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0년대 중후반 일본의 주식시장과 지가는 왜 이렇게 폭등했을까?
환율 하락(화폐 강세)은 두 가지를 동반한다. 먼저 그 나라의 기업과 가계가 가진 자산가격이 상승하게 된다. A라는 사람이 일본 국채와 미 국 국채를 각각 보유하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엔/달러 환율이 50% 떨 어지면(엔화가 50% 강세가 되면), 예전에 2천만 엔으로 10만 달러를 바 꾸던 것이 이제는 1천만 엔으로 10만 달러를 바꿀 수 있게 된다. 글로벌 시각으로 바라보면, 가계와 기업이 자산 재평가로 대박을 맞은 것과 다름없다. 자산은 그대로인데, 평가의 잣대가 바뀌니 주식과 토지의 가격이 상승하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또한 환율 하락(화폐 강세)은 경기상승을 가속화한다. 인구가 약 1억 3천만 명인 일본은 내수시장이 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편이다. 주식이나 부동산 등 자산가격이 급등하면, 기업의 투자가 늘어나고 개 인의 소비성향이 높아지며 소비지출이 커진다. 당시의 일본도 마찬가 지였다. 1985년에 309만 대였던 신규 등록 승용차는 1990년대에 500 만 대를 넘어섰으며, 가전·가구 등 내구 소비재에서도 대형 고가제품의 수요가 크게 증가했고, 편의점이 대폭 늘어나고 택배사업도 급속하게 발전한다.
- 일본 사람들은 소비가 살아나자 환호성을 질렀다. 소비는 경제의 핵심지표이자, 경제 주체들의 걱정과 근심의 영역을 축소시키는 일등 공신이다. 은행 거래를 하는 사람들도 신이 났다. 예금통장의 명목가치는 동일했지만 엔화의 실질가치가 상승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해외 여행을 하는 데 50만 엔이 필요했다면, 엔화 가치 상승으로 이제는 30 만 엔으로도 충분했다. 한 주당 100달러짜리 미국 주식도, 캘리포니아 해변가의 10만 달러짜리 미국 주택도 더 적은 엔화로 살 수 있었다. 기업들은 기업가치를 자산가격 상승에 따른 이익의 증가로 포장했다. 각종 재무비율과 수익률이 동일하더라도, 기업이 가진 부동산이나 주식 등 자산가격이 상승함으로써 이익의 절대값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것은 기업들이 가진 문제의 본질을 희석시키고 눈을 가려, 기업의 가치와 성장성에 대한 날카로운 해석을 가로막았다.
한편 엔화 강세(환율 하락)가 되면 수입가격은 낮아지고 수출가격은 높아지는 환율 전환 효과가 발생하여 수출경쟁력이 떨어지게 된다. 따 라서 수출기업은 상품의 품질을 높이든지, 또는 원가를 획기적으로 낮 출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등 경쟁력을 강화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 다. 그러한 경쟁력 신장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수출가격의 상승은 수출 감소로 이어져 큰 타격을 가져온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와 기업들은 환 율과 관련된 세밀한 대책을 수립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업들은 자산가격이 오르자 재테크에 혈안이 되어버렸다. 장기적 이득을 도모하기보다는 단기적 수익성에 매몰되어 경쟁력 신장을 도외시한 것이다. .
- 1989년 11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통일이 시작되었을 초기부터 일부 투자자들은 재빠르게 동독 화폐에 투자했다. 통일은 정치적 행위이므로, 동독의 마르크화 가치를 실제보다 높게 평가할 것으로 일찌감 치 예측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예상대로 이듬해인 1990년 7월 마 르크화가 1대 1로 통일되었고, 발빠르게 동독 화폐에 투자한 사람들은 큰 차익을 얻었다.
당시 동독과 서독의 실질 경쟁력 차이는 대략 1대 9 정도였는데, 교환비율이 1대 1로 확정되었으므로, 이론적으로 동독 마르크화의 가치가 9배 높게 평가된 것이고, 독일 마르크화에 투자한 이들은 9배의 차 익을 올린 것이다. 이를테면 한국과 북한의 경제규모가 약 50배 차이가 난다면, 매우 거칠게 말해 화폐가치의 차이도 수십 배인 셈이다. 한국의 1만 원이 북한에서는 수만 원, 수십만 원의 가치를 가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물론 한국과 북한의 화폐 원 단위는 다르지만, 쉽게 설명하기 위해 같다는 것을 전 제하고 설명한다). 그런데 한국의 1만 원과 북한의 1만 원을 똑같이 1대 1로 교환해준다면, 북한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엄청난 이득을 얻 게 되는 셈이다. 1990년 7월 동독과 서독의 마르크화 통일은 바로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동독 마르크화 투자자들은 통일이 임박하자 통일과정에서 동독 마르크화의 가치가 이처럼 부풀려질 것이라는 점에 승부수를 던져 투자 했고, 결과적으로 엄청난 이익을 얻었다. 하지만 이러한 부풀리기는 장기적으로 결국 정상을 찾아가게 마련이다. 이들은 통일 후에는 두 화 폐의 가치가 정상적 수준으로 수렴될 것이라는 점에 다시 승부수를 걸 었다. 그러므로 이론적으로는 이러한 방식의 투자를 통해 투자자들이 18배, 또는 그 이상의 차익을 올리는 것도 가능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와 같이 경제적 현상에 대한 국가 간, 또는 사회적 합의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며 그 여파는 매우 폭력적이기까지하다. 통일 독일의 경
우 합의를 통해 환율을 1대 1 교환비율로 결정한 결과, 통일비용이 결국 몇 배로 급증했다.
- 어떤 사회가 건강한 사회일까? 조선의 개혁정신은 언제부터 사라졌을까?
중요한 점은 끊임없이 요동치는 사회일수록 건강한 사회라는 점이 다. 개인은 안주와 고착을 선호하더라도, 사회는 개인에게 역동성을 부여해야 한다. 왜 조선시대 말기에 경쟁력을 잃고 외세에 휘둘렸을 까. 토지와 노비제도에 의존하여 '편안한 부를 추구한 통치이념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국 경쟁 없이 주어지는 안락이 최대의 문제였다.
- 현재 시장을 독점하는 것은 불법이지만, 야코프 푸거가 활동하던 시기 에는 독점적 지위가 분명 기발한 사고였다. 또한 이는 정부의 규제 대 상이 아니라 암묵적 용인의 대상이었다. 치열한 경쟁이 이익을 없앨 수 있다는 공포가 낳은 결과이며, 결국 그 바탕에는 인간의 '에너지 공포 심리가 있다.
수익창출에서 가격의 역할은 매우 크다. 가격경쟁이 산업의 경쟁력 을 증진시킬 것이라는 생각은 때로는 맞다. 하지만 가격을 밑에서 받치 는 핵심적 조건과 원리를 제거하면 가격체제는 순식간에 의미를 잃는다.
푸거는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쟁취한 후 거 대한 부를 향한 확실한 기틀을 움켜쥔다. 헝가리는 동유럽에서 몇 안되는 구리 생산지였으므로, 그는 단숨에 헝가리 이북 시장의 유일한 구리 공급자가 되었다. 동료 독일인들과 번번이 경쟁해야 하는 상황을 돌 파하려고 베네치아에서 독점적 시장 장악에 승부수를 던졌고, 결국 성 과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푸거의 행동은 결코 칭송할 수 없다. 하지만 다른 경쟁자들과 달리 차별적 시각으로 시장을 보았던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물량 확대를 통한 거대한 노림수는 놀라운 전략이었고 시대와 잘 맞아떨어졌다고도 할 수 있다.
푸거는 향신료 무역에서도 시장을 제압했다. 밋밋한 식사에 풍미와 생기를 더하는 데 후추만큼 좋은 상품은 없었다. 당시에는 페르시아인들이 인도의 향신료 무역을 담당하고 있었고, 유럽 대륙의 관문이자 인 도와 유럽을 연결하는 지리적 여건을 지녔던 베네치아는 향신료 무역 의 독점적 항구였다. 베네치아는 아드리아 해 연안 북단에 자리 잡은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푸거가 베네치아에서 구리를 과잉 공급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한 끗 차이의 대반전의 승부수가 필요하 다는 것이다. 외부에 의해 막히더라도 사고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가 격은 사회적 규제 속에서 인간이 만들어놓은 하나의 틀에 불과하다. 틀 을 넘어서는, 상자 밖의 생각을 하는 사람만이 거대한 부를 움켜쥘 자격이 있다.
- 인적 인프라 구축사업은 지도자를 육성하기 위한 교육사업이었다.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자 기존의 수도원으로는 어림없었기 때문이 다. 기원후 500년 이후 유럽 전역으로 확산된 수도원은 필사하는 방문헌을 베껴 쓰는 일을 하는 방)과 도서실을 갖추고 있었지만 그 수준은 형 편없었다. 가톨릭 사제들은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정도의 능력은 갖 추었지만 교육 수준이 높은 것은 아니었다. 수도원에서는 대체로 고대 에서 계승한 자유 7과(문법, 수사학, 논리학, 산술, 기하학, 음악, 천문학)의 기초를 교육하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이런 교육수준을 획기적으로 끌 어올릴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에서 대학이 등장하게 된다. 1088년 볼 로냐 대학, 1160년 파리 대학은 가톨릭 지도자를 양성하겠다는 포부를 구현한 시설이었다.
농업혁명 확산 사업은 일종의 도약 프로그램이었다. 농업혁명을 다 른 지역으로 확산하고자 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곡물의 생산 증대와 함께 교세 확장까지 가져올 수 있는, 욕심 나는 사업이었다.
- 전쟁을 통한 혁명의 확산도 도모했다. 1096년, 교황 우르반 2세 (Urbanus I)는 예루살렘을 되찾는다는 명목으로 교황권의 통치지역을 확대하기 위해 십자군 원정을 기획했다. 이후 십자군 원정에 거의 200 년 동안 매달렸지만, 1270년의 마지막 8차 원정도 결국 아무런 성과 없 이 끝나고 실패했다.
설마 전쟁사업을 기획했을까 하고 의구심을 가질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에 대한 현대의 부정적 사고는 전쟁의 참혹함을 깨달은 후에 형성된 것이다. 당시에는 '전쟁은 투자'라는 의식이 팽배했다. 포로는 무상 노동력 취득이요, 전리품으로 빼앗은 토지는 농업혁명의 새 로운 확장기지였다. 이들이 8차까지 십자군 전쟁을 벌인 것은 농업혁명 성공에 대한 자부심이자 기필코 혁명의 추가 기지를 확보하여 다시 한번 부를 쌓고 도약하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역사는 이때 각 계층의 사람들이 각기 다른 꿈을 꾸었다고 전하고 있다. 추락한 귀족들은 영지를 추가 확보하여 화려한 영주로 수직 이 동을 하고자, 농민들은 토지와 포로의 확보로 계층을 세분화하는 혁신 적 신제도의 기득권을 얻고자, 상인들은 물자의 교류 확대를 통해 간 절히 한몫을 건지고자 했을 것이다. 이처럼 십자군 전쟁은 모든 이들 의 꿈이 집약된 하나의 거대한 투자 프로젝트였다.
그런데 끝내 십자군 전쟁이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나버리자, 1277년에 는 인적 인프라 구축사업도 도마 위에 오른다. 이로써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순탄하게 추진되고 있던 교육사업에 급제동이 걸리고, 결과적 으로 대학에는 회오리바람이 몰아치게 된다.
- 중세는 농업혁명의 성과를 중심에 두고 봐야 한다. '부의 혁명'을 이 룩한 유럽은 거침이 없었고 인적 인프라, 농업혁명 확산 사업을 통해 또 한 번의 도약을 노렸다. 인적 인프라 사업은 현대의 시각으로 보아 도 대성공을 거두었다. 반면 십자군 전쟁은 전쟁의 승리를 통해 혁명의 확산을 도모하였으나 끝내 좌절되었다. 이에 교황은 심한 불균형을 발 견했을 것이다. 이 불균형을 어떻게 할 것인가.
대학의 부흥은 놀라운 치적이라고 볼 수 있다. 신학에 함몰되지 않 고 '큰 그림의 지도자를 양성하겠다는 취지는 성과를 가져왔다. 갈릴레 오와 코페르니쿠스의 천문학, 뉴턴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라는 중 력과 운동법칙 중심의 물리학 등 과학혁명은 세계를 뒤집어놓는다. 이 는 모두 중세의 대학이 주춧돌을 놓은 거대한 성과이다. 핵심 키워드로 시대를 조망해본다면 농업혁명은 '대성공했지만 십자군 전쟁은 '대참 패를 경험했다. 한편 중세는 대학의 설립과 번영이라는 '대반전을 거 둠으로써, 근대로 이어지는 중요한 역할을 마무리했다고 볼 수 있다.
- 인간의 초기 역사로 돌아가보자. 인간이 음식을 불로 익혀 먹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간이 음식을 불로 익혀 먹으면서 장의 길이가 짧아졌고, 이로 인해 에너지 소비량(기초대사량)을 줄일 수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 진 사실이다. 그런데 그 밑바탕에는 에너지에 대한 공포와 절박함이 서 려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불을 사용하면서 절감된 에너지와 낭비 되는 에너지의 차이는 기능의 진화로 나타난다.
- 인간의 뇌는 인체의 기초에너지 중 20~25%를 소비한다. 그렇다면 뇌가 큰 것이 좋을까, 작은 것이 좋을까? 진화 과정에서 인류의 뇌는 커졌다가 다시 작아진다. 두뇌의 활용과 에너지 소비의 절박함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 선택은 쉽지 않다. 두뇌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면 결국 멸종을 맞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에너지를 아끼려는 절박한 심리도 이해가 가능 하다. 에너지의 궁핍은 공포로 작용하며, 이는 노동 기피 심리와도 긴밀하게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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