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철학적인 문제들은 이어야만 한다와 일 수 없다의 독특한 조합에서 비롯됨. 예컨대 일이 이러저라하게 되어야 하는데, 또한 절대 그렇게 될 수가 없기도 한 상황인 것이다. 이어야만 한다와 일 수 없다의 조합을 마주할 때마다, 우리는 철학을 갖게 됨. 우리에게는 심오한 문제가 있다. 우리는 우리가 자신에 관해 말하는 이야기들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고 이해한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대로, 그런 이야기들이 서로 맞아떨어지지 않을 때, 우리는 더 이상 길을 못찾겠다고 느끼게 됨. 철학함이란 숲 속에서 길을 잃는 것과 같다. 철학자의 과제는 빠져나갈 길을 찾는 것이다.
- 밖에서 보면 사람들 각자의 인생은 정상을 향해 가는 시지프의 여정들 중 하나와 같으며, 그런 각자의 인생의 하루하루는 시지프가 여정에서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와 같다. 차이는 이것뿐이다. 시지프는 바위를 다시 밀어올리기 위해 본인이 직접 되돌아온다. 우리는 그 일을 자식들에게 넘겨준다.
이것이 시지프의 딜레마이자, 우리 모두가 알건 모르건 실제로 직면하는 딜레마다. 우리는 자신의 삶을 소박한 목표들과 소소한 목적들로 채운다. 그런 목표와 목적은 우리 자신에 의해서건 우리 자식들에 의해서건 그 자체으 반복에 지나지 않는 것들만을 겨냥하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시간이 우리를 죽이고 있듯, 우리도 그저 시간을 죽이고 있다. 그러나 설령 우리의 소소한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만큼 아주 거창한 목적을 발견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절대로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성공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목적을 달성하자마자, 그것이 우리 삶에 불어넣는 의미는 사라진다. 우리는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거창한 목적을 잃어버린 상태가 될 것이고, 그래서 다시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한번의 인생에서 찾아낼 수 있는 거창한 목적이란 게 많아야 얼마나 되겠는가/ 게다가 거대한 목적을 한 번 상실하는 정도라면 그저 불운으로 여길 수 있겠지만, 두번 잃는다면?
달리 말해서, 우리의 삶은 삶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바로 그것을 성취하는데 실패하거나, 아직 성취하지 않은 상태일 때에만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는 우리의 삶이란 필연적으로 의미를 가질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 삶의 의미에 관한 한,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가질 수 없는 것을 원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절망적 부조리 상황이다.
- 삶의 의미는 당연히 궁극적인 철학적 문제다. 그것은 이 문제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이유는 다른 모든 심오한 철학적 문제들, 고민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다른 모든 철학적 문제들이 바로 이 주제의 변주이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들은 우리가 부서져 쪼개진 생명체이기 때문에 발생한다. 우리가 앞으로 살펴보게 될 다른 문제들, 철학의 큰 문제들은 모두 이러한 원천에서 이러한 방식으로 발생한 것들이다.
- 우리는 마음에 대한 내부의 견해와 외부의 견해를 서로 정합적으로 들어맞게 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 때문에 심신문제가 발생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 두 견해가 어떻게 하나의 동일한 대상에 관한 것이 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어떻게 마음의 거주자들이 단지 뇌 활동과 같은 것일 수 있나? 어떻게 의식과 지향성이라는 이 거주자들의 독특한 특징이 뇌 활동으로 산출될 수 있는가? 문제를 파악하기 위해서 뇌의 활동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한 뉴런에서 일어나는 전기적 활동으로 인해 그 뉴런은 신경전달물질이라고 부르는 특정한 화학물질을 방출하게 된다. 신경전달물질은 시냅스 간극이라는 것을 가로질러서 다른 뉴런으로 스며들어간다. 이는 다시 두번째 뉴런의 발화를 일으키며, 이러한 과정이 계속된다. 궁극적으로 이것이 바로 뇌 활동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종류의 활동들이 모여, 발끝을 차이거나 사랑에 빠지거나 좋아하는 팀이 승리할 때 갖게 되는 그런 느낌이 된단 말인가? 다시 말해서, 뇌 활동은 그것들이 모여 의식이 되기에는 번지수가 맞지 않는 것들로 보인다. 또한 전형적으로 전기화학 작용을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뇌의 상태가, 어떻게 다른 어떤 것에 관한 것일 수 있는가? 다시 말해서, 뇌 활동은 그것들이 모여 지향성이 되기에는 또다시 번지수가 맞지 않는 것들로 보인다.
그 결과 우리에게는 심신문제가 발생한다. 마음에는 안과 바깥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그 바깥이 우리가 아는 바로 그 안의 바깥이 된다는 건지를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뇌가 그 안의 바깥이라는 것을 안다. 아니, 그러리라 강하게 추측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뇌가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산출하는지, 뇌 활동이 도대체 어떻게 안에서 일어나는 그런 일들이 된다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 안에서 보면, 나는 나 자신에게 개별적이고 고유한 한 사람으로 보인다. ㅇ는 다른 모든 의식의 중심들과 구분되는 또 다른 하나의 의식의 중심으로서 시간을 통해 지속하는 것이다. 나는 바로 나인 그 사람이고 다른 누군가가 아니다. 나는 40여 년 동안 잘 지내고 있는 바로 그 나다. 당연히 나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변했을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나는 그러한 변화 속에서도 지속되어 왔다. 하지만 밖에서 나의 동일성을 바라보면, 나는 그런 의미에서 나를 찾을 수가 없다. 다시 말해, 나는 안으로부터의 견해에 상응하는 그 어떤 것도 발견할 수가 없다. 밖에서 보면 나는 없으며, 있을 수도 없다. 기껏해야 단지 나들의 연속, 나들의 흐름 혹은 강물이 있을 뿐이다. 각각의 나는 이음매 없이 놀라운 속도로 서로를 이어나간다. 안에서 보면 나는 안정적이고 고유하다. 내가 겪는 모든 변화의 근저에 깔려 있으면서, 그러한 변화 속에서도 지속되는 무언가가 있다. 밖에서 보면 어떤 것도 이러한 서술에 부합하지 않는다. 안에서 보면 나는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있어야 하지만, 밖에서 보면 그런 방식으로는 절대 있을 수가 없다. 실제로 그런 방식으로 있거나 있을 수 없는 나라는 게 아예 없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인격동일성의 문제다.
- 결정론은 당신이 지금 하는 일(선택하고 결정하는 일까지도)이 미리 결정되어 있다고 주장. 당신은 당신이 한 그대로 행위하고 선택하고 결정할 수 밖에 없다. 당신에게는 아무런 선택권이 없다. 당신의 선택, 결정, 행위는 불가피하다. 그것들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에 따른 불가피한 결과로 나타났다. 따라서 지금 일어나는 일이나 미래에 일어날 일들은 모두 불가피하다.
반면에 운명론은 당신이 지금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무엇을 선택하고 결정하며 어떤 행위를 하던 간에, 미래는 동일하게 판명나리라는 견해. 당신이 범죄예방국에 자수를 하든 도망을 가든, 만약 당신이 특정 시각에 레오 크로에게 총을 쏠 운명이라면 당신은 그를 쏠 것이다. 미래는 고정되어 있고, 그래서 현재에 일어나는 일들은 미래에 일어날 일들과 무관하다.
이 차이를 알겠는가? 결정론은 당신이 지금 하는 일에 선택권이 없다는 견해다. 당신이 지금 수행하거나 내리는 행위, 선택, 결정은 불가피한 것들이다. 당신은 어찌할 수 가 없다. 즉, 결정론에 따르면 미래는 분명히 고정되어 있다. 그런데 미래는 현재가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는 과거에 일어난 일들 때문에 고정되어 있다. 반면에 운명론은 당신이 지금 달리 행동할 수도 있다고 가정. 당신은 지금 하는 일에 선택권을 갖고 있다. 다만 그 선택이 미래에 아무런 차이를 유발하지 못할 뿐이다. 운명론에 따르면 미래는 고정되어 있다. 그런데 이는 현재나 과거에 의해 고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결정론에 따르면 미래는 과거와 (미래를 기준으로 과거에 해당하는) 현재에 의해 고정된다.
- 많은 SF 영화의 주제는 타고나길 낯선 생물의 형태, 즉 우리에게 타자가 되는 존재들과의 조우를 다룸. 리플리의 삶을 그렇게 비참하게 만든 그 원조악당들보다 더 우리에게 낯선 타자를 상상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그런 타자와의 조우는 언제나 동시에 우리 자신을 좀더 면밀하고 명확하게 이해하는 방법이 된다. 타자성과의 조우는 우리 자신의 정서적이고 심리적이고 도덕적인 윤곽선을 더욱 선명하게 비추어주는 거울로 작용. 사실상 우리는 이러한 요점을 안과 밖으로부터의 견해라는 생각을 통해 표현할 수 있음. 자기 자신의 도덕적 지위나 가치를 평가할 때, 우리는 안으로부터의 견해 때문에 눈이 멀게 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견해의 중심부에 위치한 우리는 흔히 자신의 도덕적 중요성과 미덕을 과장하게 됨. 우리는 도덕적 존재자들로서 우리를 밖에서 보는 견해도 갖는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이는 우리가 다른 생명체에게 비춰지는 방식을 말한다. 철저하게 낯선 어떤 대상과의 조우는 그런 밖으로부터의 견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문득문득 기억하게 만들고, 또한 그 견해를 통해 드러나는 우리의 주요 윤곽을 어느 정도 규명하게 되는 최선의 방법이다. 도덕적인 생명체로서 우리는 우리 행위를 안에서 보는 방식 뿐 아니라, 그것들이 밖으로 비춰지는 방식 또한 고려해야 한다. 우리의 행위가 그 삶에 영향을 미치는 타자들에게 비춰지는 방식 말이다.
그리고 이것이 궁극적으로 황금률이 말하고자 하는 바다.
- 이상적인 사회는 이상적인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을 경우에만 작동함.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이상적인 사람과는 한참 거리가 멀다. 우리 모두 그냥 잘 지낼 수는 없을까? 미안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를 보면 그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끔찍하고 불쾌한 일을 하라고 부추기는 나쁜 놈들이 언제나 있다는 것이 문제다. 자유주의는 언제나 이것이 문제였다. 자유주의자가 아닌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자유주의 통치 체계가 붕괴되는 것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자유주의적인 방식으로 상대할 것인가?
- 삶에서 어떤 사건이 지닌 의미는 그 사건이 언제 일어나느냐에 달린 문제. 그런데 삶에 시간적 한계가 없다면, 어떤 사건도 삶에서 시간적 위치가 정해질 수 없다. 무한한 시야 속에서 어떤 것도 공간적 위치가 정해질 수 없든시 말이다. 공간적 한계가 없는 시야는 시야가 아니다. 그리고 시간적 한계가 없는 삶도 궁극적으로는 삶이 아니다. 삶의 한계는 그 삶 속에 있는 개별사건들이 지금의 제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 해주는 지평이다. 그리고 그 지평이 없다면 무언가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은 본질적으로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아무런 형태가 없는, 그래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존재론적 덩어리가 될 뿐이가. 한 순간에서 다음 순간으로 넘어가는 통로인 시간은 우리가 지금의 우리일 수 있게 해주는 지평이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미래 지향적 존재다. 그런데 죽음은 우리를 지금의 우리로 만들어주는 우리 삶 속의 사건들이 제 모습을 드러내도록 기준이 되어주는 궁극적 지평이다. 우리는 미래지향적 존재지만, 우리는 또한 훨씬 더 근본적으로는 죽음을 향한 존재다.
총체로서의 존재로부터 우리를 도드라지게 해주는 지평으로서의 죽음은 우리의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죽음은 우리의 삶을 앗아가고, 그럼으로써 삶이 우리에게 준 모든 가치를 앗아가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에 앞서 애당초 우리에게 삶의 의미를 준 것 또한 죽음이다. 죽음의 해악과 삶의 가치는 같은 원천에서 나온다. 그 원천이란 바로 우리가 본질적으로 죽음을 향한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가 죽을 때 이 모든 순간들은 시간 속에서 진짜 사라질 것이다. 빗속의 눈물처럼. 하지만 어쨋거나 그런 순간들이 정말로 존재했던 것은 오로지 우리가 죽음에 속박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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