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의 역사

역사 2021. 10. 22. 20:26

- 수천 년 동안 서구 사회에서 빨강은 색이라 불릴 만한 유일한 색이었다. 시간적으로나 위계상으로나 빨강은 다른 모든 색들보다 앞섰다. 물론 다른 색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그 자체로 인정받기까지, 그리고 물질문화, 사회 코드, 사고 체계에서 제 역할을 수행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인간은 빨강을 기반으로 하여 처음으로 색 체험을 하고, 성공을 맛보았으며, 자신의 채색된 우주를 구축했다. 빨강을 나타내는 아주 오랜 옛날의 어휘들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인간은 일찍부터 빨강으로 다양한 색조와 뉘앙스를 만들어 냈다. 여기서 언어는 회화의 수법, 염료나 염색의 기법과 만난다. 몇몇 언어에서는 한 단어가 상황에 따라 '빨강'을 뜻하기도 하고 ‘채색된, 유색의'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고전 라틴어의 코로라투스 coloratus', 현재 카스티야어의 콜로라도 colorado가 그렇다. '빨강'과 '아름다움'을 뜻하는 두 형용사가 같은 어근을 갖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러시아어에서 크라스니krasny(빨강), 크라시비krasivy(아름다운), 이 두 단어는 어휘론 상으로 같은 어군에 속한다. 또한 어떤 언어에서는 색을 나타내는 용어로 하양, 검정, 빨강 이렇게 세 개의 단어만 존재한다. 그런데 여기서도 검정과 하양은 색을 나타내는 형용사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들은 주로 빛과 어둠을 형언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색을 나타내는 단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빨강뿐이다. 빨강의 우위성은 일상생활이나 물질문명에서도 드러난다. 지중해 연안 지역에서는 주거 공간이나 도시 공간(벽돌, 기와), 가구류와 집기(토기, 다양한 도기), 직물과 의복(붉은색 색조들은 일종의 특권이었다), 그밖에도 장신구와 보석, 수호하고 장식하고 행운을 불러오는 부적처럼 몸에 지니고 다니는 온갖 소품에 이르기까지 빨강은 일찍부터 그 위상이 높았다. 각종 공연이나 제의에서도 빨강은 권력이나 신성함과 연관되었고, 매우 풍요로운 상징체계를 갖고 있었으며, 때로는 초자연적인 힘을 지닌 것처럼 보였다. 이처럼 여러 가지 면에서 빨강은 고대 사회에서 가장 원초의 색이었을 뿐 아니라 가장 우월한 색이었다.
- 빨강이 지닌 유해하고 부정적인 면모는 언어와 글자에서도 잘 나타 난다. 한 단어가 상황에 따라 붉어지다' 또는 '죽다', 때로는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다'를 뜻했던 것이다. 붉은 마음을 갖다(분노하다)', '붉은 행 위를 하다(악행을 저지르다) 같은 표현 역시 빨강이 부정적으로 쓰인 예 들이다. 마찬가지로 이집트 서기들은 위험, 불행, 죽음을 뜻하는 상형 문자를 붉은색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빨강이 늘 부정적인 것을 뜻하지는 않았다. 어떤 경우에는 승리를, 다른 경우에는 힘이나 권력을 나타냈으며, 그보다 빈 번하게 피와 생명력을 의미했다. 심지어 악으로부터 보호하는 기능을 지닌 빨강도 있었다. 붉은색 옷을 입은 암송아지 형상의 풍요와 다산의 여신 이시스, 그녀의 피와 눈물로 채색되었다는 붉은색 벽옥으로 만든 부적이 그런 경우다. 그렇지만 파라오 시대 이집트의 상징적 세계는 일 관되지도 않고 체계적이지도 않았다. 고대 이집트 제국 시대와 헬레니즘 시대, 상上이집트와 하下이집트 지역에서 색의 의미는 각기 달랐다. 오늘날의 고고학자들은 아직도 그 모든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고 있다. | 고대 근동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색은 벽과 가구 장식에서 중요 한 역할을 했지만, 오늘날 그 의미를 해석하기가 쉽지 않다. 여기서 빨 강은 창조, 번영, 권력, 그리고 몇몇 신들, 특히 다산과 풍요의 신들에 대 한 신앙과 연관된 긍정적인 색이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수메르인과 아 시리아인들은 신들의 조각상을 선명하고 화려한 색으로 칠했다. 신상이 석재이건 점토질이건 지배적인 색조는 역시 빨강이었다. 이처럼 빨강은 신성함의 색인 동시에 살아 있는 이 세상의 색이었다.
- 꼭두서니는 키가 큰 여러해살이풀이다. 아무데서나 야생 상태로 자랐으며, 특히 축축한 토양이나 늪지에서 잘 자랐다. 꼭두서니의 뿌리에는 색소 성분이 풍부하게 들어 있었다. 언제(기원전 5000-4000년경, 혹시 그보 다 먼저?), 어디서(인도, 이집트, 혹은 유럽?) 가장 먼저 염료를 만들어 썼는 지는 알 수 없지만, 가장 처음으로 사용된 염료가 빨강 색조였다는 사실 은 알고 있다. 따라서 꼭두서니가 가장 먼저 사용된 염료였으리라고 추 정해 볼 수 있다. 옛 사람들은 일찍부터 꼭두서니가 만들어 내는 견고 하고 진한 빨강 색조를 석회, 삭힌 오줌, 나중에는 식초, 주석, 명반 같은 매염제를 써서 다양한 뉘앙스로 변조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세월이 갈수록 기술은 점점 더 발전했고, 기원전 1000년경 지중해 연안 지역에서는 꼭두서니 염색액 제조법과 붉은색 색조를 다양화하는 기법이 완성 단계에 도달했다. 하지만 다른 색들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다. 문제는 어떻게 하여 신석기 시대에 인류가 땅을 파서 꼭두서니 뿌리를 찾아낸 다음, 껍질을 벗기고 그 안에 들어 있는 붉은 부분을 으깨어 즙을 내서 색을 내는 염료로 쓰게 되었냐는 것이다. 염색을 성공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도와 시행착오가 있었고, 얼마나 많은 실수와 사고를 겪었으며, 얼마나 많은 실험을 했을까? 물론 우리로서는 알 길이 없다.
- 로마 제국에서 꼭두서니(루비아rubia [꼭두서니속-역자) 염색은 점차 본격 적인 산업 활동이 되었다. 꼭두서니 재배로 특화된 지역들이 있었는데, 프랑스 론강 유역, 이탈리아 포강 유역의 평원, 스페인 북부, 시리아, 아 르메니아, 페르시아만이 그러했다. 여러 저술가들은 꼭두서니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우선 꼭두서니는 서늘하고 강수량이 풍부한 지역의 석회질 토양에서 잘 자란다. 3월에 씨를 파종하고 18개월이 지난 뒤, 잎과 줄기를 수확하여 가축들에게 먹이로 준다. 이렇게 하면 소와 양에게 서 붉은빛이 은은한 젖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뿌리를 캐려면 3년을 기 다려야 한다. 뿌리는 말려서 껍질을 벗겨낸 후 빻는다. 이렇게 해서 얻 어 낸 분말을 염료로 쓴다. 44 꼭두서니를 재배하는 것은 쉽지만, 쥐들로 부터 확실히 보호할 필요가 있다. 쥐들이 매우 좋아하는 검은색의 작은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이렇게 수확한 열매는 강력한 이뇨제로 쓰인다. 고 갈리에누스[서기 2세기에 활동한 페르가몬 태생의 의사-역자]가 이야기했다. 이처 럼 꼭두서니 열매는 고대 의학에서 폭넓게 사용되었다.
꼭두서니는 짙고 다양하며 아름다운 빨강 색조를 만들어 냈지만, 여 기에는 광택이 없다는 결점이 있었다. 그런 까닭에 그리스와 로마 염색 업자들은 다른 색소 물질을 선호했는데, 훨씬 더 비싸고 구하기도 어렵 지만 더 찬란한 붉은빛을 내는 연지벌레(코쿰coccum [연지벌레의 알-역자)였다. 이것은 지중해 연안에 자생하는 다양한 나무(대부분이 여러 종류의 떡 갈나무)와 관목의 잎에서 채집하는 몇몇 벌레를 건조시켜서 짜낸 끈적끈 적한 액상의 동물성 염료였다. 이때 암컷만을 사용했는데, 산란기에 채집해야 염료를 추출할 수 있었다. 암컷 연지벌레를 식초 증기에 찐 다음 햇볕에 말리면 갈색의 알갱이가 된다. 이것을 으깨면 진한 빨간색의 끈 적끈적한 액체가 나오는데, 이것을 염료로 쓰는 것이다. 연지벌레 염료는 고착성이 높고 색이 진하며 광택이 있었다. 하지만 극소량의 염료를 얻는 데 상당한 양의 벌레가 필요했다. 따라서 가격이 매우 비쌌으며, 사치스러운 직물 염색에만 사용했다.
- 연지벌레보다 더욱 격조 높고 로마 염색의 명성을 드높인 염료가 있었 는데, 바로 자주 조개다. 다른 염료들과 마찬가지로 자주 조개에 대한 로마인들의 지식은 그리스, 이집트, 특히 페니키아인에게 전수받은 것 이었다. 로마가 지중해 연안 전역을 지배하기 전부터 이미 자주 조개 염 료로 염색한 옷감은 가장 인기가 높았고 가격도 가장 비쌌다. 이 옷감들 은 부와 권력을 나타내는 징표였으며, 보물처럼 여겨졌다. 이것으로 왕 이나 족장, 사제들의 옷을 만들었으며, 신상神像에 걸치는 용도로 사용 하기도 했다.48 자주 조개 염료가 이처럼 인기와 명성을 누리게 된 데에 는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다소 신비스러운 염료로 얻은 비할 데 없는 붉은색 색조의 화려한 광채이고, 다른 하나는 그 염료의 고착성과 빛에 대한 저항성이다. 다른 염료들과 달리 자주 조개 염료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 빛깔이 퇴색되기는커녕 더욱 강렬해졌고, 햇빛이나 달빛, 심지어 단순한 불빛에도 색감이 더욱 풍부해졌다. 
- 지리적 의미보다는 상징적 의미가 더 큰 ‘레드 라인'은 여러 면에서 로마 제국의 운명을 판가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강물의 빛깔 은 이러한 정치적 차원의 의미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격 언의 함축적 의미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루비콘 강을 건너다” 라는 말은 금기를 어기고 모든 것을 걸었으며, 신의 뜻에 모든 것을 내맡긴 다는 뜻이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라는 말 역시 카이사르가 이 강을 건 너면서 발설했다고 알려져 있다. 루비콘강의 불그스름한 물빛과 대응 되는 것으로 그보다 훨씬 오래 전에 그와는 전혀 다른 상황에서 언급된 홍해의 붉은빛 바닷물이 있다. 홍해 역시 히브리인들이 이집트를 탈출 하여 약속된 땅을 찾아 나서면서 건넌 상징적인 경계선이다. 여기서도 빨강은 위험하면서도 미래지향적이고 건설적인 색으로 나타난다. 빨간 색은 역사적인 분기점을 이루는 사건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동시에 역 사의 진정한 원동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 이 모든 직물과 사물, 그리고 모든 관행을 통해 우리는 중세 유럽에서 빨강이 권력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에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왕의 권력뿐만 아니라 봉건 영주의 권력이나 위임된 권력 또한 마찬가지였다. 공작, 백작, 대남작 등의 주요 봉신들이 무대에 등장하기 위해 빨간색을 활용 했을 뿐만 아니라 황제나 왕의 대리인들도 마찬가지였으며, 하급 영주 들도 그들을 따라했다. 예를 들어 신성 로마 제국의 변방을 지키는 공작이나 총독들은 붉은색이 주조를 이루는 깃발과 문장을 지니고 있었 다. 그런데 중세 말에 지나치게 세심한 관리들이 붉은색을 황제와 왕실 에 한정된 색이라고 주장하면서 붉은색 옷과 밀랍 인장을 일반 대중들에게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물론 이러한 규제는 제대로 지켜지지 못 했다. 좀 더 동쪽으로 이동하여 폴란드에서는 더욱 놀라운 일이 있었다.
폴란드의 대영주들이 봉신과 소작 농민들에게 세금으로 붉은색 계열의 온갖 물품을 요구했던 것이다. 붉은색으로 물들인 천, 붉은색 유리, 연지벌레 '알', 붉은색 과일과 열매, 붉은색 털가죽의 소, 심지어 '새빨갛고 아름다운 볏이 달린 살찐 수탉'도 있었다.21 중세 시대에는 어떤 형태로는 붉은색을 과시하거나 부여받고 통제하며 금지하는 것, 이 모두가 자신의 권력을 표명하는 행위였다.
- 자신의 권력이 아닌, 제3자의 권력을 행사하는 경우 또한 마찬가지였 다. 예를 들어 판사는 실제 법정에서는 세밀화 도상에서는 어김없이 붉 은색 옷을 입은 모습으로 등장했다. 이때 빨강은 위임된 권력과 자신의 직무, 다시 말해 국왕이나 제후, 또는 도시나 국가를 대신하여 법조문 을 낭독하고 판결을 내리는 권한과 직무를 나타내는 색이었다. 좀 더 일 반적으로 빨강은 하느님의 심판이든 인간의 판결이든 정의를 상징하는 색이었다.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금지된 열매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를 천국에서 쫓아내는 천사는 채색화에서 붉은색의 천사, 즉 심판 을 내리는 천사로 등장한다. 이는 세속적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반적으로 사형 집행인은 붉은색 모자와 의복을 착용하며, 여기서 붉 은색은 그가 맡은 임무를 상징한다.
권력의 빨강, 죄의 빨강, 처벌의 빨강, 곧 흘러나올 피의 빨강, 이러한 색의 상징체계는 근대에 이르기 전에 다시 한 번 만나게 될 것이다.
- 오랫동안 선호와 찬탄의 대상으로 필적할 만한 상대가 없을 만큼 독보 적이었던 빨강은 한창 영광의 시절을 누리던 중 12세기에 예기치 못한 경쟁자를 만났는데, 바로 파랑이었다. 과거 로마인들에게 야만인의 색 으로 취급되어 사랑받지 못했던 파랑은 중세 초에도 여전히 주목받지 못했다. 물론 여기저기서, 특히 의복 색으로 사용되었지만, 사회적, 예술 적 차원으로나 종교적, 상징적 차원으로나 중요한 색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한다. 12세기 중엽부터 13세기 초에 이르는 수십 년 사이에 파랑은 양적, 질적으로 급부상했다. 처음에는 미 술과 채색 삽화에서, 그 다음으로는 의복과 궁정 생활 전반에서 유행하는 색이 되었다. 이때부터 파랑은 도자기 제품과 채색유리창을 뒤덮었 고, 채색 필사본의 세계를 장악했으며, 프랑스 왕과 아서왕 문장의 바탕 색이 되었다. 모든 로망어 어휘에서의 변화는 특히 놀라웠다. 고전 라틴 어에 파랑을 나타내는 단어가 없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라틴어 어 원이 아닌 두 단어가 나타나 급부상하던 파랑을 지칭하게 되었다. 그중 하나는 게르만어에서 (블라우blau/블루bleu), 다른 하나는 아랍어에서 (라주르l?zurd/아쥐르azur) 유래한 것이었다. 파랑은 사회적, 예술적, 종교적 삶 의 모든 분야에서 점차 가치를 인정받았고, 그때까지 모든 색 중에서 최고의 색, 가장 아름다운 색이었던 빨강과 경쟁하기 시작했다.
역사가들의 관심사는 이러한 변화가 색소나 염료 분야의 기술적 발 전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이념적 변화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아내 는 것이다. 유럽에서 수 세기 동안 파랑의 아름다운 색조들, 즉 순수하고 밀도 있고 광택이 있는 파랑 색조, 직물 섬유에 깊숙이 침투하는 파란색 염료를 만들어 내지 못했던 염색업자들(다양한 색조의 붉은색을 내는 능력 은 탁월했다)이 불과 두어 세대 만에 그런 파란색을 만드는 데 성공한 것 이다. 이러한 변화가 언제부터 시작되었고, 그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색 소와 염료의 화학이라 부를 수 있는 발전된 기술의 측면에서 찾아야 할 까? 아니면 파랑이라는 색의 새로워진 사회적, 상징적 위상이라는 측면 에서 찾아야 할까? 대체 어떻게 해서 파랑이 급부상하게 되었을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신학적, 이념적인 동기가 화학적, 경제적인 변화보다 앞섰던 듯하다. 
- 채색화에서 푸른색 옷을 입은 성모가 파랑의 부상에 크게 기여했으 며, 왕들은 그녀를 모방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프랑스 왕 필리프 2세 가 따라했고, 성왕 루이는 재위 기간 중 후반기(1254-1270) 내내 그렇게 했다. 나중에는 다른 서유럽 그리스도교 국가의 왕들도 푸른색 옷을 입 었다. 점차 프랑스, 영국 등의 대영주와 부유한 귀족들이 이를 따라했 다. 독일과 이탈리아 두 나라만이 한동안 그 새로운 유행에 저항했다.
필자는 이미 오랫동안 12-13세기에 나타난 '파랑의 혁명'에 대해 연 구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길게 다루지 않겠다.48 하지만 취향과 수요의 변화로 인해 염색업이라는 직업이 어떻게 그 변화에 적응해갔는지 한 번 더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고급 직물을 생산하는 대도시에서 그러한 변화는 염색업자들을 서로 다른 두 개의 직업 조합으로 뚜렷이 구분 하는 결과를 낳았다. 빨간색 염색업자들은 노란색을 다룰 수 있었고, 파 란색 염색업자들은 검은색과 녹색도 같이 염색했다. 두 집단은 서로 경 쟁했다. 꼭두서니와 연지벌레를 취급하는 상인들은 점점 더 세력을 넓 혀가는 대청大靑 상인들을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대청은 여러 토양에서 자라는 식물로 잎에서 짙은 청색 색소를 추출했다. 대청 재배 는 일부 지역(프랑스 피카르디, 독일 튀링겐, 나중에는 프랑스 남부 랑그도크)에 서 본격적인 산업 작물이 되었다. 지역의 전승에 따르면, 피카르디의 대청 상인들이 1220년대부터 증축된 새로운 아미앵 대성당의 재정을 전적으로 부담했다고 한다. 좀 과장된 이야기지만, 청색 염료의 산업과 상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던 그 시대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빨강과 파랑 사이에 벌어진 새로운 경제 전쟁의 양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또 다른 자료가 있다. 1256년 스트라스부르에서 꼭두서니 염 료 상인과 프랑스에서 건너온 채색유리 장인들이 맺은 계약서다. 꼭두 서니 염료 상인은 대성당 예배실에 설치하는 채색유리창에 테오필 수 사의 교훈적인 이야기를 그려달라고 주문했다. 테오필 수사가 악마에게 자신의 영혼을 팔았는데, 성모가 나타나 구원해주었다는 내용이었다. 이때 악마를 푸른색 옷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달라고 특별히 요청했는 데, 파랑의 이미지를 손상하려는 의도였다. 채색유리 장인들은 상인의 요청대로 악마를 푸른색으로 칠했지만, 붉은색 꼭두서니 염료 거래를 다시 활성화시키거나 파란색의 새로운 유행을 막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파랑의 유행은 이미 알자스 지방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었다.

- 중세 말에 빨강은 혼란기로 접어들었다. 최고의 색, ‘탁월한 색'이라는 위상은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다음 세기에 이러한 현상은 더욱 심해진다. 이제부터는 찬탄의 대상이었으며 때로는 빨강보다 선호되는 파랑과 여러 분야에서 경쟁을 벌여야 했을 뿐만 아니라, 궁정 사회에서 한창 유행하던 검정 색조들의 공세와도 맞서 싸워야 했다. 검정은 궁정 사회에서 앞으로 수십 년 동안 복식에서의 사치와 우아함을 표상하는 색이 된다. 연지벌레, 나중에는 코치닐로 염색한 천이 고급스러운 직물로 인정받고 있었지만, 빨강의 역할은 분명 축소되고 있었다. 이제 유행은 중세 봉건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선명하고 순수하고 광택이 나는 빨강이 아니었으며, 짙은 빨강 색조들(진홍색)이나 빨강의 변두리에 위치한 색들(분홍색, 보라색)도 아니었다. 노랑이나 갈색을 띤 빨강 색조들이 배척당했으며, 이 색조들은 지옥의 불길과 원죄, 그리고 교만, 거짓, 음란을 필두로 하는 온갖 악덕 등을 떠올리게 하는 모든 것과 연관되었다. 나쁜 빨강과 나쁜 노랑이 한곳에 공존하는 듯한 다갈색roux, 그리고 1500년대의 여러 문헌에서 '모든 색 중 가장 추한 색으로 소개되는 탄tan 색, 즉 일종의 적갈색 혹은 짙은 다갈색이 대표적인 예다. 그렇지만 빨강이 직면한 가장 큰 위험은 다른 색과의 경쟁도, 취향이나 감수성의 변화도 아니었다. 그것은 당시의 사치 단속령과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에 의해 전파된 색에 대한 새로운 윤리에 있었다. 새로운 윤리를 기준으로 판단하면, 빨강은 지나치게 눈에 잘 띄는 데다 값이 너무 비싸고 정숙하지 못하며 비도덕적이고 퇴폐적인 색이었다. 그 결과 빨강은 16세기 말부터 물질문화와 일상생활의 여러 분야에서 퇴조 국면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일상적인 윤리 차원에서 가톨릭의 반종교 개혁 운동은 프로테스탄트 가치들 중 일부분을 도입하려 했다. 이제부터는 흰색 옷을 주로 입는 교황을 본받아야 하는 평신도들에게도 빨강은 더 이상 영예로운 색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과학이 나서서 빨강의 퇴조'라는 현상을 돌이킬 수 없는 흐름으로 만들어버린다. 1666년 아이작 뉴턴이 스펙트럼을 발견하면서(스펙트럼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색의 물리학과 화학의 기본이 되는, 그 당시의 새로운 분류법이었다), 고대와 중세 때의 인식처럼 빨강이 색의 단계 중 한가운데에 위치하는 게 아니라 한쪽 끝에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색의 여왕이었던 빨강에게는 별로 영광스럽지 않은 자리였다. 이렇게 빨강은 상징적 힘의 일부분을 잃어버리는 듯했다.
- 중세에 계속 머무르면서 빨강에서 다갈색(roux)으로 이동해 보자. 오늘날 짙은 주황색 톤의 빨강으로 규정되는, 빨강의 특별한 색조인 다갈 색은 12세기부터 급격하게 평가 절하되었으며, 결국 수많은 악덕을 혼 자서 떠안아야 하는 신세가 된다. 여러 문헌과 채색화에서 치욕스러운 다갈색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있는데, 바로 유다이다.
신약 성서에서 어느 정경 텍스트나 어느 외경에서도 배반자 사도의 신체적인 모습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초기 그리스도교 미술이나 중세 초기 그림에 나타난 유다의 모습에는 특징적인 공통점 이 전혀 없다. 그렇지만 최후의 만찬 장면에서는 그의 위치, 신체 크기 나 태도 등으로 다른 사도들과 차별화하기 위해 애쓴 흔적이 보인다. 그 러다가 1000년 이후가 되어서야 처음에는 세밀화에서, 나중에는 채색 화가 삽입되는 여러 매체에서 다갈색 머리카락과 수염이 출현하고 널 리 퍼지게 되었다. 라인 강과 피즈 강 지역에서 탄생한 이 도상학적 관 행은 그리스도교 유럽의 대부분 지역으로 확산되었고, 중세 말과 근대 초에는 유다라는 인물의 가장 중요한 신체적 특징이 되었다. 
- 물론 13-15세기가 우리에게 남긴 수많은 채색화에서 이 모든 인물들 이 항상 다갈색 털을 가진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갈 색 털이라는 신체적 특징이 가장 주목할 만한 도상학적 특징 중 하나였 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신체적 특징이 나중에는 '사회적으 로 추방 또는 배척된 자들' 이라는 특별한 사회적 범주로 확대되는 결과 를 낳는다. 즉 이단, 유대인, 무슬림, 독실한 신자인 체하는 자, 나병 환 자, 신체장애자, 걸인, 떠돌이, 가난한 자 등 온갖 종류의 사회적 낙오자 들에게 적용된 것이다. 중세 채색화에서의 다갈색은 의복의 색 표식으로서의 빨강 또는 노랑, 아니면 빨강과 노랑의 배합으로 이어졌다. 실제 로 13세기부터 유럽의 몇몇 도시나 지역에서는 위의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은 그런 색의 옷을 입어야 한다는 법령이 생겼다. 다갈색은 배척 혹은 불명예를 나타내는 최초의 색 표식이었다.
- 오래 전부터 역사가, 사회학자, 인류학자들은 서구 전통에서 다갈색 에 대한 거부감을 설명하고자 애썼다. 이들은 여러 가지 가설을 내세웠 는데, 여기에는 이론의 여지가 큰 가설들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머리털 이나 피부의 다갈색을 '인종의 퇴화와 연관된, 색소 형성 과정의 결함 으로 보는 생물학적인 관점이다. 대체 인종의 퇴화'란 무엇인가? 사이 비 과학이 동원된 이러한 설명 앞에서 역사가들은 당혹스럽다.28 이들 은 다갈색을 평가 절하하는 것을 사회적 태도라 생각한다. 켈트인 사회 와 스칸디나비아를 포함한 유럽의 모든 사회에서 다갈색인 자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고, 사회적 소수 집단에 속해 있으며, 그런 이유로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불안하게 하며 논란을 일으키는 자로 간주되었다. 본 래, 다르다는 것에는 늘 배척의 위험이 뒤따르는 법이다.
다갈색인 자들 중 가장 유명한 인물인 유다는 빨강과 노랑, 이 두 색 의 부정적인 면을 한 몸에 떠맡은 자였다.30 중세 말 독일에서 회자되었 던 어원론적인 말장난에서 지적한 것처럼 유다는 그가 배반한 예수의 피로 붉은색이 되었다. 여기서는 그의 이름 이스가리옷가리옷 출신' 이라 는 뜻)을 ist gar rot, 즉 '온통 붉은색인 자'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가 저지른 배반으로 인해 유다에게는 거짓말과 불충을 상징 하는 색인 노랑이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런 까닭에 모든 배반자들 과 마찬가지로 유다는 채색화에서 노란색 옷을 입은 모습으로 나온다. 실제로 세월이 갈수록 노랑은 점점 더 평가절하되었다. 로마 시대에 노랑은 종교 의례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남성복이건 여성복이건 복식에서 매우 인기 있는 색이었지만, 중세에는 버림받고 비난받다가 결국에는 단죄를 받는 지경에 이른다. 화형장의 장작더미에 오르는 변절자, 배교자, 회개했다가 다시 이단에 빠진 자, 모든 종류의 위조범들에 게 관례적으로 노란색 옷을 입혔던 것이다. 이들이 거주하는 집도 상징 적으로 노란색을 칠했다.
오늘날에도 노랑은 여전히 사랑받지 못하는 색이다. 색에 대한 선호 도 조사에서 노랑은 여섯 가지 기본색 중 꼴찌를 차지한다(파랑, 녹색, 빨 강, 하양, 검정, 노랑 순이다).31 노랑에 대한 거부감은 중세 때부터 존재했으 며, 배반자 사도인 유다는 가장 중요한 원인 제공자인 동시에 가장 큰 피해자였다.
- 근대가 시작될 무렵 시 당국이 내세운 사치 단속령이나 복식을 규정하 는 법령들이 특히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쏟아져 나왔다. 피렌체 귀부인 들의 옷장에 대해 1343년의 복식의 관례'를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처 럼, 이 법령들은 경제적, 윤리적, 사회적이라는 세 가지 기능을 수행했 다. 우선 사치품의 소비와 비생산적인 투자를 억제하는 것이 첫 번째 목 표였고, 두 번째는 경박하고 단정치 못하며 사회적 물의를 빚는 것으로 판단되는 의복에서의 새로운 유행을 막는 것이었다. 마지막이자 이 중 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는 다양한 사회 계층 간에 거리를 둠으로써 사회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외양과 분수를 지키면서 제자리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었다.
- 의복과 관련된 문제에서 색은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어떤 색은 특정 사회 계급이나 계층에 사용이 금지되거나, 혹은 반드시 사용해야 한다. 고 규정했다. 두 경우 모두 빨강이 목록 중 최상위에 있었다. 빨강은 특 정 직업이나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 그런 이유로 사회 질서의 변두리 에 있는 자들에게 강요되었다. 예를 들어 14세기부터 17세기까지 유럽 의 여러 도시에서 창녀들은 선한 여성들과의 차별화를 위해 요란한 색 상의 옷(드레스, 두건, 숄, 장식끈)을 입어야 했다. 그 색은 주로 빨강이었다.
- 빨간 두건을 쓴 소녀 월터 크레인, 〈빨간 모자를 쓴 아이〉, 1875, 목판화집 왜 빨강인가? 이 질문에는 각 분야마다 대답이 달라질 수 있다. 오래 전부터 아이들에게 빨간색 옷을 입히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다(역사학), 이야기가 성령 강림 축일에 일어났기 때문이다(전례학), 사춘기 소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 늑대와 잠자리를 같이하고 싶다는 강한 욕망이 있었기 때문이다(정신분석학).. 옛날 동화에는 세 가지 색의 원칙이 있었는데, 늑대의 검정, 작은 버터 단지의 하양, 이 두 색과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는 소녀가 입은 옷 색이 빨강이어야 하기 때문이다(의미론),
- 호사스러운 궁정 생활의 이미지로 인해 17세기에 대해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17세기는 물질적인 면으로, 또한 사고나 감수성 면으로도 어둡고 불안하며 음산한 시기였다. 적어도 유럽 인구의 과반수에게는 그러했다.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늘 물자가 부족했으며, 이상 기후로 모두가 고생했고 기대 수명이 급격하게 하락했다. 17세기를 색으로 표현한다면, 베르사유 궁의 황금색이 아니라 비참한 검은색일 것이다. 반면에 18세기는 밝고 화려하고 빛나는 시대였다. 이 시기는 또다시 매우 암울한 19세기로 넘어가기 전, 일종의 과도기였다. 1720년대부터 ‘계몽주의' 시대의 빛은 정신적 영역에서 반짝였을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실내 장식에서도 가득했다. 문과 창문이 넓어졌고, 조명이 개선되었으며, 그 비용은 낮아졌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색을 더 잘 볼 수 있게 되었고, 색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색소 물질에 관한 화학적 연구가 전례 없는 발전을 하면서 염료와 직물의 생산도 크게 늘었다. 그 혜택은 사회의 모든 계층에게 돌아갔으며, 이제는 중간 계층도 귀족층과 마찬가지로 밝고 선명한 색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흐릿하고 어두운 색조들은 도처에서 퇴조되었다. 이전 세기의 흐릿한 갈색, 거무스름한 녹색, 푸르스름한 빛이 도는 진홍색과는 이별이었다. 의복이나 실내 장식에서는 밝은 색조, 쾌활한 색상, 특히 파랑, 노랑, 분홍, 회색에서의 '파스텔 색조들이 크게 유행했다. 그렇지만 이 새로운 유행이 빨강에 유리하게 작용한 것은 아니었다.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는 빨강이 아니라 파랑의 시대였다. 오래 전부터 빨강과 대립되는 색들 중 하나로 인식되었을 정도로 빨강의 경쟁자로 여겨졌던 파랑이 이 시기에 비로소 유럽인이 선호하는 색이 되었던 것 같다. 파랑은 오늘날에도 선호도 면에서 다른 색들을 훨씬 앞지르면서 선두에 있다. 반면에 빨강은 여론 조사에서 파랑은 물론 녹색에게도 추월을 당하고 있다. 이처럼 18세기는 적어도 오늘날의 유럽 사회에서 느리지만 돌이킬 수 없는 퇴조의 흐름으로 향하는 출발점이었다.
- 즉 하양과 빨강 사이에는 빈자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새로운 색은 어 디에 위치해야 할까?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아름답고 새로운 분홍색 혹 은 살색을 노랑의 특별한 색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것은 1517세기 동안 유럽 전역에서 그 색의 위상이 될 것이었다. 모든 사전, 뉘 앙시에, 색에 관한 기술적 혹은 전문적 매뉴얼에서 살색, 즉 우리의 분 홍색을 빨강이 아니라 노랑의 연하고 우아한 버전이라 정의했다. 프랑 스어에서 색을 나타내는 형용사 로즈rose는 18세기 중엽 이전까지 사전 에서 언급된 적이 없었다. 색에 대해 비교적 과학적으로 상세히 논하는 디드로와 달랑베르의 『백과전서 Encyclopedie]는 로즈라는 색 형용사를 처음으로 사용한 문헌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프랑스 아카데미에서 펴낸 사전에서는 1835년 여섯 번째 판본이 나올 때까지 전혀 언급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 유럽인들은 아시아에서 들여오던 '브라질 목재'와 같은 종류의 염료성 목재가 남아메리카에서도 자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목재의 염색력은 브라질 목재보다 훨씬 더 높았다. 유럽인들 은 벌목 사업에 열을 올렸고, 나중에는 이 목재를 공급하는 나라에 ‘브 라질'이라는 나무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대서양을 건너는 항해는 길고 험난했지만, 이 염료 물질의 원가는 그리 비싸지 않았다. 남아메리카 밀림을 개발하는 데 노예 노동력이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분홍 색조들의 인기는 날로 치솟았으며, 18세기 중엽에 인기가 정점에 달했 다. 그 당시 유럽 사회의 최상류층에서는, 값이 비싸다는 이유로 독점했 던 밝고 선명하고 견고한 색들에 중간 계층이 접근할 수 있게 되면서, 이들과 차별화할 수 있는 색들을 파스텔 톤, 중간 색조, 가장 혁신적인 색조에서 찾으려 하고 있었다. 
- 프랑스에서는 루이 15세 시대의 퐁파두르 후작 부인이 실내 장식이 나 직물 분야에서 분홍색의 유행을 이끌었다. 그녀는 분홍색과 하늘색 을 배합하는 것을 좋아했으며, 그녀의 총애를 받았던 두 색조는 곧 유 럽 전역에서 크게 유행했다. 그러나 의복의 경우, 분홍은 여자들뿐만 아 니라 남자들의 색이었으며, 아직까지는 분홍에서 여성적 요소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한편 이제부터는 분홍이 노랑의 특별한 색조가 아니 라 빨강과 하양의 혼합색으로 간주되었다. 이렇게 18세기 중엽 유럽 어 디에선가 오늘날의 현대적인 분홍이 탄생했다! 프랑스어에서는 얼굴 의 살색이 아닌 꽃잎 빛깔에서 유래한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다. 장미 꽃rose 이 색 용어인 '분홍rose’을 만들어 낸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도 그로부터 수십 년에 걸쳐 식물학자와 조경 전문가들이 점점 더 다양한 종 의 장미를 만들어 냈고, 고대부터 중세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분홍색 장 미들이 보편화되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변화는 아주 서서히 이루어졌 다. 프랑스어에서 로즈rose라는 단어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분홍색을 규정하는 어휘로 확고히 자리 잡은 것은 19세기에 이르러서였다. 스페 인어 로사rosa, 포르투갈어 코르드호자cor-de-rosa, 독일어 로자rosa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영어 핑크pink는 오랫동안 브라질 목재에서 추출한 염료물질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다가 뒤늦게서야 그 염료로 얻어내는 색을 형언하는 단어가 되었다.
갓난아이와 어린 아이들에게 분홍색과 하늘색 옷을 입히는 관행은 18세기에는 나타나지 않았으며, 다음 세기인 19세기 중엽에 앵글로색 슨 사회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몇몇 문헌에서 기록된 것과는 달리 성모의 보호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이것은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에서 탄생한 관습으로 서서히 유럽의 모든 사회로 퍼져 나갔다. 게다가 오랫 동안 여자아이에게는 분홍색, 남자아이에게는 하늘색으로 성별을 구분 하지도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상류사회를 묘사한 그림들을 보 면, 남자아이가 파랑보다 분홍 옷을 입고 있는 경우가 더 많다. 이와 같 은 사례는 무수히 많다. 하지만 이러한 경향은 궁정 사회, 귀족층, 그 리고 상류층에 한정되었다. 그 밖의 다른 사회 계층에서는 유아에게 거의 항상 흰색 옷을 입혔다. 그러다가 1930년대에 끓는 물에 자주 세탁 해도 색이 잘 바래지 않는 직물이 나오면서 가장 먼저 미국에서, 그 후 로는 유럽에서 분홍색과 하늘색 옷이 보편화되었다. 이때부터는 여자아 이에게는 분홍색, 남자아이에게는 파란색 옷을 입히는 풍조가 자리 잡 았다. 분홍은 옛날 전사와 사냥꾼들의 남성적인 빨강을 아이들에게 어 울리게 변조한 색이라는 사고가 이제 사라진 것이다. 18세기에 분홍은 대부분 남성적인 색이었던 반면, 이제부터는 본질적으로 여성적인 색이 되었다. 1970년대 이후 그 유명한 바비 인형이 나타남으로써 여성적인 색으로서의 분홍 이미지를 고착화했으며, 여자아이들의 놀이와 몽상의 세계 전반으로 그 영향력을 확대했다.
- 입술에 붉은색을 칠하는 것은 고대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대 여성들(을) 공통적으로 해 온 동작이다. 문화, 시기, 사회적 환경, 당대 유행에 따라 빨강의 색조는 매우 다양했다. 동로마 제국에서는 보랏빛 도는 빨강 혹은 거무스름하고 어두운 빨강, 중세 시대에는 소박하고 은은한 색조의 빨강, 18세기에는 강렬한 색조의 빨강, 그리고 오늘날에는 모든 색조의 빨강이 사용된다.
- 빨간색과 좌파 혹은 극좌파 정당이나 정치 단체 사이의 연관성은 한 세기 반이 넘는 동안 빨강의 역사를 지배했다. 그 결과 빨강의 다른 상 징적 의미들(어린 시절, 사랑, 열정, 아름다움, 쾌락, 에로티시즘, 권력, 정의)은 부 차적인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어느 한 가지 사고의 흐름이 색을 독점 하다 보니 색의 엠블럼 또는 상징으로서의 역할마저 박탈된 것이다. 그 리하여 빨강은 색도 이념도 아닌 어정쩡한 존재가 되고 말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공산주의자임을 밝히지 않고서는 빨간색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구소련이 사라지고 이념들이 약화된 오늘 날, 그 연관 관계는 매우 느슨해졌다. 그런데 요즘에는 녹색이 그 뒤를 잇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환경, 천연 에너지, 유기 농업 옹호론자나 열렬한 생태 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한다면 녹색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하기가 매우 어려워졌으니 말이다.  재빠르게 동일시하고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환원주의적' 태도는 색에게서 정서적, 시적, 심미적, 몽환적 의미를 모두 제거함으로써 색의 본래적인 특성을 변질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러한 흐름에 휩쓸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빨강은 지금까지도 위엄과 영예로 충만한 색으로 남아 있다. 게다가 빨강은 여전히 생기발랄하고 활력을 주며 심지어 호전적인 색 이다. 레드 와인은 화이트 와인보다 더 활력을 주고, 붉은색의 육류는 흰색 고기보다 더 기운을 북돋운다는 믿음이 있다. 페라리나 마세라티 같은 빨간색 자동차는 다른 색 자동차보다 더 빨리 달리는 듯하다. 스포 츠 분야에서도 붉은색 유니폼을 입은 팀이 상대 팀에게 위압적으로 보 일 수 있으며 승리할 가능성도 더 커진다는 속설이 있다.  이제는 더 이상 가장 선호하는 색이 아니고, 일상적인 환경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으며, 여러 분야에서 파랑에, 심지어 녹색에까지 추월당하고 있으면서도 상징적으로는 여전히 가장 강력한 색으로 남아있다는 점이 오늘날 빨강의 역설이다. 아주 먼 옛날로부터 내려온 색, 수많은 의미와 전설, 그리고 꿈들로 가득한 색으로서는 기이한 운명이다! 어쨌 든 기나긴 빨강의 역사는 우리 현대 사회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거워 보인다. 지금 존재하는 가치들마저 믿으려 하지 않고, 스스로의 역사, 신화, 상징, 색들을 갈수록 점점 더 외면하는 우리 사회가 감당하기에는 빨강이 너무 버겁게 느껴진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명의 자연사  (0) 2021.12.06
패권의 대이동  (2) 2021.11.17
세계사 속 부의 대반전  (0) 2021.10.07
철학과 종교의 세계사  (0) 2021.08.12
처음 읽는 돈의 세계사  (0) 2021.08.12
Posted by dalai
,

- 1980년대 중후반 일본의 주식시장과 지가는 왜 이렇게 폭등했을까?
환율 하락(화폐 강세)은 두 가지를 동반한다. 먼저 그 나라의 기업과 가계가 가진 자산가격이 상승하게 된다. A라는 사람이 일본 국채와 미 국 국채를 각각 보유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엔/달러 환율이 50% 떨 어지면(엔화가 50% 강세가 되면), 예전에 2천만 엔으로 10만 달러를 바 꾸던 것이 이제는 1천만 엔으로 10만 달러를 바꿀 수 있게 된다. 글로벌 시각으로 바라보면, 가계와 기업이 자산 재평가로 대박을 맞은 것과 다름없다. 자산은 그대로인데, 평가의 잣대가 바뀌니 주식과 토지의 가격이 상승하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또한 환율 하락(화폐 강세)은 경기상승을 가속화한다. 인구가 약 1억 3천만 명인 일본은 내수시장이 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편이다. 주식이나 부동산 등 자산가격이 급등하면, 기업의 투자가 늘어나고 개 인의 소비성향이 높아지며 소비지출이 커진다. 당시의 일본도 마찬가 지였다. 1985년에 309만 대였던 신규 등록 승용차는 1990년대에 500 만 대를 넘어섰으며, 가전·가구 등 내구 소비재에서도 대형 고가제품의 수요가 크게 증가했고, 편의점이 대폭 늘어나고 택배사업도 급속하게 발전한다.
- 일본 사람들은 소비가 살아나자 환호성을 질렀다. 소비는 경제의 핵심지표이자, 경제 주체들의 걱정과 근심의 영역을 축소시키는 일등 공신이다. 은행 거래를 하는 사람들도 신이 났다. 예금통장의 명목가치는 동일했지만 엔화의 실질가치가 상승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해외 여행을 하는 데 50만 엔이 필요했다면, 엔화 가치 상승으로 이제는 30 만 엔으로도 충분했다. 한 주당 100달러짜리 미국 주식도, 캘리포니아 해변가의 10만 달러짜리 미국 주택도 더 적은 엔화로 살 수 있었다. 기업들은 기업가치를 자산가격 상승에 따른 이익의 증가로 포장했다. 각종 재무비율과 수익률이 동일하더라도, 기업이 가진 부동산이나 주식 등 자산가격이 상승함으로써 이익의 절대값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것은 기업들이 가진 문제의 본질을 희석시키고 눈을 가려, 기업의 가치와 성장성에 대한 날카로운 해석을 가로막았다.
한편 엔화 강세(환율 하락)가 되면 수입가격은 낮아지고 수출가격은 높아지는 환율 전환 효과가 발생하여 수출경쟁력이 떨어지게 된다. 따 라서 수출기업은 상품의 품질을 높이든지, 또는 원가를 획기적으로 낮 출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등 경쟁력을 강화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 다. 그러한 경쟁력 신장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수출가격의 상승은 수출 감소로 이어져 큰 타격을 가져온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와 기업들은 환 율과 관련된 세밀한 대책을 수립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업들은 자산가격이 오르자 재테크에 혈안이 되어버렸다. 장기적 이득을 도모하기보다는 단기적 수익성에 매몰되어 경쟁력 신장을 도외시한 것이다. .
-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통일이 시작되었을 초기부터 일부 투자자들은 재빠르게 동독 화폐에 투자했다. 통일은 정치적 행위이므로, 동독의 마르크화 가치를 실제보다 높게 평가할 것으로 일찌감 치 예측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예상대로 이듬해인 1990년 7월 마 르크화가 1대 1로 통일되었고, 발빠르게 동독 화폐에 투자한 사람들은 큰 차익을 얻었다.
당시 동독과 서독의 실질 경쟁력 차이는 대략 1대 9 정도였는데, 교환비율이 1대 1로 확정되었으므로, 이론적으로 동독 마르크화의 가치가 9배 높게 평가된 것이고, 독일 마르크화에 투자한 이들은 9배의 차 익을 올린 것이다. 이를테면 한국과 북한의 경제규모가 약 50배 차이가 난다면, 매우 거칠게 말해 화폐가치의 차이도 수십 배인 셈이다. 한국의 1만 원이 북한에서는 수만 원, 수십만 원의 가치를 가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물론 한국과 북한의 화폐 원 단위는 다르지만, 쉽게 설명하기 위해 같다는 것을 전 제하고 설명한다). 그런데 한국의 1만 원과 북한의 1만 원을 똑같이 1대 1로 교환해준다면, 북한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이득을 얻 게 되는 셈이다. 1990년 7월 동독과 서독의 마르크화 통일은 바로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동독 마르크화 투자자들은 통일이 임박하자 통일과정에서 동독 마르크화의 가치가 이처럼 부풀려질 것이라는 점에 승부수를 던져 투자 했고, 결과적으로 엄청난 이익을 얻었다. 하지만 이러한 부풀리기는 장기적으로 결국 정상을 찾아가게 마련이다. 이들은 통일 후에는 두 화 폐의 가치가 정상적 수준으로 수렴될 것이라는 점에 다시 승부수를 걸 었다. 그러므로 이론적으로는 이러한 방식의 투자를 통해 투자자들이 18배, 또는 그 이상의 차익을 올리는 것도 가능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와 같이 경제적 현상에 대한 국가 간, 또는 사회적 합의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며 그 여파는 매우 폭력적이기까지하다. 통일 독일의 경
우 합의를 통해 환율을 1대 1 교환비율로 결정한 결과, 통일비용이 결국 몇 배로 급증했다.
- 어떤 사회가 건강한 사회일까? 조선의 개혁정신은 언제부터 사라졌을까?
중요한 점은 끊임없이 요동치는 사회일수록 건강한 사회라는 점이 다. 개인은 안주와 고착을 선호하더라도, 사회는 개인에게 역동성을 부여해야 한다. 왜 조선시대 말기에 경쟁력을 잃고 외세에 휘둘렸을 까. 토지와 노비제도에 의존하여 '편안한 부를 추구한 통치이념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국 경쟁 없이 주어지는 안락이 최대의 문제였다.
- 현재 시장을 독점하는 것은 불법이지만, 야코프 푸거가 활동하던 시기 에는 독점적 지위가 분명 기발한 사고였다. 또한 이는 정부의 규제 대 상이 아니라 암묵적 용인의 대상이었다. 치열한 경쟁이 이익을 없앨 수 있다는 공포가 낳은 결과이며, 결국 그 바탕에는 인간의 '에너지 공포 심리가 있다.
수익창출에서 가격의 역할은 매우 크다. 가격경쟁이 산업의 경쟁력 을 증진시킬 것이라는 생각은 때로는 맞다. 하지만 가격을 밑에서 받치 는 핵심적 조건과 원리를 제거하면 가격체제는 순식간에 의미를 잃는다.
푸거는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쟁취한 후 거 대한 부를 향한 확실한 기틀을 움켜쥔다. 헝가리는 동유럽에서 몇 안되는 구리 생산지였으므로, 그는 단숨에 헝가리 이북 시장의 유일한 구리 공급자가 되었다. 동료 독일인들과 번번이 경쟁해야 하는 상황을 돌 파하려고 베네치아에서 독점적 시장 장악에 승부수를 던졌고, 결국 성 과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푸거의 행동은 결코 칭송할 수 없다. 하지만 다른 경쟁자들과 달리 차별적 시각으로 시장을 보았던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물량 확대를 통한 거대한 노림수는 놀라운 전략이었고 시대와 잘 맞아떨어졌다고도 할 수 있다.
푸거는 향신료 무역에서도 시장을 제압했다. 밋밋한 식사에 풍미와 생기를 더하는 데 후추만큼 좋은 상품은 없었다. 당시에는 페르시아인들이 인도의 향신료 무역을 담당하고 있었고, 유럽 대륙의 관문이자 인 도와 유럽을 연결하는 지리적 여건을 지녔던 베네치아는 향신료 무역 의 독점적 항구였다. 베네치아는 아드리아 해 연안 북단에 자리 잡은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푸거가 베네치아에서 구리를 과잉 공급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한 끗 차이의 대반전의 승부수가 필요하 다는 것이다. 외부에 의해 막히더라도 사고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가 격은 사회적 규제 속에서 인간이 만들어놓은 하나의 틀에 불과하다. 틀 을 넘어서는, 상자 밖의 생각을 하는 사람만이 거대한 부를 움켜쥘 자격이 있다.
- 인적 인프라 구축사업은 지도자를 육성하기 위한 교육사업이었다.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기존의 수도원으로는 어림없었기 때문이 다. 기원후 500년 이후 유럽 전역으로 확산된 수도원은 필사하는 방문헌을 베껴 쓰는 일을 하는 방)과 도서실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 수준은 형 편없었다. 가톨릭 사제들은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정도의 능력은 갖 추었지만 교육 수준이 높은 것은 아니었다. 수도원에서는 대체로 고대 에서 계승한 자유 7과(문법, 수사학, 논리학, 산술, 기하학, 음악, 천문학)의 기초를 교육하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이런 교육수준을 획기적으로 끌 어올릴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에서 대학이 등장하게 된다. 1088년 볼 로냐 대학, 1160년 파리 대학은 가톨릭 지도자를 양성하겠다는 포부를 구현한 시설이었다.
농업혁명 확산 사업은 일종의 도약 프로그램이었다. 농업혁명을 다 른 지역으로 확산하고자 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곡물의 생산 증대와 함께 교세 확장까지 가져올 수 있는, 욕심 나는 사업이었다.
- 전쟁을 통한 혁명의 확산도 도모했다. 1096년, 교황 우르반 2세 (Urbanus I)는 예루살렘을 되찾는다는 명목으로 교황권의 통치지역을 확대하기 위해 십자군 원정을 기획했다. 이후 십자군 원정에 거의 200 년 동안 매달렸지만, 1270년의 마지막 8차 원정도 결국 아무런 성과 없 이 끝나고 실패했다.
설마 전쟁사업을 기획했을까 하고 의구심을 가질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에 대한 현대의 부정적 사고는 전쟁의 참혹함을 깨달은 후에 형성된 것이다. 당시에는 '전쟁은 투자'라는 의식이 팽배했다. 포로는 무상 노동력 취득이요, 전리품으로 빼앗은 토지는 농업혁명의 새 로운 확장기지였다. 이들이 8차까지 십자군 전쟁을 벌인 것은 농업혁명 성공에 대한 자부심이자 기필코 혁명의 추가 기지를 확보하여 다시 한번 부를 쌓고 도약하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역사는 이때 각 계층의 사람들이 각기 다른 꿈을 꾸었다고 전하고 있다. 추락한 귀족들은 영지를 추가 확보하여 화려한 영주로 수직 이 동을 하고자, 농민들은 토지와 포로의 확보로 계층을 세분화하는 혁신 적 신제도의 기득권을 얻고자, 상인들은 물자의 교류 확대를 통해 간 절히 한몫을 건지고자 했을 것이다. 이처럼 십자군 전쟁은 모든 이들 의 꿈이 집약된 하나의 거대한 투자 프로젝트였다.
그런데 끝내 십자군 전쟁이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버리자, 1277년에 는 인적 인프라 구축사업도 도마 위에 오른다. 이로써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순탄하게 추진되고 있던 교육사업에 급제동이 걸리고, 결과적 으로 대학에는 회오리바람이 몰아치게 된다.
- 중세는 농업혁명의 성과를 중심에 두고 봐야 한다. '부의 혁명'을 이 룩한 유럽은 거침이 없었고 인적 인프라, 농업혁명 확산 사업을 통해 또 한 번의 도약을 노렸다. 인적 인프라 사업은 현대의 시각으로 보아 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반면 십자군 전쟁은 전쟁의 승리를 통해 혁명의 확산을 도모하였으나 끝내 좌절되었다. 이에 교황은 심한 불균형을 발 견했을 것이다. 이 불균형을 어떻게 할 것인가.
대학의 부흥은 놀라운 치적이라고 볼 수 있다. 신학에 함몰되지 않 고 '큰 그림의 지도자를 양성하겠다는 취지는 성과를 가져왔다. 갈릴레 오와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라는 중 력과 운동법칙 중심의 물리학 등 과학혁명은 세계를 뒤집어놓는다. 이 는 모두 중세의 대학이 주춧돌을 놓은 거대한 성과이다. 핵심 키워드로 시대를 조망해본다면 농업혁명은 '대성공했지만 십자군 전쟁은 '대참 패를 경험했다. 한편 중세는 대학의 설립과 번영이라는 '대반전을 거 둠으로써, 근대로 이어지는 중요한 역할을 마무리했다고 볼 수 있다.
- 인간의 초기 역사로 돌아가보자. 인간이 음식을 불로 익혀 먹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이 음식을 불로 익혀 먹으면서 장의 길이가 짧아졌고, 이로 인해 에너지 소비량(기초대사량)을 줄일 수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 진 사실이다. 그런데 그 밑바탕에는 에너지에 대한 공포와 절박함이 서 려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불을 사용하면서 절감된 에너지와 낭비 되는 에너지의 차이는 기능의 진화로 나타난다.
- 인간의 뇌는 인체의 기초에너지 중 20~25%를 소비한다. 그렇다면 뇌가 큰 것이 좋을까, 작은 것이 좋을까? 진화 과정에서 인류의 뇌는 커졌다가 다시 작아진다. 두뇌의 활용과 에너지 소비의 절박함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 선택은 쉽지 않다. 두뇌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면 결국 멸종을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에너지를 아끼려는 절박한 심리도 이해가 가능 하다. 에너지의 궁핍은 공포로 작용하며, 이는 노동 기피 심리와도 긴밀하게 연결된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패권의 대이동  (2) 2021.11.17
빨강의 역사  (0) 2021.10.22
철학과 종교의 세계사  (0) 2021.08.12
처음 읽는 돈의 세계사  (0) 2021.08.12
문명의 역습  (0) 2021.06.20
Posted by dalai
,

- 자라투스트라는 (천지창조부터 최후의 심판까지의) 시간을 직선적으로 파악했고 극단적인 선악 이원론을 펼쳤다. 종교의 세계에서 선악 이원론 은 이 세상을 설명할 때에 강한 설득력을 발휘할 수 있다. 가령 이 세상을 정의의 신 한 명이 창조했다면 전 세계에 정의가 충만할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악한 군주도 살인귀도 존재하지 않는다. 청렴하고 바르게 살면 누구나 행복해질 수 있다. 그런데 왜 인생에는 고통이 존재하고 삶이 이렇게나 고달플까. 만약 신이 있다면 고통스러운 삶에서 우리를 구원해야 하지 않을까. 이러한 세계관에서는 인간을 고된 삶으로부터 구원하지 않는 신을 의심하고 고뇌할 수밖에 없다.
- 작가인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沈默)은 가톨릭 신자를 박해하던 일본에 숨어든 포르투갈인 사제가 일본인 신자에게 가해지는 고문을 보고 마음이 아파서 배교자의 길로 들어선다는 줄거리를 다룬다. 왜 신은 우리 를 구원해주지 않을까. 일신교를 믿는 인간은 현세의 고통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침묵』은 이 문제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반대로, 일신교가 지 닌 모순(전능한 신이 왜 현세의 고통을 해결해주지 못할까)이 인간의 사고를 깊게 만든다는 측면도 부정할 수 없다. 그 근거로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후세 철학자들이 이 문제에 진지하게 매달렸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선악이원론의 교리는 현세의 고통과 내세와의 관계를 시간축이라는 개념을 활용하여 이해하기 쉽게 설명할 수 있다.
- 조로아스터교는 최고신으로서 아후라 마즈다가 존재하여 얼핏 일신교처럼 보이지만, 선한 신과 악한 신 그리고 다채로운 신들이 존재한다는 점 에서 다신교적인 측면도 있다.페르시아에서 탄생하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이 종교로부터 가장 많은 교리를 흡수한 종교는 고대 셈족의 일신교이다. 노아의 세 아들(셈, 함, 야벳) 중에서 셈이 선조라고 전해지는 사람들을 셈족이라고 부른다. 셈족은 서남 아시아(메소포타미아, 팔레스타인, 아라비아) 역사에 등장하는 사람들로, 그들에게서 탄생한 종교의 형태가 일신교이다. 구체적으로는 유 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를 가리킨다.
- 셈족의 일부가 믿던 유일신 야훼(YHWH)가 인류를 구원하는 예언자로 선택한 인물이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인물로,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 세계에서 “신앙의 아버지”로 존경받는다. 그래서 셈족의 일신교는 “아브라함의 종교”라고도 부른다. 셈족의 일신교는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도, 천국과 지옥도, 세례 의식도 모두 조로아스터교로부터 배웠다. 현대 사회에 영향을 미친 종교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셈족의 일신교, 인도 종교 그리고 동아시아 종교이다. 
- 19세기 후반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ustra)라는 책을 썼다. 니체 철학의 중대한 명제인 “영원 회귀, 사상을 이야기한 책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자라투스트라를 독일식으 로 읽은 이름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말하는 내용은 자라투스트라와는 거의 관계가 없다. 니체는 선악 이원론의 원조 격인 고명한 자라투스트라의 이름을 빌려 자 신의 사상을 펼쳤다. 물론 니체가 조로아스터교의 경전인 아베스타를 공부하고 영감에 가까운 무엇인가를 느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니체가 주장하는 “영원 회귀 철학은 자라투스트라보다는 오히려 인도 브라만교의 경전 리그베다(Rigveda)』(신에게 바치는 찬가) 등을 참고했을 공산이 크다. 리그베다는 인도 선주민의 윤회전생 사상을 포함 하기 때문이다. 윤회전생 사상은 시간이 순환한다는 발상으로, 시간도 사람의 생명도 영원히 돌고 돈다고 믿는 신앙이다. 그야말로 “영원 회귀”에 가까운 개념이다. 따라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조로아스터교는 무관하다고 생각해도 된다.
- 서양 철학을 공부하는 데에는 소크라테스 이전과 소크라테스 이후로 나누는 사고방식이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 있다. F. M. 콘퍼드의 『소크라테스 이전과 이후(Before and After Socrates)」가 대표적인 문헌이다. 다만, 소크라테스 이전과 이후라는 분류법은 단순한 시대 전후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데모크리토스는 소크라테스보다 젊었고, 우주는 4원소(불, 공기, 물, 흙)로 구성된다고 주장한 엠페도클레스 는 소크라테스보다 20세가량 나이가 많았다. 그렇다면 왜 굳이 소크라테스 이전과 이후로 분류하려고 했을까? 나중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철학 주제의 차이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고 당시 아테네가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 차지했던 특별한 지위와도 연관이 있다. 아테네는 스파르타와 대항하며 그리스의 패권을 장악했다. 쉽게 말해서 아테네는 미국의 뉴욕 같은 대도시로 당시 그리스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그런데 이오니아의 자연 철학자들은 본래 지방 사람들이었다. 이오니아는 오늘날 아나톨리아 반도(터키)의 지명이었다. 반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아테네 출신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 태생이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시대부터 철학은 아테네의 전유물이 되었고 본격 적으로 발전했다. 아테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쉽게 말해서 서울 사람들이 서울이 아닌 지방을 모두 시골로 취급하는 발상이 이미 그 시대에도 존재했던 셈이다. 아테네라는 선진 문화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탈레스 이후로 만물의 근원을 찾으려는 철학 자들을 아테네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하대하고 차별했다는 비판이 등장했다. 현대 철학계에서는 “소크라테스 이전과 이후”라는 구분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 하는 학자들이 학계에서 다수를 차지하 게 되면서 “단순하게 초기 철학자들이라 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렸다.
- 소크라테스에서 시작한 철학의 큰 특징은 도대체 무엇일까? 세계는 어떤 구조로 생겼을까 하며 외부 세계의 탐구에 열을 올렸던 이오니아 학파와 달리, 소크라테스는 인간의 내면에 초 점을 맞추고 사색의 두레박을 내려 생각을 길어 올리려고 했다. 세계는 어떻게 생겨났을까를 묻는 사람에게 소크라테스는 거꾸로 물 었다. “세계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생각하는 그대는 자신에 관해서 무엇 을 아는가. 인간은 무엇을 아는가.” 소크라테스는 이 질문을 사람들에게 던졌고 대화를 통해서 깊이 사유하며 사람들이 자신의 무지를 자각하게 하려고 노력했다. 
- 영국의 철학자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1861-1947)는 플라톤의 업적에 관해서 유명한 말을 남겼다. “서양의 모든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각주 에 불과하다.” 이 말은 수많은 철학적 주제들이 플라톤이 남긴 문헌 속에 거의 모두 포함되어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서양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사람의 눈앞에는 플라톤이 남긴 산더미 같은 문헌이 가장 먼저 들어온다. 달리 말하면, 플라톤의 저작이 남아 있는 덕분에 우리가 아는 서양 철학 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철학사에 이름을 남긴 플라톤은 행운을 타 고났다. 어느 시대에 살았든 대학자의 업적이 남아서 전해지지 않는다면 후세에 영향을 미치기 어렵다. 예컨대 중국에는 공자보다 약간 늦게 등장 한 목자라는 대사상가가 있다. 그는 공자에 대해서 비판적인 논리를 전개 하여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그의 교단은 묵자의 사망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뿔뿔이 흩어졌고, 그의 저서도 상당수 사라졌다. 나는 화이트헤드의 말을 생각할 때마다 묵자의 불운을 떠올리고는 한다.
- 학원을 떠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플라톤은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나를 걷어차 고 떠났다. 마치 망아지가 낳아준 어미에게 발길질하듯.”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을 스승으로 모셨으나, 플라톤의 철학을 모 조리 긍정하지는 않았다고 추정된다. 이 사제 간의 철학의 차이를 『철학 키워드 사전(哲?手一口一事典)』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은 해설이 실 려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린 세계상은 플라톤과 달리 동적이며 아주 넓은 의미에서 생물주의적이다. 플라톤의 세계상은 현실의 개별 사물로 이루어진 세계로서, 영원히 불변하는 이데아 세계의 모방이기 때문에 원리적으로는 그의 세계상에 변화가 없다.” 즉, 플라톤의 이데아는 개념상의 직감이다. 논리로 “이데아가 존재한다”고 논증하지 않는다. “세계에는 이데아가 있다”고 전제하고 논리를 펼쳐나간다. 역시 동굴의 비유”는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왜 이데아가 존재 하는지는 논증하지 않는다. 신의 세계에 이데아가 존재한다는 전제로부 터 논리가 시작된다. 플라톤의 철학은 관념론이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 는 실증적이며 경험론을 중시한다.
다양한 경험 속에서 진실을 도출하기 위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경험으 로 얻은 결과를 분석하고 이론화하는 과정을 중시했다. 그래서 그는 논리 학을 체계화했다. 가령, 삼단논법이 있다. “A는 B이고, B는 C이다. 고로 C는 A이다.” 대표적인 논리 전개 방법이다. 어쩌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인 플라톤에게 차마 보여주지 못했던 자 신의 모습을 두고 고뇌했을 수도 있다. 이데아론은 어딘가 모호하다.... 그러나 감히 스승에게 반기를 들 수는 없다. 그래서 자신의 방법론으로 논리학을 다듬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라파엘로의 작품 “아테네 학당”을 살펴보자. 이 그림 속에서 얼굴을 마주 보고 선 두 사람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이다. 플라톤은 하늘을 가리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을 가리키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땅에 발을 붙이고 있어야 합니다. 플라톤, “아니, 하늘을 봐야지. 천상계에 이 데아가 있으니까. 이 세상은 이데아 세계를 모방한 허상일 뿐이다.”
- 전국칠웅 군주는 온난한 기후와 강력한 철제 농기구 및 무기로 국력을 증대했고, 광활한 중국의 황허 강 유역을 중심으로 전쟁을 되풀이했다. 철을 이용하려면 대량의 에너지를 동원하는 제철 과정을 거쳐야 한다. 춘추 시대부터 전국 시대로 이어지는 전란의 시기에 황허 강 유역에 펼쳐 진 드넓은 삼림 지대가 벌채되었다. 이 지역은 강우량이 그다지 많지 않다. 벌채된 삼림은 원래 모습을 되찾지 못하고 황야가 되었고, 초원도 드문 황토 지대로 변했다. 그러자 상류에 폭우가 쏟아질 때마다 하천이 범람했고, 강풍이 불면 황사가 날리는 지역이 확대되었다. 오늘날 한반도와 일본까지 날아드는 황사는 이 시대 이후로 발생한 것이다. 더 옛날의 황허 강은 지금처럼 누렇고 탁하지 않았다. 당시 중국에서는 고도성장에 동반된 자연 파괴가 진행되었다. 묵자는 이러한 고도성장을 내버려두었을 때에 발생하는 폐해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자세를 취한 철학자였다. 조국의 자연을 파괴하면서까지 나라를 강하게 만들고 조상 숭배를 위해서 아침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일하 는 세상을 비판했다. 서로 배려하고 공격하지 말고 평화롭게 살아라. 그 는 오직 평화를 지키기 위한 전쟁만이 허용된다고 믿었다. 묵자는 인간이 자연스럽게 바라는 행복과 심신의 건강 척도를 부지런히 고찰한 사상가 였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행복 지수를 발상한, 시대를 앞서가는 사상가였다.
- 에피쿠로스의 “아타락시아와 스토아 학파의 “아파테이아” 의 차이 
에피쿠로스는 파토스(격정, 정열, 정념)에서 멀어짐으로써 정신적 쾌락을 추구하는 생활을 행복이라고 규정했다. 반면 스토아 학파는 행복이란 덕을 추구한 결과로 얻을 수 있으며, 파토스에 동요되지 않는 마음(부동심)에 이르는 길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그 상태를 아파테이아(apatheia)라고 불렀다. 다시 말해서 스토아 학파는 마음의 평정을 추구하는 것만으로는 마음의 평정을 얻을 수 없고, 인생의 덕을 실천해야 이를 수 있는 경지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덕이란 무엇일까?
스토아 학파는 4개의 성질을 가장 큰 덕으로 규정했다. 지혜, 용기, 정 의, 절제이다. 덕을 실천한다는 것은 곧 악덕과 싸운다는 말이다. 악덕이 란 무지, 두려움, 부정, 방종이다. 가장 큰 악덕은 인간이 지켜야 하는 4개 의 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무지로 인해서 알지 못하는 상태라고 보았다. 덕을 배우기 위해서 지식을 갈고닦고 앞을 실천하며 살아야 비로소 마 음의 평정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이 아파테이아이다. 에피쿠로스의 아 타락시아가 “숨어서 살아라”라는 말로 대표된다면, 아파테이아는 그와 정반대 노선에 자리한 사상임을 알 수 있다.
- 로마가 제정 시대로 들어서자 에피쿠로스 학파의 철학과 스토아 학파 의 철학은 전성기를 맞이했는데, 이윽고 스토아 학파의 철학은 로마를 이 끄는 지도자들의 철학으로 자리매김했다. 로마 공화정 말기, 정치인 키케로(기원전 106-기원전 43)는 그리스 철학 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소개했다. 그는 그중에서도 스토아 학파의 철학을 정리했고, 에피쿠로스 학파의 철학을 강력하게 비난했다. 로마의 지체 높은 가문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당당히 살며, 이성으로 감정을 억누르고 덕을 쌓는 삶의 방식에 적극적으로 매진했다. 스토아 학파의 철학이 민중의 위에 군림하며 사는 지배층에게 적합한 사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전형적인 인물이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 렐리우스(재위 기원후 161-180)이다.
- 유가, 법가, 도가는 중국 사회에 안정을 가져왔다
유가의 사상은 예와 인과 덕을 근간으로 삼는다. 군주는 민중을 사랑하고 임금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에 충실해야 한다는 가르침이었다. 요컨대 지배자의 철학이 된 사상이다. 유가는 서한의 무제(재위 기원전 141-기원전 87) 시대에 국교 수준의 대우를 받았다. 그런 의미에서는 스토아 학파의 철학과 공통분모가 있다. 제왕이 되는 자라면 사적인 즐거움을 다소 억누르고서라도 국가의 안정과 민중의 행복을 생각하라는 사상이었다. 한편, 노자와 장자의 사상은 노력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 인간은 만물의 절대성을 움직일 수 없다. 그러니 자연에 맡기고 유유자적 살며 마음의 즐거움을 중시하라고 주장했다. 에피쿠로스의 사고방식과 닮은 구석이 있다. 법가 사상도 있었다. 유교를 정치의 이론으로 삼았다면, 실제 정치는 법률에 따라 운영되었다. 중국에서는 상앙이 체계를 세우고 한비자가 완성한 법가 사상을 기축 으로 삼아 진나라의 시황제가 중앙 집권 국가(법에 따른 행정이 이루어지는 법치국가)를 수립한 이후로 2,000년 넘게 밑그림에 변화가 없었다. 정치의 겉모습이 유교에서 공산주의로 간판을 바꿔 달았을 뿐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반 민중은 대외적인 정치 이념인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서 조상을 모 시고 부모를 공경하고 가족을 중시하며 세상의 순리에 맞추어 살아간다. 무법자는 법이 벌한다. 그리고 법가와 유가가 뒤죽박죽 섞여 제 모습을 찾을 수 없는 세태에 염증을 느낀 지식 계급은 노장 사상에 몰두한다. 이처럼 제자백가의 사상은 서로 공존할 수 있었고, 중국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각자 구미가 당기는 사상을 계급별로 적절하게 취할 수 있도록 일종의 사상적인 뷔페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처럼 여러 사상들이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며 공존할 수 있었던 중국의 환경은 사회 안정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러나 어느 시대에나 중국을 체계적으로 다잡은 사상은 법가라는 점이 중요하다. 즉, 일반 민중을 위한 패로 무대 앞에는 유가가, 무대 뒤에는 법가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식인을 위해서 도가가 마련되어 있었다.
- 기독교가 미트라교와 이시스교에서 아이디어를 빌려와 펼친 포교전술 은 멋지게 성공했다. 이들 종교를 믿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경애하던 요소가 대부분 포함되어 있는 기독교를 친숙하게 느꼈다. 덕분에 기독교 신자 는 꾸준히 증가했다.  2-3세기 무렵부터 유라시아 대륙에 기후 변화가 시작되며 한랭화 시대가 도래했다. 동쪽의 몽골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대초원 지대의 여러 부 족(유목민)들은 추위를 피해서 대거 남하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여러 부족 들이 로마 제국의 국경선을 넘나들며 치안이 악화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 으로 이상기후와 한랭화로 농작물 수확량이 감소했고, 생활이 불안정해 진 사람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사람이 늘어났다. 이러한 사회적 불안 속에서 예수의 말씀을 믿으면 최후의 심판에서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기독교의 가르침이 민중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이러한 사회 환경의 변화가 기독교세력의 확장에 큰 힘을 보탰다고 볼 수 있다.
- 「고백록」에서 언급된 자유의지 
아구스티누스는 마니교에 입교하는 등 이런거런 사상 편적을 거쳐 기독교 신자가 된 북아프리카 태생의 인물이다. 그는 수많은 거각들을 겼는데, 자서전 격인 고백록(Confessiones)은 지금도 널리 읽힌다. 그는 이 책에서 젊은 시절에 한 여성과 긴 동거 생활을 했고 사내아이를 두었다고 고백했다.
「고백록」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논했다는 점에서 철학적으로도 주목받는다. 이 주제는 서양 철학에서 중요한 화두이다. 그는 자유의지를 다음과 같이 규정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탄생 직후에 에덴 동산에서 신의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과라는 금단의 과실을 따 먹은 원죄를 범했다. 그래서 인간은 그 원죄를 갚지 않으면 자유의지 를 되찾을 수 없다. 속죄하기 위해서는 신의 은총을 얻어야 한다. 기독교 를 믿고 신의 은총을 얻어야 비로소 인간은 자유의지를 얻을 수 있다.”
이러한 논리로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로 귀의하여 믿음을 얻음으로 써 인생에서 짊어지는 고뇌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역설했다. 이 사 고방식은 이윽고 르네상스 시대부터 종교 개혁 시대에 걸쳐 철학과 종교 에서 지치지 않는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주요 논제가 되었다.
- 이슬람교의 큰 특징으로는 기독교나 불교와는 달리 종교인(사제나 승려) 이 없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쉽게 말해서 이슬람교에는 교회나 사찰을 경영하고 포교와 관혼상제 등을 주관하는 성직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이슬람교에서는 채소가게 주인이 성직을 겸업하다가 필요할 때에 전통 의상을 입고 쿠란을 읽으며 의식을 집전하는 사제 역할을 한다. 그 래서 이슬람교에서는 성직자의 생활을 위해서 헌금할 필요가 없다. 모스크라고 부르는 사원과 묘지 등의 시설물은 자치단체나 비영리단체와 유사한 조직이 관리한다. 물론 이슬람교를 공부하는 대학도 존재한다. 그리고 신학자도 존재한다. 그러나 직업 종교인은 없다. 이슬람교 신앙의 중심은 “육신오행(六信五行)”이라는 율법이다. 여섯 가지를 믿고 다섯 가지를 실천하라는 가르침이다. 육신, 즉 여섯 가지 믿음은 신, 천사, 경전, 예언자, 내세, 정명(定命)이다. 신은 야훼로, 이슬람의 알라이다. 천사는 무함마드에게 신의 예언을 전했다는 지브릴(가브리엘)이다. 경전은 신의 예언을 기록한 『쿠란이다. 예언자는 무함마드를 가리킨 다. 그리고 내세란 천국과 지옥의 존재에 관한 믿음이다. 정명은 칼뱅의 예정설과 유사하다. 사람의 구원 여부는 신이 미리 결정한다는 사고방식이다. 정명을 믿는다는 것은 그와 같은 신의 결정을 믿고 산다는 뜻이다. 신자는 이 여섯 가지를 믿어야 할 의무가 있다. 입문 의식은 무척 간단하 다. 알라가 유일한 신이며 무함마드가 최후의 예언자이다”라고 신앙을 고백하면 누구나 신자가 될 수 있다. 이렇게 이슬람교 신자가 되면 다섯 가지 행동을 실천해야 할 의무가 생긴다. 신앙고백, 예배, 희사, 단식, 순례라는 다섯 가지 행동을 삶의 의무로 준수해야 한다. 신자의 의무 첫째는 신앙고백이고 둘째는 예배이다. 하루에 5번 메카의 카바 신전이 있는 방향을 향해서 예배를 드린다. 셋째는 희사이다. 돈이 있는 신자는 가난한 사람에게 베풀라는 가르침이다. 넷째 는 단식(라마단)이다. 이슬람력 9월이 단식 기간이다. 그리고 다섯째가 순 례이다. 가능하면 평생에 한 번은 무함마드가 태어난 성지 메카의 카바 신 전으로 순례를 다녀오라는 가르침이다. 하루에 5번이나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의무는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인간 뇌의 집중력은 2시간 남짓밖에 유지되지 않는다. 뇌과학적 관점에서 5번의 예배를 일종의 기분전환으로 본다면 의외로 합리적인 가르침일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육신오행은 누구나 지킬 수 있는 수준이라고 여겨진다. 다만 질병 등의 이유로 단식을 버티기 힘든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단식은 건강 측면에서는 도움이 되는 수행이다. 직업 사제나 승려가 존재하지 않는 이슬람교에서는 신자들이 지키기 쉽고 실천하기 쉬운 육신오행을 각자 주체적으로 준수함으로써, 자립할 수 있는 강인함이 생겨나는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 무함마드는 남존여비가 일반적이던 시대에 여성의 재산권을 인정했다. 동등하지는 않았고 남성의 절반 수준이었으나 당시 유럽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발상이었다. 『쿠란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 남녀평등에 가까운 발상이 많다. 여성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사상은 결코 아니다. 여 성이 머리카락을 가리는 히잡을 착용하는 것은 차별이라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히잡을 단순하게 관습의 발전이라고 보면 넥타이도 별반 다르지 않다. 사막이 많고 건조한 중동 및 근동에서는 히잡이 뜨거운 열기로부터 머리를 보호하는 합리적인 복장이었다. 남성도 터번처럼 생긴 케피예라는 두건을 머리에 쓴다.
- 2018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최초로 여성에게 자동차 운전이 허용되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또한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여성의 사회 진출 이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슬람교 중에 서도 와하브파라는,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사고방식을 고수하고 있는 특수한 국가임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인도 등 무슬림 인구가 많은 나라들에서는 여성이 활발하게 사회에 진출하여 일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이 네 나라는 모두 여성 대통령과 총리를 배출했다.
모세의 가르침도, 예수의 가르침도, 붓다의 가르침도 그들이 살던 시대에 사람들에게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며 받아들여졌다. 그 시대의 가르침에 현대의 도덕적 잣대를 적용하며 비판하는 태도는 무책임하다. 그들이 생 각한 진리에 항구적인 인류애로 이어지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세계 종교가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마땅히 인식해야 한다. 이슬람교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이슬람교는 여성 경시와 지하드에 관해서 편견이 생기기 쉽다.
- 12세기 르네상스
이슬람 세계에서 그리스 로마 고전이 유럽으로 귀향한 시대를 12세기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이 용어는 20세기의 역사학자 찰스 호머 해스킨스 (1870-1937)가 붙인 이름이다. 이 시대에는 그리스 로마의 고전 부활과 함께 학문과 신학이 크게 발전했는데, 이슬람(스페인)의 영향을 받은 서유럽 에서는 기사도 문화가 발전하며 기사도 문학이 탄생했다. 아서 왕 이야기(Arthurian Legend)』나 『롤랑의 노래(La Chanson de Roland)』 등 우리도 잘 아는 이야기이다. 또 하늘을 찌를 듯이 아찔하게 솟은 고딕 양식 건축이 발달하여, 파리 노트르담 성당으로 대표되는 대성당들이 줄줄이 지어졌다. 성모 마리아를 숭배하는 신앙도 이 시대에 발전했다. 이 시대는 지구 온난화가 진행되어 농사가 활발해졌고, 삼포식 농법처 럼 새로운 농사기술이 등장하여 경작지를 개발했으며, 시토회처럼 적극 적으로 농지 개간 운동을 추진하는 종교 집단도 등장하여 생산력이 향상 되었다. 생산력 향상은 곧 문화 활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14세기에 마침내 찾아오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큰 물결로 이어지는 첫 번째 물결이 바로 12세기 르네상스였다.
- 르네상스(renaissance)는 프랑스어로 “재생”이라는 의미이다. 무엇이 르네 상스를 일으킨 원동력일까? 이슬람 세계를 거쳐 대량으로 유럽에 들어온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이 시발점이다.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면 책이라고 는 성서와 기독교 관련 서적밖에 없던 유럽에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과 문 학, 그리고 자유로운 학예(liberal arts)라고 불린 문법, 논리학, 수사학, 수학, 기하학, 천문, 음악 등의 서적이 물밀듯이 들어왔다.  1347년, 남이탈리아에 상륙한 페스트도 르네상스를 촉발한 큰 원동력이 되었다. 흑사병이라고 불린 이 역병은 몇 년 사이에 북유럽과 동유럽까지 번져나갔고, 이로 인해서 유럽 전체 인구의 약 3분의 1이 사망했다. 맹위를 떨친 페스트에 화들짝 놀란 사람들은 삶과 죽음에 관해서 어떤 관 점을 가지게 되었을까? 우선,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라는 말로 대표되는 사고방식이 등장했다. 언제든 죽을 수 있는 덧없는 인생이기 때문에 경건 하게 살고자 하는 삶의 방식이다. 요컨대, 인생을 신에게 맡기는 사고방식이다. 이와 상반되는 새로운 삶의 방식도 등장했다. 언제 페스트에 희생될지 모른다. 게다가 페스트에 걸려도 신이 도와주지 않는다. 그러니 차라리 한 세상 즐겁게 살다가 떠나겠다는 사고방식이다. 신의 손길에 자신의 인생 을 맡기지 않고, 신에게서 해방된 삶을 추구하는 인생관이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직역하면 “현재를 잡아라” 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 사는 순 간을 즐기라는 말도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데카메론(Decameron)』은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집필된 책이다. 저자는 단테를 이해 하고 지지했던 이탈리아의 조반니 보카치오(1313-1375)였다. 이 책에는 신 에 대한 두려움이나 신을 경애하는 태도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신에 의지하지 말라, 신의 손바닥 위에서만 인생을 살지 말고 벗어나라. 페스트라는 참혹한 역병의 유행은 그리스 로마 고전을 부활시키는 동시에 인간이 신과 인생의 관계를 되돌아보게 하고 르네상스의 물결을 불러오는 마중물 역할을 했다.
- 토마스 아퀴나스 시대에 스콜라 철학은 신앙 우위의 세계관을 확립했다. 스콜라 철학의 논리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활용하여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이렇게 신을 정점으로 하는 세계의 질서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 질서는 르네상스와 종교 개혁의 큰 파도가 덮치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매사를 합리적으로 바라보고 생각하는 지성의 중요성을 인간 이 자각했기 때문이다. 루터와 칼뱅이 제기한 문제도 합리적인 사고를 바 탕으로 성립되었다.
신앙 우위의 세계에서 합리성과 자연과학의 세계로 넘어가는 시대가 발을 내디디며 근대의 막이 올랐다. 그 선두에 선 사상가가 영국의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이었다. 그는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와 요하네스 케플러(1571-1630)와 동시대 사람이다. 갈릴레오와 케플러는 “지동설을 뒷받침한 과학자들이다. 지구가 움직인다는 주장 자체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세계관을 뿌리부터 뒤흔드는 것이었다. 인간이 신이 만든 세계 질서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으며 유럽에서는 철학과 자연과학의 세계에 합리성의 성과가 실현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여러 가지의 의미에서 “지구가 움직였던 시대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 방법서설은 인간이 자신의 의식을 높이는 인식 방법도 다루었다. 이 인식의 방법은 무척 이해하기 쉬워서 현재에도 충분히 통용된다. 베이컨 이 생각한 인간의 네 가지 우상도 우리의 사고 방법에 경종을 울렸으나, 데카르트의 방법론이 좀더 명쾌하다.
* 명증 : 그것이 진리임을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증거를 먼저 찾아라.
* 분석 : 수집한 증거를 세부까지 꼼꼼하게 분석한다. 세부 사항까지 샅샅이 검토하라.
* 종합 : 세부까지 검토했다고 끝내지 않는다. 종합해서 전체적으로 검증하라.
* 음미 : 마지막으로 음미하라. 빠진 곳은 없는가. 못 보고 놓치거나 잘못 본 곳은 없는가.
-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
미네르바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지혜와 예술의 여신이다(그리스 신화에서 의 아테네 여신), 사람들은 그녀가 데리고 다니는 부엉이를 지혜의 상징으 로 여겼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저물어야 그 날개를 편다” 라는 수수께끼 같은 문구는 헤겔의 저서 『법철학(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의 서문에 등장한다.
“부엉이가 뉘엿뉘엿 해가 지는 해거름에 활동을 시작하듯이, 지혜의 화 신인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하나의 사건과 역사가 혼란해져서 암흑에 이 르렀을 때에 인간에게 진실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날아오른다.”
이 문구는 이렇게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헤겔이 말한 황혼은 무엇일 까? 프랑스 혁명이 초래한 유럽의 시대적인 혼란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주 장도 있다. “해가 지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밤이 찾아오기 전의 어슴푸레한 상태인 유럽에 헤겔의 변증법 이론이 미네르바의 부엉이 역할을 한다”고 암시하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헤겔은 프랑스 혁명 전후로 일어난 변혁의 이유를 열심히 설명하려고 애썼다. 그 과정에서 진보적 역사관에 이르지 않았을까. 대립하던 가치가 하나로 합쳐지며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설명하면, 다소 투박하더 라도 크게 틀리지 않은 생각이라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헤겔의 발상 은 말 그대로 '황혼에 날아오르는 부엉이”로서의 역할을 혼란한 시대에 다했다고 볼 수 있다.
- "초인과 “힘에 대한 의지, 니체의 강한 실존주의 
시간도, 역사도 진보하지 않는다. 운명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인생 길을 묵묵히 성실하게 걸어가는 사람. 그 강인한 인간을 니체는 “초인(超人)”이 라고 불렀다. 니체는 인간이 강인하게 살아갈 때에 무엇을 가장 중요한 이념으로 삼아야 하는지를 생각하여 이를 힘에 대한 의지라고 결론 내렸다. 강하고 멋지게 살고 싶다는 태도이다. 키르케고르는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도 어차피 허무하며, 개인은 단독자라고 생각했고 최후에는 신에게 의지했다. 신을 믿으며 살면 마음은 평안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단언했다. 그리고 시간도 역사도 진보하지 않는다면 의지할 곳은 오직 자신밖에 없다고 보았다. 신도 없고 진보도 없다는 운명을 받아들이고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 초인이며, 그 힘에 대한 의지로 세상이 움직인다고 니체는 생각했다. 키르케고르의 종교적 실존주의와 비교하면, 니체는 더욱 강하게 인생을 긍정하는 실존주의를 확립했다고 볼 수 있다.
니체의 “초인 사상은 헬레니즘 시대의 스토아 학파의 철학과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페니키아인 제논에게서 시작된 스토아 학파는 요동치 는 감정(파토스)을 이성(로고스)으로 제어하고 마음의 평안(아파테이아)을 얻으라고 가르쳤다. 운명을 냉정하게 받아들이고 덕을 추구하며 사는 인 생이 이상적이라는 철학 사조이다. 로마 제국의 황제와 귀족들은 스토아 학파의 가르침에 깊이 공감했다.  니체와 스토아 학파의 공통점을 생각해보면, 인간의 생각이 거기서 거기이며, 유행이 돌고 돌듯 인간의 사고 역시 반복된다는 생각이 든다. 전율을 느낄 정도로 참신한 사상은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인간은 우리의 생각보다 현명하지 않다.
- 니체는 기독교가 인간의 르상티망을 교묘하게 이용했다고 비판했다.
르상티망(ressentiment)이라는 프랑스어가 있다. 사전에는 “원한, 증오, 질투 따위의 감정이 되풀이되어 마음속에 쌓인 상태”라는 설명이 실려 있다. 주로 약자가 강자에게 품는 감정으로, 민중이 군주 또는 제후에게 가지는 원한이나 질투를 말한다. 몇 명의 철학자들이 이 단어를 사용했는데, 주로 키르케고르가 철학상의 개념으로 사용했고, 니체가 받아 대담하게 이용했다.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는데, 뼈 빠지게 일해도 가난한 살림살이가 도통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고 한탄하는 사람에게 기독교는 말했 다. “가난한 사람이 천국에 간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 그러니 부자에게 신경 쓰지 말라. 그들은 지옥에 간다고 생각하라. 천국으로 가는 길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활짝 열려 있다.”
이는 니체가 말하는 “노예 도덕과 같다. 기독교는 지배층과 부유층의 압제 정치에 허덕이는 빈곤층이 품고 있는 르상티망을 교묘하게 이용하 여, 천국을 미끼로 내보이는 형태로 가난한 사람들을 포섭해서 신자로 만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원래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강인하게 살아가겠다는 마음, 즉 “힘에 대한 의지”를 포기했다. 그들은 운명을 감수하고 신에게 몸을 맡기는 수동적인 허무주의에 빠져들었다. 니체는 그렇게 기독교를 비판했다. 비판이라기보다는 정면충돌이었다. 그러고 보면 마르크스도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는 말을 남겼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빨강의 역사  (0) 2021.10.22
세계사 속 부의 대반전  (0) 2021.10.07
처음 읽는 돈의 세계사  (0) 2021.08.12
문명의 역습  (0) 2021.06.20
세계사를 결정짓는 7가지 힘  (0) 2021.05.25
Posted by dalai
,

- 로마의 여신 주노는 바람기 많은 남편인 주피터(그리스 신화에서는 제우스) 때문에 속앓이했고, 남편이 만든 수많은 자식을 구박했다. 그래 서 모네타는 경고하는 여자'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머니' 라는 말은 원래 교환의 매개가 되는 돈을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낭비하 고 마는 인간에게 경고하기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정부가 주도하는 재정·금융 정책의 유효성을 주장한 케인스 학 파를 비판하고 시장 메커니즘에 따른 금융 신뢰를 전제로 삼아 화 폐를 공급하는 정책을 주장했던 프리드먼 등의 주장을 '통화주의 (monetarism)'라 부른다. 프리드먼 학파의 주장에 따라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 영국의 대처 총리 등이 펼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이 100년 에 한 번 발생할 만한 금융 위기를 불러왔다는 현실을 보면 모네타 의 경고를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 '신대륙'에서 들어온 대량의 은 때문에 은 가격은 폭락했고, 16세기부터 17세기 초반에 걸쳐 유럽의 물가는 3배에서 4배로 가파르게 치솟았다. 쉽게 말해 시중에 돈이 남아돌았다. 이러한 현상을 훗날 '가격혁명'이라 부르게 되었다.
막대한 은 유통으로 시중에 '돈이 남아도는 현상'이 발생하자 이자를 얻겠다는 목적으로 '돈'을 운용하는 사업이 활발해졌다. 중세 에는 사악한 행위로 여겨지던 이자 획득이 적극적으로 용인되었다. 당시의 공업 생산 수준은 낮았고 투자와 투기의 대상은 상업과 식민 지 개발로 한정되었다. 신대륙에서 은이 대량으로 유입된 세비야를 중심으로 안달루시아 지방에는 인플레이션이 극심해졌고 1500년부터 1600년 사이에 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 무려 5배나 상승했다.
스페인 주조국에서 찍어낸 은화와 '신대륙'에서 밀수된 은은 16 세기에는 프랑스로, 16세기 말부터 17세기에 걸쳐서는 스페인군의 군자금으로 네덜란드로 흘러갔다. 스페인이 '신대륙에서 악착같이 그러모은 '눈먼 돈'의 약 70%가 종교전쟁으로 낭비된 것이다. 엄청 난 양의 은이 유럽 각국으로 흘러갔다.
영국, 프랑스 등지에서는 물가 상승에 임금 상승이 따라가지 못했다. 영국에서는 1673년부터 1682년까지 10년 사이에 물가가 15세 기 후반과 비교해 약 3.5배 상승했고, 임금 상승은 2배에 머물렀다. 프랑스도 엇비슷한 상황이었다.
극심한 인플레이션은 저축할 여유가 있었던 유산 계급을 돈벌이 로 내몰았다. '돈'의 팽창과 유럽 세계의 확대가 이자 획득을 목표로 '돈'이 나아갈 새로운 길을 닦아준 것이다.
- 존 로는 루이 15세의 섭정인 오를레앙 공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1716년에 형제와 함께 지폐 발행권이 있는 자본금 600만 리브르의 뱅크 제너럴(Banque Generale)을 설립하고, 프랑스에서 최초의 지폐발행에 착수했다. 뱅크 제너럴은 2년 후에는 뱅크 로열(Bank Royale)로 국영화된다. 존 로의 아이디어를 프랑스 정부에서 채택한 셈이다.
존 로는 지폐를 대량으로 발행하면 경제 규모를 확대하고 경제를 활성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우선 국민이 지폐에 익숙해지게 만드 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는 지폐로 세금을 내는 제도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민중에게 지폐의 가치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또 지폐를 활용해 국유재산의 자산 가치를 상승시키려 시도했다. 존 로는 루이지애나의 식민지 개발을 담당하는 미시시피 회사 (Mississippi Company)를 설립했다. 미시시피 회사는 존 로의 은행에서 지폐를 빌려 귀족이 보유한 국채를 사들였고, 귀족에게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 권리를 팔았다. 쉽게 말해 귀족은 가격이 내려간 국채를 내놓고 유망한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을 손에 넣게 되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거래인 셈이다.
존 로의 노림수는 제대로 효과를 발휘했다.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 은 단기간에 폭등했고, 1,000리브르의 주가가 1만 리브르 넘게 올랐 다. 주주는 거액을 벌어들였다. 백만장자(Millionaire)라는 단어가 이때 생겨났다. 1719년에 미시시피 회사는 인도 회사(Compagnie des Indes)로 이름을 바꾸었고, 희망봉 너머의 인도, 중국 무역의 배타적 독점권을 획득하고 9년 동안 '돈'을 찍어내는 독점권도 따냈다. 또 담배 소작 계약, 직접세 징수, 간접세 징수권의 대차 등의 광범위한 권한을 차례로 얻어냈다.
- 프랑스 정부에서 경제적 수완을 인정받은 존 로는 이윽고 재무장관으로 승진했다. 수배자 신분으로 대륙에 건너온 그로선 엄청난 출 세였다. 그러나 주가는 주식에 대한 수요와 공급 관계로 상승했을 뿐 이다. 회사의 식민지 사업은 적자 행진을 계속했고 확실한 수입원은 국채 이자밖에 없었다. 경영 실적을 내지 못해 수익은 미미했다.
1720년 왕립은행 관리를 인도 회사에 위탁한다는 포고가 나오자 은행권(지폐)에 대한 신뢰가 흔들렸고, 은행권을 주화로 바꾸려는 사 람들이 은행으로 몰려들며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대규모 예금 인출 사태가 발생했다. 불안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뒤따랐고 폭동까지 발생했다. 투기는 도박으로, 심리적 요인에 상당 부분을 의존한다. 존 로의 회사가 유령회사나 다름없다는 소문이 돌자 불안이 퍼져 나갔고 주가는 폭락했다.
존 로는 몰래 프랑스를 탈출해 벨기에의 브뤼셀로 망명했다. 1712년에는 존 로가 설립한 회사의 전체 주식 폐기가 결정되었다. 화려한 거품이 허무하게 꺼진 것이다. 실의에 빠진 존 로는 1729년 에 베네치아에서 궁핍하게 살다 생을 마감했다.
경제학자인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John Kenneth Galbraith)는 『돈: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Money: Whence It Came, Where It Went)』라는 책에서 생시몽 공작이 풍부하게 암시한 글을 소개했다. “미시시피 계획이라는 망상, 주식회사의 구상, 전문적인 용어, 벼룩의 간을 빼먹는 악랄한 수법 등이 이런 종류의 회사가 지닌 특징이라면 주식회사라는 이 기구 전체는 금광도 현자의 돌도 가지지 못한 이상, 필연적으로 붕괴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사실상 이것은 현 실에서 벌어진 일이다.”
- 설탕 투기에서 시작된 자본주의
설탕 생산은 시설, 도구, 가축, 노예, 노예의 식량 등을 농장주가 모조리 화폐로 사들여 설탕을 만든 뒤 유럽 시장에 내다 파는 구 조로 돌아갔다. 말하자면 모든 것이 '돈'으로 순환하는 경제 시스템 이라고 할 수 있다. '돈'이 자본으로서 대규모로 자기 증식하는 시스템, 쉽게 말해 돈이 새끼를 쳐서 돈을 낳는 시스템이 이 시기 설탕 산업에서 개발된 것이다.
사탕수수(sugar cane)는 포르투갈 식민지인 브라질에서 최초로 재 배되어 17세기에 들어서면서 남미와 카리브해 연안으로 퍼져 나갔다. 네덜란드인은 가이아나에서 사탕수수 재배를 시작했고, 영국인과 프랑스인은 카리브해의 서인도제도로 진출해 재배하기 시작했다. 사탕수수를 재배하는 플랜테이션 농장이 덩치가 커져 대규모 사업체로 발전하자 설탕은 사치품에서 대중적 기호품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예전에 설탕은 사회적 지위를 상징하는 매우 귀중한 조미료로 서 민에게는 그림 속의 떡이나 다름없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설 탕 가격이 내려가자 높은 지위를 원하는 사람들이 불 속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설탕으로 아귀아귀 덤벼들어 설탕 소비량이 급증했다. 상품에서 상징과 이미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게 해주는 사건이다.
영국의 1인당 설탕 소비량은 1600년에는 연간 400~500그램이었다가 17세기에는 약 2킬로그램, 18세기에는 약 7킬로그램으로 껑 충 뛰어올랐다. 그러나 아무리 고급스러운 상품이라고 해도 설탕 사 용량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설탕에 어울리는 친구로 찰떡궁합인 또 다른 상품을 찾아낼 필요가 있었다. 여러 후보가 물망에 올랐다. 원래 이슬람 세계의 음료였던 커피와 중국의 차가 설탕의 새로운 단짝 역할을 맡게 되었다. 설탕은 아시아에서 온 커피와 홍차의 단짝이 되어 수요가 증가했다. 지금도 설탕 소비량은 증가하는 추세다. 설탕은 청량음료, 스낵 과자, 가공식품 등에 다양하게 이용된다. 설탕 생산량은 밀가루, 쌀 등의 주요 곡물보다 많다. 17, 18세기에 '신대륙의 대농장(플랜테이션)에서 우리는 자본주의 경제가 성장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중상주의 정책에 따라 '신 대륙 식민지에서는 공업 생산이 용인되지 않았고, 유럽은 신대륙에 유리한 조건으로 공업 제품을 팔아치워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 영국에서는 한 편의 드라마처럼 은행이 탄생했다. 청교도혁명 전날 밤인 1640년의 일이다. 런던의 상인들이 금화와 은화 등의 귀금 속을 당시 조폐소가 있던 런던탑에 맡겼다. 그런데 의회와 대립하며 재정난에 시달리던 국왕 찰스 1세가 13만 파운드에 달하는 귀금속을 압류한다. 왕은 4만 파운드의 대출을 조건으로 귀금속을 반환했는데 결국 대출금은 갚지 않았다.
정부를 신뢰할 수 없게 된 런던 상인들은 오랫동안 중심가에서 환 전업을 하던 골드스미스(Goldsmith, 금 세공사)에게 화폐를 맡기게 된다. 골드스미스는 화폐를 맡으면서 베네치아 은행을 본떠 예금 증서를 발행해주었다. 그리고 예금 증서는 같은 액수의 '골드스미스 어음이라는 보조권으로 분할하기에 이른다. 일종의 화폐였다. 편리한 '골드 스미스 어음은 '돈'보다 광범위하게 유통되었다.
- 골드스미스는 예금자가 청구하면 '돈'을 돌려주었지만, 대체로 많은 '돈'이 여전히 수중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골드스미스는 남은 '돈'을 단기로 빌려주거나 어음을 할인해주는 데 쓰거나 했다. 골드스미스가 보관하는 '돈'이 예금과 대출 보증 역할을 하게 된 셈이다.
18세기 후반에 대서양 세계의 패권을 거머쥔 영국은 환전 등의 국제적 은행 업무가 필요해 은행 기능을 확장했다. 그때 유럽 본토에서 이주한 베어링(Baring), 로스차일드(Rothschild), 슈뢰더(Schroder) 등의 상인들이 유럽 각지에 가진 넓은 정보망을 이용해 활약했다. 그들은 상업은행(merchant bank)의 형태로 국제적인 은행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 서부 개척 운동으로 급속하게 개척된 미국 서부에서는 민간은행이 정부의 규제를 받지 않고 은행마다 자유롭게 은행권을 발행해 개척민에게 대출할 수 있었다. 은행은 이렇다 할 규제를 받지 않고 연금술사처럼 종이를 은행권이라는 '돈'으로 둔갑시키는 손쉬운 방 법으로 돈을 벌었다.
프론티어 정신을 내걸고 개척에 참여한 가난한 이민자들은 자산이 부족해 빚더미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이민 생활에서는 빚이 일상이었고 지역 은행이 발행하는 은행권은 무일푼인 이민 자들이 편리하게 빌려 쓸 수 있는 돈이었다. 생각해보면 빚을 아랑곳 하지 않고 소비하는 미국인의 생활 방식 자체가 미국이라는 나라의 역사를 통해 형성된 셈이다. 서부의 은행은 금화나 은화 같은 '돈'이 아닌 은행이 직접 발행한 은행권이라는 '돈'을 빌려주었다. 차용인은 은행권으로 돈을 갚을 수 있었고, 그 은행권을 받은 사람은 금화나 은화로 바꾸어 쓸 수 있었 다. 은행권은 사람들의 손에서 손으로 건네졌고 마지막에 은행으로 돌아와 금화와 은화로 교환되었는데, 그 이전에 차용인은 이자를 내고 은행권 내지는 금화나 은화를 은행에 갚는 구조였다.
지방 은행은 종이를 은행권으로 둔갑시켜 큰 이익을 얻었다. '돈' 으로 '돈'을 불리는 시스템이 굴러가기 시작했다. 주 정부가 허가한 은행은 은행권을 자유롭게 찍어내 빌려줄 권한을 인정받았는데, 주 의회는 은행을 자발적인 개인의 조합으로 보고 설립을 간단히 허가했다.
1836년, 연방 정부는 공유지 대금은 금화, 은화 또는 금·은과 태환이 가능한 은행권으로 지급해야 한다는 포고를 냈다. 그러나 상황은 시정되지 않았고 남북전쟁 전야 미국에서는 약 1만 6,000개의 은행이 발행한 추정 7,000종류의 은행권, 추정 500종류의 위조 은행권이 유통되었다. 당시 기업에서는 위조권 감별법'이라는 책자가 필수품이었다는 우스갯소리 같은 이야기가 나돌 지경이었다.
- 세계 경제를 조종했던 금
1900년에는 미국도 금본위제로 이행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1914년에 금본위제를 채택한 나라는 57개국을 헤아릴 정도 로 늘어났다. 금이 국제무역의 결제 수단으로 일원화되었고, 금을 매 개로 하는 고정 상장제가 형성되었다. 금본위제에서는 금이 유출되 면 화폐가 금과 연동해 하락한다. 통화의 가치에 따라 수출량과 수입 량이 변동하고 수출입 불균형이 시정되는 메커니즘으로 금은 세계 경제를 통제하게 되었다.
무역에서 경상흑자를 누적해온 영국은 파운드'와 금 교환을 보 증하고 다른 통화와 무제한 교환해주는 '세계의 은행으로서, 막대한 양의 금을 장기간에 걸쳐 투자해 전 세계의 금을 순환시켰다. 런던의 롬바드가가 국제 금융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했고, 대량의 금이 보증해주는 파운드가 세계 경제의 혈액 역할을 도맡았다.
- 미국의 '돈'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은 두 세력의 대립으로 발생했다. 연방 정부의 권한을 강화하자는 연방주의자와 주의 권한을 옹호하는 주권론자(states' righters)의 대립이었다. 연방주의자는 미 국도 잉글랜드 은행처럼 중앙은행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1791년에 20년 면허 기간을 가진 합중국 은행, 1816년에 마찬가지로 20년 면허 기간을 가진 제2 합중국 은행을 설립했으나 모두 폐지되었다. 중앙은행이 힘을 쓰지 못하며 미국에서는 민간은행이 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는 프리 뱅킹(Free banking) 시대가 이어졌다.
- 주 정부는 은행에 '돈'을 발행하는 권한을 주고 채권 등을 위탁해 은행권 거래소의 평가에 기반을 둔 은행권 교환 시스템을 갖추는 등 어떻게든 통화 시스템을 유지했다. 그러나 중앙은행의 부재는 통화 발행량 조달로 공황을 방지한다든지, 달러를 국제통화로 신임을 얻게 하는 일 등에 걸림돌로 작용했다. 미국 경제는 급성장을 거두었으나 달러는 국제통화로 인식되지 못했다. 그래서 무역 결제에 여전히 파운드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고 대출과 결제 수수료 등의 명목으로 많은 '돈'이 영국으로 흘러들어가는, 쉽게 말해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주인이 버는 상태가 이어졌다.
1907년에 금융 공황이 발생하자 '월가의 제왕'이라 불리던 모건 가를 중심으로 영국의 잉글랜드 은행을 모델로 삼아 중앙은행을 설 립하자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중앙은행이 생기면 경기 후퇴 시 금 리를 낮추고 통화의 공급량을 늘려 경기를 자극할 수 있다. 공황 후에 금융 제도 재편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1912년 미 하원의 은행통화위원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월가의 금융 지배 실태가 여실히 드러났다. 때마침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소속 윌슨은 중앙은행이 월가의 금융 지배 수단이 될 위험성이 있다고 지적해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민주당과 공화당은 이후 타협하여, 윌슨 정권 시기에 인구 분포를 기준으로 전국을 12개 지구로 나누어 각 지역에 연방준비은행을 설치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때 국법은행은 연방준비은행에 반드시 가입해야 했으나, 주법 은행의 가맹은 자유에 맡겨졌다. 복잡한 연방준비제도는 영국에서 독립한 후 미국 역사에 아로새겨진 연방주의와 주권주의가 타협한 산물이었다. 연방준비은행은 가맹은행에서 출자를 받아 다시 가맹은행에 돈을 빌려주고, 상업어음을 담보로 잡고 은행권을 발행했다. 이러한 연방준비은행의 감독과 조절을 맡을 기관으로 연방준비국(Federal Trade Board)이 설립되었다. 연방준비국은 1935년에 제정된 은행법에 따 라 연방준비제도이사회로 조직이 개편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연방 준비제도가 발전하면서 달러는 마침내 자립한 화폐라는 지위를 확립했다.
- 20세기 전반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유럽 각국은 몰락했고 세계 금의 3분의 2 이상이 세계의 군수공장, 농업창고 역할을 맡았 던 미국으로 집중되며 달러가 유일하게 금과 교환할 수 있는 세계통화'로 신임을 얻게 되었다. 달러가 세계의 돈이 되어 날개를 달고 세계를 누비며 세계적인 단일 경제권을 구축하는 원동력이 되는 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주의 권한이 강한 미국에서는 오랫동안 연방 정부와 주 정 부가 인정하는 은행이 각자 은행권(통화)을 발행하고 있었고, 남북전 쟁 전에는 약 700종이 넘는 '돈'이 유통되는 경제적 혼란 상태가 이 어졌다. 미국의 '돈'에 대한 사고방식은 세계적으로도 아주 특수한 사례다. 그 특수한 사고방식이 강력한 통화인 달러와 함께 세계화되어 수많은 문제를 양산하는 원인이 되었다. 미국에서 중앙은행에 해당하는 연방준비제도는 제1차 세계대전 이 발발하기 한 해 전에야 갖추어졌다. 이 사실이 보여주듯 미국은 '돈' 운용 면에서 세련된 문명이 아니었다. 수많은 은행이 느슨한 규 제하에서 '돈'을 찍어내던 미국 특유의 화폐관'은 미국 특유의 카드회사라는 발상으로 이어졌고, 스톡(stock)의 관점이 아닌 플로(flow)의관점에서 돈을 그리는 발상으로 이어졌다. 미국에서 '돈'은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가장 빠른 투기와 투자 수단이라는 개념이 자리 잡았다.
- 달러 무위의 확립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영국은 금화 지급을 중지하고 금 본위제를 폐지했으며 각국도 영국의 뒤를 따랐다. 금을 기축으로 조직된 국제 통화 제도의 취약성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그러자 국제 결 제는 금 거래 자유가 유지되었던 뉴욕에서 이루어지게 되었고, 뉴욕 에서 대량의 금이 유출되었다. 달러는 급락했고 일시적으로 40%나 가격이 내려갔다. 1913년 미국의 대외 채무는 45억 달러, 채권은 약 26억 달러에 달했다. 그러나 전쟁 중에 미국은 밀가루, 선박, 강철, 탄약 수출이 급 격히 증가하며 연합국의 식량창고이자 병기 공장 역할을 전담하게 되었다. 세계대전 기간 미국의 밀가루 수출액은 3배, 강철 수출액은 5배 이상 뛰어올랐다.
미국의 유럽에 대한 수출액은 3배, 영국에 대한 수출액은 3.5배에 달했다. 유럽 각국은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미국 채권을 내놓고 거액 의 자금까지 빌려 각종 물자를 사들였다.
1917년 4월, 연합국으로부터 거액의 채권을 보유하게 된 미국은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구실로 내세워 제1차 세계대전에 참 전했다. 1917년 9월 7일 자로 화폐, 금괴, 은괴, 통화 수출을 금지하는 대통령령이 발령되었다.
유럽 각국은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금 수출을 금지해 자국의 통화 가치를 지키려 했으나, 막대한 재정 지출과 인플레이션 발생으로 통화 가치가 큰 폭으로 하락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은 국민이 소유한 증권을 미국에 매각하거나, 증권을 담보로 잡고 국채를 발행해 여러 물자를 사들일 달러를 마련했다.
미국이 참전하자 각 연합국이 필요로 하는 달러 자금을 미국 정부 가 무제한으로 대주었고, 이는 곧 연합국의 거대한 전쟁 채무로 이어 졌다. 전후에 영국은 36억 9,600만 달러, 프랑스는 19억 7,000만 달 러를 미국에 갚아야 했다.
1914년 말에 19억 2,600만 달러였던 미국의 금 보유액은 1917년 말에는 28억 7,300만 달러로 약 2배로 증가했다. 전후에도 높은 공 업 생산력을 유지한 미국으로 유럽에서 금 유입이 이어졌다. 1921년 에는 7억 달러의 금이 미국으로 흘러들어 왔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달러는 세계 최강의 통화이자 세계통화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다.
- IMF 체제와 세계를 도는 돈, 달러
제1차 세계대전을 훨씬 뛰어넘는 대규모 전쟁으로 번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패전국도 유럽 각국도 다 같이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말하자면 미국 혼자 승리한 전쟁이었다. 압도적인 군사적 우위를 자랑하는 미국은 경제 측면에서도 세계의 금 보유액의 70%를 차지했다. 미국의 지급 준비금은 세계의 절반, 영국의 13배에 달했 다. 미국은 경제적 우위와 막강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달러를 세계통화로 끌어올려 세계 각국에서 신임을 얻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4년, 미국의 뉴햄프셔주의 브레튼우즈에서 개최된 연합국의 통화 금융 회의에서 미국의 원조를 바탕으로 국제통화기금 협정안이 소련을 포함한 44개 참가국의 만장일치로 승인되었다. 세계통화를 새로 만들자는 영국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1온스 35달러로 금과 태환할 수 있는 달 러가 실질적인 세계통화로 인정받게 되었다. IMF(국제통화기금) 협정 제4조 제1항에 따라 IMF 가맹국의 통화는 금 또는 달러로 평가를 표시하게 되었다. 달러를 중심으로 전 세계의 통화 질서가 수립되었다. 미국 주도로 세계 경제의 일원화가 추진되 는 과정에서 미국의 경기 동향이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달 러는 '돈'으로 세계를 돌았고 지금도 세계화의 기초를 구축하고 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후 금과 교환이 보증된 달러를 전 세계에 뿌렸다. 금본위제가 달러 본위제로 변했고 달러가 금과 교환되며 세계통화는 가까스로 금과 연계점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 1950년대 후반부터 미국의 국제수지 적자 확대로 각국의 달러 잔고가 증가해 달러에 대한 신임이 흔들렸다. 1958년, 1959년 2년 동안 3~4억 달러어치의 금이 미국에서 빠져나갔다. 미국이 달러를 방어하기 위해 국제 자본 거래에 제한을 설정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런던 금융가는 유로달러 시장을 성립하여 꾸준히 성장시켰다. 여분 의 달러가 유로달러가 되어 국제 금융 시장에서 대량으로 유통되자 미국의 달러 규제가 유명무실해졌다. 미국의 금 보유량은 또다시 큰 폭으로 줄어들었다.
금의 국외 유출을 고심하던 미국은 각국 정부에 달러의 금 태환을 정지해달라고 요청했으나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1971년에는 달러의 절하를 예상한 통화 투기가 각지의 외환 시장을 뒤덮었다.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이 달러를 대량의 금으로 바꾸는 정책을 시행하자 더는 버틸 수 없게 된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1971년 8월 15일에 정식으로 달러와 금의 태환을 정지해 전 세계에 충격을 안겼다. 이른바 '닉슨 쇼크'다. 달러를 세계의 기축통화로 하던 IMF 체제가 붕괴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보인 압도적인 경제적 우위가 무너져 내린 순간 이다.  같은 해 말에 스미소니언 협정(Smithsonian Agreements)이 체결되며 달러의 평가가 7.66% 내려가 고정 환율제를 일시적으로 부활시켰 으나, 미국의 재정 악화는 개선되지 못하고 달러 발행만 증가해 달러를 팔려는 압력은 커져만 갔다. 미국은 이러한 상황에서 버티지 못하고 백기를 들었다. 1973년 1월, 주요국은 변동 환율제(flexible exchange rate)로 이행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달러는 유일한 세계통화라는 자리에서 미끄러져 내려왔 다. 세계 경제는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던 시대에서 경제 상황에 따라 각국 통화의 가치가 매일 변동하는 '변동 환율제 시대'로 이행했다. 전 세계의 통화는 정부의 신임으로 가치가 보증되는 단순한 '종잇 조각'으로 변하며 인류의 생활은 한없이 불안정해졌다. 달러가 금으로 교환할 수 있는 유일한 '돈'으로 세계 경제를 하나로 통합하던 시대는 30년을 버티지 못하고 종말을 고했다.
- 변동 환율제하에서 외환 시장은 달러 표시 자산, 파운드 표시 자산, 엔화 표시 자산 등이 하루 단위로 변하게 되었다. 통화 변동의 폭 이 큰 데다 투기까지 겹치며 외환 시장은 매일매일 정신없이 변동했 다. 통화는 투기의 대상이 되었고 전 세계적인 머니 게임이 펼쳐지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1985년 가치가 치솟은 달러를 내리기 위해 5개 선진국의 재무장 관과 미 중앙은행 총재가 뉴욕에 모여 플라자 합의를 성립했다. 플라 자 합의로 미국의 달러 안정책이 용인되자 이번에는 달러 가격이 바 닥을 모르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일본의 엔화가 급격히 치솟는 엔고가 이 시절 나타났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계사 속 부의 대반전  (0) 2021.10.07
철학과 종교의 세계사  (0) 2021.08.12
문명의 역습  (0) 2021.06.20
세계사를 결정짓는 7가지 힘  (0) 2021.05.25
침대위의 세계사  (1) 2021.05.25
Posted by dalai
,

문명의 역습

역사 2021. 6. 20. 19:08

- 방향이 잘못됐을 때, 가장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다. 많은 경우 이 시대를 규정하는 '발전'은 병을 치료하기보다 는 악화시키고, 문명은 소용돌이처럼 점점 더 속도를 높이며 우리를 어지럽히는 것 같다. 혹시 발전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은 일종의 진통제 아닐까? 찬찬히 생각해보기에는 현실이 너무 공포스럽기 때문에 '미래의 희망' 이라는 약이 필요한 게 아닌가 말이다. 
- 우리는 우리를 뿌리에서 뽑아낸 힘보다 더 우악스러운 힘에 의해 발전이라는 폭포로 내던져졌다. (칼융)
- 언어학자 대니얼 에버렛Daniel Everett은 20년 이상을 아마존 상류 지역의 수렵채집 부족인 피라항족과 살았다. 당시의 경험을 그린 《잠들면 안 돼, 거기 뱀이 있어Don't sleep, There Are Snakes》라는 회고 록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피라항족은 어떤 일이 일어나는 웃는 다. 자신들의 불행에 대해서도 웃는다. 한 남자의 오두막이 폭풍우에 날아간 적이 있는데, 그 가족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크게 웃었 다. 그들은 물고기를 많이 잡아도 웃고 물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아 도 웃는다. 배가 불러도 웃고 배가 고파도 웃는다.” 14 피라항족의 웃 음은 그들이 사는 세계와의 편안한 조화를 시사한다. 근본적으로 그들을 낳은 세상과 그들이 사는 세상이 동일하기 때문에, 즉 그들의 몸과 마음이 예상하는 대로 굴러가는 세상에 살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유적 표현이 아니다. 말 그대로다. 에버렛이 관찰한 피라항족이 아마존  정글에서 느끼는 편안함은 사막에서 선인장이 느끼는 편안함과 똑같은 성질의 것이다. 그들의 삶이 쉽다는 게 아니라 그들이 만나는 어려움과 위험은 까마득하게 오랜 세대 동안 경험해왔기에 친 숙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독자들과 나는 지난 세대에 어떤 인류도 경험하지 못한 세상에 살고 있다. 지금 이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 중 에 진심으로 마음이 편안한 사람이 극히 드물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런 세상에 익숙해질 기회가 없었으니 말이다.
- 약 1만 년 전 농업이 촉발한 급격한 변화에 직면할 때까지, 인간의 삶은 평등주의, 이동생활, 사소한 것도 공유하고 필요한 자원은 누구 나 이용할 수 있는 삶, 모든 것을 제공하는 자연에 감사하는 마음으 로 특징지을 수 있었다. 수렵채집사회에서 '지도자'의 특권이란 단지 그 지위에 있는 동안 다른 구성원들보다 의견이 더 중요시된다는 게 전부였다. '권력'은 한 사람이 독점하지 않았고 쟁취하거나 물려주거 나 팔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호모사피엔스 역사의 95% 이상을 차지하는) 수렵채집사회의 이러한 특징들은 학자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 마빈 해리스는 평등하고 자유롭던 수렵사회에서 문명사회로의 강제적 인 전환이 인류에게 얼마나 큰 타격을 가했는지를 이렇게 설명한다.
계급이 생겨나자 자연이 준 풍요로움을 누리던 보통 사람들은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누군가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그에 대한 대가로 세금이나 공물을 바치거나 과도한 노동을 해야 했다. ... 역사상 처음으로 지구 에는 지하감옥, 구치소, 교도소, 강제수용소와 함께 왕, 독재자, 고위 사제, 제왕, 총리, 대통령, 지사, 시장, 장군, 제독, 경찰서장, 판사, 변호사, 교도관이 등장했다. 계급제도에 따라 인간은 처음으로 절을 하고, 아첨하고,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법을 배웠다. 여러 면에서 계급은 인류를 자유민에서 노예로 전락시킨 것이다.
- 희망에 매달릴수록 더 절망적인 상황으로 가는데도 '절대 포기하 지 말라'고 우리를 부추기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발전에 대한 맹 목적인 믿음을 부추기는 사회에서는 망상이 자라난다. 망상에 빠진 사람은 자신의 믿음이 현실과 정면으로 부딪치더라도 개의치 않는 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는 헌신하고 집중하고 근면하면 무엇이든 이 룰 수 있다는 아메리칸드림이 있는데, 그 망상에서 깨어나기만 하 면 무조건 비애국자라는 비판을 받는다. 그리고 (이 책을 포함해서) 모든 책의 마지막 장은 영원한 행복이나 더 탄탄한 복근을 얻기 위한,더 짜릿한 오르가슴을 느끼기 위한, 더 똑똑한 자식으로 기르기 위한, 또는 부자가 되기 위한 간단한 5단계 비법을 알려주는 희망으 로 끝나야 한다. 기후학자들은 수십 년 전부터 우리가 '전환불가능 점'에 근접한다고 경고했을 뿐, 이미 그 시점을 지나버렸다고 선언 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밤이 깊어졌는데도 우리는 아직 해가 지지 않았다고 믿는 것이다. “내게는 아직 절대 늦지 않았다는 말이 묘비 명에 쓰인 글귀보다도 절망적으로 들린다. 벼랑 끝으로 몸을 던지 기 전에 하는 마지막 거짓말 같기 때문이다.” 토바이어스 울프 Tobias Wolff가 한 말이다. 물론 우리는 모든 상황이 좋아지고 있다고, 인류 가 교훈을 통해 번영한다고 믿고 싶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어떻 게 할 것인가? 희망과 발전 앞에 비굴하게 무릎 꿇는 것이 사실은 이미 위급한 상황에서 나날이 악화되는 현실을 가리는 것에 불과하다.
- 로널드 라이트는 132쪽짜리 얇은 책 《진보의 함정A Short History of Progress》에서 급소를 찌르듯 이렇게 말한다. “희망은 오래된 혼란 을 개선시키는 새로운 해결책을 발견하게 하지만, 그 해결책은 훨씬 더 위태로운 혼란을 만들어낸다.” (2004년에) 그는 계속해서 “희망은 가장 허풍스러운 공약을 내세우는 정치인을 뽑게 만든다. 또한 주식 거래인이나 복권 판매자들은 다들 알겠지만, 우리 대부분은 신중하 고 확실한 검소함보다 거미줄처럼 가는 희망에 매달린다”라고 했다. 라이트는 발전을 향한 '종교적 믿음의 병폐를 지적한다. 눈에 보이 는 발전을 숭상하는 우리의 신념은 여러 분야로 가지를 뻗어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굳어졌다. 하지만 발전은 태생적으로 합리성을 벗어 나 파국을 불러들이는 논리를 가졌다."
영원한 발전이라는 장밋빛 약속은 심리적 위안은 될지 몰라도 합리적 근거는 없다. 게다가 너무 늦기 전에 궤도를 수정할 능력까지 앗아간다. 연기 냄새 때문에 잠에서 깼을 때 우리를 가장 안심시키 는 말은 “걱정할 거 없어, 얼른 자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바람직한 조언이 아니다. 심리학자 탈리 샤롯Tali Sharot은 발전에 대한 이 런 맹목적인 믿음을 낙관주의 편향optimism bias' 이라고 이름 붙였다. 당황스러운 증거는 드물게 일어나는 특이현상으로 치부하는  반면, 미래를 밝게 그리는 내용은 무엇이든 강조하는 경향이다. 
- 문명이 막아준다고 하는 대부분의 위험들은 사실 문명 자체가 만들어내고 키운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항생제와 관상동맥우회술을 업 적으로 내세우는 것은 우리 조상에게는 교통사고의 위험이 없었다는 사실을 외면한 채 안전벨트와 에어백의 혜택을 내세우는 것과 같 다. 우리 집에 불을 지른 사람이 물이 든 양동이를 들고 왔다고 해서 고마워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발전으로 인해 우리가 과로하고 병들고 불행해지고 모멸감과 두려움을 느낀다면, 도대체 발전의 장점이 무엇이란 말인가. 발전의 대가로 무엇을 잃었는지는 우리도 대략 안다. 따지고 보면 거의 모든 것을 잃었다. 파괴된 숲, 침식된 토양, 고갈된 어획량, 오염된 대수층, 일산화탄소가 가득한 대기, 암, 스트레스, 필사적으로 탈출하는 난민.... 그 외에 수없이 많은 것을 표로 정리할 수도 있다. 전에는 자식들 키우기 좋은 곳으로 이사해야겠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제는 이 혼돈의 세 상에서 자식들이 어떻게든 살아남기만을 바라는 지경이 되었다. 영속적 발전론은 우리의 가장 지혜로운 조상들이 더 잘 살기 위해 농업기술을 발명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우리는 수렵채집생활에서 농업경제로 전환되 면서 건강과 장수, 안전, 여가, 훌륭한 예술을 누리게 됐다고 배웠고, 이런 시각에 동의하는 세력도 압도적으로 많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 임을 증명하기는 힘들다. 사실 농업경제로의 변천은 삶의 질에 전 반적으로 해로운 영향을 미쳤다. 거의 모든 사람들의 건강과 안전이 악화되었고, 여가시간과 수명도 줄었다. 엄연히 엘리트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다.
- 농사를 시작한 것은 영리한 발전이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체로 문명화는 유례없이 안정적이고 온화한 환경 덕분에 인구밀도가 높아지고 사회가 복잡해지면서 나온 결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닉 브룩스Nick Brooks는 문명화 를 파국적인 기후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나온 우발적인 부산물'로 본다. 생존이 힘들어진 환경에 대응하기 위한 '최후의 도피처'로서 '문명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18 우리 조상들은 안락한 삶을 위해 힘든 수렵채집생활을 버린 것이 아니다. 농업을 시작한 것도 더 나은 삶을 위한 과감한 도약이 아니라 세계 인구가 감당할 수 없을 정 도로 폭발하면서 오랜 세월 열심히 파내려간 구덩이 속으로 추락한 비극적인 사고다.
농업경제로의 변천에 대해 1999년에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쓴 에 세이의 제목은 꺼림칙하게도 인류 역사상 최악의 실수The Worst Mistake in the History of the Human Race)다. 심지어 역사학자 유발 하 라리Yuval Noah Harari는 농업혁명을 '역사의 최대 사기라고까지 했 다. “농업혁명은 분명 식량의 총량을 증가시켰지만, 늘어난 식량이 식생활의 발전이나 여가시간의 증가로 이어진 건 아니었다.” 2015년에 나온 베스트셀러 《사피엔스Sapiens》에서 그가 한 말이다. 하라리는 그 잉여 식량이 그저 '인구폭발과 응석받이 엘리트'의 연료 역할을 했다는 것, 농부들은 더 고된 노동을 더 오래 하게 됐음에도 음식 의 질은 더 떨어졌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그리고 생존을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정착생활과 농경을 시작한 인류 앞에는 사회적 불평등, 집단들 간의 폭력, 유일신 종교를 권력 유지에 이용한 지배계급이 등장했다.
- 가톨릭 신자인 슈미트는 최초로 안정된 정착지에 사람들이 모인 것은 함께 예배를 드리려는 욕구 때문이었을 거라고 봤다. 그리고 괴베클리 테페처럼 어마어마한 규모의 사원을 짓고 유지하기 위해 서는 인부들을 먹이면서 공사를 계속 진행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농업을 발전시킬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추측했다. 신이 먼저 등장했고 그 후 나머지 조건들이 필요해졌다는 것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처슨, 보이드, 베팅거 등 기후변화에 의해 농사가 시작되었 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괴베클리 테페가 농업을 촉발한 게 아니라 농업사회로 향할 문화적 토대가 마련되었음을 보여줄 뿐이라고 믿는다.
어떤 경우든, 괴베클리 테페를 지은 사람들은 분명 감사할 일이 많 았을 것이다. 당시 세계는 인간에게 거의 이상적인 환경이었으니 말 이다. 지금은 사방으로 뻗어 있는 메마르고 황량한 구릉지가 1만 2,000년쯤 전에는 먹을 것으로 가득했다. 두 종류의 호밀과 외알밀 로 이루어진 초원이 언덕을 뒤덮었고 피스타치오 같은 견과류도 널리 흩어져 자랐다. 가젤이 뛰어다녔고 사람들은 힘을 합쳐 그것들을 사냥했다. 때로는 한 무리 전체를 잡아들이기도 했다. 유럽들소(오늘날 소의 조상)도 많았는데 한 마리 무게가 1톤 가까이 되기도 했다. 슈 미트는 그 지역이 '지상천국'에 가까웠으리라고 봤다. 괴베클리 테페 규모의 건축물을 짓는 인부들을 먹였다면 그 정도로 식량이 충분했을 터이기 때문이다. 저널리스트 엘리프 바투먼Elif Batuman과의 인터뷰에서 슈미트는 그들이 자주 큰 잔치'를 벌였으리라고 추측했다. 그때마다 취기를 돋우는 맥주나 그보다 더 강렬한 효과가 있는 음식을 즐겼는지도 모른다.
- 적어도 3만 5,000년 전부터 인류는 들소나 말 같은 동물을 그리거나 손자국을 동굴 벽에 남겼다. 하지만 괴베클리 테페를 지은 사람들은 황토나 숯으로 벽을 장식하는 정도가 아니라 인부 100명의 무 게와 맞먹는 거대한 인체 모양의 바윗돌을 깎고 정확한 자리에 배치 함으로써 바위벽을 직접 세웠다. 그런데 이 모든 풍요로운 환경은 구조적인 위험을 품고 있었다. 고 고학자 브라이언 페이건Brian Fagan에 의하면, 그 긴 여름'이 여러 세 대 계속되는 동안 사람들은 정착촌에 사는 데 익숙해졌다. 그런 정 착생활은 먹을 것이 특히 풍부한 환경에서만 가능한데 말이다. 정착 사회가 자리를 잡음에 따라 수렵채집사회의 유동성과 상호의존성은 점차 약해졌다. 이제 사람들은 물이 더 풍부한 장소로 이동하게나 그럭저럭 버틸 만한 장소로 이동하는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전까지는 항상 유지해왔던 이동생활 능력, 즉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사회적 융통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재난은 항상 세상 반대편에서 왔다. 북아메리카 지역에서 빙상이 녹으면서 거대한 호수가 생겨난 것이다. 오늘날 아가시호Lake Agassiz로 불리는 이 거대한 얼음물 호수는 현재의 캐나다 매니토바에서 미네소타까지 뒤덮으며 면적이 44만 제곱킬로미터에 이르렀다. 다 합치면 지금의 오대호 전체보다 넓다. 1만 3,500년에서 1만 2,600년 쯤 전에 아가시호의 물은 래브라도해로 빠져나가며 지축을 흔들 만 한 변화를 초래했다. 차가운 빙하물이 갑작스럽게 유입되자, 열대지 방의 바닷물을 북대서양으로 끌어와 유럽을 따뜻하게 해주던 대서양 역전순환류가 차단된 것이다(지금은 북극의 빙상이 녹아 해양으로 유입 되면서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원래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 온 빙하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계속 이동하자 수천 년 동안 온화했던 유럽에는 매서운 겨울바람이 들이닥쳤다. 후기 드라이어스기Younger Dryas의 눈이 북반구 고위도 지방을 덮으면서 그보다 훨씬 아래인 괴베클리 테페 주변도 기온이 섭씨 7도 정도가 떨어졌다. 기나긴 여름 날씨가 느닷없이 끝나고 천년 동안의 가뭄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게 갑작스럽고 절망적인 기후변화에 맞닥뜨린 인류는 겁에 질려 어쩔 수 없이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인구밀도가 이미 높아져서 대규모의 희생자 없이 수렵채집만으로 생존하는 것 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마을을 이뤄 사는 것에 적응했고 자연이 베풀던 풍부한 공짜 식량은 고갈된 상황이라 굶주린 사람 들은 내륙에서 바다나 강 쪽으로 계속 나왔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자리를 잡은 초기의 지배층은 요직과 권력을 차지했을 것이다. 
- 강가에 야생종자를 심는 방식이었든, 고랑을 파서 말라가는 견과류 나무에 물을 대는 방식이었든, 농업으로의 변화는 우리 조상들이 기억나지 않는 문을 통과하여 근대화로 휩쓸려가는 과정이었다. 그 리고 이런 변천은 위태롭고 절박한 시기에 영리한 사람들이 그저 식량을 더 얻기 위해 시도한 한 가지 방법이었을 뿐이다. 새벽 안개 낀 나파밸리에서 열기구 바구니를 붙잡으려 했던 브라이언 스티븐슨처럼 그들도 좋은 의도로 그랬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 조상들이 역사상 최초로 식량을 채취한 게 아니라 추수했던 날, 그들의 두 발은 열기구와 함께 공중에 떠올랐고 손을 놓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 "세상에는 우스운 일이 많다. 그중 하나는 백인들이 다른 야만인들보다 자신들이 덜 야만적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마크 트웨인Mark Twain, 《마크 트웨인의 19세기 세계일주Following the Equator》)
영속적 발전론의 핵심 주장은 우리가 수렵채집인보다 더 발전했고 문화적이고 세련되고 선택받았고 진화했다는 것이다. 요약하면 '우 리는 문명화되었다, 우리의 우월함은 자명하다'다. 그런데 이들은 이 주장에 반하는 역사적 증거들은 외면한다.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는 자신이 '발견한 서인도제도에서 원주민들을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의 친절함, 관대함, 아름다운 몸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들은 아주 소박하고 정직하고, 믿어지지 않겠지만 자신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다른 사람에게 나눠줍니다. 달라고 말만 하면 안 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그들 자신보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더 깊은 것 같습니다.” 스페인 국왕과 왕비에 게 보낸 서한에 그가 쓴 말이다. 일기에서는 그들에 대한 찬사가 더 욱 두드러진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다. 우선 점잖고 살인이나 도둑질도 하지 않으며 악에 관해서는 전혀 모른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고 세상 어떤 사람들보다 다정한 얼굴 로 이야기하며... 그리고 항상 웃는다.” 이런 칭찬이 몇 페이지 이어 지다가 역사상 남아 있는 문서 중 가장 섬뜩한 반전이 일어난다. “그 들은 훌륭한 노예의 자질이 있다. 우리 관리자 쉰 명만 있으면 그들을 장악해서 무슨 일이든 시킬 수 있을 것이다.”
- 초기 국가에서는 그런 생활 방식이 용인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광산이나 군대, 공장으로 몰려갈 정도로 절박한 처지에 돌려야 했다. 패트릭 콜훈 Patrick Colguhoun 이라는 경찰치안 판사가 한 말에는 굳건한 문명화에는 빈곤이 필수적이라는 통념이 잘 드러나 있다. “가난은... 사회에서 절대 없어서는 안 될 요소다. 빈 곤이 없으면 국가나 공동체가 문명 상태로 존재할 수가 없다. 그것 이 인간의 운명이며, 부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이 없으면 노동할 사람도 없을 것이고, 그러면 부유층이 재산도, 세련됨도, 안 락함도, 이익도 누리지 못할 것이다."
이런 체제에 편입되지 않으려는 사람들에 대한 억압은 “가위처럼 전통적인 생활 방식의 중심을 절단하며 나아갔다. 가위의 한쪽 날 은 스스로 먹을 것을 조달하는 사람들의 능력을 방해했고, 다른 날 은 임금노동 체제 밖에서 대안적인 생존전략을 찾으려는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옭아맸던 것이다.” 페럴먼의 설명이다. 1500년대 후반 에 영국에서 제정된 소위 튜더빈민법은 거리에서의 구걸 행위를 금지했다. 14세가 넘은 사람이 구걸하다 잡히면 태형을 당하고 불에 달군 인두로 왼쪽 귀에 표식을 남기는 처벌을 받았고 같은 죄로 3회 잡히면 처형되었다. | 이런 사례가 이례적인 것은 아니다. 애덤 스미스의 스승이자 그 시대(1700년대 중반)의 선구적인 도덕철학자였던 프랜시스 허치슨 Francis Hutcheson은 이렇게 조언했다. “근면한 습관이 몸에 배지 않은 사람들에게 생필품을 값싸게 공급한다면 그것은 태만을 부채질할 것 이다. 가장 좋은 해결책은 모든 필수품의 수요를 늘리는 것이다. ... 일시적인 노예생활을 하게 하더라도 태만은 처벌되어야 한다.”
오해하지 말라. 현대인들도 시장경제에 억지로 끌려가고 있다. 다 국적기업은 늘 가난한 나라의 땅을 수탈하여 (혹은 부패한 정치인들한테서 사들여) 현지인들이 그곳에서 작물을 키우거나 채집하지 못하도 록 몰아내고, 가장 운 좋은 사람들에게는 숲의 나무를 베어내거나 광물을 캐내거나 과일 따는 일을 시키고 노예임금을 준다. 그것도 공장에서 생산해낸 건강에도 안 좋은 식품을 그 기업 소유의 상점 에서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에 살 수 있는 회사 화폐로 지급한다. 그 런데도 시장경제의 침입으로 타격을 입은 그들은 '극심한 가난'에서 구제되었다는 이유로 축하를 받는다. 그전까지 그들은 땅이 있고, 가 축이 있고, 물고기가 있고, 사냥감도 있었기에 하루에 1달러도 안 되 는 돈으로 살 수 있었는데, 이제 시장경제에 끌려들어가 노예 같은 일꾼으로 산다. 이것이 발전이라는 것이다.
- 영속적 발전론자들이 찬양하는 '건국의 아버지들', '정복자', '문명인들은 멋모르는 역사가들이 사기꾼, 강간범, 약탈자들을 듣기 좋 게 포장한 것이다. 우리는 동상을 세우고 묘비를 만들어 그들이 이 룬 눈부신 업적을 우러러보지만, 사실 그 업적이란 건 대부분 하늘 을 찌르는 자만심과 비이성적인 탐욕에 사로잡힌 정신병자의 사악 한 행동에 불과하다. 알렉산더 게르첸Alexander Herzen 이 “역사는 미친놈들이 쓴 자서전”이라고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실제로 '역사상 위대한 인물들'로 떠받들어지는 자들은 대부분 광기에 사로잡힌 범죄자들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세상을 바꿔놓았다고들 한다. 하 지만 좋은 쪽으로 바꿔놓았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던가? 아니, 그들이 좋은 쪽으로 바꿔놓았다는 증거가 있는가? 야심 찬 얼간이들이 남겨놓은 유산은 그들의 비뚤어진 가치관과 야망을 반영한 문명이 라고 하는 게 정당한 평가 아닐까? 현재의 운명이 과거에 이미 정해 졌다고 믿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것은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희 한한 사고방식이다. “나는 내가 한 행동은 단 하나도 후회하지 않아. 하나라도 다르게 행동했다면 그건 지금의 내가 아닐 테니까!”
- 도킨스가 한 말은 모두 비유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하고 싶겠지만 그렇지 않다. 《이기적 유전자》에서 그는 분명하게 인간의 이기심이이 타고난 것이며 DNA에 새겨져 있다고 주장했다. 도킨스는 인간을 “생존 기계, 즉 유전자라는 이기적 분자를 맹목적으로 보존하도록 프로그래밍된 로봇 전달체”로 본다. 그리고 이런 유전자들의 세계는 야만적인 경쟁, 무자비한 이용과 속임수'가 판치는 세계라고 주장한 다. 나아가 인간도 유전자를 닮는다고 말한다. “이 유전자의 이기적 성향은 보통 개인의 행동에서도 이기심을 발현시키기 때문이다."
결국 도킨스에게 고통에 눈감는 것은 자연선택의 불가피한 결과이지만, 다윈은 그런 관점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공감과 이타주의가 사회적 동물들에게 분명 진화적 혜택을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다윈의 노트에는 이런 기록이 나온다. “동물학자의 시선으로 인간을 보면 인간은 부모로서의 본능, 부부로서의 본능, 사회적 본능이 있고, 이 본능은 그 대상에 대한 사랑과 자비의 감정... 자기 자신 을 잊어버릴 정도로 적극적인 공감...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상대를 돕고 보호하려는 성향으로 이루어졌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 '평등'이라는 용어가 의미하는 것은 모든 구성원들이 똑같은 물건, 똑같 은 음식, 똑같은 특권이나 권위를 누린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이 생각하 는 평등한 사회란... 모든 구성원들이 음식이나 자원을 얻는 데 필요한 기술, 특권을 얻기 위한 방법에 동등하게 접근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 다면 가장 중요한 요소는 개인에게 보장되는 자율성이다. ... 평등주의 는 단순히 위계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평등한 사회를 유지하 는 데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고고학자 로버트 켈리)
- 수렵채집사회는 다른 이들보다 자신이 잘났다고 뻐기는 구성원들을 과감히 처리한다. 존경받는 지도자라 할지라도 자기중심적으로 처신하다가는 그 지위를 잃는다. 한편, 인류학자들이 '분열 융합' 집 단으로 불렀듯이 수렵채집사회의 구성원들은 언제든 그 무리를 떠 날 수 있었다. 침팬지와 보노보도 마찬가지인데, 이는 그런 관행이 수백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시사한다. 식량 사정, 계 절의 변화, 집단 내의 갈등 같은 요인에 따라 집단들은 합쳐지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한다. 《인간사회의 기원The Origins of Human Society》 에서 인류학자 피터 보구키Peter Bogucki는 “홍적세의 무리들은 개인 들의 유연한 집합체였는데 그들의 병합은 혈연관계로 묶이기보다는 근거지가 가깝거나 처한 상황에 따라 가까워진 경우가 많았다.” 그런 '유연한 연합체에서는 내집단과 외집단의 정체성이 한 가지로 고정된 게 아니라 끊임없이 변한다.
수렵채집 집단의 다양화를 촉진하는 요인은 침팬지나 보노보처럼 여성이 다른 부족과 결혼을 한다는 사실이다. 성숙한 나이에 이르자 마자 여성들은 보통 자신이 태어난 집단을 떠나 다른 집단의 일원이 된다. 이는 수십 년 동안의 현장조사뿐 아니라 최근의 미토콘드리아 DNA 분석에 의해서도 입증된 사실이다. 
- 대니얼 리버먼은 “우리를 괴롭히는 수많은 발과 무릎 부상들은 사실 우리가 신고 달리 는 신발이 발을 약화시키고, 발목이 과도하게 안쪽으로 휘게 만들고, 무릎에 악영향을 주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1972년에 이 런 신발이 등장하기 전에는 다들 밑창이 아주 얇은 신발을 신고 달 렸지만 발이 튼튼했으며 무릎 부상도 훨씬 드물었다고 강조한다.
인간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달리기를 했다. 인간의 몸을 봐도 장거 리를 달리는 데 굉장히 효율적인 구조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 는 타고난 신체구조를 무시하며 위험을 무릅쓴다. 리버먼이 말했듯이 “인간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유산소 운동을 해야 한다.
유산소 운동은 인류의 진화에서 유구한 역사를 가졌다. 건강을 지켜 주는 마법이 있다면 그것은 달리는 것이다.” 하지만 비즈니스스쿨에 서 가르치는 방식으로 달리면 안 된다.
맥두걸은 나이키가 조작해낸 이런 결과를 '나이키 효과'라고 부른 다. 하지만 수익을 올리기 위해 이런 마케팅을 이용하는 기업이 나 이키만은 아니다. 나이키도 눈부신 수익을 거두기 위해 정석을 밟았 을 뿐이다. 값싸고 자연스러운 것을 버리고 더 안 좋은 것을 취하게 하는 게 나이키 효과라면 이와 비슷한 효과'는 우리 주위에 비일비 재하다. 방목형 대신 공장식 축산 효과', '의사의 토요일 골프모임을 위한 금요일의 무조건 제왕절개수술 효과', '불법재배로 키운 마리화나 대신 해롭고 중독성 있고 비싼 약 효과’, 또는 민망한 모유수유 대신 간편한 분유 효과'. 이 모든 것들이 나이키 효과와 뿌리가 같은 마케팅이다.
자연스럽고 건강에 좋고 공짜인 것을 문제만 일으키는 것들로 대 체하는 행태는 사실 농업과 문명화만큼이나 역사가 깊다. 그것은 상 업이라는 기어가 계속 돌아가게 만드는 수법이다. 이미 1930년대부 터 미국의 기업 컨설턴트들은 대놓고 떠벌였다. 광고의 역할은 대 중이 항상 자신의 삶과 주변 환경을 불평하게 만드는 것이다. 만족 스러운 소비자는 불만족스러운 소비자에 비해 판매에 도움이 안 되 기 때문이다.”
- 바리 족 아기들을 연구한 스티븐 베커먼steven Beckerman에 의하면, 아버 지가 한 명인 아기는 15세까지 생존할 확률이 64%인 반면, 아버지’ 가 여러 명인 아기는 80%였다. 분할 부성 관습이 있는 다른 사회에 서도 그 비율은 비슷했다.
공동소유가 기본 원칙이라 사적 재산이 존재하지 않는 평등주의 사회에서는 부권을 중요시할 이유가 거의 없었을 것이다. 핵가족은 문명화의 소산이다. 문명화 이후 수백 년 동안 미혼모는 버림받거나 모욕을 당했으며, 최악의 경우 살해까지 당했다. 수렵채집 시대의 상 호존중과 자율성을 특징으로 하던 남녀관계가 농업이 시작되면서 주인-노예 같은 관계로 변질된 것이다. 인간 존엄성이 이렇게 비극 적이고 지속적으로 몰락한 것은 새로 권력을 쥔 남자들이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기 위해 혈통을 확실히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 폭력적이고 공격적인 사회는 자연스럽게 자기복제를 한다. 신경 심리학자 제임스 프레스콧James Prescott은 부족들의 문화를 메타분 석하다가 어머니와 자식 사이의 유대감이라는 단 한 가지 기준만으 로 49개 부족문화가 평화적인지 살인을 저지를 정도로 폭력적인지 를 80%의 정확도로 예측할 수 있음을 알게 됐다. 나머지 20% 기준 은 젊은이들의 성적 표현에 대한 반응이었다. 성적인 표현을 용인하 는 사회는 평화로웠고 비난하는 사회는 폭력적이었다. 프레스콧은 다음과 같이 단언한다. “간단히 말해 애정 어린 유대라는 이 두 가지 기준은... 전 세계에 분포된 이 49개 부족사회가 평화로운 사회일지 폭력적인 사회일지를 100%의 정확도로 예측할 수 있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어머니와 젖먹이의 접촉 부족이 성인기의 잦은 과음, 폭력적 행동, 자살률, 우울증, 기타 문제행동의 상당한 원인이라는 것이 통계로 증명됐다.
- 발달심리학자 피터 그레이Peter Gray는 어린이를 그 자체로 존중하는 수렵채집인들에 대한 글을 많이 발표한다. “수렵채집인들은 아이를 대하는 태도가 성인을 대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들은 모든 사람의 욕구는 똑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힘으로 아이들의 행동을 통제하지 않는다. 나이에 상관없이 각자에게 무엇이 필요한 지는 본인이 가장 잘 안다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다.” 그레이는 이러 한 개인의 자율성이 수렵채집사회의 생태적·경제적 환경과 연관이 있을 거라고 본다. “아이들은 특정인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무리 전체에 의존하기 때문에, 누군가가 - 부모를 포함해서- 그 아 이들을 마음대로 지배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 부모한테서 야단을 맞은 아이들은 별다른 제지 없이 다른 오두막으로 간다. 그 오두막은 대부분 조부모 집이거나 부모의 형제들 집이다.”
- 여자들에게 인기가 없으면 여자들이 사악해 보이지 .... (미국 락그룹 도어즈The Doors, 사람들은 이상해People Are Strange))
- 기독교라는 종교의 중심인물은 처녀 어머니에 의해 성관계 없이 잉태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이야기를 쓴 사람들이 성적으로 무슨 문제라도 있었던 걸까? 기이하지만 천국도 섹스와 완전히 무관한 곳으로 표현된다. 기독교의 이상하게 반에로티시즘적인 성격을 마 크 트웨인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인간은) 천국을 상상해 냈으면서도 인간의 가장 커다란 기쁨, 가장 중요하고 가장 우선적인 희열은 완전히 박탈해버렸다. ... 섹스 말이다! 그것은 마치 타는 듯 한 사막에서 길을 잃고 죽어가는 사람 앞에 구원자가 나타나서, 무 엇이든 말만 하면 구해주겠지만 물은 절대 안 된다고 하는 것과 똑 같지 않은가!”
- 모든 10대가 무차별적인 분노를 드러내는 건 아니다. 여러 사회에서 발견되는 증거들이 강력하게 시사하는 것은 우리가 사춘 기라고 명명한 난해한 시기는 사실 현대 사회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개념이라는 것이다. 인류학자 앨리스 슐레겔Alice Schlegel과 허버 트 배리Herbert Barry II가 산업화되지 않은 186개 사회의 10대 관련 보고서들을 검토해본 결과, 이들 중 절반 이상에 '사춘기'라는 단어 자체가 없었다. 그런 사회에서는 10대들이 정신장애의 징후를 거의 보이지 않았고 젊은 남자들도 반사회적 행동을 하지 않았으며, 사춘 기라는 단어가 있는 사회에서도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한 연 구에 따르면, 10대들의 분노와 연관된 문제들은 서구 사회의 영향력, 특히 학교교육과 대중매체의 영향력이 시작된 직후에 생기기 시작했다. 
- 우리는 결핍이라는 개념이 중심이 된 사회에서 자란 탓에 (생존을 위해 평생 악전고투했을 것 같은) 우리 조상들이 고통 없이 뭔가를 얻으며 살았다는 것을 쉽게 믿지 못하지만, 인류학자들의 관찰에 의하면 많은 수렵사회에서는 식량의 생산자와 소비자를 거의 구분하지 않 는다. 집과 먹을 것을 구하는 활동이 고되고 피하고 싶은 사회에서 라면 그런 일을 안 하는 사람들을 멸시하는 것이 당연하다. 왜 내가 너보다 힘든 일을 더 많이 해야 해?' 이런 마음인 것이다. 하지만 그 런 활동들이 한가한 시간에 즐겁게 하는 일(사냥, 산책, 물고기 잡기, 오 두막 수리하기, 아이들과 놀기)이라면, 이 논리는 힘을 잃는다. 사냥이 재 밌으면 그것을 가장 많이 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대우받 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 번영은 행복에 이르는 열쇠가 아니다. 이탈리아의 경제학자 파올로 베르메Paolo Verme는 '자유와 통제력'이 주관적인 삶의 질 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임을 밝혀냈다. 다시 말하면, 행복과 가장 가까운 자유란 오로지 다음 달 빚을 갚기 위해 일주일에 닷새 를 알람소리에 맞춰 일어나지 않을 자유, 하기 싫으면 면도와 넥타 이(또는 브래지어)를 거부할 자유, '상사'라는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존 경하는 척하지 않을 자유를 말한다.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1932년에 통찰력이 빛나 는 매력적인 에세이 <게으름에 대한 찬양In Praise of Idleness)을 발표했다. 거기서 그는 “일의 도덕은 노예의 도덕이다. 그래서 현대 사회 는 굳이 노예제를 시행할 필요도 없다” 라고 했다. 2030년이 되면 자 동화로 인해 미국 내 모든 직업의 47%가 사라질 거라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연구가 정확하다면, 우리는 머지않아 일할 필요가 없고, 노 예제는 더더욱 필요가 없을 것이다. 거의 100년 전에 러셀은 이미 인간이 일하는 데 보내는 대부분의 시간이 완전히 낭비라는 것을 간파했다. “아무 필요가 없는데도 과도한 시간 동안 고집스럽게 일하는 것은 오로지 어리석은 금욕주의 - 보통은 자신의 의지도 아닌때문이다.” 그는 이 문제가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여가시간이 필요하 다는 주장이 부자들에게는 항상 충격’이라는 사실, 제1차 세계대전에 동원된 공장 노동이 그 후로도 계속된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고 봤다. 그의 에세이가 출판된 지 10년 후에는 또 다른 동원이 훨씬 더 대규모로 진행되었다. 그것은 결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군산복합 체'라고 명명한 체제로 자리잡았다. 러셀의 에세이에서 가장 인상적 인 대목은 마지막 단락이다. 그가 상상한 인류의 미래가 태곳적 우리 조상들의 삶과 거의 똑같기 때문이다.
- 무엇보다도 거기에는 과로와 신경과민과 소화불량이 아니라 삶의 기쁨과 행복이 있을 것이다. 해야 할 일은 여가의 즐거움을 더할 뿐 피로를 유발하지는 않는다. ... 평범한 남녀는 삶이 행복하기 때문에 더 친절해 지고 남을 덜 괴롭히고 덜 의심한다. 전쟁을 좋아하는 성향은 점차 사라 진다. 모두가 행복해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전쟁이 벌어지 면 언제 끝날지 모를 가혹한 노동에 모든 사람들이 동원될 터이기 때문 이다. 모든 덕목 중에서도 세상에 가장 필요한 것은 선한 본성인데, 선한 본성은 힘겨운 투쟁으로 점철된 삶이 아니라 편안하고 안전한 삶에서 온다. .... 기계가 발명되기까지 우리는 힘겹게 일해왔다. 그런 환경에서 우리는 어리석었다. 하지만 이제 어리석게 살 이유가 영원히 사라졌다.
- 사냥하는 인간'이라는 제목으로 1966년에 열린 인류학학회에서 마셜 살린스Marshall Sahlins는 학계 최초로 선사시대의 삶에 대한 스주의적 이론체계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했다. 최초의 풍요로운 사회'라는 주제의 심포지엄에서 살린스는 내가 이 책에서 주장한 다 양한 관점들을 소개했다. 몇 년 후에 그는 《석기시대 경제학Stone Age Economics》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논제를 좀 더 명확하 고 상세하게 설명했다. “가장 원시적인 세계의 구성원들은 개인 소 유물이 거의 없다. 하지만 가난하지는 않다. 빈곤이란 소유물이 적 다는 뜻도 아니고 수단과 목적의 관계를 가리키는 말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다. 빈곤이란 사회적 지위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빈곤은 문명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인류학자 뉴리트 버드-데이비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수렵채집인들은 단지 가난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신들이 '부유하다'고 여긴다고 말한다. "서구인들의 행동을 결핍이라는 전제와 관련해서만 이해할 수 있듯, 수렵채집인들의 행동은 풍요로움이라는 전제와 연관 지을 때 이해할 수 있다. 과연 고결한 야만인이다.
- "욕심은 좋은 것이다”라는 메시지는 황당할 정도로 극심한 빈부격 차 사회에서 그 수혜자들의 수치심을 덜어주는 데 이용되었다. 하지 만 수치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메시지는 인류의 가장 뿌리 깊은 가치관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비인간적인 경제체제를 옹호하면서 돈 버는 게임에 서 이기기만 하면 기쁨과 행복을 누릴 거라고 끊임없이 재방송을 한 다. 하지만 30만 년을 이어온 우리 조상들의 경험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기심은 문명을 이루는 데 핵심 역할을 할지 모르 지만, 진화한 인류의 본성에서 한참 벗어난 문명화가 과연 인간에게 맞는 것일까.
- 어쩌면 우리 인류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죽음이라는 유일한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삶의 모든 아름다움을 희생시키고 토템과 터부와 십자가와 제물, 교회탑, 이슬람사원, 종족, 군대, 깃발, 민족에 우리 자신을 가둔다는 것이다. (제임스 볼드윈James Baldwin)
- 만물은 전진하고 나아갈 뿐 사라지지 않는다. 멸망하는 것은 없다. 그리고 죽는 것은 우리의 예상과 달리 오히려 행복한 것이다. (월트 휘트먼)
- 흔히 의사들과 의료 시설들도 환자에게 아무 이득이 없는 비싸고 고통스러운 처치를 하고, 정도를 벗어난 경제 보상을 받는다. 매년 총 의료비의 30% 정도가 사망하는 환자들의 5%에게 들어가며, 그중 3분의 1은 죽기 마지막 한 달 동안에 집중적으로 쓰인다. 말기 환자를 평화롭게 보내는 데 드는 비용은 얼마나 돼야 할 까? “삶의 어떤 단계에 이르면, 공격적인 치료는 승인받은 고문으로 볼 수 있다.” 보런의 결론이다.
외과의사로 의료계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몇 권의 책을 낸 아툴 가완디Atul Gawande 도 《어떻게 죽을 것인가Being Mortal》에서 비슷한 결론을 내린다. “우리 의료인들은 삶의 마지막 단계에 있는 환자들 을 끊임없이 가혹하게 갈취하지만, 그로 인해 발생하는 폐해에는 무 지하다.” 가완디는 이렇게 무심한 잔인함은 죽음을 외면하려는 태도 때문이라고 본다. “환자와 노인을 대하는 방식에서 우리의 패착은 그들에게는 안전하거나 더 오래 사는 것보다 중요한 목적이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 의사들이 관행적인 처치들을 거부하는 이유는 의료계의 과장광고 뒤에 가려진 실상을 잘 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심폐소생술을 보자. 텔레비전에서 묘사되는 심폐소생술에 대한 최근 조사를 보면, 75%가 성공했고 그 환자들의 67%가 집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나왔 다. 하지만 실제로 심폐소생술을 받은 환자 중 한 달 이상 생존한 환자는 8%였고, 이들 중 일상생활에 가깝게 복귀한 환자는 3%에 불과했다.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가정의학과 임상조교수로 근무 하는 켄 머리Ken Murray 박사는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들려줬다. “심폐소생술만 하면 대부분 목숨을 구한다는 인식이 퍼져 있지만, 사실 그 성적은 초라하다. 나는 심폐소생술을 받고 나서 응급실에 실려온 환자를 수백 명이나 봤지만, 병원을 걸어나간 사람은 심장질환이 전 혀 없던 건강한 남자 딱 한 명이었다. 환자가 병이 깊거나 노령이거 나 암 말기라면 심폐소생술로 좋은 결과가 나올 가능성은 아주 희박 한 반면 고통을 가중시킬 확률은 극대화된다.”
오래 사는 것이 당연히 더 좋다는, 순전히 양적인 기준을 받아들 인다 해도 삶의 막바지 치료를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태도는 옳 지 않다. 많은 연구에 의하면, (치료보다는 통증 완화에 집중하는) 호스피 스에 입원한 환자들은 병원에 입원 중인 환자와 비슷하게 오래 살거나 더 오래 산다. 2010년에 〈뉴잉글랜드 의학저널New England Jourmal of Medicine)에 발표된 한 논문에 의하면, 폐암 말기 환자들 중 일반 적인 암 치료를 받으며 완화 치료 상담도 받은 이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항암 치료를 중단하고 일찍 호스피스 돌봄을 시작했으며, 그로 인해 삶의 마지막 단계에서 상당히 호전된 삶의 질을 누렸다. 그리 고 초기에 완화 치료를 받은 환자들 중 소수는 공격적인 말기 치료 를 받았지만, 그들도 생존기간이 25%가 더 길었다. 전문가들의 결 론은 다음과 같다. “초기의 완화 치료는 삶의 질과 심리에 상당히 긍 정적인 효과를 이끌어낸다. 초기에 완화 치료를 받은 환자들은 표준적인 치료를 받는 환자들과 비교해서 말기에 공격적인 치료를 선택 한 비율이 낮았지만 그들도 더 오래 살았다."
- 늘 죽음을 직면하며 사는 수렵채집인들은 궁극적으로 종말을 피 할 수 없음을 잘 안다. 《어제까지의 세계The World Until Yesterday》에 서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수렵채집사회에서 극도로 노쇠해지거나 병 이 말기에 이르렀을 때 삶을 끝내는 다섯 가지 방식을 소개한다. 어 떤 부족은 그런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그냥 내버려둔다. 어떤 부족 은 거주지를 옮길 때 죽어가는 사람들을 두고 떠난다. 이누이트족, 크로우족, 아쿠트족 같은 부족들은 바다로 몸을 던지거나 절벽에서 떨어지는 방식으로 목숨을 끊도록 장려한다. 그보다 적극적인 방식 은 목을 조르거나 뒤통수를 치는 식으로 '자발적인 자살을 도와주 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 노약자가 부족의 이동속도를 따라오지 못하거나 공동체에 폐를 끼치면 희생자 모르게 또는 동의를 받지 않고 그렇게 죽이는 방식이 있다.
- "병 없이 사는 기간은 줄어들고 병을 앓으며 사는 기대수명이 늘어 났다. 기능 상실 면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기간이 늘어난 것뿐이다.” 우리는 결국 수명을 연장시키지 못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그저 우리의 고통을 슬로모션으로 겪게 되었을 뿐이다.
- 전 세계에서 널리 사용되던 환각제가 밀려난 것은 종교 지도자들의 악의적인 억압 때문이다. 식물성 약물로 누구나 자유롭게 신을 만난다면 신에 대한 그들의 독점적 지위가 흔들린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스페인인들이 멕시코를 정복하던 시기에는 실로시빈 버섯 - 아즈텍인들은 이것을 '신의 육신'이라 불렀다 - 을 소지하는 것도 처형감이었다. 스페인인들이 섬기던 신은 사실 '질투하는 신'이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유럽의 원주민 치료사들은 종종 피부에 5-메톡시디 메틸트립타민과 부포테닌이라는 강력한 두 가지 성분이 있는 두꺼 비나 광대버섯을 이용했는데, 기독교가 전래된 후에는 그것들이 사용 금지됐다. 그 버섯과 두꺼비는 독성이 강했기 때문에 약물을 직접 복용하지 않고 점막을 통해 혈류로 흘러들어가게 하는 방식을 썼다. 초기 치료사들은 대다수가 여성이었는데,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이 마법의 약물을 주입하는 한 가지 방법은 남근 형태의 지팡이를 약물에 담근 다음 그것을 질점막에 문지르거나 그 안쪽에 문지르는 것이었다. 기독교는 이런 관습을 근절하기 위해 여성 치료사들을 말 그대로 악마화했고, 오늘날까지도 '마녀'는 남근을 상징하는 빗자루를 타고 다니는 모습으로 나온다.
- 실로시빈을 비롯한 향정신성 천연 화합물은 수천 년 동안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신비 체험을 활성화 시킨다는 것도 입증되었다. “그런 신비 체험은 환자에게 살아 있는 시간을 감사하게 여기는 마음을 불러일으켜서 실존적 행복감은 높 이고 암으로 인한 충격은 완화시킵니다. 환자는 자신이 죽음의 과정 에 있는 게 아니라, 사실은 죽음의 순간까지도 살아 있다는 것을 자 각하죠. 궁극적으로 환자들은 삶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암 후반기에 가장 먼저 잃는 인간관계를 풍부하게 누려 죽음을 덜 두려워하고 삶을 더 많이 껴안게 됩니다.”
- 실존적 공포의 감소는 근대 의료계에서는 전례가 없는 일이겠지만, 인류 역사에서는 분명히 입증된 현상이다. 향정신성 버섯을 다양한 의식에 이용했음을 보여주는 고고학적 증거는 적어도 5,70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오늘날의 주요 종교들이 생기기도 전이다. 역사학 자들은 그런 버섯들이 고대 힌두교 경전 《베다vedas》에서 언급한 소 마soma, 혹은 호메로스 Homeros가 《오디세이아The Odysseia》에서 '망 각의 묘약'이라고 한 망우초(忘憂草, nepenthe)일 거라고 추정한다. 
- 이 책의 주제는 가장 바람직하고 가장 지속적인 발전은 과거에 대 한 이해가 바탕이 된 발전이라는 것이다. 융은 "기억 꿈 사상》에서 "발전에 의한 개혁, 즉 새로운 방법과 과학기술에 의한 개혁은 물론 처음에는 대단해 보이지만 어딘가 수상쩍고 결국은 어떤 방식으로 든 큰 희생을 치르게 된다”라고 했다. “새로운 개혁은 절대 인류 전 체의 만족과 행복을 증진시키지 않는다. 반면, 전통 방식에 의한 개혁은 대체로 희생이 적고 더 지속적이다. 더 단순하지만 더 많은 시행착오를 통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과거를 미래의 지침으로 삼는 것이 그리 기이한 일은 아니다. 우 리 선조들이 살아온 방식을 알아야 우리가 사는 인간동물원을 어떻 게 설계해야 할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마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미래의 최고 단계를 앞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괴베클리 테페가 쓰레기처럼 파묻힌 이후 인간의 역사를 형성했던 수많은 속박을 벗어던진 미래 말이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철학과 종교의 세계사  (0) 2021.08.12
처음 읽는 돈의 세계사  (0) 2021.08.12
세계사를 결정짓는 7가지 힘  (0) 2021.05.25
침대위의 세계사  (1) 2021.05.25
세계사를 바꾼 6가지 음료  (0) 2021.05.06
Posted by dalai
,

- 어리석은 사람은 경험에서 배우고, 현명한 사람은 역사에서 배운다. (비스마르크)
-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왜 문명이 발달하지 못했을까? 이 질문은 동시에 '왜 고대 그리스와 지중해 세계에서는 그토록 일찍 문명이 탄생했을까?'라는 질문을 내포하고 있다. 그 대답 중 하나를 나는 말[馬]' 이라는 동물에서 찾고자 한다. 사실 나는 다른 책에서 “만약 말이 없었다면 21세기는 아직 고대를 벗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라고 쓰기도 했다.
문명의 발상까지는 몰라도 최소한 말의 유무로 문명 발달 속 도가 크게 달라졌다는 주장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20세기 를 대표하는 독일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년)도 『역사의 기원과 목표』에서 말을 언급했다.
- 말은 사람과 물자를 더 멀리 더 빠르게 전할 수 있게 해주었다. 또 전차와 기마부대로 막강한 무력을 행사할 수 있게 해주기도 했다. 한마디로 말은 인간사회가 문명 단계에 접어드는 결정적 견인차 구실을 했다.
이 시점에 이렇게 반문하고 싶은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다. 아 메리카 원주민도 말을 타고 다니지 않았나요?'라고. 그렇지 않다. 이는 미국 서부극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집어넣은 그릇된 정보다. 15세기에 유럽인이 찾아오기 전까지 아메리카 대륙에는 말이 없 었다. 그렇다면 이 대륙에는 원래부터 말이 없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오래전에는 아메리카 대륙에도 말이 존재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1만 년 전까지만 해도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말이 뛰어노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증거가 있다. 실제로 그곳에서 말 화석이 수없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많은 말이 왜 모두 사라졌을까? 놀랍게도 초기에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한 사람들이 수천 년간 모조리 잡아먹어 멸종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1. Tolerance : 로마는 '관용'의 힘으로 세계제국을 건설했다. - 로마는 어떻게 번영을 이루었으며 쇠퇴하고 멸망했는가
- “로마인은 갈리아인 (켈트계·게르만계)에게는 체력과 활력에서 뒤 지고 히스파니아인 (이베리아반도인)에게는 머릿수에 밀린다. 그들은 또 에트루리아인에게는 대장장이 기술에서 뒤처지고 그리스인 에게는 학예 능력 면에서 당해낼 수 없다. 그렇다면 로마인은 어떤 점에서 뛰어날까? 바로 '종교적 경건함' 이다.” (키케로)
폴리비오스는 키케로가 언급한 로마인의 종교적 성실성이 개인 의 이익보다 공공의 안녕을 중시하는 국민성을 낳았고 그 정신이 로마를 하나의 강력한 국가를 이루는 근원적 힘이 되었다고 본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그는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적용한 국정 시스템이 국력을 나라 밖으로 쏟을 여지를 마련해준 덕분에 강대한 로마제국이 탄생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 그리스의 패전 장수는 죽을 때까지 싸우거나 패 배하고 비루하게 목숨을 부지한 경우 다른 나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달리 로마의 패전 장수는 전쟁에서 맛본 쓰라린 치욕을 떨쳐내기 위해 다음 전쟁에서 그야말로 죽을 각오로 싸움에 임했다.
로마인들은 그런 마음에 기대를 걸고 패전 장수에게 기꺼이 명예를 회복할 기회를 주었다. 그런 로마인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기원전 100~44년)를 꼽을 수 있다. 카이사르는 자신도 실패를 딛고 일어선 경험이 있어서인지 부하 장수나 병사들의 실수나 실패를 무조건 질책하지 않고 관대하게 대하며 스스로 만회할 기회를 주고자 항상 노력했다.
로마인이 지닌 '관용'과 '패자 부활전을 허용하는 자세는 로마를 강대국으로 발돋움하게 하고 수백 년 동안 패권을 유지하게 해준 근원적인 힘이 되었다. 실제로 로마의 유명한 장수들은 누구나 한 번쯤 쓰라린 패배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죽음보다 더한 굴욕감을 딛고 자신에게 주어진 다음 전쟁을 승리로 이기는 데 크게 공헌했다.
- 사람이 아무리 치욕적인 일을 겪는다고 해도 이후 그가 어떤 자세로 임하고 또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 그 치욕을 상쇄시키고도 남을 만큼 큰 명예를 얻을 수 있다. 이 진리를 잘 아는 로마인은 무슨 일이든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끈기 있게 매달렸다. 또 근성과 인내력을 바탕으로 그리스와는 달리 마침내 대제국을 건설했으며 오랫동안 패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 로마제국에서 관용 정책을 가장 탁월하게 활용한 지도자는 카이사르다. 라틴어에 '클레멘티아 카이사리스(Clementia Caesaris, 카이 사르의 관용)'라는 말이 널리 회자하고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그렇다면 카이사르는 과연 뼛속까지 관용으로 가득 채운 관용의 화신 같은 인물이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카이사르는 본래 매우 입체적인 인물이었지만 '관용'의 측면에 서도 그러했다. 오늘날 누구나 관용 하면 카이사르를 머릿속에 떠올릴 정도로 그는 관용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동시에 그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잔혹한 행위를 저지르는 사람이기도 했다. 카이 사르가 관용적인 사람인 것은 일면 맞지만 그가 관용을 베푼 대 상은 어디까지나 로마 시민과 로마에 철저히 복종하는 사람뿐이었다. 반대로 그는 로마에 끝까지 맞서고 저항하는 이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벌할 때 갈리아인들에게 보인 그의 자 세와 대처는 유명하다. 그는 로마의 목에 칼을 들이댄 갈리아인을 막강한 군사력으로 가차 없이 제압한 뒤 많은 사람을 잔혹하게 처형했다. 이후 갈리아인이 복종의 뜻을 표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백 팔십도 태도를 바꿔 관용의 자세를 보여주었다.
-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Plato, 기원전 427?~3472년)은 인간의 '흥미'와 관련해 유익한 통찰을 남겼다. 플라톤은 인간에게 세 종류의 흥미가 있다고 했다. 그것은 첫째 '지식', 둘째 '돈벌이’, 셋째 '승리'다. 그는 사람은 대부분 이 세 가지 중 하 나로 움직인다고 말했다. 놀랍게도 이 주장은 그리스, 카르타고, 로마에 딱 들어맞는다. 실제로 그리스인은 지식, 카르타고인은 돈벌이, 로마인은 승리에 강한 흥미를 보였다. 플라톤이 활동하던 시대에 로마는 아직 작은 도시국가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플라톤이 로마라는 나라의 존재를 알았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다. 그런 터라 플라톤이 한 위의 말이 딱히 로마를 두고 한 말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레고 조각을 끼워 맞추듯 그리스인과 카르타고인과 로마인에 적용해보면 신기할 정도로 각 민족의 성향과 잘 맞아떨어진다. 일본 평론가 모리모토 데쓰로(森本哲?)는 『어느 통상국가의 흥망 - 카르타고의 유서」에서 “로마는 미국, 그리스는 유럽, 카르타고는 일본을 닮았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고대 그리스와 유럽은 둘 다 자국의 역사와 문화에 무한한 긍지를 느낀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으며 지식을 얻는 일에 강한 흥미를 보인다는 특징이 있다. 카르타고는 비교적 작은 영토를 가진 나라지만 당대 무역을 독 점하던 경제 대국이었다. 제2차 포에니전쟁에서 로마에 패배한 후 카르타고는 군사력을 상실했으나 경제 부흥을 통해 다시 나라를 일으켰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일본이 경제력으로 국력을 회복한 모습과 절묘하게 겹친다. 카르타고인과 일본인은 모두 돈벌이에 매우 관심이 많은 민족이다.
- “내일 죽을 것처럼 살고 영원히 살 것처럼 배워라."
Live as if you were to die tomorrow. Learn as if you were to live forever. (간디)

2. Simultaneity : '동시대성'이 역사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킨다. - 한제국과 로마제국, 공자와 소크라테스, 석가모니와 조로아스터의 탄생
- 3세기 거의 동시에 찾아온 절체절명의 위기를 로마제국은 위태위태하게 넘어간 반면 한제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두 나라의 결말이 일란성 쌍둥이처럼 완전히 똑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같은 해에 등장한 동양과 서양의 세계제국이 거의 같은 시기에 존망의 기로를 맞이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척 흥미롭고 주목할 만한 '역사의 동시대성'이라고 할 만하지 않은가.
- 기원전 1000년대에도 흥미로운 '동시대성'이 존재했다. 바로 '사상'의 탄생이다. 당시 문명 선진지역인 그 리스, 오리엔트, 인도, 중국 등지에서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우후죽순 사상과 철학이 태동했다.
먼저, 그리스에서는 호메로스부터 이오니아 철학을 거쳐 소크 라테스와 플라톤으로 대표되는 그리스철학이 탄생했다. 오리엔 트에서는 예레미야 등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예언자가 나 타났다. 오늘날 이란 부근에서는 배화교의 시조 조로아스터가 태 어났다. 인도에서는 우파니샤드 철학이 출현했고 뒤이어 불교  창시자 고타마 싯다르타가 탄생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공자, 노자 를 필두로 '제자백가'라고 부를 정도로 무수히 많은 사상가가 등장했다.
- 물론 이들 사이에는 200~300년의 시간 차이가 있지만 오늘날 까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사상과 철학이 왜 이 시기에 일제히 꽃을 피웠는지는 아직도 역사학의 수수께끼의 하나로 남아 있다.
이 시기에 특별히 주목한 철학자가 있다. 20세기 독일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다. 그는 이 시대를 축의 시대 (Achsenzeit)'라고 불렀다. 그 이유는 이 시기에 꽃피운 사상이 모두 이후 인류 사상의 근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 나는 동시대에 세계 각지에서 수많은 사상가가 출현한 이 현상 을 기원전 2000년대에 일어난 문자, 일신교, 화폐 등의 탄생과 별 개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간소화한 문자가 널리 보급 되면서 민중 사이에 읽고 쓸 줄 아는 지식계급이 탄생했으리라는 점은 누구나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또 화폐 탄생이 교역을 활발하게 만들어 사람들이 더 광범위한 정보를 얻게 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으리라고 본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일신교가 등장한 배경에는 신들 사이에 위계질서가 생겨나 인간의 사상과 가치관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추정할 수 있다. 한데 초월 신 개념은 사람들이 일상에서 친숙하게 느끼던 신의 세계와 다소 멀어지게 만들지 않았을까? 아 무튼 사람들은 기존 신을 대체할 새로운 삶의 길라잡이를 찾아야 했다. 광범위한 곳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다양한 정보를 비교하고 융합하다 보면 새로운 관점과 사상이 생겨난다. 그것을 문자로 기록 할 경우 더 먼 지역 사람들과 후대의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
현대 역사학은 알파벳과 일신교 등장, 화폐 탄생을 각각 별개의 사건으로 취급해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나는 이들 사건이 모두 당시 인간의 사고방식에서 같은 부분에 뿌리를 내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기원전 2000년대 후반부터 일어난 간소화 움직임 덕분에 '축의 시대'가 올 수 있었다고 본다.

3. Deficiency : ‘결핍(건조화)'이 문명을 탄생시켰다.- 문명 태동부터 도시국가를 거쳐 민주정 탄생에 이르기까지
-  '왜 유독 영국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다른 나라,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일어나지 않았을까?' 이 질문에 기존과 달리 새로운 관점으로 접근한 사람이 있다. 미국 역사학자 케네스 포메란츠(Kenneth Pomeranz)가 바로 그다. 그는 『대분기(The Great Divergence ? 중국과 유럽 그리고 근대세계 경제의 형성)』에서 각 지역의 생태환경 차이에 주목했다.
이 연구는 일종의 최신 지정학 연구로 보아도 좋을 만큼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영국은 다른 지역에 없는 행운을 누렸고 그 덕분에 산업혁명에 이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중 하나는 런던 등 일정 수준의 인구가 밀집한 지역 근처에 에너지 원인 양질의 석탄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에너지 자원 획득이 행운의 실체라는 얘기다. 세계는 인구 증가와 함께 에너지 자원인 목재가 부족해졌다. 산 업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의 상황이다. 18세기 이후 수백 년간 영국과 중국의 공업지대인 양쯔강 삼각주 지역의 연료용 목재 가격은 일곱 배나 폭등했다. 이처럼 전 세계가 에너지 부족에 시달리던 중 영국은 목재를 대신할 에너지원으로 석탄을 이용할 수 있었다. 새로운 에너지원을 획득한 영국은 생산성이 높아졌다. 사람들 의 생활 수준은 점점 좋아졌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인구 과잉 현상 이 일어났다. 자원이 있다고 물건을 너무 많이 생산하면 문제가 불거지게 마련이라는 것이 그 시절 사회적 인식이기도 했다.
바로 그 시점에 행운의 여신은 또 한 번 영국을 향해 미소 지었 다. 사실 영국은 멀리 떨어진 곳에 식민지를 두고 있었다. 그때까 지 영국은 잉여생산물 처리 시장 측면에서만 식민지의 가치에 주목하고 있었다. 하지만 본국의 남아도는 인구를 식민지로 내보냈을 때 얻는 이득도 상당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영국은 공업지역 근교에 있는 석탄을 에너지원으로 확보했고 광대한 식민지 덕분에 거대한 시장을 개척했다. 또 토지에 예속되어 있던 인구 부양력이라는 제약에서 풀려나 인구가 급증하면서도 일인당 소비량이 상승하는 기적이 발생했는데 바로 이것이 산업혁명을 촉발했다. 산업혁명 하면 가장 먼저 증기기관 발명에 따른 동력 쇄신이 동서의 명암을 갈라놓았다' 라는 말이 나온다. 사실 증기의 열을 기 계 작동 에너지로 활용하는 기술은 고대 지중해 세계의 사람들이 이미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로마제국에서조차 산업 근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생태환경이 기술 이상으로 중요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것도 그래서다.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서유럽은 이처럼 축복받은 생태환경에서 착실하게 성장했지만 아시아는 산업혁명을 일으킬 힘이 있으면서도 유리한 조건을 확보하지 못해 저 멀리 뒤처졌다. 그렇게 한 번 뒤처진 간격을 따라잡지 못한 채 시간이 흘러 19세기 제국주의 시 대로 접어들었고 격차는 더 많이 벌어졌다. 만약 산업혁명이 로마제국이나 한제국 시절에 일어났다면 이 정도로 큰 격차가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설령 100년의 격차 가 있었더라도 양 제국은 제각각 세계제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으리라고 본다.
- 하지만 18세기에 벌어진 50년 정도의 격차는 결정적이고도 치명적인 차이를 만들어냈다. 비교사 관점에서 아시아는 아직도 그 시절에 벌어진 격차를 완전히 따라잡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가 령 '국제화'라는 말도 따지고 보면 미국과 영국의 영어권 국가들을 중심으로 한 국제화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영어권 국가가 줄지어 선진국 반열에 들어서면서 그들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국제화 환 경을 만든 결과다.
케네스 포메란츠는 자신의 책에 '대분기’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는 산업혁명을 불러일으킨 약간의 생태환경 차이가 그야말로 서유럽과 동아시아의 이후 명암을 결정적으로 갈라놓은 분기점이 되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 대규모 건조화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이 물가 로 몰려든 일이 어떻게 문명 태동으로 이어진 걸까? 혹독한 겨울 추위를 이겨낸 땅속 식물 뿌리나 씨앗이 봄에 새싹을 틔우고 나무 를 키워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일과 비슷한 이치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건조화'와 '물 부족'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맞닥뜨린 인류는 역경을 극복하기 위해 지혜를 짜내야 했을 것이다. 살아남 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야 했을 것이다. 현실에 순응하 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열악한 환경에 맞서야 했을 것이다. 그런 역동적인 과정에 그 시대의 인간들은 좀 더 영리해지고 유능해졌을 것이다. 새로운 도구를 개발하고 기술을 발전시키고 마침내 찬란 한 문명을 이룩했을 것이다. 마치 식물이 겨울이라는 역경을 이겨 내고 이듬해에 싱싱한 새싹을 틔우고 탐스러운 열매를 맺듯 말이 다. 이렇듯 문명이 태동하고 성장하는 원리도 자연의 이치와 맥을 같이한다.
지구가 건조화해가는 열악한 환경에서 인류는 어떻게 고도로 발달한 문명을 이룩했을까? 잠시 이 점을 살펴보자. 먼저 생존을 위한 가장 필수적인 요소인 '물(강)'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크고 작은 마을이 만들어지고 그 마을 들이 통합되며 차츰 도시라고 부를만한 규모로 성장했다. 그 과정에 마을과 마을, 집단과 집단 사이에 물을 둘러싸고 하루가 멀다고 분쟁이 벌어졌다. 도시나 국가의 통치자는 이런 물 분쟁 문제를 무 엇보다 우선적으로 해결해야만 했다. 그런 필요에 따라 물 분쟁을 방지하는 '물 사용 시스템'이 개발되고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통치 자와 지배 계층은 이런 사실을 후세에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 이고 기록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문자가 탄생했을 것이다.
실제로 고대 기록을 살펴보면 거래기록 등 실무적인 기록이 꽤 많이 발견된다. 위에 언급한 대로 문자는 필요에 따라 생겨난 것이 므로 '왜 필요했는지' 파악하려면 당대의 사람들이 무엇을 기록했는지 확인하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다.

4. Huge Migration : '대이동’ 하며 세계지도를 다시 그린 민족들 - 게르만족 · 몽골제국의 드라마틱한 역사, 대교역시대부터 난민 문제까지
- "내 자손들이 비단옷을 입고 벽돌 집에 사는 날 내 제국은 멸망할 것이다.” (칭기즈칸)
- 4세기 무렵부터 게르만족은 엄청난 규모로 무리 지어 서로마제 국 영토로 물밀듯 밀고 들어왔다. 그들은 왜 갑자기 로마제국 영토 를 침범하기 시작했을까? 아시아에 살던 기마민족인 훈족이 서쪽 으로 옮겨옴에 따라 오랫동안 살아온 삶의 터전을 버리고 좀 더 서 쪽으로 이동한 것이었다. 이렇게 일어난 대규모 이동이 바로 '게르만족 대이동'이다.
전 세계적으로 한랭화가 일어나면 서쪽으로 이동해도 무슨 차 이가 있을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유럽에서도 서유럽은 멕시코 난류가 흐르는 덕분에 기후가 대체로 온난하다. 그때까지 게르만족 유입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무심히 관망하던 로마는 물밀 듯 밀려오는 이주 행렬을 더는 팔짱 낀 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다른 민족이 소규모로 들어올 때는 별 무리가 없다. 그러나 임 계점을 지나 허용치를 넘어설 지경이 되면 문제가 심각해지기 시 작한다. 정착 세력과 이주 세력 사이에 갈등과 알력이 발생하기 마 련이다. 오늘날 전 세계적인 이슈로 떠오르고 있는 유럽의 난민 문 제를 보면 어느 정도 실감이 날 것이다.
로마에서는 오늘날의 유럽 난민 문제와 비슷한 문제가 훨씬 큰 규모로 빈번히 일어났다. 평소에는 사소한 다툼으로 끝나던 일도 사람이 많아지면 자칫 폭동으로 발전하기 쉽다. 로마는 더 심각한 문제로 번지는 걸 막기 위해 진압에 나서야 했다. 이런 식으로 폭동과 진압이 반복되면서 잔 매에 장사 없듯 로마의 국력은 차츰 쇠약해져 갔다.

5. Monotheism : 유일신교는 왜 항상 분쟁의 씨앗이 되는가 - 세계사를 바꾼 3대 유일신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탄생과 발전
- - 『길가메시 서사시』나 『일리아스』 같은 고대 작품을 보면 오래된 작품일수록 사람들이 직접 신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고대인은 '신의 목소리'를 직접 들었다. 줄리언 제인스는 고대인이 들은 신의 목소리를 양원 정신'이라고 표현했다. 줄리언 제인스는 양원 정신이 좌우 뇌가 각각 만들어내는 현상이라고 주장한다. 현대 대뇌생리학 관점에서 우뇌와 좌뇌가 개별적으로 작동한다는 얘기다. 그는 인간이 명 확한 의식을 소유하면서 좌뇌가 발달하고 우뇌는 퇴화해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즉 신의 목소리는 우뇌 의 목소리'인 셈이다. 과학적으로 볼 때 인간의 뇌에서 그 같은 현상이 정말로 일어날 수 있을까? 이 점이 궁금했던 나는 뇌과학자에게 직접 물어보 았다. 그는 지금의 과학으로는 증명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양원 정신’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대답했다.
- - 사실 서구인에게 로마는 지금도 특별한 존재로 남아 있다. 로마는 광대한 지역을 오랫동안 평화롭게 다스린 강대국이었을 뿐 아니라 서구인의 뿌리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는 서구인의 자존심 원천인 동시에 그들의 이상이다. 서구에서는 이 의식을 '로마 이데아(Rom Idee)'라고 일컫는다. 이는 아시아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생소한 용어다. 굳이 번역하자면 로마적 이념' 또는 '로마적 이상'에 해당한다. 요컨대 기독교 세계의 정신적 지주로서 로마가 서구인 의 정신세계 밑바탕에 자리하고 있다는 의미다.  로마제국은 멸망했으나 오늘날까지 서구, 특히 유럽인의 마음 에 이런 생각이 뿌리내려 면면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조금 극단적 으로 말해 유럽인의 마음 밑바탕에는 지금도 로마의 재현, 즉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세계 통합'이라는 의식이 은연중에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 이 생각은 역사 속에 반복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예를 들면 신성로마제국은 이름부터 로마를 표방했고 프랑스혁명도 로마와 떼 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프랑스인이 혁명 후 사용한 관직명 '콘술'은 로마 공화정의 관직명을 그대로 채택한 것이다. 그다지 좋은 예는 아니지만 독일 나치스의 밑바탕에도 로마 이데 아'가 자리하고 있었다.
역설적으로 기독교가 이렇듯 전 세계적인 종교로 성장하지 않 았다면 이슬람교도 이렇게까지 커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 로마 이데아를 포함해 두 종교의 야망이 거대한 뱀처럼 꿈 틀대며 엎치락뒤치락하는 과정에서 세계를 양분하는 두 개의 거 대 종교로 성장했을 수도 있다.

6. Openness : 개방성'이 국가와 시대의 운명을 결정한다. - 왜 아테네나 스파르타가 아닌 로마가 강국이 되었다.
- "지성에서는 그리스인보다 못하고, 체력에서는 켈트족이나 게르만족보다 못하고, 기술력에서는 에트루리아인보다 못하고, 경제력에서는 카르타고인보다 못한 로마인이 이들 민족보다 뛰어난 점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가지고 있던 개방적인 성향이 아닐까.” (시오노 나나미(『로마인 이야기』 저자))
- 서양에서는 비록 신분 격차는 있어도 왕은 비교적 가까운 존재였다. 그처럼 친근한 존재였기에 민중은 왕의 행동과 관련해 자신에게 발언권이 있다는 의식을 하고 있었다. 이는 앞서 잠깐 소 개했듯 고대 로마의 시인 플로루스가 5현제 중 한 사람인 하드리아누스를 미주알고주알 험담했다는 이야기로도 잘 알 수 있다. 
- 서양에서는 민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최고 권력자의 권위로 이어졌다. 반대로 동양에서는 민중 앞에서 모습을 감춤으로써 권위를 만들었다. 실제로 서양의 위정자들이 민중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아무튼 거리감을 좁히려는 그들의 노력은 민중이 위정자의 국정 운영과 관련해 발언권을 행사해도 좋다는, 즉 어떤 의미에서는 민주주의적인 사고방식을 함양했다. 이러한 민주주의 토양은 서양이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길러온 것이다.
- 로마 황제는 사실 민중과 가까운 존재였다. 로마 황제 중 민중과 가깝게 지내며 친근하게 대한 황제는 의외로 많았다. 폭군으로 알려진 네로는 종종 민중 앞에서 노래를 부른 당대 인기 가수이기도 했다. 로마에서 속주로 파견한 총독 등은 당연히 민중 앞에 자주 얼굴을 보여야 했다. 가장 고귀한 신분인 황제마저 그토록 민중과 가깝게 지냈으니 총독이야 더 말해서 무엇하랴.
- 서양에서는 민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최고 권력자의 권위로 이어졌다. 반대로 동양에서는 민중 앞에서 모습을 감춤으로써 권위를 만들었다. 실제로 서양의 위정자들이 민중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아무튼 거리감을 좁히려는 그들의 노력은 민중이 위정자의 국정 운영과 관련해 발언권을 행사해도 좋다는, 즉 어떤 의미에서는 민주주의적인 사고방식을 함양했다. 이러한 민주주의 토양은 서양이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부터 길러온 것이다.

7. Nowness : '현재성'이 사라지면 역사도 사라진다 - 모든 역사가 '현재사'일 수밖에 없는 이유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 사이의 지속적인 상호작용 과정이자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다.” (에드워드 H. 카(역사가. 『역사란 무엇인가』 저자))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처음 읽는 돈의 세계사  (0) 2021.08.12
문명의 역습  (0) 2021.06.20
침대위의 세계사  (1) 2021.05.25
세계사를 바꾼 6가지 음료  (0) 2021.05.06
왜 세계사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는가  (0) 2021.04.27
Posted by dalai
,

침대위의 세계사

역사 2021. 5. 25. 20:53

-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침대는 남아프리카의 동굴에서 발 견되었다. 대략 7만 년 전에 현생 인류가 동굴 바닥을파내서 만든 침대들이 남아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 영어 bed'는 원시 게르만어 어원에서 땅바닥을 파내서 만든 쉼터'를 뜻한다. 이것은 적절한 설 명이었다. 최초의 침대가 땅을 파낸 구덩이였다는 특징 때문이 아니 라, 침대가 언제나 휴식을 취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침대는 휴식 말고도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난방이 잘 되는 집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우리 조상들이 자연과 환경에 취약했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한다. 잠을 어떻게, 어디서 잘는지는 언제나 보온과 안전성을 우선으로 해서 결정되었다.
- 빙하기 말이나 2세기 전 캐나다 북극권처럼 영하권의 추운 날씨가 이어지는 지역의 사람들은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고 낮이 짧아지면 침대로 파고들었고, 여러 겹의 털을 휘감고 깊은 겨울잠에 들었다. 4 천 년 전, 캐나다 북극권 배핀섬 인디펜던스 피오르의 겨울 집에 살던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몇 달간 반수면 상태로 지냈다. 이들은 두툼하고 따뜻한 사향노루나 황소 털가죽을 두르고 손닿을 거리에 음식과 연료를 쟁여놓고 서로 밀착해 웅크려서 지냈다.
오늘날에도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담요나 털가죽이나 옷가지를 뒤집어쓰고 땅바닥, 콘크리트 바닥, 마룻바닥에서 잠을 잔다. 하지만 5천 년도 전에 문명이 발생하면서 침대의 높이가 때때로 올라갔고, 이는 지식인층 사이에서 두드러졌다. 이런 고대 카우치 유물은 이집트의 건조한 기후 덕분에 고스란히 보존되었다. 투탕카멘이 통 치하던 기원전 14세기 중반, 침대는 이미 (우리가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기본 형태가 갖추어졌다. 다만 머리를 대는 쪽이 살짝 높았고 미끄 러져 떨어지지 않도록 아래쪽에는 발판이 세워져 있었다. 이후로 침 대가 잠을 자는 곳이라는 주제는 거의 변화하지 않았지만 침대 종류는 다양해졌다. 벽장형 침대부터 해먹, 낮은 워터 베드(물침대)와 바닥에서 5미터 가까이 띄운 침대도 있었다. 그럼에도 지난 5천 년 동
안 놀랍게도 직사각형의 형태는 변하지 않았다. 매트리스도 수천 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았다. 풀과 건초, 짚을 채운 자루나 천 가방이 수 세기 동안 기본 매트리스 구실을 했다.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이런 매트리스를 여러 개 쌓아올려서 벌레를 쫓고 충전재의 까칠 까칠한 감촉이 느껴지지 않게 했다. 21세기에 들어 수면과학 기술이 엄청나게 정교해지면서 불면증을 물리치기 위한 묘수와 엉터리 치료법이 난무하고 있다.
- 버지니아 공대의 역사학자 로저 에커치(Roger Ekirch)는 베어의 수면 연구에 자극을 받아서 이중 수면 패턴을 기록한 역사 문헌들 을 모으기 시작했다. 기원전 1세기에 쓰여진 리비우스(Livius)의 라틴어책 《로마사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둘 다 ‘프리모 솜노(primo somno)' 또는 콘큐빈 녹테(concubine nocte)', 즉 첫 번째 잠에 대하여 수차례 언급했다. 중세 시대에 제프리 초서 같은 작가 들은 영국인들이 이따금 이른 저녁에 ‘첫 번째 잠에 들었다가, 후에 깨어나서 아마도 무언가를 먹고, 다시 두 번째로 아침잠을 즐겼다고 적었다. 두 번째 잠은 한밤중을 넘기고 시작되었을 수도 있었다. 심야의 깨어 있는 시간을 영어권 사용자들은 'the watch' 또는 (watching 이라고 불렀다. 이때 사람들은 꿈을 되돌아보거나 이야기를 나누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음식을 먹거나 섹스를 나누기도 했다(유대인의 글에는 이 시간이 임신에 적기라고 충고한다). 또 다른 사람들 은 이 시간을 종교적인 목적으로 활용했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하면 괴로움을 느낀다. 예를 들어 잠을 적게 자던 윈스턴 처칠은 자신을 괴롭히던 우울증을 '블랙 독(black dog)' 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매일 밤 다섯 시간을 자도 건강에 전혀 지장이 없는 부류가 드물게 있다. 태생적으로 잠이 없다고 알려진 이 엘리트들은 긍정적이고 낙천적으로 생각했던 듯하다. 반대로 잠을 많이 자는 습관은 우울한 기분과 연관된다. 이중 수면 패턴을 끝장내는 데 누구보다 공헌한 토머스 에디슨은 태생적으로 잠을 적게 자는 위인에 속했다. 에디슨은 밤에 네 시간 정도 잤고, 때때로 사무실의 간이침대나 작업대 근처의 바닥에서 잠들었다고 한다.
- 1900년 미국 여성의 약 5퍼센트가 병원에서 분만을 했다. 1920년대에는 이 비율이 미국 대도시에서 65퍼센트에 달했고, 1955년에는 95퍼센트로 올라갔다.
오늘날 예비 '부모'는 아기를 낳기 전 각종 검사를 받는다. 또 미국과 영국의 산모 중 약 3분의 1이 제왕절개수술[caesarean section]을 받는다. 고대 로마의 과학자이자 철학자였던 대(大) 플리니우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Caesar)의 조상이 이런 방식으로 분만을 했다고 주장했다. 사실 이 명칭은 '자른다'라는 뜻을 지닌 라틴어caedere', 또는 로마법 렉스 카이사레아(Lex Caesarea, 황제령)에서 유래한 듯하다. 이 로마법에 따르면 임신한 채로 죽은 여성은 사망 직후에 분만이 허용되었다. 태아를 몸에 지닌 어머니의 장례를 치를 수 없게 한 문화적 금기 때문이었다. 무균수술과 마취제가 개발되기 전에 제왕절개 분만은 산모에게 죽음을 의미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산부인과 병원의 침대는 우리 대부분이 처음으로 만나는 침대가 되었다.
-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관련해서 침대는 적극적인 회복을 위한 공간에서 수동적인 출산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이런 전환은 여성 산 파가 남성 산부인과 의사로 바뀐 것과 일맥상통한다. 오늘날 산부인과 의사의 85퍼센트가 남성이다. 이전의 가부장 사회처럼 우리 사회 는 출산의 공로를 대부분 남성에게 돌리고 있다. 하지만 침대는 더 이상 여성이 오염되는 공간이 아니다. 출산과 관련된 수많은 질병이 치료되면서 한 달 동안 침대에서 나오지 못하는 불결한' 여성들은 이제 없다. 그 대신 여성들은 출산 후 며칠 만에 청바지를 입고 팔짝 팔짝 뛰어다니는 미디어 속 유명인을 따라 하라는 압박에 시달린다. 이것도 여성의 정신건강에 좋을 리 없다.
1970년대 초에 페미니즘 운동가들은 출산과 관련된 치료가 이해하기 쉬워야 하고 여성의 삶이 의료행위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 장했다. 출산은 질병이 아니므로 임신부 모두가 병원에 갈 필요는 없다면서, 일반 조산사의 부활을 옹호했다. 여성 운동가들이 가정출 산을 지지하면서 의사들과 갈등이 일어났다. 가정에서의 분만을 금지한 미국의 주는 없었다. 하지만 가정출산을 시행하는 의사들은 권 위의 상실과 심지어 의사자격증에 대한 위협을 받았다. 오늘날 조산사들은 미국 내 출산의 8.2퍼센트를 맡고 있다. 1980년 1.1퍼센트에 불과했던 수치보다 높다.
그런데 현대의 의학 덕분에 그 어느 때보다 인간은 안전한 삶을 살고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여성들이 자발적으로 병원 침대로 가는 이유이다. 이들은 대부분 장신구를 두른 오스투니의 여성 유골이나, 1631년 열네 번째 아이를 낳다가 죽어 타지마할에 묻힌 인도 왕비 아르주만드 바누(뭄타즈 마할), 1855년에 임신으로 인한 구토증(=입덧, 지속적인 구토와 체중감소, 탈수)에 시달리다가 죽은 소설가 샬럿 브 론테의 운명을 피할 수 있다. 산후조리를 하는 동안 침대는 삶이 갑자기 죽음으로 변할 수도 있는 장소였다.
- 임종 침대 둘레에서의 모임은 왕실에서만 중요한 것은 아니었 다. 임종 침대는 친구들과 가족이 망자를 (그리고 서로를) 지지하기 위해 모이는 사교장이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1세 시절 영국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보통 시신을 씻기고 수의를 입힌 후에 경제적 여유가 있으면 간단하게 방부 처리를 했다. 이 시신은 상여나 뚜껑 없는 관이나 망자의 침대에 놓였다. 그리고 조문이 시작되었고, 친구들과 가족은 시신을 묻기 전까지 망자를 결코 홀로 두지 않았다. 이런 전통은 20세기 중반까지 이어졌다.
가톨릭교는 임종을 지키는 관습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때 망자 의 운명이 갈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망자의 사후는 침대를 천사가 둘러쌀지 아니면 악마가 둘러쌀지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고요한 죽음은 천사가 승리했다는 표시였다.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도들은 인간의 운명이 마지막 1분으로 정해질 리 없다며, 이런 태도가 분명 임종 침대에 불안감을 가져온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개신교도인 엘리자베스 1세의 채플린은 여왕이 마지막 숨으로 곧장 천국으로 갔다고 주장하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그는 “여왕께서는 마치 양처럼 온화하게, 나무에서 익은 사과를 따듯 편안하게 이생을 떠나셨다” 라고 적었다.
이슬람에서도 가족과 친구들이 임종 침대 둘레에 모여들었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아랍어로 “알라는 유일신이고, 무함마드는 알라의 사자”임을 믿는다는 신앙 고백이 이어졌다. 원래 이 기도는 반복된 '라'음으로 편안하고 서정적으로 진행된다. 죽어가는 사람의 몸이 편치 않을 때에는 갓 태어난 아기에게 하듯 귀에 대고 성스러운 말들을 속삭여주었다. 죽은 후에 시신은 의식에 따라 씻기고 수 의가 입혀져 상여 위 관에 놓였다. 매장은 가능한 빨리, 보통 하루 이 내에 진행되었는데, 매장된 후에 조문 기간이 이어졌다. 이렇듯 신속하게 매장이 진행된 것은 위생과 부패 문제 때문이었다. 이슬람교는 물론이고 유대교도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화장을 금지했다.
16세기와 17세기 유럽의 유대인들은 임종 침대를 지키는 풍습을 미츠바(mitzvah), 즉 선행이나 종교인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유대인 공동체는 누구도 홀로 죽게 하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다. 죽어가는 사람은 열 명의 유대인 앞에서 고해를 하는데, 여기에는 일련의 기도가 포함되었다. 이후에 죽어가는 사람이 가족을 위해 축복을 빌거 나 기도를 했다. 죽은 후 시신은 24시간 안에 씻기고 매장되어야 했 다. 탈무드에 따르면 하느님은 “나는 너희 사이에 나의 형상을 두었 고, 너희의 죄로 인해 나는 그것을 뒤엎었다. 이제 너의 침대를 뒤엎 는다.”라고 말한다. 유대인 조문객들은 이 구절을 따라서 자신의 카우치나 침대를 엎어놓았다. 7일간 이어지는 시바 기간(shivah 기간, 부모·배우자와 사별한 유대인이 장례식 후 지키는 7일간의 복상服喪 기간 옮긴이)에는 바닥에 누워서 잠을 잤다.
- 서구인들은 마지막 말에 유달리 관심을 갖는다. 이런 유행은 인상적인 소크라테스의 죽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는 불경죄와 아테네 젊은이들을 타락시킨 죄로 고발되었 고 헴록(hemlock, 독미나리과의 다년초로, 독이 있어 사약으로 쓴다.)을 마시는 독약형을 선고받았다. 젊은 제자인 플라톤이 당시 사건의 흐름을 기록으로 남겼다. 소크라테스는 독약을 마시고 (아마도 침대에) 누워서 온몸을 시트로 덮었다. 독이 소크라테스의 발에서 머리로 차츰 퍼지면서 최고조에 이르렀다. 마지막 순간 소크라테스 는 자기 얼굴에서 시트를 내리고 지켜보던 친구에게 부탁을 남겼다. “크리톤, 내가 아스클레피오스(의료의 신)에게 수탉 한 마리를 빚졌 는데 자네가 대신 갚아줄 수 있겠는가?”
- 우리는 얼마나 겁먹으며 살아왔는가! 우리는 죽음과 맞서며 여기 까지 왔다. 살균된 시트와 격리 커튼이 있는 병원 침대는 우리의 생 명을 살려내는 곳이며 또한 우리 중 50퍼센트가 죽는 곳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이 병원이 아닌 곳에서 죽기를 바라는 소망을 이루지 못한다. 어쩌면 임종 침대에 사람들을 모아서 마지막 인사를 하고 용서를 건네는 전통을 되살리면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유족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침대 위에 시신을 뉘어서 모든 사람이 보고 받아 들이고 큰 북소리, 가슴 치기, 친구들의 지지, 큰 축제가 포함된 장례식을 여는 건 어떨까. 인간은 무엇보다 사교적인 동물이다.
- 옛날 사람들은 청결에 대해 각기 다른 생각을 가졌다. 이슬람교 도들은 흐르는 물로 규칙적으로 세정식을 해야 했다. 고여 있는 물 에서 씻는 행위는 불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서구의 상류층은 17세기 말 이전까지 거의 씻지 않았다. 엘리트층의 어린아이 들은 두세 살까지 목욕을 시키지 않았다. 1601년에 태어난 루이 13 세의 기록을 보면, 의사가 신중하게 고안하고 승인한 특별한 왕실 일정표에 따라 열일곱 번째 생일날을 앞두고 처음으로 목욕을 했다. 고 한다. 체액이 보존되어야 하고 또 물이 너무 많으면 건강을 해친 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15세기 무렵 유럽의 몇몇 논평자들이 위생과 도덕을 근 거로 공동 수면을 성토하기 시작했다. 가장 두려운 동물은 머릿니였 을 것이다. 머릿니가 있으면 사회에서 낙인이 찍힐 정도였다. 머릿니는 흔했지만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수시로 머리와 수염을 빗 고 감는 방법 말고는 마땅한 해결책이 없었다. 서캐와 머릿니를 잡 아 없애려 고안된 빗살이 가늘고 촘촘한 빗은 개인의 필수 소지품 이 되었다. 고고학자들이 튜더 왕조 시대의 난파선 메리 로즈(Mary Rose)를 발굴하면서 익사한 선원들 대부분이 빗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 중세 시대 유럽 사람들은 대부분 건초더미 위에서 잠을 잤다. 외투르 뒤집어쓴 채 바닥에서 자거나 짚을 채운 자루를 깔고 그 위에서 가죽 이나 담요를 덮고 잤다. 사람들은 공동주거지에서 온기를 찾아 난로 가까이에 모여서 자기도 했다. 이 주거지는 동물들과 함께 썼다. 사 람들은 자루를 건초로 채워서 침대를 만들었다. 영주의 눈에 든 이 들은 영주의 주 거주 공간 벽에 딸린 구석진 곁방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당시 침실은 창문에 유리가 없어서 외풍이 심했고 위생 상태가 형편없었다. 가장 중요한 영주만이 신화 속의 덴마크 왕 베어울프처 럼 높다란 침대를 가질 수 있었다. 베어울프는 자신의 침대 부근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수많은 용사들에 둘러싸여 잠이 들었다. 용사들 모두 갑옷만 아니라면 어디서도 잠이 들었다. 베어울프의 백성들은 1066년 잉글랜드를 정복한 노르만족에 비하면 거칠었다.
노르만족은 안락함을 선호해서 집을 지었고 영주는 응접실 역할 을 하던 방에서 잠을 잤다. 이 방들은 침실 겸 알현실로 사용되었고, 귀족부터 평민 농부까지 모든 사람이 응대를 받았다. 훗날 이 방들의 형태는 유럽 궁정의 공적 침실의 원형이 되었다.
- 2013년 인터넷의 개척자 구글의 빈트 서프(Vint Cerf)가 프라이버시 를 근래에 태어난 변종이라고 했을 때, 원색적인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서프의 말은 완벽한 진실이다. 프라이버시는 개인적인 비밀, 공적 영역과의 분리 개념으로 약 150년 전에 등장했다. 그러나 그 뿌리는 훨씬 더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흥미로운 사실은 근대적인 개념의 침실이 등장한 것은 불과 2세기 전 이었다는 것이다. 산업혁명 이전까지 프라이버시는 어느 인간 사회에서도 최우선이 아니었다. 돈 · 권위 · 안전 · 편리성에 비해 고독은 뒷 전으로 밀려 있었다.
선사시대에는 온기와 안전성이 보장되어야 하므로 프라이버시를 별로 지키지 않았다. 사람들은 화덕 가까이에 붙어 있거나 함께 웅크리고 지냈다. 십중팔구 아이들은 부모가 섹스하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가족 모두 붙어서 잠을 자거나 작은 집에서 함께 지냈기 때문 이다. 1929년 트로브리안드 군도 사람들의 성생활에 대한 인류학자 브로니슬라브 말리노프스키의 유명한 보고서에 따르면, 어른들은 자 신들의 섹스를 아이들에게 보이지 않으려 딱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 았다. 아이들이 빤히 쳐다보면 매트로 얼굴을 덮으라고 꾸짖는 게 전부였다. 한편 전통적인 수렵채집인과 극빈층 농민 사회에서 섹스 는 수면 공간이 아닌 야외에서 자주 이루어졌다. 보는 사람도 없고 움직임의 폭도 더 넓었을 것이다. 육식동물로 바글거리는 위험한 장 소나 자연환경에 살던 사람들에게 생존에 비해 프라이버시의 희생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예전의 북극 사회에서는 바깥에서 고독을 찾는 행위가 매우 위험하고 멍청한 짓으로 생각되었다.
- 프라이버시가 언제부터 개념으로 자리 잡았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아마도 통치자와 귀족들, 그 외 사람들이 구분되기 시작하면서 나타났을 것이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높은 침대에서 잠을 잤고 유력한 관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을 뺀 모든 사람이 매트나 땅바닥에 누워 잠을 잤다. 건축 기하학에 능했던 고대 아테네 사람들은 이따금 햇빛은 최대로 들이면서 공적인 노출은 최소화한 집들을 설계했다. 단어 'private'의 기원인 라틴어 'privatus'는 원래 관직을 맡지 않은 시민을 일컫는 말이었다. privatus'는 '나는 박탈한다, 빼앗는다' 뿐만 아니라 '나는 해방시킨다, 풀어준다'라는 뜻을
가진 'privo에서 유래되었다.
- 당시에도 오늘날처럼 프라이버시에 대한 논쟁이 일었던 듯하다. 소크라테스 같은 석학들은 사생활을 옹호하여 자신을 은폐하는 사람 들을 용납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는 고독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이 렇게 언급했다고 알려져 있다. “당연히 적절한 명예나 관직 어느 것 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정의조차도. 평등주의와 거리가 멀었던 로 마 사람들은 호화로운 시골 빌라든 우아한 호숫가든 도심의 대저택 이든 대놓고 자신의 부를 과시하고 즐겼다. 서기 77년 대 플리니우스 는 엄청난 재산을 가진 부자들이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고... 자신들 의 침실과 내밀한 공간... 심지어 은밀한 비밀도 낱낱이 까발렸다”라 고 적었다. 사실 로마의 주택 대부분은 딱히 구분된 침실이 없었고, 대신 이동 가능한 침대들을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옮겼을 뿐이다.
- 로마 사람들은 공공 목욕탕에서도 거리낌이 없었고, 그곳에 딸린 공동 화장실에서도 나란히 앉아 볼일을 봤다. 이 화장실에서는 칸막이로 나눈 흔적이 이따금 발견될 뿐이다. 이들은 볼일을 보기 위해 U자 형태의 구멍이 있는 좌석에 앉았고 볼일을 본 후에 낡은 천 쪼가리로 닦거나 스펀지를 붙인 막대를 함께 썼다. 그 사이에 스 스럼없이 대화를 이어갔다. 화장실은 사교와 공적 모임이 벌어지는 장소였다. 특권층이 사치와 과시를 누렸던 것에 비해 로마 시민 대 부분은 날림으로 지어진 비좁은 공동주택에 살았고 여기에 프라이 버시가 존재할 리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생활에 개의치 않았 다. 관청의 허가를 받은 매춘부와의 섹스는 (남성들에게) 비밀이 아니었고 공공연한 쾌락의 원천이었다. 폼페이의 한 벽에는 이런 낙서가 적혀 있다. “목욕·술·섹스는 우리의 몸을 망가뜨린다. 하지 만 목욕·술·섹스는 우리를 살 만하게 한다. 프라이버시는 세계 어디에서도 최우선이 아니었다. 기원전 5000년경에 등장한 중국의 '캉은 결코 사적인 침실이 아니었고, 여러 사람이 함께 자고 먹고 사 교하는 장소였다. 기원전 1000년경에야 점차 바닥보다 높은 침대에 서 잠들기 시작했다. 정교하게 새기고 금박을 입힌 엘리트층의 침실 은 조용한 휴식처라기보다 가구를 두는 공간에 가까웠고 사람들이 잠을 자고 손님을 접대하는 장소로 자리 잡았다. 옷을 보관하는 장소는 따로 있었다.
- 상업화가 진행되던 빅토리아 시대에 침실을 따로 쓰게 되면서 아주 다양한 상품이 개발되었다. 이 시기에 어린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마케팅(어린이 장난감과 가구를 포함해서)이 시작되었다.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하는 비즈니스가 활발해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 를테면 남자아이의 장난감과 옷, 가구는 파란색이고 여자아이들은 핑크색이라는 관념(부모가 물건을 두 배로 사주어야 함)은 제2차 세계대 전 이후에야 널리 알려졌다. 그 전에는 반대였다. 1918년의 한 패션업계 기사는 이러했다. “일반적으로 남자아이에겐 핑크색을, 여자아이에겐 파란색을 적용하는 규칙을 받아들인다. 핑크색은 확실하고 강렬한 색이라서 남자아이들에게 어울리는 반면, 파란색은 섬세하고 얌전해서 여자아이들을 더 예뻐 보이게 한다
- 19세기가 되자 침대와 매트리스는 중세 시대의 건초나 짚으로 채운 자루에서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다. 혼자 자는 것은 아직도 보편화되지 않았다. 앞에서 보았듯이 빅토리아 시대의 가정에서는 프라이버시를 중요시했음에도 침대 공유는 이 무렵까지 이어졌다. 침실의 분리는 실내에 계단과 복도가 발전하면서 가능해졌다. 계단과 복도를 통해 하인들과 다른 사람들은 다른 방들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한때 하인들은 남주인이나 여주인의 침실에서 잠을 잤으나 이제 하 인들도 위층이나 아래층에 자신만의 공간을 갖게 되었고 벨이 울리면 불려 갔다. 국가의 권력은 이제 더 이상 왕의 침실이 아니라 입법부와 행정부에 있었다. 따라서 침실은 호화로움이 약화되고 훨씬 사적인 공간으로 변화했다.
- 전용 침실이 여러 개 필요해지자 건축가들은 침실과 집 안 다른 구역 들의 관계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19세기에 남편과 아내의 침실은 때때로 1층에 있었고 공동의 공간인 응접실로 이어져 있었다. 가족과 하인, 성인과 어린아이들, 다 큰 아이들과 아기들이 분리되기 시작했다. 집안의 다른 가족들은 2층에서 잠을 잤고, 하인들은 더 높은 층에서 잠을 잤다. 지위가 올라갈수록 올라야 할 계단 숫자는 줄어들었 다. 이런 관습은 수세대 동안 지속되다가, 결국 1층 전체가 일상생활 에 할당되었다. 그리고 수면 공간은 위층으로 배정되었고, 각 공간은 복도로 연결되었다. 사생활에 대한 보호가 강화되었다. 하지만 단층 집이나 도심 공동주택에서는 침실을 어떻게 배치해야 할까? 두 가지 대안이 유행하게 되었다. 하나는 복도를 중심으로 침실을 배치하는 방식이었다. 또한 침실을 사교 공간들과 연결하는 방식도 있었다. 작은 집에서 침실 하나는 부모에게, 또 다른 침실은 아이들에게 배정되었다. 하인들은 지하층의 부엌에서 잠을 잤다.
- 미래의 침대는 당신의 모든 욕구를 충족시킬 수면 캡슐이 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수면 캡슐은 이미 존재하지만 보편화되어 있지는 않다. 수면 캡슐은 컴퓨터로 연결되어 있고 사용자의 안락한 정도를 점검하여 온도와 조명, 심지어 외부 소음 정도를 조절한다. 당연히 이 침대에는 자동 마시지기가 있어서 부드럽게 침대를 흔들고 우리를 조용히 그리고 가만히 깨워줄 것이다. 캐노피 수면 캡슐은 미디어 스 크린을 구비해서 커플이 일어나지 않고도 텔레비전을 보거나 웹사이 트를 검색할 수 있다. 잠이 손짓할 때는 버튼을 누르면 스크린이 블 라인드로 가려진다.
게임 콘솔과 HD 프로젝터 등 멀티미디어 오락기기를 갖춘 수면 캡슐도 있다. 원하는 대로 마음껏 침대를 조절할 수 있고, 매우 사적인 순간에 당신을 숨겨주는 블라인드도 설치되어 있다. 아니면 식물과 함께할 수 있는 생태형 식물 침대도 있다. LED로 빛을 주어 식물의 성장을 돕고, 당신을 잠들게 할 음악을 들려주는 스피커, 심지어 자가발전기도 있다. 여기서는 침대 주변의 모든 활동이 에너지로 전 환된다. 클라우드 침대(The Cloud)는 자력을 활용해서 부드러운 쿠션을 공중에 띄우는 것으로, 휴식을 취하거나 잠자기에 좋은 장소이 지만 그 밖의 다른 활동에 대해서는 비실용적이고 청교도적인 삶을 요구한다.
- 수면 캡슐, 캐노피, 자기부상 침대와 고급 워터 베드 모두 연결성 이라는 공통분모가 있는데, 이것은 불과 몇 년 전에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USB 포트와 블루투스를 설치한 매트리스도 있다. 당신의 침대가 스마트폰과 완벽히 동기화될 날이 멀지 않았다. 당신은 전세 계에 걸쳐서 인터넷을 검색하거나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침대에서 기상하는 시간, 온도를 낮추거나 음악과 빛 을 조절하는 미래 기술과 연결되어 있다. 당신은 컴퓨터가 만들어놓 은 환경에서 빈둥거리며 누리기만 하면 된다. 가상현실을 통해서 당 신의 매트리스가 꽃이 만발한 가운데,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 딩 위나 보름달과 별들 아래에 있을 수도 있다. 가까운 미래에 각 사용자에 맞춰 개별 난방과 냉방을 제공하는 매트리스를 갖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분명 당신에게 이야기책을 읽어줄 홀로그래 피 반려자를 개발해줄 것이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자동세척과 해충 제거 기능을 완비한 항균 매트리스라면 돈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과 마찬가지로 미래 세대는 당연히 안락한 표면에 기대고 싶어 하겠지만, 미래주의자들은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 을 것이다. 누군가는 공중 부양을 최고로 삼고, 당신을 공중으로 띄울 에어제트 침대를 상상한다. 아마 당신은 강력한 에어제트와 플로트에서 전화를 걸게 될 수도 있다. 베개에는 칩과 센서가 내장되어 당신의 바이털 사인을 측정하고, 수면 패턴을 추적하고 이상적인 기 상 시간을 알려줄 것이다. 천장과 벽은 낮 또는 잠을 불러오는 조명 으로 빛날 것이다. 내장 스마트폰으로 헤드셋, 음성과 센서로 난방 과 냉방을 조절하게 되리라고 미래주의자들은 말한다. 그리고 밀집 주거지와 더 작아지는 아파트를 고려해서 거실을 침실로 전환하는 자동 가구가 언급되고 있다. 수직룸은 더 흔해질 것이고, 어쩌면 우주인처럼 침낭에서 자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침낭이 안락함을 느낄 만큼 무중력 상태를 만들어낼 날이 올까?
- 우리 대부분은 우리 선조들이 알아볼 수 있는(우리의 매트리스가 훨씬 안락하겠지만) 매트리스에서 누워 잠을 잔다. 스마트 기기를 침대에 꼭 장착해야만 할까? 우리는 정말로 의학적 상태뿐만 아니라 음악 취향, 좋아하는 책, 좋아하는 물건 구입을 추적하는 전자기기를 원할까? 건강진단용 스마트워치와 칼로리 계산 어플에 중독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현실을 고려하면 답은 '그렇다'일 것이다. 곧 우 리는 슬립 트래커(sleep tracker)가 내장된 매트리스를 구입할 수 있 고, 이것은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이론적으로 시간에 따라 향상될 것이다. 슬립 트래킹은 당신의 수면을 더 스마트하게 만들어줄 것이 라고 주장한다(스마트하다는 게 무슨 뜻이든 간에). 매트리스가 최적의 수면 조건을 만들어줄 수는 있지만 당신의 수면 문제까지 해결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 대부분에게 숙면에 가장 효과적인 방안은 본업 포기, 일과 유지하기, 효과적인 다이어트, 적당한 시각의 취침, 규칙적인 운동, 잠동무와 즐기는 시간이 될 것이다.
한때 삶의 모든 과정이 역동적으로 펼쳐지던 침대는 어둠 속으 로 사라졌지만, 침대는 이제 가상의 세계에서는 사회적인 장소가 되 리라고 약속한다. 미국의 미술가 로리 앤더슨(Laurie Anderson)은 말한다. “기술은 우리가 둘러앉아 우리 이야기를 하는 캠프파이어입니다.” 그녀의 말은 일부 맞다. 기술을 통해 우리는 누구든 어떤 생각이 든 우리 침대로 가져오리라 기대할 수 있다. 우리의 조상들이 일상적 이라 여겼던 신체적 접근 없이..
무한한 연결과 완벽한 고립 이렇듯 오늘날의 침대는 이전과 마 찬가지로 우리의 삶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내일의 침대에 덮인 시트 를 잡아당길수록 우리는 미래를 더 잘 볼 수 있다. 미래는 공동체성 이 실종되는 악몽이 될 수도 있지만 상호 연결된 세상이라는 꿈이 될 수도 있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명의 역습  (0) 2021.06.20
세계사를 결정짓는 7가지 힘  (0) 2021.05.25
세계사를 바꾼 6가지 음료  (0) 2021.05.06
왜 세계사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는가  (0) 2021.04.27
부의 역사  (0) 2021.03.28
Posted by dalai
,

- 최초의 맥주가 언제 양조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기원 전 1만년 전에 맥주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거의 확실하지만, 기원전 4000년경에는 근동 지역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사실은 지금의 이라크에 해당하는 지역인 메소포타미아의 그림문자를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림에는 커다란 항아리에 갈대로 된 빨대를 꽂아 맥주를 마시는 두 사람이 그려져 있다. (고대 맥주는 표면에 곡물의 입자나 다른 찌꺼기들이 떠 있었기 때문에 부유물을 피해 맥주를 마시기 위해서는 빨대가 필요했다.)
현존하는 인류 최초의 기록물은 기원전 3400년경의 것인데 이들 문 서에도 맥주의 기원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내용은 없다. 그러나 맥주의 등장은 농경의 도입과 맥주의 원료인 곡물의 재배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인류의 생활 방식이 유목 생활에서 정착 생활로 전환되었고, 이어 최초의 도시들이 등장하고 사회의 복잡화가 급속하게 진행되었던 인류 역사의 격변기에 맥주가 등장한 것이다. 맥주는 선사 시대의 유산이며 그 기원은 문명의 기원과 밀접하게 얽혀 있다.
- 곡물은 처음에는 그렇게 중요한 식재로 여겨지지 않았지만 2가지 놀라운 특성이 발견되면서 그 중요성이 더욱 커졌다. 하나는 곡물을 물에 담그면 발아가 시작되고 단맛을 낸다는 성질이다. 완벽하게 물을 차단하여 방수가 되는 저장 구덩이를 만드는 것은 어려웠기 때문에 인간이 곡물 저장을 처음으로 시작하자마자 이러한 특성을 바로 발견했을 것으로 보인다. 달콤한 맛이 생기는 원인은 지금은 분명하다. 습기에 찬 곡물은 디아스타제diastase라는 효소를 만들어내고, 그 효소가 전 분을 맥아당麥芽糖, maltose sugar 또는 맥아麥芽, malt로 변환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은 어느 곡물에서도 발생하지만 특히 보리의 경우 훨씬 많은 디아스타제를 배출하고, 따라서 가장 많은 맥아당을 만들어낸다.) 당분糖分을 섭취할 수 있는 다른 식재가 거의 없었던 당시에 “맥아화 麥芽化, malted"한 곡물이 내는 단맛은 매우 중요했고, 자연스럽게 곡물을 물에 담갔다가 건조시키는 맥아 공법의 기술이 발전하게 되었다.
두 번째의 발견은 더욱 중요했다. 수일간 방치되어 있던 곡물의 옅은 죽에서, 특히 맥아화한 곡물이 들어있었던 경우에는 불가사의한 변화가 발생했다. 죽에서 가벼운 거품이 발생했고 그것을 마시면 기분 좋게 취했다. 즉 공기 중에 있는 천연 효모의 활동에 의해 죽에 함유되 어 있던 당분이 발효되어 죽이 알코올로 변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곡 물의 죽이 맥주로 변한 것이다.
그렇다고 반드시 맥주가 인간의 입술을 적신 최초의 알코올이라는 말은 아니다. 맥주가 발견된 당시에도 사람들이 과일이나 꿀을 저장하 려고 했을 때, 과즙 또는 꿀이 물과 섞인 상태에서 우연히 발효가 이루어져 (이는 와인이나 벌꿀 술을 만들기 위한 과정) 소량이지만 알코올이 자연적 으로 생겨났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과일은 제철이 지나면 쉽게 부 패하고 야생 꿀은 매우 제한적인 양만 채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기원전 5000년경에 최초로 등장하는 도기 없이는 와인이나 벌꿀 술은 오랜 기간 저장할 수 없었다. 반면, 맥주의 원료가 되는 곡물은 풍부했으며 쉽게 저장할 수 있었다. 따라서 맥주는 언제든지 필요한 만큼의 양을 확실하게 양조할 수 있었다. 도기가 등장하기 오래전부터 맥주는 역청을 칠한 바구니, 가죽으로 만든 가방, 짐승의 위장, 속이 텅 빈 나무, 커다란 조개 또는 돌로 만든 그릇을 사용하여 양조되었다. 아마존 유역에서는 19세기까지도 요리의 도구로 조개를 사용했고, 핀란드의 전통 맥주인 사티sahti는 지금도 속이 텅 빈 나무를 사용하여 양조되고 있다.
맥주라는 중요한 발견이 있은 후 사람들은 시행착오를 반복하면서 맥주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예를 들면, 옅은 죽 형태의 곡물에 맥아가 많고 발효 기간이 길수록 알코올 강한 맥주가 되었다
- 맥아가 많다는 것은 당질이 많다는 것이며, 발효 기간이 길다는 것은 더욱 많은 당질이 알코올로 변환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죽이 끊을 정도로 열을 높이면 맥주의 도수가 강해진다. 맥아 과정에서 보리 안 에 있는 전분의 약 15퍼센트만이 당질로 변환되지만, 맥아화된 보리를 물을 넣고 끓이면 고온에서 활성화되는 다른 전분 당화 효소들이 더욱 많은 전분을 당질로 변환시키고, 이처럼 많은 당질은 발효 과정을 통해 알코올로 변환된다.
- 메소포타미아의 양조자들은 바피르bappir라고 하는 맥주를 만드는 빵beer-bread의 첨가량을 조절함으로써 맥주의 맛과 색깔을 조절했다. 바피르는 발아한 보리를 작은 덩어리로 만들어 2번 구워 만드는데, 어두운 갈색에 이스트를 넣지 않은 단단한 빵으로 몇 년간 보전할 수 있었다. 양조자는 맥주를 만들 때 바피르를 꺼내어 잘게 부수어서 사용 했다. 기록에 따르면 바피르는 마을의 저장 창고에 보관되었고 식량이 부족했을 때에만 바피르를 먹었다고 한다. 따라서 바피르는 식재료라 기보다는 맥주의 원재료를 저장하기 위한 편리한 방법으로 중요한 의 미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맥주를 양조하는 데 빵을 사용하는 메소포타미아의 방법은 고고학자들 사이에 많은 논쟁을 야기했다. 일부 학자는 빵은 맥주를 만드는 과정에서 등장한 파생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반면, 다른 학자들은 빵 이 먼저 등장했고, 따라서 그 후에 맥주 양조의 한 요소로서 빵이 사용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빵과 맥주가 모두 곡물의 죽에서 파생 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걸쭉한 죽은 햇볕 아래에서나 뜨 거운 돌 위에서 구워지면 편편하고 둥근 모양의 빵이 되었고, 맑은 죽은 발효가 되도록 내버려두면 맥주가 되었다. 둘 다 같은 동전의 양면 이었다. 빵은 딱딱한 맥주였고, 맥주는 액체화된 빵이었다.
- 처음부터 맥주는 사회적인 음료로서 중요한 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3000~2000년 사이에 수메르인이 그린 그림은 두 사람이 빨대를 통해 하나의 항아리에 담긴 맥주를 마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당시에 맥주를 마시는 일반적인 모습이었던 것으로 추측된 다. 그러나 수메르 시대에는 곡물이나 찌꺼기 또는 맥주의 다른 불순물을 거르는 것이 가능했고, 또한 도기가 출현하면서 사람들은 각자의 컵을 사용해서 맥주를 마실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빨대를 사용하여 맥주를 마시는 그림이 매우 넓게 퍼져 있었던 것은 빨대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지만 그것은 하나의 의식으로 지속되었다는 사실을 시사해준다. 
- 그 이유는 어쩌면 음료야말로 음식과는 다르게 진정으로 공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여러 사람이 같은 항아리에서 맥주를 마 실 때 그들은 같은 액체를 소비하는 것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고기의 경우는 잘랐을 때 특정 부위가 다른 부분과 차이가 생기는 것이 일반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음료를 다른 사람들과 같이 마신다는 것은 호의와 우정을 표현하는 세계 공통의 상징적인 행동을 의미한다.
- 음료를 함께 나눈다는 것은 독이 들어 있지 않고 마셔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제공하는 사람을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의도가 담겨져 있다. 개인적인 컵을 사용하기 이전의 시대에 원시적인 용기에서 양조되었던 초창기의 맥주는 같은 용기에서 함 께 마셔야만 했을 것이다. 오늘날 맥주를 마실 때 손님에게 빨대를 제공하고 커다란 맥주 통에서 빨대를 이용하여 같이 맥주를 마시는 관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차나 커피의 경우에는 같은 포트pot를 이 용하여 와인이나 증류주는 같은 병에 담긴 것을 각자의 글라스에 따라 마시기도 한다. 그리고 사회적인 모임에서 술을 마실 때 잔을 부딪치 며 건배하는 것은 동일한 용기에 들어 있던 동일한 음료를 같이 마심 으로써 서로의 단합과 단결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행위다. 이런 것들은 고대에서부터 비롯된 전통들이다.
- 고대에는 음료, 특히 알코올음료에는 초자연적인 성질이 있다고 생각했다. 신석기 시대의 사람들에게 맥주를 마시면 취하게 되고 의식 상태에 변화가 생기는 현상은 불가사의하게 보였다. 동시에 보통의 죽이 맥주로 변화되는 신비로운 발효 과정 역시 불가사의하게 보였다. 그들이 내린 명백한 결론은 맥주는 신이 인간에게 내린 선물이라는 것 이다. 따라서 많은 문명이 어떻게 신이 맥주를 창조했으며, 어떻게 인 간에게 맥주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는지에 대한 신화를 가지고 있 는 것은 당연했다. 예를 들어, 이집트인은 맥주는 농업의 신이며 사후 세계의 왕인 오시리스Osiris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것이라고 믿었다. 어느 날 그는 발아한 곡물에 물을 섞어놓고는 잊어버린 채 햇볕에 내버려 두었다. 나중에 돌아왔을 때 곡물이 발효되었고, 그것을 마시고 기분이 너무 즐거워진 오시리스는 그 지식을 인간에게 전해 주었다는 것이다. 
- 맥주는 또한 건강과 더욱 직결되어 있었고, 메소포타미아인과 이집 트인 모두 맥주를 의약용으로 사용했다. 기원전 2100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니퍼라는 수메르 도시에서 출토된 설형문자 점토판 에는 맥주를 사용한 약제법 또는 의약 처방 리스트가 기록되어 있었 다. 그것은 알코올을 의약용으로 사용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 다. 이집트에서 맥주는 부드러운 진정제로 인정되었고, 그리고 허브와 향신료 등 여러 의학용 혼합물을 섞는 기본 재료였다. 맥주는 끓는 물 로 만들기 때문에 보통 물보다는 오염이 덜 되며, 다른 혼합 요소들이 맥주 안에서 쉽게 용해된다는 장점이 있다. 기원전 1550년경의 이집트 의 의학 사료인 “에버스 파피루스The Ebers Papyrus" - 보다 오래된 문헌 에 근거를 두고 있긴 하지만 - 는 약초를 이용한 수백 개의 처방전에 관한 내용이 있는데, 그들 중 많은 것이 맥주를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 면, 양파 반쪽과 거품이 있는 맥주를 혼합하면 변비에 효과가 있다고 했고, 올리브를 분말화해서 맥주와 혼합하면 소화불량을 치료한다고했다. 샤프란 (saffron, 크로커스 꽃으로 만드는 샛노란 가루로 음식에 색을 낼 때 쓴다. 역주)과 맥주를 섞은 것으로 여성의 배를 마사지하면 출산의 진통을 완화한다고 했다.
- 맥주는 요람에서 무덤까지 메소포타미아인과 이집트인의 모든 삶 속에 침투해 있었다. 그들이 맥주를 사랑했다는 것은 필연이라고 볼 수 있다. 복잡한 사회의 등장, 문자로 기록해야 할 필요성, 그리고 맥주의 대중화는 잉여 농산물이 없었다면 가능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비옥한 초승달 지역이 곡물 재배를 위한 최상의 기후 조건을 가졌기에 그곳에서 농경이 시작되었고, 그곳에서 최초의 문명이 탄생했고, 그곳 에서 문자에 의한 기록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맥주가 아주 풍부했다.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의 맥주는 홉hops을 포함하고 있지 않았지만 - 홉은 중세가 되어서야 맥주의 표준적인 요소가 되었다 - 맥주와 관련된 일부 관습들은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맥주가 더 이상 노동의 대가로 사용되지 않고, 사람들이 더 이상 “빵과 맥주”라는 말로 인사하지는 않지만, 맥주는 지금도 세계의 많은 지역에 서 여전히 노동자를 위한 중요한 음료로 여겨지고 있다. 맥주를 마시기 전에 건강을 기원하며 건배하는 것은 맥주에 마력과 같은 힘이 있다는 고대인의 믿음의 유산이다. 그리고 친밀하고 편안한 사회적 교류를 위한 맥주의 역할은 변하지 않고 남아 있다. 그것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음료라는 의미다. 맥주는 문명화의 새벽 이후 석기 시대의 촌락 에서, 메소포타미아의 연회장에서, 현대의 선술집이나 바에서 사람들 을 함께 어울리게 만들었다.

- 매주처럼 와인의 기원도 선사 시대이지만 상세한 내용은 알수가 없다. 와인의 발명 또는 발견은 너무 고대의 일이어서 단지 신화나 전설을 통한 간접적인 기록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고고학적 증거는 와인이 신석기 시대인 기원전 9000년에서 4000년 사이에 현대의 아르메니아와 이란 북부에 해당하는 자그로스 산악지대에서 처음으 로 생산된 것으로 제시된다. 세 가지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이 지역에서 와인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첫째로 야생의 유라시안 포도 품종인 비티스 비니페라 실베스트리스 Vitis vinifera sylvestris가 자생 하고 있었고, 둘째로 곡물 생산이 풍부해서 와인을 만드는 지역사회에 1년 내내 곡물을 식량으로 제공할 수 있었고, 셋째로 기원전 6000년경에 와인을 양조하고, 저장하고, 제공serving할 수 있는 도구인 도기가 발명되었다는 점이다.
- 고대 그리스인에게 있어서 와인을 마신다는 것은 '문명' 또는 '세련’과 동의어였다. 어떤 종류의, 그리고 언제 생산된 와인을 마시느냐가 그 사람의 문화적 세련미를 알려주는 지표였다. 맥주보다는 와인을, 보통 와인보다는 좋은 와인을, 연식이 짧은 와인보다는 오래된 와인을 선호했다. 그러나 어떤 와인을 선택하느냐보다도 중요시되었던 것은 와인을 마실 때의 태도였다. 와인을 마실 때 그 사람의 본성이 드러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6세기 때 그리스의 시인이었던 아실루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청동은 외모를 비추는 거울이지만, 와인은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다.
- 물은 와인을 안전하게 만들지만, 와인 역시 물을 안전한 상태로 바꾸었다. 와인에는 병원균이 없을 뿐만 아니라 발효 과정에서 생성되는천연 항균물질을 함유하고 있다. 그리스인은 이러한 사실을 몰랐지만 오염된 물을 마시는 위험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샘물이나 깊은 우물 또는 수조에 저장된 빗물을 선호했다. 와인으로 상처를 처리하는 것이 물로 씻어내는 것보다 감염의 위험이 적다는 사실 때문에 (그 이유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와인에는 병원균이 없고 항균물질이 함유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와인에는 소독이나 정화하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본질적으로 심포지엄은 지적 · 사회적 · 성적인 면에서 다양한 형태로 진행될 수 있지만 그 핵심은 쾌락의 추구였다. 그것은 주체할 수 없었던 모든 종류의 열정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분출구였기도 했다. 심포지엄에는 심포지엄을 탄생시켰던 그리스 문화의 최고와 최악 의 요소들이 공존했다. 심포지엄에서 마셨던 물과 와인의 혼합물은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비옥한 은유적 토양을 제공했다. 그들은 그러한 조합을 개개의 인간에게나 크게는 사회 안에 혼재하는 선과 악의 공존에 비유했다. 심포지엄에는 참석자들이 절제를 벗어나 위험한 상태로 나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여러 규칙이 존재했고, 따라서 심포지엄은 플라톤을 비롯한 다른 철학자들이 그리스 사회를 바라보는 렌즈 역할을 했다.
- 요약하면, 심포지엄은 인간의 본성을 반영하면서 좋은 면과 나쁜 면 모두를 내포하고 있지만, 플라톤은 적절한 규칙들이 준수된다면 심포지엄의 좋은 면이 나쁜 면을 넘어설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실제로 그가 아테네 교외에 아카데미를 설립하고 그곳에서 40년 이상 철학을 가 르치고 자신의 작품의 대부분을 저술했을 때 심포지엄은 그에게 교육 방법의 모델을 제공했다. 어느 연대기에 따르면 플라톤은 매일 강의와 토론이 끝나고 나면 제자들과 함께 먹고 마셨는데, 이는 “서로 친목을 도모하고, 무엇보다도 배우고 토론한 내용을 반추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 모임의 주목적은 지적인 측면에서의 재충전이었고, 플라 톤의 지시에 따라 적당한 양의 와인이 제공되었다. 당시의 기록에 따 르면 플라톤과 함께 식사했던 사람들은 다음 날 몸 상태가 아주 상쾌 했다고 했다. 그 모임에는 악대나 댄서들은 없었다. 플라톤은 교양이 있는 사람들은 “질서 있는 방법에 따라 순서대로 말하고, 그리고 듣는 것”을 통해 서로가 즐길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플라톤이 시작했던 이러한 모임은 오늘날까지 학문의 세계에 남아 있는데, 참가자들이 순서대로 발표하고 일정한 규칙에 따라 토론하고 논쟁하는 학문적 세미나 또는 심포지엄의 기본적인 형식이 되었다.
- 이전의 그리스인과 마찬가지로 로마인 역시 와인을 만민이 즐기는 음료로 생각했다. 카이사르나 노예 모두 똑같이 와인을 마셨다. 그렇 지만 로마인은 와인 감평에 있어서 그리스인의 수준을 뛰어넘었다. 마 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집주인은 자신이 마시는 낮은 수준의 와인을 안 토니우스에게 대접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처럼 와인은 부를 상징하고 음용자의 사회적 신분을 드러내면서 사회적 차별의 상징이 되었다. 로마 사회에서 가장 부유한 자들과 가장 가난한 자들의 차이는 와인 잔에 담기는 내용물에 의해 분명하게 드러났다. 로마의 부유층에게 있어서 최고급 와인의 이름을 알고,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은 과시적 소비를 드러내는 중요한 방식이었다. 그것은 그들이 최고의 와인을 구매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부자이며, 그리고 와인의 종류에 대해 공부할 시간적 여유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 저급하고 값싼 와인들에는 보존제로서 쓰이거나 또는 부패한 것을 은폐하기 위해 첨가제들이 가미되었다. 예를 들면, 암포라를 봉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역청pitch 을 가끔 보존제로서 와인에 첨가했 고, 그리스인이 그랬던 것처럼 소량의 소금이나 바닷물을 첨가하기도 했다. 서기 1세기의 로마의 농업에 대해서 썼던 콜룸멜라Columella는 그러한 보존제는 조심스럽게 사용하면 와인 맛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 면서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남긴 레시피에 따르면 첨가물을 가미해서 더욱 좋은 맛을 낼 수 있다고 했는데, 화이트 와인에 바닷물과 호로파(fenugreek, 장미목 콩과의 한해살이 풀로 높이 약 50cm까지 자란다. 잎은 복엽(겹잎)으로 3장의 작은 잎으로 이루어져 있다-역주, 두산백과 참조)를 넣어 발효시 키면 오늘날의 드라이 셰리(dry sherry, 스페인 남부에서 주로 생산되는 화이트 와인으로 식사하기 전에 마시는 와인으로 알려져 있다. 역주)와 매우 유사한, 강하면서 견과 맛이 나는 와인을 만들 수 있다. 와인에 꿀을 섞은 물섬Mulsum은 1세기 초 티베리우스의 통치 기간에 식전에 마시는 와인으로 인기가 있었고, 장미향이 나는 로자툼rosatum 도 같이 식전주로 즐겨 마셨다. 그러나 허브, 꿀 그리고 다른 첨가물들이 저급하고 질이 낮은 와인의 부족한 부분을 은폐하기 위해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일부 로마 인은 여행을 할 때 질이 낮은 와인의 맛을 높이기 위해 허브나 다른 향료를 휴대하기도 했다. 현대의 와인 애주가들은 첨가물을 사용했던 그 리스인이나 로마인의 방법에 대해서 코웃음을 칠 수 있겠지만, 사실 그러한 방법은 평범한 와인을 더욱 풍미 있게 만들기 위해 오크를 사용하는 현대의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 모하메드가 알코올을 금지한 것은 주연 자리에서 두 명의 제자가 충 돌했던 사태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예언자가 그러한 사고를 어떻게 예방할 수 있는지 알라신에게 거룩한 가르침을 구했을 때 알라신의 답변은 단호했다. “와인과 도박은 (중략) 사탄이 만들어낸 혐오스러운 것이다. 그것들을 피하면 번성할 것이다. 사탄은 와인과 도박을 수단으로 해서 너희들 사이에 반목과 증오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너희들은 알라의 존재를 기억하고, 기도를 소홀히 하지 말라. 그것 들을 삼갈 수 있겠는가?” 이 명령을 위반하는 사람에게는 40대의 태형이라는 처벌이 가해졌다. 그러나 무슬림에게 있어 알코올에 대한 금지는 여러 문화적 요소가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이슬람의 부상과 함께 권력의 중심이 지중해 연안의 사람들로부터 아라비아사막의 부족에게로 이동했다. 이들 부족은 바퀴 달린 이동 수단 대신 낙타를, 의자와 테이블 대신 쿠션을 사용했고, 최고의 세련미를 상징했던 와인을 금지 함으로써 이전의 엘리트들, 즉 그리스인과 로마인보다도 자신들이 우 월하다는 것을 표현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슬림은 기존 문명에 대한 그들의 거부감을 드러냈다. 라이벌 신앙인 기독교에서 와인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무슬림이 와인을 적대시한 이유 중 하나다. 심지어 와인을 의약적 용도로 사용하는 것조차 금지했다. 

- 대부분의 사람은 아쿠아 비태의 매력은 잠재적인 의학적 효과가 아니라 단시간 내에 쉽게 취하게 만드는 힘에 있다고 생각했다. 증류주는 와인이 귀하고 비싼 북부 유럽의 추운 지역에서 특히 인기가 있었다. 맥주를 증류함으로써 지역에서 생산되는 재료를 가지고 강한 알코올음료를 만드는 것이 처음으로 가능해졌다. 아쿠아 비태를 의미 하는 게일어 (gaelic, 스코틀랜드 켈트어-역주) uisge beatha(발음은 이슈커 바허로 하고, 이슈커는 '물'을, 바허는 '생명'을 뜻한다-역주)는 현대어인 whisky 위스키의 어원이다. 이 새로운 음료는 빠르게 아일랜드인의 일상생활의 한 부분이 되었다. 어느 연대기 작가는 아일랜드 족장의 아들인 리처드 맥라 네일의 1405년의 죽음에 대해 “생명의 물을 지나치게 많이 마신 후에 죽었는데 그것이 리처드에게는 죽음의 물이 되었다”라고 기록했다.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는 아쿠아 비태가 “번트 와인burnt wine, 불타는 와인”으로 불렸고, 독일어로는 Branntwein 브란트바인으로, 영어로는 brandywine 브랜디와인 또는 줄여서 brandy 브랜디라고 번역되었다. 사람 들은 집에서 와인을 증류하기 시작했고 축제일에 그것을 판매하기도 했다. 그러한 관행은 널리 퍼졌고, 또한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했기 때문에 독일의 뉴렘베르그에서는 1496년에 그것을 엄격히 금지했다. 
- 영국 해군이 맥주 대신에 그로그를 마셨다는 것은 18세기에 영국이 해상의 지배권을 확립해나가는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역할을 했다. 당시 수병들의 사망의 주된 원인 중 하나는 괴혈병이었다. 지금은 비타민 C의 부족이 원인으로 알려진 소모성 질환이다. 괴혈병을 예방하기 위한 최고의 방법은 18세기에 여러 번 발견되고 또 잊힌 것인데, 레몬 과 라임주스를 정기적으로 섭취하는 것이다. 1795년에는 그로그에 레 몬이나 라임주스를 넣는 것이 필수적이었는데, 결과적으로 괴혈병의 발병률이 극적으로 낮아지게 되었다. 맥주에는 비타민 C가 함유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맥주에서 그로그로 대체한 것은 영국 수병들을 전 반적으로 더욱 건강하게 만들어주었다. 그 반대는 프랑스 해군이었다. 프랑스는 맥주 대신 와인 4분의 3리터(오늘날의 와인 한 병)를 정기적으로 배급했다. 긴 항해를 하는 경우에는 16분의 3리터의 브랜디로 대체되었다. 와인은 소량의 비타민 C를 포함했지만 브랜디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 해군의 저항력이 강화된 것에 비해 프랑스 해군의 괴혈병에 대한 저항력을 감퇴시키는 효과가 초래되었다. 어느 해군 군의관에 따르면, 괴혈병에 대한 영국 왕실 해군의 저항력은 전투력을 2배로 상승시켰고, 이는 1805년 트라팔가 해전에서 영국이 프랑스와 스페인에 승리할 수 있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럼이 최초로 발명되었을 때의 시점에서 본다면 이 모든 일은 먼 미래에 일어날 일이었다. 럼이 가졌던 최초의 중요성은 증류주, 노예 그리고 설탕이라는 삼각 구도를 형성하면서 통화 수단으로 사용되 었다는 점이다. 럼은 노예를 사는 데 사용되었고, 그 노예를 이용하여 설탕을 생산하고, 설탕 생산의 찌꺼기로 럼을 만들고, 그 럼으로 다시 노예를 매수하고, 이러한 과정이 반복해서 진행되었다. 프랑스의 무역 업자인 장 바보트는 1679년에 아프리카의 서쪽 해안을 방문했을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커다란 변화가 발생했다. 나는 해외에 나갈 때마다 항상 많은 양의 프랑스산 브랜디를 가지고 갔는데, 최근에는 그 수요가 점점 줄었다. 그 이유는 아프리카 서안에서 상당한 양의 증류주와 럼이 판매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1721년, 어느 영국 무역 업자의 보고에 의하면 노예를 무역하는 아프리카 해안에서 럼은 “중요한 교역품”이 되었다고 했다. 심지어 럼으로 금도 살 수 있었다. 또 한 럼은 해안의 수용소에서 배까지 노예들을 싣고 운반하는 카누 조정자들과 경비원들에게 배급되던 브랜디의 역할을 넘겨받았다. 브랜디는 설탕과 노예를 대상으로 한 대서양 무역을 촉발하는 역할을 했지만, 럼은 그 무역을 더욱 활성화하고 더욱 커다란 이익을 남겨주었다.
- 일반적으로 각지에서 생산되고 소비되었던 맥주와는 다르게, 그리고 특별한 지역에서 생산되고 무역의 대상이 되었던 와인과도 다르게, 럼은 전 세계로부터 재료, 사람 그리고 기술이 총합된 결과물이었고, 또한 여러 역사적인 힘이 상호 교차하면서 빚어낸 결과물이었다. 폴리네시아가 기원이었던 설탕은 아랍인에 의해 유럽에 소개되었고, 콜럼부스에 의해 아메리카에 전해졌고, 그리고 아프리카의 노예들에 의해 재배되었 다. 설탕의 찌꺼기를 증류해 만든 럼은 신세계에서 유럽의 식민주의자 들과 그들의 노예에 의해 소비되었다. 럼은 대항해 시대에 유럽인의 모험과 비즈니스의 산물이었지만, 그들이 오랫동안 의도적으로 시선을 회피했던 노예무역의 잔혹성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음료였다. 럼은 인류 역사에서 최초의 글로벌 시대의 승리와 억압이 체현된 음료였다.
- 럼주와 당밀에 대한 관세는 아메리카 식민지가 영국으로부터의 분리되는 계기를 만들었고, 이와 함께 럼주에 강렬한 혁명의 향을 가미했다. 1781년에 영국이 항복하고, 그리고 아메리카 합중국이 건국되고 많은 세월이 지난 후 건국의 아버지 중 한 사람인 존 애덤스는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당밀이 미국 독립에 있어서 본질적 요소였다는 것을 고백할 때 왜 낯을 붉혀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네. 많은 위대한 사건들이 그보다도 더 작은 요인에서 비롯되지 않았는가?"
- 총기 또는 전염병과 함께 증류주는 구세계의 거주자들이 신세계의 지배자로서 자신들의 지위를 확고히 하는 데 도움을 줌으로써 근대 세 계의 형성에 기여했다. 증류주는 수백만 명의 사람을 노예화하고, 강제로 이동시키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 토착 문화를 정복하는 과 정에서 일익을 담당했다. 오늘날 증류주를 볼 때 더 이상 노예제나 착취를 연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식민지 시대에 증류주를 사용했던 방법이 다른 방식으로 남아 있기는 하다. 예를 들어, 항공기의 승객은 면 세품인 증류주 병을 손가방 안에 집어넣는 것은 증류주가 휴대하기 편하고 오랜 여행에도 상하지 않는 알코올음료이기 때문이다. 또한 세금을 싫어하고 면세품인 증류주를 구매하는 사람들은 럼의 밀수업자 또는 위스키 보이즈가 지녔던 반체제적 전통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 17세기에 유럽에 커피가 소개된 충격은 아주 주목할 만한데, 그 시대에 가장 보편적인 음료는 아침 식사의 경우에도 약한 맥주나 와인이 었기 때문이다. 물은 오염되기 쉬웠기 때문에, 특히 지저분하고 사람 이 붐비는 도시에서 맥주나 와인 모두 물보다 훨씬 안전한 음료였다. (증류주는 마시면 취했기 때문에 와인이나 맥주처럼 매일 일상적으로 마시는 음료는 아니었다.) 맥주처럼 커피는 끓인 물로 만들었고, 따라서 알코올음료에 대신 하는 새롭고 안전한 음료가 되었다. 알코올 대신 커피를 마시면 약간 취해 느슨한 상태가 아니라 각성되고 활달하게 하루를 시작하게 되었 고, 업무의 양이나 질 모두 향상되었다. 커피는 주정 상태가 아니라 깨어 있게 하고, 감각을 둔하게 하여 현실을 잊게 하기보다는 인지 능력을 높여주어 알코올과 아주 반대되는 음료로 여겨졌다. 
- 17세기 말까지 아라비아는 전 세계에 커피의 공급자로서 독점적인 지위를 구축하고 있었다. 1696년에 어느 페르시아 작가는 “커피는 메카 인근에서 재배되었다. 거기에서 지다 항구로 옮겨졌다. 그곳에서 수에즈까지는 배로 이동했고, 이후 낙타를 이용해 알렉산드리아까지 운송 했다. 그곳에 있는 이집트의 창고에서 프랑스와 베네치아 상인들은 그들의 고국에서 필요한 만큼의 커피콩을 구입했다” 라고 설명했다. 때 때로 커피는 모카에서 네덜란드까지 직접 운송되기도 했지만 지속되지는 못했다. 이처럼 커피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유럽의 국가들은 외국의 생산품에 의존하는 것에 대해 우려하기 시작했고 스스로 생산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기 시작했다. 아랍인이 자신들의 독점을 유지하기 위 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예를 들어, 커피콩은 선적되기 전에 살균 처리 되었는데, 이는 커피콩이 새로운 커피나무의 씨앗으로 사용될 수 없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리고 외국인들은 커피 생산 지역에 접근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이 같은 아랍의 독점 체제를 처음으로 깨뜨린 것은 네덜란드인이었 다. 그들은 17세기에 걸쳐 동인도제도(East Indies, 동남아시아의 말레이제도를 가리켜 부르는 역사적 명칭-역주)를 지배했던 포르투갈을 몰아냈고, 향신료 무역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단숨에 세계 최강의 상업 국가로 부상했 다. 네덜란드 선원들은 아랍의 커피나무에서 잘라낸 가지를 훔쳐서 암스테르담으로 가져갔고 온실에서 재배에 성공했다. 1690년대에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자바에 위치한 바타비아에 커피 플랜테이션을 설치했는데, 그곳은 현재 인도네시아에 속한 섬으로 당시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다.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자바에서 생산된 커피는 로테르담으 로 직접 운송되었고,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커피 시장을 장악했다. 전 문가들은 아라비아의 커피가 향이 더 뛰어나다고 평가했지만 가격에서는 자바의 커피에 경쟁 상대가 되지 못했다.
- 예멘에서 종교적인 음료로 탄생한 커피는 모호한 기원에서 출발해서 먼 길을 지나왔다. 커피는 아랍 세계에 침투했고, 그 후 유럽으로 건너갔고, 유럽의 강대국들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커피는 알코올에 대한 대안으로서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누렸고, 특히 지 식인들과 사업가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음료 자체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을 소비하는 새로운 방법이었다. 커피 하우스는 커피뿐만 아니라 대화를 제공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커피하 우스는 사회적·지적 · 상업적 · 정치적 대화를 위한 전적으로 새로운 환경을 제공했다.
- 공공 부문과 민간 부문에서 금융혁신이 빠르게 이루어졌던 시기, 수 많은 주식회사의 설립, 주식의 거래, 보험 산업의 발전, 그리고 국채의 공공 매각 등이 모든 것은 런던이 암스테르담을 대신하여 마침내 세 계 금융의 중심지가 되도록 만들었다. 오늘날 이를 가리켜 영국의 금융 혁명으로 부르고 있다. 이 혁명은 비용이 많이 드는 식민지 전쟁의 자금 조달을 위해 필요했고, 또한 커피하우스의 비옥한 지적 환경과 모험 정신 때문에 가능했다. 스코틀랜드의 경제학자인 애덤 스미스가 쓴 《국부론》은 금융 분야에서 《원리》에 필적할 만한 책인데, 그는 이 책에서 자유방임적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이론을 설명하고 지지했다. 즉 무역과 경제적 번영을 촉진하기 위해 정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정책은 사람들의 자유재량에 맡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스미스는 이 책의 상당 부분을 영국의 커피하우스에서 집필했는데, 그곳은 런던에서 스미스의 근거지였고 우편물을 수령하는 주소지였다. 또한 스코틀랜드 지식인들이 모이는 인기 있는 장소였는데, 스미스는 그들에게 국부론의 각 장을 보여주고 비판과 의견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런던의 커 피하우스는 근대 세계를 형성한 과학 혁명과 금융 혁명을 탄생시킨 용광로였다.
- 오늘날 커피와 카페인이 있는 다른 음료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매우 광범위하게 보급되어 있기 때문에 커피가 도입될 당시의 충격과 초창기 커피하우스에 대한 인기를 상상하기 어렵다. 현대의 카페는 역사적으 로 빛났던 그들의 조상에 가까이 가기는 어렵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다. 커피는 여전히 사람들이 아이디어와 정보를 논하고 발전시키고 교환할 때에 만나서 마시는 음료라는 점이다. 이웃들 의 커피 잡담에서부터 학문적인 콘퍼런스나 비즈니스 미팅까지 커피는 여전히 알코올처럼 자기 통제력을 잃은 염려 없이 교류와 협력을 촉진하는 음료인 것이다.
커피하우스의 원래 문화가 오늘날 가장 잘 알기 쉬운 형태로 남아 있는 곳은 카페인이 연료가 되어 정보의 교류를 촉진하는 인터넷 카 페나 무선 인터넷이 제공되는 장소, 그리고 모바일 세대들이 사무실과 미팅 장소 대신으로 사용하는 프랜차이즈 커피숍이라 할 수 있다. 현 대 커피 문화의 중심이며 스타벅스 커피 프랜차이즈의 고향인 시애틀 이 세계에서 가장 큰 소프트웨어와 인터넷 회사들의 본거지라는 사실 이 경이롭지 않은가? 커피와 혁신, 이성, 그리고 네트워킹의 관계는 - 여기에 혁명적 열정의 질주까지 더해져서 -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 영국 사회의 정상에서부터 하층민까지 모든 사람이 차를 마셨다. 유해 사업 그리고 사회적 변화는 서로 얽히면서 영국인이 차를 사랑하게 되는 과정에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현상은 18세기 말이 되기 전에 이미 외국인들이 주목했던 현상이었다. 1784년에 프랑스에서 온 어느 여행자는 “영국 전역에서 차를 마시는 것은 일반적이었고, (중략) 가 장 가난한 농부조차 부자와 마찬가지로 하루에 두 번 차를 마셨고, 차 의 전체 소비량은 어마어마했다” 라고 말했다. 스웨덴에서 온 어느 방 문자는 “차는 영국인에게 물 다음으로 불가결한 것이었다. 모든 계층이 차를 소비했고, 아침 일찍 런던의 거리에 나가면 많은 장소에서 옥외에 작은 테이블들이 설치되어 있고, 석탄 카트를 끄는 인부나 노동자들이 둘러앉아 컵에 들어있는 맛있는 음료를 마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차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제국으로부터 세계 각 지로 전파되었고,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새로운 제국의 중심에 뿌리를 내렸다. 영국인은 집에서 차를 마실 때마다 대영제국의 강력한 힘과 광대했던 영토를 생각한다. 차의 부상은 세계 강대국으로서 영국의 성 장과 얽혀 있으며, 영국이 상업적 · 제국주의적 힘을 더욱 팽창시켜 나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 17세기에 많은 사무직 직원들, 비즈니스맨, 그리고 지식인들이 커 피에 탐닉했던 것처럼 18세기에 새롭게 탄생한 공장 노동자들은 차를 즐겨 마셨다. 차는 이렇게 새롭게 변화된 노동 환경에 최적으로 어울 리는 음료였고 여러 가지 형태로 공업화에 도움을 주었다. 공장의 주 인들은 종업원의 휴식을 위하여 “차 마시는 시간tea breaks"을 허용하 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농업 노동자들에게 제공되었던 맥주는 알코올 때문에 정신을 무디게 만들었지만 차는 카페인 때문에 오히려 정신을 예민하게 해주었다. 차는 길고 지루한 작업 시간 동안에 노동자의 예민함을 유지시켜주고, 빠르게 움직이는 기계를 다룰 때 집중력을 높여주었다. 수작업으로 하는 직공이나 방적공은 필요할 때 휴식을 취할 수 있었지만 공장의 노동자들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들은 기름칠이 잘 된 기계의 부품처럼 일을 해야만 했고, 차는 공장이 잘 돌아갈 수 있 도록 유지시켜주는 윤활유였다. 
또한 차에는 천연 항균 성분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도 장점 중 하나였다. 이 때문에 수인성 전염병의 발병 가능성이 크게 줄어들었고, 차를 만들기 위해 사용하는 물이 충분히 끊지 않은 경우에도 별 문제가 없었다. 영국에서 이질의 발병률은 1730년대부터 떨어졌다. 1796년의 어느 관찰자는 이질과 다른 수인성 질병들의 “발병률이 크게 낮아져 서 런던에서는 그러한 질병의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라고 기록했다. 19세기 초경에 의사와 통계학자는 영국인의 건강 상태가 향상된 가장 큰 원인이 차의 보급 때문이라는 점을 인정했다. 이로 인해 노동자들은 미들랜드(Midlands, 영국의 중앙부에 위치한 지역의 이름으로 18세기와 19세기의 산업혁명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 지역이다. 가장 큰 도시로는 버밍햄 이 있다)에 위치한 공업도시들 근처에서 밀집된 형태로 생활하더라도 질병의 발생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또한 차에 들어 있는 항균성분인 페놀이 모유 중에 엄마의 젖으로 쉽게 이동하기 때문에 유아들의 건강에도 도움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유아의 사망률이 감소했고, 마침 산업혁명이 막 시작되었을 때 필요했던 거대한 노동 인력의 공급을 가능하게 했다.
- 불법적인 약품이었던 아편을 차와 직접적으로 교환하는 형태의 무역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고, 동인도회사는 아편 무역이 드러나지 않도록 정교한 거래 구조를 고안했다. 아편은 벵골에서 생산되었고 1년에 한 번 캘커타에서 경매가 이루어졌는데, 회사는 그 이후에 아 편이 어디로 이동하는지 모른 척했다. 실제로 아편은 인도에 근거를 둔 “지역 무역회사들country firms”이 구입했는데, 이들은 명목적으로는 독립적인 회사로서 동인도회사로부터 중국과 교역을 승인받은 회사 들이었다. 이 회사들은 경매를 통해 구입한 아편을 배에 싣고 광동의 하구까지 가서 은과 교환했고, 이후 린틴이라는 섬에 아편을 하역했다. 이곳에서 아편은 중국 상인에 의해 노를 갖춘 갤리선에 실린 후 해안으로 밀반입되었다. 지역 무역회사들이 아편을 직접 중국으로 보낸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불법적인 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동인도회사 역시 어떤 방식으로든 무역에 관여하지 않 았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실제로, 동인도회사는 회사의 배를 이용한 아편의 수송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세관 관리들은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지만 중국의 아편 상인으로부터 뇌물을 받으면서 동인도회사의 교묘한 사 기극을 눈감아 주고 있었다. W. C. 헌터라는 미국 상인은 당시의 사정 은 이렇게 설명했다. “아주 완벽했던 (외국인은 일절 관여하지 않은) 뇌물 시스템이 존재했기 때문에 비즈니스는 쉽게 그리고 정기적으로 진행되 었다. 새로 임명된 관리가 부임하는 등 때때로 장애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보상 문제가 제기된다. (중략) 그러나 곧 서로가 만족할 만한 합의가 이루어지고, 중개인들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다시 나타나고 그 지역에 평화와 면책이 다시 허용된다.” 때때로 지방의 관리들은 린틴 주변을 배회하는 외국 배들을 향해 본토의 항구에 기착하 거나 그곳에서 떠날 것을 요구하는 위협적인 포고령을 발동했고, 중국 세관의 배가 외국 배를 최소한 지평선으로 사라질 때까지 추격하는 모 양을 양측이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관리들은 외국 밀수업자를 몰아냈다고 주장하는 보고서를 발간하기도 했다.

- 19세기에 아메리카는 경제력을 자국 내에 집중했고, 반면 20세기에는 해외로 경제력을 돌리면서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그 후 미합중국은 세 번째 국면에 처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소련 과의 냉전 체제였다. 양측은 군사력에서 팽팽했고, 전쟁은 경제전쟁으 로 발전하게 되었고, 그리고 궁극적으로 소련은 미국과 더 이상 경쟁할 수 없게 되었다. 미국의 세기라고 불릴 수 있던 시대인 20세기가 끝나 면서, 세계 경제가 무역과 통신으로 이전보다 더욱 밀접한 관계를 맺는 글로벌 경제 체제가 되면서 압도적인 군사력과 경제력을 겸비한 미합중국은 세계에서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확고한 지위를 갖게 되었다.
미국의 대두, 20세기의 전쟁, 정치, 무역 그리고 커뮤니케이션의 글 로벌화는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고 유명한 브랜드로 미국과 그 가치관 이 체화된 것으로 보편적으로 여겨지는 음료인 코카-콜라가 전 세계에 보급되는 과정과 잘 부합된다. 미합중국을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콜라가 아메리칸 드림인 선택과 소비자 중심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경 제적·정치적 자유를 상징했다. 그러나 반대하는 사람에게는 콜라가 무자비한 글로벌 자본주의, 글로벌 기업과 브랜드에 의한 지배, 그리 고 지역문화와 가치를 훼손하면서 미국화 또는 미국식으로 균질화의 시도를 상징했다. 대영제국의 이야기를 한 잔의 차 속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세계 최강국이 되기까지 미국의 등장에 관한 이야기는 갈색의 달콤한 그리고 거품이 나는 코카-콜라의 이야기 속에 펼쳐져 있다.
- 미국의 젊은이들이 군인으로 징집되자 코카-콜라 회사의 사장인 로 버트 우드러프는 “군복을 입은 모든 이들에게 어디에 있는 5센트 코카-콜라 한 병을 제공하고 모든 비용을 회사가 부담하라”고 지시했다. 코카-콜라는 이미 병사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고, 무알코올의 청량 음료는 군사 훈련 중에 지급되었다. 회사가 코카-콜라를 군에 적극적 으로 공급한다는 홍보 전략은 코카-콜라와 애국심, 그리고 전쟁에 대 한 지원 태도와 연결하면서 훌륭한 효과가 있었다. 코카-콜라는 미국 에서 멀리 떨어진 전쟁터에 있는 병사들로부터 진심 어린 환영을 받았 다. 코카-콜라는 고향을 생각나게 하고 병사들의 도덕심 유지에 도움을 주었다.
“우리는 당신의 회사가 이 비상사태가 진행되는 동안에 우리에게 계속해서 코카-콜라를 제공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희망합니다” 라고 어느 장교는 코카-콜라 회사에 편지를 보냈다. “나는 코카-콜라가 군 에 복무 중인 젊은이들에게 도덕심을 세워주는 매우 중요한 상품으로 분류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회사는 이러한 수십 통의 편지를 증거 삼아, 그리고 군의 강력한 지지를 등에 업고 워싱턴에 많은 로비를 했다. 그 결과 회사는 코카-콜라는 전쟁 수행에 중요한 상품이라는 이유 로 1942년에 설탕 배급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배급제의 실시로 경쟁 사들은 청량음료의 생산량을 반으로 줄여야 했지만, 코카-콜라는 이 전과 마찬가지로 생산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었다.
- 코카-콜라 병을 선적하고 지구의 반을 돌아 군대가 주둔하 는 곳으로 가는 것은 매우 비효율적이었다. 무엇보다 군수품을 실어 야 할 귀중한 선적 공간을 코카-콜라 병으로 채울 수는 없었다. 그래 서 군부대 안에 특별한 병 작업 시설과 소다 디스펜서를 설치했고 코카-콜라 원액만 그곳으로 보내도록 했다. 이러한 기계를 설치하고 운 영하는 코카-콜라 직원은 많은 군인들에게 비행기를 수리하고 탱크 를 움직이는 기술자만큼이나 중요했다. 그들은 “기술 감독관technical observer" 이란 특별대우를 받았고 군대의 계급도 부여되었기 때문에 “코카-콜라 대령”으로 불렸다. 그들은 전쟁 기간에 전 세계에 64곳 이상의 군 기지에 병 작업 시설을 설치했고 약 100억 병의 코카-콜라를 공급했다. 기술 감독관들은 정글에 가지고 들어갈 수 있도록 휴대용 코카-콜라 기계를 고안했고, 잠수함의 좁은 해치hatch를 통해 들어갈 수 있도록 슬림형 기계도 개발했다. 또한 코카-콜라는 해외의 미국 군사기지 주변에 사는 민간인들에게도 제공되었는데 대부분이 그 맛에 매료되었다. 폴리네시아인 (Polynesia, 폴리네시아는 중앙 및 남태평양에 흩어져 있는 1000개 이상 섬들의 집단을 가리킨다-역주)들부터 줄루족(Zulus, 아프리카 원주민 의 하나로 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살고 있는 민족-역주)까지 전 세계의 사람들이 처음으로 코카-콜라의 맛을 보게 되었다.
- 1945년에 연합군이 최종적으로 승리한 후에도 재건기의 3년간 군 기지에 설치된 코카-콜라의 생산 기계들은 계속 가동되었다. 그 후 생산 시설은 민간에 넘겨졌다. 그러나 그때쯤에는 미군 덕분에 전 세계로 퍼진 코카-콜라는 남극을 제외하고 지구상의 모든 대륙 위에 확고 한 기반을 구축했다. 회사의 어느 간부가 말한 것처럼 제2차 세계대전 덕분에 "코카-콜라의 매력이 거의 전 세계에서 인정되었다."
- 1997년에 발간된 <이코노미스트>의 분석에 따르면, 각국에 있어서서 코카-콜라 소비량은 해당 국가의 글로벌화의 수준을 보여주는 좋은 지표라고 밝힌 바 있다. 즉 (국제연합이 정한 기준에 따라 측정된) 풍요로움과 삶의 질, 그리고 사회적·정치적 자유와 밀접한 상관관계를 보여준다. 는 것이다. 매거진은 “발포성의 거대 시장을 가진 상품, 즉 자본주의는 사람들에게 좋은 것입니다”라고 결론지었다. 물론 코카-콜라가 사람 들을 부유하고 행복하고 자유롭게 만든 것은 아니다. 이는 소비자 중 심주의와 민주주의가 확산될 때 발포성의 갈색 음료는 항상 함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어느날 탄산 소다수는 미합중국에서 가장 널리 소비되는 음료로서 모든 액상 형태의 소비량의 약 3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고, 코카-콜라 회사는 단일 회사로서 가장 커다란 공급자이다. 세계적으로는 회사는 인류가 소비하는 총 액상의 3퍼센트를 공급하고 있다. 코카-콜라는 의 심할 바 없이 20세기의 음료이며, 그리고 20세기에 발생했던 미합중국의 부상, 공산주의에 대한 자본주의의 승리, 그리고 글로벌화의 진전 을 상징하는 음료였다. 코카-콜라를 인정하는 안 하든 그 음료가 가진 매력의 너비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계사를 결정짓는 7가지 힘  (0) 2021.05.25
침대위의 세계사  (1) 2021.05.25
왜 세계사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는가  (0) 2021.04.27
부의 역사  (0) 2021.03.28
문명은 왜 사라지는가  (0) 2021.03.21
Posted by dalai
,

김소원 아나운서가 들려주는 모두가 잘사는 세상을 위한 신실재론이란 무엇인가? [왜 세계사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는가] - YouTube

 

이 책의 저자인 마르쿠스 가브리엘을 알게 된 것은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책과 유발 하라리 등과 같이 저술한 '초예측'이란 책을 통해서다. 철학과 교수가 지은 책이라 좀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도 다소 존재한다. 

책의 제목이 우선 좀 자극적이긴 하다. 오늘날 유럽에서는 이른바 19세기의 국민국가의 부활이 일어나고 있는데, 19세기기는 유럽 최고 전성기였고, 그들이 지구의 패권을 거머쥔 패자였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바라보면, 영국의 브렉시트나 독일이 그 옛날 프로이센주의의 통합모델로 돌아가려는 경향이 자연스레 이해된다.

이 책은 현대세계의 다섯 가지 위기와 그 안에 숨겨진 진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각각 가치의 위기, 민주주의의 위기, 자본주의의 위기, 테크놀로지의 위기, 표상의 위기가 그것이다. 

예를 들어 인터넷은 민주주의를 붕괴시킬 수 있다. 우리가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인터넷은, 결코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플랫폼이 아니다. 사실은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인터넷을 지배하고 있다. 검색 엔진만 봐도 지금은 구글의 독무대이며, 아무리 웹서핑을 해봐도 인터넷에서 충분한 정보를 얻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아침에 트럼프가 우산을 들었는지 들지 않았는지, 누구를 해고했는지 같은 인터넷 기사를 몇 분 훑어보고 나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진실은 가려지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소설을, 드라마를 본 것인지도 모른다. 진정한 저널리즘이란 쉬이 보이지 않는 진실을 백일하에 밝혀내는 것인데 지금은 비판적이지 않은 저널리즘이 횡행하고 있고, 이것이 인터넷 사회가 낳은 저널리즘의 위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저널리즘의 위기는 곧 민주주의의 위기이기도 하다. 저널리즘의 힘을 통해 진실을 규명하려는 자세가 실종된 민주주의는 이미 민주주의로서 기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테크놀로지나 과학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는데, 과학적 세계관은 과학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과학을 우상화하고 마찬가지로 잘못 이해된 종교와 가깝게 두는 의심스러운 비과학적 사고 탓에 좌초하기 때문이다. 과학은 세계를 설명하는 게 아니라, 단지 그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 이를테면 분자나 일식을 설명할 뿐이다. 결국 과학은 인간에 대한 가치를 설명하지 못한다. 이런 측면에서 저자는 인공지능이나 소셜미디어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한다. 

인공지능에 대해서는 환상이라고 단언하고 있는데, 지능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이지, 기계가 갖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리적인 종이폴더에 나에 대한 출생증명서나 졸업장이 있다고 해서 이것을 지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출생증명서나 졸업장이 웹상에 존재하고, 원하는 정보를 불러올 수 있다하더라도 종이폴더와 온라인이나 웹사이에 존재론적인 차이는 없다. 따라서 웹, 프로그램, 알고리즘, 딥러닝 같은 것을 지능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종이폴더 역시 지능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소셜미디어에 대해서는 자신이 인생을 진정으로 향유하고 있는가 하는 점보다,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 현대사회의 표상의 위기로 보고 있다.

이 책을 통해 마주치는 현실을 보여지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철학의 눈으로 바라볼 때 진실에 가까운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될 수 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 본 리뷰는 출판사 도서지원을 통해 작성된 개인적 리뷰임을 밝힙니다.

 

- 나 자신을 예로 들자면, 이 책의 계약을 실현시키기 위해 서는 국세청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매우 완만하고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간신히 출간이라는 결과에 이를 수 있다. 법 적인 구조 안에서 명확히 정의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제대로 거치면 바람직한 결과가 나온다. 결과까지 가는 과정에서 이 민주적인 제도가 '뭔가 수상쩍은 일이 벌어지고 있지는 않은지를 확인하느라 속도가 늦어지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 절차를 인정해야 한다. 모든 일이 항상 바로바로 자신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는 데 만족한다고 말해야 한다. 그것이 민주적 사고다. 
비민주적 사고란 이것이 없어졌으면 좋겠어'라는 사고 방식이다. 어떤 일이나 상황이 언제나 완전하게 기능하고, 게다가 자신의 이익을 실현하는 형태로 기능하기를 원하는 사고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틀림없는 독재주의다. 중국과 같은 독재주의 국가에서는 자신의 적을 무너뜨리기가 훨씬 쉽다. 말 그대로 적을 살해하는 방법도 쓸 수 있다.
- 자본주의에는 악의 잠재성이 있다.
우리에게 공통된 문제 중 하나는, 소위 신자유주의 neoliberalism 이론가를 포함한 대부분 사람이 믿는 자본주의 이론이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확실히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자본주의에 관해 생각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해준다. 하지만 마르크스 의 이론은 너무나 불충분하다.
자본주의는 노동의 역할 분담에 대한 응답이다. 자본주의는 노동의 역할 분담을 이용해 '한 사람의 인간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다른 사람이 모른다'는 사실을 가치로 변환한다. 그것이 자본주의 비즈니스다.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상대는 알지 못한다. 그것이 당신에게 이점이 된다. 상대가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시점에서 당신은 얼마의 금액을 청구할 수 있을지 를 계산하는 것이다. 만약 상대에게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려져 있는 경우라면, 그 금액을 청구할 수 없다. 당신은 자신의 제품이 실제보다 훨씬 뛰어난 척을 해야 한다. 사실은 상대를 믿지 못하지만 믿는 척해야 한다. 당신의 제 품을 사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 구조가 자본주의의 '거짓' 이다. 자본주의 자체가 불투 명한 시스템이다. 자본주의에는 투명성이 보장되어 있지 않다. 그렇지 않고서는 제대로 기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자제가 반드시 '악'은 아니지만 자본주의에는 악 의 잠재성이 도사리고 있다.
이 사실을 이유로 대부분의 민주주의 이론가가 '자본주 의는 우리를 민주주의 반대 방향으로 끌고 가려고 한다'고 비판한다. 민주주의에서는 투명성이 중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비판은 필요 없다. 필요한 것은 생산 상태를 좌 우하는 자본가에게 민주적인 사고 훈련을 받게 하는 일이 다. 유명한 자선가인 빌 게이츠나 헝가리 출신의 유대인 투 자가 조지 소로스와 같은 수준이 아니라, 중간 수준의 자본가들에게 말이다.
- 일본과 독일은 중국이나 미국과는 대조적으로 경제 성장이 훨씬 늦어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너무나도 오랫동안 좋은 아이디어를 내놓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변화 속도가 빨라서 10년마다 새 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그것도 상당히 기발한 착상을 내지 않으면 안 된다. 미국인은 제2차 세계대전 후 10년마 다 새로운 기술 아이디어를 창안해내고 있다. 기술 외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러한 아이디어다.
일본은 디지털 테크놀로지 분야에서 획기적인 아이디어 를 다양하게 선보였지만, 최근 한동안은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고 있다. 이런 국가들, 특히 독일과 일본은 무언가 해야만 한다. 두 나라 모두 산업의 대부분을 자동차 산업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자동차의 전자제어장치ECU. electronic control unit 문제를 해결한다면 그 기술이 다음 아이디어가 될 수 있다.
확실히, 다음에 나올 아이디어는 환경 위기를 해결하는 쪽이 될 것이다. 내가 도덕적 기업을 강조한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환경 위기를 해결하는 기업은 22세기의 정치 구조를 결정할 수도 있다. 과학자들이 친환경 핵에너지를 찾아내면 어떻게 될까. 독일은 최근 수차례 시도했지만 모두 흡족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원자력발전의 대체물질을 발 견한다 해도 문제없이 작동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완벽히 제 기능을 해낼 수 있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어쩌면 물리적으로 제대로 작동하는 것은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핵융합이 아니라 다른 것일 가능성도 있지만, 아직 발견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이 아이디어를 내는 국가는, 어디가 되든지 간 에 22세기를 대표하는 국가로 우뚝 설 것이다.
- 그 다음 단계는 도덕의 진보를 통해 이익을 창출하는 '윤 리자본주의'의 확립이다. 매우 단순한 방법이지만 지금까 지 착상한 것은 어떤 한 단체를 제외하고 아무도 없다. 과연 누구일까? 바로 가톨릭교회다. 내가 아는 한, 인류사상 가 장 성공한 '회사'다. 이집트 신관神官들도 꽤 상당한 단계까 지 추진했지만 근 5000년 동안 가장 오래 지속되고 있는 ' 기업은 가톨릭교회다. 그들은 무엇을 팔고 있는가? 아무것 도 팔지 않는다. 그들이 파는 것은 달성될지 여부조차 확실치 않은 약속뿐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는 프로테스탄트를 모두 합치면 약 25억 명에 이른다. 상당한 인원이다. 페이스북 이용자보다 많다. 가톨릭교회가 팔고 있는 것은 도덕성이며, 당신이 얻을 수 있는 건 그것뿐이다. 심지어 독일에서는 가톨릭이나 프 로테스탄트로 있으려면 세금을 내야 한다. 급여에서 세금 이 공제된다. 약 6%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상당한 액수다. 어쨌든 다음에 일어날 큰 이슈가 윤리자본주의인 것은 분명하다. 지금 선진국에서는 물건이 넘쳐나 소비 의욕이 점차 떨어지고 있다. 
- 대처리즘Thatcherism, 레이거노믹스Reaganomics 에서 시작된 신자유주의는 현재 점점 더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으며,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 굴복한 것으로 생각된다. 포스트모던 사상은 의도치 않게 신자유주의를 도왔다. 신자유 주의를 포스트모던 사상으로 정당화하기는 쉽다. 이는 신자유주의자들이 “거봐, 뭐든지 가능하잖아. 그러니 이것도 문제없어.” 하고 아무 생각 없이 말하기 때문이다. 포스트모 던 사상에는 비평의 힘이 없다. 포스트모던 사상이 유일하게 비판하는 것은 매우 독선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이나 매우 강한 신조를 가진 사람뿐이다. 반대로 포스트모던 사상이 비판하지 못하는 대상은 통계밖에 믿지 않는 유연한 사고를 지닌 사람이다.
거기에는 명확한 관계성이 있다. 대부분의 신자유주의 이 론가는 직접적, 그리고 간접적으로 포스트모던 사상을 갖 고 있다. 통계적인 세계관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포스트모던 성향을 띈다. 모더니티는 원래 비통계적 사실을 바탕으로 작용했고, 계몽은 통계적 세계관을 갖고 있지 않았다. 확률 계산 자체가 계몽시대에 발명되었다. 즉, 통계적인 세계관은 19세기에 탄생해서 20세기에 본격화되 었다.
신자유주의의 주술에서 벗어나려면 경영윤리를 바꾸고 경제에 윤리관을 되찾아야 한다. 신자유주의의 자멸에 관 한 좋은 예가, 오늘날의 영국이다. 이는 가장 무능한 정치가 보리스 존슨을 총리로 선출했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도널드 트럼프와 같은 인물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르다. 도널드 트럼프는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 어떻게 말하든지 간에 매우 유능한 비즈니스맨이며 놀랄 만큼 성공한 사람이다. 이에 비하면 보리스 존슨은 단지 소인배일 뿐이다.
- 물리적인 종이 폴더가 있다. 출생증명서나 고교 졸업장이 들어있다. 실수로라도 그것을 '지능' 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출생증명서 뒤에 고교 졸업증서가 있고 그 뒤에 이를테면 임대차계약서가 나란히 순서대로 포개져 들어있 다. 종이 폴더도 컴퓨터 데이터 처리와 똑같다.
온라인에서도 마찬가지다. 관공서에 있는 종이 파일과 온 라인 또는 웹 사이에 존재론적인 차이는 없다. 온라인이 약 간 더 복잡하다거나, 다른 의미에서 복잡하다고 할 뿐 양쪽 모두 똑같다. 그러므로 웹이나 프로그램, 알고리즘, 딥러닝-이러한 것을 지능이라고 생각한다면 종이 폴더도 지능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는다. 즉 '인공지능'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나의 변명이다. 혹은 약삭빠른 사람의 트릭이다. 메커니즘mechanism 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머신machine 이라는 단어에서 왔으며 머신의 어원은 그리스어 '메카네mechane' 이다. 메카네는 '트릭'이라는 의미다. 고대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Homeros는 트로이의 목마를 메카네, 즉 '트릭' 이라고 했지만 실은 이것이 머신, 즉 기계라는 의미다. 따라서 기계가 지능이 되는 일은 결코 없다. 자명한 이치다.
- 미국에서는 이미지의 중요성과 영향력이 몹시 크다. 2장에서도 언급한 파사드다. 미국에서는 모든 일이 파사드와 같다. 미국의 건축물을 보면 그 파사드(건물의 정면 부분)는 아름답게 단장되어 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면 뭐든지 망가져서 사용할 수 없다. 미국에서는, 가령 대부호의 집에 초대받아 가도 에어컨 소리가 너무 크고 문은 꼭 닫히지 않아 엉망이다. 모든 것이 불완전하다. 그것이 파사드, 이미지다. 미국인은 단독 주택에 살기를 좋아하는데, 그것은 누군가가 근사한 집이라고 생각할 것을 상상하기 때문이다. 뉴욕이 그런 식이다. 나는 뉴욕의 뉴스쿨대학교에서 교편을 잡 았었는데 대학에서 처음으로 사회조사 분야의 테뉴어Tenure 자격(북미 대학에서의 종신고용 자격)을 타진받았을 때 거절했 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도시인데 그곳에서 살고 있는 나 자신은 조금도 행복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런 도시에서 사는 건 도저히 무리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의 생활은 비참했다.
어디를 가도 “대단해요. 뉴욕에서 오셨어요? 근사한 도 시죠?” 하는 말을 듣는다. 뉴요커들은 “그럼요, 멋진 도시예요.” 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다르다. 밤에는 시끄러워서 도통 잠을 잘 수가 없으며 더럽고 이상한 냄새가 난다. 여름엔 지독히 덥고 뭐든지 고장 나 사용하기 힘들다. 지하철은 무질서한 혼돈 상태이고 거리에는 쥐와 오물 천지다. 지하철 안을 쥐가 뛰어다닌다. 도시의 어느 곳을 가도 형편없고 낭패를 본다. 한 달만 있어 보면 어떻게든 벗어나 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뉴요커들은 이 도시에서의 생활을 즐기고 있다. 이는 타인들이 뉴욕에 산다는 건 멋진 일'이라고 동경한다. 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이유가 간접적인 동기를 만들 어준다. 자신은 전혀 멋지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데도 남들이 멋있다고 부러워하니 그 사실이 좋을 뿐이다. 미국인은 그런 식으로 사고하는 경우가 많다.
그에 비하면 독일인은 무척 현실 지향적이다. 남들이 '저 사람은 인생을 행복하게 살고 있는 걸까?'라고 생각하든 말 든 아무 상관없다.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행복하게 누리고 있느냐 아니냐를 중요하게 여긴다. 타인이 어떻게 생각하는 신경 쓰지 않는다. 자신이 인생을 진정으로 향유하고 있는가 하는 점보다, 타 인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은 또 다른 표상 의 위기를 가져온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침대위의 세계사  (1) 2021.05.25
세계사를 바꾼 6가지 음료  (0) 2021.05.06
부의 역사  (0) 2021.03.28
문명은 왜 사라지는가  (0) 2021.03.21
오리진  (0) 2021.02.06
Posted by dalai
,

부의 역사

역사 2021. 3. 28. 15:00

- 크리스트교가 《신약성서》에서 청빈을 주창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유대교에서는 부와 재화를 쌓는 것이 가치 있는 일로 칭찬받습니다. 유대인 격언에 “돈은 무자비한 주인이지만 유익한 종이 되기도 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유대인은 돈의 가치를 인정합니다. 유대교에서는 사유 재산을 적극 보호합니다. 그래서 타인의 재물 을 훔치거나 빼앗는 사람에게는 극형을 포함한 엄격한 형벌을 주고 벌금이나 배상을 꼼꼼하게 규정합니다. 유대교가 재산권과 소유권 불가침을 율법으로 정한 것에는 그들 나름대로 합리적 이유가 있습니다. 유대인은 이런 율법을 지킴으로 써 유대인 이외의 민족에게 신용을 얻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 전에 금고를 설치해 각지 부유층들의 금은보화를 맡을 수 있었고 맡기는 쪽도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유대인은 재산을 맡길 때에 보관료를 걷었습니다. 그리고 재산 소유자에게 양해를 얻은 뒤 제3자에게 금과 은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유대교에서는 금리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고리대를 인정합니다. 유대인은 맡긴 재산을 담보로 채권을 발행하고 거액의 투자금을 모으고 그것을 건설업 등의 개발 사업으로 돌려서 큰 이익을 얻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역사적으로 세계를 석권하는 유대인의 금융 비즈니스가 시작되었습니다. 유대교는 경제적 부와 재화를 둘러싼 문제가 사람들 사이의 분쟁을 야기한다는 것을 꿰뚫어보고 그것을 조정하는 시스템을 율법 속에 포함시켰습니다. 신이 감독해서 인간의 소유권을 확정하고 관리했 지요. 쓸데없는 소유권 분쟁이 생기지 않도록 규칙을 법제화했습니다. 소유권의 불가침은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금융업 같은 신용 경제를 낳았습니다. 유대교는 모든 면에서 경제 사회의 조화를 우선할 수 있도록 제도를 설계했습니다. 법치국가가 없었던 시대에 유대교는 율법과 율령으로 시장에서의 신용과 여신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신이라는 절대 이념을 신용의 원천으로 삼았기에 고대에도 고도로 발전된 결제 시스템이 가능할 수 있었지요.
- 정신적인 종교가 물질적인 경제를 만들어냈다니, 쉽게 이해하기는 어려운 개념입니다. 그러나 종교라는 신성한 것을 정치와 경제 등의 세속적인 것에서 분리한다는 생각은 근대 이후에 생긴 사고방 식입니다. 전근대시대에 성聖과 속俗은 분리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근대 이후를 사는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서로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융화되었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상황은 종교와 경제를 하나로 보아야만 본질을 볼 수 있습니다.
- 예수 그리스도는 약자가 필연적으로 가진 심리와 그 충동을 알고 절묘하게 마음을 사로잡았고 곧 큰 세력으로 발전했습니다. 약자를 구제하는 구조는 이슬람교와 불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에 서는 어느 정도 공통적인 것이지요. 약자가 강자에게 분노, 원한, 증오의 감정을 갖는 것을 르상티 망ressentiment 이라고 합니다. 철학자 니체는 저서 《도덕의 계보 zur Genealogie der Moral》에서 크리스트교가 르상티망에 의해서 발상한 종교 라고 밝힙니다.  부유층을 중심으로 하는 유대교 보수파에게 예수를 따르는 개혁 파들의 선교는 자신들의 존립 기반을 위협하는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보수파의 음모에 휘말려 십자가형으로 처형되고 맙니다.
- 이슬람은 세력을 확대하면서도 빈곤층을 배려했습니다. 《코란》에는 부가 한쪽으로 집중되는 것과 물건이나 화폐를 쓰지 않고 묵혀두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다양한 계율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토지는 알라가 부여해준 것이기 때문에 사적으로 소유하는 것이 제한됩니다. 그렇게 일부 사람들이 토지를 독점하는 것을 막고 있지요. 또 부유층은 자카트라는 기부금을 내야 합니다. 그에 더해서 코란은 부유층에게 종교세를 걷어서 부가 빈곤층에게 재분배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자카트의 일환으로서 와크프라는 것이 있습니다. 와크프는 단순하게 재산을 기부하는 것이 아니라 병원, 학교, 모스크 등 공익과 복지를 위해 재산의 소유권 행사를 멈추는 것입니다. 와크프 역시 일정 재산을 가진 사람에게 부과됩니다. 《코란》에서 설명한 자카트와 와크프 규정은 시대와 함께 유명무 실해졌습니다. 그래서 현재 이슬람 사회의 빈부 격차는 늘어나기만 하고 줄어들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이슬람 초창기에는 자카트와 와크프를 철저하게 지켰고 부가 잘 분배돼서 이슬람 사회가 강하게 결속할 수 있었습니다.  그 외에 이슬람에서는 공공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면 모든 생산 기관에 국가가 개입할 권한이 있었습니다. 일부 사업자가 이익을 독점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또 이슬람에서는 화폐가 자가 증식하는 형태인 이자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슬람은 경제 격차가 벌어질 때 빈곤층에게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슬람교가 부의 편중을 막고 격차를 해소할 수 있는 경제 시스템 설계를 교의 안에 포함시킨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크리스트교가 가져온 자본주의의 맹아 : 중세시대 교황이 유럽을 다스린 것은 유럽 경제 성장에 영향을 줬습 니다. 교황이라는 종교 권위자를 정점으로 교황의 영향력이 미치는 성직자와 지방 호족이 지배 피라미드를 만들었고 그 피라미드는 유럽 전역으로 넓어졌습니다. 따라서 중세 유럽에서는 크리스트교를 바탕으로 한 연대와 이에 따라 종교 조직에 귀속하려는 의식이 강했습니다. 반면에 국가의 정체성과 국가 의식은 약했습니다. 종교가 국가와 민족을 넘어서는 연대의 중심핵이 되었습니다. 중세에서 프랑스 왕국, 영국 왕국, 독일 황제 등의 국가 군주는 이름만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교황은 지방 정치를 지방 성직자와 호족들에게 통째로 맡겼습니다. 결국 지방분권적이고 평온한 교황 연합체가 형성됐습니다. 중앙집권적 국가는 나타나지 않았고 지방이 저마다 의 방법으로 통치를 맡았습니다.  이 온화한 지방분권 체제 속에서 중세 도시가 성장했습니다. 도시는 상공업으로 더 발전했고 시장도 생겼습니다. 시장에서 화폐와 물건을 교환했고 유통 경제가 확산되어 유럽 경제 전체가 살아났습니다. 12세기 유럽은 전에 없던 호경기를 만났고 유럽 각지에서 상공업도시가 형성됐습니다. 그중 북부 도시 뤼베크를 맹주로 하는 한자 동맹권(13~15세기 독일 북부 연안과 발트해 연안의 여러 도시가 맺은 연맹이 다. 해상 교통의 안전 보장, 공동 방호, 상권 확장 따위를 목적으로 했다)과 안트베르펜의 플랑드르(벨기에) 교역권인 북부시장은 북해와 발 트해를 무대로 번영했습니다. 한편 남부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하는 롬바르디아 동맹권은 남부시장이었고 지중해를 무대로 번성했습니다. 이 북부 시장과 남부 시장은 뉘른베르크, 아우구스부르크 등의 독일 도시를 경유해서 만났습니다. 또 롬바르디아 동맹권은 지중해 를 넘어서 카이로 등의 오리엔트 경제권과 만났습니다.  이처럼 중세 도시를 중심으로 했던 경제 활동 전반을 자본주의의 맹아로 볼 수 있습니다. 지방분권적 체제 속에서 도시 상인들은 자 신들의 재량과 책임으로 비즈니스를 운영했고 번영을 이뤘습니다. 교황이 이 체제를 보증했고 도시 상인들과 크리스트교는 더 유연하게 연대했습니다. 종교가 12세기 유럽이 경제적으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기반과 요인을 만든 것입니다.
- 르네상스 Renaissance는 영어로 리뉴얼 Renewal, 즉 재생과 갱신이라는 의미입니다. 르네상스는 14세기에 시작해서 16세기까지 이어졌고 이 탈리아를 중심으로 서유럽 전역으로 퍼졌습니다. 르네상스는 중세 의 신 중심 세계관에서 탈피하고 인간성의 자유와 해방을 지향했습니다. 휴머니즘(인문주의, 인간중심주의)에 기초하고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문화를 모범으로 해서 인간 존재를 재생하려고 했습니다. 12~13세기에 십자군 원정이 본격적으로 일어났고 동방 이슬람 권과 접촉하면서 지중해 무역이 생겨났습니다. 이탈리아는 서유럽에서 동방으로 가는 현관문이었습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자리한 이탈리아 도시에서 경제가 발달하고 문화적 기반이 단단해졌고 이 엄청난 경제적 번영을 배경으로 르네상스가 시작됐습니다. 이탈리아는 고대 로마의 전통도 갖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중세의 가치 기준을 대체할 고대 문화유산에 근거를 두고 새로운 문화를 양 성할 수 있었습니다. 르네상스시대에 이탈리아는 북이탈리아의 도 시 공화국과 중부의 로마 교황령, 그리고 남부의 나폴리 왕국으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북이탈리아의 중심 도시는 피렌체였습니다. 피렌체는 동방 및 지중해와의 무역과 모직물 생산과 금융업으로 번 영했습니다. 15세기에 금융 재벌인 메디치가가 피렌체 정치를 장악 했는데 1453년 비잔틴제국이 멸망하고 그리스의 고전 학자들이 이 탈리아로 많이 망명하자 메디치가가 그들을 보호했습니다. 르네상스부터 대항해시대까지 새로운 가치들이 발견되면서 기존 크리스트교 사회의 공통 사상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사회의 목적은 종교가 아니라 현세의 시점으로 해석됐고 교회 세력이 경제, 상업, 군사, 정치, 복지 등의 세속적인 제반 현상에 대해 서 갖고 있던 지배권의 정당성이 사라졌습니다. 결국 교회 세력은 국가와 관료 제도에 길을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종교적인 지배권과 세속적인 지배권이 명확하게 구분됩니다. 신이 현세 사회에 지침을 주지 않게 되면서 인간이 모든 일을 결정해야 했습니다.  국가 권력은 현세를 통치하는 기관으로서 다양한 고찰, 해석, 합의를 이끌어냈고 주권 sovereign, 즉 소버린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습니다. 주권의 어원은 라틴어 superanus이고 super은 지상至上, 즉 가장 높은 위'를 의미합니다. 이 단어가 고대 프랑스어 soverain으로 바뀌 어서 영어의 sovereign이 됐습니다. 따라서 주권은 본래 지상이라 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신을 뜻합니다. 중세 이후 신이 갖고 있던 지상권이 현세로 내려왔을 때 지상권은 인간의 통치권 으로서 새로운 세속적인 의미를 갖게 됩니다. 신이 인간에게 양도한 지상권은 주권입니다. 주권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르네상스 말기의 왕권신수설입니다. 왕권신수설은 신이 지상권을 어떤 인간에게 구체적으로 양도를 했 는가를 이야기합니다. 결국 그 사람이 왕이라는 내용입니다. 르네상스시대에는 세계관이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전환됐 습니다. 또 과학이 발전하면서 신의 절대성이 붕괴됐고 그 대신에 왕이 신의 대리인으로서 현실을 통치할 수 있는 정당성을 부여받았 습니다. 왕의 권력은 신이 주신 절대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왕권신 수설로 나타난 것입니다. “짐은 곧 국가이다”라고 말한 루이 14세처럼 군주들은 왕권신수 설에 기초한 절대 권력을 가졌습니다. 법과 제도를 만들 권리와 행정 기능을 일차원적으로 장악했습니다. 세속의 통치 지침을 종교계시로부터 독립시키고 현세를 지배했습니다. “짐은 곧 국가이다”라는 말은 왕권과 국가가 하나라는 것이고 실 체가 있는 왕권이 신이라는 추상물을 대신해서 이 세상에 나타났다. 는 의지를 선언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17세기 이후의 근세에서 이른바 절대주의라고 불리는, 국왕 권력을 중심으로 한 왕권 국가가 탄생합니다.
- 소버린은 과거 지상권이라는 종교적 의미를 가졌지만 이 시대에 와 서는 가장 세속적인 의미로 바뀝니다. 금융 세계에서 소버린은 국채를 뜻합니다. 주권이 있는 국가는 자국의 통화를 발행할 수 있고 동시에 정부 의 채무를 짊어진 사람들에게 채권을 발행할 수 있습니다. 주권 국가가 그 빚을 갚겠다는 의무를 보증하는 약속 수표가 바로 국채, 즉 소버린입니다. 국채는 국가의 주권이 직접 반영된 문서이고 국가의 주권이 사람들의 신용을 얻음에 따라서 화폐를 대체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국채를 발행하고 국가 재정을 조절하는 권한은 국가가 주권(소버린)을 가진 증거이기도 하고 그 주권에 의해서 보증된 채권이 또 국채(소버린) 입니다. 국채를 소버린이라고 부르는 것은 주권 국가가 통화 창출을 조정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국가는 금리, 인플레율, 경상 수지 등의 경제 현상 전반을 지배 및 장악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하는 상징성이 있습니다. 국채 상환이 지연되어 채무를 이행하지 못하면 디폴트, 즉 재정 파탄이 온 것입니다. 디폴트는 재정 파탄뿐만 아니라 국가 주권의 파탄도 의미합니다. 이처럼 국채와 주권은 국가의 정체성으로서 강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또 소버린이 종교적으로 가장 높은 곳이라는 의미에서 나온 단어 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소버린은 신이 인간에게 위양한 현세의 정치와 경제에 대한 결정권입니다. 소버린은 지금도 엄숙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재정의 규율을 지키고 국채(소버린)의 가치를 지키는 것은 국가의 주권(소버린)을 지키는 일이고 신이라는 가장 높은 곳에 어울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 루터의 성서중심주의 사상과 그 운동으로 프로테스탄트가 늘어났습니다. 루터는 유럽 각지의 개혁자들에게도 영향을 줬습니다. 개혁자 칼뱅 Jean calvin 이 있던 프랑스에서는 가톨릭 신앙이 강해서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스위스에서는 루터의 영향으로 종교개 혁이 한창인 도시가 몇 개나 생겼고 그중에서도 제네바는 칼뱅을 초청해서 종교개혁을 이끌게 했습니다. 칼뱅은 루터의 사상을 더욱 발전시키면서 철저하게 교회를 개혁했고 기존의 정치권을 위협했습니다. 때문에 칼뱅은 제네바에서 추방됐지만 1541년 개혁파들이 다시 칼뱅을 제네바로 불렀고 결국 칼뱅은 봉건제 영주를 추방하고 정치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칼뱅은 제네바의 시정을 장악하고 종교와 정치가 하나가 된 신권 정치를 펼쳤습니다. 그렇게 금욕적인 프로테스탄트 교리가 자리를 잡습니다. 시민의 일상생활에서 사치와 오락이 제외됐고 제네바 거 리에서 화려한 의복이나 고가의 기호품은 자취를 감췄습니다. 향락적인 언동이나 오락도 엄격하게 규제됐습니다. 부정부패를 적발했고 거리의 치안도 개선시켰습니다. 재정은 규율로 다스렸고 복지 및 의료 예산을 늘려 실업과 빈곤도 박멸했습니다. 칼뱅의 개 혁은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이전에 제네바의 로마 가톨릭 세력은 봉건 영주와 결탁해서 금권정치를 하고 일반 시민들을 착취하고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신앙심이 두터웠던 시민들은 교회를 거스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칼뱅이라는 카리스마 있는 이방인이 나타나서 신앙을 지 키면서도 부패를 척결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알려주고 정당성을 설명했습니다. 프로테스탄트라는 새로운 신앙의 틀 속에서 신을 따 르면서도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칼뱅의 주장이 사람들 을 각성시켰습니다. 결국 칼뱅의 탄생은 일반 대중이 기득권 계층을 뒤집은 쿠데타였습니다. 당시 일부 시민은 경제가 성장하면서 부를 얻고 힘을 키웠지만 기득권층의 시장 독점으로 더 큰 성장의 기회를 빼앗겼습니 다. 그런 독점을 파타할 정당성을 프로테스탄트라는 새로운 신앙이 보증해준 것입니다. 기존 크리스트교에서는 부를 쌓고 재산을 관리하는 것을 세속적인 것으로 보고 기피했습니다. 돈을 다루는 상인 등을 멸시하는 사고방식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을 이끈 루터와 칼뱅은 모든 직업이 존경받을 만하다는 직업 소명을 주창했습니다. 독일어로 직업을 뜻하는 '베루프 Beru'는 부른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신이 인간에게 사명을 주는 것 이 바로 소명이고 그 소명으로 각자에게 합당한 직업이 주어진다는 사고방식입니다. 이 베루프라는 단어를 루터가 의도적으로 사용했다고 베버는 서 술합니다. 일상의 직업 노동에 전념하는 것이 프로테스탄트에게는 종교적인 의무를 다하는 것이고 일을 해서 얻는 보수는 신의 은혜였습니 다. 근로와 절약으로 쌓은 돈이 자본이 되고 이를 기반으로 근대 자본주의가 발전해나갔다고 베버는 주장합니다. 칼뱅 이후 기존에 기피했던, 이자를 취득하는 은행업이 공기업으 로 인정받았고 근대적인 금융 자본이 발전했습니다. 베버는 칼뱅이 영리 추구와 재산 축적을 인정한 것이 자본주의 정신의 기반이 되었고 유럽의 근대화를 지탱했고 또 자본주의 사회 가 발전하는 원리가 됐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본주의가 노동을 종교에서 분리시키고 경제 활동을 종교적 모든 구속에서 해방시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베버는 신에게 부여받은 소명과 그 소명이 낳은 재물이 대규모 자본을 낳았다고 말합니다. 종교에서 분리된 합리주의로 자 본주의가 형성된 것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다. 프로테스탄트가 자본주의를 낳았다는 베버의 생각은 20세기에 큰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이후 베버를 비판하 는 학자들이 나타났습니다.
- 칼뱅이 영리 추구와 재산 축적을 인정해야 한다고 할 때 그 인정은 적극적인 것이 아니라 조건적인 것이었습니다. 칼뱅은 사람들이 사회에 봉사하는 정신으로 일에 전념함으로써 부를 획득하고 풍요롭게 사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부 자체를 사랑 해서는 안 되며 경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칼뱅 교의에서는 자본 주의의 자유경쟁 아래 경제적인 이익을 최대화하는 자세가 허용되 지 않습니다. 칼뱅은 엄격한 도덕규범 아래에서 공공의 복지를 위해서 노동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칼뱅의 의도를 넘어서 자본주의가 사람들이 이익을 추구할 수 있도록 면죄를 준 것도 사실입니다. 영국의 역사가 리처드 헨리 토니 Richard Henry Tawney는 1926년에 발표한 《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 Religion and the Rise of Capitalism》에서 프로테스탄트 개혁이 경제 활동을 종교 규범과 윤리 구속에서 해방시켰다고 했습니다. 종교가 물질적 인 이익 추구를 인정하는 결과가 됐고 그렇게 근대 자본주의가 형성 됐다는 설명입니다.  처음에는 경건한 프로테스탄트였던 중산 계급이 점차 자본을 축적하면서 기업가인 산업 자본가, 다시 말하면 부르주아로 변모합니다. 또 자본이 없는 사람들은 노동자 계급으로서 자본가에게 종속됩니다. 18세기가 되어 종교 색이 옅어지자 자본주의는 이익 추구를 전면에 내세웁니다. 칼뱅의 의도를 넘어서 자본주의는 홀로 길을 걷습니다. 토니는 결국 칼뱅이 인정한 영리 추구와 재산 축적이 자본주의를 종교에서 독립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베버와 토니의 논의에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베버가 자본주의 정신이 이익 추구에 대한 프로테스탄트의 면죄로부터 생겨났다고 주장하는 데에 반해 토니는 자본주의 정신은 이미 있었고 프로테스탄트 교의를 면죄로 이용해 발전했다고 주장합니다. 토니의 설명이 역사 속에서 보는 실제 모습과 가깝습니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자기 이익을 최대화하고 자유 경쟁을 근본 원리로 하기 때문에 성공하는 자와 탈락하는 자가 필연적으로 발생하고 신 앞에서의 평등이라는 암묵적인 규율에 반하는 현상이 일 어납니다. 따라서 거대한 자본을 가진 성공한 부르주아는 교리가 거래와 사업을 인정하면서도 자신과 타인도 따를 수 있는 방향으로 해석되길 원했습니다. 칼뱅 이전에도 이런 요구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칼뱅 시대 이후 에는 자본가들이 교리를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데 철저하게 사용했습니다. 부르주아는 프로테스탄트 교리와 함께 자본주의 세계를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세계란 베버가 주장하는 것처럼 종교적인 사명관이 우선하는 세계가 아니라 실리적으로 계산을 따지는 세계입니다.
- 경제가 발전하면서 도시 주민인 부르주아의 힘이 강력해졌고 그들은 경제의 자유와 의사 결정의 자유를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왕정을 타파하고 부르주아가 의회를 구성했고 의회를 최고 의사 결정 기관으로 만들면서 자신들의 이익과 권리를 증폭시켰습니다. 프랑스혁명으로 대표되는 근대 시민 혁명은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종교 개혁 시대에 칼뱅이 영리 추구와 재산 축적을 인정하면서 경제적인 자유를 얻은 부르주아들은 사회계약설이라는 새로운 이념을 갖고 정치적인 자유를 획득하려고 내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성이 신을 대신하는 만능의 능력으로 근대라는 시대의 문을 열었습니다.
- 중국은 유럽과 다른 지역보다 훨씬 더 부유했기 때문에 근대화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18세기 중국을 다스렸던 건륭제는 영국에서 온 사절단에게 “너희 들 나라에는 빈약한 것만 있다. 우리들이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 다”라고 말하고 이들을 쫓아냈습니다. 당시 영국 사절단이 가져온 것은 태엽 감는 시계, 오르골, 소형총, 기계 인형, 기관차 모형이었습니다. 모두 기계화를 국책으로 하는 영국의 독자적인 기술력을 자랑하는 물건이었습니다. 건륭제는 이것들을 보고 “천박한 장인의 착상”라고 웃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건륭제를 비롯한 중국 지배층은 유교적인 세계관을 확고 하게 갖고 있었습니다. 군신서열의 예를 국제 관계에도 적용해서 대국인 중국이 주변 국가들을 종속시키고 세계 질서의 중심이 되어 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른바 중화사상이었습니다. 중화사상에 사로잡혀 있던 지배층들은 영국에서 발명한 총과 산 업 기계의 유용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잔재주라고 생각했습니다. 영국의 과학사가인 조지프 니덤 Joseph Needham은 저서 《중국의 과학과 문명 science and Civilization in China 》에서 중국인이 발명한 화약을 총과 대 포로 실용화할 수 없었던 이유는 기술 혁신 같은 새로운 것에 대한 잠재적인 불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서술했습니다. 유교적인 인습과 전통을 고집하는 중국인에게 새로운 것은 이상한 것, 전통을 파괴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기피해야 했습니다. 건륭 제가 영국에서 가져온 물건의 가치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이해 하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입니다. 결국 유교적인 중화사상이 변혁의 기회를 빼앗았습니다.  건륭제는 1757년 외국 배가 최남단의 광저우만까지만 들어올 수 있게 제한하는 사실상의 쇄국정책을 취했고 중국의 근대화는 세계 열강보다 늦어졌습니다.
-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 빈곤이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주요 원인이라고 서술합니다.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풍 요로움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어 서 그들을 구제해도 그들의 자존심까지 구제할 수 없습니다. 스미스는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들에게 일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서술합니다. 일을 함으로써 사 회에 공헌할 수 있고 자신이 사회에서 필요하다는 자각을 하면 인간 의 자존심을 구제할 수 있습니다. 자존심이 충만한 인간은 공정함과 정의를 표방하는 마음속의 공평한 관찰자에 적합하고 타인을 믿고 타인에게 주기도 하고 또 받기도 합니다. 서로 필요한 것을 교환하고 서로 돕는 호혜적인 관계를 쌓을 수 있는 사회적 존재가 됩니다. 스미스는 자본주의에는 물질적인 조화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조화에 이르는 기능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경제 활동을 통한 호혜 관계야말로 신이라는 초월자가 인간에게 부여한 이성의 증거이고 인 간은 이성을 통해서만 건전하고 조화롭게 경제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 인간 이성은 혼란스러워지고 의심을 많이 하게 됩니다. 신용 불안이 사회를 뒤덮습니다. 미래를 신용할 수 없어 사람들은 소비를 억누르고 저축을 우선으로 하고 자신을 폐쇄적으로 만들어서 몸을 지키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또 경기가 냉각하고 후퇴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됩니다. 경제를 성장시키려면 인간이 인간과 연대하고 협조하고 신뢰해 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공정함과 정의의 이념인데 근대 사상가들은 이성이라고 불렀고 스미스는 마음속의 공평한 관찰자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념을 근원적으로 우리 인간에게 부여한 존재가 무엇인지를 생각할 때 우리는 다시 종교적인 존재가 됩니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계사를 바꾼 6가지 음료  (0) 2021.05.06
왜 세계사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는가  (0) 2021.04.27
문명은 왜 사라지는가  (0) 2021.03.21
오리진  (0) 2021.02.06
전염병 역사를 흔들다  (0) 2021.02.06
Posted by dala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