료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질병의 우환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고, 부를 재분배함으로써 불평등으로 인한 형평성의 부재로부터 우리를 해방하며, 공교육을 제공함으로써 무지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여, 좋은 삶을 가로막는 요인들로부터 우리를 해방한다. 우리가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는 사회악을 척결함으로써 국가는 우리가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할 수 있도록 해방한다.
- 하지만 프리드먼을 비롯해 경제적 우파에 속한 사람들에 의하면 이와 같은 자유에 대한 국가중심적 비전은 사람들을 호도할 뿐만 아니라, 근본적 차원에서 우리의 자유를 위협하기까지 한다. 하이에크가 썼던 저술을 들먹이며, 프리드먼은 모든 국가에는 점점 더 많은 권력을 집적하여 그 과정에서 점점 더 확대되고 군림하려 드는 내재적 경향이라는 문제가 있다고 주장. 이런 일이 일어나면 국가는 점점 더 중앙집권화하고 전체주의적으로 변화해 결과적으로는 민주주의적 자유를 완전히 없애버리게 된다는 것. 이런 바탕에서 프리드먼은 사회민주주의적 자본주의는 내버렫두면 사회주의, 나아가 공산주의로 진화할 수밖에 엇다고 주장. 이처럼 공산주의로 가는 흐름을 저지하기 위한 최적의 방법은, 사회민주주의적 자본주의를 자유시장 버전의 자본주의로 교체해 국가의 야심을 꺾어 버리는 것이다. 프리드먼의 주장이 가진 문제가 무엇이었건 간에 큰 국가를 소련의 공산주의와 연관짓고, 작은 국가를 서구적 자유와 연관짓는 그의 주장은 당대에 만연한 반공주의 정서와 딱 들어맞음. 그의 주장은 작은 국가의 시장근본주의에는 없었던 도덕적 비전을 부여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했다. 이제는 이 최신 유행의 비전을 설득력 있는 방식으로 널리 퍼뜨리기만 하면 되었다. 이제 새로운 자본주의에 필요한 것은 국민에게 이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카리스마 넘치는 정치인 집단이었다.
- 수년간 나는 직업적 상황에서뿐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PHQ-9과 GAD-7같은 검사지를 작성한 경험이 있는 수많은 이들을 만나왔다. 하지만 내가 아는 한 이들 중 자신이 거대한 경제 서사시에 조연배우로 출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이런 진단도구가 주로 신자유주의의 현재상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그들의 고통을 재구성하고 민영화하기 위한 수단이라 보지 않았다. 이런 문서가 약탈적 제약기업의 야망 및 과잉처방과 직결된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이들은 이러한 도구들이 고통을 개인적 결함으로 표현함으로써 고통을 이윤을 축적하기 위한 상품으로 탈바꿈시키고, 감정적 고통을 낳는 뿌리깊은 구조적 원인에 대해 정부가 손을 놓게 만든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 불평등과 정신적 고통 사이에 이처럼 밀접한 관련성이 나타나는 이유는 뭘까? 윌킨슨에게 이 질문을 던지자, 그는 진화이론을 바탕으로 대답. "우리는 진화 역사에서 대부분 기간을 조그만 수렵채집사회에서 보냈습니다. 이 사회에서 우리는 오래도록 지위가 균등하게 배분되는 평등주의적 삶의 방식에 맞추어 진화해 왔습니다. 예전엔 집단 전체의 협력이 모든 사람의 생존에 필수적이었습니다. 그러니 협력적인 사람이야말로 곁에 두면 유용한 사람이었죠."
여성은 덜 이기적이라고 생각되는 파트너를 선호했고, 공동체는 집단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사람의 가치를 높게 샀다. 실제로도 우리는 이기적이고 나밖에 모르면 외면당하거나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일찍이 인류가 처한 환경은 관계지향성이나 협조성 같은 친사회적 특징을 선택하게 되었죠.
인류가 생명체로서의 역사상 대부분의 기간을 보다 평등하고 협력적인 환경에서 보냈다는 사실을 듣고서, 나는 윌킨슨에게 심각한 경제적, 물질적 불평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즉 격차와 분리로 가득한 사회조직 속에서 살아가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이 사실이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를 물어보았다. "우리는 경쟁과 분열이 급격히 심화되는 것을 경험하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체계 속에서 우리의 위치, 다시 말해 다른 사람과 비교했을 때 우리 자신의 위치와 우리가 어떻게 판단되는지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상당히 가중시킵니다."
- 윌킨슨은 우리의 경제형태가 정신건강 개혁을 가로막고 있다고 보았을까? 그의 답변은 더 결단력 있었다. 정치에서 혹은 미디어에서 정신질환, 스트레스와 자해가 증가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릴 때면, 이에 대한 반응은 거의 언제나 서비스를 늘리라는 겁니다. 정신과 의사와 심리학자의 수를 늘리라는 거죠. 하지만 우리는 왜 전례없이 높은 수준의 육체적 편안함을 누리는 사회가 이처럼 끔찍한 정신적, 감정적 고통이라는 짐을 짊어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질문하지 않습니다. 진실은 이에 대한 구조적 설명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바로 이것이야말로 핵심적인 문제입니다."
이 책에서 나는 정신의료 서비스에서 이런 구조적 설명이 대체로 무시당하고 있으며, 이는 정신의료 서비스의 이데올로기가 사회경제적 현 상태를 변화시키기 보다는 유지하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설명하고자 했다. 우리가 노동자가 가진 불만의 의료화를 보건, 일터로 돌아가기 위한 심리치료이 증가를 보건, 물질주의적 가치와 치료의 조응을 보건, 실업상태의 병리화를 보건, 경제적 생산성이라는 측면에서 측정되는 회복을 보건, 업계의 이해관계를 가장 우선시하는 의약품 규제를 보건, 진단명이 학교예산 감축에 대응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이는 것을 보건, 널리 퍼진 고통의 상품화와 탈정치화에 대해 보건, 우리는 새로운 자본주의의 이념적 욕구와 필요에 부응하는 시녀가 되어버린 체제를 보게 된다. 이런 굴종을 명확히 인식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왜 실패하고 있는 우리의 정신건강 시스템이 실패에도 불구하고 확장을 거듭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 코로나가 모든 것을 바꾼 셈이다. 코로나는 새로운 경제생산 체제의 생존가능성과 지속가능성을 변화시켰음. 코로나는 우리 삶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하고 무엇이 가장 중요하지 않은지에 대한 생각을 변화시켰다. 코로나는 우리가 왜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지, 무엇이 우리를 괴롭게 하고 무엇이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지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부분적으로나마 변화시켰다. 근래에 생각되었던 것보다 체계적인 경제적 개혁이 더 가까울수도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 모든 변화가 새로운 정신건강 패러다임이 오래지 않아 승산을 갖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준다. 결국 어떤 경제적 패러다임도 영원히 가지는 못했기 때문. 그리고 현재의 패러다임도 그런 역사적 경향을 따를 수밖에 없다. 변화는 도래할 것이며, 변화가 도래했을 때 정신건강 분야에 존재하는 대안적 생각들은 시행될 준비가 완료되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노력을 계속하기만 한다면, 즉 우리가 계속해서 신자유주의의 압력과 유혹에 저항하기위해 노력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신자유주의 교리가 강제하는 율법이 아닌 사람들의 필요에 부응하는 개입들을 개발한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