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나저나 한번뿐인 험난하면서도 소중한 인생으로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메리 올리버의 시, 여름날)

- 살아 있는 한 모든 것이 충분한 순간은 없다. 그럼에도 이따금 달콤할 때도 있고, 운이 좋다면 조금 더 지속된다. (레이먼드 카버의 시, 그녀를 불행하게 만든 사람)

- 우리는 모두 언제 목이 날아갈지 모르는 채 함부로 돌아다니고 시간을 낭비하고, 순간을 즐기고, 운명을 거스르면서 허술한 구멍 사이로 요리조리 빠져나간다. (메기 오페럴, '나는 살아 있다, 살아 있다, 살아 있다')

- 죽음은 삶의 반대편이 아닌, 그 일부로서 존재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

- 질병은 인생의 어두운 측면이며 더 부담스러운 국적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모두 이중국적을 취득하는데, 한쪽은 건강한 자들의 나라이고, 다른 쪽은 아픈자들의 나라이다. 우리는 모두 좋은 쪽 여권을 사용하기를 바라지만, 머잖아 잠시라도 다른 쪽의 시민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수전 손택, 은유로서의 질병)

- 오늘날 자행되는 심폐소생술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잔인한 과정임. 말기 신부전처럼 회복불가능한 질병으로 죽어가는 환자들에게는 애초에 시행하면 안되는 처치임. 건강한 환자들에게도 흉부압박과 전기충격은 흔히 실패로 끝남. 병원 안에서 심정지에 빠진 사람들 다섯명 중 한 명만 살아서 병원을 나간다. 병원 밖에서 심정지에 빠진 환자들의 소생 가능성은 훨씬 더 낮아서 열 명 중 한 명만 살아남는다.
물론 생사의 기로에 선 환자에게 심폐소생은 시도할 가치가 있다. 하지만 심장이 정지된 시간동안 산소부족이 장기화되면 환자는 살아나더라도 영구적으로 뇌손상을 입게될 위험이 있다. 남은 평생을 정신이 온전치 못한 상태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 신은 우주를 상대로 주사위 놀이를 한다. 신이 걸핏하면 주사위를 던지는 상습 도박꾼이라는 증거가 도처에 깔려 있다. (스티븐 호킹)

- 어원학적으로 볼 때, 의학은 보이는 모습과 다름. 의사라는 단어는 라틴어 도세르에서 온 말로 가르친다는 의미. 반면 환자는 라틴어 파티엔스에서 온 말로 참는 사람이란 뜻. NHS병원 안팎에서 환자에게 요구하는 인내와 극기는 실로 엄청남. 가령 응급실에서는 진료순서가 올 때까지 몇 시간씩 대기해야 하고, 암치료를 시작하려면 몇 주, 심지어 몇 달을 기다려야 함. 환자에게 고통을 덜어주겠다고 해 놓고 오히려 고통을 가중시킴. 의사가 다가올때까지 환자는 수술복 차림에 손목밴드를 차고 초조하게 기다릴 뿐이다. 미력하나마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고 결정하도록 타고난 종으로서, 이런 현실은 확실히 참아내기 어렵다.
호스피스와 병원은 환대와 마찬가지로 호스페스라는 라틴어에서 비롯되었는데, 호스페스는 집주인과 손님, 낯선 사람을 모두 뜻하는 말. 나는 호스피스가 주인과 손님과 낯선 이들을 제대로 대접하는 곳이길 바란다. 가정과 병원의 장점을 모아 집처럼 편안한 분위기에서 의료혜택을 누리는 곳이길 바란다. 

- 라틴어 동사 펠리에어는 외투를 입히다, 덮어 감추다, 라는 의미. 완화의료의 1차목적이 죽음의 증상을 숨기는 데 있음을 암시. 그런데 이 말은 죽음이 가까이 올 때 모르핀에 취해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 말고는 더 기대할 게 없다는 식으로 들림. 하지만 우리는 그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완화의료를 떠받치는 원칙을 하나만 꼽자면, 살아감과 죽어감은 이항대립처럼 서로 반대되거나 모순되는 짝꿍이 아니라는 점. 

- 와화의료를 행사하는 의사로서, 우리의 역할을 삶을 연장하는 게 아님, 불가피한 일을 막으려고 싸우는 것도 아님. 병이 통제를 벗어났음을 받아들이며, 즉 불치병의 최종성에 맞서지 않고 그 안에서 노력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느느 일들에 집중할 수 있다. 우리의 도움으로 환자는 눈을 감는 그날까지 삶의 질을 높이고 의미를 찾고 자잘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이런 원칙은 어떻게든 죽음과 질병에 맞서 이기려는 기존의 의학적 모델에 부합하지 않는다. 물론 의학의 역사는 그런 싸움의 과정에서 얻은 승리의 산물이다. 최초의 백신과 항생제, 화학요법, 시험관 아기, 뇌신경외과 수술, 티타늄 고관절, 인공망막, 인공심장, 안면이식 등 그 목록은 끝없이 이어진다. 의학계의 이정표를 나열하는 순간, 경이로움과 경외감에 흐뭇한 미소가 떠오른다. 의사들과 과학자들의 끈질긴 노력과 기발한 재주덕에 오늘날 우리는 인류역사에서 그 어느때보다 더 오래, 더 잘 살게 되었다.
그렇지만 죽음은 결코 물리칠 수 없으며, 얼마간이라도 유예하려면 대가를 치러야 함. 의학은 우리 삶을 연장할 힘을 지녔지만, 의도치 않게 고통마저 연장시킬 수 있다. 누군가가 간절히 바라는 생명연장치료가 다른 이에게는 의사들이 애초에 시도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몹쓸 경험으로 전락. 
"아무도 죽어가는 말에게 채찍질을 하진 않을 겁니다." 예전에 한 환자가 말했다. 그런데 그 말이 인간이고 또 하필 암에 걸려 있을 때는 예외라는 겁니다."
심페소생술과 인공호흡, 위관을 통한 장기적 영양공급이 가능한 시대라, 우리는 삶을 끈질기게 이어갈 수 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어떤 대가를 치르고 있나? 오늘날 의사들은 죽음에 대한 과도한 개입에 득보다 실이 더 많은 게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환자가 간신히 연명이라도 하게끔 어떻게 살려낼 것인가를 따질 게 아니라, 이 환자를 굳이 살려야 하는가를 따져야 한다.

- 우리는 간혹 섹스와 죽음의 문제를 놓고, 현 시대와 빅토리아 시대를 비교하곤 한다. 빅토리아 시대엔 죽음은 활발하게 논의 되었지만, 섹스는 엄격한 금기사항이었음. 반면 우리 시대엔 섹스는 늘 화제의 중심이지만, 죽음은 입에 잘 올리지도 못함.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벌어질일이라고 단언할 수 있는 유일한 사건을 두고서, 우리는 누군가가 저 세상으로 갔다거나 누군가를 잃었다는 식으로 완곡하게 표현. 죽음을 둘러싼 문제가 아무리 골치 아프더라도 우리는, 특히 의사들은 두려워하지 말고 죽음을 똑바로 쳐다보고, 우리가 어차피 죽을 운명임을 거듭 인정해야 함. 
호스피스 환자들 중에는 그동안 임박한 죽음에 대해 늘 에둘러 이야기하다, 이곳에서 속 시원하게 터놓을 기회가 생기면 크게 안도하는 사람이 많음. 그렇다 하더라도 죽음의 문제를 터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 우선 의사가 환자에게 솔직하게 말하고 행동하라고 압박하면 실패하기 십상. 의사가 자기 뜻에 따르라고 강경하게 요구할수록 환자는 더 강경하게 저항함. 거짓 부갑상선 기능 저하증 같은 어려운 말을 쓰면서 잘난척 하는 사람에게 이래라저래라 지시받는 것보다 더 짜증 나는 일은 없다.

- 의학이 그동안 눈부시게 진보하긴 했지만, 불치병은 여전히 인간이 떠받드는 신들의 수만큼 많다. 아무리 박멸하려 해도 세균과 미생물은 살아 남는 것 같다. 웬만한 치료가 다 실패하면 외과의가 나서서 우리를 갈가리 찢고 남은 한 푼까지 싹 걷어간다. 그런게 바로 당신을 위한 진보다. (헨리 밀러, 여든이 되면서)
오늘날, 의사와 윤리학자, 언론과 대중이 의학의 의도치 않은 해악을 놓고 논쟁한다는 점에서 밀러는 대단히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그 에세이에서 가장 감명깊게 읽은 부분은 불치명, 즉 죽어야 할 운명에 대한 그의 성찰이었다. 밀러에 따르면, 젊음의 진정한 척도는 시간이 아니라 태도라고 주장한다.

- 여든 살 나이에 불구나 병자가 아니라면, 건강을 유지하고 여전히 산책을 즐기며 식사를 맛있게 한다면, 약을 먹지 않고도 잠을 잘 잔다며, 꽃과 새, 산과 바다에 여전히 마음이 동한다면, 당신은 참으로 운 좋은 사람이니 아침저녁으로 무릎을 꿇고 신에게 감사해야 한다. 나이는 더 어린데도 정신적으로 너무 지쳐 하루하루 기계처럼 살아간다면, 상사에게 하서 이렇게 말하는 게 좋을 것이다.
물론 작은 소리로. "빌어먹을, 난 당신의 졸개가 아니야!"
거듭해서 사랑에 빠질 수 있다면, 당신을 내놓은 죄를 저지른 부모를 용서할 수 있다면, 크게 성공하지 못해도 하루하루 만족하며 산다면, 과거의 일을 잊어버릴 뿐만 아니라 용서할 수 있다면, 점점 더 심술궂고 독하고 냉소적으로 되지 않을 수 있다면, 확실히 당신은 인생을 참 멋지게 살고 있다.

- 심박이 약해지면서 따뜻한 피를 제대로 뿜어내지 못하므로 손이 차갑게 느껴진다. 피부가 창백해지고, 심지어 푸르스름해지기도 한다. 마지막 며칠에서 몇 시간 동안엔 의식이 혼미해진다. 호흡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불규칙해질 수도 있다. 막판에는 몸이 흔들릴 정도로 깊은 숨을 쉬다가 한참 동안 숨을 멈추기 때문에 가족들은 흔히 안절부절 못하면서 그게 마지막 숨이었는지 혼란에 빠진다.
의식은 못하지만 목구멍에 침이 고이며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날 수도 있다. 이 소리가 가족들에게 고통을 줄 수 있지만 환자들은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임종 즈음엔 신기하게도 우리 몸이 알아서 연민어린 반응을 보인다. 심장과 폐, 신장, 간 등 몸의 주요장기가 뇌를 마취시키기 때문에 환자는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한다. 폐에 이상이 생기면 혈류에 이산화탄소가 늘어나 졸음이 온다. 간이나 신장이 나빠지면 혈액에 독소가 쌓여 의식이 점점 흐릿해진다. 기진맥진한 심장이 제 기능을 못하면서 혈압이 뚝 떨어지면, 산소공급이 끊긴 뇌는 망각의 늪으로 천천히 미끄러져 들어간다.

- 죽음이 다가올수록 살아가는 행위는 그저 가혹한 심리적 시련이다. 환자가 삶의 마지막 며칠이나 몇 시간을 남기고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지만 다른 조치로는 그 증상을 완화할 수 없을 때, 마지막 옵션이 지속적으로 깊은 수면상태에 빠뜨리는 것이다. 의식불명 상태로까지 진정제를 투여하면 환자는 비로소 고뇌에서 해방된다.
이것은 죽음을 재촉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덜어주는 게 목적이기 때문에 조력사나 안락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어쨌든 대다수 환자는 이런 극단적 조치가 불필요하다. 대개 낮은 용량의 진정제로도 두려움을 충분히 누그러뜨릴 수 있다. 그런 상태에서 환자는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주변세계와 얼마든지 소통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완화의료에선 또 다른 극단적 사례도 찾을 수 있다. 평생 죽음 공포증에 시달리던 환자가 말기 진단을 받고 두려움을 떨쳐내기도 하는 것이다.

- 마지막 카드가 어떻게 게임을 이끄는지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끈끈하게 연결되긴 했어. (엘라스티카의 노래 커넥션)

- 인생을 한껏 즐기고, 우리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하고, 동료 인간에게 빛과 평화와 즐거움을 주며, 엉망진창인 이 행성을 우리가 태어난 때보나 더 건강하게 해 놓지 못한다면 도대체 뭐하러 여기 있는가? (헨리 밀러)

- 상처를 받거나 곤경에 빠지거나 굴욕감을 느낄 거라는 두려움을 무시하고 마음을 충분히 주는 것, 그것만이 유일하게 중요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충분히 대담하게 살지 못하고 충분히 노력하지 못했으며 충분히 사랑하지 못했다고 후회한다. 다른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테드 휴즈)

- 의사들은 간혹 선의로 죽음이 전혀 고통스럽지도, 힘들지도 않다고 말한다. 심지어 죽음이 일종의 초월적 경험 같아서, 제대로 죽는다면 평범한 삶의 마지막을 그야말로 멋지게 장식할 수 있다고 떠벌이기도 한다.
사실 죽음은 인간의 경험만큼이나 다양하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물론 우리가 호스피스에서 목격하듯이 신체가 기능을 멈추는 데는 일정한 패턴이 있다. 하지만 사람을 기계부품처런 나눠서 파악할 수는 없다. 죽음은 삶의 여러 면과 마찬가지로 덤덤할 수도 있고 가슴이 찢어질 만큼 아플 수도 있다. 온화하거나 잔인하거나 아름다울 수도 있다.어떤 환자에게는 심지어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의학에서, 아무리 선의라 하더라도 현실을 미화하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완화의료가 아무리 도움을 준다 할지라도, 애초에 죽을 운명을 타고난 생명체라는 잔인한 현실을 모면하게 해 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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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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