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일을 하는가

인문 2025. 1. 25. 10:50

- 희망없는 노동의 반복. 바로 그 낙담이 신들이 생각해 낸 인간에 대한 최대의 벌이었다. 만약 현재의 내 삶이 무기력의 연속이라면 내가 시시포스의 후예가 아닌지 의심해 봐야한다.
꿈과 희망이 없는 삶...
어제와 오늘이 비슷하고 작년의 삶과 올해의 삶이 비슷하고, 내일의 삶이 설렘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 그 자리에 멈추고 나 자신을 되돌아봐야 한다. 내가 바로 현대판 시시포스의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 현대인들은 생각보다 굉장히 집요하게 행복에 집착함. 다만 그 사실을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당신의 모든 결정과 판단과 생각의 중심에는 행복이 있다. 그래서 나는 현대인들을 행복에 대한 지향자 혹은 중독자들이라 생각한다. 그렇다. 현대인들은 모두 늘 행복하고 싶어하는 행복지향자, 행복중독자들이다. 사실 당신의 고민도 사실 여기서 출발하는 것이다.
행복지향자들이기 때문에 늘 행복하고 싶어한다. 늘 행복하지 않으면 잘 못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일을 할 때도 행복하고 돈을 벌 때도 행복하고 여행을 할 때도 행복하고 사람을 만날 때도 행복하고 그런 삶을 꿈꾼다. 그게 맞는 삶의 방향이라 여기면서.
문제가 뭔지 아는가? 그런 사람은 없다는 거다. 일단 늘 행복하면 내가 행복한 상태인지 모르는 게 논리적이지 않은가? 늘 행복한 상태라면 그냥 행복한 상태가 일상이 되니 정작 행복하다는 생각을 못한다. 그냥 당연한 거지. 그리고 결정적으로 당신 주변에 늘 행복한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없다. 당연히 없지. 행복할 때도 있고 그저 그럴 때도 있고 불행할 때도 있고 이게 평범한 우리의 삶이지 않던가?
우리는 행복지향자들이기 때문에 직장에서도 행복을 꿈꾼다. 행복한 먹고사니즘을 지향한다. 이런 행복중독자들 같으니라고! 이건 좀 선을 넘는거다. 행복을 꿈꾸는 것은 당연하다. 잘못된 것은 당연히 아니다. 본능적인 것이니까. 하지만 늘 행복할 수는 없음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직장생활의 본질을 이해하고 내 삶의 방향을 정확히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당신의 지금까지 커다란 행복만 추구했다면 이제부터 좀 소소해지자. 내 일생을 큰 기쁨과 큰 행복만으로 다 채울 수 없으니까 소소한 거를 하나하나 찾아야 한다. 어떤 것이 나한테 기쁨이고 행복인가를 끊임없이 찾아서 소소한 기쁨과 행복을 늘려나가야 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정말 조그마한 불행도 현미경처럼 크게 본다는 말이 있다. 어떤 삶의 프레임을 갖느냐에 따라 삶은 다른거다. 내 인생은 왜 이렇지? 내 인생은 왜 이렇게 지루하지? 왜 이렇게 재미있는 게 없지? 이렇게 부정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면 내가 살아야할 이유가 없어 난 불행한 것 같지만 어느 누구도 잘 찾아보면 자신이 맞춘 프레임 밖에 행복들이 많다.

- 겨울에 날씨가 엄청 추우면 수도를 틀어 놓아야 힌다. 우리가 살면서 소소하게 행복한 시간을 갖는 것은 겨울철에 수도를 틀어놓는 것과 같다. 내 삶을 흐르게 하는거다. 성취를 위해 쉬지 않고 달려만 가고 있다면 한겨울의 수도를 잠가놓는 것과 같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마음이 얼어버리게 된다. 내 마음의 수도를 틀어 놓아야 한다. 그러면 내 인생의 직장생활도 조금씩 여유가 생기고 행복해질 수 있다.

- 행복을 뒤로 미루고 있는 나에게, 아무것도 안하고 있는 나에게, 어느 날 갑자기 선물처럼 행복이 찾아오지는 않는다. 행복을 원한다면 행복을 뒤로 미루지 말고 현재의 행복을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 그래야 삶의 행복을 향유할 수 있다.
지금 내가 행복하지 않은 것은 행복한 거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찾지 않기 때문에 현재 생활이 만족스럽지 않은 거다.

- 현대직장인들의 불안의 원인으로 첫번째 이유는 노력하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성취주의가 불안의 원인. 알랭 드 보통은 엄격했던 시대에는 가난한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들로 동정을 받았으나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현대사회에서는 실패한 사람들로 간주되어 비난받으므로 실패에 대한 불안이 더 높아진다고 설명.
두번째 이유는 우리가 그동안 너무 빠르게 달려왔기 때문. 한국인들이 불안한 이유는 한국의 압축성장이 가져온 폐해. 어마어마하게 빨리 발전했지만 얻는 것이 있으면 잃어버리는 것이 있듯이 정신을 잃어버리는 거다. 경제가 발전하는 속도네 맞춰 바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거다. 그러니까 가만히 있으면 불안해짐. 
남들은 달려가고 있는데 나도 가만 있으면 안되지, 라고 생각하며 항상 남들과 비교하고, 남들에게 뒤처질까 봐 불안해하는 거다. 내가 뒤처진다는 것은 내 체면이 깎이는 일이고 전 세계에서 유일한 유교국가인 한국에서 체면이 깎인다는 것은 안될 일이다. 그러니까 끊임없이 나를 채찍질하고 남들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가서 남들에게 잘 나가는 나를 과시하고 싶다는 심리가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것이다.

- 자존감이란 결국 나와 나의 관계의 문제이므로 타인이 나의 자존감을 높여줄 수 없다. 자존감은 스스로 높여야 한다. 그리고 그 시작이 바로 나와 나의 관계복원이다. 좀 오글거리게 표현하면 오늘부터 나하고 친하게 지내는 거다. 나 자신의 좋은 면, 긍정적인 점, 잘하는 점을 찾아 스스로 인정해주는 거다. 자책과 자기혐오로 잔뜩 움츠려 있는 내 마음속의 '내가 좋아하는 나'의 비중을 높여보려는 노력을 해보는 거삳.
그리고 중요한 것은 내가 좋아하는 나의 모습이 다수의 인정과 사랑을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상관없다는 거다. 그냥 내가 스스로 인정하고 사랑할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게 바로 자존감이다.

- 대한민국 전체기업수익의 60%를 100대기업이 가져가고 나머지 40%를 갖고 그 외의 기업들이 나눠먹기 위해 혈투를 벌인다. 이 40%를 나눠먹기 위해서 달려드는 기업에는 대기업도 있고 중견기업도 있다. 중소기업은 여기서도 소외된다. 당신이 창업하면 먹이사슬 제일 아래단계다.
미국 100대 부자 중 78명이 창업자다. 한국은 100명중 84명이 상속부자다. 미국처럼 잔인한 시장경제에서도 자본주의, 신자유주의를 가장 열심히 신봉한 미국에서도 새로운 창업자들이 계속 성공신화를 만드는데 한국은 그게 힘들다. 그러니까 금수저 흙수저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당대 부자, 자수성가한 살마을 키우지 못한 게 한국 사회의 구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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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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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나저나 한번뿐인 험난하면서도 소중한 인생으로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메리 올리버의 시, 여름날)

- 살아 있는 한 모든 것이 충분한 순간은 없다. 그럼에도 이따금 달콤할 때도 있고, 운이 좋다면 조금 더 지속된다. (레이먼드 카버의 시, 그녀를 불행하게 만든 사람)

- 우리는 모두 언제 목이 날아갈지 모르는 채 함부로 돌아다니고 시간을 낭비하고, 순간을 즐기고, 운명을 거스르면서 허술한 구멍 사이로 요리조리 빠져나간다. (메기 오페럴, '나는 살아 있다, 살아 있다, 살아 있다')

- 죽음은 삶의 반대편이 아닌, 그 일부로서 존재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

- 질병은 인생의 어두운 측면이며 더 부담스러운 국적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모두 이중국적을 취득하는데, 한쪽은 건강한 자들의 나라이고, 다른 쪽은 아픈자들의 나라이다. 우리는 모두 좋은 쪽 여권을 사용하기를 바라지만, 머잖아 잠시라도 다른 쪽의 시민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수전 손택, 은유로서의 질병)

- 오늘날 자행되는 심폐소생술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잔인한 과정임. 말기 신부전처럼 회복불가능한 질병으로 죽어가는 환자들에게는 애초에 시행하면 안되는 처치임. 건강한 환자들에게도 흉부압박과 전기충격은 흔히 실패로 끝남. 병원 안에서 심정지에 빠진 사람들 다섯명 중 한 명만 살아서 병원을 나간다. 병원 밖에서 심정지에 빠진 환자들의 소생 가능성은 훨씬 더 낮아서 열 명 중 한 명만 살아남는다.
물론 생사의 기로에 선 환자에게 심폐소생은 시도할 가치가 있다. 하지만 심장이 정지된 시간동안 산소부족이 장기화되면 환자는 살아나더라도 영구적으로 뇌손상을 입게될 위험이 있다. 남은 평생을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 신은 우주를 상대로 주사위 놀이를 한다. 신이 걸핏하면 주사위를 던지는 상습 도박꾼이라는 증거가 도처에 깔려 있다. (스티븐 호킹)

- 어원학적으로 볼 때, 의학은 보이는 모습과 다름. 의사라는 단어는 라틴어 도세르에서 온 말로 가르친다는 의미. 반면 환자는 라틴어 파티엔스에서 온 말로 참는 사람이란 뜻. NHS병원 안팎에서 환자에게 요구하는 인내와 극기는 실로 엄청남. 가령 응급실에서는 진료순서가 올 때까지 몇 시간씩 대기해야 하고, 암치료를 시작하려면 몇 주, 심지어 몇 달을 기다려야 함. 환자에게 고통을 덜어주겠다고 해 놓고 오히려 고통을 가중시킴. 의사가 다가올때까지 환자는 수술복 차림에 손목밴드를 차고 초조하게 기다릴 뿐이다. 미력하나마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고 결정하도록 타고난 종으로서, 이런 현실은 확실히 참아내기 어렵다.
호스피스와 병원은 환대와 마찬가지로 호스페스라는 라틴어에서 비롯되었는데, 호스페스는 집주인과 손님, 낯선 사람을 모두 뜻하는 말. 나는 호스피스가 주인과 손님과 낯선 이들을 제대로 대접하는 곳이길 바란다. 가정과 병원의 장점을 모아 집처럼 편안한 분위기에서 의료혜택을 누리는 곳이길 바란다. 

- 라틴어 동사 펠리에어는 외투를 입히다, 덮어 감추다, 라는 의미. 완화의료의 1차목적이 죽음의 증상을 숨기는 데 있음을 암시. 그런데 이 말은 죽음이 가까이 올 때 모르핀에 취해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 말고는 더 기대할 게 없다는 식으로 들림. 하지만 우리는 그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완화의료를 떠받치는 원칙을 하나만 꼽자면, 살아감과 죽어감은 이항대립처럼 서로 반대되거나 모순되는 짝꿍이 아니라는 점. 

- 와화의료를 행사하는 의사로서, 우리의 역할을 삶을 연장하는 게 아님, 불가피한 일을 막으려고 싸우는 것도 아님. 병이 통제를 벗어났음을 받아들이며, 즉 불치병의 최종성에 맞서지 않고 그 안에서 노력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느느 일들에 집중할 수 있다. 우리의 도움으로 환자는 눈을 감는 그날까지 삶의 질을 높이고 의미를 찾고 자잘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이런 원칙은 어떻게든 죽음과 질병에 맞서 이기려는 기존의 의학적 모델에 부합하지 않는다. 물론 의학의 역사는 그런 싸움의 과정에서 얻은 승리의 산물이다. 최초의 백신과 항생제, 화학요법, 시험관 아기, 뇌신경외과 수술, 티타늄 고관절, 인공망막, 인공심장, 안면이식 등 그 목록은 끝없이 이어진다. 의학계의 이정표를 나열하는 순간, 경이로움과 경외감에 흐뭇한 미소가 떠오른다. 의사들과 과학자들의 끈질긴 노력과 기발한 재주덕에 오늘날 우리는 인류역사에서 그 어느때보다 더 오래, 더 잘 살게 되었다.
그렇지만 죽음은 결코 물리칠 수 없으며, 얼마간이라도 유예하려면 대가를 치러야 함. 의학은 우리 삶을 연장할 힘을 지녔지만, 의도치 않게 고통마저 연장시킬 수 있다. 누군가가 간절히 바라는 생명연장치료가 다른 이에게는 의사들이 애초에 시도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몹쓸 경험으로 전락. 
"아무도 죽어가는 말에게 채찍질을 하진 않을 겁니다." 예전에 한 환자가 말했다. 그런데 그 말이 인간이고 또 하필 암에 걸려 있을 때는 예외라는 겁니다."
심페소생술과 인공호흡, 위관을 통한 장기적 영양공급이 가능한 시대라, 우리는 삶을 끈질기게 이어갈 수 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어떤 대가를 치르고 있나? 오늘날 의사들은 죽음에 대한 과도한 개입에 득보다 실이 더 많은 게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환자가 간신히 연명이라도 하게끔 어떻게 살려낼 것인가를 따질 게 아니라, 이 환자를 굳이 살려야 하는가를 따져야 한다.

- 우리는 간혹 섹스와 죽음의 문제를 놓고, 현 시대와 빅토리아 시대를 비교하곤 한다. 빅토리아 시대엔 죽음은 활발하게 논의 되었지만, 섹스는 엄격한 금기사항이었음. 반면 우리 시대엔 섹스는 늘 화제의 중심이지만, 죽음은 입에 잘 올리지도 못함.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벌어질일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유일한 사건을 두고서, 우리는 누군가가 저 세상으로 갔다거나 누군가를 잃었다는 식으로 완곡하게 표현. 죽음을 둘러싼 문제가 아무리 골치 아프더라도 우리는, 특히 의사들은 두려워하지 말고 죽음을 똑바로 쳐다보고, 우리가 어차피 죽을 운명임을 거듭 인정해야 함. 
호스피스 환자들 중에는 그동안 임박한 죽음에 대해 늘 에둘러 이야기하다, 이곳에서 속 시원하게 터놓을 기회가 생기면 크게 안도하는 사람이 많음. 그렇다 하더라도 죽음의 문제를 터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 우선 의사가 환자에게 솔직하게 말하고 행동하라고 압박하면 실패하기 십상. 의사가 자기 뜻에 따르라고 강경하게 요구할수록 환자는 더 강경하게 저항함. 거짓 부갑상선 기능 저하증 같은 어려운 말을 쓰면서 잘난척 하는 사람에게 이래라저래라 지시받는 것보다 더 짜증 나는 일은 없다.

- 의학이 그동안 눈부시게 진보하긴 했지만, 불치병은 여전히 인간이 떠받드는 신들의 수만큼 많다. 아무리 박멸하려 해도 세균과 미생물은 살아 남는 것 같다. 웬만한 치료가 다 실패하면 외과의가 나서서 우리를 갈가리 찢고 남은 한 푼까지 싹 걷어간다. 그런게 바로 당신을 위한 진보다. (헨리 밀러, 여든이 되면서)
오늘날, 의사와 윤리학자, 언론과 대중이 의학의 의도치 않은 해악을 놓고 논쟁한다는 점에서 밀러는 대단히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그 에세이에서 가장 감명깊게 읽은 부분은 불치명, 즉 죽어야 할 운명에 대한 그의 성찰이었다. 밀러에 따르면, 젊음의 진정한 척도는 시간이 아니라 태도라고 주장한다.

- 여든 살 나이에 불구나 병자가 아니라면, 건강을 유지하고 여전히 산책을 즐기며 식사를 맛있게 한다면, 약을 먹지 않고도 잠을 잘 잔다며, 꽃과 새, 산과 바다에 여전히 마음이 동한다면, 당신은 참으로 운 좋은 사람이니 아침저녁으로 무릎을 꿇고 신에게 감사해야 한다. 나이는 더 어린데도 정신적으로 너무 지쳐 하루하루 기계처럼 살아간다면, 상사에게 하서 이렇게 말하는 게 좋을 것이다.
물론 작은 소리로. "빌어먹을, 난 당신의 졸개가 아니야!"
거듭해서 사랑에 빠질 수 있다면, 당신을 내놓은 죄를 저지른 부모를 용서할 수 있다면, 크게 성공하지 못해도 하루하루 만족하며 산다면, 과거의 일을 잊어버릴 뿐만 아니라 용서할 수 있다면, 점점 더 심술궂고 독하고 냉소적으로 되지 않을 수 있다면, 확실히 당신은 인생을 참 멋지게 살고 있다.

- 심박이 약해지면서 따뜻한 피를 제대로 뿜어내지 못하므로 손이 차갑게 느껴진다. 피부가 창백해지고, 심지어 푸르스름해지기도 한다. 마지막 며칠에서 몇 시간 동안엔 의식이 혼미해진다. 호흡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불규칙해질 수도 있다. 막판에는 몸이 흔들릴 정도로 깊은 숨을 쉬다가 한참 동안 숨을 멈추기 때문에 가족들은 흔히 안절부절 못하면서 그게 마지막 숨이었는지 혼란에 빠진다.
의식은 못하지만 목구멍에 침이 고이며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날 수도 있다. 이 소리가 가족들에게 고통을 줄 수 있지만 환자들은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임종 즈음엔 신기하게도 우리 몸이 알아서 연민어린 반응을 보인다. 심장과 폐, 신장, 간 등 몸의 주요장기가 뇌를 마취시키기 때문에 환자는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한다. 폐에 이상이 생기면 혈류에 이산화탄소가 늘어나 졸음이 온다. 간이나 신장이 나빠지면 혈액에 독소가 쌓여 의식이 점점 흐릿해진다. 기진맥진한 심장이 제 기능을 못하면서 혈압이 뚝 떨어지면, 산소공급이 끊긴 뇌는 망각의 늪으로 천천히 미끄러져 들어간다.

- 죽음이 다가올수록 살아가는 행위는 그저 가혹한 심리적 시련이다. 환자가 삶의 마지막 며칠이나 몇 시간을 남기고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지만 다른 조치로는 그 증상을 완화할 수 없을 때, 마지막 옵션이 지속적으로 깊은 수면상태에 빠뜨리는 것이다. 의식불명 상태로까지 진정제를 투여하면 환자는 비로소 고뇌에서 해방된다.
이것은 죽음을 재촉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덜어주는 게 목적이기 때문에 조력사나 안락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어쨌든 대다수 환자는 이런 극단적 조치가 불필요하다. 대개 낮은 용량의 진정제로도 두려움을 충분히 누그러뜨릴 수 있다. 그런 상태에서 환자는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주변세계와 얼마든지 소통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완화의료에선 또 다른 극단적 사례도 찾을 수 있다. 평생 죽음 공포증에 시달리던 환자가 말기 진단을 받고 두려움을 떨쳐내기도 하는 것이다.

- 마지막 카드가 어떻게 게임을 이끄는지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끈끈하게 연결되긴 했어. (엘라스티카의 노래 커넥션)

- 인생을 한껏 즐기고, 우리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하고, 동료 인간에게 빛과 평화와 즐거움을 주며, 엉망진창인 이 행성을 우리가 태어난 때보나 더 건강하게 해 놓지 못한다면 도대체 뭐하러 여기 있는가? (헨리 밀러)

- 상처를 받거나 곤경에 빠지거나 굴욕감을 느낄 거라는 두려움을 무시하고 마음을 충분히 주는 것, 그것만이 유일하게 중요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충분히 대담하게 살지 못하고 충분히 노력하지 못했으며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다고 후회한다. 다른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테드 휴즈)

- 의사들은 간혹 선의로 죽음이 전혀 고통스럽지도, 힘들지도 않다고 말한다. 심지어 죽음이 일종의 초월적 경험 같아서, 제대로 죽는다면 평범한 삶의 마지막을 그야말로 멋지게 장식할 수 있다고 떠벌이기도 한다.
사실 죽음은 인간의 경험만큼이나 다양하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물론 우리가 호스피스에서 목격하듯이 신체가 기능을 멈추는 데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 하지만 사람을 기계부품처런 나눠서 파악할 수는 없다. 죽음은 삶의 여러 면과 마찬가지로 덤덤할 수도 있고 가슴이 찢어질 만큼 아플 수도 있다. 온화하거나 잔인하거나 아름다울 수도 있다.어떤 환자에게는 심지어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의학에서, 아무리 선의라 하더라도 현실을 미화하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완화의료가 아무리 도움을 준다 할지라도, 애초에 죽을 운명을 타고난 생명체라는 잔인한 현실을 모면하게 해 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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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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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이 문턱에 선 사람들은 그 순간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진정한 삶의 시작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죽음을 선고받으면 죽음이 실체가 있는 대상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음. 그와 동시에 삶의 실체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때 사람은 자신이 아직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깨닫는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제 살아야 할 인생은 이것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죽어가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온 힘을 다해 하루하루를 살아가라고 알려준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인생수업)

- 죽음 그리고 죽음의 정숙함이야말로 우리 미래에서 유일하고 확실하며 모두에게 평등하다. 이 유일하고 확실하며 평등한 사실이 인간에게 아무런 힘도 미치지 못한다니, 또 인간들은 자신이 죽음의 형제라는 사실을 느끼지 못한다니 이 얼마나 괴이한 일인가. (니체, 죽음의 학문)

- 사람은 어떻게 죽는가
(1) 비교적 장시간을 신체기능을 유지하고 마지막 2개월 정도에 급격히 기능이 떨어진다. (암)
(2) 급격히 증세가 악화되는 현상이 반복되면서 서서히 기능이 떨어지고 마지막에 비교적 급격한 경과를 보인다. (심장질환이나 폐질환 말기)
(3) 기능이 저하된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된다. (치매, 노쇠)

- 환자에게 남은 수명을 예측하기는 상당히 어렵지만 현장의 경험은 확실히 큰 도움이 된다. 일반적으로 환자의 여명을 예측하는 기준은, 완화의료 분야에서 자주 사용되는 스테로이드 효과와 증상, 그리고 일상생활의 장애정도다. 개인적 경험상 스테로이드가 전혀 듣지 않거나 효과가 있어도 한정적이거나, 혹은 며칠만 눈에 띄게 효과가 있다면 남은 수명은 짧은 주단위다. 즉 1주일에서 3주일 안에 숨을 거둘 가능성이 높다.
환자의 증상과 일상생활의 장애정도도 중요한 판단기준. 암이 고통스러운 질병인 이유는 발병 초기부터 통증을 느끼기 때문. 하지만 통증보다 더 말기환자를 괴롭히는 것은 빈도 100%에 가까운 전신권태감, 즉 온몸에 힘이 없는 상태. 식욕부진도 90% 이상의 환자에게 나타남.
남은 수명이 2주일 미만이면 이동, 배변, 배뇨, 식사, 수분섭취 같은 일상적 행위에 급격히 장애가 일어남. 즉 암환자의 경우 남은 수명이 한달 정도라면 정상적으로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여명이 2주 미만이 되면 갑자기 일상적 행위가 불가능해지고 마지막에는 거의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죽음을 맞이함.
심, 폐질환이나 치매의 경우도 행동에 장애가 생기는 것은 마찬가지. 다만 심,폐질환의 경우 비교적 급속도로 최후를 맞이할 확률이 높고 치매는 암보다 훨씬 더 천천히 기능저하가 일어난다는 차이가 있을 뿐. 어느 쪽이든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이동, 배변, 배노, 식사, 수분섭취가 가능한 사람은 정말 행운아다. 

- 여명 주단위
수명이 몇 주일 남았을 때. 이 시기 가장 먼저 나타나는 증상은 전신권태감.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고 나른하다. 기운이 없다고 하면 보통 피로나 피곤한 상태를 생각하지만 이 시기의 권태감은 그런 감각과는 차원이 다르고 환자들에게 심한 고통을 준다. 
스테로이드는 전신권태 증상에 비교적 잘 듣는 약물이지만 여명이 1-2주 단위가 되면 효과가 급격히 떨어짐. 결국 이때는 달리 처방할 만한 약이 없으므로 전신권태감으로 환자가 지나치게 괴로워하면 의식을 늦추는 진정제를 투여할 수밖에 없다.
온몸이 심하게 붓는 것도 이 시기다. 하루 1리터 이상 점적을 계속하면 붓기가 눈에 띄게 심해진다. 환자의 상태를 보아 수액의 주입량을 적닿이 줄여야 한다.
식욕부진도 심해지는데 이 시기에는 아무리 영양을 섭취해도 환자의 상태는 호전되지 않음. 연명효과도 거의 없는 시기.
여명이 주단위가 되었을 때 말기의료는 일종의 전환점을 맞이함. 치료가 가능한 환자와 같은 방식으로 처치하면 환자에게 고통만 줄뿐이다. 심한 경우 남은 수명을 단축시킬 수도 있다. 사망이 가까운 환자에게 어느 정도의 수분과 영양이 필요한지, 확실한 연구결과는 아직 없다. 하지만 일반 환자보다 훨씬 적은 양으로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환자나 가족의 강력한 희망에 따라 하루에 수분 200미리, 영양분 35키로칼로리를 투여하고 경과를 지켜본 적이 있는데, 놀랍게도 그 편이 환자가 고통을 덜 느끼며 100일 정도 평온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여느 때보다 훨씬 적은 양이었음에도 탈수현상도 일어나지 않았고 영양실조상태에 빠지지도 않았다. 말기 의료의 경험이 풍부한 의료진들은 때때로 경험하는 일이다.
일반 사람들 뿐 아니라 의료진도 오해하기 쉬운 일이지만, 이때 환자는 소위 말하는 기아상태가 아니다. 따라서 영양분을 주입한다고 몸 상태가 호전되지 않는다. 환자는 이미 영양을 주입해도 기능을 개선하거나 생명을 연장할 수 없는 상태인데, 이런 상태를 악액질이라고 한다.
일상 행위의 장애를 보면 이 시기에 환자가 가장 힘들어하는 점은 걷지 못하는 일. 자기 힘으로 이동할 수 없는 고통은 상당히 크다. 더 괴로운 것은 그 상태를 개선할 방법이 없다는 것. 안타깝게도 한번 걷지 못하는 상태가 되면 다시 회복될 가능성은 낮다.
또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된다는 상실감에 정신적으로도 심한 고통에 시달림. 다가오는 죽음으로 인해 자신의 존재가 위협당하면 누구나 근원적 의문이 생김. 내 인생은 도대체 무엇이었나? 왜 나는 죽지 않으면 안되는가? 와 같은 의문이고, 그 의문에 답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림.
전신쇠약 증상이 진행되면 어제까지 할 수 있던 일을 갑자기 못하게 되므로 누구나 상실감과 무력감을 느낌.
- 체력이 떨어지므로 배뇨가 어려워 요실금 증상을 보이기도 함. 반대로 움직이기 힘든데도 몇 번이나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하는 빈뇨현상도 나타남. 어느 경우든 마지막에는 요도에 관을 삽입해서 소변을 보게됨. 요실금이나 변실금은 환자에게 상당히 큰 정신적 고통을 안겨줌. 하지만 전신상태의 악화로 인한 기능저하가 원인이므로 개선되기 어려움. 결국 체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식욕저하가 심해져서 식사를 거의 못하고 섭취량이 극단적으로 줄어듬. 혹은 연하곤란과 같이 음식물이나 물을 먹고 마시는 것이 어려워짐. 이때 식사를 강요하고 점적이나 코에 관을 삽입하거나 위루로 영양분을 강제로 주입하는 것은 상태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음. 또 연하곤란은 음식물을 기관이나 폐로 잘못 삼키는 오연증상을 일으켜 오연성 폐렴을 유발하기도 함. 연하곤란이 더 진행되면 침만 삼켜도 오연이 되므로 식사를 멈추어도 오연증상을 방지할 수 없음
또 이무렵에는 성대가 가늘어져 목소리가 쉬게 되고 말하는 것이 힘들어짐. 이관의 변화로 귀에서 소리가 울리는 이명이 생기거나, 입안이 바싹 마르는 등 고통스런 증상이 다양하게 나타남. 유감스럽게도 이들 기능저하의 개선에 완화의료는 그다지 효과가 없다. 사망이 가까워져 전신의 모든 기관이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태이므로 개선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이런 증상들이 나타나면 더 이상 손쓸 도리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 여명 일 단위
개인차는 있지만 이 시기 주요 증상은 자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는 것이다. 떨어지는 체력을 보충하기 위한 자연스런 반응. 깨어 있을 때 오히려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무력감에 시달리므로 수면상태가 환자에게는 그다지 고통스럽지는 않은 듯 하다. 몸이 축처져서 잠도 잘 수 없는 환자도 있는데, 그런 경우 환자의 동의하에 졸음을 유발하는 진통제를 사용. 이 약제는 적절히 사용하면 수명을 단축시키지 않음.
이 단계의 환자는 곁에서 지켜보는 가족들이 '항상 자고 있다', '일어나 있어도 잠꼬대를 하는지 알 수 없는 소리를 한다'고 표현하듯이 많은 시간을 자면소 보낸다. 깨우지 않으면 곧장 졸다가 자버리는 경면 상태가 된다. 또 점점 시간이나 장소를 구별하지 못하거나 가족까지 잘 알아보지 못하는 시간, 지남력 장애가 두드러진다.
개중에는 섬망과 같은 혼미상태에 빠지는 환자도 있다. 이 증상은 여명이 주단위일 때 나타나기도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8할의 환자에게 나타난다고 한다.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를 하거나, 주위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거나, 가족들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환각이 보이는 등 주변 사람이 보기 혼란에 빠진 듯한 증상이 나타남.
이럴 때 환자가 말하는 것을 부정하거나, 의료용 마약을 잘못 사용하면 증상이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있음
이 시기가 되면 환자는 물론 옆에서 간병하는 가족들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움. 통증으로 괴로워하거나 누워서 꼼짝 못하는 환자를, 이제 곧 닥칠 영원한 이별을 예감하며 지켜봐야 하는 것이다. 강한 정신력이 필요한 시기다. 마지막 순간까지 의식이 또렷한 사람은 정말 극소수다. 대개는 혼수상태에 빠지거나 섬망 상태가 되어 오늘이 며칠인지, 여기가 어딘지 모르며, 가족의 얼굴까지 알아보지 못한다.
- 또 오랜 침상생활 탓에 욕창이 생겨 피부가 상한다. 욕창을 예방하려면 자주 체위를 바꾸어주어야 하지만, 전신상태가 악화되면 눈깜짝 사이에 욕창이 생긴다. 욕창은 예방하기도 어렵지만 전신상태가 나빠지면 영양상태도 악화되므로 한 번 생기면 잘 낫지도 않는다. 이 시기가 되면 환자와 정상적 대화도 어려워짐.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숨을 거두기 직전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은 거의 불가능. 환자는 누운 채 움직일 수 없게 되므로 배뇨, 배변도 곤란해짐. 식사는 물론 수분섭취까지 어려워 억지로 먹이거나 마시게 하면 오연증상을 일으킴. 점적으로 수분과 영양을 주입한다고 해도 수명을 늘리거나 하는 효과는 기대하기 어려움.
이 시기에는 간병하는 가족에 대한 보살핌도 중요. 환자가 계속 누워있기만 하고 불러도 반응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가족들은 낙담하거나 긴장이 풀려 더 괴로워함. 하지만 이런 증상은 특별한 것이 아님. 대부분의 환자가 겪는 과정. 
- 여명이 24-48시간 정도가 되면 최후의 고비가 기다림. 사망 24가 이전 무렵이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다. 이때 환자는 몸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무력감에 시달림. 그야말로 마지막 고비다. 이 시기에는 간헐적으로라도 진정시킬 필요가 있다. 
사람은 정말 쉽게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때는 환자도 마지막 고통을 느끼는 듯 하다. 개인차는 있지만 다리가 무겁다며 좀 움직여달라고 한다든지 괴로운 나머지 뒤척이다가 체위를 바꿔달라고 부탁하기도 함. 환자도 괴롭고 지켜보는 사람도 가장 힘든 시간이다. 이 고비만 넘기면 대개의 경우 온화한 시간이 기다린다. 고통이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지만 완화의료의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도 이 24시간 전후에 찾아오는 고통을 없애기는 어려움. 

- 여명 시간단위
마지막가지 통증을 겪거나 섬망증상이 계속되는 환자도 있지만 이때쯤 필요한 환자에게 적절히 진정제를 투여하면, 혹은 약물을 사용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의식이 없는 혼수상태로 넘어감. 이 상태에서 환자는 거의 고통을 느끼지 못함. 고통이 있다면 몸을 뒤척이기도 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고통이 없다고 보아도 좋다. 상태가 갑자기 악화될 가능성은 약 2할 정도이며, 그 밖에 수명이 몇 시간 남지 않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때 참고가 되는 것이 혈압이 떨어져 손목의 동맥으로 맥이 잡히지 않거나, 소변량이 거의 제로에 가깝게 줄어드는 증상, 그리고 피부와 점막이 파래지는 청색증과 같은 증상임. 의식이 희미해져 불러도 대답이 없거나 자극에 반응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들 징후가 한 가지 혹은 여러가지가 한꺼번에 나타난다면 일반적으로 소생이 힘든 위독상태다.
- 이 시기 가족들이 기억해야할 사항
(1) 환자는 거의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몸을 뒤척이거나 하지 않는 한, 가래가 끓는 소리가 계속 나거나 '아- 아-'하고 숨을 쉴 때마다 목소리가 새어 나오거나 호흡이 거칠어져도 환자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족들은 너무 걱정말고 침착하게 임종을 준비해야 한다.
(2) 환자의 청각은 마지막까지 기능을 유지한다는 점. 여명이 일단위가 되면 환자는 아마도 고통에서 벗어나 꿈꾸는 듯한 상태가 되는 것 같다. 그런 반면 외부 소리는 확실히 들린다고 한다. 가족에게는 여전히 환자가 괴로워 보일지라도, 또 말을 걸어도 거의 반응이 없기에 곁에서 보기 힘든 시기지만 마지막까지 환자의 곁을 지켜주어야 한다.
큰 소리가 아니라 귓전에서 상냥하게 말을 거는 것도 좋다. 손을 잡아주거나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는 행동도 저세상으로 떠나는 환자의 발길을 편안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한편 '장례식을 준비해야겠다'든지 '이제 얼마나 남았을까요?'와 같이 환자가 들어서는 곤란한 이야기는 피한다. 환자에게 들릴 가능성이 있으므로 민감한 이야기는 자리를 옮겨서 한다.
- 임종이 가까워 오면 먼저 환자의 호흡방법이 변화함. 아래턱을 내미는 호흡, 즉 하악호흡으로 숨을 쉰다. 그리고 몇십 분 혹은 몇분 뒤에 호흡이 멈춘다. 호흡이 정지해도 한동안은 심장이 뛰고 경동맥이 뛰는 것이보이며, 팔의 동맥도 일정 시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심장도 멈춘다. 그 순간을 편의상 사망시각으로 본다.
하지만 심장의 전기신호는 심장이 정지된 뒤로도 몇 시간씩 멈추지 않으므로 사망시각을 꼭 정밀하게 따질 필요는 없다. 사망의 3요소, 호흡정지, 심장정지, 동공확대의 증상이 확인된다 해도 육체의 모든 세포가 죽은 것은 아니기 때문. 따라서 사망시각은 어디까지나 편의적인 구별에 지나지 않음. 결국 가족들 모두가 환자의 죽음을 받아들였을 때야말로 진정한 사망시각이다.
- 한편 미리 환자의 죽음을 예상한 가족들은 예상된 슬픔이라는 반응을 보임. 환자가 죽은 뒤에 슬퍼하는 상황을 살아있을 때 미리 느끼는 것. 이것은 극히 정상적 반응이며 실제 환자가 죽은 뒤 가족들이 그 상황에 원만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줌. 가족들은 환자의 죽음을 예상하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려고 애쓰거나 환자가 없는 생활을 가정하고 가족관계를 다시 정립하기도 함.
인간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익숙해질 시간이 있으면 큰 환경변화에도 적응가능. 에를 들어 천천히 진행하는 빈혈환자는 보통사람보다 2배 정도 혈액이 묽은 상태에서도 정상적으로 생활을 영위함. 반면 갑작스런 출혈로 혈액이 정상보다 절반 이하로 묽어지면 완전히 쇼크상태에 빠져 생명이 위험해진다.
정신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서서히 환자의 죽음을 받아들일 시간이 있다면 누구나 충분히 적응가능하다. 사람이 마음은 생각보다 약하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스스로 치유할 수 있다. 예상된 슬픔도 환자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반응이다.

- 환자 가족 중에는 '아이들에게 부모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편이 좋다.', '나중에 트라우마가 되니 죽는 순간은 보이고 싶지 않다'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가능한 있는 그대로의 과정을 보여주는 편이 좋다. 단 주위 어른들이 아이가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해 주어야 한다.
'엄마는 힘들지만 잘 견디고 있단다'
'아빠가 이제 떠나시려나봐. 하지만 우리가 곁에 있으니까 외롭지 않으실 거야'
장례식에도 가능한 한 참석시켜야 한다. 말기 의료의 현장을 경험하며 가장 나쁜 일은 진실을 안이하게 숨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누구든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설명해준다면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다. 아직 어리니까 혹은 노인이니까 하고 무시해서는 안됨.
특히 아이는 가족을 떠나보낸 기억을 껴안고 앞으로도 오랜 시간을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가족이 죽기 전에도, 죽은 후에도 또 환자 본인도, 주위 사람들도 거짓을 말해서는 안된다. 그 아이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 조금만 아파도 죽지나 않을까 마음이 약해지는 것은 번뇌 탓입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은 끝이 없지만 목숨이 다해 어쩔 수 없이 저 세상으로 떠밀려 가는 것이 평범한 인간의 운명입니다. 이렇듯 언제까지나 세상에 매달린 채 정토로 떠날 마음이 없는 인간을 부처는 더욱 가엾게 여겼던 것입니다. (유이엔, 탄이초)

- 죽음의 변화과정 4가지
옛날 사람들은 자신이 죽을 때를 깨닫고 세상을 떠났다.
혹은 누군가가 일러줘서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 죽어갔다. 필립 아리에스는 서양사회에서 죽음이 변화하는 과정을 4가지로 구분.
먼저 순화된 죽음, 그리고 나의 죽음, 너의 죽음, 마지막으로 금지된 죽음이다. 1000년도 넘게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익숙한 순화된 죽음이었다. 아리에스에 따르면 죽음을 친숙하게 느끼며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는 옛사람의 태도는 죽음이 너무나 두려워 입에 담는 것조차 꺼리는 지금의 우리와 너무나 다르다. 
죽음을 친숙하게 바라보는 태도는 11세기에서 12세기, 즉 중세중반까지 유지되었음. 17세기 무렵 혹은 그 이후까지 일부 사회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죽을 때는 그 사람의 친척이나 친구, 이웃둘이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물론 아이들도 참석시켰다. 18세기까지 죽음을 앞둔 사람의 방을 그린 그림에서 아이가 없는 경우는 없다. 죽음에 관련된 모든 일에서 아이들을 격리시키려는 지금 사회와는 너무 다르다. 죽어가는 사람 곁에 아이가 있는 일도 흔했다는 것이다.
- 필립 아리에스는 죽음과 역사에서 죽음이 터부시되기 시작한 것이 그리 오래 전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 그에 따르면 죽음을 멀리하고 터부시하는 태도는 20세기 전반 미국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리에스의 주장에 따라 우리 사회에서 죽음이 어떤 식으로 변천했는지 살펴보자. 우선 최초에 순화된 죽음이 있었다. 이 죽음은 약 1000년 중세 중반까지 이어짐. 이 시절 죽어가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최후가 가깝다는 사실을 알고 세상을 떠날 준비를 했다. 죽음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으므로 병상에 누워 죽음을 기다림. 죽음은 또 공공의 것이기도 해서 죽어가는 자의 방은 통행인조차 마음대로 드나들었다. 당시에는 아이들도 죽음을 지켜보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익숙하며 친숙한 존재였다.
중세 중반을 지나가자 죽음은 나의 죽음으로 바뀜. 12세기부터 15세기 사이에 보이는 죽음이다. 부유한 자, 권력 있는자, 학식 있는 자를 중심으로 죽음이 자신의 야망과 쾌락을 해치는 존재라는 사실을 강렬하게 자각하기 시작. 그와 동시에 자신이 소유한 물건이나 존재에 대한 집착, 그리고 삶에 대한 열정을 느끼게 됨. 그들은 죽음이라는 거울 속에서 자신만이 가진 개성을 재발견하게 된 것임. 이때부터 죽음은 모두에게 동질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죽음, 즉 나의 죽음으로 재탄생.
중세를 지나 근세로 접어들자 너의 죽음이 출현. 이 죽음은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이어짐. 죽음은 내가 아닌 타자의 죽음으로 묘사되었고 이 세상과 단절됨. 지난 날 평범한 일상 속에 존재하던 죽음의 병상이 죽어가는 사람도, 지켜보는 사람도 슬픔에 울부짖으며 기도하는 특별한 존재가 됨. 또 죽음이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그려진 탓에, 죽음이라는 이미지만 떠올려도 사람들의 마음은 격렬하게 동요했다. 유언도 전처럼 주변의 일을 자세하게 기재하지 않고 재산관계만 간략히 정리하게 되면서 죽음의 주도권이 본인이 아니라 가족에게 옮겨감.
- 20세기 초반 사람들은 죽어가는 사람에게 진실을 알릴 수 있는 용기를 잃어버림. 그리고 사회는 죽음으로 인한 괴로움과 감정적 동요를 피하려고 애쓰게 되었다. 아리에스는 이 시기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
병원에서의 죽음은 지금까지 당연하던 죽음의 장면을 앗아갔다. 가족과 친지들에 둘러싸여 죽음을 맞이할 기회는 점점 사라졌다. 죽음은 의료의 정지로 인해 발생하는, 즉 의료진이 인정한 결정에 의해 생겨나는 지극히 기술적 현상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 결정이 내려지기 훨씬 이전에 의식을 잃는다.
죽음은 이제 일련의 세부단계로 해체되고 세분화됨. 최종적으로는 어느 단계가 진실한 죽음의 순간인지, 즉 환자가 의식을 잃은 단계인지, 호흡을 멈춘 단계인지 알 수 없게 됨. 의료진은 살아남은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인정할 수 있는 죽음을 환자에게 요구하게 됨. 볼썽사나운 죽음은 주위 사람들을 동요시키므로 기피되었다. 죽음은 멀리 격리되고 터부시되었다.

- 사람은 본래 자신의 죽음을 깨달을 수 있는 힘이 있다. 병원치료나 대체의료가 죽음의 마지막 순간까지 끼어든 탓에 다른 곳에 신경을 쓰게 되었을 뿐이다. 자신의 몸이 전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누구나 자신이 죽을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음. 오히려 죽음을 터부시한 탓에 죽어가는 사람은 거짓 정보를 전달받게 됨. 주변 사람들의 말을 믿고 자신의 죽음을 깨닫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음.
하지만 내가 죽음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몇 안되는 환자들은 스스로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이야기해 주었다. 그들은 자신이 언제 죽을 것인지 확실히 깨닫고 있었던 것. 결국 주변에서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지만 않는다면 대부분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깨달을 수 있다. 죽음은 터부시할 대상이 아니며 현대의 금지된 죽음은 시대의 산물일 뿐이다.

- 우리는 언젠가 죽을 존재다. 우리의 인생은 유한하며 우리의 시간은 정해져 있다. 우리의 가능성은 제한적이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무엇인가를 하려고 생각하거나, 어떤 가능성을 살리거나, 실현하거나, 성취하거나, 시간을 활용하거나, 충실하게 보내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죽음은 우리에게 그 일을 강제하는 존재다. ... 죽음은 살아가는 의미의 일부가 되었으며 고난과 죽음이야말로 인생을 의미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빅터 프랭클, 그래도 인생에서 예스라고 하다)

- 얼마나 오래 사는가는 본질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다. 단지 장수한다는 사실만으로 삶에 의미를 부여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짧지만 훨씬 더 뜻깊은 인생도 있다. 한 사람의 자서전이 가진 가치는 그 페이지 수가 아니라 오직 그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의 풍요로움으로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빅터 프랭클)
긴 여행이 반드시 감동적인 것은 아니다. 짧지만 아름다운 자연과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훨씬 더 감동적인 여행이 될 것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장수하는 인생도 훌륭하지만 오래 사는 것보다 잘 사는 일, 즉 좋은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 병이 깊어지면 '이럴 때 가족이 없어서 곤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나는 그럴 때야말로 '가족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성공했다고 자부할 만한 일이 그리 많지 않지만 가정을 이루지 않은 것은 참 잘했다고 생각한다. ... 친구사이라면 서로 잘하는 분야에서 형편이 될 때 도와줄 수 있다. 만일 내게 가족이 있었다면 이런 도움에도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도움이 필요할 때 부탁하는 일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나도 충분히 남을 도왔으니 내가 필요할 대는 기꺼이 남의 도움을 받는다. 내가 도와준 사람과 지금 나를 도와준 사람은 대개 다른 사람이다. 한 번 신세를 지게 되면 늘 그 사람에게 도움을 받게 되는데,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는 법이다. 양쪽을 합해서 수지가 맞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를 도와주는 사람에게는 진심으로 감사하지만 미안한 마음은 없다. (지바 아츠코, 잘 죽는 것은 잘 사는 일이다)

- 우리는 살면서 이별의 슬픔과 괴로움을 경험한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그 괴로움을 견뎌낸다. 하지만 인생의 가장 큰 이별인 죽음에 대해서는 오히려 준비하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을 다잡고 준비하면 어떨까 깨달았다. 그 준비란 지금 함께 있는 사람들과의 이별을 슬퍼하는 일이며 자신이 살아온 세계에 미련을 떨치지 못하며 죽어가는 일이다. 죽음이란 그런 이별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의 공포를 견디는 방법은 억지로 죽음에서 눈을 떼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생활 속에서 작은 죽음의 이별을 되풀이하며 마음의 준비를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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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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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을 향한 하향곡선은 다양한 궤도를 그리지만, 개인이 느끼는 신체의 약화는 상대적으로 일정한 흐름을 따른다. 처음에는 매년 기력이 떨어지다가 그 주기가 매월에서 매주로 짧아지고, 삶의 마지막에 이르면 하루하루가 다르다. 이는 삶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 이제 가족이 모여 아직 하지 못한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다.
때로는 마치 백조가 죽기 직전에 딱 한번 부른다는 스완송처럼 숨을 거두기 전에 갑자기 활력이 넘치는 사람도 있다. 그 원인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간혹 분명한 이유가 존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현상이 늘 축복인 것만은 아니다.

- 예상한 방식 그대로 찾아오는 임종은 대부분 차분하고 평온하게 진행되지만 예기치 못한 갑작스러운 죽음 또한 곳곳에 존재.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할 때 보통 당사자는 의식을 잃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는 채로 눈을 감지만, 그것을 목격한 사람은 견디기 힘든 기억을 갖고 살아가게 된다.
누군가와 사별한 사람은 설사 그것이 평화로운 죽음이었다 하더라도 그 경험을 반복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이것은 고통스러운 경험을 기억으로 바꾸기 위한 중요한 과정이다. 그리고 환자들을 돌보는 우리도 때로는 힘든 경험을 털어놓아야 한다. 그래야만 마음의 건강을 지키면서, 다시 힘을 내 병원으로 돌아가 다음번 충격을 감내할 수 있다.

- 임종 자리는 곧 끝을 맞이할 삶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되는 자리이자, 가만히 지켜보며 귀를 기울이는 자릳. 그리고 우리를 연결하는 것이 무엇이며, 다가오는 이별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영원히 바꾸어 놓을지 생각하는 시간이다.

- 사람들은 실제 질병보다 질병을 바라보는 태도에 의해 더 크게 제한됨. 질병은 신체적 도전을 야기하나, 많은 경우 감정적 도전이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인간의 정신은 앞에 놓인 길이 너무 험하게 느껴질 때면 좌절하기도 하지만, 지지와 격려가 있으면 고비를 극복하고 창의적 해결책을 찾아낸다. 우리는 제각각 다른 개인이기에 한 사람의 계획이 겉보기에 비슷한 상황에 처한 다른 사람에게도 들어맞으리라는 법은 없다.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내도록 도와주는 것이 그들의 존엄을 존중하는 길. 그들은 삶의 새로운 단계에 접어든 것일 뿐 개인성을 포기한 것이 아니기 때문.

- 오늘날 죽음을 언급하는 것은 금기가 되었다. 이 변화는 점진적으로 이루어졌으며, 현대인이 임종과정으로부터 점점 더 유리되면서 차츰 그것을 설명하는 어휘도 줄고 있다. 눈을 감았다, 우리 곁을 떠났다, 같은 완곡한 표현이 죽었다를 대체. 질병은 투쟁의 대상이 되었고, 병자와 치료, 그리고 그 결과를 이야기할 때는 전투의 비유가 사용됨. 아무리 잘 살았던 사람도, 아무리 인생에서 이룬 바에 만족하며 아쉬울 것 없이 편안히 눈을 감은 사람이라도 단순히 죽은 것이 아니라 싸움에서 진 것이 된다.

- 질병과 죽음을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되면 막연한 이야기대신 간단명료한 대화가 가능해짐. 죽음을 마치 입 밖에 내는 것만으로도 불행을 가져오는 저주인 양 취급하는 대신 서로 허심탄회하게 죽음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면 죽어가는 사람은 삶을 어떻게 마무리할지 생각해보면서 뒤에 남은 가족을 위한 계획을 세울 수 있을 것임. 모든 인생의 끝에 찾아오는 죽음이라는 개념을 당연한 순리의 영역으로 되찾아올 수 있을 것이다. 열린 대화는 미신과 공포를 잠재우고, 아닌 척과 선한 거짓말로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솔직하게 순간을 보낼 수 있게 해준다.

- 보통 폐에 공기가 충분히 공급되지 못해ㅍ사망에 이르는 질병의 경우 호흡실패가 점진적으로 진행. 그 과정에서 산소포화도가 떨어져 의식과 사고력이 감소하고, 혈중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어져 졸음이 오게 됨. 이 미세한 변화는 점진적 의식상실로 이어짐. 이때 공기기아 감각이나 두통이 유발되기도 하지만, 소량의 몰핀류 약물과 진정제를 투입하면 호흡과 생명이 자연히 약해지다 결국 멈출때까지 호흡곤란 증세를 거의 또는 전혀 느끼지 않도록 조치하는 것이 가능.
인공호흡기를 끄는 것은 이와는 상당히 다른 문제다. 인공호흡기가 멈추는 즉시 질식하는 느낌이 들며 극심한 공포를 경험하게 됨. 

- 깊은 숨을 쉬면서 코고는 듯한 소리를 낸다. 한동안 깊고 빠른 호흡이 이어지다 점차 느리고 조용해진다. 체인스톡 호흡. 환자가 깊은 의식불명 상태임을 의미. 이렇게 빠르다가 느려지는 호흡이 한 주기가 끝날때마다 한참 동안 숨을 쉬지 않는 공백이 생긴다. 공황을 일으키거나 갑작스런 고통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며 어떤 극적인 사건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저 호흡주기가 조용히 끝날 것이다.

- 현대 실험심리학에서 주요 종교들, 그리고 공자와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의 무신론적 지혜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영원철학은 모두 사람이 일생에 걸쳐 지혜를 터득하면서 이루는 내면의 성장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인간의 삶은 두 단계로 구분된다. 첫번째 단계는 정체성을 확립하고 성인의 역할을 해낼 수 있게 성장하는 단계. 이 단계는 필연적으로 자기중심적이며 모든 것이 나로 귀결된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어떤 가치를 믿는가? 나는 어떤 재주와 재능, 강점가 능력을 가졌는가? 세상이 내 능력을 알아줄까? 때로 자신의 결점가 약점을 분별하는 자아성찰이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그 이유는 약점을 타인의 관심과 비판으로부터 감추기 위해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인생의 첫단계에서 정체성을 확립한다.
인생의 두번째 단계는 자아를 뛰어넘는 지혜를 습득하는 과정. 인간은 오랜 세월을 거쳐 이런 지혜를 터득한다. 하지만 남보다 일찍 이 단계에 도달하는 사람도 있으니, 대부분 개인적으로 소중한 누군가 또는 무엇을 잃거나 커다란 고통을 겪었기 때문. 자신이 치료불가능한 병에 걸렸음을 알게 되고, 다가오는 죽임이 익숙하고 소중한 모든 것의 종말을 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환자들도 여기에 해당. 영원철학은 이 변화과정을 나름의 방식으로 묘사하지만, 모두를 관통하는 골든룰은 타인을 향한 측은지심이다. 즉, 나에게 맞춰져 있던 모든 초점이 모두와 모든 것으로 이동. 여기에는 남의 잘못을 너그럽게 용서하듯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고 용서하는 것도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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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진국 병원들은 상담실이나 명상실 같은 여유공간을 설치해 두고, 종교에 관계없이 환자나 보호자들이 와서 기도하고 울기도 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함. 국내 대형병원에는 명상실이 들어갈만한 공간을 온통 상점들이 차지하고 있어 병원에 온 것인지 백화점에 온 것인지 분간이 안된다. 오늘날 한국의 병원은 과연 누구를 위한 병원일까.

- 법조계와 의료계의 시각이 다른 문제의 본질은 의료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음을 의료현장에서 종사하는 사람 외에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가령 폐렴환자에게 항생제는 필수다. 항생제를 쓰지 않으면 치명적(회생불가능)이지만, 적절히 사용하면 환자를 회생시킬 수 있다. 물론 항생제는 부작용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이런 경우는 드물다. 달리 표현하면, 항생제를 써서 환자에게 끼치는 영향은 99퍼센트 이상의 이득과 1퍼센트에도 못 미치는 손해를 비교해 결정하게 되는 절대적 의료행위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의사의 결정과 행동은 절대적이고, 무한 책임을 진다. 이같은 의학적 결정은 회생가능, 회생불가능으로 이원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진료현장에서 이뤄지고 있는 의학적 결정은 그렇지 못하다. 인위적으로 인체기능을 조절할 수 있는 연명도구가 급속히 발달하면서, 회생가능성 예측이 굉장히 어려워졌다. 법은 회생가능성이 있었는가, 없었는가 둘 중 하나의 답변을 요구하지만, 진료현장에서는 회생가능성의 판단이 100%와 0%로 명확히 구분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다만 확률을 예측해볼 수 있을 따름이다.

- 80년대 병원에서 일했던 의사들의 주요 업무 중 하나는 임종에 임박한 환자를 구급차에 실어 집으로 모셔다 드리는 일이었음. 집을 떠나 객사하는 것을 피하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 그러나 사회가 병원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됨에 따라 91년 10%대에 불과하던 병원에서 임종하는 말기암 환자 비율이 2010년에는 90%에 근접했고, 연명장치가 계속 발전하면서 임종의 의료화 현상도 가속화됨.
현대 의학으로 더는 치료가 불가능하며, 중환자실 의료기기로 생명연장만 가능하다고 할 때 그렇게라도 살겠다고 선뜻 나서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그러나 진료현장에서는 의료분쟁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상황이 애매할수록 더 많은 검사나 치료를 행하고, 상태가 위중해지만 일단 연명장치부터 적용하는 것이 관행이 됨. 불확실한 상황에서 이뤄지는 의학적 결정에 대해 사회가 의료진을 보호할 제도를 마련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
그 결과 리엔재단이 2010년 발표한 임종의 질 보고서에서 한국은 OECD국가중 최하위권을 기록. 1등을 차지한 영국에 비해 우리나라가 국민 1인당 CR, MRI등 고가 의료장비 보유대수는 네배에 달하고, 항암제를 포함한 약은 두 배 이상 쓰고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임종의 질은 의료수준이나 경제적 요인으로 좌우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임종의 질을 떨어뜨리는 의료행위가 이뤄지는 이면에는 투병과 임종과정에 환자 본인의 뜻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한국만의 특수한 가족문화도 있다.

- 회생가능성 없어 임종을 앞둔 환자나 보호자가 할 수 있는 의료선택은 크게 두가지.
첫째, 생명이 붙어 있는 기간을 연장하는 데 중점을 두고 가능한 연명의료를 모두 시행하는 의료집착적 행위. 많은 경우 환자가 회복할 수 있기를 막연히 기대하면서 이쪽을 선택. 
둘째, 삶의 기간보다 질에 중점을 두고 가능한 한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완화의료. 의료진은 기본적으로 환자의 생명을 연장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함. 이런 병원 시스템 속에서는 현대의학으로 치료불가능한 환자뿐 아니라 고령으로 자연사를 앞두고 있는 노인에게도 모든 의학적 방법을 동원해 생명연장을 시도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짐. 
그렇지만 임종과정에서 일어나는 호흡곤란에 인공호흡기를 적용하고, 신장기능이 떨어지면 투석을 해서 절대적 생존기간을 늘리는 것이 환자에게 의미있는 삶을 주지 못할 뿐더러 결과적으로 임종단계의 고통받는 기간만 연장했다면 과연 윤리적으로 옳은 일일까.

- 카톨릭에서 제정한 의학윤리 지침서에서는 인공호흡기 같은 예외적 의료행위를 중단하는 것은 용인될 수 있지만 간호행위, 영양공급 등 필수 의료행위는 통상적인 도덕적 의무라고 제시. 반면 서양의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는 영양공급 문제도 포함된 경우가 많다.
한편 한국의 의료현황은 크게 다름. 국내의 한 조사에 따르면, 말기 암 환자의 83%가 임종 이틀 전까지 정맥주사를 통해 영양공급을 받는 것으로 나타남.
우리나라에서 회생가능성이 희박한 환자에게 행하는 의료행위에 대한 의견일치율은 인공호흡기, 심폐소생술, 혈액투석, 경관영양공급, 정맥영양공급, 항생제, 마약성 진통제 순이다. 인공호흡기, 심폐소생술, 혈액투석 등은 예외적 연명의료로 보는 반면, 영양공급, 항생제, 진통제 사용은 통상적 필수 진료행위로 여기고 있다.

- 서구에서 의사가 전문직으로 존경받는 직업인 이유 중 하나는 왕진 때문이었을 것임. 늦은 밤 환자의 가족이 의사 집 문을 두드리면 의사가 급히 잠옷을 갈아입고 진료가방을 챙겨 비바람을 뚫고 환자 집으로 가는 장면은 옛날 영화에서나 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영국에서는 아직까지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음. 의사가 그 환자의 병을 고치지 못했다 하더라도 어려운 순간을 함께 하고 도와주기 위해 달려와준 것만으로도 환자의 가족들은 그 의사를 신뢰할 것임.
우리나라에서도 과거에는 의사가 환자의 가정을 방문하는 왕진 형태의 진료가 이뤄졌지만 지금은 잊혀가는 과거다. 의료기술의 발달로 첨단 의료장비를 갖추고 있는 시설에서 진료를 받는게 환자에게 도움이 된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왕진제도가 사라져버린 가장 직접적 원인은 건강보험제도. 우리제도는 환자가 의료기관을 방문해 받는 검사, 시술, 약 등에 기준한 체계이므로 의사들은 많은 수의 환자에게 검사지와 처방전을 발부해야 한다는 압박 아래 환자와의 만남인 진료행위는 오히려 등한시 되고 있는 것이다. 왕진은 진료행위가 핵심인 의료행위이며 따라서 환자를 중심에 두고 있지만 현해 의료체계에 만지 않는다는 이유로 도태되고 말았음.
70년대 이후 의학교육을 받은 의사들은 환자를 찾아간다는, 다시 말해 환자를 중심으로 하는 의사의 자세를 배우지 못했다. 환자와 의사의 만남보다는 검사나 약을 앞세우고, 환자의 입장보다는 관리하기 편리한 제도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잃어버리고 말았다.

- 건강보험 수가에는 간병과 관련된 비용이 포함돼 있지 않다. 선진국에서는 의료에 필수적으로 포함되는 간병 서비스를 한국 의료정책은 외면. 08년부터 장기요양보험제도를 실시하고 있지만 65세 이상 노인에게 해당되거나 또는 65세 미만에서는 노인성 질병을 가진 자만 수급대상으로 지정됨. 이런 조건에 부합하더라도 간병비 지원은 요양시설이나 집에 있을 때만 가능함. 병이 악화되어 의료기관에 입원하면, 일반 환자뿐 아니라 요양병원에 입원한 노인환자 조차 간병지원을 받을 수 없음.
중증질환으로 진단되면 검사비와 약값은 건강보험이 대부분을 지원해주고 본인은 5%만 지불하면 되지만, 거동이 불편한 환자들 돌보는 간병인은 개인부담으로 고용하거나, 가족 중 누군가가 직장을 그만두는 희생까지 감수해야 함. 지금도 병원의 모든 시스템은 40년 전과 마찬가지로 환자를 간병할 가족이 있는 것을 전제로 운영되기에 보호자 없이 혼자 병원에 오는 환자는 입원하기가 두려울 수밖에 없다.

- 매년 7만명의 암환자가 극심한 고통을 겪으면서 임종을 맞고 있다. 이 과정에 호스피스, 완화의료라는 적극적 간병서비스가 절실한데도 불구하고 재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미뤄오다가 17년 8월에갸 건강보험 지원을 받게 됨. 전체 암 사망자 중 호스피스 전문기관의 도움을 받은 환자는 17.5%에 불과.이와 반대로 효능이 충분히 입증되지 않아 우리보다 소득수준이 높은 선진국에서도 보험급여가 되지 않는 고가의 검사나 신약에 대한 급여확대에 한국은 보험재정을 쏟아붓고 있다.
장기 간병에 지쳐 노인부부가 동반자살을 하고, 부모나 자식인 환자를 살해하는 등의 사건이 끊이지 않는다. 대부분 만성질환을 앓고 있는 노인들의 간병문제를 의료와 분리해서 접근하는 정책은 현실과 맞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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