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구상에 연이어 발생한 가지 포괄적 인간 가치 체계를 차례로 소개한다. 나는 셋 중 가장 먼저 발생한 가치 체계를 '수럽 채집 가치관'으로 부른다. 이 가치관은 야생식물을 채취하고 야생동물을 사냥하는 것을 주요 생산수단으로 삼은 사회와 결부된 가치관이다. 수렵채집인은 위계가 없지는 않지만 위계보다 평등을 중시하고, 폭력에 상당히 너그럽다. 두 번째 가치 체계는 '농경 가치관'이다. 이 가치관은 주로 작물을 재배하고 가축을 길러서 생활하는 사회와 결부된다. 농경 민은 평등보다 위계를 중시하고, 폭력에 덜 관대하다. 세 번째 가치 체 계는 '화석연료 가치관'이다. 이는 석탄, 천연가스, 석유의 형태로 화석 화된 죽은 식물의 에너지를 추출해서 살아 있는 동식물의 에너지를 증 강하는 사회와 결부되는 가치관이다. 화석연료 이용자는 아직 불평등하 지만 위계보다 평등을 중시하고, 폭력을 용납하지 않는다."
- 인간의 핵심 관심사는 인간 종의 가장 가까운 친척인 유인원과도 얼마 간 공유되고, 심지어 돌고래 및 고래와도 일부 공유된다. 인간 가치관은 적어도 얼마간은 유전적으로 내장되어 있다. 이런 맥락에서 생물학자 에드워드0. 월슨rdward Osbome wilkton은 40년 전 이렇게 제안했다.'윤 리를 철학의 품에서 일시적으로 떼 내 생물학적으로 따져 봐야 할 때가 온 건 아닐까? 이 가능성을 과학과 인문학이 함께 고려해야 한다."251) 윌슨의 제안에 대한 고려는 지금까지 주로 과학계에서 이루어졌다. 과학자들은 우리가 공평과 정의 같은 핵심가치를 유인원 조상에게서 물 려받았음을 설명하는 데 많은 진전을 이문 반면, 인문학자들은 뭔가를 생물학적으로 따지는 데 현저히 열의가 없었다.2이 그래서 그런지 인간 가치관이 지난 2만 년에 걸쳐 어떻게 진화해 왔는지, 그리고 공평과 정 의 등이 의미하는 바가 시대와 지역에 따라 어째서 그렇게 엄청난 차이 를 보이는지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 많지 않았다. 학계가 인간 가치관 의 생물학적 뿌리를 설명해 낸 것은 분명 중요한 업적이다. 하지만 그것 은 가치관의 진화를 설명하는 첫걸음을 멘 것에 불과하다. 두 번째 걸음은 인간이 생물학적 진화 과정에서 문화를 창조할 지력 체을 부여받은 유일한 동물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여기서 지력이 란, 교육과 모방 등의 전파 방법을 통해 우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획득하는 누적 정보를 말한다. 우리의 도덕 체계는 문화적 적응의 산물이다. 환경 변화에 따라 생물학적으로 진화하는 것은 인간이나 다른 생명 제나 마찬가지지만, 문화적으로 진화하는 것은 인간이 유일하다. 인간 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변하면 그 안에서 자신의 유용성을 유지하기 위해 (또는 심지어 강화하기 위해) 행동 방식과 제도를 바꾼다."
- 빙하기가 끝난 이후 인간의 환경에 일어난 최대 변화는 에너지 획 득량의 폭발적 증가였다. 우리는 이 사건들을 흔히 농업혁명agricullural revolution과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으로 부른다. 이것이 인류사의 3대 가치 체계가 3대 에너지 획득 방식과 대체로 겹치는 이유다. 1940년대에 인류학자 레슬리 화이트Leslie White는 역사 전체가 하나의 간단한 공식으로 축약된다고 했다. C=ExT. 여기서 C는 문화culture고, E는 에너지energy, T는 기술 technology이다.체 화이트의 결론은 이렇다. "문화는 세 가지 경우에 발달한다. 1인당 연간 에너지 추출량이 증가할 때, 또는 이 에너지를 일에 투입하는 기술적 수단의 효율성이 증가할 때, 또는 앞 의 두 가지 요인이 동시에 증가할 때." 화이트가 근래에 인기가 떨어지긴 했지만 나는 이 책에서 화이트가 대체로 옳다는 것을 논증할 생각이다. 지난 2만 년 동안 인간의 에너지 추출량이 가파르게 상승했고, 이것이 문화적 진화를 추진했다. 그리고 그 과정의 일부로 인간 가치관이 변했다. 가치 체계를 이런 맥락에서 보면, 그 끝에는 시대의 필요가 생각을 정한다는 결론이 기다린다. 이것이 내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바다.
- 기술과 규모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수렵채집 집단은 상당히 생산적 이다. 야생 자원에 비해 인구밀도가 낮고 기동성이 높은 경우 수럽채집인은 뼈빠지게 일하지 않아도 활동적 성인이 매일 필요로 하는 식품에 너지 1,500~2,000킬로칼로리를 거뜬히 확보한다. 심지어 북미 남서 부처럼 불리한 환경에서도 수럽채집 활동에 소비하는 시간은 일평균 2~5시간에 불과하다. 인류학자 마샬 살린스Marshall sahlins가 수렵채집 사회를 '최초의 풍요 사회'original amluent socicty로 지칭한 것은 이런 맥락이었다. 그러나 '최초의 풍요 사회'는 도발적인 명칭인 만큼이나 모호한 개념 이다. 수렵채집 방식은 상대적으로 적은 노동으로 식량을 제공하지만 다른 물자를 제공하는 데는 그만큼 효율적이지 못하다. 이에 대해 살 린스는 수럽채집인은 물질주의자가 아니므로 그 점이 '풍요 사회' 가설 을 무효화하지는 않는다고 반박했다. "세상에서 가장 원시적인 사람들 은 물자를 거의 소유하지 않는다. (~) [그렇다고] 그들이 가난한 것은 아니다."3리 하지만 일부 인류학자들은 전혀 다른 입장을 취한다. 이들은 우리 시대 수럽채집인이 사실상 빈민임을 인정한다. 다만, 그 궁됩은 수 렵채집이 에너지 획득 방법으로 비효율적인 탓이 아니라 농경 사회와 화석연료 사회의 착취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 수렵채집 집단에도 뽑질문화가 있다. 다만 그 세련됩과 부유함의 정도는 집단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인다. 선사시대 일본의 조몬Jomon 족이나 북미 태평양 연안의 과키우들Kwakiull 족처럼 대규모 정주생환 집단은 가장 윤택한 축에 들고 극한 환경에서 매우 작은 규모로 항상 이동하며 사는 집단은 가장 빈궁한 축에 든다. 하지만 고고학 출토 유물, 근대 이전 문헌자료, 민족지 등의 모든 사료가 같은 결론을 가리킨다. 시대를 막론하고 가장 풍요로운 수럽채집인조차도 농경 사회의 기준으로 보면 빈곤하고, 화석연료 사회의 기준으로 보면 매우 빈곤하다. 더 중요한 문제도 있다. 가장 풍요로운 수럽채집 사회도 식량 조달이 원활하지 못한 시기를 겪기 마련인데, '풍요 사회'라는 명칭은 이 점을 가리는 면이 있다. 집단에 따라서는 (뚜히 상대적으로 규모가 크고 정주 기간이 긴 집단들은) 어려운 시기에 대비해 식량을 비축하는 재간을 발휘하지만, 다른 집단들은 그렇지 못하다. 수럽채집인은 정기적으로 식량 결핍을 겪고, 그에 따라 (현대의 기준에 비하면) 건강 상태도 나쁘다. 이들의 기대수명은 보통 20대 중반에서 30대 중반이다. 간혹 70대까지 장수하는 사람도 있지만, 신생아의 절반이 보통 15세 이전에 죽고, 실아남아 어른이 되어도 대개 40세 이전에 죽는다. 전반적으로 말해서 수럽채집 집단은 야생 자원으로 생존하기 위해 구성원을 아주 적게 유지한다. 이는 기동성과 부양 능력을 고려한 전략적 인구 억제 노력에 따른 것이 아니다. 인구 급중과 굶주림이 반복되는 호황-불황 순환boom and bust cycle에 따른 것이다.
- 정치적.경제적 위계의 느슨함처럼 성별 위계와 혼인 관계의 느슨함 도 수렵채집이라는 에너지 추출 방식에서 비롯된 결과적 속성으로 보인 다. 여자가 채집하는 식료는 건강과 생존에 필수적이다. 야생 식물이 식 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열대지방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공유정 신 덕분에 대개는 집단 구성원 모두가 식물 식료에 공평한 접근권을 행 사한다. 수렵채집 사회의 남자가 농경 사회 남자보다 여성 통제에, 특히 여자의 성 활동 통제에 상대적으로 무심한 이유는 수렵채집인은 농경 인에 비해 상속할 것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수렵채집 사회에서는 누구 를 부모로 두었든 야생 식료에 모두 공평하게 접근권을 가진다. 물질적 성공은 대물림할 수 있는 물리적 재산보디는 사냥하고 채집하고 연합하 는 능력에 달렸다. 따라서 적자가 땅과 재산의 상속권을 가지는 사회에 비해 자식의 친자했 여부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여자를 사이에 둔 남자들의 다툼이 폭력으로 번지는 빈도는 농경 사회보다 수렵채집 사회가 높다(화석연료 사회에 비하면 더욱 높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인류학자들도 있는데, 그런 학자들은 수럽채집인 남자가 여자를 놓고 싸우는 것은 '사실상' 음식과 영역에 대한 분 쟁이며, 여자 문제는 보다 뿌리 깊은 경쟁 관계를 표출하는 구실에 불 과하다고 주장한다. 정말로 그런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수렵채집 사회 폭력 행위의 원인을 여자 문제에 따른 남자 들의 다툼으로 본다. 당사자들의 한결같은 진술이 그러하므로 다르게 해석하기 어렵다. (아마존 북부에서 원시농경과 수렵채집을 병행하는) 야노마미 Yanomami 족과 와오라니waorani 족 사회에서는 폭력 성향이 강한 남자들이 그렇지 않은 남자들보다 섹스파트너와 자녀가 많다는 증거가 수집되기도 했다.
- 수렵채집처럼 농경도 발생 장소와 발생 시기가 대중은 알려져 있다. 발생 장소는 고고학자들이 '측면구룽지대 Hilly Flanks라고 부르는 곳으로, 요르단 강 유역에서 터키 국경까지 둥글게 울 라갔다가 이란-이라크 국경을 타고 내려오는 활 모양의 땅이다. 발생 시기는 대략 1만~1만 5천 년 전으로 본다. 이후 농경은 지구 전역으로 퍼졌다. 하지만 농경의 확산은 속도와 규모, 철저함에서 수럽채집의 학 산과 큰 차이를 보였다. 현생 인류 수렵채집인은 아프리카를 떠나 지구상 살기 적당하고 접근 가능한 곳곳으로 퍼지는 데 (대략 기원전 7만~1만5천 년까지) 5만 년 이상 걸렸다. 그 과정에서 세계 인구는 (기원전 7만 년경에는 약 5만 명이었다가 기원전 1만 5천 년경에는 약 300만 명으로) 60배가량 늘었고, 고 인류는 지구상에서 완전히 멸종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농경민은 (대략기 원전 9500년에서 기원후 1500년까지) 불과 1만 1천 년 만에 지구상 살기 적당 하고 접근 가능한 곳을 구석구석 점렁했고, 그 과정에서 세계 인구는 약 500만 명에서 4억 5천 만 명으로 90배 증가했다. 수렵채집인은 멸종은 면했지만 기원전 9500년경에는 세계 인구의 99퍼센트를 점했다가 기원후 1800년에는 1퍼센트로 줄어들었다.의 농경민은 최소한 5천 년간 세계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했다
- 기원후 900년 무럽부터 기후학지들이 '중세 온난기'Medieval Warm Period라고 부르는 따뜻하고 습한 시기에 접어드는 데, 이 기간에 기근 발생이 줄어 인구가 꾸준히 늘었다. 인구증가가 곧 개인의 행복은 아니었다. 농경민은 같은 농지에서 더 많은 사람을 부양하고 척박한 땅까지 개간하느라 점점 더 힘들여 일해야 했다. 그러다 1346~1400년에 흑사병의 대유행으로 유럽 인구가 거의 절반으로 줄 면서 노동인력 대비 농지면적 비율이 극적으로 높아졌고, 이는 생존자 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15세기에 비숙련 노동자의 실질임금이 전 례 없던 수준으로 치솟았다. 그러나 인구가 다시 회복되면서 농경민 은 또다시 빠듯한 소출(수익)을 위해 뼈빠지게 일해야 했다. 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 지식인들의 전언에 따르면, 당시 농민은 그들의 시대를 비참함 그 자체로 인식하며 지나간 15세기를 여유와 케이크와 에일 맥주의 황금시대로 여겼다. 미국의 6대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 John Quincy Adams는 유럽에서 공사로 일하던 1800년에 집으로 보내는 편지에 당시의 농촌을 "진흙과 짚의 비루한 조합에 불과 하며 (~) [그 안에는] 누더기 차림과 해쏙한 얼굴의 비렁뱅이 종족이 살고 (.) 집집마다 아이들이 바글대는데 하나같이 거친 셔츠 한 장만 겨우 걸쳤거나 아예 벌거벗고 다니고, 몸에는 역병이 창궐하던 이집트 땅처럼 해충이 우글우글하다'"고 표현했다. 화석연료 세계에서 온 방문자의 눈으로 보면, 인구변동 주기의 가장 행복한 단계에 있을 때조차 농민의 삶은 인간의 삶이라 할 수 없을 만큼 비참하고 피폐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 농경 사회는 이처럼 수렵채집 사회보다 인구가 많고 부유했지만 부의 분배에서 불평등했다. 이는 농경이 복잡한 노동 분화를 요구하는 동시에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비약적 노동 분화의 가장 명백한 특징이자 결과는 가족 규모를 크게 뛰어넘는 경제활동 주체의 등장이다. 하지만 조직 확장을 논하기에 앞서 중요하게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수렵채집 사회에서처럼 농경 경제에서도 가족은 여전히 사회의 기본 구성요소이 자 생산단위였다. 다만 가족의 내부 구조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동인이 작용했다. 첫 번째 동인은 노동 자체의 변화였다. 수럽채집 사회에서 주로 여자는 식물 채집을 맡았고 남자는 동물 사냥을 맡았다. 성별에 따른 분업은 원시농경 사회에서도 거의 변하지 않았다. 사냥과 채집은 여전히 중요한 식료 확보 수단이었고 농사 일의 강도는 그다지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텃밭으로 이용할 수 있는 땅은 어디나 널려 있었고 노동력은 상대적으로 귀했다. 원시농경민은 남녀가 함께 괭이질을 하고 잡초를 뽑으며 넓고 얕게 일했다. 그러다 인구가 늘어나 노동인력 대비 가용 토지가 귀해지면서 사람들은 점점 더 땅을 집중적이고 집약적으로 일궜다. 처음에는 땅을 열심히 갈아서, 나중 에는 거름을 쓰고 관개수를 대는 방법으로, 그리고 노동 강도를 높여 가며 단위면적당 소출량을 있는 대로 짜냈다. 노동생산성 증대가 관건이 되면서 남자의 강한 상체 근력이 농사일에 중요해졌고, 사람들은 점차 바깥일을 남자의 일로 인식하게 되었다."
노동의 변화가 여성을 농사일에서 배제하는 중요한 동인이었다면, 여 성이 결정적으로 집에 매이게 된 두 번째 동인은 인구의 변화였다. 농경의 발명 이전에는 인구가 평균적으로 1만 년마다 두 배가 되었지만, 농경이 시작된 후부터는 인구가 배가되는 시간이 2천 년 이하로 뚝 떨어 졌다. 농부의 아내는 여성 수럽채집인보다 아이를 휠씬 많이 낳았다. 얼 마나 많이 낳았던지 어떤 선사시대 역사가들은 이를 두고 '신석기시대 판 인구전환론'demographic transition(인구중가를 경제사회적 발전의 성과로 보는 이론으로, 보통 19세기부터 최근의 인구동향 연구에 적용된다-옮긴이)을 말한다.' 농경 사회의 여성은 대체로 일곱 명의 아이를 낳았다. 성년의 대부분을 임신 상태나 수유 상태 또는 유아를 돌보는 상태로 보내는 셈이다. 육아와 농작을 병행하기는 매우 어렵다. 이렇게 인구 변화와 노동 패턴의 변화가 공모해서 결국 남녀의 영역을 바같일과 집안일로 분리했다.
- 농경의 논리는 다음의 이유들로 성별에 따른 노동과 공간의 분리를 지향했다. (1)농경민이 생산하는 식료는 수럽채집인이 모으는 식료보 다 복잡한 준비 과정(타작, 키진, 방기. 굽기 등)을 요했고, (2)농경민의 영구 정착용 집은 수럽채집인의 임시 거처보다 강도 높은 유지관리 및 청소 를 요했으며, (3)이런 활동들은 집에서 여자들에 의해 아이들 돌보는 일 과 병행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세계 모처의 농경민이 공통으로 도달한 결론은 남자는 들에 나가 일하고, 여자는 집에 남아 살림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원시농경 단계를 넘어선 농경 사회라면 백이면 백 같은 양상 을 보일 만큼 이 노동 분업 결정은 매우 견고하고 분명했다. 이 시리아의 아부 후레이라 유적에서 발굴된 162구의 유골을 조사한 결과, 기원전 7천 년경의 측면구릉지대에서 이미 성별에 따른 노동 재구 성이 진행되었다는 정황 증거가 나왔다. 남녀 모두 등 상부. 척추 뼈가 확장돼 있었는데, 이는 머리에 무거운 짐을 많이 이고 다녔던 탓일 가능 성이 높다. 그런데 유독 여자의 유골에서 독특한 관절염 흔적이 발견됐다. 무료을 바닥에 대고 않아 발가락을 이용해 힘을 가하는 자세를 장기간 취한 데 따른 외상인데, 곡식을 같고 빻는 노동 때문인 것으로 생각 된다.
- 인류학과 사회학 연구를 보면, 20세기 산업화 이전 농경 사회에서 전 형적으로 포착되는 특성이 있다. 그것은 농사일의 강도, 상속의 중요성. 여성의 성적 순결에 대한 남성의 집착 사이의 강한 상관성이다. 이것도 농경 논리에 따른 결과로 보인다. 수럽채집인은 어린이에게 영근 식 물과 사냥감, 안전한 야영지 찾는 방법을 가르치며 대대로 지식을 전수 한다. 하지만 농경민에게는 그보다 휠씬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상속 대상이 있다. 바로 물질적 재산이다. 농경 세계에서 떵떵거리고 살려면 집 과 경작지, 가축은 물론 우물과 담장, 연장을 보유해야 하고, 제초.급수. 개간 같은 개량농법도 확보해야 한다. 윗대로부터 물려받을 재산이 있느냐 빈손이냐의 문제는 말 그대로 생과 사의 문제다. 이렇게 걸려 있는 게 많다 보니, 농경민 남자는 자신의 재산을 물려받을 아이가 자기 자식이 맞는디는 것을 확실히 해 둘 필요를 느낀다. 수렵채집 사회는 정조 관념에 상대적으로 무심했지만, 농경 사회는 딸들의 혼전순결(1950년 대 이탈리아 남부 출신의 한 인유학자는 훈전순결윤 ' 상징 중의 상징'으로 일컬었다)과 아내의 혼외정사를 맹렬히 감시했다. 농경민 남자는 대체로 이미 유산을 상속받은 후인 30세 무렵에 결혼하는 반면, 농경민 여자는 대체로 아직 성경험 기회가 없을 때인 15세 무렵에 결혼했다.
- 기축시대 주요 사상가 중 다수(소크라테스 씻다르타, 조로아스터, 예수 등)는 생전에 글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이 정확히 무슨 생각을 했고 무 엇을 행했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인간이 정진할 목표에 대한 전반적인 관점은 서로 비슷했다. 인간은 이승의 불결과 타락과 덧없음에서 벗어 나 그 너머에 있는 정과 선의 상태에 도달해야 한다. 이런 주장이 대 두한 주요 요인은 무엇일까? 신격화된 왕이 정점을 이루는 '존재의 거대한 사슬'이 도덕질서의 닷 노릇을 해 온 구시대의 비전이 설득력을 잃었다는 뜻이다.!
- 중국에서 그리스까지 기축시대 이론가들은 이승 너머의 초월적 영역을 궁극적 정의가 불가한 곳으로 보았다. 불교의 열반(본뜻은 '붙어서 꺼진 상태'로, 초가 꺼지듯 이숭의 미후이 소명하고 일체의 번뇌에서 해달한 경지), 유가의 인(너그럽고 덕행이 높음), 플라톤의 토칼론(훌륭함), 기독교의 천국 Kingdom of Heaven, 도교의 도등 모두 지극히 추상적이다. 그런데 도달점이 막연했던 데 비해 도달 방법에 대해서는 놀라운 합의가 있었다. 바로 현실 초월이다. 현실 초월은 현실의 도덕질서 유지를 위해 신격화된 왕이나 거기 봉사하는 사제가 제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현실 초월은 선을 향한 자기 형성과 내적 수양에 달려 있었다. 각각의 기축 전통은 나름의 수행 방법을 제시했다(불교의 명상, 소크라테스의 대화법, 유대교의 학습, 유교의 학문정진과 예의준수). 하지만 이 기법들이 수행자에게 근본 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같았다. 윤리적으로 살고, 사욕을 극복하고, 관용 을 베풀고, 자신이 하지 않은 것을 남에게도 시키지 않는 것. 기축시대의 사상은 아그라리아의 현상을 위협하는 급진적.반체제적 성격을 띠었다. 기축 사상가의 대부분은 엘리트 내 하층부(소크라테스 공자. 무함마드, 히브리 선지자 대부분)나 심지어 하층민(예수 등)에 속했고, 이들을 계 승한 기원후 첫 밀레니엄의 사상가들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이들은 대제국의 지리적 주변부 출신이었다. 공자는 주나라의 제후국인 노나라 에서, 싯다르타는 인도 북부의 소국 사캬Sakya(석가)에서 태어났고, 다른 이들도 이스라엘과 그리스와 아라비아의 변방에서 나왔다. 중국의 위 와 조해, 인도의 마가다, 아시리아, 페르시아, 이집트 같은 거대 세력이 아니라 그 주변에서 부침을 겪던 곳들이다. 기축 사상가들의 적어도 일부는 빈민이 부자에 휘둘리고, 사람의 지체가 태생으로 나뉘고, 심지어 여자가 남자에게 종속되는 현상에 의문을 제기했다. 특히 도교와 불교는 정치적 위계를 부정하는 입장을 보였고, 공자와 소크라테스와 예수 는 통치자의 윤리적 결함을 질책했으며, 히브리 선지자들은 왕에게 폭언도 서슴지 않았다. 농경 사회 엘리트들은 기축 사상가들을 때와 필요에 따라 찬양하고, 박해하고, 주방하고, 처형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고대 대제국 모두 이들 비판 세력을 수용했다. 지배층은 기축 사상의 급진 비주류를 길들여 가며 명민한 젊은 학자들을 제도권 안으로 등용했다.
- 가부장적 가치관은 농경으로 에너지를 획득했던 사회에서 필요의 산 물이었다. 농업혁명 이후 여성에 대한 남성 주도권이 강화된 것은 남성 농부가 남성 사냥꾼보다 횡포해서가 아니었다. 농경 사회에서는 가부장 제가 노동 조직화에 가장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한정된 자원을 놓고 끝없이 경쟁하는 세상에서 수천 년에 걸쳐 가장 효율적인 사회가 덜 효 율적인 사회를 대체해 왔고, 그 과정에서 가부장제가 성공 요소로 드러 나자 남녀 공히 가부장적 가치를 공정한 가치로 수용하게 되었다. 그렇 지 않다면, 다른 종류의 체제로 가동되고 다른 종류의 가치관이 득세했 던 사회의 사례가 역사학과 인류학 기록에 하나도 없을 이유가 없다
- 계층질서가 거의 없었던 수렵채집 사회에서는 폭력적 죽음을 맞을 가능성이 10퍼센트도 넘었다. 이에 비해 농경 사회의 폭력적 죽음 비중은 내 계산에 의하면 5퍼센트 정도고, 때로는 그보다도 휠씬 낮았다.' 농경은 사람들이 폭력적 죽음을 당할 일이 적어져야 굴러간다. 야생 식료를 먹고 살며 이동이 잦았던 수럽채집인은 노동 분업이 단순했고 대지에 별다른 자본 투자를 하지 않았다. 수럽채집인이라고 10퍼센트가 넘는 살인율이 즐거웠을 리 없지만, 그런 유혈사태 속에서도 나름 공 동체 기능을 유지했다. 하지만 농경민은 애기가 다르다. 에너지원을 길들이는 생산방식은 복잡한 노동 분업과 대지에 대한 막대한 자본 투자 를 요하고, 그런 생산 체제는 수럽채집 사회처럼 폭력적인 환경에서는 존속하기 어렵다. 이런 맥락에서도 흡스가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런 [폭력] 상태에서는 성과가 불확실하기 때문에 근면이 있을 자리가 없 다. 결과적으로 세상에 문물이 일어나지 않고, 바닷길이 열리지 않아 해 외에서 물품을 수입할 일도, 너른 건물이나 운반 수단이 있을 여지도 없 다. 많은 힘을 요하는 공사를 행할 수도, 세상에 대한 지식을 쌓을 수도 없다. 시간 운용도 예술도 학문도 사회도 없다. 무엇보다 인간은 끝없는 두려움과 폭력적 죽음의 위험에 노출된 채 고독하고 가난하고 더럽고 짐승처럼 우악스럽게 살다가 이른 죽음을 맡는다."
- 농경은 폭력을 문제로 만들었고, 동시에 폭력을 다스리는 해법도 만 들었다. 상대적으로 팅 빈 땅에 띄엄띄엄 살았던 수럽채집인은 상황이 불리해지면 공격자에게서 도망쳐 다른 곳에서 사냥하고 채집하면 그 만이었다. 하지만 날로 인구가 늘고 붐비는 대지에 갇혀 사는 농경민은 살던 자리를 마음대로 떠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웃과 전쟁을 벌여 승 리한 측이 패배한 측을 몰아내지 않고 커진 사회 안으로 흡수.통합하는 일이 많았다. 통합은 흔히 강간과 약탈, 노예화를 수반하는 잔혹한 과정 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초대형 사회들이 생겨났고, 그런 사회의 통치 자들은 겔너가 아그라리아를 두고 말했듯 "세금을 징수하고 평화를 유 지하는 것 외에는 달리 관심이 없었다." 통치자의 급선무는 신민을 평정하고 달래서, 죽어라 일해 '카이사르의 것을 카이사르에게 바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서로를 죽이거나 남의 생산기반을 파괴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었다. 평화 유지에 성공한 통치자는 흥하고 그렇지 못한 통치자는 망했다.
- 강제노동은 수천 년 동안 농경 사회에 필요악으로 존재했는데, 그 강 제노동을 화석연료가 단 1세기만에 쏠어버렸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자유 임금노동이 득세하기 무섭게 화석연료는 농경 사회의 노동시장을 오랫동안 들어막았던 또 다른 걸림돌도 와해시키기 시작했다. 그 걸림 돌은 바로 성별 분업이었다. 강제노동의 경우처럼 이번에도 수요와 공 급의 원리가 변화의 주역이었다. 수요 측면부터 보자. 19세기에 화석연 료 기계의 보급으로 경제활동에서 인간 근력의 필요는 점차 줄고, 대신 인간 조직력의 필요가 늘었다. 지적 능력과 서비스 면에서는 여자도 남자 못지않았다. 여성 인력은 노동시장을 두 배로 키울 수 있는 열쇠였다. 화이트칼라는 핑크칼라로 변했다.
- 아그라리아는 선을 그어야 사는 사회였다. 구분선이 엘리트와 민중 남자와 여자 사이에만 존재한 것은 아니다. 신자와 비신자, 청결한 사 람과 불결한 사람, 자유인과 종속인 등 수없이 많은 구분과 범주가 존 재했다. 각각의 집단은 상호간에 의무와 특권이 복잡하게 얽힌 위계구 조에 따라 정해진 자리가 있었고, 각자의 위치와 서로의 관계가 올드딜 과 신의 뜻과 폭력의 위협에 의해 부과되고 강제되었다. 반면 화석연료 사회는 선을 지움으로써 굴러간다. 사회구조가 엄격히 구획된 구조에서 반구조로 이동할수록, 다시 말해 상호 대체 .가능한 시민들로 구성되고 내부 구분선이 사라진 빈 상자 구조로 변화할수록, 시장의 규모와 효율이 증대되고 사회 내부의 개인과 집단의 기능이 강화된다.
- 계몽사상은 북대서양 양쪽 해안에서 일어난 신종 경제에 대한 반응이었다. 북서유럽의 아그라리아 탈출을 촉발한 이 대서양 경제는 옛날에 도시국가들을 풍요롭게 했던 무역망의 초대형 버전이었다. 지식인들은 점차 고전과 성경 해석을 버리고 풍향과 조류 의 작용을 설명하고 천체 운행의 원리를 밝히는 데 힘을 기울였고, 신학 문은 우주의 역학모델 탐구로 빠르게 수렴됐다.(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갈릴레이Galilei, 데카르트Descartes 같은 사 람들이 나무의 생장은 시계의 작동만큼이나 신비와는 거리가 멀며 우 주의 중심은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라고 말하고 다니자, 당대 실권자들 은 이들을 요주의 인물로 취급했다. 하지만 대서양 경제권의 최대 수혜 자는 아그라리아의 지배 엘리트였고, 따라서 지상과 천계의 운동이 해 명되면 가장 크게 덕 볼 사람도 이들이었다. 그러자 17세기에는 오히 려 지배층이 신진 자연과학자들에게 능력 발휘의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 다. 교황청은 1633년에 갈릴레이를 겁박해 입을 막았지만, 영국 통치자 들은 1687년 뉴턴이 만유인력과 운동법칙을 역설한 <수학 원리) Principia Malbemalica를 용인했다.
- 아그라리아를 떠받쳤던 복합적 분업과 장거리 교역은 농경민이 수렵 채집인처럼 폭력적이었다면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인더 스트리아의 상호 대체 가능한 시민들의 개방형 공동체도 사람들이 농경 시대처럼 분쟁을 폭력으로 해결하려 들면 제대로 굴러 가지 못한다. 화 석연료 사회는 극단적 평화에 의존한다. 이 평화는 흡스도 놀랄 위력의 리바이어던들이 강제하는 평화다(최초의 근대적 경찰이 등장한 것이 1828년 산업 혁명 초기의 런던이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과거에 그랬듯 사람들은 이번에도 새로운 현실에 맞게 가치관을 조정했다. 농경 사회가 분쟁 해결을 위한 합법적 폭력 사용의 범위를 좁혔다면, 화석연료 사회는 그 범위를 더욱 좁혔다.
- 어째서 사람들은 수럽채집의 자유와 여유를 버리고 농경의 구속과 노역을 택했을까? 마샬 살린스가 그의 논문 <최초의 풍요사회>original amluent society에서 제기했던 질문이다. 물학자 겸 지리학자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이 선택을 "인류 역사상 최악의 실수"로 불렸고, 역사학자 유발 노아 하라리vuva Noah Harari는 최근 한발 더 나아가 농업혁명에 "역사상 최대 사기"라는 딱지 를 붙였다.이 한편 진화론자 피터 리처슨, 로버트 보이드, 로버트 베팅거 는 같은 질문을 다르게 고칠 것을 권고한다. 이들이 제안하는 보다 정확 한 질문은 이렇다. "플라이스토세Pleistocene(약 200만~1만 년 전으로 흔히 빙 하시대로 울림-옮긴이)에는 불가능했던 농경이 홀로세[olocene(약 1만 년 전~ 현재-옮긴이)에는 어째서 필수가 되었나?"이 내가 생각해도 위의 질문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가장 교육적이다. 수렵채집에서 농경으로의 이동 이 딱히 필연은 아니었다(사실 인간사의 어떤 것도 필연은 없다). 하지만 개연 이 농경의 편에 워낙 무겁게 쌍여서 농경이 도래하지 않을 가능성이 사라지다시피 줄었을 뿐이다.'
- 농경에서 화석연료로 넘어올 때도 수렵 채집에서 농경으로 넘어올 때처럼 기존 방식에 변화의 압박이 가중되면 서 사람들은 연이어 새로운 방법을 강구했다. 대개는 실패로 돌아갔다 수렵채집 사회의 대부분은 동식물을 길들이지 못했고 운 좋은 소수만 성공했다. 마찬가지로 로마 제국, 송나라, 무굴 제국, 청나라 등의 여러 농경 사회가 에너지 획득량 1인당 1일 3만 킬로칼로리라는 상한선에 도 달했지만 그중 대부분은 한계를 돌파하지 못했다. 농경 사회가 그랬듯 화석연료 사회도 특정 시기에(기원후 1800년경) 특 정 장소에서(북서유럽) 하나의 돌파구를 통해 역사의 전면으로 부상했다 '어째서 그때 거기서 시작되었는가?'는 역사학계의 뜨거운 쟁점이다 1700년경 북서유럽의 기술력은 아시아보다 두드러지게 월등하지 않았 다. 유럽의 과학과 수학이 좀 앞서 있었지만 아시아도 마음만 먹으면 선진 문물을 확보할 수 있었다. 가령 중국 청나라 강희제(재워:1661-172)는 예수회 선교사들로부터 수학과 천문지리 등을 학습했고 하프시코드 연주법을 배우기도 했다. 산업혁명이 하필 유럽에서 시작된 것을 두고 어떤 학자들은 유럽의 제도와 관습이 결정적이었다고 말하고, 다른 학자들은 종교와 전반적 문화, 기후여건, 부존자원 등에서 이유를 찾는다. 또 유럽을 화석연료 시대로 추진한 것이 무엇이었니를 분기보다 나머지 세계의, 특히 중국의 발목을 잡은 것이 무엇이었나를 물어야 한다는 주 장도 있다. 나는 전작 <왜 서양이 지배하는가>에서 화석연료 사회가 특정 시기 특정 장소에서 시작된 이유도 수럽채집 사회와 농경 사회가 특정 시기 특정 장소에서 발생한 이유와 다르지 않다고 했다. 그 이유는 바로 지리 적 이점이다.이1 북서유럽은 고대부터 기원후 1400년경까지는 지리적으 로 심각하게 불리한 여건에서 고군분투했다. 당시 세계의 중심(지중해. 중동, 남아시아와 동아시아)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고 대서양이라는 거대한 무역 장벽에 가로막혀 오지처럼 격리된 신세였다
- 하지만 대양을 통째로 가로지르는 원양선의 출현으로 판세가 뒤집 히기 시작했다. 중국은 이미 기원후 1200년경 이 정도 수준의 조선술 과 항해술을 보유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태평양은 너무나 거대 한 바다였기 때문에 대양횡단 원정이 상업적으로 가치 있는 일이 되기 까지는 수백 년이 더 흘러야 했다. 그러다 1400년경 서유럽이 외항선을 개발하면서 태평양보다 휠씬 좁은 대서양이 갑갑한 무역 장벽에서 초특 급 교역로로 화려하게 탈바꿈했다. 1500년까지는 항해시대가 본격화되 어 유럽인들이 이 바닷길로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인도양을 드나들었 다. 거기다 아메리카 대륙이 동아시아보다는 서유럽에서 훨씬 가까웠기 때문에, 1492년 이후 아메리카를 발견하고, 약탈하고, 식민지화한 것도 아시아인이 아니라 유럽인이었다. 이렇게 신세계는 아시아 중심 경제가 아니라 유럽 중심 경제에 편입되었다. 17세기에 이르러 북대서양은 이 른바 '골디락스 대양'Goldilocks Ocean(골디락스는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면서도 물 가상승 압력이 거의 없는 이상적인 경제 상황을 뜻한다. 동화에서 곰 세 마리가 사는 오두 막에 들어가 스프 세 그릇 중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스프를 골라 먹고, 세 침대 중 너무 딱딱하지도 물렁하지도 않은 침대를 골라서 잔 금발소녀의 이름에서 유래했다-옮긴이) 이 되었다. 대서양은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았다. 아프리카와 유럽과 아 메리카의 해안을 따라 각양각색의 사회와 생태가 번성할 만큼은 크고. 유럽의 배들이 재빠르게 누비고 다니며 구석구석에서 수익을 쓸어 모을 수 있을 만큼은 작은 천혜의 바다였다. 역사학자들은 17~18세기의 유럽 중심 대서양 교역을 삼각 무역uriangular urade이라고 부른다. 유럽의 공산품, 아프리카 노예, 아메리카의 열대작물을 엮는 삼각 무역망은 역 사상 최강의 수익창출 기계로 기능하며 유럽을 살찌웠다. 대서양 일대의 에너지원을 독식한 북서유럽의 에너지 획득량은 17세기에만 10퍼센트 상승했다.이 그리고 아테네와 베네치아 같은 연안 도시국가가 지중해 무역의 패권을 잡았던 때처럼 에너지 보너스는 아그라리아의 빛줄을 느슨하게 풀었다.
- 어떤 미래든 미래는 오고, 또 지나간다. 우리가 미래에 남아 있다면. 앞서 말했듯 수럽채집, 농경, 화석연료 단계를 통틀어 빙하기 이후 지 금까지 있었던 굵직한 변화들은 우리가 성장을 거듭하다가 견고한 천장 에 부뒷혔을 때 일어났다. 기존 에너지 획득 방식에 내재한 발전 한계치 에 다다른 선진 사회들이 그 천장을 뚫으려는 역사적 자연실험에 들어 갔다. 이 실험은 수렵채집인이 농경을 발견할 때는 수없이 일어났고, 농 경민이 화석연료를 발견할 때는 최소한 다섯 번(로마 제국, 송나라. 무굴 제국. 청나라, 근세 유럽) 일어났다. 산업혁명 전까지는 에너지 획득 방식을 변혁 하려는 시도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고, 인류는 생산 증가가 인구 증가 를 따라가지 못하는 맬서스의 덧에 번번이 발목을 잡혔다. 이쯤에서 궁금해진다. 수럽채집과 농경처럼 화석연료 이용에도 견고한 붙박이 천장이 있을까? 최근에 이 질문이 하나의 정치적 쟁점이 되었다. 그러나 대답은 언제나 '그렇다'로 기운다.
- 기원전 2200년경 아카드 제국과 이집트 고왕국이 몰락하던 시점부 터 최근까지, 대형 문명사회가 붕괴할 때마다 다섯 가지 같은 동인이 작용했다. 통제 불능의 인구 이동, 국가 기능 마비, 식량 부족, 전염병 확산 그리고 (항상 포함되지만 가장 예측 불허한) 기후변화.
21세기에 이 종말의 다섯 동인이 다시 뛰기 시작할 조짐이 느껴진다. 과거의 붕괴는 으레 수백만 명의 과잉사망을 초래하고 생활수준의 추락과 문화적 암흑기를 야기해 사람들을 생지옥으로 몰았다. 로마 제국의 에너지 획득량이 기원후 첫 수백 년 동안 정점을 찍은 이래 송나라가 다시 비슷한 성과를 내기까지 1천 년의 세월이 걸렸고, 송나라의 전성기가 꺾어진 후 청나라와 무굴 제국과 유럽이 비슷한 수준을 회복하기까지 600년이 걸렸다. 암울한 이야기다. 그러나 21세기의 붕괴는 이보다 휠씬, 휠씬 암울할 것이 분명하다. 첫째, 사회들이 2만 년 동안 꾸준히 통합.팽창해 온 결과, 돌파구 마련을 위해 가동되는 자연실험 개수가 대폭 줄었다. 우리 시대에는 기본적으로 단 한 번의 지구적 실험으로 모든 것이 결정된다. 우리에게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둘째, 지금의 세상에는 과거 어느 사회 에도 없었던 새로운 파멸의 방식들이 도사리고 있다. 가장 확실한 것이 핵무기다. 로마 제국에는 핵무기가 없었지만 지금은 있다. 좋은 소식은 1986년에 비해 현재는 전 세계 핵탄두 수가 20분의 1로 줄었다는 것이고, 나쁜 소식은 최근 범세계적 핵확산방지 체제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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