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해당되는 글 163건

  1. 2025.03.15 오 마이 갓 세계사
  2. 2025.02.27 맛있는 세계사
  3. 2025.02.01 의자의 배신
  4. 2025.01.22 젓가락
  5. 2025.01.22 글로벌 푸드 한국사 3
  6. 2025.01.18 고기의 인문학
  7. 2025.01.16 음식 경제사 1
  8. 2025.01.14 향신료 전쟁
  9. 2025.01.09 한국사는 없다
  10. 2025.01.03 한국인의 기원 2

오 마이 갓 세계사

역사 2025. 3. 15. 07:52

- 장례식으로 조기매장을 예방하다
생각하는 존재답게 인류는 조기매장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가지 노력을 기울임. 그중 우리나라 조상들의 지혜가 대단하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이 죽으면 장례식을 치른다. 바로 묻지 않고 삼일장, 오일장을 치른다. 지금은 예를 갖춘다는 의미의 관습으로 굳었지만, 초기에는 조기매장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기다려본 것이다. 살아나는지, 안 살아나는지. 간혹 관에 넣었는데 살아나오는 경우가 있었다.
그리고 보통 장례는 조용히 치르지 않는다. 가족이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하며 시끄럽게 운다. 익숙한 목소리를 계속 들려주는 것. 살아 있다면 이 소리를 듣고 깨어라나는 것이다. 그 목소리를 듣고 실제 깨어나는 시신도 있었다. 또 묻기 전에 염을 한다. 시신을 닦는 것인데, 마사지다. 자극을 주는 것. 그리고 염을 할 때 온 가족이 그 과정을 지켜보고 확인하게 한다. 또 24시간 그 곁을 지키는 사람이 있었다. 향도 피운다. 이렇게 청각, 촉각, 후각을 모두 자극한다. 장례 절차마다 하나하나 이유가 있다. 지금은 당연한 예법이자 관습인데, 당시에는 조기매장에 대한 두려움이 영향을 미쳤다.
- 그리스와 로마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사람이 죽으면 관에 바로 넣지 않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 8일간 눕혀 놓고 프라피케라 불리는 여성들이 돌아가면서 노래를 부름. 그리고 땅에 묻기 전에 시신을 깨끗이 닦았다. 또 향수를 뿌린다. 우리 나라와 매우 비슷하다.
로마에서는 또 십자가형을 당한 사형수의 시신을 유족에게 넘겨주기 전에 창으로 찔러서 진짜 죽었는지 확인했다. 조기매장을 막기 위한 인도적 차원이라기 보다는, 사형수가 살아나 멀쩡히 돌아다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 또 다른 이유도 있엇는데, 당시 유대인들은 십자가형으로 죽어가는 가족을 맨드레이크가 함유된 와인으로 닦아주는 관습이 있었다. 맨드레이크가 최면효과가 있어서 사람을 기절시키기도 했다. 그래서 죽지 않았는데 가사상태에 빠질 수 있었다. 그래서 창으로 찔러 죽음을 한번 더 확인한 것.

- 최초의 마취제, 아산화질수
아산화질소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쓰이는 기체화합물로, 외과수술의 혁신을 일으킨 최초의 마취제다. 신경전달물질 중 글루타메이트의 수용체와 결합해 자극의 전달을 방해함으로써 신경을 마비시켜 고통을 줄여주고 기분을 진정시켜 널리 이용됨. 현재에도 태아에게 미치는 영향이 적어 산모에게 사용하고 있으며, 치과에서 어린아이를 위한 마취제로도 사용됨. 물론 부작용도 있다. 메스꺼움, 구토, 현기증을 일으킬 수 있고, 비타민 B12 결핍을 초래해 신경계에 독성을 일으킬 수 있다.
 
- 기원전 10만년이든, 3만년이든 공통된 특징이 있다. 바로 빙하기. 왜 빙하기에 수염을 밀었을까? 수염에 물이 묻으면 얼기 때문. 빙하기라고다 얼어붙을 것 같지만, 당시 지구 평균기온은 섭씨 4-6도였을 것으로 추정됨. 겨울이 오면 지금보다 훨씬 긴 기간동안, 훨씬 넓은 지역에서 영하 20-30도의 날씨를 경험. 
혹독하게 추운 겨울날 턱수염과 콧수염니 젖었다고 생각해 보라. 그대로 얼어붙는다. 동상에 걸려 죽게 된다. 그때는 난방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고대인들은 돌이나 조개껍질, 화산근처에서 발견한 유리 같은 날카로운 도구를 이용해 수염을 짧게 잘랐다. 바짝 깎지는 못했다. 잘못하면 상처가 나서 죽을 수 있었기 때문. 작은 상처의 감염으로도 죽던 시대다. 이래저래 추워서 죽고, 상처나서 죽고, 그러니까 타협점으로 적당히 수염을 잘랐을 거라는 추정이 일반적임.
기원전 12000년, 드디어 빙하기가 끝나고 간빙기가 찾아옴. 얼어 죽을 위험이 적어진 것. 가뜩이나 성가시고 불편했는데 죽음을 무릅쓰고 굳이 수염을 깎을 필요가 없다. 면도와 관련된 문화가 거의 사라졌다.

- 신분과시에 목숨을 걸었던 이집트인
기원전 3000년, 이집트에서 면도가 다시 시작됨. 그런데 이집트 사람들이 처음부터 수염을 깎은 것은 아님. 기원전 3100년 당시 설립된 초기 왕조 시대에 왕조가 완전히 자리잡기 전까지 전쟁이 난무했기 때문에 오히려 긴 수염을 선호. 더 강하고 전투경험도 많아 보였기 때문. 무엇보다 공격당할 때 수염이 간단한 상처로부터 보호해주었다.
그런데 왕조가 세워지고 문명이 자리잡고 또 통일되면서 수염이 문제가 됨. 이집트가 지리적으로 굉장히 덥고 습하다. 수염에서 머릿니가 자란다. 감염이 일어남. 게다가 사람이 많아 머릿니가 빠르게 번져감. 그래서 면도가 시작됨. 머릿니를 비롯한 감염병의 원인제거가 면도의 주된 목적이었다. 부수적으로 체취 제거도 있었다. 문명인으로서 멋있어지고 싶은데 냄새가 나니까 원인을 제거하고 싶었던 것. 이때부터 면도가 비약적으로 발전. 그래서 이집트의 거대도시 안에는 무조건 이발소가 있었다.
- 이집트 사람들은 체모도 제거했음. 그 시대에 왁싱을 한 것. 제모크림을 사용했다. 석회나 비소같은 부식성 물질을 발라 털을 녹임. 위험했을 텐데도, 그 정도로 제모에 진심이었다. 그러나 혼자서 면도하기 어려웠다. 청동기 시대였으므로 거울은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았고, 칼도 그렇게 날카롭지 않았다. 혼자 면도하다가 구리나 청동칼에 잘못 베이면 바로 죽는다. 게다가 얼굴이니까 염증이 머리로 가면 진짜 죽는다. 그래서 전문가가 필요했다. 
결국 면도는 인건비와 관련됨. 처음에는 위생을 목적으로 하던 면도가 신분을 과시하는 수단을 바뀜. 

- FDA가 승인한 두가지 탈모약
* 피나스테리드 : 1974년 도미니카공화국의 남자아이 일부가 전립선의 크기가 작고 남성형 탈모와 여드름이 없음을 확인하고, 탈모와 전립선비대증 치료를 목적으로 연구한 결과로 탄생. 아이들에게서 5AR의 결핍을 확인하고, 이에 따라 DHT농도가 낮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DHT가 머리 쪽 모낭에 작용해 탈모를 일으킨다는 점까지 밝힌 연구진이, 5AR의 분비를 억제하는 약인 피나스테리드를 개발
* 미녹시딜 : 궤양치료제로 개발되던 중 궤양에는 효과가 없고 오히려 혈관 확장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밝혀져 고혈압 치료제로 승인받음. 승인 후 피험자들에게 임상시험을 하던 중 부작용으로 다모증이 발생했고, 이를 계기로 개발된 바르는 형태의 탈모약.

- 대항해 시대 괴혈병만큼이나 만연했던 정신질환
욕구불만, 향수병, 알콜의존증, 불면증, 분노조절장애. 공황장애 등 지금 생각해보면 대향해시대의 세이렌 소리는 알콜 금단증상인 섬망일 것 같다. 술에 중독되면 알콜을 섭취하지 않을 경우 금단증상이 발생. 더군다나 주변은 망망대해고먹을 것도 변변치 않은 상태이니 일반적 금단증상에 그치지 않고 섬망으로까지 이어진 것.
반드시 알콜 금단 섬망이 아니더라도 배라는 한정된 공간에 오래 있는데 주변은 망망대해라면 그것만으로도 섬망이 올 수 있다. 한데 식욕, 수면욕 등이 충족되지 않는 욕구불만에 더해 고향을 떠나온 지 오래되어 향수병까지 겪고 있다면 더욱 취약해짐. 이처럼 여러 이유로 섬망이 발생한 상태에서 바람이 세게 불고, 파도가 치면 뭐가 보이는 것 같고, 그러면 너무 힘드니 여기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해 바다로 뛰어들게 됨. 그걸 보고 있는 다른 선원들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너무 힘들다보니 세이렌이 유혹해서 데려간건가?, 하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선상에서의 싸움도 마찬가지다. 다 짜증나 있는데, 술도 먹었으니 더 그랬을 것이다. 항해를 갔다 왔는데 금세 또 나가야 할 경우 공포가 배가될 것임. 이런 이유로 당시 유럽은 기독교 신앙이 지배하고 있었지만 각종 미신과 부적이 성행했다.

- 지금도 거머리를 치료와 활용하는 이유
거머리는 흡혈시 히루딘이라는 물질을 분비. 히루딘은 혈액응고를 억제해 피를 묽게 만드는데, 이를 활용하기 위해 현대의학에서도 거머리를 치료에 이용하기도 함. 대개 독소제거 또는괴사조직 제거등에 쓰임. 히루딘은 헤파린과 비슷한 작용을 일으키지만 명백히 다르다. 헤파린은 응고억제 작용을 억제할 수 있는 약이 존재하는데 히루딘은 아직까지 중화제가 나와 있지 않아 거머리를 이용한 치료시 한번에 너무 많은 양이 주입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함

- 독신목동과 암컷 라마, 그리고 콜럼버스
매독은 중세 이후 인류역사와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 매독의 유래에 대한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가장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신대륙 기원설. 신대륙은 아메리카대륙으로 , 보통 구대륙에서 건너온 천연두와 황열벙 등의 전염병이 신대륙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으나, 매독만큼은 신대륙에서 건너와 퍼진 것으로 추정됨.
구대륙과 신대륙 간에 질환의 차이가 생기는 이유는 문화적 차이 때문. 유럽은 가축을 사육해서 먹는다. 이 과정에서 천연두와 결핵이 인수공통감염병으로 변이를 일으켜 사람들 사이에 퍼진 것으로 보임. 하지만 신대륙에는 기를만한 동물이 거의 없었다. 소나 양, 돼지가 없었기 때문. 소와 비슷한 동물로 버펄로가 있었는데, 이를 가축으로 사육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키우다 죽을수도 있다. 그 외에 라마나 알파카 정도가 있는데, 라마는 힘이 약하고 알파카는 너무 작아서 써먹기 어려웠다. 그래서 가축을 대량으로 키우지 않았다. 덕분에 천연두나 결핵이 발생하지 않음.
하지만 라마를 먹이려면 목동들이 아주 멀리다녀야 했다. 그러다 보니 목동은 주로 혼자 지내야 했고, 라마에게 욕정을 풀었다고 함. 이 과정에서 매독이 발생했다고 추정됨. 구대륙에서는 콜럼버스 이후 매독이 발생하지만, 잉카에서는 오래전부터 매독이 큰 문제였다. 독신인 목동이 암컷 라마를 소유하면 사형에 처한다는 법도 있었다.
매독에 걸려 유럽으로 돌아간 컬럼버스는 당시 신대륙을 발견한 영웅 그 자체였으니 인기가 많았을 것. 매독은 순식간에 퍼진다. 컬럼버스가 1493년 유럽으로 귀환했고, 1495년 매독이 대규모로 유행하기 시작. 불과 2년만의 일이다. 그로부터 20년도 채 되지 않아 중국, 일본, 조선으로까지 번진다. 
사람들이 매독은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생각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 나라는 아닌 것 같으니까 싫어하는 나라의 이름을 붙인다.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는 프랑스병, 프랑스에서는 이탈리아병, 네덜란드에서는 스페인병, 러시아에서는 폴란드병, 튀르키예에서는 기독교도병으로 부름. 조선에서도 이것이 어찌 유교에 걸맞은 질환이라 할 수 있는가, 라며 중국병, 즉 당창이라 부름. 왜색병이라고도 불렀는데, 임란때 우리나라에 쳐들어온 가토 기요마사도 매독환자였다. 실제로 이 루트로 옮겨왔을 가능성이 큼

- 췌장의 기능에 관하여
췌장은 약 15센티로 상복부 뒤쪽에 위치해 소화효소를 십이지장으로 분비하는 외분비기능과 혈당조절 관련 호르몬인 인슐린과 글루카곤 분비기능을 동시에 관여. 인슐린은 혈당이 올라가면 혈당을 낮우고 반대로 글루카곤은 혈당이 떨어지면 혈당을 높임. 이 두 호르몬은 서로의 상호작용을 통해 혈당의 농도를 조절. 현대사회에서는 고혈당이 문제다. 혈당이 높으면 미세혈관이 망가져 다양한 질환을 일으키기 때문.

- 20세기의 환상통
20세기 중분, 효과적 치료법을 찾지 못한 채 마약성 진통제를 처방하는 방식으로 환상통 치료를 미루고 미루다가, 인도의 뇌과학자 빌라야누르 라마찬드란이 거울치료를 개발. 라마찬드란이 생각하기에, 사람들이 없는 팔 때문에 아파하니까 왠지 뇌가 착각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래서 그 착각을 고쳐보기로 한다.
거울을 가운데 대고 오른쪽 팔을 왼쪽으로 비춘다. 왼쪽 팔이 없는데, 거울을 보면 왼쪽 팔이 있는 것처럼 보임. 오른쪽을 움직여 왼쪽 팔의 감각훈련을 진행. 이렇게 계속 훈련을 했더니 환상통이 사라짐. 이명처럼, 없는 감각을 뇌가 계속 보상하고 있었던 것. 그래서 특정 부위가 없다는 것을 완전히 인지하고 나니 환상통이 사라진 것. 반대편, 그러니까 멀쩡한 팔을 거울에 비춰서 잃은 팔이 마치 있는 것처럼 뇌에 착각을 일으키는 원리다.
- 고무 손을 만들어 잘린 팔 쪽에 끼우면 감각이 없다. 환자가 자신의 팔을 만지고 있는데 감각이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지하면 통증이 사라진다. 지금은 좀 더 발전해서 이같은 원리로 가상현실을 이용한 치료가 최근 도입되었다. 여전히 환상통의 원인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는 사실과 별개로, 치료의 효과는 상당히 좋음. 다행히 이제는 환상통으로 인한 고통을 겪을 일은 없다.

- 고혈압 합병등의 위험한 이유
고혈압의 90%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본태성 고혈압. 하지만 고혈압을 유발하는 요인은 잘 밝혀져 있다. 유전, 흡연, 고지혈증, 당뇨, 60세 이상 노년층, 폐경 이후 여성, 나트륨, 지방, 알콜 과다섭취, 칼슘, 칼륨, 마그네슙 섭취부족 및 일부 약물을 고혈압 유발요인으로 꼽는다.
고혈압이란 혈관 벽에 작용하는 압력이 높은 것으로 이 상홍이 지속되면 결국 혈관 내벽에 미세한 상처가 생김. 만약 상처가 난 혈관이 뇌혈관이라면 뇌출혈이 발생. 관상동맥이라면 관상동맥 질환이 발생. 또 혈관벽의 압력을 이겨내기 위해 심장이 무리하므로 심장근육이 비대해짐. 그런데 심장은 근육이 너무 커지면 내부공간이 줄어들고 효과적 수축이 어려워져 기능이 떨어짐. 즉, 심부전증이 발생. 이외에도 신장질환이나 흉부 및 복부의 동맥류를 유발할 수도 있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맛있는 세계사  (0) 2025.02.27
의자의 배신  (0) 2025.02.01
젓가락  (0) 2025.01.22
글로벌 푸드 한국사  (3) 2025.01.22
고기의 인문학  (0) 2025.01.18
Posted by dalai
,

맛있는 세계사

역사 2025. 2. 27. 06:56

- 원래 빵이란 말은 포르투갈어 파오에서 유래. 15세기 이후 포르투갈 상선이 동아시아에 자주 나타났다. 카톨릭 예수회 신부였던 프란시스코 사비에르는 1549년 포르투갈 상선을 타고 일본 규슈의 가고시마에 도착. 이후 일본열도에 카톨릭이 전해졌고, 미사때마다 포르투갈어 파오가 성찬과정에서 말해짐. 하지만 일본인들은 빵을 파오라 부르면서도 한자로는 증병, 혹은 맥병이라고 적음. 1912년이 되어서야 일본에서도 비로소 빵이란 말이 보통명사로 쓰였고, 한국에도 이 말이 들어오게 됨.

- 낙타를 이용하여 사막을 통과하면서 오아시스에 형성된 마을에 상품을 판매하던 서아시아 대상인들이 젖 대신에 치즈를 만들어서 이동식량으로 사용하면서 치즈는 전세계로 퍼져나감. 그러니 치즈는 서아시아에서 발명되어 그리스로 전해진 셈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책 동물의 역사에서 액체의 젖은 오로스라 부르며, 딱딱한 젖은 타이로스라 부른다고 적음. 이 타이로스가 바로 치즈다. 
고대 로마에서는 치즈를 카세우스라 불렀다. 남자라는 뜻도 갖고 있는 이 단어는 주로 남자들이 치즈를 만들었기 때문에 생겨난 말. 이것이 영어로 옮겨지며 카세로 변했고, 다시 치세와 치즈로 바뀜

- 수확한 밀은 쌀과 달리 밥을 지을 수 없다. 쌀에 비해 밀은 딱딱한 겉껍질을 갖고 있다. 하지만 속의 알갱이는 너무 부드러워 쌀알처럼 깎아내리기 어렵다. 그래서 밀을 그 자체로 잘게 부순 다음 고운 채로 여러번 걸러서 껍질을 제거하고 밀가루를 얻는 방법을 써야 함. 예전에는 당연히 갈돌이나 절구 혹은 맷돌이 있어야 밀가루를 만들 수 있었다. 중국인들은 이 밀가루로 국수를 만들었고, 서아시아인들과 유럽인들은 빵을 만들었다.

- 국수때문에 생겨난 빠른 젓가락
국수가 북송과 남송에서 대대적 인기를 누리면서 중국인들의 식사도구도 젓가락 하나로 변함. 고대중국인들은 오늘날 우리와 마찬가지로 숟가락과 젓가락을 함께 사용했음. 그런데 국수가 인기를 누리면서 젓가락 위주로 식사를 하게 됨. 중국어로 젓가락은 쿠아이쯔라고 부름. 원래 빨리라는 의미를 지닌 쿠아이에 대나무를 뜻하는 죽이 붙었다. 곧 대나무로 만든 젓가락인데 음식을 빨리 먹을 수 있는 도구라는 뜻이 쿠아이쯔에 담겨 있음. 북송과 남송의 도읍지에 있던 식당에서 국수가 일종의 패스트푸드로 판매되었기 때문. 가게에서는 손님이 가능한 빨리 먹도록 하기 위해서 값싼 대나무로 젓가락을 만들었고 지금도 중국인들은 쿠아이쯔로 국수 말고도 각종 음식을 먹는다.

- 소시지란 말은 고대 로마의 말은 라틴어의 살수스에서 유래. 그 뜻은 소금에 절인다는 의미, 이 말이 고대 북부 프랑스로 옮겨져서 소싯세가 되었고, 영어로 소시지가 됨. 그 어원이나 만드는 방법에서도 알 수 있듯이 소시지는 고기를 소금에 절여서 오랫동안 보관하는 방법에서 생겨난 음식임.
햄이나 베이컨도 소시지와 비슷. 햄은 원래 돼지의 넓적다리 살을 소금에 절인 후 연기에 훈제한 식품. 이에 비해 베이컨은 돼지의 옆구리 살로 햄을 만든 다음 그것을 말려서 얇게 썬 식품. 모두 육식을 했던 유목민이나 목축민이 개발한 것. 
비록 모양과 맛은 약간씩 다르지만, 세계 각 곳의 사람들은 소시지와 비슷한 음식을 오래전부터 먹어왔다. 우리나라 순대도 일종의 소시지. 다만 오늘날 하나의 산업으로 자리잡아 전 세계에 퍼져나간 것은 서유럽 사람들이 즐겨 먹던 소시지다.

- 특별한 날에 많이 잡은 고기는 한꺼번에 먹기보다 오랫동안 저장하여 두고두고 먹는다. 그래서 유목민들은 고기를 소금에 절이든지, 연기로 굽든지, 겨울에 야외에 두고 말리든지 하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특히 가축을 잡아도 제대로 살코기를 먹기 어려웠던 하층민들은 버려진 가축의 골, 혀, 귀, 염통, 콩팥, 코, 창자, 피 등의 부산물을 구해서 이것을 잘게 썰어 소금에 버무린 다음, 창자 속에 넣고 말리거나 훈제하는 방법을 개발. 소시지는 가난한 사람들이 동물성 단백질을 먹기 위해 발명한 음식. 이런 발명은 인류가 사회를 이루어 살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발달과정이다.

- 로마제국이 돗어로 갈라져 쇠락할 무렵, 이웃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강력한 이슬람 제국이 일어섰다. 마호네트라는 선지자를 따르는 사람들이 메소포타미아 지역뿐 아니라 지중해 남쪽과 에스파냐, 심지어 동로마 제국까지 쳐들어옴.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이슬람 제국에 붙잡혀 감옥에 갇히는 굴욕적 사건까지 일어남. 다급해진 교황 루르비누스 2세는 이슬람에게 빼앗긴 예루살렘을 되찾자고 호소하며 주변 왕국에 군대를 요청. 유럽의 여러 왕국들은 다같이 십자가를 앞세우고 군대를 모아서 이슬람 제국으로 쳐들어감.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 전쟁은 예루살렘 탈환과는 전혀 관계없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됨. 약 여덟번에 걸친 원정과정에서 서유럽 십자군은 수많은 민족을 학살하고 약탈을 일삼더니, 심지어 비잔티움 수도인 콘스탄티노플과 그리스도교를 공격하기에 이름. 애초에 십자군 원정에 참여한 국가들은 전쟁으로 얻게 될 새로운 영토와 경제적 이익이 목적이었기 때문.
결국 예루살렘 탈환에는 실패했지만, 이 전쟁으로 서유럽은 이슬람의 앞선 과학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 특히 전쟁터 한가운데에 있었던 이탈리아는 무역이 발달하게 됨. 그 결과 이탈리아는 훗날 르네상스의 주역이 되었다.

- 인도에서 커리소스의 재료로 가장 많이 사용하는 향신료는 커리나무라고 불리는 쿠라야 코엔니지라는 나무의 잎이다. 인도가 원산지인 만큼 남인도와 스리랑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음식을 만들 때 이 잎을 곱게 간 가루를 반드시 넣는다. 커리 잎은 말리면 향기가 적어지기 때문에 보통 생잎 그대로 식용유에 살짝 볶아서 가루로 만듬. 생강과 비슷한 강황도 커리소스의 중요한 재료임. 이것들은 주로 남아시아나 동남아 같은 열대지역에서 자람. 인도에서는 이 재료를 말린 뒤 절구에 빻아 커리소스로 사용. 이외에도 우리나라에서는 고수라고 불리는 코리앤더의 열매를 말려서 가루낸 것, 후춧가루, 계피가루, 육두구, 미나리과에 속하는 식물인 커민과 딜의 씨를 가루낸 것 등이 모두 커리소스의 재료로 쓰인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 마이 갓 세계사  (0) 2025.03.15
의자의 배신  (0) 2025.02.01
젓가락  (0) 2025.01.22
글로벌 푸드 한국사  (3) 2025.01.22
고기의 인문학  (0) 2025.01.18
Posted by dalai
,

의자의 배신

역사 2025. 2. 1. 07:05

- 악이 땅을 휩쓸고, 땅은 빠르게 악의 먹이가 되고 있다. 부가 축적되는 곳에서 사람은 타락한다. (올리버 골드 스키스, 버려진 땅)

- 산업혁명이 인간의 몸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산업혁명 이전에는 다양하고 광범위한 작업방식이 존재했다. 그때의 작업방식을 낭만적으로 묘사하려는 것은 아니다. 당시 일은 대부분 힘들고 재미없었으며 생명을 위협했다. 하지만 그 일을 하려면 몸을 상당히 폭넓게 움직여야 했다. 19세기 중밤 맨체스터 노동계급을 연구한 엥겔스는 198세기에는 지방 노동자들이 "큰 위험을 겪지 않고 편안하게 평생을 보냈으며, 매우 경건하고 정직하게 올바르고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었고, 그들의 물질적 상황은 그전 사람들보다 훨씬 나았을 정도"로 운이 좋았다고 서술.
육체노동이 기계노동으로 전환되는 동안, 트깋 19세기 전반부에 육체노동자가 몸을 움직이는 범위는 대폭 감소. 육체노동자들이 손으로 하던 일은 점점 줄어들다가 결국에는 흔적조차 찾기 힘들 정도가 되었다. 
19세기에는 당시의 작업방식 때문에 발생한 수많은 사고와 끔찍한 장애에 대한 우려가 많았다. 당시 횡행하던 고용주들의 착취로부터 노동계급을 보호하기 위한 법안 발의가 홍수를 이룸. 노동 또는 고질적 혹사로 상해나 장애를 겪고 난 후 생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된 빈곤층도 흔했다. 작업 중 기계에 피부를 뜯기거나 실명하거나 팔다리가 잘려 불구가 된 노동자들의 참혹한 이야기들이 퍼지기도 했다.

- 산업혁명의 두번째 물결은 첫번째 만큼 건강을 위협하지는 않지만 지속적으로 독성을 노출하고 있다. 아마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지금 이 책을 쓰는 나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앉아 있는 자세다. 현재 지구상 노동 대부분은 이 자세에서 이루어진다. 의자에 앉은 자세에서 종아리와 허벅지, 허벅지와 등이 각각 직각을 이룬 상태에서 몸은 앞으로 살짝 구부러지고, 어깨는 안쪽으로 둥글게 말리고, 목덜미 부분의 인대는 두개골이 키보드에 부딪히지 않도록 지탱해주는 역할을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의자가 보편적으로 사용된 지는 얼마 되지 않음. 역사적으로 보면 고대에는 의자가 매우 드물었음. 고대 바빌로니아의 니네베 유적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의자가 있다. 고대 그리스 화명과 석비에도 고대 중국과 일본문화에도 의자가 나타난다. 수천 년 동안 의자는 권위의 상징으로 반아들여졌다. 오랫동안 의자가 널리 쓰이지 않는 이유는 이렇게 중요한 지위의 상징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 고귀한 자질, 가장 천한 살마도 가지리 않는 동정심, 인간뿐 아니라 심지어 가장 보잘 것 없는 생물에게도 향하는 박애심, 태양계의 움직임과 구조를 꿰뚫는 신적인 지능. 이 모든 탁월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점을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한다. 인간의 몸에는 미천한 출신이라는 지울 수 없는 낙인이 새겨져 있다는 것을. (찰스 다윈,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

- 인간의 발에는 발바닥을 따라 흐르는 강한 인대의 지지를 받는 아치형 근육이 네 개 층으로 분포. 이 근육들이 아치 모양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는 동시에, 몸무게를 감당하기 위한 추진 에너지를 저장하고, 걷거나 뛸 때는 발가락이 지면에서 떨어지는 순간에 그 에너지를 다시 반환한다. 엄지발가락이 다른 발가락들과 마주봤다면 이 저장된 에너지를 낭비했겠지만, 그렇지 않기에 인간의 발은 이 에너지를 이용할 수 있게 됨.
인간의 발은 그 모양과 기능, 모든 면에서 움직임의 가능성을 극대화하도록 되어 있음. 모든 발가락이 앞쪽으로 뻗어 있기 때문에 보행주기의 전반부 동안 발의 아치에 저장된 에너지가 반환되어서 보행 후반부에 필요한 추진력을 보강해 줄 수 있음. 앞쪽으로 뻗은 엄지발가락은 인간이 걷거나 뛸때 생기는 여분의 에너지를 남김없이 반환해 작은 용수철 역할을 함. 몸의 운동량과 무게를 이용해 이동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기막히게 기발한 메커니즘이다.

- 딱딱하고 보호기능을 가진 발싸개가 나타난 것은 후기 구석기 시대 후반. 네안데르탈인과 사피엔스의 화석 유적을 보면 엄지발가락을 제외한 발가락 네개가 그 전에 비해 훨씬 덜 발달된 것을 확인할 수 있음.
신발은 우리가 움직이는 방식을 변화시켰을 뿐 아니라 혹독한 기후에서 두 발로 더 멀리 움직일 수 있도록 해줌. 수많은 세월동안 인간의 보행방식에 일어난 이런 변화는 우리 뼈에 그대로 새겨짐. 우리의 발을 감쌌던 발싸개는 보행방식에 변화를 주었고, 그 변화는 다시 우리 몸의 움직이는 부분들 간의 연결방식 대부분을 변화시킴. 우리가 슬리퍼를 신고 있을 때와 직장에서 15센티 하이힐을 신고 있을 때를 비교해 보면 그 차이를 쉽게 알 수 있음. 신발은 우리 발의 아치를 평평하게 만든다. 또 신발을 신으면 발의 내부근육을 거의 쓰지 않거나 잘못 쓰게 되어 내부 근육이 약해짐. 발의 뼈 자체에 염증이 생기는 건막류 같은 심한 질환이 발생할 가능성도 높아짐.

- 형질 인류학자 에릭 트링카우스는 고고학 저널에 중기 구석기 시대화 후기구석기 시대 유적에서 발가락뼈의 형성과 발달을 비교한 결과, 이 둘 사이에 비교적 갑작스러운 변화가 발생했다고 보고. 발가락뼈가 훨씬 더 발달했다는 것이다. 초기 아메리카 원주민(맨발로 다녔다고 알려짐)의 비교적 통통한 발과 이누이트족(물개가죽으로 만든 장화를 신음) 일부 발가락을 비교한 결과, 트링카우스는 신발을 신은 발은 맨발만큼 스트레스에 노출되지 않아 점점 가늘어진다는 결론을 내림.
신발은 약 4만년 전 샤머니즘, 의식과 종교, 동굴미술이 나타나는 등 갑자기 창의성이 폭발한 현상의 일부였던 것으로 보임. 신발이 정교하게 변화한 시기도 이때였을 것이다.
초기 인간의 하루 이동량이 8-14키로에 달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맞다면 하나의 종이 접근할 수 있고 거주할 수 있는 지구의 다른 모든 지역으로 이동하는 데에는 여러 세대가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최근 이스라엘 미스릴야에서 발견된 호모 사피엔스의 위턱뼈를 보면 현생인류가 이전에 생각했던 시점보다 훨씬 전부터 이동을 시작한 듯 하다. 중국에서 발견된 사피엔스의 치아들도 약 10만년 전의 것이라는 연대측정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 식사간격을 줄이는 것은, 광고회사나 제과회사 사람들에게는 좋은 일일지는 몰라도, 치아와 몸 모두에 해로운 영향을 미침, 한꺼번에 많이 먹고 그렇지 않으면 굶는 방식은 오늘날 우리에게는 낯설다. 이런 방식은 소규모 재배가 시작된 이후로 사라졌기 때문. 우리 몸은 수백년 동안 굶는 데 익숙했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과학적으로도 우리 몸은 굶는데 최적화되어 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기분장애 환자의 단식: 신경생물학과 효율성이라는 13년 논문에서는 단식이 기분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하기 위해 많은 신경생물학적 메커니즘들, 즉 신경전달물지르이 변화, 수면의 질, 신경 영양학적 요소의 합성 같은 것을 제시. 많은 임상환자 진술을 바탕으로 한 관찰에 따르면, 단식이 우울증상에 미치는 초기 효과는 기분, 각성 수준, 평온한 느낌의 개선과 연관되어 있다.

- 서던캘리포니아대 노인학, 생명곡학 교수 발터 롱고의 연구는 단식에 세포확산(세포교체) 속도 감소, 뇌와 내장의 염증감소, 인슐린 감소, 렙틴 감소, 뇌 네트워크 활동 강호, 새로운 뇌세포 생성, 휴식기 심박수 감소, 혈압 강하, 스트레스 저항성 증가 등의 효과가 있음을 여러차례 보여주었음. 롱고는 존스홉킨스 마크 매트슨과 함께 발표한 논문 '단식 : 분자메커니즘과 임상적용'에서 "습관적 단식은 대사경로와 스트레스 저항성 경로를 다시 설정함으로써 부분적인 생명연장 효과를 낸다"고 결론내림. 간헐적 또는 주기적 단식은 설치류에게는 제2형 당뇨, 암, 심장질환, 신경퇴화를 예방해주고 인간에게는 비만, 고혈압, 천식 류머티즘성관절염 발생빈도를 낮추어 준다.

- 하루 여덟 시간을 충실하게 일하면 결국 보스가 되어서 하루 열두 시간씩 일하게 될 것이다. (로버트 프로스트)

- 작물수확이 늘어나자 정착지도 늘어났다. 정착지는 마을, 부락, 항구가 되었으며 결국 도시가 됨. 도시가 커지며 운송과 앉아서 하는 일이 필요해졌고 도시문제의 영원한 상징인 운동의 필요성도 커짐.
농업혁명으로 곡물생산이 안정되고 나서 오랜 시간이 지났을 때 그리스 문화에서 운동이란 개념이 생김. 노동관습과 패턴의 변화 그리고 여가를 즐기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반응이었따. 자신을 위해 일할 테테스(소작농)와 노예를 소유한 사람들은 육체노동을 어느 정도 하지 않으면 건강을 해친다는 것을 곧 깨달음. 운동은 놀이와는 매우 달랐다. 그 결과는 비슷할지 몰라도 운동은 건강개선이라는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하는 데 반해 놀이는 오락, 즐거움, 또는 경쟁과 경기 등 모든 종류의 이유로 한다.
운동은 노동량의 차이가 큰 사회, 특히 도시에서만 나타남.

- 우리의 신체기관들이 그렇듯이, 팔다리의 일부분이 망가지면 다른 부분이 그 역할을 대신. 그래서 아치가 몸의 구조를 지탱하는 역할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되면 발목, 무릎, 엉덩이, 척추, 목 등이 도움을 주려 한다. 문제는 이것들이 실제로 도움을 줄 능력이 없다는 데 있음.
인간은 말, 양, 염소와 달리 땅 위 생활에 결코 완전히 적응한 적이 없다. 초기 인간이 발달시킨 메커니즘은 복잡하고 강력하고 기발하고,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했다. 하지만 적절한 영양분과 자극이 없으면 그 메커니즘은 결국 무너진다. 우리의 위가 음식물을 필요로 하고 피부가 햇볕을 필요로 하듯이, 발과 몸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움직임이 필요. 한번 발이 약해지면 그것은 바이러스처럼 우리의 몸 다른 부분으로 확산할 수 있음.
빅토리아시대 공장노동자들은 초과 작업과 영양실조에 시달렸다. 이 상황이 꼿꼿이 앉아서 일하는 방식과 합쳐지며 러다이트 기계 파괴자들이 난동을 부릴 때처럼 광폭하게 각종 질병이 우리 몸을 총공격하게 되었다.

- 이런 공장들이 있었던 도시와 시기에 학교가 부상한 것은 어느 정도는 우연이다. 하지만 이 과정 어딘가에서 우리는 교육을 공장으로 변화시켰다. 공장의 규칙과 규율을 어린이들에게 주입하는 것은 일종의 통치전략. 이 통치전략하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자신의 생활방식을 점점 더 확실하게 기계화하는 방법을 배워나갔다.

- 공장과 학교의 융합은 오늘날 교육제도에 나타나는 모습과 다르지 않음. 오늘날 교육제도에서도 비즈니스 관행은 학교와 대학에 억지로 주입되지만,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학교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
찰스 디킨스는 이 모든 것을 진작부터 알았다. 그는 아이들을 배우는 기계로 취급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예견했다. '어려운 시절'에서 디킨스는 공장노동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 했지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새롭게 부상하는 교육제도에 대한 이야기를 쓰게 되었다. 이 책의 유명한 첫문장은 다음과 같다.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사실'이다. 소년과 소녀들에게 오직 사실만을 가르쳐라. 삶에서 필요한 것은 오직 사실뿐이다. 다른 어떤 것도 주입하지 말고, 다른 어떤 것이든 뿌리째 뽑아내라."

- 09년 사우스캐롤라이나대학의 연구는 '앉아서 주로 생활하는 정상 체중 성인은 유산소운동을 해서 몸이 탄탄한 과체중 또는 비만 성인보다 심혈관 질환위험이 더 높다'는 결론을 내림. 날씬한 몸매보다는 탄탄한 몸이 건강의 조건에 가깝다는 의미.
앉아 있기에는 위험이 따른다. 사람들이 이 위험에 대해 더 잘 알게 된다면 이와 관련된 수백만건의 사망을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앉아 있기라는 질병은 침묵의 살인자다. 그에 관련된 연구들의 결론도 매우 놀랍다. 2010년 미국암학회는 앉아 있는 시간과 육체적 활동의 수준 및 형재를 비교연구해서 놀랄만한 결과를 발표. 비활동적인 여성은 하루에 세 시간 이하로 앉아 있는 여성에 비해 이런 생활을 지속할 경우 사망확률이 94% 높았다.


- 2012년 미국 역학저널에 발표된 연구는 앉아 있기와 조기사망의 연관성을 밝힘. 연구자들은 텔로미어를 관찰했는데, 텔로미어란 염색체의 보호캡 같은 것으로 나이가 들수록 서서히 가늘어짐. 연구자들은 실험 대상자 7813명 중 하루에 열시간을 앉아 있었던 사람들의 텔로미어가 엄청나게 짧아졌다는 사실을 발견. 이들은 생물학적으로 8세 정도 나이가 더 든 상태였다. 연구는 "아주 적은 정도의 활동도 텔로미어가 줄어들지 않게 하는 것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 비만은 수없이 많은 원인을 가진 복잡한 질환이지만, 의지부족은 그 원인들에 포함되지 않는다. 의지부족이 비만의 원인이라는 생각은 20세기 중반에나 하던 생각이다. 현재 비만의 원인은 유전적 영향, 출생전 상태, 생물학적 영향까지 다양하게 알려지고 있음. 초기발달의 영향 같은 더 분명한 사회적 원인들도 있다. 돈과 시간도 중요한 요소이며, 환경도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중요한 역할을 함.(특정 음식을 먹는 습관과 가용성을 결정하기 때문) 이런 이유로 의지부족 때문에 비만이 되었다고 비난하는 것은 전 세계적 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비만에 대한 유익한 반응이 아님. 비난하면서 고개를 젓는 것은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 비만은 다른 환경적 요소들과 점점 더 연관관계가 많아지고 있음. 미생물총, 즉 삶의 초기에 우리의 장에서 면역체계를 훈련시키는 수조 개의 미생물들이 비만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밝혀지고 있음. 연구결과에 따르면 우리의 장내 환경이 음식처리방식을 바꿈. 특정 종류의 미생물들이 음식으로부터 불필요한 에너지를 더 효율적으로 흡수한다는 의미. 13년 사이언스에 발표된 연구도 이 사실을 암시함. 동일한 유전자를 가진 쌍둥이들로부터 장내 세균을 채취해서 실험을 했다. 이 쌍둥이들은 유전적으로 동일했지만 한 명은 살쪘고 다른 한 명은 말랐다. 이런 상태의 쌍둥이 집단으로부터 채취한 미생물들은 무균상태의 쥐에게 옮겨졌다. 이 쥐들에게는 다시 똑같은 먹이, 즉 칼로리 흡수와 소비가 동일한 상황이 주어졌지만, 몸무게는 같은 상태를 유지하지 않았다. 쌍둥이 중 살찐 쪽으로 장내세균을 받은 무균상태 쥐들은 쌍둥이 중 마른 쪽으로부터 장내세균을 받은 쥐들에 비해 몸무게가 많이 늘었고, 체지방이 더 많이 축적됨. 이 경우를 보면 비만은 전이되는 듯하다.
이 연구결과는 체질량, 음식, 장내세균 사이의 상호작용이 적어도 현재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것을 보여줌. 칼로리 흡수처럼 단순한 과정이 비만이라는 유행병의 원인이라는 생각은 의심받고 있다. 그보다는 광범위한 식습관 자체가 비만이 원인일 수 있다는 것. 따라서 핵심은 우리가 먹는 음식이 아니라, 그 음식이 우리가 먹는 다른 모든 음식을 처리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 신경전달물질과 우울증의 관계에서처럼 이 시스템은 새로운 외부자극에 잘 반응하지 않는 민감한 시스템으로 보임.
물질대사는 편의성과 몸에서 에너지가 사용되는 속도에 관련된 것일 뿐만 아니라 음식이 소화계에서 처리되는 방식에도 관련됨. 내장에 매우 다양한 세균이 많이 분포한다면 몸무게를 유지하기 어려움. 최근의 연구둘이 몸무게 감소를 칼로리 흡수, 소비비율이 아닌 음식의 질과 연결시키는 이유도 여기 있다. 

- 제2형당뇨병은 초대형 문제다. 제1형과 달리 제2형은 비만과 화가실한 연관관계가 있음. 몸무게가 늘어나면 우리 몸 안의 세포들은 인슐린 효과에 대한 저항성을 높임. 따라서 인슐린이 효과를 내기 위해서 우리 몸은 점점 더 많은 인슐린을 만들어내야 한다.
포도당이 에너지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혈액에서 세포로 전달되어야 하며 인슐린은 그 전달과정을 돕는다. 하지만 몸무게가 늘어나면 지방, 특히 복부지방이 증가. 이는 우리 세포들이 왁스칠을 해서 만든 방수재킷처럼 지방으로 번들거리게 된다는 뜻. 이렇게 되면 인슐린이 세포 안으로 뚫고 들어가기 더 어려워지고, 결과적으로 세포들은 혈중 포도당을 흡수하지 못하게 되어 혈액안에 포도당이 엄청난 농도로 축적됨. 몸 안을 돌던 포도당이 지방으로 왁스칠이 되지 않은 세포를 찾다가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를 인슐린 저항성이라 부름. 하지만 인슐린 저항성은 공평한 경쟁의 장이 아니다. 단지 과체중이라 해서 당뇨병에 걸리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
- 인슐린 저항성은 나이가 들면서 약간 늘어남. 하지만 당뇨병과 가장 강한 연관성을 갖는 것은 복부지방이다. 탄수화물로 가득한 음식의 섭취여부는 별로 중요치 않음. 당뇨병은 에너지 입력과 출력의 문제다. 여분의 칼로리는 결국 혈액 내 지방산을 더 고농도로 쌓이게 하고, 결국 인슐린 저항성을 증가시킴.
우리 문호에서 음식가공이 그토록 문제가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음식가공은 우리 얼굴 모양을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우리 몸에서 미량 영양소를 고갈시켜서 좋은 박테리아를 죽이고 당이 더 늘어나도록 만들었다.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최대의 열량을 내는 기름진 당 폭탄을 배달하기 위해 이미 정리된 음식이 내는 에너지의 영향이 조용히 늘어남. 이런 음식에 들어 있는 인공첨가제는 어무나 기묘하고 불가해한 것이라서 내 생각에는 화학박사 학위가 없는 사람은 인스턴트 식품에 들어 있는 성분의 반도 알지 못할 것임. 가공식품 안의 정제 탄수화물이 너무 쉽게 분해되는 것(혈당과 인슐린 수치를 급증시킴)이 문제는 아니다. 가공식품이 자연식품에 비해 영양가가 적고 비타민과 미네랄이 적게 들어 있는 것이나 가공식품에 섬유질이 훨씬 덜 들어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문제는 아니다. 다만 가공식품을 적당히 먹어야 하는 이유가 되기는 한다. 그런데 위의 사실들을 모아보면 우리 음식에 엄청나게 많은 것으로 구성되지만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매우 적게 제공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됨. 가공식품은 꽉 차있기도 하고 텅 비어있기도 하다. 가공식품은 영양가는 적지만 칼로리와 염분은 엄청나게 많이 포함하며, 우리 몸이 빨리 처리할 수 있는 상태라서 먹으면 금세 다시 허기를 느낀다.

- 아주 오래전 빙하가 예상치 못하게 얼고 녹던 시대에 우리에게는 먹을 것을 구하기 힘든 기간을 위해 지방을 축적하는 능력이 진화했음. 혹독한 시기에는 잉여 칼로리를 지방으로 가장 잘 전환할 수 있는 일부 생물들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인류는 대기중에 이산화탄소 농도가 이렇게 높은 상태에서 먹걱리를 길러야 하는 환경에서 진화하지 않았다. 앞으로 몇십년 안에 이산화탄소 농도는 산업시대 이전의 두 배에 이를 가능성이 높다. 그로 인해 지구가 받을 영향을 논하기는 너무 이르지만, 이미 그로 인해 단백질가 미네랄 농도가 떨어지고 있으며 탄수화물 범벅인 먹거리에 당과 녹말이 더 첨가되고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임. 인류세에 높아지는 이산화탄소에 의해 먹이사슬 밖으로 축출되고 있는 미량영양소화 이를 갈망하는 인간이 식욕이 앞으로 비만을 얼마나 널리 퍼뜨릴지 궁금하다.

- 우리의 면역체계는 땅콩, 먼지 입자, 또는 꽃가루 같이 무해하다고 인식되어야 하는 물질에 대해 적대적으로 반응하도록 변했다. 면역 체계는 무해하다는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함. 출생때부터 발달의 핵심 단계들에서 면역체계는 충분히 학습을 하지 않았기 때문. 한때 자궁은 균이 거의 없는 환경이라 생각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엄마의 장 박테리아가 이미 자궁안에서 태아의 면역체계를 변호시킨다는 사실을 안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우리는 우호적인 박테리아에게 최초의 세계를 받는 것이다. 우리는 산모의 산도를 지나 질을 통해 나오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우호적인 박테리아(주로 유산균)로 뒤덮힌다. 면역체계에게는 일종의 최초 몰입교육이 되는 셈. 

- 루크는 모유의 기능에 대해 설명. "모유는 오랫동안 균이 없다고 생각되었지만, 그렇지 않다. 모유 안에는 유기체들이 있으며, 특정한 장 미생물총의 먹이가 되고 성장을 촉진하는 다당류도 있다." 신생아를 위한 완벽한 음식인 이 물질은 유아가 소화할 수 없는 특정 다당류를 포함하고 있다.
인간의 장은 매우 놀라울 정도로 기발한 능력을 지님. 쓸모없는 요소들을 포함하는 물질의 생성가 배달에 왜 대사차원의 노력을 기울일까? "다당류는 전혀 유아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발달상의 이유로, 아이의 장에서 증진되어야 하는 유기체들은 탐욕스럽게 이 다당류들을 먹어치운다. 따라서 다당류는 기본적으로 유기체의 비료역할을 하는 프리바이오틱스다. 

-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콘크리트, 벽돌, 유리에 둘러싸인 인류세에 산다. 박테리아의 의도와 상관없이 박테리아를 차단하도록 설계된 병실 같은 환경에 태어나는 것. 수백만 년 동안 우리는 개울물을 먹었지만 현재는 염소살균한 물을 먹는다. 그전에는 흔하던 부생성 미코박테리아를 마주치지 않는다는 뜻. 이 박테리아는 기생충, 유산균과 마찬가지로 현대생활에서 우리가 거의 마주치지 않는 박테리아다. 이 모든 박테리아는 역사적으로 우리의 면역체계에 중요하다고 생각되었다.
알레르기가 심한 사람들은 장내 박테리아의 종류가 얼마 안되고 밀도도 낮다. 우리는 몸이 발달하는 과정에서 적절한 미생물총을 만나지 못하며, 선사시대 초원에 있던 모든 종류의 박테리아와 마주치는 대신 도움이 안되고 성질이 균일한 박테리아만을 만난다. 이케아의 미생물 버전이다. 숲의 복잡한 다양성 대신 공항 라운지의 답답함과 만나는 것이다.

- 미생물총은 식욕을 자극하기도 함. 박테리아가 자기 잡단의 구성원 수를 늘리거나 줄이는 방법으로 우리가 먹는 음식에 반응한다는 사실이 밝혀짐. 우리가 먹으면 그들도 먹는다. 그리고 그들은 물질을 분비하고 유전자를 활성화시키며 우리가 영양분을 흡수하는 것을 도와줌. 또한 이 박테리아들은 우리의 중추신경계, 뇌와 소통함. 소통방식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수백만 년 동안 인간의 몸 속에서 살아온 미생물총은 숙주와 소통하며 함께 진화했다. 이 박테리아들은 식욕을 자극해서 음식을 섭취하게 함. 그리고 우리가 박테리아에게 적대적 환경을 만들 때 우리 몸은 우울증, 불안, 심지어 고혈압 등의 증상을 보인다.

- 심리분석가이자 작가인 대리언리더는 우리가 전화기를 가만히 놓아두지 못하고 회의 중에도 만지작거리며 극장이나 공연장에서도 들여다보는 이유는 전화기를 만지는 것이 상실의 몸짓이기 때문이라 주장. 우리는 엄마의 손길을 원하던 어린 시절의 자아처럼 잠정적이고 무언가를 찾는 행동을 연습하고 다시 살려내고 있는 것임. 전화기 사용은 여러 의미를 가지지만, 거기에 또 다른 무엇인가가 있었으면 한다. 나는 이 기술을 통해서 우리가 서로 다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안정시키는 접촉과 연결된 느낌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우리 손은 실제로 매우 원시적이다. 키벨은 내게 다른 영장류이 형태와 기능을 살펴본 동료들의 해부학 연구를 보여주었다. 그 연구는 종으로서의 우리 이야기가 손에 땀을 쥐게 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나무두더쥐, 여우원숭이, 다람쥐원숭이, 갈라고, 늘보로리스, 안경원숭이, 타마린, 마카크, 개코원숭이, 콜로부스 원숭이, 잎원숭이, 긴팔원숭이, 오랑우탄, 고릴라, 침팬지의 손을 종이에 대고 따라 그려서 모양과 크기가 평균인 손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결과는 평균적이고 원시적인 영장류의 손일 것이다. 어떤 특정한 기능에도 적응하지 않고 어떤 특정한 일들을 딱히 더 잘하지도 않는 그런 손 말이다.
- 우리의 손은 평균적이다. 특정하게 적응된 부분이 전혀 없다. 키벨은 우리 손이 우리를 "모든 것을 다 잘하는 사람"으로 만든다고 이야기한다. 손은 거의 모든 영장류의 손과 비교할 때 환경에 가장 덜 적응된 것으로 보임. 인간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동안 손은 많은 것을 변화시키지 않았따. 문자를 보내고 타이핑을 하는 손은, 제니 방적기를 작동시키고, 땅에 씨를 뿌리고, 사자 인간을 조각하고, 오할로 유적지에 부상자를 묻고, 최초의 석기를 만들었던 손과 다르지 않다. 그 손이 바로 이 책을 들고 있는 당신의 손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영장류의 손이 자신의 환경을 최대한 이용하도록 성공적으로 진화하는 동안 인간의 손은 훨씬 더 극적인 일을 했다는 것.
우리는 종들 사이에서 특이한 존재다. 진화가 일어나 일을 하기에 적당해지기를 기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지능력은 그 반대과정을 가능하게 했다. 다른 유인원의 손은 환경에 적응했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의 원시적인 손을, 엄지손가락을 포함한 손가락들을 환경과 상호작용하기 위한 이상적 도구로 만들었다.

- 버나드 맨더빌의 꿀벌의 우화는 1705년 처음 출간되었을 때 물의를 일으켰다. 존슨 박사를 제외한 모든 사람을 모욕했다는 이유. 이 책은 현대의 자본주의 경제가 어떻게 펼쳐질지 보여준다.
... 노예들이 허용되지 않는 자유국가에서 가장 확실한 부는 열심히 일하는 수많은 빈곤층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일을 하지 않고 안정적인 해군이나 육군간호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들은 굶주림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하기 때문에 저축할 가치가 있는 그 어떤 것도 받아서는 안된다. ... 빈곤한 사람들의 대부분이 절대로 놀지 못하게 하면서 돈을 버는 대로 쓰게 만드는 것이 모든 부자들의 관심다다. ... 사회를 행복하게 만들고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 사람들이 편안함을 느끼도록 하려면 그들 대부분을 무식하면서 가난하게 만드는 것이 필수적이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 마이 갓 세계사  (0) 2025.03.15
맛있는 세계사  (0) 2025.02.27
젓가락  (0) 2025.01.22
글로벌 푸드 한국사  (3) 2025.01.22
고기의 인문학  (0) 2025.01.18
Posted by dalai
,

젓가락

역사 2025. 1. 22. 07:44

- 젓가락은 서양의 나이프와 완전히 다르다. 젓가락은 음식을 베거나 찌르거나 난도질하거나 잘라내는 것을 거부하는 식사도구다. 젓가락으로 먹는 음식은 이제 더 이상 폭력을 가해서 얻은 먹이가 아니라, 조화롭게 이동된 물질이다. 젓가락은 이전에 새모이와 밥으로 뚜렷이 구분되던 물질을 한 줄기 젖으로 바꾸었다. 젓가락은 지치지 않고 어머니가 밥을 한입 떠먹이는 것 같은 몸짓을 하는 반면, 창과 칼로 무장한 서양의 식사방식에는 포식자의 몸짓이 여전히 남아 있다.
이러한 바르트의 숙고는 고대 중국에서 젓가락이 식사도구로 바뀌게 된 과정과 이유에 영향을 끼친 문화적 요인들을 검토하는 데 매우 유용. 바르트에 따르면, 젓가락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하는 사람들처럼 음식을 폭력적으로 다루지 않는다는 점에서 젓가락은 약탈적이지 않다. 이런 주장을 편 사람은 바르트 말고도 많다. 16세기 아시아를 여행하며 젓가락을 본 많은 서양인은 아시아인의 젓가락 사용을 좀더 문명화된 식습관이라고 생각하면서 비슷한 느낌을 공유했다.
중국인에게 이것은 소중한 문화적 신념이 되었다. 옥스퍼드대 중국학자 레이먼드 도슨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표현.
"중국인에게 문명인과 야만인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젓가락으로 밥을 먹는 사람인지, 손가락 또는 나중 일이지만 나이프와 포크같은 하등한 도구로 밥을 먹는 사람인지만큼, 그렇게 명확한 기준은 없다."

- 왕런샹의 주장에 따르면 "포크의 사용은 고기 섭취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포크는 숟가락이나 젓가락과 달리, 음식물(고기)을 나르는 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고대 중국에서 포크 사용은 일반적이지 않았따. 포크를 사용했던 사람들, 즉 육식을 하는 사람들은 상류층에 한정된 반면, 민중 대부분은 초식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일반 민중은 고기를 먹을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포크를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 왕런샹의 지적은 오늘날 포크가 고기뿐만 아니라 채소를 먹을 때도 효과적이라는 사실 때문에 힘을 잃을수도 있지만, 고대중국의 조리습관에 대한 그의 주장은 여러 고고학 유물과 역사연구가 뒷받침하고 있다. 전혀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먹는 음식의 종류에 따라 먹는 도구도 달라지게 마련. 

- 음식사가펠리페 페르난데스 아르메스토에 따르면, "대부분의 역사에서 (과학적 종자개량의 고된 과정을 통해 오늘날 놀랄 만큼 수확량이 다양한 밀 종자를 생산해내기까지) 쌀은 세상에서 견줄만한 것이 없는 수확량이 가장 많은 음식이었다. 다양한 토종종자가 있는 쌀은 1헥타아르당 평균 5.63명을 부양하는 반면, 밀은 3.67명, 옥수수는 5.96명을 부양한다. 역사 전반에 걸쳐, 쌀을 주식으로 하는 동아시아와 남아시아 문명은 다른 지역보다 더 인구가 많고, 생산성이 강하고, 더 창의적이고, 더 산업화되고, 더 기술이 발전하고, 더 강력한 무기를 보유했다."
중국이 바로 이런 나라였다. 북부지방에서 고대 중국문명을 육성한 것이 기장이라면, 쌀은 남부지방의 문화를 발전시킨 주역. 시간이 흐르면서, 쌀은 농업과 먹거리체계에서 훨씬 더 막중한 자리를 차지했다.

- 고려말, 몽골의 발흥과 뒤이은 한반도 침략은 한국의 음식과 요리문화에 중요한 변화를 일으킴. 몽골이 한반도를 점령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몽골은 수십 년동안 고려와 전쟁을 벌인 끝에, 1270년대 마침내 한반도를 평정하겨 거대한 몽골제국의 한 행정구역으로 편입. 몽골의 지배 덕분에, 그동안 불교의 영향으로 한국요리에서 배제되었던 고기를 사람들이 먹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인의 식탁에 고정적으로 오르는 음식이 됨. 물론 고기를 먹을 정도로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 한해서 그랬다는 말이다. 숯불에 고기를 굽거나 뜨겁게 달군 냄비에 얇게 썬 고기를 넣고 끓이는 것과 같은 몽골식 조리법도 고려인에게 소개됨. 중국인들의 여행기는 한국인이 13세기부터 어떻게 고기를 다시 먹기 시작했는지에 관해서 매우 흥미진진하고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서긍은 선화봉사고려도경에서 고려인이 12세기에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양고기, 돼지고기를 거의 먹지 않는다고 전한다. 그러나 1488년 명나라 사신으로 조선에 온 동월이 쓴 조선잡록에는 조선사람들이 쇠고기, 양고기, 돼지고기, 거위고기를 어떻게 먹었는지 설명하면서, 그 가운데 양고기를 가장 좋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식생활에서의 이같은 두드러진 변화는, 말할것도 없이 한반도에서 몽골의 영향력이 커졌다는 의미. 다시 말해, 금속제 식사도구가 한국인 사이에서 꾸준히 인기가 있었고, 지금까지도 그 명맥을 이어온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금속제 식사도구가 널리 사용되었던 당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고기를 먹는 것과 관련해 더욱 내구성이 높고 견고한 식사도구가 필요했기 때문일 수도 있음. 두 경우 모두 양고기 등 여러 동물고기의 섭취가 총체적으로 늘어난 것을 포함해, 유목민의 요리와 문화의 영향력 때문이라는 사실은 두말할 나위 없다.

- 젓가락 두 짝을 한데 모았을 때 또 다른 기능은 음식조각을 꼭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꼭 집는다는 말이 지나치게 강하고 공격적인 표현이기는 하다. 왜냐하면, 음식물은 그것을 집어올리고 나르는 데 딱 피룡한 만큼보다 더 큰 압력은 결코 견뎌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젓가락의 움직인은 재질(목기나 칠기)에 따라 훨씬 더 부들워질 수 있다. 그 동작에는 안아 옮길고 아이를 조심스레 다루는 어머니의 손길 같은 그런 포근함이 있다. 그때 가해지는 힘은 더 이상 강제로 눌러서 밀어내는 힘이 아니다. 우리가 음식을 대하는 중요한 태도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젓가락은 결코 음식물을 찢거나 썰거나 길게 자리지 않으며, 결코 손상을 입히지 않는다. 다만 음식물을 분류하고 뒤집고 옮길뿐이다. (롤랑 바르트, 기호의 제국)

- 일본어로 하시라고 말하는 젓가락은 다리를 뜻하는 말과 발음이 같다. 일본인에게 젓가락은 인생의 중요한 갈림길에서 실제로 사람과 사람, 인간의 영역과 신의 영역, 그리고 산 자와 죽은 자, 현세와 내세 사이의 영적 소통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예컨대 군인이 전쟁터에 나간 것처럼 누군가가 집을 멀리 떠나 있을 경우, 나머지 가족 구성원은 집에서 밥을 먹을 때 밥상에 그의 젓가락도 놓고 음식도 차려놓고는 한다. 이렇게 차려진 밥상을 가게젠이라 부르는데, 객지에 나간 사람의 안전과 안녕을 비는 마음을 표현한 것. 일본인은 어떤 사람이 쓰던 젓가락에 그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기 때문에, 그의 안전을 기원하는 가족의 소망이 그 다리를 통해 전달될 수 있다고 생각함. 사람이 한 번 쓴 젓가락에 그의 영혼이 깃든다는 이런 믿음은 일본인이 일회용 젓가락을 즐겨 사용하는 이유도 되었다.

- 일본인은 현세와 내세를 서로 소통시키는 행위를 하시와타시(다리를 놓음)라 부름. 따라서 젓가락은 고인을 저 세상으로 보내는 마지막 임무를 완수하기 위한 장례식 때 반드시 있어야 하는 필수품이다. 갓 태어난 아기를 어른이 젓가락으로 먹이는 의식과 마찬가지로, 임종한 사람에게도 그가 가장 좋아하는 밥그릇에 젓가락 한 쌍을 꽂아서 밥을 준다. 밥그릇은 베갯맡에 두기에 그것을 마쿠라메시(우리말로 사자밥)라고 부르고, 밥그릇에 꽂은 젓가락은 세워서 꽂는다 하여 다테바시라 부른다. 고인에게 마지막 식사를 바친 뒤, 젓가락은 일본 전통 장례식에서 한 가지 역할을 더 수행한다. 그것은 하시와타시 행위다. 불교의 영향을 고려할 때, 일본인이 시신을 화장하는 것은 오랫동안 확립되어온 풍습이었다. 시신을 화장한 뒤, 상가의 가족들은 젓가락을 한 쌍씩 들고 타고 남은 잿더미에서 유골들을 집어서 옆 사람에게 줄지어 전달. 이 행위는 그들과 죽은자, 현세와 내세 사이를 영적으로 연결하려는 것임. 실제로 일본인은 인생은 젓가락에서 시작해 젓가락으로 끝난다는 격언을 즐겨 말한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맛있는 세계사  (0) 2025.02.27
의자의 배신  (0) 2025.02.01
글로벌 푸드 한국사  (3) 2025.01.22
고기의 인문학  (0) 2025.01.18
음식 경제사  (1) 2025.01.16
Posted by dalai
,

글로벌 푸드 한국사

역사 2025. 1. 22. 07:40

- 진짜 위스키는 너무 비쌌다. 또 희석식 소주에 익숙한 한국 주당들에게 위스키의 알콜 농도는 너무 높았다. 폭탄주는 이런 사장으로 탄생한 한국 주당들의 창작물이다. 80년 서울의 봄이 실패로 끝아고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한국경제는 급속히 성장. 80년대 초중반 서울 강남지역은 스탠드바와 나이트클럽, 그리고 룸살롱 등 유흥업소의 전성시대였다. 정치적, 경제적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이곳에서 폭탄주를 돌리며 값비싼 위스키를 마셨다는 만족감에 도취. 90년 위스키 수입 자유화로 외국 정통 위스키를 맛볼 수 있게 되었지만, 이미 폭탄주에 취한 한국인은 값비싼 수입 위스키조차 맥주를 섞어 폭탄주로 남용하거나 뇌물로 주고받음. 97년 IMF 위기가 닥치기 전까지 아시아에서 한국이 새로운 위스키 시장으로 부상한 배경도 여기에 있다.
한국 위스키 시장 개방 초기인 91년에는 스탠다드급 위스키가 많이 판매되었지만, 90년 중반부터 프리미엄급 위스키의 판매가 급속도로 상승. 그러다 01년에 들어서면 스탠다드급의 판매가 점차 하향추세를 보이고, 대신 슈퍼 프리리엄급이 새로운 시장을 형성하며 상승추세를 보임.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전반적인 한국 위스키 시장은 와인시장에 밀려 퇴보의 길을 걸음. 알콜농도가 높은 독주가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부정적 인식이 만들어낸 결과. 여기에 기업의 접대방식이 변화한 것도 한몫했다. 더욱이 경제성장이 둔화하며 비싼 위스키는 주당들의 입맛만 당길 뿐이었다. 룸살로에서 수백만원에 달하는, 권력의 상징 같던 위스키 폭탄주 대신 소주와 맥주를 섞은 소맥이 대중적 폭탄주로 자리잡음.
2000년대 이후 국내에서 유통되는 위스키 가운데 국내산은 4%에도 미치지 못함. 나머지는 수입산. 그래도 한국의 주당들이 위스키를 즐기는 방식에 변화가 나타남. 2010년대 초반 수도권을 중심으로 위스키바가 생김. 룸사롱 문제가 사회적으로 주목받으면서 위스키를 진심으로 즐기는 주당들이 위스키바를 찾기 시작. 2020년 코로나 상황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혼술 경향이 생기며 젊은 주당들이 위스키에 주목. 좋은 품질, 독특한 맛의 위시키를 찾는 매니아도 생겨났지만, 좀더 대중적으로 위스키를 즐기게 된 만큼 가성비 좋은 미국의 버번 위스키 수입이 급속하게 늘어남. 또 2020년 이후 한국의 젊은 주당들은 위스키와 탄산을 섞은 하이볼을 즐김다. 91년이 한반도에서 진짜 위스키가 법률적 시민권을 얻은 해라면, 2022년은 위스키의 진정한 맛을 아는 한국인이 탄생한 해로 기록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 초콜릿은 카카오 나무 열매의 씨를 볶아 분쇄한 가루와 밀크, 버터, 설탕, 향료 등을 섞어 만든 식품. 카카오 나무는 멕시코와 중미 북서부를 포함하는 메소아메리카 열대지역이 원산지. 열매는 긴 타원형으로 길이는 10-30센티. 카카오 열매는 노란색이나 짙은 갈색을 띠면 수확함. 이 딱딱한 열매 속에는 30-50개 정도의 씨앗이 들어 있다. 이 씨앗을 발효시키면, 불그스름한 갈색으로 변하며 향이 난다. 이것을 물로 씻어 건조한 후 가루 낸 것이 바로 초콜릿의 주재료다.
- 1828년 네덜란드 화학자 쿤라트 반 호텐은 카카오 열매 씨앗을 압착해 지방성분인 카카오 버터를 분리해 내는 기계를 발명. 그렇게 하면 초콜릿의 지방함량을 낮추고 가루를 쉽게 얻음으로써 그 가루를 덩어리로 뭉칠 수도 있었다. 게다가 그는 알칼리염 처리를 해 초콜릿의 떫은 맛을 줄이고 더 진한 색을 띠게 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에도 유통되는 네덜란드식 초콜릿이다.
하지만 네덜란드식 초콜릿의 상품화는 1847년 영국인 조셉 프라이가 프라이스 앤드 선이라는 회사에서 대량생한하면서 시작됨. 이후 유럽과 북미에서 다양한 종류의 초콜릿을 만들어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의 초콜릿이 세상에 나왔다. 20세기에 들어 초콜릿은 대량생산의 길을 걸었고, 20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다국적 기업의 등장으로 지구촌 구석구석 초콜릿이 퍼져나감.
초콜릿의 지구사를 펴낸 사라 모스와 알렉사더 바데녹은 20세기 초콜릿 광고가 여성성, 포르노그라피, 건강과 영양, 어린이, 단란한 가정 등의 이미지를 주로 사용하여 초콜릿을 이상화했다고 보았다. 이 광고들 속에 검은 그림자, 곧 인종, 이국정서, 노예라는 이미지가 판타지로 묘사되었음을 분석. 헨젤과 그레텔, 찰리와 초콜릿 공장, 심슨 가족과 같은 동화, 영화, 드라마에 그려진 초코릿의 이미지는 그 이면에 숨어 있는 불공정무역과 노동착취를 숨기는 장치로, 혹은 그러한 그림자에 빛을 던져주는 도구였다. 한국 기업의 초콜릿 광고에도 이런 양상은 적지 않음. 아프리카 카카오 열매 생산지인 가나가 마치 유토피아처럼 느껴지도록 유도하는 광고가 한때 인기를 누린 것처럼 말이다.

- 커리의 지구사를 쓴 콜린 테일러 센은 지구촌 곳곳에 존재하는 커리를 단 하나로 정의하기 어렵자고 밝혔다. 그래도 정의를 내린다면, 커리는 '향신료를 넣은 고기, 생선, 또는 채소로 만든 스튜로, 밥과 빵, 옥수숫가루를 비롯한 탄수화물 음식과 함께 먹는다'라고 규정. 이 정의대로라면 향신료가 들어간 모든 음식을 커리라 할 수 있지만, 커리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향신료를 쓰느냐가 중요. 센은 커리나무의 잎이나 강황, 커민씨, 코리앤더씨, 고추, 호로파를 섞어 만든 가루로 맛을 낸 모든 음식을 커리라고 볼 수 있다고 했다.

- 2000년대 이후 인도를 방문하는 한국인이 증가하며 카레라는 이름도 커리로 바뀌어 감. 21년 3월 한 식품회사에서는 인도의 델리와 마드리스, 타이의 유명한 커리들을 레토르트 제품으로 내놓아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전자렌지에 1분만 돌리며녀 바로 먹을 수 있는 이 제품은 국내 카레시장의 판도를 바꾸어 놓음. 그러자 기존 카레시장을 독점해 오다시피한 기업에서도 본고장의 맛에 가까운 커리제품을 시장에 출시. 22년 현재 한국의 커리시장은 어느 업체의 제품이 본고장의 커리맛에 가까운가를 두고 경쟁중이다.
80년대 이후 음식의 역사를 연구하는 일부 학자들은 제국과 식민지의 관계가 해체된 후에 오히려 식민지 음식이 제국으로 이동하는 사례가 있음을 증명하기 시작. 가장 대표적 사례가 커리다. 인도 사람들이 외국으로 나가면서 커리는 다양한 형태로 진화. 영국인이 만들어낸 커리파우더는 북미와 오스트레일리아와 일본으로 전해짐.
60년대부터 한국 사회는 일본식 카레를 한국식으로 바꾸어갔다. 이 과정에서 카레국수, 생선카레튀김, 카레참치캔, 카레치킨 프라이드 등이 개발됨. 그려나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인은 인도아대륙과 동남아 본고장 커리 맛에 푹 빠져 있다. 미국 민속학자 루시 M 롱은 국제적 관광이 확장될수록 사람들은 관광지에서 맛보았던 음식을 귀국후에도 먹고 싶어 한다고 보았다. 2010년대 이후 한국 커리시장의 변화는 해외여행을 통한 한국인의 타 문화 경험이 가져온 결과다. 본고장의 커리맛을 알고 즐기는 사이에 한국식 카레의 자취도 엷어지고 있다.

- 독일의 한 소비자 데이터 분석기업은 2018년 기준 전 세계 도시 중 바게트, 식빵, 롤빵 같이 반죽을 부풀려 만든 로프르레드 1키로당 값이 가장 비싼 도시로 서울을 꼽츰. 서울의 1키로당 빵값이 15.59달러인 데 비해, 파리는 6.33달ㄹ, 홍콩은 4.16달러였다. 왜 서울 빵값이 세게에서 제일 비쌀까? 빵 재료 대부분을 수입하기 때문. 하지만 밀과 설탕을 수입하는 홍콩도, 심지어 도쿄 현의점에서 판매하는 빵값도 서울보다 훨씬 싸다. 몇몇 대기업이 빵집 프랜차이즈를 독점하고 있다는 것과 빵은 한국인의 주식이 아니라서 정부의 물가통제 대상에 들지 않는다는 점을 그 이유로 들 수 있음. 
- 밀가루 외에도 빵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는 효모다. 효모를 넣으면 밀가루 반죽이 부풀어 먹기 좋게 됨. 빵을 부풀리는 방법은 역사상 세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강한 열을 반죽에 가해 반죽에서 나오는 증기로 부풀리는 방법. 효모를 사용하지 않고 이렇게 만든 빵이 플랫브레드다. 
다른 하나는 공기중 젖산균을 이용해 자연적으로 발효시키는 사워도 발효법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스트 발효법이다. 사워도 발효버과 이스트 발효법을 이용해 만든 것이 로프브레드다.
빵의 역사를 연구한 학자들은 고대 이집트에서 보리술을 만들며 생긴 박테리아가 제빵사에게 전해져 사워도 발효빵이 만들어졌다고 추정함. 19세기 후반까지 유럽의 제빵사 대부분은 보리술, 그중 에일을 만드는 과정에서 생긴 침전물에서 이스트를 구해 밀가루나 곡물가루의 반죽에 넣어 빵을 부풀려 구워냈다.

- 차가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전분음식과 비전문음식을 한꺼번에 먹는 식사방식을 가진 한국인에게 식후 짠맛을 상쇄해주는 음료는 본래 숭늉이었다. 70년대 말 이후 전기밥솥이 널리 보급되며 더는 가정에서 숭늉을 만들 수 없게 됨. 그러면서 숭늉의 자리를 커피, 그중 커피믹스가 대신하기 시작. 숭늉에서는 탄수화물에서 나온 포도당의 단맛과 탄맛이 나는데, 커피믹스 역시 단맛과 탄맛이 난다.
이것이 커피믹스가 숭늉을 대신할 수 있었던 이유. 그러나 단맛이 없는 차는 '밥+탕+반찬'의 식사를 하는 한국인에게 식후 음료로 적당하지 않음. 이것이 한국인이 커피와 달리 차를 가까이 하지 않는 이유중 하나다.
2010년대 이후 해외여향을 하거나 해외에 머물며 다양한 차를 마셔본 젊은 층을 중심으로 차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늘고 있음. 이들은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외국차의 소비를 지속하고 있음. 또 그즈음 단맛이 아는 홍차를 비롯해 영국, 프랑스, 캐나다 등의 블렌딩티가 한국에 들어옴. 하지만 2020년대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차는 한국인들로부터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잇음. 그 이유 중 하나는 커피에 대한 한국인의 엄청난 열정이다. 차는 한국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글로벌 푸드다. 하지만 한국의 차는 재배지가 좁고, 조선시대 성리학에 밀렸고, 20세기 이후 커피와 산업음료에도 밀리며 여전히 식탁의 가장자리에서 겨우 버티는 중이다.

- 2020년대 한국의 젊은이들은 마라의 맛에 푹 빠져 있다. 마라는 고추, 후추, 천초, 이 세가지를 적절하게 조합. 마라의 매운맛 중 '마'의 맛은 천초와 후추에서, '라'의 맛은 고추에서 나옴. 또 마라탕에는 진피, 초마, 초장, 강즙, 산향, 마장, 개말같은 매운맛 향신료와 조미료도 들어 있음. 2000년대 후반 중국 마라탕은 서울 베이징식 중국음식점과 중국교포가 운용하는 꼬치구이집에서 판매되기 시작. 핫소스와 불닭의 매운맛에 매료되어 있던 한국의 젊은이들은 익숙지 않은 향신료가 가득한 마라탕을 예상보다 쉽게 받아들임. 미국식 핫소스인 스리라차의 매운맛도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음. 

- 콜럼버스를 비롯해 유럽인이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이후,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견된 산물 대부분은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상인에 의해 유럽을 비롯한 아프맄, 아시아에까지 전파됨. 아메리카 대륙의 산물은 어느 특정한 시기에 어느 특정한 산물이 전파되었다고 보아서는 안됨. 곧 다양한 전파경로와 과정을 통해 전 세계로 퍼짐. 이런 점에서 한국고추를 비롯호 전 세계의 각종 칠리페퍼에 관한 식물학적 연구가 이 논쟁에 앞서 제시되어야 함. 칠리페퍼의 야생종은 라틴아메리카 대륙에서 널리 발견됨. 한국고추의 한반도 자생설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한국고추의 야생종이 한반도에서 발견되어야 함. 그리고 유전학적 연구를 통해 칠리페퍼의 식물학적 계통을 밝히고, 한국고추가 아메리카 대륙의 칠리페퍼와 서로 다른 유전학적 계통임이 검증되어야 할 것임.
- 청양고추는 83년 중앙종묘에서 개발함 품종. 중앙종묘는 커리 제조에 필요한 캡사이신 추출용으로 타이 재래종과 제주도 재래종을 잡종교배하여 신품종을 개발했는데, 예상보다 캡사이신 추출률이 높지 않아 경제성이 떨어졌ㄷ. 중앙종묘는 이 품종을 버리기 아까워 시험재배에 참여한 경북 청송과 영양 농민들에게 무료로 씨앗을 주었다.
농가에서 재배한 청양고추의 풋고추를 인근 횟집에 제공했는데, 횟집에서 매운탕에 넣었더니 손님들의 반응이 좋았다. 이 사실이 중앙종표에 알려져 신품종 고추는 청송과 영양에서 따온 청양고추라는 이름을 판매되기 시작. 그러나 중앙종묘는 97년 IMF로 이듬해 멕시코 종자회사 세미니스에 인수됨. 세미니스는 다시 미국 몬산토에 넘어감. 오늘날 청양고추의 재산권은 몬산토에 있다.

- 20세기 100년 동안 한국인의 식탁은 고추의 양이 엄청나게 늘어났고 그 품종도 다양해졌으며, 매운 정도도 그 전에 비해 훨씬 강해짐. 하지만 그 이면에는 식재료의 신선도와 다양한 조리법을 매운맛의 고춧가루로 덮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더욱이 70년대 외식업의 성장은 한국음식의 매운맛을 더욱 강화. 심지어 멕시코의 핫소스를 응용한 새로운 외식업이 소비자의 입맛을 자극하면서 20세기 말에는 새로운 매운맛의 시대가 열림. 돌이켜보면 식민지기 의학자들이 제기했던 고추의 다량식용문제는 오늘날 한국음식에서 크게 개선해야 할 문제가 되었다.

- 고추와 달리 후추, 정향, 육두가, 석란육계는 수입에 의존. 이 가운데 석란육계는 여성 냉증 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하여 수요가 늘어났지만, 수입이 쉽지 않았다. 60-70년대에는 석란육계를 비롯해 후추까지 정부가 나서서 수입을 금지. 외화유출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80년대 들어 시나몬커피가 유행하며 석란육계 수입이 증가. 이런 현상은 수입상과 다국적기업의 입김이 작용한 결과임. 
2000년대 들어서도 외국향신료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늘어남. 한 식품업쳬 관계자는 소비유형의 서구화와 퓨전화가 가속화되며 국내 향신료 시장이 꾸준히 성장하리라 예측했는데, 그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이제 백화점과 마트의 향신료 전문매장에서는 외국의 향신료뿐 아니라, 직접 제조한 다양한 향신료를 판매하고 있음. 이는 2000년대 이후 매년 국내 향신료 시장이 20-30% 성장한 결과임.
한국의 식품시장에서 향신료가 중요상품으로 잡았다. 90년대 이후 해외여행이나 해외거주경험이 있는 한국인이 많아지며 세계 향신료 시장에 한국인의 식탁이 포섭되기 시작한 결과. 조선시대 약재로 여겨졌던 후추, 정향, 육두구, 석란육계 등의 다양한 향신료를 이제 백화점이나 마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향신료의 지구사의 저자 프레드 차라는 '이제 집과 슈퍼에 있는 향신료를 비롯한 다른 식품의 포장용기를 확인해 보라. 음식점에서 식사할 때는 향신료 재료를 물어보고 인터넷에서 향신료 산지가 어디인지, 각각 고유한 역사를 지닌 이 향신료를 사용한 요리법은 어떤 것이 있는지 검색해 보라'고 제안.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의자의 배신  (0) 2025.02.01
젓가락  (0) 2025.01.22
고기의 인문학  (0) 2025.01.18
음식 경제사  (1) 2025.01.16
향신료 전쟁  (0) 2025.01.14
Posted by dalai
,

고기의 인문학

역사 2025. 1. 18. 06:38

- 돼지고기 사육이 늘어난 것은 일제 강점기 들어서임. 소를 키우는 것보다는 돼지를 키우는 것이 유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됨. 소는 분만간격이 14개월이고 임신기간이 280-287일에 이르는데다 한 번에 새끼 한마리만 낳는다. 반면 되재는 분만간격이 5.5개월이고, 임신기간도 114일에 불과하며 한번에 10마리 정도를 출산.
그러니까, 과거 조선시대 쇠고기 선호에서 돼지고기를 주로 먹기 시작한 것으로의 전환에는 아무래도 일제강점기의 축산정책이 미친 영향이 컸다. 일제강점기에 버크셔 및 요크셔종을 도입하여 재래돼지와 교잡시켜 보급하였기에 1910년에 55만 두였던 돼지가 35년에는 160만두에 이름. 결국 공급이 한국인의 육류소비패턴 변화에 일조한 것.

- 돼지고기 기피이유
전 세계적으로 볼 때 돼지고기는 기피되는 식품. 돼지고기 기피의 중심지는 중동지역으로 유대교와 이슬람교 모두 돼지고기를 금한ㄷ. 구약과 코란에서 금지하고 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하지만, 돼지고기 식용을 금지하는 유대교나 이슬람교의 유럽은 중동지역의 생태학적 조건과 환경이 돼지사육에 부적합했기 때문에 만들어졌다고 보임.
고대 중동에서 음식을 제공하는 중요 동물이 소, 양, 염소 세종류였음. 마빈 해리스는 섬유질을 소화시키는 반추동물이 중동지경의 인간과 가축 사이의 관계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보았음. 즉, 이 반추동물은 인간이 먹어야 할 곡물을 나눠 먹지 않고, 인간이 먹기에 부적절한 풀이나 짚, 건초, 잎사귀 등을 먹고 살면서 고기와 젖을 제공. 반면 인간과 비슷한 먹이를 두고 경쟁관계에 있는 돼지고기는 기피되었다고 설명.

- 한국인에게 돼지고기 하면 삼겹살이다. 삼겹살이라는 단어가 널리 쓰인 것은 80년대 이후.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삼겹살이 '돼지의 갈비에 붙어 있는 살로 비계와 살이 세겹으로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고기이다. 비슷한 말로 세겹살이라 한다'라고 설명됨. 국어사전에 삽겹살이 오른 것은 94년이다. 50년대 사전을 살펴보면, 쇠고기의 부위는 등심, 안심, 채끝, 제비추리 같은 단어가 수록되어 있지만 돼지고기 부위는 살코기, 비계, 족발, 순대만 수록되어 있어 부위별 세밀한 소비는 없었던 것으로 보임. 살코기와 비계, 내장과 족발 정도의 구분, 아니면 찌개거리와 구이용같은 조리방식에 의한 구분만 존재
삼겹살구이 식당은 70년대 후반부터 생겨남. 우리민족의 돼지고기 요리 역사에 소금구이가 없었던 이유는 잔반을 먹이고 거세하여 사육하지 않으면 고기에서 냄새가 많이 나기 때문. 마늘, 생강 등으로 특유의 누린내를 제거해야 먹을 수 있었다. 그래서 70년대 중반 이전에도 삼겹살을 먹었지만 양념한 두루치기 형식의 요리가 많았다. 쇠고기 중심의 로스구이가 돼지 삼겸살 로스구이로 변화한 것, 정확히 말하면 지금과 같은 삼겹살구이 식당이 70년대 후반부터 많이 생겨난 것은 그 당시 기업양돈의 확대로 냄새가 안나는 돼지고기가 생산되어 삼겹살을 로스구이 방식으로 구워 먹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
또한 한우 가격 인상도 큰 원인이 되었을 것.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회식메뉴가 쇠고기 등심이나 갈비에서 돼지삼겹살로 이동하면서 대중문화로 자리잡음. 과거 돼지고기는 쇠고기에 비해 선호도가 낮았다. 70년대 정부가 쇠고기 가격폭등을 막기 위해 돼지고기 소비 육성책을 쓰면서 돼지고기 수요가 증가. 그 이전에 편육은 쇠고기였지만 80년대가 되면서 돼지보쌈이 유행하기 시작했고, 냉장고가 대중화되면서 가정에서도 상대적으로 가격이 싼 돼지고기 보관이 쉬워짐

- 삼겹살 구이는 한국인만의 고기문화. 지극히 한국적이고 독보적이다. 서양인들은 삼겹살을 염지와 훈연가공을 통해 얇게 썬 베이컨으로 만들어 조금씩 잘라먹음. 한국인은 비계가 타면서 내는 고소한 냄새를 맛있게 느끼고, 지방이 입안에서 씹힐 때의 촉감을 즐긴다. 여기에 상추와 된장, 마늘, 풋고추 등을 더해 쌈으로 싸먹는 습관도 삼겹살구이 인기에 일조. 채소를 곁들이면 고기에 부족한 섬유소 섭취도 증가하고 맛과 건강에도 당연히 좋다.
삼겹살은 비타민 B1과, 단백질, 아연, 엽산, 인, 철분, 칼륨 등 각종 영양성분이 풍부. 

- 과거 돼지고기는 주로 삶거나 구워 먹음. 그러나 지금 대표적 돼지고기 음식 중 하나는 돈가스. 돈가스가 한반도에 처음 들어온 것은 일제강점기인 30-40년대로 추정됨. 그러나 당시에는 돈가스가 대중적 음식으로 자리 잡지는 못했을 것으로 보임. 본격적으로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경양식집이 널리 생기기 시작한 60년대 이후.
우리나라에는 일본에 의해 돈가스가 들어왔지만, 원래 돈가스는 서양인이 일본에 전해준 음식. 돈가스는 널리 알려진바와 같이 서양의 커틀릿을 일본인의 입맛에 바꾼 절충음식이다. 외국의 문화를 받아들여 그것을 일본에 맞게 바꾼, 일본의 문화적 특성이 잘 반영된 음식의 상징이다. 1868년의 메이지 유신은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일본을 근대화시킨 정치적 혁명이었지만, 한편으로는 1200년의 육식금기를 깨뜨린 요리유신이기도 했음. 이 육식혁명이 오늘날 일본 음식문화를 풍부하게 만든 출발점이 되었는데, 그 대표적 음식이 바로 돈가스다.

- 우리나라에서 양계산업이 발달하면서, 60년대 전기구이 통닭에 이어 70년대부터 닭도리탕이 음식점에 등장했고, 매운 음식을 좋아하는 우리 식성에 맞아 빠르게 인기메뉴가 되었다. 이렇게 대중화된 닭도리탕은 일본말이라는 논란에 휩싸이게 됨. 사람들이 닭도리탕의 도리는 새 혹은 닭을 뜻하는 일본말이라고 주장하게 되었고, 이런 주장을 받아들여 97년에는 국립국어원 고시로 닭도리탕을 닭볶음탕으로 순화하여 사용할 것을 권장.
이렇게 닭도리탕이 닭볶음탕으로 바뀌었지만, 현재도 닭도리탕에 대한 논란은 여전함. 닭을 뼈째로 여러 조각으로 토막내 감자, 당근, 양파 등 채소와 고주창 고춧가루 등 매운 양념장을 넣고 끓여 만드는 이 음식은, 조립법 어디에도 기름을 넣어 볶는 과정은 사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한 닭도리탕의 도리가 일본말에서 유래했다는 근거도 명확하지 않다는 점.
닭도리탕은 일제강점기 이후 갑자기 생겨난 음식이나 말이 아니며, 그 이전부터 먹어온 음식이고 써왔던 말이다. 실제로 문헌을 찾아보니 24년 출간된 이용기의 한식요리책인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는 "송도에서는 도리탕이라고 하여 양념으로 파와 후춧가루, 기름과 깨소금, 마늘 등을 넣고 만든다"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닭복금을 도리탕이라고 한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25년 최영년의 해동죽지에는 도리탕이 나오는데 도리탕의 한자는 소리나는 대로 쓴 듯하다. '이것은 닭고깃국으로 평안 성안 일대에서 생산된다. 뼈마디를 잘라 표고버섯과 훈채와 함께 종일토록 고아 고기를 익히면 살이 매우 연해져 세상 사람들이 패강(대동강)상의 명산물이라고 칭한다' 라고 나와 있다. 즉 도리탕이 평양의 특산물이며 개성 북쪽인 관서지역 음식이라는 것이다. 지금의 닭도리탕과는 조리법이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그 당시 개성과 평양에서 명물음식으로 이름난 것으로 미루어보다 이미 오랫동안 먹어온 음식으로 봐야 함
이런 기록들로 볼 때 닭도리탕은 아마도 닭을 도리쳐서 만든 탕이라는 의미가 더 맞는 것 같다. 일보어 도리가 음식명에 들어가서 닭도리탕이 만들어졌다는 최근 주장은 시대적으로 잘 맞지 않으며, 따라서 닭도리탕을 닭볶음탕으로 바꾼 것도 성급한 판단으로 생각된다.
과거 닭의 전통 조리법은 닭을 한 마리 통째로 넣고 끓이는 것이지만, 지금은 닭을 토막내 파, 마늘 등 양념과 채소를 넣어 만드는 닭도리탕이 더 인기다. 이런 변화는 고춧가루나 고추장 등 좀 더 자극적인 양념장을 사용하게 된 미각의 변화로 인해 조립법도 변화한 탓이라 추정됨. 최근에는 이런 조리법이나 유래, 용어 등의 반론들을 종합해 닭매운찜으로 바꿔 부르자는 의견도 있음.

- 너비아니와 불고기 조립법은 각각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1800년대 말 시의전서에서는 정육을 잘게 저며 양념한 다음 불에 직접 굽는 것을 너비아니라 했고, 조선요리제법 39년판에 나오는 우육구이(너비아니) 만드는 법은 '고기를 얇게 저며 그릇에 담고 간장과 파 이긴 것, 깨소금, 후추, 설탕을 넣고 잘 섞어서 굽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 불고기는 쇠고기를 얇게 썰고 양념해서 육수를 부어 철판에 올려 굽는 음식. 불에 굽는 불고기가 아니라 국물에 잠겨 익는 형태가 되어 버렸다.
이렇게 현재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불고기라는 이름의 고기구이가 언제 이 땅에서 시작되엇는지는 확실하지 않음. 그러나 우리 고기 요리의 맥이 상고시대의 맥적에서 시작해 고려시대 설야멱적으로, 그리고 조선시대 설야적, 설리적 등으로 이어졌다가 일제강점기에 너비아니로 발전했으며, 오늘날 불고기라는 이름으로 자리잡은 듯 하다. 현재 우리에게 가장 매력적인 고기요리는 역시 불고기다. 그것이 맥적에서 왔든 달짝지근하게 먹던 일본음식의 영향을 받았든 간에 이 시대를 대표하는 우리의 고기 요리인 것은 틀림없다.

- 조선시대에는 고기를 주로 삶아서 먹었는데, 질긴 고기를 맛있게 삶기 위한 비법도 중요했다. 그를 위해 고안된 방법들이 고조리서에 많이 나오는데,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이 닥나무 열매. 닥나무 열매와 함께 고기를 삶으면 연하고 향기롭다는 것. 냉장보관할 수 없는 사정에서, 상한 고기도 버리기 아까웠다. 따라서 약간 상한 듯한 고기를 삶을 때 볏짚이나 호두껍데기를 넣으라고 했고, 여름에는 식초를 넣어 삶으면 10일이나 상하지 않고 견딘다고 했다. 우리 선조들은 맛있는 고기조리를 위해 부단이 연구했던 듯하다.

- 하몽은 발효생햄으로 스페인에서는 하몽, 이탈리아에서는 프로슈토라 불림. 하몽은 돼지뒷다리의 넓적다리 부분을 통째로 잘라 소금에 절여 건조, 숙성시켜 만든 스페인의 대표적 고기 가공품. 비싼 값에 수입을 많이 하는 식품이 되었다. 그래서 최근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이 발효생햄을 직접 만드는 축산농가가 생겨나고 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조리법이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겨울이면 돼지고기를 소금에 절여서 창고에 걸어두고 말리고 숙성시켜두었다가 필요할 때 잘라 먹는 방식으로, 추운 지방에서는 잘 해먹던 고기조리법이었다. 
1680년경에 쓰여진 작자 미상의 국한문 혼용의 요록이라는 조리서는 '겨울에 고기 맛 내는 법"을 소개. 이에 따르면 '소나 노루나 사슴고기의 뼈를 발라내거나 뼈를 그대로 두기도 한다. 또는 길게 자르거나 편육으로 얇게 썰어 항아리에 담고 소금물을 부어 10일쯤 두었다가, 소금기가 고기에 배면 꺼내 물기를 제거하고 바람이 통하고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매달라 말린다. 얼었다 녹았다 하기를 반복하면서 마르면 감탕나무(싸리) 바구니에 넣어 보관하는데 여름을 지나고 먹어도 좋다. 거위나 오리나 닭이나 꿩도 털을 제거하고 위와 같은 방법으로 한다.'고 하여 지금의 발효생햄 만든 법과 비슷하다.
그리고 1670년의 조리서인 음식디미방에도 고기 말리고 오래 두는 법이 나온다. 그 방법은 다음고 같다. '말리려는 고기의 뼈를 발라버리고 매우 씻어 냄새와 피가 없도록 하여 베어서 편을 만들어 두 판자 사이에 넣어 돌로 눌러두어라. 물기가 없어지거든 소금을 섞어 다시 눌러두어라. 햇볕에 말리되 반쯤 마르거든 다시 두 판자 사이에 끼우 밟아 편편하게 하여 매우 말려라. 볕이 없으면 시렁을 매고 발을 깔아 그 위에 고기를 널고 그 아래 불을 피워 말려라. 연기를 쐬면 고기에 벌레가 생기지 않는다.'
직접 음식을 조리한 여성 저자의 조리서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우리도 정말 세련된 고기요리를 즐겼음을 확인할 수 있다.

- 감칠맛은 구아노ㅗ신1인산, 이노신1인산과 같은 5'-리보뉴클레오타이드와 아미노산인 L-글루타메이트의 맛. 감칠맛은 오랫동안 지속되는 혀를 덮는 듯한 수프 또는 고기맛으로, 군침이 돌게 함. 감칠맛은 인간과 동물의 혀에 있는 특수 수용체 세포에서 글루타메이트의 카복실레이트 음이온을 감지할 때 느껴지는 미각임. 이것은 기본적으로 맛의 균형을 유지하고 요리의 전체 맛을 완성함. 우리는 잘 구운 고기를 입에 넣었을 때 대부분 정말 맛있다고 느낌. 이 맛이 바로 감칠맛으로, 고기의 단백질이 분해되어 나오는 아미노산들에 의해서 만들어짐. 인간은 모유를 통해 감칠맛을 처음으로 접한다고 하니 감칠맛에 대한 인간의 집착이 얼마나 클지 짐작 가능.
이런 아미노산에는 물론 글루탐산이 영향을 미침. 그러나 글루탐산은 채소나 다른 식물성 식품에도 들어 있어, 고기 특유의 맛을 결정한다고 보기는 어려움. 고기에는 채소와 같은 식물성 식품에는 없는 감칠맛 성분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노신산이다. 이노신산은 동물 몸의 에너지원이 되는 중요 물질인데 아데노신3인산이 분해되며 생김. 식물들은 움직이지 않으므로 이노신산을 만들지 못함. 하지만 동물의 근육에는 아데노신3인산이 다량 함유되어 이노신산이 만들어짐.
이노신산은 글루탐산과 함께 핵산 조미료의 핵심원료. 채소나 콩 같은 식물성 식품에 글루탐산이 있음에도 고기에 비해 감칠맛이 떨어지는 이유는 고기에 있는 이노신산이 글루탐산과 함께 맛을 최대로 올리기 때문. 즉, 이노신산이야말로 고기의 감칠맛 성분의 핵심이다. 우리가 채식을 하다가도 고기가 먹고 싶어지는 이유는 바로 이 이노신산의 감칠맛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맛을 느끼고 싶어하는 것이 고기에 대한 맹렬한 욕구로 나타나지 않을까 싶다. 이는 또한 식욕을 증가시키는 역할도 하고 의욕도 생기게 한다. 이렇게 감칠맛 나는 고기가 있다는 것은 먹을 거리를 찾고 즐기는 풍요로운 삶을 위한 축복이 되기도 함. 




.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젓가락  (0) 2025.01.22
글로벌 푸드 한국사  (3) 2025.01.22
음식 경제사  (1) 2025.01.16
향신료 전쟁  (0) 2025.01.14
한국사는 없다  (0) 2025.01.09
Posted by dalai
,

음식 경제사

역사 2025. 1. 16. 06:51

- 우리나라를 헬조선이라 부르는 팍팍한 현실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정부의 성장중심 경제정책의 한계, 미성숙한 법규와 제도부터 급격한 근대화까지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나는 우리 민족의 주식인 쌀에 있다고 생각한ㄷ. 정확히 말하면 쌀의 생산력 탓이다. 1만년전부터 접해온 쌀 때문에 우리 역사가 요동쳤다는 이야기.
쌀의 단위 면적당 부양능력은 다른 어떤 곡식보다 월등함. 동양은 기원전 1000년 전 철기문명이 시작된 뒤 서기 1500년 전까지 서양의 생산력을 압도했다. 인종주의적 편견에 가득한 유럽의 지식인들조차 인정하는 대목임. 그 압도적 생산력의 첫걸음은 쌀에서 나왔다.
그러나 쌀의 생산력은 1500년 이후부터 지금까지 동양의 발전속도를 서양의 발밑으로 끌어내린 힘으로도 작용.
이 힘은 중국의 주변국가로 자신을 한정해온 조선에도 재앙이었음. 조선은 일본에 패망하고, 일제 식민지 역사는 남북분단으로 이어짐. 

- 중국인이 용을 신으로 모신 것은 용이 비를 불러온다고 생각했기 때문. 비가 오지 않으면 쌀농사는 불가. 쌀농사를 가능하게 하는 계절풍은 대양과 대륙의 복사에너지 온도차이에서 오는 대류현상이 원인이다. 고대 중국인들은 이런 자연현상을 용의 조화로 이해. 비가 내리지 않아도 잘 자라는 밀과 보리가 주식인 유럽과 중동에 비해동양은 우기와 장마때 내리는 비로 한 해 농사가 좌우됨. 동양과 서양이 신을 바라보는 관점은 사뭇 달랐다.
동양의 지배층은 신을 바라보는 관점이 자신에게 투사되도록 많은 장치를 고안. 계급이 처음 등장한 청동기 시대에 통치자와 제사장이 일치한 것도 이런 이유임. 왕은 청동검과 청동거울, 황금장신구로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피지배층을 세뇌했다. 이들의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

- 쌀의 우월한 생산력 때문에 동양국가들은 안정적 번영을 누림.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로마가 지주들의 토지독점과 토지황폐화 때문에 멸망한 것과는 대조적임.
쌀은 밀이나 보리에 견주어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음. 쌀은 1헥타아르당 생산량이 밀(820키로)에 견주어 1.7배나 많은 1,440키로다. 옥수수 860키로보다 많다. 인류가 보리와 함께 가장 먼저 재배한 것으로 알려진 수수의 생산량(헥타아르당 400키로)에 견주면 무려 3.6배나 된다. 쌀을 키우는 민족은 빠르게 고대국가를 이룰 수 있었다.

- 역사는 우리가 죽음을 맞는 전쟁터는 기념하면서, 번영의 터전인 밀밭은 비웃는다. 역사는 왕의 서자 이름은 줄줄이 꿰고 있지만 밀의 기원에 대해서는 알려주지 못한ㄷ. 인간이 저지르는 어리석음이다. (앙리 파브르)

- 역사를 움직이는 결정적 열쇠는 신이나 보이지 않는 손 같은 형이상학적 힘, 위대한 지도자의 영도력이 아니라 개인이 사유재산에 대한 욕망이었고 사회 시스템이 이런 욕망을 어떻게 수용하느냐였다. 서양은 동양보다 훨씬 빠른 중세 때 이미 이런 욕망의 필요성을 인정. 반면 동양의 지배층은 이 욕망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일부 이슬람 세력과 북한 등은 지금도 이를 인정하기를 꺼린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신념이나 영도력은 초기확산속도는 빠르지만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지속력이 떨어짐. 진나라는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뒤 불과 15년만에 망했다. 스페인 선교사들은 모든 인간을 하느님이 창조했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잊고 노예무역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반면 자기 땅에 대한 농민의 집착과 경제활동에 대한 상공인의 자유의지는 꾸준한 방향성으로 역사를 움직였다. 농민들은 늘 배가 고팠던 까닭이다.
개인의 생각을 만드는 기초는 먹거리다. 우리가 황혼녘 밥짓는 냄새를 맡으면 설명할 수 없는 따뜻하고 뭉클한 기운을 느끼는 것은 우리 민족이 1만년 가까이 한반도에서 쌀을 먹으면서 삶을 이어왔기 때문. 

- 유라시아인들의 쇠칼을 만들어 서로의 땅을 빼앗으려 혈안일 때 농업생산력이 높은 아즈텍인과 잉카인은 인신공양에 빠져 있었다. 왜 그랬을까? 학자들은 옥수수의 기적적인 생산조건 때문이라고 분석.
옥수수는 밀이나 쌀처럼 노동집약적 곡식이 아님. 심지어 쟁기질도 타작도 도정도 필요없다. 심는 법도 단순하기 그지없다. 남자 농민이 큰 막대기로 땅에 구멍을 뚫으면 그 구멍에 부인이 씨앗을 심는다. 1년에 두번 씨앗을 심으면 50일 안에 열매가 열림. 옥수수는 빨리 익을 뿐 아니라 익기 전에도 낱알을 먹을 수 있음. 1알을 심으면 보통 150알 이상을 거둘 수 있고, 심지어 800알을 얻기도 함. 이것은 계절에 따라 7-8일 정도만 일하면 된다는 것을 의미. 집약적 노동의 자유로움이 결국 지나치게 전제적인 신정국가에 이르게 한 것.

- 아메리카의 옥수수는 유럽으로 건너가서는 전혀 다른 역사를 일구었다. 호기심 많은 콜럼버스에 의해 유럽으로 건너간 옥수수는 감자와 함께 근대적 자본주의를 태동시키는데 공헌. 두 식물의 가장 큰 공은 빠른 식량화를 통한 인구팽창. 페스트 확산으로 급감했던 유럽인구는 17세기부터 급증. 기원전 이후 2억명 가량이던 인구는 1650년에 약 5억명으로 2배가량 늘었고, 이후 폭발적으로 성장해 1850년에는 10억명을 기록. 중국의 인구증가도 옥수수 전파되었던 17세기 청나라때부터였다.
유럽에서 최초로 옥수수에 주목한 나라는 전쟁광 스페인이 아니라 전통의 부호 이탈리아였다. 중남미의 인신공양 행위를 유럽 최초로 지켜보고 기록했던 스페인 사람들은 남미에서 가져온 옥수수를 불길한 음식으로 취급해 아예 먹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무역으로 일군 도시국가 베네치아는 달랐다. 베네치아를 비롯해 이태리 도시국가들은 노동력 대비 높은 옥수수의 생산성에 매료됨. 그들은 시칠리아에 옥수수를 키워 식량으로 삼고 대신 옥수수에 견주어 2배이상 비싼 밀을 시장에 팔았다. 17세기 베네치아는 생산된 곡물의 15-20%를 수출한 반면 프랑스는 2%를 제외한 대부분이 곡물을 소비. 
밥이 되고 돈이 되는 옥수누는 자연스레 부국강병에 골몰하던 유럽 전역으로 퍼짐. 사유재산과 대의 민주주의라는 열망을 품고 미지의 땅인 미국으로 건너간 유럽인들의 주식 역시 옥수수였다. 미국 이민 초기 밀농사는 잘 되지 않았다.

- 아즈텍제국 멸망 후 멕시코로 건너온 스페인 사람들은 현지에서 앓던 설사와 고열 등의 병을 목테수마의 복수라 불렀다. 목테수마는 아즈텍 제국의 마지막 왕. 아직 GM농산물의 피해가 구체적으로 입증된 것은 아니지만 세계보건기구가 15년 10월 가공육을 석면과 같은 1급 발암물질로, 붉은 살코기를 2급발암물질로 규정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대판 목테수마의 복수는 옥수수를 통해 더 근본적이고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다.

- 그리스와 페르시아 전쟁은 여러 면에서 상징적임. 동양과 서양이 맞붙은 최초의 전쟁이었고, 전제주의와 민주주의 간의 최초의 전쟁이었다. 그리고 밀과 보리의 전쟁이었다. 페르시아는 그리스를 한 줌 보리라고 불렀다. 밀이 나는 풍요의 나라 페르시아가 바위투성이 땅에서 보리를 먹는 가난한 그리스에 완패를 당한 것. 헤시오도스는 페르시아 땅은 그리스보다 600배 풍요롭다고 말한 바 있다. 
600배나 풍요로운 나라가 가난한 나라에 패배한 이유는 간단함. 페르시아 군인은 노예거나 정복된 속주의 피지배층이었다. 반면 그리스이 중심세력인 아테네 군인은 공동체를 대표하는 시민이었다. 마지못해 전쟁에 나선 바위를 자유를 위해 반드시 이겨야 하는 계란이 깨뜨려버린 것이다.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인들은 노예상태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자유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만일 조금이라도 자유의 맛을 보았다면 그들은 그리스인들에게 창뿐 아니라 도끼까지 들고 자유를 위해 싸우라고 조언했을 것이다."라고 적었다.

-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적절히 섞어놓은 영국은 20세기 초까지 세계 제일 부강한 나라로 성장. 후발 자본주의 국가는 물론 중국과 같은 반봉건 국가들에게도 영국은 벤치마킹 대상이었음. 그러나 민주주의가 낯선 여러 국가는 스파르타의 전통에 경도되었다. 나치와 일본 제국구의가 대표적. 사회주의 국가인 스탈린 시대 소련과 지금의 북한도 스파르타와 닮았다.
19세기말부터 일본식 자본주의에 직접적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도 스파르타의 전통이 강함.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 획일화된 학교교육, 고루한 서열문화 등은 찬란한 아테네보다 칙칙한 스파르타를 떠올리게 함. 무엇보다 수능이나 토익 따위에 청춘을 소진하는 젊은이들은 전사가 되기 위해 집단생활에 내몰린 스파트라 젊은이들과 닮았다.
먹는 것도 비슷하다. 잡코리아 등이 취업준비새아 1147명을 대상으로 17년에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삼시세끼를 꼬박꼬박 챙겨먹는 취업준비생은 17%에 불과했다. 이들이 가장 자주 사먹는 식사메뉴는 편의점 도시락고 삼각김밥이었다. 조모스와 딱딱한 보리빵을 먹던 스파르타 전사의 한끼를 떠올리게 한다.

- 나는 폴리비우스가 조영관(로마 지방의회 관리)르로 뽑혔으면 좋겠다. 그는 우리에게 맛있는 빵을 공급해준다. (폼페이 유적 낙서)

- 가룸의 가장 큰 매력은 영양보다 맛. 생선으로 만든 젓갈같은 풍부한 감칠맛을 내는 천연 글루탐산의 보고다. 로마인은 가룸을 그냥 빵에 찍어먹기도 했지만, 허브를 첨가해 산뜻하게 만들어먹기도했다. 우리나라 젓갈처럼 조미료로 쓰기도 했지만 소화제 등 약으로 썼다는 기록도 있다. 로마인들은 심지어 가룸을 술에 타서 먹기도 했다.

- 고대 박물학자 대 플리니우스는 자연사에서 "지중해에서 가장 흔한 멸치뿐 아니라 고등어, 참치 등 여러 종류의 물고기를 사용해 가룸을 만든다"고 적었다. 물고기의 종류에 따라, 또 고형물이 많고 적음에 따라 알렉, 무리, 리쿠아멘 등으로 불림. 가격 역시 천차만별이었다. 빈민이 먹던 거은 액젓의 국물을 건지고 남은 찌꺼기 알렉이었다. 반면 귀족이 가장 좋아했던 것은 이스파니아의 고등어로 만든 가룸. 이 고급가룸은 로마시대 사치품 중 하나였던 포도주와 가격이 비슷했다.

- 수도사들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사라진 로마시대의 농업기술을 부활시킨 것. 게르만족의 경제적 자살로 휘청거리던 중세 경제가 회생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임. 로마가 멸망한 뒤 멈추었던 물레방아가 다시 돌기 시작. 물레방아는 로마의 전성기를 열었던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 건축가 비트루비우스가 고안. 잡초로 뒤덮였던 황무지가 수사들의 쟁기질로 기름진 땅으로 변하기 시작. 수도원은 중세 혁신의 전진기지가 되었다.
두번째 업적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대로 가난한자와 병자를 돌본 것. 수도사는 그리스로마 문명뿐 아니라 예수의 적자이기도 했다. 이들의 활동으로 교회의 영향력은 점점 커짐. 영주와 귀족들은 천국에 가려고 자신의 땅을 수도원에 바쳤다. 덕분에 수도원의 경제력도 확대됨. 수도원은 여러 곳에 형제수도원을 설립했고 도움을 요청하는 이웃 수도원도지원. 수도원은 종교적 역할을 할 뿐 아니라 경제적 구심점이 되어갔다.
수도원에는 중세에 보기드문 잉여생산물이 쌓이기 시작했다. 로마시대에는 콜로세움보다 큰 식량창고를 능수능란하게 만들었으나 그런 건축기술이 없었던 중세 수도원은 잉여생산물이 변질되거나 손실되기 전에 가공해 팔아야 했다. 그들의 선택은 맥주. 그러나 빵을 액체로 만든 맥주는 보름도 안되어 변질되기 일쑤. 중세 도로환경을 고려하면 그들은 맥주의 보존기간을 늘려야 했음.
수도사들은 이런저런 방법을 시도하다가 늪지대에서 자라는 뽕나뭇과의 여러해살이 풀인 홉을 찾아냄. 9세기 수도사들은 홉을 넣으면 맥주의 맛이 상큼해질 뿐 아니라 보존기간도 늘어난다는 것을 알아냈다. 수도원은 홉을 넣은 맥주를 유럽 방방곡곡에 팔기 시작. 로마시대 이후 흔적만 남았던 유럽의 길이 수도원 맥주를 실은 수레를 따라 다시 모습을 드러냄

- 맥주와 포도주는 비슷하지만 여러모로 다르다. 당분이 많아 저절로 발효되는 포도주와 달리 맥주는 한번 끓여서 전분을 포도당으로 만드는 수고로움을 거쳐야 함. 고대 그리스와 로마인은 포도주처럼 저절로 술이 되는 신화적 기적이 없는 맥주를 세속의 술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포도주는 예수의 피로 상징되면서 중세에도 그  신성을 유지.
하지만 지금 세계인은 포도주보다 맥주를 6배 이상 많이 마신다. 세계 주류시장 동향자료를 보면 14년기준 세계인이 마신 술의 76.1%가 맥주다. 와인의 비중은 10.3%에 불과. 게다가 우리가 마시는 맥주는 전통적인 핏빛 에일맥주가 아니라 황금빛 맥주임. 하이네켄, 버드와이저, 칭다오 등 현대인이 마시는 맥주의 70%는 라거다. 라거는 저장하다는 뜻의 독일어 동사 라거렌에서 왔다. 발효온도를 낮추어 장기숙성한 혁신적 맥주제조법은 15세기 독일에서 개발됨. 
예수가 로마시대 포도주를 선택한 것은 유대사회에서 피를 언급하는 것은 금기였기 때문. 예수는 금기를 깨 사람들에게 죄와 구원을 환기시키려 했다. 예수와 비슷하게 중세의 수도사들은 당시 금기인 혁신을 자기몸을 쓰는 노동으로 증명해 보임. 그들의 노력으로 핏빛맥주는 황금색으로 변했고, 그 과정에서 중세는 근대 자본주의로 발효할 수 있었다. 비록 자신의 몸인 교회가 카톨릭과 개신교라는 두쪽으로 쪼개지는 아픔을 지켜보아야 했지만, 가난한 목수의 아들 예수는 맥주의 황금빛 변신을 기뻐했을 것이다.

- 유럽인이 청어를 많이 먹은데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단백질 공급원이 부족했기 때문. 서양인이 고기를 손쉽게 접하게 된 것은 19세기 냉동선 발명이후다. 그전까지 붉은 고기는 쉽게 접할 수 없는 사치품이었다. 게다가 유럽은 후추 등 향신료가 풍부하지 않았기에 고기요리는 지금과는 다른 고약한 냄새가 나는 염장육류가 대부분. 따라서 염장생선은 위도탓에 낮부터 컴컴해지는 북유럽의 겨울철을 지탱해주는 긴요한 음식이었음. 발효를 하면 원래보다 풍부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이는 염장하면 맛이 없어지는 육류와 큰 차이.
지금도 스웨덴에서는 수르스트뢰밍이라는 염장 발효청어를 즐겨먹음. 이 음식은 세계에서 가장 냄새가 고약한 음식으로 선정되었으며 일부 국가에서는 발효가스의 폭발위험 때문에 수르스트뢰밍 통조림의 비행기 반입을 금지하기도 했다. 그래도 스웨덴 사람들은 빵에 수르스트뢰밍을 올려 별미로 즐겨 먹음.
청어의 수요증가에는 종교적 이유도 있었다. 부활절 등 각종 종교적 행사를 앞두고 소고기나 가축의 육식을 금지하던 중세 그리스도교의 전통탓에 염장 청어수요는 지속적으로 증가.

- 에너지, 금융, 그리고 과학보다 직접적으로 서양문명에 변곡점을 가져온 것은 후추와 설탕이다. 후추는 유럽인을 바다로 뛰어들게 해 넓은 신대륙을 식민지로 만드는 계기가 됨. 설탕은 확보된 식민지에 심었던 환금작물이었음. 목화 역시 면사를 만드는 환금작물이었음. 후추와 설탕이라는 불쏘시개가 없었다면 문명의 변방이자 유럽의 변방이었던 서유럽에서 산업혁명이 들불처럼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임.
산업혁명을 주도한 영국은 고대문명의 발상지였던 중동이나 인도,아시아와도 멀었고 유럽문명의 뿌리라 할 수 있는 그리스, 로마와도 거리가 멀었다. 한마디로 문명의 곁불을 쬐던 영국고 그 영국의 비주류였던 청교도가 세운 미국은 세계 역사를 바꾸는 사회, 경제시스템의 혁명을 만들어냄. 그리고 서양사상의 초석을 놓았던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마저 경계해 마지 않았던 민주주의를 전세계에 퍼뜨림

- 영국은 세계 최초로 자본주의 경제를 선보이고 19세기에는 세계의 공장이라 불릴 정도로 산업이 발달했지만 경제구조는 스페인 노예무역에서 벗어나지 못함. 영국은 1807년 인권을 이유로 세계최초로 노예무역을 철폐. 흑인인권을 생각해야 한다는 인식도 있었지만, 서구열강이 너도나도 플랜테이션 농업에 나서면서 설탕가격이 떨어진 것도 주요이유. 영국은 광대한 식민지에서 나오는 설탕, 향신로, 차, 고무, 면화를 독점적으로 싼값에 확보해 증기기관으로 작동하는 기계로 가공해 공급하는 식민지 의존 경제시스템이었음. 말이 공업국가였지 영국경제의 기초는 식민지형 플랜테이션 농업생산물이었다. 바다를 지배한다는 자만감은 16세기 스페인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눈을 가렸고 영국 자본가들은 혁신을 등한시하는 부자의 저주에 빠짐.
반면 미국, 독일같은 후발국가들은 식민지가 거의 없었다. 그들은 영국처럼 식민지 플랜테이션에 의존한 경공업재신 중화학공업을 발전시킴. 결국 이 두나라는 석유기반 내연기관을 만들기 시작. 특히 미국은 아메리카 원주민을 쫓아낸 넒은 국토에 미친 듯이 철도를 깔았다. 영국은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미국철도에 투자했고 미국은 철강과 기계산업을 발전시킴. 중공업을 중심으로 발전한 미국의 공업생산량은 19세기말 이미 영국을 초월
미국과 독일이 유럽 귀족들이 장난감 취급했던 내연기관 자동차를 만들려고고민하고 있을 때, 영국은 마차보다 빨라서는 안 된다는 붉은 깃발법을 통과시킴. 이 말도 안되는 법은 무려 30년간 지속됨. 이 법안은 내연기관 분야에서 영국이 미국이나 독일에 비해 뒤처지게 했다.
후추와 설탕같은 아열대 식민지 농업에 의존한 초기 자본주의 경제는 대량생산, 대량소비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 자본주의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유럽국가들이 깨달은 것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 때문. 영국, 스페인, 프랑스, 네덜란드 등의 지배에 신음하던 제3세계 식민지 국가들은 2차대전 뒤 대부분 해방됨. 그러나 식민지를 경험한 많은 국가가 폭력으로 이식된 자본주의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채 저개발 국가로 남아 있다. 후추와 설탕이 밀고 끈 자본주의가 마냥 달콤하지 않은 이유다.

- 영국의 미국에 덜미를 잡힌 이유는 간단함. 국내총생산의 개념이 없던 시절이라고 하지만, 영국은 고대 로마인들도 알던 국력=인구라는 상식을 망각. 양국인은 같은 앵글로색슨족인 미국인조차 야만인 취급하며 가혹한 세금정책을 앞세우다 미국의 독립을 촉발. 1770년대 영국 정부가 식민지 미국의 요구대로 세금을 인하했다면, 미국은 1900년 초반까지 오스트레일리아나 캐나다처럼 영국에 충성을 다하는 속지로 남아 있었을지도 모름.
학자들은 식민지에서 목화, 고무 등 원료를 수입해 가공한 뒤 다시 식민지에 파는 플랜테이션 운영의 달콤함에 젖은 기득권층이 개혁을 거부하는 지대추구를 고집한 것이 영국의 쇠퇴원인이라고 지목해옴. 고대 로마시대부터 토지를 소유한 귀족과 지주들은 민심이 반영된 개혁안을 좌절시키는 핵심세력이었다.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이들을 잠재적 반역자로 여긴 것은 역사를 고찰하며 배운 것이지만 선견지명이기도 했다.
특히 영국의 지대추구 세력은 상인과 결탁해 수입관세를 높게 부과하는 중상주의 정책을 지지. 지주와 상인들은 흉년이 들어 식량을 비롯한 생필품 가격이 폭등해도 관세보호 덕분에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반면 서민들은 매년 날뛰는 생필품 물가에 생존을 위협받음. 1848년 곡물관세가 폐지될 때까지 영국에서 폭동이 지속해서 발생한 까닭. 자국의 노동계층은 물론 식민지 주민과의 불통이 영국을 망친 셈.

- 오늘의 미국을 만든 것은 8할이 맥도날드다
맥도날드가 미국 대표브랜드가 된 결정적 요인은 맛이나 영양이 아니라 미국식 표준화. 맥도날드는 햄버거를 만드는 과정은 물론이고 종업원의 서비스까지 표준화해 통제. 명분은 청결이었지만 속내는 이윤 극대화. 코카콜라가 광고와 환상으로 무의식을 지배하려 했다면, 맥도날드는 의식과 행동을 통제해 일상을 합리화하려 했다. 포드가 공장의 생산과정을 일관되게 효율화했다면, 맥도날드는 일상까지 효율화를 확대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 양적인 자본주의를 포드가 만들었다면 정교화된 자본주의는 맥도날드가 만든 것이다.

- 92년 부시정부가 발표한 신규식물 종자에서 파생한 식품에 관한규정을 제정한 사람들은 유전자 변형으로 만들어진 식품의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구성이 일반적 식품과 동일하다면, 전통적 식물교배과정에서 파생된 식품과 같은 범주에서 동일하게 취급해야 한다는 성분동일성의 원칙을 들고 나옴. 대장균과 인간의 유전자를 무작위로 섞은 유전자 변형 생명체에 동종 간에만 해옸던 고전적 품종개량과 동일한 지위를 부여한 것.
왜 레이건과 부시는 GMO업체에게 특혜에 가까운 혜택을 준 것일까? 80년대무역수지 적자와 군비확장에 따른 재정적자에 신음하던 미국은 생명공학을 미국의 경쟁력을 확보해줄 중요한 산업으로 보았다. 한편으로는 서방세계가 공산주의에 맞서 승리하려면 지구적인 식량증산이 필요하다고 판단. 수확량 많은 GMO의 녹색혁명으로 적색혁명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함. 91년 소련은 사라졌지만 GM곡식은 여전히 미정부의 중요 안보전략 중 하나임. 테러리스트가 양산되는 중동과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에 식량을 충분히 공급하는 것이 테러발생 억제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것.

- 경제위기를 타개하겠다고 도입했던 파생상품이 세계경제를 구하지 못했듯이 GM곡식은 인류를 배고픔에서 구원하지 못함.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미국 금융규제완화가 1%의 부자에게 부를 집중시킨 대힌 중산층을 붕괴시키고 있듯이, GM곡식은 배고픔을 해소하기는 커녕 농민마저 굶주림에 빠지게 하고 있음. GM곡식의 40% 정도는 가축사료로 쓰임. 나머지는 액상과당과 기름 같은 식품공업 재로로 쓰이거나 바이오에탄올 같은 연료로 사용됨. 농부는 거대농업기업이 구매해주는 사료용, 가공용 GMO 단일 품목만 생산해야하고, 정작 자신이 먹을 곡식이 없어 배고픔에 시달리는 일이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글로벌 푸드 한국사  (3) 2025.01.22
고기의 인문학  (0) 2025.01.18
향신료 전쟁  (0) 2025.01.14
한국사는 없다  (0) 2025.01.09
한국인의 기원  (2) 2025.01.03
Posted by dalai
,

향신료 전쟁

역사 2025. 1. 14. 06:50

- 향신료를 찾기위한 바닷길 탐험은 16세기 초 이베리아반도의 두 나라,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시작. 그중 특히 포르투갈이 과감하고 악착스럽게 목숨까지 거는 위험을 감수하며 길을 열었음. 이슬람 상인에게서 풍문으로 들은 내용 혹은 부정확한 정보에 기인하여 신비로운 향산료의 섬들을 찾아나섬.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뱃길을 항해하여 수많은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드디어 인도에서 후추를, 스리랑카에서 시나몬을, 믈라카에서 정향과 육두구를 찾았고, 이를 독점무역의 발판으로 삼는데 성공하면서 자기나라 군주에게 부를 안겨줌. 그러나 동서고금의 역사가 그렇듯이 처음 차지한 자는 언제나 두번째로 온 자에게 나리를 빼앗기기 일쑤다. 지금도 그렇다. 기업에서도 기껏 개발한 기술 또는 개척한 시장을 후발주자에게 빼앗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포르투갈의 대항애로부터 한 세기도 더 지난 후 두번째 강자가 나타남. 그리고 앞선 자들이 가진것을 모두 빼앗음.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이은 신흥강자는 바로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는 영국과의 경쟁에 이기면서 향산료가 풍부한 꿈의 바다인 말루쿠제도를 석권
1505년, 포르투갈이 시나몬 숲을 독점했던 스리랑카 요새는 1640년 네덜란드가 차지. 1498년 바스쿠 다가마가 인도 코지코드에 상륙해 후추교역을 시작한 이래 160년 동안 교역을 독점하며 지배하던 인도 남부 말라바르 해안기지들 역시 1663년에 네덜란드가 가져갔다.

- 유럽인들이 자행한 악행은 비단 반다제도만의 일이 아니었음. 아메리카 잉카 원주민 학살, 아프리카 전역에서 자행한 노예사냥도 외에도 많다. 그중 불빛을 향해 돌진하는 부나비처럼 싸우다 산화한 반다인들의 사연은 특히 처절. 참고로 현재 인도네시아에는 700개 정도의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진 종족이 모여 산다. 
오늘날 반다제도에 사는 사람들은 이주자들이다. 네덜란드의 총공격으로 노동력이 사라지자 다른 곳에서 대체인원을 데려왔기 때문. 마카사르, 부기스, 말레이, 자바 등지에서 왔고 중국인, 말루쿠인, 심지어 포르투갈인도 있었다고 함. 육두구농사는 하도급을 주었는데 네덜란드 전직병사, 전직 동인도회사 직원등에게 특혜를 주면서 고용. 역사는 이 사건을 반다의 학살, 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집단학살사건으로 기록함.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기의 인문학  (0) 2025.01.18
음식 경제사  (1) 2025.01.16
한국사는 없다  (0) 2025.01.09
한국인의 기원  (2) 2025.01.03
제국의 탄생과 몰락  (2) 2024.12.12
Posted by dalai
,

한국사는 없다

역사 2025. 1. 9. 07:15

- 4.2ka와 2.8ka 사이의 간격은 1400년. 단군이 아사달에 도읍해 나라를 다스렸다는 1500년의 시간과 거의 일치함. 또 주나라 호왕이 기자를 조선에 보내자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런 진술은 기자로 대표되는 중국계 이주민과 단군으로 대표되는 고조선 원주민 세력 사이에 충돌이 벌어졌고, 결국 단군 그룹이 패배하여 근거지를 옮겼다는 사실을 말해줌. 이후 단군은 아사달로 복귀했으나 숨어지내며 산신이 되었다. 정치적 권력을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환웅그룹이 선진적 농경기술을 들고 오자 원주민 무리 가운데 호랑이 부족이 물러났던 역사가 기자그룹과 단군그룹 사이에 재현된 것. 고대 한반도의 역사는 이렇게 기후변화가 가져온 충격을 극복하면서 시작되었다.

- 한 무제가 가장 우려한 시나리오는 흉노가 고조선 같은 주변국과 손을 잡고 한나라를 둘러싸는 것이었다. 이왕이면 보다 손쉬운 외교적 방법으로 풀고 싶었는지 한 무제는 일단 고조선에 사신을 파견. 신하국으로서의 의무를 다할 것을 다짐받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고조선 우거왕으로부터 만족스러운 답변을 얻지 못하자 한 무제는 신속하게 흉노의 왼팔을 끊었다. 즉 고조선 정벌고 한사군 설치는 동쪽에서 흉노를 견제하고 고립시키는 대전략의 일환으로 추진된 정책이었다. 한나라는 고조선 정벌 10년 뒤인 기원전 99년 흉노원정을 재개했고 흉노를 완전히 제압.
- 수나라와 당나라가 엄청난 국력소모를 감수하면서 수차례 고구려를 침공한 배경도 이때와 별로 다르지 않음.
(1) 대륙에 통일국가가 세워지고,
(2) 내부 혼란을 정비하고 나면,
(3) 이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한반도로 향함.
한반도가 중국 중심의 중화체제를 보호하는 울타리가 되어주지 않는다면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다는 것이 한 무제 이래 이어진 중국의 대한반도 인식이었다. 시진핑 시대가 공고해지며 한중 양국간 긴장이 고조되는 것이 과연 우연일까?

- 평양에서 한나라 목간이 발견된 일은 두가지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하나는 그 무렵 평양이, 즉 당시 낙랑군이 한나라 행정구역의 일부였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낙랑군에서 한나라 본토와 마찬가지로 체계적 인구조사를 실시했다는 것. 인구를 파악하는 것은 세금수취와 밀접함. 다시 말해 이 자료는 낙랑군이 평양일대에 실제로 존재했으며, 체계적 행정이 이루어졌음을 입증하는 스모킹 건이다. 그동안 무덤이나 발굴품 등을 통해 평양이 낙랑군의 중심이었을 것으로 추정해왔지만, 구체적인 문서를 통해 입증된 것은 처음이었다. 민족적 주체성을 강조하는 북한 학계를 통해서 발표되었다는 점은 역설적으로 이 자료의 신빙성에 힘을 더한다. 이로써 한사군 만주설은 힘을 잃게 됨.
- 목간에 따르면 초원 4년(기원전 45년) 낙랑군은 총 25개 현으로 구성됨. 호수는 4만 3845호. 전년보다 584호가 증가했으며, 인구는 28만 여명으로 전년보다 7800여명 증가. 기원전 45년이면 고조선이 멸망한 기원전 108년이 약 60년 가량 지난 때다. 인구와 호수가 증가했다는 사실은 고조선이 붕괴된 혼란을 딛고 낙랑사회가 안정기에 접어들었음을 알려줌.
- 낙랑군의 존재를 외면하면 도리어 고구려의 빛나는 역사가 빛을 잃게 된다. 한반도에서 낙랑군을 축출하는 것은 결코 만만한 사업이 아니다. 선진 문물과 토지를 확보한 낙랑군은 오랜기간 한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다. 이곳을 탐낸 고구려는 이미 3대 대무신왕을 시작으로 몇번이나 공략하려 했지만, 15대 미천왕 때에서야 낙랑군을 정복할 수 있었다. 미천왕은 낙랑군과 그 아래 있던 대방군까지 정복하면서 중국세력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축출. 이후 원나라 때 일부를 제외하면 중국은 한반도에 영토를 확보하지 못했다. 그러니 고구려의 낙랑군 정복은 한국사의 기념비적 사건이다. 낙랑군이 사라진 뒤 비로소 한반도에는 더 발달한 정치체제가 출현했지만, 역설적으로 이들이 낙랑군을 통해 그런 단계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

- 교과서에는 국가의 흥성을 주로 중앙집권화의 성공, 귀족등 기득권 세력 억제, 종교를 통한 국론통일 등으로 설명하고는 함. 하지만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너무나 정치적 시각에서만 역사를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 사실 이 조건대로라면 지금 세계에서 가장 흥성해야 할 나라는 사우디를 비롯한 몇몇 이슬람 국가다. 하지만 이런 국가들이 가장 흥성한다고 보기 어렵거니와 지금 중동의 몇몇 국가들이 부상한 것은 저 세가지 조건을 충족해서가 아니라 검은 황금으로 불리는 석유가 가져다준 부가 원천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가야의 영화, 신라의 부상, 그리고 신라와 가야의 국력역전은 국제 유통망의 변화에서 수반되었다. 길이 어느 쪽으로 바뀌느냐에 따라 이들 국가의 운명도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리고 그 역사적 분기점에서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섰던 신라는 한반도 트로이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고, 나아가 삼국시대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었다. 그것이 길의 변천 그리고 기회를 제대로 이용할 줄 알았던 신라 지도부의 판단력이 만든 결과였다.

- 영화나 드라마, 만화에서 고구려를 다루는 방식은 언제나 강력한 군사력과 스펙터클한 전투장면을 앞세우는 것이다. 아니면 태왕사신기처럼 온갖 판타지가 겹쳐진 광개토 대왕의 신화적 활약상을 강조함. 하지만 고구려는 군사강국이기에 앞서 외교강국이었다. 고구려=군사강국을 떠올리지만 실은 고구려의 흥망은 돌궐, 설연타, 철륵 같은 북방세력을 다루고 중국 왕조를 상대하는 외교술에 달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님. 고구려는 백제를 고립시키기 위해 수도를 이전해가면서 해상로를 틀어막았고, 거의 매년 중국에 사신을 보냄. 그렇게 얻은 정보를 활용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국제정치의 판을 짰다. 중국 왕조의 갖은 위협 속에서도 700년간 만주에서 존속했던 고구려의 저력은 바로 이런 점이었다.

- 지일파 국왕의 시대
무령왕 그러니까 사마가 태어날 무렵 백제는 건국 이래 최대위기였다. 국가의 기반이 되던 한강유역을 고구려에 빼앗겼고 국왕은 수시로 교체되었다. 고구려에 의해 중국으로 가는 바닷길이 막히는 바람에 외교적으로도 위축되었다. 혼돈을 추스르고 국력을 회복하려면 한강유역을 대신할 땅을 확보해야 했다. 또한 그것은 한강유역만큼 농업생산성을 갖춘 땅이어야 했다. 당시 그런 조건에 부합하면서 백제가 현실적으로 노릴 수 있는 곳이 지금의 전남지역이었다.
전남은 원래 백제땅이 아니었느냐는 의문이 있을 수도 있다. 교과서에도 4세기 근초고왕 때의 전남을 백제영역으로 표시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근래 연구들은 전남이 꽤 오랫동안 백제에 복속되지 않고 마한이라는 정치적 독립체를 유지했다는 쪽에 힘을 싣고 있다. 근초고왕 때 일시적으로 정복하기는 했으나 이곳을 백제 영역으로 완전히 흡수하거나 통치하지는 못했다는 것. 백제가 한성을 내주기 전까지는 고구려와 경기도, 황해도에서 피터지게 싸웠던 만큼 이 지역에 신경쓸 여력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성을 내준 뒤 백제 수도가 웅진(공주)와 사비(부여)로 내려오면서 전남지역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백제에게 중요한 땅이 됨. 하지만 북방에서는 고구려의 위협이 계속되고 있었기에 섣불리 남부로 돌리기도 쉽지 않았을 것임. 백제로서는 일본의 지원이 그 어느때보다 필요한 시점
무령왕은 이런 배경에 의해 선택된 군주였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과 강한 커넥션을 가진 무령왕이 다스리던 백제에는 일본 출신 인사들이 들어와서 활동할 여건이 충분했음. 실제로 왜계 관료가 백제 조정에서 활동한 기록도 있다. 일본 조정에도 백제출신관료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은 서로 각국 조정에서 친백제, 친왜 여론을 형성하며 가교 역할을 했을 것이다.

- 고려는자유무역 국가였나
고려는 조선과 달리 상업과 무역이 발달해 외국상인이 많이 드나들었던 것으로 알려짐. 조선보다 무역이 활발했던 것은 맞다. 하지만 우리가 상상하는 자유무역 시스템과는 거리가 멀다. 고려는 후삼국 통일 후 반세기가 지난 무렵부터 민간무역을 엄격히 막음. 최승로는 "해상 왕래로 배가 난파되어 사망하는 자가 많고 중국인들이 무역하는 이들을 천하게 여긴다"면서 민간무역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성종은 이를 따랐다. 하지만 배가 난파되고 중국에서 천하게 여긴다는 건 어디가지나 명분일 뿐, 여기에는 깊은 정치적 고려가 있다.
왕건집안은 해상무역을 통해 일어선 가문. 무역으로 큰 부를 얻고 그것을 기반으로 군사력까지 보유한 군벌세력이 되었음. 그런데 전국에는 외척인 나주 오씨를 비롯해 이런 세력이 많았다. 즉 제2, 제3의 왕건이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왕권으르 튼튼히 하려면 이런 위협요소를 제거해야 했다.
다만 개국 초기에는 결혼동맹으로 엮인 왕실의 인척이자 개국공신인 이들의 기반을 건드릴 수가 없었다. 어설프게 접근했다가는 도리어 왕실이 위협을 받을 수 있었다. 마치 궁예가 왕건의 반란으로 무너졌듯이 말이다. 이 일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4대 광종 때 노비안검법과 과거제 실시 등으로 중앙집권화의 초석을 마련한 뒤, 6대 성종때가 되었을 때 비로소 민간무역금지령을 내린 것이다.

- 명나라가 상업이나 무역을 억누르고 농업을 장려하는 쪽으로 회귀한 데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다. 주원장이 명나라를 건국한 1368년, 즉 14세기 후반은 한랭기의 충격이 수십년간 쌓인 때. 그렇기 때문에 급선무는 식량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서는 농업생산성을 회복해야 했다. 그러니 백성들이 도시로 몰려들어 점포에서 주판을 잡기보다는 시골의 농지로 돌아가 호미와 괭이를 들기를 바랐을 것임. 비슷한 시기 개국한 조선도 비슷한 정책을 폈다. 어떤 학자들은 조선의 수도가 개경에서 한양으로 이동한 것이 삼남지역의 식량생산성이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라고도 본다. 한랭화로 인해 황해도나 평안도, 경기북부에서는 이전보다 벼농사를 짓기 어려워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식량생산은 남쪽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고려말 왜구의 침략으로 식량생산지와 수도의 거리를 더욱 좁힐필요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 명나라와 조선의 중농억상 정책은 원라아와 고려에 대한 부정일수도 있지만, 기후가 만든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했다. 인류문명은 결국 기후와 얼마나 친숙해지느냐에 흥망이 달려 있는 것이다.
문익점이 목화씨를 들여온 것이 고려말인 이유도 기후영향. 최근 지적되고 있지만 원나라는 목화씨 반출을 막은 적이 없다. 그런데도 굳이 이때 목화씨를 고려로 들여온 것은 백성들이 추운 기후에 적응하려면 더 따뜻한 소재가 필요했기 때문.

- 과거 나당전쟁 때 당나라가 신라와의 싸움을 서둘러 마무리 짓고 서쪽으로 군대를 돌렸던 예가 있다. 수도 장안에서 가까운 토번이 쳐들어왔기 때문. 당에게는 대한반도 전략보다는 대토번 전략이 훨씬 중요했다. 수도가 가깝기 때문. 따라서 베이징을 수도로 삼은 현재의 중국이 대한반도 정책에 얼마나 촉각을 세우고 있을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방어체계인 사드도입에 맹렳게 반발하는 배경도 마찬가지.

-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비교적 이른시기 참전한 것도 한반도를 빼앗기면 수도 코앞에 일본군이 오기 때문이다. 미중갈등이 증폭할수록 중국은 한국을 포기하기 어렵다. (조영현교수)

- 제임스 팔레 교수는 "인구의 30%가 노예라는 점에서 조선은 노예제 사회라고 주장한 반면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를 비롯한 한국학자들은 노비가 양인과 결혼할 수 있다는 점이나, 주인과 떨어져 살며 일정량의 현물만 바치면 되는 납공노지가 있었다는 점에서 과거 미국 흑인 노예나 중국과 일본에 있었던 노예보다는 자유로운 처지였다는 점을 강조함. 납공노비는 사실상 양인과 별 차이가 없었고, 그랬기에 양천교혼이 활발. 사실 노비가 양인보다 월등하게 비참한 삶을 살았다면, 자녀가 노비가 될 것을 뻔히 알면서 노비와 결혼한 양인이 많지는 않았을 것. 하지만 매매와 상속이 가능한 재산으로 취급되었다는 점에서 노비의 신분은 일반 양인과는 달랐다.
- 노비의 존재는 조선이 근대국가로 발달하기 어려운 결정적 요인. 근대국가로 발전하려면 산업이 발전해야 하고 산업이 발전하려면 공장이나 도시에서 일할 노동자가 필요. 19세기말까지 산업혁명에 성공한 영국, 프랑스, 미국, 그리고 아시아의 일본은 신분제의 굴레를 비교적 빨리 벗어던짐으로써 산업화 단계에서 도시와 공장에서 일하는 인력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다. 반면 조선에서는 노동력 대부분이 양반집안의 노비로 편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설령 자본가가 있어도 노동자를 구할 수 없었음. 공장을 짓기 어려운 이유다. 월그을 받는 노동자가 없으면 사회전체 구매력도 떨어진다. 구매력이 떨어지면 상업발달에도 한계가 있다. 노비문제는 조선이 20세기초 망할 때까지 농업국가에서 벗어나기 힘들게 만든 큰 이유였다.

- 혹자는 조선과 일본을 비교하면서 조선이 일본에 대해 해금정책을 쓴 것이 잘못되었다고 하지만, 이런 해석은 당시 무역질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 조선은 조공무역을 통해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확보했다. 이와 함께 명이라는 든든한 뒷배를 두고 안보를 보장받았다. 그 대가로 다른 나라와의 자유무역을 포기한 것. 임진란 때 일본에 당한 수모를 떠올림 조선이 명의 체제에 속한 탓에 허약해진 것이 아니냐고 반론을 펼 수 있겠지만, 어쨌든 조선은 개국부터 임진왜란까지 200년 동안 안정을 누렸다. 이런 상황은 결코 밑지는 장사가 아니었다.
반면에 명나라로부터 조공기회를 얻지 못한 일본은 필연적으로 해외시장진출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명나라가 해로를 차단한 상황에서 해양국가 일본이 대체시장으로 생각할 수 있는 선택지는 동남아였고, 그 지역을 대상으로 왕성한 무역활동을 벌였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선택이 옳아 보여도 그것은 당대 각자가 처한 환경에 대한 적응과정이었을 뿐이다. 즉 조선과 일본의 선택은 지정학적 차이, 조공질서에 대한 처지 등이 작용한 것. 이를 두고 조선이 해금정책을 펼쳤다고 비난하는 것은 현재 시각에서 당대를 재단하는 것이다. 활발한 무역을 펼쳤던 고려조차도 중국 외에는 해외시장이 없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한반도 국가는 중국 이외의 시장을 개척할 만큼 물산이나 수출품이 풍부하지도 않았다. 물론 조선과 달라진 현재의 대한민국은 이때를 반면교사 삼아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 이것이 역사를 통해 현재를 보는 지혜다.

- 동남아 시장을 개척했지만 일본은 여전히 중국시장을 원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란을 일으킨 이유중 하나가 경제였다. 히데요시는 해안 지역 다이묘들이 밀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는 것이 불안했다. 그래서 지방 다이묘들이 무역을 엄격히 제한하면서 명나라에 정식무역을 제안했음. 하지만 명나라는 조공, 책봉체제를 이탈한 일본과 무역을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명에게 무역이란 경제보다는 외교, 안보의 수단이었다. 이런 마찰은 히데요시로 하여금 전쟁을 부추기는 요인이 되었다.
명나라와 마시를 통해 교역한 몽골도 마찬가지. 몽골은 교역을 확대하고자 했지만, 과거 몽골의 지배를 받은 명은 이런 요구를 들어주지 않음. 이쪽도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시기 북쪽과 남쪽에서 압박을 받은 명나라의 상황을 북로남왜라 표현하는데, 궁극적으로는 경제적 마찰이 원인. 그러니까 이들은 명나라 조공시스템의 문제아였던 것. 그에 비해 조선은 모범생이었다. 명에 사신을 보내는 기회를 가장 많이 얻을 수 있었던 것도 무역문제로 폭력사태를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

- 조선도 혹한이 이어지며 1600년대에는 압록강이 얼어붙는 일이 빈번. 청나라 기병들이 언제든 강을 건너 쳐들어올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진 것. 그래서 인조실록에는 강이 이미 견고하게 얼어붙어 남북의 경계가 없으니 강 연안의 방비가 급한 것은 이전에 비해 백배나 된다, 라거나 압록강 일대가 얼어붙은 후에는 하나의 평지가 되니, 철기가 달려오는 것이 질풍보다 빠르다, 는 등의 우려섞인 보고가 여러차례 등장함.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모두 한겨울에 발생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조선 조정도 언제든 후금이 기병을 앞세워쳐들어올 수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압록강이 얼면 경상, 전라, 충청도의 군사를 국경일대로 이동시켰다가 봄이 되어 압록강이 녹으면 다시 내려보내도록 했다.
22년 2월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했으르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당시 언론이나 다수의 군사전문가들은 3월이 되면 러시아의 진격이 무뎌질 거라 예상. 러시아 모스크바부터 우크라이나 키이우까지의 평야지대가 녹아 진흙탕이 되면서 전차들의 진격이 어려워진다는 것. 실제로 봄이 되자 러시아의 전격전은 어려워졌고, 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듬. 하지만 맹추위가 기승을 부린 1636년의 청나라군사들은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 청천강, 임진강 등을 전속력으로 건너며 열흘도 안되어 한양을 위협할 수 있었다.

- 소빙기가 대동법을 살리다
격렬한 반대에도 현종 때 대동법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데에는 소빙기와 함께 닥친 경신대기근의 영향이 컸다. 세금부담을 낮추어주지 않으면 험악해진 민심이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머지 않아 세금징수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 있다는 지도층의 위기감이 팽배해진 것. 
대동법은 그런 미증유의 위기에 조선의 지도층이 국가의 존속과 생존을 위해 발버둥친 결과였다. 새로운 환경에 맞추어 살아남기 위해서는 혁신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당시 기록에 따르면 대동법을 실시하기 전에는 중간상인에게 주어야 하는 커미션 등 때문에 토지 1결당 70-80두 가량을 내야했는데, 대동법이 자리잡으면서 1결당 12두로 고정되어 세금부담이 1/7~1/8 정도로 내려감. 
이렇게해서 위기를 넘긴 조선은 18세기에 황금기를 맞이하며 안정을 누림. 18세기 영정도 시대의 안정은 이 대동법 덕에 만들어진 결과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님.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만한 부분이 더 있다. 앞서 대동법에 의지를 보였던 효종은 충청도에서 시범적으로 실시. 반대 여론 때문에 확대실시는 후대로 미룬 것. 그런데 충청도에서 대동법이 성공해 민생이 나아졌다는 소문이 퍼지자, 반대가 심했던 전라도에서 대동법을 실시해달라는 요청이 빗발치고, 그렇게 해서 대동법은 전라도로 확대됨.

- 조선의 역사에서 현종은 그다지 존재감이 없다. 세종이나 정조같은 성군으로 꼽히는 것은 고사하고, 효종이나 순조처럼 딱히 내놓을 만한 업적이 없었던 임금보다도 인지도가 낮다. 하지만 현종은 조선을 구한 여성 히어로같은 군주였으며, 그의 치세는 지금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17세기 조선은 약 100년에 걸쳐 여러차례의 전쟁과 정변, 참혹한 대기근과 전염병을 겪어야 했다. 경신대기근때는 약 100만명이 사망했다고 조선왕조실록은 전한다. 이는 전체 인구의 약 10%. 백성의 유망, 경작지 황폐화, 국가재정 파탄 등 도저히 국가를 유지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이었다. 현종은 이 모든 악재가 누적된 상황에서 왕위에 오름. 현종시대를 덮친 대기근과 전염병은 그대로 자연재해였다. 같은 시기 유라시아 대륙이 대부분 비슷했다. 유럽도 페스트로 대규모 희생자가 나왔고, 중국과 일본도 비슷한 위기를 겪음. 당시 조선의 시스템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현종은 좌절하지 않고 재난을 극복하려고 노력. 그는 이전까지 왕실이 받아왔던 각종 공물을 줄이고, 조정을 독려해 구휼작업에 나서고, 세금을 감면하는 등 온갖 방법을 강구. 그래도 전례없는 대위기 속에서는 역부족이었다. 자연재해를 군주의 몸가짐이나 정치적 올바름으로 연결지어 해석하던 조선사회에서 이같은 미증유의 재난이 현종을 얼마나 괴롭혔을까.


- 조선통신사가 남기는 메시지 두가지
하나는 전선을 두개 만들지 않으려 했던 조선왕조의 고민. 조선은 북에서 후금의 위협이 증대하자, 임란을 일으킨 일본과 관계를 개선하는 선택을 함. 조선의 국력으로 양쪽을 감당할 수 없다고 진단했기 때문. 심지어 일본에서 군수물자인 조총을 수입하려고도 했다. 비록 병자호란으로 무너지긴 했지만, 조선이 이런 판단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덕분에 이후 중국에서 인삼시장이 닫혔을 때 일본시장으로 대체할 수도 있었다.
또 다른 교훈은 일본에 대한 관심과 경계다. 조선은 여러 한계에도 불구하고 주기적으로 통신사를 보내면서 일본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파악. 적어도 통신사가 제대로 기능한 17-18세기에는 양국 국력차가 크게 벌어지지 않았고, 일본으로부터의 침략위기도 없었다. 공교롭게도 통신사는 19세기 중반부터 단절되었다. 이후 결과는 우리가 아는 대로다.

- 한양집중화를 보여주는 좋은 자료가 문과급제자의 지역별 비율이다. 과거시험은 조선시대 권력과 재력 그리고 사회적 권위를 획득하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다. 그러니 과거 급제자의 비율을 따지는 일은 요즘 의대나 SKY합격자 수를 지역별로 따져보는 것과 비슷.
급제자를 100명 이상 낸 가문은 1그룹(15개), 40-99명을 낸 그룹은 2그룹(26개), 1-39명을 낸 가문은 3그룹(117개)로 구분. 그런데 100명 이상 급제자를 낸 1그룹 가문중 한양출신은 17세기 전반만 해도 평균 60% 정도였는데, 17세기 후반에는 74%로 늘어나고, 19세기에는 80%를 넘어섬.
우리가 흔히 안동김씨라 부르는 19세기 세도정치가분도 정확히 구분하면 한양에 자리잡은 장동김씨다. 병자호란 당시 척화파 선두였던 김상헌의 후예들로 장동 일대에 모여살았다. 이들은 중앙정부의 권력까지 장악해 경화거족이라 불렸다. 장동김씨 외에도 달성서씨, 풍산홍씨, 파평윤씨, 전주이씨, 반남박씨, 청송심씨, 경주김씨 등이 대표적 경화거족으로 꼽힘. 이런 가문에 속한 한양거주집안에서 문과 급제자가 다수 배출된 것.
1789년(정도 13년) 문과 급제자 현황 역시 한양집중화의 한 면모를 보여줌. 당시 서울인구(18만 9153명)은 전국인구(740만 3606명)의 2.6%에 불과했는데, 문과 급제자는 45.9%를 차지. 서울독주 시대가 열린 것이다.
한양의 장점은 차고도 넘쳤다. 지금도 강점으로 꼽히는 정보와 교통요소는 이때도 마찬가지. 조선시대에는 3년마다 치르는 정규문과 외에도 별시, 증광시 등 비정기적으로 치르는 과거시험이 있었다. 한양과 경기도는 정보가 빠르게 전달되었고, 과거를 치르는 장소와 거리도 가까워 시험에 응시할 여건이 좋았다. 반면 한양에서 며칠이나 걸리는 영호남에서는 상대적으로 여건이 나빴다.

- 구한말 역사에서 조선이 국권침탈을 맞이하게 된 가장 결정적 패착은 국제관계에 대한 오판. 중국밖에 몰랐던 조선의 국왕은 열강에 대해 너무 순진하게 접근했다. 그래서 조선의 힘을 키우기보다는 열강을 이용하려 했다. 처음에는 미국에 기대려 했고, 그다음에는 영국과 러시아에, 그리고 필요에 따라 청나라와 일본에도 보호를 기대. 남의 힘을 이용해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고자 한다면 국제사회의 움직임과 이해관계를 명확하게 꿰뚫고 있어야 함. 고종은 그럴 능력이 없었고 국권침탈이라는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이 주요 인재들도 친일파, 친청파, 친러파 등에 속하거나 소속을 갈아탔다. 당대 조선의 인재로 꼽혔던 민영익, 김윤식은 친청파, 한때 조선의 미래를 이끌고 갈 인물이라 평가받던 김옥균, 박영효는 친일파. 훗날 친일파 거두가 되는 이완용은 을미사변 직후까지만 해도 친러파 핵심인사였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음식 경제사  (1) 2025.01.16
향신료 전쟁  (0) 2025.01.14
한국인의 기원  (2) 2025.01.03
제국의 탄생과 몰락  (2) 2024.12.12
5개 원소로 읽는 결정적 세계사  (4) 2024.12.10
Posted by dalai
,

한국인의 기원

역사 2025. 1. 3. 07:29

- 동아시아 고유전체 자료는 북방계 또한 원래 남쪽에서 출발한 집단임을 시사함. 남쪽에서 올라와 북방에 정착한 사람들이 다시 남진하여 한반도로 들어왔다는 것. 결국 한반도로의 주된 이주의 흐름이 모두 남쪽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셈인데, 이는 알타이산맥 인근에서 몽골을 거쳐 만주로 동진한 집단을 북방계로 본 과거의 추론과는 다르다. 실제 한국인과 몽골인은 유전적으로 꽤 차이가 난다. 한국인은 몽골인보다는 일본인, 그리고 만주족과 같은 중국 북동부 사람들과 가까움.

- 한반도의 농경민과 관련해서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다. 2000년대 초 중국 우익학자들은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황허강 문명에 대한 관심을 거두고 황허강 동북쪽에 위치한 랴오허강 유역의 문명에 주목. 당시 국내 사학자들은 그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고, 중국 학자들의 그런 행동이 동북공정의 일환임을 인지하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중국은 랴오허 문명을 황허문명 앞에 내세우며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가 중국 왕조의 지방정권이었다고 우기고 싶었던 것. 만주에 위치한 랴오허 유역이 중국의 핵심 문명지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으면 이런 주장을 하기 더 쉬워짐
그런데 랴오허 문명의 중심인 홍산문화나 샤자뎬 문화를 일궜던 고대인과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운 현대인은 한국인이다. 고인골 유전자 자료는 한족보다 한반도인이 랴오허 문명의 주축이었음을 암시. 물론 이는 중국 학계가 원한 결과가 아니었다. 동북아 초기 농경민은 한반도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다. 고립도가 높았던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평지가 좁기 때문. 그러나 기후변화가 이어지면서 이들은 기존의 선입견을 버리고 진취적 생각으로 무장해야 했다. 기후변화로 5000년 전 이후 동북아 지역은 시간이 흐를수록 건조해지고 한랭해졌으므로 북방민들, 특히 랴오시와 랴오둥 지역 사람들은 농경에 좀더 적합한 기후를 찾아 한반도로 꾸준히 내려왔다. 그중 일부는 일본까지 건너갔다. 일종의 기후난민이었던 셈이다.

- 아프리카에서 출발하여 동쪽으로 이동한 호모 사피엔스가 대략 4만년전 동아시아에 도착. 이때는 농경이 시작되기 전이다. 수렵채집민 집단은 어로와 사냥이 용이한 초원지대를 거주지로 선호. 한반도는 동아시아의 가장자리인데다 대부분이 산지여서 그리 인기있는 곳이 아니었음. 하지만 추위가 극심해지자 분위기는 반전됨. 2만 5000년 전 이후 기온이 떨어지면서 많은 북방민이 한반도로 들어옴. 이들은 빙하기가 막판에 다다르면서 기온이 오르자 이번에는 초지를 찾아 북방으로 되돌아감. 홀로세 들면서 한반도는 더욱 온난해짐. 인구는 많지 않았다. 그러다 8200년전 갑자기 추위가 엄습하자 아무르강 하류의 수렵채집민 집단이 추위를 피해 대거 남쪽으로 이동. 홀로세의 양호한 기후로 아무르강 인구가 늘던 와중에 갑작스레 찾아온 저온현상이 식량위기를 불러온 것. 이 한랭기는 200년 가량 지속되다 끝났고, 곧이어 온난하고 습윤했던 홀로세 기후 최적기가 찾아옴. 기후가 좋아지며 동식물 개체수는 늘어남. 먹을거리가 풍족해지자 수렵채집민 인구도 증가.
그러나 홀로세 후반 기온이 떨어지기 시작하지 동북아 전역에서 다시 이주물결이 거세게 일어남. 4800년전 이후 한반도와 주변 지역 기후는 주기적으로 한랭건조해지는 경향을 보임. 주로 열대 서태평양 해수면 온도가 떨어지고 흑점수가 감소할 때 그러했다. 기온이 내려가고 가뭄이 닥칠때면 더 나은 땅을 찾아 움직이는 이주민의 거대한 흐름이 생김. 이들의 이동은 보통 랴오시와 랴오둥에서 시작하여 한반도 남부로 그리고 바다 건너 일본으로 넘어가는 경로를 따랐다. 홀로세 후반, 3000년전, 2000년전, 1000년전 등 대략 1000년마다 나타난 온난기에는 동북아 각 지역사회가 번영을 구가. 식량사정이 양호했으므로 내부갈등은 미미했다. 외부인의 유입도 적어 사회는 안정적으로 유지됨. 그러나 그 사이사이 상대적윽로 추웠던 시기에는 북쪽에서 이주민이 내려오면서 한반도 사회는 큰 혼란을 겪음.

- 북방민이 남하할 때마다 한반도 남부사회는 대내외적인 갈등에 휩싸였지만 동시에 이들이 전해주는 선진문물 덕에 지역이 발전하는 순기능 또한 적지 않게 누릴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중기 청동기 저온기(3800-3400년전)에는 벼 농경 문화가, 철기 저온기(2800-2300년전)에는 동검문화와 아마도 원시 한국어가, 중세 저온기(1900-1200년전)에는 철기 기마문화가 한반도 남부에 처음 전파됨. 이런 신문물은 한반도 부족사회가 고대국가 체제를 갖춰 나가는 데 절대적으로 기여.
이는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음. 한반도에서 전해진 선진문물 덕에 일본은 고유의 독특한 문화를 일굴 수 있었다. 철기 저온기에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들은 벼 농경문화와 원시 일본어를 전했고 야요이 문화를 창출. 중세 저온기에 마한, 가야, 백제 등에서 이주한 사람들은 고훈시대와 아스카 시대를 열며 야마토 문화를 주도. 가야인들은 고훈 시대에 철기기술을 전파했고, 백제인들은 건축, 학문, 예술, 제도, 종교 등 다양한 영역에서 아스카 시대의 문화발전을 도왔다.

애초에 호모 사피엔스는 왜 아프리카를 빠져나왔을까? 무엇보다 호모 속 장체가 다른 동물에 비해 행동반경이 월등히 넓다. 호모는 진화의 결고로 몸의 털이 사라지고 땀을 통해 체온을 조절하면서 장거리 이동이 가능해졌다. 이들은 자신의 장점을 충분히 살려 동물이 지칠때까지 쫓아다니는 사냥전략을 즐겨 사용. 그 과정에서 아프리카 대륙을 빠져나온 종이 호모 에렉투스다. 유라시아로 진입한 호모 에렉투스가 저 멀리 인도네시아까지 도달한 것만 봐도 호모의 이동능력과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얼마나 특출난지 알 수 있음. 이후 70만년 전에는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가 아프리카에서 유라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감. 유라시아로 이동한 하이델베르겐시스로부터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이 나옴. 한편 현생인류 호모 사피엔스는 아프리카에 어물러 있던 하이델케르겐시스에서 분기했다.
호모 사피엔스 또한 호모 에렉투스와 같이 호기심이 많고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종이었다. 대략 13만년 전에 마지막 간빙기인 이미안 간빙기가 지구에 도래하면서 아프리카는 습윤해졌고 사하라 사막 면적은 축소됨. 사막이 초지로 변하자 동아프리카의 사피엔스는 새로 생겨난 초원길을 따라 이동하여 북쪽의 시나이 반도 부근 그리고 남쪽의 바브엘만데프 해협에 도착. 당시 해수면은 빠르게 상승중이었으나 홍해 남북으로 아라비아 반도와 아프리카 대륙은 여전히 육지로 연결되어 있어서 이들은 쉽게 아프리카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세차운동으로 대력 2만-2만 5000년 주기로 기후가 습윤해질 때마다 새로운 사피엔스 집단이 초원길을 따라 아프리카를 빠져나감

- 기후변화의 리듬에 따라 다양한 사피엔스 집단이 아프리카를 떠나 유라시아에 진출. 그러나 7만 4000년 전 엄청난 규모의 화산폭발로 기온이 떨어지자 지구상의 사피엔스 수는 급감.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에 있던 대형 화산 토바가 폭발한 것. 사피엔스뿐 아니라 다른 구인류들도 큰 피래를 봄. 이후 대략 6만년 전에 상대적으로 화산폭발의 영향을 덜 받았던 아프리카에서 새로운 사피엔스 집단이 다시 빠져나와 유라시아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감. 네안데르탈인과 데니소바인은 그 과정에서 멸종됨. 이 경쟁에서 승리한 사피엔스 집단이 지금 현생인류의 직접적 조상이다.

- 동쪽으로 이동한 집단의 석기문화가 상대적으로 뒤처졌는지 몰라도 이 집단의 새로운 환경에 대한 적응력은 매우 뛰어났음. 이들은 강성한 세력을 유지하면서 동남아와 오세아니아에 자리잡고 있던 선배 사피엔스와 데니소바인 집단을 무력화하며 빠른 속도로 퍼져나감. 농경민과 달리 수렵채집민들에게는 노예가 필요없다. 이동에 방해만 된다. 그들을 살려두면 언제 반격을 가할지 모르는 다른 계통의 수렵채집민들을 가차없이 제거하며 전진했다.

- 순다랜드에서 사훌랜드로 건너온 사피엔스가 바다를 건너는 대모험에는 성공했는지 몰라도 유전자 확산 측면에서 보면 이는 패착에 가까웠다. 동쪽으로 이동하여 순다랜드에 도착한 무리 중 남쪽이 아닌 북쪽으로 올라갔던 사피엔스가 결국 넓은 동아시아 전체를 장악했기 때문. 빙기라는 차가운 시기에 따뜻한 곳이 아닌 추운 곳을 택한 선택이 오히려 경쟁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 것. 생존이 힘든 환경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혁신을 거듭해야 함. 반면 남쪽으로 내려간 무리는 태평양 연안과 좁은 섬에서 고립되었기에 세력을 넓히고 싶어도 한계가 있었다. 열대의 안락한 환경 속에서 안정적 삶을 영위하다 보니 변화에 대한 이들의 적응력은 차츰 무뎌짐
순다랜드 북부에서 북쪽을 향해 전진한 사피엔스 무리는 동아시아 곳곳에 자리잡은 후 점차 분화됨. 과거 동아시아에서 분기된 여러 무리 가운데 한반도인의 형성과장에서 유전적으로 크게 기여한 몇몇 집단이 있다. 구석기 시대에는 티안유안, 조몬, 아무르강 집단이, 신석기 시대에는 아무르강, 랴오허강, 황허강, 양쯔강 집단이 바로 그들이다.

- 다지역 기원설은 아프리카 기원설가 대척점에 있다. 아프리카 기원설은 주로 유전학자가 주장하는 반면, 다지역 기원설은 고인골 형태를 연구하는 형질인류학자가 지지. 다지역기원설 옹호자들은 호모에렉투스가 대략 200만년 전에 아프리카를 빠져나와 전 세계로 퍼져나간 후 각기 다른 지역에서 호모 사피엔스로 개별진화했다고 주장. 그리고 그 이후 각 지역의 사피엔스들이 활발하게 교잡하여 유전적으로 균질한 지금의 인류가 출현했다고 봄. 호모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이나 데니소바인과도 교잡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다지역기원설 역시 재고할 가치는 있다. 이 두 구인류를 기원이 다른, 즉 아프리카 기원과 관계가 없는 또 다른 호모사피엔스로도 볼 수 있기 때문.

- 농경은 부족함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니면 풍족함이 그 배경이었을까? 농경은 매우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하는 작업으로 인류가 성공한 최초의 혁신이라 일컬어짐. 농경은 인간사회뿐만 아니라 지구 생태게까지 뒤흔든 대변화였음. 여유로움 속에서 해도 안 해도 그만인 몇차례의 실험만으로 그 어려운 혁신이 완성되었을 것 같지는 않다. 먼 과거에 일어난 사건의 인과관계를 정확히 알 방도는 없음. 그러나 반드시 성공해야 하다는 절박함이 농경문화의 창출로 이어졌으르 가능성이 더 높지 않을까?
단어가 주는 느낌과 달리 혁신에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함. 장기간에 걸쳐 수많은 아이디어들이 축적된 상태에서 새로운 사고가 방아쇠를 당길 때 혁신이 일어남. 근동의 나투프인들은 뵐링-알레뢰드기의 풍요로움 덕에 정착생활을 즐겼고, 초기 농경과 관련된 다양한 지식을 체득. 이런 지식은 먼 훗날까지 면면히 이어짐. 그러나 대부분 파편화되어 수천년 동안 영향력이 낮은 단순정보에 머물러 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기후변화의 곤경에 처한 인류가 생존을 갈구하다가 그때까지 전해져 내려오던 단편적 지식을 모아 폭발력 있는 혁신을 이끌었다면? 상당히 그럴듯하게 들리지 않는가.

- 한반도에서는 홀로세 기후 최적기가 7600-4800년 전에 도래. 북반구 여러지역에서 초기문명들이 나타나 발전하던 시기와 엇비슷함. 기후가 온난 습윤해지자 전체 산림 면적인 이전 시기에 비해 늘어났고, 나무의 밀도도 높아짐. 최적기의 기후가 뚜렷한 변동없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며 한반도 생태계의 극상종인 참나무 비중이 증가. 대신 교란이 잦은 조건에서 경쟁력을 가진 소나무와 풀은 감소. 온난습윤한 환경 속에서 도토리와 같은 열매, 야생동물, 어패류 등 먹을거리가 풍부해지자 수렵채집민의 이동반경은 줄어듬. 한반도에서는 대략 5500년 전부터 정착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
최적기에는 전체적으로 온난습윤한 환경이 조성되면서 세계 곳곳에서 초기 문명이 발생하고 인구가 늘어남.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홀로세 기후 최적기가 끝나는 순간부터 여러 사회가 뚜렷한 변화를 겪었다는 사실이다. 흥성하던 문명과 집단이 갑작스러운 쇠락을 겪고 사회 구성원들이 대규모로 이동하기 시작. 빈번한 이주는 집단 사이의 갈등으로 이어졌고, 소멸한 기존문화를 대신해 새로운 문화가 들어섬. 중국 양사오 문명화 훙산 문명이 모두 이때 무너짐. 메소포타미아의 우르크가 약해지고 얌나야 유목민이 중앙아시아에서 유럽을 진격하여 농경사회를 제압한 시기도 이때다. 최적기가 끝나고 나타난 기후 악화가 이런 사회변동의 배경이었을 가능성이 큼. 물론 인구증가, 내부갈등, 전염병, 전쟁 등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사회의 혼란과 이주를 초래한 여러 다양한 요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과거를 돌아보면 이와 같은 문제들은 늘 급격한 기후변화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았다.

- 홀로세 후기 기후변동은 대략 500년 주기로 나타났는데, 주기가 항상 500년으로 일정했던 것은 아님. 대략 400-600년까지 차이를 보임. 이유는 홀로ㅗ세 후기의 기후변화를 주도한 것은 저위도 태평양의 해수흐름으로, 이 흐름은 500년 주기의 태양활동이 조절했다. 그런데 여기에 태양활동과는 관계없는, 즉 화산활동, 온실가스, 피드백 등 다른 요인들이 추가로 영향을 미침. 200년의 차이는 이런 연유에서 비롯됨.
약 4600-4700년 전 홀로세 기후 최적기가 끝났고, 약 4200-3900년 전에 전 세계 여러 문명이 동시에 무너짐. 약 3700년 전에는 전차를 보유한 힉소스의 남진으로 이집트 중왕국이 멸망했고, 약 3200년 전에는 해양민족의 침략으로 지중해 동부 청동기 문화가 붕괴. 약 2800-2700년에는 4.2ka 이벤트에 버금가는 기후변동이 발생해 중국이 춘추전국 시대의 혼란으로 빠져듬. 약 2300년 전에는 한반도에서 벼농경 문화가 크게 쇠락하였고, 약 1700년 전에는 중국의 한나라가 멸망하고 위촉오 삼국시대의 격변기로 접어듬.
이어 약 1200년 전에는 멕시코 중부 고지대의 테오티우아칸 문명이 가뭄에 큰 타격을 입었고, 약 600년 전에는 유라시아에 흑사병이 돌아 1억명이 넘는 사상자가 발생. 가장 최근인 150년 전에는 흑점수가 감소하여 북반구 전역에 흉년이 들고 전염병이 돌았다.
- 홀로세 후기에 400-600년 주기로 기후가 악화된 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개개의 역사적 사건에 당시 기후변화가 어느 정도로 기여했는지 파악하는 것은 어려움. 기후변화의 영향력이 컸던 사건도 미미했던 사건도 있을 것임. 어쨌든 기후가 변했을 때 사회변동이 일어났다면 기후변화의 영향을 깊이 있게 실펴보는 것이 맞다. 기후변화가 사회변동을 촉발한 방아쇠였을 수도 있고 사회변동의 속도를 높인 박차였을 수도 있다. 혹은 이미 다른 내부요인으로 무너져가던 사회에 기후변화가 최후의 일격을 가한 것일 수도 있다.
 
- 유럽, 인더스계곡, 페르시아, 동북아 등 북반구 대부분의 지역에서 인구집단이 이동하고 섞이는 과정은 엇비슷했다. 마지막 빙기말 수렵채집민들이 지구 대부분의 지역으로 빠르게 퍼져나감. 추운 빙기가 끝나고 온난한 홀로세로 접어들며 농경이 시작되었고 인구는 증가. 인구압박에 못이긴 농경민은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섰고 그 과정에서 만난 수렵채집민을 인구수를 앞세워 제암. 한편 내륙의 건조한 초원으로 이동한 농경민은 작물재배를 포기하고 유목생활에 집중. 말을 능숙하게 다루게 된 유목민은 기후가 나빠져 먹을 것이 부족할 때마다 기동성을 살려 정주사회를 공략하고 무너드림. 점령지에서 유목민은 정주민의 생활방식을 따르는 경우가 많았고 유목문화는 점차 위력을 잃어감. 이 일련의 과정에서 수렵채집민, 정주농경민, 유목민의 유전자는 복잡하게 섞임.

- 최적기의 따뜻한 기후와 참나무 원시림은 한반도의 수렵채집사회가 성장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수렵채집민들은 도토리와 같은 열매나 야생동물, 어패류 등을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었다. 과거와 달리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멀리 움직일 필요가 없다보니 이들의 이동반경은 지속해서 감소하였고, 결국 해안이나 하천을 중심으로 정주하는 문화가 나타나기 시작. 한반도의 탄소연대자료를 모아 시기별 주거지수를 추정한 연구결과는 대략 5700-5500년전부터 인구가 증가하고 정착 수렵채집민의 수가 증가했음을 잘 보여줌
이 때는 북방의 랴오허 유역이나 랴오둥반도에서 한반도로 조, 기장 농경ㅁ누화가 처음 전파된 시기와 가까움. 최적기의 온화한 기후 덕에 정주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던 수렵채집민 중 일부가 남들보다 먼저 농경이라는 새로운 실험을 시도했음. 먹을 거리는 풍부했으므로 실패에 대한 부담은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다. 조, 기장, 팥, 콩 등 초기농경은 들이는 시간에 비해 얻는 것이 그리 많지 않았지만 야생 먹거리가 부족할 때 보조생계수단으로 요긴했음. 농경이 시작된 후에도 주거지 수가 크게 늘지 않았음을 고려할 때 최적기에 조나 기장재배가 본격적인 농경으로 이어지지는 않은 것으로 보임. 그러나 농경이라는 새로운 문화가 더해지며 수렵채집민의 삶이 더욱 풍족해졌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음.

- 최적기가 끝나고 청동기 시대에 들어오면서 기온과 강수량이 차츰 하강곡선을 그리기 시작. 주기적으로 한랭기가 닥칠 때마다 동아시아 전역에서 연쇄적 난민 행렬이 이어졌고 한반도로도 외지인이 들이닥침. 외부 이주민들은 갈등과 혼란을 가져오면서 기존사회의 기반을 약화하는 주범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농경, 야금, 토기제작, 직조술 등 북방 선진문화 또한 전해주었기 때문에 한반도 사회가 발전하는 데 도움이 됨. 한반도 청동기 시대는 벼 농경이라는 신문물이 도입되어 인구가 급성장하는 때. 다른 한편으로 기후의 전반적 악화로 잦은 이주와 사회갈등으로 점철된 시기이기도 함.

- 북방의 농경집단은 농경뿐 아니라 목축과 수렵채집을 함께 영위하며 제너럴리스트의 삶을 살았다. 저위도에 비해 생산성이 현격히 떨어지는 북방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생계방식이 요구되었기 때문. 계절별로 기온차이가 무척 큰 대륙성 기후는 적응력과 기동성이 떨어지는 집단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거친 북방땅에서 경쟁력이 처지는 집단은 따뜻한 남쪽 땅을 끊임없이 갈구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기후가 악화될 때면 여지없이 남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남쪽에 내려와서는 농경에 집중하면서 제너럴리스트의 생활방식을 버리고 스페셜리스트의 삶에 자연스레 동화되어 갔다.
북에서 밀려내려오는 사람들로 한반도의 인구밀도는 차츰 높아짐. 특히 기후가 출렁거릴 때 북방의 이주물결은 세차게 몰려왔고 인구의 섞임은 반복됨. 동시에 제너럴리스트 집단이 엄혹한 북방 땅에서 생존을 위해 일군 여러 혁신 문물이 빠짐없이 남쪽 한반도로 전해짐. 작물, 언어, 말, 금속 등과 관련된 문화는 모두 북에서 비롯하여 한반도로 내려왔고 바다 넘어 일본까지 건너갔다. 북방의 문화는 밝은 햇살이 가득한 남쪽 당에서 다양하게 변주되며 꽃을 피웠다. 차가운 북방문화의 잠재력이 온화한 남방에서 폭발한 것이다. 기후 변화에서 비롯된 인간집단과 문물의 이동은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왕조들이 중국 왕조에 크게 뒤지지 않는 자신들만의 고유한 문화를 구축할 수 있었던 주된 요인이었다.

- 얌나야 집단에서 시작된 유목문화는 서유라시아에서 히타이트와 스키타이로 이어짐. 이들은 유목민의 장점인 제련술과 기마술을 발판으로 철기 기마민족의 정체성을 발전시킴. 홀로세 기후 최적기가 끝난 4900년 전 이후 사방으로 확장한 얌나야, 3700년전경부터 나타난 중기 청동기 저온기에폰틱-카스피해 초원에서 남하하여 아나톨리아에 정착한 히타이트, 2800년 전경부터 시작된 철기 저온기에 중앙아시아에서 서쪽으로 이동한 스키타이는 모두 광활한 유라시아 초원지대에서 유목생활을 하다 기후변화에 자극받아 따뜻하고 물이 풍부한 지역을 찾아 이동했다. 얌나야, 히타이트, 스키타이. 대략 1000년 간격으로 출몰하여 유럽과 중동의 정착민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유라시아 기마민족은 이후에도 1000년을 주기로 살벌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1600년 전에 나타난 훈족과 700년 전에 나타난 몽골족이 그들이다.

- 주나라의 봉건제도가 붕괴한 후 기원전 400년부터 기원전 250년까지 매서운 추위가 이어짐(2.3ka) 주나라가 멸망한 후 치열한 경쟁끝에 살아남은 진, 조, 위, 한, 제, 연, 초의 전국칠웅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전쟁을 거듭하였다. 이른바 전국시대라 불리는 시기. 보통 기후여건이 나빠져 흉년이 들고 전염병이 돌면 내부의 불만화 갈등이 폭증하게 마련. 왕권에 대한 욕심도 있었겠지만 일곱나라 모두 부족한 자원을 확보하고 내부의 분열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전쟁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이들 가운데 중국 동북부에 터를 잡고 중원 이남 여섯나라와 세를 겨루던 연나라는 배후의 고조선이 항상 꺼림직했다. 고조선은 요동뿐 아니라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점유한 강성한 국가였고 당시 인접국인 제나라와도 외교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나라 입장에서는 입의 가시같은 존재였다.
연나라는 기원전 315-312년 전 제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망국의 위험에 처한 적이 있어 제나라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제나라와 제대로 붙어 싸우려면 일단 후방의 군사적 위협부터 제거해야 했다.
고조선과 연나라의 전쟁은 기록으로 남아 있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전쟁으로 발발연대를 기원전 300-290년 정도로 봄. 연나라는 고조선을 침공하여 제압하는 데 성공. 고조선의 전력으로는 당시 진개라는 걸출한 장수가 이끈 연나라 군에 맞서 싸우기에 역부족. 더구나 연나라는 수년 전 고조선 동북쪽 동호와의 전쟁에서도 이미 승리를 거둬 사기가 높은 상태였음. 고조선은 이때의 패배로 세력이 위축되어 한반도 서북부로 쫓겨났고 동시에 다수의 유민이 한반도로 이주하여 남쪽 지방에서 부족사회를 이루게 됨.

- 철기 저온기 내내 북방민이 추위와 갈등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한반도 남부에서는 외부인과 토착민의 갈등이 끊이지 않음. 사회는 혼란스러웠고 인구는 쉬이 늘지 않았다. 500-600년 간 이어지던 추위가 마침내 끝나고 20200년전부터 기온이 회복되는 추세를 보임. 무엇보다 강수량의 증가가 뚜렷했다. 철기 저온기 내내 감소하던 강수량은 2200년 전을 기점으로 방향을 바꿔 상승하기 시작. 
2200년 전에서 200년간 비교적 높은 기온이 유지되면서 한반도 사회는 안정을 되찾는 것으로 보임. 하지만 연나라에서 망명한 위만이 기원전 194년 고조선의 준왕을 배신하고 난을 일으켜 왕권을 찬탈하는 일이 벌어짐. 위만에 밀린 준왕은 바다를 통해 전북 익산지역까지 내려옴. 만경강 유역에 터를 잡고 새로운 사회를 조직하여 선진문물을 전파. 계층은 분화되고 권력은 집중되었다. 기후 여건 또한 이전에 비해 한결 나아졌기 때문에 인구는 증가하기 시작.

- 한반도에서 전반적으로 기온이 떨어지던 기원 원녕르 전후한 시기와 3세기경 북방에서 소규모 집단들이 남부로 이주하기 시작. 고구려 유민 온조세력은 남쪽으로 내려와 기원전 18년 한강 하류에 자리잡고 위례성을 축조. 또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의하면 기원후 42년경 경남 김해에 일군의 사람들이 도착하여 김수로를 왕으로 옹립하고 금관가야를 세움. 온조집단과 김수로 집단 모두 북방의 선진문물을 앞세워 토착세력을 누르고 어르면서 지역의 지배권을 거머쥐었을 것임. 당시 한반도 남부에 거주하던 토착민들은 이전에 내려와 정착한 고조선 유민들의 후손들로 보임. 북방에서 내려오는 이들은 농경이나 전쟁에 유용한 최신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토착민과의 경쟁에서 남해안을 중심으로 패총이 확산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당시 기온하강으로 농업생산성이 낮아지자 먹을 것을 찾아 내륙에서 해안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 기후 여건이 좋지 않을 때는 날씨에 민감한 농사에 매달리기보다 해안가에서 어로나 채집활동 비중을 높여야 먹을 거리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

- 문화는 전성기를 향해 달리고 인구는 눈에 띄게 불어났다. 주변 환경이 심하게 교란되며 생태계 회복력이 떨어진다. 이때 대응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폭의 기후변화가 갑작스레 나타나면, 이동이 쉽지 않은 정착민 집단은 유목민이나 수렵채집민들보다 훨씬 타격이 크다. 기후변화는 곧 식량위기로 이어지고 굶주림은 면역력을 저하시킨다. 집단에 전염병이 빠르게 확산하면서 인구가 급감. 인구감소로 사회활력이 급속히 떨어진다. 세금이 걷히지 않으니 사회 안전망이 무너지며 지배층에 대한 불신은 팽배해짐. 물자가 부족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의 것을 약탈하는 제로섬 싸움이 만연. 내부갈등은 더욱 심화되고 민란이 연이어 발생함. 마지막까지 버티던 사람들도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고향 땅을 등지고 끝내 떠나고 만다. 예전의 화려함은 온데간데 없이 이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 황량한 땅으로 변한다. 문화가 발달하고 쇠락하는 과정은 지역을 막론하고 유사함. 이는 인간행동양식의 단일성을 보여준다.
지배층이 통찰력과 정치적 감각을 가졌다면 예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사전에 계획하고 움직이고자 할 것이다. 이때 가장 손쉽게 택하는 방안은 침략이다. 기후변화가 식량위기로 번질 조짐이 보이면 아마 전쟁을 서둘렀을 것이다. 이웃나라로 쳐들어가 우선 부족한 물자부터 확보해야 사람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기 전에 불씨를 잠재울 수 있다. 과감한 계획이 성공을 거둔다면 위기는 곧 기회로 이어짐. 지배층은 탄탄한 지지를 발판으로 자신의 나라를 강고하게 유지하는 동시에 전쟁을 통해 국세를 확장하려는 원대한 뜻을 품게 된다.

- 기후변화는 더 나은 땅을 쫓는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고 내부갈등을 일으키며 외부세력과의 전쟁을 유도. 홀로세기후 최적기가 끝난 후 동아시아 각 지역사회는 잦은 기후변화에 시달림. 농경이 집약적으로 이뤄지기 전, 기후가 변화하는 조짐이 보일 때문 수렵채집민이나 유목민뿐 아니라 정주 농경민 역시 과감하게 이주를 감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작물생산량과 노동투입의 선순환으로 농경사회 규모가 확대되자 위기가 빤히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정주민들은 이주를 주저하였다. 기후변화의 충격은 배가될 수 밖에 없었다. 자원을 두고 벌이는 외부집단과의 경쟁은 가열되었고 계층간 내부갈등은 심화됨. 정주생활이 시작된 후 기후위기에 힘겹게 버티는 시간만 조금 늘어났을 뿐 결국엔 역부족이라는 현실을 실감하고 이내 새땅을 찾아 움직이는 일이 반복됨. 지역 부족들이 뭉치고 중앙집권체제를 갖춘 국가들이 나타나자 기후 변화의 여파는 사람들의 이주로 마무리되지 않았음. 대부분 큰 전쟁으로이어졌다. 전쟁의 패잔병과 난민은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다른 곳으로 피난을 떠나야 했다.
동아시아에 호모 사피엔스가 들어오기 시작한 4만년 전부터 고구려가 남진을 거듭하던 대략 1500년전까지 한반도에서 이주의 물결이 멈춘적은 거의 없다. 그 대부분은 기후변화와 식량위기가 어둡게 그늘을 드리운 곳에서부터 시작. 

- 약 8200년전 추위를 피해 아무르강 유역에서 내려온 수렵채집민 집단, 중기 청동기 저온기와 약 3200년 전 산둥, 랴오둥, 랴오시 등에서 이주한 농경민 집단, 철기 저온기에 랴오시와 랴오둥에서 남하한 점토대토기 문화집단, 중세 저온기에 북방에서 내려온 고조선과 부여 유민이 혼합하여 현대 한국인으로 이어짐. 여기에 조금 더 덧붙이면 8200년전 아무르강 수렵채집민이 내려올 당시 한반도에는 만빙기 때 북방으로 돌아가지 않고 눌러앉은 토착집단이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또 한반도 남부에는 조몬 수렵채집민도 살고 있었다. 홀로세 기후최적기에는 랴오시 지역에서 소규모의 기장 농경민이 한반도로 내려왔을 가능성도 있음. 특히 중세 저온기 초반부에 내려온 고저선과 부여의 유민이 현대 한국인에 유전적으로 크게 기여했을 것으로 추정됨. 고조선의 준왕세력, 황허강 집단의 유전성분이 높은 위만조선의 유민, 선비족과 고구려에밀린 부여 유민이 꾸준히 한반도 남부로 이주하며 기존의 삼한사람과 섞임. 물론 이외 수많은 인적 이동이 과거 한반도인의 형성에 관여했을 것임.
대부분 중요한 이주는 한랭화가 진행될 때 발생. 그러나 기후변화와 관계없이 움직인 소규모 무리도 분명 존재했을 것임. 기온이 떨어지는데 오히려 북쪽으로 이동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기온이 온화한 시기임에도 다른 땅을 찾아 더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임.

- 온난화가 계속 이어진다면 결국 지구는 티핑포인트를 넘어 과거에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기후조건인 초간빙기로 들어설 것임. 그후 상황은 예측하기 어렵다. 조금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아마도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생태계가 기능을 상실하면서 인류의 인구는 큰 폭으로 감소. 생존한 사람들은 고온과 가뭄을 이겨낸 적응력 높은 동물과 자원을 두고 경쟁해야 함. 저위도 사람들은 중위로로, 중위도 사람들은 갈등을 피해 고위도로 이동하는 도미노같은 이주와 갈등이 이어짐. 저위도의 가난한 나라들은 기후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사라지고 이곳은 곤충이나 파충류의 땅이 될 것임. 본격적을 초간빙기로 향하며 기온이 빠르게 높아지고,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지역은 고위도 일부 지역으로 제한됨. 하지만 인류는 이 흐름을 저지할 방법이 없다. 끔찍하지만 가능한 시나리오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향신료 전쟁  (0) 2025.01.14
한국사는 없다  (0) 2025.01.09
제국의 탄생과 몰락  (2) 2024.12.12
5개 원소로 읽는 결정적 세계사  (4) 2024.12.10
역사의 쓸모  (1) 2024.11.14
Posted by dala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