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권의 대이동

역사 2021. 11. 17. 20:38

- 왜 패권을 떠받치는 요소가 시대에 따라 달라졌을까? 이 물음에 답 하려면 서로 다른 패권 국가가 기대고 있던 경제 체제의 속성을 자세 히 들여다봐야 한다. 가령, 중세 봉건제라는 경제 체제와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기간에 등장한 경제 체제의 특징을 생각해볼 필 요가 있다. 특히 이행기에 등장하는 자본주의는 식민지 개척과 착취, 전쟁에 기대고 있어서 '전쟁 자본주의'라 부르기도 한다. 그 후 자본주 의가 활짝 꽃을 피우면서 '산업 자본주의'가 출현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렇게 변화하는 경제 체제의 속성을 패권의 형성과 이동 문제 에 대입해보면 폴 케네디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스페인제국이 영토에 집착했던 까닭은 봉건제의 속성과 연관되어 있다. 반면 네덜란드가 무력을 앞세워 아시아와 아메리카에 무역 네트워크를 개척하는 데 혈안이었던 일은 봉건제가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과 연관이 있다. 자본주의가 좀 더 성숙함에 따라 영국과 미국은 폭력보다 기술 혁신에 바탕을 둔 경제력과 자유 무역 교리를 앞세우기 시작했다.
패권 국가를 뒷받침하는 경제 체제의 속성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패 권을 구성하는 요소가 더 분명하게 드러날 뿐만 아니라 패권이 쇠락하 는 까닭도 파악할 수 있다. 폴 케네디는 한 나라가 갖추고 있는 경제력 에 비해 군사력이 지나치게 확장되면 '과잉 팽창'이 일어나 쇠락이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그럴듯한 주장이지만 경제력이 군사력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임계점은 패권 국가마다 달랐을 뿐만 아니라 임 계점이 찾아오는 원인도 달랐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따라서 이 문제는 경제 체제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속성을 이해할 때 답할 수 있으며 동 시에 패권 행사에 반드시 필요한 재정 체제의 특징을 이해할 때 더욱 분명해진다. 여기서 '재정 체제'란 일반적인 개념, 즉 세금을 거두고 돈 을 빌려주고 이자율을 조정해 경제 자원을 동원하는 제도 및 기구뿐 아니라 이를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나 정치 문화까지도 모두 포함한 다. 이 재정 체제를 잘 갖추지 못하면 한 나라의 힘을 국내외로 투사하기 어렵고, 재정 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하면 패권국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다. 이를테면 봉건제에 바탕을 두고 있던 스페인이 기댈 수 있는 재정 체제와 거기서 동원할 수 있는 재정 자원의 규모는 성숙한 자본주의에 바탕을 둔 미국 재정 체제의 역량과 분명 차이가 있으며, 그에 따라 두 나라가 패권을 유지할 수 있는 기간도 달라졌다. 따라서 우리가 패권 형성과 쇠락의 역사를 살펴볼 때 눈여겨볼 문제는 패권의 바탕이 되는 경제 체제의 속성과 그것에 기대고 있는 재정 체제의 효율성이라 할 수 있다.
- 이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14세기 중반 유럽을 강타해 유럽 인구의 최소 3분의 1을 앗아간 흑사병을 생각해보자. 유럽은 심각한 위 기를 겪었지만 인구는 그 후 다시 회복되었다. 하지만 아메리카 원주 민 인구는 이렇게 회복되지 않았다. 병이란 게 한 번 돌고 나면 면역이 생기는 법인데도 인구가 다시 회복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원주민이 먹고살기 어려웠다는 방증이다.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스페인 사람들은 금이나 은 같은 귀금속을 얻 기 위해서 원주민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포토시와 멕시코에서 은이 발견된 후에는 원주민 노동력을 끝없이 착취해 엄청난 양의 은을 얻기 도 했다. 이런 학살과 노동 착취를 잊어서는 곤란하다. 더군다나 귀금속이 발견되기 전에 이미 스페인 사람들이 원주민 노동력을 착취하면 서 엄청난 환경 파괴가 일어났고, 그 때문에 수많은 원주민이 희생되 었다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다.
또한 아메리카에 정착한 모든 스페인 사람들이 귀금속 채굴로 먹고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본국에서 그랬듯 농사나 목축으 로 재산을 불리기를 원했는데, 특히 노동력이 많이 필요하지 않은 목축에 관심을 기울였다. 1520년대부터 스페인 사람은 정복 지역에 소, 말, 돼지, 양을 들여왔고, 153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목축을 시작했다.
특히 양을 기르는 데 애써서 1550년대에 이르면 양이 1000마리에서 3900마리로 네 배나 늘어났다.
하지만 양 목축은 원주민 농업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 양이 농업 지역 내의 공유 목초지에 풀을 뜯으러 들어왔던 것이다. 남아메리카 환경도 크게 바뀌었다. 원래 남아메리카는 땅이 비옥해서 밀 농사를 주로 지었는데, 목축이 확대되고 원주민 인구가 줄어들면서 사막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전염병, 사막화, 노동 착취 등으로 원주민 인구는 급속히 줄었고 다 시는 그 수를 회복하지 못했다. 이건 어쩌면 원주민에 대한 수탈과 착 취가 그만큼 심했다는 방증일 테고, 유럽인의 도덕적 책임은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뜻이다.
- 여기서 두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우선 스페인제국에는 부유한 지 역도 많고, 아메리카라는 든든한 보물창고도 있었는데 왜 전쟁 비용을 조달하는 데 그토록 어려움을 겪었을까? 다음으로 왜 스페인제국과 그 주변 여러 나라와 제국은 끊임없이 영토를 두고 다투었을까?  첫 번째 물음에 대한 답은 스페인제국이 아직까지 중세의 잔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데서 찾아야 한다. 특이하게도 스페인제국 은 정복 전쟁보다는 주로 결혼과 상속, 외교를 통해 유럽 여러 나라를 편입하면서 건설되었다. 그러다 보니 중앙집중적으로 통일된 통치 구조를 갖추지 못했고, 대신 여러 나라가 황제 개인을 중심으로 느슨하게 결합되어 있는 복합왕국composite monarchy 이라는 체제를 따르고 있었다. 복합왕국은 그것을 구성하는 나라의 고유한 통치 구조와 문화를 그대로 보전한 채 왕조 사이에 혼인이나 상속을 통해 영토를 넓혀나가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이런 체제는 손쉽게 빨리 영토를 확장하는 데는 유리하지만, 왕국을 구성하는 여러 지역의 재정 자원을 체계적으로, 또 효율적으로 동원하는 데는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이런 특성은 훗날 북아메리카대륙에서 여러 주가 하나의 나라를 이 뤄 탄생한 미국과 비교하면 더 두드러진다. 미국은 여러 주가 각각 자 치권을 행사하면서도 연방 정부와 의회가 강력한 연방 헌법 아래 아래 재정 자원을 통제하고 배분할 수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짧은 시간에 강력한 나라로 떠오를 수 있었다. 미국의 연방 체제와 복합왕국의 느 슨한 결합은 달랐다는 이야기다. 반면에 스페인제국 같은 복합왕국은 잘 정비되어 있는 재정 체제를 갖추지도 못했고, 이를 뒷받침하는 이 념도 발전시키지 못했다. 그러니 나랏돈이 필요할 때마다 그때그때 각 지역 엘리트와 갈등하고 타협하면서 근근이 자원을 동원해야 했다.
두 번째 물음에 대한 답은 첫 번째 물음에 대한 답을 보충하기도 한 다. 잘 정비된 체계적인 재정 체제를 갖추지 못한 까닭과 영토를 둘러 싼 다툼이 끊이지 않았던 일은 모두 같은 원인, 바로 스페인제국이 여 전히 봉건적인 경제 질서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이 경제 체제는 근본적으로 군사력을 가진 이들이 농민이 생산한 경제 잉여를 강압적으로 짜내는 일에 바탕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농민들은 기 술 혁신을 도모해 생산을 늘릴 까닭이 전혀 없었다. 따라서 혁신은 극 히 드물고 생산성은 아주 낮을 수밖에 없는 체제였다.
이런 경제 체제에 바탕을 두고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나 황제는 백성 에게서 거두는 잉여를 단기간에 늘릴 수 없었다. 세금을 늘린다고 해 도 거둬들일 잉여 자체가 워낙 부족하니 한계가 있으며, 대개 농민의 저항에 부딪치기 십상이었다. 이럴 때 쓸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국왕 에게 속한 땅, 그러니까 직영지라 불리는 땅을 더 효과적으로 이용하 는 것인데, 이 일도 농민의 노동력을 동원하는 일이어서 또 다른 저항 에 맞닥뜨릴 위험이 컸다. 결국 봉건 군주가 부를 늘리는 가장 손쉬운 대안은 정복이나 결혼으로 영토를 늘리는 일이었다. 이것이 바로 스페 인제국이 그토록 영토에 집착한 이유다. 영토를 넓히려는 전략, 그러니까 정복 전쟁이나 결혼, 상속, 외교 같은 수단을 동원해 영토를 넓히는 일은 일시적으로 군주의 필요를 채울 수 있다. 하지만 제국 규모로 성장한 뒤에도 봉건제의 잔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스페인제국, 특히 제국의 본거지였던 스페인에는 아직도 농민에게서 잉여를 착취하는 귀족 영주 나 소규모 군주가 많이 남아 있었다. 이런 세력을 완전히 제압하고 중 앙집중적인 국가를 건설하는 일, 즉 역사학자와 정치학자들이 국가 형 성 state formation이라고 부르는 과정이 스페인제국에서는 완성을 보지 못했다.
- 봉건제에 머물고 있던 스페인제국은 상업이나 제조업에서 끝없이 이윤을 거둬 자본을 축적하는 사람이 다수를 이루는 사회로 이행하지 못했다. 이런 이행의 동력은 직접생산자인 농민을 토지에서 축출해 임 금노동자로 바꾸는 과정이 필요했고, 그런 일은 거칠게 이야기하자면 지주가 자본가로 변신해 농민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가능했다. 당시 유럽 변방의 작은 나라였던 잉글랜드가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을 치른 후에 귀족이 대거 몰락하면서 왕권을 크게 강화하는 한편 농촌에서 지 주가 농민을 땅에서 쫓아내면서 재산권을 다져나갔던 게 바로 이런 사 례라고 할 수 있다. 대신 스페인 지주층, 바꿔 말하면 귀족은 여전히 농민에게서 경제 잉여를 짜내어 과시적인 소비에 몰두했다. 이런 이들이 지배층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제국이 계속해서 영토를 둘러싼 전쟁에 휘말리는 일은 피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계속된 전쟁으로 봉건 경제 체제에서 동원할 수 있는 재정 자원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결국 스페인제국은 쇠락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 네덜란드가 발트해 무역에서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네덜란드인이 보유한 대규모 선단, 동원한 선박의 효율성과 그에 따른 낮은 운송비를 꼽을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네덜란드인이 많은 배를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었던 건, 네덜란드에 서 일찌감치 어업이 발전했기 때문이다.
특히 중요했던 것은 대어업大魚業이라 불렀던 청어잡이였다. 네덜란 드가 여기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떻게 보면 운이 좋았다. 원래 청 어 떼는 발트해에 주로 머물렀는데, 15세기에 소빙하기로 바다 수온이 낮아지자 좀 더 따뜻한 바다를 찾아서 네덜란드 앞바다인 북해로 이동 한 것이다. 그래서 『베르메르의 모자Vermeer's Hat』를 쓴 캐나다 역사학자 티머시 브룩Timothy Brook은 네덜란드인이 ‘윈드폴windfall”, 즉 '뜻밖의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네덜란드 어부들은 이런 행운을 누리기에 충분한 준비를 갖 추고 있었다. 이미 14세기 중반에 청어 내장을 제거해 소금에 절이는 기술을 개발했고, 15세기 초에는 기동력이 좋고 안정적인 뷔스buss 라는 배를 이용했다. 17세기 전반기에 이르면 이런 청어잡이 어선이 무려 1500척이었고, 어부 숫자도 1만 2000명에 달했다. 네덜란드 상인은 청어와 발트해 지역의 곡물을 교환했는데, 이 곡물을 서유럽과 이베리아반도 지역에 수출하고 대신 정제되지 않은 소금이나 수공업 제 품을 수입해 큰 이익을 거뒀다.
어업과 무역의 성장은 네덜란드 조선업 발전을 이끄는 힘이 되었다. 튼튼하고 빠른 뷔스에 이어 16세기 말에는 소형 범선인 카라벨caravel 을 개량해 원양 항해에 적합하게 만든 캐럭carrack을 발트해 무역에 널 리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595년에는 플라이트fluyt라는 범선을 개 발해 썼는데, 이 배는 선체 좌우가 볼록해 많은 상품을 실을 수 있었기 때문에 대량 운송에 아주 효율적이었다. 17세기에 이르면 네덜란드 조선소에서 매년 건조되는 배는 400척이 넘었고, 고용된 노동자만 해도 1만 명 이상이었다. 네덜란드에서 도시화가 빠르게 일어났다는 사실은 경제가 성장하는 데 유리한 여러 변화를 낳았다. 중세 후기에 네덜란드를 비롯해 유럽 곳곳에서 일어난 도시화는 근대적인 재산권 개념이 생기고 퍼져나가 는 데 도움이 되었다. 물론 그것만으로 자본주의가 자리 잡았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배타적인 재산권 개념이 도시에서 널리 퍼지기 시작하면서 상거래와 공업이 발전했다.
도시가 발전하면서 문화적으로나 지적으로 번성한 일도 넓게 보면 네덜란드가 스페인의 지배에서 독립하고, 암스테르담 같은 국제 도시 가 발전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인문주의가 북유럽에서 기독교 인문주의 humanism 운동으로 변해 저지 대 국가 도시들을 중심으로 꽃을 피웠다. 그 시대 대표적인 인문주의 자로 유럽 곳곳 지식인과 깊이 교류했던 지식인 에라스뮈스가 저지대 국가 출신이었다는 사실이 이 점을 잘 보여준다. 
- 결국 종교재판소 도입과 개신교도에 대한 박해에서 시작된 정치적·종교적 불만에, 스페인제국의 무리한 세제 개혁과 극단적인 조치가 더 해지면서 17개주 전체의 저항 운동으로 번져나갔다. 특히 이 과정에서 네덜란드 사회의 주류를 이루었던 상인 집단의 태도 변화를 주목해야 한다. 원래 상인은 정치적 저항을 굉장히 꺼리는 편인데, 정치권력자에 대해서 드러내놓고 저항하는 일은 자칫하면 사업 자체를 완전히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신중하고 또 신중한 상인이 저항에 가담했다는 건, 그만큼 제국에서 얻는 이익에 비해 제국이 강요하는 부담이 너무 커졌다는 뜻이다.  네덜란드독립전쟁은 1568년에 시작되어 이후 80년이나 계속되었 다. 물론 이 작은 나라가 당시 세계 최강의 스페인제국군에 맞서는 건 정말 쉽지 않았을 것이다. 1580년대 말, 스페인제국의 공세가 거세지 자 네덜란드공화국은 '스페인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으로 프랑스나 잉글랜드에 보호를 요청해볼 궁리까지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1590년대 이후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상업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막대한 부가 축적되고, 이런 부가 다시 전쟁을 지속시키는 일종의 선 순환이 나타난 것이다. 그 덕택에 네덜란드는 스페인제국은 물론 잉글 랜드나 프랑스 같은 새로운 열강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하면서 경제적 활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좀 더 자세하 게 살펴보자.
- 이렇게 볼 때 오랜 전쟁에도 네덜란드가 스페인제국과 달리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는 네덜란드 정부가 군사와 재정 정책으로 네덜란드 상업을 적극적으로 보호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전쟁을 피해 이주한 수많은 이민을 유치해 자본과 지식, 사업 네트워크를 흡수했던 일도 크게 기여했다. 군사비를 몇몇 국제 은행가들의 대부에 의존 한 스페인제국과 달리 자국의 부유한 시민에게 의존한 일도 경제가 활 발하게 돌아가는 데 도움이 되었다. 세금만으로는 전쟁을 치를 수 없 었던 정부가 장기 공채 같은 채권을 발행해 시민으로부터 전쟁 자금을 모았고, 그 결과 채권 시장에서 거래가 활발해져 시중에 자본이 더 활 발하게 돌았던 것이다. 이렇게 네덜란드 경제는 상업과 금융업을 바탕 으로 전쟁에 적응해갔다. 결국 군사력과 재정 자원을 동원하는 일과 상업을 유기적으로 연 결해 계속 부를 창출하는 체제를 갖춘 네덜란드는 봉건 영토의 세금 과 아메리카의 귀금속,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대규모 대부에 의존한 스페인제국과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8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치 열하게 다툼을 벌였던 두 나라 가운데 스페인제국은 전쟁이 길어질수 록 힘을 잃은 반면, 네덜란드는 상업의 위용을 유럽 안팎에서 마음껏 과시했다. 그 결과, 인구가 기껏해야 150만 명 정도였던 작은 나라 네 덜란드는 당대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스페인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지켜낼 수 있었고 더 나아가 패권 국가로 도약하기 위한 궁극적인 힘, 바로 상업을 진작할 수 있었다. 어떻게 네덜란드가 그런 힘을 갖게 되 었는지 이해하려면 16~17세기 아시아 무역에서 두각을 나타낸 동인 도회사의 사례를 살펴봐야 한다.
* 16세기 중반에 저지대 국가 신교도 제조업자가 주로 만들었던 새로운 직물을 일컫는 말이다. 길이가 짧은 방모사로 짠 무겁고 폭이 넓은 구직물 old draperies과 달리 신직물은 좀 더 거칠고 가벼우면서 길이가 긴 소모사로 짰다. 나중에는 소모사와 방모사를 엮어 짠 서지serge나 소모사와 명주실로 짠 직물이 등장했다. 구직물은 16세기 중반에 인기를 있은 반면, 신직물은 가볍고 색깔이 다채로운 데다가 값이 저렴해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 네덜란드의 한계: 봉건 귀족에 기댄 자본주의 경제
동인도회사의 배들이 아시아 곳곳을 헤집고 다니던 17세기 전반은 그야말로 네덜란드의 황금기였다. 독립전쟁은 1648년에 막을 내렸고, 네덜란드공화국의 독립이 국제 사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네 덜란드 상인들은 유럽과 아시아, 아메리카의 갖가지 상품을 본국으로 들여온 후 이를 다시 유럽 곳곳에 유통시켜 엄청난 이윤을 누렸다. 고 급 직물을 비롯한 네덜란드 공산품은 유럽 전역에서 인기를 끌었다. 네덜란드는 그야말로 세계의 창고가 되었다. 프랑스 역사가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은 저서 『물질문명과 자본주의 Civilization materielle, Economie et Copitalisme』에서 네덜란드 창고 무역의 일면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거대한 창고였다. 창고는 큰 선박보다 더 크고 많은 비용이 들 었다. 이것을 이용해서 연합주(네덜란드) 전체 국민이 10~12년 동안 (1670년) 소비할 수 있는 양의 밀을 비롯해 청어, 향료, 영국의 직물, 프랑스의 포도주, 폴란드와 동인도의 초석, 스웨덴의 구리, 메릴랜드의 담배, 베네수엘라의 카카오, 러시아의 모피, 에스파냐의 양모, 발트해 지역의 대마, 레반트의 비단 같은 상품을 보관했다.”
이런 ‘창고무역(중개 무역)' 에서 축적한 부 덕분에 네덜란드 사회는 대단한 풍요를 누렸다. 이를테면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렘브란트나 페 르메이르 같은 대가를 비롯해서 수많은 화가의 작품들이 활발하게 거 래되었다. 17세기 중반 네덜란드에는 대략 250만 점의 미술 작품이 유통되었는데, 네덜란드는 물론 유럽 곳곳에서 수입된 작품들, 특히 여러 장르의 회화 작품은 네덜란드 중산층 가정을 장식하는 데 활용 되었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황금기는 짧았다. 17세기 후반이 되면 이미 경제 에서 쇠퇴의 징후가 나타나고, 유럽에서 새롭게 떠오른 강자 잉글랜드 와 전통적인 열강 프랑스와의 경쟁에서 뒤처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때 도 네덜란드는 여전히 유럽에서 가장 부유했지만, 17세기 초 같은 활 력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핵심적인 원인은 네덜란드가 기본적으로 상업에 거의 모든 것을 의존하는 사회였다는 데 있었다.
네덜란드는 자본주의 사회의 면모를 어느 정도 갖추기는 했지만, 네 덜란드가 거래하며 이윤을 거뒀던 유럽 사회는 여전히 봉건 질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스페인제국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봉건 사회는 기 본적으로 영토의 논리, 그러니까 토지에 묶여 있는 농민으로부터 강제 로 잉여를 수취하는 이들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그러므로 농업에서 문 제가 생기면 지배층이 거둬들일 수 있는 잉여도 줄고, 그만큼 이들이 익숙했던 사치스러운 과시적 소비도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소빙하기 가 찾아와 유럽 대부분 나라에서 농업 생산이 위축된 17세기 중반 위 기는 바로 이런 문제를 낳았다.
- 그 결과, 네덜란드 경제의 중추를 이루었던 무역에 문제가 생겼다. 우선 네덜란드 무역을 오랫동안 지탱한 발트해 무역이 정체하기 시작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된 건 네덜란드 해양 운송업과 무역업에 특별히 문제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실제로 발트해 무역에서 네덜란드가 차지하는 비중 자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농업 위기로 인 해 인구가 줄어들거나 정체되어 전반적으로 수요가 떨어져서 발트해 무역량 전체가 줄어든 것이 문제였다. 실제로 17세기 전반 이후 발트 해 무역량은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해 17세기 말에는 20퍼센트 가까이 줄었고, 18세기 전반기에는 절반 이하로 줄었다.
발트해 무역이 위축되었던 것만큼이나 네덜란드 경제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힌 일은 아시아 향료 무역의 수익성이 악화된 것이었다. 이 역시 17세기 유럽의 위기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인구가 줄어들 고 농업 생산이 위축되면서 향료 같은 사치품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었 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향료 무역의 수익성이 빠르게 악화된 17세기 후반에 인도산 면직물이나 차, 커피 같은 새로운 상품의 교역은 늘어났다. 네덜란드동인도회사도 이런 추세에 따라 면직물 같은 새로운 상 품 시장에 들어가려 했지만, 여기서는 향료 무역에서처럼 독점적인 지 위를 구축하기가 어려웠다. 향료와 달리 면직물 같은 상품의 생산지는 여러 지역에 분산되어 있었던 데다가, 강력한 제국과 지역 국가에 속 해 있었기 때문에 쉽게 정복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네덜란드동인도회사는 새로운 무역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구태의연한 방법을 쓰려고 했다. 차 무역 같은 경우 네덜란드는 향료제도에 있던 약소 부족에게 썼던 방법을 아시아의 거인 중국에도 쓰 려고 했다. 물론 중국 정부는 가만있지 않았고 네덜란드동인도회사가 차 무역에 참여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사이 잉글랜드동인도회사는 차 시장에 뛰어들어 인도산 면직물과 중국산 차를 맞바꾸는 새로운 무역 을 시작했다. 네덜란드동인도회사는 폭력과 강압으로 큰 성공을 거뒀 으나 예전의 성공에 도취된 나머지 변화하는 세계 경제 환경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 그렇다면 네덜란드의 패권은 왜 오래 이어지지 못했을까? 두 가지 원인을 제시할 수 있는데, 하나는 봉건 질서가 지배하는 유럽 세계에 서 네덜란드가 주로 사치품 무역을 통해 이윤을 거두고 있었기 때문이 다. 그러다 보니 17세기 소빙하기에 농업 위기가 찾아왔을 때 봉건 귀 족의 구매력이 급격하게 떨어지자 네덜란드로서는 이윤을 창출할 만 한 대체 구매자를 찾기 어려웠다. 다른 하나는 국가 형성 과정에서 일 어난 중상주의 경쟁에서 밀려났기 때문이다. 경제 성장이 빠르지 않아 서 재정 자원을 동원하기 어려울 때 규모가 훨씬 큰 프랑스나 잉글랜 드 같은 경쟁자와 만나다 보니 싸움이 힘들 수밖에 없었다.
따지고 보면 이런 한계는 네덜란드 자본주의가 좀 더 발전했다면 해 결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네덜란드가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아주 오 래된 전통적인 논리를 따라 이윤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는 기 술 혁신과 국내 시장의 통합, 내수 시장 확대 같은 성숙한 자본주의 사 회를 추구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지 모른다. 아울러 규모의 문제도 이 점과 연관이 있다. 네덜란드가 대외 무역에 집중하면서 실제로 정착식민지를 확대하는 데 관심을 보였다면 무역 위기가 닥쳤을 때 이를 보완해줄 넓은 제국 시장에 기댈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네덜란드는 17세기 후반 이후 패권을 잃은 다음에도 여전히 부유한 나라로 남았다. 18세기 중반까지도 네덜란드의 1인당 국내총 생산은 유럽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 오히려 문제는 네덜란드 경제가 성장이나 후퇴가 거의 없는 정체 상태에 접어들 었다는 것이었다. 원래 상업에 바탕을 두고 자본을 축적했던 나라였기 때문에 제조업이 충분히 발전하지 못했고, 기술 혁신이 빠르게 일어나 지 않았던 터라 18세기 즈음에 이르면 네덜란드 자본은 투자할 곳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네덜란드 자본은 금융 시장으로 몰렸고, 거기서 조성된 돈은 결국 경쟁국인 영국으로 흘러들었다.

- 네덜란드의 뒤를 이어 패권을 거머쥐게 된 영국은 좀 달랐다. 영국의 자본주의 역시 상업에 크게 의존하기는 하지만, 제조업 분야에서의 기술 혁신이 네덜란드보다 지속적으로 일어났고, 결국 산업혁명에 성공했다. 따라서 네덜란드는 영토 확장에 바탕을 둔 스페인 과 자본 축적에 기댄 영국 사이에 놓인, 이를테면 이행기의 패권 국가 였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그래서 네덜란드의 전성기는 그렇게 짧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 학교에서 명예혁명과 권리장전에 관해서 배울 때 흔히 국민의 자유 같은 기본권을 보장하는 근대 입헌군주제가 성립된 사건이었다는 정 도로만 이해하고 넘어간다. 그런데 그만큼이나 중요한 일이 바로 의회 가 매년 열렸다는 사실이다. 이 의회를 구성하는 의원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공채나 주식을 샀던 상인이나 제조업자, 지주였다. 그러니까 공 채를 사는 사람들이 세금을 매기고 그 세금 수입으로 자기 자신에게 이자를 지불하는 법을 만들었던 셈이다. 다시 말해, 정치권력과 돈을 버는 일이 긴밀하게 얽혀 들어갔던 것인데, 이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 의 아주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명예혁명의 성공은 영국 자본주의의 발전과 깊이 연관된 사건이었다.
- 실제로 영국 의회는 특정 물품소비세와 관세 수입을 정부 공채에 지 불하는 이자로만 사용하도록 법을 제정했고, 이런 식으로 정부의 지불 을 보증해 시장에서 두터운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그 결과, 영국 정 부는 매번 전쟁을 치를 때마다 점점 더 큰돈을 금융 시장에서 조달할 수 있었다. 이러다 보니 프랑스 같은 경쟁국은 영국 정부의 자금 조달 능력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프랑스와 전쟁을 시작한 1689년 잉글랜 드 정부가 지고 있던 부채는 겨우 100만 파운드 정도였다. 적은 액수는 아니지만, 훗날을 생각하면 사소한 돈이었다. 1690년대 재정혁명을 시행한 후 9년전쟁이 끝났을 때 그 액수는 1500만 파운드로 늘었 다. 세월이 흘러 북아메리카독립전쟁이 끝나는 1783년에 이르면 국가 부채가 2억 4300만 파운드에 이르렀다(2017년 기준으로 계산하면 2000 억 파운드가 넘는 금액이다). 80년 만에 조달할 수 있는 재정 자원의 규모가 거의 15배 늘어난 셈이다.
- 18세기 영국 대서양 무역은 네덜란드처럼 중개 무역에 그친 것이 아니라 영국 내 제조업 발전과 긴밀한 연관관계를 맺으며 발전했다. 무역과 제조업 발전이 시너지를 내면서 함께 성장했던 것이다. 무역을 통해서 거둬들이는 수입뿐만 아니라 제조업 발전을 통해서 창출되 는 고용과 부가가치는 영국 내 시장을 확대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그런 만큼 영국 자본주의가 더욱 진전되었고, 이것은 훗날 산업혁명이 일어나는 데 중요한 조건을 제공했다. “산업혁명에 불을 붙일 불꽃이 필요했다면 해외 무역은 그 불꽃이 나온 곳”이라고 말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의 말처럼 말이다.
- 삼각 무역은 영국과 아프리카, 아메리카의 세 축을 연결하는 교역 네트워크였다. 런던이나 브리스틀, 리버풀 같은 곳에서 출발한 배는 인도산 직물이나 술, 총, 각종 제조업 제품을 신고 서아프리카에 도착했다. 이런 상품으로 현지 노예 상인에게서 노예를 산 뒤 아메리카대륙을 향해 떠났다. 북아메리카 남부 식민지나 서인도제도에서 노예를 팔고 나면, 그 빈자리를 설탕이나 담배, 커피, 염료, 해군 물자 같은 물품으로 채워 넣고, 다시 영국으로 떠났다. 세 단계로 이루어진 이 여정은 길게는 18개월이나 걸렸다.
- 근대 초에 탄생한 자본주의는 이렇게 인간을 착취해 얻은 이윤에 바탕을 두고 작동했다. 이를 초기 자본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 자본주의가 영국에서 처음 탄생했다는 사실은 영국이 어떻게 네덜란드와 프랑스를 물리치고 패권을 장악할 수 있었는지 설명할 때 중요한 의미 를 갖는다. 간단히 말해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축적된 자본은 그 자 체로 패권 형성의 요인이 될 뿐만 아니라 군사력으로 전환되어 실제로 패권을 쟁취하는 데 힘을 보탰다. 이후 영국이 패권을 장악하고 영제국이 점점 세를 넓히는 과정은 바로 이 자본주의의 확대 및 심화와 밀 접한 관련이 있다. 19세기에 '팍스 브리타니카 Pax Britannica'라고 불리는 시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 따라서 영국의 패권을 뒷받침한 산업혁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런 일반적인 설명보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서 산업혁명 시대 일어난 기술 혁신과 투자를 추동한 ‘동력'을 찾아봐야 한다. 이 문제와 관련해 최근에 널리 주목받는 한 가지 가설은 영국의 독특한 생산요소 의 가격 구조가 영향을 주었다고 이야기한다. 이를테면 산업혁명 중심지였던 북부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노동 과 자본의 상대 가격을 비교해보면 흥미로운 결과가 나온다. 1800년 무렵 빈과 스트라스부르에서는 자본 가격에 비해 노동 가격이 세 배 이하 수준이었는데, 북부 잉글랜드에서는 일곱 배나 되었다. 이런 비교는 프랑스나 오스트리아에 비해 영국에서 노동 가격이 자본 가격보다 훨씬 높았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그러면 상대적으로 값비싼 노동보다 자본을 좀 더 풍부하게 이용하려 했을 터다.
노동만 따로 떼어놓고 봐도 영국은 확실히 '고임금高賃金 경제'였다. 건설 노동자가 받는 임금을 하루에 얻을 수 있는 은의 양으로 환산해 세계 주요 6개 도시의 임금 변화 추이를 살펴본 결과, 런던 노동자는 이미 17세기 후반에 세계에서 제일 높은 수준의 임금을 받고 있었다. 산업혁명 기간인 1775년 이후에는 런던 임금이 다른 나라 주요 도시보다 훨씬 빨리 올라서 암스테르담과 비교하면 두 배 수준이었고, 베이징과 비교하면 여섯 배 수준에 달했다. 이렇게 임금이 높았으니 자본가가 이윤을 내려면 당연히 노동력 비용을 줄이는 방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가격 구조 아래에서 상대적으로 값이 비싼 노동력 투입은 줄이는 대신에 그에 비해 값이 싼 자본을 좀 더 투입하려는 경제적 유인이 작동했다. 그게 바로 이 시기 영국에서 앞다퉈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고 자본을 투입하는 산업혁명이 일어난 원인이었을 것이다. 
- 비용은 치르지 않으면서도 세계 곳곳에서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고 싶었던 영국이 선택한 방법은 기발했다. 비공식적인 지배, 그러니까 큰 비용을 치러야 하는 식민지 병합이나 공식적인 지배는 자제하고 다른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길을 찾기로 한 것이다. 영국은 이제까지 자본주의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해서 시장이 발전하지 못한 곳에 영국 산 공산품을 자유롭게 수출하고 영국인이 마음껏 자본을 투자하는 데 필요한 제도와 틀을 갖추는 데만 집중하기로 했다. 19세기 중반 영국 이 아시아와 아메리카 여러 지역에서 문호 개방에 특히 관심을 기울이 면서 자유로운 무역 특권을 얻는 데 주력한 일은 바로 이런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이 같은 침투 전략을 실천하면서 영국이 흔히 활용했던 방법은 무역 조약을 맺는 것이었다. 자본주의가 아직 뿌리를 내리지 못한 아 시아나 아메리카 여러 나라에서는 영국인이 시장에 진입하는 데 반드 시 현지 권력의 보호가 필요했으므로 조약으로 이런 보호를 약속받고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제도를 서서히 이식했다. 실제로 영국은 여러 나 라와 자유 무역 조약을 맺었다. 1836년과 1857년에 페르시아와 조약 을 맺었고, 1838년에는 오스만제국과 조약을 체결했다. 1833년에는 중국과 자유 무역에 합의했고, 1858년에는 일본과 조약을 맺었다.
이런 조약에는 여러 가지 내용을 담기 마련이지만, 영국 정부가 반 드시 확보하려 했던 조건 하나는 바로 최혜국 대우였다. 최혜국 대우 란 조약을 체결한 두 나라가 합의한 조건을 이 두 나라와 최혜국 대우를 약속한 모든 나라에 동일하게 적용한다는 원칙이었다. 영국이 이 조항을 귀중하게 여겼던 까닭은 몇몇 나라와 자유 무역 조약을 맺기만 하면 최혜국 대우 조항을 바탕으로 자유 무역 원리를 널리 퍼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 정부의 처지에서 보면 외교적인 노력을 최소한 으로 줄이면서도 자유 무역 원리와 제도를 퍼트리는 아주 좋은 방법이 었다.
이런 영국의 전략을 역사가들은 '자유 무역 제국주의free trade imperialism’라고 부른다. 핵심은 공식 지배보다는 비공식적인 영향력 확 대를 선호하되, 특히 영국과 자유롭게 무역하면서 이익을 얻는 토착 엘리트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영국 제품을 파는 시장을 만들고 영국 자본이 자유롭게 진출할 환경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 전략을 바탕으로 영국은 1840년대부터 몇십 년 동안 중국과 남아메리카, 오스만제국, 아프리카 일부 지역을 마치 식민지처럼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었다. 게다가 교통과 통신 기술의 발달은 영국의 바뀐 정책을 성공적으로 뒷받침했다. 그래서 19세기 말 저명한 역사가 존 실리는 증기기관이 제국이라는 “정치적 유기체에 “새로운 혈액 순환망”을 공급했고, 전신은 “새로운 신경 시스템”이 되어주었다고 이야기했다. 이를테면 중국 과의 아편전쟁에서 잘 드러났듯이, 증기선은 영국 상인이 하천을 따라 내륙 깊숙한 곳까지 이동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인도나 남아메리카에 철도망을 놓은 일은 내륙의 도시와 읍내, 항구를 연결해 거대한 시장 을 만들었다. 오고가는 수많은 열차의 일정을 정확하게 조절하는 수단으로 철도망과 함께 발전한 전신은 1850년대부터 해저 케이블을 통해 본국과 식민지 사이에 소식을 빠르게 전달했다. 예전에는 몇 달씩이나 걸려 도착하던 소식이 단 몇 시간 만에 전해지니 통치의 효율성이 좋 아지는 것은 당연했다. 물론 이런 기술 진보 역시 산업혁명의 성과라 는 점을 생각하면, 산업혁명이 제국을 경영하는 방법을 크게 바꿔놓았다고 말할 수 있다.
- 18세기에 빈번하게 일어난 전쟁을 통해서 발전한 런던 금융 시장은 나폴레옹전쟁 때까지 국가 부채가 증가하면서 규모가 더 커졌다. 이어 19세기 자유 무역 시대에 영국이 세계 무역의 중심이 되면서 런던 금융 시장이 제공하는 각종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늘었고, 해외 투자 가 크게 증가했다. 19세기 후반 세계 최대의 자본 수출 국가였던 영국 은 1차 세계대전 직전 매년 40억 파운드를 수출했다. 자본 수출이 활발 해지자 영국의 국부國富 가운데 해외 자산이 차지하는 비중도 크게 늘 어 1850년 대략 7퍼센트 수준에서 1913년 35퍼센트까지 올라갔다. 이렇게 경제 환경이 변하면서 소득 대부분을 금융 자산에서 얻는 사회 집단이 등장했다. 이들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 한복판에서 자본 투자와 혁신으로 이윤을 얻고, 이윤을 재투자해 더 큰 자본을 축적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생산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일, 그러니 까 귀족의 핵심적인 특질을 받아들이면서 노동 세계를 멀리하고 여가 를 중시했다. 이런 이중적인 특징에 주목해서 역사가들은 이들을 '신사 자본가gentleman capitalist' 라고 부른다.
흔히 영국 신사라 하면 즉시 떠오르는 어떤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프록코트를 차려입고 모자와 지팡이를 갖춘 말쑥한 중년 남자 같은 이미지 말이다. 이런 복식이 한창 유행했던 때가 바로 19세기였다. 이렇 게 차려입은 신사 자본가는 생산 활동에 관여해 수입을 얻는 일은 신 사답지 못하다고 여기며 제조업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이 주로 다녔던 이튼이나 해로 같은 명문 사립학교나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대학교도 산업이나 기술 문제를 가르치지 않았다. 오히려 고색창연한 고전 교육을 주로 받고, 졸업 후에는 금융업에 진출하거나 금융 소득 으로 살아가면서 의회와 중앙 정부, 교회, 지방 정부의 요직을 차지해 지배 엘리트의 지위를 굳건하게 유지했다. 이렇게 지배층이 된 신사 자본가들의 가치관과 태도는 사회 곳곳으로 퍼져나갔고, 산업계 종사 자들도 빨리 은퇴해서 그들처럼 살고 싶어 했다. 그사이 1차 산업혁명 시대에 영국 사회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도전과 모험 정신은 쇠락했다.
신사 자본주의가 널리 확산되면서 영국 제조업의 상대적 쇠퇴를 만 회할 만한 정책적인 노력은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영국의 제조업자들 이 미국이나 독일의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자유 무역 체제를 재검토해 달라고 요청할 때에도 해외에 투자한 금융 소득이 주 수입원이었던 신 사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자유 무역에 더욱 집착했다. 이 를테면 대불황 시기 디플레이션에 대한 대책으로 금과 함께 은을 기축 통화로 정해 통화 공급을 조절하자는 제안이 산업계에서 나왔지만, 영국이 주도하는 금본위제 아래에서 이익을 거두고 있었던 신사 자본가 들은 격렬하게 반대했다. 이처럼 금융업에 이해관계가 있는 신사 자본가들이 정책 결정권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 산업계의 입장을 개선할 수 있는 정책은 성공하기 어려웠다. 그사이 미국은 강력한 보호 정책을, 독일은 국가 주도의 산업 정책을 바탕으로 영국을 발 빠르게 따라잡았다.

- 식민지 시대 대부분, 더 정확하게 말해 7년전쟁이 끝나는 1763년 이전까지 북아메리카 식민지에 대한 영국 정부의 기본 정책은 '유익한 방치salutary neglect'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영국인은 식민지가 기 본적으로 본국이 필요로 하는 원료와 농산물 공급처 역할, 그리고 영 국산 제조업 제품 시장 역할을 하면서 본국의 재정 지원 없이 자생하 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식민지가 영국의 경제 발전에 는 기여하되 영국인에게 재정 부담을 지워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식민지가 이런 역할만 충실하게 한다면, 영국 정부는 식민지 내에서 벌어지는 일에 시시콜콜 개입할 까닭이 없었다. 따라서 대부분 문제에서 식민지는 사실상 자치권을 누리고 있었다.
내부에서는 자치를 유지하면서도, 북아메리카 식민지인은 영제국의 테두리 안에서 영국 정부가 제공하는 군사 보호와 번성하는 제국 시장 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 권한을 누릴 수 있었다. 물론 영국 정부는 본국 제조업자와 식민지인이 서로 경쟁해서는 곤란하다는 원칙 아래 몇몇 식민지 제조업을 규제하기도 했다. 하지만 식민지인 대부분은 무엇보 다 지주가 되기를 원했던 데다가, 원료와 농산물을 영제국 아래에 있 는 아프리카와 서인도제도, 영국 본국에 수출하면서 큰 이익을 거뒀기 때문에 이런 규제에 대해 크게 불평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항해법과같은 식민지 규제에 대해서 그렇게 불만을 품을 까닭이 없었다.
북아메리카 식민지는 주로 원료와 농산물을 수출하고 공산품을 수 입했기 때문에 본국과의 무역에서 꽤 큰 적자를 감수해야 했다. 하지 만 식민지는 운송업에서 상당한 이익을 거두고 있었고 본국에서 여러 형태로 부를 이전받았다. 예컨대 1768~1772년 경상수지를 살펴보 면 상품 무역 부문에서 식민지는 영국에 대해 매년 150만 파운드 정 도 적자를 기록했지만 서비스 부문에서 운송 및 각종 서비스로 72만 파운드 흑자를 봤다. 본국에 납부한 세금은 4만 파운드에 지나지 않 았고 오히려 본국으로부터 군사비 40만 파운드를 지원받았으며 공직 자 봉급 4만 파운드 정도를 이전받고 있었다. 이런 여러 항목을 다 합치면 본국에 대한 북아메리카 식민지의 경상수지는 거의 균형을 이루 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해 산업 국가로 변신 중인 영국과 농업이 기반인 북아메리카 식민지 사이는 일종의 보완 관계 또는 동반자 관계였고, 식민지는 그 덕분에 충실하게 성장을 이어갈 수 있었다.
- 이렇듯 내전이 끝난 이후부터 1차 세계대전 전까지 미국의 경제발전은 풍부한 자원과 통합된 방대한 국내 시장, 기술 혁신, 인구 증가와 이주민 유입 같은 여러 요인에 기대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이 다른 쟁 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노쇠한 영국을 대신해 세계 최고의 경제 대 국에 올라설 정도로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었던 데는 이런 요인들보다 더 근본적인 무엇이 있었다.
미국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는 자본주의 경제 성장이 창조적 파괴', 즉 혁신으로 기존 산업 생태계를 뒤흔들어 새로운 산업을 창출하고, 거기서 생산성 향상을 이루어내는 데 달렸다고 역설한 바 있다. 영국의 경우, 이런 혁신은 제임스 와트, 리처드 아크라이트 같은 발명가 가 주도했고, 그 밑바탕에는 개선을 지향하는 혁신 문화가 있었다. 하지만 미국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미국에서 2차 산업혁명을 주도하면 서 새로운 혁신을 연이어 내놓은 이들은 영국처럼 전통적인 개인 발명가가 아니라 대기업과 이를 이끄는 기업가였다.
- 미국이 대공황에서 벗어나는 데 이토록 어려움을 겪었던 까닭은 무 엇일까? 근본적인 요인은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이루지 못한 데 있었 다. 간단히 말해 다른 모든 나라를 압도하는 생산력으로 엄청나게 많 은 양의 상품을 생산할 수 있었지만 국내 수요가 그 수준에 미치지 못 한 것이다. 물론 해외 수요가 충분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럽이나 일본도 공황을 겪은 데다, 공황이 시작되면서 미국을 필두로 모든 주요 자본주의 국가가 보호 무역으로 돌아서버렸다
- 미국의 처지에서 가장 뼈아픈 대목은 국내 시장의 대안이 될 수 있었던 유럽 시장의 구매력이 아주 더디게 회복된 데 있었다. 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미국의 도움 없이 유럽 재건 은 불가능하다고 역설했지만, 이런 주장은 전통적으로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던 고립주의자의 반발에 부딪쳐 묻혀버렸다. 많은 미국인은 자신의 나라가 낡고 부패한 구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에 개입해 희생을 치를 까닭이 없다고 생각했다. 독일의 도발 때문에 세계대전에 개입하기는 했지만, 전쟁이 끝나자마자 미국인 대다수는 다시 유럽에서 손을 떼고 싶어 했고, 복잡한 배상금 문제나 전시 부채 문제에서 미국의 이익을 챙기는 데만 집중했다. 그래서 미국은 패전국 독일이 부담해야 할 배상금은 물론, 영국을 비롯한 승전국이 미국에 갚아야 할 엄청난 액수의 부채를 탕감하는 일을 거부했다. 특히 막대한 규모로 책 정된 전후 배상금은 독일 경제를 거의 황폐화시켰는데, 미국은 독일에 시장 개방 같은 도움을 주지 않았다. 경기 위축을 부채질한 또 하나의 요인은 전쟁 직후 영국을 비롯한 주요 자본주의 국가가 전쟁으로 크게 달라진 경제력을 무시하고 예전 환율 체제로 되돌아간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19세기 초부터 1930년 대 초까지 세계 경제를 떠받치던 환율 체제는 영국 파운드를 기축 통화 로 삼은 금본위제였다. 이는 영국이 견실한 재정 체제를 유지하고 영국 경제가 잘 돌아갈 때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세계대전 후 상황은 완 전히 달라졌다. 영국은 전쟁 이전 환율 그대로 금본위제를 복구하려 했 지만, 전쟁으로 크게 위축된 영국 경제는 고평가된 파운드화를 유지하 기 어려웠다. 이때 만약 미국이 나서서 달러를 새로운 기축 통화로 정 하고, 막대한 금 보유고를 바탕으로 국제 통화 체제를 뒷받침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그러지 않았고 결국 대공황이 일어나자 여러 나라가 극심한 금융 위기를 겪게 되었다. 최종 대부자 역할을 하는 패권 국가가 없는 상태에서 세계 경제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이런 상황에서 미국을 필두로 전 세계가 보호주의로 돌아선 것은 불 난 곳에 기름을 끼얹는 꼴이었다. 대공황이 결국 수요 부족에서 비롯 한 일이라면, 대공황이 시작되었을 때 가장 부유한 미국이 세계 여러 나라에 시장을 활짝 열어 교역을 활성화하고, 이를 통해 구매력을 회 복하면 미국산 제품에 대한 수요를 다시 만들어내는 방법을 취해야 마 땅했다. 그런데 미국은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1930년 관세 법을 제정해 900개 제조업 제품과 575개 농산물에 대한 평균 관세를 18퍼센트나 인상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영국과 프랑스 같은 나머지 주요 자본주의 국가도 보호주의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로 인해 세계 경제는 이른바 '블록 경제'로 재편되었고 국제 교역은 크게 위축 되었다. 1929년 360억 달러 수준이었던 국제 거래 규모는 1932년 약 120억 달러로 줄어들고 말았다.
결국 1920년대 말 시작되어 거의 10년 동안 미국 경제를 괴롭혔던 대공황에 대한 책임 가운데 상당 부분은 미국에 있었다고 봐야 할 듯하다. 1차 세계대전으로 세계 제1의 경제 대국으로 떠오른 미국은 영 국의 뒤를 이어 패권 국가로서 세계 경제의 안정과 발전을 뒷받침할 만한 행보를 보여야 했다. 하지만 미국은 당시 극도로 혼란스러운 경 제 상황을 악화시키는 최악의 선택을 거듭했다. 자유 무역을 더욱 진 작해야 할 상황에서 예전처럼 강력한 보호주의를 택했고, 금본위제에 서 빨리 이탈해야 할 때도 머뭇거리기만 했다. 이런 미국이 대공황을 극복하고 세계 경제를 이끄는 명실상부한 패권 국가가 되기까지는 또 한번의 세계대전을 겪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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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al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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