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자연사

역사 2021. 12. 6. 20:14

- 우주는 우리 안에 있다. 우리는 별과 같은 물질로 만들어졌다. 우리는 우주가 자신의 존재를 알려주는 한 방법이다. (칼 세이건)
- 복잡한 유기 분자는 어떻게 자기복제하는 원시 생명체, 즉 자연 선택의 대상으로 조직되었을까? 더 간단히 말해서 분자들은 언제 처음으 로 자기조직화를 시작하여 생명을 얻었을까? 결국 “생명”의 정의는 번식 하는 능력에 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두 가지 가설이 제안되었다. 첫 번째 가설은 밀러와 유리가 재현한 것과 같은 원시 지구 환경에서 생성 된 아미노산을 재료로 하여 핵산, 즉 자기복제능력이 있는 분자가 조직되 었고, 이 분자들이 자연선택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가설이 성립하려면 생명에 연료를 대는 대사 과정에 앞서서 이 대사를 관장하는 RNA 같은 복잡한 자기복제 분자가 먼저 존재해야 한다. 두 번째 가설은 앞의 시나리오를 거꾸로 돌려서, 열수구에서 공급되는 에너지를 활용하는 대사 과정이 먼저 조직된 다음에 자기복제 분자가 만들어졌다고 본다. 즉, 자기복제분자는 이 에너지를 활용하도록 진화했고 대사 과정을 자연선택의 대상으로 만들었다는 시각이다. 유니버시티 칼 리지 런던의 닉 레인이 『생명의 도약(Life Ascending)』에서 우아하게 설명한 이 “대사 우선” 개념은 현재 학계에서 선호되는 가설이다.
그러나 생명의 기원에 대한 답을 찾는다고 해도 생명체가 보여주는 다양성의 퍼즐을 풀지는 못한다. 어떻게 성게와 콘도르, 인간처럼 완벽하게 다른 종들의 조상이 하나이고, 이 공통 조상으로부터 이처럼 다양한 종들이 생겨났을까? 어떻게 유사한 것에서 다른 것이 만들어졌을까?
- 다윈의 진화론에서 수정이 필요한 부분을 더 파고들려면 20세기를 통 틀어 가장 창의적이고 동시에 논란의 중심이 된 미생물학자이자 인습타 파자였던 린 마굴리스를 만나는 것보다 좋은 방법은 없다. 1970년에 마 굴리스는 앞에서 설명한 고대 세균의 공생을 통해서 동물과 식물의 세포 (세포 소기관을 특징으로 하는 “진핵세포)가 기원했다는 강력한 증거를 제 시했다. 이 발상 자체는 거의 한 세기 전에 등장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가 없던 터였다. 마굴리스는 단세포 생물의 세포와 다세포 동식물의 세포가 고대 남세균(시아노박테리아)과 호기성 세균 사이에서 일어난 공생 적이고 서로에게 이로운 연합의 진화적 산물이라는 가설을 세웠다. 미토 콘드리아는 세포 안에서 연료를 태워 가용한 에너지로 변환하는 소기관인데, 마굴리스는 지구상의 모든 진핵세포에 미토콘드리아가 들어 있다. 는 사실과 이 미토콘드리아가 핵 속에서 세포를 복제하고 조절하는 나선 형 DNA가 아니라 세균의 DNA를 닮은 원형 DNA에 의해서 조절된다는 사실에 처음으로 주목했다. 이를 바탕으로 마굴리스는 진핵세포가 각각 제 DNA를 들고 만난 별개의 두 조상이 만들어낸 산물이라고 제시했다. (그림 1.2), 다시 말해서, 서로 다른 원시 생명체들이 “합심하여” 마침내 지 구상의 모든 동물과 식물의 세포가 되었다는 뜻이다.8 | 모든 세포가 미생물의 상리공생, 즉 “세포 내 공생(endosymbiosis)”으로 부터 진화했다는 마굴리스의 “이단적인” 가설에 대한 당시의 반응은 신속 하고 가혹했다. 이제는 고전이 되었지만, 그녀가 아직 대학원생이던 1967 년에 쓴 이 논문은 15번이나 퇴짜를 맞은 후에야 출판되었고, 그후에도 일각에서는 쓰레기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이제 그녀의 발상은 널리 인정되어 고등학교와 대학교의 정규 교육 과정에서도 가르친다. 마굴리스의 연구는 제한된 자원에 대한 포식과 경쟁만이 진화의 동인이라는 다원 의 추론을 박살 냈다. 생명의 진화는, 진핵생물이 진화한 과정을 일컫는 것은 물론 “함께 산다”는 어원에 따라서 더욱 포괄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용어인 “공생발생”에 의해서 추진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생물은 공생발생한 것이다. 그들은 경쟁 못지않게 협력하는 과정을 경험 했고, 함께 사는 것과 떨어져 사는 것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이루며 살고 있다.
- 맨 처음 복잡한 세포가 되었던 태곳적부터 미생물은 다양한 공생적 또는 적대적 관계를 맺으며 생명의 다양성에 일조해왔다. 사람의 몸속에서 미생물은 대장 세포의 90퍼센트를 차지하며, 이 장 마이크로바이옴은 인 체의 중요한 대사 경로를 통제한다. 최근에는 오랫동안 쓸모없는 흔적기 관으로 치부되었던 충수가 실은 중요한 장내 세균의 안전 가옥, 또는 제 장고 역할을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장에 크게 탈이 나는 바람에 장내 미 생물의 수가 크게 줄어들면, 충수는 필수적인 미생물들이 다시 소화계에 자리를 잡도록 돕는다. 인간의 지리적 활동 영역이 확장되고 식단이 발달 하면서 우리 조상들은 이질과 같은 장 질병을 매우 흔히 겪었는데, 이 역 시 마이크로바이옴이 새롭게 직면한 엄청난 위협이었을 것이다.
- 익혀 먹기는 선조들이 누리지 못한 무수한 혜택을 초기 인간에게 주었다. 고기와 채소를 익히자 조직이 부드러워져서 치아가 덜 닳게 되었고, 식품의 형태를 유지하는 화학 결합과 세포벽이 분해되어 음식의 에너지 값이 크게 높아졌으며 대사가 쉬워졌다. 요리의 시작은 장 못지않게 뇌의 발달을 촉진했고, 익힌 음식은 진화가 인지능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 루어지도록 부채질했다. 또한 요리는 음식의 구조적, 화학적인 방어체계 를 중화하거나 무장해제시켰고 기생충과 병원균을 죽여서 질병의 발병과 사망률을 감소시켰다. 날음식 위주의 식단을 연구한 결과, 현대에도 인간은 익힌 음식, 특히 익힌 고기에 절대적으로 의존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영양학 분야에서 진행된 실험 연구와 상관 연구의 결과로 알 수 있듯이, 건강과 윤리적인 이유로 오직 날음식만 고집하는 사람은 심하면 불임이 될 수 있다. 날음 식 식단과 장수를 위한 저칼로리 식단은 만성적인 에너지 부족을 초래한 다. 날음식만 먹으면 익히는 과정에서 절감되는 소화의 대사 비용을 인체 가 고스란히 부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저칼로리 식단을 유지하는 사람이 나 신경성 무식욕증 환자가 만성적인 에너지 결핍을 겪는 이유는 단지 섭 취하는 에너지 양이 적기 때문이다. 만성 에너지 결핍은 남성과 여성 모두 에게 리비도(libido), 즉 성욕을 잃게 하며 날음식만 먹는 여성은 생리주기 가 불규칙해지다가 시간이 지나면 불임이 될 수도 있다. 벌새가 꽃꿀을 마시고 소가 풀을 반추하도록 진화한 것처럼 인간은 익힌 음식을 먹도록 진화했다. 음식을 익혀 먹지 않으면 감자처럼 단단한 뿌리채소에서 밀과 같은 곡류, 빵나무 열매 같은 과일에 이르기까지 많은 주식의 실용성이 떨어지고, 어떤 경우에는 아예 소화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요리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바꾸었고, 세계로 나아갈 가능성을 확장시켰다.
요리는 인류를 문명을 향한 길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지구를 지배하 는 길로 인도했다. 양질의 음식이 풍부해진 덕분에 인간은 점점 커지는 뇌를 감당할 수 있었는데, 척추동물에게 뇌는 에너지를 절대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장기이기 때문이다. 사냥에는 기술과 도구가 필요하므로 이 작 고 직립한 유인원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힘보다는 머리가 더 중요했다. 더 크고 더 힘센 동물들을 사냥하고 방어하려면 계획과 의사소통과 같은 조 정된 행동뿐만 아니라 상상력이 필요했다.
- 호모 사피엔스는 20만 년 전에 아프리카 대륙을 벗어나 이주를 시작했다. 이들 초기 인간은 커진 뇌로 협동 사냥능력과 기술뿐만 아니라 추운 날씨를 견딜 수 있는 털옷을 개발했고, 사바나의 먹잇감을 쫓아 소 아시아까지 영역을 확장했다.
우리는 의복의 발달사를 이(fice)의 역사 덕분에 알게 되었다. 인간의 몸 에서 털이 빠지고 인간이 옷을 입은 사건이 이의 진화 경로에서 중요한 분 기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머릿니와 사면발니는 서로 다른 종이지 만, 원래는 인간의 체모에서 번성했던 공통 조상으로부터 진화했다. 이 의 DNA를 계통학적으로 분석하여 머릿니와 사면발니가 유전적으로 분 지한 시점을 찾을 수 있었고, 이를 통해서 호미니드 조상이 120만 년 전에 체모를 잃었다는 결과를 얻었다(땀의 증발을 통해서 체온을 식힐 수 있으므로, 뜨거운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털이 없는 인간의 몸은 큰 먹잇감을 사냥 할 때에 지치지 않고 장거리 달리기를 하는 데에 유리했을 것이다). 이후에 추 운 환경으로 이주하면서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 옷을 만들어 입은 것 은 약 17만 년 전이다. 이는 사람의 머리에 사는 머릿니와 옷에 알을 낳고 사는 몸니 사이의 DNA 변이를 통해서 알아낸 사실이다. 초기 인간은 옷을 걸친 덕분에 아프리카에서 벗어나 북쪽으로 이동하여 유럽과 아시아 를 연결하는 추운 아나톨리아 반도에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 4만 년 전의 화석에 기록된 뼈 바늘의 생김새와 연대 측정 결과를 바탕으로 이 곳에서 그들이 바느질로 옷을 지어 입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현생인류 는 10만 년 전에 아시아에, 4만 년 전에 유럽에, 2만5,000년 전에 시베리아에 도착했다. 그리고 베링 육교를 건너서 1만2,000년 1만5,000년 전에 아메리카 대륙에 도달한 다음,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의 “켈프 하이웨이”에 서식하는 해달, 바다표범, 기타 해양 식량원을 쫓아서 앞으로 나아갔다. 인간은 원시 뗏목을 이용한 이동의 용이성, 그리고 풍부한 식량과 피난처 덕분에 해안선과 강의 계곡을 따라서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다.
- 현재 진행되는 연구들은 이 연대를 수정하고 관련 가설들을 재검토한다. 예를 들면 게놈 자료는 아시아인이나 폴리네시아인들이 베링 육교가 열리면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할 수 있었던 시기보다 훨씬 더 일찍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최근에 중국에서 발견된 화 석을 보면 현생인류는 현재의 이주 모형이 추측하는 시기보다 10만 년 먼 저 중국에 도착했다. 현재 과학자들은 인간이 아프리카에서 나와서 지구 전역으로 퍼진 과정을 보정하고 있는데(예를 들면 인류학자 토르 헤위에르달은 아메리카 원주민이 태평양을 횡단했다고 제안했다), 이는 초기 인간과 그들의 조상과의 관계를 정교하게 다듬고 심지어 재정의하는 작업과도 같다.
- 농장이 있기 전에 사냥터가 있었다. 석기시대 후기의 수렵채집인 조상들 은 계절에 따른 식물의 생장 주기와 동물의 이주라는 자연적인 변화에 기 대어 살았기 때문에 계절별로 낚시, 사냥, 수확용 야영지를 세웠다. 예를 들면 어떤 동굴은 호모 사피엔스 이전부터 대대로 200만 년 이상이나 사 용되었다. 동굴은 자연이 선사한 단기 거주지였고, 초기 인간 집단은 돌 이나 햇볕에 구운 진흙 벽돌, 나무로 만든 대들보, 또는 오래 전에 멸종한 매머드의 갈비뼈로 직접 집을 짓기도 했다. 같은 시기에 아메리카 대륙의 서쪽 해안, 아프리카 대륙의 북쪽 해안, 유럽의 하곡(河谷), 중국의 강 하 구처럼 비교적 생산성이 높고 식량이 풍부한 지역을 따라서 농업 이전의 원시 도시가 발달했다. 이는 독특한 거주 형태였는데, 실제로 생산성이 가장 높은 곳에는 대형 포식자들이 도사리는 울창하고 위험한 숲이 있어서 초기 인간이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물을 재배하고 숲을 개간하는 기술이 발달하기 전에 생산성이 가장 뛰어난 곳은 위험천만한 숲이 장악하고 있었다.
실험 생태학에서는 이처럼 가장 바람직하고 식량이 풍부한 서식지에 살지 못하는 상황을 일반적인 군집 형성의 법칙으로 설명한다. 전문 용어로는 “경쟁 배타의 원리”라고 부르는 이 법칙은 동일한 생태적 지위에 있거나 동일한 필요를 가진 두 생물은 공존할 수 없다는 원리이다. 다시 말해서 가장 우세한 포식자와 경쟁자가 생장과 번식에 가장 좋은 서식지를 독 점하고, 하위 종들은 덜 선호되는 서식지로 쫓겨난다는 뜻이다. 이러한 압 력 때문에 인간의 초기 서식지는 생산성이 다소 낮은 사바나나 강기슭으 로 제한되었다. 내가 1970년대에 뉴기니에서 연구하던 중에 만난 토착민 가족이 빽빽한 맹그로브 숲 때문에 밤이면 안전을 위해서 연안에서 자야 했던 상황과 다르지 않다. 유인원이 나무 위에서 내려오지 못했던 것처럼 인간은 사바나와 강기슭 서식지에 매여 있었다. 생태군집 형성의 자연사 법칙 때문이었다. 수천 년간 자연선택이 결정해온 이 생태군집 형성의 법칙은 수십 년 전에야 야외 실험에 의해서 밝혀졌다.
- 생산성이 떨어지는 지역은 인간은 물론, 성장이 빠른 잡초나 소극적인 대형 초식동물처럼 같은 이유와 법칙으로 인해서 그런 서식지에 제한되어 살아가는 다른 생물에게도 피난처를 제공했다. 서식지를 공유하게 된 풀과 대형 초식동물들은 의존성과 상리공생을 형성하기에 이상적인 생물이었다. 그러나 자연적으로 형성된 군집이 곧바로 순화(domestication : 야생 동식물을 사람에게 유용한 가축이나 작물로 변화시키는 과정/옮긴이)로 이 어지지는 않았다. 대신 공진화, 동식물의 순화, 문명의 발생을 위한 최적 의 요인들이 적시적소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앞으로 계속해서 살펴보 겠지만, 농업과 동식물의 순화는 인간이 뛰어난 재주와 창의성을 발휘한 덕분이 아니라 인간과 동식물 간의 협력관계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다
- 밀은 인간이 밀을 길들인 것이 아니라 밀이 인간을 길들였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로 전 세계에 퍼졌지만, 원래는 시리아의 카라카 산의 언덕에서 자라던 잡초성 초본에 불과했다. (그림 3.1). 그러나 이 흥미로운 식물 중심적 관점은 인과관계에 혼동을 주기도 한다. 농업에서의 선별적 선호는 인간에 의한 의도적이고 차별적 인 선택이었다. 예를 들면 야생 배추는 원래 영국 해협의 영양분이 부족한 석회암 절벽에서 자라던 잡초성 십자화과(十字花科) 식물인데, 영리한 원 예가들이 선별적으로 교배하여 오늘날 다양한 채소가 되었다. 현존하는 모든 배추 품종과 브로콜리, 컬리플라워, 케일, 방울다다기, 콜라드그린을 포함하여 인기 있는 많은 채소들이 전부 유럽 해안에서 자생하던 브라시카 올레라케아(Brassica oleracea)라는 단일 배춧속 종을 개량한 품종이 라는 것을 알면, 현대의 많은 식도락가들이 깜짝 놀랄 것이다. 원예가들 은 잎과 싹의 크기, 싹의 조밀도, 꽃과 줄기의 특성에서 각기 다른 것을 골 라 선택 교배함으로써 브라시카 올레라케아를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다양한 채소들로 변형시켰다. 눈에 잘 띄지 않고 경쟁력도 변변치 않아 불모 의 서식지로 내쳐졌던 식물이 지구에서 가장 성공적인 식물로 우뚝 선 것이다. 
비슷한 순화 과정이 파키스탄의 인더스 강과 중국의 황허강, 양쯔강을 포함하여 강을 따라서 세계적으로 5-6군데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동물과 식물의 순화는 이들 중심지에서 종자, 동물, 순화 기법의 확산과 함 께 전 세계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 19세기 초의 과학자들에 따르면, 인간이 15만 년간 사냥과 채집을 하며 살아오다가 가축과 작물에 의존하는 정착 생활로 전환한 이유는 한곳에 눌러앉아 지내면서 식량이 안정적으로 공급되어 기근을 줄였고, 또 여가 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예술, 문자, 영성과 문화가 자유롭게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최근의 실증 연구에서는 반대의 결과가 나왔다. 가축과 작물을 지속적으로 보살펴야 하는 농경 생활에는 이동하며 사는 수렵채집 생활보다 2배의 시간과 노력이 든다는 것이다. 초기 농부들은 한곳에 정착하여 물질문화를 축적할 수 있었지만,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농부와 목동이 해야 했던 업무는 극도로 어려운 것이었고, 따라서 다이아몬드는 농업혁명을 “존재를 저주하는 총체적인 사회적, 성적 불평등과 질병, 폭정을 가져온...우리가 단 한 번도 회복하지 못한 재앙”이라고 불렀다. 농업혁명은 인간이 단독으로 이루어낸 혁신이 아니 었다. 이것은 공생발생적 진화의 결과였다.
물론 수렵채집 생활로부터의 전환은 빠르지 않았다. 중앙 오스트레일 리아의 광활한 사막이나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의 아북극 지역처럼 농경이 가능하지 않은 극도로 열악한 환경에서는 19-20세기까지도 수렵-채집인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다른 대부분의 생태계에서는 인간과 동식물 사이에서 수동적으로 시작된 관계가 마침내 상리공생의 필연적인 부산물 로서 농경을 탄생시켰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농업이 선택이나 자연 스러운 진보가 아니라 진화의 결과였다는 뜻이다. 이 가설은 이런 변화가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대륙이 만나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부터 중국,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까지 전 세계의 다양한 수렵채집 사회에서 독립적 으로 일어났다는 사실로 뒷받침된다. 다이아몬드는 세계적인 농업 확산 을 자연의 순화와 관련지어 수천 년의 양성 피드백에 의해서 추진된 “자기 촉매, 과정이라고 불렀다.
따라서 인간이 동식물을 통제하게 된 것은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 라, 공진화가 자연스럽게 확장됨에 따라 피드백 고리를 움직이면서 필연적으로 나타난 예정된 수순이었다. 농경은 협력에 의존했고 노동집약적 이었지만, 식량을 더 많이 생산하여 지속적으로 불어나는 인구를 부양했 고, 이는 다시 더 많은 식량과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사실 사냥과 채집에 서 농경으로의 변화는 그저 석기시대 사람들이 농사에 들어가는 비용과 장기적인 결과를 예측하지 못했고, 먹이사슬에서 벗어나서 자연을 통제 한다는 것이 궁극적으로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일어났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농업은 혁명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진화적 함정, 다시 말해 인간, 식물, 동물 사이에서 발달한 의존성과 상리공생이 만들어낸 자연적인 수순이었다.

- 문명이란 불필요한 필수품을 끝없이 늘려가는 것이다.(마크 트웨인)
- 염료를 만들기 위해서 페니키아인들은 뿔고둥을 수확하여 껍데기를 깨서 열고는 독샘을 꺼내 햇볕에 말린 후에 곱게 갈았다. 수출용으로 약 450그램의 건조된 염료를 생산하는 데에 25만 마리의 뿔고둥이 필요했다. 어느 지역의 뿔고둥 개체군이든 쉽게 씨를 말릴 양이 었다. 수천 년에 걸친 남획과 서식지 파괴로 인해서 오늘날 지중해에서 그 정도로 많은 뿔고둥을 수집하려면 몇 개월은 족히 걸릴 것이다. 나는 최근에 이탈리아 사르데냐의 해안가로 거의 6개월간 매일 조사를 나갔지만, 뿔고둥은 한 마리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티레와 시돈처럼 뿔고둥을 이용 하기 위해서 바위 해안가에 세워졌던 고대 페니키아 정착지에서는 뿔고둥 들이 수확된 지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으스러진 뿔고둥 껍데기들로 이루 어진 커다란 패총이 발견된다.
- 페니키아인은 뿔고둥 번식지를 찾아서 해변을 샅샅이 뒤졌을 뿐만 아 니라 바닷가재를 낚시할 때에 쓰던 미끼 달린 함정을 사용하여 뿔고둥을 잡았을 것이다. 얕은 물에 서식하는 뿔고둥은 보통 6~7년을 사는데, 그래 서 번식지에서 빠르게 절멸되었고 페니키아인은 더 깊은 물속으로 들어가 수확해야 했다. 뿔고둥이 풍부했던 서식지가 고갈될 때마다 페니키아인 은 해안을 따라서 지중해 전역과 북아프리카로 이동했고, 뿔고둥을 따라 가면서 해양 자원 탐험가로 거듭났다. 페니키아인이 해양 무역을 하기 위 해서는 단단한 레바논시다로 건조한 튼튼하고 믿을 수 있는 배가 필요했 다. 페니키아인은 뿔고둥과 레바논시다 숲을 과도하게 착취하면서 항해 와 원양에 필요한 기술을 발달시켰고, 바다를 장악하여 새로운 자원을 개 발함과 동시에 새로운 거래처를 확보했다. 이들은 레바논시다를 대체하기 위해서 북아프리카 해안에서 자라는 시다와 소나무를 수입했다. 레바논시다는 오늘날 소수의 보호 구역에만 제한적으로 분포하며 기후 변화 로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페니키아인은 이러한 성공을 바탕으로 지중해 전역에서 해적으로부터 교역로를 보호하기 위한 전함을 포함해 수백 척 의 상선으로 운영되는 무역망을 운영했다. 페니키아인들은 아프리카, 스페인, 키프로스, 사르데냐에 이르는 먼 지역까지 무역 기지를 세웠다. 자주색 염료와 더불어 상아, 이국적인 동물 가죽, 심지어 노예까지 무역망을 따라서 이동했다. 상품을 운송하기 위해 새로운 저장 용기가 필요해지면서 유리 제품이 개발되어 와인, 올리브유, 곡물 등의 운반에 쓰였다. 유리는 뜨거운 불로 인해서 탄산칼륨과 모래 가 혼합된 것을 우연히 발견하며 처음으로 등장했을 가능성이 크다. 페니키아인은 유리를 물들여 푸른색 용기를 만들었고 이는 그들이 가진 재주 와 기량의 상징이 되었다. 무역이 발달하면서 노예 제도도 달라졌다. 과거 에 노예는 전쟁의 전리품이었지만, 인구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인구와 함 께 증가한 노동 수요를 노예가 채우기 시작했다. 페니키아인은 최초의 노 예 상인이었던 듯하다. 이들은 아프리카 부족 간에 벌어진 전쟁의 전리품 인 노예를 다른 상품과 거래하고 지중해 전역에 팔았다. 또한 그들은 잘 알려진 2단 갤리선 운항에 120명의 노예를 동력으로 사용했다. 노예들은 일꾼, 하인, 병사로 동원되었다. 로마 제국의 전성기에는 제국이 제대로 기능하는 데에 50만 명에 가까운 노예가 필요했다.
페니키아인이 노예 제도를 상업화했다면 바이킹은 산업화했다. 그들 은 유럽의 해안가나 강가의 마을을 습격하여 물자를 강탈했고 주민들을 납치해서 전 세계에 노예로 팔았다. 중세 초기에 바이킹은 밭에서 작물이 자라는 여름 동안 강을 따라서 동유럽의 마을들을 약탈했으나 점차 좀더 수익성 있는 사업인 노예 무역에 힘을 쏟았다. 노예는 노동력, 목 재, 소금 등과 맞바꾸어 거래되었다. 그들은 러시아 남부의 방어가 허술 한 시골 지역을 습격하여 “슬라브인(Slav)”을 거래했다. 여기에서 슬라브 란, 과거에 동유럽과 페르시아 왕에게 노예(slave)로 팔리던 인종 및 언어 집단 전체를 뜻한다. 노예 제도는 18세기에 제기되기 시작한 윤리적 문 제들로 인해서 19세기 중반에 법적으로 폐지되었으나, 한정된 자원의 세 계라는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에도 노예가 암시장에서 상품으로 거래되 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 말의 경우, 한 번에 혹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길든 것인지, 또는 말을 길 들이는 지식이 유라시아 전역에 공유, 확산하면서 빈번한 가축화 사례로 이어진 것인지는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왔다. 최근에 밝혀진 유전학, 고고학 증거에 따르면 말은 원래 고기를 얻기 위해서 키웠다. 오늘날의 카자흐스탄과 터키 지역의 초기 유목 부족들은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영양가 높은 겨울철 단백질원으로서 말 고기가 필요했다. 말은 양이나 염 소와 달리 스스로 눈을 파고 먹이를 찾을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말 은 짐을 나르는 동물이 되었다. 기원전 3500년경으로 추정되는 말의 유골 에서 나온 이빨에는 굴레로 인해서 마모된 흔적이 있었다. 가축화된 말이 유라시아를 통해서 퍼지면서 야생말과 교배하여 더 탐나는 힘센 잡종들 이 태어났다. 낙타를 길들인 것처럼 말과의 협력적 상리공생 또는 가축화 로 인해서 인간은 유라시아 스텝의 비생산적인 광활한 땅을 지배했고 동시에 대륙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육상 무역도 가능해졌다.
- 뿔고둥을 수확하여 화폐화한 페니키아인처럼 중국인은 누에의 가치와 쓰임새를 시장에 내 놓았다. 그러나 페니키아인이 자원을 완전히 고갈시킨 반면에 중국인은 현명하게 누에를 길들이고 번식시켜서 누에와 비단 생산을 산업화했다. 이제 야생에서는 누에가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다. 누에는 수천 년간 길들 면서 날개를 잃고 스스로 뽕나무를 찾아갈 수 없어서 인간의 손에 의지해 서만 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누에나방은 비단의 대량 생산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개량되었고, 더는 아시아 뽕나무에서만 살지 않으며 거의 전 세계에 분포한다. 그러나 인간의 도움이 없이는 멸종할 것이다. 누에는 절 대적인 가축화, 또는 상리공생의 한 사례로서, 민들레, 쥐, 진드기처럼 생 존을 전적으로 인간에게 의존하는 종이다.
- 로마의 도로는 폭 5미터 이상에, 배수가 되는 석조 포장도로가 8만 킬 로미터에 육박하는 체계로 성장했다. 오늘날의 인터넷, 또는 과거 수십 년 전의 유선 텔레비전처럼, 이 도로는 제국 전체에 문화(그리고 경제적 평등 과 불평등에 대한 인식)를 확산시켰다. 자원의 이용이 문화적, 사회적으로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이해하고, 그 과정에서 누가 이득을 보는지를 인식 하게 된 것이다. 퓰리처 상을 수상한 작가 토머스 프리드먼은 범세계적인 교통망으로 인해서 부자와 빈자 모두가 소득과 삶의 질에 존재하는 엄청 난 격차를 인식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로마의 도로는 오늘날 스마트폰 정보화 시대에 급증한, 사회 “평탄화”의 초기 사례였다.17 피정복민 사이에 뿌려진 분노의 씨앗이 한창 자라던 시기에 지배층의 탐욕 그리고 지배 중심지에서 너무 멀리까지 확장된 제국의 규모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로 나타난 평탄화가 제국의 쇠락으로 이어졌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기원후 5세기에 로마 제국이 붕괴한 후, 비잔틴 제국은 로마 제국의 동 쪽 지역에서 성장했고, 적어도 몽골 제국이 세워지기 전까지는 실크로드 를 따라서 교역을 통제했다. 그다음에는 말을 길들인 바로 그 스텝의 유 목민 후손인 몽골인이 말을 탄 공포의 전사가 되어 유라시아의 실크로드 를 지배했다. 초기에 칭기즈 칸이 이끈 몽골 제국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 에서 중국까지 이어지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육상 무역망을 두 세기 동 안 지배했다. 이것은 생태계의 힘을 다룰 줄 알고, 비록 강압적이었을지라도 집단의 힘을 이용할 줄 알았던 몽골인들의 능력과 관련이 있을 것이 다. 다른 문명들이 정착 농경 생활에 몰입할 때에 몽골인은 말, 지리, 그리 고 열악한 초원 환경을 속속들이 이해하며 살았다. 수천 년 전 페니키아인 처럼, 몽골인은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는 도시를 건설하는 대신 무역에 초 점을 맞추었다. 그들은 공포로 다른 문화를 지배했고 천막과 귀중품들을 늘 들고 다녔는데, 이것은 유목 부족으로서의 문화적 뿌리를 반영한다. 그러나 중세 말기에 아시아 시장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경로를 찾아나선 탐험적 항해가 본격화되면서 이러한 독점 무역 체제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 장내 미생물은 우리를 외부 미생물로부터 지켜주며, 사람들이 새로운 지역에 가면 물갈이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예컨대 체 내에서 적절한 미생물 환경을 발달시킬 때까지), 그러나 질병의 치료에 관해 서는 세균과 바이러스의 생활사에 좀더 의식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 질병의 세균론을 터득하기 전에는 시행착오를 거쳐 발견한 항생 효과를 이용해서 세균성 질병을 치료했다. 예를 들면 그리스와 인도에서 는 곰팡이를 활용했고, 러시아 사람들은 따뜻한 흙을, 수메르 의사들은 환자에게 거북이 등딱지와 뱀 껍질을 섞은 맥주 수프를 주었고, 바빌로니 아인들은 눈의 감염을 사워밀크(sour milk)로 치료했다. 이 모든 처치법에 는 천연 항생제(병원성 미생물과 싸우기 위해서 곰팡이 또는 기타 빠르게 번식하는 생물들이 진화시킨 방어 수단)가 들어 있었으므로 어느 정도는 효과가 있었다. 
- 거세처럼 상징적인 행위는 온전한 인간의 문화라는 인상을 줄 수도 있 지만 사실 여기에도 인간이 그저 따르고 있을 뿐인 풍부한 진화의 역사가 있다. 예를 들면 많은 종류의 기생체가 숙주를 거세하여, 숙주 자신의 자 손보다 이 영리한 기생체의 자손을 생산하는 커다란 암컷으로 만든다. 이 와 비슷하게 일부 사회적 곤충의 수컷은 호르몬을 통해서 중성화되어 말 잘 듣는 헌신적인 일꾼이 된다. 인간과 동식물 모두 거세라는 행위 이면에는 동일한 진화적 동기가 있다. 거세당한 자의 호르몬을 조작하여 거세한 자의 생식적 생산량 또는 적합도를 증진하려는 것이다. 
척추동물 중에 성적 조작을 통해서 사회를 통제하는 가장 극단적인 사 례는 산호초에서 하렘을 이루고 사는 앵무고기와 그 친척인 양놀래깃과 물고기들이다. 양놀래깃과 물고기들은 성별이 사회적 환경에 따라 제어되 도록 진화했다. 앵무고기 하렘에는 우두머리 수컷 한 마리를 암컷들이 둘 러싸고 있고 나머지 작은 수컷들은 발을 붙이지 못하고 쫓겨난다. 알파 수컷이 죽으면(또는 연구자가 인위적으로 제거하면) 몸집이 가장 큰 암컷이 호르몬에 의한 성 변화를 일으키며 며칠 만에 알파 수컷이 된다. 이런 식 으로 경쟁에서 가장 우세한, 즉 가장 몸집이 큰 물고기가 자신의 유전자 를 다음 세대로 전달한다
- 교회나 유사한 기관들은 신화를 통해서 적극적으로 대중을 달래고 통제했다. 이들은 사람들을 문맹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고 기근, 질병, 전쟁이 신의 형벌이라고 가르치면서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그리고 무엇을 먹으면 안 되는지, 무엇을 입어야 하는지, 언제 어떻게 성관계를 해야 하는지를 모두 성문화했다. 종교기관은 어부들과 이해관계를 맺어 그들의 후원을 받았고(원래는 이교도와 맺었던 관계였다), 대신 금식일을 지정하여 그날에는 생선만 먹어야 한다는 규율(기독교 성전에는 전혀 나와 있지 않은 관례)을 정해서 어부들을 도왔다. 또한 교회는 종교 전쟁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배층은 전쟁을 통해서 권력을 확장했고 교회는 이 념적 동기를 정치적, 경제적 행동으로 옮기는 역할을 했다. 안타깝지만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활용되는 도구이다.
- 앞에서 논의한 것처럼 14-15세기의 유행병과 기근은 사람들의 목을 조 이던 종교와 귀족 체제를 무너뜨리는 데에 크게 일조했다. 치명적인 질병 은 인간의 위계 구조에 개의치 않았고, 사회 계층을 가리지 않고 덮치면 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오랜 지배와 속박의 시대가 불안정해지자, 건드린 벌집처럼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과 같은 소국들이 여기저기로 뛰쳐나와 해상 무역을 장악했고, 세계를 탐험하고 식민지 제국을 건설하면서 에너지를 발산했다. 우리는 인류사의 이 시기 를 르네상스와 계몽의 시대라고 부르지만, 한편으로 이 현상은 인간이 고 갈된 자원의 기반으로부터 벗어나 확산을 시도한 것으로서, 자연사에서 개체군 과밀과 제한된 자원에 대한 보편적인 반응, 다시 말해서 질병이나 기근 같은 사건의 원인이자 결과였다. 이 시기에도 종교와 신화는 식민주의자들에게 마야 문명을 비롯해서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그리고 태평양 섬들의 토착 문화처럼 새롭게 만난 문명들을 지배하고 노예화하고 파괴하는 권한을 부여하면서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극심했던 종교 지배의 마지막 고통의 시기였던 1215년에 유럽 귀족들 은 가장 큰 타격을 받았다. 왕의 신성한 권리를 뒤집은 마그나 카르타(대 헌장)가 체결되면서 귀족과 종교의 결탁에 금이 간 것이다.20 대헌장의 정 신은 광범위하게 해석되었고 농민들 사이에서는 존재의 대사슬에 대한 불신이 전염되기 시작했다. 이 발전은 사회의 위계 구조에 좀더 심각한 위 협의 씨앗을 뿌렸고, 전 세계에 지적인 유행병처럼 퍼져나간 프랑스와 미 국의 혁명과 함께 18세기 계몽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고전적 형태의 위계 구조가 해체될 때에 사회는 여전히 변화와 발전을 주도하지 않았다. 대신 자연사의 제약이 사회와 조직의 변화에 박차를 가해 새로운 힘과 지배권에 자리를 내주었다. 이 새로운 힘의 하나가 과학이다.

- 자신 외에 다른 누구도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그럴 수도, 그러기를 바랄 수도 없다. (석가모니)
- 광대버섯은 크고 빨간 갓에 흰 반점이 있는 버섯으로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다. 슈퍼 마리오 비디오게임 속 세계에서부터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 in Wonderland)』 속 물담배를 피우는 애벌레가 앉은 자 리에 이르기까지 만화와 대중문화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광대버섯은 날 것으로 먹으면 치명적이지만 『리그베다』에 나온 대로 가공하면 향정신성 효과는 유지되면서 독성은 제거된다. 광대버섯으로 만든 물약은 힌두교 외부에서도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토착 시베리아 문화권에서는 더 높은 정신과 교감하는 데에 사용되었는데, 전통적으로 동짓날에는 광대버섯의 빨간 갓을 본떠서 붉은 의상을 입은 무속인이 사람들에게 광대버섯 물약을 나누어주었다(누군가는 선물을 나누어주는 이 붉은 옷의 인물이 산타클로스의 모태라고 믿는다)
- 1970년에 존 마르코 알레그로는 자신의 책 『거룩한 버섯과 십자가(TheSacred Mus/aroom and the Cross)』에서 광대버섯과 관련된 매우 창조적이고 매혹적인 이론을 제시했다.15 최근 새삼 재평가되기 시작한 이 작품은 당 시에 꽤나 악명이 높았는데, 광대버섯이 만들어낸 환상과 연관된 신화에 기독교의 뿌리가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알레그로는 초기 기독교 예 술과 언어의 기원을 근거로 하여 기독교가 원래는 영적 경험을 유발하는 버섯을 추종하던 집단이었다는 가설을 내세우면서 예수가 아닌 버섯의 신화로서 「신약성서를 재해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알레그로는 광대버섯을 그린 것이 분명한 중세 초기의 기독교 예술 가운데 프레스코와 모자이크를 그 근거로 들었다. 이 그림에서는 에덴 동산 속 생명의 나무와 지식의 나무를 버섯의 이미지로 표현했고, 이브가 아담에게 버섯을 건네고 있다는 것이다(그림 8.1). 그에게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못하더라도, 전 세계의 유사 한 사례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어서 그 연관성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예 를 들면 아프리카와 유럽의 원시 동굴 벽화(기원전 1만~기원전 7000년)에는 무당이 버섯과 함께 버섯 주위에서 춤추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 코넬 대학교의 제니퍼 빌링과 폴 셔먼은 전 세계 36개국의 전통 육류 요리법이 포함된 요리책 93권에서 4,570개의 조리법을 수집하여 문화권별 로 향신료의 종류, 쓰임새, 사용량을 조사했다. 빌링과 셔먼은 만약 향신 료가 건강을 증진하려는 목적으로 사용되었다면, 음식이 더 빨리 상하는 따뜻한 지역의 조리법에서 향신료가 더 많이 쓰일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 다. 또한 채소보다 고기에 양념을 더욱 강하게 할 것이고, 되도록 양념의 효능을 파괴하지 않는 조리법이 사용될 것이라는 가설도 세웠다. 분석 결 과는 이 가설들을 모두 뒷받침했다. 특히,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향신료들 이 모두 강한 항균, 항곰팡이 효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올스파 이스, 마늘, 양파, 오레가노가 가장 효과적임을 발견했다. 인도에서는 25 개 양념 중에 요리당 평균 9.3개의 양념을 사용한 반면, 노르웨이에서는 총 10개의 양념 중에 평균 1.6개를 사용했다. 헝가리 온대 지역의 요리법은 전체 21개 중에서 평균 3개의 양념을 넣었다. 이 연구는 또한 향신료를 미리 넣지 않고 조리 중이나 조리 후에 넣도록 권장하는 것은 양념의 약효 를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라는 것과, 채소는 고기보다 양념을 덜 사용한다 는 것도 밝혔다(채소를 먹고 전염되는 감염이 적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주로 음식의 맛을 돋우기 위해서 양념을 넣지만, 빌링과 셔먼의 연구는 공진화의 결과를 보여준다. 향신료는 위험한 미생물로부터 음식을 지키 고 의약적인 효과까지 추가하는데, 이것들은 모두 그 맛을 즐기는 사람들 의 건강, 수명, 번식의 성공을 증진한다
향신료 사용은 인류에 앞서서 진행되었던 진화적 군비 경쟁은 물론이 고, 다른 생물들과 공유하는 복잡다단한 생태 경관에서 인간이 어떻게 창 의력을 발휘하여 입지를 다졌는지를 여러 측면에서 보여주는 완벽한 사례이다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보의 세계  (0) 2022.02.05
세계는 어떻게 번영하고 풍요로워졌는가  (0) 2021.12.18
패권의 대이동  (2) 2021.11.17
빨강의 역사  (0) 2021.10.22
세계사 속 부의 대반전  (0) 2021.10.07
Posted by dalai
,