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전경제 선언

사회 2025. 1. 3. 07:31

- 우리가 아무런 이득도 안되는 선물을 주고받는 행위를 그만두지 않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인류가 현재처럼 화폐를 사용해 물건을 교환하기 전에는 주고 받는것, 다시말해 증여를 통해 필요한 물건을 조달해왔기 때문.
부족사회에서도 사람들은 먹을 것부터 재산, 토지가지 부족간, 씨족간에 주고 받았다. 이런 경제를 증여경제라 함. 물론 증여뿐 아니라 매매나 자급, 재분배도 오래전부터 이루어졌지만 증여가 차지하는 비율이 가장 높았다.

- 증여는 단순히 물건을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개 답례의 의무가 있다. 이렇게 선물하고 답례하기를 반복함으로써 사람들은 유대를 돈독히 하면서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조달.
이 증여정신은 지금도 우리 안에 존재함. 이것은 자본주의보다 훨씬 뿌리 깊고 보편적인 인간세계의 기반임
증여는 물건이나 돈을 주는 것을 가리키지만 편지 주고받기, 품앗이, 초대, 보살핌같이 증여로 간주하지 않는 행위도 같은 구조임. 이런 상호작용 전반을 호혜라고 함. 물건이나 돈의 증여와 답례는 이 호혜라는 거대한 시스템의 일부다.

- 증여경제라고 하면 모든 사람이 타인을 배려하는 꿈같은 사회를 떠올리는데 그렇지만은 않다. 오늘날의 증여도 뇌물의 의미로 주거나 자기 과시를 위해 주는 등, 자기자을 위하는 측면이 있는데 이는 과거에도 마찬가지. 증여 그 자체만으로는 이타적 선행이라 단정할 수 없음.
인디언들의 포틀래치라는 연회는 그것을 여실히 보여줌. 부족의 수장이 손님을 초대해 개최하는 이 연회는, 상대가 보답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규모의 선물을 해서 상대의 체면을 짓밟는 장대한 허세싸움. 이를 위해 때로는 귀중한 재산을 눈앞에서 불태우거나 부수고, 노예를 죽이기도 했다. 증여는 지금도 그런 측면을 갖고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성선설 따위를 무턱대고 강조하면 본질을 흐린다. 다만 아무리 부정적 측면이 있다해도 선물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물건이나 돈을 내놓는 행위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선물은 오지랖이 넓은 것이 아니라 마음이 넓은 것이다. 세상의 기본이 되는 원리로서는,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고 이득이 되지 않는 행동은 하지 말라고 하는 자본주의보다 훨씬 매력적.

- 서양에서는 버려진 음식물을 일반인이 수거하기 좋은 환경이 갖춰져 있다. 수확하고 남은 농작물이나 과일을 가난한 사람으로 하여금 농장에 가져가도록 하는 유럽의 이삭줍기 전통고 그중 하나. 이삭줍기라고는 해도 떨어진 이삭만 줍는 것은 아님. 유럽에서는 중세부터 근세까지 수확이 끝난 농지나 과수원을 마을의 노인, 과부, 고아, 병자들에게 개방해 남겨진 농작물을 자유롭게 가져가도록 했다. 밀레의 이삭줍기에 그려진 것은 그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지역 가난한 사람들이다.
구약성서에도 이런 구절이 있다.
"너희 땅의 수확을 거두어들일 때, 밭에서 모조리 거두어들이지 마라. 거두고 남은 이삭을 줍지 마라. 너희 포도를 속속들이 뒤져 따지 말고, 남은 과일을 거두지 말며 가난한 자와 몸 붙여 사는 외국인이 따먹도록 남겨놓아라."

- 화폐가 생겨났다고 반드시 금전제일주의 사회로 곧장 향하는 것은 아님. 일보에서는 와도카이친이 만들어졌지만 그후 점점 화폐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쌀이나 비단에 의한 교환이 주를 이룸. 또 도시지역에서 돈을 활발하게 사용해도 사회 전체가 그것을 따르지는 않았다. 에도 시대 농촌지역에 관해서는 화폐가 침투해 특산품 같은 상품생산이 활발해졌다는 것만이 강조되지만, 그래도 주료는 자급자족과 현물경제였다. 물론 조세도 현물로 납부하는 것이 기본. 다시 말해 돈은 훗날 나타난 자본주의 사회에서 필수적 존재지만, 돈의 등장이 자본주의 사회를 만든 것은 아님.

- 시장 또는 화폐의 발생이 반드시 원시사회의 경제시스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이 사실은 19세기의 신화, 즉 화폐의 출현이 시장을 창출하고 분업화의 속도를 급격히 끌어올려 인간이 본디 갖고 있는 거래, 교역, 교환 성향을 개방함으로써 불가피하게 사회를 전환시켰다는 주장을 완전히 뒤집는다. (칼 폴라니)

- 이익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경제활동이 전체에서 이루어지는 사회를 자본주의 사회라고 함. 그런 의미에서 보면 물질만능주의는 먼 예살부터 곳곳에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매매의 대상이 되는 물건은 상품이라고 하는데, 상품경제와 화폐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이익제일주의는 더 멀리 퍼져나감.
그리고 역사적으로는 이익을 우선하지 않는 것을 예외로 취급하게 된 산업혁명 이후의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로 간주됨. 산업혁명은 18세기유럽에서 시작된 이후 전세계로 퍼져나갔으므로 이 견해에 따르면 자본주의도 이 시기 이후에 세계로 번졌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은 메이지 시대가 시작된 19세기 후반부터 자본주의 사회가 되었다. 현물경제와 자급자족이 생활의 기본이었던 농촌에서도 메이지 시대에 접어들어 돈으로 조세를 납부하게 되면서 돈의 중요성이 훨씬 커짐. 물론 지금도 자급자족적으로 생활하는 농가는 존재하지만, 지극히 예외적 현상임.


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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