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르망의 발굴 전까지 사람들은 창조적 사고를 하려면 커다란 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인류가 창조적 사고를 하게 된 과정을 대략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현생인류의 조상인 호모Homo는 지금으로부터 200만 년 전쯤 기후변화로 식량이 부족해지는 바람에 창조성을 발휘하게 되었다. 호모는 당시 이미 도 구를 만들고, 그 도구로 새로운 영양공급원을 개척해나갈 수 있 을 만큼 뛰어난 지능을 가지고 있었다. 호모는 고기를 자르기 위 해 돌로 무기와 칼을 만들었다. 그 덕분에 원래 약한 축에 속하던 호모는 사바나의 가장 큰 동물과 겨룰 수 있는 사냥꾼으로 변신했다. 육식은 호모에게 양질의 영양을 공급해주었고, 덕분에 호모는 더 커다란 뇌로 무장할 수 있었다. 커다란 뇌를 가지고 더 똑똑해질수록, 더 효과적으로 사냥할 수 있었다. 그렇게 호모는 지구상에서 가장 성공적인 포식자이자 세계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리고 훗날 어느 순간부터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맞지 않는다. 첫째, 로메크위의 석기산업은 200만 년 전의 기후변화보다 훨씬 앞서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지구온난화가 원시림을 바싹 말려버리고 아프리카에 사바나가 생겨나기 최소 50만 년 전에 이미 이곳에서 뗀석기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둘째, 소니아 아르망 팀이 발굴한 연장들은 육식을 위한 칼이나 무기가 아니었다. 그곳 어디에도 칼자국이 난 동물의 뼈는 발견되지 않았다. 날에 남은 흔적도 이런 연장이 식물에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그 도구들은 분명히 호두 같은 것을 깨뜨리거나 덩이줄기를 수확하거나 나무줄기에서 곤충들 을 제거하는 일에 쓰였던 것 같다. 셋째, 이런 기구를 만든 이들은 뇌가 크지 않았다. 평평한 얼굴의 케냔트로푸스 플라티옵스는 현생인류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뇌 용적은 오늘날 인간의 3분의 1을 간신히 넘는 수준이었다. 300만 년 전에는 다른 종의 초기 인류도 생존했지만, 어느 종도 현대의 침팬지보다 뇌가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창조적 사고로 현실을 일구어갈 수 있었음이 분명하다.
- 창조성이 이해력과 독창성만의 문제라면 유인원은 우리 조상보다 훨씬 먼저 돌칼을 만들어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동물원에서도 그런 능력을 선보여 우리의 감탄을 자아낼 것이다. 하지만 창조성이 단순히 즉흥적으로 번득이는 영감에서 유래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신화뿐이다.
돌을 깨뜨려 뗀석기 하나를 만드는 데도 창조적 사고는 아이 디어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뚜렷한 보상이 보이지 않아도 실패 를 감수하고, 부단히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노력과 의지가 필요 하다. 꽤나 복잡한 창조적 과업을 달성하는 사람은 기꺼이 오랜 시간을 미지의 영역에서 보낸다. 침팬지가 석기 제작에 실패하는 것은 지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자제력과 장기적으로 계획하는 능력이 부족해서다. 솔직히 말해 우리 역시 이로 말미암아 좌절 하는 일이 부지기수다.
- 인간이 언제부터 말로 서로 소통하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다. 목소리는 고고학적 흔적을 남기지 않으므로, 인류의 언어 사용에 대한 가설은 열 가지가 넘는다. 아이와 어머니 간의 옹알이가 최초의 발화로 이어졌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고, 언어를 사용한 시점을 훨씬 나중으로 가정하여, 모닥불 앞에서 노닥거리던 행동이 언어의 기원이 되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로메크위의 발굴물에 비추어 보면 이 모든 이론은 별 로 신빙성이 없다. 300만 년 전에 석기를 만든 사람들이 이미 서 로 의사소통을 할 줄 알았다는 사실에 별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후세 사람들처럼 유창하게 말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성대와 입이 아직 제대로 된 단어를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300만 년 전의 초기 인류가 내는 소리는 휘파람 소리, 개 짖는 소리, 유인원의 그르렁거리는 웃음소리와 비 슷했을 수도 있고, 유인원처럼 개별적인 소리와 제스처로 의사소 통을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유인 원의 제스처와 소리는 타고난 것이라서 그 상태에서 더 이상 발 전이 없는 반면, 투르카나 호숫가에서 석기를 만들던 사람들은 이미 새로운 상황을 위한 신호를 만들어냈던 것이 틀림없다. 서 로의 뜻에 맞춰주고 서로 복잡한 의견을 주고받는 능력이 없었다면, 석기 제작을 수천 년간 이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 많은 교양서, 심지어 전문서들까지도 호모사피엔스가 이름에 걸맞게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덕분에 약 4만 년 전에 본격적으로 인류의 역사가 시작될 수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설명은 부인할 수 없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일단 단순하고 이해하기 쉽다. 그리고 우리, 즉 현대의 호모사피엔스의 귀에 좋 게 들린다. 하지만 설명하기 편하고 자존감에 도움이 된다고 해 서 꼭 사실인 것은 아니다. 세계사를 호모사피엔스의 우수성으로 설명하는 것은 꽤 유쾌할지 모르겠지만, 세 가지 사실이 그 설명에 들어맞지 않는다.
첫째, 호모사피엔스가 어떤 존재인지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 '호모 속에 속한 여러 종을 서로 어떻게 구분해야 할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종종 호모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을 서로 다른 종으로 본다. 그러나 생물학에는 '종'이라는 개념에 대한 정의가 최소 대여섯 가지는 된다. 가장 널리 퍼진 견해는 서로 교 배하여 번식이 가능한 생물을 하나의 종으로 보는 것이다. 아랍말과 하플링거는 서로 교배하여 번식 가능한 후손을 만들어낼 수 있으므로, 같은 종인 '가축화된 말 Equus ferus caballus'에 속한다. 반 면 가축화된 말과 당나귀는 다른 종이다. 이들의 후손인 노새 혹 은 버새는 번식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5만 년 전쯤 유럽으로 이주한 호모사피엔스와 이미 그곳에 살고 있던 네안데르탈인은 함께 번식 가능한 후손을 낳 았다. 그 후손이 바로 유럽인이다. 오늘날 유럽인의 유전자에는 이주민인 호모사피엔스와 원주민인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가 섞여 있다. 유럽인의 조상 중에는 최소한 한 명의 네안데르탈인이 있다. 네안데르탈인은 호모사피엔스에 의해 멸절되지도 멸종되지도 않았다. 그보다는 이주민들에게 흡수되었다.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는 현대 유럽인의 게놈에 1~4퍼센트 정도 반영되어 있다. 호모사피엔스가 유럽인의 두 조상 중 몸집은 더 작았지만, 더 성공적인 조상이 되었다. 이주민의 유전자가 더 잘 퍼져나간 것은 단지 그들이 수적으로 원주민보다 많았기 때문이었을 것다. 따라서 호모사피엔스는 새로운 종의 인류가 아니라 초기 인 류 중에서 우리와 가장 유사한 해부학적 특징을 지니고 있었을 따름이다.
둘째, 4만 년 전에 호모사피엔스는 전혀 신인류가 아니었다. 유전자 연구에 따르면 약 30만 년 전에 이미 아프리카에서 해 부학적으로 현대적인 인간이 호모에렉투스로부터 진화해 나왔다. 하지만 그들의 문화는 왜 훨씬 나중에야 급속히 전개되기 시작했을까? 미국 스탠퍼드대학교의 고생물학자 리처드 클라인 Richard Klein을 비롯한 여러 연구자는 5만 년 전 "신경계의 변화"가 갑자기 호모사피엔스를 더 똑똑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현대인이 비상한 혁신 능력”을 갖추게 된 것은 우연한 유전자 돌연변이 덕분에 갑자기 머리가 좋아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셋째, 호모사피엔스보다 먼저 유럽에 살던 초기 인류는 지능도 상상력도 부족하지 않았다. 우리가 보았듯이 그들은 뼈로 물건을 만들고, 예리한 칼, 접착제, 배를 고안했다. 문화가 서서히 전개된 것은 결코 창의성이 부족해서가 아니었다. 문제는 새로운 것이 생겨나도 거의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잊힌다는 것이었다. 이주민인 호모사피엔스의 위대한 업적은 좋은 아이디어가 공동체에 지속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게 했다는 점이다.
- 읽기를 배우면서 우리의 뇌는 개조되고 재프로그래밍된다. 그리하여 시각적 지각은 이제 미세한 선에 더욱 강하게 반응하고, 그에 따른 뇌 활성화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읽기에 능숙해지면, 어린아이들과 문맹자들이 얼굴 인식에 활용하는 대뇌의 좌반구 중추가 재프로그래밍되어 상징을 해독하는 역할을 한다. 대신 에 대뇌 우반구에 얼굴을 인식하는 새로운 중추가 발달한다. 진 화적으로 굉장히 오래된 뇌간은 호모사피엔스와 파충류 사이에 별 차이가 없지만, 문자에 친숙해지면 뇌간조차도 재조직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글을 읽을 수 있고 상징을 능숙하게 다루는 사람은 다르게 보고 다르게 느끼며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한다. 뇌가 일단 그렇게 프로그래밍되면 기호는 눈과 귀가 지각하는 현실에 대한 평형추로 작용한다. 상징이 일단 활성화되면, 그것을 끄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기호를 다루는 능력이 삶에서 얼마나 중요 한 역할을 하는지 인간을 대상으로 연구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인간과 진화적으로 가장 가까운 친척을 대상으로 실험하여, 네안데르탈인과 초기 호모사피엔스가 처음 상징을 도입했을 때 행동과 사고의 가능성이 어떻게 확장되었는지를 엿볼 수 있다.
- 상징은 세 가지 방식으로 지성을 확장한다. 
첫째, 상징은 세상을 묘사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상징과 더불어 우리는 감각이 인식하지 못하거나 생각이 따라가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상상할 수 있다. 입자물리학은 파인만 다이어그램을 토대로 하고, 화학은 원자를 철자로, 원자결합을 선으로 표시하는 구조식을 토대로 한다.
두 번째로 상징은 생각을 조직화해준다. 그래서 현실을 묘사하는 것만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데도 상징이 필요하다. 화학자는 구조식을 이리저리 활용하여, 새로운 약품, 플라스틱, 때로는 독극물을 만들어낸다. 작곡가는 종이에 음악을 쓴다. 록 밴드가 연습실에서 악기 연주를 하며 곡을 만들 수 있는 것은 머릿속에 이미 음표, 화음, 리듬이라는 상징적 표상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조화로운 공동생활을 위해 상징이 필요하다. 사회 가 복잡할수록 모든 사회 구성원이 그 의미를 아는 기호가 더 많이 필요하다. 그래야 낯선 사람과 의사소통할 수 있다.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이 돈을 매개로 상품과 노동력을 교환할 수 있다. 축구팀의 색깔은 서로 알지 못하는 팬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준다. 상징이 현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 이론가 낸시 에이킨 Nancy Aiken은 현대의 예술 시장과 화려 한 전시회는 예술을 무엇보다 흥미로운 여가활동으로 보여주고 자 하지만, 원래 예술은 생존에 필수적인 것이었다고 말한다. 에이에 따르면 예술은 상징을 만들어 인간 무리를 생존에 유리하 게 하며, 인간을 서로 뭉치게 한다. 더 많은 사람이 공동생활을 할수록 예술의 비중은 높아진다. 가령 장신구로 변신한 조개껍데기는 신분과 개성을 드러낼 수 있다. 즉 사람들이 어떤 대상을 상징 삼아 다른 대상을 나타낼 수 있다면, 색칠된 조개껍데기는 단순히 연체동물의 석회질 껍데기이기를 중단하고, 공동생활의 표지가 된다.
- 인구가 아주 적고 사람 간의 교류가 별로 없는 사회라면 그런 상징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가족끼리 있을 때는 목걸이를 착용할 일이 없었다. 하지만 무리가 커지고 다양 해지자마자 그런 물건이 도움이 되었다. 영국의 고고학자 마크 토머스 Mark Thomas는 아프리카 남부 블롬보스 동굴에서 발굴된
조개껍데기 장신구와 나중에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유물들이 인구가 증가하던 시대에 생겨난 것임을 증명했다.상징은 신화를 만들고 사람들을 결집시킨다. 호주 원주민의 선사시대 암벽화 역시 예술의 발전이 공동체의 형태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보여준다.  호주 원주민들은 지역에 따라 굉장히 다른 삶의 조건에서 살아갔다. 무더운 내륙 사막 지역의 경우 아주 넓은 땅에 소수의 주민만이 거주했다. 그러다 보니 비옥한 해안 지역보다 부족의 영토가 훨씬 넓었다. 영토가 넓으면 좁은 지 역에 모여 사는 것보다 더 다양한 스타일의 예술이 생겨날 거라 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대다. 적은 인구가 널리 흩어진 가운데 서로에게 의존하며 살아가는 극한의 기후 지역에서는 상징이 서로를 이어준다. 그리하여 수백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곳에서도 바위에 새겨진 무늬와 그림이 늘 같은 모티브를 보여준다. 하지만 강수량이 풍부한 해안 지역에서는 좁은 반경에 여러 부족이 서로 공존했고 서로 다름에 가치를 두었다. 이들은 이웃들과 스스로를 구분하기 위해 예술을 활용했다. 그리하여 상당히 다양한 상징들이 등장했다. 사람들은 단합하고 구분 짓기 위해 상징을 고안했으며, 이런 기호가 생각의 도구로서 지니는 가치는 나중에야 깨달았다.
- 사람들은 어떤 가정을 변치 않는 사실로 여기곤 한다. 창조 적 사고는 이런 가정이 가정임을 깨닫고 새로운 생각의 여지를 여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만이 아이디어 를 떠올릴 수 있다. 폴란드 시인 비슬라바 쉼보르스카 Wislawa Szymborska는 1996년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영감이 무엇이든, 그 것은 끊임없이 난 모른다'라고 생각하는 데서 생겨난다”고 했다.
모든 예술작품은 '난 알지 못한다'는 태도에서 탄생한다. 그 러나 쉼보르스카는 영감이 예술가의 전유물은 아니라고 했다. 영감은 마음을 여는 모든 사람에게 찾아온다. 아주 오랫동안 창의적 사고는 운 좋은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능력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창조성을 발휘하게 하는 특별한 뇌기능 같은 것은 없음을 알고 있다. 창조성은 기본적인 지각 메커니 즘을 활용한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낄 때마다 우리는 그것들을, 우리가 지각한 것들을 지어낸다.
- 베이즈 정리에 따르면 모든 인식의 시작에는 감각적 인상이 아니라 선입견이 있다. 우리는 선입견으로부터 상상을 만들어낸 다. 상상이 곧 가설이다. 감각기관은 이제야 비로소 작동한다. 그러나 눈과 귀가 제공하는 정보는 상상을 강화하거나 보완하거나, 반박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감각에 의해 상상이 확인되면, 우리 는 그것을 현실로 여긴다. 상상이 확인되지 않아도 나쁠 것 없다. 그 가설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그만큼 더 똑똑 해진 셈이고 이를 토대로 새로운 상상을 지어내면 된다.
베이즈 정리에 주목하기 전까지는 참이냐 거짓이냐만 존재했다. 가설은 들어맞거나, 아니면 틀린 것으로 판명되었다. 틀린 것은 곧 무가치한 것이었다. 그러나 베이즈 정리는 나중에 잘못된 것으로 판명된다 해도 불확실한 믿음이 얼마나 유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인식은 단순히 어떤 사실이 아니라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각과 사고는 늘 선입견을 배경으로 일어난다. 그 선입견은 달이 우리에게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하늘에 떠 있다고 말하며, 서로 다른 거리에 있는 당신의 두 손이 같은 크기라고 말한다. 동물원 우리의 덤불 속에 숨어 있는 명확하지 않은 얼룩 패턴이 표범의 등이라고 말하며, 통화 품질이 나쁜 휴대전화 너머에서 자꾸 지지직거리며 끊기는 목소리가 여자 친구의 목소리라고 말한다. 또한 레스토랑의 소믈리에가 추천해준 보르도 와인이 미각의 향연을 경험하게 해줄 거라고 말한다. 이런 선입견들이 대략 맞아떨어진다면 당신은 저녁 하늘에 쟁반같이 떠오르는 주 황빛 보름달을 보게 될 것이고, 양손이 같은 크기로 보일 것이며, 표범을 분간해낼 것이고, 여자 친구의 목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와인에서 소믈리에가 약속한, 강하지 않고 섬세한 타닌감과 구스베리 및 감초의 향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 모든 경험은 상상력 덕분에 가능하다. 동물원의 먼 덤불 사이에서 우리의 눈은 움직이는 몇몇 밝은 얼룩만 포착한 다. 왼손의 상은 망막에서 오른손의 두 배에 해당하는 면적을 차 지한다. 휴대전화에 바짝 가져다 댄 귀에는 음향 샐러드’가 들린다. 안대를 한 상태에서는 대부분의 사람이 레드와인과 화이트 와인조차 잘 구분하지 못한다.
- 영국의 인지심리학자 크리스 프리스Chris Frith 는 “세상에 대한 우리의 지각은 현실과 맞아떨어지는 상상”이라고 했다. 이 문장을 종종 현실과 놀랍게도 맞아떨어지는 상상'이라고 보충해야 할 것이다. 우선 뇌는 감각이 제공하지 않는 데이터를 보충해서 우리가 맹점을 느끼지 않고 평생 살 수 있게 해준다.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눈과 귀가 만들어내기는 하지만 그냥 없어져버리는 정보가 훨씬 많다는 것이다. 그 정보들을 모두 처리하는 것은 너무 낭비이기 때문이다. 가령 눈은 1초당 약 1000만 비트의 정보를 뇌로 전달한다. 이것은 700페이지짜리 책에 담긴 정보량에 맞먹는다. 하지만 그중 100비트만 의식에 다다른다. 100비트는 단어 두 개 정도에 해당하는 양이다. 그 밖의 모든 정보는 눈에서 뇌로 전달되는 동안 걸러진다. 그렇게 남은 정보는 너무 적어서 주변에서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려주지 못한다.
- 창조적 과정은 대개 4단계로 구성된다. 
1단계에서는 논리적 과정을 거쳐 해결책을 찾기를 희망하며 해당 주제에 열심히 몰두한다. 하지만 모든 숙고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고, 몇 번이나 헛된 도움닫기를 시도한 끝에 이성은 백기를 든다. 문제 해결을 위해 애쓰던 사람은 실패를 자각한다. 이 순간 그는 자신이 반드시 필요한 준비 prepare 시간을 거쳤을 뿐이고, 창조적 사고가 자기 앞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2단계는 알을 품듯 문제를 품고 부화incubation 시키는 단계다. 당사자는 더는 의식적으로 문제에 골몰하지 않는다. 해결 가망 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준비 과정에서 기억된 내용이 무의식 속에서 계속 작동한다. 종종 이런 제어되지 않는 두뇌 활 동이 꿈에서 나타나기도 한다. 밤에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기억 나게 하는 이미지와 생각의 파편들이 떠오르지만, 이로부터 어떤 의미도 유추되지는 않는다.
2단계에서 전혀, 혹은 거의 의식되지 않았던 정신적 과정의 결과가 3단계에서 눈앞에 드러난다. 이른바 조망illumination의 단계다. 뇌과학에 따르면 칼 프리드리히 가우스가 번개가 친 것에 비유한 유레카 경험은 객관적으로도 증명된다. 이런 조망이 비정상적인 뇌파 증가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를 오른쪽 뒷머리, 귀 윗부분에서 감지할 수 있다. 놀랍게도 이런 신호는 당사자가 자신의 통찰을 지각하기 약 2초 전에 나타난다. 주의력을 조절하는 우측 뒷머리의 뇌 영역이 활성화되면서 벌어지는 일인 듯하 다. 이 영역이 주의력을 주변으로부터 내면에 있는 상상의 세계 로 향하게 하면서 아이디어에 무대를 마련해준다.
조망이 찾아오면 굉장히 기쁘다. 하지만 처음에는 이 생각이 틀린 것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공존한다. 언뜻 아주 기발해 보이는 많은 착상이 곧 적절치 않은 것으로 밝혀지기 때문이다.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이 문제 해결에 부적합하다는 점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창조적 과정의 마지막 4단계인 검증.verification이 이루어진다. 논리적 사고가 다시 활발하게 작동하여, 그 아이디어가 설득력이 있고 쓸 만한 것인지 확인하는 단계다. 좋은 아이디어로 판명되면 이제 정말로 발견에 대한 행복감이 밀려든다. 이런 일은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험에 속한다.
- 경마에 참가한 말과 기수처럼 모드 1과 모드 2는 창조적 과정에서 서로를 필요로 한다. 둘이 함께해야만 목표에 이를 수 있다. 꿈꿀 수 없는 이성은 느리고 무기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논리를 외면하고 꺼리는 정신도 마찬가지로 문제가 있다. 그러므로 창조성은 고립된 재능이 아니라 대립적인 것을 머릿속에서 통합시키는 기술이다. 논리가 꿈을 만날 때 아이디어가 생겨난다.  명료한 이성은 목적 없이 배회하는 모드 1의 연상을 조심스럽게 한 방향으로 유도하지만, 결코 많은 통제를 가해 아이디어의 흐름을 막지는 않는다. 냉철한 사고는 현실과의 관계를 잃지 않게 하고, 쓸데없는 환상을 걸러낼 뿐만 아니라, 늘 똑같은 고민 을 중단시키고, 자칫 백일몽에 빠지기 쉬운 생각의 고리를 끊는다. 그리하여 창조적 과정에서는 꿈과 분석, 무의식과 의식, 허황된 생각과 계획적인 생각, 관심의 넓은 포커스와 좁은 포커스 사이에서 섬세한 균형이 이루어진다.
이런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어렵다. 우리는 직관과 논리가 서로 대립된다고 느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우리 뇌 안에서 모드 1과 모드 2는 서로 맞수다. 즉 일반적으로는 서로를 배제한다. 디폴트모드 네트워크가 켜져서 모드 1 상태가 되자마자 모드 2를 조성하는 실행 네트워크는 꺼진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우리는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동시에 공상에 잠길 수 없다.
- 조형예술의 걸작 또한 탐구적 창조성에서 비롯되었다. 회화 가운데 가장 유명한 〈모나리자〉는 수수께끼 같고 신비한 얼굴 표정으로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이 그림을 그리기 전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얼굴에 드러나는 감정 표현을 체계적으로 연구했다. 는 사실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다빈치는 기괴한 초상화를 연 속적으로 그리면서 유사한 형태와 과장된 형태를 계속 변형시켜 보았다. 심지어 모양에 따라 코를 체계적으로 분류하기까지 했다. 코가 직선으로 뻗었는지, 동그란 모양인지에 따라 네 가지 기 본 유형으로 나누었고, 콧등의 굴곡 정도에 따라서도 형태를 구 분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런 식으로 표정을 보여주는 갖가 지 요소를 담아 도구상자를 마련했고, 덕분에 이전의 어떤 화가보다 감정을 풍부하게 묘사할 수 있었다.
- 세기말이 되면, 말의 사용이 (......) 크게 달라져서 모순 없이 정확하게 생각하는 기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앨런 튜링)
- 변혁의 기술은 규칙을 토대로 하지 않으며, 특정 목표를 추구하지도 않는다. 변혁적 창조성은 기존 목표를 포기하고 새로운 목표를 발견한다. 규칙을 파괴하고 자신의 규 칙을 정립한다. 역사상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착상들은 그렇게 생겨났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300년 전에 정립된 뉴턴 역 학을 뛰어넘어 물리학에 새로운 개념을 선사했다. 베토벤이 교향 곡 5번을 쓸 때만 해도 멜로디가 아닌, 네 개의 리듬감 있는 천둥소리로 교향곡을 시작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었다. 마르셀 뒤샹은 자신의 레디메이드를 통해 예술은 숙련된 솜씨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기대를 영원히 불식시켰다.
- 변혁을 이루는 열쇠는 지능이라기보다는 자율성이다. 감정은 우리에게 의도를 변화시킬 자유를 부여해주고, 생각을 새로운 지평으로 인도해준다. 감정은 우리가 야심찬 목표를 추구하게 하고,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 Antonio Damasio의 말처럼 “수천 척의 지적인 배를 띄우고, 이것을 조종하도록 도와준다.” 감정은 신체의 생존에 도움을 주고 신체는 이런 감정을 만들어낸다. 이렇듯 신체와 정신은 상호작용한다. 창조적 사고가 인간을 자연계에서 조금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의 창조적 사고에 식량과 후손으로 보답한 자연은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았다. 우리는 생물학적 존재로 남았다. 우리의 창조 성과 신체성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 천재, 그것은 기꺼이 되찾아온 유년 시절을 의미한다. (샤를 보들레르)
- 변혁이 가능하려면 혼란을 견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미국의 수필가 제임스 볼드윈James Baldwin은 창조적 과정에 관해 고찰하면서 사회가 변화를 그토록 달가워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했다. 볼드윈은 기존의 것에 달라붙어 있으려는 경향은 특권을 포기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불안을 견디지 못해서 나타나는 것이 라고 설명했다. “사회의 목적은 내적, 외적 혼란에 맞서는 방벽을 처줌으로써 사람들이 무난히 살아가게 하고 인간 종이 생명을 유 지하게 하는 것이다. 어떤 전통이든 일단 한번 굳어지면 대부분 의 사람은 마치 이런 전통이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계속되어온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변화를 상상하기가 싫고 상상할 수도 없다. 자신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해준 전통 없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한다. 그런 것들을 포기해야 하고 포기할 수 있다고 제안하면, 그들은 패닉 반응을 보인다.” 1962년에 볼드 윈이 쓴 이 글은 지금 읽어도 예언적으로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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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학교에서 한국사를 배우고, 시험을 치르게 된다. 특히나 수능에서는 필수과목이기 때문에 반드시 공부를 해야하는 과목이다. 일부의 학생을 제외하곤 역사과목을 좋아하는 학생은 별로 없다. 아무래도 고리타분하기도 하고, 외워야 할 것이 너무 많아서 그렇기도 하다. 수능에서 필수과목이 되고, 절대평가 과목이 되면서 문제의 난이도는 많이 쉬워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공부는 필요하다.

이 책은 역사교사이자 작가인 유정호님이 지은 책으로, 역사를 공부해야 하거나 역사를 좋아하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책이다. 저자가 생각하는 효과적인 역사교육 방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역사는 사실을 암기하도록 가르치는 것잉 아니라,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파악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건이 일어난 원인과 배경을 알면 결과가 자연스레 도출되면서 힘들이지 않아도 역사적 사건을 기억할 수 있다.
둘째, 역사에 숨겨진 재미있는 이야기나 현재와 관련된 부분이 나오면, 역사의 흥미도가 높아지면서 쉽게 역사를 이해할 수 있다.
셋째, 역사적 사건의 전체적 내용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요약된 표가 제시될 경우 학습효과가 높아진다
넷째, 사료를 통해 역사적 사실을 접했을 때, 이해도가 향상되고 사료를 제시하는 문제도 쉽게 맞힐 수 있다. 

위와 같은 네가지 원칙을 기초로 하여, 이 책은 문답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두번째 질문이 '농경의 시작이  왜 혁명일까?'이다. 일반적으로 역사책에서는 농업혁명, 신석기혁명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그 내용에 대해서는 아주 간단히 서술되어 있을 뿐이다. 이 책에서는 혁명이라 불릴만큼 변화를 가져온 내용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어서, 한번 읽어보면 그 내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우리 나라의 역사를 크게 4가지로 구분하였다. 고대부터 삼국시대, 통일신라부터 고려시대, 조선 전후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제강점기부터 근대사회로 구분하고 각 시대별로 가장 중요한 질문 25가지에 대해 그 내용을 정리하였다. 특히 답변 마지막에는 '한눈에 보는 역사'라는 작은 코너를 통해, 도표의 형태로 관련 내용을 정리하고 있다.

수능을 준비하는 수험생이라면, 평소에 조금씩 읽어두고, 시험전날 주요내용만 훑어보고 간다면 시험대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 본 리뷰는 출판사 도서지원 이후, 자유롭게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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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격의 사피엔스

역사 2022. 5. 11. 19:47

- 포레 부족에 식인이 성행했지만, 남자들은 이 연회에 참석하지 않 았다. 식인이 그들의 전투력을 약화시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식인 풍습은 여자와 아이들만 따랐다. 학자들이 발견한 프라이온은 죽은 사람의 뇌와 척수에만 존재했다. 포레 부족 여인이 죽은 사람의 뇌를 삼키거나, 포레 부족 아이들이 망자의 척수를 흡수할 때 프라이온이 그들의 신체로 침입하여 뇌 조직에서 단백질의 잘못 된 접힘을 야기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쿠루 주술'이 여자와 아이 들에게만 나타난 이유다. 이렇게 보면 동족포식(同族捕食)은 대자연 이 인류를 위해 설정한 금기인 것 같다. 금기에 도전하면 자연의 힘 에 잠식당하기 마련이다. 쿠루 주술'이 바로 그 전형적인 예다. 그럼 뉴기니에는 왜 식인 풍습이 남아 있는 것일까? 현재의 한 이론에 따르면, 뉴기니의 자연환경은 돼지, 소, 양, 말 등 대형 가축을 키우기에 부적합하다. 외부의 선진 기술이 유입되고 보급되기 전에, 뉴기니 현지 부락 역시 돼지 사육을 시도했다. 하지만 돼지를 키우는 데 드는 비용은 생각보다 너무 컸다. 그래서 부락 여성이 자신의 젖을 먹이며 새끼 돼지를 키우기도 했다고 한다. 대규모 가축 사육 이 불가능하다 보니 원주민의 단백질 공급원은 매우 제한되었다. 그 래서 어떤 동물 단백질도 그들에게는 매우 귀중했다. 그들은 사람을 소름 끼치게 하는 거미, 타란툴라까지 잡아서 구워 먹었고, 물에 오 래 잠긴 나무에서 자라는 배좀벌레조개도 별미 삼아 먹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방금 죽은 수십 킬로그램의 신선한 인육을 원주민들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국가박물관에서 일한 다년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나는 한 가지 원 칙을 믿게 되었다. “인류 역사에서 일어나는 어떠한 사회적 행위든 그 안에는 자연 과학의 기저 논리가 있다”는 원칙이다. 뉴기니의 식인 풍습도 마찬가지다. 내 우상이자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교수인 재레드 다이아몬드(Jared Mason Diamond)는 뉴기니에서 오랫동안 조사와 연구를 한 후, 그곳의 식인 풍습에 대해 이런 관점을 제시했다. “식인 풍습이 존재하는 것은, 현지의 단백질 부족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엥겔스(Engels)도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이란 저서에서 식 인 현상에 대해 “식량의 결핍으로 인간은 서로의 피와 고기를 먹게됐다”고 말한 바 있다.
-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현재까지 우리는 그저 피가 낭자한 쉼표를 찍었을 뿐이다. 그 후 전문가들은 일부 포레 부족 구성원이 장기간 식인을 했지만 쿠루 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원인은 생존한 식인 부족의 몸속에 있었다. 정확히는 그들의 20번 염색체에 있었다. 인간의 20번 염색체에는 PRNP 라고 불리는 유전 자가 있는데, 프라이온 단백질 유전자다. 만약 이 유전자의 129번 염기 서열에 이형접합체(異型接合體, heterozygote)**가 있다면, 이 유전자의 주인은 프라이온 병에 강한 저항력을 갖게 된다. 즉, 일부 포레 부족구성원은 이 유전자를 가졌기 때문에 인육을 먹고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후 전문가들은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조사를 했 고 프라이온 병에 저항력을 가진 유전자가 여러 민족에 보편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는 아주 섬뜩한 가능성을 의미한다. 우리 중 대부분의 사람이 식인의 역사에서 자연 선택의 결과 살아남 은 것일 수도 있다는 점 말이다.
- 종합해보면 공전 궤도 주기, 지축 각도 주기, 세차 주기, 이 세 주기가 어우러져 규칙적으로 지구의 기후에 영 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지축 각도가 줄고 북반구의 여름이 원일점(遠日點)**에 머물 때 빙 하기가 찾아오고, 많은 양의 물이 고위도 지역에 눈과 얼음의 형태로 갇히고 만다. 넓게 퍼진 얼음 덮개는 햇빛을 반사시켜서 기온을 더 떨어뜨리고, 그로 인해 얼음 덮개도 더욱 커진다. 이런 '자가 순환 과 정을 통해 지구는 점점 더 극심한 추위로 빠져드는 것이다. 밀란 코비치 이론'은 현재 학계에서 수많은 학자에게 인정받고 있다.
- 요추간판 돌출 즉, 허리 디스크는 직립 보행 인간에게 생긴 여러 문제 중 하나일 뿐이다. 그 외에도 위장 하수, 탈장, 심혈관 질환 등 의 문제가 생겨났다. 또한 직립 보행은 인류에게 아주 뿌리 깊은 문 제점을 남겼는데, 그것은 바로 여성의 고통스러운 출산이다. 사실 우리의 친척인 침팬지도 특별한 경우 두 다리로 일어나 몇 걸음 걷 는다. 하지만 그 모습은 마치 주제파악 못 하고 설치는 술주정뱅이 같다. 침팬지가 비틀대며 걷는 데엔 여러 원인이 있다. 그들의 허벅 지 구조나 발가락 방향은 직립 보행에 적합하지 않다. 그 외에 또 하 나의 결정적인 요인은 그들의 골반이 키에 비해 아주 크다는 것이 다. 인간이든 침팬지는 이 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물리 법칙의 지배를 받게 돼 있다. 하체로 걸으려면 몸의 중심을 하체의 지지면(支持面)에 둬야 하며, 빠르게 움직일 때에도 무게중심이 지지면에서 너무 멀어지면 안 된다. 지금 고개를 숙여 자신의 골반을 보자. 지금 상태에서 골반이 두 배로 커진다면 걸을 때 어떨까? 침팬지처럼 엉덩이를 흔들면서 걸어야 균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걸으면 너무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장거리 이동에서 지나친 에너지 소모는 위험하다. 결국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 자원결핍의 압박을 받는 상황에서, 큰 골반 구조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은 결국 키가 커졌고, 골반이 작은 체형으로 진화 했다. 그러면서 가벼운 몸놀림으로 균형을 잡고 직립보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에너지 손실도 크게 줄어들었다. 하지만 결핍이라는 이 유령은 인간을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골반이 작아졌다는 것은 여성의 산도(産道)가 좁아졌다는 뜻도 된다. 좁은 산도는 인류가 진 화하는 과정에서 또 하나의 특질과 맞물리면서 너무나도 잔혹한 결과를 불러왔다. 긴 역사 속에서 수많은 여성과 아이가 죽었으며, 오랫동안 아주 처절하게 인류의 생명 궤적을 바꿨다. 작은 골반을 괴 롭힌 잔혹한 특질은 바로 인류의 뇌 용량 증대다.
- 오늘날 주목을 받는 여자 스타들은 수려한 미모와 정교하고 작은 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턱이 작을수록 좋아 연예인을 희망하는 여성들은 성형수술로 좌우 아래턱뼈를 깎기도 한다. 왜 작은 턱이 미의 상징이 되었을까? 왜 이토록 많은 사람이 작은 턱을 사랑하는 것일까? 아마도 이것은 식성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작은 턱은 씹는 행동이 부족하다는 뜻이고, 씹는 행동이 부족하다는 것은 부드 럽고 정교한 음식을 먹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생산력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 부드럽고 정교한 음식은 더 높은 사회 계층과 경제적 지위를 의미한다. 그래서 작은 얼굴은 종종 좋은 가정 형편과 연관되어 배우자를 고를 때에도 매우 유리한 조건이 된다. 반대로, 넓은 턱은 거친 음식을 씹는 것을 의미하고, 거친 음식들은 상대적으로 낮은 삶의 질, 즉 결핍이 있는 생활을 의미한다. 결핍은 고생의 근원이다.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그에 관련된 현상과 사물을 회피하려고 한다. 그래서 이런 인지 방식과 사회적 경험의 상호작용을 겪은 후, 작은 얼굴을 선호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는 가설에 불과하지만, 상당히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고 있다.
- 2004년 「네이처(Nature)」지는 씹는 근육과 뇌 용량의 관계에 관한 기사를 실었다. 내용은 이렇다. 약 200만 년 전, 인류 조상의 뇌 용량 이 급격하게 커졌는데,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중 한 가지 원인에 대 해 그동안 사람들이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건 바로 우리 조 상의 체내에서 'MYH16'이라는 유전자가 돌연변이를 일으켰다는 사실이다. 이 변이로 인해 저작()을 담당하는 근육의 생장이 둔화되었고, 얼굴 양쪽 근육이 약화되어 머리의 성장에 가해졌던 제약이 줄어들었다. 그 결과 인류는 더 큰 뇌 용량을 가질 수 있게 됐고, 더욱 복잡한 인지 행위를 할 수 있는 물리적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점이 있다. 대자연에서 진화의 기 본 원칙은 유전자 돌연변이가 발생한 후, 자연 선택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즉, 발생한 돌연변이가 살아남느냐 그렇지 못하냐는 문제는 해당 돌연변이를 가진 개체가 후손을 번식시킬 가능성에 달려 있다. MYH16의 돌연변이는 씹는 근육의 발육을 늦췄는데, 보통 이 돌연 변이 유전자를 가진 개체는 식사 효율이 떨어져 영양 섭취 부족에 시달렸다. 이미 다양한 결핍이 존재하는 환경에서 이런 변화는 생존 과 번식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류의 진화사 는 세상이 깜짝 놀랄 만한 반전을 연출한다. 씹는 근육이 점점 약해 진 개체가 어떤 행동을 취한 후, 오히려 더 강해지고 더 번성해졌는 데, 반전을 연출한 그 행위는 바로 앞에서 언급했던 시간 접기'이다.
씹는 근육이 약해진 후, 일부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그보다 조금 늦게 출현한 호모 하빌리스는 딱딱한 음식을 씹는 이 복잡한 과정을 입 밖에서 진행했다. 즉, 석기로 음식에 선처리(處理)를 가한 것이나, 견과류의 껍데기는 부수고, 질긴 섬유질은 으깨고, 큼직한 생고기는 잘게 다지고, 거대 맹수의 골격은 골수를 미리 발라냈다. 다루기 어렵고 씹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식량을 미리 처리하고 나자, 음식을 먹는 과정은 매우 쉬워졌다. 오늘날의 영장류들은 종종 음식 을 먹는 데 많은 시간을 소비한다. 고릴라의 경우, 보통 반나절 동안 음식을 먹는다. 하지만 호모 하빌리스는 석기로 처리를 한 후에 음 식을 먹었기에 식사 시간이 전보다 훨씬 줄어들었다. 호모 하빌리스 의 치아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보다 더 작아졌고 입술 부위도 덜 돌 출되었다. 이는 입에 가해지는 부하가 그만큼 줄어들었다는 뜻이다. 외부의 힘을 빌려 더 짧은 시간 안에 목적을 달성하는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행동이다. 바로 그 순간부터, 그동안 자연계에 균일하 게 흐르던 시간이 인간 조상에게만 다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100만 여 년 전, 올두바이 협곡에 사는 호모 하빌리스들이 손에 들고 있던 그 단순한 석기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아주 작은 시간의 용기(容器) 로 볼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사용했을 때, 용기 안에 접혀서 들어가 있던 시간이 밖으로 나왔고, 우리는 자연계에서 다른 종들보 다 더 짧은 시간에, 더 높은 효율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게 됐다. 이는 단지 음식을 먹는 것에 그치지 않았고 세상의 모든 일을 포함했다.
- 결핍된 환경에서 인간의 조상들은 대개 조 잡하고 질 낮은 음식을 먹고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강한 교합 근 육에 의존해 음식을 섭취했다. 이후 유전자 돌연변이는 그들의 교 합근을 약하게 했는데, 일부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여 단단한 음식을 처리함으로써 결핍의 압박을 이겨냈다. 그 결과는 뇌 용량의 증대 로 이어졌다. 그런데 머리 크기의 증대는 산모의 출산을 힘들게 하 고 식량 채집의 효율을 떨어뜨려 새로운 결핍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이번에는 더 오래 사는 할머니가 살아남아 자신의 딸이 아이를 양육 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렇게 장수하고, 늦게 성숙해지는 유전자 가 선택을 받으면서, 인간은 성장 과정이 더 길어지고 더 큰 체격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인간은 체질 면에서는 행동 면 에서든, 하나의 영원한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응해왔다. 그 난제는 바로 결핍이다.
- 사실 체모와 기생충 사이의 상호관계는 인간의 진화에 약간의 실마리를 남겼다. 이 단서들을 통해 인류학자는 사람이 체모를 벗은 시기를 알아냈다. 고대 인류의 몸에는 '이'라는 기생충이 있었다. 인간의 체모가 완 전히 사라지지 않았을 때는 길고 복슬복슬한 체모가 서로 뭉쳐 있었 을 것이다. 그 덕에 이는 체모를 따라 인간의 머리카락에서 사타구 니까지 어느 부위로든 이동해 피를 빨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이 점 점 털을 벗고, 어깨, 가슴, 등의 털이 모두 없어지자 '이'는 살기 어려 워졌다. 그래서 체모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두 부위, 머리카락과 음모에 갇히게 되었다. 장기간의 지리적 격리는 생식의 격리를 초래 하곤 하는데, 한 기생충이 장기간 서로 다른 환경에 갇혀 서로 유전자를 교류할 수 없게 되면, 결국 두 가지 기생충으로 분화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는 머릿니와 사면발니로 분화됐다. 머릿니와 사면발 니가 언제 분화되었는지 알 수 있다면, 인간이 언제 체모를 벗게 됐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 다시 인간의 체모로 돌아가자. 앞에서 언급한 기생충에 관한 가설은 학계의 많은 전문가로부터 지지를 받긴 했지만, 다음으로 언급할 세 번째 이론이 현재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인류가 체모를 벗은 이유는, '열을 발산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앞에서 아프리카 모로코 지역의 더위를 묘사했는데, 그런 환경에 서 동물이 발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더위를 먹어 죽을 것이 분 명하다. 약간의 생활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쉽게 이해할 것이다. 길고 촘촘한 체모는 열 분산에 큰 지장을 준다. 몸의 수분을 가두고, 공기의 이동 속도를 늦춰 땀 증발의 효율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샤워를 하자마자 온몸의 피부는 다 마르지만, 머리카락과 두피는 여전히 젖어 있는 이유도 이것이다.
- 인간의 몸에는 엽산이라는 영양물질이 있는데, 이것은 수용성 비타민이다. 엽산이 부족할 때 피로와 무기력, 멍한 기분을 느낀다. 더 중요한 것은 엽산의 부족이 남성과 여성의 생식기관에 모두 부정적 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남성의 몸속에 엽산이 부족하면 정자 발육이 둔화된다. 일부 엽산 억제제는 남성 피임약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또한 임신부가 엽산이 부족할 경우 태아가 발육에 지장을 받 아 척수가 없거나 심지어 뇌의 발달이 불완전할 확률이 커진다. 그렇다면 햇빛은 과연 사람의 피부색에 어떤 작용을 할까? 연구 결과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비교적 옅은 피부색을 가질 경우, 자외 선이 그의 몸 안에 있는 엽산 수치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 한 시간 동안 태양 빛을 쪼이면 그 사람의 체내 엽산 수치가 50% 내려간다. 따라서 아프리카처럼 강렬한 일조 환경에서, 옅은 피부색을 가진 사람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심각한 엽산 결핍을 겪는다. 남성은 정자 활동력이 떨어질 것이고, 임신부는 기형아를 낳거나 사산할 수도 있다. 인간이 체모를 벗은 후, 피부색은 출산 능력과 후손의 생존율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특징이 됐다. 결국 엽산의 결핍에 적응하기 위해 호모 사피엔스는 짙은 피부로 진화했다. 피부 속 멜라닌 색소는 자외선이 일으키는 엽산의 분해 작용을 효과적으로 낮춰 엽산 결핍을 완화시켰고, 짙은 피부의 남성은 '명예 회복'이 가능해졌다. 짙은 피부를 가진 여성이 건강한 후손을 낳을 확률도 더 높았다. 이런 사실을 토대로 인류학자들은, 우리 의 조상이 처음 아프리카 대륙에서 다른 대륙으로 이동했을 때 짙은 색의 피부를 가졌을 것이라고 본다.
- 짙은 피부색이 햇빛이 인체 내의 엽산을 분해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막는데, 왜 인간은 아프리카를 떠나면서 점차 피부색이 옅게 변했을까? 이 문제를 설명하려면 다른 영양물질을 다루어야 한다. 그것은 비타민D이다.  비타민D는 인간의 뼈와 근육의 성장에 매우 중요한 요소인데, 만약 어린아이가 비타민D가 부족하면 구루병(樓病)에 걸려 신체 발달이 온전치 못하고, 기형이 될 수 있다. 또한 성인이 비타민D가 결핍되면 연골병, 관절 통증, 근육무력증에 걸릴 수 있다. 구석기 시대에 이런 병은 모두 환경에 대한 인체의 적응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그럼 피부색과 체내의 비타민D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을까?
- 일반적으로 인체는 두 가지 방법으로 비타민D를 충전한다. 햇빛과 음식이다. 인체가 충분한 양의 빛을 받으면 피하조직의 어떤 화학 물질이 비타민D로 전환되어 신체의 필요를 충족시켜준다. 하지만 피부색이 너무 짙으면 피부 안의 멜라닌 색소가 이 과정을 방해하고, 인체는 비타민D 결핍으로 각종 질환에 걸리게 된다. 그래서 짙은 피부를 가진 사람들은 고위도 지역이나 안개가 낀 지역에서 구루병과 골연화증(骨軟化症)*으로 고통받기 쉽다. 그럼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옅은 색의 피부로 진화해야 한다. 즉, 위도가 높은 지역 등 부족한 일조 환경에서 옅은 피부 색이 유리했고, 이로 인해 피부가 상대적으로 흰 사람도 비타민D를 합성하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일조량 이 비타민D를 보충하는 유일한 공급원은 아니라는 것이다. 육류 음 식 역시 비타민D의 공급원 중 하나다. 에스키모들은 고위도 지역에 몰려 사는데, 그들의 피부색은 그다지 희지 않다. 하지만 결핍을 겪지는 않는데, 주요한 원인은 그들이 섭취하는 음식에서 육류의 비율 이 아주 높기 때문이다. 그들은 '극단적 육식주의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육류에서 충분한 비타민D를 섭취한 그들은 고위도에 살지만 옅은 피부색이 필요하지 않다. 종합해보면, 같은 지역에서 나타나는 피부색의 차이는 엽산과 비 타민D 두 영양물질의 균형으로 결정된다. 인류가 행동 방식을 바꾸거나 특질을 바꾸는 건 두가지 영양물질 중 어느 하나라도 결핍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 학자들은 머릿니와 사면발니가 분화한 시간을 측정해 사람의 체모가 벗겨진 시간을 계산했다.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20만 년전(호모 에렉투스 단계)이다. 고대 인류가 체모를 벗은 후, 신체의 각 부 위, 특히 어깨, 목, 가슴, 등 부위가 매끄럽게 변하면서 체모가 없는 부위에는 이가 생존하기 어렵게 됐다. 하지만 나중에 몇몇 머릿니들은 머리카락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생태학적 위치를 찾았다. 바로 고대 인류의 옷 속이다. 옷의 섬유 속에 숨어 계속 생존하기 위해 이는 앞발이 갈고리 모양으로 진화했다. 장기간의 지리적 격리는 점차 생식 격리를 초래했고, 옷 속으로 옮겨간 머릿니는 점차 몸니로 분화 되었다. 이 단계에 이르면 논리적으로 설명이 된다. 옷이 있기 때문에 몸니가 생겼고, 몸니가 있다는 것은 옷이 있다는 뜻이다. 분자시계를 통해 몸니가 얼마나 오래전에 머릿니로부터 분화됐는지를 계산하 면, 고대 인류가 언제부터 옷을 입게 됐는지 알 수 있다.
최종 측정 결과, 몸니는 17만 년 전에 머릿니로부터 분화했다. 이는 곧 약 17만 년 전에 호모 사피엔스가 옷을 입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후에 인류학자들은 지질학적 각도에서 주변 증거를 연구했는데, 약 18만 년 전에 지구의 기후가 점점 추워지기 시작했다. 체모를 벗 은 호모 사피엔스에게는 매우 커다란 시련이었을 테고, 옷을 입는 강한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 그런데 참 이상하다. 뇌 용량으로 보면 네안데르탈인이 결코 열 세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성인 네안데르탈인의 평균 뇌 용량은 1200ml에서 1750ml까지 다양하다. 일부 네안데르탈인의 뇌 용량은 같은 시기 유럽에 살고 있던 호모 사피엔스(당시 호모 사피엔스의 평균 뇌 용량은 1500ml 안팎이었다)를 뛰어넘을 정도다. 그런데 뇌 용량이 더 큰 네안데르탈인이 오히려 더 강한 지적 수준과 더 복잡한 문화적 행위를 갖추지 못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직 학계에서 결론이 나지 않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결핍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네안데르탈인의 비교적 큰 뇌 용량 역시 여러 요소의 상호작용에 의한 것이다. 특이하게도 그들의 두개골 후두부는 비정상적으로 돌출되었다. 현대인의 눈에는 거의 기형으로 보일 정도다. 후두부에 상응하는 대뇌 영역은 후두엽이며, 시각 중추가 있는 곳이다. 즉, 크 게 발달한 후두엽은 더 발달된 시각 중추를 의미한다. 이 특질에 맞 춰 생각해보면, 네안데르탈인은 큰 눈자위와 더 큰 안구를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인류학자들은 이러한 사항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후, 네안데르탈인이 현대인보다 더 뛰어난 시력을 가지고 있으며, 이것이 높은 위도에서 살면서 진화해온 형질 중 하나라고 결론 내렸다.
위도가 높은 지역일수록 빛의 양이 적다. 조명 설비가 보급되지 않은 구석기 시대에 시력은 사활을 결정짓는 중요한 형질이었다. 사 냥감이 들판과 밀림에 남긴 작은 단서를 발견하는 일은 다음 일정 시간 동안 네안데르탈인 사냥꾼과 그들의 친지들이 음식을 먹을 수 있을지 없을지의 문제였다. 물론 눈의 더 중요한 역할은 치명적인 위험을 파악하는 것이다. 거대 맹수의 발자국과 배설물, 나뭇가지 사 이로 쉬잇' 소리만 내고 잘 보이지 않는 독사, 적의를 품은 호모 사피 엔스가 쳐놓은 온갖 함정들을 알아채기 위해서라도 더 좋은 시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즉, 네안데르탈인은 더 많은 시각 정보를 수집해야 하는 환경에서 큰 눈이 자연 선택되었을 것이다. 더불어 시각 정보의 과부하에 대비하기 위해 시각 중추 역시 더 크게 진화했다.
그러나 인간의 뇌 공간은 한정되어 있다. 거대해진 시각 중추가 뇌의 공간과 에너지를 많이 차지하게 되면서 네안데르탈인의 뇌 발 육은 불균형해졌다. 이마 바로 뒤에 있는 전두엽은 인류의 뇌 영역 중 가장 늦게 진화됐다. 전두엽은 사교, 기억, 정서 관리, 논리 해석 등 복잡한 지적 활동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 네안데르탈인의 대뇌 중 그 부분의 발육이 상대적으로 뒤떨어지는 것은, 호모 사피엔스에 비해 문화 행위의 창의성과 유연성이 부족해서일 가능성이 크다. 뇌 가 빛 부족 문제에 지나치게 반응하다 보면 다른 부위의 발달을 포기하기도 하는데, 아마도 이러한 한계 속에서 네안데르탈인의 뇌는 사물의 특성을 추출하는 것 같은 복잡한 지적 활동을 담아내지 못한 것 같다.
문화 행동의 차이는 결핍을 대하는 두 인간의 임기응변 능력에도 차이를 만들었다. 생존 레이스에서 승리의 저울은 점점 호모 사피엔스에게 기울었다.
- 오늘날 우리는 종종 인간의 언어를 문화의 매개체 중 하나로 보는데, 사실 언어는 추상적 개념이다. 세상의 그 어떠한 추상적 개념도, 실존하려면 물리적 토대를 가져야 한다. 인간의 언어도 마찬가지인데, 언어의 물리적 기반 중 하나는 바로 인간의 특이한 후두 구조다. 오늘날 학계의 일부 연구자들은 인간을 습관성 직립 보행을 하는 영장류'로 정의하고 있다. 그런데 이 습관성 직립 보행의 특징으로 인해 인간은 복잡한 언어를 가질 수 있게 됐다. 직립 보행을 하면서 경추가 점점 지면에 수직으로 늘어졌고, 목도 머리의 바로 아래로 천천히 이동했다. 목구멍도 아래로 내려왔다. 그 결과 공기는 더 긴 소리 기관에서 긴 경로로 움직일 수 있게 됐다. 인간이 공기의 흐름 에 다양하게 간섭할 수 있는 긴 공간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숨을 쉴 때 공기는 목구멍의 성대를 통과한다. 성대는 높 은 빈도로 개폐할 수 있는데, 이 과정은 공기에 다양한 진동 주파수 를 만들어준다. 즉, 진동을 가진 공기가 입안으로 들어가, 입술, 치아, 혀의 활동을 통해 비강 등의 다른 부위와 조합해 다양한 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양한 발음이 복잡한 언 어의 존재 기반이자 전제 조건이라는 점이다.
- 오늘날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에서 일부 부시맨들은 아직도 매 우 오래된 언어를 사용하는데, 이 언어에는 140가지 정도의 발음이 있다. 그중 혀를 입천장에 붙인 후 힘차게 공기를 빼내서 튕기는 소 리도 있는데, 이러한 소리는 야외에서는 그리 멀리 퍼지지 않기 때 문에, 몸을 숨기고 사냥감을 기다릴 때 서로 의사소통을 하는 데 편 리하다고 한다. 조금은 생소한 발음 기술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토 착 언어가 호모 사피엔스의 거의 모든 발음을 사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복잡한 발음은 서로 다른 개념을 담을 수 있다. 그래서 호모 사피 엔스는 다양한 표현이 가능했다. 오늘날 학계는 호모 하빌리스, 호 모 에렉투스, 네안데르탈인들의 후두부와 발음기관의 구조가 호모 사피엔스에 비해 덜 발달되었을 거라고 판단한다. 그래서 그들은 다 양하고 또렷한 소리를 낼 수 없었고, 나아가 복잡하고 정교한 언어 도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것이 결국 문화 발전의 한계로 이어진 셈 이다.
- 네안데르탈인은 정밀한 언어를 구사하지 못해 복잡한 사회 조직 관계를 구축하기 어려웠다. 집단과 집단 사이의 끈끈함은 약하고, 배척의 강도는 높았다. 그래서 대규모 집단을 유지하고 함께 움직이 는 것이 불가능했다. 반면 호모 사피엔스의 정밀한 언어는 시공간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었다. 그래서 사회적 관계가 복잡한 사람 또는 모두에게 잘 알려진 사람이 설령 현장에 있지 않더라도 개체나 족군 간에 '조직 자원'을 제공할 수 있었다. 호모 사피엔스는 정밀한 언어 시스템으로 무형 네트워크를 구축해서 종의 내적 소모를 크게 줄였 고, 협동성을 키웠다고 할 수 있다
- 데이터를 보면 사실의 전모가 더 잘 드러난다. 학자들은 서아시아, 즉 지중해 동부의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의 집단 내 연령 분포를 확인했다. 그 결과, 두 집단의 노인 비율은 거의 동일하게 나타났다. 유럽 지역처럼 뚜렷한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카스파리는 서아시아 지역이 위도가 낮고 유럽보다 기후가 온화해서 인간이 살 기에 적합하기 때문일 거라고 말했다. 이 명확한 차이는 우리에게 또 한 번 “결핍이 우리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 날씨가 추운 유럽은 따뜻하고 온화한 서아시아보다 각종 생활 자 원에 심각한 결핍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결핍은 호모 사피엔스의 정밀한 언어와 그로 인해 늘어난 수명이 자연 선택되는 걸 촉진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유럽의 호모 사피엔스 노인들은 결핍에 대응하기 위해 생겨난 셈이다.
오늘날 인류학자들은 일부 수렵 부족의 어른이 여전히 정밀하고 복잡한 언어로 부족 무리에 지식을 전수하고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됐다. 뉴멕시코대학교의 학자 힐라드 카플란(Hillard Kaplan)은 노인들의 도움으로 ‘무리에 있는 후손들이 수적으로나 생 존율 면에서 모두 나아졌고, 조부모들은 복잡한 사회관계를 더욱 공 고히 했다'는 점을 발견했다. | 이로써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은 왜 서로 다른 운명의 길로 걸어갔고, 왜 호모 사피엔스는 점점 더 발전했는데, 네 안데르탈인은 결국 사라졌을까?”라는 질문의 답에 더욱 가까워졌 다. 많은 사람이 호모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 사이의 경쟁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 호모 사피엔스가 계획적으로 네안데르탈인들을 공 격하고 포위하여 최종적으로 그들을 멸종시켰다고 믿는 것 같다. 하 지만 이는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다. 사실, 호모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을 대체한 것은 의식한 것도, 계획한 것도 아니다. 그저 진화 과정에서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 혹자는 인류가 신석기 시대에 들어선 후에야 토기를 발명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토기 기술은 구석기 시대의 마지막 단계에 이미 출현했다. 예를 들어, 장시성 셴런둥(仙人洞) 에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복원 가능한 토기가 발견됐는데, 지금 으로부터 1만 2,000년 전의 것이다. 아마도 당시 인간이 동굴 안에 서 불을 사용할 때 무심코 흙을 태우고, 토기를 만드는 영감을 얻었 을 가능성이 크다. 많은 사람이 토기 기술의 위대한 의미를 간과하고, 단순히 원시 인류가 불에 구워서 만든 단지나 항아리일 뿐이라고 생각하는데, 사 실 토기 제조 기술에는 알려지지 않은 숨은 가치가 아주 많다.
만약 당신이 석기 시대의 여성이라고 가정해보자. 아이를 낳았는 데 젖이 나오지 않는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어머니 젖이 부족한 것은 흔한 상황이지만, 석기 시대에는 젖소도, 분유도 없었다. 이 경 우 갓 태어난 아이는 결핍에 목숨을 빼앗길 위기에 놓인다. 그런데 토기 기술이 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이 기술은 신석기시대에 발전해 확산되었고, 각지의 사람들이 표준화된 용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용기가 있으면 유동식을 만들 수 있고, 젖이 없는 어머니는 아이를 위해 쌀과 고깃국을 끓여줄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아기가 영양 부족으로 사망하는 비율이 현저하게 줄었다. 또한, 토기의 출현은 어머니의 수유 스트레스를 크게 줄여주었다. 여성들이 더 빨리 수유에서 해방되어 다음 출산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스탠퍼드대학교 동아시아 고고학과의 류리(劉莉) 교수의 언급처럼, 신석기 시대의 토기 기술은 인구 증가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 이 용기의 구체적인 사용 과정은 대략 이렇다. 먼저, 조상들은 좁쌀이나 기장 같은 곡물을 용기에 넣고 끓여 죽처럼 만든 다음, 소구 첨저병에 붓는다. 그리고 맥아 또는 다른 식물의 싹을 갈아서 넣 다(싹 안에 들어 있는 디아스타아제가 녹말을 포도당으로 분해하는 역할을 한다). 그다음, 약간의 물을 넣고 진흙으로 입구를 막아서 진공 상태로 만 든다.
미생물은 산소가 없는 환경에서만 포도당을 에틸알코올과 이산화 탄소로 바꿀 수 있다. 그런데 이 과정은 신경을 더 써야 한다. 이미 생물이 아주 연약하기 때문이다. 너무 높은 온도에서는 미생물이 쉽게 죽어서 발효가 이뤄지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구첨저병을 흙에 꽂아서 병의 온도를 내려가게 하고, 필요할 경우 병에 물을 뿌렸다. 온도가 너무 낮아도 미생물의 활력이 떨어져 완성된 술이 싱거워질 수 있다. 그래서 조상들은 병을 지푸라기 등으로 덮어 보온 했다. 아무튼 이렇게 정성을 들인 후, 일정 시간이 지나면 드디어 발 효가 완성된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술을 즐겼을까? 아마도 함께 술을 빨아 마셨을 가능성이 크다. 오늘날까지도 중국 서남부의 일부 소수민족은 술을 빨아 먹는 풍 습이 남아 있다. 술을 빨아 먹는다는 것은, 술이 담긴 용기를 가운데 두고 여러 사람이 둘러앉아 긴 빨대를 용기에 넣어 함께 마시는 걸 의미한다. 학자들은 신석기 시대의 몇몇 토기의 주둥이에서 세로 방 향으로 난 마찰의 흔적을 발견했는데, 초기 인류가 갈대 등을 이용해 술을 빨아 마실 때 남긴 자국일 가능성이 크다. 용기는 바닥이 뾰족해 침전물이 쉽게 모이게 되어 있다. 즉, 침전물이 위로 떠올라 식감을 방해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 오늘날 일부 맥주 공장의 발효 탱크도 이러한 바닥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음주는 양사오 문화 시기에 비교적 흔한 일이었을 것이다. 출토된 부장품으로 볼 때, 그 당시는 아직 사람 사이에 지위와 재력의 차이 가 형성되지 않았다. 같은 무리에 있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평등해 서 같은 용기에서 술을 마실 수 있었다. 빈부격차가 나타나기 시작 한 건 양사오 문화 이후, 즉 룽산 문화 시대에 이르러서다. 사회 자 원이 부족한 사람들은 아래로 눌렸고, 결핍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사 람들이 상위 계층을 이뤘으며, 귀천의 구분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때 술을 마시는 용기에도 변화가 생겼는데, 빨아 먹는 용기에서 점차 독립된 개인 용기로 바뀌었다. 사람과 사람 간에 경계가 뚜렷해진 것이다. 이는 중국 사회가 복잡해졌고 이 과정에서 사회 계층 이 분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증거이다.
- 좀 더 거시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알코올을 분해하는 능력은 인간이 자연계 대부분의 동물보다 강하다. 천부적인 음주 재능은 아마도 결핍에 의해 생겨났을 가능성이 크다. 성질로 나눠보면, 술은 과실 주에서 양조주, 다시 양조주에서 증류주에 이르는 과정을 거쳤는데 우리 조상들은 언제부터 넓은 의미의 과실주를 접하게 됐을까? 유전자 정보로 보면 약 1,000만 년 전이다. 2015년 한 연구진이 미국국립과학원회보 「PNAS」에 연구 성과를 발표했다. 인간을 포함한 몇몇 영장류의 몸에서 에탄올 대사와 관련 된 유전자가 약 1,000만 년 전에 자연 선택되어 확산되었다는 내용이다. 당시는 넓은 의미의 인간조차 나타나기 전이고, 인간, 침팬지 그리고 고릴라가 어떤 고대 유인원을 공통 조상으로 가지고 있을 때다. 이 고대 유인원은 숲에서 생활할 때, 종 내 경쟁에 밀렸거나, 그 외의 다른 어떤 이유로 정상적인 열매를 충분히 먹을 수 없었다. 그 래서 어쩔 수 없이 이미 무르고 변질되기 시작한 열매를 먹어야 했 다. 이 열매들은 보통 떨어진 낙엽 사이에 묻혀 있었는데, 습하고 따 뜻하며 공기의 유통이 부족한 환경이 형성되면서 일부 과일은 발효 되어 알코올을 만들었다. 그렇게 알코올을 먹은 고대 유인원이 자연선택의 선호를 받았다. 알코올에 내성이 없는 유인원은 술에 취해서 나무에서 추락하거나 위험에 대한 경계심이 떨어져 맹수에 도전했 을 수도 있다. 그렇게 그들의 유전자는 점차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알코올에 내성을 가진 개체는 자신의 유전자를 지속하고 확산시킬 수 있었다. 나중에 이 고대 유인원들은 고릴라, 침팬지 그리고 인간 으로 점점 분화되었고, 알코올을 잘 분해하는 유전자는 이 세 종 모두에게서 발견되었다. 그 후 인간은 알코올 함량이 더 높은 양조주와 증류주를 발명해 계속해서 자신을 취하게 만들었지만, 그것은 또 다른 얘기일 뿐이다. 내가 보기에도 알코올을 대사하는 능력은 결핍 의 압박 속에서 생겨난 것 같다.
- 상하이 푸단대학교 분자인류학 박사 얀시(嚴實)는 전국적으로 광범위한 표본을 추출하고 취합하여 통계를 낸 후, 대략 60%의 중국남성이 중국 신석기 시대 5대 슈퍼 조상의 후손(『중국인의 슈퍼 조상(中 國人的初級祖先 : 국내 미출간)』 참조)이라고 밝혔다. 슈퍼 조상이란 신석기 시대에 더 많은 출산의 기회를 가졌던 남 성을 일컫는다. 즉, 그 슈퍼 조상이 매우 많은 자손을 번성시켰고, 이 자손들이 계속해서 확산되면서 광범위한 유전자 전파를 실현한 것 이다. 이들의 핏줄은 결국 중국 인구의 바다로 이어졌다. 나는 얀시 박사를 찾아가 피 검사를 한 적이 있는데, 나 역시 신석기 시대 5대 슈퍼 조상 중 하나의 후손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이 중국 민족의 슈퍼 조상과 Y염색체 아담은 그다지 비슷하지 않다. 이는 슈퍼 조상이 비교적 짧은 기간에 많은 자손을 번성시켰다는 얘기인데, 일부 학자들은 권력을 통한 성의 독점이 이뤄졌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이 가설을 접하며 나는 오스카 와일드의 “삶의 모든 것은 성에 관한 것이고, 성 자체를 제외하면 성은 곧 권력에 관한 것이다(Everything in life is about sex, except sex. Sex is about power).” 라는 명언이 떠올랐다.
중국의 신석기 시대도 마찬가지다. 소수의 남성은 부계 씨족 간의 정복 전쟁에서 큰 권력을 손에 넣었고, 이로써 성 자원을 독점한 후 주변 여성들과의 사이에서 많은 자손을 낳았다. 그런데 한 자연 집 단에서 남성과 여성의 수는 대략 1.1:1이다. 많은 여성이 극소수 남 성에게 독점된다면 다른 남성들은 어떻게 할까? 오늘날 일부일처제 사회에서는 남성이 배우자를 찾고 후손을 남길 수 있는 확률이 크게 높아졌지만, 신석기 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스탠퍼드대학교의 한 과학 연구팀이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에 자신들의 연구 성과를 발표했데, 신석기 시대에 남성 Y염색체의 다양성이 갑자기 낮아졌 다는 내용이었다. 이는 당시 부계 집단 간에 치열한 번식 전쟁이 일 어났고, 출산의 기회가 특정인에게 고도로 집중됐음을 의미한다. 구 석기 시대의 호모 사피엔스 부족 사이에 있었던 폭력적인 충돌은 신 석기 시대에 더욱 격렬해졌다. 농업 때문에 사람들이 물러날 수 없 었던 것이다. | 채집과 수렵의 시대에는 주거가 일정하지 않았으니, 전투에 패배 한 쪽이 다른 곳으로 이주해서 살면 됐다. 하지만 신석기 시대에는 정착 생활을 했고, 토지, 가옥, 가축 등 사유재산을 가진 상황이었다. 따라서 전투의 승자는 이 모든 것을 가졌고 패자는 다 잃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많은 남성이 사망했고, 여성과 자손을 번식할 수 있는 권리는 소수의 승리자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계속되는 전쟁의 승리를 통해 선택된 통치자와 전쟁 영웅들이었다.
연구팀은 디지털 시뮬레이션을 통해, 신석기 시대 성인 남녀의 결 혼 비율을 1:17로 추정했다. 대다수의 남성은 자신의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극도의 성 결핍 속에서 암울하게 역사의 무대를 떠났다.
성의 결핍은 남성들을 쉴 새 없이 경쟁하고 싸우게 만들었고, 심지어는 살인도 불사하게 했다. 이렇게 광범위하고도 빈번한 폭력 행위는 신석기 시대에 절정을 이뤘다.
- 토양에 아연이 부족하면 문제가 복잡해진다. 흉노와 선비 같은 북방 유목 민족은 위도가 높은 내륙 지방에서 오래 살았다. 그런데 그곳 대부분의 토양에는 아연이 부족하다. 게다가 북방 유목 민족은 주로 육식을 하는데, 육식에 있는 구리는 인체에서 아연과 길항작용 (抗作用)을 일으킨다. 결국 육식을 많이 하면 아연의 흡수에 어느 정도 지장을 받는 것이다. 그 결과 흉노와 선비족의 여성은 오랫동안 심각한 아연 결핍 상태에 있었다. 고고학자들은 이 시기에 출토 된 일부 유골을 분석하고, 화학 실험을 통해 이 결론을 증명해냈다.
앞에서 언급했듯, 아연의 결핍은 출산 시 임신부의 사망률을 높인다. 그래서 역사상 북방 유목 민족 사회에서는 가임 여성의 사망률이 높았고, 결론적으로 극심한 남녀 불균형이 빚어졌다. 이런 이유로, 순조롭게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성은 매우 귀중한 존재였으며, 쉽게 밖으로 유출할 수 없는 자산이었다.
가오카이 박사는 인구 붕괴와 민족 멸종을 막고 가족의 핏줄을 이 어가기 위해 수계혼의 풍습이 생긴 것으로 추정했다. 과거 한 학자 는 수계혼의 세 가지 원칙을 이렇게 총결산했다. 첫째, 수계혼의 대상이 되는 여성은 반드시 과부여야 한다. 다시 말해, 자기 아버지나 형이 살아 있을 경우엔 계모나 형수와 혼인할 수 없다. 둘째, 장가드 는 사람은 망자의 사회적 관습에 맞는 혼인 계승자여야 한다. 셋째, 수계혼은 공개적인 결합이고 정당한 관계이다. 은밀하게 이뤄지는 사통 관계가 아니다.
세 가지 원칙은 북방 유목 민족 사회에서 수계혼이라는 근친혼이 가져올 폐해를 없했을 뿐 아니라, 건강한 가임 여성이 가족 내에서 핏줄을 이어갈 수 있도록 했다. 만약 가오카이 박사의 추측이 맞다. 면, 수계혼이라는 풍습은 당시의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겨난 것이다. 결핍이 이 풍습을 만들어냈다는 얘기다.
물론 삼국, 양진, 남북조 시대의 사람들은 미량 원소의 개념을 알 지 못했다. 한족과 다른 소수 민족들은 부족한 자원과 생존 공간을 두고 다툴 뿐만 아니라, 결핍으로 인한 문화적 충돌을 일으키며 서로를 적대시했다. 이런 큰 배경하에서 중화 대륙의 연이은 전쟁은 끝없이 사상자를 냈고, 수많은 학자가 삼국, 양진, 남북조 시대를 중국 역사상 가장 어둡고 혼란했던 시대로 결론 내렸다. 그 어둠과 공 포의 정도는 명나라 말기에 견줄 만하다.
- 결핍과 결핍에 따른 파장이 17세기의 주된 흐름이었다. 볼테르 (Voltaire)는 이렇게 말했다. “17세기는 권력 찬탈의 시대였고, 전 세계 는 강탈과 약탈, 악행의 무대였다.”  20세기 중엽, 영국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E. J. Hobsbawm)은 “17세기 유럽은 경제 불황, 식량 부족, 사망률 상승, 사회 반란이 빈번하던 시대를 거치면서 위기를 맞았다”고 했다. 오늘날 사학계에서는 보통 이 위기를 '17세기 위기'라고 부른다. 제프리 파커(Geoffrey Parker)는 17세기의 위기를 심도 있게 연구했는데, 1차적인 수치로 볼 때 당시
전 세계 인구의 1/3이 빈번한 전란과 기근, 전염병으로 사라졌을 것이라고 했다.
현재 많은 학자가 이 같은 글로벌 위기의 주된 원인으로 오늘날보 다 현저하게 추웠던 17세기의 기후를 꼽는다. 특히 17세기 중엽에는 태양 활동이 뚜렷하게 약화되어서 추위가 더욱 심해졌고, 전 세계 각지에 일련의 혼란을 불러일으켰는데, 명나라 말기의 적지 않은 문 헌 기록에서 극한 기후가 남긴 여러 징후를 찾아볼 수 있다. | 천계 원년(天啓 元年, 서기 1621년) 봄, 양쯔강 중하류와 그 이남에서 눈이 40여 일간 계속되었고, 둥팅호(洞庭湖)가 얼음으로 뒤덮였다. 숭 정 6년(서기 1634년), 황허강이 얼어붙고 얼음이 돌처럼 굳었다. 숭정 9년(서기 1637년)에 중국 최남단 하이난섬에 눈이 3일 동안 쉬지 않고 내려 초목이 전부 죽었다. 1641년 쑤저우(蘇州)의 복사꽃은 예년보다 약 2주 늦게 폈다. 이듬해 장쑤성에는 초여름에 서리가 내렸고, 학자 들은 이 정보로부터 17세기 중엽의 기온이 현재보다 2°C가량 낮았 을 것으로 추측한다.
- 기근과 전란 외에 전염병도 명나라의 멸망을 증폭시킨 중대 요인이다. 결핍이 어떻게 다양한 전염병을 일으키는지, 많은 사람이 그 과정을 생소하게 느낄 것이다. 미국 시카고대학교의 명예교수 윌리엄 맥닐(Willian McNeil)은 저서 『전염병의 세계사 (Plagues and Peoples)』에 서 다음과 같은 관점을 제시했다. “한 지역에 전염병이 기승을 부리 는 것은, 그 지역의 환경이 균형을 잃었기 때문이다. 병원체와 인간, 동물 사이에 균형을 잃으면 전염병이 폭발해 다시 균형을 이룰 때까 지 수많은 숙주를 감염시키고 죽인다." 이 이론은 명나라 말기에 충분히 검증되었다. 17세기 중엽, 명나 라 백성은 비교적 작은 범위 내에서 장기간 생활하며 해당 지역의 미생물 환경에 적응했다. 하지만 가뭄이 심해지고 황충의 습격이 연달아 일어나자,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인구의 대량 이동은 각지 미생물 환경의 균형을 파괴하는데, 이는 전염병의 대규모 확산을 위한 최고의 조건이 된다. 또한 농작물의 수확량이 적거나 아예 없을 때, 사람들은 식단 범위를 확대하고 설치류 동물처럼 평소에 먹지 않던 식재료를 먹게 된다. 이때 감염된 동물일 경우 쉽게 잡힌다. 그래서 굶주림으로 면역력이 약해진 사람 들이 병원균과 접촉해 더 쉽게 감염되는 것이다.
결국 근본적인 원인은 식량의 결핍에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전 염병은 가뭄과 충해로 인해 비롯된다. 1640~1641년에는 재해와 전염병이 일상적으로 존재했다. 명나라 말기의 산둥안후이 등에서는 심각한 기근 외에도 절반 이상의 백성이 전염병으로 죽었고, 대추만큼 큰 파리가 하늘을 가득 뒤덮고 춤을 췄다.
- 해발 2,851m의 탐보라 화산은 인도네시아 숨바와섬 북쪽에 위치 한다. 1815년 4월 5일부터 12일까지 탐보라 화산에는 VEI(화산 폭발 지수) 7의 맹렬한 폭발이 있었는데, 1,000억m33의 분진이 쏟아져 나왔 고, 고온의 화염이 공기를 뒤흔들고 광풍을 이뤘으며, 섬에 있는 거 목들이 뿌리째 뽑혔다. 넘쳐흐르는 마그마는 지나는 길목에 있는 모 든 것을 삼키고 바다로 흘러들어가 바닷물까지 끓어오르게 했다. 또 한 화산재와 돌 조각이 날려 하늘을 뒤덮고, 반경 수백km 이내의 마 을이 전부 파괴되거나 매몰됐으며, 1만 명 이상의 사람이 즉사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 탐보라 화산의 폭발로 약 150km2의 화산재가 평류층(平流)으로 분출됐다. 화산재에 함유된 거대한 양의 이산화황 구름은 고반사성 입자와 섞여 대기를 타고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햇빛을 전부 반사해버렸다. 이 현상의 가장 직접적인 결과는 지구의 기온 하락이 었다. 극심한 기온 하락으로 광합성이 약화되고 수정 난도가 높아지자, 세계 각국의 농업기반이 크게 흔들렸다. 탐보라 화산이 폭발한 이듬해인 1816년에 화산으로 인한 기온 하락 효과가 명확하게 드러났고, 북반구 대부분의 나라에 여름이 오지 않았다.그래서 1816년을 '여름 없는 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해, 흉년이 전 세계를 휩쓸었고, 미국의 전(前) 대통령과 중국 윈난의 농부들은 약속이나 한 듯 심각한 곤경에 빠졌다. 윈난 지역의 농민들은 1816년의 흉년에 속수무책이었다. 당시 윈난성의 주요 작물이 벼였는데, 기온과 벼의 성장은 매우 깊은 연관이 있다. 윈난은 위도는 낮지만 해발고도는 높다. 대부분의 지역이 해발 1,500m 이상인 고지대라 사계절 기온 변화가 심하지 않고, 겨 울도 북방처럼 춥지 않다. 여름에도 찌는 듯한 더위가 없다. 상대적 으로 안정된 이러한 기온에서 벼가 잘 자라려면 8월 평균 기온이 18°C를 밑돌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쌀알을 맺지 못한다. 충분한 햇빛도 매우 중요하다. 쌀알의 크기와 질량은 광합성을 통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1816년에 탐보라 화산 폭발은 기온을 낮 췄을 뿐만 아니라 햇볕도 앗아갔다. 윈난의 8월 평균 기온은 이상할 정도로 낮았고 한여름에 서리가 내려 윈난 사람들은 평생 처음으로 눈을 구경하기도 했다. 그 결과 현지 벼농사는 그야말로 재앙과 같 은 흉작이었다. | 윈난 사람들은 벼 대신 다른 특정 작물을 심기 시작했는데, 이로 인해 식량 결핍이 더욱 심화되었다. 이는 대재앙의 도화선이었다. 이 특수한 작물은 중국 고난의 근대사에서 매우 불미스러운 역할을 맡았고, 청나라 붕괴에도 한몫했다. 그것은 바로 양귀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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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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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측의 역사

역사 2022. 4. 6. 19:59

- 영과 접촉한다는 것은 곧 '평범한' 세계를 떠나 변성의식상태로 들어감을 의미한다. 변성의식상태는 '정신 기능에 대한 주관적 경험이, 의식이 명확하게 깨어 있을 때의 일반적인 기준에서 크게 벗어났다고, 본인이(또는 그를 지켜보는 객관적 관찰자가) 주관적으 로 인식하는 정신 상태'로 정의할 수 있다.2 잘 알려진 사례로는 중독, 희열, 가수 상태, 최면, 간질 등이 있다. 인간 정신 상태의 여 러 형태를 연구하는 일부 학생들은 내가 이전 저서에서 그랬듯 이 목록에 꿈을 포함하기도 한다. 형태가 무엇이든 간에 변성의식상태의 공통점은 이 상태에 빠진 사람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꾸 는 듯 보인다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주위 환경에 대한 샤먼의 인 식 능력을 일시적으로 떨어뜨린다. 동시에 그 외의 다양한 것들을 인식하는 능력을 강화한다(또는 사람들이 그렇게 믿는다).
- 샤먼 본인에게서 나온 정보와 샤먼을 관찰한 사람들에게서 나온 정보를 조합해서 볼 때, 겉으로 나타나는 이 모든 증상은 샤먼의 정신 상태와 어느 정도 유사성을 보인다. 하지만 완전히 동일 하지는 않다. 얼마 전부터 MRI 검사를 통해 샤먼 의식을 포함한 전반적인 변성의식상태가 생각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진 뇌 부위의 전기 신호 패턴을 바꿀 수 있는지를 알아보려는 시도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 방법을 통해 한 연구팀은 변성의식상태 가 발생하는 동안 '정상'에서 가장 크게 벗어나는 뇌 부위가 후방 대상피질, 배측전방대상피질, 섬피질임을 발견했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이 입증된다 해도 샤먼의 주관적 경험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변성의식상태로 넘어가는 데 사용하는 방법은 문화마다 각기 달랐다. 시베리아에서는 증기로 가득 찬 방에서 시간을 보내기 도 했는데, 이런 증기실 안에서는 샤먼의 혈압이 올라가 땀으로 뒤덮인 극도의 흥분 상태에 빠졌다. 모든 문화에서 가장 흔히 사용된 방법은 음악이며, 특히 노래하고 방울을 흔들고 일관된 리듬 으로 북을 치는 행위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최면 효과를 낸다. 이런 음악은 샤먼이 직접 연주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연주해주기도 한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춤, 기도, 고독, 철야기도, 단식, (정화 방식으로서의) 구토, 자학 행위, 신진대사를 촉진하거나 느리게 하는 호흡법이 있다. 성적으로 금욕하거나(드물게는 신성한 섹스를 하기도 했다) 독한 알코올음료를 마시기도 했다. 의식 전체나 일부는 다른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일부 문화에서는 사 람들이 보지 못하는 실내나 어둠 속에서 의식을 치렀다.  전과 다른 정신 상태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일부 샤먼은 마술적 힘이 있다고 여기는 특별한 지팡이로 땅을 두드렸다. 일부 샤먼은 옷을 전부 벗었는데, 이것이 변성의식상태로 들어가기 위한 방법이었는지 그 이후에 나타난 결과인지는 알기 어렵다. 마지막 으로 샤먼은 영과 관련된 것으로 여기는 특정 물질을 섭취하기도 했다. 일부 학자는 이러한 물질 섭취가 종교의 기원을 나타낸다고 믿으며, 그중 한 명은 예수가 샤먼이었으며 '지금 여기'라는 한계 를 초월하기 위해 추종자들과 함께 환각 버섯을 섭취했음을 증명하려고 시도했다. 실제로 샤먼과 추종자들의 환각제 사용은 전 세계 여러 지역에서 기록되었다. 일부 문화에서는 이와 같은 의 식을 치르며 양과 염소 같은 피 흘리는 동물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의 목표는 샤먼, 또는 그의 정신(그의 몸은 제자리에 남아 있으므로)이 일상적인 환경을 떠나 미스터리한 여행에 나서게 하는 것이었다. 
- 잘 때 왜 예지력이 생기는가에 대한 설명은 무척 다양하다. 아이스킬로스는 “잠자는 정신은 두 눈에서 자유로워진다”라고 말했 다. 그와 얼추 동시대를 살았던 핀다로스는 꿈이 “즐거움과 불행 중 무엇이 올지를 결정하는 것”을 즐긴다고 믿었다. 기원전 4세 기 초의 장군이자 작가였던 크세노폰은 사람의 영혼이 죽음과 유 사한 수면 상태에 있을 때 그 신적인 특성이 가장 잘 드러나며 육신에 꽉 매여 있지 않기에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헬레니즘 철학가였던 이암블리코스는 잠든 영혼이 이제 신체를 운영할 필요가 없으므로 미래를 포함한 현실에 대해 자유롭게 숙고 할 수 있기 때문에 꿈에 예지력이 생기는 것이라 설명했다. 또한 영혼이 몸과 더 잘 분리될수록 영혼의 근원인 모든 것을 아는 지적 또는 신적 본질과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플루타르코스가 보기에 꿈은 특정 유출물'의 결과였다. 이 유출물들은 바깥 에서 구멍을 통해 몸으로 들어와 꿈꾸는 사람에게 미래의 환영을 보여주었다. 이보다 훨씬 뒤인 서기 4세기에 그리스도교 작가인 아타나시 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몸이 잠들어 가만히 쉬고 있을 때 사람은 내면에서 움직이고있다. 그는 자기 바깥에 있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낯선 땅을 가로지르며 친구들을 만나고 종종 그것[꿈] 들을 통해 매일의 행동을 예측하고 미리 알게 된다.
여기에는 수면이 초자아의 경계를 늦춰 원래는 저 깊은 곳에 있던 것을 표면으로 끌어올린다는 프로이트의 개념과 유사한 면이 있 다. 꿈은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었기에 사람들은 꿈을 꾸려고 특별 한 노력을 기울였는데, 예를 들면 자신이 조언을 구하는 신, 특히 그리스의 의술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에서 잠을 잤다. 이 만큼 자주 쓰인 방법은 아니었지만 신성한 동굴에서 머물며 단식을 하거나, 월계관을 베개 밑에 두는 것처럼 여러 물건과 함께 잠들기도 했다. 2세기 시인인 유베날리스는 당시 로마에 동전 몇  을 받고 즉시 사람들이 원하는 꿈을 파는 유대인 여성들이 있었다고 말한다.
- 1850년에서 1920년 사이는 심령주의의 황금기였다. 심령주의는 영국과 미국, 유럽 전역에 서 중산층 이상의 신사 숙녀를 포함해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심지어 실증주의 및 유물론과의 전투에 말려든 교회마저도 어느 정도는 심령주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에이브 러햄 링컨의 아내 메리 토드도 심령주의를 믿은 사람 중 한 명이 었다. 두 아들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메리 토드는 심령주의를 백악관으로 들여와 영매를 고용하고 심령술 모임을 열었으며 그 중에는 링컨 대통령이 참석한 모임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노예제 를 폐지하라고 링컨을 설득한 것이 메리 토드와 그녀의 뒤에 있었 던 영들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심령주의를 믿은 또 다른 유명인으로는 〈셜록 홈스〉 시리즈의 저자이자 역시 아들을 잃은 경험이 있었던 아서 코넌 도일이 있다. 수많은 심령술 모임에 참여한 아서 코넌 도일은 심령주의와 영매를 변호하는 글을 여러 번 썼으나 나중에 지지를 철회했다.
아이작 뉴턴이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중력의 형태로 원 격 작용이 존재함을 증명했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힘이 존 재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이런 사고방식은 심령주 의를 실험한 상당수가 자연과학자였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가 장 초기에 심령주의를 믿은 자연과학자는 오거스터스 드 모르간 (1806~1871)이었다고 전해진다. 선구적인 논리학자이자 수학자 였던 드 모르간은 대수학의 기본 법칙을 발견했고 지금도 그의 이 름을 딴 달 분화구가 남아 있다. 또 다른 두 명은 19세기 최고의 전자기학 전문가이자 오늘날에도 사용되는 방정식을 도출한 제 임스 클러크 맥스웰의 제자들이었다. 그중 한 명은 존 윌리엄 스 트럿 레일리로, 맥스웰의 뒤를 이어 1879년부터 1884년까지 세계 적으로 유명한 케임브리지 대학 캐번디시 연구소의 소장을 지냈다. 1904년에는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고, 1905년에서 1909년까지 왕립학회장을 역임했다. 관심사가 다양했던 그는 과학과 종교를 조화시키려 노력했고 실제로 심령 연구 협회의 협회장을 맡기도 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인물은 올리버 로지였다. 1851년 부유한 지식인 집안에서 태어난 로지는 런던대학에서 물리학을 공부하 고 1877년에 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인리히 헤르츠의 작업에 대해 알지 못했던 그는 독자적으로 라디오파를 발견했다. 코넌 도일의 말처럼 동시대 사람들에게 로지는 “물리학과 심령학이라는 두 분야의 위대한 지도자 였다. 오늘날 그는 주로 점화 플러그를 발명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 임사체험은 죽음이 임박한 것이 아닌, 이미 죽었다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다시 살아난 것을 의미한다.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사 람들은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체험을 들려준다. 이런저런 수준의 임사체험에 관한 이야기들은 아마 모든 시기의 모든 문명에서 발 견될 것이다.37 임사체험은 중세에 만연했다가 종교개혁 시기에 인기를 잃은 뒤 19세기에 심령주의 운동과 연관되어 재등장했다. 1970년경 이후로는 완전히 인기를 되찾았고, 현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수가 많고 널리 알려져 있다.
- 알아차렸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샤머니즘, 예언, 신 탁, 해몽(꿈의 해석), 심령술(죽은 자와의 소통)에는 공통점이 있다. 예언자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상관없이, 이 방법들은 미래에 발생 할 일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평범한' 세계를 떠나 다른 세계로 진 입해야 한다는 가정을 깔고 있다. 현대의 분석가와 미래학자, 예 측 전문가가 하는 것처럼(또는 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이성과 논 리를 사용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이성과 논리를 한쪽으로 치워 놓고 거기에서 해방됨으로써 다른 영향력이 작용할 수 있도록 하 는 여러 수단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건 동전의 일면일 뿐이다. 가장 먼 과거에도 그러한 가정에 기초하지 않는 방법, 즉 미래 예측 방법을 개발하고 사용 하는 사람이 자신의 감각을 온전히 지니고 있어야 하는 방법들이 존재했다. 감각을 온전히 지녀야 했던 이유는, 눈앞에 보이는 것을 상세히 관찰하고 관찰한 내용을 이용해 규칙을 만든 뒤, 그 규칙을 이용해 미래에 대한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은 황홀경에 빠지는 대신 과학자, 또는 최소한 기술자의 태도를 지녀야만 한다. |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중 가장 먼저 등장해 가장 오래 지속된 방법은 점성술astrology(말 그대로 별들의 논리logic 또는 말word 이라는 의미다)이다. 글이 발명되기 한참 전에, 중석기 시대의 뼈와 동굴 벽에서 발견된 흔적에 따르면 아마도 2만 5천 년 전에, 사람들은 머리 위 하늘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그랬기에 하늘에서 벌어 지는 많은 일들이 주기적이며 질서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기 쉬 웠을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이해한 사람들은 하늘에서 관찰한 것 과 땅 위에서의 삶 사이에 있을 수도 있는 연관성에 대해 고민하 기 시작했을 것이다.
- 노스트라다무스는 아들 세자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집요하게, 그리고 아마도 헛되이 해온 작업을 돌이켜보았다. 그 일이란 신의 의지(신의 의지 없이는 아무것도 이뤄질 수 없었다)와 주술 (노스트라다무스는 주술을 강력 비난했다), 변성의식상태, 그가 찾고 있던 진정한 통찰력을 결합할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는 이 러한 통찰은 오로지 신중한 연구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말 했다. 당연히 그의 예언은 틀릴 때가 많았다. 1564년 남편을 잃은 프랑스의 카트린 드 메디시스 왕비를 만났을 때 노스트라다무스는 그녀가 평온할 것이라 단언하며 겨우 2년 뒤에 발생할 내전 을 예측하는 데 실패했다. 또한 그는 훗날 샤를 9세가 될 왕비의 아들이 아흔 살까지 살 거라고 주장했다(샤를 9세는 24세에 사망했 다), 노스트라다무스의 4행시(그의 저서 『예언 Propheties』은 4행시 942 편으로 이루어졌다)는 대개 시적이고 애매모호하다는 특징이 있었 고, 이러한 특징 덕분에 거의 모든 상황에 적용될 수 있었다. 아마도 이러한 이유로 여러 번 실수를 했음에도 명성에 큰 오점이 남지 않았을 것이다.
- 17세기 후반만 해도 우주에서 벌어진 일뿐만 아니라 지진과 엄청난 폭풍 같은 특이한 사건에는 분명 숨은 의미가 있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결국 한 역사가의 표현처럼 신이 내린 천재지변을 피할 수 있는 위험으로 바꾸어 전조에 대한 믿음이 사그라지게 한 것은 과학 혁명의 전개였다.20 그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에드먼드 핼리의 『혜성 천문학 개요 Synopsis of the Astronomy of Comets 』 (1705)다. 이 책은 1638년에 관측된 혜성이 1601년과 1531년에 그리난 적성과 같은 것임을 보여주었다. 또한 핼리는 그 혜성이 ITE년에 다시 나타날 것이라 예측했다. 그해 핼리는 사망하고 없었지만 정말로 혜성은 나타났다.
- 이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1749~1752년에 벤저민 프랭클린이 번개는 그저 전기의 방전이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었다. 번개는 다른 세계에서 보낸 전령이 아니라 자연현상이었다. 게다가 접지를 통해 다스릴 수도 있었다. 2~3세기 전에 그렇게 말했다면 아마 프랭클린은 처형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프랭클린 의 발견은 150년 뒤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막스 베버가 말한 “세계의 탈주술화"를 보여준 동시에 더욱 촉진했다. 하지만 변화는 점진적이었으며, 기이한 사건과 그 해석을 담은 목록은 이후로도 계속 출간되었다(오늘날에도 특히 인터넷상에서 계속되고 있다).
- 중세와 르네상스기에 숫자점은 모든 곳에서 계속되었다. 모든 숫자에는 개인이나 세상 전체에 관한 다양한 의미가 부여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숫자는 7이었는데, 아마도 일반적인 환경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시에 가장 많이 기억할 수 있는 개수가 7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22 7은 (지구를 나타내는 4에 하 늘을 나타내는 3을 더한 것이므로) 완전함과 완벽함, 우주를 의미했 고, 천지창조의 기간, 일주일의 모든 날, 일곱 교회, 성모 칠고七苦, 행성, 일곱 가지 성사, 일곱 가지 대죄, 일곱 가지 미덕(향주삼덕에 사추덕을 더한 것), 7년 대환란, 묵시록에 나오는 일곱 트럼펫과 일 곱 봉인, 아우구스티누스 역사의 일곱 시기, ‘주기도문'의 일곱 가 지 청원, 그리스도의 일곱 번의 여행, 미사의 일곱 순서, 인생의 일 곱 단계, 그리스도의 마지막 일곱 말씀, 음계의 일곱 음, 일곱 가지 선한 일을 나타냈다. 
- 성경을 이용해 예수가 재림하고 낙원이 펼쳐질 날을 계산하 고자 했던 여러 인물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이작 뉴턴이다. 심 지어 1704년에는 이 주제에 관해 다니엘의 예언과 요한의 묵시록에 관한 평론이라는 책을 쓰기까지 했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뉴턴은 먼저 다니엘에서 예언한 2,300일이 사실은 날이 아니라 해를 의 미한다고 상정했다. 그다음 어떤 해를 시작점으로 삼을지를 결정 하려 했다. 시작이 되는 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마케도니아인 이 페르시아제국을 멸망시킨 기원전 331년이라고들 믿는 “숫염소에게 작은 뿔이 돋아난” 때일까?(다니엘, 8:1~27) 아니면 예루살렘과 성전이 로마인에게 무너진 서기 70년일까? 아니면 “교황이 최고 지위를 얻은” 서기 800년일까? 아니면 그레고리 7세가 교황의 자리에 오른 1073년일까? 그다음 뉴턴은 「요한의 묵시록」에 언급된 숫자 1,290에 따라 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그리고 여러 난해한 계산을 통해 자신이 얻은 여러 결과를 조화시키고자 했다.
결국 뉴턴은 예수가 재림할 확률이 가장 높은 해로 2060년을 제시했지만 나중에는 그 해가 2090, 2132, 2344, 2374년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 당황한 그는 『성경』속 예언은 “종말이 올 때까지” 아무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 덧붙였으며, 그때가 오더라도 “악한 사람은 이해할 수 없다” 라고도 덧붙였다. 오늘날까지도 『성경』에 언급된 '날'이 정말 한 해를 의미하는지, 아니면 천 년을 의미하는지(「베드 로의 둘째 편지」 3:8~10)뿐만 아니라 일주일이 단순히 7일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1년이나 7년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 역사적 패턴이 반복된다는 생각(단순하고 일상적인 형태로는 이를 경험이라고 한다)과 역사가 순환한다는 생각은 현재에도 건재하다. 이 두 가지 생각을 토대로 저술 작업을 했던 20세기 후반의 유명 역사학자 중 한 명은 베스트셀러 『강대국의 흥망The Rise and Fall of Great Powers』(1987)을 쓴 폴 케네디였다. 이 책에서 그는 독자들에게 “제국적 과잉 팽창” 이라는 개념을 소개했다. 제국적 과잉 팽창은 국가의 크기가 국가 방어에 쓸 수 있는 자원의 양을 능가할 때 나 타난다. 케네디는 이러한 부조화가 발생하면 국가는 쇠퇴하다 결 국 무너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러한 사례로 스페인과 영국, 미국을 제시했다. 이 책은 냉전이 끝나기 겨우 2년 전에 나왔 는데, 소비에트연방의 사례도 들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고대 로마는 말할 것도 없는데, 로마의 사례를 통해 이러한 과정이 서기 2세기 후반부터 이미 일어나고 있었음을 설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제국적 과잉 팽창으로 인해 미국이 쇠 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미국은 자국 다음으로 국방비를 많이 지 출하는 열세 개 국가의 국방비를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돈을 국방 비에 지출하고 있으며(2019년 기준) 그 결과 막대한 재정 적자와 국제수지 적자를 겪고 있으므로, 미국의 힘은 점점 약화될 것으로 보인다. 사이클이 계속 서쪽으로 이동하며 미국 해안을 떠나 태평양 반대쪽에 도착한다면, 워싱턴은 자기 차례를 맞이한 베이징에게 권력의 자리를 넘겨주어야 할지도 모른다.
- 모든 것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는 지속적이고 확실한 하나의 '마스터키'는 한 번도 발견된 적이 없다. 아마도 프톨레마이오.스를 본받았을 일부 경제학자들은 최선을 다해 사이클 내의 사이클을 겹겹이 고안했다. 다른 경제학자들은 당시 발전 중이었던 과학 분야인 기상학과 천문학, 심지어 점성술을 모델로 삼았다. 그 결과 1878년부터 경제활동과 태양의 흑점 간의 상관관계를 입증하려는 무수한 시도가 있었다. 실제로 1900년경부터 예측forecasting'이라는 단어가 두루 쓰이게 된 것은 이런 다양한 분야간에 일어난 상호작용 때문이다. 심지어 굴지의 경제학자와 경영인이, 정부와 사기업이 '현대적’ 경영 방식을 적용해 사이클을 부순 결과 끝없는 번영이 시작되었다고, 또는 곧 시작되어 계속 이어질 거라고 믿은 시기도 있었다(1906에서 1908년, 1920년대 후반, 1950년에서 1969년, 1993년에서 2008년).  그러나 경기 후퇴와 불황은 계속 발생했고, 호황과 불황이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순환 모델은 여전히 미래 경제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남아 있다.
- 가장 먼저 변화의 영향을 느낀 곳은 유럽의 대도심이었다. 많 은 공장과 그 공장을 운영하는 노동자들이 집중되어 있던 곳도 대 도심이었고, 17세기부터 분침이 도입된 벽시계와 손목시계가 점 점 흔해지다 자부심 있는 모든 부르주아가 시계를 차고 다니게 된 곳도 대도심이었다. 17세기의 마지막 사반세기경에는 영국에 서만 매해 15만에서 20만 개의 시계를 생산했고 그중 많은 양을 수출했다. 마치 사람들이 이제 역사의 흐름을 어떻게 이해하는 지를 보여주듯, 어떤 시계에는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간다Tempus fugit”는 라틴어 격언이 박히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의 표현을 빌리 면, 시간이 공간보다 더 귀했다. 공간은 되찾을 수 있지만 시간은 그렇지 않았다.
변화가 너무 급작스럽고 거대했기에 아주 외딴 시골 마을에서 오랜 전통을 지키며 살던 사람들도 이 변화를 모를 수 없었다. 변화가 유럽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대서양 너머에서 벤저민 프랭클린, 토머스 페인, 토머스 제퍼슨, 존 애덤스 같은 인물들이 변화를 이어받았다. 이 네 인물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이 역사는 순환한다는 생각을 폐기하고 역사는 과거에서 미래를 향해 선형으로 나아간다는 생각을 점차 지니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특히 중요했던 또 다른 요소는, 19세기가 엄청난 제국주의 시대였다는 점이 다. 증기선과 철도, 소총, 말라리아 약으로 사용된 퀴닌 덕분에 유 럽인이 다른 대륙으로 넘어가 영향력을 떨치게 되면서, 수억 명의 전 세계 인구가 원하든 원치 않는 변화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 헤겔이 이전 학자들과 달랐던 점(당시 프로이센에 막 영향을 미 치기 시작하던 어마어마한 사회경제적 변화가 반영되었다)은 역사적 과정이 이 방향에서 저 방향으로 이동하다가 결국 그 어떤 본질적 변화도 없이 안정 상태에 도달하는 그래프의 선처럼 정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는 데 있다. 지난 6천 년 역사를 되돌아본 그는 (당시 사람들은 여전히 이러한 사안에서 『성경』을 지침으로 삼았다) 역사가 매우 동적이라고 생각했다. 역사는 뉴턴의 화살 같은 시간 속에서 언제나 새로운 형태를 띠며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이어졌다.
투키디데스와 마키아벨리 등등에게는 미안하지만, 역사는 패 턴이나 사이클처럼 복제되거나 반복된 적이 한 번도 없다. 물리학 의 영역에서처럼 같은 사건이 매번 똑같이 발생하지도 않는다. 물 리학에서 수소와 산소가 만나면 언제나 물이 된다. 압력이 일정하 게 유지되기만 하면 물은 100도로 가열될 때 언제나 증기로 변한 다. 빅탱 이후로 언제나 그래왔고, 우주가 존재하는 한 언제까지 나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헤겔이 이해한 것처럼 역사는 늘 변화 의 과정이었고, 그러한 역사 속에서 모든 사건은 유일무이한 동시 에 다른 모든 것들과 연결되었다.
- 헤겔이 역사의 진정한 본질과, 역사가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 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방식으로서의 변증법의 본질을 제대로 드 러냈다는 것이 마르크스의 시작점이었다. 그러나 또 다른 철학 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의 영향 아래 마르크스는 헤겔의 이론을 거꾸로 뒤집어 버렸다. 마르크스는 생각이 행동을 추동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활동'이 생각을 추동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말한 생 명활동은 특히 경제활동, 즉 일이었다. 마르크스는 일을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활동으로 여겼는데, 일은 오로지 인간만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마르크스 본인이 입에 풀칠 하는 것을 늘 어려워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 생존을 위해 일하고 생산해야 하는 인간의 의무에서 비롯되어 역사 속에서 언제나 서로 경쟁하며 나아가는 '물질적 생산관계'는 변증법에 따라 발전했다. 이에 따라 노예제도가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했던 '원시적 공산주의'를 대체했다. 봉건제도가 노예제도를 대체했고, 자본주의가 봉건제도를 밀어냈다. 그리고 모든 현대 기술을 활용해 전보다 훨씬 발전된 형태로 돌아온 공산주의가 결국 자본주의를 폐기할 것이었다. 이 네 가지 생산제도는 각기 특유의 상부구조'를 발전시켰는데, 상부구조란 사회계급뿐만 아니라 상 층계급의 하층계급 지배를 설명하고 정당화하고 강화하는 종교, 법, 문화, 예술, 사상을 의미한다. 각 생산제도에는 이전 생산제도 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이번 장의 주제와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점 은, 각 생산제도가 그 안에 정반대되는 제도의 싹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때가 무르익으면 정반대의 생산제도가 기존 제도를 무력 화한다. 기존 제도가 사라지고 나면 번데기에서 나비가 나오듯 새 로운 제도가 등장한다.
- 역사를 이용해서 미래를 예측하는 네 가지 방법이 있다. 첫 번째 방법은 변하는 것은 아 무것도 없으며 모든 것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상정한다. 두 번째 방법은 변화는 순환하며 역사는 언제나 시작점으로 돌아가 계속 되풀이된다고 본다.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이 두 가지 방법은 기원전 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은 우연이 아닌데, 그때 가 과거를 이해하고 남기기 위해 과거의 사건을 조사' 한다는 의 미에서의 역사 개념이 처음 등장한 때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 두 가지 방법은 산업혁명이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18세기 말까지 함께 득세했으며, 오늘날에도 종종 이용되고 있다.  더 최근에 등장한 다른 두 가지 방법은 역사는 반복되지 않으며 변화야말로 역사를 구성하는 요소라고 상정한다. 이 두 방법 은 19세기 초반에서야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는 과거와 현재 에 외삽법을 적용하는 것으로, 이렇게 하려면 역사는 화살처럼 특정 방향으로 흐른다고 가정해야만 한다. 다른 하나는 트렌드와 그 트렌드가 낳을 수밖에 없는 정반대의 트렌드를 모두 고려하는 것 이다. 이렇게 하면 양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질적 성장까지 고려할 수 있다.
이 네 가지 방법 모두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고도 유일한 방법은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라고 가정한다. 또 다른 공통점은 변성의식상태를 위한 공간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신의 계시도, 꿈도, 죽은 사람도 역사가 (어딘가로 흘러간다고 가정한다면) 어디로 흘러가고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줄지를 알려주지 못한다. 그 대신 이 네 가지 방법은 기록된 사실과 과정에 대한 냉철하고 객관적이며 편견 없는 연구에 기반한다. 여기서 과정이란, 현재에서 과거로 물러난 것으로 과거 안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으며 “분노와 열망 없이 sine Ira et studio" 주의 깊게 들여다보기만 하면 누구나 접근 해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어려운 점은 언제 일어난 어 떤 사건에 어떤 방법을 적용할지, 당면한 문제를 다룰 때 어떤 방 법을 사용할지, 이 네 가지 방법을 어떻게 결합할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마르크스 역시 이러한 어려움을 느꼈다. 마르크스가 이에 어찌나 분노했는지, 사건들이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처음에는 비극으로, 그다음에는 희극으로 일어나는 것 같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문제의 해답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아마 앞으로도 발 견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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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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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의 세계

역사 2022. 2. 5. 20:21

- 1만 2,000년 전, 지구의 인구는 단 200만 명이었다. 지구의 인구는 어떻게 그렇게 단시간에 70억 명에 이르게 되었을까? 게다가 곧 100억 명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중 10억 명은 영양실조, 다른 10억 명은 과체 중이다. 또 어쩌다가 인류의 1퍼센트가 전 세계 부의 절반을 차지하는 상황에 이르렀을까? 이러한 의문에 대한 단 하나의 해답, 역대급 멍청이 짓은 바로 신석기 시대의 도래, 달리 말해 정주 농업의 발명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정착생활을 통해 이전보다 훨씬 안정적으로 식량을 확보할 수 있게 되면서 사람의 수는 몇 세대 만에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수렵채집인이 3~4년마다 평균 1명의 아이를 낳은 반면 전통사회의 농업인은 매년 1명의 아이를 낳았다. 상당수의 아이가 어린 나이에 사망하긴 했지만 말이다. 이러한 인구폭발로 인해 수렵채집 사회는 밀려나거나 동 화되었고 심지어 학살까지 당하며 점차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브라 질 아마존 숲에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 가. 그러나 농업인이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외딴 지역에서는 수렵채집 생활방식이 조금 더 오래 유지될 수 있었다. 그래서 해양자원과 임산자원이 비교적 풍부한 생물학적 환경에서 성립한 일본의 조몬繩文 문화는 기원전 마지막 세기가 되어서야 농업사회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러한 인구폭발이 이번에는 또 다른 세 가지 바보짓을 불러 오고 말았다. 바로 노동, 전쟁, 지배계급이다. 
- 어리석음은 두 가지 면이 있다. 몇몇 사람이 권력욕을 가질 수 있다고 쳐도, 다른 대다수가 그것을 왜 인정해주었는지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500년 전, 에티엔 들라보에티Etienne de La Boétie 는 소논문 「자발적 복종 La servitude volontaire」에서 이에 대해 본질적 질 문을 던졌고 제법 설득력 있는 세 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첫 번째 이유로 그는 다른 세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만드 는 관습을 꼽았다(관습에 관한 특히 멍청한 명언으로는 대안은 없다There is no alternative가 있다.) 두 번째로는 시스템을 바탕으로 한 견고한 피라미드 조직망을 지적했다. 세 번째로 그는 사후에 더 나은 세상이 기다리고 있 다는 미명하에 순종과 인내를 가르치는 종교를 자발적 복종'의 원인으 로 제시했다. 실제로 군주들은 자신이 초월적 존재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하며, 의식을 치를 때 성경에 맹세하기보다는 스스로를 신격화 했다. 보에티가 왜 우리는 복종하기에 충분히 멍청한가를 설명하려 했다. 고는 하지만, 저항이 일어날 수 있다는 가설은 생각하지 못한 것 같다. 프랑스 인류학자 피에르 클라스트르 Pierre Clastres는 권력이 과도하게 팽 창되는 것을 막기 위한 메커니즘이 많은 전통사회에 존재했음을 지적했다. 실제로 지배계급에 대한 풍자, 의무적인 부의 재분배, 명성을 떨친 전사에 대한 결투 신청, 명망가가 사망했을 때 재산을 함께 매장하기 등의 메커니즘이 존재했다. 문서 기록이 존재하는 역사시대를 살펴보면 상궤를 벗어난 권력은 반란과 혁명을 통해 어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정치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더 민주적인 체제가 간혹 시도되기도 했 다. 이누이트나 그레이트플레인스 아메리카 인디언과 같은 일부 사회에 서는 계절에 따라 강제적 명령을 따라야 하는 시기(특히 사냥 시기)와 그 외의 일상적 '무정부' 시기를 번갈아가며 생활했다.
- 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빙하기의 수렵채집인과 비교해보면 농업은 인간을 훨씬 가녀리고 나약하게 만들었고 뇌의 용적도 줄어들게 했다.... 요컨대 문명화된 인간이란 고대 인간의 길들여진 버전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어쨌든 일부 고생물학자는 매우 설득력 있는 증거 와 함께 이러한 주장을 제시했다. 그것은 쉽게 이해되는 부분이다. 신격화된 왕의 협박에 입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은 예전의 공격적인 오록스 처럼 가장 먼저 죽임을 당했다. 입을 닫고 있어야 더 오래 살아남아 유 전자를 전달할 수 있는 기회를 더 많이 갖게 된다는 것을 인간이 깨닫 게 된 순간부터, 진화의 법칙은 자발적 복종으로 인간을 몰아갔다.
이제 요약해보자. 농업의 '발명'은 인간의 어리석음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인간은 자발적으로 길들여졌고 나약해졌으며 수많은 질병 에 노출되었다(예상치 않은 피해를 감수하지 않고서는 소, 닭, 돼지들과 공존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세균은 한 종에서 다른 종으로 옮겨가기 위해 가축을 이용 했다). 그럼에도 진화는 승전보를 울렸다. 지구상에 수렵채집인은 500만명에 이르렀고 서기 1800년경 농부는 10억 명에 이르렀으며 집약적 농업의 등장과 함께 인간은 머지않아 100억 명에 도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의 대다수는 도심에 모여 있다. 인간들 역시 집약적 축산으로 살아가는 소들만큼 행복할까?
- 예수라는 유대인은 4세기에 들어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사회적 측면에서, 왜 로 마 제국의 지배층과 사회 구성원들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였을까? 그것은 교회의 스토리텔링 덕분이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 복음을 강조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쌍봉낙타(사실은 단봉낙타)가 바늘 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
로마는 극소수의 특권층이 부와 권력을 점유한 극도로 불공평한 사 회였다. 서민으로 하여금 사회조직을 떠받치게 하려면 빵과 서커스가 필요했다. 이러한 관리 방식을 에베르제티즘evergétisme이라 부른다. 사 회를 떠받치는 이들의 삶을 유지하는 데 로마의 귀족은 자기 부의 일부 분을 내놓았고 그 덕에 서민들은 넉넉하게 먹을 수가 있었다(지중해에서 가장 비옥한 튀니지와 이집트 지역에서 들여온 수천 톤의 밀이 이탈리아로 공급되었다). 또 좋은 환경에서 노동을 하지는 못해도 후원자들이 자금을 제공해 지은 건축물 덕분에 공중목욕탕(로마에만 800개가 있었다), 극장, 검 투사와 이국의 맹수가 대결하는 서커스 등으로 기분전환을 할 수 있었 다. 이렇게 부를 나누는 행위는 19세기까지 다른 역사에서는 정말로 상 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로마 귀족들은 사회적 평화를 돈을 주고 산 셈이었다.
부자는 지옥에서 영원히 불탄다는 기발한 생각을 무조건 믿게 하면서 교회는 로마 시민뿐만 아니라 가난한 사람 모두를 지원하도록 귀족 을 설득했고 재산을 기부하도록 유도했다. 젊고 부유하며 아름다웠던 귀족 멜라니아(훗날 성녀가 되었다)는 400년 무렵,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하느님의 일을 행하는 데 바치기로 결심하고 노예 8,000명에게 금화를 3닢씩 나누어주며 해방시켜주었다. 그런데 이 배은망덕한 자들이 돈을 각출해서는 다시 노예로 삼아달라며 그를 고소했다! 자유롭게 해방된 후로는 노숙을 하며 힘든 일을 해야 했고 살아남기 위해 매춘을 하기도 했으므로, 그보다는 관대한 주인의 회초리가 더 부드럽게 느껴졌던 것 이다. 그들은 패소했고,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자유, 이 얼마나 멍청한 것인가.'
- 법률가 조엘 베이칸Joel Bakan은 기업을 사람(법인)으로 본다는 점에 착안해 기업들의 '인격적인 특성을 분석했다. 그는 DSM-II(미 국에서 사용하는 정신질환 진단 및 통계 매뉴얼, 1980년대 버전)를 이용해 기 업들을 진단했고 그 결과 법인이 완벽하게 사이코패스의 행동방식을 보였다고 주장했다. 기업은 타인의 감정, 이익, 안전을 깡그리 무시하고 오로지 주주들의 심리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기업은 공감능력이 없으 며 사람 간의 소원해진 관계를 회복시키지 못하지만 필요한 경우라면, 예컨대 기업을 광고하기 위해서는 완벽하게 공감하는 척할 수도 있다. 또한 기업은 절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혹독한 처벌을 받지 않는 한 약속을 지키지 않고 제멋대로 도덕적 기준을 무시해버리며 특히 조세 납부 면에서 가능한 한 잽싸게 법적 의무에서 벗어나려 한다.
- 다른 토착어와 마찬가지로 중국어의 고대어와 방언에는 멍청이를 일컫는 수식어가 매우 다양하고 많다. 그 뉘앙스도 멍청이를 비롯해 무식쟁이, 우둔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 맹추, 등신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이다. 그렇지만 전국시대 문헌을 보면 그런 표현 들은 대개 ‘愚(어리석을 우)’ 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어느 정도는 상상을 보태 이 단어의 어원을 찾아 가보자. '愚'는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아래에 있는 부수 心, 즉 마음은 대개 무엇인가가 심리적으로 깊 이 자리 잡는 과정을 가리킨다. 위쪽의 萬는 '우'라는 발음 부분으로 원 숭이를 가리킨다. 간혹 서기 100년에 지어진 최초의 중국 자전을 근거 로 긴꼬리원숭이라 하기도 한다. 긴꼬리원숭이는 진화적 관점에서 긴팔원숭이와도 무척 가까운 영장목으로 과거는 알지만 미래는 내다보지 못하는 반인반수라 할 수 있다. 먼저 이 단어의 다의성을 살펴보자. 긴 꼬리원숭이 우의 표기는 중국 고대 전설 속에 등장하는 위대한 인물 의 이름, '우禹'와 매우 흡사하다. 그는 둑과 댐을 쌓는 대신 그저 “물길 을 잘 다스리는 것만으로 대홍수에서 사람들을 구했다고 전해지는 어진 군주이자 가히 통치의 모범이 될 만한 인물로 칭송된다. '어리석을 우’ 자는 이런 군주의 이름을 그릇되게 모방한 글자다. 그러므로 멍청이란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하고 다른 이들을 어설프게 따라 하는 진부한 아류를 지칭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원숭이에 관련된 근거는 이내 사라져버렸고 문헌에서도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이후 '愚'는 슬기, 지혜, 통찰력과 같은 단어의 반대말로서 더 큰 의미를 갖게 되었 다. 즉, 어리석은 사람이란 지식과 경험을 쌓지 못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상황이 어떻게 변화할지 예측하지 못하고 다양한 상황에 따라 유연하 게 대처하지 못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 어리석음과 지혜의 가치 전복은 이 지점에서 완벽해진다. 어리석음이란 자신을 자기 안에 가둬두는 게 아니라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유일한 방식이다. 어리석음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정신수련 의 결과물이다(여기서는 음악을 통해 도에 이르렀고, 후대에 장자에 크게 영향을 받은 선불교 역시 정신적 혼돈을 통한 온갖 정신수련법을 통해 도에 이르려 한다. 이를테면 풀리지 않는 문제나 무아지경에 빠지게 하는 외침이나 충격 등을 이용한다). 그러면 어리석음은 내가 없어진 상태, 지식을 내려놓은 상태, 육신과 정신 안에서 멍해진 온전한 존재를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실제로 중국 현대문학이 널리 퍼트린 어리석은 자들의 초상은 이러한 도교 문헌에 상당 부분 빚지고 있다. 멍청이란 세상과 그 세상의 비웃음으로 인해 만들어진, 자신의 본질적 이면을 아는 사람이 쓰고 있는 외피일 뿐이다. 당연한 것이란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배우는 사람이 며, 지식의 오만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다. 흔히 소동파蘇東坡라 불리는 위대한 시인 소식蘇武(1037~1101)은 “크게 지혜로운 자는 크게 어리석어 보인다”고 했다. 큰 지혜를 가진 사람은 무상함과 겸손함을 알고 결코 자기의 재능을 뽐내지 않으며 어리석음으로 슬기롭게 자신을 감출 줄 안다는 의미다. 그렇지만 조심해야 한다. 어리석음이란 일시적인 것일뿐,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 서양인이 불교를 철학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서양에 불교를 들여 온 사람들이 불교의 교훈적 메시지를 토착화했기 때문이다. 요가나 그 외 여러 정신수련 활동도 마찬가지다. 반면 동양에서는 불교를 종교로 여긴다. 따라서 불교 사원이 있고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종교가 있으며, 선원이 있고, 으레 반복되는 의식이 있다. 장세바스티앙의 친구 루는 서양인 견습 비구로서 짧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네가 기독교 수도회에서 겪을 수 있는 모든 일은 여기 불교 선원에서도 겪을 수 있어. 질투, 비방, 증오, 폭력, 성 학대까지.” 불교가 마음의 학문이라면 명상이 결합되지 않을 수 없다. 불교는 다른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명상 수행을 한다(특히 힌두교는 명상 수행을 강조한다. 기독교 역시 묵상을 하는데 그도 그럴 것이 meditation' 이라는 단어부터 라틴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불교를 세계적으로 받아들여지게 하고 적응시키려 하는 상당수의 핵심 관계자가 망명 중인 달라이 라마 주변 에 포진하고 있었다. 그들 중 일부 의사와 승려는 명상이 기억력을 향상하고 스트레스를 풀어주며 수행 중인 승려가 뇌파를 조절할 수 있게 해 준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서양인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치료적 가치에 중점을 두다 보니 명상이 대다수 불교 선원의 핵심 가치가 아니라는 사실은 외면 당하고 있다. 실상 불교 선원에서는 의례를 행하고 경전을 연구하는 데 열중한다. 그런데 연구자들을 제외한 서양인은 이러한 경전 연구를 몹시 지루해한다. 그만큼 경전 연구는 까다로운 작업이다.
- 원시불교는 인도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서양의 사상과는 다르며 심지어 중국 사상과도 차이가 있다. 중국도 불교를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그 과정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1세기 초반에 중국에 들어온 불교는 만만치 않은 장애물에 맞닥뜨렸다. 인도 사상('힘겹게 쌓은 선업을 통해 해탈하기 전까지는 끝없이 계속되는 윤회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의 맥락에 서만 납득되는 불교 교리를 중국 사상(죽으면 저승에 가서 조상들을 만난 다')에 맞게 토착화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몇백 년이 흐른 뒤에야 두 사상이 융화될 수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두 가지 경향이 점진적으로 발전했다. 평생 동안 끊임없이 선업을 쌓아야 삶의 마지막에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인도 불교 사상을 옹호한 돈오점수(점법)와 살아 있는 동안에도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며 중국인을 포섭한 돈오돈수(돈법)다. 돈오점수는 동남아시아(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 태국) 의 남방불교(상좌부불교) 수행법이고 돈오돈수는 극동아시아(중국, 한국, 일본, 베트남)의 북방불교(대승불교) 수행법이다. 대승의 어원은 큰 수레 로, 더 많은 사람을 구제해 태우는 큰 수레라는 의미다. 대승불교의 한 갈래인 금강승불교는 티베트와 몽골의 불교로 금강승이란 금강의 수레 다. 밀교密敎라고도 불리는 금강승불교는 전문적 이론과 승려를 중심으로 한 교파다. 대승불교에는 구제에 이르는 수행법을 더 단순화한 여러 교파가 존재한다. 선불교에서는 문자에서 벗어나 곧바로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서 본성을 보아야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일본 정토 종에서는 죽음의 순간에 염불을 하면 극락왕생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혹시 또 모르니 여러분에게 그 염불을 알려드리겠다. 나무아미타불.'
미국의 일부 종교사회학자와 의견을 같이하는 프랑스 인류학자 마 리옹 다프상스는 20세기에 일종의 제3의 물결, 신新불교가 나타났다고 설명한다. 신불교는 교리를 단순화하고 불교를 세계화하기 위한 일종의 불교 운동으로, 불교도들의 이상을 선택적으로 재해석하며 서양에서 시작되었고 전 세계에 불교를 전파시킨다는 목표를 지향한다. 기존의 불교 신자는 이러한 주장이 자신들을 어리석다고 비난한다며 몹시 불쾌해했다. 그러나 나쁘게만 볼 필요는 없다. 우리는 종교가 전파되고 변화하는 융합의 시대에 들어섰다. 진정한 불교는 진정한 이슬람교, 진정한 기독교처럼 마음의 성찰로 대변된다. 상좌부불교는 대승불교를 품고 있고, 대승불교는 신불교를 품고 있다. 새로운 신자들을 포섭하기 위해 한 종교가 변모해가는 과정인 것이다.
- “남성과 여성의 차이는 단 한 번도 철학의 대상이 된 적이 없다.” 페미 니즘 사상 철학가 주느비에브 프레스Geneviève Fraisse는 『남녀의 차이 La difference des sexes』(1996)에서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최소한 말할 수 있 는 것은 철학자 대다수가 2,500년 동안 반페미니즘, 나아가 여성혐오를 통해 오히려 두각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이 현상은 성차별적 입장을 드러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필두로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시작 되었다. 예컨대 아리스토텔레스는 “용맹함은 사령관의 미덕이요, 순종은 여성의 미덕”이라고 천명했다.
기독교 성직자들에게서도 페미니스트적 면모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기독교 교회는 오랫동안 여성을 악마 같은 창조물로 여겼다. 하기야 창세기」에서 뱀(악마)의 말을 듣고 가련한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게 한 것도 이브가 아니던가? 그러므로 모범적 기독교도 페넬롱Francois Fenelion 신부(전문적 신학 교육을 받은 17세기 프랑스 성직자였다)가 여성의 지성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보여주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는 사실 은 그리 놀랍지도 않다. 그는 “여성의 지성은 타율적이므로... 마땅히 미덕과 행동규범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철학계에서 여성혐오로 메달을 수여한다면 평생 동안 여성을 증오 하는 말을 쏟아낸 쇼펜하우어에게 금메달이 돌아가야 한다. 그는 “여성과 남성이 동등하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전제"라고 말했다. 칸트도 둘째가라면 서럽다. “교양 있는 여성은 책을 마치 시계처럼 사용한다. 남에 게 보여주려고 시계를 차고 있을 뿐, 평소에는 그 시계가 제대로 작동하 는지, 시간은 정확히 맞는지 신경도 쓰지 않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철학자들은 모두 여성에게 적대적이었단 말인가? 침소봉대할 필요는 없다! 철학자들 중 일부는 여성의 종속성을 논하며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콩도르세, 샤를 푸리에, 오귀스트 콩트, 존 스튜어트 밀, 카를 마르크스, 존 듀이가 바로 그런 철학자들이다....
- 나폴레옹은 군사학교 시절부터 스스로 천재적인 지략가라고 생각했어요. 바로 그 점이 그의 잘못이기는 한데, 적어도 자신이 신적인 존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죠. 나폴레옹 이야기를 아실 거예요. 그는 고문관들에게 물었죠. “내가 죽으면 사 람들이 나에 대해 뭐라고 하겠나?” 그들이 한 목소리로 말해요. “오, 모든 사람이 슬퍼할 겁니다, 폐하. 그리고는 말하겠죠. 정말 위대한 분이셨다고요!” 그러자 나폴레옹은 이렇게 답했어요. “아냐, 사람들 은 '휴우, 이제 드디어 끝이구나!' 할 걸세.” 그는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않았어요. 
- 셔튼) 인간이 악마같이 되거나 밑바닥을 드러내는 상황을 만들고 싶으면 어떻게 하면 되는지 알려드릴게요. 
1 우선 누군가를 계속 압 박하고 늘 경계태세를 갖추게 하세요. 그럼 그에게서 점점 공감도, 배려도, 친절도 기대할 수 없게 될 거예요. 
2 잠을 못 자게 하세요. 실제로 많은 경영자들이 무척 적게 자죠. 
3 끊임없이 주변에 나는 이겼고 당신은 졌어' 식의 경쟁을 부추기고 리더의 행동을 비판 없이 받아들이며 그의 뜻대로만 끌려가는 직원들을 두세요. 진실을 말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목소리 높여서 주장해봤자, 연구 결 과들을 보면 어쨌든 기업의 리더는 언제나 아첨을 더 좋아한다는 것 을 알 수 있어요. 그러면 직원 입장에서는 리더에게 나쁜 소식을 전 해줄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고 그 때문에 비판을 받지는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리더는 원하든 원하지 않는 비굴한 아첨꾼들에게 둘러싸여 있죠....
바로 이게 합리적인 사람이 어떻게 고질적인 멍청이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답변이에요. 그렇지만 경제적으로나 유명세로 성공하고 싶다면 계속해서 멍청이로 있을 수는 없어요. 굴복시켜야 할 사 람과 곁에 두어야 할 사람을 식별하는 전략을 세워야 해요. 그래서 주변에 나를 차분하게 만들어주고 나 자신과 남에게서 나를 보호하 는 데 도움을 주는 직원을 가까이에 두는 것이 더 좋겠죠. 
- 셔튼) 심리학 연구를 보면 권력을 더 많이 가질수록 공감능력은 줄어들고 개인적 욕구는 늘어난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어요. 그렇지만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면 권력은 자제심을 느슨하게 풀어주기 때문에 진짜 인성이 더 쉽게 드러나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래요, 멍청이가 권력을 차지할 때도 있지만 멀쩡한 사람도 권력을 갖게 되면 멍청이가 될 수 있어요. 권력은 사람을 타락시키기도 하지만 이미 존재하고 있던 어리석음을 거리낌 없이 드러나게 해 주기도 하니까요. 저랑 조금 친분이 있는 실리콘밸리의 두 억만장자 를 예로 들어볼게요. 링크드인의 창업자 리드 호프먼은 정말로 호감 가는 사람이에요. 들어오는 부탁을 비서들이 계속해서 걸러내야 할 만큼 친절한 사람이죠. 진정한 인격이 성공을 통해 더 부각된 경우 라 할 수 있어요. 반대로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는 성공한 뒤의 모습이 그리 아름답지는 않았죠. 여러 투자자의 이야기를 들 어보면 그는 아주 탐욕스러워진 것 같더군요. 그에게서 아주 깊은 인상을 받았었는데, 굉장히 실망스러웠어요. 페이스북 창업 초창기 에 몸담았던 여러 사람을 아는데, 회사 분위기가 예전과는 많이 달 라진 것 같다고 하더군요.
- 셔튼) 경영자의 능력이 출중하면 때때로 그가 멍청한 행동을 해도 사람들이 참아줄 수 있겠죠. 저는 명석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불쾌하 게 하는 실리콘밸리의 엔지니어를 여럿 알고 있어요. 그들은 개방된 공간에서 일하면서도 이런저런 방법을 강구해 칸막이를 치고 구석 진 장소에 있으려고 하죠. 문제는 리더가 되려면 더 이상은 혼자서 배를 모는 항해사처럼 행동할 수 없다는 거예요. 팀으로 일해야 하 니까요. 그런데 그 리더가 사람들을 지치게 해 번아웃으로 몰고 가거나 그들을 무시한다면 장기적으로 볼 때 그 팀은 오래갈 수가 없 어요. 그렇지만 이건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제예요! 일부 경영자는 냉혹함이라는 특성을 드러내죠. 그들은 자신에게 반기 드는 것을 참지 못하고 직원들을 해고해버려요. 제가 보기에 그런 사람들 을 딱히 야비한 멍청이라 규정할 수는 없어요. 오히려 유능한 리더들이라 할 수 있죠! 팀원들과 격렬한 논쟁을 자주 벌였던 인텔의 전 CEO 앤디 그로브는 그 때문에 멍청이라는 평판을 얻게 되었죠. 실 제로 그는 절대 악의가 있는 사람은 아니었어요. 끊임없는 토론은 직원들 간의 경쟁을 유발하는 수단이기도 하니까요. 한편 최고의 기 업들은 기업 내에서의 의견 교환에 대해 기준을 명시한 내부 규정을 마련했어요. 그런 기업에서는 정면으로 하는 지적이 어느 정도 용인 되죠. 구글은 상대적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조성한 것으로 평가 받는데, 그 경우 공격은 더 교묘하게 이루어지겠죠. 킴 스콧은 실리콘밸리의 팀장들 Radical Candor』에서 어떻게 인간성을 잃지 않고 리더가 될 수 있는지를 설명했어요. 그는 이스라엘과 일본의 조직 문화를 소개했는데, 이스라엘 회사는 모두가 목청 높여 강력한 피드백을 하는 반면 일본 회사는 무언가 지적하는 것을 꺼린다는 것이었죠. 기준은 저마다 다를 수 있어요. 그런 면에서 미국에 대해 이야기하 는 것이 정말 싫지만, 민주당을 지지하는 공화당을 지지하는 예의의 규칙이 10년 전과는 달라졌다는 것을 인정해야 해요. 사람들은 이제 거리낌 없이 악의를 드러내요. 놀라울 것도 없는 게, 온라인에서 우 리는 상대의 눈을 마주치지 않죠. 상대를 바라보지 않는 소통은 공 감을 이끌어내기 어려워요. 트럼프 대통령이 다방면으로 멍청하다는 건 이미 증명되었지만 트위터에서는 한층 더 악독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것만 봐도 그렇죠.
- 고고학 자료에 따르면 일찍이 사회 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켰던 '포식'에서 '생산'으로의 경제 변화가 전쟁의 확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의외로 자원이나 새로운 토지를 획득하기 위한 공동 체간 경쟁은 전쟁 확산에 별로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같은 맥락에서 이주민 과 토착민, 즉 초기 농업목축인과 최후의 수렵채집인 간 전쟁을 증명할 만한 자료 역시 매우 미미하다). 동물 사육과 식물 재배를 통해 식량을 생산하면 서 야생 자원을 활용할 때와 달리 잉여물이 발생하게 되었고 이것은 이내 '소유'의 개념을 탄생시키며 불평등을 불러왔다. 축적된 식량은 곧바로 탐욕을 자극해 공동체 내부의 불화를 일으켰 을 뿐만 아니라 잠재적 노획물을 확보하기 위한 공동체 간 전쟁의 빌미를 제공했다.
- 신석기 시대에 유럽에서 (동굴벽화와 무덤에서 볼 수 있듯) 지배계급과 전사계급이 등장한 것이 그 증거다. 이러한 변화 역시 농업목축업이 중 심이 된 사회에서 위계질서를 탄생시켰고, 엘리트 계급과 특권계급, 전 사와 전쟁포로(농업은 공동체가 제공하는 노동력보다 더 풍부한 노동력을 필 S로 했다. 그때부터 전쟁포로는 노예가 되었고 노예는 마치 가축처럼 자손을 퍼 트리며 공동체의 확대에 기여했다)를 차례로 출현시켰다.
설상가상으로 자기만의 이익과 경쟁을 추구하는 엘리트 계급의 등 장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내부 반목과 공동체 간 전쟁을 촉발시켰다. 사회의 위계질서는 지배자와 노예를 가르는 사회적 분열뿐만 아니라 여성에 대한 폭력의 형태로 드러나는 성차별을 불러일으켰다. 가부장제가 등장하고 남성우위 사회가 이루어지면서 여성의 역할은 폄하되고 남성의 활동은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받았다. 특히 전쟁터에 나서는 전 사의 역할은 남자아이를 위한 수많은 통과의례의 원형이 되었다.
공동체 간 전쟁이 빈번하게 발생하게 된 건 기껏해야 기원전 5500년 부터였다. 기원전 3000년경부터 청동기 시대가 열리며 전쟁은 더욱 치열해진다. 금속으로 정식 무기를 만들고 귀중품(값비싼 재산이었던 도끼 등 금속제품을 보관하는 저장소)을 소유하게 되면서 이 시기에 전쟁이 하 나의 제도로서 자리를 잡았다. 이렇게 전쟁과 폭력은 '문명'과 함께 하나의 몸에 머리가 둘인 샴쌍둥이처럼 동시에 확산되고 발전했다.
- 마셜) 지구온난화가 미치는 가장 큰 영향은 기후가 아니라 사회적 측면에 관련되어 있어요. 일례로 강이 말라버리면 국가 전체가 영향을 받게 되고 국민들은 절망에 빠질 것이며 이웃 나라와 전쟁을 일 으킬 수도 있어요. 충분히 가능한 일이죠. 특히 중동 지역에서는요. 이것은 단지 제 의견만이 아니라 미 국방성, NATO, 군 전문가들의 의견이기도 해요. 역사적으로도 인간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 겁이 많아지고 불안해하다가 결국 미친 짓을 저질렀죠. 인간의 본성 에는 양면성이 있어요. 한편으로 인간은 협동적이고 관대하며 이타적이죠. 태풍과 해일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서로를 도울 거예요.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상황이 악화되면 인간은 서로 폭력을 휘두를 수도 있죠.
기후변화가 일으킬 문제 중 하나는 우리가 희생양을 찾으려 할 것이라는 데 있어요. 홀로코스트가 그렇게 시작되었잖아요. 완벽한 열패감을 맛본 독일인들은 공격할 거리를 찾아야 했죠. 비록 해결책 과는 거리가 멀었어도요. 우리는 이미 극우 정치인들에게서 그런 현 상을 목격하고 있어요. 자신이 무력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극우 정당에 표를 던지는 추세가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잖아요. 지구온 난화가 그런 현상을 확대하는 데 일조할까 봐 무척 걱정이 됩니다.
- “사람들은 역사를 만들지만 자기가 뭘 만들었는지 모른다.” 마르크스 에게 영감을 받은 프랑스 사회학자 레이몽 아롱Raymond Aron이 한 말이 다. 이 표현은 다른 형태로 되풀이되었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사회 학자 에드가 모랭Edgar Morin 은 각각의 결정은 예기치 않은 결과를 낳으 며 때로는 누구도 원치 않은 일련의 사건들을 일으킨다는 '행동생태학' 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 다. 1914년 6월 28일 벌어진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암살과 그로부 터 한 달 후에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6,500만의 군사가 동원되었고 2,000 만 명의 시민과 군인이 사망했으며 비슷한 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의 발발 사이에 유럽 주요국의 지도자들은 누구도 그 최종 결과를 예상하지 못한 일련의 선택을 했다. 바로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클라크Christopher Clark가 『몽유병자들 The Sleepwalkers에서 보여준 바다. 이러한 행위들이 불러온 최종 결과에서 드러나는 무분별은 역사의 흐름에(여기서는 무지함으로 간주되는) 어리석음이 개입했다는 가장 명징한 증거들 중 하나다. 나심 니콜라스 탈렙Nassim Nicholas Taleb는 그에 대한 원칙을 『블랙 스완Black swan』에서 다음 과 같이 일반화했다.
그저 단순하게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하루 전날, 여러분이라면 여러분이 이해하고 있는 세상에서 앞으로 그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 1933년 히틀러의 지지자들은 홀로코스트를 상상하지 못했다. 2003년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면서 조지 부시와 매파는 그것이 이슬람 무장 단체가 활개를 치는 데 훌륭한 빌미를 제공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겠 는가. 오늘날 모든 사람들은 가당치 않은 이유로 결국 그 지역에 재앙을 불러 온 전쟁을 일으킨 것을 후회하고 있다.
- 오만, 학술용어로는 휴브리스, 이는 역사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치는 어리석음의 또 다른 형태다. 그것은 거대함에 대한 열망이다. 열망의 근원 은 힘, 권력, 부, 특권을 향한 수컷들끼리의 경쟁이다. 그리고 힘에 대한 열망은 수많은 미친 짓을 감행하게 했다. 군주, 왕, 파라오, 기업가, 은행가가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하 늘을 향해 우뚝 세운 기념비, '오만의 탑'들을 보자. 가장 유명한 탑은 쿠푸 의 피라미드다. 쿠푸는 그토록 높은 피라미드를 축조하며 하늘에 더 가까이 닿고 싶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실상 선왕들보다 더 높은 피 라미드를 짓고 싶을 뿐이었다. 거대한 기념비를 축조하려는 이 무모한 경쟁은 고대 문명 전체를 관통하며 모든 거대 문명에서 관찰된다. 메소 포타미아, 이집트, 페르시아, 히타이트, 그리스, 로마, 중국, 인도, 앙코 르, 마야, 잉카, 아스테카에 이르기까지 최고 권력자는 권력을 드러낼 궁전, 사원, 피라미드를 건축하며 힘을 과시하는 데 열중했다.
중세시대에 건축에 몰두한 주교들 또한 이웃 교구보다 더 높은 첨탑 이 있는 대성당을 짓고 싶어 했다. 공식적인 명분은 신을 찬양하기 위해 첨탑을 높이 올려야 한다는 것이었지만, 높은 첨탑은 인간의 세속적 욕망의 결과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 프랑스 역사학자 조르주 뒤비Georges Duo 는 이렇게 썼다. “대성당의 크기와 장엄함은 건물을 지은 주교나 사제의 오만한 자존심을 드러낸다.” 
프랑스 중북부 우아즈주 보베Beauvais의 주교는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높은 첨탑을 건축하기로 결심했다. “첨탑을 세울 겁니다. 첨탑이 서고 나면 그걸 본 사람들이 우리를 미쳤다고 생각할 정도로 높은 첨탑을 요. 1569년에 세워진 대성당 첨탑의 높이는 153미터에 달했다. 그렇지만 첨탑이 서 있었던 기간은 고작 4년이었다. 예수승천대축일 미사가 끝난 후, 우르르 쾅쾅 요란한 소리가 났고 단 몇 초 만에 첨탑과 종이 무너져내렸다. 이후 첨탑은 절대로 재건되지 않았다.
르네상스 시대의 신흥 귀족도 유럽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이후로 부 르주아가 거대한 건축물을 세우는 경쟁에 돌입했다. 역사는 반복되었다. 이탈리아의 귀족 가문은 언제나 더 높은 탑을 올린 궁전을 짓기 위 해 경쟁했다. 그런 궁전이 토스카나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13세기 피렌체에는 160채의 탑이 세워졌고 그중 일부는 높이가 70미터에 달했다. 건축가의 능력을 시험에 들게 한 여러 건축물이 다 지어지기도 전에 무너져 내렸다. 5세기가 지난 후, 자본주의의 열풍이 아메리카 대륙을 덮쳤고 점점 더 높이 올라가는 마천루가 경쟁적으로 건설되었다. 고대의 멘히르 든 베르사유 궁전이든 건축물을 세우는 주요한 동인은 오만, 야망, 질투, 이웃에 대한 증오 등 매우 저속한 것들이었다. 거대한 건축물의 비범함은 그 목적이 비합리적일 때에야 비로소 드러날 수 있었다.
- 인간사에서 어리석음의 지분은 늘 악의 지분보다 크다. (윈스턴 처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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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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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 사회에서 생산력의 근간을 이루는 에너지는 대개 태양에너지와 식물의 광합성 작용에서 비롯했습니다. 식물이 자라려면 당연히 땅이 있어야겠지요. 이 땅을 용도에 따라 나눠야 했습니다. 사람 이 먹는 작물을 키우는 경작지와 가축을 먹일 사료를 재배하는 목초지, 땔감을 얻는 숲이었지요. 이 세 부류의 땅은 서로 경쟁 하면서도 균형을 이뤄야 했습니다. 식량 생산을 높이기 위해 곡 물 경작지를 늘리려면 사료를 얻는 목초지를 줄이거나 땔감을 얻 는 숲을 개간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유럽 같은 경우는 곡물 경작 지를 늘리는 만큼 비료도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목초지를 무한정 줄일 수 없었습니다. 곡물 생산이 늘어나 그만큼 인구가 늘면 땔 감도 더 많이 필요할 테니 숲을 계속 줄일 수도 없었겠지요. 다시 말해 인구가 늘어난다고 해서, 혹은 인구를 늘리기 위해서 경작 지를 마음껏 넓힐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여러 용도의 땅이 균형 을 이뤄야 했는데, 이런 균형을 맞추는 일이 항상 쉬웠던 것은 아 닙니다.
균형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도 곡물 생산을 늘리려면 토질이 좋지 않아서 그간 농사를 짓지 않던 땅을 일궈야 했습니다. 이렇게 생산을 늘리면 인구도 늘어날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새로 경작하는 땅은 토질이 좋지 않기 때문에 예전만큼 수확량을 낼 수 없었지요. 17세기부터 잉글랜드 같은 곳에서는 돌려짓기 방법을 바꾸고 토질을 개선하는 작물을 심어 생산성을 꽤 높일 수 있었 지만, 이런 방법도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가파른 인구 증가에 부 딪혀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이런 생산 성 향상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17세기에 소빙하기가 찾아와 평 균 기온이 떨어지면서 작황이 나빠지고 인구가 줄어들기도 했지 요. 그래서 전통사회는 18세기 말 경제학자 토머스 맬서스가 인 구론』에서 주장했던 법칙, 그러니까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 하는 반면 산출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법칙에서 벗어나 기 어려웠습니다. 토지가 풍부해 생산이 늘면 인구 역시 증가합니다. 그런데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면 땅이 부족해져서 질이 좋 지 않은 땅에도 농사를 짓기 시작하고, 그러면 결국 산출이 부족해지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지요. 그럴 때 질병이나 기근, 전쟁 같은 억제 요인이 작동하기 시작해서 인구를 줄여버립니다. 이것 을 '맬서스 함정'이라고 부르지요. 인구와 산출이 어떤 한계 안에 서 늘거나 줄기를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장과 수축이 반복되는 맬서스 함정에서 벗어나는 일은 18세기 중반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야 가능했 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몇몇 숫자들을 다시 한번 상기해보지 요. 잉글랜드 인구는 1350년 무렵에 500만 명까지 늘었습니다. 그 무렵 찾아온 흑사병으로 인구가 거의 절반이나 줄어들었고, 그 이후 계속 줄어들다가 1600년에 이르러 흑사병 이전 수준으로 겨우 회복합니다. 17세기에 잉글랜드 인구는 다시 정체되었 다가, 18세기 초부터 서서히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그 후 산업혁 명이 일어나는 18세기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빠르게 늘어나지요. 처음으로 인구 조사가 진행된 1801년에 잉글랜드 인구는 770만 명이 되었고, 1821년에는 드디어 1천만 명을 넘어섭니다. 그 뒤 에 인구 증가세는 더 빨라졌지요. 1인당 국내총생산도 산업혁명 이후 빠르게 향상되었습니다. 2013년 가격을 기준으로 1600년 1인당 국내총생산은 1,143파운드 정도였으나, 1800년에는 2,333파운드가 되었습니다. 두 세기 만에 두 배가 된 셈이지요. 1차 산업혁명이 거의 마무리되는 1850년대 초에 이르면 3천 파운드가 되었고,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에 5,441파운드가 되었으니, 한 세기 만에 두 배 가까이 뛴 셈입니다. 이렇게 인구 증가와 경제 성장에 가속이 붙는 일은 산업혁명 이전에는 상상하 기 어려웠습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산업혁명이 인류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이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 크래프츠와 할리가 내놓은 결과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대목이 발견됩니다. 두 사람은 총요소생산성 향상에 여러 공업 부문이 각각 얼마나 기여했는지도 계산했는데, 산업혁명을 이끈 면직물 공업의 기여분이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고 하지요. 산업혁명의 또 다른 핵심 분야였던 제철업과 다른 직물업이 나머지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이런 결과는 증기기관이라는 새로운 동력원과 기계, 공장제를 도입한 공업 부문의 생산성은 빠르게 향 상된 반면 나머지 공업 부문에서는 생산성이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 산업혁명 시대에는, 이를테면 '근대' 공업과 '전통' 공업이 공존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이지요. 이렇게 보면 산업혁명 시대, 특히 초기에 경제 성장이 왜 점진적이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근대 공업 부문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았기 때문에 경제 전체의 성장도 빠르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근대' 부문이 늘어나자 성장 속도가 좀 더 빨라졌고요. 이런 점을 감안하면 산업혁명이 과연 '혁명'이었 나 하는 물음도 다시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산업혁명을 단기간에 일어난 급격한 경제 성장으로 좁게 생각하지 말고, 경제구 조에서 일어난 근본적인 변화로 보면, 산업혁명이라는 용어를 여 전히 쓸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 산업혁명이 시작될 무렵 잉글랜드는 유럽과 아시아의 어떤 나라보다도 임금이 높은 고임금 경제였던 반면, 자본 비용과 에너지 가격은 임금에 비해 저렴한 나라였습니다. 이런 생산요소 상대 가격의 구조 때문에 잉글랜드에서는 특정한 방향으로 기술 혁신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지요. 자본과 에너지 가격이 임금보다 싸니까 기술 혁신은 가능하면 노동 투입 을 줄이면서 대신에 자본과 에너지 투입을 늘리는 방향으로 진 행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는 토머스 뉴커먼이 개발하고 제임 스 와트가 성능을 개선한 증기기관과 면직물 공업에서 등장한 여 러 기계가 될 것입니다. 석탄을 연료로 사용하는 초기 증기기관 은 에너지 효율이 낮아서 연료 소비가 많았습니다. 와트가 효율 을 크게 개선하는 데 성공했지만, 기본적으로 증기기관은 석탄이 풍부한 곳이 아니면 사용할 수 없는 동력원이었지요. 잉글랜드는 자본과 석탄이 풍부했기 때문에 탄광뿐만 아니라 면직물 공장 같 은 곳에 증기기관을 설치해 마음껏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 이렇게 식민지가 영국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은 왜 영국에서 처음 산업혁명이 일어났는지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 마리가 됩니다. 잉글랜드가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든 것은 17세 기 초부터입니다. 에스파냐나 포르투갈에 비해 한 세기 정도 늦 었고, 네덜란드나 프랑스와는 거의 비슷한 시기였어요. 조금 늦게 식민지 경쟁에 나섰지만 잉글랜드 행정부와 의회는 강력한 해군을 만들어 잉글랜드 무역선단을 효과적으로 보호했습니다. 또 한 국가는 동인도회사를 비롯해 여러 무역회사와 식민회사에게 자체적으로 무력을 갖추고 외교활동을 펼 수 있는 특권을 주기 도 했습니다. 특정 회사가 경제적인 어려움에 빠지면 구제 조치를 취하기도 했지요. 더욱이 베스트팔렌 조약(1648) 이 체결된 이 후 유럽 열강이 국익 증진을 목표로 여러 전쟁을 벌일 때도 영국 정부는 아주 효율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행정부와 의회는 조세 징수 기구를 잘 정비해서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많은 세금을 거 뒀고, 장기공채 같은 혁신적인 금융기법을 도입해서 아주 싼 이자로 자금을 빌렸습니다. 이렇게 동원한 막대한 재정 자원은 영국이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요.
- 국가의 노력 덕분에 상인들은 자유롭게 세계 곳곳을 누비며 무역 활동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이들과 제조업자는 식민지 무역에서도 엄청난 이익을 거뒀고, 특히 제조업자는 식민지 시장에서 새로운 사업을 발굴할 수 있었지요. 제조업자가 활발하 게 사업을 펼치니 일자리가 늘어나고 그만큼 임금도 올랐습니다. 바로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앞에서 이야기한 두 조건, 그러니까 풍부한 자본과 높은 임금이라는 조건이 마련될 수 있었던 게지요. 식민지와 제국은 그만큼 산업혁명과 긴밀하게 연관된 일이었습니다.
- 미국이 2차 산업혁명을 거쳐 산업사회로 변모했듯이, 유럽에 서는 독일이 1871년 통일 이후 비슷한 길을 걸었습니다. 통일 이 전 독일에서 가장 힘이 센 나라였던 프로이센에서는 일찌감치 수 공업 전통에 바탕을 두고 산업혁명을 시작해보려는 움직임이 있 었습니다. 하지만 19세기 중반에 영국이 세계 시장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기 때문에 독일 같은 후발 주자는 직물업 같은 소비재 공업이나 제철업, 기계공업 같은 주요 분야에서 경쟁하기 어려웠어요. 게다가 독일은 여러 나라로 갈라져 있었기 때문에 잘 통합된 국내 시장에 의존할 수도 없었지요. 그런 만큼 독일이 산업혁명에 성공하려면 영국이 아직 지배하지 못한 새로운 분야 를 개척하는 한편 정치적 통일을 이뤄 넓은 국내 시장을 만들어내야 했습니다. 
이런 필요를 어느 정도 채워준 게 바로 철도였습니다. 정치적 통일과 함께 철도망을 독일 전역에 건설하는 것은 시장 통합뿐 만 아니라 제철업과 기계공업 같은 주요 산업을 발전시키는 효과 를 발휘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대규모 자본을 조달하는 과정에 서 금융업도 발전시킬 수 있었어요. 금융업은 나중에 2차 산업혁 명 시대가 열렸을 때 독일 기업에 자본을 공급하는 중요한 역할 을 하게 되지요. 그 결과 철강과 화학, 전기공업에서 독일 기업은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생산력과 세계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 면에서 독일은 영국을 바짝 추격할 정도가 되었어요. 사실 이 시대에는 미국이나 독일뿐만 아니라 프랑스 같은 전통적인 열강과 러시아, 오스트리아 - 헝가리, 이탈리아, 일본 같은 나라가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영국은 19세기 중반에 누리던 압도적인 생산력 우위를 더 이상 유지하 기 어려워졌습니다. 이 점은 다음의 두 표가 잘 보여줍니다.
- 19세기 말 자본주의 발전을 이끌던 몇몇 나라에서 시장경쟁이 점점 치열해지자국가와 기업은 두 방향으로 대응했습니다. 한 가지 방향은 제국주의 경쟁이었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일어난 아프리카 쟁탈전이 잘 보여주듯, 유럽 여러 열강과 뒤늦 게 제국 대열에 뛰어든 미국과 일본 모두 식민지를 넓히려는 치 열한 경쟁에 돌입했지요. 식민지는 화학공업을 비롯한 새로운 공 업 부문에 필요한 원료를 얻을 수 있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공산품 시장이 되어줄 것이라 기대되었습니다. 제국과 제국주의는 경제적 동기로만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현상이었지만, 이 시기에 더욱 뚜렷해진 식민지 경쟁은 이윤율이 떨어지고 경쟁이 치열해진 것과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다른 한 가지 방향은 기업 차원에서 이윤의 하락과 경쟁에 대 응해 내놓은 새로운 전략입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기 업 규모를 키우고 조직을 개선해서 생산력과 생산성을 높이는 한 편 시장 경쟁에 참여하는 기업의 수를 줄이는 일이었습니다. 바로 그 과정에서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대기업이라는 새로운 기업형태가 출현하게 되었지요.
- 대기업, 노동 통제권을 장악하다
장기불황에 접어들면서 가격과 이윤율이 떨어지자 기업이 거의 본능적으로 보인 반응은 공급을 줄여 물가 하락을 막고 이윤 총 량을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전략이 성과를 거두려 면 특정 제품 시장에서 활동하는 기업의 수도 줄여야 했습니다. 어느 한 기업이 공급량을 줄이더라도 다른 경쟁 기업이 박리다매 전략을 택해 공급을 크게 늘려버리면 전체 공급량을 조절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이지요. 그러므로 시장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기 업이 1880년대부터 트러스트나 지주회사 형태로 같은 상품을 생 산하는 기업들을 인수·합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전략을 수평 통합'이라 부릅니다.
- 포드자동차에서는 노동자 이직률이 아주 높았고, 결근이나 중도 탈락 같은 문제가 자주 일어났습니다. 이를테면 1913년에는 “1만 5천 명의 노동자를 채우는 데 한 해에 5만 3천 명을 모집했다”거나 같은 해 연말에는 노동자 100명을 늘리기 위해 963명을 모집해야 하는 일이 벌어졌지요. 이런 문 제를 해결하기 위해 같은 해에 포드는 파격적인 해법을 내놓았어 요. 하루 9시간 노동에 2.38달러였던 급여를 8시간 근무에 일당 5달러로 개선한 것이지요.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중도탈락률이 0.5퍼센트로 줄어들었고 결근도 거의 사라졌습니다. 포드자동차에는 일자리를 찾는 구직자가 대거 몰려들었지요.
하지만 '일당 5달러'에는 중요한 조건이 달려 있었습니다. 이런 조치는 성실한 노동력을 확보하는 데만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집단을 분열시키고 노동자들 간 임금 격차를 확대하려는 것이었어요. 포드자동차에는 일당 5달러를 요구할 수 없는 노동자가 많았습니다. 근무 기간이 6개월 미만인 노동자나 21세 가 안 된 노동자, 여성 노동자가 그런 경우에 해당했지요. 더 나 아가 포드는 5달러라는 높은 일당을 주는 대가로 노동자를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새로운 인간형으로 개조하려고 했어 요. 예컨대 '청결과 신중함'을 강조했고, 금연이나 금주, 도박 금 지 등을 요구했지요.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포드자동차는는 사회학부서를 설립해서 노동자의 일상생활을 면밀하게 조사하 고 가정 방문 등을 통해 노동자가 규율을 잘 지키도록 강제했습 니다. 그러므로 일당 5달러 정책에는 노동 과정뿐만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도 노동자를 통제하려는 생각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지요. 포드자동차에서 이런 노동정책은, 이를테면 회사 경영을 방 해할 수 있는 노동운동 관련자를 솎아내고 동시에 회사가 고용한 수많은 이민 노동자를 미국식 생활방식에 적응시키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 르네상스 운동부터 개신교 종교개혁, 유럽의 해상 진출 같은 근대 초 유럽의 중요한 변화가 일부 자연철학자들이 '새로운 과학'을 주장하게 된 배경을 이뤘어요. '새로운 과학'은 인간이 남긴 불완전한 기록과 그 권위에 의지하기보다는 경험과 이성을 지식의 근원으로 강조했습니다. 이제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무엇을 발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면서 지식의 역사도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지식인의 책무는 이 제 역사에 묻힌 과거 지식을 발굴해내는 게 아니라 새로운 지식 을 발견하는 일이 되었지요. 이런 생각은 훗날 새로운 역사관이 등장하는 데도 보탬이 되었어요. 인간의 역사란 흥망성쇠를 반복 하는 순환이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계속 진보한다는 단선적인 역사관이 자리 잡는 데 도움이 된 것이지요.
- 로버트 훅은 마이 크로그라피아』(1665)에서 코페르니쿠스부터 자기 시대까지 일어 난 과학의 진보, 특히 관찰과 실험이 보여준 가능성을 자랑스럽 게 이야기해요. 좀 길지만, 한 대목을 살펴보면 좋겠어요 (니얼 퍼 거슨의 책에서 재인용한 것입니다).
망원경이 발명되어 이제 아무리 멀리 있는 것도 볼 수 있게 되 었다. 게다가 현미경 덕분에 아무리 작은 것도 우리의 연구 범 위를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이렇듯 우리 앞에는 우리가 이해 해야 할 새로운 시각 세계가 한없이 펼쳐져 있다. (...) 비밀스 러운 자연의 섭리를 낱낱이 밝혀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철저히 연구하여 손해 볼 것이 무엇이겠는가? 토론과 논쟁 속 주장은 곧 노력을 요하는 실질적인 노동으로 바뀔 것이다. 견해라는 온갖 달콤한 망상, 뇌가 고안해낸 사치인 우주의 형 이상학적 본질은 곧 사라지고, 확고한 역사, 실험, 연구가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다.
훅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베이컨이 제안한 새로운 과학의 지 향점과 방법을 잘 이해할 수 있어요. 여기서 실험과 관찰은 “견 해라는 온갖 달콤한 망상”을 피하고, 대신 더 분명한 지식, 그것 도 실제 생활에 쓸 수 있는 지식을 만들어내는 수단이라고 하지 요. 바꿔 말하면, 이런 주장은 신이 세상을 창조한 까닭이나 창 조의 원리처럼 자칫 사변적인 논쟁으로 번질 수 있는 주제는 피하면서 자연 세계의 작동 원리를 묘사하는 데 힘을 쓰자는 말이기도 해요. 그렇게 할 때, 자연 세계를 통제하고 예측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지요. 그러므로 훅 같은 사람에게는 '왜'라는 질문보다 '어떻게'라는 질문이 더 중요했어요. 물론 방금 인용한 훅의 말에는 이런 새로운 철학을 실제로 어떻게 수행하는 가에 대한 답은 들어 있지 않아요.
사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베이컨이 일찌감치 명쾌한 답을 내 놓았지요. 핵심은 실험과 관찰을 수행하고 그 결과를 동료들과 적극적으로 공유하는 것이었어요. 그러면 이들이 비슷한 실험과 관찰을 반복해 충분한 데이터를 축적해요. 마지막으로 이 데이터 에서 일반적인 결론을 끌어내지요. 그러니 과학은 이제 어떤 천 재 한 사람에게 의존하는 일이 아니라 여러 연구자가 힘을 모아 수행하는 집단 활동이 되었어요.
- 흔히 세계사에서 소비사회가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간 시기를 2차 세계대전 이후라고 말합니다. 1950년 무렵부터 한 세대 사이에 서양 여러 나라와 일본 같은 선 진 자본주의 사회는 물론 개발도상국이 전례 없이 빠른 경제 성 장을 경험했던 것과 긴밀하게 연관된 일이지요. 하지만 좀 더 긴 안목으로 역사를 바라보면, 1950년대에 나타나는 소비사회의 특 징들이 그보다 훨씬 전에 등장했음을 알게 됩니다. 적어도 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요. 소비사회는 역사가 꽤 오래된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소비사회의 특징을 간략하게 정리해보는 게 좋을 듯해요. 소비 자체는 인류 역사 전체에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지요. 하지만 소비가 일어나는 문맥이 달라지고 양적 으로 크게 늘어나는 새로운 국면은 대략 17세기에서 18세기 사 이에 등장합니다. 그래서 그 무렵 소비혁명'consumer revolution이 일어났다고 말하지요. 몇 가지 변화가 특징적입니다. 가령, 물건 소유가 예전에 비해 훨씬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고, 실제로 사람들이 더 많은 물건을 갖기 위해 애쓰게 되었어요. 물건을 획득하는 방법도 달라져요. 과거에는 직접 물건을 만들거나 조상에게서 물려받는 일이 흔했는데, 이제는 시장에서 구매하게 되었습니다. 물건을 얻으려는 동기도 달라지지요. 과거에는 필요가 소비를 이 끄는 중요한 동기였다면 이제는 패션과 새로움을 찾으려는 욕망 이 훨씬 중요해졌어요. 소비가 일어나는 공간도 넓어졌습니다. 예전에는 기껏해야 장터가 고작이었지만 이제 수많은 상설 상점 이 등장해요. 아무 때나 쇼핑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쇼핑 자체가 쾌락의 근원이 되었지요. 상품 정보가 훨씬 더 빨리 다양한 경로 로 퍼져나가면서 소비자도 상품에 대한 지식을 갖추게 되었습니 다. 그만큼 유행도 빨리 바뀌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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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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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자연사

역사 2021. 12. 6. 20:14

- 우주는 우리 안에 있다. 우리는 별과 같은 물질로 만들어졌다. 우리는 우주가 자신의 존재를 알려주는 한 방법이다. (칼 세이건)
- 복잡한 유기 분자는 어떻게 자기복제하는 원시 생명체, 즉 자연 선택의 대상으로 조직되었을까? 더 간단히 말해서 분자들은 언제 처음으 로 자기조직화를 시작하여 생명을 얻었을까? 결국 “생명”의 정의는 번식 하는 능력에 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두 가지 가설이 제안되었다. 첫 번째 가설은 밀러와 유리가 재현한 것과 같은 원시 지구 환경에서 생성 된 아미노산을 재료로 하여 핵산, 즉 자기복제능력이 있는 분자가 조직되 었고, 이 분자들이 자연선택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가설이 성립하려면 생명에 연료를 대는 대사 과정에 앞서서 이 대사를 관장하는 RNA 같은 복잡한 자기복제 분자가 먼저 존재해야 한다. 두 번째 가설은 앞의 시나리오를 거꾸로 돌려서, 열수구에서 공급되는 에너지를 활용하는 대사 과정이 먼저 조직된 다음에 자기복제 분자가 만들어졌다고 본다. 즉, 자기복제분자는 이 에너지를 활용하도록 진화했고 대사 과정을 자연선택의 대상으로 만들었다는 시각이다. 유니버시티 칼 리지 런던의 닉 레인이 『생명의 도약(Life Ascending)』에서 우아하게 설명한 이 “대사 우선” 개념은 현재 학계에서 선호되는 가설이다.
그러나 생명의 기원에 대한 답을 찾는다고 해도 생명체가 보여주는 다양성의 퍼즐을 풀지는 못한다. 어떻게 성게와 콘도르, 인간처럼 완벽하게 다른 종들의 조상이 하나이고, 이 공통 조상으로부터 이처럼 다양한 종들이 생겨났을까? 어떻게 유사한 것에서 다른 것이 만들어졌을까?
- 다윈의 진화론에서 수정이 필요한 부분을 더 파고들려면 20세기를 통 틀어 가장 창의적이고 동시에 논란의 중심이 된 미생물학자이자 인습타 파자였던 린 마굴리스를 만나는 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다. 1970년에 마 굴리스는 앞에서 설명한 고대 세균의 공생을 통해서 동물과 식물의 세포 (세포 소기관을 특징으로 하는 “진핵세포)가 기원했다는 강력한 증거를 제 시했다. 이 발상 자체는 거의 한 세기 전에 등장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가 없던 터였다. 마굴리스는 단세포 생물의 세포와 다세포 동식물의 세포가 고대 남세균(시아노박테리아)과 호기성 세균 사이에서 일어난 공생 적이고 서로에게 이로운 연합의 진화적 산물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미토 콘드리아는 세포 안에서 연료를 태워 가용한 에너지로 변환하는 소기관인데, 마굴리스는 지구상의 모든 진핵세포에 미토콘드리아가 들어 있다. 는 사실과 이 미토콘드리아가 핵 속에서 세포를 복제하고 조절하는 나선 형 DNA가 아니라 세균의 DNA를 닮은 원형 DNA에 의해서 조절된다는 사실에 처음으로 주목했다. 이를 바탕으로 마굴리스는 진핵세포가 각각 제 DNA를 들고 만난 별개의 두 조상이 만들어낸 산물이라고 제시했다. (그림 1.2), 다시 말해서, 서로 다른 원시 생명체들이 “합심하여” 마침내 지 구상의 모든 동물과 식물의 세포가 되었다는 뜻이다.8 | 모든 세포가 미생물의 상리공생, 즉 “세포 내 공생(endosymbiosis)”으로 부터 진화했다는 마굴리스의 “이단적인” 가설에 대한 당시의 반응은 신속 하고 가혹했다. 이제는 고전이 되었지만, 그녀가 아직 대학원생이던 1967 년에 쓴 이 논문은 15번이나 퇴짜를 맞은 후에야 출판되었고, 그후에도 일각에서는 쓰레기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이제 그녀의 발상은 널리 인정되어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정규 교육 과정에서도 가르친다. 마굴리스의 연구는 제한된 자원에 대한 포식과 경쟁만이 진화의 동인이라는 다원 의 추론을 박살 냈다. 생명의 진화는, 진핵생물이 진화한 과정을 일컫는 것은 물론 “함께 산다”는 어원에 따라서 더욱 포괄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용어인 “공생발생”에 의해서 추진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생물은 공생발생한 것이다. 그들은 경쟁 못지않게 협력하는 과정을 경험 했고, 함께 사는 것과 떨어져 사는 것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이루며 살고 있다.
- 맨 처음 복잡한 세포가 되었던 태곳적부터 미생물은 다양한 공생적 또는 적대적 관계를 맺으며 생명의 다양성에 일조해왔다. 사람의 몸속에서 미생물은 대장 세포의 90퍼센트를 차지하며, 이 장 마이크로바이옴은 인 체의 중요한 대사 경로를 통제한다. 최근에는 오랫동안 쓸모없는 흔적기 관으로 치부되었던 충수가 실은 중요한 장내 세균의 안전 가옥, 또는 제 장고 역할을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장에 크게 탈이 나는 바람에 장내 미 생물의 수가 크게 줄어들면, 충수는 필수적인 미생물들이 다시 소화계에 자리를 잡도록 돕는다. 인간의 지리적 활동 영역이 확장되고 식단이 발달 하면서 우리 조상들은 이질과 같은 장 질병을 매우 흔히 겪었는데, 이 역 시 마이크로바이옴이 새롭게 직면한 엄청난 위협이었을 것이다.
- 익혀 먹기는 선조들이 누리지 못한 무수한 혜택을 초기 인간에게 주었다. 고기와 채소를 익히자 조직이 부드러워져서 치아가 덜 닳게 되었고, 식품의 형태를 유지하는 화학 결합과 세포벽이 분해되어 음식의 에너지 값이 크게 높아졌으며 대사가 쉬워졌다. 요리의 시작은 장 못지않게 뇌의 발달을 촉진했고, 익힌 음식은 진화가 인지능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 루어지도록 부채질했다. 또한 요리는 음식의 구조적, 화학적인 방어체계 를 중화하거나 무장해제시켰고 기생충과 병원균을 죽여서 질병의 발병과 사망률을 감소시켰다. 날음식 위주의 식단을 연구한 결과, 현대에도 인간은 익힌 음식, 특히 익힌 고기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영양학 분야에서 진행된 실험 연구와 상관 연구의 결과로 알 수 있듯이, 건강과 윤리적인 이유로 오직 날음식만 고집하는 사람은 심하면 불임이 될 수 있다. 날음 식 식단과 장수를 위한 저칼로리 식단은 만성적인 에너지 부족을 초래한 다. 날음식만 먹으면 익히는 과정에서 절감되는 소화의 대사 비용을 인체 가 고스란히 부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저칼로리 식단을 유지하는 사람이 나 신경성 무식욕증 환자가 만성적인 에너지 결핍을 겪는 이유는 단지 섭 취하는 에너지 양이 적기 때문이다. 만성 에너지 결핍은 남성과 여성 모두 에게 리비도(libido), 즉 성욕을 잃게 하며 날음식만 먹는 여성은 생리주기 가 불규칙해지다가 시간이 지나면 불임이 될 수도 있다. 벌새가 꽃꿀을 마시고 소가 풀을 반추하도록 진화한 것처럼 인간은 익힌 음식을 먹도록 진화했다. 음식을 익혀 먹지 않으면 감자처럼 단단한 뿌리채소에서 밀과 같은 곡류, 빵나무 열매 같은 과일에 이르기까지 많은 주식의 실용성이 떨어지고, 어떤 경우에는 아예 소화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요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바꾸었고, 세계로 나아갈 가능성을 확장시켰다.
요리는 인류를 문명을 향한 길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지구를 지배하 는 길로 인도했다. 양질의 음식이 풍부해진 덕분에 인간은 점점 커지는 뇌를 감당할 수 있었는데, 척추동물에게 뇌는 에너지를 절대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장기이기 때문이다. 사냥에는 기술과 도구가 필요하므로 이 작 고 직립한 유인원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힘보다는 머리가 더 중요했다. 더 크고 더 힘센 동물들을 사냥하고 방어하려면 계획과 의사소통과 같은 조 정된 행동뿐만 아니라 상상력이 필요했다.
- 호모 사피엔스는 20만 년 전에 아프리카 대륙을 벗어나 이주를 시작했다. 이들 초기 인간은 커진 뇌로 협동 사냥능력과 기술뿐만 아니라 추운 날씨를 견딜 수 있는 털옷을 개발했고, 사바나의 먹잇감을 쫓아 소 아시아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우리는 의복의 발달사를 이(fice)의 역사 덕분에 알게 되었다. 인간의 몸 에서 털이 빠지고 인간이 옷을 입은 사건이 이의 진화 경로에서 중요한 분 기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머릿니와 사면발니는 서로 다른 종이지 만, 원래는 인간의 체모에서 번성했던 공통 조상으로부터 진화했다. 이 의 DNA를 계통학적으로 분석하여 머릿니와 사면발니가 유전적으로 분 지한 시점을 찾을 수 있었고, 이를 통해서 호미니드 조상이 120만 년 전에 체모를 잃었다는 결과를 얻었다(땀의 증발을 통해서 체온을 식힐 수 있으므로, 뜨거운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털이 없는 인간의 몸은 큰 먹잇감을 사냥 할 때에 지치지 않고 장거리 달리기를 하는 데에 유리했을 것이다). 이후에 추 운 환경으로 이주하면서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 옷을 만들어 입은 것 은 약 17만 년 전이다. 이는 사람의 머리에 사는 머릿니와 옷에 알을 낳고 사는 몸니 사이의 DNA 변이를 통해서 알아낸 사실이다. 초기 인간은 옷을 걸친 덕분에 아프리카에서 벗어나 북쪽으로 이동하여 유럽과 아시아 를 연결하는 추운 아나톨리아 반도에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 4만 년 전의 화석에 기록된 뼈 바늘의 생김새와 연대 측정 결과를 바탕으로 이 곳에서 그들이 바느질로 옷을 지어 입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현생인류 는 10만 년 전에 아시아에, 4만 년 전에 유럽에, 2만5,000년 전에 시베리아에 도착했다. 그리고 베링 육교를 건너서 1만2,000년 1만5,000년 전에 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한 다음,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의 “켈프 하이웨이”에 서식하는 해달, 바다표범, 기타 해양 식량원을 쫓아서 앞으로 나아갔다. 인간은 원시 뗏목을 이용한 이동의 용이성, 그리고 풍부한 식량과 피난처 덕분에 해안선과 강의 계곡을 따라서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다.
- 현재 진행되는 연구들은 이 연대를 수정하고 관련 가설들을 재검토한다. 예를 들면 게놈 자료는 아시아인이나 폴리네시아인들이 베링 육교가 열리면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할 수 있었던 시기보다 훨씬 더 일찍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최근에 중국에서 발견된 화 석을 보면 현생인류는 현재의 이주 모형이 추측하는 시기보다 10만 년 먼 저 중국에 도착했다. 현재 과학자들은 인간이 아프리카에서 나와서 지구 전역으로 퍼진 과정을 보정하고 있는데(예를 들면 인류학자 토르 헤위에르달은 아메리카 원주민이 태평양을 횡단했다고 제안했다), 이는 초기 인간과 그들의 조상과의 관계를 정교하게 다듬고 심지어 재정의하는 작업과도 같다.
- 농장이 있기 전에 사냥터가 있었다. 석기시대 후기의 수렵채집인 조상들 은 계절에 따른 식물의 생장 주기와 동물의 이주라는 자연적인 변화에 기 대어 살았기 때문에 계절별로 낚시, 사냥, 수확용 야영지를 세웠다. 예를 들면 어떤 동굴은 호모 사피엔스 이전부터 대대로 200만 년 이상이나 사 용되었다. 동굴은 자연이 선사한 단기 거주지였고, 초기 인간 집단은 돌 이나 햇볕에 구운 진흙 벽돌, 나무로 만든 대들보, 또는 오래 전에 멸종한 매머드의 갈비뼈로 직접 집을 짓기도 했다. 같은 시기에 아메리카 대륙의 서쪽 해안, 아프리카 대륙의 북쪽 해안, 유럽의 하곡(河谷), 중국의 강 하 구처럼 비교적 생산성이 높고 식량이 풍부한 지역을 따라서 농업 이전의 원시 도시가 발달했다. 이는 독특한 거주 형태였는데, 실제로 생산성이 가장 높은 곳에는 대형 포식자들이 도사리는 울창하고 위험한 숲이 있어서 초기 인간이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물을 재배하고 숲을 개간하는 기술이 발달하기 전에 생산성이 가장 뛰어난 곳은 위험천만한 숲이 장악하고 있었다.
실험 생태학에서는 이처럼 가장 바람직하고 식량이 풍부한 서식지에 살지 못하는 상황을 일반적인 군집 형성의 법칙으로 설명한다. 전문 용어로는 “경쟁 배타의 원리”라고 부르는 이 법칙은 동일한 생태적 지위에 있거나 동일한 필요를 가진 두 생물은 공존할 수 없다는 원리이다. 다시 말해서 가장 우세한 포식자와 경쟁자가 생장과 번식에 가장 좋은 서식지를 독 점하고, 하위 종들은 덜 선호되는 서식지로 쫓겨난다는 뜻이다. 이러한 압 력 때문에 인간의 초기 서식지는 생산성이 다소 낮은 사바나나 강기슭으 로 제한되었다. 내가 1970년대에 뉴기니에서 연구하던 중에 만난 토착민 가족이 빽빽한 맹그로브 숲 때문에 밤이면 안전을 위해서 연안에서 자야 했던 상황과 다르지 않다. 유인원이 나무 위에서 내려오지 못했던 것처럼 인간은 사바나와 강기슭 서식지에 매여 있었다. 생태군집 형성의 자연사 법칙 때문이었다. 수천 년간 자연선택이 결정해온 이 생태군집 형성의 법칙은 수십 년 전에야 야외 실험에 의해서 밝혀졌다.
- 생산성이 떨어지는 지역은 인간은 물론, 성장이 빠른 잡초나 소극적인 대형 초식동물처럼 같은 이유와 법칙으로 인해서 그런 서식지에 제한되어 살아가는 다른 생물에게도 피난처를 제공했다. 서식지를 공유하게 된 풀과 대형 초식동물들은 의존성과 상리공생을 형성하기에 이상적인 생물이었다. 그러나 자연적으로 형성된 군집이 곧바로 순화(domestication : 야생 동식물을 사람에게 유용한 가축이나 작물로 변화시키는 과정/옮긴이)로 이 어지지는 않았다. 대신 공진화, 동식물의 순화, 문명의 발생을 위한 최적 의 요인들이 적시적소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앞으로 계속해서 살펴보 겠지만, 농업과 동식물의 순화는 인간이 뛰어난 재주와 창의성을 발휘한 덕분이 아니라 인간과 동식물 간의 협력관계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다
- 밀은 인간이 밀을 길들인 것이 아니라 밀이 인간을 길들였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전 세계에 퍼졌지만, 원래는 시리아의 카라카 산의 언덕에서 자라던 잡초성 초본에 불과했다. (그림 3.1). 그러나 이 흥미로운 식물 중심적 관점은 인과관계에 혼동을 주기도 한다. 농업에서의 선별적 선호는 인간에 의한 의도적이고 차별적 인 선택이었다. 예를 들면 야생 배추는 원래 영국 해협의 영양분이 부족한 석회암 절벽에서 자라던 잡초성 십자화과(十字花科) 식물인데, 영리한 원 예가들이 선별적으로 교배하여 오늘날 다양한 채소가 되었다. 현존하는 모든 배추 품종과 브로콜리, 컬리플라워, 케일, 방울다다기, 콜라드그린을 포함하여 인기 있는 많은 채소들이 전부 유럽 해안에서 자생하던 브라시카 올레라케아(Brassica oleracea)라는 단일 배춧속 종을 개량한 품종이 라는 것을 알면, 현대의 많은 식도락가들이 깜짝 놀랄 것이다. 원예가들 은 잎과 싹의 크기, 싹의 조밀도, 꽃과 줄기의 특성에서 각기 다른 것을 골 라 선택 교배함으로써 브라시카 올레라케아를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다양한 채소들로 변형시켰다. 눈에 잘 띄지 않고 경쟁력도 변변치 않아 불모 의 서식지로 내쳐졌던 식물이 지구에서 가장 성공적인 식물로 우뚝 선 것이다. 
비슷한 순화 과정이 파키스탄의 인더스 강과 중국의 황허강, 양쯔강을 포함하여 강을 따라서 세계적으로 5-6군데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동물과 식물의 순화는 이들 중심지에서 종자, 동물, 순화 기법의 확산과 함 께 전 세계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 19세기 초의 과학자들에 따르면, 인간이 15만 년간 사냥과 채집을 하며 살아오다가 가축과 작물에 의존하는 정착 생활로 전환한 이유는 한곳에 눌러앉아 지내면서 식량이 안정적으로 공급되어 기근을 줄였고, 또 여가 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예술, 문자, 영성과 문화가 자유롭게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최근의 실증 연구에서는 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가축과 작물을 지속적으로 보살펴야 하는 농경 생활에는 이동하며 사는 수렵채집 생활보다 2배의 시간과 노력이 든다는 것이다. 초기 농부들은 한곳에 정착하여 물질문화를 축적할 수 있었지만,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농부와 목동이 해야 했던 업무는 극도로 어려운 것이었고, 따라서 다이아몬드는 농업혁명을 “존재를 저주하는 총체적인 사회적, 성적 불평등과 질병, 폭정을 가져온...우리가 단 한 번도 회복하지 못한 재앙”이라고 불렀다. 농업혁명은 인간이 단독으로 이루어낸 혁신이 아니 었다. 이것은 공생발생적 진화의 결과였다.
물론 수렵채집 생활로부터의 전환은 빠르지 않았다. 중앙 오스트레일 리아의 광활한 사막이나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의 아북극 지역처럼 농경이 가능하지 않은 극도로 열악한 환경에서는 19-20세기까지도 수렵-채집인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다른 대부분의 생태계에서는 인간과 동식물 사이에서 수동적으로 시작된 관계가 마침내 상리공생의 필연적인 부산물 로서 농경을 탄생시켰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농업이 선택이나 자연 스러운 진보가 아니라 진화의 결과였다는 뜻이다. 이 가설은 이런 변화가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대륙이 만나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부터 중국,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까지 전 세계의 다양한 수렵채집 사회에서 독립적 으로 일어났다는 사실로 뒷받침된다. 다이아몬드는 세계적인 농업 확산 을 자연의 순화와 관련지어 수천 년의 양성 피드백에 의해서 추진된 “자기 촉매, 과정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인간이 동식물을 통제하게 된 것은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 라, 공진화가 자연스럽게 확장됨에 따라 피드백 고리를 움직이면서 필연적으로 나타난 예정된 수순이었다. 농경은 협력에 의존했고 노동집약적 이었지만, 식량을 더 많이 생산하여 지속적으로 불어나는 인구를 부양했 고, 이는 다시 더 많은 식량과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사실 사냥과 채집에 서 농경으로의 변화는 그저 석기시대 사람들이 농사에 들어가는 비용과 장기적인 결과를 예측하지 못했고, 먹이사슬에서 벗어나서 자연을 통제 한다는 것이 궁극적으로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일어났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농업은 혁명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진화적 함정, 다시 말해 인간, 식물, 동물 사이에서 발달한 의존성과 상리공생이 만들어낸 자연적인 수순이었다.

- 문명이란 불필요한 필수품을 끝없이 늘려가는 것이다.(마크 트웨인)
- 염료를 만들기 위해서 페니키아인들은 뿔고둥을 수확하여 껍데기를 깨서 열고는 독샘을 꺼내 햇볕에 말린 후에 곱게 갈았다. 수출용으로 약 450그램의 건조된 염료를 생산하는 데에 25만 마리의 뿔고둥이 필요했다. 어느 지역의 뿔고둥 개체군이든 쉽게 씨를 말릴 양이 었다. 수천 년에 걸친 남획과 서식지 파괴로 인해서 오늘날 지중해에서 그 정도로 많은 뿔고둥을 수집하려면 몇 개월은 족히 걸릴 것이다. 나는 최근에 이탈리아 사르데냐의 해안가로 거의 6개월간 매일 조사를 나갔지만, 뿔고둥은 한 마리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티레와 시돈처럼 뿔고둥을 이용 하기 위해서 바위 해안가에 세워졌던 고대 페니키아 정착지에서는 뿔고둥 들이 수확된 지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으스러진 뿔고둥 껍데기들로 이루 어진 커다란 패총이 발견된다.
- 페니키아인은 뿔고둥 번식지를 찾아서 해변을 샅샅이 뒤졌을 뿐만 아 니라 바닷가재를 낚시할 때에 쓰던 미끼 달린 함정을 사용하여 뿔고둥을 잡았을 것이다. 얕은 물에 서식하는 뿔고둥은 보통 6~7년을 사는데, 그래 서 번식지에서 빠르게 절멸되었고 페니키아인은 더 깊은 물속으로 들어가 수확해야 했다. 뿔고둥이 풍부했던 서식지가 고갈될 때마다 페니키아인 은 해안을 따라서 지중해 전역과 북아프리카로 이동했고, 뿔고둥을 따라 가면서 해양 자원 탐험가로 거듭났다. 페니키아인이 해양 무역을 하기 위 해서는 단단한 레바논시다로 건조한 튼튼하고 믿을 수 있는 배가 필요했 다. 페니키아인은 뿔고둥과 레바논시다 숲을 과도하게 착취하면서 항해 와 원양에 필요한 기술을 발달시켰고, 바다를 장악하여 새로운 자원을 개 발함과 동시에 새로운 거래처를 확보했다. 이들은 레바논시다를 대체하기 위해서 북아프리카 해안에서 자라는 시다와 소나무를 수입했다. 레바논시다는 오늘날 소수의 보호 구역에만 제한적으로 분포하며 기후 변화 로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페니키아인은 이러한 성공을 바탕으로 지중해 전역에서 해적으로부터 교역로를 보호하기 위한 전함을 포함해 수백 척 의 상선으로 운영되는 무역망을 운영했다. 페니키아인들은 아프리카, 스페인, 키프로스, 사르데냐에 이르는 먼 지역까지 무역 기지를 세웠다. 자주색 염료와 더불어 상아, 이국적인 동물 가죽, 심지어 노예까지 무역망을 따라서 이동했다. 상품을 운송하기 위해 새로운 저장 용기가 필요해지면서 유리 제품이 개발되어 와인, 올리브유, 곡물 등의 운반에 쓰였다. 유리는 뜨거운 불로 인해서 탄산칼륨과 모래 가 혼합된 것을 우연히 발견하며 처음으로 등장했을 가능성이 크다. 페니키아인은 유리를 물들여 푸른색 용기를 만들었고 이는 그들이 가진 재주 와 기량의 상징이 되었다. 무역이 발달하면서 노예 제도도 달라졌다. 과거 에 노예는 전쟁의 전리품이었지만, 인구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인구와 함 께 증가한 노동 수요를 노예가 채우기 시작했다. 페니키아인은 최초의 노 예 상인이었던 듯하다. 이들은 아프리카 부족 간에 벌어진 전쟁의 전리품 인 노예를 다른 상품과 거래하고 지중해 전역에 팔았다. 또한 그들은 잘 알려진 2단 갤리선 운항에 120명의 노예를 동력으로 사용했다. 노예들은 일꾼, 하인, 병사로 동원되었다. 로마 제국의 전성기에는 제국이 제대로 기능하는 데에 50만 명에 가까운 노예가 필요했다.
페니키아인이 노예 제도를 상업화했다면 바이킹은 산업화했다. 그들 은 유럽의 해안가나 강가의 마을을 습격하여 물자를 강탈했고 주민들을 납치해서 전 세계에 노예로 팔았다. 중세 초기에 바이킹은 밭에서 작물이 자라는 여름 동안 강을 따라서 동유럽의 마을들을 약탈했으나 점차 좀더 수익성 있는 사업인 노예 무역에 힘을 쏟았다. 노예는 노동력, 목 재, 소금 등과 맞바꾸어 거래되었다. 그들은 러시아 남부의 방어가 허술 한 시골 지역을 습격하여 “슬라브인(Slav)”을 거래했다. 여기에서 슬라브 란, 과거에 동유럽과 페르시아 왕에게 노예(slave)로 팔리던 인종 및 언어 집단 전체를 뜻한다. 노예 제도는 18세기에 제기되기 시작한 윤리적 문 제들로 인해서 19세기 중반에 법적으로 폐지되었으나, 한정된 자원의 세 계라는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에도 노예가 암시장에서 상품으로 거래되 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 말의 경우, 한 번에 혹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길든 것인지, 또는 말을 길 들이는 지식이 유라시아 전역에 공유, 확산하면서 빈번한 가축화 사례로 이어진 것인지는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왔다. 최근에 밝혀진 유전학, 고고학 증거에 따르면 말은 원래 고기를 얻기 위해서 키웠다. 오늘날의 카자흐스탄과 터키 지역의 초기 유목 부족들은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영양가 높은 겨울철 단백질원으로서 말 고기가 필요했다. 말은 양이나 염 소와 달리 스스로 눈을 파고 먹이를 찾을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말 은 짐을 나르는 동물이 되었다. 기원전 3500년경으로 추정되는 말의 유골 에서 나온 이빨에는 굴레로 인해서 마모된 흔적이 있었다. 가축화된 말이 유라시아를 통해서 퍼지면서 야생말과 교배하여 더 탐나는 힘센 잡종들 이 태어났다. 낙타를 길들인 것처럼 말과의 협력적 상리공생 또는 가축화 로 인해서 인간은 유라시아 스텝의 비생산적인 광활한 땅을 지배했고 동시에 대륙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육상 무역도 가능해졌다.
- 뿔고둥을 수확하여 화폐화한 페니키아인처럼 중국인은 누에의 가치와 쓰임새를 시장에 내 놓았다. 그러나 페니키아인이 자원을 완전히 고갈시킨 반면에 중국인은 현명하게 누에를 길들이고 번식시켜서 누에와 비단 생산을 산업화했다. 이제 야생에서는 누에가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다. 누에는 수천 년간 길들 면서 날개를 잃고 스스로 뽕나무를 찾아갈 수 없어서 인간의 손에 의지해 서만 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누에나방은 비단의 대량 생산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개량되었고, 더는 아시아 뽕나무에서만 살지 않으며 거의 전 세계에 분포한다. 그러나 인간의 도움이 없이는 멸종할 것이다. 누에는 절 대적인 가축화, 또는 상리공생의 한 사례로서, 민들레, 쥐, 진드기처럼 생 존을 전적으로 인간에게 의존하는 종이다.
- 로마의 도로는 폭 5미터 이상에, 배수가 되는 석조 포장도로가 8만 킬 로미터에 육박하는 체계로 성장했다. 오늘날의 인터넷, 또는 과거 수십 년 전의 유선 텔레비전처럼, 이 도로는 제국 전체에 문화(그리고 경제적 평등 과 불평등에 대한 인식)를 확산시켰다. 자원의 이용이 문화적, 사회적으로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이해하고, 그 과정에서 누가 이득을 보는지를 인식 하게 된 것이다. 퓰리처 상을 수상한 작가 토머스 프리드먼은 범세계적인 교통망으로 인해서 부자와 빈자 모두가 소득과 삶의 질에 존재하는 엄청 난 격차를 인식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로마의 도로는 오늘날 스마트폰 정보화 시대에 급증한, 사회 “평탄화”의 초기 사례였다.17 피정복민 사이에 뿌려진 분노의 씨앗이 한창 자라던 시기에 지배층의 탐욕 그리고 지배 중심지에서 너무 멀리까지 확장된 제국의 규모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로 나타난 평탄화가 제국의 쇠락으로 이어졌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기원후 5세기에 로마 제국이 붕괴한 후, 비잔틴 제국은 로마 제국의 동 쪽 지역에서 성장했고, 적어도 몽골 제국이 세워지기 전까지는 실크로드 를 따라서 교역을 통제했다. 그다음에는 말을 길들인 바로 그 스텝의 유 목민 후손인 몽골인이 말을 탄 공포의 전사가 되어 유라시아의 실크로드 를 지배했다. 초기에 칭기즈 칸이 이끈 몽골 제국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 에서 중국까지 이어지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육상 무역망을 두 세기 동 안 지배했다. 이것은 생태계의 힘을 다룰 줄 알고, 비록 강압적이었을지라도 집단의 힘을 이용할 줄 알았던 몽골인들의 능력과 관련이 있을 것이 다. 다른 문명들이 정착 농경 생활에 몰입할 때에 몽골인은 말, 지리, 그리 고 열악한 초원 환경을 속속들이 이해하며 살았다. 수천 년 전 페니키아인 처럼, 몽골인은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도시를 건설하는 대신 무역에 초 점을 맞추었다. 그들은 공포로 다른 문화를 지배했고 천막과 귀중품들을 늘 들고 다녔는데, 이것은 유목 부족으로서의 문화적 뿌리를 반영한다. 그러나 중세 말기에 아시아 시장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경로를 찾아나선 탐험적 항해가 본격화되면서 이러한 독점 무역 체제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 장내 미생물은 우리를 외부 미생물로부터 지켜주며, 사람들이 새로운 지역에 가면 물갈이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예컨대 체 내에서 적절한 미생물 환경을 발달시킬 때까지), 그러나 질병의 치료에 관해 서는 세균과 바이러스의 생활사에 좀더 의식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 질병의 세균론을 터득하기 전에는 시행착오를 거쳐 발견한 항생 효과를 이용해서 세균성 질병을 치료했다. 예를 들면 그리스와 인도에서 는 곰팡이를 활용했고, 러시아 사람들은 따뜻한 흙을, 수메르 의사들은 환자에게 거북이 등딱지와 뱀 껍질을 섞은 맥주 수프를 주었고, 바빌로니 아인들은 눈의 감염을 사워밀크(sour milk)로 치료했다. 이 모든 처치법에 는 천연 항생제(병원성 미생물과 싸우기 위해서 곰팡이 또는 기타 빠르게 번식하는 생물들이 진화시킨 방어 수단)가 들어 있었으므로 어느 정도는 효과가 있었다. 
- 거세처럼 상징적인 행위는 온전한 인간의 문화라는 인상을 줄 수도 있 지만 사실 여기에도 인간이 그저 따르고 있을 뿐인 풍부한 진화의 역사가 있다. 예를 들면 많은 종류의 기생체가 숙주를 거세하여, 숙주 자신의 자 손보다 이 영리한 기생체의 자손을 생산하는 커다란 암컷으로 만든다. 이 와 비슷하게 일부 사회적 곤충의 수컷은 호르몬을 통해서 중성화되어 말 잘 듣는 헌신적인 일꾼이 된다. 인간과 동식물 모두 거세라는 행위 이면에는 동일한 진화적 동기가 있다. 거세당한 자의 호르몬을 조작하여 거세한 자의 생식적 생산량 또는 적합도를 증진하려는 것이다. 
척추동물 중에 성적 조작을 통해서 사회를 통제하는 가장 극단적인 사 례는 산호초에서 하렘을 이루고 사는 앵무고기와 그 친척인 양놀래깃과 물고기들이다. 양놀래깃과 물고기들은 성별이 사회적 환경에 따라 제어되 도록 진화했다. 앵무고기 하렘에는 우두머리 수컷 한 마리를 암컷들이 둘 러싸고 있고 나머지 작은 수컷들은 발을 붙이지 못하고 쫓겨난다. 알파 수컷이 죽으면(또는 연구자가 인위적으로 제거하면) 몸집이 가장 큰 암컷이 호르몬에 의한 성 변화를 일으키며 며칠 만에 알파 수컷이 된다. 이런 식 으로 경쟁에서 가장 우세한, 즉 가장 몸집이 큰 물고기가 자신의 유전자 를 다음 세대로 전달한다
- 교회나 유사한 기관들은 신화를 통해서 적극적으로 대중을 달래고 통제했다. 이들은 사람들을 문맹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고 기근, 질병, 전쟁이 신의 형벌이라고 가르치면서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그리고 무엇을 먹으면 안 되는지, 무엇을 입어야 하는지, 언제 어떻게 성관계를 해야 하는지를 모두 성문화했다. 종교기관은 어부들과 이해관계를 맺어 그들의 후원을 받았고(원래는 이교도와 맺었던 관계였다), 대신 금식일을 지정하여 그날에는 생선만 먹어야 한다는 규율(기독교 성전에는 전혀 나와 있지 않은 관례)을 정해서 어부들을 도왔다. 또한 교회는 종교 전쟁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배층은 전쟁을 통해서 권력을 확장했고 교회는 이 념적 동기를 정치적, 경제적 행동으로 옮기는 역할을 했다. 안타깝지만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활용되는 도구이다.
- 앞에서 논의한 것처럼 14-15세기의 유행병과 기근은 사람들의 목을 조 이던 종교와 귀족 체제를 무너뜨리는 데에 크게 일조했다. 치명적인 질병 은 인간의 위계 구조에 개의치 않았고, 사회 계층을 가리지 않고 덮치면 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오랜 지배와 속박의 시대가 불안정해지자, 건드린 벌집처럼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과 같은 소국들이 여기저기로 뛰쳐나와 해상 무역을 장악했고, 세계를 탐험하고 식민지 제국을 건설하면서 에너지를 발산했다. 우리는 인류사의 이 시기 를 르네상스와 계몽의 시대라고 부르지만, 한편으로 이 현상은 인간이 고 갈된 자원의 기반으로부터 벗어나 확산을 시도한 것으로서, 자연사에서 개체군 과밀과 제한된 자원에 대한 보편적인 반응, 다시 말해서 질병이나 기근 같은 사건의 원인이자 결과였다. 이 시기에도 종교와 신화는 식민주의자들에게 마야 문명을 비롯해서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그리고 태평양 섬들의 토착 문화처럼 새롭게 만난 문명들을 지배하고 노예화하고 파괴하는 권한을 부여하면서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극심했던 종교 지배의 마지막 고통의 시기였던 1215년에 유럽 귀족들 은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 왕의 신성한 권리를 뒤집은 마그나 카르타(대 헌장)가 체결되면서 귀족과 종교의 결탁에 금이 간 것이다.20 대헌장의 정 신은 광범위하게 해석되었고 농민들 사이에서는 존재의 대사슬에 대한 불신이 전염되기 시작했다. 이 발전은 사회의 위계 구조에 좀더 심각한 위 협의 씨앗을 뿌렸고, 전 세계에 지적인 유행병처럼 퍼져나간 프랑스와 미 국의 혁명과 함께 18세기 계몽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고전적 형태의 위계 구조가 해체될 때에 사회는 여전히 변화와 발전을 주도하지 않았다. 대신 자연사의 제약이 사회와 조직의 변화에 박차를 가해 새로운 힘과 지배권에 자리를 내주었다. 이 새로운 힘의 하나가 과학이다.

- 자신 외에 다른 누구도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그럴 수도, 그러기를 바랄 수도 없다. (석가모니)
- 광대버섯은 크고 빨간 갓에 흰 반점이 있는 버섯으로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다. 슈퍼 마리오 비디오게임 속 세계에서부터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 in Wonderland)』 속 물담배를 피우는 애벌레가 앉은 자 리에 이르기까지 만화와 대중문화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광대버섯은 날 것으로 먹으면 치명적이지만 『리그베다』에 나온 대로 가공하면 향정신성 효과는 유지되면서 독성은 제거된다. 광대버섯으로 만든 물약은 힌두교 외부에서도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토착 시베리아 문화권에서는 더 높은 정신과 교감하는 데에 사용되었는데, 전통적으로 동짓날에는 광대버섯의 빨간 갓을 본떠서 붉은 의상을 입은 무속인이 사람들에게 광대버섯 물약을 나누어주었다(누군가는 선물을 나누어주는 이 붉은 옷의 인물이 산타클로스의 모태라고 믿는다)
- 1970년에 존 마르코 알레그로는 자신의 책 『거룩한 버섯과 십자가(TheSacred Mus/aroom and the Cross)』에서 광대버섯과 관련된 매우 창조적이고 매혹적인 이론을 제시했다.15 최근 새삼 재평가되기 시작한 이 작품은 당 시에 꽤나 악명이 높았는데, 광대버섯이 만들어낸 환상과 연관된 신화에 기독교의 뿌리가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알레그로는 초기 기독교 예 술과 언어의 기원을 근거로 하여 기독교가 원래는 영적 경험을 유발하는 버섯을 추종하던 집단이었다는 가설을 내세우면서 예수가 아닌 버섯의 신화로서 「신약성서를 재해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알레그로는 광대버섯을 그린 것이 분명한 중세 초기의 기독교 예술 가운데 프레스코와 모자이크를 그 근거로 들었다. 이 그림에서는 에덴 동산 속 생명의 나무와 지식의 나무를 버섯의 이미지로 표현했고, 이브가 아담에게 버섯을 건네고 있다는 것이다(그림 8.1). 그에게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못하더라도, 전 세계의 유사 한 사례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어서 그 연관성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예 를 들면 아프리카와 유럽의 원시 동굴 벽화(기원전 1만~기원전 7000년)에는 무당이 버섯과 함께 버섯 주위에서 춤추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 코넬 대학교의 제니퍼 빌링과 폴 셔먼은 전 세계 36개국의 전통 육류 요리법이 포함된 요리책 93권에서 4,570개의 조리법을 수집하여 문화권별 로 향신료의 종류, 쓰임새, 사용량을 조사했다. 빌링과 셔먼은 만약 향신 료가 건강을 증진하려는 목적으로 사용되었다면, 음식이 더 빨리 상하는 따뜻한 지역의 조리법에서 향신료가 더 많이 쓰일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 다. 또한 채소보다 고기에 양념을 더욱 강하게 할 것이고, 되도록 양념의 효능을 파괴하지 않는 조리법이 사용될 것이라는 가설도 세웠다. 분석 결 과는 이 가설들을 모두 뒷받침했다. 특히,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향신료들 이 모두 강한 항균, 항곰팡이 효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올스파 이스, 마늘, 양파, 오레가노가 가장 효과적임을 발견했다. 인도에서는 25 개 양념 중에 요리당 평균 9.3개의 양념을 사용한 반면, 노르웨이에서는 총 10개의 양념 중에 평균 1.6개를 사용했다. 헝가리 온대 지역의 요리법은 전체 21개 중에서 평균 3개의 양념을 넣었다. 이 연구는 또한 향신료를 미리 넣지 않고 조리 중이나 조리 후에 넣도록 권장하는 것은 양념의 약효 를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라는 것과, 채소는 고기보다 양념을 덜 사용한다 는 것도 밝혔다(채소를 먹고 전염되는 감염이 적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주로 음식의 맛을 돋우기 위해서 양념을 넣지만, 빌링과 셔먼의 연구는 공진화의 결과를 보여준다. 향신료는 위험한 미생물로부터 음식을 지키 고 의약적인 효과까지 추가하는데, 이것들은 모두 그 맛을 즐기는 사람들 의 건강, 수명, 번식의 성공을 증진한다
향신료 사용은 인류에 앞서서 진행되었던 진화적 군비 경쟁은 물론이 고, 다른 생물들과 공유하는 복잡다단한 생태 경관에서 인간이 어떻게 창 의력을 발휘하여 입지를 다졌는지를 여러 측면에서 보여주는 완벽한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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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

패권의 대이동

역사 2021. 11. 17. 20:38

- 왜 패권을 떠받치는 요소가 시대에 따라 달라졌을까? 이 물음에 답 하려면 서로 다른 패권 국가가 기대고 있던 경제 체제의 속성을 자세 히 들여다봐야 한다. 가령, 중세 봉건제라는 경제 체제와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기간에 등장한 경제 체제의 특징을 생각해볼 필 요가 있다. 특히 이행기에 등장하는 자본주의는 식민지 개척과 착취, 전쟁에 기대고 있어서 '전쟁 자본주의'라 부르기도 한다. 그 후 자본주 의가 활짝 꽃을 피우면서 '산업 자본주의'가 출현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렇게 변화하는 경제 체제의 속성을 패권의 형성과 이동 문제 에 대입해보면 폴 케네디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스페인제국이 영토에 집착했던 까닭은 봉건제의 속성과 연관되어 있다. 반면 네덜란드가 무력을 앞세워 아시아와 아메리카에 무역 네트워크를 개척하는 데 혈안이었던 일은 봉건제가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과 연관이 있다. 자본주의가 좀 더 성숙함에 따라 영국과 미국은 폭력보다 기술 혁신에 바탕을 둔 경제력과 자유 무역 교리를 앞세우기 시작했다.
패권 국가를 뒷받침하는 경제 체제의 속성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패 권을 구성하는 요소가 더 분명하게 드러날 뿐만 아니라 패권이 쇠락하 는 까닭도 파악할 수 있다. 폴 케네디는 한 나라가 갖추고 있는 경제력 에 비해 군사력이 지나치게 확장되면 '과잉 팽창'이 일어나 쇠락이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그럴듯한 주장이지만 경제력이 군사력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임계점은 패권 국가마다 달랐을 뿐만 아니라 임 계점이 찾아오는 원인도 달랐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따라서 이 문제는 경제 체제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속성을 이해할 때 답할 수 있으며 동 시에 패권 행사에 반드시 필요한 재정 체제의 특징을 이해할 때 더욱 분명해진다. 여기서 '재정 체제'란 일반적인 개념, 즉 세금을 거두고 돈 을 빌려주고 이자율을 조정해 경제 자원을 동원하는 제도 및 기구뿐 아니라 이를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나 정치 문화까지도 모두 포함한 다. 이 재정 체제를 잘 갖추지 못하면 한 나라의 힘을 국내외로 투사하기 어렵고, 재정 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하면 패권국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봉건제에 바탕을 두고 있던 스페인이 기댈 수 있는 재정 체제와 거기서 동원할 수 있는 재정 자원의 규모는 성숙한 자본주의에 바탕을 둔 미국 재정 체제의 역량과 분명 차이가 있으며, 그에 따라 두 나라가 패권을 유지할 수 있는 기간도 달라졌다. 따라서 우리가 패권 형성과 쇠락의 역사를 살펴볼 때 눈여겨볼 문제는 패권의 바탕이 되는 경제 체제의 속성과 그것에 기대고 있는 재정 체제의 효율성이라 할 수 있다.
-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14세기 중반 유럽을 강타해 유럽 인구의 최소 3분의 1을 앗아간 흑사병을 생각해보자. 유럽은 심각한 위 기를 겪었지만 인구는 그 후 다시 회복되었다. 하지만 아메리카 원주 민 인구는 이렇게 회복되지 않았다. 병이란 게 한 번 돌고 나면 면역이 생기는 법인데도 인구가 다시 회복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원주민이 먹고살기 어려웠다는 방증이다.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스페인 사람들은 금이나 은 같은 귀금속을 얻 기 위해서 원주민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포토시와 멕시코에서 은이 발견된 후에는 원주민 노동력을 끝없이 착취해 엄청난 양의 은을 얻기 도 했다. 이런 학살과 노동 착취를 잊어서는 곤란하다. 더군다나 귀금속이 발견되기 전에 이미 스페인 사람들이 원주민 노동력을 착취하면 서 엄청난 환경 파괴가 일어났고, 그 때문에 수많은 원주민이 희생되 었다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다.
또한 아메리카에 정착한 모든 스페인 사람들이 귀금속 채굴로 먹고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본국에서 그랬듯 농사나 목축으 로 재산을 불리기를 원했는데, 특히 노동력이 많이 필요하지 않은 목축에 관심을 기울였다. 1520년대부터 스페인 사람은 정복 지역에 소, 말, 돼지, 양을 들여왔고, 153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목축을 시작했다.
특히 양을 기르는 데 애써서 1550년대에 이르면 양이 1000마리에서 3900마리로 네 배나 늘어났다.
하지만 양 목축은 원주민 농업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양이 농업 지역 내의 공유 목초지에 풀을 뜯으러 들어왔던 것이다. 남아메리카 환경도 크게 바뀌었다. 원래 남아메리카는 땅이 비옥해서 밀 농사를 주로 지었는데, 목축이 확대되고 원주민 인구가 줄어들면서 사막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전염병, 사막화, 노동 착취 등으로 원주민 인구는 급속히 줄었고 다 시는 그 수를 회복하지 못했다. 이건 어쩌면 원주민에 대한 수탈과 착 취가 그만큼 심했다는 방증일 테고, 유럽인의 도덕적 책임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뜻이다.
- 여기서 두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우선 스페인제국에는 부유한 지 역도 많고, 아메리카라는 든든한 보물창고도 있었는데 왜 전쟁 비용을 조달하는 데 그토록 어려움을 겪었을까? 다음으로 왜 스페인제국과 그 주변 여러 나라와 제국은 끊임없이 영토를 두고 다투었을까?  첫 번째 물음에 대한 답은 스페인제국이 아직까지 중세의 잔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데서 찾아야 한다. 특이하게도 스페인제국 은 정복 전쟁보다는 주로 결혼과 상속, 외교를 통해 유럽 여러 나라를 편입하면서 건설되었다. 그러다 보니 중앙집중적으로 통일된 통치 구조를 갖추지 못했고, 대신 여러 나라가 황제 개인을 중심으로 느슨하게 결합되어 있는 복합왕국composite monarchy 이라는 체제를 따르고 있었다. 복합왕국은 그것을 구성하는 나라의 고유한 통치 구조와 문화를 그대로 보전한 채 왕조 사이에 혼인이나 상속을 통해 영토를 넓혀나가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이런 체제는 손쉽게 빨리 영토를 확장하는 데는 유리하지만, 왕국을 구성하는 여러 지역의 재정 자원을 체계적으로, 또 효율적으로 동원하는 데는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이런 특성은 훗날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여러 주가 하나의 나라를 이 뤄 탄생한 미국과 비교하면 더 두드러진다. 미국은 여러 주가 각각 자 치권을 행사하면서도 연방 정부와 의회가 강력한 연방 헌법 아래 아래 재정 자원을 통제하고 배분할 수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짧은 시간에 강력한 나라로 떠오를 수 있었다. 미국의 연방 체제와 복합왕국의 느 슨한 결합은 달랐다는 이야기다. 반면에 스페인제국 같은 복합왕국은 잘 정비되어 있는 재정 체제를 갖추지도 못했고, 이를 뒷받침하는 이 념도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러니 나랏돈이 필요할 때마다 그때그때 각 지역 엘리트와 갈등하고 타협하면서 근근이 자원을 동원해야 했다.
두 번째 물음에 대한 답은 첫 번째 물음에 대한 답을 보충하기도 한 다. 잘 정비된 체계적인 재정 체제를 갖추지 못한 까닭과 영토를 둘러 싼 다툼이 끊이지 않았던 일은 모두 같은 원인, 바로 스페인제국이 여 전히 봉건적인 경제 질서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이 경제 체제는 근본적으로 군사력을 가진 이들이 농민이 생산한 경제 잉여를 강압적으로 짜내는 일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농민들은 기 술 혁신을 도모해 생산을 늘릴 까닭이 전혀 없었다. 따라서 혁신은 극 히 드물고 생산성은 아주 낮을 수밖에 없는 체제였다.
이런 경제 체제에 바탕을 두고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나 황제는 백성 에게서 거두는 잉여를 단기간에 늘릴 수 없었다. 세금을 늘린다고 해 도 거둬들일 잉여 자체가 워낙 부족하니 한계가 있으며, 대개 농민의 저항에 부딪치기 십상이었다. 이럴 때 쓸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국왕 에게 속한 땅, 그러니까 직영지라 불리는 땅을 더 효과적으로 이용하 는 것인데, 이 일도 농민의 노동력을 동원하는 일이어서 또 다른 저항 에 맞닥뜨릴 위험이 컸다. 결국 봉건 군주가 부를 늘리는 가장 손쉬운 대안은 정복이나 결혼으로 영토를 늘리는 일이었다. 이것이 바로 스페 인제국이 그토록 영토에 집착한 이유다. 영토를 넓히려는 전략, 그러니까 정복 전쟁이나 결혼, 상속, 외교 같은 수단을 동원해 영토를 넓히는 일은 일시적으로 군주의 필요를 채울 수 있다. 하지만 제국 규모로 성장한 뒤에도 봉건제의 잔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스페인제국, 특히 제국의 본거지였던 스페인에는 아직도 농민에게서 잉여를 착취하는 귀족 영주 나 소규모 군주가 많이 남아 있었다. 이런 세력을 완전히 제압하고 중 앙집중적인 국가를 건설하는 일, 즉 역사학자와 정치학자들이 국가 형 성 state formation이라고 부르는 과정이 스페인제국에서는 완성을 보지 못했다.
- 봉건제에 머물고 있던 스페인제국은 상업이나 제조업에서 끝없이 이윤을 거둬 자본을 축적하는 사람이 다수를 이루는 사회로 이행하지 못했다. 이런 이행의 동력은 직접생산자인 농민을 토지에서 축출해 임 금노동자로 바꾸는 과정이 필요했고, 그런 일은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지주가 자본가로 변신해 농민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가능했다. 당시 유럽 변방의 작은 나라였던 잉글랜드가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을 치른 후에 귀족이 대거 몰락하면서 왕권을 크게 강화하는 한편 농촌에서 지 주가 농민을 땅에서 쫓아내면서 재산권을 다져나갔던 게 바로 이런 사 례라고 할 수 있다. 대신 스페인 지주층, 바꿔 말하면 귀족은 여전히 농민에게서 경제 잉여를 짜내어 과시적인 소비에 몰두했다. 이런 이들이 지배층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제국이 계속해서 영토를 둘러싼 전쟁에 휘말리는 일은 피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계속된 전쟁으로 봉건 경제 체제에서 동원할 수 있는 재정 자원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결국 스페인제국은 쇠락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 네덜란드가 발트해 무역에서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네덜란드인이 보유한 대규모 선단, 동원한 선박의 효율성과 그에 따른 낮은 운송비를 꼽을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네덜란드인이 많은 배를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었던 건, 네덜란드에 서 일찌감치 어업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특히 중요했던 것은 대어업大魚業이라 불렀던 청어잡이였다. 네덜란 드가 여기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떻게 보면 운이 좋았다. 원래 청 어 떼는 발트해에 주로 머물렀는데, 15세기에 소빙하기로 바다 수온이 낮아지자 좀 더 따뜻한 바다를 찾아서 네덜란드 앞바다인 북해로 이동 한 것이다. 그래서 『베르메르의 모자Vermeer's Hat』를 쓴 캐나다 역사학자 티머시 브룩Timothy Brook은 네덜란드인이 ‘윈드폴windfall”, 즉 '뜻밖의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네덜란드 어부들은 이런 행운을 누리기에 충분한 준비를 갖 추고 있었다. 이미 14세기 중반에 청어 내장을 제거해 소금에 절이는 기술을 개발했고, 15세기 초에는 기동력이 좋고 안정적인 뷔스buss 라는 배를 이용했다. 17세기 전반기에 이르면 이런 청어잡이 어선이 무려 1500척이었고, 어부 숫자도 1만 2000명에 달했다. 네덜란드 상인은 청어와 발트해 지역의 곡물을 교환했는데, 이 곡물을 서유럽과 이베리아반도 지역에 수출하고 대신 정제되지 않은 소금이나 수공업 제 품을 수입해 큰 이익을 거뒀다.
어업과 무역의 성장은 네덜란드 조선업 발전을 이끄는 힘이 되었다. 튼튼하고 빠른 뷔스에 이어 16세기 말에는 소형 범선인 카라벨caravel 을 개량해 원양 항해에 적합하게 만든 캐럭carrack을 발트해 무역에 널 리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595년에는 플라이트fluyt라는 범선을 개 발해 썼는데, 이 배는 선체 좌우가 볼록해 많은 상품을 실을 수 있었기 때문에 대량 운송에 아주 효율적이었다. 17세기에 이르면 네덜란드 조선소에서 매년 건조되는 배는 400척이 넘었고, 고용된 노동자만 해도 1만 명 이상이었다. 네덜란드에서 도시화가 빠르게 일어났다는 사실은 경제가 성장하는 데 유리한 여러 변화를 낳았다. 중세 후기에 네덜란드를 비롯해 유럽 곳곳에서 일어난 도시화는 근대적인 재산권 개념이 생기고 퍼져나가 는 데 도움이 되었다. 물론 그것만으로 자본주의가 자리 잡았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배타적인 재산권 개념이 도시에서 널리 퍼지기 시작하면서 상거래와 공업이 발전했다.
도시가 발전하면서 문화적으로나 지적으로 번성한 일도 넓게 보면 네덜란드가 스페인의 지배에서 독립하고, 암스테르담 같은 국제 도시 가 발전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인문주의가 북유럽에서 기독교 인문주의 humanism 운동으로 변해 저지 대 국가 도시들을 중심으로 꽃을 피웠다. 그 시대 대표적인 인문주의 자로 유럽 곳곳 지식인과 깊이 교류했던 지식인 에라스뮈스가 저지대 국가 출신이었다는 사실이 이 점을 잘 보여준다. 
- 결국 종교재판소 도입과 개신교도에 대한 박해에서 시작된 정치적·종교적 불만에, 스페인제국의 무리한 세제 개혁과 극단적인 조치가 더 해지면서 17개주 전체의 저항 운동으로 번져나갔다. 특히 이 과정에서 네덜란드 사회의 주류를 이루었던 상인 집단의 태도 변화를 주목해야 한다. 원래 상인은 정치적 저항을 굉장히 꺼리는 편인데, 정치권력자에 대해서 드러내놓고 저항하는 일은 자칫하면 사업 자체를 완전히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신중하고 또 신중한 상인이 저항에 가담했다는 건, 그만큼 제국에서 얻는 이익에 비해 제국이 강요하는 부담이 너무 커졌다는 뜻이다.  네덜란드독립전쟁은 1568년에 시작되어 이후 80년이나 계속되었 다. 물론 이 작은 나라가 당시 세계 최강의 스페인제국군에 맞서는 건 정말 쉽지 않았을 것이다. 1580년대 말, 스페인제국의 공세가 거세지 자 네덜란드공화국은 '스페인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으로 프랑스나 잉글랜드에 보호를 요청해볼 궁리까지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1590년대 이후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상업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막대한 부가 축적되고, 이런 부가 다시 전쟁을 지속시키는 일종의 선 순환이 나타난 것이다. 그 덕택에 네덜란드는 스페인제국은 물론 잉글 랜드나 프랑스 같은 새로운 열강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하면서 경제적 활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좀 더 자세하 게 살펴보자.
- 이렇게 볼 때 오랜 전쟁에도 네덜란드가 스페인제국과 달리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는 네덜란드 정부가 군사와 재정 정책으로 네덜란드 상업을 적극적으로 보호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쟁을 피해 이주한 수많은 이민을 유치해 자본과 지식, 사업 네트워크를 흡수했던 일도 크게 기여했다. 군사비를 몇몇 국제 은행가들의 대부에 의존 한 스페인제국과 달리 자국의 부유한 시민에게 의존한 일도 경제가 활 발하게 돌아가는 데 도움이 되었다. 세금만으로는 전쟁을 치를 수 없 었던 정부가 장기 공채 같은 채권을 발행해 시민으로부터 전쟁 자금을 모았고, 그 결과 채권 시장에서 거래가 활발해져 시중에 자본이 더 활 발하게 돌았던 것이다. 이렇게 네덜란드 경제는 상업과 금융업을 바탕 으로 전쟁에 적응해갔다. 결국 군사력과 재정 자원을 동원하는 일과 상업을 유기적으로 연 결해 계속 부를 창출하는 체제를 갖춘 네덜란드는 봉건 영토의 세금 과 아메리카의 귀금속,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대규모 대부에 의존한 스페인제국과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8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치 열하게 다툼을 벌였던 두 나라 가운데 스페인제국은 전쟁이 길어질수 록 힘을 잃은 반면, 네덜란드는 상업의 위용을 유럽 안팎에서 마음껏 과시했다. 그 결과, 인구가 기껏해야 150만 명 정도였던 작은 나라 네 덜란드는 당대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스페인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지켜낼 수 있었고 더 나아가 패권 국가로 도약하기 위한 궁극적인 힘, 바로 상업을 진작할 수 있었다. 어떻게 네덜란드가 그런 힘을 갖게 되 었는지 이해하려면 16~17세기 아시아 무역에서 두각을 나타낸 동인 도회사의 사례를 살펴봐야 한다.
* 16세기 중반에 저지대 국가 신교도 제조업자가 주로 만들었던 새로운 직물을 일컫는 말이다. 길이가 짧은 방모사로 짠 무겁고 폭이 넓은 구직물 old draperies과 달리 신직물은 좀 더 거칠고 가벼우면서 길이가 긴 소모사로 짰다. 나중에는 소모사와 방모사를 엮어 짠 서지serge나 소모사와 명주실로 짠 직물이 등장했다. 구직물은 16세기 중반에 인기를 있은 반면, 신직물은 가볍고 색깔이 다채로운 데다가 값이 저렴해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 네덜란드의 한계: 봉건 귀족에 기댄 자본주의 경제
동인도회사의 배들이 아시아 곳곳을 헤집고 다니던 17세기 전반은 그야말로 네덜란드의 황금기였다. 독립전쟁은 1648년에 막을 내렸고, 네덜란드공화국의 독립이 국제 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네 덜란드 상인들은 유럽과 아시아, 아메리카의 갖가지 상품을 본국으로 들여온 후 이를 다시 유럽 곳곳에 유통시켜 엄청난 이윤을 누렸다. 고 급 직물을 비롯한 네덜란드 공산품은 유럽 전역에서 인기를 끌었다. 네덜란드는 그야말로 세계의 창고가 되었다. 프랑스 역사가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은 저서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Civilization materielle, Economie et Copitalisme』에서 네덜란드 창고 무역의 일면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거대한 창고였다. 창고는 큰 선박보다 더 크고 많은 비용이 들 었다. 이것을 이용해서 연합주(네덜란드) 전체 국민이 10~12년 동안 (1670년) 소비할 수 있는 양의 밀을 비롯해 청어, 향료, 영국의 직물, 프랑스의 포도주, 폴란드와 동인도의 초석, 스웨덴의 구리, 메릴랜드의 담배, 베네수엘라의 카카오, 러시아의 모피, 에스파냐의 양모, 발트해 지역의 대마, 레반트의 비단 같은 상품을 보관했다.”
이런 ‘창고무역(중개 무역)' 에서 축적한 부 덕분에 네덜란드 사회는 대단한 풍요를 누렸다. 이를테면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렘브란트나 페 르메이르 같은 대가를 비롯해서 수많은 화가의 작품들이 활발하게 거 래되었다. 17세기 중반 네덜란드에는 대략 250만 점의 미술 작품이 유통되었는데, 네덜란드는 물론 유럽 곳곳에서 수입된 작품들, 특히 여러 장르의 회화 작품은 네덜란드 중산층 가정을 장식하는 데 활용 되었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황금기는 짧았다. 17세기 후반이 되면 이미 경제 에서 쇠퇴의 징후가 나타나고, 유럽에서 새롭게 떠오른 강자 잉글랜드 와 전통적인 열강 프랑스와의 경쟁에서 뒤처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때 도 네덜란드는 여전히 유럽에서 가장 부유했지만, 17세기 초 같은 활 력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핵심적인 원인은 네덜란드가 기본적으로 상업에 거의 모든 것을 의존하는 사회였다는 데 있었다.
네덜란드는 자본주의 사회의 면모를 어느 정도 갖추기는 했지만, 네 덜란드가 거래하며 이윤을 거뒀던 유럽 사회는 여전히 봉건 질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스페인제국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봉건 사회는 기 본적으로 영토의 논리, 그러니까 토지에 묶여 있는 농민으로부터 강제 로 잉여를 수취하는 이들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그러므로 농업에서 문 제가 생기면 지배층이 거둬들일 수 있는 잉여도 줄고, 그만큼 이들이 익숙했던 사치스러운 과시적 소비도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소빙하기 가 찾아와 유럽 대부분 나라에서 농업 생산이 위축된 17세기 중반 위 기는 바로 이런 문제를 낳았다.
- 그 결과, 네덜란드 경제의 중추를 이루었던 무역에 문제가 생겼다. 우선 네덜란드 무역을 오랫동안 지탱한 발트해 무역이 정체하기 시작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된 건 네덜란드 해양 운송업과 무역업에 특별히 문제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실제로 발트해 무역에서 네덜란드가 차지하는 비중 자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농업 위기로 인 해 인구가 줄어들거나 정체되어 전반적으로 수요가 떨어져서 발트해 무역량 전체가 줄어든 것이 문제였다. 실제로 17세기 전반 이후 발트 해 무역량은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해 17세기 말에는 20퍼센트 가까이 줄었고, 18세기 전반기에는 절반 이하로 줄었다.
발트해 무역이 위축되었던 것만큼이나 네덜란드 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 일은 아시아 향료 무역의 수익성이 악화된 것이었다. 이 역시 17세기 유럽의 위기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인구가 줄어들 고 농업 생산이 위축되면서 향료 같은 사치품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었 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향료 무역의 수익성이 빠르게 악화된 17세기 후반에 인도산 면직물이나 차, 커피 같은 새로운 상품의 교역은 늘어났다. 네덜란드동인도회사도 이런 추세에 따라 면직물 같은 새로운 상 품 시장에 들어가려 했지만, 여기서는 향료 무역에서처럼 독점적인 지 위를 구축하기가 어려웠다. 향료와 달리 면직물 같은 상품의 생산지는 여러 지역에 분산되어 있었던 데다가, 강력한 제국과 지역 국가에 속 해 있었기 때문에 쉽게 정복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네덜란드동인도회사는 새로운 무역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구태의연한 방법을 쓰려고 했다. 차 무역 같은 경우 네덜란드는 향료제도에 있던 약소 부족에게 썼던 방법을 아시아의 거인 중국에도 쓰 려고 했다. 물론 중국 정부는 가만있지 않았고 네덜란드동인도회사가 차 무역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사이 잉글랜드동인도회사는 차 시장에 뛰어들어 인도산 면직물과 중국산 차를 맞바꾸는 새로운 무역 을 시작했다. 네덜란드동인도회사는 폭력과 강압으로 큰 성공을 거뒀 으나 예전의 성공에 도취된 나머지 변화하는 세계 경제 환경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 그렇다면 네덜란드의 패권은 왜 오래 이어지지 못했을까? 두 가지 원인을 제시할 수 있는데, 하나는 봉건 질서가 지배하는 유럽 세계에 서 네덜란드가 주로 사치품 무역을 통해 이윤을 거두고 있었기 때문이 다. 그러다 보니 17세기 소빙하기에 농업 위기가 찾아왔을 때 봉건 귀 족의 구매력이 급격하게 떨어지자 네덜란드로서는 이윤을 창출할 만 한 대체 구매자를 찾기 어려웠다. 다른 하나는 국가 형성 과정에서 일 어난 중상주의 경쟁에서 밀려났기 때문이다. 경제 성장이 빠르지 않아 서 재정 자원을 동원하기 어려울 때 규모가 훨씬 큰 프랑스나 잉글랜 드 같은 경쟁자와 만나다 보니 싸움이 힘들 수밖에 없었다.
따지고 보면 이런 한계는 네덜란드 자본주의가 좀 더 발전했다면 해 결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네덜란드가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아주 오 래된 전통적인 논리를 따라 이윤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는 기 술 혁신과 국내 시장의 통합, 내수 시장 확대 같은 성숙한 자본주의 사 회를 추구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아울러 규모의 문제도 이 점과 연관이 있다. 네덜란드가 대외 무역에 집중하면서 실제로 정착식민지를 확대하는 데 관심을 보였다면 무역 위기가 닥쳤을 때 이를 보완해줄 넓은 제국 시장에 기댈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네덜란드는 17세기 후반 이후 패권을 잃은 다음에도 여전히 부유한 나라로 남았다. 18세기 중반까지도 네덜란드의 1인당 국내총 생산은 유럽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오히려 문제는 네덜란드 경제가 성장이나 후퇴가 거의 없는 정체 상태에 접어들 었다는 것이었다. 원래 상업에 바탕을 두고 자본을 축적했던 나라였기 때문에 제조업이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고, 기술 혁신이 빠르게 일어나 지 않았던 터라 18세기 즈음에 이르면 네덜란드 자본은 투자할 곳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네덜란드 자본은 금융 시장으로 몰렸고, 거기서 조성된 돈은 결국 경쟁국인 영국으로 흘러들었다.

- 네덜란드의 뒤를 이어 패권을 거머쥐게 된 영국은 좀 달랐다. 영국의 자본주의 역시 상업에 크게 의존하기는 하지만, 제조업 분야에서의 기술 혁신이 네덜란드보다 지속적으로 일어났고, 결국 산업혁명에 성공했다. 따라서 네덜란드는 영토 확장에 바탕을 둔 스페인 과 자본 축적에 기댄 영국 사이에 놓인, 이를테면 이행기의 패권 국가 였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그래서 네덜란드의 전성기는 그렇게 짧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 학교에서 명예혁명과 권리장전에 관해서 배울 때 흔히 국민의 자유 같은 기본권을 보장하는 근대 입헌군주제가 성립된 사건이었다는 정 도로만 이해하고 넘어간다. 그런데 그만큼이나 중요한 일이 바로 의회 가 매년 열렸다는 사실이다. 이 의회를 구성하는 의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공채나 주식을 샀던 상인이나 제조업자, 지주였다. 그러니까 공 채를 사는 사람들이 세금을 매기고 그 세금 수입으로 자기 자신에게 이자를 지불하는 법을 만들었던 셈이다. 다시 말해, 정치권력과 돈을 버는 일이 긴밀하게 얽혀 들어갔던 것인데, 이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 의 아주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명예혁명의 성공은 영국 자본주의의 발전과 깊이 연관된 사건이었다.
- 실제로 영국 의회는 특정 물품소비세와 관세 수입을 정부 공채에 지 불하는 이자로만 사용하도록 법을 제정했고, 이런 식으로 정부의 지불 을 보증해 시장에서 두터운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그 결과, 영국 정 부는 매번 전쟁을 치를 때마다 점점 더 큰돈을 금융 시장에서 조달할 수 있었다. 이러다 보니 프랑스 같은 경쟁국은 영국 정부의 자금 조달 능력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프랑스와 전쟁을 시작한 1689년 잉글랜 드 정부가 지고 있던 부채는 겨우 100만 파운드 정도였다. 적은 액수는 아니지만, 훗날을 생각하면 사소한 돈이었다. 1690년대 재정혁명을 시행한 후 9년전쟁이 끝났을 때 그 액수는 1500만 파운드로 늘었 다. 세월이 흘러 북아메리카독립전쟁이 끝나는 1783년에 이르면 국가 부채가 2억 4300만 파운드에 이르렀다(2017년 기준으로 계산하면 2000 억 파운드가 넘는 금액이다). 80년 만에 조달할 수 있는 재정 자원의 규모가 거의 15배 늘어난 셈이다.
- 18세기 영국 대서양 무역은 네덜란드처럼 중개 무역에 그친 것이 아니라 영국 내 제조업 발전과 긴밀한 연관관계를 맺으며 발전했다. 무역과 제조업 발전이 시너지를 내면서 함께 성장했던 것이다. 무역을 통해서 거둬들이는 수입뿐만 아니라 제조업 발전을 통해서 창출되 는 고용과 부가가치는 영국 내 시장을 확대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런 만큼 영국 자본주의가 더욱 진전되었고, 이것은 훗날 산업혁명이 일어나는 데 중요한 조건을 제공했다. “산업혁명에 불을 붙일 불꽃이 필요했다면 해외 무역은 그 불꽃이 나온 곳”이라고 말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의 말처럼 말이다.
- 삼각 무역은 영국과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세 축을 연결하는 교역 네트워크였다. 런던이나 브리스틀, 리버풀 같은 곳에서 출발한 배는 인도산 직물이나 술, 총, 각종 제조업 제품을 신고 서아프리카에 도착했다. 이런 상품으로 현지 노예 상인에게서 노예를 산 뒤 아메리카대륙을 향해 떠났다. 북아메리카 남부 식민지나 서인도제도에서 노예를 팔고 나면, 그 빈자리를 설탕이나 담배, 커피, 염료, 해군 물자 같은 물품으로 채워 넣고, 다시 영국으로 떠났다. 세 단계로 이루어진 이 여정은 길게는 18개월이나 걸렸다.
- 근대 초에 탄생한 자본주의는 이렇게 인간을 착취해 얻은 이윤에 바탕을 두고 작동했다. 이를 초기 자본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 자본주의가 영국에서 처음 탄생했다는 사실은 영국이 어떻게 네덜란드와 프랑스를 물리치고 패권을 장악할 수 있었는지 설명할 때 중요한 의미 를 갖는다. 간단히 말해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축적된 자본은 그 자 체로 패권 형성의 요인이 될 뿐만 아니라 군사력으로 전환되어 실제로 패권을 쟁취하는 데 힘을 보탰다. 이후 영국이 패권을 장악하고 영제국이 점점 세를 넓히는 과정은 바로 이 자본주의의 확대 및 심화와 밀 접한 관련이 있다. 19세기에 '팍스 브리타니카 Pax Britannica'라고 불리는 시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 따라서 영국의 패권을 뒷받침한 산업혁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런 일반적인 설명보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서 산업혁명 시대 일어난 기술 혁신과 투자를 추동한 ‘동력'을 찾아봐야 한다. 이 문제와 관련해 최근에 널리 주목받는 한 가지 가설은 영국의 독특한 생산요소 의 가격 구조가 영향을 주었다고 이야기한다. 이를테면 산업혁명 중심지였던 북부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노동 과 자본의 상대 가격을 비교해보면 흥미로운 결과가 나온다. 1800년 무렵 빈과 스트라스부르에서는 자본 가격에 비해 노동 가격이 세 배 이하 수준이었는데, 북부 잉글랜드에서는 일곱 배나 되었다. 이런 비교는 프랑스나 오스트리아에 비해 영국에서 노동 가격이 자본 가격보다 훨씬 높았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그러면 상대적으로 값비싼 노동보다 자본을 좀 더 풍부하게 이용하려 했을 터다.
노동만 따로 떼어놓고 봐도 영국은 확실히 '고임금高賃金 경제'였다. 건설 노동자가 받는 임금을 하루에 얻을 수 있는 은의 양으로 환산해 세계 주요 6개 도시의 임금 변화 추이를 살펴본 결과, 런던 노동자는 이미 17세기 후반에 세계에서 제일 높은 수준의 임금을 받고 있었다. 산업혁명 기간인 1775년 이후에는 런던 임금이 다른 나라 주요 도시보다 훨씬 빨리 올라서 암스테르담과 비교하면 두 배 수준이었고, 베이징과 비교하면 여섯 배 수준에 달했다. 이렇게 임금이 높았으니 자본가가 이윤을 내려면 당연히 노동력 비용을 줄이는 방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가격 구조 아래에서 상대적으로 값이 비싼 노동력 투입은 줄이는 대신에 그에 비해 값이 싼 자본을 좀 더 투입하려는 경제적 유인이 작동했다. 그게 바로 이 시기 영국에서 앞다퉈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자본을 투입하는 산업혁명이 일어난 원인이었을 것이다. 
- 비용은 치르지 않으면서도 세계 곳곳에서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고 싶었던 영국이 선택한 방법은 기발했다. 비공식적인 지배, 그러니까 큰 비용을 치러야 하는 식민지 병합이나 공식적인 지배는 자제하고 다른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길을 찾기로 한 것이다. 영국은 이제까지 자본주의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해서 시장이 발전하지 못한 곳에 영국 산 공산품을 자유롭게 수출하고 영국인이 마음껏 자본을 투자하는 데 필요한 제도와 틀을 갖추는 데만 집중하기로 했다. 19세기 중반 영국 이 아시아와 아메리카 여러 지역에서 문호 개방에 특히 관심을 기울이 면서 자유로운 무역 특권을 얻는 데 주력한 일은 바로 이런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이 같은 침투 전략을 실천하면서 영국이 흔히 활용했던 방법은 무역 조약을 맺는 것이었다. 자본주의가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한 아 시아나 아메리카 여러 나라에서는 영국인이 시장에 진입하는 데 반드 시 현지 권력의 보호가 필요했으므로 조약으로 이런 보호를 약속받고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제도를 서서히 이식했다. 실제로 영국은 여러 나 라와 자유 무역 조약을 맺었다. 1836년과 1857년에 페르시아와 조약 을 맺었고, 1838년에는 오스만제국과 조약을 체결했다. 1833년에는 중국과 자유 무역에 합의했고, 1858년에는 일본과 조약을 맺었다.
이런 조약에는 여러 가지 내용을 담기 마련이지만, 영국 정부가 반 드시 확보하려 했던 조건 하나는 바로 최혜국 대우였다. 최혜국 대우 란 조약을 체결한 두 나라가 합의한 조건을 이 두 나라와 최혜국 대우를 약속한 모든 나라에 동일하게 적용한다는 원칙이었다. 영국이 이 조항을 귀중하게 여겼던 까닭은 몇몇 나라와 자유 무역 조약을 맺기만 하면 최혜국 대우 조항을 바탕으로 자유 무역 원리를 널리 퍼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 정부의 처지에서 보면 외교적인 노력을 최소한 으로 줄이면서도 자유 무역 원리와 제도를 퍼트리는 아주 좋은 방법이 었다.
이런 영국의 전략을 역사가들은 '자유 무역 제국주의free trade imperialism’라고 부른다. 핵심은 공식 지배보다는 비공식적인 영향력 확 대를 선호하되, 특히 영국과 자유롭게 무역하면서 이익을 얻는 토착 엘리트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영국 제품을 파는 시장을 만들고 영국 자본이 자유롭게 진출할 환경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 전략을 바탕으로 영국은 1840년대부터 몇십 년 동안 중국과 남아메리카, 오스만제국, 아프리카 일부 지역을 마치 식민지처럼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었다. 게다가 교통과 통신 기술의 발달은 영국의 바뀐 정책을 성공적으로 뒷받침했다. 그래서 19세기 말 저명한 역사가 존 실리는 증기기관이 제국이라는 “정치적 유기체에 “새로운 혈액 순환망”을 공급했고, 전신은 “새로운 신경 시스템”이 되어주었다고 이야기했다. 이를테면 중국 과의 아편전쟁에서 잘 드러났듯이, 증기선은 영국 상인이 하천을 따라 내륙 깊숙한 곳까지 이동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인도나 남아메리카에 철도망을 놓은 일은 내륙의 도시와 읍내, 항구를 연결해 거대한 시장 을 만들었다. 오고가는 수많은 열차의 일정을 정확하게 조절하는 수단으로 철도망과 함께 발전한 전신은 1850년대부터 해저 케이블을 통해 본국과 식민지 사이에 소식을 빠르게 전달했다. 예전에는 몇 달씩이나 걸려 도착하던 소식이 단 몇 시간 만에 전해지니 통치의 효율성이 좋 아지는 것은 당연했다. 물론 이런 기술 진보 역시 산업혁명의 성과라 는 점을 생각하면, 산업혁명이 제국을 경영하는 방법을 크게 바꿔놓았다고 말할 수 있다.
- 18세기에 빈번하게 일어난 전쟁을 통해서 발전한 런던 금융 시장은 나폴레옹전쟁 때까지 국가 부채가 증가하면서 규모가 더 커졌다. 이어 19세기 자유 무역 시대에 영국이 세계 무역의 중심이 되면서 런던 금융 시장이 제공하는 각종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늘었고, 해외 투자 가 크게 증가했다. 19세기 후반 세계 최대의 자본 수출 국가였던 영국 은 1차 세계대전 직전 매년 40억 파운드를 수출했다. 자본 수출이 활발 해지자 영국의 국부國富 가운데 해외 자산이 차지하는 비중도 크게 늘 어 1850년 대략 7퍼센트 수준에서 1913년 35퍼센트까지 올라갔다. 이렇게 경제 환경이 변하면서 소득 대부분을 금융 자산에서 얻는 사회 집단이 등장했다. 이들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 한복판에서 자본 투자와 혁신으로 이윤을 얻고, 이윤을 재투자해 더 큰 자본을 축적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생산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일, 그러니 까 귀족의 핵심적인 특질을 받아들이면서 노동 세계를 멀리하고 여가 를 중시했다. 이런 이중적인 특징에 주목해서 역사가들은 이들을 '신사 자본가gentleman capitalist' 라고 부른다.
흔히 영국 신사라 하면 즉시 떠오르는 어떤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프록코트를 차려입고 모자와 지팡이를 갖춘 말쑥한 중년 남자 같은 이미지 말이다. 이런 복식이 한창 유행했던 때가 바로 19세기였다. 이렇 게 차려입은 신사 자본가는 생산 활동에 관여해 수입을 얻는 일은 신 사답지 못하다고 여기며 제조업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이 주로 다녔던 이튼이나 해로 같은 명문 사립학교나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교도 산업이나 기술 문제를 가르치지 않았다. 오히려 고색창연한 고전 교육을 주로 받고, 졸업 후에는 금융업에 진출하거나 금융 소득 으로 살아가면서 의회와 중앙 정부, 교회, 지방 정부의 요직을 차지해 지배 엘리트의 지위를 굳건하게 유지했다. 이렇게 지배층이 된 신사 자본가들의 가치관과 태도는 사회 곳곳으로 퍼져나갔고, 산업계 종사 자들도 빨리 은퇴해서 그들처럼 살고 싶어 했다. 그사이 1차 산업혁명 시대에 영국 사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도전과 모험 정신은 쇠락했다.
신사 자본주의가 널리 확산되면서 영국 제조업의 상대적 쇠퇴를 만 회할 만한 정책적인 노력은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영국의 제조업자들 이 미국이나 독일의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자유 무역 체제를 재검토해 달라고 요청할 때에도 해외에 투자한 금융 소득이 주 수입원이었던 신 사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자유 무역에 더욱 집착했다. 이 를테면 대불황 시기 디플레이션에 대한 대책으로 금과 함께 은을 기축 통화로 정해 통화 공급을 조절하자는 제안이 산업계에서 나왔지만, 영국이 주도하는 금본위제 아래에서 이익을 거두고 있었던 신사 자본가 들은 격렬하게 반대했다. 이처럼 금융업에 이해관계가 있는 신사 자본가들이 정책 결정권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 산업계의 입장을 개선할 수 있는 정책은 성공하기 어려웠다. 그사이 미국은 강력한 보호 정책을, 독일은 국가 주도의 산업 정책을 바탕으로 영국을 발 빠르게 따라잡았다.

- 식민지 시대 대부분, 더 정확하게 말해 7년전쟁이 끝나는 1763년 이전까지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한 영국 정부의 기본 정책은 '유익한 방치salutary neglect'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영국인은 식민지가 기 본적으로 본국이 필요로 하는 원료와 농산물 공급처 역할, 그리고 영 국산 제조업 제품 시장 역할을 하면서 본국의 재정 지원 없이 자생하 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식민지가 영국의 경제 발전에 는 기여하되 영국인에게 재정 부담을 지워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식민지가 이런 역할만 충실하게 한다면, 영국 정부는 식민지 내에서 벌어지는 일에 시시콜콜 개입할 까닭이 없었다. 따라서 대부분 문제에서 식민지는 사실상 자치권을 누리고 있었다.
내부에서는 자치를 유지하면서도, 북아메리카 식민지인은 영제국의 테두리 안에서 영국 정부가 제공하는 군사 보호와 번성하는 제국 시장 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 권한을 누릴 수 있었다. 물론 영국 정부는 본국 제조업자와 식민지인이 서로 경쟁해서는 곤란하다는 원칙 아래 몇몇 식민지 제조업을 규제하기도 했다. 하지만 식민지인 대부분은 무엇보 다 지주가 되기를 원했던 데다가, 원료와 농산물을 영제국 아래에 있 는 아프리카와 서인도제도, 영국 본국에 수출하면서 큰 이익을 거뒀기 때문에 이런 규제에 대해 크게 불평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항해법과같은 식민지 규제에 대해서 그렇게 불만을 품을 까닭이 없었다.
북아메리카 식민지는 주로 원료와 농산물을 수출하고 공산품을 수 입했기 때문에 본국과의 무역에서 꽤 큰 적자를 감수해야 했다. 하지 만 식민지는 운송업에서 상당한 이익을 거두고 있었고 본국에서 여러 형태로 부를 이전받았다. 예컨대 1768~1772년 경상수지를 살펴보 면 상품 무역 부문에서 식민지는 영국에 대해 매년 150만 파운드 정 도 적자를 기록했지만 서비스 부문에서 운송 및 각종 서비스로 72만 파운드 흑자를 봤다. 본국에 납부한 세금은 4만 파운드에 지나지 않 았고 오히려 본국으로부터 군사비 40만 파운드를 지원받았으며 공직 자 봉급 4만 파운드 정도를 이전받고 있었다. 이런 여러 항목을 다 합치면 본국에 대한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경상수지는 거의 균형을 이루 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해 산업 국가로 변신 중인 영국과 농업이 기반인 북아메리카 식민지 사이는 일종의 보완 관계 또는 동반자 관계였고, 식민지는 그 덕분에 충실하게 성장을 이어갈 수 있었다.
- 이렇듯 내전이 끝난 이후부터 1차 세계대전 전까지 미국의 경제발전은 풍부한 자원과 통합된 방대한 국내 시장, 기술 혁신, 인구 증가와 이주민 유입 같은 여러 요인에 기대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이 다른 쟁 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노쇠한 영국을 대신해 세계 최고의 경제 대 국에 올라설 정도로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었던 데는 이런 요인들보다 더 근본적인 무엇이 있었다.
미국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는 자본주의 경제 성장이 창조적 파괴', 즉 혁신으로 기존 산업 생태계를 뒤흔들어 새로운 산업을 창출하고, 거기서 생산성 향상을 이루어내는 데 달렸다고 역설한 바 있다. 영국의 경우, 이런 혁신은 제임스 와트, 리처드 아크라이트 같은 발명가 가 주도했고, 그 밑바탕에는 개선을 지향하는 혁신 문화가 있었다. 하지만 미국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미국에서 2차 산업혁명을 주도하면 서 새로운 혁신을 연이어 내놓은 이들은 영국처럼 전통적인 개인 발명가가 아니라 대기업과 이를 이끄는 기업가였다.
- 미국이 대공황에서 벗어나는 데 이토록 어려움을 겪었던 까닭은 무 엇일까? 근본적인 요인은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이루지 못한 데 있었 다. 간단히 말해 다른 모든 나라를 압도하는 생산력으로 엄청나게 많 은 양의 상품을 생산할 수 있었지만 국내 수요가 그 수준에 미치지 못 한 것이다. 물론 해외 수요가 충분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럽이나 일본도 공황을 겪은 데다, 공황이 시작되면서 미국을 필두로 모든 주요 자본주의 국가가 보호 무역으로 돌아서버렸다
- 미국의 처지에서 가장 뼈아픈 대목은 국내 시장의 대안이 될 수 있었던 유럽 시장의 구매력이 아주 더디게 회복된 데 있었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미국의 도움 없이 유럽 재건 은 불가능하다고 역설했지만, 이런 주장은 전통적으로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고립주의자의 반발에 부딪쳐 묻혀버렸다. 많은 미국인은 자신의 나라가 낡고 부패한 구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에 개입해 희생을 치를 까닭이 없다고 생각했다. 독일의 도발 때문에 세계대전에 개입하기는 했지만, 전쟁이 끝나자마자 미국인 대다수는 다시 유럽에서 손을 떼고 싶어 했고, 복잡한 배상금 문제나 전시 부채 문제에서 미국의 이익을 챙기는 데만 집중했다. 그래서 미국은 패전국 독일이 부담해야 할 배상금은 물론, 영국을 비롯한 승전국이 미국에 갚아야 할 엄청난 액수의 부채를 탕감하는 일을 거부했다. 특히 막대한 규모로 책 정된 전후 배상금은 독일 경제를 거의 황폐화시켰는데, 미국은 독일에 시장 개방 같은 도움을 주지 않았다. 경기 위축을 부채질한 또 하나의 요인은 전쟁 직후 영국을 비롯한 주요 자본주의 국가가 전쟁으로 크게 달라진 경제력을 무시하고 예전 환율 체제로 되돌아간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19세기 초부터 1930년 대 초까지 세계 경제를 떠받치던 환율 체제는 영국 파운드를 기축 통화 로 삼은 금본위제였다. 이는 영국이 견실한 재정 체제를 유지하고 영국 경제가 잘 돌아갈 때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세계대전 후 상황은 완 전히 달라졌다. 영국은 전쟁 이전 환율 그대로 금본위제를 복구하려 했 지만, 전쟁으로 크게 위축된 영국 경제는 고평가된 파운드화를 유지하 기 어려웠다. 이때 만약 미국이 나서서 달러를 새로운 기축 통화로 정 하고, 막대한 금 보유고를 바탕으로 국제 통화 체제를 뒷받침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그러지 않았고 결국 대공황이 일어나자 여러 나라가 극심한 금융 위기를 겪게 되었다. 최종 대부자 역할을 하는 패권 국가가 없는 상태에서 세계 경제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이런 상황에서 미국을 필두로 전 세계가 보호주의로 돌아선 것은 불 난 곳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었다. 대공황이 결국 수요 부족에서 비롯 한 일이라면, 대공황이 시작되었을 때 가장 부유한 미국이 세계 여러 나라에 시장을 활짝 열어 교역을 활성화하고, 이를 통해 구매력을 회 복하면 미국산 제품에 대한 수요를 다시 만들어내는 방법을 취해야 마 땅했다. 그런데 미국은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1930년 관세 법을 제정해 900개 제조업 제품과 575개 농산물에 대한 평균 관세를 18퍼센트나 인상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영국과 프랑스 같은 나머지 주요 자본주의 국가도 보호주의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세계 경제는 이른바 '블록 경제'로 재편되었고 국제 교역은 크게 위축 되었다. 1929년 360억 달러 수준이었던 국제 거래 규모는 1932년 약 120억 달러로 줄어들고 말았다.
결국 1920년대 말 시작되어 거의 10년 동안 미국 경제를 괴롭혔던 대공황에 대한 책임 가운데 상당 부분은 미국에 있었다고 봐야 할 듯하다. 1차 세계대전으로 세계 제1의 경제 대국으로 떠오른 미국은 영 국의 뒤를 이어 패권 국가로서 세계 경제의 안정과 발전을 뒷받침할 만한 행보를 보여야 했다. 하지만 미국은 당시 극도로 혼란스러운 경 제 상황을 악화시키는 최악의 선택을 거듭했다. 자유 무역을 더욱 진 작해야 할 상황에서 예전처럼 강력한 보호주의를 택했고, 금본위제에 서 빨리 이탈해야 할 때도 머뭇거리기만 했다. 이런 미국이 대공황을 극복하고 세계 경제를 이끄는 명실상부한 패권 국가가 되기까지는 또 한번의 세계대전을 겪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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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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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의 역사

역사 2021. 10. 22. 20:26

- 수천 년 동안 서구 사회에서 빨강은 색이라 불릴 만한 유일한 색이었다. 시간적으로나 위계상으로나 빨강은 다른 모든 색들보다 앞섰다. 물론 다른 색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그 자체로 인정받기까지, 그리고 물질문화, 사회 코드, 사고 체계에서 제 역할을 수행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인간은 빨강을 기반으로 하여 처음으로 색 체험을 하고, 성공을 맛보았으며, 자신의 채색된 우주를 구축했다. 빨강을 나타내는 아주 오랜 옛날의 어휘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인간은 일찍부터 빨강으로 다양한 색조와 뉘앙스를 만들어 냈다. 여기서 언어는 회화의 수법, 염료나 염색의 기법과 만난다. 몇몇 언어에서는 한 단어가 상황에 따라 '빨강'을 뜻하기도 하고 ‘채색된, 유색의'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고전 라틴어의 코로라투스 coloratus', 현재 카스티야어의 콜로라도 colorado가 그렇다. '빨강'과 '아름다움'을 뜻하는 두 형용사가 같은 어근을 갖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러시아어에서 크라스니krasny(빨강), 크라시비krasivy(아름다운), 이 두 단어는 어휘론 상으로 같은 어군에 속한다. 또한 어떤 언어에서는 색을 나타내는 용어로 하양, 검정, 빨강 이렇게 세 개의 단어만 존재한다. 그런데 여기서도 검정과 하양은 색을 나타내는 형용사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들은 주로 빛과 어둠을 형언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색을 나타내는 단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빨강뿐이다. 빨강의 우위성은 일상생활이나 물질문명에서도 드러난다. 지중해 연안 지역에서는 주거 공간이나 도시 공간(벽돌, 기와), 가구류와 집기(토기, 다양한 도기), 직물과 의복(붉은색 색조들은 일종의 특권이었다), 그밖에도 장신구와 보석, 수호하고 장식하고 행운을 불러오는 부적처럼 몸에 지니고 다니는 온갖 소품에 이르기까지 빨강은 일찍부터 그 위상이 높았다. 각종 공연이나 제의에서도 빨강은 권력이나 신성함과 연관되었고, 매우 풍요로운 상징체계를 갖고 있었으며, 때로는 초자연적인 힘을 지닌 것처럼 보였다. 이처럼 여러 가지 면에서 빨강은 고대 사회에서 가장 원초의 색이었을 뿐 아니라 가장 우월한 색이었다.
- 빨강이 지닌 유해하고 부정적인 면모는 언어와 글자에서도 잘 나타 난다. 한 단어가 상황에 따라 붉어지다' 또는 '죽다', 때로는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다'를 뜻했던 것이다. 붉은 마음을 갖다(분노하다)', '붉은 행 위를 하다(악행을 저지르다) 같은 표현 역시 빨강이 부정적으로 쓰인 예 들이다. 마찬가지로 이집트 서기들은 위험, 불행, 죽음을 뜻하는 상형 문자를 붉은색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빨강이 늘 부정적인 것을 뜻하지는 않았다. 어떤 경우에는 승리를, 다른 경우에는 힘이나 권력을 나타냈으며, 그보다 빈 번하게 피와 생명력을 의미했다. 심지어 악으로부터 보호하는 기능을 지닌 빨강도 있었다. 붉은색 옷을 입은 암송아지 형상의 풍요와 다산의 여신 이시스, 그녀의 피와 눈물로 채색되었다는 붉은색 벽옥으로 만든 부적이 그런 경우다. 그렇지만 파라오 시대 이집트의 상징적 세계는 일 관되지도 않고 체계적이지도 않았다. 고대 이집트 제국 시대와 헬레니즘 시대, 상上이집트와 하下이집트 지역에서 색의 의미는 각기 달랐다. 오늘날의 고고학자들은 아직도 그 모든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고 있다. | 고대 근동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색은 벽과 가구 장식에서 중요 한 역할을 했지만, 오늘날 그 의미를 해석하기가 쉽지 않다. 여기서 빨 강은 창조, 번영, 권력, 그리고 몇몇 신들, 특히 다산과 풍요의 신들에 대 한 신앙과 연관된 긍정적인 색이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수메르인과 아 시리아인들은 신들의 조각상을 선명하고 화려한 색으로 칠했다. 신상이 석재이건 점토질이건 지배적인 색조는 역시 빨강이었다. 이처럼 빨강은 신성함의 색인 동시에 살아 있는 이 세상의 색이었다.
- 꼭두서니는 키가 큰 여러해살이풀이다. 아무데서나 야생 상태로 자랐으며, 특히 축축한 토양이나 늪지에서 잘 자랐다. 꼭두서니의 뿌리에는 색소 성분이 풍부하게 들어 있었다. 언제(기원전 5000-4000년경, 혹시 그보 다 먼저?), 어디서(인도, 이집트, 혹은 유럽?) 가장 먼저 염료를 만들어 썼는 지는 알 수 없지만, 가장 처음으로 사용된 염료가 빨강 색조였다는 사실 은 알고 있다. 따라서 꼭두서니가 가장 먼저 사용된 염료였으리라고 추 정해 볼 수 있다. 옛 사람들은 일찍부터 꼭두서니가 만들어 내는 견고 하고 진한 빨강 색조를 석회, 삭힌 오줌, 나중에는 식초, 주석, 명반 같은 매염제를 써서 다양한 뉘앙스로 변조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세월이 갈수록 기술은 점점 더 발전했고, 기원전 1000년경 지중해 연안 지역에서는 꼭두서니 염색액 제조법과 붉은색 색조를 다양화하는 기법이 완성 단계에 도달했다. 하지만 다른 색들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다. 문제는 어떻게 하여 신석기 시대에 인류가 땅을 파서 꼭두서니 뿌리를 찾아낸 다음, 껍질을 벗기고 그 안에 들어 있는 붉은 부분을 으깨어 즙을 내서 색을 내는 염료로 쓰게 되었냐는 것이다. 염색을 성공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도와 시행착오가 있었고, 얼마나 많은 실수와 사고를 겪었으며, 얼마나 많은 실험을 했을까? 물론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
- 로마 제국에서 꼭두서니(루비아rubia [꼭두서니속-역자) 염색은 점차 본격 적인 산업 활동이 되었다. 꼭두서니 재배로 특화된 지역들이 있었는데, 프랑스 론강 유역, 이탈리아 포강 유역의 평원, 스페인 북부, 시리아, 아 르메니아, 페르시아만이 그러했다. 여러 저술가들은 꼭두서니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우선 꼭두서니는 서늘하고 강수량이 풍부한 지역의 석회질 토양에서 잘 자란다. 3월에 씨를 파종하고 18개월이 지난 뒤, 잎과 줄기를 수확하여 가축들에게 먹이로 준다. 이렇게 하면 소와 양에게 서 붉은빛이 은은한 젖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뿌리를 캐려면 3년을 기 다려야 한다. 뿌리는 말려서 껍질을 벗겨낸 후 빻는다. 이렇게 해서 얻 어 낸 분말을 염료로 쓴다. 44 꼭두서니를 재배하는 것은 쉽지만, 쥐들로 부터 확실히 보호할 필요가 있다. 쥐들이 매우 좋아하는 검은색의 작은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이렇게 수확한 열매는 강력한 이뇨제로 쓰인다. 고 갈리에누스[서기 2세기에 활동한 페르가몬 태생의 의사-역자]가 이야기했다. 이처 럼 꼭두서니 열매는 고대 의학에서 폭넓게 사용되었다.
꼭두서니는 짙고 다양하며 아름다운 빨강 색조를 만들어 냈지만, 여 기에는 광택이 없다는 결점이 있었다. 그런 까닭에 그리스와 로마 염색 업자들은 다른 색소 물질을 선호했는데, 훨씬 더 비싸고 구하기도 어렵 지만 더 찬란한 붉은빛을 내는 연지벌레(코쿰coccum [연지벌레의 알-역자)였다. 이것은 지중해 연안에 자생하는 다양한 나무(대부분이 여러 종류의 떡 갈나무)와 관목의 잎에서 채집하는 몇몇 벌레를 건조시켜서 짜낸 끈적끈 적한 액상의 동물성 염료였다. 이때 암컷만을 사용했는데, 산란기에 채집해야 염료를 추출할 수 있었다. 암컷 연지벌레를 식초 증기에 찐 다음 햇볕에 말리면 갈색의 알갱이가 된다. 이것을 으깨면 진한 빨간색의 끈 적끈적한 액체가 나오는데, 이것을 염료로 쓰는 것이다. 연지벌레 염료는 고착성이 높고 색이 진하며 광택이 있었다. 하지만 극소량의 염료를 얻는 데 상당한 양의 벌레가 필요했다. 따라서 가격이 매우 비쌌으며, 사치스러운 직물 염색에만 사용했다.
- 연지벌레보다 더욱 격조 높고 로마 염색의 명성을 드높인 염료가 있었 는데, 바로 자주 조개다. 다른 염료들과 마찬가지로 자주 조개에 대한 로마인들의 지식은 그리스, 이집트, 특히 페니키아인에게 전수받은 것 이었다. 로마가 지중해 연안 전역을 지배하기 전부터 이미 자주 조개 염 료로 염색한 옷감은 가장 인기가 높았고 가격도 가장 비쌌다. 이 옷감들 은 부와 권력을 나타내는 징표였으며, 보물처럼 여겨졌다. 이것으로 왕 이나 족장, 사제들의 옷을 만들었으며, 신상神像에 걸치는 용도로 사용 하기도 했다.48 자주 조개 염료가 이처럼 인기와 명성을 누리게 된 데에 는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다소 신비스러운 염료로 얻은 비할 데 없는 붉은색 색조의 화려한 광채이고, 다른 하나는 그 염료의 고착성과 빛에 대한 저항성이다. 다른 염료들과 달리 자주 조개 염료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빛깔이 퇴색되기는커녕 더욱 강렬해졌고, 햇빛이나 달빛, 심지어 단순한 불빛에도 색감이 더욱 풍부해졌다. 
- 지리적 의미보다는 상징적 의미가 더 큰 ‘레드 라인'은 여러 면에서 로마 제국의 운명을 판가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강물의 빛깔 은 이러한 정치적 차원의 의미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격 언의 함축적 의미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루비콘 강을 건너다” 라는 말은 금기를 어기고 모든 것을 걸었으며, 신의 뜻에 모든 것을 내맡긴 다는 뜻이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라는 말 역시 카이사르가 이 강을 건 너면서 발설했다고 알려져 있다. 루비콘강의 불그스름한 물빛과 대응 되는 것으로 그보다 훨씬 오래 전에 그와는 전혀 다른 상황에서 언급된 홍해의 붉은빛 바닷물이 있다. 홍해 역시 히브리인들이 이집트를 탈출 하여 약속된 땅을 찾아 나서면서 건넌 상징적인 경계선이다. 여기서도 빨강은 위험하면서도 미래지향적이고 건설적인 색으로 나타난다. 빨간 색은 역사적인 분기점을 이루는 사건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동시에 역 사의 진정한 원동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 이 모든 직물과 사물, 그리고 모든 관행을 통해 우리는 중세 유럽에서 빨강이 권력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에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왕의 권력뿐만 아니라 봉건 영주의 권력이나 위임된 권력 또한 마찬가지였다. 공작, 백작, 대남작 등의 주요 봉신들이 무대에 등장하기 위해 빨간색을 활용 했을 뿐만 아니라 황제나 왕의 대리인들도 마찬가지였으며, 하급 영주 들도 그들을 따라했다. 예를 들어 신성 로마 제국의 변방을 지키는 공작이나 총독들은 붉은색이 주조를 이루는 깃발과 문장을 지니고 있었 다. 그런데 중세 말에 지나치게 세심한 관리들이 붉은색을 황제와 왕실 에 한정된 색이라고 주장하면서 붉은색 옷과 밀랍 인장을 일반 대중들에게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물론 이러한 규제는 제대로 지켜지지 못 했다. 좀 더 동쪽으로 이동하여 폴란드에서는 더욱 놀라운 일이 있었다.
폴란드의 대영주들이 봉신과 소작 농민들에게 세금으로 붉은색 계열의 온갖 물품을 요구했던 것이다. 붉은색으로 물들인 천, 붉은색 유리, 연지벌레 '알', 붉은색 과일과 열매, 붉은색 털가죽의 소, 심지어 '새빨갛고 아름다운 볏이 달린 살찐 수탉'도 있었다.21 중세 시대에는 어떤 형태로는 붉은색을 과시하거나 부여받고 통제하며 금지하는 것, 이 모두가 자신의 권력을 표명하는 행위였다.
- 자신의 권력이 아닌, 제3자의 권력을 행사하는 경우 또한 마찬가지였 다. 예를 들어 판사는 실제 법정에서는 세밀화 도상에서는 어김없이 붉 은색 옷을 입은 모습으로 등장했다. 이때 빨강은 위임된 권력과 자신의 직무, 다시 말해 국왕이나 제후, 또는 도시나 국가를 대신하여 법조문 을 낭독하고 판결을 내리는 권한과 직무를 나타내는 색이었다. 좀 더 일 반적으로 빨강은 하느님의 심판이든 인간의 판결이든 정의를 상징하는 색이었다.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금지된 열매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를 천국에서 쫓아내는 천사는 채색화에서 붉은색의 천사, 즉 심판 을 내리는 천사로 등장한다. 이는 세속적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반적으로 사형 집행인은 붉은색 모자와 의복을 착용하며, 여기서 붉 은색은 그가 맡은 임무를 상징한다.
권력의 빨강, 죄의 빨강, 처벌의 빨강, 곧 흘러나올 피의 빨강, 이러한 색의 상징체계는 근대에 이르기 전에 다시 한 번 만나게 될 것이다.
- 오랫동안 선호와 찬탄의 대상으로 필적할 만한 상대가 없을 만큼 독보 적이었던 빨강은 한창 영광의 시절을 누리던 중 12세기에 예기치 못한 경쟁자를 만났는데, 바로 파랑이었다. 과거 로마인들에게 야만인의 색 으로 취급되어 사랑받지 못했던 파랑은 중세 초에도 여전히 주목받지 못했다. 물론 여기저기서, 특히 의복 색으로 사용되었지만, 사회적, 예술 적 차원으로나 종교적, 상징적 차원으로나 중요한 색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한다. 12세기 중엽부터 13세기 초에 이르는 수십 년 사이에 파랑은 양적, 질적으로 급부상했다. 처음에는 미 술과 채색 삽화에서, 그 다음으로는 의복과 궁정 생활 전반에서 유행하는 색이 되었다. 이때부터 파랑은 도자기 제품과 채색유리창을 뒤덮었 고, 채색 필사본의 세계를 장악했으며, 프랑스 왕과 아서왕 문장의 바탕 색이 되었다. 모든 로망어 어휘에서의 변화는 특히 놀라웠다. 고전 라틴 어에 파랑을 나타내는 단어가 없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라틴어 어 원이 아닌 두 단어가 나타나 급부상하던 파랑을 지칭하게 되었다. 그중 하나는 게르만어에서 (블라우blau/블루bleu), 다른 하나는 아랍어에서 (라주르l?zurd/아쥐르azur) 유래한 것이었다. 파랑은 사회적, 예술적, 종교적 삶 의 모든 분야에서 점차 가치를 인정받았고, 그때까지 모든 색 중에서 최고의 색, 가장 아름다운 색이었던 빨강과 경쟁하기 시작했다.
역사가들의 관심사는 이러한 변화가 색소나 염료 분야의 기술적 발 전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이념적 변화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아내 는 것이다. 유럽에서 수 세기 동안 파랑의 아름다운 색조들, 즉 순수하고 밀도 있고 광택이 있는 파랑 색조, 직물 섬유에 깊숙이 침투하는 파란색 염료를 만들어 내지 못했던 염색업자들(다양한 색조의 붉은색을 내는 능력 은 탁월했다)이 불과 두어 세대 만에 그런 파란색을 만드는 데 성공한 것 이다. 이러한 변화가 언제부터 시작되었고, 그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색 소와 염료의 화학이라 부를 수 있는 발전된 기술의 측면에서 찾아야 할 까? 아니면 파랑이라는 색의 새로워진 사회적, 상징적 위상이라는 측면 에서 찾아야 할까? 대체 어떻게 해서 파랑이 급부상하게 되었을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신학적, 이념적인 동기가 화학적, 경제적인 변화보다 앞섰던 듯하다. 
- 채색화에서 푸른색 옷을 입은 성모가 파랑의 부상에 크게 기여했으 며, 왕들은 그녀를 모방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프랑스 왕 필리프 2세 가 따라했고, 성왕 루이는 재위 기간 중 후반기(1254-1270) 내내 그렇게 했다. 나중에는 다른 서유럽 그리스도교 국가의 왕들도 푸른색 옷을 입 었다. 점차 프랑스, 영국 등의 대영주와 부유한 귀족들이 이를 따라했 다. 독일과 이탈리아 두 나라만이 한동안 그 새로운 유행에 저항했다.
필자는 이미 오랫동안 12-13세기에 나타난 '파랑의 혁명'에 대해 연 구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길게 다루지 않겠다.48 하지만 취향과 수요의 변화로 인해 염색업이라는 직업이 어떻게 그 변화에 적응해갔는지 한 번 더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고급 직물을 생산하는 대도시에서 그러한 변화는 염색업자들을 서로 다른 두 개의 직업 조합으로 뚜렷이 구분 하는 결과를 낳았다. 빨간색 염색업자들은 노란색을 다룰 수 있었고, 파 란색 염색업자들은 검은색과 녹색도 같이 염색했다. 두 집단은 서로 경 쟁했다. 꼭두서니와 연지벌레를 취급하는 상인들은 점점 더 세력을 넓 혀가는 대청大靑 상인들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대청은 여러 토양에서 자라는 식물로 잎에서 짙은 청색 색소를 추출했다. 대청 재배 는 일부 지역(프랑스 피카르디, 독일 튀링겐, 나중에는 프랑스 남부 랑그도크)에 서 본격적인 산업 작물이 되었다. 지역의 전승에 따르면, 피카르디의 대청 상인들이 1220년대부터 증축된 새로운 아미앵 대성당의 재정을 전적으로 부담했다고 한다. 좀 과장된 이야기지만, 청색 염료의 산업과 상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던 그 시대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빨강과 파랑 사이에 벌어진 새로운 경제 전쟁의 양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또 다른 자료가 있다. 1256년 스트라스부르에서 꼭두서니 염 료 상인과 프랑스에서 건너온 채색유리 장인들이 맺은 계약서다. 꼭두 서니 염료 상인은 대성당 예배실에 설치하는 채색유리창에 테오필 수 사의 교훈적인 이야기를 그려달라고 주문했다. 테오필 수사가 악마에게 자신의 영혼을 팔았는데, 성모가 나타나 구원해주었다는 내용이었다. 이때 악마를 푸른색 옷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달라고 특별히 요청했는 데, 파랑의 이미지를 손상하려는 의도였다. 채색유리 장인들은 상인의 요청대로 악마를 푸른색으로 칠했지만, 붉은색 꼭두서니 염료 거래를 다시 활성화시키거나 파란색의 새로운 유행을 막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파랑의 유행은 이미 알자스 지방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 중세 말에 빨강은 혼란기로 접어들었다. 최고의 색, ‘탁월한 색'이라는 위상은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다음 세기에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해진다. 이제부터는 찬탄의 대상이었으며 때로는 빨강보다 선호되는 파랑과 여러 분야에서 경쟁을 벌여야 했을 뿐만 아니라, 궁정 사회에서 한창 유행하던 검정 색조들의 공세와도 맞서 싸워야 했다. 검정은 궁정 사회에서 앞으로 수십 년 동안 복식에서의 사치와 우아함을 표상하는 색이 된다. 연지벌레, 나중에는 코치닐로 염색한 천이 고급스러운 직물로 인정받고 있었지만, 빨강의 역할은 분명 축소되고 있었다. 이제 유행은 중세 봉건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선명하고 순수하고 광택이 나는 빨강이 아니었으며, 짙은 빨강 색조들(진홍색)이나 빨강의 변두리에 위치한 색들(분홍색, 보라색)도 아니었다. 노랑이나 갈색을 띤 빨강 색조들이 배척당했으며, 이 색조들은 지옥의 불길과 원죄, 그리고 교만, 거짓, 음란을 필두로 하는 온갖 악덕 등을 떠올리게 하는 모든 것과 연관되었다. 나쁜 빨강과 나쁜 노랑이 한곳에 공존하는 듯한 다갈색roux, 그리고 1500년대의 여러 문헌에서 '모든 색 중 가장 추한 색으로 소개되는 탄tan 색, 즉 일종의 적갈색 혹은 짙은 다갈색이 대표적인 예다. 그렇지만 빨강이 직면한 가장 큰 위험은 다른 색과의 경쟁도, 취향이나 감수성의 변화도 아니었다. 그것은 당시의 사치 단속령과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에 의해 전파된 색에 대한 새로운 윤리에 있었다. 새로운 윤리를 기준으로 판단하면, 빨강은 지나치게 눈에 잘 띄는 데다 값이 너무 비싸고 정숙하지 못하며 비도덕적이고 퇴폐적인 색이었다. 그 결과 빨강은 16세기 말부터 물질문화와 일상생활의 여러 분야에서 퇴조 국면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일상적인 윤리 차원에서 가톨릭의 반종교 개혁 운동은 프로테스탄트 가치들 중 일부분을 도입하려 했다. 이제부터는 흰색 옷을 주로 입는 교황을 본받아야 하는 평신도들에게도 빨강은 더 이상 영예로운 색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과학이 나서서 빨강의 퇴조'라는 현상을 돌이킬 수 없는 흐름으로 만들어버린다. 1666년 아이작 뉴턴이 스펙트럼을 발견하면서(스펙트럼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색의 물리학과 화학의 기본이 되는, 그 당시의 새로운 분류법이었다), 고대와 중세 때의 인식처럼 빨강이 색의 단계 중 한가운데에 위치하는 게 아니라 한쪽 끝에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색의 여왕이었던 빨강에게는 별로 영광스럽지 않은 자리였다. 이렇게 빨강은 상징적 힘의 일부분을 잃어버리는 듯했다.
- 중세에 계속 머무르면서 빨강에서 다갈색(roux)으로 이동해 보자. 오늘날 짙은 주황색 톤의 빨강으로 규정되는, 빨강의 특별한 색조인 다갈 색은 12세기부터 급격하게 평가 절하되었으며, 결국 수많은 악덕을 혼 자서 떠안아야 하는 신세가 된다. 여러 문헌과 채색화에서 치욕스러운 다갈색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있는데, 바로 유다이다.
신약 성서에서 어느 정경 텍스트나 어느 외경에서도 배반자 사도의 신체적인 모습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이나 중세 초기 그림에 나타난 유다의 모습에는 특징적인 공통점 이 전혀 없다. 그렇지만 최후의 만찬 장면에서는 그의 위치, 신체 크기 나 태도 등으로 다른 사도들과 차별화하기 위해 애쓴 흔적이 보인다. 그 러다가 1000년 이후가 되어서야 처음에는 세밀화에서, 나중에는 채색 화가 삽입되는 여러 매체에서 다갈색 머리카락과 수염이 출현하고 널 리 퍼지게 되었다. 라인 강과 피즈 강 지역에서 탄생한 이 도상학적 관 행은 그리스도교 유럽의 대부분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중세 말과 근대 초에는 유다라는 인물의 가장 중요한 신체적 특징이 되었다. 
- 물론 13-15세기가 우리에게 남긴 수많은 채색화에서 이 모든 인물들 이 항상 다갈색 털을 가진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갈 색 털이라는 신체적 특징이 가장 주목할 만한 도상학적 특징 중 하나였 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신체적 특징이 나중에는 '사회적으 로 추방 또는 배척된 자들' 이라는 특별한 사회적 범주로 확대되는 결과 를 낳는다. 즉 이단, 유대인, 무슬림, 독실한 신자인 체하는 자, 나병 환 자, 신체장애자, 걸인, 떠돌이, 가난한 자 등 온갖 종류의 사회적 낙오자 들에게 적용된 것이다. 중세 채색화에서의 다갈색은 의복의 색 표식으로서의 빨강 또는 노랑, 아니면 빨강과 노랑의 배합으로 이어졌다. 실제 로 13세기부터 유럽의 몇몇 도시나 지역에서는 위의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은 그런 색의 옷을 입어야 한다는 법령이 생겼다. 다갈색은 배척 혹은 불명예를 나타내는 최초의 색 표식이었다.
- 오래 전부터 역사가, 사회학자, 인류학자들은 서구 전통에서 다갈색 에 대한 거부감을 설명하고자 애썼다. 이들은 여러 가지 가설을 내세웠 는데, 여기에는 이론의 여지가 큰 가설들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머리털 이나 피부의 다갈색을 '인종의 퇴화와 연관된, 색소 형성 과정의 결함 으로 보는 생물학적인 관점이다. 대체 인종의 퇴화'란 무엇인가? 사이 비 과학이 동원된 이러한 설명 앞에서 역사가들은 당혹스럽다.28 이들 은 다갈색을 평가 절하하는 것을 사회적 태도라 생각한다. 켈트인 사회 와 스칸디나비아를 포함한 유럽의 모든 사회에서 다갈색인 자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고, 사회적 소수 집단에 속해 있으며, 그런 이유로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불안하게 하며 논란을 일으키는 자로 간주되었다. 본 래, 다르다는 것에는 늘 배척의 위험이 뒤따르는 법이다.
다갈색인 자들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인 유다는 빨강과 노랑, 이 두 색 의 부정적인 면을 한 몸에 떠맡은 자였다.30 중세 말 독일에서 회자되었 던 어원론적인 말장난에서 지적한 것처럼 유다는 그가 배반한 예수의 피로 붉은색이 되었다. 여기서는 그의 이름 이스가리옷가리옷 출신' 이라 는 뜻)을 ist gar rot, 즉 '온통 붉은색인 자'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가 저지른 배반으로 인해 유다에게는 거짓말과 불충을 상징 하는 색인 노랑이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런 까닭에 모든 배반자들 과 마찬가지로 유다는 채색화에서 노란색 옷을 입은 모습으로 나온다. 실제로 세월이 갈수록 노랑은 점점 더 평가절하되었다. 로마 시대에 노랑은 종교 의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남성복이건 여성복이건 복식에서 매우 인기 있는 색이었지만, 중세에는 버림받고 비난받다가 결국에는 단죄를 받는 지경에 이른다. 화형장의 장작더미에 오르는 변절자, 배교자, 회개했다가 다시 이단에 빠진 자, 모든 종류의 위조범들에 게 관례적으로 노란색 옷을 입혔던 것이다. 이들이 거주하는 집도 상징 적으로 노란색을 칠했다.
오늘날에도 노랑은 여전히 사랑받지 못하는 색이다. 색에 대한 선호 도 조사에서 노랑은 여섯 가지 기본색 중 꼴찌를 차지한다(파랑, 녹색, 빨 강, 하양, 검정, 노랑 순이다).31 노랑에 대한 거부감은 중세 때부터 존재했으 며, 배반자 사도인 유다는 가장 중요한 원인 제공자인 동시에 가장 큰 피해자였다.
- 근대가 시작될 무렵 시 당국이 내세운 사치 단속령이나 복식을 규정하 는 법령들이 특히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쏟아져 나왔다. 피렌체 귀부인 들의 옷장에 대해 1343년의 복식의 관례'를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처 럼, 이 법령들은 경제적, 윤리적, 사회적이라는 세 가지 기능을 수행했 다. 우선 사치품의 소비와 비생산적인 투자를 억제하는 것이 첫 번째 목 표였고, 두 번째는 경박하고 단정치 못하며 사회적 물의를 빚는 것으로 판단되는 의복에서의 새로운 유행을 막는 것이었다. 마지막이자 이 중 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는 다양한 사회 계층 간에 거리를 둠으로써 사회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외양과 분수를 지키면서 제자리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었다.
- 의복과 관련된 문제에서 색은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어떤 색은 특정 사회 계급이나 계층에 사용이 금지되거나, 혹은 반드시 사용해야 한다. 고 규정했다. 두 경우 모두 빨강이 목록 중 최상위에 있었다. 빨강은 특 정 직업이나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 그런 이유로 사회 질서의 변두리 에 있는 자들에게 강요되었다. 예를 들어 14세기부터 17세기까지 유럽 의 여러 도시에서 창녀들은 선한 여성들과의 차별화를 위해 요란한 색 상의 옷(드레스, 두건, 숄, 장식끈)을 입어야 했다. 그 색은 주로 빨강이었다.
- 빨간 두건을 쓴 소녀 월터 크레인, 〈빨간 모자를 쓴 아이〉, 1875, 목판화집 왜 빨강인가? 이 질문에는 각 분야마다 대답이 달라질 수 있다. 오래 전부터 아이들에게 빨간색 옷을 입히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다(역사학), 이야기가 성령 강림 축일에 일어났기 때문이다(전례학), 사춘기 소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 늑대와 잠자리를 같이하고 싶다는 강한 욕망이 있었기 때문이다(정신분석학).. 옛날 동화에는 세 가지 색의 원칙이 있었는데, 늑대의 검정, 작은 버터 단지의 하양, 이 두 색과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는 소녀가 입은 옷 색이 빨강이어야 하기 때문이다(의미론),
- 호사스러운 궁정 생활의 이미지로 인해 17세기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17세기는 물질적인 면으로, 또한 사고나 감수성 면으로도 어둡고 불안하며 음산한 시기였다. 적어도 유럽 인구의 과반수에게는 그러했다.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늘 물자가 부족했으며, 이상 기후로 모두가 고생했고 기대 수명이 급격하게 하락했다. 17세기를 색으로 표현한다면, 베르사유 궁의 황금색이 아니라 비참한 검은색일 것이다. 반면에 18세기는 밝고 화려하고 빛나는 시대였다. 이 시기는 또다시 매우 암울한 19세기로 넘어가기 전, 일종의 과도기였다. 1720년대부터 ‘계몽주의' 시대의 빛은 정신적 영역에서 반짝였을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실내 장식에서도 가득했다. 문과 창문이 넓어졌고, 조명이 개선되었으며, 그 비용은 낮아졌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색을 더 잘 볼 수 있게 되었고, 색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색소 물질에 관한 화학적 연구가 전례 없는 발전을 하면서 염료와 직물의 생산도 크게 늘었다. 그 혜택은 사회의 모든 계층에게 돌아갔으며, 이제는 중간 계층도 귀족층과 마찬가지로 밝고 선명한 색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흐릿하고 어두운 색조들은 도처에서 퇴조되었다. 이전 세기의 흐릿한 갈색, 거무스름한 녹색, 푸르스름한 빛이 도는 진홍색과는 이별이었다. 의복이나 실내 장식에서는 밝은 색조, 쾌활한 색상, 특히 파랑, 노랑, 분홍, 회색에서의 '파스텔 색조들이 크게 유행했다. 그렇지만 이 새로운 유행이 빨강에 유리하게 작용한 것은 아니었다.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는 빨강이 아니라 파랑의 시대였다. 오래 전부터 빨강과 대립되는 색들 중 하나로 인식되었을 정도로 빨강의 경쟁자로 여겨졌던 파랑이 이 시기에 비로소 유럽인이 선호하는 색이 되었던 것 같다. 파랑은 오늘날에도 선호도 면에서 다른 색들을 훨씬 앞지르면서 선두에 있다. 반면에 빨강은 여론 조사에서 파랑은 물론 녹색에게도 추월을 당하고 있다. 이처럼 18세기는 적어도 오늘날의 유럽 사회에서 느리지만 돌이킬 수 없는 퇴조의 흐름으로 향하는 출발점이었다.
- 즉 하양과 빨강 사이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새로운 색은 어 디에 위치해야 할까?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아름답고 새로운 분홍색 혹 은 살색을 노랑의 특별한 색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것은 1517세기 동안 유럽 전역에서 그 색의 위상이 될 것이었다. 모든 사전, 뉘 앙시에, 색에 관한 기술적 혹은 전문적 매뉴얼에서 살색, 즉 우리의 분 홍색을 빨강이 아니라 노랑의 연하고 우아한 버전이라 정의했다. 프랑 스어에서 색을 나타내는 형용사 로즈rose는 18세기 중엽 이전까지 사전 에서 언급된 적이 없었다. 색에 대해 비교적 과학적으로 상세히 논하는 디드로와 달랑베르의 『백과전서 Encyclopedie]는 로즈라는 색 형용사를 처음으로 사용한 문헌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프랑스 아카데미에서 펴낸 사전에서는 1835년 여섯 번째 판본이 나올 때까지 전혀 언급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 유럽인들은 아시아에서 들여오던 '브라질 목재'와 같은 종류의 염료성 목재가 남아메리카에서도 자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목재의 염색력은 브라질 목재보다 훨씬 더 높았다. 유럽인들 은 벌목 사업에 열을 올렸고, 나중에는 이 목재를 공급하는 나라에 ‘브 라질'이라는 나무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대서양을 건너는 항해는 길고 험난했지만, 이 염료 물질의 원가는 그리 비싸지 않았다. 남아메리카 밀림을 개발하는 데 노예 노동력이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분홍 색조들의 인기는 날로 치솟았으며, 18세기 중엽에 인기가 정점에 달했 다. 그 당시 유럽 사회의 최상류층에서는, 값이 비싸다는 이유로 독점했 던 밝고 선명하고 견고한 색들에 중간 계층이 접근할 수 있게 되면서, 이들과 차별화할 수 있는 색들을 파스텔 톤, 중간 색조, 가장 혁신적인 색조에서 찾으려 하고 있었다. 
- 프랑스에서는 루이 15세 시대의 퐁파두르 후작 부인이 실내 장식이 나 직물 분야에서 분홍색의 유행을 이끌었다. 그녀는 분홍색과 하늘색 을 배합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그녀의 총애를 받았던 두 색조는 곧 유 럽 전역에서 크게 유행했다. 그러나 의복의 경우, 분홍은 여자들뿐만 아 니라 남자들의 색이었으며, 아직까지는 분홍에서 여성적 요소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한편 이제부터는 분홍이 노랑의 특별한 색조가 아니 라 빨강과 하양의 혼합색으로 간주되었다. 이렇게 18세기 중엽 유럽 어 디에선가 오늘날의 현대적인 분홍이 탄생했다! 프랑스어에서는 얼굴 의 살색이 아닌 꽃잎 빛깔에서 유래한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다. 장미 꽃rose 이 색 용어인 '분홍rose’을 만들어 낸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도 그로부터 수십 년에 걸쳐 식물학자와 조경 전문가들이 점점 더 다양한 종 의 장미를 만들어 냈고, 고대부터 중세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분홍색 장 미들이 보편화되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변화는 아주 서서히 이루어졌 다. 프랑스어에서 로즈rose라는 단어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분홍색을 규정하는 어휘로 확고히 자리 잡은 것은 19세기에 이르러서였다. 스페 인어 로사rosa, 포르투갈어 코르드호자cor-de-rosa, 독일어 로자rosa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영어 핑크pink는 오랫동안 브라질 목재에서 추출한 염료물질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다가 뒤늦게서야 그 염료로 얻어내는 색을 형언하는 단어가 되었다.
갓난아이와 어린 아이들에게 분홍색과 하늘색 옷을 입히는 관행은 18세기에는 나타나지 않았으며, 다음 세기인 19세기 중엽에 앵글로색 슨 사회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몇몇 문헌에서 기록된 것과는 달리 성모의 보호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이것은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에서 탄생한 관습으로 서서히 유럽의 모든 사회로 퍼져 나갔다. 게다가 오랫 동안 여자아이에게는 분홍색, 남자아이에게는 하늘색으로 성별을 구분 하지도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상류사회를 묘사한 그림들을 보 면, 남자아이가 파랑보다 분홍 옷을 입고 있는 경우가 더 많다. 이와 같 은 사례는 무수히 많다. 하지만 이러한 경향은 궁정 사회, 귀족층, 그 리고 상류층에 한정되었다. 그 밖의 다른 사회 계층에서는 유아에게 거의 항상 흰색 옷을 입혔다. 그러다가 1930년대에 끓는 물에 자주 세탁 해도 색이 잘 바래지 않는 직물이 나오면서 가장 먼저 미국에서, 그 후 로는 유럽에서 분홍색과 하늘색 옷이 보편화되었다. 이때부터는 여자아 이에게는 분홍색, 남자아이에게는 파란색 옷을 입히는 풍조가 자리 잡 았다. 분홍은 옛날 전사와 사냥꾼들의 남성적인 빨강을 아이들에게 어 울리게 변조한 색이라는 사고가 이제 사라진 것이다. 18세기에 분홍은 대부분 남성적인 색이었던 반면, 이제부터는 본질적으로 여성적인 색이 되었다. 1970년대 이후 그 유명한 바비 인형이 나타남으로써 여성적인 색으로서의 분홍 이미지를 고착화했으며, 여자아이들의 놀이와 몽상의 세계 전반으로 그 영향력을 확대했다.
- 입술에 붉은색을 칠하는 것은 고대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대 여성들(을) 공통적으로 해 온 동작이다. 문화, 시기, 사회적 환경, 당대 유행에 따라 빨강의 색조는 매우 다양했다. 동로마 제국에서는 보랏빛 도는 빨강 혹은 거무스름하고 어두운 빨강, 중세 시대에는 소박하고 은은한 색조의 빨강, 18세기에는 강렬한 색조의 빨강, 그리고 오늘날에는 모든 색조의 빨강이 사용된다.
- 빨간색과 좌파 혹은 극좌파 정당이나 정치 단체 사이의 연관성은 한 세기 반이 넘는 동안 빨강의 역사를 지배했다. 그 결과 빨강의 다른 상 징적 의미들(어린 시절, 사랑, 열정, 아름다움, 쾌락, 에로티시즘, 권력, 정의)은 부 차적인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어느 한 가지 사고의 흐름이 색을 독점 하다 보니 색의 엠블럼 또는 상징으로서의 역할마저 박탈된 것이다. 그 리하여 빨강은 색도 이념도 아닌 어정쩡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공산주의자임을 밝히지 않고서는 빨간색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구소련이 사라지고 이념들이 약화된 오늘 날, 그 연관 관계는 매우 느슨해졌다. 그런데 요즘에는 녹색이 그 뒤를 잇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환경, 천연 에너지, 유기 농업 옹호론자나 열렬한 생태 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한다면 녹색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하기가 매우 어려워졌으니 말이다.  재빠르게 동일시하고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환원주의적' 태도는 색에게서 정서적, 시적, 심미적, 몽환적 의미를 모두 제거함으로써 색의 본래적인 특성을 변질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러한 흐름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빨강은 지금까지도 위엄과 영예로 충만한 색으로 남아 있다. 게다가 빨강은 여전히 생기발랄하고 활력을 주며 심지어 호전적인 색 이다. 레드 와인은 화이트 와인보다 더 활력을 주고, 붉은색의 육류는 흰색 고기보다 더 기운을 북돋운다는 믿음이 있다. 페라리나 마세라티 같은 빨간색 자동차는 다른 색 자동차보다 더 빨리 달리는 듯하다. 스포 츠 분야에서도 붉은색 유니폼을 입은 팀이 상대 팀에게 위압적으로 보 일 수 있으며 승리할 가능성도 더 커진다는 속설이 있다.  이제는 더 이상 가장 선호하는 색이 아니고, 일상적인 환경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으며, 여러 분야에서 파랑에, 심지어 녹색에까지 추월당하고 있으면서도 상징적으로는 여전히 가장 강력한 색으로 남아있다는 점이 오늘날 빨강의 역설이다. 아주 먼 옛날로부터 내려온 색, 수많은 의미와 전설, 그리고 꿈들로 가득한 색으로서는 기이한 운명이다! 어쨌 든 기나긴 빨강의 역사는 우리 현대 사회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워 보인다. 지금 존재하는 가치들마저 믿으려 하지 않고, 스스로의 역사, 신화, 상징, 색들을 갈수록 점점 더 외면하는 우리 사회가 감당하기에는 빨강이 너무 버겁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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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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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 중후반 일본의 주식시장과 지가는 왜 이렇게 폭등했을까?
환율 하락(화폐 강세)은 두 가지를 동반한다. 먼저 그 나라의 기업과 가계가 가진 자산가격이 상승하게 된다. A라는 사람이 일본 국채와 미 국 국채를 각각 보유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엔/달러 환율이 50% 떨 어지면(엔화가 50% 강세가 되면), 예전에 2천만 엔으로 10만 달러를 바 꾸던 것이 이제는 1천만 엔으로 10만 달러를 바꿀 수 있게 된다. 글로벌 시각으로 바라보면, 가계와 기업이 자산 재평가로 대박을 맞은 것과 다름없다. 자산은 그대로인데, 평가의 잣대가 바뀌니 주식과 토지의 가격이 상승하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또한 환율 하락(화폐 강세)은 경기상승을 가속화한다. 인구가 약 1억 3천만 명인 일본은 내수시장이 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편이다. 주식이나 부동산 등 자산가격이 급등하면, 기업의 투자가 늘어나고 개 인의 소비성향이 높아지며 소비지출이 커진다. 당시의 일본도 마찬가 지였다. 1985년에 309만 대였던 신규 등록 승용차는 1990년대에 500 만 대를 넘어섰으며, 가전·가구 등 내구 소비재에서도 대형 고가제품의 수요가 크게 증가했고, 편의점이 대폭 늘어나고 택배사업도 급속하게 발전한다.
- 일본 사람들은 소비가 살아나자 환호성을 질렀다. 소비는 경제의 핵심지표이자, 경제 주체들의 걱정과 근심의 영역을 축소시키는 일등 공신이다. 은행 거래를 하는 사람들도 신이 났다. 예금통장의 명목가치는 동일했지만 엔화의 실질가치가 상승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해외 여행을 하는 데 50만 엔이 필요했다면, 엔화 가치 상승으로 이제는 30 만 엔으로도 충분했다. 한 주당 100달러짜리 미국 주식도, 캘리포니아 해변가의 10만 달러짜리 미국 주택도 더 적은 엔화로 살 수 있었다. 기업들은 기업가치를 자산가격 상승에 따른 이익의 증가로 포장했다. 각종 재무비율과 수익률이 동일하더라도, 기업이 가진 부동산이나 주식 등 자산가격이 상승함으로써 이익의 절대값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것은 기업들이 가진 문제의 본질을 희석시키고 눈을 가려, 기업의 가치와 성장성에 대한 날카로운 해석을 가로막았다.
한편 엔화 강세(환율 하락)가 되면 수입가격은 낮아지고 수출가격은 높아지는 환율 전환 효과가 발생하여 수출경쟁력이 떨어지게 된다. 따 라서 수출기업은 상품의 품질을 높이든지, 또는 원가를 획기적으로 낮 출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등 경쟁력을 강화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 다. 그러한 경쟁력 신장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수출가격의 상승은 수출 감소로 이어져 큰 타격을 가져온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와 기업들은 환 율과 관련된 세밀한 대책을 수립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업들은 자산가격이 오르자 재테크에 혈안이 되어버렸다. 장기적 이득을 도모하기보다는 단기적 수익성에 매몰되어 경쟁력 신장을 도외시한 것이다. .
-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통일이 시작되었을 초기부터 일부 투자자들은 재빠르게 동독 화폐에 투자했다. 통일은 정치적 행위이므로, 동독의 마르크화 가치를 실제보다 높게 평가할 것으로 일찌감 치 예측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예상대로 이듬해인 1990년 7월 마 르크화가 1대 1로 통일되었고, 발빠르게 동독 화폐에 투자한 사람들은 큰 차익을 얻었다.
당시 동독과 서독의 실질 경쟁력 차이는 대략 1대 9 정도였는데, 교환비율이 1대 1로 확정되었으므로, 이론적으로 동독 마르크화의 가치가 9배 높게 평가된 것이고, 독일 마르크화에 투자한 이들은 9배의 차 익을 올린 것이다. 이를테면 한국과 북한의 경제규모가 약 50배 차이가 난다면, 매우 거칠게 말해 화폐가치의 차이도 수십 배인 셈이다. 한국의 1만 원이 북한에서는 수만 원, 수십만 원의 가치를 가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물론 한국과 북한의 화폐 원 단위는 다르지만, 쉽게 설명하기 위해 같다는 것을 전 제하고 설명한다). 그런데 한국의 1만 원과 북한의 1만 원을 똑같이 1대 1로 교환해준다면, 북한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이득을 얻 게 되는 셈이다. 1990년 7월 동독과 서독의 마르크화 통일은 바로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동독 마르크화 투자자들은 통일이 임박하자 통일과정에서 동독 마르크화의 가치가 이처럼 부풀려질 것이라는 점에 승부수를 던져 투자 했고, 결과적으로 엄청난 이익을 얻었다. 하지만 이러한 부풀리기는 장기적으로 결국 정상을 찾아가게 마련이다. 이들은 통일 후에는 두 화 폐의 가치가 정상적 수준으로 수렴될 것이라는 점에 다시 승부수를 걸 었다. 그러므로 이론적으로는 이러한 방식의 투자를 통해 투자자들이 18배, 또는 그 이상의 차익을 올리는 것도 가능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와 같이 경제적 현상에 대한 국가 간, 또는 사회적 합의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며 그 여파는 매우 폭력적이기까지하다. 통일 독일의 경
우 합의를 통해 환율을 1대 1 교환비율로 결정한 결과, 통일비용이 결국 몇 배로 급증했다.
- 어떤 사회가 건강한 사회일까? 조선의 개혁정신은 언제부터 사라졌을까?
중요한 점은 끊임없이 요동치는 사회일수록 건강한 사회라는 점이 다. 개인은 안주와 고착을 선호하더라도, 사회는 개인에게 역동성을 부여해야 한다. 왜 조선시대 말기에 경쟁력을 잃고 외세에 휘둘렸을 까. 토지와 노비제도에 의존하여 '편안한 부를 추구한 통치이념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국 경쟁 없이 주어지는 안락이 최대의 문제였다.
- 현재 시장을 독점하는 것은 불법이지만, 야코프 푸거가 활동하던 시기 에는 독점적 지위가 분명 기발한 사고였다. 또한 이는 정부의 규제 대 상이 아니라 암묵적 용인의 대상이었다. 치열한 경쟁이 이익을 없앨 수 있다는 공포가 낳은 결과이며, 결국 그 바탕에는 인간의 '에너지 공포 심리가 있다.
수익창출에서 가격의 역할은 매우 크다. 가격경쟁이 산업의 경쟁력 을 증진시킬 것이라는 생각은 때로는 맞다. 하지만 가격을 밑에서 받치 는 핵심적 조건과 원리를 제거하면 가격체제는 순식간에 의미를 잃는다.
푸거는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쟁취한 후 거 대한 부를 향한 확실한 기틀을 움켜쥔다. 헝가리는 동유럽에서 몇 안되는 구리 생산지였으므로, 그는 단숨에 헝가리 이북 시장의 유일한 구리 공급자가 되었다. 동료 독일인들과 번번이 경쟁해야 하는 상황을 돌 파하려고 베네치아에서 독점적 시장 장악에 승부수를 던졌고, 결국 성 과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푸거의 행동은 결코 칭송할 수 없다. 하지만 다른 경쟁자들과 달리 차별적 시각으로 시장을 보았던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물량 확대를 통한 거대한 노림수는 놀라운 전략이었고 시대와 잘 맞아떨어졌다고도 할 수 있다.
푸거는 향신료 무역에서도 시장을 제압했다. 밋밋한 식사에 풍미와 생기를 더하는 데 후추만큼 좋은 상품은 없었다. 당시에는 페르시아인들이 인도의 향신료 무역을 담당하고 있었고, 유럽 대륙의 관문이자 인 도와 유럽을 연결하는 지리적 여건을 지녔던 베네치아는 향신료 무역 의 독점적 항구였다. 베네치아는 아드리아 해 연안 북단에 자리 잡은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푸거가 베네치아에서 구리를 과잉 공급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한 끗 차이의 대반전의 승부수가 필요하 다는 것이다. 외부에 의해 막히더라도 사고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가 격은 사회적 규제 속에서 인간이 만들어놓은 하나의 틀에 불과하다. 틀 을 넘어서는, 상자 밖의 생각을 하는 사람만이 거대한 부를 움켜쥘 자격이 있다.
- 인적 인프라 구축사업은 지도자를 육성하기 위한 교육사업이었다.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기존의 수도원으로는 어림없었기 때문이 다. 기원후 500년 이후 유럽 전역으로 확산된 수도원은 필사하는 방문헌을 베껴 쓰는 일을 하는 방)과 도서실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 수준은 형 편없었다. 가톨릭 사제들은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정도의 능력은 갖 추었지만 교육 수준이 높은 것은 아니었다. 수도원에서는 대체로 고대 에서 계승한 자유 7과(문법, 수사학, 논리학, 산술, 기하학, 음악, 천문학)의 기초를 교육하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이런 교육수준을 획기적으로 끌 어올릴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에서 대학이 등장하게 된다. 1088년 볼 로냐 대학, 1160년 파리 대학은 가톨릭 지도자를 양성하겠다는 포부를 구현한 시설이었다.
농업혁명 확산 사업은 일종의 도약 프로그램이었다. 농업혁명을 다 른 지역으로 확산하고자 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곡물의 생산 증대와 함께 교세 확장까지 가져올 수 있는, 욕심 나는 사업이었다.
- 전쟁을 통한 혁명의 확산도 도모했다. 1096년, 교황 우르반 2세 (Urbanus I)는 예루살렘을 되찾는다는 명목으로 교황권의 통치지역을 확대하기 위해 십자군 원정을 기획했다. 이후 십자군 원정에 거의 200 년 동안 매달렸지만, 1270년의 마지막 8차 원정도 결국 아무런 성과 없 이 끝나고 실패했다.
설마 전쟁사업을 기획했을까 하고 의구심을 가질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에 대한 현대의 부정적 사고는 전쟁의 참혹함을 깨달은 후에 형성된 것이다. 당시에는 '전쟁은 투자'라는 의식이 팽배했다. 포로는 무상 노동력 취득이요, 전리품으로 빼앗은 토지는 농업혁명의 새 로운 확장기지였다. 이들이 8차까지 십자군 전쟁을 벌인 것은 농업혁명 성공에 대한 자부심이자 기필코 혁명의 추가 기지를 확보하여 다시 한번 부를 쌓고 도약하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역사는 이때 각 계층의 사람들이 각기 다른 꿈을 꾸었다고 전하고 있다. 추락한 귀족들은 영지를 추가 확보하여 화려한 영주로 수직 이 동을 하고자, 농민들은 토지와 포로의 확보로 계층을 세분화하는 혁신 적 신제도의 기득권을 얻고자, 상인들은 물자의 교류 확대를 통해 간 절히 한몫을 건지고자 했을 것이다. 이처럼 십자군 전쟁은 모든 이들 의 꿈이 집약된 하나의 거대한 투자 프로젝트였다.
그런데 끝내 십자군 전쟁이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버리자, 1277년에 는 인적 인프라 구축사업도 도마 위에 오른다. 이로써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순탄하게 추진되고 있던 교육사업에 급제동이 걸리고, 결과적 으로 대학에는 회오리바람이 몰아치게 된다.
- 중세는 농업혁명의 성과를 중심에 두고 봐야 한다. '부의 혁명'을 이 룩한 유럽은 거침이 없었고 인적 인프라, 농업혁명 확산 사업을 통해 또 한 번의 도약을 노렸다. 인적 인프라 사업은 현대의 시각으로 보아 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반면 십자군 전쟁은 전쟁의 승리를 통해 혁명의 확산을 도모하였으나 끝내 좌절되었다. 이에 교황은 심한 불균형을 발 견했을 것이다. 이 불균형을 어떻게 할 것인가.
대학의 부흥은 놀라운 치적이라고 볼 수 있다. 신학에 함몰되지 않 고 '큰 그림의 지도자를 양성하겠다는 취지는 성과를 가져왔다. 갈릴레 오와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라는 중 력과 운동법칙 중심의 물리학 등 과학혁명은 세계를 뒤집어놓는다. 이 는 모두 중세의 대학이 주춧돌을 놓은 거대한 성과이다. 핵심 키워드로 시대를 조망해본다면 농업혁명은 '대성공했지만 십자군 전쟁은 '대참 패를 경험했다. 한편 중세는 대학의 설립과 번영이라는 '대반전을 거 둠으로써, 근대로 이어지는 중요한 역할을 마무리했다고 볼 수 있다.
- 인간의 초기 역사로 돌아가보자. 인간이 음식을 불로 익혀 먹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이 음식을 불로 익혀 먹으면서 장의 길이가 짧아졌고, 이로 인해 에너지 소비량(기초대사량)을 줄일 수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 진 사실이다. 그런데 그 밑바탕에는 에너지에 대한 공포와 절박함이 서 려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불을 사용하면서 절감된 에너지와 낭비 되는 에너지의 차이는 기능의 진화로 나타난다.
- 인간의 뇌는 인체의 기초에너지 중 20~25%를 소비한다. 그렇다면 뇌가 큰 것이 좋을까, 작은 것이 좋을까? 진화 과정에서 인류의 뇌는 커졌다가 다시 작아진다. 두뇌의 활용과 에너지 소비의 절박함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 선택은 쉽지 않다. 두뇌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면 결국 멸종을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에너지를 아끼려는 절박한 심리도 이해가 가능 하다. 에너지의 궁핍은 공포로 작용하며, 이는 노동 기피 심리와도 긴밀하게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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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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