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칼포퍼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과학자란 어떤 존재인가'에 관해 알기쉬운 예를 들어 설명. 외딴 섬에 표류한 로빈스 크루소가 연구실을 짓고 거기서 정밀한 관찰과 분석을 하여 학술논문을 썼다 치자. 그 내용은 그 시점의 자연과학의 도달점과 딱 일치하는 것이었다. 로빈슨은 틀림없이 자기 나름의 배움의 길을 걸었다. 한데 그를 과연 과학자라 할 수 있을까?
포퍼는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로빈슨의 과학에는 과학적방법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 "그의 성과는 음미할 이가 그 이외에 없고, 그 개인의 심성사의 불가피한 귀결인 이런저런 편견을 정정할 수 있느느 이가 그 외에는 없기" 때문. 포퍼는 과학자이기 위한 조건을 이렇게 규정. "진정한 커뮤니케이션 수련은 자기 일을 그 일을 해 본 적 없는 사람에게 설명할 때 비로소 할 수 있고, 이 수련 또한 과학적 방법의 구성요소다."
포퍼가 로빈슨을 과학자가 아니라고 판단한 것은 로빈슨의 연구결과가 틀렸기 때문이 아님. 어떤 언명이 과학자의 것인지 아닌지는 그 언명이 참인지 거짓인지가 아니라 공공적인지 아닌지에 따라 정해지기 때문. "내가 말하는 것은 진리다. 반재하는 사람이 있더라도 내 언명의 진리성은 흔들리지 않는다."라고 주장하느 사람이 한 말은 과학적이지 않다. 반면 "내 가설은 틀렸을지도 모른다. 이에 대한 사후감정을 기다린다"라고 말하는 이의 언명은 설령 틀렸다 해도 과학적이다.
과학의 객관성을 담보하는 것은 그것이 공공의 장에 나와서 자유로운 검토과정을 거치는 것임. 과학은 어떤 과학자가 제시한 가설이 반증 사례로 뒤엎어지고 그 반증사례까지 설명할 수 있는 보다 포괄적인 가설이 제시되는 과정을 거쳐 진보함. 모든 과학적 가설은 반증가능한 것이기 때문.
- 어렸을 때는 난독 즉 손에 잡히는 대로 이것저것 마구 읽었습니다. 고등학생 때부터는 지도를 만들어 지도 속의 빈칸을 메우는 식으로 체계적 독서를 했다. 대학원에서 레비나스 선생님을 만나고부터는 그때까지와는 전혀 다른 독서를 하게 되었다.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읽기. 저자를 가상의 멘토로 삼고 읽어 나가기. 내가 이해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것, 나의 생각과는 다른 것을 마크하면서 읽기. 그리고 '왜, 어떤 근거로, 어떤 추론을 거쳐 저자가 이런 식견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물으면서 읽게 되었다. 이런 무방비 독서를 지금까지 40년 정도 즐겁게 이어오고 있다.
- 글쓰기 기술이라고 하면 아마 보통은 문장을 어떻게 논리적으로 혹은 수사적으로 아름답게 쓸 것인가에 주안점을 둘 것이라 생각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쓰는 힘을 갖추었다는 것은 자신의 보이스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 자기 보이스로 지어낸 말에는 고유한 율동과 흐름과 힘이 있다. 그래서 읽었을 때 무엇이 쓰여 있는지 퍼뜩 가늠이 안되어도 계속 읽어나갈 수 있다.
따라서 어려운 것, 보통 사람들은 좀처럼 이해하기 힘들 것 같은 복잡기괴한 이야기를 쓸 때는 반드시 자신의 보이스로 말을 지어야 함. 보이스가 생생하고 리드미컬하게 진행되면 독자에게는 흐름에 휘말려서 정신을 차려보니 끝까지 다 읽고 말았다와 같은 일이 일어남.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독서는 독자가 '당신이 말하고 싶은 것이 무언지 잘 알겠습니다." 하고 나면 그걸로 끝나니까요. 독자는 거기서 책을 덮습니다. 그래서는 곤란합니다. 그러지 않고 '당신이 말하고 싶은 것이 무언지 잘 모르겠지만, 어쩌다보니 책을 덮을 수가 없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다 읽고 말았다'라고 고백하는 독자를 얻는 것이 쓰는 사람에게는 가장 기쁜 일입니다.
그러니 의미는 일단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마지막까지 술술 읽을 수 있게 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아가 음독, 즉 소리내어 읽기를 감당할 수 있게 써야 합니다. 쉬엄쉬엄 중간에 한숨 돌리며 읽어도 좀처럼 읽히지 않는 글이나 리듬이 나쁘거나 귀에 거슬리는 마찰음, 파열음이 많은 문장은 음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음독할 수 있는 문장은 독자의 머리(뇌)가 아니라 몸으로 들어갑니다. 몸으로 스며들어 독자의 신체 일부가 됩니다. 이후 오랜시간이 지나서 그 글이 이미 독자의 몸의 한 부분이 된 시점에 독자는 무심코 과거에 읽었던 책의 한 구절을 입에 담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심코 입니다. 몸 깊숙한 곳에서 그 말이 떠오르는 겁니다.
작가로서 최고 영예는 자기가 쓴 문장이 누군가의 몸에 스며들어서 거기서 오랜 시간을 보낸 뒤에 어느 날 그 사람의 말로 재생되는 것이 아닐까요. 저는 그런 문장을 쓰고 싶습니다.
- 지적 흥분은 글이 다루는 내용에 관해 곧바로 독창적이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식으로 일어나는 게 아니다. 이전까지 비교적 조용하고 불활성화되어 있던 뇌의 어느 부위에 전기가 통해서 갑자기 뭔가가 하고 싶어지는 상태에 가까움. 즉 책을 읽다가 '아! 그렇지!'하며 벌떡 일어나서 냉동실에 얼려 둔 재료를 가지고 요리를 하고 싶어진다거나 방 청소를 시작하거나 옛친구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지거나 베란다 문을 열고 나가서 차가운 맥주를 마시고 싶어지는 반응이 생긴다면 그것이 지적으로 흥분했다는 증거. 저는 독자들이 그렇게 반응했으면 합니다. 그 흥분이 이후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는 알 수 없지만 어찌 됐든 이전까지 비교적 조용하고 불활성화되어 있던 독자의 뇌 어느 부외에 전기가 통해서 심장이 세게 고동치기 시작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 진정한 자기를 발견했을 때 인간은 비로소 최대의 성과를 낸다. 따라서 이후로는 죽을 때까지 쭉 그 진정한 자기인 채로 살면 된다, 와 같은 말은 인간에 관한 하나의 가설임. 특정 지역의 이데올로기일뿐 세계 표준은 아니다. 특히 미국에서 이런 이데올로기가 지배적. 많은 사람들이 아이덴티티 폴리틱스라는 개념에 속박되어 있다. 아이덴티티 폴리틱스는 인종, 젠더, 민족, 성적지향성 등 특정한 정체성에 기초한 집단을 가장 중요한 정치단위로 간주하는 사상을 의미. 정체성을 공유하는 집단이 모든 사회적 행동의 기본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그 말만 들으면 당연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공유된 정체성으로 한 번 그 집단에 속한 사람은 그 정체성을 바꿀 수 없게 된다는 의미. 그 사람에게는 그 집단이 정한 '우리 집단의 구성원이라면 이렇게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한다'는 정형을 따르는 것만 허용된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계 미국인 집단에 속하는 아이가 프랑스 인상주의 작곡가 드뷔시를 듣고 의식의 흐름기법을 창시한 마르셀 프루스트를 읽고 아르누보 양식으로 유명한 영국 오브리 비어즐리의 그림을 사랑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할 것임. 그런 취향을 고집하면 아마도 그 정체성 집단으로부터 추방될 것임.
사회 내에 다양한 정체성 집단이 병존한다는 것은 그 사회가 다양성에 관용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줌. 다만 정체성 집단 내의 구성원 한명 한명에게는 그만큼의 다양성이 허용되지 않음. 저는 그런 생각과 삶의 방식이 굉장히 부자유스럽다고 생각하지만, 대다수 미국인은 '이것으로 된 거야. 이게 다양성이고 포섭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 무심이란 '그래, 이것을 하자'와 같은 자발만이 있고 달성해야 할 목적이 없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 그런 일을 하고 싶어졌는지도 자신도 잘 모른다. 가끔 훌륭한 기록을 세운 운동선수가 인터뷰에서 '이번 경기 결과는 그냥 과정일 뿐입니다.'라는 말을 할 때가 있다. 주변에서 '굉장하군요, 굉장합니다'라고 치켜세우는 것을 신경쓰지 않고 '그냥 과정일 뿐입니다'라고 별것 아닌 듯 말하는 것은 이 선수가 성공경험에 얽매이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 자신의 목표달성을 성공으로 간주하고 다른 경쟁상태에게 이겼다는 식으로 총괄하면 거기서 발전이 멈춰버릴 위험이 있음을 선수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 종교적 지성이란 크기를 경외하는 마음. 인간의 도량형으로는 결코 측정할 수 없고 사유할 수 없는 것과 마주했을 때 자신의 무력감과 초라함을 직면하는 것을 의미. 자신이 무력하고 초라한 존재라고 해서 위축되거나 무력감에 사로잡힐 필요는 없다. '내가 지금 고민하는 것과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 내가 욕망하는 것은 그것에 마음을 빼앗길 만큼 큰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그 집착에서 벗어나면 어느 정도 쿨해질 수 있다.
구원은 본래 인간의 도량형으로는 측정할 수 없는 것에 압도당하는 경험을 의미. 따라서 '믿는 사람은 구원받는다'라는 말은 어느 정도 사실일지 모르겠지만 '믿지 않는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님. 하나님과 부처를 믿지 않아도 세계의 무한함을 실감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구원을 받은 것. 큰 것에 대한 경외심을 갖고 있을 테니까요.
- 배움은 무방비, 즉 모종의 순수함없이는 달성할 수 없다. 지나치게 방어적이거나 늘 주변사람과의 상대적 우열, 강약, 승패를 신경쓰는 사람은 좀처럼 무방비, 무구, 천진할 수 없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누군가로부터 비판받거나 허점을 보일 수 있고 공격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런 방어적인 사람은 연속적인 자기쇄신을 할 수 없다. 자기 쇄신 없이 인간은 성숙할 수 없다. 지식과 기술이 아무리 더해져도 그건 성숙이 아님. 사람은 배우지 않고 성숙할 수 없다.
'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 당신의 삶에 대해 니체가 물었다 (0) | 2025.01.14 |
---|---|
데일리 대드 (0) | 2025.01.11 |
군주론 인생공부 (1) | 2025.01.05 |
나의 현재만이 나의 유일한 진실이다 (0) | 2024.12.28 |
우주의 끝에서 철학하기 (1) | 2024.1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