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음이 문턱에 선 사람들은 그 순간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진정한 삶의 시작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죽음을 선고받으면 죽음이 실체가 있는 대상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음. 그와 동시에 삶의 실체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때 사람은 자신이 아직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깨닫는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제 살아야 할 인생은 이것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죽어가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온 힘을 다해 하루하루를 살아가라고 알려준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인생수업)
- 죽음 그리고 죽음의 정숙함이야말로 우리 미래에서 유일하고 확실하며 모두에게 평등하다. 이 유일하고 확실하며 평등한 사실이 인간에게 아무런 힘도 미치지 못한다니, 또 인간들은 자신이 죽음의 형제라는 사실을 느끼지 못한다니 이 얼마나 괴이한 일인가. (니체, 죽음의 학문)
- 사람은 어떻게 죽는가
(1) 비교적 장시간을 신체기능을 유지하고 마지막 2개월 정도에 급격히 기능이 떨어진다. (암)
(2) 급격히 증세가 악화되는 현상이 반복되면서 서서히 기능이 떨어지고 마지막에 비교적 급격한 경과를 보인다. (심장질환이나 폐질환 말기)
(3) 기능이 저하된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된다. (치매, 노쇠)
- 환자에게 남은 수명을 예측하기는 상당히 어렵지만 현장의 경험은 확실히 큰 도움이 된다. 일반적으로 환자의 여명을 예측하는 기준은, 완화의료 분야에서 자주 사용되는 스테로이드 효과와 증상, 그리고 일상생활의 장애정도다. 개인적 경험상 스테로이드가 전혀 듣지 않거나 효과가 있어도 한정적이거나, 혹은 며칠만 눈에 띄게 효과가 있다면 남은 수명은 짧은 주단위다. 즉 1주일에서 3주일 안에 숨을 거둘 가능성이 높다.
환자의 증상과 일상생활의 장애정도도 중요한 판단기준. 암이 고통스러운 질병인 이유는 발병 초기부터 통증을 느끼기 때문. 하지만 통증보다 더 말기환자를 괴롭히는 것은 빈도 100%에 가까운 전신권태감, 즉 온몸에 힘이 없는 상태. 식욕부진도 90% 이상의 환자에게 나타남.
남은 수명이 2주일 미만이면 이동, 배변, 배뇨, 식사, 수분섭취 같은 일상적 행위에 급격히 장애가 일어남. 즉 암환자의 경우 남은 수명이 한달 정도라면 정상적으로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여명이 2주 미만이 되면 갑자기 일상적 행위가 불가능해지고 마지막에는 거의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죽음을 맞이함.
심, 폐질환이나 치매의 경우도 행동에 장애가 생기는 것은 마찬가지. 다만 심,폐질환의 경우 비교적 급속도로 최후를 맞이할 확률이 높고 치매는 암보다 훨씬 더 천천히 기능저하가 일어난다는 차이가 있을 뿐. 어느 쪽이든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이동, 배변, 배노, 식사, 수분섭취가 가능한 사람은 정말 행운아다.
- 여명 주단위
수명이 몇 주일 남았을 때. 이 시기 가장 먼저 나타나는 증상은 전신권태감.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고 나른하다. 기운이 없다고 하면 보통 피로나 피곤한 상태를 생각하지만 이 시기의 권태감은 그런 감각과는 차원이 다르고 환자들에게 심한 고통을 준다.
스테로이드는 전신권태 증상에 비교적 잘 듣는 약물이지만 여명이 1-2주 단위가 되면 효과가 급격히 떨어짐. 결국 이때는 달리 처방할 만한 약이 없으므로 전신권태감으로 환자가 지나치게 괴로워하면 의식을 늦추는 진정제를 투여할 수밖에 없다.
온몸이 심하게 붓는 것도 이 시기다. 하루 1리터 이상 점적을 계속하면 붓기가 눈에 띄게 심해진다. 환자의 상태를 보아 수액의 주입량을 적닿이 줄여야 한다.
식욕부진도 심해지는데 이 시기에는 아무리 영양을 섭취해도 환자의 상태는 호전되지 않음. 연명효과도 거의 없는 시기.
여명이 주단위가 되었을 때 말기의료는 일종의 전환점을 맞이함. 치료가 가능한 환자와 같은 방식으로 처치하면 환자에게 고통만 줄뿐이다. 심한 경우 남은 수명을 단축시킬 수도 있다. 사망이 가까운 환자에게 어느 정도의 수분과 영양이 필요한지, 확실한 연구결과는 아직 없다. 하지만 일반 환자보다 훨씬 적은 양으로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
환자나 가족의 강력한 희망에 따라 하루에 수분 200미리, 영양분 35키로칼로리를 투여하고 경과를 지켜본 적이 있는데, 놀랍게도 그 편이 환자가 고통을 덜 느끼며 100일 정도 평온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여느 때보다 훨씬 적은 양이었음에도 탈수현상도 일어나지 않았고 영양실조상태에 빠지지도 않았다. 말기 의료의 경험이 풍부한 의료진들은 때때로 경험하는 일이다.
일반 사람들 뿐 아니라 의료진도 오해하기 쉬운 일이지만, 이때 환자는 소위 말하는 기아상태가 아니다. 따라서 영양분을 주입한다고 몸 상태가 호전되지 않는다. 환자는 이미 영양을 주입해도 기능을 개선하거나 생명을 연장할 수 없는 상태인데, 이런 상태를 악액질이라고 한다.
일상 행위의 장애를 보면 이 시기에 환자가 가장 힘들어하는 점은 걷지 못하는 일. 자기 힘으로 이동할 수 없는 고통은 상당히 크다. 더 괴로운 것은 그 상태를 개선할 방법이 없다는 것. 안타깝게도 한번 걷지 못하는 상태가 되면 다시 회복될 가능성은 낮다.
또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된다는 상실감에 정신적으로도 심한 고통에 시달림. 다가오는 죽음으로 인해 자신의 존재가 위협당하면 누구나 근원적 의문이 생김. 내 인생은 도대체 무엇이었나? 왜 나는 죽지 않으면 안되는가? 와 같은 의문이고, 그 의문에 답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림.
전신쇠약 증상이 진행되면 어제까지 할 수 있던 일을 갑자기 못하게 되므로 누구나 상실감과 무력감을 느낌.
- 체력이 떨어지므로 배뇨가 어려워 요실금 증상을 보이기도 함. 반대로 움직이기 힘든데도 몇 번이나 화장실을 들락거려야 하는 빈뇨현상도 나타남. 어느 경우든 마지막에는 요도에 관을 삽입해서 소변을 보게됨. 요실금이나 변실금은 환자에게 상당히 큰 정신적 고통을 안겨줌. 하지만 전신상태의 악화로 인한 기능저하가 원인이므로 개선되기 어려움. 결국 체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식욕저하가 심해져서 식사를 거의 못하고 섭취량이 극단적으로 줄어듬. 혹은 연하곤란과 같이 음식물이나 물을 먹고 마시는 것이 어려워짐. 이때 식사를 강요하고 점적이나 코에 관을 삽입하거나 위루로 영양분을 강제로 주입하는 것은 상태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음. 또 연하곤란은 음식물을 기관이나 폐로 잘못 삼키는 오연증상을 일으켜 오연성 폐렴을 유발하기도 함. 연하곤란이 더 진행되면 침만 삼켜도 오연이 되므로 식사를 멈추어도 오연증상을 방지할 수 없음
또 이무렵에는 성대가 가늘어져 목소리가 쉬게 되고 말하는 것이 힘들어짐. 이관의 변화로 귀에서 소리가 울리는 이명이 생기거나, 입안이 바싹 마르는 등 고통스런 증상이 다양하게 나타남. 유감스럽게도 이들 기능저하의 개선에 완화의료는 그다지 효과가 없다. 사망이 가까워져 전신의 모든 기관이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태이므로 개선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이런 증상들이 나타나면 더 이상 손쓸 도리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 여명 일 단위
개인차는 있지만 이 시기 주요 증상은 자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는 것이다. 떨어지는 체력을 보충하기 위한 자연스런 반응. 깨어 있을 때 오히려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무력감에 시달리므로 수면상태가 환자에게는 그다지 고통스럽지는 않은 듯 하다. 몸이 축처져서 잠도 잘 수 없는 환자도 있는데, 그런 경우 환자의 동의하에 졸음을 유발하는 진통제를 사용. 이 약제는 적절히 사용하면 수명을 단축시키지 않음.
이 단계의 환자는 곁에서 지켜보는 가족들이 '항상 자고 있다', '일어나 있어도 잠꼬대를 하는지 알 수 없는 소리를 한다'고 표현하듯이 많은 시간을 자면소 보낸다. 깨우지 않으면 곧장 졸다가 자버리는 경면 상태가 된다. 또 점점 시간이나 장소를 구별하지 못하거나 가족까지 잘 알아보지 못하는 시간, 지남력 장애가 두드러진다.
개중에는 섬망과 같은 혼미상태에 빠지는 환자도 있다. 이 증상은 여명이 주단위일 때 나타나기도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8할의 환자에게 나타난다고 한다.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를 하거나, 주위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거나, 가족들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환각이 보이는 등 주변 사람이 보기 혼란에 빠진 듯한 증상이 나타남.
이럴 때 환자가 말하는 것을 부정하거나, 의료용 마약을 잘못 사용하면 증상이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있음
이 시기가 되면 환자는 물론 옆에서 간병하는 가족들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움. 통증으로 괴로워하거나 누워서 꼼짝 못하는 환자를, 이제 곧 닥칠 영원한 이별을 예감하며 지켜봐야 하는 것이다. 강한 정신력이 필요한 시기다. 마지막 순간까지 의식이 또렷한 사람은 정말 극소수다. 대개는 혼수상태에 빠지거나 섬망 상태가 되어 오늘이 며칠인지, 여기가 어딘지 모르며, 가족의 얼굴까지 알아보지 못한다.
- 또 오랜 침상생활 탓에 욕창이 생겨 피부가 상한다. 욕창을 예방하려면 자주 체위를 바꾸어주어야 하지만, 전신상태가 악화되면 눈깜짝 사이에 욕창이 생긴다. 욕창은 예방하기도 어렵지만 전신상태가 나빠지면 영양상태도 악화되므로 한 번 생기면 잘 낫지도 않는다. 이 시기가 되면 환자와 정상적 대화도 어려워짐.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숨을 거두기 직전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는 일은 거의 불가능. 환자는 누운 채 움직일 수 없게 되므로 배뇨, 배변도 곤란해짐. 식사는 물론 수분섭취까지 어려워 억지로 먹이거나 마시게 하면 오연증상을 일으킴. 점적으로 수분과 영양을 주입한다고 해도 수명을 늘리거나 하는 효과는 기대하기 어려움.
이 시기에는 간병하는 가족에 대한 보살핌도 중요. 환자가 계속 누워있기만 하고 불러도 반응이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가족들은 낙담하거나 긴장이 풀려 더 괴로워함. 하지만 이런 증상은 특별한 것이 아님. 대부분의 환자가 겪는 과정.
- 여명이 24-48시간 정도가 되면 최후의 고비가 기다림. 사망 24가 이전 무렵이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다. 이때 환자는 몸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무력감에 시달림. 그야말로 마지막 고비다. 이 시기에는 간헐적으로라도 진정시킬 필요가 있다.
사람은 정말 쉽게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때는 환자도 마지막 고통을 느끼는 듯 하다. 개인차는 있지만 다리가 무겁다며 좀 움직여달라고 한다든지 괴로운 나머지 뒤척이다가 체위를 바꿔달라고 부탁하기도 함. 환자도 괴롭고 지켜보는 사람도 가장 힘든 시간이다. 이 고비만 넘기면 대개의 경우 온화한 시간이 기다린다. 고통이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지만 완화의료의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도 이 24시간 전후에 찾아오는 고통을 없애기는 어려움.
- 여명 시간단위
마지막가지 통증을 겪거나 섬망증상이 계속되는 환자도 있지만 이때쯤 필요한 환자에게 적절히 진정제를 투여하면, 혹은 약물을 사용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의식이 없는 혼수상태로 넘어감. 이 상태에서 환자는 거의 고통을 느끼지 못함. 고통이 있다면 몸을 뒤척이기도 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고통이 없다고 보아도 좋다. 상태가 갑자기 악화될 가능성은 약 2할 정도이며, 그 밖에 수명이 몇 시간 남지 않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이때 참고가 되는 것이 혈압이 떨어져 손목의 동맥으로 맥이 잡히지 않거나, 소변량이 거의 제로에 가깝게 줄어드는 증상, 그리고 피부와 점막이 파래지는 청색증과 같은 증상임. 의식이 희미해져 불러도 대답이 없거나 자극에 반응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들 징후가 한 가지 혹은 여러가지가 한꺼번에 나타난다면 일반적으로 소생이 힘든 위독상태다.
- 이 시기 가족들이 기억해야할 사항
(1) 환자는 거의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몸을 뒤척이거나 하지 않는 한, 가래가 끓는 소리가 계속 나거나 '아- 아-'하고 숨을 쉴 때마다 목소리가 새어 나오거나 호흡이 거칠어져도 환자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족들은 너무 걱정말고 침착하게 임종을 준비해야 한다.
(2) 환자의 청각은 마지막까지 기능을 유지한다는 점. 여명이 일단위가 되면 환자는 아마도 고통에서 벗어나 꿈꾸는 듯한 상태가 되는 것 같다. 그런 반면 외부 소리는 확실히 들린다고 한다. 가족에게는 여전히 환자가 괴로워 보일지라도, 또 말을 걸어도 거의 반응이 없기에 곁에서 보기 힘든 시기지만 마지막까지 환자의 곁을 지켜주어야 한다.
큰 소리가 아니라 귓전에서 상냥하게 말을 거는 것도 좋다. 손을 잡아주거나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는 행동도 저세상으로 떠나는 환자의 발길을 편안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한편 '장례식을 준비해야겠다'든지 '이제 얼마나 남았을까요?'와 같이 환자가 들어서는 곤란한 이야기는 피한다. 환자에게 들릴 가능성이 있으므로 민감한 이야기는 자리를 옮겨서 한다.
- 임종이 가까워 오면 먼저 환자의 호흡방법이 변화함. 아래턱을 내미는 호흡, 즉 하악호흡으로 숨을 쉰다. 그리고 몇십 분 혹은 몇분 뒤에 호흡이 멈춘다. 호흡이 정지해도 한동안은 심장이 뛰고 경동맥이 뛰는 것이보이며, 팔의 동맥도 일정 시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심장도 멈춘다. 그 순간을 편의상 사망시각으로 본다.
하지만 심장의 전기신호는 심장이 정지된 뒤로도 몇 시간씩 멈추지 않으므로 사망시각을 꼭 정밀하게 따질 필요는 없다. 사망의 3요소, 호흡정지, 심장정지, 동공확대의 증상이 확인된다 해도 육체의 모든 세포가 죽은 것은 아니기 때문. 따라서 사망시각은 어디까지나 편의적인 구별에 지나지 않음. 결국 가족들 모두가 환자의 죽음을 받아들였을 때야말로 진정한 사망시각이다.
- 한편 미리 환자의 죽음을 예상한 가족들은 예상된 슬픔이라는 반응을 보임. 환자가 죽은 뒤에 슬퍼하는 상황을 살아있을 때 미리 느끼는 것. 이것은 극히 정상적 반응이며 실제 환자가 죽은 뒤 가족들이 그 상황에 원만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줌. 가족들은 환자의 죽음을 예상하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려고 애쓰거나 환자가 없는 생활을 가정하고 가족관계를 다시 정립하기도 함.
인간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익숙해질 시간이 있으면 큰 환경변화에도 적응가능. 에를 들어 천천히 진행하는 빈혈환자는 보통사람보다 2배 정도 혈액이 묽은 상태에서도 정상적으로 생활을 영위함. 반면 갑작스런 출혈로 혈액이 정상보다 절반 이하로 묽어지면 완전히 쇼크상태에 빠져 생명이 위험해진다.
정신적으로도 마찬가지다. 서서히 환자의 죽음을 받아들일 시간이 있다면 누구나 충분히 적응가능하다. 사람이 마음은 생각보다 약하지 않다.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스스로 치유할 수 있다. 예상된 슬픔도 환자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반응이다.
- 환자 가족 중에는 '아이들에게 부모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편이 좋다.', '나중에 트라우마가 되니 죽는 순간은 보이고 싶지 않다'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가능한 있는 그대로의 과정을 보여주는 편이 좋다. 단 주위 어른들이 아이가 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해 주어야 한다.
'엄마는 힘들지만 잘 견디고 있단다'
'아빠가 이제 떠나시려나봐. 하지만 우리가 곁에 있으니까 외롭지 않으실 거야'
장례식에도 가능한 한 참석시켜야 한다. 말기 의료의 현장을 경험하며 가장 나쁜 일은 진실을 안이하게 숨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절감했다. 누구든 진심으로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설명해준다면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다. 아직 어리니까 혹은 노인이니까 하고 무시해서는 안됨.
특히 아이는 가족을 떠나보낸 기억을 껴안고 앞으로도 오랜 시간을 살아야 한다. 그러므로 가족이 죽기 전에도, 죽은 후에도 또 환자 본인도, 주위 사람들도 거짓을 말해서는 안된다. 그 아이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 조금만 아파도 죽지나 않을까 마음이 약해지는 것은 번뇌 탓입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은 끝이 없지만 목숨이 다해 어쩔 수 없이 저 세상으로 떠밀려 가는 것이 평범한 인간의 운명입니다. 이렇듯 언제까지나 세상에 매달린 채 정토로 떠날 마음이 없는 인간을 부처는 더욱 가엾게 여겼던 것입니다. (유이엔, 탄이초)
- 죽음의 변화과정 4가지
옛날 사람들은 자신이 죽을 때를 깨닫고 세상을 떠났다.
혹은 누군가가 일러줘서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 죽어갔다. 필립 아리에스는 서양사회에서 죽음이 변화하는 과정을 4가지로 구분.
먼저 순화된 죽음, 그리고 나의 죽음, 너의 죽음, 마지막으로 금지된 죽음이다. 1000년도 넘게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익숙한 순화된 죽음이었다. 아리에스에 따르면 죽음을 친숙하게 느끼며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는 옛사람의 태도는 죽음이 너무나 두려워 입에 담는 것조차 꺼리는 지금의 우리와 너무나 다르다.
죽음을 친숙하게 바라보는 태도는 11세기에서 12세기, 즉 중세중반까지 유지되었음. 17세기 무렵 혹은 그 이후까지 일부 사회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죽을 때는 그 사람의 친척이나 친구, 이웃둘이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물론 아이들도 참석시켰다. 18세기까지 죽음을 앞둔 사람의 방을 그린 그림에서 아이가 없는 경우는 없다. 죽음에 관련된 모든 일에서 아이들을 격리시키려는 지금 사회와는 너무 다르다. 죽어가는 사람 곁에 아이가 있는 일도 흔했다는 것이다.
- 필립 아리에스는 죽음과 역사에서 죽음이 터부시되기 시작한 것이 그리 오래 전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 그에 따르면 죽음을 멀리하고 터부시하는 태도는 20세기 전반 미국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리에스의 주장에 따라 우리 사회에서 죽음이 어떤 식으로 변천했는지 살펴보자. 우선 최초에 순화된 죽음이 있었다. 이 죽음은 약 1000년 중세 중반까지 이어짐. 이 시절 죽어가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최후가 가깝다는 사실을 알고 세상을 떠날 준비를 했다. 죽음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으므로 병상에 누워 죽음을 기다림. 죽음은 또 공공의 것이기도 해서 죽어가는 자의 방은 통행인조차 마음대로 드나들었다. 당시에는 아이들도 죽음을 지켜보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익숙하며 친숙한 존재였다.
중세 중반을 지나가자 죽음은 나의 죽음으로 바뀜. 12세기부터 15세기 사이에 보이는 죽음이다. 부유한 자, 권력 있는자, 학식 있는 자를 중심으로 죽음이 자신의 야망과 쾌락을 해치는 존재라는 사실을 강렬하게 자각하기 시작. 그와 동시에 자신이 소유한 물건이나 존재에 대한 집착, 그리고 삶에 대한 열정을 느끼게 됨. 그들은 죽음이라는 거울 속에서 자신만이 가진 개성을 재발견하게 된 것임. 이때부터 죽음은 모두에게 동질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죽음, 즉 나의 죽음으로 재탄생.
중세를 지나 근세로 접어들자 너의 죽음이 출현. 이 죽음은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이어짐. 죽음은 내가 아닌 타자의 죽음으로 묘사되었고 이 세상과 단절됨. 지난 날 평범한 일상 속에 존재하던 죽음의 병상이 죽어가는 사람도, 지켜보는 사람도 슬픔에 울부짖으며 기도하는 특별한 존재가 됨. 또 죽음이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그려진 탓에, 죽음이라는 이미지만 떠올려도 사람들의 마음은 격렬하게 동요했다. 유언도 전처럼 주변의 일을 자세하게 기재하지 않고 재산관계만 간략히 정리하게 되면서 죽음의 주도권이 본인이 아니라 가족에게 옮겨감.
- 20세기 초반 사람들은 죽어가는 사람에게 진실을 알릴 수 있는 용기를 잃어버림. 그리고 사회는 죽음으로 인한 괴로움과 감정적 동요를 피하려고 애쓰게 되었다. 아리에스는 이 시기의 죽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
병원에서의 죽음은 지금까지 당연하던 죽음의 장면을 앗아갔다. 가족과 친지들에 둘러싸여 죽음을 맞이할 기회는 점점 사라졌다. 죽음은 의료의 정지로 인해 발생하는, 즉 의료진이 인정한 결정에 의해 생겨나는 지극히 기술적 현상이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 결정이 내려지기 훨씬 이전에 의식을 잃는다.
죽음은 이제 일련의 세부단계로 해체되고 세분화됨. 최종적으로는 어느 단계가 진실한 죽음의 순간인지, 즉 환자가 의식을 잃은 단계인지, 호흡을 멈춘 단계인지 알 수 없게 됨. 의료진은 살아남은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인정할 수 있는 죽음을 환자에게 요구하게 됨. 볼썽사나운 죽음은 주위 사람들을 동요시키므로 기피되었다. 죽음은 멀리 격리되고 터부시되었다.
- 사람은 본래 자신의 죽음을 깨달을 수 있는 힘이 있다. 병원치료나 대체의료가 죽음의 마지막 순간까지 끼어든 탓에 다른 곳에 신경을 쓰게 되었을 뿐이다. 자신의 몸이 전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누구나 자신이 죽을 때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음. 오히려 죽음을 터부시한 탓에 죽어가는 사람은 거짓 정보를 전달받게 됨. 주변 사람들의 말을 믿고 자신의 죽음을 깨닫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음.
하지만 내가 죽음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몇 안되는 환자들은 스스로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이야기해 주었다. 그들은 자신이 언제 죽을 것인지 확실히 깨닫고 있었던 것. 결국 주변에서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지만 않는다면 대부분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깨달을 수 있다. 죽음은 터부시할 대상이 아니며 현대의 금지된 죽음은 시대의 산물일 뿐이다.
- 우리는 언젠가 죽을 존재다. 우리의 인생은 유한하며 우리의 시간은 정해져 있다. 우리의 가능성은 제한적이다.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무엇인가를 하려고 생각하거나, 어떤 가능성을 살리거나, 실현하거나, 성취하거나, 시간을 활용하거나, 충실하게 보내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죽음은 우리에게 그 일을 강제하는 존재다. ... 죽음은 살아가는 의미의 일부가 되었으며 고난과 죽음이야말로 인생을 의미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빅터 프랭클, 그래도 인생에서 예스라고 하다)
- 얼마나 오래 사는가는 본질적으로 아무 의미가 없다. 단지 장수한다는 사실만으로 삶에 의미를 부여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짧지만 훨씬 더 뜻깊은 인생도 있다. 한 사람의 자서전이 가진 가치는 그 페이지 수가 아니라 오직 그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의 풍요로움으로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빅터 프랭클)
긴 여행이 반드시 감동적인 것은 아니다. 짧지만 아름다운 자연과 사람을 만날 수 있다면 훨씬 더 감동적인 여행이 될 것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장수하는 인생도 훌륭하지만 오래 사는 것보다 잘 사는 일, 즉 좋은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 병이 깊어지면 '이럴 때 가족이 없어서 곤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나는 그럴 때야말로 '가족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성공했다고 자부할 만한 일이 그리 많지 않지만 가정을 이루지 않은 것은 참 잘했다고 생각한다. ... 친구사이라면 서로 잘하는 분야에서 형편이 될 때 도와줄 수 있다. 만일 내게 가족이 있었다면 이런 도움에도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도움이 필요할 때 부탁하는 일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나도 충분히 남을 도왔으니 내가 필요할 대는 기꺼이 남의 도움을 받는다. 내가 도와준 사람과 지금 나를 도와준 사람은 대개 다른 사람이다. 한 번 신세를 지게 되면 늘 그 사람에게 도움을 받게 되는데,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는 법이다. 양쪽을 합해서 수지가 맞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를 도와주는 사람에게는 진심으로 감사하지만 미안한 마음은 없다. (지바 아츠코, 잘 죽는 것은 잘 사는 일이다)
- 우리는 살면서 이별의 슬픔과 괴로움을 경험한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그 괴로움을 견뎌낸다. 하지만 인생의 가장 큰 이별인 죽음에 대해서는 오히려 준비하지 않는다. 그래서 마음을 다잡고 준비하면 어떨까 깨달았다. 그 준비란 지금 함께 있는 사람들과의 이별을 슬퍼하는 일이며 자신이 살아온 세계에 미련을 떨치지 못하며 죽어가는 일이다. 죽음이란 그런 이별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의 공포를 견디는 방법은 억지로 죽음에서 눈을 떼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생활 속에서 작은 죽음의 이별을 되풀이하며 마음의 준비를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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